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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영화 센터(Hellenic film commission) 홈페이지
기본정보 (2018년) 출처(EFP: 유럽 영화 프로모션) | |
인구 | 1,075만 명 |
순수 자국생산 장편영화 | 극영화 19편, 다큐멘터리 18편 |
관객 수 | 940만 명 |
1인당 연간 영화 관람 횟수 | 0.94회 |
자국영화 점유율 | 7.8% |
스크린 수 | 547개 |
1. 개요
그리스의 영화 산업에 대해 서술한 문서.의외로 영화쪽에서 명망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줄스 다신 부인으로 유명한 멜리나 메르쿠리 같은 국제적인 스타도 배출했고, 그리스인 조르바 영화화로 유명해진 마이클 카코야니스,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테오 앙겔로풀로스나 코스타 가브라스 같은 국제적인 영화감독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할리우드에서는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페르소나 페돈 파파미하일 촬영 감독이 유명하다.[1] 그리스 북부의 중심지인 테살로니키에서는 국제영화제도 열린다. 다만 상업영화는 미국 영화와 영국 영화가 싹쓸이하고 있다.
2. 영화 시장
그리스 영화 시장은 2017년이 최신 자료인데 6,500만 유로이다. 링크 2011년에는 9299만 유로였다. 2011년 기준으로 당시 인구는 1,135만명, 영화관 방문객 수는 1,190만 명으로 1인당 연간 영화 관람 횟수는 1.0명이다. 영화관 스크린 수는 2017년 기준으로 390개. 링크 2010년에 370개 스크린이 있던 것에 비하면 영화 시장 악화에도 불구하고 스크린이 무려 20개나 늘었다.2011년 이후로 본격화된 그리스 경제위기의 여파로 2011년 이후 그리스 영화 시장은 악화일로다. 2015년에 와서야 그리스 박스오피스가 2009년 이후 6년만에 플러스로 돌아섰다. 2009년의 1억 24만 유로에 비해서 2017년의 상황은 65%에 그치고 있다. 그리고 2009년 수준을 회복할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다.
미국 영화가 제일 많은 점유율을 차지하고 그 다음 영국 영화와 다른 유럽국가 영화들도 점유율을 일정부분 차지한다. 자국영화의 점유율은 2018년 기준 7.8%에 불과하다.
한국 영화, 중국 영화, 일본 영화들은 그리스 영화 시장에 접근하지 않고 있다. 그나마 일본 영화 중 애니메이션 극장판들이 일부 그리스에 제한적 상영을 하기도 한다.
한국 영화는 그리스에 거주하는 한국 교민들에 의해 소비되며, 주로 불법 복제나 넷플릭스, 한국의 VOD서비스로 들어가기에 한국 영화의 그리스 정식 수출 실적은 무의미할 정도로 없는 편이다.[2]
3. 역사
3.1. 초기
1830년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한 그리스에 처음으로 영화가 전래된 것은 1897년이다. 1897년에 영화가 전래되자 아테네의 그리스인에 의해 최초의 영화관 법인과 영화 제작사가 설립되었다. 영화 촬영은 1897년 시작되었고, 아테네와 테살로니키에 1898년 최초의 영화관이 세워졌다.그리스 왕국 정부에서도 영화 산업을 진흥시키기 위해 영화 제작자들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전쟁 기간동안 그리스에서는 영화관 문을 닫고 영화 제작을 금지시켜 영화 제작자들의 원성을 샀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고 1차대전이 종전을 맞고 나서야 영화 제작이 다시 허용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예술영화 위주로 만들어지던 그리스는 전간기가 되자 상업영화가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그리스에서 최초의 성공적인 상업영화는 1920년 제작되어 1922년 출시된 코미디 영화 Βιλλάρ στα γυναικεία λουτρά του Φαλήρου이었다. 테살로니키에서 제작되고 최초 개봉했는데 대성공해서 2019년 지금까지도 테살로니키에서는 해당 영화에 대한 기념회를 매년 해당 영화 개봉일에 한다고 한다.
3.2. 1936년 ~ 1940년대
그리스에서 1936년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자, 수많은 그리스 영화인들은 군부에 의한 대대적인 탄압을 받게 되었다. 그리스 영화인들은 군부 쿠데타를 반대하고 자유주의 계열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리스 영화인들은 키프로스, 유고슬라비아 왕국, 루마니아 등으로 뿔뿔이 국외로 탈출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와서야 복귀한다.제2차 세계 대전에 그리스는 베니토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가 1940년 10월 28일 그리스를 침공하여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한다. 하지만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군은 그리스에서 완패를 당하고 오히려 침공 1달만에 이탈리아가 그리스한테 땅을 삥뜯기는 병맛나는 상황에 처했다. 이 때 그리스에는 대승에 환호하며 승전을 축하하는 선전 영화가 수십여편이나 쏟아져 나왔다.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처음에는 이탈리아를 손절하고 그리스한테 승전 축하 전보를 보내며 그리스를 추축국으로 끌어들이려 애썼다.
