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족 관련 틀 | |||||||||||||||||||||||||||||||||||||||||||||||||||||||||||||||||||||||||||||||||||||||||||||||||||||||||||||||||||||||||||||||||||||||||||||||||||||||||||||||||||||||||||||||||||||||||||||||||||||||||||||||||||||||||||||||||||||||||||||||||||||||||||||||||||||||||||||||||||||||||||||||||
|
만주족 满族 | Manchu People | ᠮᠠᠨᠵᡠ | |||||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상세 이미지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
[1] | [2] | }}}}}}}}} | |||
<colbgcolor=#ee1c25><colcolor=#ffff00> 명칭 | [ruby(满, ruby=Mǎn)][ruby(族, ruby=zú)] (중국어) | ||||
ᠮᠠᠨᠵᡠ (manju) (만주어) | |||||
Manchu people (영어) | |||||
인구 | 10,410,585명 (중국) 12,000명 (대만)[3] | ||||
주 거주 지역 | 만주(둥베이 3성) |
[clearfix]
1. 개요
만주와 과거 한반도 북부에 거주했던 북방 퉁구스계 반농 반수렵 민족.현재는 중국의 소수 민족이 그 후손이다. 한국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숙신-말갈족-여진족의 후신이다.[4]
중국에서는 만주족 대신 만족(滿族)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이는 만주족의 주(州) 글자가 지명에 붙는 글자기 때문에 만주라는 지역 범위를 만주족이라는 특정 민족의 몫으로 두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1635년 이전에는 여진족이라 불렸고, 1635년에 청의 숭덕제가 만주족으로 개칭하였다.[5] 현대 중국에선 만주를 중국 영토의 일부라는 뉘앙스가 강한 '동북 3성'이라고 부른다.[6] 다만 이 명칭은 중원 문명의 적자를 자처한 만주족 스스로가 붙인 이름이므로 일부 역덕들이 주장하듯이 중국 공산당이 만든 용어는 아니고, 장쉐량군을 "중화민국 동북 변방군"으로 부른 것에서 보듯이 중국국민당도 이 용어를 썼다.
중국에서 한족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2위 좡족보다는 인구가 약간 적지만, 중국 서남부에 집중된 좡족에 비해 중국 대륙 전역, 대만 등 중화권 전역에 고루 분포하고 있다.
만주족이나 전신인 여진족을 몽골이나 중앙아시아 민족들마냥 유목민족이라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여진족과 만주족의 영역은 만주의 삼림지역이었기 때문에 유목보다는 농업과 수렵에 집중했던 수렵채집민이다. 물론 내몽골과 맞닿은 만주 서쪽에 사는 퉁구스계 민족들은 유목생활을 하기도 했다.
2. 명칭과 기원
만주의 파저강에서 유래하여 청 태조 천명제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와 누르하치가 이끄는 세력을 각각 '만주'와 '만주 구룬'[7]이라고 불렀다. 누르하치의 아들인 청 태종 숭덕제 아이신기오로 홍타이지가 나라 이름을 청나라로 개칭하면서 여진이라는 말을 완전히 금지시킨[조서] 후부터는 오직 만주라는 말만 쓰이게 된다.명나라 시기 명나라의 이민족 구분 기준으로 여진족은 남쪽의 건주, 동쪽의 해서, 북쪽의 야인[9] 크게 3종족으로 나뉘는데 '만주'는 이중 건주여진이 자신들을 일컫는 명칭이었다. 누르하치가 속한 '건주'여진(建洲女眞), 후에 정복한 '해서'여진은 거의 모두 만주 팔기군에 편입이 되었지만 여진 부족 가운데서도 연해주와 두만강 하류의 '야인'여진(野人女眞)은 일부만 만주 팔기군에 편입되었다.[10] 청태종에게 조선이 항복할 때도 청의 요구사항 중 하나가 청나라와 만주인에 적대적이었던 야인여진 쪽의 우랑카이(瓦爾哈, 올량합, 오랑캐)와의 관계를 끊을 것이었을 정도였으니 명나라 때 당시의 동북 관외 지방의 지역별 원주민 구분 기준이지, 그 당시 동북 지방 원주민 사이에서는 서로 같은 민족이라는 의식은 희미했다고 봐야 한다. 애초에 해서여진과 건주여진도 극심한 갈등을 겪으면서 건주여진 위주로 통합된다.
따라서 15세기나 16세기 기준으로 현재의 만주-연해주 지역의 원주민들 = 만주족이라 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11]
3. 역사
만주족을 칭한 16세기 이전의 역사는 말갈족, 여진족 문서 참조.3.1. 명청교체기의 모습
엄밀히 말해서 만주족은 기마민족이 아니다. 그들은 만주를 떠나기 전에도 대부분 정착해서 살았으며 중국화되어 있었고 장사에 능했다.[12] 그러나 군대의 중심은 기마부대였다. 그리고 그들은 몽골식 군사 기술을 완성하여 중국의 행정체계가 자신들에게 봉사하도록 만들었다.
《세계전쟁사》 / 존 키건
《세계전쟁사》 / 존 키건
이 시기의 시조 신화는 만주 시조 신화 참조. 만주족의 전신인 16세기까지는 명나라의 이이제이적인 공작 때문에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이들은 명나라군에 복속하여 가끔 몽골 정벌에 동원되기도 했다.[13] 16세기 말에 이르러 명나라가 임진왜란에 참전하는 사이, 건주여진의 추장인 누르하치는 부족을 통일하고, 후금을 세워 명나라에서 독립, 명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명나라는 무능한 황제들의 폭정 및 조정의 당파싸움으로 농민반란이 일어나서 신흥세력인 후금에 제대로 대항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누르하치는 자신의 운명을 건 사르후 전투에서 명나라에 대승을 하여 완전히 요동 동쪽을 손에 넣는다.
후금 초기에는 조선과의 관계에 조심스러웠으나, 이후 후금은 청을 세우고 황제국을 자칭하면서 국경을 마주 맞댄 조선에게 군신관계를 요구한다. 조선이 군신관계를 거부하자, 병자호란을 일으켜 삼전도에서 항복을 받고 이후에 조공 명목으로 조선에서 상당량의 인력과 물자를 수탈했다.[14] 명나라가 망한 이후에는 오삼계와 같은 한족 배신자들의 협력으로 산해관으로 들어와 이자성등의 농민반란군을 진압하여 향신의 지지를 얻는 동시에 자신들에 반항하는 한족을 억눌렀다. (양주학살, 변발령, 삼번의 난) 약탈의 경우는 여진족 시기나 명청교체기에 군자금이 필요할 때까지만 했고 만주-중국을 포괄하는 강력한 중앙 정권인 청나라가 들어선 이후에는 없어졌다.
만주족은 대륙을 장악하면서 한족의 반항이나 반란은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몇배로 보복했는데, 일부 한족은 만주족이 대륙을 장악하면서 수천만의 한족을 학살했다고 주장한다. 물론, 학살이나 진압 자체는 사실이지만 수치의 신빙성은 가려들어야 하고, 또 인권의식이 전혀 없었던 전근대에 벌어진 정복전쟁에서 양민학살이나 약탈은 동서양을 불문하고 자주 벌어졌으며, 만주족만의 전유물도 아니었다.[15]
일단 양주에서만 만주족에 의해 한족 800,000여 명이 학살당하거나 변발을 거부한다고 한족을 대량으로 죽인 건 사실이지만(양주십일), 전근대 냉병기로 인한 학살에는 물리적인 한계가 있고 거론되는 숫자 간의 차이가 크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정확하게 만주족이 어느 정도로 한족을 탄압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양주만 봐도 당시 정말 도시 인구가 80만명인가부터가 의문이다.[16][17]
그러나 만주족의 중국 대륙 통치에 그만큼 한족의 저항이 컸고, 만주족이 이를 잔학하게 탄압했다는 점만은 사실이다.
3.2. 청나라의 만주족
과거의 해석은, 만주족은 중국의 다른 야심찬 이민족 정복자들처럼 그들 지배의 통치나 정당화에 중국식 방법을 적용했고, 그 결과로 사실상 문명화된 중국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청나라의 실상을 제대로 반영했다 보기 힘들다. 청 통치자들은 일인 다역의 역할을 했다. 그들은 여러 부류의 신민들(만주족, 몽골인, 티베트인, 한인)을 동시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다스렸다. 청나라의 황제는 중국 백성에게는 천자였고, 몽골인에게는 칸 중의 칸(카간)이었으며, 티베트인에게는 차크라바르틴(전륜성왕)이었다. 청나라는 다양하면서도 다민족적인 세계 제국이었다.
이번원(理藩院)은 만주어로 '바깥 지역을 통치하는 기구'를 뜻한다. 이번원은 중국 본토의 외부 지역, 즉 몽골과 티베트 등을 관리하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중화제국 역사상 최초의 행정기관이었다. 6부와 동등한 지위를 가진 이번원은 수도 베이징에 관청을 두고 있었으며, 이번원에 소속된 지방 관료들의 규모도 거대했다. 한족 지식층은 거의 모두 이번원에서 배제되었고, 대부분은 중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들로 행정이 운용되었다.
《하버드 중국사 청》 / 윌리엄 T. 로
《하버드 중국사 청》 / 윌리엄 T. 로
만주족은 명나라의 옛영역에 그치지 않고 서쪽으로 군사적으로 계속 팽창하였다. 원나라 영역이었으나, 명나라 시절 중국의 영역에서 벗어났던 티베트와 서역은 청나라에 손에 들어왔다. 약 18세기 후반쯤에는 티벳-서역의 쟁패를 두고 오이라트계인 준가르부와 대립하는데, 준가르는 명나라 시절부터 중국의 서쪽을 계속 공격했으며, 청나라때도 티베트와 칭하이에서 청나라와 군사적으로 대립했다. 정통 중화를 자처하게 된 만주족은 건륭제시절 준가르부를 정벌, 준가르부의 씨를 말리고, 이곳을 신강 (새로 얻은 영역)이라고 일컫는데, 이곳은 현재 신장 위구르 자치구가 된다. 19세기까지 만주족은 티베트, 몽골, 연해주, 일리 강등을 정복하여 엄청난 판도의 제국을 건설하였다. 이중에서 일리강과 연해주는 러시아에 뜯기고, 외몽골은 독립해버려 잃어버리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영역은 고스란히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에 계승되었다.
청나라의 만주족은 자신들보다 훨씬 많은 한족 인구를 정복하고 지배했다. 한족의 인구에 비해 만주족의 수가 압도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제도를 통해 혈통을 유지해야 했고, 한족과의 결혼은 엄격히 제한을 두었다. # 공자의 후손처럼 대단한 명문 가문이라는 특이 케이스거나 한족 귀족[18][19]들 같은 경우에만 팔기 내 만주족과 결혼할 수 있었다. 물론 만주족 남성들이 한족 여성을 취하는 것에는 아무런 통제가 없었다.
