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1-14 21:09:06

소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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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
소비에트 군 소비에트 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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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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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공군
파일:Малая_эмблема_Ракетных_войск_стратегического_назначения_России.png
전략로켓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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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해군
소련의 준군사조직
파일:Soviet_Border_Guard_sleeve_patch.jpg
KGB 국경군
파일:440px-MVD_Badge_(Gradient).svg.png
소련 내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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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군
Soviet Armed Forces
Вооружённые силы СССР
파일:attachment/소련군/sov_f.jpg
소련군(1985년 기준)
상비군 5,070,000명
예비군 13,500,000명
소련 육군
전차 55,260대
장갑차 70,577여대
대포 95,124문
육군소속 헬기 7,341여기
소련 해군
항공모함 5여척
순양함 32여척
구축함 74여척
프리깃함 32여척
핵잠수함 227여척
재래식 잠수함 154여척
초계함 185여척
고속정 430여척
상륙함 32여척
소련 공군
전투기 6,890여기
수송기 2,135여기
폭격기 1,200여기
정찰기 1,000여기
공중급유기 210여기
대잠기 185여기
미사일 5,361여발
핵미사일 발사차량 ss-25 306여발
핵미사일 발사차량 ss-27 54여발

1. 개요2. 수뇌부
2.1. 1941년2.2. 1945년2.3. 1991년
3. 발전
3.1. 창군과 발전 3.2. 종심 작전의 부상3.3. 제2차 세계 대전3.4. 냉전
3.4.1. 공군과 방공군
4. 병폐
4.1. 대숙청4.2. 부실한 병참 능력4.3. 부족한 간부 전문성4.4. 낮은 훈련 수준4.5. 취약한 군인 복지4.6. 정치장교의 전횡4.7. 인명경시4.8. 전시강간
5. 징병제6. 개입한 전쟁 및 분쟁7. 군조직
7.1. 각군별7.2. 독립 군종7.3. 군관구7.4. 함대
8. 훈장9. 군가
9.1. 관련 소련군영상
10. 장비, 차량, 군복11. 한국계 인물12. 기타13. 관련 문서


1. 개요

파일:attachment/소련군/godotgoda.jpg
그대는 해를 거듭하며 강인해지는 소비에트 인민의 군인이라![1]

옛 공산주의 국가 소련국군이었다. 1918년 창설된 소비에트 러시아군(Вооружённые силы Советской России)을 시초로 소련이 성립되는 1922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군(Вооружённые Силы Союза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이 창설되었다. 약칭을 소련군(ВС СССР)이라 하며 1993년 12월 25일까지 존속했었다.[2] 흔히 이전 명칭으로 알려진 노동자와 농민의 붉은 군대(Рабоче-Крестьянская Красная Армия), 약칭 붉은 군대, 적군, 노농적군(Красная Армия, РККА)은 1918~46년 동안의 소련 육군을 지칭하는 것으로 소련군 전체를 지칭하지는 않는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이 붕괴하는 순간까지 미군과 함께 세계 최강의 군대였고,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군대였다. 2차대전 종전시에는 약 1000만, 냉전 말기에도 총병력이 500만 명 이상이었다.[3] 국방예산은 1982년 기준 2000억 달러였다. 2015년 현재 1년마다 엄청난 국방예산을 퍼붓는 그 중국조차도 국방예산이 1132억달러로 80년대의 소련보다 딸린다. 환율 물가상승률 등을 다 따지면 지금 중국의 4~8배까지도 간다. 지금 달러로 거의 7000~8000억 달러 수준. 미군이 2015년 기준 7,000억 달러 수준으로 이 수치와 유사하다.[4]

초기에는 종심작전의 창안 등 큰 발전을 보여주지만 대숙청으로 죄다 무위로 돌아가는 등 불안불안한 모습을 보여주더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추축군을 상대로 혹독한 대가를 치르며 경험과 전략을 배우고 종심작전을 부활시키는 등 크게 성장한다.[5] 승전한 시점에서는 그 군사력이 워낙 강한데다, 자본주의 세력에 대항하여 싸울 것을 명시한 공산당 이론과 힘의 논리에 민감하던 점이 겹쳐 다른 나라들을 불안케 했다. 실제로, 냉전 기간 동안 소련군의 주된 임무는 전쟁발발시 나토군을 분쇄하고 서유럽에 진주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막대한 양의 병력과 전차, 항공기를 준비하고 육군 병력의 70% 가량을 유럽지역 국경에 공격형으로 배치하고 있었다.[6]

2. 수뇌부

2차 세계대전 때까지의 소련군 수뇌부는 스타프카라는 일종의 위원회로 구성되어 있었다.

2.1. 1941년

파일:attachment/stav1941.gif
독소전쟁 발발당시 스타프카의 구성원.

위줄부터 세묜 티모셴코 원수(국방장관), 이오시프 스탈린 공산당 서기장,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원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외무장관, 게오르기 주코프 대장(총참모장),
세묜 부됸니 원수,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대장(해군 총사령관)

2.2. 1945년

2차 세계대전 승리 직전이다.
총사령관 국방장관 총참모장
파일:external/b86a38.medialib.glogster.com/portrait-of-joseph-stalin-1879-hi.jpg파일:external/b86a38.medialib.glogster.com/portrait-of-joseph-stalin-1879-hi.jpg파일:external/img.blogin.com/blogin_00350668_179751301.jpg
이오시프 스탈린 이오시프 스탈린 대원수[7]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
총사령관 대리 해군 총사령관 공군 총사령관
파일:external/img.blogin.com/blogin_00350671_179753871.jpg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uznetsov1.jpg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lexander_Novikov.jpg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원수 알렉산드르 노비코프 공군상급원수

2.3. 1991년

소련 해체 당시인 1991년 기준이다.
통수권자 국방장관 총참모장
파일:external/c510383.r83.cf2.rackcdn.com/mikhail%20gorbachev%208-165x247.jpg 파일:attachment/소련군/E_S_General.jpg 파일:attachment/소련군/General_V_L.jpg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 예브게니 샤포슈니코프 공군 병과 원수[8] 블라디미르 로보프 대장

이 중 국방장관은 8월 쿠데타 이후 임명된 옐친계 인물들이다.

3. 발전

3.1. 창군과 발전

러시아 제국러일전쟁 패배와 국내 혁명운동으로 나라 꼴이 말이 아닌데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결국 전비 때문에 제정이 몰락하고 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임시정부는 제정에 뒤이어 전선을 맡았으나, 결과적으로 전황은 더욱 나빠졌고, 이 틈을 타서 볼셰비키 당이 휘하 소수병력을 이용하여 정권을 전복시키면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 탄생했다.

그러나 새로 정권을 잡은 이들은 대다수가 군대나 군사에 정통하지 못한 비전문가들이었다. 게다가 아직 불안정한 정권의 상태를 볼 때, 군대처럼 힘있는 집단이 반란을 시도할 경우 체제가 전복되는 것도 가능했다.[9] 영관급 이상의 경험많은 장교들은 대부분 반혁명세력의 편에 섰고, 이들은 공산당에 대항해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볼셰비키 당의 무력은 병사 소비에트와 연결된 적위대뿐이었다.

그 후로 러시아는 1918년부터 20년까지 적백내전에 돌입하며, 실제로 그 후유증은 20년대까지도 계속됐다. 그 불안한 틈을 타고 다른 나라 군대들이 러시아를 침범하기도 했다. 미군, 일본군도 백군을 지원하며 공산세력과 싸웠지만 결국 승리는 붉은 군대에게 돌아간다.

초기의 적위대는 마르크스주의의 이념에 따라 '인간은 모두 평등하므로' 계급제를 완전히 없애려 했다. 붉은 군대의 전신으로도 볼 수 있는, 병사 소비에트에서 지휘관은 선거로 뽑히던 전통 때문에, 적위대의 지휘관은 선거로 뽑혔다. 그러나 이 때문에 사병 출신들이 지휘관을 맡게 됨에 따라 내전 초기에 적위대는 연패했다. 레온 트로츠키는 1918년 적위대를 개편해서 장교선거제도를 폐지하고 위에서 능력자를 지휘관에 임명하는 체제로 바꾸고, 이름을 "노동자와 농민의 붉은 군대"로 개칭했다. 문제는 "능력자"들이 대부분 러시아 제국군 장교출신이었으므로, 이를 감시하게 도입한 것이 정치장교 제도. 그러나 트로츠키 아래서 계급제도는 끝내 내전이 끝날 때까지 도입되지 않았다.

