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각국의 영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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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 시장
MPAA(미국영화협회)의 집계에 따르면, 2019년 러시아 영화 시장은 북미 영화, 중국 영화, 일본 영화, 한국 영화, 영국 영화, 프랑스 영화, 인도 영화, 독일 영화, 멕시코 영화 시장에 이어서 세계 10위로 나타났다. 위의 순위표에는 북미 영화 시장(114억 달러)이 따로 표시되어 있지 않은데, MPAA가 미국 기관이라 미국을 제외한 국가들만 표로 따로 나왔기 때문이다.
2. 러시아 제국 시절
러시아에 처음으로 영화란 매체가 출현한 것은 1896년 5월,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영화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여름 극장에서 상영했을 때였다. 뒤이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영화는 점차 러시아인들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었다. 1903~1904년부터 러시아의 대도시와 중, 소 도시에는 이동식 극장이 등장해서 각 도시별로 순회하며 영화를 상영했다. 이후 단순한 영화 관람을 넘어 러시아인의 손으로 영화가 제작된 것은 1908년으로, 이 때 알렉산드르 드란코프(Алекса́ндр Дранко́в)가 제작한 러시아 최초의 장편 영화 《스텐카 라진》(Стенька Разин)이 개봉했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의 영화 산업 기반은 거의 없다시피 해서 자본, 기술, 그리고 장비는 전적으로 서유럽에 의존해야 했다. 드란코프 외에도 초기 러시아 영화사에서 중요한 인물로는 알렉산드르 한존코프(Александр Ханжонков)가 있다. 그는 1904-1914년의 기간 동안 70여 편의 영화를 제작하였는데, 그가 제작한 영화는 주로 러시아 고전 작품과 역사를 바탕으로 했다. 이 시기 러시아 영화는 주로 문학 작품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이후 1908년부터 1914년까지 제작된 대부분의 영화는 전쟁 선동을 위해 만들어진 작품들이었다. 특히 전선에서 기록영화가 많이 촬영되었는데, 당시의 기록 영화들은 특별한 주제 의식이나 스토리 없이 그저 영상으로 정보만을 전달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러한 선동 영화의 주 목적은 바로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것이었다.
3. 혁명 직후 소비에트 영화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볼셰비키들은 정치적 선동과 선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이것을 실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매체로 영화를 주목했다. 이는 당대의 사회환경과 미디어 환경을 살펴보면 바로 이해가 가능한데 러시아 혁명 당시 러시아 제국의 문맹률은 최소 75% 이상을 상회했을 정도로 몹시 높았고, 이 때문에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계층은 한정적이었기 때문에 신문과 선전포스터 같은 인쇄매체를 뿌린다해도 파급력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이 당시에 정식방송을 시작하지도 않았으며, 거리 연설도 직접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한정적이었다. 이러하니 영화가 그나마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설 수 있는 대중매체였던것이었다. 이후 영화 산업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소비에트 영화는 당의 기본 지침에 따라 공산주의 이념의 선전과 민중의 교화를 위해 만들어졌다. 영화는 이제 단순한 오락물로서가 아니라, 대중들의 교육과 계몽의 도구로서 자리잡게 된 것이다. 또한, 체계적인 영화인 교육을 목적으로 1919년에는 세계 최초의 영화학교인 게라시모프 국립 영화학교(Всероссийский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институт кинематографии имени С. А. Герасимова)가 설립되었다. 1919년 적백내전 당시에는 전선의 상황을 담은 기록 영화가 주로 만들어졌다.4. 1920년대