만주족 아이신기오로 황실이 본거지를 중국으로 옮긴 이후에도 청나라 팔기 제도에 편입되지 못한 만주 원주민들은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살았다. 그들은 조선의 함경도나 평안도 지방의 사람들이나 중국인들과 거래를 하기도 했으며, 가끔 아예 조선으로 건너가서 눌러앉기도 했다. 이들은 본토에서 적응하지 못해 이주한 하층민으로 조선에 가서도 여전히 주로 사당패 같은 일을 하는 하층민이 되었다. 앞서 서술한 바대로 두만강 쪽 '야인' 여진은 부족단위로 편입되지 못하고 개인 자격으로 편입되었다.[20]
다만 청나라가 멸망하기 전까지 팔기군이냐 아니냐로 한족과 만주족의 구별은 이어졌고, 대체적으로 중국의 민족주의자들은 서로를 지배-피지배민족으로 여겼다. 특히 청나라는 망할 때까지 변발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변발 헤어 스타일로 후대 중국인들의 원성을 두고두고 듣게 된다.
내각대학사, 6부 상서, 군기대신 등 정부 요직은 팔기[21]만 임명하다 만•한병용제로 각 관직마다 같은 수의 만주족과 한족을 임명하기 시작했다. 같은 직책이라 해도 팔기가 한족보다 품계와 봉급이 높게 책정되었고, 나중에 동일한 품계로 조정된 뒤에도 만주족이 우대받는 건 여전했다. 특히 한족은 반란의 우려가 있다하여 문관직만 허용했으며, 군대를 지휘할 수 있는 무관직은 태평천국의 난 때에 가서야 허용되었다. 내명부를 관할하는 황후도 팔기에서만 선발했으며[22], 한족 후궁의 자식들은 위의 경우를 제외하면 황위 계승에서 배제되었다. 지방행정에선 하급 행정구단위인 '현'을 관할하는 지현은 한족 지역 유지들에게 맡겼으나 최상급 행정단위인 '성'을 관할하는 총독, 순무는 팔기군이 독점했다. 물론 청나라 황제들은 팔기에 소속되지 않은 한족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만한일체"라는 말을 했다. 사실 이것은 청나라가 쓰러진 이후에 민국 시절에도 오족협화라는 말로 계승되며, 중국 사극에서는 황제를 통해 "만주족과 한족은 짐의 백성"이라는 말과 만한(몽)일체란 말이 튀어나온다. 청나라의 만한전석을 재현하는 행사에서도 이러한 말이 나온다.[23]
청나라 후반기까지 베이징에서는 기인 주거지와 한족 주거지는 엄격하게 구분되었다. 그곳에서는 한인 풍속에 물들지 않으려 팔기군 소속 만주인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병영생활을 했고[24], 혼인도 마찬가지로 만주인 여자는 한족에게 시집 갈 수 없었다. 특히 청나라 아이신기오로 황실은 망할 때까지 공주를 한족에게 시집 보낸 적이 거의 없다. 예외로 태조 누르하치의 손녀와 결혼한 이영방과 같은 케이스나 성조 강희제의 고모 화석건녕공주가 오삼계의 아들 오응웅에게 시집간 경우가 있다. 그러나 평서왕 오삼계 일족과 다른 항복한 명나라 출신 군사집단들은 일반 한족으로 대우하지 않고 팔기군에 포함된 한군기인(漢軍旗人)이었으며, 일반 한족과 다른 취급으로 사실상 만주인이었다. 거기다가 건녕공주는 김용의 소설과 달리 황후의 소생이 아니라 이름없고 신분이 낮은 한인 출신 후궁의 딸이었다. 즉 순수 만주족이 아니라는 의미다. 게다가 한족에게 변발을 강요하며 거부하거나 하지않을 경우 사형, 더 심하게는 집단으로 학살했다. 태평천국의 격문에 보면 "만주족이 한족 여성을 대상으로 광범위하게 성수탈을 했다"는 문구가 주를 이를 정도이다.[25] 애초에 만주인이 완전히 한족과 동화되었으면 백련교도의 난이나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태평천국의 난 때 태평천국을 따르던 한족은 변발을 끊었으며[26] 요충지마다 건설된 성에 거주하던 '주방팔기(駐防八旗)' 소속 만주족은 태평천국의 난 시절, 성이 함락될 때마다 예외없이 한족에게 분풀이로 몰살당했다.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던 증국번도 한족이라서 만주족을 싫어한 한족 인민들의 분위기로 인해 태평천국을 조져버리자는 격문에서 만주족의 청나라를 위해 싸울 것이라는 문구를 빼버렸다.
청나라를 세운 후 만주족은 점점 중국 문화에 동화되어갔지만 나름대로 민족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했다. 관학을 세워 만주어를 가르치고 관리등용 시험 때도 만주어를 장려했다. 특히 만주인이 문관이 되려면 반드시 만주어와 몽골어의 번역 시험을 보도록 했다. 한자와 만주문자가 함께 적혀 있는 현판을 자금성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까닭이다. 이후 현실적으로 한인 문인들을 지배층에 끌어들인 강희제 시대에 《강희자전》을 편찬하면서 청나라 황실에서도 중국어의 사용을 허가하고, 그 후에는 서서히 중국화되기 시작했다. 집단 거주지인 만주를 떠나 베이징 등 각지로 옮겨 간 만주족은 적은 인구로 300년 가까이 한족을 지배했지만, 결국은 한족에게 점차 융합되었으며 문화적으로 만주어를 까먹고 한족에 거의 동화되었다.
3.2.1. 만주족은 사실 청나라 말기에 형성됐다는 설
만주족이라는 개념이 청나라 말기에 형성되었다는 설도 있다.위에서 다루듯 만주족의 문화 자체가 이전부터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민족 문서에서 보듯 종족적 문화가 존재하는 것과 민족 의식으로 발전하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이다. 만주족의 문화는 국가가 규정한 계급과도 같은 것으로 그 안에서도 각각의 서열이 규정되어 있었고, 만주족으로 한데 뭉친 민족 의식이 있었다고 확신하기는 어렵다. 동족 의식이 전혀 없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통일 영웅으로 불리는 누르하치는 여진족을 통일한 게 아니라 여진 계통으로 이루어진 각각의 독립 세력들을 정복해 나간 것에 가깝다. 또한 동족 의식이 있었다고 해도 그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고 그것이 상호간에 존재했던 의식인지도 알 수 없다. 이후 청의 지배층은 조선인과 바요트와 우루트 등의 내칼카 몽골인 그리고 오론촌인, 나나이인, 우데게인, 어웡키인, 다우르인 등을 팔기만주에 귀속시켰으며, 팽창에 따라 루스 차르국의 카자크와 야르칸드의 위구르, 그리고 티베트인 등도 팔기만주에 편입했다.
팔기만주 가운데 만주족을 형성하지 못한 기인들도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신장, 광둥성, 베이징시, 허베이 성, 산둥성에 거주하는 어웡키인, 신장 타청시에 거주하는 다우르인, 신장 일리 카자흐 자치주 찹찰 시버 자치현에 거주하는 시버인, 허베이 성과 랴오닝 성 등지의 박씨 조선인[27] 등이다. 이 중에서 시버족은 여진 계통의 종족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만주족을 형성하지 않고 독자적인 정체성을 유지했다.
핵심적으로 만주족은 '팔기만주'만이 아닌 팔기한군[28], 팔기몽고 그리고 각 기의 보오이(Booi) 등의 후손들을 모두 포함한 것으로 다양한 집단들의 복합체였다. 국가가 수많은 집단들의 문화를 하나로 규정하고 하나의 역사를 정립하면서 문화적 균질화를 시도하였고, 균질화된 이들이 청 말기에는 타자에 의해 계급이 아니라 종족으로 간주되면서 자신들도 종족적인 정체성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집단 거주지인 만주를 떠나 베이징 등 각지로 옮겨 간 만주족은 한족보다 매우 적은 인구로 300년 가까이 한족을 지배했지만, 만주어를 사용하는 것은 기인들을 대상으로 국가가 규정한 만주적인 것이었다. 실제로 만주족이라는 종족이 기인들 사이에서 형성되었을 때 그들 대부분은 한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반대로 일부 만주족 지배에 공을 세운 한족은 만주족에 편입되었다. 마찬가지로 정묘호란이나 병자호란때 포로로 끌려간 일부 조선인들이 청나라에서 공을 세워 만주족으로 편입된 경우도 있다. 이런 입장에서 보자면 "만주어를 까먹고 만주족의 정체성을 잃어버렸다"라는 설명은 다소 이상하다. '만주족'이라고 불렸던 이들 중에서는 애초부터 만주어를 몰랐던 이들도 수두룩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만주족 일부가 에스니시티를 형성한 것은 기인들에 대한 탄압이 가장 심했던 시기이자 반만주주의(Anti-Manchuism)가 팽배하던 19세기 태평천국전쟁 시기 전후라고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견해에 의하면, 여진족의 대다수가 만주족이 된 것은 맞지만, 여기에 한족이나 몽골족, 심지어는 극소수의 조선인도 이 섞여서 현재의 만주족이 형성된 것이며, 그렇게 보면 현재의 만주족은 청말에 되어서야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3.3. 청나라 멸망과 중화민국 수립 이후
청나라가 멸망하면서 만주족의 운명은 매우 비참해졌다. 특히나 태평천국의 난과 신해혁명이 반청복명·반만흥한적 성격이 다분해서 혁명파 및 한족이 만주족을 학살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29] 남의 나라를 정복해서 지배자로 군림하며 악행을 저질렀고 나라를 망친 주범이라는 구호와 분노가 더해져 아예 만주족 축출 운동까지 전개되며 반만주주의 폭동이 벌어져 수많은 만주족이 학살당할 정도였다.완벽한 소멸-신해혁명 이후 만주족의 고초이 당시에 많은 만주족이 학살을 피해서 성씨를 한족처럼 외자로 바꿔버렸다. 예를 들어 황족이었던 아이신기오로씨는 주로 김(金)씨로, 허서리 송고투가 소속되었던 허서리씨는 영(英)씨로, 우징의 조상이었던 우야씨는 오(吳)씨로, 용골대로 알려진 타타라 잉굴다이의 성씨인 타타라씨는 담(覃)씨 등으로 바꾼 것이다. 그리하여 현재 만주족은 대부분 한족이나 한국인처럼 외자 성인데, 문화대혁명 이후로 박해받을 일이 없어지면서 일부 명문가들은 다시 만주족 고유성으로 바꾸기도 했다고 한다.