그래서 군대에는 계급제에 의한 통제가 사라지고 부대 내에는 오로지 '분대장,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 같은 직책만이 존재하게 됐다. 예외는 장군 뿐이었기에, 군의 계급은 사실상 '병사, 장군' 이 둘 밖에 없었다. 사실 고급 장교들 사이에서는 그런 직책이 계급 역할을 하기도 했다. 보병이나 기병들로만 싸운 적백내전에서 승리하는 등, 처음에는 이런 체제가 그럭저럭 돌아갔다. 그러나 문제는 군이 복잡해지면서 불거졌다. 복잡한 조직에서 너도나도 같은 계급이다 보니, 지휘관의 명령을 듣더라도 병사들이 잘 따르려 하지 않게 된 것이다. 중대장이나 대대장 이외엔 중간 책임자가 없었기에 병사들은 평상시에도 통솔하기 힘들었지만, 전시에는 더더욱 통제가 불가능했다. 누구 하나 명령이 제대로 수행되는지 안 되는지 관심없었고, 누구의 책임도 아니었다. 때문에 트로츠키에 이어 붉은 군대의 총사령관[10]이 된 미하일 프룬제는 이를 개혁하려 했으나, 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게 되면서 이 문제는 계속 남아있었다. 그동안 붉은 군대는 500만 대군으로 성장한데다가, 기갑부대, 공수부대와 같은 새로운 병과가 창설되면서 계급의 필요성이 절실히 제기되어, 결국 1935년 붉은 군대에 계급제도가 마침내 도입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적백내전의 경험은 소련의 군사학과 군사 사상을 크게 발전시켰다. 1차대전보다 훨씬 광활한 지역에서 내전을 겪은 소련군은 부족한 예비 전력을 철도로 이동시키면서 전선 곳곳을 틀어막았고, 간신히 패배를 면할 수 있었다. 연이어 위협받던 전선을 증강하기 위해 철도로 대규모 부대가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적백내전은 또한 제대 전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일부 보병 사단들은 전쟁 기간 중에 다섯 차례나 여러 전선을 오가야 했다. 이 경험을 통해 모든 참전자들은 준비된 전력과 전략 예비대의 필요성을 뼈아프게 인식하게 되엇다.

내전 과정에서 소련군 1세대 지휘관들은 소수의 전력으로 광대한 공간을 방어한 대다수의 전투들을 큰 경험으로 삼아, 이와 같은 전장 환경에서 모든 전술적인 작전들을 전체 전역으로 통합하여, 적 후방 깊숙한 목표를 겨냥했다. 그리하여 붉은 군대는 승리의 2가지 원동력은 특정 지역에 적을 압도하는 전력을 집결시키는 것과 산개한 적을 섬멸하기 위한 후방 진출, 돌파, 포위 등의 신속한 기동에 있음을 깨닫게 되어 당시의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먼저 기동전의 필요성을 깨닫고 발전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기동의 전제 조건은 고도로 기동화된 공세 전력이었고, 적백 내전에서는 이점을 무장 열차와 차량, 특히 기병 전력에 많은 부분을 의존했다.

3.2. 종심 작전의 부상

적백 내전이 끝난 후 붉은 군대는 전선군 내지 야전군 규모의 작전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1차대전 시절같은 1회의 전략적 승리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닌 지속적이고 누적되며 연속적이고 장기적인 작전을 연구하게 된 것이다.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폴란드의 비스와 강까지 진격한 미하일 투하쳅스키는 위와 같은 소련 군사학계의 논의에 공감하여 블라디미르 트리안다필로프의 '충격군' 이론을 받아들여 이를 자신의 '광정면 동시접촉 이론'과 결합시킨 소련식 기동전 전술인 종심전투교리를 완성시켰다. 투하쳅스키와 트리안다필로프는 현대식 군대는 한 번의 결정적인 전투로 무너트리기에는 너무나 규모가 방대하고 피해로부터의 회복도 빨라서 공격자는 일련의 연속적인 공세를 펴야 하며, 각 공세는 직후에 적 후방에서의 신속한 전과확대로 연계되거나, 방어자가 전력을 재정비할 때는 새로운 전투로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전투를 일반적인 전략의 문맥에 놓고 본다면, 당시 소련 군인들은 개별 전투의 전술과 전체 전쟁의 전략 사이에 위치한, 용병술의 새로운 수준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중간적인 수준은 알렉산드르 스베친이 저술한 책 제목인 작전술이라는 이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작전술은 전체 전략적 작전이나 전체 전역의 맥락에서 대규모 부대의 작전을 기획하고 조율하는 상급 지휘관들의 영역이자, 전략적 목표 달성을 위한 일련의 연속적인 군사 행동이다. 참고로 영어로는 'Operational Art'.

모든 전선에서 충분한 밀도의 부대로 적을 고착시킨 후(견제군의 역할) 선택된 지점을 보병, 포병, 전차가 결합된 충격으로 돌파할 수 있으며, 그 간극을 통하여 항공기 및 기계화 부대의 지원을 받는 기동군을 적 후방에 투입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종심전투교리는 1929년부터 소련군의 표준 전술로 정착됐지만 아직 공업화되지 않은 소련에게는 다소 꿈같은 전투교리였으며 그 영역이 전술 차원에만 미쳤고 아직 작전술의 범위까지는 발전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당시까지는 투하쳅스키 이론을 지지해 준 스탈린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종심전투 교리의 실행을 위한 대규모 기갑세력 양성 등 붉은 군대의 현대화 계획을 적극 집어넣었다. 이를 통해 1936년에 이르면 마침내 소련 군사학계의 최고 걸작인 종심작전이 탄생하게 되었다. 종심작전은 현대의 러시아군중국 인민해방군, 조선인민군 등의 공산권 표준 전투교리로 자리잡게 된다.

당시 영국의 리델 하트와 프랑스의 샤를 드 골기동전 교리를 상부에 내놓았지만 번번히 무시당하고 독일의 하인츠 구데리안 또한 그다지 대접받지 못한 시대임을 감안하면 종심작전의 등장은 큰 발전이었다.

파일:attachment/소련군/soviet-tactical-exercising-1935.jpg
전술 훈련중인 소련군. 1935년.

그러나 결국 대숙청의 칼바람이 붉은 군대에 몰아닥쳐서 투하쳅스키가 처형당하자, 종심작전은 철저히 부정당하게 되었고 소련의 군사 사상은 크게 퇴보하고 만다. 그 결과는 겨울전쟁독소전쟁 초반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혹독한 경험을 치른 소련군은 게오르기 주코프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를 비롯한 숨은 투하쳅스키 지지자들에 의해 종심작전이 부활하고(앞으로 종심작전을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마침내 베를린을 점령해 나치 독일을 패망시키게 된다.

당시 미국에서 가상적국이었던 소련군의 군사 교리를 특수작전교범(Special tactics)이라는 이름으로 연구했다. 그 결과를 러시아어에서 영어로 번역해 OPFOR Battle Book ST 100-7 (156쪽 분량) 공개했다. 그래서 그 내용을 공부할 수 있다.

다음은 소련군 작전술의 핵심들이다.
  • 기동을 통해 적을 물리친다.
  • 적이 대규모로 유기적인 활동을 할 수 없도록 방해한다.
  • 적이 상황에 맞춰 반응하는 것을 막는다.
  • 군단 이상 단위를 갖는 적의 조직과 통제를 부순다.

이를 위해서 강조되는 요점은 다음과 같다.
  • 기동성
  • 속도
  • 우선권
  • 유연성
  • 주 목적 달성에 집중할 것
  • 기습
  • 전장 정보
  • 전투력의 유지
  • 효과적인 조직

3.3. 제2차 세계 대전

1941년 6월 독소전쟁(대조국전쟁) 발발 이후, 12월 모스크바 전투 직전까지 약 5개월간 소련군이 날려먹은 병력은 사상자와 포로를 합해 약 600만으로서, 전쟁 직전의 총전력을 거의 탕진했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여기에 장비의 손실도 엄청나서 전투기와 전차의 손실량은 각각 2-3만대에 육박했다. 이는 여러 원인이 있지만 첫번째로 대숙청으로 조직력과 지휘력이 매우 약화된 점, 두번째로 부적절한 병력 배치, 세번째로 2년간 실전경험을 쌓아 최강의 군대로 성장한 독일군의 가공할 전력 등을 들 수 있다.

이렇게 엄청난 병력을 날려먹었기 때문에 야전의 허리가 되는 경험많은 초급장교와 부사관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으며, 전쟁이 계속되면서 전혀 훈련을 받지 않은 초급장교들과 부사관들이 일선지휘를 맡으면서 1943년 말까지 독일군에 비해 몇배나 많은 사상자를 냈다.

그러나 이렇게 버티면서 사관학교가 아닌 실전에서 교리를 학습하게 된 이런 초급장교나 부사관들의 레벨업이 계속되고, 살아남은 사병들이 경험을 쌓으면서 초급장교나 부사관으로 계속 승진함에 따라 소련군의 전력도 계속 향상된다. 특히 러시아 혁명 이후 전문적인 교육을 받고 대숙청 이후 쾌속 승진한 40대 고급지휘관들[11]의 지휘가 세련되어 가면서 소련군은 점점 소프트웨어면에서 독일군에 맞설만한 진용을 갖추게 되었다.

