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1-17 20:58:09

청나라


파일:Qing Dynasty.png ・ 大淸國
다이칭 구룬・대청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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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어 후금 ᠠᠮᠪᠠ ᠠᡳᠰᡳᠨ ᡤᡠᡵᡠᠨ[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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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청나라 국기.pn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40px-Seal_of_Qing_dynasty.svg.png
국기 국새
파일:만주제국도2차수정본.png
사할린은 길림에 속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조공만 받고 통치는 하지 않았다.
1616. 2. 17. ~ 1912. 2. 12. (296년) ,혹은, 1924. 1. 5. (308년)[19]
성립 이전 멸망 이후
후금
남명

북원
준가르
중화민국 중화제국 군벌 국민당
청황실 소조정 공산당
복드 칸국
투바 인민 공화국
티베트
영국령 홍콩
일본령 대만
상징
국호 후금(後金) → 청(淸)
국가 공금구
위치
만주, 연해주, 몽골 고원, 중원, 투바, 중앙아시아 일부 지역, 위구르, 티베트, 타이완 섬, 사할린[20]
역사
누르하치, 겅옌 한으로 추대 1616년
남몽골 정복 1635년
대청국(다이칭 구룬) 선포 1636년
남명 정복 1662년
북몽골 복속 1691년
준가르 정복 1758년
아편전쟁 발발 1840년
태평천국의 난 발발 1851년
의화단 운동 1899년
신해혁명 1911년
황제 퇴위 1912년
황실 해체 1924년
수도
허투 아라(흥경) ,(1583 - 1587, 1603 - 1619),
퍼 아라[21] ,(1587 - 1603),
쟈이판[22],(1619 - 1620),
사르후 ,(1620 - 1621),
랴오양 ,(1621 - 1625),
묵던(성경) ,(1625 - 1644),
버킹(순천부) ,(1644 - 1912),
면적
14,100,000km2
내수면 비율 2.8%
인문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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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3억 100만명 ,(1790년 추산),
3억 8,310만명 ,(1820년 추산),
3억 9591만 8,000명 ,(1898년 추산),
민족 만주족, 한족, 몽골족, 티베트족, 위구르족, 회족, 조선족[23]
공용어 만주어, 한어, 몽골어, 티베트어, 위구르어
공용 문자 만주 문자, 한자, 몽골 문자, 티베트 문자, 아랍 문자
종교 티베트 불교, 대승 불교, 유교, 도교, 백련교, 이슬람교, 만주 샤머니즘[24]}}}}}}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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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1616 – 1908),
입헌군주제 ,(1908 – 1912),[25]
국가원수 황제·천자
(만주식 군호)
카안 (몽골식 군호)
주요 황제
(황제 연호 년도)
초대 천명제 ,(1616 – 1626),[26]
2대 숭덕제 ,(1626 – 1636),
4대 강희제 ,(1661 – 1722),
5대 옹정제 ,(1722 – 1735),
6대 건륭제 ,(1735 – 1796),
12대 선통제 ,(1908 – 1912),
정부수반 내각총리대신[27]
역대 내각총리대신 초대 아이신기오로 이쾅 ,(1911 – 1911),
2대 위안스카이 ,(1911 – 1912),
국성 아이신기오로(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愛新覺羅) }}}}}}
통화 냥 ,(~ 1899),
청 위안 ,(1899 ~ 1912),
현재 국가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몽골, 러시아(투바 공화국)
1. 개요2. 역사
2.1. 건국 이전까지2.2. 건국 이후2.3. 멸망
3. 강역4. 문화5. 상징6. 역대 황제
6.1. 국호가 후금이었던 시기6.2. 국호를 청으로 변경한 이후6.3. 추존 황제6.4. 종합
7. 항렬8. 계보도9. 대외 관계
9.1. 원(元)9.2. 명(明)9.3. 조선9.4. 일본9.5. 그 외
10. 같이보기
10.1. 주요 사건 (시대순)10.2. 인물 (시대순)
11. 둘러보기


1. 개요

중국의 마지막 통일왕조이자 정복왕조, 한대(漢代) 이래 역대 왕조 중 왕통의 중단 없이 가장 오랫동안 존속한 왕조이다.[28]

또한 21세기 기준 최후의 퉁구스계 주권국가로, 퉁구스계 만주족을 중심으로 그 외의 다수의 민족들이 연합한 다민족국가이다. 명목상 청나라의 후신을 칭한 만주국일본 제국괴뢰국이었다.

보통은 청나라라고 부르지만 만주어로 다이칭 구룬. '구룬'은 국(國)이란 뜻의 만주어 독음이다. 한자로는 대청(大清)이다. 19~20세기에는 대외 문서에서 중화대청국(中華大淸國)이나 대청제국(大淸帝國)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 당대 영문으로는 대청(Great Qing) 또는 대청제국(Empire of the Great Qing) 또는 그냥 중국(China)으로 불렸고 현대 중국에서는 청조(淸朝)라고 불리고 있다. 다이칭 구룬과 거의 같은 뜻으로 암바 칭 구룬(Amba Cing Gurun), 암바 다이칭 구룬(Amba Daicing Gurun)으로 부르기도 했다.

다른 중국 왕조들과 달리 국명이 추상 명사이다. (요하), (안출호수), 대원(대재건원), 등의 일부 사례를 제외하면 중국에 자리잡은 역대 국가들은 춘추시대의 각 국명에서 유래한 전통적 지명에서 나라 이름을 따왔기 때문에 매우 이질적이다. 그 이유로는 '불'을 상징하는 명조(明朝)를 제압하겠다는 뜻에서 물 수() 변이 들어간 청()을 채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른 설로는 청나라의 만주어 원음인 다이칭(Daicing)이 몽골어로 전사(戰士)를 의미했기 때문에 원래 국명이 '전사의 나라'를 뜻한다는 말이 있다.

1636년 4월 11일, 후금의 압카이 수러 한이 국호를 개칭하면서 역사에 등장했다. 1644년, 중국 북경에 입관(入關)했으며, 1924년까지 300여 년 동안 大淸이라는 국호는 유지되었다. 1912년에 퇴위했던 선통제가 1917년 장훈복벽으로 복위하여 잠시 부활하기도 했다.

황성(皇姓)은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 만주어 발음이며, 혹자는 아이신교로로 표기하기도 한다. 현대의 표준 중국어로는 '아이신줴뤄'로 발음된다. 한국식 독음으로는 '애신각라'로, 원어인 만주어를 음차한 것이다. 한자를 해석해 '신라를 사랑하고 새긴다'라는 뜻이라는 유사역사학의 주장이 있으나 신빙성은 없다. 여진족 신라인설 문서 참조.

청나라는 마치 유럽의 동군연합 국가처럼 서로 다른 집단들의 집합체였다.
만약 청 제국의 직성 지역에서만 시료를 채취해서 보면 청나라 황제는 한화에 성공한 '중국'의 수명천자(受命天子)처럼 보이지만 직성 이외의 지역에서 시료를 채취해서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이 떠오른다. 몽골 유목민의 초원 세계에서는 대칸의 이미지, 티베트를 중심으로 한 티베트 불교도의 세계에서는 불법(佛法)의 수호자인 전륜성왕이자 '문수보살 황제'라는 이미지, 타림 분지의 위구르 무슬림 세계에서는 이슬람의 보호자라는[29] 이미지를 각각 갖게 된다. 그리고 기인(旗人)의 세계에서는 누르하치의 계승자인 한(汗)으로 표상되었다.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中

중화는 청나라의 구성 요소 중 하나였으나, 19세기 후반 청은 내우외환과 근대화를 겪으면서 사실상 중화제국화 하였다.[30][31]

2. 역사

1588년 누르하치, 여진 통합
1606년 누르하치, 쿤두런 한 즉위
1616년, 누르하치, 겅옌 한 즉위
1618년 국호를 '금'으로 개칭
1619년 사르후 전투 대승, 여진 통일 선포
1621년 요양 천도
1625년 심양 천도
1626년 영원성 전투 패배
1629년 북경 광덕문 전투
1636년 대청 선포 및 칭제건원, 병자호란
1639년 이자성과 장헌충 재봉기
1640년 - 1642년 송산–금주 전투 승리
1644년 입관, 자금성 함락
1645년 양주 공방전, 남경 입성
1646년 이자성, 장헌충의 난 종결
1652년 - 1659년 이정국, 정성공 복명 운동
1654년, 1658년 1,2차 나선정벌
1659년 정성공의 남경 공격, 실패
1662년 남명 멸망
1663년 사천 무산 전투
1660년 - 1799년 문자의 옥
1673년 – 1681년 삼번의 난
1683년 대만 원정, 정씨 왕조 멸망
1684년 해금 철폐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 체결
1711년 지정은제 시행
1716년 강희자전 완성
1724년 양렴은제 시행
1726년 개토귀류 시작
1727년 캬흐타 조약 체결
1732년 군기처 설치
1735년 명사 간행, 공포
1747년 원명원 건설
1755년 - 1758년 준가르 원정
1760년
공행 설치
1777년
흠정몽고원류 간행, 공포
1778년
흠정만주원류고 간행, 공포
1782년
사고전서 완성
1789년
흠정외번몽고회부왕공표전 간행, 공포
1793년
메카트니 사절단, 건륭제 알현
1796년 – 1805년
백련교도의 난
1813년
천리교의 난
1816년
아머스트 사절단, 쫓겨남
1838년 - 1839년
임칙서, 광저우에서 아편 단속
1840년 - 1842년
제1차 아편전쟁, 난징 조약
1844년
황포 조약(프), 망하 조약(미) 체결
1851년 - 1864년
태평천국 운동
1853년 - 1868년
염군의 반란
1856년 – 1860년
에로호 사건, 제2차 아편전쟁
1858년
아이훈 조약, 톈진 조약 체결
1860년
영불 연합군의 북경 점령, 베이징 조약 체결
1862년 - 1895년
양무운동 전개
1863년
상해 공공조계 설정
1864년 - 1877년 야쿱 벡, 위구르 점령

1871년 러시아, 이리 계곡 점령
1874년 일본, 대만 출병
1881년 이리 조약 체결
1884년 영국, 티베트 침략
1884년 - 1885년 청불전쟁
1894년 - 1895년 청일전쟁
1897년 독일, 칭다오 점령 1899년 조차 (~ 1919년)
1898년 변법자강운동 전개, 무술 정변
1899년 - 1901년 의화단 운동
1901년 신축조약 체결, 신정 지시
1911년 우창 봉기, 신해혁명
1912년 청 멸망, 중화민국 수립

2.1. 건국 이전까지

15세기를 전후해 명나라의 영락제는 요동도사를 설치한 뒤 여진족의 각 부족들을 회유하여 부족명에 위소의 명칭을 갖다붙히고, 흑룡강압록강 그리고 두만강 지역으로 팽창을 시도하였지만, 선덕제 치세에 누르간도사가 유명무실해지는 등 명의 팽창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 무렵을 전후하여 명 조정은 여진을 건주삼위 일대의 건주여진과 해서위(海西衛) 일대의 해서여진 그리고 그 동부의 여진족들을 야인으로 여진족을 구분했다.

이후 오이라트와 몽골 세력 그리고 여진 부족들이 요동의 안정을 위협하자, 명나라는 장성지대와 마찬가지로 산해관-개원-봉황성을 연결하여 요동도사를 방어하는 요동변장의 축조를 시작했고, 그리하여 완성된 요동변장은 요동도사에 위협이 되었던 몽골과 여진을 방어하는 방어선이자 명나라의 내지와 외지를 구분하는 국경으로 설정되었다.

요동변장 동쪽의 혼하 유역과 그 부근에는 건주삼위가 있었는데, 이들은 16세기 중반부터 명의 요동 변경을 약탈하는 동시에 동북쪽으로는 해서여진의 여러 부족과 각축전을 벌이며 팽창을 시도했다. 16세기 후반부터 차하르 몽골의 투먼 자삭투 칸의 간접적인 지배를 받던 건주여진의 세력가 왕고(王杲) 및 왕올당(王兀堂) 등에 의해 여진의 요동 공격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한편 왕고의 통치를 받은 소자하 유역의 숙수후부(Suksuhu Aiman)의 허투 아라(Hetu Ala)에서 출생한 누르하치는 조부와 부친의 사망을 기회로 계모 컨저(Kenje)를 죽이고 허투 아라의 주인이 돼 누르하치의 조부 교창아(Giocangga)의 여섯 형제의 가족들인 닝구타 일족을 통합하는 등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고, 누르하치는 1586~89년 왕야부(완안부)와 후너허부(혼하부)를 최종적으로 통합하여 건주여진을 모두 합병했다. 그는 세력을 더욱 팽창하여 1606년에는 내칼카의 바야우드 오톡의 엉거더르 타이지에게 '쿤더런 칸'(쿤두런 한)이라는 존호를 받았으며, 1616년 2월에는 '겅옌 한'의 칭호를 취했다.

이후 그는 금나라의 계승 의지를 표명하기 하여 자신의 나라 또한 아이신 구룬(Aisin Gurun)으로 칭하고, 자신의 씨족명인 '교로'에 '아이신'을 덧붙여 아이신 교로(Aisin Gioro)라는 가족도 조직했다. 그는 사르후 전투에서 승전하여 요동 지역을 석권하고 동시에 해서여진의 예허부를 최종적으로 통합하는 등 지속적으로 팽창했지만 영원성 전투에서 원숭환이 통솔하는 명군에게 대패하고 몇달 뒤 병사하고 말았다.

누르하치 사후 네 버이러 중 네번째 버이러(Duici Beile)였던 8남 홍 타이지는 2남 다이샨의 지지를 통해 한의 지위를 계승한 뒤, 동북쪽으로는 다구르어웡키, 서북쪽으로는 차하르 몽골, 서쪽으로는 명나라의 요서 지역으로 팽창하면서 후금의 세력을 더욱 키워나갔고, 1635년에 주션(Jušen: 여진)이란 족명을 금지하고 만주로 고쳤다.

