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19:00:24

복드 칸국

몽골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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Олноо өргөгдсөн Монгол улс
Государство Монголия
大蒙古國
파일:복드 칸국 국기.svg 파일:복드 칸국 문장.svg
국기 국장
<colcolor=#ffffff> 1911 ~ 1919(1차)
1921 ~ 1924(2차)
<rowcolor=#ffffff> 1차 성립 이전 1차 멸망 이후
청나라 치하 몽골 중화민국
<rowcolor=#ffffff> 2차 성립 이전 복드 칸 승하 이후
중화민국 몽골 인민공화국
<colbgcolor=#015197> 위치 외몽골
수도 니슬렐 후레(현 울란바토르)
정치체제 전제군주제사회주의 입헌군주제
지도자 젭춘담바 후툭투(복드 칸)
언어 몽골어
종교 티베트 불교

1. 개요2. 역사
2.1. 청나라의 지배2.2. 청나라의 붕괴와 독립운동2.3. 복드 칸의 즉위와 복드 칸국 성립2.4. 중화민국재점령, 잃어버린 독립2.5.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등장과 몰락, 그리고 적군 세력의 점령
3.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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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11년 12월 19일 러시아 제국의 지원 아래 몽골의 왕공[1]들이 청나라로부터 독립하여 세운 칸국이다.

2. 역사

2.1. 청나라의 지배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청나라 치하 몽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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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대칸들을 배출해왔던 내몽골의 차하르부는 만주족후금 건국(1616년) 당시부터 아이신기오로 황실과 혼인동맹으로 일체화되어 있었다. 17세기부터 청나라강희 연간에 할하부의 외몽골 지역을 침략했고, 18세기 건륭 연간에는 오이라트준가르 홍타이지국을 멸망시키면서, 서몽골을 포함한 몽골 전 지역을 정복했다. 그리고 분할통치를 펼쳐 몽골인들을 청나라에 동화시키려고 했다. 물론 내몽골의 차하르 부족은 이미 만주족과 일체화되어 있었으며, 외몽골의 할하 부족과 오이라트족 잔당을 대상으로 동화정책을 폈으나 실상 외몽골은 반 독립지대였다.

2.2. 청나라의 붕괴와 독립운동

20세기에 들어 내우외환으로 청나라가 붕괴될 조짐을 보이자 외몽골의 할하족 몽골인들은 자신들의 독립을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1911년 7월, 외몽골의 왕공들은 왕공회의를 개최하고,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결정했다. 그리고 러시아 제국으로 대표단을 파견하여 외몽골의 독립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다. 이 대표단으로 파견된 사람들 중 한 명이 몽골 불교의 수장인 젭춘담바 후툭투[2] 8세 악왕롭상초이지냠단잔왕축[3]이었다. 그는 훗날 복드 칸국의 군주인 복드 칸으로 추대되었다.

대표단은 1911년 7월 29일 후레[4]를 떠나 동년 8월 15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이에 러시아 정부에서는 8월 17일 특별회의를 개최하여 외몽골 문제에 관한 사항을 논의했다. 여기서 러시아는 몽골의 완전 독립은 불허하는 대신, 청나라 내에서 자치를 유지하게끔 처리하는 방안을 채택했다. 대표단은 1911년 10월경부터 한 사람씩 비밀리에 귀국했다.

하지만 1911년 10월 10일, 청나라에서 신해혁명이 발발하며 중국 내부의 사정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11월 28일, 외몽골의 독립 주도 세력들은 할하 왕공 전체회의를 개최하고 현안을 논의했다. 왕공들은 회의 결과를 몽골의 불교 수장인 젭춘담바에게 보고했고, 젭춘담바는 룬덴[5] 형식으로 이에 화답했다. 이 룬덴을 통해 왕공들은 공통적으로 내•외몽골의 민족적, 영토적으로 통합된 전 몽골의 독립을 주장하며, 몽골의 민중에게 젭춘담바를 중심으로 한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2.3. 복드 칸의 즉위와 복드 칸국 성립

신해혁명 이후 중국의 상황이 악화되자 1911년 11월 30일, 임시정부의 구성을 선언하며 몽골에 주둔중인 청니라군을 추방하고, 대청제국의 몽골 통치 중심지인 이흐 후레를 니슬렐 후레[6]로 바꾸며 수도로 삼았다. 12월 1일 할하 왕공들은 몽골이 청나라로부터 독립했음을 공포하며 대청제국으로부터의 이탈을 선언했다. 또한 내몽골과 외몽골의 유력 부족장들과 왕공들에게 몽골의 독립에 동참하여, 1368년 원나라의 멸망 이후 사실상 공중분해되었던 모든 몽골족의 통합된 독립을 이루자고 호소했다.

