최근 수정 시각 : 2019-06-08 06:57:33

화교/대한민국

1. 개요2. 역사
2.1. 구한 말2.2. 일제 강점기2.3. 해방공간2.4. 한국전쟁과 중국과의 수교 이전2.5. 중국과의 수교(1990년대에 이르러)2.6. 한국 화교들의 정체성
3. 화교 현황4. 신화교5. 유명 인물
5.1. 연예인/스포츠/기타5.2. 기업인5.3. 화교설이 도는 사람
6. 대중매체에서 나온 화교 인물7. 대우
7.1. 화교 탄압에 대한 비판7.2. 반론
8. 경제 위기 당시 루머9. 분포10. 둘러보기

1. 개요

대한민국에 정착해 살고 있는 화교. 대부분 대만 국적이며 한족 출신이다. 출신지로는 산둥,장쑤등이 있다.

임오군란이 일어나면서 명성황후는 외세를 끌어들려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하였고 흥선대원군을 납치하게 하였다. 청나라는 군대 4천명을 파견했고 그중 40명의 상인들이 같이 인천에 정착했다고 한다. 청나라는 영국의 홍콩 조계지처럼 조선에 군대를 파견한 댓가로 인천에 조계지를 설치하였고 초기에는 수탈과 침략의 목적으로 화교들이 정착한 것은 사실상 부정하지 못한다.[1] 그 수는 점점 늘어나서 6000명이 되었고 1923년에는 화교들이 중국에 송금한 돈이 지금 돈으로 말하자면 100억엔이라는 많은 자금이 유출되었다.

청나라는 임오군란으로 조선을 속국으로 명시하였는데 당시 청나라는 서양 열강들에 의해 반식민지화되었고 자존심을 구긴 청나라는 흥선 대원군과 명성황후 사이와 개화파등의 어지러운 국면에 있던 조선을 서양 열강과 같이 조계지를 설치하여 식민지화하여 수탈할 약한 대상이자 희생냥으로 보았고 임오군란의 청나라 군대가 베트남과 프랑스 전쟁에 개입하려고 이동한 후부터는 수많은 중국 화교들이 조선으로 와서 장사와 인신매매 등도 행하며 조선의 서민들에게 수탈을 가하였다.

일제는 경제 침략자 역할로 주둔하던 화교들이 수많은 자본 유출을 하자 중일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손을 써야겠다고 생각하여 만보산 사건을 조작하게 되었고 조선내에 화교들은 평양에서부터 인천 서울 부산 등지에서 200명이 살해당하고 강간과 폭행같은 잔혹한 만행이 지속되었다. 그리하여 화교들은 중국으로 귀국하기 시작하였고 그때부터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다른 화교들과는 다르게 대한민국의 화교는 한반도와 가까운 산동성 지방 출신들이 많다. 지도를 봐도 산동성이 한국에서 가깝고, 한국 외 국가에 있는 대다수 화교들의 발상지라고 볼 수 있는 광동성복건성은 한국에서 멀다.[2]

이로 인해 대한민국의 화교들은 다른 화교들과 지역적 소속감이 다르다고 한다. 일단 언어부터 다르다. 다른 화교들은 대부분 광둥성, 푸젠성 출신이라서 광둥어, 객가어나 민남 방언을 주로 사용하는데 반해 산둥성은 북방 방언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냉전시대의 특수했던 관계로 인해서 대부분 국적은 중화민국(현재의 대만)이다. 1992년 중국과의 수교가 이루어진 이후엔 다시 중국으로 국적을 변경한 사람들도 있다.

대한민국의 경우 정부 규모로(특히 박정희 정권 시절) 화교가 경제적인 실권을 쥐는 것을 지속적으로 견제했다. 특히 1961년 외국인 토지 소유 금지법으로 화교들의 부동산을 압수하고 소유 규모를 제한하였다. 직접적인 재산적 타격도 컸지만, 당시 화교들 중엔 부동산 중개업에 종사하던 이들도 많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타격도 컸다. 1962년의 화폐 개혁도 실제로는 화교들이 모아온 재산을 노린 것이라는 설도 있다. 당시에는 인플레이션 때문에 돈을 은행에 예치시키는 것보다 현금으로 집에 보관하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이런 장롱예금들을 은행으로 끌어들여 산업화에 대한 자금으로 충당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다.[3] 지금도 이것이 화교들의 재산을 강탈하기 위해서였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다. 화교 어르신들 얘기 들어보면 이때 환전량이 정해져 있어서 예금 안 하고 모아둔 현금 상당수를 울며 겨자먹기로 싸게 넘겨야 했다고 한다. 이후 1990년대 들어서 중국과 수교하며 완화되어가는 추세지만 여전히 제한이 있다. 이러한 차별 때문에 화교들은 상당수 귀화를 선택해 현재 한국 사회에 동화되었다. 자기가 말 안 하면 모를 정도.[4] [5]] 경제 활동 제약 등으로 많은 화교들이 귀화를 택해 한국인이 되었다. 똑같이 한국어가 제1언어, 즉 모국어라 구별도 잘 안 되고, 대화할 때 중국어를 섞어 쓰는 사람들은 요즘은 대개 조선족(한국계 중국인)들이지 화교들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 화교가 얼마나 동화되었냐면 중국어도 잊어버려 화교소학에서 따로 가르쳐야 할 정도이다.

현재는 2011년 귀화자가 10만 명을 넘었을 때 중국(중화인민공화국) 출신이 7만 9천 명이었고 중화민국(대만) 국적자는 2천 명이었다. #을 참고할 것. 위의 언급이 사실과 다르다기 보단 한국 화교 사회가 1990년 이전부터 흔들렸고[6], 그 빈자리를 최근에 한국으로 넘어온 중국인들과 중국 출신 조선족이 메꾸는 경우가 더 많다고 보면 된다. 실제로 2000년대 이후 배달부노가다 같은 블루 칼라는 조선족들이 점령한 업종이 되었다. 조선족은 같은 한민족이라는 이유로 별 다른 불이익도 안 보고 되려 정부가 귀화를 권장하기까지 한다. 국적 회복이 명분이다.

2010년대 현재 대한민국의 순수 화교 인구[7]는 7만 명 정도로 나머지는 대만으로 이주하거나 미국, 호주로 이민 갔다. 여기서 화교는 영주권을 가진 사람들을 말한다. 한중 수교 이후에 들어온 중국인들이나 조선족이 주류인 중국인들은 한국 화교에 포함하지 않는 편이다. 다만 중국에서 들어온 한족들을 화교로 치면 화교들의 숫자가 크게 불어나는 중이기는 하다. 2017년 기준으로 한국내 거주 중국인은 110만~120만명인데 이 중 조선족이 60만~70만명이다.[8]

결국 한국에 체류하는 중화민국(대만)인은 결국 크게 두 부류인데
  • 산둥에서 온 화교들
  • 근래에 대만 지구에서 온 사람들
로 나눌 수 있다. 대만에서는 이 두 부류를 노교(老僑,오래된 화교), 대교(臺僑, 대만에서 온 화교)로 구분하는 듯하다. 현재 국내 체류자의 인구 비율로 따지면
  1. 중국 국적의 조선족[9]
  2. 중국 국적의 한족과 기타 소수민족
  3. 중국 산동성 출신의 후손이며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대만 국적
  4. 대만에서 태어나고 자란 대만 국적
순서다.(중국에서 홍콩마카오를 따로 놓는다면 그들이 가장 수가 적다.) 그 이유는 노교들이 대규모로 한국에 귀화하거나 미국 등 외국[10] 혹은 대만으로 이민해서이다.

2. 역사

한국 화교를 줄여서 한화(韓華)라고 하기도 한다. 와는 상관 없다[11].

한국에선 화교라는 단어가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지만 중화권에서는 더 상세하게 분류하기도 한다.
  • 화교(華橋): 중국 또는 대만 국적을 유지하며 해외에 체류하는 사람.
  • 화인(華人): 체류국의 국적을 취득했으며 중국계 커뮤니티에 참여하는 사람.
  • 화예(華裔): 체류국의 국적을 취득했으며 중국계 커뮤니티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

2.1. 구한 말

한국 화교의 역사는 전란이 있거나 여러 이유로 한반도에 오던 중국인들로 거슬러 올라갈수있다. 고조선 후기에 많은 중국계 유민들이 한반도로 흘러왔으며, 위만이 이들의 대표격으로 왕위에 오른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후로도 고구려와 백제, 신라,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 전란이 있을때마다 한반도로 이주해온 중국인들이 적지 않게 있었으며,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 등 역사서에서 비교적 상세히 나오고 있고, 또한 중국계 성씨를 지닌 인구가 강당하다는 점[12]을 생각하면 이들의 인구비중이 상당했으리라고 추정할수있지만 결국에는 시간이 흐르며 단계적으로 동화되었다.

본격적인 시작은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군이 주둔하면서부터이다. 이 시기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에 의해 청나라 상인들이 조선 국내에서의 상업 활동을 보장받으면서 일본 상인들보다 유리한 위치에 올라서게 되고, 조선 조정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화교들은 주둔 청군의 도움을 받아 한반도 내에서 유통망을 확충하는데 힘썼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인 입장에서 보자면 초기의 화교들은 서양인이나 일본인 상인과 다를 바가 없는 썩 달갑지 않은 집단이었다.

한국 화교의 발생은 외국의 화교 집단과는 다르다. 다른 화교들은 농지 문제라든가 경제 문제 등으로 17세기부터 인구 유출이 발생한 복건이나 광동 출신들이 많았다. 19세기 이후 신대륙으로 간 화교들도 서양과의 교류가 많았던 이 지역 출신들이 많았다. 이들은 대체로 자신들이 간 나라에서 3D 업종부터 시작해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에 비해 한국 화교들은 인천과 직항이 있던 산동 지방 출신들로 위안스카이 등 실력자들이 한국에서 청나라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유입시킨 것이다.