그는 청해에서 릭단 칸이 병사하여 와해되어 버린 차하르 몽골을 복속했는데 릭단 칸의 아들인 어저이 콩고르는 부마로 삼았다. 그 과정에서 획득한 대원 전국옥새와 조선 정복 그리고 몽골 통합을 구실로[32] 1636년 4월 11일,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 Gosin Onco Hūwaliyasun Enduringge Han) 대원을 계승한 다이칭 구룬(Daicing Gurun, 大淸)을 선포했다.

홍타이지는 칭제건원식에서 자신이 선포한 대청질서에 조선 사신들이 응하지 않자, 조선 정복을 추진하였는데, 조선 인조를 위시한 서인의 향명배금 정책[33]과 팔도에 하달한 선전교서를 빌미로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1637년 2월 10일을 전후로 홍 타이지의 군영 인근에서 천연두 환자가 발생하는 탓에 조선 정복 계획은 사실상 무산됐지만, 결과적으로 삼전도에서 미완의 즉위식을 완성하여 자신의 권위를 확립했다.

청 제국은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승리한 뒤 여세를 몰아 1621년에 요동을, 1636년에 막남의 칼카 5부와 차하르 등에 대한 지배체제를 확립하고 1642년에 송산 전투에서 승리하여 만리장성 동북 지역을 석권했다. 1629년부터 1643년까지는 여섯 차례 화북을 공격하여 무인지경으로 약탈함으로써 기근과 대규모 반란으로 마비된 행정력에 더욱 악화시켰으며 그 과정에서 북경을 포위하기도 했다.[34]

청나라는 명나라에게 큰 타격을 주었지만, 결코 명나라를 멸망시킬 수준의 국력은 아니었다. "군사력 = 국력"이 아니라는 말이다. 청나라는 기병 중심의 군대이기 때문에 당연히 회전에서는 보병 중심의, 그것도 쇠퇴한 명군을 압도한다. 하지만 반대로 공성전에서는 기병의 효력이 나오기 어려우며, 명나라와 달리 화기를 다수 보유한 것도 아니었기에 영원성 전투에서 패배한 것이다. 결국 명나라가 망할 때까지도 산해관을 격파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명나라는 비록 쇠퇴하고 있었지만 인구에서 여전히 압도적이었으며 오래전부터 서양과의 접촉 덕분에 홍이포와 같은 신형 화기를 다수 보유하고 있었던 반면, 신흥 국가인 청나라는 명나라에 비해 국가의 역량이 모자랐다.

그러나 명나라의 대기근 그리고 자연 재해 등으로 반란이 횡행하는 상황에서 청군이 약탈전까지 벌여 명나라가 큰 타격을 받고 있던 상태에서 청나라는 부패한 명 관료들을 최대한 끌어들여 최신 화기와 신식 훈련을 받은 정예 부대를 포함해 상당한 숫자의 명군을 운좋게 얻었다. 명군의 서광계와 손원화 등은 화기를 발사할 때 필요한 거리 측량과 각도 정위에 관한 학문을 서구에서 배우고 있었고 총규, 총척 및 구도의의 사용 및 탄약 장전 기술을 개선한 훈련을 받은 명군의 정예였다. 또한 이자성군이 북경을 점령하고 명나라를 멸망시킨 뒤 산해관을 방비하던 오삼계 및 그 휘하의 명군은 만리장성을 우회하여 북경을 점령하려던 청군에 합류하여 산해관을 열어주었다.

한편 당시 명나라에서는 성능이 개선된 신형 화기가 개발되고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철심동체 주조법과 니형 주조법, 실랍법을 이용해 무게와 비용을 줄이고 내구도가 향상되어 더 많이 쏠 수 있게 된 정료 대장군으로 철심동체 주조법의 원리는 남북 전쟁 때 미군보다도 200년 빠른 것이었다.

하지만 명군과 후금군의 전투를 생각해보면 상당수가 총병일 명군을 상대로 하는 후금군은 최대 사정거리에서 깔짝깔짝 거리다가 기회가 생기면 기동력을 이용해서 측면 공격하거나 여차하면 돌격 후 근접전을 벌였을 테니, 내구력을 늘린 신형 화기라는 건 크게 의미가 없다. 명군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되려면 후장식 소총처럼 연사력이 크게 증가하거나 아니면 대기병 전투에 유리한 대형 총검 같은 것들이 발명되었어야 했다.

더구나 이자성 등이 명나라를 개판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저런 신형 무기가 명군에 보급되어 전투력이 조금이라도 상승하기 전에 청나라는 명나라를 무너뜨리는 것에 성공했다. 청의 북경 점령 과정을 보면 천운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정도다. 실제로 '하늘의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 같은 말들이 많이 있고 당시 상황도 그래서 로또로 성공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때를 기다리며 참고 또 참은 것도 능력은 능력이다.#

게다가 명나라는 암군들의[35] 위기를 맞이한 상황에서도 장거정 등의 무지막지한 제도 개혁과 부유함, 압도적인 인구로 잘 막아내고 있었다. 명나라의 사정이 얼마나 안 좋았냐면, 환경 변화와 각종 재해로 쌀값이 7배나 오르는 현상이 무려 7년이나 계속되었고 우수하지 못한 황제들로[36] 인하여 재정이 파탄나고 실업자와 반란이 속출하는 상황이었다. 수치적으로도 명나라의 국력이 순식간에 반토막 나고 추락하는 걸 보면 아찔할 정도다. 이떄 명나라는 식량난이 너무 심해서 나무 껍질을 벗겨 먹고 풀을 먹고 심지어 썩은 송장을 먹었던 사람들까지 있었다고 한다.

건국 시조에 대한 신화도 있다. 만주 시조 신화 참조.

2.2. 건국 이후

위에서도 말했듯, 명나라를 멸망시킨 건 운이 꽤 좋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천명제 누르하치에 이어서 숭덕제, 산해관을 넘어서부터 본격적으로 순치제(順治帝), 강희제(康熙帝), 옹정제(雍正帝), 건륭제(乾隆帝) 등 유능한 황제들이 몇 명씩이나 연달아, 그것도 엄청나게 오랫동안 통치를 하여 동아시아는 물론 주변 아시아 세계 전체에 강력한 영향력을 과시했다. 건륭제는 중국의 많은 황제들 중 가장 장수(89세)했고, 가장 오래 황제 자리에 있었던(현직 60년 + 태상황 4년) 사람이다. 현직 황제로서 가장 오래 앉아있던 이는 강희제(61년)였다.

동방으로 계속적으로 침략해오던 러시아군과 강온 정책을 번갈아 구사하며 끝내 국경선을 확정했고, 서방과의 접촉도 점점 더 활발해졌다. 중국이 티베트위구르, 내몽골, 만주와 현재 러시아로 넘어간 투바, 연해주를 확실하게 지배에 넣은 것도 이 때였다. 내몽골은 연합 왕국의 측면도 있다. 황후들은 원칙적으로 순치제 때까지 내몽골의 몽골 부족에서 선발되었다. 또 황제가 몽골의 대칸을 겸했다.일종의 몽골족 포섭구. 티베트달라이 라마는 황제의 스승으로 모셔졌기 때문에 티베트는 단순한 번국이라기엔 굉장히 격이 높았다. 외몽골, 티베트, 신강은 준가르를 멸망 시켜서 차지했다.

전성기의 청은 지금의 중국보다도 더욱 넓은 영토를 자랑했다. 청말 민초 이래 캐발살내어 지금 중국이 다시금 확보하고 있는 내몽골, 티베트위구르만이 아니라 연해주 즉 외만주와 외몽골 전체, 더불어 대만까지 전부 청의 영토였다. 중국 역사상 이보다 영토가 넓었던 경우는 몽골 제국뿐인데 이쪽은 지도상의 크기는 넘사벽이지만 여러 칸국으로 갈라진 것도 있고, 통치가 비교적 느슨하기도 해서 몽골 제국 중 중국을 다스린 원나라로만 한정한다면 청나라가 더 크고 실효 지배력 또한 청나라가 우세했다.

이렇게 영토가 넓었던 만큼 단순한 한만국가이라기엔 보다 다양한 속성을 가진 나라였다. 그래서 지역 및 민족마다 청 군주의 이미지가 다양했는데 만주에선 금나라를 계승한 한으로, 북방의 몽골에선 원나라를 계승한 칸으로, 중원과 남방에선 명나라를 계승한 천자로, 티베트에선 불법을 수호하는 전륜성왕으로, 위구르에선 이슬람의 수호자로 여겨졌다. 이러한 이미지 때문에 "키메라의 국가"이라고도 한다. 아시아 동군연합의 끝판왕이다.

그러나 문명을 볼 때 학문을 중시하는 입장에서는 문자의 옥과 화기의 연구 제조 금지 등으로 비난을 받는 편이다. 청이 유럽 문물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기 전, 자체적인 병서나 화기 수준을 보면 크게 보아 명나라 시절과 다를 바가 없었다. 심지어 가경 4년에 명나라 화포를 개조하니 성능이 더 떨어지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해전에서도 명나라는 청나라만큼 어이없게 패배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 예가 랴오뤄 만 해전/요라만 해전(料羅灣海戰). 명나라가 몇몇 문명권과 다르게 유럽 세력과의 해전에서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었던 것도 르네상스가 진행되면서 다른 문명들을 압도적인 속도로 능가하기 시작하고 있던 유럽 문물을 따라가고 있어서 그럴 수 있었다는 점에서 청나라 지배층들이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유클리드의 기하학의 기하학 원본 전 6권을 간행되어 중국 학자들의 관심을 받았던 게 명나라 때의 일이고 군사학, 농업, 천문학 등에서의 서적이나 훈련 방법 등에서 유럽 문물이 의외로 이미 인정을 받고 있었다. 망조가 들어서 어이없게 날아가기는 했지만 명나라는 유럽식 훈련으로 수학과 과학이 동원된 사격술 등을 익힌 군대가 더 우수하다고 생각하고 정예병으로 육성하고 있었다.

물론 명나라와 싸웠던 당시 네덜란드는 전근대 시절이었고, 독립하려고 온 힘을 유럽에 쏟던 30년 전쟁 와중이었다는 점에서 청이 만난 영국과는 차원이 달랐다. 영국은 근대 국가였었고, 온 힘을 쏟는데도 없었던 국가였다. 시대를 뛰어넘는 적이 아닌 네덜란드와 완전히 다른 시대를 사는 것이나 다름없던 영국과의 비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청나라 때는 문자의 옥 때나 황제들이 자기들이 말을 타고 중국을 정복했다고 한족 지배층들이 하던 것들을 대단하게 여기지 않던 면이 있어서 중국 학계가 상대적으로 망해가고 있었다. 후에도 만주족 지배층들은 서구화 능력도 그렇고 의지도 별로 없었으며 청나라 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전했던 것들도 물론 있었지만 퇴보했던 것들도 있었다.

당시 만주인들을 봐도 문명을 이끄는 데 아무래도 유목민의 기풍과 문화가 있어서 학문에 불리하게 작용한 면이 있다. 환빠의 영향이 강할 때 나온 서적의 영향인지 희한하게도 만주족 황제나 지배층에 대해서 사서에도 쓰여진 단점을 지적하지 않고 장점만 거론되는 경향이 있는데, 만주족 황제나 지배층들도 딱히 초인적 존재는 아니라 명백히 단점도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인구 증감 같은 양적인 것들을 단순하게 비교할 때도 시간 정도는 고려를 해야 한다.

사실 세계의 유목민 왕조들은 관점에 따라 평가가 다른 경우들이 매우 많다. 일단 정주 국가들의 경우 지배층들이 문명을 주도하며 여러 가지 것들을 내놓는 경우가 많았다. 과거에는 지배층들이 보통 지금의 지식인 계층과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에 문명 발달에도 생각보다 영향력이 엄청났고 수학처럼 문명을 발달시키는 것에 기여한 학자들을 찾아보면 지배층 출신들이 많다. 심지어 가난한(?) 것처럼 묘사되는 그리스 학자들도 자세히 알아보면 노예가 있었기 때문에 본인은 딱히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불로소득 계층이 많았다.

반대로 유목민들은 정작 지배층인 유목민들이 직접 문물 발달에 기여하는 게 적은 편이었다. 물론 공부를 하기 시작한 유목민들도 있었고 그러다 정주민이 되기도 했다. 보통 여러 지역들을 정복하여 교류를 확산시켜 기여를 했다거나 하는 간접적인 식이고 유목민들이 직접 과학 기술 혹은 수학과 관련된 서적을 쓰거나 하는 일들은 적었다. 단, 그런 것들을 이용하는 건 생각보다 잘한 유목민들도 많았다.

아무래도 지배층들이 문명에 직접 기여하는 것들이 적으면서 밑에 피지배층들을 착취해서 그 열매를 가져가니 피지배 민족들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잠재력을 깎아먹었다느니 하는 말들이 많이 나온다. 러시아처럼 자기들을 정복한 유목민들을 보고 고혈을 빨아먹는 거대한 기생충이니 어쩌고 하며 평가가 매우 부정적인 곳들도 있다.

다중 수도 체제가 있어서 한인 신민의 천자가 머무는 중국 본토의 베이징, 만주인 - 몽골인의 칸의 거처인 만주의 묵던(지금의 선양), 티베트 불교 신도들이 숭배하는 문수보살이 강림한 내몽골의 청더(承德)까지 총 3개의 수도를 운용했다. 1762년 건륭제가 1년 중 자금성(紫禁城)에서 머문 시간은 1/3에 불과했다.