루쉰의 전기를 보면 폐허가 된 옛 팔기군 군영터에 만주족 노파 둘이 살고 있는데, 주변 동네의 한족 어린이들이 몰려와서 돌을 던지며 노파들을 괴롭힌다거나 건장한 한족 남성들이 근처에 올 때마다 두 노파가 겁에 질려 '여기엔 아무 것도 없다우'라는 말만 반복하더라는 일화가 소개된 바 있다. 해당 일화 자체는 구 군영터 곁을 지나가면서 그 모습을 본 루쉰과 친구의 입장에서 소개된 거라 '예전에 청나라가 득세하던 시절에는 한족이 말을 타고 이 주변을 지나가면 만주족이 한족 주제에 말을 타고 다닌다고 비웃고 괴롭혔다'는 루쉰의 한탄으로 끝난다.
이는 명나라 멸망 과정에서의 약탈과 학살에 대한 보복이라기보다는, 지배계급으로서 특권을 누렸던 만주족에 대한 분노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민족주의적 성향이 있었던 건 맞지만, 청나라의 명나라에 대한 약탈과 학살도 청나라 후기 만주족의 무능함으로 만주족이 한족에게 실망의 대상이 됨에 따라서 재조명된 것에 가깝다. 원래 중국은 왕조 교체나 정권 교체기에 항상 지배계급에 대한 학살이 있어왔다. 명나라가 원나라를 무너뜨려서 북쪽으로 몰아낸 이후, 포로가 된 몽골인들과 색목인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했고[30], 청나라도 건국하면서 양주대학살 등 수많은 반청세력을 학살했듯이, 딱히 중화민국만 그런 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진 이후로 토지개혁으로 중화민국의 지주계급에 대한 인민재판과 대대적인 학살이 있었다.
과거 금나라나 원나라가 패망 후 원래 살던 고향 땅으로 돌아간 경우처럼 만주족도 일부는 동화되어도 민족과 영토 자체는 남아있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되지 못한 이유는 청나라 후기의 경우가 특수했기 때문이었다. 한족과 만주족의 구분은 청나라 후기부터 급속하게 약화되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만으로 동화된 것은 아니고 타이밍도 좀 나빴다. 만주족은 기본적으로 한족에 동화되는 것을 경계해서 만주족과 한족의 구분을 철저히 했고, 언젠가 돌아갈지도 모를 만주를 보험삼아 봉금 지역으로 지정해 한족의 유입을 막아뒀지만, 하필 청나라 후기는 예상치 못한 외세의 등장으로 이게 어려워졌던 것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만주 북쪽에는 위협적인 세력이 없는 게 정상인데, 이 시기에는 북방에서 러시아 제국이 갑툭튀해 버렸다. 이 바람에 이때부터는 패망한 유목 제국의 패턴대로 만주로 돌아가서 새로운 국가를 세우거나 부족 상태로 존재하는 등 만주족 전통을 계승해서 한족과 구별되는 정체성을 유지하기가 거의 불가능해진다. 실제로 만주 땅의 주요 지점은 러시아에게 하나씩 빼앗겨 러시아의 실질적인 지배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31]
더구나 만주족은 중국 정복 후 성공[32]에 취해서 점차 정체 혹은 쇠퇴[33]하고 있었고, 신식 무기의 등장과 함께 기병과 유목민이 가지던 힘이 약화되었다. 기병은 소수 인구로 다수를 정복할 수 있던 거의 유일한 수단이고 활이 주무기였기 때문에 말타고 싸우는 법만 안다면 어느 정도 세력을 유지할 여지가 있었지만, 신식 무기인 현대식 총포 앞에서 소수정예 기마궁술은 유물행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만주족은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변화에 적응하려하지 않았다. 특히나 시대가 바뀌면서 한족 지배자들이 개혁을 하기 시작해서 유목민들과 힘의 차이가 크게 벌어지게 된다. 몽골의 군사력만 해도 청나라 전반기에는 상당히 강력했으나 신해혁명 이후에 수립된 복드 칸국은 안휘군벌 쉬수정의 외몽골 출병으로 자치가 취소되고 중화민국에 복속되어 1920년 안직전쟁으로 안휘군벌이 몰락하고 담딘 수흐바타르, 허를러깅 처이발상 등의 독립운동과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까지 개입한 개판이 되고 나서야 간신히 독립할 정도였다.[34] 후의 국공내전에서도 이제 소수 민족들은 한족 세력이나 외부 세력의 지원이 없으면 그냥 잉여가 되었다. 냉병기와 기병으로는 자동소총, 기관총, 야포, 전차, 항공기에 도저히 맞설 방법이 없었다.
여기에 청나라 후기의 대변혁으로 쓸만한 인재가 부족해지고 근대화가 시급해지면서 정책을 바꿨는데, 한족 견제정책을 거의 폐기하고 한족에게 만주족이 독점하고 있던 고위 관직을 마구 퍼준 것이다. 특히나 태평천국을 진압할 때 한족 의병들의 활약이 대단했기에 청나라 조정에서는 이들을 무시할 수 없었고, 팔기군이 건륭제 말기에 막장화된 이후로 청나라의 군권 및 실질적인 권력은 이런 한족 의병들을 지휘했던 증국번, 이홍장, 좌종당의 손에 넘어간다.[35] 그러니 한족의 폭풍 출세를 경계한 북방 지역 지도자들은 황실에 항의하고 한족은 나라를 말아먹었다고 반발한다. 이러한 상황에 러시아를 막기 위해서 한족에게 만주를 개방하자, 한족이 만주로 대거 이주해서 만주를 한족 천지로 만들었다. 청나라가 만주에 대한 봉금령을 풀어버리면서 한족이, 특히나 당시 아편전쟁으로 인한 해안 방어 정책으로 청이 해안에만 투자를 하면서 가난해진 산동 서부, 하남 지역 등의 한족이 우르르 만주에 몰려갔다. 한족이 만주로 몰리면서 만주족과 한족의 숫자 차이는 엄청나게 벌어졌고, 수적 우위에 서게 된 한족은 결국 만주족을 누르고 만주를 장악하는데 성공한다.[36]
실제로 증국번은 "그 백면 유생의 호령 한마디에 무수한 사람이 일제히 호응하여 무한을 함락했습니다.[37] 따라서 장래에 그가 꼭 나라의 복이 될 거라고 장담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라는 평가를 받았고 한족 측근들은 그를 부추겨 만주족 왕조를 멸하고 다시 한족 제국을 세우려 했다. 게다가 서태후와 광서제의 대결에서 광서제의 통수를 친 원세개는 고위직을 유지하다가 청나라가 충분히 무력해졌다는 판단이 들자, 청 황실을 배신하고 반란을 일으킨다. 그런데 멍청한 서태후는 이를 눈치채기는 커녕 한족의 힘을 빌려서 권력을 독점할 생각이나 하고 있었으니 광서제는 훗날 큰어머니인 서태후를 죽였어야했다고 후회하며 독살당하고 만다.
광서제 사후, 한족이 청나라의 실권을 장악해가는 사이에 내부 갈등이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수준까지 와버린 청나라는 결국 신해혁명을 맞아 멸망당하고 만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중화민국은 한족의 국가였기에 만주족은 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한 움직임을 이어나갔다. 개중에는 몽골인들과 만주족이 합심한 만몽독립운동의 움직임이 있었는데, 신해혁명 이전부터 청나라의 망조를 감지한 만주와 몽골의 귀족들이 계획한 것이다.[38] 이후에 몽강국과 러시아처럼 만주국은 유목을 금지시키는 정책을 폈다. 이러니 만주족의 정체성이 더욱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는 만주족이 스스로 만주국을 포기하는 결과로 작용하게 된다.
3.4.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 현대 만주족의 분포도. 고대에 랴오닝에 한민족계가, 지린에 퉁구스계가 많이 살았던 것과 달리 2010년 기준으로 지급시 중 랴오닝성 단둥(31.6%), 번시(28.4%), 후루다오(25.5%), 진저우(24.9%), 푸순(24.3%), 그리고 허베이성 청더(承德; 38.2%) 시에서 만주족 비율이 20%를 넘긴다. 이는 입관 이후 만주족이 중국 본토로 대거 옮겨갔고, 조선 후기부터 두만강 유역의 봉금지를 중심으로 현재의 조선족의 조상이 되는 한민족이 유입됐기 때문이다.[39]
공산당은 소수민족 보호를 약속했고 그리하여 만주족 자치현이 만주족의 본거지인 랴오닝성에 여럿 설치되었다. 이런 자치현에서는 행정문서에 만주어를 병기하고, 모든 공무원은 만주어를 할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청조 몰락 이후에 만주족은 정체성을 숨기고 민족교육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미 중화민국 시기에는 한족에 거의 동화되어 있었고, 이런 행정적인 조치는 거의 실효성이 없었다. 20세기 만주국 시절에도 만주국에서는 만주어가 아니라 한어(표준중국어)[40]가 쓰이고 있었다. 청조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만 하더라도 만주어를 전혀 모른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고,[41] 중국어만 쓰고 있었던 형편에서 딱히 만주족 정체성을 되살리기는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문화대혁명 때문에 한족과 소수민족을 불문하고 전통 문화를 모두 반동시하자, 만주족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또 다시 숨기게 되었다. 다만 이미 청말부터 만주족의 정체성은 희미해져갔고 중화민국 성립 당시부터 만주족의 문화는 거의 감추었기에 문화대혁명이 결정타였던 것은 아니다.
현재 중국에서 만주족은 소수민족 중의 하나이며, 만족(滿族)이라 부른다. 중국 소수민족 가운데는 나름 자부심 있는 민족으로 좡족1957만 명과 위구르족1177만 명, 후이족1138만 명, 묘족1107만 명에 이어 인구수 5위이다.[42] 약 1,042만 명 정도가 중국 동북지방을 중심으로 살고있다.[43] 성(省)급 행정구역인 만주족 자치구는 없으나, 자치현은 11개(허베이성 4, 랴오닝성 6, 지린성 1), 자치향(鄕)도 랴오닝성을 중심으로 여러 군데 있다. 유독 진(金)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데, 이건 청나라의 황성인 아이신기오로를 한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나온 성씨이다.
그러나 중국의 통계자료 조사에서 1982년 430만 명이었던 인구가 불과 8년 뒤인 1990년에 985만 명, 8년 만에 2배 이상 비정상적으로 증가해 정말 만주족이 저 정도 규모로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중국에서는 많은 한족이 세제혜택이나 두 자녀 혜택 등을 노리고 소수 민족의 후예라는 증거를 제시하여 소수민족으로 주민등록을 변경하곤 한다. 또한 청 말기부터 학살을 당하기도 했고 다른 소수민족과 달리 거의 한족이나 마찬가지인 후이족과 함께 청대에 고유 문화로 규정된 언어가 거의 소멸된 채 표준중국어 및 지역별 방언만을 사용하는 민족이라 외모나 언어로는 한족과 만주족을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반만주족 분위기 하에 성씨를 바꿔서 한족인 척 살다가[44], 만주족으로 커밍아웃한 인구도 상당할 것이다.