그러다가 1894년 발생한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청나라에게 승리하면서 조선과 청나라의 수교는 끊어진다. 5년 후 대한제국이 된 조선은 청에게 유리했던 과거의 수호조약을 수정하여 새롭게 조약을 건다. 이 시기에 화상들은 일상(일본인 상인)들에게 점유율 면에서 밀리나 그 전에 잘 확보해둔 유통망을 바탕으로 꾸준히 상업에 종사한다. 그러다가 1905년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상실되고 청나라 역시 망해 중화민국이 들어선다.

2.2. 일제 강점기

중화민국은 일본과 새로운 수교를 맺게 되고 일본은 자국 상인들이 조선에서 힘을 갖도록 하기 위해 화상을 견제한다. 화상들의 주요 교역 상품은 영국이 만든 포목이나 자국의 비단 등인데 일본은 1920년대 말에 높은 관세를 붙이는 식으로 이를 견제한다. 그러자 화상들은 한약상이나 청 요릿집 등을 차리고 주물공장 등을 운영한다. 이들의 숫자는 1930년에 6만명에 이른다. 당시 조선의 인구가 갓 2000만 정도를 넘겼고 일본인이 약 70만을 차지했는데 화상들은 조선 전체의 상인에서 2%를 차지했다.

특이할 만한 사항은 이런 화교들에 포함되지 않는 계절 노동자도 꽤 많았다는 것이다. 1920년대 조선에서 발생한 토목공사에는 산동에서 겨울이나 봄에 일자리를 찾으러 온 중국인 노동자들이 많았다. 비공식적인 추계론 1927년에 17만의 중국인 계절 노동자들이 왔다는 분석도 있다. 이들은 일본인 임금의 절반 수준인 조선인보다 임금이 좀 더 쌌다. 화교 중에는 농업에 종사한 이도 많았다. 화농(華農)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주로 채소를 재배했고 채소를 구매할 구매력을 갖춘 일본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많이 했다. 그리고 가족을 위해 외국에 돈을 벌러 왔다는 심리적 이유로 인해 조선인보다 더 악착같이 일하며 돈을 모았고 돈을 많이 벌어도 저축만 하고 소비를 잘하지 않는 특성상 일본인 경영자들이 조선인보다 중국인 노동자를 선호하여 조선인의 일자리를 뺏으면서 조선 물건을 사지는 않는다는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조선 내에서 반중 감정은 점차 강해졌고, 조선총독부 입장에서도 조선내에서 반중바람이 거세게 불면 독립운동가들의 입지가 급속도록 좁아지고[13] 반중감정이 거세지면 상대적으로 일본에 대한 반감이 감소될수있다는 측면으로 인해 조선인들과 화교간의 갈등이나 언론을 통한 조선인-화교 대결구도 강조와 유언비어 유포를 부채질하였고, 여러번 오보사태가 터지며 1920년대 후반부터 1931년까지 화교를 상대로 폭동이 일어난다. 일제강점기 화교배척폭동, 1927년 화교배척폭동, 1931년 화교배척폭동, 1931년 평양화교 학살 문서 참고

상황 발생 후 1주가 지나서야 총독부는 진화에 나서지만 평양 한 곳에서만도 약 120여명의 화교가 폭동으로 사망했다. 수치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사망 97/부상 118, 중국측에선 사망 142/부상 546, 국제연맹의 만주사변 조사 보고서에는 사망 127/부상 392. 이 폭동으로 약 4천명의 화교들이 중화민국 영사관으로 대피했다고 할 정도였고 6만이었던 화교의 숫자는 그 해 겨울에 3만으로 반토막이 난다.

다행히 일본의 이간질이 개입됐다는 것을 안 조선과 중국의 지식인들은 반일전선을 강화하기 위해 진실을 알리려고 노력했고 그 해 겨울에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 의거를 행하면서 조선과 중국의 감정은 완화된다. 그러나 1931년 만보산 사건 후 일어난 일은 화교들에게 꽤 큰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1930년대에 만주사변,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화교들은 적성국의 국민으로 조선에서 생활하게 된다. 화교들도 친일파와 반일파로 나뉘어 갈등을 빚게 된다. 특히나 전쟁으로 본토와의 무역이 불가해지면서 화교들은 위축된다.

2.3. 해방공간

1945년 일본이 패망했다. 한국에 진주한 미 군정2차 세계대전의 연합국인 중화민국인인 화교들에게 우호적이었다. 기존의 식민지 시절의 네트워크였던 만주, 북한 지방, 일본과의 연결이 끊기면서 한반도 남부의 화교들은 중계무역 등을 독점하게 된다. 1946년엔 전체 무역량의 82%, 1948년에는 52.5%를 차지할 정도였다. 당시 화교의 숫자는 북부 지방에 5만, 한국에 2만 정도가 살았다. 이런 화교들의 짧은 전성기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정부와 각종 사회 기능이 회복되면서 점점 줄어든다. 거기에다 본토에서 국공내전이 발생하고 1948년 한국 정부가 외국인의 출입을 제한하고 1949년 세워진 중화인민공화국이 자국민의 해외 이주를 금지하면서 중화민국인들은 이산가족이 된다. 특히나 전쟁 직전에 한국 정부는 밀무역을 막는단 이유로 전국에 창고봉쇄령을 내려 중계무역을 하던 화교들은 타격을 입는다. 특히나 한국인들은 공업화를 하는데 중화민국이나 홍콩 같은 중화계보다는 재일 한국인이 많은 일본을 주요 수입 기지로 삼는다.

2.4. 한국전쟁과 중국과의 수교 이전

1950년 한국에서 전쟁이 터지면서 북부에 살던 화교들 중 약 1만명이 중국으로 가거나 한국으로 월남한다. 장제스는 국공내전 직후인지라 다시 중화민국군을 투입하는 방안을 미국에 제안하지만 확전을 원치 않던 미국은 거절한다. 대신 국내 거주 화교들을 모아서 SC지대를 창설한 다음에 중국인민지원군을 상대로 한 정보공작과 심리전, 통역업무 등에 투입하였다. 그외에 일부는 자원하여 실제 전선에 나갔다고 하는데 반공화교들로 추정된다. 당시 화교들은 전국에서 부산으로 피난을 많이 갔는데 군복을 입고 휴가 나온 화교들이 자주 임시 화교학교에 나타났다고 한다.

이들 중 일부는 나중에 대만으로 건너가서 중화민국군에 참여하기도 했다고 한다. 한국 화교 중에 대만의 사관학교에 가 대만군이 된 사람도 꽤 있다고 한다. 예전에 화교들은 대만에 들어가 몇 개월 이상 있으면 대만군에 입대해야 했다. 현재는 모병제가 도입되어 그럴 필요는 없지만. 국제 사회에서 중화민국의 대표성을 세우고 싶었던 장제스는 해외의 화교들에게 이를 얻기 위해 한국 화교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한국 화교들은 대만 입시에서 꽤 혜택을 받은 편이었고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대만의 중고등학교로 올 수 있게 여러 지원책을 마련한 게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는 편이었다. 심지어는 군함을 동원해 화교들이 대만에 와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지원하기도 했다. 한국 정부도 대만과의 협조를 위해 중공군 중 4천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해 대만으로 보내기도 했다.

한국 전쟁이 끝나고 화교들은 사실상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던 상업을 포기하고 요식업에 주력한다. 국내 산업 보호를 위해 1950년 창고봉쇄령과 화폐개혁, 그리고 1962년의 외국인 토지 소유 금지 등으로 인해 화농이 몰락하고 화상들도 헐값에 땅을 팔게 된 것이 그 이유다.[14] 화교 요식업자들은 피로연 같은 큰 행사를 많이 했는데 토지 소유 제한으로 대규모 영업장의 운영이 불가능해진다. 운이 좋은 경우엔 한국인 바지사장을 내걸기도 한다.

박정희 정권에 들어와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으며, 국내공산업 발전을 위한 국산품 애용, 국민의식 고취 노력이 더 강해지며 외국계 억제 정책은 계속되었다. 1970년엔 주거용 200평, 영업용 50평으로 약간 제한이 풀리긴 하지만 영세한 수준을 벗어나기 힘들었고 이러한 외국인 토지 소유 제한은 외환위기 이후에 풀리게 된다. 1970년엔 단 몇 개월 뿐이긴 하지만 중식당의 쌀밥 판매 금지 조치가 내려진 적도 있는데 이는 혼분식정책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는데 사실 타 식당도 혼분식 정책으로 애로사항이 꽃피기는 마찬가지였다지만[15] 화교들에게 상당히 심리적으로 위축될 만한 일이었다. 그탓에 4천 곳에 달하던 화교 식당은 1천 곳으로 줄어들었다. 대신 미국에 한국화교들의 식당이 2천 곳이나 생겼다.

다만 당시 한국과 중화민국(대만)은 서로 상당히 우호적인 편이었다. 아무래도 당시 반공이 실질적인 국시였던 한국과 대만이 같은 적인 중국을 갖고 있어서 정치적으로 밀월 관계였기 때문에 그런 듯. 1964년 프랑스, 1972년에 일본, 1979년에 미국이 차례로 중화민국과 단교한데 비해 한국은 1992년까지 수교를 유지했다. 화교를 경제적으로는 탄압했지만, 병역 면제에 대학 입학시에 정원 외 입학까지 시켜 주는 등의 특혜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 또한 1980년대부터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했다. 중국 본토과의 수교가 가시화되면서 중국 대사관이 있던 소공동 쪽에 주로 거주하던 화교들이 본토와의 연결이 상대적으로 편한 연남동 등지[16] 로 이주하기도 했다.