한편 대외 관계에서 주목할 만한 점으로, 청이 러시아 제국과 맺은 네르친스크 조약에는 한자로 쓰인 문건이 전혀 없고, 오직 만주어와 러시아어만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관련기사 청조(淸朝)가 네르친스크 - 캬흐타 조약의 기록에 만주어를 원본으로 삼은 것에 대해 국내 학자가 네르친스크 - 캬흐타 조약의 내용을 분석해 가설을 제시한 책이 있다.

이에 따르면 네르친스크 - 캬흐타 조약(이하 청 - 러 조약)은 청과 러시아가 서로 대등한 위치를 가지고 조약을 맺은 것인데, 많은 이들이 아편 전쟁 후의 '불평등 조약 체제'에 집중하기 때문에 '평등 조약'인 것에 주목하지 청 - 러 조약이 왜 만주어로 기록되었는지는 주목하지 않는다. 사실 청 - 러 조약의 기록을 만주어로 남긴 이유는 청 - 러 조약이 평등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중국적 화이(華夷)개념에 따르면 '오랑캐'인 러시아와 맺은 조약은 '불평등 조약'이어야 한다. 천자의 나라인 중국이 상위, 러시아가 하위인 조약이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준가르 몽골 문제의 해결에 쫓기던 청나라는 러시아에 불평등 조약을 강요할 수 없었다. 이는 러시아도 마찬가지로 당시 러시아 차르이던 표트르 1세와 이복 누나 소피야 간의 대립으로 내부가 시끄러웠기 때문에 군사적으론 유리했으나 청에게 이전에 획득한 영토를 내주는 등 불리한 내용으로 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청 - 러 조약은 평등 조약이 되었다. 이는 중국의 마지막 통일 왕조가 한족 왕조였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듯 싶다. 이자성의 순나라가 제대로 성공하여 약 300년 가까이 이어진다든가, 삼번의 난이 성공한다든가, 아예 명나라이자성의 난을 진압하여 멸망하지 않고 그대로 19세기까지 이어지는 등을 가정해도 말이다.

결과적으로 평등 조약이라는 것은 한족의 천하관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조약이 된다. 이 때문에 청 - 러 조약의 기록은 중국어, 즉 조약문에는 만주어로만 기록되었으며, 동국강은 한족 관료의 참여를 요청했지만 강희제는 조약의 체결 자체에 한족 관료를 참여하지 못하게 했다. 한족 중심의 천하관이 개입할 때 문제를 일으킬것이라는 경계심이 작용했을 것이다. 또 입관 후 45년밖에 안된 탓도 있고 지리상으로 북방 문제에 대해 상대적으로 남쪽에있었던 한족이 개입할 여지가 적었다. 네르친스크 조약에 참여했던 통궈강의 경우도 본래 한족 출신이지만 팔기에 편입되어 있었고 1688년 만주족으로 변경을 하게 된다.[37]

후대의 청나라에 비해 군사력이 한참 취약했기 때문에 단순한 비교는 곤란하지만 당장 한족 왕조인 북송요나라, 서하와의 군사적 충돌 문제 탓에 다른 한족 왕조들에 비해서, 심지어 만주족의 청나라보다도 상대적으로 적극적인 중화 사상을 추구하지 못했다. 상국으로 인정받긴 했지만 명목상 북송의 제후국이었던 고려 또한 여요전쟁을 겪은 후부터는 명목상 북송과 요나라에 이중으로 사대하게 되었다. 만약 중국의 마지막 통일 왕조가 한족 왕조였다면 러시아와의 군사적 충돌을 끝내고 평화 협정을 맺을 때 대외적으로는 평등 조약을 체결하고 대내적으로는 중화 사상에 입각한 불평등 조약이라고 일종의 언론 플레이를 하지 않았을까 싶다.

일단 만주족이 주체가 되어 이루어진 나라이며, 초기에 들어왔을 땐 격렬한 저항을 받았기 때문에 특히 강남 쪽에서는 사람이 나날이 잔뜩 죽어 나갔다. 지금의 양저우(揚州)나 쑤저우(蘇州) 등이 있는 지방에서는 수십만 단위로 대학살이 저질러졌다고 한다. 흠좀무. 특히 만주족이 강요한 변발은 흔히 중국 무협 영화에 나오는 뒷머리만 남기고 앞머리만 미는 그런 변발이 아니다. 뒤통수에 동전 크기 만한 부분만 제외하고 모조리 밀어버리는 변발이다. 일명 금전서미. 이 변발은 19세기 말 조선의 단발령과는 비교도 못 할 정도로 한족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변발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이민족계 왕조들이 한족 주민들에게 변발을 강요한 경우는 수도 없이 많았으나 만주족이 강요한 금전서미는 다른 이민족계 왕조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압적이라서 한족들에게는 큰 수치였고 컬쳐 쇼크 그 자체였다.[38]

그리고 청나라는 변발을 거부하는 한족의 저항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면서 수많은 한인들이 학살당하여 강남은 말 그대로 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특히 양저우 대학살은 양주십일 이라고 하여 김용무협소설 녹정기에서도 나온다. 링크의 3 항목을 읽으면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다. 각지에서 어마어마한 인구가 학살당해서 명청 교체기 대학살이라 부르기도 한다. 물론 중국 인구사와 청나라 시기 인구를 생각하면 5,000만이라는 수치는 매우 과장이 되어 있다. 근거도 빈약하며 주장하는 사람들도 신뢰성에 의심이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리적으로 솔직히 만주족이 터미네이터도 아니고 대량살상무기를 사용한 시대를 능가하는 학살 속도에 한족의 인구의 증감을 봐도 가능성이 별로 없다. 인구 조사 결과가 적은 것은 건륭제 시기까지 이어지는 대규모 반란과 그로 인한 만주족 행정력의 한계 때문이라고 보면 된다.

실제 중국 역사서에선 전란에 휩싸이고 나라가 어지러운 난세가 펼쳐지면 기록되는 호구 수가 격감했다가 상황이 안정되면 상식을 뛰어넘는 속도로 인구가 회복되는데, 이건 그만큼 사람이 많이 죽고 태어났다기보다 호구 조사 시 실제 호구수에서 누락되는 인구 수가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과장을 감안하더라도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대학살이 벌어진 건 확실하다. 중요한 건 직접적인 학살을 저지른 이들은 청 제국에 투항한 한족으로 이루어진 명나라의 패잔병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 학살을 주도한 건 청나라의 지배민족인 만주족이었고 중원 입관 이전에는 만주족도 한족과 조선인들에게 직접 학살을 저질렀기 때문에, 신해혁명으로 인한 만주족의 몰락을 억울한 몰락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이 모든 저항을 짓밟은 이후 간신히 굴복한 한족에게 융화 정책을 펴 한족에 대한 차별을 계속해서 없애나가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데 주력하였으며, 그 뒤에도 저항이 있긴 했는데 훌륭한 황제들이 나와 당근과 채찍으로 차례차례 강온 양면술을 써가며 통치해나갔다. 다만 황비홍 머리로 불리는 이 변발만은 철저히 지키게 했고 청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이는 한족을 통치하기 위해 그들의 습관을 인정해줄 필요는 있지만 거기에 묻혀서 자신들의 존재가 사라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신민들이 송나라의 의복과 제도를 사용하는 것을 막지 못했던 금나라가 말기에 접어들면서 남송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정체성을 상실했던 것을 보도록 하자. 비록 언어나 문화 면에서는 한화를 면치 못했으나 만주족으로서의 정체성과 종족은 청 말기에도 명확하게 구분되었을 정도로 잘 보존되었다.

특히 청나라가 한족문화를 받아들이긴 했어도 어디까지나 통치에 필요하기 때문이지, 만한차별정책이 폐지된 것은 아니었다. 입관 후 하급 행정구역인 부나 현의 수장은 한족에 비해 지나치게 적은 인구 때문에 한족들에게 맡겼으나 상위 행정구역을 관할하는 총독과 순무만은 대부분이 만주족이나 몽골족이었으며, 어쩌다 임명되는 한족 총독과 순무도 한군팔기 소속이었다.

참고로 총독은 2개 이상의 성을 관할하는 직책으로 명나라 때는 비상설직이었으나 명 말기부터 상설화되었다. 한편 순무는 1개 성을 관할하는 직책으로 총독과 마찬가지로 명 초기에 비상설직으로 설치되어 말기부터 상설화되었다.

중앙정부의 경우는 아예 초창기에는 만주족, 몽골족, 한족 출신으로 팔기제도에 편입된 사람들인 한군기인만이 관리로 임명되었으며, 같은 수의 만주족과 한족 대신들을 임명하는 제도인 만한병용제가 시행된 뒤에는 내각대학사, 6부상서, 6부시랑, 군기대신 등의 직책에 같은 수의 몽골족, 한군기인 포함한 만주족과 한족을 따로 임명하였다.

물론 처음 한족 대신을 임명했을때 같은 직책이라 하더라도 만주족이 한족보다 품계가 더 높았다가 나중에 동급으로 조정되지만, 만한차별은 청이 멸망할 때까지 사라지지가 않았다. 애초에 인구비율을 보면 만한병용제부터가 한족에 대한 차별이었다. 거기다 청나라 황제들은 한족들 앞에서는 만주족과 한족은 모두 짐의 자식이라고 립서비스를 하면서 만주족들만 있을 때는 한족들을 깎아내리기도 했다(...)

또한 황후는 만주족이나 몽골족이어야 했으며, 공주들도 한족에게 시집보내지 않은데다 한족 후궁의 자식들은 황위계승에서 배제되었다. 대표적으로 건륭제가 있다. 이 경우는 옹정제의 살아있는 아들들 중 건륭제가 유일한 만주족 후궁 소생이었다. 아예 그런 건 아닌데 각각 동가씨(퉁갸씨)와 위가씨(워이갸씨) 출신의 강희제와 가경제는 황제가 되었다. 물론 동가씨와 위가씨는 한군기인이지만 모두 기적이 만주로 옮겨져서 그들은 한인이 아닌 만주인이었다.

거기다 한족은 군대와 관련된 무관으로 임용될 수 없었다. 무관직책이 한족에게 개방된 때는 태평천국 운동 때에 가서였는데 당시 팔기군의 군사력이 엄청나게 퇴보했기에 어쩔 수 없이 그러한 선택을 한 것이었으며, 이때도 만주족 대신들의 반발이 심했다. 청조 말기 한족(漢族)들에 의해 사용된 청을 멸하고 한족을 부흥시킴을 의미하는 멸청흥한(滅淸興漢)이니 청을 돕고 서양인을 멸함을 의미하는 부청멸양(扶淸滅洋)이니 하는 구호와 쑨원의 삼민주의의 민족의 뜻이 만주족의 청조를 타도하고 한족의 국가를 회복한다는 것만 봐도 한족과 만주족은 청 말기까지 엄격히 구별되었고 만주족에 대한 한족의 적개심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2.3.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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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강에게 분할당하는 청,[39] 르 프티 주르날, 1898년

청은 문자의 옥과 화기의 연구 제조 금지 등으로 발전이 거의 없었다. 유럽 문명은 계속 발전을 하고 있는데 청은 유럽 문물을 수입하기 전에 보유한 자체적인 병서나 화기 수준을 보면 명나라 시절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40] 그리고 기이할 정도의 승마궁술에 대한 집착 혹은 자체적인 화기 연구 금지[41] 등으로 내부 역량을 떨어뜨렸다.[42] 주요 무력 기반이었던 팔기군 역시 금나라의 맹안모극이 쇠퇴하던 테크트리[43]를 따라서 그대로 쇠퇴한 지 오래였다. 게다가 그 문제는 무려 전성기라는 강희제 때부터 시작된 현상이었다.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은 백련교도의 난, 태평천국 운동으로 군사력이 쇠퇴했음이 드러남과 함께 아편전쟁의화단 운동으로 서구 열강에게 쥐어터질 만큼 터지고, 빼앗길 만큼 뺏기고, 심지어, 무시하던 일본에게까지 처절하게 관광을 타는 굴욕을 당하는 등의 외세의 침략이 원인이었다. 결국 말기의 청나라는 거의 반쯤 식민지로 전락했다. 그 무렵 지방에선 군벌들이 따로 세력을 키우고 국민들 사이에서는 신사조가 널리 퍼져서 더이상 과거처럼 통치를 할 수 없게 변하기도 했다.

청나라의 끝없는 굴욕으로 청 황실의 명성은 땅바닥에 떨어졌고, 원래부터 지배층 만주족과 피지배층 한족으로 분리된 민족 구성이었기 때문에 한족 지식인들은 민족주의 사상에 따라서 '청나라' 자체마저도 일종의 '외래 민족 침략 세력'으로 보고 만주족의 청 왕조로부터 한족 민중의 독립을 추구한다는 이론을 전개하였으며 이것이 폭넓게 받아들여졌다.

1911년에 신해혁명으로 산하의 지방 정부들이 반란을 일으켜 독립을 선언하며 지방의 군 부대들도 청 조정의 명령을 거부하고 혁명군에 가담하자 청 왕조는 지방 통제권을 잃고 전국이 한시에 공중 분해되면서 파멸을 선고받았다. 1912년 이를 진압하라고 보낸 총사령관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총구를 돌려 청 왕조를 폐지시켜 버림으로써 1912년 멸망하고 말았다. 그렇게 청나라는 한족의 투항으로 흥했다가 한족의 투항으로 망했다.