적백 내전 이후 신경제정책으로 경제가 회복세에 접어들자, 영화 산업도 탄력을 받게 된다. 1922년 소련 국가 영화위원회 (고스키노) 가 설립되어 국가적으로도 영화 산업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기 극장에 걸린 영화 대부분은 외국 영화였으며, 주로 미국과 서유럽으로부터 수입해 온 영화가 많이 상영되었다. 이런 경향은 20년대 중반에 들어서부터 바뀌게 되는데, 바로 젊고 재능있는 인재들의 등장이었다. 《전함 포템킨》으로 잘 알려져 있는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은 그의 몽타주 이론을 정립했고, 지가 베르토프는 러시아인의 삶 그 자체를 보여주는 기록 영화를 주로 만들었다. 그의 작품 《카메라를 든 사나이》는 시나리오, 배우, 세트의 도움 없이 그저 카메라를 들고 현장에 가서 직접 제작한 것으로, 오늘날의 다큐멘터리의 효시이다. 또한 이 시기는 소비에트 무성영화의 황금기로 평가받는데, 대표적인 작품들은 예이젠시테인의 《전함 포템킨》, 《파업》, 베르토프의 《카메라를 든 사나이》, 푸돕킨의 《어머니》, 《페테르부르크의 종말》 등이 있다.5. 1930년~1940년
1930년대 이오시프 스탈린이 등장해서 철권 통치를 펴자 소비에트 영화 산업은 침체기를 맞는다. 네프 시기 독자적으로 영화를 제작, 배급하던 수많은 영화 제작사들은 모두 국가의 통제 하에 놓였으며, 영화위원회의 감독 하에 영화를 만들게 된다. 1932년 소련 공산당은 1920년대의 '아방가르드적' 경향을 버리고 소비에트 리얼리즘을 따르라는 명령을 내렸다. 공산당은 또한 영화 제작에 있어서 몇 가지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는데, 이에 따라 관객들의 롤 모델이 될 수 있는 정의로운 영웅을 내세운 영화,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영화, 그리고 당 정책을 지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영화가 주로 제작되었다. 이를 어기는 영화는 심의, 검열을 받고 상영이 금지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시기 소비에트 영화는 1920년대의 실험정신을 완전히 잃고, 혁명의 역사를 다루는 데만 치중하면서 점차 정형화, 획일화되어 갔다. 이 당시 영화의 두드러진 특징으로는 블라디미르 레닌을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가 많았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레닌에 대한 묘사는 다양했는데, 주로 그는 혁명의 지도자, 순수하고 겸허한 인간, 아니면 일반 민중들과 다름 없는 모습으로 등장했다.예외적으로, 1930년대에는 뮤지컬 코미디 장르가 성행했다. 이 분야의 대표적인 감독은 그리고리 알렉산드로프(Григо́рий Алекса́ндров)인데, 그는 뛰어난 코미디 배우이자 자신의 아내인 류보비 오를로바(Любовь Орлова) 와 손잡고 여러 뮤지컬 영화를 만들었다. 1938년에 개봉한 《볼가강》 (Волга-Волга)은 그의 대표작으로, 소비에트 영화 역사 사상 공전의 대성공을 기록했다.
1940년대에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군인들의 영웅적인 활약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와 뉴스 영상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시기 극영화의 주요 주제는 전선의 상황과, 병사들의 영웅적 활약상 등이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으로는 앞서 말했던 레닌의 경우와 같이, 스탈린을 주요 주인공으로 다룬 영화들 역시 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 영화들은 스탈린을 주로 전쟁 영웅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영화의 예로 1948년 제작된 이고리 사브첸코의 《세번째 공습》과, 2부작으로 만들어진 블라디미르 페트로프의 1949년 영화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있다.