2.5. 중국과의 수교(1990년대에 이르러)

1992년 한국이 중국과 수교하면서 대만과 단교했다. 한중수교 양해각서 및 국제법과 국제관례에 따라, 명동 자리에 있던 대만 대사관은 그대로 중국 대사관이 됐는데 대만 정부가 혹시나 해당 부지를 대만계 단체 등에 팔 것을 우려해 한국 정부는 단교 1주일 전에 비밀리에 통보하고 3일 전에 공식 통보함으로써 물리적인 시간을 주지 않았다.

결국 대만 정부는 부지를 그대로 중국에 넘겨주게 되고 청천백일기가 내려가고 오성홍기가 올라가는 동안 화교들이 몰려들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나마 한국 정부는 신사적인 편이었는데 프랑스일본은 단교 때 수도와 전기를 끊고 경찰을 투입해 저항하는 대사관 직원들을 퇴거시켰다. 미국 같은 경우에는 시간을 주어 대만이 대사관으로 쓰던 부지를 대만계 단체에 매각할 수 있도록 했는데 그 자리를 그대로 자신들의 대사관으로 쓰려던 중국에 자국 내 재산 동결과 같은 보복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어쨌든 1992년은 화교들에게 있어서 중대한 분기점이었는데 근래에는 신화교의 등장에 한국에서 중국 대륙인을 보기가 쉬워졌고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중국에 우호적인 화교들도 꽤 있다고 한다. 다만 중장년층 이상 화교에선 여전히 중국 대륙인들을 빨갱이로 보는 사람들도 많다. 화교들은 중국 국민당 당원들도 꽤 있는데 최근엔 대만 독립파를 지지하는 화교들도 소수이긴 하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되어버리면 본인 연고가 산둥이 맞다면 중화인민공화국을 택하지 않는 한은 진짜 대만 독립하면 자신의 국가정체성은 완전히 없어진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는 있다.

한국 화교는 1970년대 최대 8만에 이르렀다. 전쟁 이후에는 베이비 붐과 월남자 등으로 인한 자연증가. 근데 수치에 따라 12만까지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국내산업보호를 위한 외국인에 대한 제한조치도 있었고 당시에 대만이 한국보다 많이 잘살았기 때문에[17] 화교들 입장에서 아쉬울것이 그리 많지 않으니 대만으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고 북미로도 상당수가 이주하여 1990년에 2만명까지 줄어들게 된다. 물론 대만이 잘살았다고 해도 문화적 차이는 엄연히 있기 때문에 대만생활에 적응하지 못한다거나 실패한다는 이유로 다시 돌아오는 경우도 꽤 있다. 토지 소유 제한 등으로 화교들은 전문직 등으로 진출하게 되고 대만이 그래도 꽤 살았던 탓에 한국에서 대학 입학 등에서 괜찮은 편이었다. 화교들은 의대, 한의대 등 알짜배기 학과에 입학할때 특별 전형을 통해 들어온다. 이 때문에 해당 직종 종사자들도 화교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있고 심지어 세계 어느 나라에서 외국인한테 알아서 만렙 채워주냐고 까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 화교들을 보면 의사나 한의사가 꽤 많은 편이다.[18] 특별전형으로 들어오는 수만 해도 세자리를 훌쩍 넘어간다. 각 학교당 몇명 수준이지만, 전국 한의대 의대 숫자를 합치면 수십개가 되니..... 그래도 가장 많은 건 식당이지만. 미국 캘리포니아에는 약 1만명에 가까운 한국 화교들이 이주해있는데 민남어를 쓰는 복건이나 광동어를 쓰는 광동 출신들과 달리 대부분이 산동 출신들이라 소속감이 달라 한국 화교들은 미국내 차이나타운 대신에 코리아타운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조선족이니까 중국어방언간 차이는 웬만한 유럽 언어들간의 차이보다 훨씬 더 크다 보니깐 이런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1989년 천안문 6.4 항쟁에 참가했다가 중국 정부의 탄압과 체포를 피해 한국으로 망명한 사람도 많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중국이 아닌 홍콩이나 대만에서 이주해온 것으로 위장하면서 국내 화교 단체와도 연관을 맺지 않았다. 자국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혹시 있을 지 모를 테러를 피하기 위한 것이다. 그 중에는 아예 한국인처럼 융화된 사람도 적지 않다. 이들 중에는 자녀들이 성인이 된 후에야 사실은 부모 본인은 중국에서 온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여서, 자신을 완전한 한국인으로 믿고 자란 자녀들이 놀라는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그 정도로 철저하게 조심하였다고 한다.

1990년대 이후에 태어난 화교들은 중국어가 스펙이 되자 중국어를 배우러 교육기간의 일부를 대만이나 중국에서 보내는 일이 생기고 있다. 집에서 중국어 사용이 줄어들고 화교학교 교육으로도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화교 3세대의 경우 모어는 거의 한국어라 봐도 무방하다.

2.6. 한국 화교들의 정체성

대한민국 귀화 화인이 아니라 아직도 귀화 안 한 화교들은 대부분 중화민국(대만) 국적을 유지하며 한국과 마찬가지로 가부장적이며 민족주의적인 기질이 강한 편이다. 속인주의 국가인 한국과 중국 때문에 대부분 3세대에 이르러서도 중화민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으며 한국으로 귀화하는 사람은 연 100명을 밑도는 수준이었다가 최근에 들어서는 한국인들과 결혼이 급증하여 늘고 있다. 특히 화교 여성의 경우 한국 남자를 선호하기도 한다. 그리고 자식을 한국인으로 키운다. 어차피 같은 황인에 이름도 한국식 독음으로 하면[19] 거의 똑같아 못 알아본다.

통혼에 관해서는 화교들은 한국인 남자와 화교 여자가 결혼하는 것에는 부정적이지만 화교 남자가 한국인 여성과 결혼하는 것에는 상당히 관용적이다. 하지만 화교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 천대 때문에 그나마도 무너지는 편이라 화교 3세대 여자의 경우에는 한국인 남자와 결혼하는 일도 꽤 많다. 특히 통혼은 최근에 잦은 편으로 한성화교학교의 경우에 학생들의 절반 가량이 어머니가 한국인이다. 아버지가 한국인이고 어머니가 화교인 화교가 잘 없는 이유는 한국이나 중화민국이나 부계혈통을 따르는 편이라 화교 여자들이 한국인으로 귀화해버리며, 자녀들 역시 부계주의에 의한 한국 국적을 가진 한국인으로 자라기 때문이다. 이 경우 당연히 학교도 일반 한국 학교들에 진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희라주현미가 대표적인 예시.

그러나 1998년 6월 14일 이후부터는 부모 양계 혈통주의 국적법[20]으로 한국 국적법이 개정되었기 때문에 출생 당시에 부모의 성별과 상관없이 부모 중 1명이 한국 국적이면 자동으로 한국 국적을 부여한다. 외국인 부(父) 한국인 모(母)의 자녀는 한국인 모친의 가족관계등록부(母家의 호적)에 출생신고 된다. 이런 경우에는 한국인 어머니의 성씨를 사용하거나 혹은 외국인 아버지의 성씨를 사용하거나 혹은 자녀의 아버지 나라 외국식 이름을 그대로 한글로 등록할 수도 있다. 그리고 2010년 5월에 선천적인 복수국적의 경우는 만 22세 전까지[21] 한국 내 '외국 국적 불행사 서약'을 하고, 남자는 군복무를 이행하는 조건 하에 복수국적을 허용하도록 대한민국 국적법이 개정되었다.

1992년 한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면서 중국은 화교학교 등에 중국 본토식의 교육을 하라고 압력을 넣고 있는 편이고 화교들도 새롭게 넘어오는 신화교 등의 문제에 있어서 다양한 의견을 내고 있는 편이다.

화교들에 대한 차별도 예전보다 제도적으로 많이 개선된 편이다. IMF 이후부터는 외국인도 한국 부동산을 구입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으며, 예전에는 3년 또는 5년 마다 장기거주외국인(F2) 사증을 갱신해야 했고 등본을 떼려면 동사무소가 아니라 출입국사무소에 가야 했지만 2002년부터 새롭게 시행된 대한민국 영주권이 나왔다. 그리고 대한민국 영주권자이면서 지역사회의 주민으로서 지방 참정권은 허용된다. 지방참정권은 도지사, 시장, 군수, 교육감, 시.도의원, 군의원, 지방자치단체의원장 등의 투표권이 주어진다. 물론 한국 국적이 아니므로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선거 자격은 없다. 다른 선진국들도 아주 개방적인 국가들 중 극소수의 경우에만 외국 국적의 영주권자에게 일부분 제한적인 지방 참정권 정도를 허용하며, 사실상 대부분의 국가는 영주권자에게 참정권을 아예 허용하지 않는다. (참고로 이민자의 국가로 불리는 미국도 영주권자는 아예 유권자 등록도 투표도 전혀 할 수 없다.) 애초에 자국민과 똑같이 대접할 수는 없으니까.

화교 1, 2세대는 거의 완전한 중국인 정체성을 가지고 화교학교 등의 민족 교육을 통해 강화된 것이 있지만 아래로 내려갈수록 한국에 동화되는 사람도 많다. 특히나 3세대에 이르면 제1언어가 한국어가 되어버리고 한국 문화가 더 익숙하며 중국어는 나중에 따로 배우는 경우가 많다. 이는 재일교포 사회에서도 흔히 보이는 현상이다. 다만 이것은 화교나 재일교포 사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이 세상 어느 민족 정체성이 가장 강력한 국가의 디아스포라여도 해외에 대대로 머물러 영주하면서 3세대 이상 거주하면 언어적, 문화적, 정서적으로 '체류국'의 영향을 받아 비슷하게 동화되는 것이 심리학적으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한다.