현대 중국에서 만주족으로 인정받는 기준이 되는 것이 과거 팔기군에 속했는지 여부인데, 팔기군 자체에 한족도 상당히 있었으니 이것으로도 구분은 불가능하지만 아무튼 내무부 소속 보오이[45]거나 팔기한군[46]에 속했거나 혈통상으로 만주인이 아니더라도 신고하는 게 가능하다.[47] 입관(1644년) 당시 기준으로 팔기군 내 만주인 비중은 40~45%정도였다.[48] 따라서 현재 호적상 만주인으로 신고한 사람 가운데 절반 이상은 금나라 이전까지 거슬러올라가는 통념상의 여진인과는 연결되지 않는다. 이것도 청나라 시절 돈을 주고 한인 출신이 만주족 양자로 들어가거나 하는 호적 세탁을 감안하지 않은 숫자임에도 그러하다.
동북 3성(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 구석탱이에 위치한 도시('치치하얼'이라든가)나 마을에서는 전통을 유지하면서 살고 있는 만주인 마을이 아직도 소수로 남아 있다(가령 헤이룽장성 싼자쯔 마을(三家子村)). 그나마 귀족이 아닌 하층민일 경우에는 결국 스스로 먹고 살아야 했고, 역설적이지만 그 때문에 그 나름의 전통을 유지할 수 있었던 셈이다.
이외에도 청나라 왕조 시기에 만주족이 청나라 전역에 퍼져 통치계급을 구성하였던 역사적인 연고로 인하여 오늘날에도 중국 전역에 고루 분포하는데 그중에서도 내몽골자치구(499,911명), 베이징시(250,286명), 허난성(61,705명), 톈진시(56,548명), 산둥성(33,527명), 구이저우성(21,932명), 닝샤후이족자치구(21,962명), 신장위구르자치구(19,493명), 간쑤성(17,285명), 광둥성(17,972명), 섬서성(15,801명), 후베이성(14,540명), 쓰촨성(13,849명), 산서성(13,665명), 윈난성(12,187명), 장쑤성(11,880명) 등 순으로 다수 거주한다. 여타 각 성급 행정구역에는 각기 1만 명 미만의 만주족이 산재하고 있다.
2000년 현재 만주족의 도시 지역 거주비율은 20.65%로서 전체 소수민족 평균보다는 높고 중국 전체 및 한족의 도시거주 비율보다는 다소 낮다. 준도시화 지역인 진(鎭) 거주비율은 14.60%이다. 향촌 지역 거주비율은 64.75%로서, 중국 내 전체 소수민족 평균(76.56%)보다는 낮고 중국 전체 평균(63.08%) 및 한족의 향촌 지역 거주비율(61.83%)과 비슷하다.
관련된 다른 소수민족으로는 청나라 때 신장 위구르 자치구 쪽에 주둔군으로 파병된 시버족이 있다. 시버족은 코르친 몽골에 종속되어 있던 여진족의 한 갈래로, 일각에서는 선비/실위-시버 간의 음운학적 연속성이라는 가설과 Y DNA를 근거로 실위나 선비의 후예로 보기도 한다. 그들이 쓰는 시버어는 중세 만주어와 소통이 가능할 정도로 가까워서 여진어, 만주어 연구에 쓰이고 있다. 만주어와의 차이는 방언 차이 정도. 안준을 비롯한 시버족 언어학자들은 만주어와의 방언적 관계를 부정하지만, 그래도 중국에서 만주어를 연구하고 고문헌을 번역할 능력이 되는 전문가들은 대부분이 시버어를 할 줄 아는 시버족 언어학자들이다.
청나라 때 고위직을 점유해서 그런지, 중국의 민족 중에는 학계 문화 예술계 인사들이 많다고 알려져 있다. 1990년에 실시된 조사에 의하면 평균적인 한족보다도 교육 수준이 높다고 알려져 있다.# 사실 소수 민족이 받는 여러 우대 조치와 인구를 고려하면 특히나 금수저가 많은 만주족의 평균치가 한족보다 높은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2003년 자료
2010년 조사에서는 10년 전보다 인구가 감소했다. 사실 만주족이 많이 살고 있는 중국의 동북지역은 유명한 저출산 지역이기에, 이곳은 만주족 뿐만 아니라 한족, 몽골족, 조선족 등 다른 민족들도 인구가 감소했다.
4. 문화
만주족의 전신인 여진족의 영역이었던 만주는 워낙 크기 때문에 문화수준이나 경제력도 천차만별이었다.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여진족은 그다지 문명수준이 높지 않았으나, 이후 명나라와 인접한 곳에 있던 건주여진은 명나라의 영향을 받아 수렵-채집-유목 경제 상태 에서 점점 농경민족화하고 있었다. 또한 이 지역에서 산출되는 여러 특산물 (말, 인삼, 금, 은) 및 특히 말은 몽골에 대항하기 위해 기병을 양성하던 명나라와의 무역에서 특산품으로 사용되었으며, 그 결과 건주여진은 상당한 수준의 경제력을 보유하게 되었고, 이는 이후 대륙을 장악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런 경제력으로 계급이 생기고 문화도 발달하게 되었다.다만 만주의 동부인 두만강쪽의 여진족(야인여진)은 조선초기와 그다지 변화가 없었고, 문명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인구 밀도 또한 낮은 관계로 나머지 두 부족에 비해 후진적이었다. 같은 여진족에게 무시당할 정도였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직전까지도 조선의 변경을 노략질하며 살아가고 있었다.[49] 이후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이 후금을 세우고 야인여진 부족들을 하나씩 정벌하여 자신의 세력권으로 편입하였다. 이는 명과의 전쟁을 앞두고 후방을 정리하고 인력을 충원하려는 방편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조선 북방의 경비가 안정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입관후에는 청나라의 지배층이 되면서 중원문화를 흡수하여 높은 문화수준을 보유하게 되었다. 원래 종교는 몽골이나 한국의 삼국시대와 마찬가지로 샤머니즘이었고, 이후에는 화엄종 등 다른 대승불교를 믿었으나 "만주족"이라고 개명한 이후 몽골(내몽골, 외몽골 모두 포함)의 영향으로 티베트 불교도 받아들였다. 청더 시에는 만주족이 세운 티베트 불교 사원들이 남아있으며, 옹정제의 잠저인 옹화궁을 비롯해 높으신 분들의 거처나 여러 명승지에 티베트 불교 사원이 들어서기도 했다. 만주족의 '만주'라는 단어가 문수보살의 만주어 발음(만주시리mañjuśri)에서 온 것이라는 설도 있다. 다만 근현대에는 만주족도 한족에 거의 동화되면서 한족처럼 정토교나 선종을 믿는 경우도 있다. 또한 숭덕제의 칭제건원 때부터 동아시아 국가의 치국 이념이었던 유교 문화도 열심히 받아들여서 스스로 정통중화의 적자를 자칭했고, 강희제시절에는 이것이 만주족에 온전히 정착되었다. 그래서 다른 동아시아 민족들처럼 유교와 불교 모두가 민족문화에 영향을 주었다. 여기에 고유의 문자까지 가져 많은 중국 고전을 자신의 문자로 번역했다.[50] 결론적으로 대륙을 지배하던 만주족은 조선 초기에 조선의 변경을 약탈하던 미개부족이 아니라, 중원문화의 적자를 자처하면서도 중원문화(즉 한족의 문화)와 구별되는 고유의 문화를 지키려고 노력한 문화민족이었다. 현재도 중국의 학자나 예술가들 중에 만주족 출신이 많은 것은 이때부터 생긴 전통이다. 다만 이런 문명화 노력은 성인 남자 전원이 전투원이었던 만주 시절에 비해 군사력의 약체를 불렀고, 결국 19세기에 가면 청나라는 무력을 한족 의병이나 한족 군벌에 의존하면서 청나라가 망하는 원인이 된다.
청나라 시대 만주어로 쓰여진 각종 문헌은 그 수가 너무 많은데, 전문가 수의 부족으로 아직 다 해독이 되지 않고 있다. 강건성세에 황제들이 대신들과 주고받은 주접(빨간붓 밀지)만 해도 남아있는 양이 어마어마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마저도 한문을 위주로 하여 번역 및 전산화가 이뤄져 있다. 최근에는 이런 만주어 문헌을 해독하기 위해 만주어와 비슷한 언어를 쓰는 시버족 연구자들이 중국의 역사 연구기관에 특별 채용된다고 한다.
전통 악기는 주즈하프, 몽골의 텁쇼르와 비슷한 주워르거, 만주식 산시엔인 텅어리, 궁호(弓胡), 팔각고, 몽골의 이킬과 비슷한 쿠머시가 있다. 참고로 국악의 악기로 유명한 해금이 거란이나 몽골과 같은 동호계 유목민족 해족의 악기가 중국 북송을 통해 고려에 들어와서 그대로 향악기로 정착하게 된 경우이다.
21세기에 만들어진 만주족 상징 문장.
만주족을 상징하는 비공식 문장, 두번째 버전. 팔기군의 색을 기반으로 만든 듯하다. 비공식적으로 쓰이는 깃발도 있다.
4.1. 언어
언어에 관해서는 청 왕조가 존속하던 시대에는 당연히 국어(國語)의 지위에 있었다. 그 당시 국어라고 하는 건 중국어가 아닌 만주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또한 청나라 후기를 거쳐 동북지역에 거주하던 만주족이 한족에 동화되면서 그들이 쓰던 만주어에서 유래된 차용어가 중국어 방언인 북경 방언[51]과 동북 방언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만주어 때문에 관화의 m음과 입성음을 비롯한 받침음이 사라졌다는 학설도 있지만 이는 근래로 올수록 만주어의 영향이라기보다는 원나라 시기 몽골어의 영향으로 여겨지고 있다. 다만 발음면에서는 아니어도 차용어면에서는 동북지역을 비롯한 토착방언에 상당한 영향을 남긴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심양 방언은 화자 상당수가 산동반도에서 건너온 한족과 한족화된 만주족 혈통이 섞인 사람들이 대부분이기에 만주어의 영향을 상당히 받아 만주어에서 유래된 차용단어가 많아 표준중국어와는 어법이나 단어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고 한다. 다만 이곳의 방언은 표준중국어 표준 발음이다. 즉 서울 방언과 마찬가지의 역할이다. 중국의 아나운서 상당수가 이 지역 출신이며, 한국에서 활동하는 장위안도 만주족이 살던 랴오닝성 안산 출신이다.