소련은 이미 1941년 전쟁 발발 직후부터 독일이 1943년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있던 총력전 전산업 총동원체제를 실시하였다. 독일군의 진격이 예상되는 곳에서는 아예 공장 전체의 설비가 며칠만에 해체되어 우랄 산맥 동쪽에서 조립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무기의 대량생산을 달성함으로써 초기에 손실했던 장비와 무장을 만회하고도 넘칠만큼 보급을 확보하게 되었다. 분명히 개별무기의 성능은 뛰어난 기술력을 바탕으로한 독일군이 우수했지만, 소련은 개별 성능은 독일에 미치지 못해도 생산비용, 소비자원, 생산물량 등을 고려한 총합은 독일보다 우수함으로써 하드웨어에서도 우위를 점하는데 성공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기점으로 독일군 지휘부는 소련을 군사적으로 정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특히 미군이 개입한 이후로는 소련의 정복이 아니라 전선 안정화를 목표로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43년 여름 소련군의 주력을 섬멸하기 위한 치타델 작전을 실시했다가 위와 같이 기량이 향상된 소련군에게 결정적으로 패하면서 동부전선의 균형추는 소련측으로 기운다. 이후 소련군은 투하쳅스키가 생전에 꿈꾸었던 종심작전 교리를 십분 발휘하여 독일군을 몰아붙여 결국 승리했다. 소련군은 바그라티온 작전, 비수아-오데르 대공세, 만주 작전에서 인상적인 기갑 웨이브 공세를 발휘함으로써 서방측에게 깊은 인상과 함께 공포감을 줬다.

3.4. 냉전

냉전이 시작되자 소련은 미국에 위협을 느끼고 동유럽 위성국들과 함께 집단방위동맹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 결과물로 나온 것이 바르샤바 조약기구였다. 소련은 미국으로 상징되는 서방세력과 직접적으로 맞설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었으며, 그리하여 동유럽 위성국들로 하여금 완충지대를 만들어서 2차대전과 같은 사태를 다시는 겪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미국은 소련의 두 배의 국력을 자랑하고 있었으며, 2차대전에서도 소련의 생산시설은 반 이상 파괴되었지만, 미국은 피해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소련이 단시일 안에 미국의 경제력을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재래식 전력을 대규모로 확충하는 것보다는 핵개발이 더 싸게 먹히므로, 흐루쇼프는 돈이 많이 드는 재래식전력을 줄이고, 이 재원을 경제개발에 투입하는 대신, 비교적 돈이 적게 드는 핵무기와 대륙간탄도탄으로 전쟁 억지력을 확보하려 했다.[12] 이는 2차대전으로 비대해진 군부의 반발을 불렀고, 흐루쇼프는 주코프를 해임함으로써 일단 군부의 반발을 눌렀지만, 군부의 불만은 지속되었다. 이렇게 핵무기와 로켓을 강조하여 만들어진 결과물이 스푸트니크차르 봄바이다.

소련 말기에는 고르바초프 집권 이후 실시한 개혁과 혼란 속에 1991년 소련은 붕괴하였고, 소련군도 공중분해되었다. 국방비나 병력이 전성기의 1/10까지 줄어들고, 국방 시스템이 모조리 붕괴된 나머지 2000년대 중반까지 그 후신인 러시아군은 안습이었다. 이 상황은 푸틴 집권 이후 나아졌다. 자세한 것은 러시아군 참조.
  • 소련 육군
  • 소련 해군: 전통적인 대륙국가였기 때문에 육군에 비해 해군은 상대적으로 미약했다. 그래도 냉전 시대에 소련 해군미 해군의 뒤를 이은 세계 2위의 해군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미국을 제외하면 그 어떤 나라도 소련 해군의 전력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문서 참조.

3.4.1. 공군과 방공군

냉전기간 동안 일단 소련은 항공기의 숫자 면에서는 미국을 훨씬 앞지르고 있었으나, 질적 전력면에서 뒤쳐져 공군력에서 밀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2차 세계대전 시기 독일 공군에 워낙 호되게 당한 것 때문에 대공 미사일과 화기류 개발에 큰 관심을 쏟았다. 2차대전에서 소련 공군을 지휘한 알렉산드르 노비코프 공군원수는 흐루쇼프에게 대규모 공군 건설을 제안했으나, 흐루쇼프는 국방비를 줄이고 싶어했기 때문에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렇기 때문에 방어에 치중하여 대공미사일과 대공무기 개발에 열심이었고, 특히 대공미사일 성능은 뛰어났다. 또한, 세계 최초로 위상배열 레이더를 탑제한 MiG-31을 실전배치하는 등, 날조된 이미지와는 달리 결코 항공기성능에서도 서방권에 뒤지지 않았다.
소련군은 공군과 방공군을 분리하여 방공군에게 방공전투기 + 고고도 대공미사일, 군사위성을 담당시켰다. 우주군도 방공군 소속이다. 일반 공군에는 전투기와 전략, 전술폭격기를 운용하게 했다. ICBM이나 중거리탄도탄 같은 경우는 전략로켓군에서 담당했다. 그 이외에도 특이한 점은 수송기 세력인데, 워낙 영토가 넓다보니 유사시 신속대응군 역할로서 공수부대의 규모와 임무가 매우 중요하였다. 때문에 수송기의 성능과 그 숫자 등에서 우월한 경향을 보인다. 냉전기에 생산된 소련 수송기들은 냉전이 끝난 지금까지도 민간화물분야에서 독보적으로 자주 사용될 정도.

4. 병폐

4.1. 대숙청

위에 언급한 정치장교들은 소련군의 전투력을 작살내는 요소였고, 투하쳅스키를 비롯한 장성과 장교들은 이 때문에 정치장교를 없애던가 권한을 줄이려 노력했다.

또한 우크라이나 대기근에서 스탈린은 소련군을 동원해 우크라이나를 철저히 탄압했고, 수백만의 아사자가 발생했다. 공산주의 이념적으로도 군대는 인민을 위한 것이고, 당시 정식 명칭조차 '노동자 농민을 위한'인 붉은 군대가 이 따위 짓을 하는걸 본, 혹은 참여한 장교들은 스탈린에게 반감을 품었고, 얼마 안되던 당 소속의 군인들이 스탈린에게 반대표를 던지기도 했다. 이는 스탈린의 의심병을 부채질했고 결국 대숙청이 벌어졌다.

4.2. 부실한 병참 능력

겉으로 드러나는 숫자나 전투력은 무시무시했지만, 이에 반해 병참능력이 부실하다는 주장이 있다.

당시 바르샤바 조약국은 소련을 제외하면 기껏해야 폴란드,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등이었던 반면, 나토 가맹국은 메이저급만 따져도 미국, 서독, 영국, 이탈리아 등에 프랑스도 준 가맹국이었다[13]. 소련 한 국가만 보면 1대 1로 미국조차 밀릴 정도로 우월했으나 전체 경제 규모나 국방예산 규모로 보면 나토 가맹국이 바르샤바 조약국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미국과 NATO 가맹국들을 능가하는 군사력을 지니려 했던게 문제로, 결국 이는 무리하게 키운 체급을 유지하느라 군수지원, 의료지원 같은 지원 분야의 부실로 이어졌다.

또한 의료지원과 군수지원 체계의 경우 기껏해야 2차 세계대전 때보다 살짝 나은 수준이었다. 위 블로그의 내용 중에서도 나오는 이야기지만 대조국전쟁 때보다는 나은 의료지원을 받고 있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아프가니스탄에서도 풍토병으로 작전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해당 자료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전체 파병병력의 67%에 달하는 41만 5천명의 인원이 심각한 질병으로 인해 치료받은 수준이다. 게다가 이중에서 폐렴은 무려 20%, 말라리아 4%에 이질[14] 등도 많다. 참고로 2차 세계대전 동안 소련군의 질병 입원 비율은 35% 정도.

비전투용 군수장비가 모자란 면은 소련 특유의 생필품 부족현상과도 직결되는 문제였다. 계획경제의 부작용 때문에 어떤 분야는 물자가 넘쳐나는 반면, 다른 분야는 심각한 부족이 벌어진다. 예를 들어 1980년대, 소련군의 포격 훈련량은 세계 최고였을 정도로 수천달러짜리 포탄은 수없이 허공에 퍼부었지만, 정작 군인들은 치약의 보급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핵심 장비를 적대하는 서방에서 수입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잠수함용 에어컨이나 정밀공작기기를 소련에서 생산하기 힘들어서 서방에서 구입한 경우 도 있다고 한다.[15] 특히 에어컨 같은 경우는 원자력 잠수함 내부 온도조절에 필요했기에 해군참모총장이 '서방제 에어컨을 급히 입수해달라'같은 요구를 했을 정도.[16]

마지막으로 소련의 대해외 식량 수입 제 1순위가 미국이었다. 다만, 소련은 미국 다음으로 농업생산량 높은 나라였으며, 소련은 기본적으로 식량은 자급자족을 유지하고 있었다. 소련이 미국으로부터 식량 수입한 이유는 육류소비 감소를 방지하기 위한것이였지 무슨 미국 식량 아니면 소련이 굶어죽을 정도로 농업 생산못하는 그런 나라는 아니였음을 감안해야 한다.CIA 보고서 1921년에 레닌이 미국으로부터 식량 수입을 지시한 것을 시작으로, 2차 세계대전 동안에도 미국의 원조로 부담을 덜었다. 그리고 흐루쇼프 집권기인 1950년대와 60년대 초에 걸쳐서 시베리아와 카자흐스탄 일대의 광할한 처녀지를 활용하여 식량생산량을 크게 늘리려는 시도를 해봤지만 이건 처참하게 실패로 끝났고, 이후로도 농업생산성을 크게 개선하지 못했다. 물론 자영지에서 생산되는 식량들은 그런대로 생산되기는 했지만[17] 사실 1960년대 이후로는 소련인들이 먹는 육류와 곡식량은 서방세계에 비해 크게 차이나지 않았는데,[18] 문제는 농업 생산 효율이 서방의 절반 수준도 안되었다. 그중에서 핵심을 차지한 것이 계획경제와 협동농장 특유의 비효율성때문 이었다.