화교 학교에서도 되도록 중국어를 쓰게 시키지만 학생들끼리 있을 땐 한국어로 대화할 때가 많다. 화교학교에 안 다니는 화교들도 한 10% 정도 되는데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화교인 줄도 모르다가 귀화하거나 성인이 돼서 알 때도 있다. 재한화교들도 사람이다 보니 그 중 소수는 중화사상에 심취해서 혐한이 된 소수의 인간들도 있다. 그 역갤을 비롯한 혐한일뽕 커뮤니티에서 화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건 유명하고[22] 한국 인터넷 상에서 국까 여론이 확산되는 것과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서 이간질이 일어난 경우가 혐한 성향 화교들이 주도했다는 설이 나돌 정도이며 중국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여행가이드를 할 때 한국의 역사 및 문화재에 대한 왜곡된 설명을 하는 경우도 있다.

상당 수가 한국인 혼혈이어서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많은 편. 그래도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다른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있어 혐한이나 반한인 화교들이 눈에 잘 띄기는 한다. 그리고 아무래도 한국인에 동화되다보니 화교들 중엔 기독교 신자들도 많은 편이다.[23] 특히 인천광역시의 화교들은 상당수가 기독교를 믿는다.[24]

한국인 남성들 입장에선 군대에 안 간다는 게 화교 남성들을 싫어하는 이유가 되는 경우가 있다. 다만 한국군에서 외국인을 입대시키지 않는다는 점[25]한국중화민국속인주의 전통과 민족주의 전통이 강한 탓에 국적을 바꾸는 것이 개인에게 상당히 결단이 필요하였다는 점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실 공무원이 되려고 하거나 여러 차별이 싫어서 귀화하는 화교 중엔 군대 가는 사람도 있다.[26] 특이 케이스이지만 행정착오로 한국과 대만 국적이 모두 말소되어 무국적자가 된 예비역 육군병장 화교도 있다.[27] 현재는 정상적으로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해 주고 예비군도 간다. 예전엔 재산 5,000만원이라는 귀화의 조건이 있는데 요새는 많이 약화된 편이다. 또 군의관 3년 갔다오니 유급 2번 당했던 화교 동기가 이미 개원해서 자리 잡은거 볼때 참으로 상콤함을 느낄 수 있다. 물론 군필 귀화 화인의 경우 해당없는 얘기. 어차피 이쪽이면, 특히 모계가 화교인 하프인 경우는 그냥 똑같은 한국사람일 뿐이다.

화교들이 한국을 떠난 이유 중에는 정책적인 차별도 있지만 교육 문제도 있다. 한국이 고도의 학벌사회로 성장하는 가운데 화교학교는 학력을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검정고시를 쳐서 한국 수험 과정을 밟거나 대만의 대학교를 준비해야 하는데 해외에서 자국 입시를 준비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화교학교 자체는 대만 입시를 준비한다. 한국 대학에 화교들 특별전형으로 들어가는 거 있지 않냐고 싶겠지만 그걸로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은 그리 많지 않다. 화교 학교 다니면서 한국 수능을 별도로 준비하는 건 힘들고 한국에서 좋은 대학을 나오기 어려우니 대만이나 미국으로 간 것이다. 정작 미국 가서는 코리아타운에서 산다. 이런저런 이유가 겹쳐서 1970년대 초반에 10만~15만에 가깝던 인구가 지금은 절반정도로 줄은 것이다.

한편 화교들과 그 본국 중화민국과의 관계도 복잡하다. 위에 언급했듯이 대체로 한국 화교들은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중화민국이 '대만'을 강조하면서부터 연계가 더욱 소원해지는 감도 있다. 이들은 '중화민국인'은 맞지만 '대만인'은 아니다. 물론 자기 소개를 할 때 (중국이라고 하면 중화인민공화국을 연상하므로) 편의상 남에게 대만 사람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다보니, 대학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의 대륙 출신 유학생 무리와, 대만 출신의 중화민국 국적의 유학생 무리 어느 쪽에도 끼지 못 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물론, 그런 거 상관 없이 잘 어울려 노는 경우도 있지만, 중화민국을 지지하면서 대만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없는 상태라면, 어느 집단에 들어가도 이질감이 발생하게 된다. 심지어, 둘 다 중화민국 국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중화민국에서 태어난 대만인은 중국인의 정체성을 부정하는데, 한국에서 태어난 화교는 중국인의 정체성을 주장하는, 묘하게 정체성이 엇갈린 상황도 발생한다.

또한 한국 화교들은 중화민국 본국에는 호적이 없어서 국민 신분증[28]번호도 없다. 현재 중화민국 정부는 여권 발급에서 '무호적 국민'에 대한 차별을 하고 있다[29]. 외관상 타이완 섬 거주민들과 차이가 없는 여권이지만 효력의 차이는 굉장히 크다[30]. 중화민국 국민에게 비자를 면제하는 나라에 갈 때도 무호적 국민은 그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31] 심지어는 무호적 국민이 대만 국적을 가지고, 대만 여권을 들고, 대만에 들어가는 경우에도 비자를 받아야 하며, 대만 거주시에도 외국인등록증을 발급받아서 거주한다[32].
그래서 중화민국은 대한민국 국민에게 90일간 무비자 입국을 허가하므로 중화민국 국적을 유지하는 화교가 대만에 가는 것보다 대한민국으로 귀화한 화교가 가는 것이 오히려 쉽다.

이 무호적 국민이란 개념은 리덩후이 정권 때인 1991년에 생긴 것으로 보인다. 관련 글. 중국어(정체자)이다. 본국인 대만에서는 '억울하면 와서 호적 만들어라' 하는 식인데 이게 쉽지도 않을 뿐더러 남자의 경우는 대만이 징병제 국가라 군대 문제가 걸리게 된다. 결국 한국 화교들이 본국 정부에 시위를 한 사례도 있었다. 한국 화교들의 주장에 의하면 천수이볜 정권 이후로 호적 만들기가 어려워졌다고 한다. 기사 1기사 2 다른 나라에도 중화민국의 무호적 국민이 있고 이들도 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데, 필리핀 화교가 대만에서 비슷한 이유로 시위를 한 사례도 있다. 국부천대 이후의 중화민국은 축소된 영토에 많은 사람들이 있고 수많은 화교들마저 많이 와버리면 국가 경영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것이기에[33] 이런 차별 정책을 해 오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사실 여기에는 정치적 견제가 숨은 이유이기도 하다. 보통 외성인들이 대다수인 화교들은 국민당 지지율이 높다 특히 1,2세대들.
또한 중국인 100만명이 대한민국에 거주하면서 중국인(신화교)의 부모를 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정체성이 중국인인데 반중 성향이 강한 대한민국에서 거주하면서 낮아진 자존감의 회복을 위하여 역사갤러리같은 친대만,친일본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면서 한국인을 비하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좌우지간 이러한 제약 땜에 현재는 귀화 화인이나 하프들이 더 눈에 띈다. 귀화자의 대표적인 예는 조리사 이연복과 가수 주현미, 배우 하희라와 빙속선수 공상정(특별귀화 케이스로 복수국적이다.), 기업인 담철곤 등이 있다.

참고문서 : 대만/외교

3. 화교 현황

10만명에 가깝던 화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기부터 70년대까지 화교 경제 진출을 막기 위해 각종 제한을 걸어 대만,홍콩,미국 등으로 이주해 한때 2만명까지 줄었다가 1990-2000년대 이후 다시 돌아오고 있어 2010년대 귀화자를 포함한 화교 인구는 5만명 정도이다. 이중에 13,316명이 영주(F-5)이며 거주비자(F-2)는 6,569명이다. 다만 이들은 자발적인 집계이고 실제 숫자는 현재 화교 3세 이상을 합산하면 5~7만명 가량이다.
서울특별시 8,769명
경기도 2,484명
인천광역시 2,839명
부산광역시 1,732명
대구광역시 871명
충청남도 647명
전라북도 585명
충청북도 569명
강원도 558명
대전광역시 514명
경상북도 432명
경상남도 358명
광주광역시 334명
제주시 295명
울산광역시 282명
전라남도 221명

서울시 서대문구의 연희동과 연남동(연희동 남쪽이란 뜻)엔 전통적으로 화교가 많이 살고, 근처에 화교 중.고등학교도 있다. 이 화교 학교가 전국적으로 대표적으로 큰 화교 학교에 속한다. 하지만 교육 현실은... 주차 안내표시에 중국어 번체로 안내도 적혀 있고 근처의 중국집 중에 화교가 운영하는 곳이 많다.

4. 신화교

1992년 한중 수교 이후에 들어온 대륙의 중국인들을 말한다. 2012년 한국의 체류 외국인은 144만명으로 장기체류자 112만명, 단기체류자 32만명 선이다. 여기에 잡히지 않는 불법체류자는 17만명 정도이다. 한국 정부는 중국인과 한국계 중국인, 즉 조선족을 구분하는데 합법 체류자 가운데 중국인은 25만, 불법체류자 중에 중국인은 5만명 정도 수준으로 한국 내에 화교를 제외하고 약 85만의 중국계 인구가 있는 것이다.

5. 유명 인물

화교와 화인(귀화자)의 구분 없이 일단 다 화교로 기재한다. 중국 귀화자는 제외한다.