1911년 12월 29일에는 젭춘담바 8세를 신생 독립 몽골의 칸으로 추대하면서 마침내 복드 칸국이 건국되었다. 젭춘담바 8세의 칸 즉위식 이후 5부 내각의 발표와 함께 독립에 공헌한 사람들에 대한 논공행상이 이루어졌는데, 신생 몽골은 종교 수장이 나라의 수장을 겸하는 신정국가의 정치체제를 취함에 따라 성직자인 라마승들이 정부의 요직을 차지했다. 이러한 체제를 채택한 이유는 몽골인들이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기 보다는, 몽골인들의 주류 종교인 불교를 중심으로 내•외몽골과 그 부족들을 하나로 묶으려는 정치적 계산의 산물이었다.

외몽골(할하)이 준가르의 멸망 이후 청나라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 이래 약 200년 만의 독립이었다. 외몽골이 독립하자 독립선언에 자극받은 내몽골에서도 도처에서 독립 투쟁이 일어났다. 내몽골의 49개 호쇼(부족 단위) 중에서 35개 호쇼가 외몽골에 귀속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칭기즈 칸 이래 600년 만에 다시 모든 몽골족을 아우르는 거대한 나라가 탄생할 것처럼 보였다. 더불어 이러한 움직임에 호응한 신생 몽골의 독립 군대는 내몽골까지 통합시킬 목적으로 남하하여, 10,000명의 군대로 차하르성을 장악했다. 하지만 외부의 요인이 이러한 움직임을 막았다.

통일된 몽골의 독립을 공인시키기 위해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하여, 수도인 니슬렐 후레에서 러시아 제국의 대표단과 신생 몽골의 대표단이 만났으나,(니슬렐 후레 회담) 러시아는 독립에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하며 자치국 정도에 그칠 것을 요구했다. 그 이유는 몽골이 독립한다면 그 주변에 있는 러시아 제국의 영내에 있는 몽골족들이 봉기할 수도 있음을 러시아 제국이 우려했고, 또한 1912년 4월 25일에 일본 제국과 맺은 세력 분할의 조약에 따라 몽골 지역에 대해 외몽골은 러시아의 영향권으로, 내몽골은 일본의 영향권으로 보장함에 따라 더 이상 몽골의 독립을 무리하게 진행하지 않고도 러시아 제국이 이득을 볼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몽골 정부는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등 구미 열강 9개국에 독립 승인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일본은 러시아와의 밀약으로 인해 묵살했고, 나머지 국가들은 러시아에 이득이 가는 몽골의 독립이 자국에는 이득이 별로 되지 않는다는 판단하에 모조리 묵살했다. 결국 이러한 요건 속에 중화민국북양군벌의 수장인 위안스카이를 중심으로 결집하며, 몽골을 다시 재합병시키려하자 그로 인해 독립마저도 무산될 위기에 처해진 몽골 정부는 수도 니슬렐 후레에 있는 러시아 대표단과의 협상을 통해 외몽골만의 독립이라도 확정받기 위해 300만 루블의 원조와 러시아의 보호를 받는 조건으로 내몽골에 주둔한 모든 몽골군을 외몽골로 철수시키기로 합의했다.(니슬렐 후레 협정)

중화민국의 북양정부는 이러한 상황을 바탕으로 몽골의 독립은 결코 승인할 수 없다는 주장을 고수하면서, 외몽골의 군대가 철수한 내몽골 지역을 러허성과 차하르성, 쑤이위안성 등 3개 성으로 분리시키며 중국군을 주둔시켰다. 그런데 러시아의 입장이 다시금 돌변하여 신중국의 안정적인 정권이 몽골을 통치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후, 위안스카이 정부와 비밀리에 교섭하여 외몽골의 독립을 취소한 뒤, 자치국으로 격하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는 외몽골과의 협약을 명백하게 위반한 것이었다. 항상 러시아의 목적은 몽골의 완전한 독립보다는 어디까지나 외몽골에서 자국의 정치적, 경제적 지위를 유지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1915년 5월 25일 러시아와 외몽골의 국경 마을인 캬흐타에서 러시아 제국-중화민국-몽골 복드 칸국 3국이 맺은 캬흐타 협정에서 자치국으로의 격하가 담긴 조약을 복드 칸국의 몽골측은 러시아가 몽골의 자치 형태마저 불허하고, 중화민국의 영토로 완전히 공인하겠다는 협박에 못이겨 받아들여야 했다. 대신 몽골은 최소한의 이득은 건져 실질적인 중국의 내정 간섭을 받지 않는다는 것, 자체 정부와 군대를 보유할 권리 등을 보장받았다.