6. 1953-1991
스탈린 사망 후, 뒤를 이은 니키타 흐루쇼프가 등장해 스탈린 격하 운동을 벌이면서 해빙기가 도래한다. 이러한 영향으로 소비에트 영화계 역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영화 검열 제도가 일부 폐지되어 소련 영화인들은 보다 자유로운 제작 환경을 만끽할 수 있게 되었고, 영화 학교에서 교육받은 젊은 영화인들의 유입으로 소련 영화계에는 이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영화들이 속속 등장한다. 1957년에 개봉한 미하일 칼라토초프의 학이 난다[1]는 그 점에서 흐루쇼프 체제의 해빙을 알리며 소련 영화의 국제적 성공을 시작하는 영화로 꼽힌다. 1962년 제작된 SF 컬트 영화 《앰피비언 맨》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기존에 제작되던 역사, 문학 관련 작품들 역시 성행하였는데, 주요 소재는 바로 2차 세계대전이었다. 40년대와는 다르게, 이 당시 전쟁을 묘사한 작품들은 국민 선동과 이데올로기적 요소에서 탈피해 보다 사실적이고 인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그리고리 추흐라이의 1959년 작 '병사에 대한 발라드'로, 전쟁 중 포상으로 휴가를 받게 되자 고향으로 잠깐 돌아가 어머니를 뵙고자 하는 병사의 이야기이다. 예술 영화의 거장인 안드레이 타르콥스키가 《이반의 어린 시절》로 데뷔한 것도 이 시기이다. 그러나 브레주네프가 집권한 이후로는 세르게이 파라자노프처럼 가혹한 탄압을 받은 사례도 있다.여하튼 이때 소련 영화는 비교적 값싼 영화관람료로 시간을 때우기 족하다는 이유도 있기 때문에 대단히 높은 관객수를 기록했는데 TV보급 등의 이유로 영화관객들이 줄어들기 시작한 1960년대와 70년대에도 관객수 1500만명 이상을 동원하지 않으면 흥행실패작으로 간주될 정도였다. 1인당 연간 영화 관람횟수는 20회 정도로 세계 수위권을 다투웠으며 그 영향으로 영화관객수가 세계 1위(연간 관객수가 40억명 가량 기록했다.) 전 세계 영화관의 절반 이상이 소련에 있었을 정도였다. 1970년대애서부터 1980년대까지 소련전역의 영화관수는 약 15만개였다. 당시 소련의 경쟁국이었던 미국은 물론이고, 중국과 인도보다도 영화관이 더 많았다는 얘기다. 그 만큼 당시에 영화관에서 영화를 관함하는 것이 당대 소련인들 사이에서 여가생활을 즐기는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는 얘기인것이다. 물론 1980년대 이후로 관객수가 점차 줄어드는 추세에 접어들었기는 했지만 소련붕괴 이전까지도 다른 국가들에 비해서 거대한 영화시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할리우드 영화에서 소련이 영화시장을 개방한다면 수익을 거하게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 당시 활약한 여배우로 아나스타샤 베르틴스카야가 있다. "소련의 비비안 리" 라고 일컫어질 정도로 빼어난 미모를 자랑했던 그녀는 1961년 '진홍색 돛' 으로 데뷔해 평단과 관객들의 호평을 받고, 이후 '앰피비언 맨', '전쟁과 평화' 등 다양한 영화에 출연해 러시아 영화계 굴지의 여배우로 자리매김한다.
더불어 이 시절, 비록 사상적인 한계가 있다고 해도, 여러 모로 꽤 볼만한 영화가 많았다. 전쟁과 평화처럼 무려 75만명을 동원하여 기네스북에 사람을 가장 많이 동원한 영화로 올라가서 아직까지, 아니 미래에도 깨어지지 않을 기록도 이 시절 소련 영화였다. 이런 거 말고도, 거대한 드래곤을 잡는 러시아 전설에 대한 영화로도 10만명이 넘는 엑스트라를 동원하거나, 2차대전 쿠르스크 전투를 그린 영화를 만들며 30만에 이르는 엑스트라 및 실제 전차 수백여대를 쓰며 독일 및 다른 나라 배우까지 캐스팅시켜 독일군과 영국군으로 나오게 하던 것도 이 시절 나왔다. 그야말로 엄청난 규모로 영화를 찍은 것이다.
소비에트 정권 말기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를 시작하면서 표현의 자유가 점차 보장되자, 국가가 독점적으로 제작하던 영화시장에도 실험적인 독립영화가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로 인해서 이전까지 개봉되기 힘들었던 소련 사회의 어두운면을 다룬 사회비판적인 영화들이나 이전의 검열로 인해 창고에서 잠들었던 영화들이 속속 개봉되었으며 개중에 <53년의 차가운 여름>, <어린 베라> 등 흥행에 성공한 작품도 다수 나올 정도였다. 특히 소련 사회의 부조리를 매섭게 비판하는 <인터걸> 같은 영화에서 시작해 훗날 컬트적으로 인기를 얻은 <이글라>, <킨자자!>같은 작품까지 당시 어려웠던 사회상과는 별개로 오늘날까지도 화자되는 명작이 다수 배출되었다.