5.1. 연예인/스포츠/기타

  • 공상정: 1996년생 쇼트트랙 선수. 춘천 화교 출신 의사의 딸로 화교 3세다. 중3이던 2011년 특별귀화 신청을 인정 받아 귀화하였으며, 공상정선수는 한국과 대만의 이중국적이다. 2014 소치 동계올림픽 3000m 계주에서 금메달을 따서, 화교 귀화자 출신 첫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화교학교 출신이 아닌 일반 한국 학교를 나왔다.
  • 나광훈: 1962년생 배우.
  • 단영: 1978년생 배우.
  • 강래연: 1981년생 배우
  • 소소경: 1979년생 前 프로야구 선수. 중화민국 국적이지만 중학교 고등학교를 대구광역시에서 다녀, 규정에 따라 국내 선수로 활동하였다. 1998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하여 2005년에 이원식과 함께 LG 트윈스로 트레이드 되었다. 이때 트레이드 상대가 홍현우,이용규 였다. 은퇴후 2014년 현재 대전 유천초등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지내고 있다.
  • 손성희: 1990년생 가수. 필서진과 마찬가지로 대만에서 활동 중이다.(대만 활동시 이름은 孫盛希/Shi Shi) 부모님이 모두 중화민국 국적의 한국 화교며 고향은 강릉시. 연세대 재학시절 밴드 동아리 "소나기" 에서 보컬로 활동한 이력이 있다.
  • 이기용: 1985년생 모델 겸 배우. 아버지가 한국인으로 귀화했다고 한다.
  • 이연복: 1959년생 요리사. 중식당 목란 운영. 한국으로 귀화
  • 장채희: 김창렬의 아내.
  • 주현미: 1961년생. 광주광역시 화교 출신으로 트로트 가수이다. 아버지는 중국에서 출생하고 4살 때 한국으로 이주한 중국인이며 어머니는 한국인이다. 한의사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약사일을 하다가 음반을 취입하였다. 현재는 한국인으로 귀화. 참고로 주현미의 친할머니 역시 화교가 아닌 한국인이다.
  • 필서진: 1989년생 가수. 대만에서는 Bii, 혹은 Bii畢書盡으로 불린다.(2013년부터 후자를 더 많이 씀) 아버지가 중화민국 국적의 한국 화교, 어머니는 한국인인 혼혈이며 고향은 성남이다. 중화민국 국적이지만 성남에서 화교학교가 아닌 일반 한국 초중고를 다녔다. 2006년 성남정보산업고(현 성남금융고)2학년을 중퇴, 홀로 대만으로 건너가 트레이닝을 받고(당시엔 중국어를 전혀 할 줄 몰랐다고 한다) 2010년 대만에서 데뷔하였다. 이후 2012년에 해군에 입대하였고 대만 호적을 취득, 완전한 대만인이 되었다. 2013년 제대후 발표한 2집 Come back to Me의 동명 타이틀곡이 대박을 터뜨리면서서 대만 현지 소녀팬들의 우상으로 급부상하였다. 앨범 수록곡의 대부분을 작사작곡하며 거의가 대만 드라마 주제곡 및 삽입곡으로 쓰였다. 타이틀곡은 한글 가사가 짧게 들어가 있거나 중국어/한국어 두 가지의 버전이 존재한다. 심지어 한국어로만 된 노래도 있으며 공연이나 시상식 등에서 노래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한국에 있었을 때 자신을 SM관계자라고 소개한 의문의 남자에게서 명함을 받고 어머니에게 보여줬는데 그거 다 사기꾼이라면서 갈기갈기 찢어버렸다고...만일 진짜 그 남자가 SM측 사람이었고 어머니가 승낙했다면 대만이 아닌 한국에서 볼 수 있을텐데... 하지만 뒷날 라디오 방송을 통해 슈주와 친분을 쌓았으니 아주 인연이 없진 않은 듯.
  • 하희라: 1969년생 배우최수종과 결혼하며 귀화하였다. 아버지는 화교이며 어머니는 한국인이다.
  • 후인정: 배구 선수로 귀화했다. 역시 배구 선수, 감독 출신인 아버지 후국기나 다른 가족들은 중화민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다. 국적 때문에 할아버지의 반대로 한국 대표선수가 되지 못했던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 김승희: 1974년생 가수. 2014년에 한국나이로 무려 41세에 데뷔하였고 대만 현지에서는 RK金承熙라는 이름으로 활동중이다. 필서진과 마찬가지로 대만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자랐으며 국적은 한국. 한국에서 10여년간 연습생 겸 보컬 트레이너로 있어서인지 대만 데뷔 앨범 홍보 영상에 티아라와 다비치 등 "당시" 코어 소속 가수들의 축하 메시지가 있다. 대만 데뷔곡 10:10은 별에서 온 그대의 대만판 삽입곡으로 쓰임.
  • 강육항: 1958년생 가수.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대만으로 건너가 가수활동을 했다. 이문세 등 한국노래를 번안해서 부른 노래가 몇곡있다. 대만 TV를 보면 나름 인기가수 인듯하다. 대만 TV 에서 번안곡을 부를 때면 한국어 가사를 중간에 넣는 경우도 있다.
  • 이강: 1992년생 전 축구선수. KBS2 방송 청춘 FC를 통해 대중적으로도 알려진, '2009 FIFA U-17 월드컵’의 8강 진출 멤버.(당시 대표팀 동료로는 손흥민, 김진수, 윤일록 등). 현재는 개인레슨과 아프리카 축구 방송을 하며 지도자를 준비 중.
  • 황인덕: 1992년생 배우. 2011년 tvN 오! 보이로 데뷔해 대만에서 활동 중이다. 미남이시네요 대만판에서 강신우 역을 맡은 바 있다.

5.2. 기업인

해방공간 당시 화교들은 대중(對中)무역 등으로 인해 1946년에 수입액의 90%를 화교가 차지할 정도였으나 중국의 국공내전에 의한 무역중단[34]과 한국 상인들의 역량 회복[35], 한국전으로 인한 창고봉쇄령[36], 화폐개혁[37], 부동산 제한 등으로 화교들의 경제력은 미미한 수준이 되었다. 그러던 것이 1990년대 들어 중국과의 교역이 늘어나면서 한국어와 중국어를 둘 다 구사하는 화교들의 경제 활동에 많이 참여했다.

화교들은 유독 요식업자가 많은데 중국 수교 이전에는 한국 기업에서 임원으로 승진하기가 힘들어서 중간에 나간 케이스가 많다. 그리고 한국 화교는 산동 출신들이라 광동이나 복건성 출신의 화교들과는 교류가 적은 편이다.
  • 담도굉(譚道宏): 베이징현대차 총경리(부사장). 설영흥의 추천으로 영입되었다. 1959년생으로 한성화교학교,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현대정공(현대모비스)에서도 근무했다. 2015년 8월에 현대자동차 중국법인의 전략담당부사장으로 발령났다. 설영흥이 물러난 뒤 한국인인 최성기가 이어 받자 중국 정부와 조율이 잘 안 되서 다시 화교를 발탁한 케이스로 재계에서 보고 있다. 설영흥은 정몽구와의 친분으로 유입된데 비해 담도굉은 현대에 입사해 실력으로 승진한 케이스이다.
  • 담철곤(譚哲坤): 1955년생으로 오리온그룹의 회장이다. 현재는 횡령, 배임으로 집행유예 결혼후 한국인으로 귀화. 조부가 화교였으며 본인은 자신이 화교라는 자각도 거의 없다고 한다. 하희라와 비슷한 케이스. 하지만 중국어 구사가 가능하고 중국제과시장에서 오리온이 약진하는 등 혜택을 보고 있다. 어찌보면 신격호의 한중버전[38][39] 본 항목에 나오는 설영흥이나 담도굉과 달리 한국켄트외국인학교를 나오고 조지워싱턴대학교를 거치는 등 일반적인 화교 2-3세보다는 한국의 재벌 2-3세와 비슷한 교육과정을 거쳤다.
  • 설영흥(薛榮興): 1945년생. 오른쪽은 현대자동차 회장인 정몽구이며 왼쪽이 부회장인 설영흥이다. 현대자동차의 중국 판매를 총괄하고 있다. 본래는 아버지가 중국집을 하면서 무역업도 했는데 본인도 가업을 물려받아 무역업을 했다. 정몽구 회장과는 경복고를 다닐 때 정몽구가 근처에 있던 설영흥 아버지의 식당에 자주 들르면서 알게 되었다. 둘은 7살 차이로 정 회장이 연상이다. 당시에 설 부회장은 초등학생이었다. 무역업을 하다가 1999년부터 현대에 합류하였다. 사실 정몽구의 당구 친구였다는 이유로 친해졌다고...
  • 설호지(薛浩智): 현대차의 이사. 위의 설영흥 부회장의 아들이다.
  • 손계서(孫啓瑞): 대한항공의 고문 출신. 화교들은 요식업이나 여행업에서 많이 종사했는데 그도 대한항공에서 중국 현지의 인허가를 받아내는데 주력했다. 한국의 한족 화교들이 오히려 중국 국적을 가진 조선족[40]에 비해 외국인 멸시를 이기고 중국에서 관시를 구축하기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2013년에 작고.
  • 손서신(孫書臣): 대한항공의 상무.
  • 여경래(呂敬來): 그랜드앰버새더호텔 중식당 홍보각 대표. 아버지는 화교이며 어머니는 한국인이다.
  • 여경옥(呂敬玉): 롯데호텔 중식당 도림 조리이사. 아버지는 화교이며 어머니는 한국인이다.
  • 후덕죽(侯德竹): 신라호텔 중식당 팔선 상무이사.