2.4. 중화민국재점령, 잃어버린 독립

하지만 1917년에 복드 칸국의 최대 후원자인 러시아 제국이 11월 혁명으로 붕괴하자 중국은 캬흐타 협정을 파기하고, 복드 칸국의 자치마저도 불허하며 몽골을 다시 재합병시키려고 했다.

당시 중화민국은 위안스카이 사후 북양정부의 실세가 된 안휘군벌의 수장인 국무총리 돤치루이가 장악한 상태였는데, 돤치루이는 장훈복벽 이후 국회와 약법 복구를 거부하면서 독재정치를 행했고, 이 때문에 호법전쟁이 일어났다. 돤치루이는 무력으로 중국을 재통일하려했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차오쿤우페이푸가 이끄는 직예군벌과의 마찰이 심각한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돤치루이의 심복인 쉬수정은 안휘군벌의 세력을 확대할 겸 안휘군벌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외몽골 출병을 단행하게 되었다. 1919년, 북양정부는 600명 규모로 구성된 쉬수정의 변방군을 파병하여, 복드 칸국을 공격했다.

일본 제국의 육사 출신으로 책략가에다 야심이 넘치던 쉬수정은 몽골을 그의 영지로 만들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몽골 정부에 대해 자치권을 포기하고 투항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복드 칸과 각료들을 모조리 체포하여 베이징으로 압송하겠다고 협박했다. 또한 중국군을 동원하여 복드 칸의 사원을 포위하고 당장이라도 공격할 준비를 했다. 쉬수정의 군대는 소수에 불과했지만, 그렇다고 러시아의 도움 없이 중국과 전면 전쟁을 할 수는 없었고, 중국군의 무장에 비해 빈약한 몽골의 군대는 저항할 여력이 없어 결국 복드 칸은 백기를 들게 되었다. 약 2,000여 명 정도였던 외몽골의 군대는 무장해제된 채 해산당했다. 1919년 11월 17일에 항복했고, 11월 22일 복드 칸국은 공식적으로 해산되어 중국에 다시 복속되었다. 이때 쉬수정은 거창한 해산식을 거행했다. 몽골인 관료들의 관인은 모조리 회수당했으며, 복드 칸은 50세의 노구를 이끌고 당시 중화민국 대총통이었던 쉬스창의 사진에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몽골인들에게는 그야말로 굴욕이었지만 덕분에 쉬수정은 중국인들로부터 "서북왕"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쉬수정의 지배는 오래가지 않았다.

중앙의 지배권을 두고 1920년 7월 북양군벌 간의 내전인 안직전쟁이 발발하면서 서북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던 중국군이 대거 철수했고, 몽골에는 소수의 부대만이 잔류하게 되었다. 안직전쟁의 결과로 직예군벌에게 밀린 안휘군벌이 몰락하자, 환계에 속했던 쉬수정 역시 서북군을 상실하고, 외국 공사관에서 숨어지내다가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안직전쟁 이후 몽골에 대한 중국 중앙정부의 관심 또한 멀어지게 되자, 중국의 혼란스러운 정치적 상황을 지켜보던 몽골 독립파들은 다시 봉기할 준비를 하게 되었다.