4.3. 부족한 간부 전문성

소련은 가용 예산 이상의 군사력을 보유하기 위해 징병제를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급여를 주어 전문 인력을 모병하기보다는 2년제 징집 병력으로 인력을 끊임없이 채워넣는 방식으로 군을 운영했다. 이는 심지어 부사관 계급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명목 상으로는 부사관 계급이 존재했지만 이들 역시 전문 직업군인이 아니라 오래 복무한 병사들에게 주어지는 계급일 뿐이었고 의무 복무가 끝나면 그냥 전역하였다. 결국 초급 장교들이 부사관의 역할까지 떠맡아 장교단의 업무 강도가 과중해졌고, 그에 따라 이들의 본업인 군 지휘에 대한 집중도와 전문성은 역으로 하락해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장교는 수 년마다 보직과 근무지를 옮겨가며 근무하다보니 결국 한 부대에 수 년 이상 머무는 인원이 사실상 없었다. 이는 특히 정교한 최신 군사 장비를 사용하는 부대에서 심각한 문제들을 만들었는데, 해당 장비를 가장 오래 다뤄본 병사도 2년 정도가 한계였고 장교들도 근무지를 자주 옮기다보니 해당 장비에 대한 미숙련 인력만이 부대에 남고 말았다. 괜히 서방 국가들의 군대가 부사관 같은 하급 간부들을 조직의 중핵으로 여기고 육성하는 것이 아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까지는 그래도 베테랑 병사들이 부사관 역할을 실제 수행하여 주코프 원수 역시 이들을 군대의 등뼈라고 칭찬하였으나, 전후 이들은 전역 해버리거나 장교로 임관하면서 부사관 계급이 순식간에 유명무실 해졌다. 소련도 이런 문제점은 인지하여 1970년대쯤 부터 준사관 제도를 육성하려 했는데, 여기서도 문제가 있었다. 이 준위 계급은 2년 병사복무를 마친 자들이 지원 가능했는데, 2년 복무를 마친 병사들 중에서 우수한 자원은 이미 장교로 지원하고 있었던것. 결국 군에서도 준위 계급을 장교로 임관 못하는 2급 자원정도로 취급하였고, 소련이 멸망할때까지도 준위계급의 봉급이나 처우등이 서방의 부사관 계급에 준했던 적은 단 한번도 없다고한다. 때문에 서방군대를 방문한 소련군 장성들이 부대 부사관들을 보며 매우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이것저것 질문을 많이 던졌다고 한다. 이후 소련 멸망뒤에 러시아군이 부사관 계급을 부활시키려고 노력했으며 2008년쯤에야 제대로 된 부사관 계급을 마련하게 된다.

4.4. 낮은 훈련 수준

열악한 군수능력과 조직체계상의 약점은 소련군의 훈련수준 역시 저하시켰다. 물론 북한군처럼 막장은 아니었지만 훈련량은 확실히 부족했는데, NATO군 전차승무원이 일반적으로 연간 100~200발의 전차포 교탄을 소모할 때 소련군은 정예사단이 연간 50발, 보통은 20여발 수준의 전차포 사격을 수행할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엔진 신뢰성 및 부품 수급 문제 때문에 전차 기동훈련은 끽해야 중대급이었으며, 전차병의 훈련 수준도 NATO군에 요구되는 것보다 크게 낮았다.[19] 미군 M1 에이브람스 전차병들이 2,000m 거리에서 등장한 표적을 12초 이내에 90% 확률로 격파할 것을 요구받은 데 반해 소련군은 최대유효사거리 내의 표적을 60초 이내에 격파하는 것이 기준이었다. 차탄 사격 시간도 미군은 5초, 소련군은 12초. 독일군이나 네덜란드군의 레오파르트2도 미군 M1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성능상 서방 신예 3세대 전차와의 비교는 불공정하다고? CAT '85의 성적을 보면 M60 패튼이나 레오파르트1, 치프틴 같은 구형 전차들의 퍼포먼스가 3세대 전차들보다 좀 떨어지긴 했지만 표적과 교전하는 데 16.2초 이상 걸린 전차는 단 하나도 없었다.

소련군은 충분한 교탄과 부품을 일선에 보급할 능력이 없는 것은 물론, 부대의 등뼈라고 할 수 있는 부사관을 단기 징집으로 유지하는 조직체계상의 문제 때문에 충분한 훈련도를 확보할 수 없었다. 전차소대 내에 2년 이상 야전에서 근무하면서 훈련한 병력이 1/4을 넘기는 소대는 극히 드물었으며, 사실 2년 이상 복무한 인원 자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징집병을 유지하면서도 전문적 부사관을 육성해 부대의 연속성을 확보하는 서유럽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

심지어 이런 문제는 특수부대인 스페츠나츠도 피해갈 수 없었다! 스페츠나츠 또한 전원이 2년 복무하는 징집병 중에서 임의로 인원을 선출하였고, 이들 부대의 부사관 역시 한국군의 병장 계급 비슷하게 징집병 중에서 복무기간이 긴 병사에게 그냥 주어진 것. 그나마 스페츠나츠의 명성에 관심을 보이고 지원하는 병사도 많았다고 하며, 이들을 정규직 부사관 학교에 보내어 못 버티는 사람은 탈락시키고 나머지를 훈련시키는 식으로 인적자원의 질을 좀 더 높여보려는 시도는 하였다. 하지만 이들 대다수의 질적 수준은 소련군 상층부의 인식에서도 조금 더 특수한 훈련을 받은 공수부대 병사 정도였다. 아프가니스탄의 실전에서 일반 보병부대보다 이들의 전과가 높았던 것은 사실이나, 이는 이들이 체계적인 훈련을 잘 받은 것보다는 임무의 특성상 소련군에서 이례적으로 자율판단과 행동을 허가받았기 때문으로 평가된다. 소련군 내에서 몇 안되는 '병사 개개인의 창의성, 독창성'을 인정받은 병종이라 게릴라전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유연하게 대처했다고 한다.

실제로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 스페츠나츠들과 교환훈련을 하게된 미군 특수부대원들이 이들의 사격, 전술 능력에 대하여 "명성만큼 대단하지는 않다"라고 평가를 하였으며, 그 분야에서 도리어 여타 동유럽 특수부대를 더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20] 실제 사례에서도 인질구출 작전에서 인질의 안전보다는 인질을 잡은 테러범을 때려잡는데 더 집중한다거나, 버스 인질극 제압 시범을 보일 때 수류탄과 폭약으로 버스를 아주 박살내버리는(...) 동영상은 유튜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정작 전문적인 특수부대가 나온 건 소련이 붕괴한 뒤 러시아가 되고 나서 체첸 저항세력과 마피아를 상대로 한 저강도 전쟁이 일상화되면서부터다. 일례로 1997년 스베르들롭스크 주에서 열린 스페츠나츠 대회(Spetsnaz Competition)에서 미군 특수부대 최초로 참가한 델타포스 출신 전술사격 교관 마이크 페넌 같은 경우 스페츠나츠를 "실력에 비해 많이 과장됐다"고 평가했다.

4.5. 취약한 군인 복지

러시아 역사를 통틀어 군인들은 러시아 제국 때부터 대우가 좋지 못했다. 당시 러시아군 대우는 육, 해군을 가리지 않고 정말 열악해서, 포템킨 호 사건 같은 반란이 터지기도 하였다. 오죽하면 1917년 2월 혁명 당시 러시아군에 식량 배급을 달라며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던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자신들의 가족 등 지인들을 발견한 군인들이 그대로 시위대에 참여하면서 러시아 제국이 전복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러시아 제국군은 제정 말기에 자국민들로부터 학살자, 전쟁범죄자 소굴, 개새끼 수준의 취급을 받았고, 소련군도 이것의 영향으로 나치 독일이 쳐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자국민 내에서의 평가가 썩 좋지 못했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피의 일요일 사건과 같이 권력을 지키기 위해 민중들을 향해 발포하는 일조차 서슴치 않았고, 이러한 모습은 소련의 선전 영화였던 전함 포템킨과 같이 비인간적으로 그려질 정도였다. 소련군 역시 공산당 독재 아래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받으면서 1962년 노보체르카스크에서 시위를 벌이던 자국민에게 발포, 26명이 숨지기도 했고, 1990년 리가, 바쿠, 트빌리시같은 각 공화국 수도에서 독립시위를 벌이던 시민들에게 발포해 사상자를 내기도 했다. 현대 러시아군 또한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1996년과 1998년 체첸전에서의 전쟁범죄[21]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실정이다.