5.3. 화교설이 도는 사람

  • 진미령 : 화교가 아니다. 부모님 양쪽 모두 한국인이며 아버지가 한국광복군 출신. 아버지가 중국인들과 친한 탓에 그냥 화교학교에 넣었다고 한다 현재도 화교학교를 보면 편법으로 다니는 한국인들이 꽤 있다. 부모 어느 쪽도 화교가 아닌 그냥 한국인들. 이유는 중국어 배우게 하려고.
  • 전지현(왕지현): 화교가 아니다. 개성 왕씨이지만 부모의 이름이 특이하기 때문에 화교의 후손이라는 루머가 퍼졌다. 그러나 전지현은 본인의 부모님조부모님도 화교와 관련이 없다고 인터뷰하였다. 2012년에도 또다시 화교라는 소문에 대해 가장 터무니없고 황당했다언급했다. 검찰측에서 전지현의 아버지가 화교라고 발언했다는 언론 오보에 대해서 서울중앙지검 역시 그런 내용을 말한 적 없다며 일축하였다. 해당 기사 전지현 어머니의 성씨는 묵씨인데 소수지만 대한민국에 실제로 존재하는 성씨라고 한다. 연예기사에서도 전지현의 결혼식 당시 전지현의 어머니한복을 입고 참석한 사진이 올라와 있다.

6. 대중매체에서 나온 화교 인물

  • 정청 (신세계) - 전라도 여수 출신의 화교인. 한국사회에서 마이너의 상징인 호남에 더한 마이너인 화교라는 설정까지 겹친, 마이너 오브 마이너 인 인물, 하지만 그것을 절대 숨기지 않고, 자신의 약점도 모두 극복해 낼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한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서 감독이 잡은 설정이라고 한다.# 작중에서 한국사회에서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호남사투리를 상용하며 화교들도 보통 숨기는 중국어하는 모습을 당당하게 내세운다. 부하들은 모두 화교 출신으로 구성하고, 역시 중국어만 가능한 변호사를 부하로 삼아, 중국도 부지런히 드나들며 삼합회와의 비즈니스도 열심히 진행하고, 한국 경찰에게 선물을 줄 때도[45] 굳이 중국과자인 전병을 선물하며 자신이 중국계임을 다시 밝히는 등 당당한모습을 보인다. 마지막으로 이자성에게 진심을 전할 때도 중국어로 말한다
  • 이자성 (신세계) - 정청과 같은 역시 전라도 여수 출신 화교, 단 여러모로 정청보다는 한국화가 많이 진행 된 인물로, 중국계 혈통을 딱히 드러내지는 않고 꽤 숨기는 것으로 묘사 된다. 작중 국적도 한국인이며 [46] 극 중에서 중국어 대화를 알아는 들어도 중국어로 따로 말하지는 않는다. 이는 한국 사회에 가능한 동화되고 티내지 않고 살려는 현실의 화교에 훨씬 가까운 모습이다. 다만 시나리오 단계에서는 이자성도 중국어를 하고 중국 비즈니스에도 가담하는 장면이 있었다고 한다. 감독이 위의 '소극적 화교'의 설정을 더 강조하기 위해 삭제했다고 #그리고 화교인 것과는 별도로 정청과는 다르게 한국어를 사용할 때도 호남사투리를 전혀 쓰지 않는 것으로 나온다. 다만 이는 이자성이 따로 노력한 것인지, 어려서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생활해서 사투리를 잊은 것 인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47]
  • 마봉팔 (극한직업) - 한국으로 귀화[48]화교인 것으로 나온다. 극중 마봉팔 역을 맡은 진선규가 영화 범죄도시에서 조선족으로 나와 인기를 얻었던 오마쥬이다.

7. 대우

외국 국적[49]이기 때문에 차량 등록 하나만 해도 중형차 이상은 구비해야 할 서류 종류가 한국인의 4배에 가까우며 죄다 인지를 떼야하는데다가 서류 미비를 구실로 인지 재발행을 요구하는 등, 한국인으로 귀화하는 게 더 빠를 정도. 주민번호 맨 앞 자리도 1, 2, 3, 4가 아니라 5, 6, 7, 8로 시작하는데 사실 주민 등록번호가 아닌 외국인 등록번호라 그렇다.

하희라도 화교였으나 1995년 최수종과 결혼하면서 귀화하였다. 본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신이 화교인 것 자체를 모르고 살았으며 중국어도 할 줄 모른다고. 아무래도 가족과 같이 살다 보면 규제가 문제될 수도 있으니. 그리고 한국인과 결혼하고 조건을 만족시키면 간단히 귀화가 가능하지만 선택은 자유다.

과거엔 정부 주도로 화교의 경제 진출을 막았으나 의약업 쪽으로 진출한 화교도 있을정도, 한중 수교 20주년 기념 KBS-CCTV 공동 제작 프로그램에 화교 출신 설영흥 현대 자동차 부회장이 출연하기도 했다.

6.25 전쟁 당시엔 화교 청년 중 일부가 한국군에 입대해서 활동한 적이 있다. 한국어중국어에 모두 능숙하다는 점을 이용해 공산군 진영에 침투, 정보를 수집하거나 중공군 포로를 심문하는 등의 임무를 맡았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참전 용사들이 이에 대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백선엽의 자서전에서 발췌. 관련기사

그런데 국내에서 화교들의 중국 음식점이 굉장히 인기를 끌어서 문화적 영향은 제법 크다. 친숙한 사업인 동네 중국집이나 중국에 역수출되어 인기를 끄는 한국식 짜장면의 탄생이라든지... 정작 중국에서 한국식 짜장면은 한국 요리로 분류 된다고 한다. 한국에서 대표적인 중국 음식이 짜장면인 것과는 정반대. 유명한 화교 음식점이 여러 군데 있었으나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다시피 하며 사정이 안 좋아진 틈을 타 한국인들이 상표를 얻었다. 대표적으로 공화춘. 공화춘 외에도 중국집 이름의 클리셰가 된 것들은 대부분 실존했던 유명한 음식점이라고 한다. 이건 꼭 상표를 뺏었다는 게 아니라 그냥 문화 전파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 한국의 경우 화교가 득세한(특히 경제적으로) 다른 나라들의 경우에 주목해 그들이 혼란기의 한국에 끼칠 악영향을 고려하여 건국 초기부터 1970년대까지 각종 제한을 걸었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두가지의 견해가 있다.

7.1. 화교 탄압에 대한 비판

화교의 경제장악은 몇몇 동남아시아 나라에만 국한된 케이스였다. 이 지역에는 수백년전부터 중국인들이 대거 무역, 교류, 피난 등으로 정착해온 역사가 있어, 나라 인구의 5%에서 20%가 화교였고 원주민들과의 교육수준에서 차이가 많았던 것이다.

당연히 일본, 유럽, 미국, 캐나다 등 다른 나라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없었다. 한국도 19세기말인 임오군란(1882년)때 조선에 40여명의 중국상인이 들어오면서 비로소 화교역사가 시작된다. 그래서 화교들이 무조건 나라경제를 장악한다는 주장은 화교들에겐 억울할 수도 있다.

왜 한국인으로 귀화하지 않았냐고 반문할 수도 있는데 귀화하려면 재산이 어느 정도 있어야 했고 절차도 까다로웠고 동아시아의 속인주의 전통에 민족주의가 강하게 겹친 터라 국적을 포기하거나 새로 얻는 게 굉장히 어려웠다. 일본에서 그렇게 차별을 받던 재일교포들도 60만이 넘는 숫자가 아직도 한국 국적이나 조선적을 유지하고 있다.

7.2. 반론

정부 수립 당시부터 약 70년대까지, 당시의 한국 정부는 화교가 득세한 다른 나라들의 케이스에 주목해 그들이 혼란기의 한국에 끼칠 악영향을 고려하여 각종 제한을 걸게 된 것이다. 지금의 스탠다드로 보면 그 당시의 차별은 좀 심하긴 했다. 근데 그 때는 자국인 인권조차 안 따지던 시절(...)이었고[50], 사실상 인권을 따지는 지금도 어느 정도 화교에 차별을 두는 건 비슷하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다른 힘없는 외국계에 비하면 당시에나 지금이나 오히려 특혜를 주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영주권시민권의 차이를 생각하면 화교뿐만이 아니라 다른 외국 국적자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영주권자의 경우는 극단적인 경우는 그냥 싫어도 추방할 권리가 있다. 이것은 주권 국가의 고유 권리이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 경우에 따라서는 영주권자들에게 (특히 선거 부분에서) 국가의 주권 자체가 농락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일제강점기의 트라우마 때문에 일본계 외국인에 대해서는 훨씬 더 가혹하게 차별했다. 심지어 영주권을 가진 외국인에게 참정권이 생긴 이후인 2006년 지방선거 당시에 재한일본인 가운데 영주권자는 1,622명인데 이중에 선거권을 인정받은 사람은 51명이다. 그 정도로 일본계에게는 제한이 많다. 근데 화교에 비하면 다들 숫자가 거의 얼마 안 됐다. 그나마도 주재원이나 외교관이었고. 사실상 당대의 재한 외국인 정책은 화교들이 주요 대상이 된다. 주한미군이 있긴 하지만 걔넨 군 부대에서 지내고.본격 소수민족 주한미군

미국을 포함한 상당수 국가의 경우 원칙적으로는 영주권자는 투표권 자체가 없다. 그래서 미국의 유권자 등록카드 기입사항을 보면 시민권자 여부를 묻는 사항과 '영주권자는 이 카드를 기입하지 마십시오'라고 쓰여있다. 그런데 한국은 지방선거에서 영주권이 있는 화교들에게 투표권을 준다. 지방자치에 한정된 이야기지만 귀화도 아닌 영주권자가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한국인의 참정권이 침해받는 상황이라고 해석될 여지도 있다. [51]

이런 해프닝은 참정권과 귀화 문제에 대해 유독 동아시아 3국이 서로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의 경우 (이웃나라 출신의) 영주권자에게 서로 쿨하게 참정권을 주거나, 아니면 주변 국가와의 문제를 고려해서 아예 참정권을 주지 않는데, 예를 들어 재일교포들이 일본에서 지방참정권 받는 문제랑 일본인들이 한국 사회에서 지방참정권 받는 문제를 연계해서 다뤘어야 하는데 이점에서 한국 정부가 미숙했다고 볼수도 있지만 애시당초 중국과 일본은 외국인참정권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국가이니 협상 테이블을 만들지도 못했을 것이다. 한국이 외국인참정권을 부여하는 것은 호구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으나, 외국인참정권에 가장 관대한 유럽의 경우 주변 국가끼리 유럽연합이라는 정치적, 경제적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는 곳이다. 공동체는 커녕 툭하면 갈등이 벌어지는 동아시아에 위치하는 한국과는 상황이 다르다.