4.2. 인명
만주족은 중국에서 한족 다음으로 많은 성씨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륭시기에 편찬된 '팔기만주씨족통보'에 따르면 과이가씨를 필두로 1,114개의 성씨가 존재했다.[52] '팔기만주씨족통보'에 수록된 대부분의 성씨는 만주족이지만 귀순한 사람의 성씨도 수록되어 있는데 몽골족, 한족의 성씨도 있고 조선인의 성씨도 팔기만주 내에 43개나 기록되어 있다.만주족 성씨의 방식은 다른 민족들과 조금 다르다. 할라(ᡥᠠᠯᠠ, 哈拉, hala)와 무쿤(ᠮᡠᡴᡡᠨ, 穆昆, mukun)이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하는데, 할라는 씨족(氏族) 혹은 큰 범위의 성씨를 의미하고, 무쿤은 씨족 내의 씨(氏) 혹은 작은 범위의 성씨를 의미한다. 즉, 할라라는 씨족 내에 무쿤이라는 씨가 있다는 것이다. 썩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우리식의 성씨와 본관을 떠올리면 쉽다.[53] 정확히는 고대 중국의 성과 씨의 관계다. 만약 고대 로마에 관심이 있었다면 로마인의 이름을 생각하면 상당히 정확하게 이해할 수도 있다. 즉 로마인 이름에서 세 번째 이름과 두 번째 이름의 관계와 같다.[54] 황성인 아이신기오로를 예로 들어보면 기오로(覺羅)라는 씨족 내의 아이신(愛新)씨라는 의미이다.[55] 아이신은 만주어로 쇠(金)라는 뜻인데, 만주족의 전신인 여진족이 세운 옛 나라의 국호가 금(金)인 것을 생각하자. 청 왕조가 존속하던 기간 중에 기오로를 사성 받았다면 그건 기오로라는 할라 내로는 받아들인다는 의미이지만 무쿤 내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황족의 경우에는 오직 아이신이라는 무쿤 이내의 사람에게만 해당되었다.
이 할라와 무쿤이라는 씨족 단위는 시간이 지나면서 크게 변화하게 되는데, 기본적으로 할라 단위는 유명무실해지고 무쿤이 실질적인 구속력을 가진 조직 단위로 기능하게 된다. 이렇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대체로 할라 간의 잦은 통혼으로 인한 할라 단위 구분의 무의미함, 잦은 인구 이동으로 인한 할라 조직의 해체 및 무쿤 조직의 독립성 강화 등이 꼽히지만, 무엇보다 명, 조선, 몽골, 야인여진[56] 등 외부 세력과의 대립으로 인한 할라 조직의 붕괴와[57] 이로 인해 좀 더 유기적이고 위기 대응에 용이한 무쿤 조직이 살아남게 된 것에서 비롯된다. 다만 이는 해서 및 건주여진에 한정된 부분이고, 야인여진의 경우 할라와 무쿤의 원형을 대부분 보존하고 있었다.
다만 만주 수렵민족 시절의 씨족 사회가 영향을 주어서 만주족이 성씨나 풀네임으로 서로를 부르는 일은 없었다. 영어 등의 여러 위키백과 문서에서는 만주족 인물에 대해서는 표제어로 이름만 적고 만주어 이름은 성을 붙이지 않는다고 적시해놓을 정도.[58] 예외적으로 금나라와 청나라의 황족이었던 완안씨와 애신각라씨의 경우, 과시 목적으로 성씨를 이름 앞에 붙이는 경우도 있었다. 만주족이 들려주는 만주족 성씨 이야기
대신 중원에 입관하면서 수명성(隨名姓)이라는 게 생겨났는데, 이름 첫글자를 한족식 한 글자 성씨처럼 쓰는 것이다. 구왈기야 오보이가 이름인 '오보이'의 첫글자를 따서 '오(鰲) 대인'으로 불린 게 대표적. 만주족이 점차 한화하여 한어 성명과 유사한 이름을 짓고 한족처럼 돌림자를 쓰기 시작하면서는 만주인을 처음 만나는 일부 한인들이 왜 만주족은 아비와 자식의 성이 다른가 신기해했다는 일화도 있다.[59]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한 후에는 만주족 대다수가 생존을 위해서라도 성씨를 한족식으로 바꾸었다. 대체로 만주식 성씨의 뜻이나 발음에서 따와 한족식 성씨를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강희제의 외가 퉁기야씨, 가경제의 외가 워이기야씨처럼 조상이 한화된 여진족의 후손이 다시 만주족이 된 경우이거나 직계 기원부터 한족인 사람이 모종의 이유로 만주족에 귀화한 경우이면 조상의 한족식 성씨가 다시 쓰였으며, 만주족 아버지와 한족 첩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 경우 어머니의 한족식 성씨를 쓰기도 했다. 임진왜란을 피해 만주로 도망친 조선인 난민, 사르후 전투 이후 조선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후금의 포로가 된 조선군 패잔병, 이괄의 난에 가담했다가 이괄의 난 진압 이후 후금으로 망명한 반란군 패잔병, 정묘호란 때 후금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 탐관오리들의 수탈을 피해 만주로 도망쳐 만주족 행세를 하며 살아간 조선 하층민 등에게서 이어진 조선계 만주족 가문은 조상의 조선식 성씨를 복원했다. 드물게는 자신의 아버지나 할아버지에게서 이어진 수명성을 그대로 성씨로 등록하기도 했다.[60] 또한 아이신기오로 가문의 일부 황족은 뿌리만은 잊지 말자는 의미로 쇠 금(金, 만주어로는 '아이신')자를 써서 진(중국어 발음)씨로 개성하기도 했다. 현대에 들어서는 만주족의 정체성을 보전하고자 하는 인사들이 팔기만주씨족통보 등의 고문헌을 뒤져가며 자신들의 뿌리를 찾아 애신각라, 과이가, 부찰 같은 만주 성씨를 복원시키기도 한다.
4.3. 습속
한족이 개를 식용으로 열심히 먹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주인들은 개를 먹지 않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는 청 태조 누르하치가 위기에 처했을 때 개가 구해줬다는 전설 때문이다.[61]흔히 대중매체에서 전족을 제외하면 중국 전통이라 알려진 것들도 본디 만주족의 풍습이다. 차이나 드레스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한 치파오가 만주족의 복식에서 유래했고, 그 외에도 강시영화의 강시복장, 변발, 속칭 'UFO모자'라 불리는 청 관모, 그리고 물만두가 바로 이들의 주식이었다. 요리의 경우는 만주 요리 및 만주족 요리를 참조하는 것도 좋다.
또한 독특한 헤어스타일인 만주식 변발을 선호했는데 이는 몽골인들이나 튀르크인들이 선호하던 긴 머리를 두 갈래로 땋는 장발식 변발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서 머리를 거의 다 밀어버린후 한 갈래의 머리카락만 땋는 대머리식 변발이 유행하였는데, 당대로선 매우 파격적인 스타일이었다. 전자를 알타이식 변발, 후자를 퉁구스식 변발이라고 한다. 알타이식 변발은 몽골군의 이미지를 퉁구스식 변발은 황비홍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될 듯.
음력 8월 26일은 절량일(絶粮日)이며, 이날 만주족은 깻잎으로 계란, 쇠고기, 돼지고기와 함께 쌀을 비벼 싼 다판바오(打饭包)라는 요리를 만들어 먹는 풍습이 있다. 누르하치의 군대가 전쟁 중 음식이 모두 바닥나 아사 위기에 처하는 일이 있었는데, 소식을 듣고 근처 마을 사람들이 깻잎에 밥을 싸서 군사들을 먹여 결국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그 외 어펀(ᡝᡶᡝᠨ, efen)이라는 병자(餅子)[62]에 속한 빵 및 전을 먹기도 한다.
중국의 젠즈와 비슷한 풍습이 있다. 종이를 구하기 어려웠던 만주 전통상 흰색 나무껍질로 만들었으나 한족의 문화가 주류가 되다 보니 한족이 좋아하는 빨간색으로 만들게 되었다.
만주족 고유의 인사법이 여럿 전해진다. 주로 남성이 손윗사람을 만날 때 오른무릎을 꿇고 오른주먹을 땅에 짚는 타천(打千)[63]이라는 인사법이 대표적. (강희제가 할머니 황태후에게 절하는 그림) 주로 중국 드라마에서는 청조 황족, 만인이나 팔기의 높으신 분들에게의 인사로 쓰이며, 팔기한군이나 녹영 등의 한족 군인들의 인사법으로도 자주 묘사된다. 도르곤, 오보이 등 황제도 무서워하지 않는 권력을 손에 넣은 역전의 용장이 이를 행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패기가 넘친다. 그 외에 만주 복식인 장포 차림(관리들은 관복 차림)으로 절을 하면서 맨손이 보이지 않게끔 소매를 쭉 펼쳐내리는 예절도 특이한데, 사극에서는 입은 옷이 원래부터 손을 덮지 않는 짧은 소매여도, 훈련 때문에 소매를 동여맸던 무사들조차도 급히 절을 할 때는 이렇게 억지로라도 소매를 펼쳐주곤 하는데 그 광경이 처음 보는 사람한테는 영락없는 먼지털이처럼 보인다. 청나라 사극에서 심심찮게 옥의 티를 유발하는 요소 중 하나. 황제에게만 행하며 삼전도의 굴욕으로 한국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삼궤구고두례 역시 유명하지만, 의외로 삼궤구고두례는 매체에서는 자금성 태화전에서 황제 앞에 모인 관료들이 절하는 장면에서도 제대로 묘사되는 경우가 드물다. 세번 절하고 아홉번 조아리는 걸 다 보여주기엔 너무 길어서 간략화가 불가피한 듯하다. 그밖의 다양한 예절에 대해서는 여의전 제작과정에서의 궁중 예법 소개 영상도 참고.
5. 종교
고대부터 여진족은 샤머니즘을 숭상했는데 샤먼이라는 단어 자체가 퉁구스어족 언어에서 지식을 가진 자라는 뜻의 샤만(šamán)에서 유래했다. 만주족은 샤머니즘, 대승불교도 신봉했는데,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가 명명한 '만주'라는 명칭은 불교의 문수보살에서 기원한 것이다.청나라를 건국한 이후 티베트 불교도 신봉하게 되었으며, 청나라 황제는 달라이 라마를 스승으로 모시기도 했었다. 그 결과 어웡키족, 나나이족, 다우르족, 만주의 부위 키르기스족 등 청나라를 통해 티베트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건륭제는 러허성(현재의 청더시)에 피서산장을 건설했을 때 사원 중 일부는 티베트 건축물과 비슷하게 짓기도 했었다.
이 외에도 예수회 선교사의 영향으로 가톨릭을 믿는 만주족도 있다. 대표적으로 옹정 연간 호쇼이 간친왕이 세례명이 죠셉인 가톨릭 신자였고 그의 아내도 세례명 마리아를 받은 가톨릭 신자였다. 하지만 청나라 자체가 가톨릭을 그렇게 좋지 않게 보았기 때문에 이들에게 박해와 개종을 강요했다.