7. 1990년대 이후의 러시아 영화
하지만 이러한 창작붐은 몇년 지나지 않아 소련 해체로 인해 급속히 사그라들었고 러시아 내 영화제작자들은 소련 해체와 함께 찾아온 영화시장의 붕괴로 인해 재정적인 고통을 감수해야했다.우선 소련 붕괴 직후에 초인플레이션이 닥쳐오는 경제적인 혼란기가 닥쳐오면서 각종 사회복지제도가 붕괴되었으며 시민들의 예금은 휴지조각이 되었고, 이로 인해 주머니 사정이 열악해진 기존 영화애호가들이나 일반관객들은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것보다는 TV를 통해 방송되는 영화를 보거나 비디오 대여점으로 가서 싼값에 영화를 빌리는 것을 선호하게되었고, 이 때문에 수많은 영화관들이 관객수 감소로[2] 문을 닫게 되었다. 비디오 영화가 러시아 영화계의 버팀목이 되었냐면 그러하지못했는데 비디오 대여점에서 파는 영화들은 대개 헐리우드 영화나 옛 소련시절 영화 등을 불법 복제해온것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비디오 영화시장이 커진다한들 러시아 영화 제작자들이 벌 수 있는 수입은 얼마 없었고[3] 그나마 벌 수 있는 수입의 태반을 마피아가 가져가는 막장상황이었다. 어느정도냐면 당시 TV방송국에서 틀어주는 영화도 대다수가 저작권료를 내지 않은채 방영되었다. 거기에다가 소련해체와 더불어 영화업계에 대한 지원도 사실상 사라졌고 미국영화가 러시아 영화시장에서 차지하는 점유율은 무려 70%대에 달한데 반해 러시아 영화는 소련시절의 영광은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린채 점유율은 10% 미만을 기록하여 영화는 죽었다라는 말이 나올정도로 당시 러시아 영화계는 말 그대로 밑바닥까지 떨어져서 황폐화 되었다. 한국영화계도 침체였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경제상황의 차이나 스크린 쿼터제의 유지 등으로 러시아보다는 상황이 훨씬 나았다.
이 시절의 암울한 감수성을 잘 보여주는 영화로는 키라 무라토바의 무기력 증후군, 알렉세이 발라바노프의 브라트(러시아 영화), 파벨 룽긴의 택시 블루스. 알렉세이 게르만의 스탈린 사후를 다루는 역사극 흐루스탈료프, 나의 차!, 비탈리 카네프스키의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와 눈 오는 날의 왈츠가 있다. 전반적으로 기존 소련 영화와 달리 수다스럽고 기괴하며 검열의 완화로 인한 과격한 표현, 현실에 대한 강한 좌절감이 드러나는 편이다.
이러한 상황으로 말미않아 시장경제를 주장하는 정치인들조차 러시아 자체 영화에 대한 지원을 강화해야한다고 나설정도가 되었고 1999년 들어서 영화에 대한 국가적인 지원이 재개되었고, 2000년대 이후로 러시아의 경제상황이 나아지면서 소련시절만은 못하더라도 러시아 영화의 점유율이 늘어나고 있고, 엑스트라를 수십만명이 쏟아부은 영화들이 나온 소련시절만큼은 아니더라도 거액의 자금을 들인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흥행을 이어가며 현재 러시아 영화가 자국시장에서 차지하는 점유율은 16% 정도로 1990년대 중반 시기에 비하면 어느정도 늘어났으며 대도시 지역에서 영화관들이 다시금 늘어나고 있고 멀티플렉스화도 이루어졌으며 중소도시에 영화관을 대대적으로 증설하는 등 소련시절의 영화 인프라 수준을 재건하려는 작업들이 이어지고 있다. 물론 이러한 러시아 영화의 부흥과는 별개로 러시아 영화만의 특색이 많이 사라지고 헐리우드 영화의 제작방식이나 줄거리를 비슷하게 따라가고 있는 작품들이 적지 않게 나오고 있다보니까 이와 관련한 비판도 많다.