마지막 황제인 부의(溥儀)는 청조 멸망 이후에도 중화민국 정부와 체결한 "청실 우대 조건"에 따라 자금성에 잔류하였는데(청나라 소조정),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황실 우대 조건
    1. 대청 황제는 물러난 이후, 「존호는 계속 유지되며, 폐지되지 아니한다」. 중화민국은 대청 황제를 "외국 군주를 대하는 예"로 우대한다.
    2. 대청 황제는 물러난 이후, 세금 사백만 냥을 사용하며, 이후 신 화폐가 주조되면 사백만 원이 중화민국에 의해 지급된다.
    3. 대청 황제는 물러난 이후, 자금성에 잠정적으로 계속 거주하며, 이후 이화원으로 옮기게 된다. 시위(侍衛)하는 사람 등은 계속 쓸 수 있다
    4. 대청 황제는 물러난 이후, 그 종묘와 능침에 대해 영구히 제사를 받들며, 중화민국은 적절히 호위하는 병사를 두어 그것을 신중히 보호한다.
    5. 덕종(광서제)의 능이 아직 완성이 안 되었으므로, 제도에 맞게 수리하며 옛 예법에 맞게 한다. 그 경비는 중화민국이 지출한다.
    6. 궁중에서 고용하는 집사 인원은 계속 유지되나, 이후에는 환관은 더 고용할 수 없다.
    7. 대청 황제는 물러난 이후, 지금 가지고 있는 자산은 중화민국이 특별 보호한다.
    8. 현재 보유한 금위군은 중화민국 육군부에 편제되며, 그 수 및 녹봉은 예전과 같이 한다.

  • 청 황족 대우 조건
    1. 청나라 왕공 작위는 예전과 같이 유지된다.
    2. 청 황족은 중화민국 국가의 공권과 사권에 대해서는 보통 국민과 같다.
    3. 청 황족의 사유 재산 일체는 보호된다.
    4. 청 황족은 병역의 의무가 면제된다.

  • 각족 대우 조건은 생략

이 조건으로 푸이는 자금성 안에서는 청 황제로서 행세할 수 있었고, 자금성 내에서는 계속 선통 연호가(음력과 함께) 쓰였다. 이후 청나라 황족들과 복벽파들이 복벽운동을 전개하였지만 자기 자신이 황제가 되고 싶었던 위안스카이는 오히려 1914년 11월 23일 복병 정치 징치령을 발표해 복벽파들을 탄압했다. 그리고 1915년 12월 12일 홍헌제제를 단행함으로 자기 자신이 황제가 되어버렸다(...). 이후 이에 반발하는 호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위안스카이는 3월 23일 제제를 취소하고 6월 6일 사망했으며 전국 각지가 군벌들이 할거하는 개판으로 떨어진 와중에 복벽파 장쉰이 쿠데타를 일으켜 장훈복벽을 단행함으로 1917년 7월 10여일 동안 청이 부활하기도 했으나 돤치루이가 이를 진압하면서 복벽 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북양 군벌 정부에 실질적으로 귀속되었다.

특히 북양 군벌 정부는 청실 우대 조건을 지키는 데 별 관심이 없었고, 군주제를 혐오하던 군벌 펑위샹2차 직봉전쟁 와중에 1924년 11월 5일 핍궁사건을 일으키면서 푸이가 자금성에서 쫓겨나게 되었으며 1924년 11월 5일에 청실 우대 조건이 수정되면서 사실상 청 황제 존호는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푸이는 천진에 도착한 이후부터 일본의 보호를 받게 된다.

1931년 11월에 장제스는 푸이가 톈진에 남는다면 청실 우대 조건을 회복시켜주겠다는 제안을 하지만, 도이하라 겐지가 획책한 천진 사변을 비롯한 수차례의 암살 협박을 받아왔기 때문에 푸이는 거절한다. 게다가 북벌군이 1928년 북평을 점령한 다음에 장쭝창의 부하인 쑨뎬잉이 국민혁명군에 투항하면서 벌인 동릉 도굴 사건이 처벌당하긴커녕 오히려 방조되었고 서태후의 능묘에서 나온 야명주쑹메이링의 신발을 장식하는 데 쓰였단 소문에 푸이는 남경 정부에 완전히 학을 뗐다.

결국 그 달 10일에 푸이는 만주로 가게 되고, 이듬해(1932년) 일본이 세운 괴뢰 정권 만주국의 황제가 되기에 이른다. 일본은 만주국이 청의 후신이라고 선전했지만, 현실은 일제의 괴뢰국이었다.

3. 강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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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청의 강역. 청은 전성기에 파키스탄카슈미르, 카자흐스탄 잠발리주와 알마티주, 러시아 연해주하바롭스크 그리고 아무르 주 등을 지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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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청의 강역. 여러 조약을 통해 일부 영토를 잃었으며, 투바외몽골을 제외하면 나머지 지역인 신장성티베트, 내몽골, 칭하이 성은 현 중국의 영토이다.

4. 문화

이 시대의 문학 작품 중에는 홍루몽이라는 소설이 크게 유명하다. 중국 본토에서는 삼국지보다 더 유명하다고 한다.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연구자가 많은 소설이라고 한다. 홍루몽 외에도 요재지이, 유림외사도 중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청나라 문학 작품이다.

오늘날 베이징에 남아 있는 왕조 시대의 대규모 건축물 중 많은 것들이 청나라 시대에 만들어졌는데 이화원이 대표적이다.

청 황가의 성인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의 한국식 한자 발음이 애신각라이고, 스스로 조상을 신라로 꼽았기 때문에 신라 왕조와 연관지어 만주족도 원래는 신라인과 같은 뿌리가 아니냐는 물음도 있으나, 애신각라는 만주어 아이신기오로를 한자를 빌려서 가차한 것일 뿐이어서 신라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여기에는 만주족의 성씨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만주족 성씨의 방식은 다른 민족들이랑 조금 다르다. 할라(哈拉, hala)와 무쿤(穆昆, mukun)이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하는데, 할라는 씨족(氏族) 혹은 큰 범위의 성씨를 의미하고 무쿤은 씨족 내의 씨(氏) 혹은 작은 범위의 성씨를 의미한다. 즉, 할라라는 씨족 내에 무쿤이라는 씨가 있다는 것이다. 썩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우리식의 성씨본관을 떠올리면 쉽다.[44][45] 만약 고대 로마에 관심이 있었다면 로마인의 이름을 생각하면 상당히 정확하게 이해할 수도 있다. 즉 로마인 이름에서 세 번째 이름과 두 번째 이름의 관계와 같다.[46] 황성인 아이신기오로를 예로 들어보면 기오로(覺羅)라는 씨족 내의 아이신(愛新)씨라는 의미이다.[47] 아이신은 만주어로 금(金, 쇠가 아니다.)라는 뜻인데, 만주족 전신인 여진족이 세운 옛 나라의 국호가 (金)인 것을 생각하자. 청 왕조가 존속하던 기간 중에 기오로를 사성 받았다면 그건 기오로라는 할라 내로는 받아들인다는 의미이지만 무쿤 내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황족의 경우에는 오직 아이신이라는 무쿤 이내의 사람에게만 해당되었다.

다만 만주 수렵민족 시절의 씨족 사회가 영향을 주어서 만주족이 성씨나 풀네임으로 서로를 부르는 일은 없었다. 대신 중원에 입관하면서 수명성(隨名姓)이라는 게 생겨났는데, 이름 첫글자를 한족식 한 글자 성씨처럼 쓰는 것이다. 구왈기야 오보이가 이름인 '오보이' 의 첫글자를 따서 '오 대인' 으로 불린 게 대표적이다.

참고로 '신라' 또한 우리말인 '사로' 혹은 '서라벌' 등의 음차로, 되도록 뜻이 좋은 한자를 쓰려다 보니 부르게 된 것이다. 신라 = 사로 = 서라벌은 모두 같은 말을 다른 한자로 썼을 뿐인데, 실제 이 단어가 정확히 어떻게 발음되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한족 우월주의자들은 청나라를 흑역사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48] 청나라 전통 복장이나 헤어 스타일을 경멸하고 명나라까지의 전통이 진짜 중국이다라고 생각하며, 제국주의 시대 중국이 근대화에 진입하지 못하고 열강들의 능욕을 당한 것도 만주족의 통치 때문이었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사실 만주족에 대한 이러한 반감은 비단 한족들뿐만 아니라 동시대 청나라의 지배를 받았던 외몽골몽골족들에게서도 나타나는 경향[49]이 있는데, 외몽골 입장에선 청나라의 지배로 인해 같은 알타이계에 뿌리를 둔 내몽골위구르를 잃었기 때문이다.[50]

물론 위구르튀르크계 언어를 사용하고 10세기부터 이슬람화되어 몽골인들과는 문화적 이질감이 있으니 그러려니 해도 언어도 같고 원래부터 함께 살아온 내몽골이 분리된 건 외몽골 할하인들 입장에서 정말 뼈아프다.

때문에 유튜브 같은 데 보면 만주족은 중국 역덕과 몽골 역덕들 사이에서 자주 다굴당하는 편인데, 처음엔 원나라vs송나라 떡밥 논쟁에서 시작했다가 갑자기 청나라가 끼면 합심해서 청나라를 까는 재밌는 현상이 종종 나타나곤 한다. 중국인은 만주족이나 몽골족이나 다 같은 주변 오랑캐로 치부해버리고 몽골인은 만주족들이 중국 좋은 일만 시켜놓았다고 비아냥거린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중국 영토는 청나라 때 확정된 것이고 적어도 외몽골인 입장에선 같은 알타이계인 내몽골이나 튀르크 등을 잃었으니 화날 만 하다. 물론 이는 역사를 모르고 하는 소리로, 내몽골의 차하르인들은 차하르 칸국의 에제이 칸이 후금 칸인 숭덕제 홍타이지에게 대원진국옥새를 바치면서 항복을 선언하자 천명이 대원에서 대청으로 계승되었다며 에제이를 배신하고 후금에 합류했다. 그리고 후금은 스스로를 중국 황제국으로 선포해 국호를 청으로 바꾼다.

반면 내몽골의 차하르인들은 후금 때부터 만주에 합류한데다 청나라 치하에서 우대를 받기까지 해서 외몽골의 할하인들에 비하면 만주족에 대한 반감이 적은 게 아니라 정확히는 별 신경 안 쓰고 되려 친척 민족이라고 생각하며 청나라는 한족 왕조가 아니며 한족은 만주-몽골의 노예였음을 강조한다.

하지만 현재 중국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이미지는 한족 왕조인 송나라명나라 등이 아닌 몽골족 원나라, 만주족 청나라 등 이민족에서 비롯된 것이 많다. 우선 변발이라는 특유의 머리 스타일부터 해서, 우리가 흔히 UFO모자로 아는 모자는 사실 몽골인들의 전통의상 델에서 유래한 것이었고, 치파오 역시 만주족 복식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춘절 때 거는 재복을 비는 민화 역시 관우와 함께 나오는 동자의 헤어 스타일이 몽골족 변발이다. 사실 칭기즈 칸의 임팩트와 서구와 접촉한 마지막 중국왕조가 청인 연유 등으로 외국에 이들 유목민족의 인상이 너무 강하게 남아 버린고로 이민족의 왕조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죽하면 중국을 일컫는 또 다른 명칭이 거란이 기원인 키타이일 정도.[51]

청 후기의 황제들(도광제부터)을 보면, 초기 황제들과 달리 궁중 생활만 해서 그런지 대체로 얄팍한 체형에 심지어 대부분 단명했다.

또한 청의 12명의 황제 중 5명[52]이 10살이 되기 전에 황제로 즉위했다.

5. 상징

5.1. 국기

황룡기(黃龍旗)
파일:청나라 국기(1862~1889).png 파일:청나라 국기.png
1862~1889 1889~1912

1889년부터 신해혁명(1912년) 때까지 사용되었다.

양무운동 당시 청나라의 정식 국기가 필요했는데, 권력자인 서태후의 결정으로 1862년 10월 17일 청나라의 국기가 삼각의 황룡기로 결정 되었다가 1889년 사각의 황룡기로 바뀐다.

황룡기의 바탕색인 노란색은 중국 황제의 상징 색이며, 용은 청나라 황제를 뜻한다고 한다. 이는 곧 '짐이 곧 국가다"라는 인식을 주기 위한 위엄이라고 한다.

5.2. 국가(國歌)

1911년 공식 국가가 지정되었지만 곧바로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나라가 망하여 단 131일 동안만 사용되었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공금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역대 황제

  • 추존 황제는 제외된다.
  • 시호는 각주로 병기하되 만주식과 중국식의 순서로 한다.
  • 한호는 만주식 군주 칭호, 칸호는 몽골식 군주 칭호이며 연호는 00제로 알려진 중국식을 먼저 쓰고 만주식을 뒤에 쓴다. 세조 때부터는 한호가 연호 + 한(ex: 순치제는 이지슌 다산 한, 강희제는 얼허 타이핀 한)의 형태로 나타나므로 생략한다.
  • 국성인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는 생략한다.