6. 한국과의 관계
한국-만주 관계에서 소수민족과의 관계 참조. 유전적으로 한국인과 만주족은 가장 흡사하고, # 과거에는 1000년 이상 고조선, 부여, 고구려와 발해라는 같은 나라의 구성원이기까지 한데다가, 고려, 조선 초기까지는 만주족의 전신이었던 여진족의 많은 수가 여진족을 이끌던 이성계를 따라 조선에 귀화했으므로 역사적으로 가까운 것은 맞다.6.1. 이북의 만주족
북청여진자석각(北青女真大字石刻) 함경남도 북청군 위치 | 만주족의 성지(聖地)인 백두산 양강도 삼지연시 위치 | 이지란(李之蘭) 함경남도 북청군 출생 |
1910년 지역별 양반 비율 | 1937년 지역별 평균신장 | 세시풍속과 음식 |
북쪽의 두 도(평안도, 함경도), 특히 평안도 사람들은 다른 조선 사람들보다 더 굳세고 더 미개하고 더 사납다. 그들 중에는 양반들이 매우 적고 따라서 벼슬아치들도 매우 적다. 사람들은 은연중에 그들을 왕정의 적이라고 믿고 있다. 정부는 그들을 조심히 다루면서도 엄중히 감시하고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지 노상 두려워하고 있는데 반란이 일어나는 날에는 진압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샤를르 달레 신부 <조선교회사>
만주족(여진족)은 고려 말부터 이북 지역에 거주하며 조선사람과 통혼이 잦았고 조선에 귀화하는 이도 많았다.[64] 현재에도 동북 방언 및 육진 방언에는 만주어에서 차용된 어휘가 남아있고 또한 만주어에서 유래된 여러 지명 또한 남아있다.동북방언[65] 또한 함경도에는 이들이 세운 금(金) 왕조의 주요 유적 또한 남아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북청여진자석각(北青女真大字石刻)[66]과 경원여진자비(慶源女眞大字碑)[67]등이다.-샤를르 달레 신부 <조선교회사>
만주족의 만주 요리는 이북 지역의 식문화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만두, 선지[68], 순대[69] 등 대표적이다. 다만 이셋은 실제로는 삼국시대에도 있었다. 특히 만주족은 청나라 시기 명절에 만두[70]를 먹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것이 이북지역의 세시풍속과 음식에도 영향을 끼쳐 현재에도 명절 잔칫상에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는 떡국을 올리는 것과 달리 이북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등지에서는 명절에 만둣국을 올리는 풍습이 생겼다.남북 이야기 만둣국의 기원과 북한의 설날 만둣국 문화
7. 만주족과 현대의 중화민족 정의
중국 사학자들이 만주족을 현대 민족주의 관점에서 중화민족[71]으로 해석하기 시작한 것은 동북공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수십년 전 중소결렬 때부터라고 보는 것이 더 편하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18세기 청나라와 러시아 제국 사이의 국경을 결정한 네르친스크 조약과 캬흐타 조약에 대한 해석은 후대 민족주의와 당대 정치역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1950년대 러시아와 중국의 역사가들은 이 조약들이 1950년대 "형제 동맹"의 뿌리이자, 중국과 러시아 간의 유일한 평등조약이라 보았다. 그러나 1960년대 이래 러시아인들은 두 조약이 만주족이 공격적으로 팽창함으로서 러시아 카자크들에게 강요한 불평등 조약이라고 여겼다. 중국의 역사가들은 러시아인들이 조약에 조인하고도 지속적으로 몽골을 지원한 신의를 저버린 제국주의자들로 간주했다.최근 중국의 민족주의자들은 '중국인'(?)[72]이 점령했다고 알려진 동시베리아 지역의 상당 부분에 대한 영유권을 청이 포기했기 때문에, 조약 자체가 중국에 불리하게 "불평등"했다고 주장한다. 현대 중국에서는 이른바 장백산 문화론이라 하여 만주족 역사 전반을 중국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상황이다. 백두산에 가보면 이 산은 중화민족의 하나인 만주족의 영산이므로 우리 산이다 라는 내용의 설명문을 볼 수 있는데, 이 공정의 일환으로 백두산 부근의 공무원은 만주족의 복장을 입고 있기까지 하다. 물론 이들 중 만주족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백두산 관련하여 북한과의 영토 분쟁 관련한 논란을 차단하려는 목적으로 보인다.
물론 중화 및 중국이라는 개념이 한족과 한족을 정복한 정복왕조들의 정체성이었을 뿐, 몽골계 유목민이나 퉁구스계 유목민들이 우리는 미래에 중국의 소수민족이 되어 중화민족의 일원이 된다는 정체성 따위는 없었으므로, 당시 기준으로 이들은 중국이 아니라 중국을 위협하는 이웃 세력에 불과하다.
8. 여담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명나라를 멸망시키면서 한족을 대신해 중화제국을 자처했고 중국의 영역을 거의 두 배로 늘려놓았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영역으로 확정되지 않았던 내몽골, 티베트, 현재의 신장위구르 자치구까지 온전하게 중국의 영역으로 만들었다.[73] 하지만 정작 만주족이 한족보다 인구수가 압도적으로 부족했기에 만주족도 이걸 알고 한족에 흡수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한족에 흡수되고 말았다. 문화도 중국과 다른데 중원에 들어간 결과가 중국의 영토만 늘려줘서 현대에 비판을 많이 받고 있다. 만주족은 역사적으로나 유전적으로 봐도 중국보다는 한국에 더 가깝다. 고대부터 만주에서 한민족(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이 만주족을 복속하였기에 같은 나라의 민족 구성원으로 함께 했다. 한족은 고조선, 고구려, 발해와 전쟁하면서 만주에서 요서를 오래 점령한 정도다(연, 진, 한, 위 등).[74] 그외의 지역(요동)은 서로 점령하면서 반복했다. 나머진 한민족과 만주족, 몽골계(선비, 거란 등)이 오랜기간 차지했다. 명나라때도 만주 대부분의 지역은 만주 원주민들이 활동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국은 중원 통일을 가장 우선시했지, 만주가 중요한 건 아니었다. 발해와 거란이 망하고 한동안 만주는 여진족(금나라)이 점령하고 있었다. 언어인 만주어도 한국어처럼 SOV 형태를 사용한다.# 이후 일본제국 때 괴뢰국으로 만주국이 잠시 부활하기도 하지만 일본이 패망하고 만주 전략 공세 작전에서 소련에게 멸망 후 소련은 만주를 중국에 반환한다.다만 만주족이 중원으로 이주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들이 근대의 풍파를 이겨내고 독립 국가를 세웠을지는 분명하지 않다. 명청전쟁에서의 보여준 뛰어난 군사적 능력 덕분에 잘 부각되지 않으나, 후금은 인구가 천만도 채 되지 않았으며 지금도 남만주 지역은 산지고 요동과 북만주 지역은 평야가 있어도 춥고 척박한 탓에 농사가 힘들기 때문에 유목활동을 하며 약탈로 경제를 유지하던 약소 국가에 가까웠다.# 오히려 기회가 있을 때 중원 진출을 포기하고 만주에 남았다면 힘을 회복한 중국에 반격당해 멸망하거나[75] 만주 진출을 노리던 러시아 제국에 합병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니면 역사 처럼 일본제국 만주국이 되었거나.
중국통계에 따르면 중국 완안(完颜)씨의 82.4%가 만주족, 17.6%가 한족이다. 중국 佟씨의 49.8%가 만주족, 35.6%가 한족이다. 중국 혁(赫)씨의 46%가 한족, 44%가 만주족이다. 중국 관(关)씨의 51.5%가 한족, 40.3%가 만주족이다. 중국 郎씨의 68.1%가 한족, 26.6%가 만주족이다. 중국 악(鄂)씨의 43.9%가 한족, 26.3%가 만주족이다. 중국 이(伊)씨의 57%가 한족, 25.2%가 만주족이다.
9. 유명한 만주족 인물
현대 중국에서는 학계와 예술계 쪽에 만주족이 많다. 원래는 만주지역에 살던 변방 민족이였지만, 청나라 때 입관한 이후 귀족 신분으로 살아서, 고급 교육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76] 집안의 전통이 되어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금수저로서 고급 교육을 받은 사람이 많다. 특히 연극영화계에 만주족 인사들이 많은데, 청대 경극의 발전사에는 이들이 역할이 특별히 언급될 정도로 기여를 했고, 이 전통이 내려와 현대에도 배우는 물론 제작자, 감독에도 만주족이 많다.- 존 푸(1934 ~ 2010) - 중국명 푸루런(傅履仁). 그의 집안이 원래 사용했던 성은 푸차(ᡶᡠᠴᠠ, 부찰(富察))[77]였지만, 신해혁명 후에 학살을 피해 성을 푸(傅)로 바꾸었다. 미군에서 육군 법무관으로 근무하며 소장까지 지냈다.
- 라오서 (老舍, 1899 ~ 1966) - 유명 작가. 만주성은 슈슈기오로(舒舒觉罗). 문화대혁명의 광기를 피하지 못하고 홍위병들에게 버클이 달린 허리띠로 구타당하고 모욕감에 자살.
- 랑랑 (郎朗, 1982 ~) - 피아니스트. 만주성은 니오후루씨[78]이다. 2008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 나왔다.
- 관지림 (1962 ~) - 홍콩 여배우. 만주성은 구왈기야(과이가)씨이다.
- 후쥔 (호군, 1968 ~) - 배우. 만주성은 예허나라씨이다. 드라마 주원장(2006년 작품)의 명나라 태조 주원장과 건원풍운의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칸 역할로 유명한 중국의 배우. 만주족 배우가 한족 왕조의 국부와 몽골 왕조의 국부를 연기한 셈이다.
- 관샤오퉁 (1997 ~) - 여배우. 만주성은 구왈기야(과이가)씨이다.
- 주해미 (1966 ~ 2023) - 여배우. 만주성은 구왈기야(과이가)씨이다.
- 왕려곤 - 여배우. 만주성은 완안씨.
- 리원량 (1986 ~ 2020) - 의사.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위험성을 폭로하고 공안들에게 체포당하면서까지 환자들을 돌봤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코로나에 감염되면서 요절했다. 우한의대를 나왔지만 원래 고향은 만주족이 많이 사는 랴오닝성 진저우시이다.
- 감청자 (1988 ~) - 여배우. 니오후루씨.
- 류위신 (1997 ~ ) - 여가수. 니오후루씨.
- 바이징팅 (1993 ~ ) - 배우.
- 부대룡 (1976 ~ ) - 배우. 한국의 웹툰 작가이자 유명 방송인인 침착맨과 닮은꼴인 그 분 맞다. 원래 성은 부찰씨이다.