사실 이럴만도 한게 러시아 제국 시절, 아니 그보다 훨씬 이전의 시절부터 높으신 분들의 졸개가 되어서 민중을 가장 억압하고 착취한게 군인들이었다. 군인들이 착취에 앞장선 이유는 러시아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는 현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너무 광대[22]하고 땅이 척박해서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았다.[23] 그러다보니 별도의 행정 담당하는 공무원들이 별로 없었기에 사실상 군인들이 모든 행정 일들을 도맡아서 했는데, 군인은 많은데 땅은 척박하고 사람들은 적게 살다보니 생산력이 적었고, 세금으로 가져가는게 적으니 군인들이 착취한다고 보면 된다(러시아 지역은 생각 외로 엄청나게 가난했다. 수확철이 되면 사람들은 농산물의 냄새를 맡으며 풀뿌리, 벌레, 나뭇잎들을 씹어먹었다는 얘기들도 있을 정도다).

러시아 제국군은 나폴레옹이 쳐들어오니까 적 막는답시고 민가를 싸그리 불태워버렸고, 피의 일요일 사건 때도 군인들이 무차별적인 학살을 벌였으며, 적백내전 당시에는 백군은 민간인들을 빨갱이라며 잔혹하게 학살했고, 적군은 조국을 지켜야한답시고 농민들이 애써 수확한 농산물을 모두 징발하니 러시아 민중들 입장에서는 군인을 좋게 볼 수가 없었다.

소련 시절에는 게다가 병사들의 계급이 2단계로 간소화 되어 있었고, 또한 병사생활을 잘 아는 부사관급 간부가 2차 세계대전 이후로 없다시피하니 병사 간의 계급 갈등과 구타, 갈취, 내무부조리도 군 전반에 만연하였다. 그나마 장교 계층이 비교적 부대관리에 신경을 쓰고 있었고, 병사들끼리도 공감하지 못할정도로 과도하게 선을 넘은 경우는 당에 꼰질러서 반동으로 몰아버리면 문자그대로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사태가 됨으로 관리가 된 편이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후 생활고에 시달리게된 장교층이 군을 대거 이탈하면서 신생 러시아군에서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군대를 빠져나갈 수 있다면 징병 인력들이 병역을 기피하려고 하는 풍조를 낳음으로써 징집자원이 사회 취약계층에 한정되는 악순환이 발생하였다.

4.6. 정치장교의 전횡

흔히들 정치장교가 활용된 가장 큰 이유를 군에 대한 불신이라고 알지만, 실질적으로 가장 큰 원인은 적백내전 시절부터 독소전쟁에 이르기까지 병사들의 수준이 대단히 떨어졌기 때문에 그렇다. 병사들이 질적으로 낮다보니, 이를 통제하고, 또 한편으로는 병사들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정치장교를 부대마다 배치하게 되었다.

위에서도 말했듯, 군사분야에 미숙한 정치가들이 군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려다 보니 독소전쟁 초기까지는 그 부작용도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정치장교 시스템이다. 소대장급 이상 지휘관에게는 같은 권한에 같은 계급의 정치장교가 1:1로 따라 붙었다. 이들은 당의 이론과 지시를 군이 잘 따르도록 지시하고 교육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이들은 군의 계급, 명령체계에서 독립된 조직으로 공산주의 이론이 우선적으로 교육되었다. 사실상 부대 안에 지휘관이 두 명인 셈이라, 의사결정에 걸리는 시간이 두 배로 늘고 신속한 결정을 내릴 수 없어 군의 작전수행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다.

더욱 문제를 심화시킨 요인은 정치장교들이 권한은 큰 주제에 군사적 자질이 심각하게 부족한 경우가 많았다는 것에 있었다. 차라리 그냥 지휘관이 둘이면 또 모르겠는데 대부분의 정치장교들은 당원 출신으로 군사에 대한 경험이나 지식이 거의 전무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소련군은 군인 둘이 아니라 군인 한명과 말 안 듣고 하는 일마다 꼬치꼬치 태클 거는 민간인 한명에게 지휘받고 있었다.

결국 정치장교가 있는대로 병크를 터트리는 사이에 병사들은 무슨 명령을 따라야 할지 우왕좌왕하게 되고 결국 적 부대의 공격에 사이좋게 전멸하고 마는 식이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같이 가뭄에 콩나듯이 군사적 재능이 있거나 최소한 개념이라도 있는 정치장교가 있었던 부대는 다행히 두 지휘관이 쿵짝이 맞아 괜찮은 전과를 올릴 수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이런 사례는 드물었기 때문에 정치장교가 있는 부대는 대부분 참혹한 최후를 맞기 일쑤였다.

다행히 독소전쟁 초기에 독일군에게 신나게 털린 이후에는 정치장교가 작전에 간섭하는 일은 사라지고 정훈, 심리상담 등의 업무만 맡게 되었으며 그 결과 뛰어난 지휘관들의 지휘와 병사들의 애국심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4.7. 인명경시

러시아 제국이나 소련은 질적으로 좋은 정예 부대를 육성하기 위해 많은 노력과 힘을 쏟았지만 쉽지가 않았다. 일단 병사들에 대한 대우가 낮다보니 자연적으로 군대의 질적 저하가 심해졌다. 이러다보니 질적으로 저하된 자가 군대에 우글거려 인명경시가 더 심해졌다. 특히 형벌부대가 창설된 이후에는 더더욱 질적 저하가 심각해졌는데, 교도소에 들어가야 할 범죄자나 사형당해야 하는 죄수들이 군대에 들어오다 보니 군의 질적 저하가 더 심각해지고, 이는 곧 인명경시로 이어졌다. 형벌부대가 대규모적으로 운영된 독소전쟁 이후에는 병사들의 질적 저하가 매우 심각해졌고, 질적 저하가 심각해지다 보니까 들어오는 병사의 질 또한 낮았다. 그렇게 또 병사의 질적 저하가 심각해졌고, 이런 악순환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학계마다 이 악순환의 시초에 대해서 얘기가 많지만, 상당수 연구가들이 시베리아 개척 시점을 이 악순환의 시초로 보고 있다.

원래 러시아 제국군도 그런 성향이 있었지만 소련군 역시 병사의 목숨이나 안전에 대한 배려가 극히 적었다. 대표적으로 독소전쟁 초기에 부족한 무기와 조건에도 불구하고 전략적 철수나 재정비 대신 대규모 공격에 감행했다가 큰 피해를 입는 경우가 여러번 있었다. 이렇게 병사를 일개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경향 덕택에 군의 사기는 크게 낮았으며 실제로 비인간적인 처우와 인권무시로 인해 탈영이 잇따랐다. 이 때문에 러시아군은 부족한 전략과 무기를 병사들의 희생으로 승리하는 군대로 인식되어 왔다.[24]

제2차 세계대전 후 냉전이 시작되면서 핵무기가 개발되자, 소련군은 기존의 재래식 물량만으로는 전쟁에 한계가 있음을 인지하고 점차 핵전력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재래식 전면전을 대비한 전략교리 수행을 위해 소련군도 미군과 같은 기계화 노력에 힘썼다. 실제로 소련 말기에는 고전적 의미의 보병사단은 모두 기계화보병으로 이루어진 차량보병사단들로 대체되었다.

여담으로 냉전 시절 동독군의 주 임무는 서방 세력과의 전쟁시 제파식 전술의 제1파였는데, 이게 NATO처럼 각 국가별로 담당영역[25]이 존재하여 해당 전선은 해당 국가가 주력이 되어 담당하는 그런 차원의 것이 아니다. 좀 더 쉽게 풀어서 설명을 하면, 공격시 제일 큰 피해가 발생하고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는 최초 공격을 동독군에게 맡겨서 동독군이 적 전력을 깎아먹고 피해를 보면, 그때 소련군 본대가 공격을 들어가는 식이다. RPG 게임으로 비유하면 동독군은 탱커, 소련군은 딜러 역할이란 말. 당연하지만 적의 공격을 다 받아내는 것은 동독군이고 가장 큰 피해도 동독군이 보게 되어있다. NATO 마냥 가맹국들이 최대한 동등한 지위에서 자국방위, 혹은 동맹국 보호를 위해 각각의 영역을 맡고 희생을 보는게 아니고, 소련의 위성국이 소련군이 볼 피해를 적게 보도록 만든 총알받이인 셈. 소련군의 작계를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 면에서 이 점을 부정조차 하기 힘든데, 첫째는 소련군 작계 자체가 제파식공격의 제 1파는 큰 피해를 보는 것을 가정하기 때문에 제일 중요한 정예 병력은 보내지 말도록 하고 있다. 1파가 적에게 피해를 주고 나면 그 때 잘 준비된 정예부대를 투입하여 공격하도록 하고 있다. 두번째는 유사시 나토군이 동독을 공격할 때의 방위 계획인데, 우습게도 동독군은 공격시 선봉을 서야 하기 때문에 뒤로 빠진다. 소련군이 동독을 방어하고, 다시 반격을 할 때 동독군을 보낸다. 물론 동독군은 바르샤바 조약군에서도 정예이고, 이를 전략 예비대 같은 개념으로 보는 사람도 있겠으나, 정작 소련군은 자기네 부대는 전략예비대로 쓰려고 뒤로 꽁쳐놓고 동맹국 군대를 총알개념으로 적진에 던지려 하고 있었다. NATO의 경우는 동맹국들에게 정치적인 배려를 안할 수가 없었기에 NATO 국가별로 각자 담당 구역이 있었고, 이 담당 구역은 그 나라가 목숨걸고 지켜내는 식이었다. 물론 주전장이 되는 것은 서독이었지만, 그 서독 방위에는 영국군, 미군, 프랑스군도 각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몸빵을 하는 사이 미 본토에서 주력이 도착하여 바르샤바 조약을 막는게 주 전략 이었다. 어디처럼 '너넨 우리 총알받이'라고 드러내놓은게 아니다.