또한 한국의 경우 징병제 국가인데다가 휴전중인 관계로 국방의 의무가 없는 영주권자에게 권리부여를 하는 것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여론을 가지고 있다. 위 단락에서 언급된 납세의 의무도 한국사회에서는 국방의 의무에 비하면 민감도가 떨어지는 편이다.[52] 위의 한국전쟁을 언급하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건 SC지대 한정이고 한국전쟁 이후로는 화교가 대한민국 국방에 참여한 사례가 없다.

또한 이 정책을 가지고 과거의 독재 정권의 문제라고 비판하는 것도 상당히 논점에서 어긋난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민주화 이후에도 화교 탄압 정책이 즉시 완화되지는 않았으므로 화교 입장에서는 더더욱 고통을 받았던건 사실이다. 차라리 역사적으로 외세에게 침략을 받았던 배경과 식민통치의 트라우마로 인해서 외국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는 비판이 더 논점과 일치한다. 물론 민주적인 정권이 있었어도 그랬을 테니 독재 정권이 탄압을 한 게 정당화되는 건 아니지만 한국의 제노포비아가 상당히 한국인들의 트라우마에 바탕하여 심리 기저에 자리하고 있고 방어기제로 작용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부모 양계 혈통주의 국적법으로 개정되었기 때문에 1998년 6월 14일 이후 출생부터는 부모 중 1명이 한국 국적이면 출생 국가와 상관없이 자동으로 한국 국적을 부여한다. 외국인 부(父) 한국인 모(母)의 자녀는 한국인 모친의 가족관계등록부(母家의 호적)에 출생신고 된다. 이런 경우에는 한국인 어머니의 성씨를 사용하거나 혹은 외국인 아버지의 성씨를 사용하거나 혹은 자녀의 아버지 나라 외국식 이름을 그대로 등록할 수도 있다. 따라서 한국 화교와 한국인이 결혼했으며 1998년 6월 14일 이후 출생한 자녀는 모두 대만한국선천적인 복수국적을 가지고 태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2010년 5월에 선천적인 복수국적자의 경우는 만 22세 전까지 '외국 국적 불행사 서약'을 하고 병역을 이행하는 조건 하에 복수국적을 허용하도록 대한민국 국적법이 개정되었다.

8. 경제 위기 당시 루머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해외 화교들이 한국 정부의 부채를 탕감해주는 대신 화교들의 권익 신장과 조계 지역 형태의 거주구를 요구했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당시 한국 정부가 필요했던 건 부채 탕감이 아니라 국가 신용도와 국가 단위 유동성 확보로, 일개 이익 단체인 화교 레벨에서 어찌할 수가 없다. 이런 헛소문의 자매품으론 통일교가 한국 부채를 탕감해 줄 테니 통일교를 국교로 지정해 달라는 요구를 해왔다는 루머가 있다.

이는 1997년 인도네시아의 외환 위기를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화교 자본이 강하게 영향을 주던 인도네시아는 화교 자본을 추방하려고 애썼는데 그 반작용으로 외환 위기를 겪었고 이 때문에 화교 자본들의 복귀를 수상이 요청한 바 있다. 이런 경제적인 반감으로 인해 이듬해인 1998년인도네시아 화교 학살이 일어났다.