반대로 푸틴 독재 체제가 확고해지면서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금 사건처럼 자국 비판적인 영화인에게 탄압과 비판을 가해대는 문제도 발생하고 있다. 안 좋은 쪽으로 중국 영화를 닮아간다는 얘기도 있을 정도. 키릴이 감독한 레토(영화) 주역인 유태오도 우여곡절 끝에 촬영이 끝나고, 동료 러시아 배우들에게 너는 한국으로 돌아가니 다행이지만, 우리는 앞으로 걱정이다. 라는 한탄을 들었다고 한다. 감금당하진 않았지만,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의 리바이어던도, 자국 비판적인 내용 때문에 관제 언론의 공격을 받아야 했다. 결국 즈바긴체프의 2017년작 러브리스는 해외 자본 비율을 최대화하는 방식으로 검열을 피했다.[4] 태양 아래라는 북한 체제 고발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한 비탈리 만스키 감독도 2015년 라트비아로 이주하여 2016년 인터뷰에서 북한에서는 러시아가 이제 자신들과 똑같은 나라라고 생각한다고 비판했고, 2022년 3월 전쟁 직후 모스크바 극장에서 전쟁에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페인트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그래도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까지는 어느 정도 표현의 자유가 지켜져 자국 비판 영화에도 지원이 들어갔으나, 침공 이후로는 검열 체제가 강해지고 지원이 끊기면서 산업 자체에 암운이 드리워졌다. 탄압의 된서리를 제일 심하게 맞은 키릴 세레브렌니코프는 감금이 끝나자 러시아를 떠났고, 출판 하마토바처럼 러시아 훈장을 받은 배우조차 전쟁 비판 메시지를 내고[5] 라트비아로 떠나버렸을 정도로 유출 현상이 나타나는 중. 하지만 러시아어권 영화 산업이 워낙 한정적이고[6], 러시아 이미지가 폭락한 상황이라 이주조차 쉽지 않다고 한다.[7]
할리우드 영화들이 불법적으로 극장에 대놓고 상영하고 있으며, 선전 영화들은 흥행도 신통치 않다는 것이다.#
8. 러시아 영화의 특징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처럼 초창기 영화사에 혁명을 일으킨 몽타주 기법의 중심이기도 하지만, 정작 그 몽타주 기법은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상업적으로 재밌게 편집하기 위해 활용되었다(…) 본디 몽타주 기법은 혁명을 위한 정치적인 기법이었다.안드레이 타르콥스키라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예술영화계의 거장이 등장하기도 했다. 더불어 소련 시절에는 엄청난 엑스트라로 알아주는 영화들이 대거 나왔는데, 특히 러시아 신화를 영화화한 작품에서는 괴수물 마니아들의 호평을 받은 작품도 여럿 나왔다. (다수의 엑스트라를 출연시키는 이유는 인민을 위한 영화라는 정치적인 목적에 기반한다. 물론 영화시장이 엄청나게 거대했던것도 있겠지만.) 10만 이상의 엑스트라를 써서 드래건을 잡는 거대한 스펙터클을 보여줬으며, 세르게이 본다추크의 '전쟁과 평화'는 기네스북에도 오른 총 70만 이상 엑스트라를 쓴 바 있다. 물론 이건 소련의 영화시장이 그 만큼 거대했다는 점이 강했기 때문에 1990년대 이후로는 영화시장이 밑바닥까지 떨어졌고 현재도 그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기 때문에 이런 영화를 찍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타르콥스키 이후엔 비평적으로 알렉산드르 소쿠로프와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 감독이 예술 영화의 명맥을 잇는 중. 레토(영화)에 출연했던 유태오의 인터뷰에 따르면 예술 영화 투자 같은 경우, 재벌에 속하는 기업가들이 투자를 많이 해주는데 '우린 딴데서 돈 많이 버니 손실은 신경쓰지 마'에 가깝다고 한다. 1990년대 공산주의 체제 붕괴 이후 나이트워치 시리즈 등 다양한 상업 영화들도 점점 나오고 있는 중이다. 1990년~2000년대의 영화들은 신생 러시아 상업 영화의 붐이라고도 볼수 있는데, 그 당시의 암울한 분위기와 리얼리즘 느와르의 지평을 연 '브라뜨' 시리즈도 있었으며, 시베리아의 이발사와 같은 러시아 제국에 대한 고증을 살린 수준급의 역사 로맨스도 존재한다. 하지만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무비들, 특히나 슈퍼 히어로 영화들을 독창성없이 따라하는듯한 양산형 저질 B급 영화들도 나오고 있다는게 문제.