- 전지희 (1992 ~ ) - 탁구선수. 중국에서 귀화한 대한민국의 여자 탁구 선수다.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 왕하이쥔 (王海军, 1978 ~) - 세이프가드 디펜더스가 지목한 국내의 중국 비밀 경찰서 사건의 중국 통일전선공작 총책이다. 푸순시 칭위안만족자치현 태생으로, 2003년 조선족 배우자[81]을 통해 국내에 입국하여, 폭로 직전까지 강남 소재 동방명주중화요리점을 비롯해 王中王여행사 및 王中王종합개발공사 등을 운영했다. 그는 현재 미디어그룹 HG문화미디어 회장으로서, 신화통신의 인터넷 사이트인 신화망 한국총경리(CEO)를 맡고 있다. 그 외에 중국재한교민협회총회 회장 겸 한화중국평화통일촉진연합총회장이기도 하다.
만주족은 아니지만 한국에서 활동했던 유명한 퉁구스 계통으로는 슈퍼주니어의 전 멤버 한경이 있다. 한경은 말갈족 계통의 나나이족 출신이다. 나나이족과 만주족은 같은 남퉁구스계 민족이다.
관련 영어 신문 기사
만주족 씨족 리스트
10. 관련 문서
[1] 만주 황족의 전통 복식을 갖춰 입은 현대 만주족.[2] 청 고종 건륭제 치세때 1등시위 후르차 바투루(Hūrca Baturu) 장김보오(Janggimboo)를 묘사한 작자 미상의 <공신도>.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얼굴의 명암에서 서양화 기법을 확인할 수 있다.[3] 대만의 만주족은 대부분 외성인과 동화되었다.[4] 엄밀히 말해서 말갈, 여진족과 만주족이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다. 이들이 살던 요동 지역은 한반도와 달리 사방이 트인 개방적인 지형이었고 수백년의 역사를 거치며 끊임없이 편입과 이탈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여진족 상당수는 만주족으로 이어졌지만 일부는 한반도의 국가나 중국에 귀화하거나 또는 반대의 과정이 이루어지면서 다른 갈래로 나뉘었다. 사실 역사를 거치며 계속 외부혈통이 유입되는건 한족이나 한민족도 마찬가지지만 만주, 몽골, 중앙아시아 등 지형 장벽이 없는 지역에서는 이런 현상이 특히 두드러져, 고인골을 조사해 보면 인종 자체가 지금과 좀 다른 경우가 많다.[5] 다만 완전히 여진족=만주족 등식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고 시버족처럼 만주족에 속하지 않은 여진족의 일파도 존재한다.[6]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7] 만주의 어원은 확실하지 않다. 문수보살에서 유래했다는 설, 조선 초기 여진족을 이끌었던 이만주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설, 여진족이 살던 지역이 자원이 풍부해 만주라고 불렀다는 설 등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조서] 是日,汗曰:我国原有之名为满洲 、 哈达 、乌拉、 叶赫 、辉发其无知之人称之为诸申。夫諸申乃席北超墨爾根之親誼,與我們何干。此後所有等稱我國原有之名滿洲,若稱諸申,罪之。《만문원당》天聰九年十月庚寅諭曰「我國原有滿洲、哈達、烏喇、葉赫、輝發等名. 向者無知之人,往往稱爲諸申。 夫諸申之號乃席北超墨爾根之裔,實與我國無涉。 我國建號滿洲,統緖綿遠,相傳奕世。 自今以後,一切人等,止稱我國滿洲原名,不得仍前妄稱。」《청실록》[9] 野人. 말그대로 야만인이라는 뜻. 그래서 영어로도 Wild Jurchen이라 한다.[10] 오늘날까지도 야인 여진들의 후손들은 자신들을 만주족보다는 어웡키, 오로치 등 다른 퉁구스계 민족으로 자신들을 정의한다.[11] 우데게족, 나나이족, 어룬춘족, 어원키족 등으로 나누어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같은 퉁구스계에 속할 뿐, 만주족이라는 민족으로는 볼 수는 없는 셈.[12] 이 점이 청나라의 만주족과 금나라의 여진족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금나라의 여진족은 문화적으로 청나라의 만주족보다는 오히려 만주족과 대립하던 야인여진과 더 비슷했다. 또한 요나라를 멸망시킨 후 적지 않은 일부 거란인들과 같이 살면서 여진족은 부분적으로 거란족화되었고, 반면 여진족과 같이 살던 거란족은 혼혈되면서 여진족에 동화되어 흡수되었고, 금나라와 동하가 멸망하고 몽골의 지배를 받으면서 몽골족과도 혼혈되어 몽골의 영향도 받았다. 거란과 몽골 등 몽골계 민족들의 문화도 들어오면서 섞이게 되어 어느 정도 몽골화되는 등 문화적으로 거란과 몽골과도 비슷한 면이 있었다.[13] 명나라시대 만주방면은 이부가 아니라 병부에서 관할했다. 즉 현재로 따지면 특별군사행정구역이었다.[14] 다만 조선에 대한 수탈은 청나라뿐만 아니라 명나라도 마찬가지였다. 가도에 주둔했던 모문룡의 명군은 조선에 대한 수탈로 청나라만큼 미움을 받았다.[15] 한족이 중심이 된 명나라군도 정통제 시절 현재의 호북성 방면의 묘족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성인 남성은 학살하고, 포로로 잡힌 수천명의 남자아이들은 모조리 궁형에 처하는 만행을 저지른바 있다. 학살이 문제가 된 것은 인권의식이 높아진 근대에 들어서와서였고, 전근대 시절에는 동서양을 불문하고 전쟁후에 자주 벌어지던 일이었다. 동시대에 서양에서 벌어진 30년 전쟁만 하더라도 당시 독일 인구 1/3이 사망했다.[16] 인구 100만이라는 칭호가 붙은 도시들도 실제로는 60만이거나 한 경우가 많았다.[17] 난징 대학살 당시 40일 동안 300,000명이 죽었는데 냉병기로 10일 안에 800,000명을 죽일 수 있었는가는 의문이다. 그리고 《양주십일기》 등의 판본이 근대 이후에 나와서 민족주의자들의 선전에 이용되었다는 점도 있다.[18] 한족 출신 만군기 포의 워이갸씨(건륭제의 후궁이자 가경제의 생모인 효의순황후), 퉁갸씨(순치제의 후궁이자 강희제의 생모인 효강장황후) 등 일부 "갸"자가 붙은 성씨들은 원래 한족이지만 만주족으로 편입된 사람들이다.[19] 효강장황후의 가문은 같은 경우에는 원래 한족화된 여진족으로 본래는 만주족이고, 만주 8대 성씨로 유명한 가문이다.[20] 편입되지 못했다는 설도 있으나, 부족 단위가 아니라 개별단위로 팔기군에 편입시켰다고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대륙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만주족은 인구가 적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체제의 안정을 위해 만주에 있는 동족을 산해관 이남으로 이주시키려고 했다.[21] 몽골족, 팔기에 편입된 한족 포함.[22] 물론 청나라 초반엔 효장태후 같은 몽골인도 있었는데, 이는 칭기스칸의 핏줄인 보르지긴(보르지기트) 황금씨족에 한정되었다.[23] 중국은 다민족 국가이기 때문에 민족 갈등을 미디어에서 직접적으로 묘사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이는 딱히 중국이 독재 국가여서가 아니라 다민족국가 대부분이 그렇다.[24] 말이 병영이지 성 내에 성을 하나 더 지은 것이다. 당연히 한인은 출입할 수 없게 했다. 노비나 유모만 빼고. 특히 한족 남자는 해지기 전에 모두 내쫓았다고 한다.[25] "만주족은 하얀 여우와 붉은 개의 자손이다. 그들은 미개하고 야만스러운 종족이었으며, 야생 여우를 사악한 황제로 앉혔다. 만주족의 궁정은 여우 떼와 개 떼가 몰려 사는 곳이다. 또한 만주족은 중국의 아름다운 여인들을 모두 궁궐로 끌고 가서 첩으로 삼았다. 그 때문에 3,000명의 미녀들은 구역질나는 짐승들에게 몸을 더럽히고 말았다." - 홍수전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발표한 글인 <봉천토호격>(奉天討胡檄) 출처: 《어메이징 세계사》/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225쪽[26] 나중에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했을 때도 변발부터 끊었다.[27] 이들은 대륙에서 희소한 박씨였기에 정체성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28] 한군기인 대부분은 1742년에 건륭제가 이들을 한족으로 선언한 이래 출기(出旗) 정책을 시행됨으로써 광주의 주방과 북경 내성을 제외하고는 모두 출기되었다.[29] 사실, 만주족의 청나라 뿐만 아니라 여진족의 금나라가 몽골 제국과 남송에 의해 멸망했을 때 및 몽골족의 원나라가 홍건적의 난 진압에 실패하여 북쪽으로 쫓겨났을 때도 수많은 여진족과 몽골족이 중앙의 방관 아래 그들에게 악감정이 단단히 쌓였던 한족에게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했다.[30] 아이들은 죄가 없다고 처형 대신 궁형을 받아 내시로 만들었다. 정화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31] 하얼빈이나 다롄같은 도시에 러시아풍의 고건축이 많이 남아 관광지가 된 것도 이 시기 사실상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이다. 초기 시베리아 횡단철도 계획도 이르쿠츠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그냥 만주를 자국 영토처럼 관통해 지나가는 루트였는데, 러시아가 청나라를 사실상 호구로 보고 만주는 러시아가 자유자재로 장악할 수 있는 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32] 사실은 건륭제 사후 일어난 백련교도의 난 당시부터 만주팔기의 상태가 막장이었는데, 만주족 총독 포이모 러보오(費莫 勒保)는 만주팔기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조정에 보고했다. "만주족 군대는 규율을 우습게 여기고, 교만하고 나태하며 또한 고생에 익숙지 않으니, 한족 군대인 녹영(綠營)에게 경시당할 뿐입니다." 사실상 그나마 이와 같은 상태로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중국 대륙에서 오래 버틴 것은 정치적으로도 상당한 성과를 낸 숭덕제, 순치제,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같은 뛰어난 능력을 가진 황제들 덕분일 것이다.[33] 청나라는 키메라 제국이라는 말도 들을 만큼 역사를 보면 처음부터 만주족만이 아니라 다른 민족들도 상당히 잘 이용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가면 막장화가 가속화되어 한족이 수적 및 질적 우위를 차지하고 다른 민족들도 만주족에 대한 반감이 강해진 것 때문에 그 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34] 사실, 유목민들 중에서도 머리가 좀 깨어있던 사람들은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엄청난 공포를 느끼고 외국으로 망명하기까지 했다.