그리고 소련 붕괴 이후에는 상황이 악화되어 엄청난 감군을 한데다가, 가혹행위 방지도 담당했던 정치장교가 사라지자 병사 대우가 나빠져서 지금 러시아군은 구타, 가혹행위 등 온갖 비인간적인 처사에 시달리고 있다.[26]

4.8. 전시강간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연합군에 의한 독일 점령 기간의 강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붉은 군대는 이상적이지 않고, 그럴 수도 없습니다.

- 이오시프 스탈린,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밀로반 질라스가 소련군의 유고슬라비아 여성 강간에 대해 항의할 때 한 말.[27]

소련군은 곳곳에서 전시강간(war rape)을 저지른 것으로 악명이 높다.

대표적인 것이 2차대전 종전 전후 독일 여성을 상대로 한 강간. 영국의 저널리스트 안토니 비버는 이 사건을 인류역사상 최악의 대량 강간으로 호칭하였다. 소련군은 독일 내에서 200만명의 여성에게 성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파악되고 있고, 베를린에서만 약 10만명의 여성을 강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8] 더욱이 강간은 한 차례로 끝난 것은 드물고, 많게는 수십명에게 윤간당한 여성들도 비일비재했다. 8세에서 80세까지의 거의 대부분의 연령대의 여성들이 성범죄의 표적이 되었고, 안토니 비버의 주장에 의하면 독일로 끌려온 자국 소련 여성들까지도 강간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29] 슐레지엔의 나이세 강 인근의 수녀원도 소련군의 전시강간의 희생양이 되어 182명의 수녀들이 강간을 당하였고, 카토비체의 한 교구에서는 66명의 수녀를 임신시켰다고 한다. 고아청소년 10만명 중 80%가 성병에 걸렸다는 얘기도 있다.기사 소련군이 강간을 많이 하는 이유는 단순한 성욕 때문일 수도 있지만 또 다른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독일군이 자국의 여자들을 학살하고 강간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 복수를 목적으로 저지르는 것일 수도 있다. 독일 박물관이나 동유럽 박물관의 독일의 이러한 행위들을 똑같이 복수한다는 일기가 수도 없이 존재한다. 연합군들도 독일 여성들에게 수십만건의 성범죄를 저질렀으나 냉전의 여파와 탓에 묻혀버리고는 한다.[30]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만 독일 여성들 2만 명이 강간을 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모두 합치면 150만 명의 독일 여성들이 서방 연합군에 의해 강간을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소련의 전시강간을 문제삼는 이들 대부분은 의도적으로 자료를 부풀리기도 하며, 반대로 소련측을 옹호하는 이들은 축소시키기거나 어쩔 수 없는 일, 즉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는 식으로 피하려고 한다. 현재 러시아는 소련군의 전쟁범죄를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안토니 비버가 소련에 비판을 했다고 해서 네오 나치로 오해될 소지를 막기 위해서 첨언하자면, 비버는 자신의 저서인 '스탈린그라드-피의 기록'에서 소련군의 업적이 2차 대전의 결과를 바꿨다며 높이 평가[31]하기까지 했으며, 스탈린이 비록 잔혹한 독재자이지만 그 덕분에 소련군이 독일을 무찌르는데 힘이 됐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비버는 소련군 만행뿐만이 아니라, 서방 연합국의 만행에 대해서도 제대로 쓴소리와 비판을 가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다. 무엇보다도 단순히 소련에 비판적인 논조를 지녔다고 해서 네오 나치란 소리를 하지 않는다. 네오 나치 참조.

소련 상부측에서는 병사들이 전시강간을 저지르자 초기에는 무관심하다가, 갖가지 문제점들이 터지고 장교들이 군기 유지에 문제가 많다면서 항의하자 결국 이를 문제삼아서 NKVD를 동원해 전시강간 행위를 엄격하게 단속하였고, 이후 전시강간은 사라졌다.[32] 이 당시의 상황을 잘 표현한 영화가 니나 호스 주연의 독일 영화 '베를린의 여인'인데, 독일의 한 전직 저널리스트의 수기를 극화한 실화영화이다.[33] 소련군의 성범죄를 정면으로 다룬 내용이라 이 수기가 1959년 독일에서 출간되었을 때 패전의 상흔이 아물지 않은 독일인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았으며 판매량도 좋지 못했다.# 수기에서 나오는 소련군의 무자비한 성범죄는 독일 여성들에겐 잊고싶은 기억이었고, 무엇보다 주인공이 수차례 강간을 당한 뒤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소련군 장교에게 붙는 내용이 독일 여성들의 명예를 훼손한 거란 비난을 받았다. 예상치 못한 부정적인 반응에 당황한 작가는 익명으로 출판된 이 수기를 자신이 생존해있는 동안에는 다시는 출판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작가가 죽은 2년 후인 2003년 이 수기는 재출판되었고, 첫 출판 당시와는 가치관이 변한 현재에는 담담하면서도 구체적인 서술이 높이 평가받으며 2차대전 당시의 상황을 잘 나타낸 회고록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이 수기를 쓴 익명의 작가의 이름은 마르타 힐러로 밝혀졌다.참조[34] 베를린의 여인이라는 영화는 초점을 소련군 전체가 아니라, 주인공 하나에게만 맞췄고, 철저하게 주인공이 보는 시각으로만 초점을 맞춘데다가, 영화가 중립적인 편이라 때문에 꽤나 높게 평가받는 편이다. 다만 매춘으로 출세하여 다른 여성들을 괴롭히고 군림한 여성들에 대해서는 자세히 나오지 않아서 이 부분에 대해서 아쉽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또한 '조이디비전'#이란 영화에서도 소련군의 성범죄를 다루고 있다. 베를린의 여인에 비해 완성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평을 받았지만, 이러한 평은 매우 부당한 평가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애시당초 이 영화는 소련군의 성범죄[35]를 직접적으로 다룬 것이 아닌 고아가 된 독일인 소년이 소련군 여성 정치장교의 도움으로 소련의 KGB가 되어 영국으로 보내진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36] 이 영화에서는 영국 정보부가 소련 여자 스파이를 고문[37][38]하거나 패전이 코앞인데 승리할 수 있다는 개드립을 치는 나치 당원[39]이 나오는 등 중립적인 편이다. 한국에서는 레지스탕스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

폴란드와 유고슬라비아, 핀란드에서도 소련군의 부녀자 강간이 빈번했는데, 특히 독일로 진격하는 길목에 있는 폴란드가 심했다. 독일계가 아닌 순수 슬라브족 폴란드계 여성만 최소 10만 명이 강간당했다. 폴란드가 보수적인 가톨릭국가이고 전후 친소정권이 들어섰음을 생각해 보면 피해사실을 밝히지 않은 피해자는 그보다 몇 갑절은 많을 것이다. 독일계 폴란드인 여자들이 얼마나 강간살해를 당했는지는 추산조차 불가능하다.

이같은 소련군의 강간 행위가 먼 유럽만의 이야기는 아닌데, 특히 소련군이 한반도 북한 지역에 진주해 세운 소련군정 내에서 벌어진 민간인 강간 행위도 상기해야 할 부분에 속한다.# 특히 주된 피해자들은 식민지 주재 일본인이나 현지 조선인들이 되었다. 북에서 월남한 여학생 임영애는 1946년 1월 18일 반탁전국학생총연맹 연설에서 "북한에 진주한 로스케 놈들은 밤이면 쌀과 공장의 기계들을 소련으로 가져가는가 하면 대낮에도 부녀자를 강간하고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소련군정 항목 참조.