하지만 무솔리니의 대삽질때문에 독일이 북아프리카 전역을 책임져야 했고, 영국이 그리스와 접촉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는 결국 연합국에 붙었다. 결국 히틀러는 그리스에 대한 태도를 우호적에서 적대적으로 바꾼다.
1941년 4월 6일 히틀러는 대대적인 그리스 침공을 감행했다. 독일군은 이탈리아군과 비교도 안 되게 강한 전쟁 기계에다 바로 밑에 있던 불가리아 왕국까지 슬슬 구슬려 참전시켜 협공을 했던지라 그리스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결국 그리스 왕국은 3주만인 1941년 4월 27일 멸망당했다.
그리스 왕국의 패망 이후 나치 치하의 그리스국이 세워졌다. 나치 독일 치하의 그리스 영화는 독일 영화 시스템으로 개조당했으며, 그리스어 영화 제작이 철저히 금지되었다. 그래도 같은 나치 치하를 겪었던 폴란드 영화보다는 상황이 나았다.
폴란드는 아예 폴란드 제2공화국 시절의 폴란드 영화를 보면 아우슈비츠로 끌려가던 시절이었는데 나치 독일은 영화를 구실로 그리스 국민들을 폴란드 수준으로 탄압하지는 않았다. 그리스 영화들은 나치에 의해 파괴되지 않고 계속 보존되었다. 이렇게 한 것은 히틀러가 그래도 그리스-이탈리아 전쟁에서 이긴 그리스를 일부 '봐준' 것이었다. 물론 다른 분야는 철저히 탄압했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의 패망으로 종전되고, 그리스는 다시 독립국이 된다. 이에 군부 쿠데타 시절 국외로 탈출했던 그리스 영화인들이 대거 그리스에 복귀하게 된다. 이는 1950년대의 그리스 영화 황금기로 이어진다.
3.3. 황금기
1950년대와 1960년대는 전간기 시절을 뛰어넘는 그리스 영화의 최전성기였다. 훗날 민주화 운동에 장관까지 역임한 그리스 국민배우 멜리나 메르쿠리가 미국 출신 거장 줄스 다신[3]을 만나 결혼한 뒤, 그리스 배경 영어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일요일은 참으세요', '토카피', '페드라' 같은 영화들이 대표적이며 이 영화들은 비평과 흥행 모두 성공하면서 그리스 영화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한국에서도 큰 임팩트를 남겨 기성세대들의 추억으로 남아있다. 다신-메르쿠리 콤비는 지금도 그리스에서는 상당히 존경받는다.한편 마이클 카코야나스 같은 감독 역시 그리스인 조르바 영화화부터 시작해 영어권에서도 이름을 알리는데 성공했다.
3.4. 1970년대 ~ 1990년대
1970년대 군부 독재 이후 그리스 영화는 '수치상으로는' 황금기보다 더 뛰어난 시절을 맞았다. 군부 정권은 자신들의 선전을 위해 1971년 Hellenic film commission(그리스 영화 센터)를 설립하고 대대적인 영화 제작 지원을 하였다.그러나 전간기와 황금기 시절 그리스 영화를 주도했던 자유주의 영화 풍조는 철저히 탄압하여 질적으로는 엄청나게 악화되었다. 예술영화는 거의 나오지도 않고 상업영화들도 독재 선전용 영화들로 떡칠되었다. 그리스 영화인들은 이 시기를 흑역사로 여긴다.
1974년 군부정권이 물러나고 민주화가 되었는데... 하필이면 컬러 TV가 도입되며 그리스 영화판은 폭삭 주저 앉는다. TV가 들어오기 전에 일본 영화 시장에서 1인당 연간 영화 관람 횟수가 14.3회에서 TV 도입 이후 1인당 영화 관람 횟수가 1명 정도까지 폭삭 주저 앉았는데, 그리스 영화판은 일본 영화판보다 더 극적이었다. 그리스 영화는 컬러TV 도입 이전 영화 관람 연간 횟수가 15회에 달할 정도로 많았으나 1980년대가 되면 연간 1회 아래로 떨어진다. 수치상으로 1/16 미만으로 줄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리스에서 일부 만들어진 영화들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외국어영화상을 받고, 미국 영화와 영국 영화 시장에서 히트하기도 했다.