[35] 그러나 증국번과 이홍장은 과거 시험을 통과한 고급 관료 출신이다. 좌종당은 증국번이 초야에서 발탁한 인재였다. 증국번은 청나라 조정 내에서 후한의 군권을 틀어쥔 조조와 비슷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황제에 오르라는 부추김을 계속 받았으나, 본인 스스로 성리학의 대가로서 성리학의 대의에 충실하려 했음인지 이를 사양했다.[36] 이를 틈관동이라고 한다. 중원에서 만주로 넘어가는 관문인 산해관을 통과해 동쪽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틈관동'(闖關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37] 이것은 태평천국의 난 시점의 일로 당시 청나라의 기존 군사세력이었던 팔기군(정규군)과 녹영(보조군)은 무능하고 부패하기 짝이 없어서 내외의 전란에 제대로 대응을 못했다. 이러다보니 청 황제는 지방곳곳에 교지를 내려 의병을 창설하여 대적(對敵)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때 증국번은 조정의 한족 관리(2품)였는데 모친상으로 상을 치르러 고향에 있던중 황제의 교지를 받고 의병을 조직했다. 그가 만든 의병 '상군'은 특유의 시스템과 무수한 전공으로 절대적인 명성을 떨쳤다. 증국번 말고도 의병장은 많았으나, 그의 상군만이 끝까지 태평천국과 대적하여 난을 진압시킨 주역이 되었고 청나라의 실질적인 정규군 노릇을 했다고 한다.[38] 하지만 이걸 지원한 일본인들은 1차 봉기가 실패하고 2차 봉기를 계획하던 중에 자신들에게 이득이 없을 것 같자, 그들을 가차없이 방치했다. 그렇게 만몽독립운동은 무산되고 나중에야 그것을 빌미로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킨다. 물론, 일제의 진짜 의도는 만주를 먹어치우고 괴뢰 국가를 수립하며 중국 대륙을 정복하는 것에 있었기에 요직은 만주족이 아닌 전부 일본인과 친일 한족이 차지했다. 그래서 만주족은 일제한테 이용만 당했고, 일제 특유의 막장 통치로 인해서 만주족이 차별을 당하자, 일제와 만주국을 적대시하게 된다.[39] 고구려의 평양천도 이후에도 한민족이 만주의 경우 요동 중심으로 분포했기 때문에 그 때 퉁구스계 민족이 대거 유입된 것은 아니다.[40] 만주국에서는 이 표준중국어를 "만주어"라고 했다.[41] '일어서'라는 뜻의 '일리' 하나를 아는 것이 전부였다고 한다.[42] 만주족: 1042만 명[43] 2021년도 통계[44] 청나라의 전성기에도 문자의 옥으로 희생된 만주족 중에는 연좌제에 의한 처형을 피하기 위해, 혹은 머나먼 변방으로 유배되었다가 도망쳐 숨기 위해 한족으로 신분을 세탁하는 이들이 있었다.[45] 흔히 한역 음차로 '포의노'(包衣奴)로 알려져 노비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노비는 아니다. 음차할 때 당시 한인들도 생소한 개념이라 노비를 뜻하는 이름으로 음차했는데, 최근 연구에 의하면 정복당한 한인이 대부분이라고 알려진 기존 통설도 틀렸고 만주인이 오히려 숫적으로 다수로 알려져 있다. 명나라 정복 이전 만주 사회에서 생산 계층을 담당한 이들로 평민에 해당한다. 다른 팔기군이 기적에 포함되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군인 호적인 것과는 차이가 있다. 물론 보오이를 소유하는 건 만주 귀족만 허용된다. 내무부 소속 보오이는 황제 휘하 상삼기에 속하고 나머지는 팔기군 하오기 산하 만주 귀족 보오이로 속한다. 청조에서 이들은 어쨌든 기인은 기인이라 팔기 외의 민인들보다는 조금 나은 위치에 있었으나 입관 이전부터 청조와 운명을 함께해온 명문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낮은 신분이라 일종의 컴플렉스가 존재했고, 출세하여 황족에까지 연결되는 연줄을 확보한 경우 상삼기 신분으로 대기되기도 했다.[46] 팔기군 내에서 한족 출신.[47] -마크 C.엘리엇- 《만주족의 청제국》[48] 나머지는 보오이를 제외하면 팔기몽고 20~22%, 나머지 35~40% 팔기한군.[49] 신립, 이순신이 물리친 자들이 바로 이런 야인여진들이었다.[50] 만주족의 조상인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 시기 때만 하더라도 자체적으로 문자를 만들고 나름의 문명 부족으로 주변의 몽골족을 야만 부족으로 멸시를 했던 역사가 있다. 그리고 거란과 한족의 문화를 받아들여 문화를 높이려고 하기도 했다.[51] 북경 방언과 북경 표준어(보통화)는 약간 다르다.[52] 황실가문인 아이신기오로씨는 수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총 1,115개[53] '전주 이씨' '김해 김씨' 이런 식으로 성을 쓰는 것.[54] 예를 들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경우 코르넬리우스는 씨족의 이름이고 술라가 가문의 이름이다. 코르넬리우스 씨족 자체는 고대 로마의 전체 집정관 중 40%를 차지했을 정도의 최고 명문이지만 정작 술라 가문은 몰락하여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어렸을 때 창녀의 돈을 받아 공부하기도 했다.[55] 그래서 수수기오로, 시린기오로 등의 다른 기오로계 성씨도 있다.[56] 여진족, 만주족 사회에서 해서, 건주여진과는 달리 야인여진은 같은 민족이라기보다는 사실상 외부 야만족 정도의 취급을 받는 경우가 많이 보인다. 만주족 통합 이후에도 야인여진은 만주족이라는 공동체 안에 완벽히 편입되지 못했다. 사실 해서와 건주도 서로 원래는 같은 민족으로 여긴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이들은 아무튼 결국 만주족이라는 공동체로 통합되긴 했다.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의 관계는 규모는 훨씬 작았지만 고구려 초기 계루부와 소노부의 주도권 싸움과도 비슷한 면이 있다. 원래 초기 졸본부여 혹은 고구려 사회에서는 소노부가 가장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결국 계루부를 중심으로 통합된다.[57] 여진족은 외부의 공격을 받을 시 복수라는 명분에 의해 오히려 더욱 똘똘 뭉치고 강해지는 경향이 있었기에 명나라와 조선의 여진족 토벌군은 여진족 부락을 공격할 때 한 사람도 살려두지 않는 '멸족'을 fm으로 삼았다.[58] 현대 몽골의 경우도 근대화되면서 성씨를 새로 등록한 것이다. 그래서 과거와 다르게 성씨를 사용하고 있지만 러시아의 영향 때문인지 서양식으로 이름 뒤에 성씨가 온다.[59] 시간이 흐르면서 만주족도 한자 두 글자에 맞춰서 한족과 유사한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아졌다. 또한 황실에서 공식적으로 항렬에 따른 돌림자를 도입하는 등 돌림자 이름을 짓는 경우도 많아졌다. 그런데 그 돌림자가 한족의 성씨로 쓰이는 글자로 정해지는 경우도 있어서 이름만으로는 한인이 아니라 만인임을 알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60] 고대 게르만족의 경우도 로마 문화의 영향으로 성씨를 쓰기 시작하면서 아버지나 위대한 조상의 이름이 그대로 성씨로 굳은 경우가 많다.[61] 수렵, 유목민족에게 개는 생존에 꼭 필요한 동물이고 굳이 개가 아니라도 말, 양, 소, 낙타 등 먹을 수 있는 고기가 충분한 상황이라 개를 먹지 않는다. 참고로 몽골도 비슷한 이유로 개를 먹지 않는다.[62] 중화식 팬케이크 및 납작빵.[63] 만주어로는 버트허 북담비(Bethe Bukdambi).[64] 재가승, 이지란, 니탕개 등등[65] 아오지탄광이 위치한 아오지는 만주어로 '불타는 돌' 곧 석탄을 뜻한다 또한 두만강은 만주어 '투먼 울라(Tumen Ula)'에서 유래되었다.[66] 함경남도 북청군 위치. 금(金) 선종(宣宗) 흥정(興定) 2년(1218년) 또는 금(金) 해릉왕(海陵王) 정륭(正隆) 3년(1158년) 세워진 것으로 추정.[67] 함경북도 경원군 위치. 여진어 비문 중 가장 오래되었으며 금(金) 희종(熙宗) 천권(天眷) 원년(1138년) 또는 금(金) 희종(熙宗) 황통(皇統) 원년(1141년). 1138-1153년간 또는 고려 의종 10년(1156년)에 세워졌다는 설이 있다.[68] 만주어 성이(ᠰᡝᠩᡤᡳ, senggi)[69] 만주어 senggi duha (senggi 피+ duha 창자)[70] 교자 혹은 물만두[71] 일종의 민족의 상위개념을 만들어 중국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 및 접경지대 주민들(조선족, 태족, 몽골족 등등 나라가 있는 민족 포함) 문화까지 모조리 중화민족의 것으로 귀속시키려는 시도의 일환이다.[72] 신해혁명을 계기로 오족공화를 주장한 그 이후부터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은 커녕 중국어 조차 못하는 몽골족, 다우르족, 어웡키족 등등이 선사시대부터 지금까지 중국인이었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한다. 요즘은 중국 공산당을 지지하는 분청들이 어느새 장제스의 이런 사이비 이론을 따라하고 있다.[73] 건륭제가 그곳을 차지한 준가르부를 멸족하면서 그 공백지에 서쪽에 있던 위구르족과 동쪽에 있던 한족을 불러와 살게 한 것이다.[74] 수나라와 당나라 황실은 선비족 논란이 있다.[75] 국공내전 등[76] 원래 청나라 초기 만주족 남성의 직업은 전원 팔기군에 소속된 군인이었으나 이렇게 만주족이 싸움보다 공부로 방향을 바꾼 다음에는 청나라의 군사력이 약화된다. 결과적으로 아편전쟁이나 태평천국의 난 시절에 팔기군은 약체로 전락하고, 반란진압은 한족의 의병에 의존하게 된다.[77] 몽고계 만주족 가문으로 청나라 때부터 군인, 귀비의 배출로 유명했다. 건륭제 때의 효현순황후나 건륭제 휘하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운 부찰 부항이나 부찰 복강안이 이 씨족.[78] 건륭제의 권신이었던 니오후루 허션의 성이다.[79] Ariel Aisin-Gioro라는 영어 이름도 사용했다. 중국 밖에서 활동한 이력은 딱히 없다.[80] 역시 강희제의 황후였던 효공인황후의 씨족. 이 씨족의 오야 조혜는 건륭제 때 준가르부 토벌에 총사령관으로 출진, 무장으로 이름이 높았다.[81] 배우자가 2명 이상이라는 의혹이 있다.[82] 한마디로 한족과 만주족 혼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