9. 분포

한국 정부가 인정한 차이나타운인천광역시, 부산광역시에 있다. 각각 인천역, 부산역 앞에 위치한다.
  • 인천
    1905년 당시부터 인천에 일부 화교가 정착하였으며 한국 내 차이나타운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유명하다. 대표 서민 음식인 짜장면이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화교들이 여전히 많이 거주하지만 관광지, 상업지구로 개발되어 한국에서 중국을 느낄 수 있는 테마파크로 성격이 변화했다. 주로 대형 중화요리점이 많고 인근 지역과 연계된 관광코스 중 한 곳이다. 조선족이 많다는 일부 주장과 달리 관광지화되면서 다른 지역에서도 흔한 특색없는 한국 프랜차이즈의 범람으로 지역에서는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 서울특별시
    종로와 명동, 특히 중앙우체국과 주한 중국대사관 근처에 몰려 있다. 신화교들의 경우에는 영등포구, 구로구에 대거 거주하고있다.
  • 부산광역시
    규모로는 인천 차이나타운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또한 명색이 차이나타운인데 오히려 조선족러시아 사람과 러시아어, 아랍어 간판이 더 많아 보여서 차이나타운이라기보다는 작은 이태원동 같은 분위기이다. 중국집이 많은데, 짜장면이 인천 차이나타운에서 유래한 음식이기 때문인지 이 곳에는 짜장면보다는 만두를 주력으로 삼는 곳이 많다. KTX를 탈 수 있는 부산역 바로 앞에 있어서 접근성은 좋은 편. 이전까지는 아무나 가볍게 발을 들일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2013년 대대적으로 타일을 갈아엎고 간판도 획일적으로 정비되어 관광지처럼 깔끔해졌고 관광객이 길을 거니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다.[53]
  • 대구광역시
    종로(대구에도 종로가 있다.)쪽에 화교들이 상당히 모여살고 있는데 중국인 학교가 있지만 차이나타운이라고 부르기엔 미비한 수준이며 사실상 일반 유흥가, 혹은 외국인 거주구역이나 다를바가 없다. 조선족이 대부분이다. 바로 옆이 시내인지라 시내쪽에 가게를 차린 화교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야끼우동의 원조인 '중화반점'도 화상이다.
  • 광주광역시
    계림동에 화교 소학교가 있고 충장로 5가 지역에 화교들이 운영하는 중국음식점이 들어서 있다. 다만 광주 지역은 화교들을 결집시킬만한 커뮤니티가 강한 편이 아니고 화교 교육기관이 소학교(=초등학교)까지밖에 없다는 점이 다른 지역의 화교 공동체에 비하면 약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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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청나라는 영국과 같은 서양 열강에 피해 한번 못주고 짧은 시간에 항복하여 패하는 등 많은 굴욕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청나라는 그때부터 가장 만만하고 약소국인 조선에게 똑같은 수법을 썼는데 그것이 조계지 획득이였고 화교들은 경제 침략의 도구가 되어 일제강점기에 청나라에 송금되는 자금이 많았다.[2] 지금도 인천, 평택에서 중국을 오가는 여객선들은 산동지역 항구 위주로 운항중이다. 위해, 청도, 연태, 위도 등 산동 항로가 상당히 많다. 산동반도 이외에는 천진, 대련(요녕성), 진황도(하북성), 연운강(강소성) 노선 뿐이다.[3] 제3공화국(드라마)에서도 5.16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경제정책을 검토하면서 "화교들이 엄청난 현금을 숨겨두고 있다는 거야"라는 대사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4] 생김새도 비슷한데다가 성씨와 이름을 아예 우리와 똑같은 걸 쓰니 알아볼 도리가 없다. 별 생각없이 만나던 지인이 원래 화교 출신이라 놀라는 경우도 많다. 군대에서도 화교 출신이 간헐적으로 보인다. 사실 대부분의 화교들은 거주국가에 대부분 동화되어갔다. 한국뿐만이 아니라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의 경우에도 현지 이름과 현지 언어를 쓰며 베트남의 경우에도 한국보다 더 강경한 정책에 베트남을 벗어나던지 동화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5] 참고로 인도네시아의 경우 자바섬의 경우 대부분 자바어인도네시아어를 사용하며 동화가 많이 되었지만 수마트라섬이나 칼리만탄섬 등지의 화교들은 아직도 복건어를 사용하며 현지인들과 거리를 두고 있고 이에 따른 갈등도 많다. 대부분 부동산등의 부는 화교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6] 귀화하지 않는 화교는 거진 이민을 택하거나 대만행을 택했다. 현재 2만 명 정도만이 중화민국 국적으로서 영주권자로 잔류해 있고 그나마 이들도 조금씩 귀화하는 중이다.[7] 아직 귀화 안 한 중화민국 국적자로 점진적으로 귀화 중이다.[8] 여기엔 귀화한 사람들은 제외되었다.[9] 중국 조선족은 한국에서 재외동포 비자를 받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같은 중국 국적이어도 한족이나 기타 소수민족과 구별된다.[10] 사실 산둥 출신이 대부분인 국내 화교에게 대만 또한 낯선 땅이다. 대만보다는 아예 미국 등 외국으로 이민을 간 화교들이 생각보다 많다.[11] 한화는 본래 한국화약(韓國火藥)의 약칭이므로 韓火라고 써야 옳을 것이고 실제 그렇게도 썼었으나, 회사명과 관련하여 웃지 못할 일을 겪은 이후에는 약칭을 공식 사명으로 채택하면서 한자 표기도 韓華로 바꾸었다.[12] 물론 개성왕씨의 경우처럼 가문의 명예를 높일려는 의도로 조작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그렇다해도 교류가 없다는것을 무턱대고 부정할 정도는 아니다.[13]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당시에 조차지였기는 했지만 어쨌든 중국안에 위치해있었다.)에 위치한데다가 독립운동가들도 중국 국민당이나 중국 공산당 등 중국내의 정당들이나 단체들과 협력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을 노린것이다.[14] 미국 로스엔젤로스에서 유학생활을 했던 이승만이 화교의 놀라운 상권 장악력을 목격하고 막으려 했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이런 강력한 화교 견제 정책은 이후 정권들이 계승해서 1990년대까지 이어진다. 단, 반론에도 있지만 당시에는 화교를 포함한 외국계 출신들은 다 차별받아서 민족주의를 위해 실행한 정책이라고 보는 편이 맞을 수 있다. 오히려 화교들은 다른 힘없는 외국계에 비해 특혜도 어느 정도 받았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15] 오죽 이 당시 혼분식 정책이 얼마나 강압적으로 혼분식 단속원이 식당 사장딸이 먹는 밥이 휜쌀밥인것을 가지고 트집잡아서 영업정지 처분을 내린 일이 있었을 지경이었다. 다행히도 소송에서 승소했다고.[16] 한성화교학교가 있던 곳. 화교 출신 배우 하희라도 그 지역에서 자랐다.[17] 당시 한국정부나 한국언론에서 대만을 모범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한 나라로 소개했던 시절이었고, 국민들 생활수준도 한국보다 많이 앞서있었다. 구체적으로 예시를 들자면 컬러TV는 대만이 1970년대에 보급되었는데 한국은 1980년대에 보급되었다든가 자가용 대중화도 한국이 1980년대 중후반이 되어서야 시작되었는데 대만은 이보다 5년 정도 일찍 시작되었다든가 하는 식이었다. 여행자유화 조치도 대만은 1979년, 한국은 1989년에 시행되었다. 즉, 당대에는 대만이 한국보다 10년 일찍 더 잘살았다는 얘기다. 경제지표면에서 있어서도 대만이 한국보다 앞서기는 매한가지였다. 물론 2000년대에 대만의 봉급수준이 정체되고 결과적으로 한국보다 훨씬 뒤떨어지게 되면서 이는 희석되었다. 공공물가나 식료품과 생필품 가격, 외식비는 대만이 한국보다 훨씬 싸다고는 하지만 부동산 가격이나 전월세비를 감안하면 물가 차이가 심하게 나는것은 아니다.[18] 그 예로 공상정의 아버지는 화교출신 의사다.[19] 다만 한자를 사용하더라도 중국인과 한국인의 작명법이 다르고, 한국인에는 없는 중국인의 성이 많아서 티가 나는 경우도 꽤 있다.[20] 과거 한국은 부계주의를 택하여서 아버지한국인인 경우에만 한국 국적을 부여했다. 이는 남녀차별이며 UN 국제협약에서 벗어난다는 지적이 계속 있어왔고, 무엇보다 미혼모 밑에서 태어난 자식들이 호적에 등록되지 못하는 등 사회 문제가 발생하여 1998년 6월 14일 이후 출생자부터는 출생 당시 부모 중 어느 1명만 한국 국적이면 출생국가와 상관없이 무조건 한국 국적을 부여하는 부모양계혈통주의로 바뀌었다.[21] 여자는 만 22세가 지나면 하나의 국적만을 선택해야 하지만, 남자는 만 22세가 지났어도 군복무 후 2년 내에 다시 외국 국적 불행사 서약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추가로 주어진다.[22] 한국의 일뽕의 상당수가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그 중에서 중화민국(대만) 국적을 가진 화교)라는 의견이 있는 데 한국의 화교들이 전부 일뽕인 것은 아니다.[23] 중화권 중에서는 홍콩, 마카오, 싱가포르가 기독교인이 많은 곳이다. 중화인민공화국도 각종 박해 속에 지하 교회가 늘고 있다.[24] 인천은 국내에서도 가톨릭개신교 모두 초강세 지역으로 유명하다. 개항 이후 국내 최초로 기독교 선교가 이뤄진 지역이고 개항과 개화기란 역사적 배경이 작용했기 때문이다.[25] 다만 귀화자는 기본적으로 자동 면제이지만, 희망 신청자에 한하여 군복무 할 수 있도록 개정되었다.[26] 다만 귀화자는 기본적으로 자동 면제이지만, 희망 신청자에 한하여 군복무 할 수 있도록 개정되었다.[27] 이 경우 큰 문제였지만 다행히도 국적회복 제도를 통하여서 다시 한국 국적을 받았다고 한다.[28] 한국의 주민등록증이나 중국본토의 후커우에 해당하는 것이다.[29] 중화민국 정부의 입장은 자신들이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국가에서 하며, 자신들은 이를 개선할 것을 각국에 요청한다는 것이다.[30] 중공의 일국양제에서 따와서 자기들에게 一本兩制가 적용된다고 말한다. 똑같은 여권이지만 타이완, 펑후, 진마 거주민과 자기들은 다른 제도를 적용한다고.[31] 중화민국 국민번호가 있는 중화민국 국적자들에만 비자를 면제해주는 나라들과 그렇지 않은 나라들로 나뉘는데, 전자의 대표적인 경우가 미국, 캐나다이며, 후자의 경우로는 대한민국 등이 있다. 그런데 주요 선진국은 거의 다 전자라고 봐도 무방하다.[32] 거주지가 확실하면 면제제해 주기도 한다. 어쨌거나 '중화민국 여권'에 '중화민국 비자'가 붙어 있는, 외부인이 보기에 황당한 상황도 생긴다.[33] 귀국 화교가 대만 거주민들의 일자리를 뺏어간다든지. 안 그래도 대륙에서 대만으로 온 외성인들도 꽤 됐는데 귀국 화교도 사실은 외성인이다.[34] 중화민국과 달리 중국 공산당은 극도로 대외무역에 폐쇄적이었다.[35]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 초기의 경제 혼란 등으로 한국인들의 경제력이 위축되었다가 순식간에 회복되었다. 사실 인구규모에서 차이(한국인 2천만 가량, 한국화교 3-4만)가 엄청 나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주도권을 회복하는 건 결국 시간문제였다.[36] 무역에 종사하던 화교들에게 타격[37] 은행을 잘 이용하지 않고 현금보유를 선호하던 화교들에게 타격이 되었다.[38] 다만 신격호는 재일 교포 출신이고 담철곤은 화교 출신이다.[39] 국민들의 인식에서 신격호의 롯데그룹은 일본 기업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담철곤의 오리온그룹은 한국 기업이라는 인식이 강하며 중국 또는 대만 기업이라 하지 않는다.[40] 조선족은 소수민족이라 중국 정관계의 주류로 파고들기가 쉽지 않다. 그나마 잘 사는 조선족들은 중국에 정착했지만 중하층 조선족들이 한국으로 많이 이주해서 3D 직종에 종사하는 게 그 이유에서이다.[41] 친할아버지는 화교 2세, 친할머니는 한국인으로 혼혈이다.[42] 출생신고라는 법적인 등록 절차를 거치지 않았어도 한국 정부는 한국인의 2세가 출생 당시부터 이미 대한민국 국적을 보유한 것으로 간주한다.[43] 대만은 출생 당시 부모 중 한명이 대만 국적이면 출생국가와 상관없이 대만 국적을 부여하는 속인주의 국가이다. 만약에 장원영의 출생 당시에 아버지한국으로 귀화하지 않고 대만 국적을 계속 유지하고 계신 상태였다면 한국과 대만의 이중국적을 부여받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한국 화교가 소지한 대만 여권은 대만에서 무호적이기 때문에 호적 번호가 없고, 대만에서 대만 여권 소유자임에도 불구하고 비자를 발급 받아야만 체류할 수 있으며, 선거투표의 권리도 없고, 해외 여행 시에도 실제 대만여권의 무비자 혜택을 받을 수 없다. 이는 사실상 무늬만 있는 깡통 여권인 셈이다.[44] 중국이 아닌 대만식 영문 표기이다. 중국에서는 장씨를 ZHANG으로 표기한다.[45] 실제로는 뇌물로 안에 달러를 넣어두었다[46] 한국 경찰은 한국국적을 가져야만 가능하다[47] 아마 사투리를 원래 거의 쓰지 않는 타입이거나, 어려서 타지 생활을 했을 확률이 높다. 순경 신분으로 강과장과 대화 할때도 전부 서울 억양을 쓰며,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정청과 건달 생활을 하며 여수에서 지낼 때에도 사투리는 전혀 쓰지 않는다[48] 유도 국가대표였다는 언급이 나오며, 경찰이라는 직업은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만 가질 수 있다.[49] 화교이기 때문이 아니라 외국 국적이기 때문이다.[50] 농담이 아니라 국가 발전을 위해서 자국민도 가차없이 희생시켰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72747. 사실 우리나라만 이런 게 아니라 일본도 국가 부채를 정부와 기업 고위 관련자들을 제외한 자국민 자산을 몰수해서 갚기도 있다.[51] 그러나 노화교 (老華僑)들은 지방참정권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 실태이다. 한성화교협회의 고문인 국백령 씨는 2018년 인터뷰에서 "지방참정권 부여 이전에 한국의 노화교에게 일본의 재일한국인과 비슷한 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먼저이며 지방참정권은 재일한국인의 지방참정권을 부여하기 위한 정치적인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했다.[52] 사실 당연할 수 밖에 없는게 한국에서 소득세를 내는 사람이 생각보다 적기 때문이다. 화교들은 소규모 자영업이 많은 관계로 소득세 많이 낼 정도의 부자는 별로 없다.[53] [어째 정작 중국인, 조선족러시아인들만 있는 게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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