6.1. 국호가 후금이었던 시기

대수 묘호 연호 시호 한호 칸호 즉위년일 퇴위년일 재위 기간 능호
01 태조(太祖) 천명(天命, 1616년 ~ 1626년)[53] [54] [55] - 누르하치
(努爾合赤)
1616년 2월 17일 1626년 9월 30일 10년 225일 복릉(福陵)
02 태종(太宗) 천총(天總, 1627년 ~ 1636년 3월)[56] [57] [58] [59] 홍타이지
(皇太極)
1626년 10월 20일 1636년 5월 15일 9년 208일 소릉(昭陵)

6.2. 국호를 청으로 변경한 이후

대수 묘호 연호 시호 칸호 즉위년일 퇴위년일 재위 기간 능호
02 태종
(太宗)
숭덕(崇德, 1636년 4월 ~ 1643년)[60] [61] [62] 홍타이지
(皇太極)
1636년 5월 15일 1643년 9월 21일 7년 129일 소릉(昭陵)
섭정 성종
(成宗)
- [63][64] - 도르곤
(多爾袞)
1643년 1650년 14년 -
03 세조
(世祖)
순치(順治, 1644년 ~ 1661년)[65] [66] [67] 푸린(福臨) 1643년 10월 8일 1661년 2월 5일17년 120일 효릉(孝陵)
04 성조
(聖祖)
강희(康熙, 1662년 ~ 1722년)[68] [69] [70] 히오완예이(玄燁) 1661년 2월 5일 1722년 12월 20일 61년 318일 경릉(景陵)
05 세종
(世宗)
옹정(雍正, 1723년 ~ 1735년)[71] [72] [73] 인전(胤禛) 1722년 12월 27일 1735년 10월 8일 12년 285일 태릉(泰陵)
06 고종
(高宗)
건륭(乾隆, 1735년 ~ 1795년)[74] [75] [76] 훙리(弘曆) 1735년 10월 8일 1796년 2월 9일 60년 124일 유릉(裕陵)
07 인종
(仁宗)
가경(嘉慶, 1796년 ~ 1820년)[77] [78] [79] 용얀(顒琰)[80] 1795년 2월 9일 1820년 9월 2일 24년 206일 창릉(昌陵)
08 선종
(宣宗)
도광(道光, 1821년 ~ 1850년)[81] [82] [83] 민닝(旻寧)[84] 1820년 10월 3일 1850년 2월 25일 29년 145일 모릉(慕陵)
09 문종
(文宗)
함풍(咸豊, 1851년 ~ 1861년 7월)[85] [86] [87] 이주(奕詝) 1850년 3월 9일 1861년 8월 22일 11년 166일 정릉(定陵)
10 목종
(穆宗)
동치(同治, 1862년 ~ 1874년)[88] [89] [90] 자이슌(載淳) 1861년 11월 11일 1875년 1월 12일 13년 62일 혜릉(惠陵)
11 덕종
(德宗)
광서(光緖, 1875년 ~ 1908년)[91] [92] [93] 자이티얀
(載湉)
1875년 2월 25일 1908년
11월 14일
33년 263일 숭릉(崇陵)
12 공종
(恭宗)
선통(宣統, 1908년 ~ 1912년), (1917년)[94] -[95] [96] 푸이(溥儀) [97] 1908년 12월 2일 1912년 2월 12일 3년 72일 없음 [98]

6.3. 추존 황제

묘호 시호 이름 재위 기간[99] 능호 비고
- 충의신무관성대제
(忠義神武關聖大帝)
충의신무령우인용위현개성대제
(忠義神武靈佑仁勇威顯開聖大帝)
관우(關羽) - 관릉(關陵) 함풍제 추존, 후한 말의 인물
시조(始祖) - 부쿠리용숀
(布庫哩雍順)
- - 태조 추숭, 만주족 시조
조조(肇祖) 원황제(原皇帝) 먼터무(孟特穆) 1405년 ~ 1433년 - 태조 추숭, 태조의 6대조
- 순황제(順皇帝) 충샨(充善) 1433년 ~ 1467년 - 태조 추숭, 태조의 5대조
- 흥황제(興皇帝) 톨로(妥羅) 1467년 ~ 1481년 - 태조 추숭, 태조의 4대조
- 정황제(正皇帝) 시버오치피양구
(錫寶齊篇古)
1481년 ~ 1522년 - 태조 추숭, 태조의 고조부
흥조(興祖) 직황제(直皇帝) 푸만(福滿) 1522년 ~ 1542년 - 태조 추숭, 태조의 증조부
경조(景祖) 익황제(翼皇帝) 기오창가(覺昌安) 1542년 ~ 1571년 - 태조 추숭, 태조의 조부
현조(顯祖) 선황제(先皇帝) 탁시(塔克世) 1571년 ~ 1583년 흥릉(興陵) 태조 추숭, 태조의 부친
성종(成宗) 무덕수원광업정공안
민입정성경의황제
(懋德修遠廣業定功安
民立政誠敬義皇帝)
예충친왕
(睿忠親王)
도르곤(多爾袞) - - 세조 추숭, 태조의 14자
추후 삭탈

6.4. 종합

대수 묘호 연호 시호 칸호 즉위년일 퇴위년일 재위 기간 능호
- 시조
(始祖)
- - - 부쿠리용숀
(布庫哩雍順)
? ? ? -
- 조조
(肇祖)
- [100] - 먼터무
(孟特穆)
1405년 1433년 38년 -
- - - [101] - 충샨
(充善)
1433년 1467년 70년 -
- - - [102] - 톨로
(妥羅)
1467년 1481년 28년 -
- - - [103] - 시버오치피양구
(錫寶齊篇古)
1481년 1522년 43년 -
- 흥조
(興祖)
- [104] - 푸만(福滿) 1522년 1542년 24년 흥경릉
(興景陵)
- 경조
(景祖)
- [105] - 기오창가
(覺昌安)
1542년 1571년 33년 -
- 현조
(顯祖)
- [106] - 탁시
(塔克世)
1571년 1583년 14년 흥릉(興陵)
- - - - - 누르하치
(努爾合赤)
1583년 1616년 33년 -
01 태조
(太祖)
천명
(天命, 1616년 ~ 1626년)[107]
[108] [109] 누르하치
(努爾合赤)
1616년 2월 17일 1626년 9월 30일 10년 225일 복릉(福陵)
- - 천총
(天總, 1627년 ~ 1636년 3월)[110]
- - 홍타이지
(皇太極)
1626년 10월 20일 1643년 9월 21일 9년 208일 -
02 태종
(太宗)
숭덕
(崇德, 1636년 4월 ~ 1643년)[111]
[112] [113] 홍타이지
(皇太極)
1626년 9월 30일 1636년 5월 15일 7년 129일 소릉(昭陵)
섭정 성종
(成宗)
- [114] - 도르곤
(多爾袞)
1643년 1650년 14년 -
03 세조
(世祖)
순치
(順治, 1644년 ~ 1661년)[115]
[116] [117] 푸린(福臨) 1643년 10월 8일 1661년 2월 5일 17년 120일 효릉(孝陵)
04 성조
(聖祖)
강희
(康熙, 1662년 ~ 1722년)[118]
[119] [120] 히오완예이
(玄燁)
1661년 2월 5일 1722년 12월 20일 61년 318일 경릉(景陵)
05 세종
(世宗)
옹정
(雍正, 1723년 ~ 1735년)[121]
[122] [123] 인전(胤禛) 1722년 12월 27일 1735년 10월 8일 12년 285일 태릉(泰陵)
06 고종
(高宗)
건륭
(乾隆, 1735년 ~ 1795년)[124]
[125] [126] 훙리(弘曆) 1735년 10월 8일 1796년 2월 9일 60년 124일 유릉(裕陵)
07 인종
(仁宗)
가경
(嘉慶, 1796년 ~ 1820년)[127]
[128] [129] 용얀
(顒琰)[130]
1795년 2월 9일 1820년 9월 2일 24년 206일 창릉(昌陵)
08 선종
(宣宗)
도광
(道光, 1821년 ~ 1850년)[131]
[132] [133] 민닝
(旻寧)[134]
1820년 10월 3일 1850년 2월 25일 29년 145일 모릉(慕陵)
09 문종
(文宗)
함풍
(咸豊, 1851년 ~ 1861년 7월)[135]
[136] [137] 이주(奕詝) 1850년 3월 9일 1861년 8월 22일 11년 166일 정릉(定陵)
10 목종
(穆宗)
동치
(同治, 1862년 ~ 1874년)[138]
[139] [140] 자이슌(載淳) 1861년 11월 11일 1875년 1월 12일 13년 62일 혜릉(惠陵)
11 덕종
(德宗)
광서
(光緖, 1875년 ~ 1908년) [141]
[142] [143] 자이티얀
(載湉)
1875년 2월 25일 1908년 11월 14일 33년 263일 숭릉(崇陵)
12 공종
(恭宗)
선통
(宣統, 1908년 ~ 1912년),
(1917년) [144]
-[145] [146] 푸이
(溥儀)[147]
1908년 12월 2일 1912년 2월 12일 3년 72일 없음 [148]

7. 항렬

강희제 시대에 아들 대의 항렬자가 윤(胤: 또는 允)으로 정해졌고, 그것은 옹정제의 휘 윤진(胤禛)에서 나타난다. 손자 항렬은 홍(弘: 건륭제), 증손자 항렬은 영(永) 또는 옹(顒: 가경제)로 정해졌다. 건륭제 대에 와서 손자대 항렬로 면(綿) 또는 민(旻: 도광제)이, 증손자대 항렬로 혁(奕: 함풍제), 고손자대 항렬로 재(載: 동치제, 광서제)를 정하고, 도광제 대에 추가로 부(溥: 선통제), 육(毓), 항(恒), 계(啟)가, 함풍제 대에 그에 덧붙여 도(燾), 개(闓), 증(增), 기(祺)를 더했다. 1938년에 애신각라 족보를 수속(修續)함과 동시에 부의는 경지개서(敬志開瑞),석영원성(錫英源盛),정조무상(正兆懋祥) 등 12글자를 더 추가했다.

청나라 종법상 항렬 하나에 황제 한 명가 원칙이라 청나라 말기에 동치제 다음으로 항렬이 부(傅)인 사람이 황위에 올라야 했지만, 서태후가 동치제와 항렬이 같은 광서제를 동치제 다음 황제로 옹립하여 이 원칙을 깨트렸다.

8. 계보도

추존 황제
현조 탁시
1.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
2. 아이신기오로
홍타이지
아이신기오로
도르곤
3. 아이신기오로
푸린
4. 아이신기오로
히오완예이
5. 아이신기오로
인전
6. 아이신기오로
훙리
7. 아이신기오로
용얀
8. 아이신기오로
민닝
9. 아이신기오로
이주
혁현 혁종
10. 아이신기오로
자이슌
11. 아이신기오로
자이티얀
재풍 재의
12. 아이신기오로
푸이
아이신기오로
푸쥔

9. 대외 관계

9.1. 원(元)

원은 명나라에게 대도를 뺏기고 북쪽 내몽골 및 만주 지역으로 물러가서 북원을 세웠다. 그 후로 명나라중국 대륙을 빼앗기 위해 많은 전쟁을 벌였다. 그래서 실제로 알탄 칸 때는 경술의 변을 통해 거의 원나라 부활 일보직전까지 성공했기까지 했으나 알탄 칸의 사후 약체화되었고, 외몽골의 오이라트와도 고비 사막을 경계로 툭하면 전투를 벌여 쇠약해진 상태에서 후금이 팽창하자 북원의 후신 차하르 칸국의 에제이 칸이 대원진국옥새를 후금의 홍타이지 칸에게 바치고, 후금은 대원옥새를 바탕으로 중국의 황제를 선포,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연호를 숭덕이라 하여 황제국을 선포한다.

이후 청나라는 북원의 영역인 내몽골과 만주 흥안성을 복속시키고 내몽골 왕공들을 대거 팔기군에 합류, 막강한 기병 전력을 갖고 명과 조선을 털어버리며 특히 조선에게는 희대의 굴욕을 주기까지 했다.

청나라와 관계를 가진 건 북원이지만, 북원도 원의 일부이자 연장선이니 원이라 표칭한다. 실제로 대원진국옥새를 갖고 있던 차하르 칸국은 북원의 후신이기도 했다.

9.2. 명(明)

명과는 후금 건국 당시부터 줄곧 적대 관계를 유지했다. 임진왜란을 전후로 명의 국력이 쇠하고 정정불안이 가속화하자 먼저 조선을 침공해 후방을 안정시키고 지속적으로 명을 압박, 결국 이자성의 난을 계기로 명이 멸망하자 남진하여 명의 영토를 접수하였다. 이후 남명 정권이 토벌되면서 명과의 전쟁이 마무리되었다.

청 말기의 쑨원 같은 민족주의 혁명가들이나 반청 복명 인사들은 청나라와 '중국(명)'의 관계를 식민지라고 주장했다.

9.3. 조선

군신 관계 하나만으로 설명되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역사 관계로 보자면 좀 다르다.

처음에 이성계가 고려 변경에 살아서 고려인들이 이성계를 여진족 취급한 적도 있지만 정작 청의 추존 황제인 조조원황제코론두란터무르와 같이 이성계의 부하였다. 세종대왕이 원래 여진족의 땅이었던 함길도개척한 적도 있고 수시로 예방전쟁[149]이 일어났다.

임진왜란 때는 수러 바투루가 조선에 대한 원한이 없다며 원군 파병을 제안했지만 선조는 건주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럴만한 게 왜란 때 함경도 북부 종성진 근처 등에선 툭하면 여진족들이 넘어오기도 했다. 원래 예방전쟁으로 여진 부족들이 못 크게 조선이 기병들을 보내 밟았으나 임진왜란 때 신립탄금대 전투에서 져서 기마궁수 대부분이 죽어 증발해 버렸고 아무도 신경쓰지 않자 여진족들이 자주 넘어온다. 이들은 회령을 점령한 가토 기요마사도 쫓아냈다. 즉 원병 요청을 덥석 수락한 경우 자칫하면 왜군을 쫓아낸 건주여진이 함경도와 평안도 등 북방과 강원도 동해안을 꿀꺽 할 수 있는 상황으로 잘못하면 정강의 변 시즌2가 될 수 있어서 건주의 제안은 당연히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 대신에 명나라가 요동 총병 이여송, 부총병 조승훈이 이끄는 대규모 부대를 파병해 준다.

광해군 때는 조선이 등거리 외교 노선을 지켜 상대적으로 적대감이 줄어들었으나 뒤이어 인조반정이 발생해 인조가 즉위하고, 숭명, 배청(排淸) 노선을 주장하는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여 조선에 공격적인 성향으로 돌아서 정묘호란병자호란 등이 일어난 것이 정설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오수창 교수 등에게 지적되었듯이 청 태종의 칭제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조선 측에서는 겉으로는 배금을 하는 듯하였으나 웬만한 청의 요구는 상당수 들어주었다.