5. 징병제

소련은 한국처럼 징병제를 실시했다. 복무 기간은 육군과 공군은 2년으로 우리나라와 비슷했고 해군은 3년이었는데, 위 두 곳은 지원제였던데다 대우가 육공군에 비해 매우 좋았기 때문에 긴 복무기간에도 많은 이들이 몰렸다.[40] 그러나 소련의 대학생들은 학교에서 실시하는 교련 수업만으로 예비역 장교 자격이 부여되어 사실상의 병역 면제 혜택을 받았다는 점은 한국과 다르다.[41]

6. 개입한 전쟁 및 분쟁

7. 군조직

7.1. 각군별

  • 소련 육군(Советская Армия, СА)[42]
    • 지상군(Сухопутные Войска, СВ)
    • 항공대(Военно-воздушные силы, ВВС)
    • 전략로켓군(Ракетные войска стратегического назначения, РВСН)
    • 방공군(Войска противовоздушной обороны, ВПВО)
  • 소련 해군(Военно-Морской Флот, ВМФ)

7.2. 독립 군종

7.3. 군관구

  • 레닌그라드
  • 벨라루스
  • 카르파티아
  • 키에프
  • 오데사
  • 모스크바
  • 볼가-우랄
  • 북캅카스
  • 투르케스탄
  • 시베리아
  • 트랜스바이칼
  • 극동
  • 중앙아시아

7.4. 함대

8. 훈장

훈장/소련 참조.

9. 군가

아래는 소련군의 유명한 군가들이다. 대체로 소련군가에는 러시아 민요풍의 노래가 많다. 한편으로는 애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경쾌하다. 반복되는 후렴구가 특징이며, 음악적으로 봐도 훌륭하다. 소련군(현재 러시아군도 마찬가지)의 공식 합창단인 붉은 군대 합창단[44]은 웅장한 선율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1990년에는 한국에도 방한하여 연주회를 가진적이 있다. 소련의 군가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은 군가/소련,러시아 항목을 참조할 것.



대표적인 소련 군가 초원. 자세한 건 항목을 참조하라. 월드 인 컨플릭트 트레일러로 쓰여 유명하다. 그러나 몇몇사람들은 소련 군가 하면 미제가 만든 어떤 게임 노래부터 떠올린다

9.1. 관련 소련군영상

1967년 10월 혁명 기념일에서 소련 국가가 나오는 부분 영상1979년 10월 혁명 기념일[45]
1990년 소련의 마지막 전승 기념일 행사일본이 안보교범용으로 만든 영상, 소련 육군의 주요 무기체계를 설명한다
소련 해군에 관한 교범 영상소련 공군 및 방공군에 관한 영상
소련군 1945~1990 제식

10. 장비, 차량, 군복

소련군/장비 문서로.
소련군/차량 문서로.
군복/러시아군 문서로.

11. 한국계 인물

소련이 다민족 국가였던 만큼 고려인 출신의 소련군인도 물론 있었다. 일부는 제 2차 세계대전 말 소련군이 관동군을 제끼고 내려온 1945년에 북한 지역으로 진입하기도 했다.
  • 정상진: 소련군 출신 조선인민군이다. 소련식 이름은 유리 다닐로비치. 2차대전 이후 적기훈장을 수여받았고 조선 청진시 상륙 작전에도 참전하였다. 후에 김일성 종합대학을 졸업하고 소련에 가서 호화롭게 살았다고. 그리고 소련내 한인재단에 도움을 주면서 여러 차례 대한민국을 방문했다. 2013년에 사망했다.오래 살았네
  • 김일성: 1940년부터 광복 때까지 소련 극동군 제 88국제여단에서 장교(소령)로 복무하였다.

12. 기타

소련제 무기와 장구류는 서방과는 전혀 다른 개성을 자랑했기 때문에 밀리터리 매니아 중에는 이쪽에 심취하는 경우도 있다. 하야미 라센진이라던가.

많은 병사들이 우샨카를 착용했기 때문인지 우샨카는 소련군 또는 러시아군, 이 이미지가 나아가 전반적인 러시아인 남성의 복장을 상징하는 물건처럼 인식되고 있다.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에서는 아인슈타인이 타임머신 개발에 성공해 과거로 날아간 뒤 히틀러를 없애버리지만, 시간의 반동으로 스탈린이 이끄는 소련군이 세계대전을 일으킨다. 소련군(레드얼럿) 항목 참조.

레드얼럿 1편에서 소련군은 나치 독일군 대신 V2로켓과 잠수함으로 무장하고 있으며, 상상속 무기인 테슬라 코일을 사용한다. 전반적으로 C&C 타이베리움 시리즈의 악역인 Nod의 변형판이었지만 유닛들 성향은 GDI에 가깝다. 맘모스 탱크와 헤비 탱크 등으로 강력한 화력을 보여주는 것이 특징.

레드얼럿 2편에서는 유리의 사이킥 능력이 추가되었다.
3에서는 2 이후(유리의 복수 이후) 시점에서 과거로 날아가 아인슈타인을 날려버리고 세계 유일의 초강자로 새로 등극하나 했는데, 웬 욱일 제국군이 나타나 뒷통수.

싱귤래리티에서는 카토르가-12 섬의 과거인 1955년의 회상 속에서 온갖 괴물들에게, 혹은 아예 과거로 직접 타임슬립한 주인공에게 썰려나가는 안습한 역할로 등장한다.

고전 액션 영화나 그것을 오마주한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와 비슷한 분위기의 FPS 게임 데드폴 어드벤처(Deadfall Adventures)에서는 유물 사냥꾼들 아니면 독일 국방군 or 슈츠슈타펠만 나오는 클리셰를 비틀기 위함인지 북극 지역에서 1930년대의 소련군이 적으로 등장한다. 물론 신나게 주인공에게 썰린다(...).

슈퍼마리오의 별칭(...)이다. 실향민 출신인 오락실 주인이 마리오를 보고 1의 군인을 닮아서 그렇게 불렀대나 뭐래나.


이거 하나면 이해가 갈 것이다. 참고로 배경 노래는 슬라브 여인의 작별.

걸즈 앤 판처프라우다 고교는 소련군을 본땄다.

소련은 멸망하는 순간까지도 전군 (해군 제외)에게 양말 대신 발싸개를 지급했다. 우리가 흔히 양말도 못 사는 거지나 쓴다고 '거지 발싸개'라고 부르는 그 발싸개다.영문위키 Footwraps 발싸개는 제대로 싸지 않으면 양말보다도 심각한 발 부상이나 물집을 불러오기 십상이었고 통풍이 잘 안되어 발냄새가 엄청났다고 한다. 소련이 붕괴하자마자 독립국가들은 전원이 군에서 발싸개를 퇴출시키고 양말을 지급하였으나, 심지어 러시아는 2012년에(!) 국방장관이 올해야말로 군에서 발싸개를 완전히 퇴출하겠다고 했을 정도.

하지만 이는 양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소련식 군화(장화식)에서는 양말보다 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군에는 양말을 보급했다. 북한군도 1990년대까지는 발싸개를 지급했다. 1990년대 MiG-19기를 몰고 귀순한 이철수 대위가 발싸개를 하고 왔을 때, 일부 언론에서 엘리트 공군 비행사에게도 경제난 때문에 양말을 지급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이철수 대위가 직접 "소련식 비행화를 신을 때는 양말보다 발싸개가 더 편리하다"고 반박한 바 있다.[46] 발싸개는 양말보다 빨리 건조가 되고 구멍이 뚫려도 돌려서 싸면 구멍이 덮어지는 장점이 있다.