2.5.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등장과 몰락, 그리고 적군 세력의 점령

1920년 10월 2일 제정파 백군의 지휘관 중 한 명인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7] 남작이 이끄는 800여 명의 군대가 몽골 국경을 침공했다. 러시아 내전에서 패배한채 패잔병들과 함께 몽골로 들어온 그는 몽골의 독립을 지원하겠다는 명목으로 몽골인들을 규합했다. 약 2,000여 명 이상으로 늘어난 운게른 남작의 군대는 1921년 2월 4일 중국군을 수도 니슬렐 후레에서 쫓아내고 점령했다. 하지만 그의 점령은 수도에 한정되어 있었다. 운게른은 복드를 다시 칸으로 추대하고, 몽골 정부를 부활시켰다. 운게른이 니슬렐 후레를 점령하는 동안, 외몽골은 크게 러시아 내전으로 쫓겨다니던 운게른 휘하의 백군들이 점령한 수도 근방, 나머지 지역을 아직 점령중인 북양정부 군벌, 지하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몽골인들로 사분오열되었다. 그 혼란속에서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수립된 몽골 최초의 사관학교인 호지르볼란(Hkujirbulan) 군사학교 출신으로 훗날 몽골의 지도자가 되는 담딘 수흐바타르[8]가 몽골의 독립을 되찾기 위해 그를 따르는 동지들과 함께 몽골 인민혁명당[9]을 창설하고, 당의 군대인 인민의용군도 창군했다.

수흐바타르는 당시 러시아 내전에서 승리하고, 러시아 혁명 이후 수립된 신생 국가인 소련과 접촉해 백군을 몰아내기 위한 지원을 요청했다. 소련은 운게른의 백군이 러시아 동부를 다시 혼란에 빠뜨릴 것을 우려하여 몽골 독립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지원을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수흐바타르의 몽골 인민의용군은 소련이 파병한 적군(Red army) 1,600명을 포함하여 백군으로부터 몽골을 되찾을 공격군을 구성했는데 그 규모는 약 10,000명에 달했다. 또한 대포 12문과 기관총 156정으로 무장했으며, 소련으로부터 약간의 장갑차와 항공기도 지원받았다. 인민의용군은 우선 1921년 3월 18일 새벽, 캬흐타에 주둔하고 있었던 2,000여 명의 중화민국군을 기습 공격했다.(캬흐타 전투) 숫적으로는 월등히 우세했지만 사기도 낮은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중화민국군은 변변히 싸우지도 않고 무기를 버린채 도주했다. 이어서 인민의용군은 백군까지 몰아내기 위해 이르쿠츠크에서 수도인 니슬렐 후레로 진격했다.

운게른의 부대는 불교도 기사단이라 불리며, 약 4,000여 명에 대포 10문을 가지고 있었지만 1921년 6월부터 7월 초까지 니슬렐 후레 북쪽에서 벌어진 여러 번의 전투에서 패배했다.(니슬렐 후레 전투) 7월 6일 수도 니슬렐 후레가 해방되었고, 인민의용군은 다시 그곳을 수도로 삼았다. 전투에서 패배한 운게른은 도망쳤지만 결국 포로가 되어 9월 15일 시베리아로 끌려가 군사재판을 받은 후 총살되었다.

​1921년 7월 9일 복드 칸이 다시 군주로 추대되어 사회주의 입헌군주제라는 독특한 형태[10]몽골 인민정부가 수립되었다. 이후에도 약 1년에 걸쳐 외몽골 여기저기에서 할거하고 있었던 백군 잔당과 중국군 잔당들을 토벌하여 이들을 모두 소탕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자력이 아닌 소련의 원조에 의존해야 했기에 상전이 중국에서 소련으로 바뀌게 되었고, 외몽골은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다. 한편 점차 심해지는 소련의 간섭으로 민족주의 계열의 혁명가들이 쫓겨나고 코민테른 출신의 친소파들이 주도권을 쥐게 되면서 소련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심화되었다. 1924년 5월 20일 몽골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복드 칸이 승하했다. 몽골 인민정부는 새로운 대칸을 세우는 대신 입헌군주제를 폐지하고, 완전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기로 결정한 후 몽골 인민공화국으로 개칭했다.

3. 참고 문헌

  • 이평래, 《1911년 몽골 독립과 민족 통합 운동의 초기 과정》, 2008, vol., no.104, pp. 155-190 (36 pages)
  • 네이버 지식백과, "몽골의 역사"

[1] 王公, Jasag, 외몽골의 지도자[2] Jebtsundamba Khutuktu[3] Agvaanluvsanchoijinyamdanzanvanchüg, 1870년~1924년[4] 오늘날의 울란바토르[5] Lüden, 불교 수장의 가르침[6] Niislel Khuree[7] Roman von Ungern-Sternberg[8] D. Sukhbaatar[9] Mongolian People's Revolutionary Party. MPRP[10] 유일한 사례는 아니다. 다른 사례는 1979년~1983년 모리스 비숍 내각 하의 그레나다 인민 혁명 정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