결국 만주 지역의 대기근으로 인한 그나마 시도하려했던 농업 지역에 대한 대타격과, 50만 - 100만에서 최소 200만 - 250만까지 늘어난 청나라의 인구, 명과의 무역 중단으로 인한 물자 부족으로써의 경제적 상황 속에서 여러 몽골 부족들을 굴복시키고, 요동 지역의 한족 등을 흡수하며 신장된 국력과 강경으로 실리를 찾으려던 관온인성황제는 결정적으로 가도에 주둔한 모문룡에 대한 문제 때문에 결국 1627년, 1차로 정묘호란, 1636년, 인조의 선전교서, 칭제건원 행사에서 조선 춘신사와 회답사의 횡포로 2차적으로 병자호란을 일으켜 마침내 조선을 굴복시켰다.

그 결과 인조의 두 아들 소현세자봉림대군(효종)이 청으로 끌려가기도 했으며, 진원부원군, 서평부원군 한명욱, 정백창, 여이징, 정선흥 등 많은 사대부가와 백성들의 여인들이 끌려가기도 했으며 피로인들을 심심하면 철퇴로 치고 살육하기도 했다.[150]

사실 이때 청의 태도가 명에 비하면 많이 무례하였는데 1636년 4월 11일, 압카이 수러 한이 제위에 오르고 대청을 선포하였을 때 축문과 표문에 일방적으로 조선을 정복 혹은 복종시키고 내몽골 부족들을 통일했다는 내용을 발표하기도 하였고 나덕헌[151], 이확 등의 사신을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기도 했었다.

이런 청의 행패에 대하여 대사성 이식은 우리나라를 이국 운운하며 노예처럼 여기고 있다며 분개하기도 했다.

심지어 용골대, 범문정 등이 1차 심옥, 2차 심옥 등을 일으키거나 정명수가 영의정 이하 조선 고위 신료 11명을 참살 후 별연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러니 초창기에는 매우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청 초기에는 원나라가 100년 안에 망한 사례를 들며 오랑캐들은 100년 안에 하늘이 망하게 한다[152]는 내용이 있는 동몽선습[153]을 근거로 들어 많은 사람들이 청이 망할 날을 바라기도 했다.

이후 초기에는 과도한 수준의 공물을 요구하였지만 이것은 양국 관계가 호전되고 조선에서 공물에 대한 경감 요구를 계속 하여 청에서 받아줌에 따라 나중에는 많이 감소했다고 한다.

후에 즉위한 효종이 한때 청을 치겠다는 '북벌론(北伐論)'을 계획하기도 했으나 효종이 40대의 짧은 나이로 승하했으며, 북벌의 실체에 대해서도 의문이 많다. 도리어 나선정벌에 보탬이 되기나 했다. 물론 러시아인들은 조선 조총수의 솜씨를 놀라워했고, 이를 계기로 네르친스크 조약이 체결되기까지도 했다. 그러나 조선은 죽 쒀 개 준 꼴이 됬다. 네르친스크 조약은 마카오의 예수회 선교사로 온 포르투갈인들이 중재해서 라틴어프랑스어로 러시아인들과 소통해 체결된 조약이며 만주어-몽골어러시아어-라틴어로만 체결되고 한어는 아예 있지도 않았다. 한족들은 마카오의 포르투갈인들을 통역하는 역할 빼곤 한 것도 없었는데 조선의 지분 따위는 당연히 없었다.

이후엔 명대와 같이 적대감이 희석되고 관계가 개선되는 모습을 보였으나[154] 기회를 틈타 북벌을 의논할 때도 있었다. 강희제가 만력제를 기리는 만동묘를 두고도 "조선은 우리가 망해도 또 제사를 지내줄 것 아니냐?"라고 쿨하게 대처한 것도 한 일례. 사실 이때는 하필 청 3현제의 통치 시기로 북벌은 해봤자 실패했을 것이다.

개화기에 들어서는 메이지 유신 뒤 세력 확장을 꾀하는 일본과 서구 열강을 배척하기 위해 조선과 접촉하는 일이 많아졌으며,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통해 사실상 과거의 조공국을 넘어선 속국, 식민지 취급을 하려고 했다. 1884년 갑신정변 때는 청군이 민씨 정권의 요청에 따라 김옥균 등 개화파와 일본군을 우정국에서 몰아내기도 하였고 그해 청불전쟁이 터지면서 청나라 군대 일부가 전쟁터에 투입되기도 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 정부가 청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여 군대가 파병되었고, 이를 빌미 삼아 일본 역시 자국 군대를 조선에 파병하여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일본에 참패한 청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며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대부분 상실하였고, 1897년 고종대한제국을 수립하며 기존의 조청 관계는 끝났다.

이후 1899년 한 - 청 통상 조약[155]을 체결함으로써 대등한 관계로 전환했고 의화단 사건이나 간도 문제 때문에 말이 많았으나 이는 일시적인 것으로 1904년 러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이 조선의 식민 지배를 약속받자 마침내 공식적으로 조선을 포기. 뒤이어 1910년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경술국치, 일제강점기)가 되었고, 청 역시 1911년 신해혁명으로 쇠퇴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1912년에 멸망하였다.

9.4. 일본

일본과는 막부 시절 및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는 특별히 눈에 띄는 관계가 없었다. 물론 서로 존재는 알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는 함경북도로 진출한 가토 기요마사가 여진족 노토부락을 털다 누르하치와 도도의 부대에 의해 쫓겨나기도 했고, 이후 가토는 명나라를 갈려면 여진족과 북원을 거쳐야 하는데 둘 다 만만하지 않다며 사실 상 대륙 정복은 불가능하단 보고를 올린다. 제 아무리 조총이 있어도 여진의 기병과 맞서는 건 어른과 아이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우고, 사르후 전투에서 명나라가 패배하여 요양을 상실하자 일본 역시 촉각을 세우며 규슈 쪽 방비를 강화한다.

그러면서도 내심 임진왜란의 복수를 후금이 대신 해준단 생각에 우호적인 시선도 보내고 조선이나 명을 통해 후금과 무역도 시작한다. 후금은 활을 만들 때 쓰는 물소 뿔 수우각궁면을 매우 필요로 했는데 물소는 한반도엔 살지도 않고 중국 남부 지방이나 오키나와에 사는지라 명과 일본을 통해 구입해야 했으며, 이 수우각궁면과 모피, 말 등을 맞바꾸는 마시 및 호시를 조선과 후금이 변방 지역에서 열면서 후금 물건이 일본에도 들어간다.

사실 병자호란이 끝난 후 청나라는 조선에게 일본도 입조(!) 시키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그 후 청나라가 중국 본토 점령에 올인하는 와중에 흐지부지된듯 하다.

실제로 청나라는 병자호란 직후에도 조선과 일본과의 무역에는 전혀 관여를 안하는 등 일본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로는 일본과의 무역을 허락해줄 것을 요구하는 등 어느 정도는 관심을 보였고 실제로 어느 정도 중계 무역을 통해 교역을 하였다.

명과 조선을 대상으로 전쟁을 했었던 일본인들은 여진족 그리고 후금 및 청나라의 팽창에 대해서 꽤 우호적인 시선을 보여주었는데, 실제로도 임진왜란에 대해서 명과 조선이 크게 분노하기도 했었고 청나라의 팽창 덕분에 굉장한 실리를 챙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청나라의 사신들이 올 때마다 왜인들이 기세가 더욱 살아난다는 기록도 있고 쓰시마는 인조의 어필과 대장경, 향로, 범종, 화병, 촛대 등을 공물로 요구하며 "두 나라의 안녕과 우호를 위해 이런 요청을 하는 것이며 조선이 거부할 경우 이전까지의 우호가 수포로 돌아갈 것."이라는 협박을 하기도 했다. 다른 왜인들 역시 명과 조선의 세력이 약해진 것을 믿고[156] 조선에게 무례하게 굴었는데 1638년 2월 경상감사 이경증은 "왜인들에게 품질이 나쁜 공포를 주면 왜인들이 분노하고, 품질이 좋은 공포를 주면 백성들이 원망한다. 하지만 결국 품질이 좋은 것을 줄 수밖에 없다."라고 통탄하였으며 인조는 이에 대해서 "백성들이 원망하고 왜인들이 분노하는 상황이 난처하다"라고 하였다. 병자호란 때도 동래 왜관의 왜인들은 동태를 주시하며 본국에 계속해서 보고했으며 자기네들도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기라 잘못하다 만주족이 조선은 물론 다음 차례로 자기들까지 복속시키려 들까봐 우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일본에게 유리한 세견선 파견을 더 많이 요청하기도 하였다. 결국 북방은 물론 남방의 안정까지 위해 일본이 해달라는 걸 다 해줄수밖에 없었다. 물론 일본은 세키가하라 연간에서 임진왜란 주도 세력이 모두 싹쓸이 당한데다 전투의 격렬함 때문에 동군도 이겼지만 피해가 꽤 커서 다시 조선을 쳐들어갈 힘 따위는 없었고 되려 청나라에 의해 제2 여원 연합군 일본침공 사태를 맞을 걱정을 했다. 조총을 보유하긴 했지만 일본보다 더 먼저 마카오를 통해 조총불랑기포를 도입한 명나라조차 사르후 전투에서 만구다이 궁기병을 앞세운 후금에게 너무 쉽게 패배한 것을 보고 걱정을 안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하카타 등 규슈의 방비가 병자호란 때 강화되는 모습도 보였다.

일본은 위치 상 연해주함경도 동해안과 맞닿아서 살던 여진족 각 부족, 특히 함경도 일대에 살던 올랑합이라 불리던 야인여진 부족들이 존재를 모를 리가 없고 고려 시대에는 도이라고 일종의 해적 집단을 만들어 실제로 도호쿠 등에 쳐들어간 적이 있다. 일본은 이때 정체불명 무리가 고려 북쪽 함경도에서 쳐들어 오자 당황해서 고려에 얘네 누구냐며 지원을 타전했고 고려는 얘네가 바로 그 유명한 여진족이라며 정체를 알려준 일이 있었다.

메이지 유신 뒤 일본제국아시아에서 세력 확장을 꾀하며 위협 세력으로 떠올랐다. 1894년 조선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양국이 군대를 파병함에 따라 갈등이 폭발, 청일전쟁이 발발해 일본이 승리를 거두었다. 패전 결과 청은 일본에 타이완을 내주어야 했다.

반면에 극우 단체 흑룡회에서 쑨원의 흥중회, 중국 혁명 동맹회 등 혁명 단체를 대륙 침략 목적으로 신해혁명을 지지하고 지원해주었고 청이 멸망함에 따라 티베트, 위구르, 몽골 등 소수 민족들이 분리 독립을 시도하였다. 결국엔 외몽골은 독립에 성공했지만 내몽골, 위구르, 티베트는 중국의 일부로 흡수되었다. 사실 외몽골도 소련의 도움으로 독립에 성공한 케이스이며 몽골 인민 공화국은 사실상 소련의 속국이었다.

1912년 청이 멸망하면서 일본은 본격적으로 중국 대륙을 향한 세력 확대에 나선다. 그러나 청의 경우는 나라가 아니라 왕조만 망한 것이어서 바로 중화민국이 수립되어 일본의 팽창을 견제했고 이후 만주사변으로 이어서 푸이를 끌어들여 만주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건국케 한다.

이미 만주사변 이전 청일전쟁 이후 불법적으로 일본 경찰들을 만주로 보냈다는 기록이 나왔다.#

9.5. 그 외

외몽골의 경우 1691년 돌론노르 회맹에서 칸들이 강희제에게 분명한 신속의사를 포명함으로써 청나라에 복속, 청의 외몽골 지방이 된다. 그러나 청이 멸망한 뒤 외몽골은 독립을 추진. 복드 칸국으로 독립하고 1924년 다시 몽골 인민 공화국을 세우게 된다. 물론 자력은 아니고 적백내전 당시 소련군의 도움으로 독립했고 이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속국이 된다. 반면 일찍이 대원전국옥새를 바치며 청 황싷에게 충성을 맹세한 내몽골은 계속 청과 호흡을 같이 하다 티베트와 함께 서구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중국사에서도 전무후무한 병력을 징집할 수 있게 된 한족들에게 일방적으로 병합을 당해 내몽골 자치구로 이어진다. 병자호란 때 한성을 약탈한 자들이 바로 이 내몽골의 외번 몽골군이다. 이들은 <조선왕조실록>에도 몽고병으로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프랑스 혁명 같은 사례들을 분석해보면 인구가 많은 국가들에 민족주의가 퍼질 경우 주변을 침공하거나 하는 걸로 봐서는 어떻게 보면 당연하게 예지할 수 있는 일이었다.[157]

몽골족과의 관계에선 만몽 연합 정권을 내세웠고 실제로도 내몽골의 보르지긴(보르지기트) 일족은 황실의 외척으로서 황족의 권리를 누렸다. 그리고 청의 통치 영역이 아닌 외몽골의 할하 유목민은 회유책을 썼고, 청의 통치에 저항하던 오이라트인은 무력으로 응징해 버렸다. 그 외에 17세기에 러시아 남부로 이주했던 오이라트의 분파인 칼미크인의 일부는 러시아와의 불화로 인해 옛 준가르의 땅으로 돌아와 청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158]

본디 중원과 별 관련이 없던 동투르키스탄티베트가 중국에 속하게 된 것 또한 청대의 일. 동투르키스탄의 경우 오이라트의 잔당인 준가르가 청의 지배를 피해 서쪽의 동투르키스탄으로 도망쳐 차가타이 칸국을 멸망시키고 칸국을 세워 청나라의 복속 시도에 계속 저항했다. 하지만 국력 차로 인해 준가르 칸국은 1757년 건륭제 때 멸망하였고 준가르는 제노사이드에 가까운 대량 학살을 당한다. 청은 점령한 동투르키스탄에 새로 정복한 곳이란 뜻에서 '신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티베트의 경우 1717년 준가르 칸국이 티베트를 점령하자 1720년 강희제가 친청파 티베트군과 함께 원정군을 파견하여 준가르를 몰아낸 후 티베트를 복속시켰다. 청 말기 청이 쇠락하고 이 지역에서 반란이 계속 일어났음에도 청은 계속해서 이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하였다. 결국 동투르키스탄과 티베트 모두 외몽골처럼 신해혁명 이후 중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청에게서 독립하여 사실상 독립국처럼 행동했으나 1950년 중국을 평정한 중화인민공화국이 침공하여 중국의 지배 하에 든다. 그 후는 잘 아시다시피.