일단 테오 앙겔로풀로스가 롱테이크 위주로 자국 역사를 회고하는 유랑극단으로 본격적인 전성기를 열어젖히며 세계적인 거장으로 부상했다. 특히 앙겔로풀로스는 그리스 영화에 대한 선입견도 굳혀버려서,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등장하기 이전의 그리스 영화는 성찰적이고 느린 영화들이라는 인식을 강하게 만들었다.
해외에서는 망명했던 코스타 가브라스가 정치적인 영화로 히트를 기록하면서 헐리우드 진출에 성공해 멜리나 메르쿠리나 마이클 카코야니스 다음으로 국제적인 그리스 영화감독으로 자리잡았다.
1990년대부터 그리스의 유럽연합 가입이 가시화되고 이 때쯤 되면 군부 독재 청산도 이뤄지면서 Hellenic film commission(그리스 영화 센터)도 정상화되고 그리스 영화 시스템도 정상화되었다. 이 때부터 멀티플렉스가 들어오며 조금씩 증가세로 돌아섰다.
3.5. 유럽연합 가입 ~ 2000년대까지
그리스의 유럽연합 가입 이후 2000년대까지는 그리스 영화가 크게 성장했다. 국가 회계를 분식회계까지 해가며 유로화에 가입했는데, 2000년대 유로화의 강세로 그리스의 소비력에 엄청난 거품경제가 발생한 것이다.예술영화와 상업영화가 반반 정도를 보이며 균형을 잡던 그리스 영화 시장은 유로존 가입 이후 버블이 낀 소비력에 기반하여 철저하게 상업영화에 투자되었고, 예술영화는 소외되었다.
그나마 2003년 터키 문서에도 언급된 터치 오브 스파이스가 대히트를 기록하면서 저력이 죽지 않았다는걸 알렸지만 여전히 아슬아슬하다.
3.6. 2010년대
2011년 그리스 경제위기로 인해 그리스 상업영화 시장은 박살이 났으나, 예술 영화계는 오히려 세계적인 주목을 받으며 그리스의 이상한 물결(Greek Weird Wave)이라는 새로운 그리스 영화 사조가 탄생되었다.그리스 영화 센터에서 없는 나라 살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돈을 지원하고 있기 때문에, 2010년대에는 예술영화 위주로 발전하고 있다. 2010년대 그리스 영화는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자주 초청되었고 수상도 종종 했다.
란티모스 역시 "그리스에서 영화 만드는 건 쉽지 않다. 믿을 건 오로지 정부 지원인데 늙은 감독들만 지원을 받는다. 하지만 새로운 그리스 필름 센터의 위원장은 젊은 감독들에게 지원을 주기로 결정했다. 일종의 혁명이다."라고 자국 상황을 알리기도 했다.
2000년대-2010년대에는 요르고스 란티모스를 중심으로 아티나 라켈 창가리나 알렉산드로스 아브라나스 같은 도회적인 감독들이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란티모스는 국제 진출에 성공한 그리스 감독이 되었다. 다만 란티모스나 창가리, 아브라나스 모두 이름을 알리자마자 국제 진출하거나 국제 활동을 병행하는 걸 보면 자국에서는 오래 활동하기 힘든 건 여전한 것으로 보인다.[4]
4. 애니메이션 영화
애니메이션 영화도 있기는 한데, 한국에 수입되는 건 거의 없다시피하다.5. 영화감독
6. 영화 배우
7. 작품
주로 코미디 영화, 뮤지컬 영화 부문이 강세이다.8. 영화관
[1] 참고로 페인도 그리스계 미국인이다.[2] 네이버 N스토어 등을 통해 다운로드 된 이후 불법 복제 되는 루트가 많다. 넷플릭스로 수출된 영화들은 넷플릭스 가입자들에 한해 보곤 한다.[3] 범죄 영화사에서 반드시 언급되는 리피피, 밤 그리고 도시, 벌거벗은 도시 같은 걸작들을 만든 감독이다. 매카시즘 광풍 때문에 피해를 많이 받았던 감독으로, 당시 유럽으로 활동 영역을 옮긴 상태였다.[4] 창가리는 미국 유학파로 리처드 링클레이터랑 친분이 있어서 데뷔 전에도 후에도 링클레이터 영화에 가끔 얼굴을 내밀었으며, 아브라나스는 은밀한 가족으로 주목받자 미국 가서 짐 캐리 주연인 영화 다크 크라임을 찍었지만 폭망하고 다시 돌아온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