러시아에서 개봉되는 외국영화의 경우 가장 큰 특징은 더빙을 한다는 것인데[8] 단순히 더빙을 한다면 별 화제거리도 안되었겠지만 그냥 더빙도 아니고 배우들의 목소리를 전혀 삭제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위에 성우들이 더빙을 한다. 그 때문에 원본 대사와 더빙 대사가 동시에 들린다. 그 외에도 러시아 내에서 만든 영화 역시 그렇다. 캐릭터가 외국어로 말할 경우 그위에 바로 더빙을 해서 역시 두 언어가 동시에 들린다. 무엇보다 국어책 읽기식의 더빙이라 듣는 사람 입장에선 더더욱 묘하다. 영화 뿐 아니라 드라마도 마찬가지. 이는 러시아어 특징상 자막을 만들 경우 자막이 너무 길어지는 문제가 있어서 이렇게 된 거라고 한다. 그런데 이는 자막이 아니라 더빙을 하는 것에 대한 이유는 될 수 있지만 왜 원어까지 이중으로 내보내는지에 대한 이유는 될 수 없다.[9][10] 참고로 이 시스템은 발트3국 등 다른 구소련권 국가들도 마찬가지이며, 베트남과 폴란드에서도 이러한 더빙 시스템을 수출해서 이들 나라에서도 외국영화를 국어책 읽기식으로 더빙한다.
북한에서 소련 시절에 영화가 많이 수입되어왔기 때문에 남한에서 할리우드 영화와 홍콩 영화가 인기가 많았듯이 소련 영화가 인기가 많았다고 하며, 북한 영화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체제선전 영화를 많이 수입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소련의 영화산업이 엄청나게 발전한 덕택에 장르도 나름대로 다양하다 보니까 더욱 인기를 끌었다는 듯. 다만 90년대에 러시아 영화시장이 한 동안 붕괴상태에 있던것도 있고 21세기 들어서도 시장 면에서 중국보다는 작다보니까 중국 영화에게 밀린다는 듯하다.[11]
워낙 한 끝발 날린데다 세계 영화사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편인지라, 러시아인들의 자국 영화에 대한 자존심은 상당히 강한 편이다. 또한 소련에게 우호적이었던 제3세계 출신 영화인들 역시 소련/러시아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많다. 일례로 아프리카/세네갈 영화의 시조로 불리는 우스만 셈벤은 소련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돌아왔다.
우주영화나 전쟁영화 쪽에선 고증이 엄청나다.
유난히 주인공이 영웅으로 성장하는 류가 눈에 띄게 많다. 스테이션 7이나 과거 소련의 선전영화가 대표적 예시.
9. 감독들
-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
- 알렉산드르 도브젠코
- 지가 베르토프
- 세르게이 본다르추크
- 니키타 미할코프
-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 세르게이 파라자노프[12]
- 알렉산드르 소쿠로프
- 알렉세이 발라바노프[13]
- 알렉세이 게르만 - 아버지 알렉세이 유리예비치 게르만과 아들 알렉세이 알렉세예비치 게르만 모두 영화 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 - 데뷔작 리턴으로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감독. 현재 소쿠로프와 세레브렌니코프와 함께 러시아 예술 영화를 이끄는 감독이다.
-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10. 나무위키에 등재된 러시아 영화 목록
- 거울(영화)
- 그린 엘리펀트(...)