러시아 제국과는 중앙아시아 일대를 두고 견제를 주고 받는 사이였다가 청말 연해주 등의 영토를 거하게 삥뜯겼으며 영국, 프랑스 등은 교역을 하러 왔으나 청은 교역에 별 관심도 없었고 교역이 확대되는 것도 원하지 않은 반면 영국에서는 은이 자꾸 청으로 흘러들어가 경제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다. 교역 문제로 점점 고조되어 가던 양측의 갈등은 결국 아편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동시대 남아시아 최대 제국이였던 무굴 제국과는 별 분쟁없이 무역만 하고 지냈다. 왜냐하면 이 두 국가 사이에 지구상에 가장 높은 산맥이 있어서(...).[159]

조선 외에 조공국으로 베트남, 미얀마가 있다.

10. 같이보기

10.1. 주요 사건 (시대순)

10.2. 인물 (시대순)

11.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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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암바 아이신 구룬(대금국)[2] 만주 구룬(만주국)[3] 다이칭 구룬(대청국)[4] 암바 칭 구룬(대청국)[5] 두림바이 구룬(중국)[6] 다이칭 울루스(대청국)[a] 현대에서 시대를 나타낼때 쓴다.[b] 청국(칭궈 / 대청국(따이칭궈)[c] 대청제국(따이칭짜이궈)[d] 중화대청국(쭝화따이칭궈)[a] [b] [c] [d] [15] 청(신)[16] 대청제국(다이신데코쿠)[17] 현대에서 청나라 시대를 가리킬때. 당시에는 지금의 중국과 같은 China(차이나).[18] 그레이트 칭[19] 청나라 소조정을 왕조의 연장으로 보았을 때[20] 단, 사할린은 상술되었듯이 사실상 조공만 받았다.[21] 퍼 아라성은 푸순시 신빈만족자치현 용링진 얼다오허쯔촌 남산-하얼사산 북쪽 기슭의 가장 높은 언덕에 그 터가 남아 있다.[22] 자이퍈성은 푸순시 구 동부 혼허 중상류의 다훠팡 저수지 동남쪽의 톄베이산에 위치한다.[23] 당시 호란으로 많은 조선인들이 청으로 끌려가서 살게 되었다.[24] 천신 압카이 한을 섬기는 만주족의 고유 종교.[25] 1908년 대청제국의 헌법인 흠정 헌법 대강이 발행되었으나 군주의 권력을 보장하는 내용이 많아 그냥 발행 이후에도 전제 군주제를 시행한다는 의견도 있다. 다만 흠정 헌법 대강은 대한제국의 헌법인 대한국 국제와는 달리 대놓고 군주의 전제 왕권을 보장한다는 내용은 없었다.[26] 누르하치는 청의 초대 군주도 아니었고, 황제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를 초대 황제로 하는 것은 후대에 줄곧 그렇게 여겼기 때문이다.[27] 입헌군주제로 변경이후[28] 참고로 통일 왕조 중에서 가장 오래 존속한 나라는 한나라이고 그 다음이 송나라이다. 다만 한은 신나라의 건국으로 광무제가 왕조를 복구하기 전까지 15년간 끊겼었고, 송은 정강의 변으로 황제가 잡혀가고 북송이 멸망하는 바람에 왕통이 한 번 끊겼다.[29] 이리장군(伊犁將軍, ili jiyanggiyūn)을 통한 간접적인 지배자. 다만 이슬람의 보호자라는 이미지는 호자들과 위구르인들이게 잘 먹히지 않았다.[30] 흔히 청이 명을 정복한 직후부터 만주족이 한족에 동화되었다는 의견이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견해다.[31] 의외로 한족이 서양 문물 수입에 적극적이었다. 태평천국운동을 일으킨 홍수전은 기독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그 태평천국을 진압하고 양무운동을 일으킨 리훙장은 서양의 무기와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캉유웨이는 영국과 일본의 영향을 받아 변법자강운동을 일으켰으며, 쑨원은 미국 공화주의의 영향을 받아 신해혁명을 일으킨다.[32] 실제로 후금은 몽골계 세력을 하나로 합치거나, 조선을 정복한 적은 없다. 국내 호란사 연구에서 지적되듯이 후금은 조선이 신속했다고, 조선은 형제관계라고 여겼다. 일례로 정묘호란 이후 귀국하는 아민을 만난 홍 타이지가 조선이 항복했다고 발언한 것이 그것이다.[33] 실제로 인조 정권은 주화파가 득세하였고 이에 따라 강경한 배금 정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34] 기사년의 변이라고 부른다. 청군은 영원성을 방비하던 원숭환이 급히 지원하자 한 발 물러서 퇴각했다. 원숭환 참조.[35] 정덕제는 좋은 군주상은 아니었으나, 가정제만력제에 비빌 정도로 암군이냐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36]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도 일하지 않은 만력제, 천계제와 달리 열심히는 하였으나 상황을 반전시키기에는 능력이 모자랐으며 일처리도 엉망이었다.[37] 자세한 내용은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구범진, 민음사) 4장 청 제국과 러시아 편 참조.[38] 특히 청나라 이전의 한인들은 머리카락을 소중하게 여겨 승려를 제외하곤 머리를 깎는다는 것 자체를 큰 수치로 여겼다. 실제로 한족 왕조의 형벌중에서 머리카락을 강제로 깎아 모욕을 주는 형벌도 있었다.[39] 왼쪽부터 대영제국빅토리아 여왕, 독일 제국빌헬름 2세, 러시아 제국니콜라이 2세, 프랑스마리안, 일본 제국사무라이, 그 뒤엔 청의 이홍장을 묘사하였다. 당시 청나라에 주둔하고 있던 주요 열강들의 이권 경쟁을 풍자하고 있는데, 독일이 중국이라고 쓰인 파이에 칼을 꽂고 영국을 견제하고 있고 영국 역시 마찬가지로 독일을 견제하고 있으며 프랑스와 러시아는 독일과 영국이 싸우는 그 틈에 목을 내밀고 큰 파이 조각이 어디 없는지 유심히 들여다 보고있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역시 한 몫을 차지하기 위해 심각한 표정으로 파이를 들여다 보고있다. 뒤에선 이홍장이 열강들에게 중국이 유린당하는 걸 보면서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다. 미국은 청나라에 대한 본격적인 이권 침탈 경쟁에 이 그림에 묘사된 나라들에 비해서는 뒤늦게 합류했기 때문에 묘사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40] 하지만 만주족 입장에서 한족이 자력으로 주무기인 화기를 발전시키는 것을 별로 원하지 않았다는 관점도 있다. 결국 정복자로서 군림하는 이민족 왕조의 한계가 만주족과 더불어 한족 문명권의 군사적 역량까지 크게 떨어뜨린 셈이다.[41] 그런데 적어도 당시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이 아주 어이없는 일로 보이진 않을 수도 있었다. 청조 황실의 입장에서 자신들이 다스리고 있는 영토가 이전 왕조인 명나라 시절보다 훨씬 넓어졌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고, 이렇게 이룬 대외적 확장 과정에서 팔기군을 비롯한 궁기병들이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궁기병이 아직도 군사력의 척도나 다름없다는 판단을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이는 절대로 옳은 판단은 아니었는데, 따지고 보면 청조의 확장 과정에서 복속 당한 위구르, 준가르, 차하르 등의 세력들 역시 궁기병이 군사적으로 주력을 차지하고 있는 세력들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청나라의 궁기병이 주위의 다른 궁기병들에 비해 실력이 월등했을 뿐 스웜 전술의 무력화로 인한 군사적 패러다임 변화를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은 절대 아니었는데 청나라 입장에서는 이를 미리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셈이다.[42] 피정복민족의 반란 위협을 차단하고자 병법이 쓸모가 없다는 핑계로 한족이 병법을 논하는 것을 금지하기도 했다. 무경총요 같은 것들을 살필 때, 중국 군사 역사에서 보편적으로 병법가들이 중국의 과학 기술을 군사학에 도입하던 것을 생각하면 치명적인 실수다. 실제로 청나라 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체적으로 발전한 과학 기술들도 있었는데 그것들은 청군에 거의 도입이 되지 않고 있었다.[43] 만주족과 여진족 모두 사냥이나 군공이 아니라 고리대금이나 지주로서 얻는 수입에 의존하면서 만주족 팔기군과 맹안모극의 구성원들은 전투력이 사라지고 말았다.[44] '전주 이씨' '김해 김씨' 이런 식으로 성을 쓰는 것.[45] 그나마 가장 가깝게 비유하면 본관과 분파를 이름에 쓴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예를들면 안동권씨 복야공파 출신의 권철수라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할라와 무쿤을 적용한 만주어식 이름 배열은 '복야공(파)(안동)권(씨) 철수'인 셈이다.[46] 예를 들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경우 코르넬리우스는 씨족의 이름이고 술라가 가문의 이름이다. 코르넬리우스 씨족 자체는 고대 로마의 전체 집정관 중 40%를 차지했을 정도의 최고 명문이지만 정작 술라 가문은 몰락하여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어렸을 때 창녀의 돈을 받아 공부하기도 했다.[47] 그래서 수수기오로 등의 다른 기오로계 성씨도 있다.[48] 당연히 중국을 지배한 나라 중에 몽골족이 세운 제국도 싫어하는 건 덤이다. 괜히 "애산지후무중국(崖山之後無中國, 애산 전투(원vs송) 이후 중국은 없다.)"이란 말이 중국 역덕들 사이에서 도는 게 아니다.[49] 더구나 몽골인들도 청나라가 들어서기 전에는 여진족들을 하찮은 족속들이라고 무시하던 역사도 있었다. 물론 이 경향은 외몽골의 할하 부족이나 오이라트가 심했다. 북원은 여진족이 자신들 영향력 하에 있어서 딱히 신경쓰진 않았다.[50] 청나라는 몽골족의 일파인 준가르부의 씨를 말리기도 했다. 물론 오이라트 계열도 몽골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쨌든 현 외몽골에서 할하 인과 함께 두번째로 많은 부류가 이 오이라트인들이다.[51] 홍콩캐세이퍼시픽항공의 캐세이는 거란이고 퍼시픽은 잘 알다시피 태평양으로, 굳이 뜻을 해석하면 중화태평양항공 내진 중국태평양항공이라는 뜻이다. 남방의 홍콩에 소재한 회사에 거란 이름이 붙은 건 중국을 시적으로 표현하는 키타이가 거란에서 유래해서이다. 이 표현은 미국은 원래 아메리카라 일컫지만 시적으로 일컬을 땐 컬럼비아라고 일컫는 것과 같다.[52] 순치제, 강희제. 동치제, 광서제, 선통제. 이 중 광서제와 선통제의 경우 황위 계승 서열이 한참 떨어져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실권력자인 서태후의 정치적인 목적으로 인해 즉위한 것이다.[53] 만주어로 압카이 풀링가, 몽골어로 텡그린 술데투.[54] 더르기 황제.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55] 거런 구룬버 우지러 겅기연 한. '모든 나라들을 이롭게 하는 지혜로운 군주'라는 의미.[56] 만주어로 압카이 수러.[57] 겅시연 수 황제.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58] 언두링거 한.[59] 복다 카간.[60] 만주어로 워시훈 어르더뭉거, 몽골어로 데게데 에르뎀투.[61] 겅시연 수 황제[62] 복다 카간.[63] 무덕수원광업정공안민입정성경의황제(懋德修遠廣業定安民立政誠敬義皇帝)[64] 추후 삭탈.[65] 만주어로 이지슌 다산.[66] 얼덤부러 황제. 체천융운정통건극영예흠문현무대덕홍공지인순효장황제(體天隆運定統建極英睿欽文顯武大德弘功至仁純孝章皇帝).[67] 아이비어 자사크 칸.[68] 만주어로 얼허 타이핀.[69] 고신 황제.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효경성신중화공덕대성인황제(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孝敬誠信中和功德大成仁皇帝).[70] 엔크 암갈란 칸.[71] 만주어로 후왈리야순 톱[72] 텀거툴러허 황제. 경천창운건중표정문무영명관인신의예성대효지성헌황제(敬天昌運建中表正文武英明寬仁信毅睿聖大孝至誠憲皇帝).[73] 나이랄트 토브 칸.[74] 만주어로 압카이 워이여허.[75] 용키양가 황제. 법천융운지성선각체원입극수문분무흠명효자신성순황제(法天隆運至誠先覺體元立極敷文奮武欽明孝慈神聖純皇帝).[76] 텡게린 테트게센 칸.[77] 만주어로 사이쿵가 펑션.[78] 숭기연 황제. 수천흥운수화수유숭문경무광유효공근검단민영철예황제(受天興運敷化綏猷崇文經武光裕孝恭勤儉端敏英哲睿皇帝).[79] 사이시얄투 이루겔투 칸.[80] 永琰(영염)에서 顒琰(옹염)으로 바꿨다.[81] 만주어로 도로 얼덩거.[82] 상간 황제. 