13. 관련 문서



[1] 1988년 소련 '조국 수호자의 날'(День защитника Отечества) 기념 포스터.[2]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군이 1992년 창설됐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이외의 CIS 국가 중심의 반쪽짜리 소련군이 93년까지 유지됐다.[3] 대전 말기인 45년 기준으로 무려 13개 전선군(집단군)을 굴렸다. 대한민국의 60만상비군을 다 모아도 집단군을 편성하려면 예비군까지 전부 끌어와야 가능하다.[4] 파일:ShFR3.png
그림에서 보듯이 냉전의 정점에 달했을 1970년대 후반에는 국방비가 오히려 미국을 앞서는 위엄을 보였다. 이후 레이건 행정부 집권으로 미국도 군사비를 늘림에 따라 1980년대 초중반의 국방비는 미소가 거의 비슷했다. 문제는 소련은 미국의 반밖에 안되는 경제력이었기 때문에 소련의 부담이 훨씬 컸다는 것. 이런 국방비 몰빵은 결과적으로 소련의 해체에 영향을 미쳤다. 사실 미국도 1980년대 식의 국방비를 계속 하다가는 골로 갈뻔 했다. 그나마 냉전이 해소된 조지 H. W. 부시 집권 후부터 대폭 삭감하면서 1990년대 미국의 경제가 살아난 것이다. 근데 2000년대 테러와의 전쟁의 전비로 미국도 2000년대 후반부터 경기침체에 접어든다.
[5] 붉은 군대가 초기의 막장상태에서 크고 아름다운 무적의 스팀롤러로 변하는 과정을 담은 책으론 리처드 오버리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Russia's War)>이 있다.[6] 사실 순수공격형이라기보다는, 나토군이 침공 징후를 보일 때 선빵을 날린다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공세형 수비.[7]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독소전쟁이 터지자 국방장관이던 현역군인 세묜 티모셴코 원수는 서부전선군 사령관을 맡아 전선에 나갔고, 스탈린은 공석이 된 국방장관을 전쟁 끝까지 겸직했다.[8] 소련군에서 한 병과의 최선임 자격으로 주어지는 대장보다는 높고 원수보다는 낮은 계급이다.[9] 실제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그런 선례를 만들었다. 때문에 그들은 군에 대한 당의 통제력을 강화하는데 주력했다. 이런 곱지 못한 시선은 정치장교 제도의 창설과 훗날 스탈린 시대에 벌어진 대숙청의 기조가 됐다.[10] 정확히는 군사혁명위원회 의장.[11] 종전시 원수까지 오른 주코프, 코네프가 전쟁 발발 당시 만 44세(1897년생), 그리고 바실렙스키가 45세, 로코솝스키가 46세, 대장까지 오른 추이코프, 체르냐홉스키, 노비코프는 겨우 36세 밖에 되지 않았다.[12] 이 전략은 1960년대 중국과 1990년대 북한이 따라한다. 자꾸 이 항목에서 1960년대 미국의 핵전력을 들어 소련이 핵개발 대신 재래식 전력에 집착했다는 설을 푸는 밀덕이 있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는 흐루쇼프 회고록 및 소련사만 봐도 바로 나온다. 흐루쇼프가 2차대전의 영웅인 국방장관 주코프 및 공군사령관 알렉산드르 노비코프를 해임한 것은 이들이 지나치게 재래식 전력 확충을 강조했기 때문이다.[13] 참조 블로그[14] 그냥 설사만 하고 마는 병으로 아는 사람도 있는데, CDC에 따르면 매년 전세계에서 110만명이 사망하는 병이고, 전장에서는 매우 흔하다. 그나마 그 피해를 최소화한 군대는 미군 정도.[15] 이 역시 공산국가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100% 계획경제였던 탓에, 국가에서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부분의 개발과 생산은 그럭저럭 이루어지지만 민간소비재에 대한 연구와 생산이 뒤쳐진 것이다. 예를 들면 의류, 에어컨 같은 민간소비재 기술을 이용하는 분야는 서방과의 차이가 안습이었다. 특히 보편적인 학문의 자유와 치열한 경쟁을 통한 기술혁신이 없기 때문에 2차대전 이후 새로 등장한 의류, 소비재 등은 서방에 비하면 안습인 수준이었다. 다만 수학, 물리 등 기초과학 및 전자, 컴퓨터, 소프트웨어 분야는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미국과 대등한 수준, 혹은 능가했다. 예를 들어 시뮬레이션의 바탕이 되는 확률론이나 확률과정론 같은 분야는 거의 소련에서 완성된 학문이었고, 미국보다 앞서서 인터넷을 구상하기도 하였다.[16] 잠수함 타보면 알겠지만 에어컨 없으면 찜통이다.[17] 소련이 100% 협동농장에서만 농사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국가에서 별장만들 땅을 나누어줬기 때문에 취미생활이나 용돈벌이의 일환으로 텃밭을 가꾸는 일이 많았다. 1990년대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가 초인플레이션으로 경제난에 빠졌을 때 식량난에 시달리지 않았던 이유가 다차 덕분이라는 것이 주 이유.[18] 일례로 1980년대 경의 소련의 1인당 육류소비량은 미국이나 서유럽까지는 아니었지만 남유럽 국가들과 비슷한 수준은 되었다. 그러니까 고기는 거의 매일같이 먹었다.[19] 여기에는 미군과 소련군의 방침 차이도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미군은 '운용하기 쉽고, 수리하기 쉬운' 엔진을 만든 반면, 소련군은 '만들기 쉽고 잔고장은 적은' 엔진에 주력했기 때문이다. 웬만한 고장은 내구도로 버티다가 치명적 손상에는 엔진을 갈아버리는 것으로 대처한 것. 하지만 이러한 형태는 생산과 효율 측면에서는 뛰어났을지 몰라도 실제 훈련과 야전상황에서는 좋지 못했다.[20] 실제로 미국, 영국의 특수부대원 출신들에게 동유럽 최고의 특수부대를 뽑아보라고 하면 러시아의 알파 그룹 등은 언급도 안 되고, 폴란드의 그롬은 거의 반드시 언급된다.[21] 체첸 반군의 악명높은 공격과 테러, 잔인한 만행에 대한 보복으로, 체첸 점령 이후 대테러작전이라는 명목 아래 자치스트카(Зачистка)를 진행, 수많은 체첸 민간인을 학살했다.[22] 지금이야 철도와 비행기 등이 있지만 근대까지만 해도 이동수단이라고 해봐야 말뿐이었다.[23] 지금이야 화학비료를 쉽게 구할 수 있고 각종 기계들을 활용 가능하지만 당시에는 철저하게 사람의 노동력에만 의존해야했다. 철저히 노동력에만 의존해야하는데 척박한 땅이다 보니 농사 짓기 힘들어서 사람들이 잘 안 살려고 했다(중세까지의 기록을 봐도 심심치 않게 러시아 농노들이 서유럽쪽으로 도망쳤다는 기록들이 있다).[24] 하지만 근위사단같은 정예병력이나 조종사나 전차병, 해군같은 기술병과에는 나름대로 좋은 대접을 제공하고자 애썼다. 사실 현대전에서 이런 전문/기술 인력을 잃을 경우 전쟁수행에서 손실이 크기에 어느 군대나 이런 인력을 최대한 보호하려 한다.[25] 예를 들면 중부유럽 지상군은 미군, 서독, 영국이 담당하고 준 가맹국인 프랑스도 유사시 돌파당할 가능성이 높은 전선을 담당한다는 식.[26] 그래도 그나마 러시아군은 쇼이구 시대에 들어오면서 조금 나아지고 있긴 하다.[27] 출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Russia's War), 351쪽[28] 독일 뿐 아니라 독일을 도와주었던 적이 있었던 헝가리, 루마니아, 그리고 나치의 만행을 방조했던 오스트리아 등도 이런 일을 당했다.[29] 그는 이뿐만 아니라 러시아 국내에서조차 자국군에게 강간당한 러시아인들의 보상을 촉구한다는 의견을 밝힌 적이 꽤 되는 편이다.[30] 연합군의 전쟁범죄는 최근 들어 조명받았지만, 학계에서 큰소리가 나오지 못하는 이유가 가해자인 서방 입장에서는 당연히 말하기 껄그럽고, 독일측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인과응보당했으니 뭐라고 할만한 처지가 못되는 편이고, 러시아측도 자신들도 흑역사가 있으니 대대적으로 학계에서 연구가 못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31] 원본 저서 속의 뉘앙스로는 '소련군 없었으면, 연합군은 2차 대전 이기지도 못했을걸'하는 식으로, 소련군을 정말 높게 평가하고 있다. 소련군의 활약을 어떻게든 축소하고 왜곡하려는 대다수의 서방쪽 사람들과 대조적이다.[32] 참고로 전시강간이 사라진 이후 흥행한 것은 매춘이었다. 독일측 여성들이 배급의 우선권 확보나 안전 확보 등을 위해서 자발적 매춘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몇몇 독일 여성들은 소련측 고위 장교들을 상대하면서 쌓은 인맥들로 타 여성들을 괴롭혔다고 한다.[33] 이 수기도 한국어로 번역되어 정식출판되었다.[34] 영화와 수기에 나오지 않는 뒷얘기이지만, 마르타 힐러는 독일군 남자친구와 헤어진 뒤, 스위스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결혼하여 살았다고 한다.[35] 여기서 소련군의 강간 장면이 꽤 나오는 편이다. 그 때문에 러시아쪽 반응은 그다지 좋지 못하다.[36] 냉전시기 소련이 고아들을 교육해서 서구권으로 스파이로 보낸다는 도시전설이 있었다.[37] 초기 각본 구성 상태에서는 영국 정보부에서 소련 여자 스파이를 고문하다가 윤간하려는 장면이었지만, 영국쪽에서 올 후폭풍 때문에 윤간 장면을 빼버리고 약간 다듬어서 시나리오를 작성했다고 한다.[38] 이 때문에 영국쪽에서 이 영화를 안 좋게 보는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실제로 영국 정보부가 좌익 성향의 사람들을 납치하고 고문했다는 증언들이 있다. 즉, 영국을 까기 위해 만든 거짓이 아니라, 실제 사례를 넣은 셈.[39] 이 나치 당원이 승리할 수 있다고 말하는 모습은 무언가 마치 사이비 종교 신자박사모 같이 보인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40] 현재 러시아도 징병제를 실시하지만, 복무 기간은 1년이다. 그래도 러시아군은 84만 5천명의 상비군 병력을 유지하고 있다.[41] 현재 러시아의 대학생들도 병역 면제 혜택을 받고 있다.[42] 이하 소련 육군 소속이다.[43] 평시에는 내무부 관할이나, 전시에는 국방부의 지휘를 받는다.[44] 정식 명칭은 알렉산드로프 앙상블. 물론 저것도 줄인 것이고 진짜는 '적기훈장을 두번 수훈한 A. V. 알렉산드로프 명의의 러시아군 정통 가무 앙상블(...)이다.[45] 이 해를 끝으로 80년대부터 진행 구성이 많이 변경되었다.[46] 그런데 소련에서도 편의를 위해 운동화나 서방식 전투화 쓰는 부대가 있었으나 이쪽도 양말 대신 발싸게 지급 받는 경우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