- 나는, 인어공주
- 노스텔지아
- 레토(영화)
- 러브리스
- 리바이어던
- 만약 내일이 전쟁이라면
- 몽골
- 미래에서 온 손님
- 병사의 시
- 베를린 도로
-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
- 브라트
- 브레이브 언더 파이어
- 솔라리스(1972)
- 세이빙 레닌그라드
- 스탈린그라드(2013)
- 스토커
-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 안드레이 루블료프(영화)
- 어거스트 에이트
- 엔지니어링 레드(...)
- 영웅: 샐러멘더의 비밀
- 운명의 아이러니
- 워털루
- 인간의 운명
- 인어 아가씨의 슬픈 사랑
- 전역
- 전쟁
- 전쟁과 평화
- 전함 포템킨
- 제독
- 제9중대
- 즈베즈다
- 카프카스의 포로
- 컴 앤 씨
- 캡틴 프로닌[14]
- 코마
- 파일럿: 배틀 포 서바이벌
- 플래닛
- 하드코어 헨리
- 희생(영화)
- 화이트 타이거: 최강 전차군단
- T-34(영화)
11. 영화 사이트
- 키노포이스크: 세계 2위의 영화 사이트.
12. 영화관
[1] 이 영화에서 한국인에게 모래시계 삽입곡으로 잘 알려진 백학(Журавли)이 삽입되었다.[2] 1995년 기준으로 1인당 영화관람횟수가 0.25회로 집계되었는데 이 수치는 불과 5년전인 1990년에는 8회를 기록했다. 결국 관객수가 1/30이하로 떨어진것이다.[3] 심지어 헐리우드 영화들이 박스오피스 수위권을 달리기는 했다만 이러한 경제적인 여건과 불법복제가 판치는 현실 때문에 외국에서 영화를 정식수입한 업자들도 기대했던 만큼의 수입을 벌어들이기 힘들 정도였다.[4] 그럴만한게 이 영화에서는 돈바스 전쟁과 2014년 소치 올림픽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이 들어있었기 때문에 시비 걸릴 가능성이 리바이어던보다 훨씬 높았다.[5] 이 배우는 푸틴 선거를 도왔던 경력이 있었다. 하지만 운영하는 자선 재단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했다는 얘기도 있고, 돈바스 내전이 일어날 줄 알았다면 지지하지 않았을 거라면서 푸틴 지지를 철회한 상태.[6] 영어권이나 프랑스어권과 달리 사실상 영화 산업이 제대로 돌아가는 데가 러시아 하나 밖에 없다. 우크라이나와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같이 인구수가 어느정도 되는 나라들은 있기는 하나 헐리우드 영화가 시장점유율 대부분을 차지한다.[7] 출처[8] 물론 자막도 쓰지만 러시아어의 특성상 자막으로 하면 화면에 차지하는 비율이 많아지기 때문에 관람에 불편해서 선호되는 편은 아니다.[9] 아마 당시 러시아의 편집기술이 서방국가에 비해 떨어지는 편이라 그냥 원본 영화의 영어대사를 작게 줄이고 더빙을 입힘으로써 비용절감이 목적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10] 다만 외국산 아동용 TV애니메이션은 타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풀더빙을 한다 다만 사우스파크, 심슨 같이 성인용 만화는 해당이 안되는듯. 그래도 자본이 제대로 들어갔을 경우에는 원래 녹음을 뺀 버전으로 더빙하기는 한다.[11] 하지만 최근의 중국 영화는 중국공산당을 찬양하는 국뽕 영화를 공산당원과 공무원, 군인들이 주도하여 관람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어 유랑지구를 정점으로 투입 예산을 늘려도 퀄리티는 오히려 폭락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어 건전한 영화시장이라고 보기가 어렵다.[12] 다만 인종 자체는 아르메니아인.[13] 원래도 저명했지만 브라뜨 시리즈를 제작하면서 엄청난 명성을 얻게된다. 러시아의 "타란티노"라는 별명도 얻을 지경.[14] 1992-5년동안 나온 정신나간 신생 러시아의 애니메이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