효천부운입중체정지문성무지용인자검근효민관정성황제(效天符運立中體正至文聖武智勇仁慈儉勤孝敏寬定成皇帝).[83] 터르 게렐트 칸.[84] 綿寧(면녕)에서 旻寧(민녕)으로 바꿨다.[85] 만주어로 굽시 얼기영거.[86] 일러투 황제. 협천익운집중수모무덕진무성효연공단인관민장검현황제(協天翊運執中垂謨懋德振武聖孝淵恭端仁寬敏莊儉顯皇帝).[87] 투기멜 엘베그트 칸.[88] 만주어로 요오닌가 다산.[89] 필링가 황제. 계천개운수중거정보대정공성지성효신민공관의황제(繼天開運受中居正保大定功聖智誠孝信敏恭寬毅皇帝).[90] 부린투 자사그치 칸.[91] 만주어로 바다랑가 도로.[92] 암발링구 황제. 동천숭운대중지정경문위무인효예지단검관근경황제(同天崇運大中至正經文緯武仁孝睿智端儉寬勤景皇帝).[93] 바다라울트 투르 칸.[94] 만주어로 거훙거 요소.[95] 후에 구 황실이 올린 시호로는 배천동운법고소통수문경부관예정목체인입효민황제(配天同運法古紹統粹文敬孚寬睿正穆體仁立孝愍皇帝). 하지만 중국 정부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손제(遜帝)라고 부른다. 참고로 그 의미는 겸손할/사양할 손.[96] 휴브트 요스 칸.[97] 이미 만주족이 중국에 한참 동화된 후의 청의 마지막 황제라 그런지 만주식 발음은 알려져 있지 않다. 흔히 알려진 푸이라는 이름은 중국식 발음. 헨리(Henry)라는 영어 이름이 있는데, 푸이의 개인 교사였던 영국인 레지널드 존스턴(Reginald Johnston)이 헨리 8세의 이름에서 따서 붙여준 이름이다. 하지만 이 이름은 1920년부터 1932년까지 서양인들과 대화할 때만 잠깐 사용되었을 뿐이며, 중국에서는 잘 쓰이지도, 알려지지도 않았다. 청나라 때는 황제의 본명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무례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당연히 본명이 불릴 일이 거의 없었고, 제위를 잃고 평민이 된 후에는 그냥 푸이 선생이라고 불렸다. 아이신기오로라는 성은 잘 쓰이지 않았다. 그의 동생 중 한 명인 푸런(溥任, 1918.8.17~2015.4.10)은 이름을 진유즈(金友之)로 바꿨다. 즉, 이름을 바꾸면서 성도 진(金)씨로 함께 바꾼건데, 현재도 많은 만주족들은 진씨 성을 사용한다.[98] 사후 베이징 바바오산 혁명공묘(北京 八宝山 革命公墓)에 묻혔다가 청서릉(淸西陵) 인근에 마련된 화룡황가능원(華龍皇家陵園)에 매장되었다.[99] 건주위 추장[100] 원황제(原皇帝)[101] 순황제(順皇帝)[102] 흥황제(興皇帝)[103] 정황제(正皇帝)[104] 직황제(直皇帝)[105] 익황제(翼皇帝)[106] 선황제(宣皇帝)[107] 만주어로 압카이 풀링가, 몽골어로 텡그린 술데투.[108] 더르기 황제.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109] 거런 구룬버 우지러 겅기연 한. '모든 나라들을 이롭게 하는 지혜로운 군주'라는 의미.[110] 만주어로 압카이 수러.[111] 만주어로 워시훈 어르더뭉거, 몽골어로 데게데 에르뎀투.[112] 경시연 수 황제[113] 복다 칸[114] 무덕수원광업정공안민입정성경의황제(懋德修遠廣業定安民立政誠敬義皇帝)[115] 만주어로 이지슌 다산.[116] 얼덤부러 황제. 체천융운정통건극영예흠문현무대덕홍공지인순효장황제(體天隆運定統建極英睿欽文顯武大德弘功至仁純孝章皇帝).[117] 아이비어 자사크 칸.[118] 만주어로 얼허 타이핀.[119] 고신 황제.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효경성신중화공덕대성인황제(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孝敬誠信中和功德大成仁皇帝).[120] 엔크 암갈란 칸.[121] 만주어로 후왈리야순 톱[122] 텀거툴러허 황제. 경천창운건중표정문무영명관인신의예성대효지성헌황제(敬天昌運建中表正文武英明寬仁信毅睿聖大孝至誠憲皇帝).[123] 나이랄트 토브 칸.[124] 만주어로 압카이 워이여허.[125] 용키양가 황제. 법천융운지성선각체원입극수문분무흠명효자신성순황제(法天隆運至誠先覺體元立極敷文奮武欽明孝慈神聖純皇帝).[126] 텡게린 테트게센 칸.[127] 만주어로 사이쿵가 펑션.[128] 숭기연 황제. 수천흥운수화수유숭문경무광유효공근검단민영철예황제(受天興運敷化綏猷崇文經武光裕孝恭勤儉端敏英哲睿皇帝).[129] 사이시얄투 이루겔투 칸.[130] 永琰(영염)에서 顒琰(옹염)으로 바꿨다.[131] 만주어로 도로 얼덩거.[132] 상간 황제. 효천부운입중체정지문성무지용인자검근효민관정성황제(效天符運立中體正至文聖武智勇仁慈儉勤孝敏寬定成皇帝).[133] 터르 게렐트 칸.[134] 綿寧(면녕)에서 旻寧(민녕)으로 바꿨다.[135] 만주어로 굽시 얼기영거.[136] 일러투 황제. 협천익운집중수모무덕진무성효연공단인관민장검현황제(協天翊運執中垂謨懋德振武聖孝淵恭端仁寬敏莊儉顯皇帝).[137] 투기멜 엘베그트 칸.[138] 만주어로 요오닌가 다산.[139] 필링가 황제. 계천개운수중거정보대정공성지성효신민공관의황제(繼天開運受中居正保大定功聖智誠孝信敏恭寬毅皇帝).[140] 부린투 자사그치 칸.[141] 만주어로 바다랑가 도로.[142] 암발링구 황제. 동천숭운대중지정경문위무인효예지단검관근경황제(同天崇運大中至正經文緯武仁孝睿智端儉寬勤景皇帝).[143] 바다라울트 투르 칸.[144] 만주어로 거훙거 요소.[145] 후에 구황실이 올린 시호로는 배천동운법고소통수문경부관예정목체인입효민황제(配天同運法古紹統粹文敬孚寬睿正穆體仁立孝愍皇帝). 하지만 중국 정부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손제(遜帝)라고 부른다. 참고로 그 의미는 겸손할/사양할 손.[146] 휴브트 요스 칸.[147] 이미 만주족이 중국에 한참 동화된 후의 청의 마지막 황제라 그런지 만주식 발음은 알려져 있지 않다. 흔히 알려진 푸이라는 이름은 중국식 발음. 헨리(Henry)라는 영어 이름이 있는데, 푸이의 개인 교사였던 영국인 레지널드 존스턴(Reginald Johnston)이 헨리 8세의 이름에서 따서 붙여준 이름이다. 하지만 이 이름은 1920년부터 1932년까지 서양인들과 대화할 때만 잠깐 사용되었을 뿐이며, 중국에서는 잘 쓰이지도, 알려지지도 않았다. 청나라 때는 황제의 본명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무례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당연히 본명이 불릴 일이 거의 없었고, 제위를 잃고 평민이 된 후에는 그냥 푸이 선생이라고 불렸다. 아이신기오로라는 성은 잘 쓰이지 않았다. 2015년 4월 10일에 사망한 그의 동생 푸런(溥任, 1918년 8월 17일 생)은 이름을 진유즈(金友之)로 바꿨다. 즉, 이름을 바꾸면서 성도 진(金)씨로 함께 바꾼건데, 현재도 많은 만주족들은 진씨 성을 사용한다.[148] 사후 베이징 바바오산 혁명공묘(北京 八宝山 革命公墓)에 묻혔다가 청서릉(淸西陵) 인근에 마련된 화룡황가능원(華龍皇家陵園)에 매장되었다.[149] 기록을 보면 조선군이 왕왕 침략해 여진족들의 농토에 소금을 뿌리고 건물들을 파괴해서 여인, 노인, 아이들이 울부짖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조선에 쳐들어오기 전에 미리미리 쳐들어가서 학살하고 방화하고 개발살냈다.[150] 이는 초창기 청에 대하여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분노한 이유이기도 했는데, 청군은 조선인과 한인을 대상으로 살육과 약탈, 방화는 물론 남편이나 아이가 있는 여인도 무자비하게 능욕했으며 심지어 젖먹이 아기들을 무참하게 도륙하고 어미만 끌고 가서 노예로 삼기도 했다. 당시 관점으로도 야만인, 오랑캐 같은 짓을 일삼으며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태도를 보고 많은 조선인들과 한인들이 분노하며 청을 증오했다. 강도록 등에는 이와 같은 비참한 정황이 묘사되어 있다. 태평천국 운동 때도 사망자가 많았던 이유가 태평천국에 가담한 한인들이 만주족과 청에 대한 반감으로 만주족을 학살하자 그에 대한 보복으로 청군이 태평천국군 포로들의 항복을 받아주지 않고 학살했기 때문이다. 태평천국군의 지휘관들의 경우 능지처참에 처해졌다. 그 업보인지 몰라도 신해혁명 때 만주족이 한족 혁명군에게 학살되는 과정에서 젖먹이 아기들도 무참하게 도륙되었을 뿐더러 한족 혁명군은 명청전쟁, 정묘호란, 병자호란 당시의 청군과 달리 그 아기의 어미들까지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당시 만주족을 말 탄 미개인으로 규정하고 청군에 의해 명의 신민들이 당한 고초를 끊임없이 강조한 한족 민족주의자들에 의한 만주족 탄압과 학살에 관한 기록을 보면 말 그대로 후덜덜한 편이다. 혁명군은 만주족을 공개처형 등을 통하여 살해하거나 서안에서처럼 식량 공급을 중단하여 굶긴다음 2만 명을 죽였고, 돈이 많아도 혁명군이 가산을 전부 몰수하였기에 굶어죽거나 얼어죽었다. 얼마나 많은 만주족이 학살당했는지 당시 영국인 기자가 "만주인들이 살던 거리는 텅 비었고 사방에는 만주족의 시체가 즐비하며, 수많은 시신이 성문 밖의 한 구석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혁명군은 여전히 만주족을 사냥하고 있고, 만주족 800여 명이 살해당했다고 한다." 같은 기사를 쓸 정도였으며 가산이 억만에 이르렀다는 경친왕 혁광의 손자는 가산을 전부 몰수당해 쓰레기를 뒤지는 처지까지 되었고 팔기자제들과 청의 황족들 또한 각지에서 하류층이 되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환향녀 문제가 만주족에게 그대로 돌아왔는지 하류층이나 매춘부로 전락한 만주족 여성들이 속출하기도 했다. 사실 중국 소수민족들 중 자기들 언어가 거의 소멸된 소수민족은 한족이나 다름없는 회족과 만주족밖에 없는데, 이러한 학살의 여파로 진짜 만주족이 이미 사라져서라고 보는 게 옳다. 당시 기록을 보면 한족이 양자로 들어가거나 한 경우가 아닌 만주족 직계 혈통이면 의외로 만주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나 혁명군의 만주족 학살 후 루쉰의 전기에서 나타난 것처럼 노인 2명만 남거나 해서의 농담이 아니라 한족들과 관계가 깊거나 일부 혁명군이 동정심에 살려준 경우처럼 예외를 제외하면 전부 학살당하여 살던 곳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쯤되면 현대에 들어서 자신의 민족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만주족이 점점 늘어나는 것 자체가 엄청난 기적으로 느껴질 정도. 물론 만주족 자체는 청 말기에 형성된 아이덴티티로 여기엔 여진족 각 부족과 내몽골의 우랑카이족, 그리고 잔존 실위족과 퉁구스가 섞인 시버인들이 포함되어 있다.[151] 어혈이 생기고 하체 마비가 올 때까지 맞았다.[152] 당나라나 요나라 같은 경우도 있지만 당나라 같은 케이스는 한족 정권으로 여겨졌고 당시 관념상 요나라보다 송이 중국을 지배하는 통일 왕조 취급을 받았다.[153] 당시 필수 교재였다.[154] 적대감이 희석되었다는 것도 사실 조선에서 병자호란으로 고통받은 세대들이 세월이 흘러 병이나 노환 등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세대교체가 이루어져서 그렇게 된 것에 가깝다. 관계 개선이라는 것도 청나라가 중원을 정복한 이후 더 이상 조선을 수탈할 일이 없어지다 보니 조청관계가 청나라 초기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나빠진 것이다. 다만 양이 적어진 것이고 계속 수탈은 하고 있었다.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1&cp_code=cp0301&index_id=cp03010473&content_id=cp030104730001&search_left_menu=2 엄청나게 하다가 좀 줄인 게 전부다. 결국 청나라는 건국 이후부터 멸망하는 순간까지 조선과는 제대로 된 좋은 인연이 없다시피 했다.[155] 당시 청의 상태도 막장이었기에 의외로 대등한 관계였다.[156] 왜냐하면 원래 명이 조선을 도와 중화 질서를 어긴 일본을 손 좀 봐주려고 했었는데 여진족이 성장하자 그 계획이 취소되었다.[157] 특히 일대일로 방향은 중화사상 같은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옛날부터 진출하려고 했던 곳들이라 고전적인 느낌까지 있다.[158] 여러 사정으로 인해 돌아가지 않고 유럽에 남은 칼미크인들은 훗날 러시아 연방의 자치 공화국인 칼미키야 공화국을 이루게 된다.[159] 다만 그렇다고 충돌이 아예 없진 않았다. 무굴제국이 영국의 식민지가 된 이후 청나라 령이었던 티베트를 침공했는데 티베트가 청나라 조정에 구원을 청했고 이에 청나라가 군대를 파견해 맞붙었다. 청나라가 나라 상태가 멀쩡했다면 히말라야를 넘어온 인도군을 물리칠 수 있었겠지만 알다시피 당시는 나라 꼴이 말이 아니라서(...) 지진 않았지만 이겼다고 하기에도 뭐한 전투 이후 인도가 그냥 퇴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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