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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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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구분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
세기구분
19세기 20세기 21세기
밀레니엄구분
제1천년기 제2천년기 제3천년기
1. 개요2. 정치
2.1. 세계2.2. 한국
3. 경제
3.1. 세계3.2. 한국
4. 문화
4.1. 음악
4.1.1. 한국 음악4.1.2. 중화권 음악
4.2. 영화4.3. 방송4.4. 만화, 애니메이션4.5. 게임
5. 대중문화 속의 1970년대6. 1970년대생7. 1970년대에 들어가는 해

1. 개요

서기 1970년~1979년까지를 이르는 연대시기. 1960년대 못지않게 경제발전이 어느 정도 발전기에 접어든 시기이기도 하였지만 정치적으로는 1945년부터 시작되었던 동서냉전 체제가 계속되었던 시기였고 중동전쟁석유파동(오일쇼크)까지 겹쳤다. 그만큼 시대가 격동적이다. 하지만 데탕트 등의 긍정적인 사례도 존재했다. 아타리 2600 등의 게임기를 통해 본격적인 게임의 시대가 도래한 년대이다.

여담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피해를 입었던 상위 선진국[1]들이 전쟁의 상흔을 완벽히 씻어내고 다시 경제적 여유를 되찾은 시기이기도 하다.

2. 정치

2.1. 세계

New York City 1970s Part 1 - www.NBCUniversalArchives.com

미국소련의 양강 대결이 이 연대에서도 이어졌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서 간신히 벗어났지만 남베트남북베트남1975년 멸망하는 등 일시적 쇠퇴를 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70년대 후반에도 오일쇼크와 경제위기, 지미 카터 시절의 이란 이슬람 혁명(호메이니 집권), 이란 대사관 사건도 미국의 영향력 쇠퇴를 우려하게 했다. 리더십 측면에서도 닉슨의 사임 이래 포드와 카터가 모두 재선에 실패했다. 영국 역시 영국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반면 소련은 오일쇼크를 바탕으로 브레즈네프 정권이 그나마 안정된 경제사정을 유지하는 등 일시적으로 호시절을 보낸다. 80년대의 서구(영미)권의 신보수(+신자유주의) 우위와 공산권 붕괴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달까.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중국에게 손을 벌리며 데탕트(화해)를 기획한다. 1971년대만(중화민국)을 상임이사국에서 축출하고 UN에 가입한 중화인민공화국이 처음으로 국제사회에서 모습을 드러내었으며 이때부터 상임이사국으로 부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72년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닉슨이 중공을 방문하고, 중공과 일본 국교가 회복되었다. 여담이지만 리처드 닉슨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회복세를 나타나기는커녕 오히려 하락세를 걷고 있다.

한편 중공은 1976년 저우언라이마오쩌둥이 잇달아 죽고 화궈펑에 의해 4인방이 축출되고 덩샤오핑이 복권되면서 개방의 물결이 시작되게 된다. 대만에서는 장개석이 비슷한 시기(1975년)에 죽고 옌자간에 거쳐 아들 장징궈가 뒤를 잇는다.
포르투갈에서는 철권 독재 정치를 펼친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전 총리가 1970년 사망하고 1974년 모잠비크, 앙골라, 기니비사우 등 아프리카 식민지 전쟁에 참전했던 군부내 소장파 장교들을 중심으로 카네이션 혁명이 일어나 살라자르의 뒤를 이어 독재정치를 펼치던 마르셀루 카에타누 총리가 축출되면서 오랜 극우 독재정권이 붕괴되었고 포르투갈의 이웃나라 스페인 역시 이듬해인 1975년 스페인 내전을 통해 집권한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죽고 프랑코 사후 후안 카를로스가 국왕이 되어 왕정이 부활하면서 남유럽의 독재체제가 종식되었다.

반면 칠레,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페루 등 중남미 국가들에서는 군부 쿠데타와 군부 독재와 같은 군부의 정치 개입이 가중화되었고 브라질은 군정이 계속되었다.
1972년 당시 옛 서독에서 열렸던 1972 뮌헨 올림픽이스라엘 선수들을 노렸던 범죄사건 검은 구월단 사건이 터져서 이스라엘과 아랍권의 갈등이 고조되었고, 이는 여러 차례의 중동전쟁으로 표면화 되고, 이는 두 차례의 석유파동으로 이어진다.

또한 1976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캐나다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 정책을 고수하여 논란을 일으켰던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친선경기를 벌였던 뉴질랜드의 참가를 허용하자 이에 범아프리카 국가들이 반발하여 불참하는 등 정치적 성향을 거부하고 있던 올림픽 정신이 정치색깔과 인종차별 색깔 등으로 물들게 되는 계기를 낳기도 하였다.

1979년에는 소련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였다. 그리고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소련판 베트남 전쟁이 된다. 아프가니스탄 역시 헬게이트에 빠진다.
Japan in the seventies (2) 70年代の日本

일본에서는 1960년대에 이어서 좌파 투쟁이 치열했으나 70년대 일본의 좌파 운동은 내분으로 인해 구심점을 잃고, 그 가운데 적군파처럼 과격한 무장 투쟁으로 대중들의 호응을 스스로 버리고 만다. 한편 경제적으로 안정세를 유지하면서 일본 국민의 좌파 운동에 대한 관심도 사라져갔다. 경제도 망하고 정치도 우익 일변도인 오늘날의 일본을 생각하면 웃기는 일이라고 할까. 하지만 역설적으로 공산당이 전성기를 맞고 자민당이 록히드 사건과 오일쇼크로 정권유지에 어려움을 겪었을 때가 이 시기였다.(하지만 분열과 오히라 마사요시의 죽음로 정권을 계속 유지했다.)

2.2. 한국

사실상 이때부터 남북분단이 완전히 굳어졌다고 봐도 된다. 남북한에 각각 다른 정부가 수립된 뒤 태어났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사실상 유년기만 보낸 1940~1950년대생들이 이 시기부터 사회 주류가 되었는데 이들의 조국은 1948년에 수립된 단독 정부 대한민국이지 과거의 조선이나 식민지 한반도가 아니었다. 통일에 대한 회의론적인 입장이 증가한 것도 북한의 실상이 알려진 것과 더불어 이들이 사회의 주도권을 잡는 1990년대 초반부터다.

대한민국은 사실상 1961년부터 집권해온 박정희 정부가 계속되었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신민당 후보를 꺾고 3선을 달성한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에 유신헌법 개헌투표에 부쳐 91.5% 통과로 제4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본격적인 박정희 정권, 즉 유신의 시대이다.

스포츠에서는 1972 뮌헨 올림픽에서는 북한에 밀려 부진했으나, 1976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경기에서 처음으로 레슬링 선수 양정모대한민국에 사상 최초의 금메달을 안겨주었으며 이 때에 들어서 한국 스포츠가 성장기를 거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서울에서 아시아경기대회(아시안 게임)를 1970년에 열기로 하였으나 북한의 위협 문제와 경제문제 등으로 반납하게 되었고, 16년 후인 1986년에 가서야 아시아경기대회가 개최되었다.

6.25 전쟁의 폐허와 수난 속에서 태어났거나 그 이전에 태어났어도 이 시기 유년기를 보낸 초기 베이비부머, 즉 1940년대생과 1950년대생들이 이 연대에 들어서 성인으로 성장하게 되었던 때이기도 하였다. 식민지와 전쟁을 온 몸으로 겪었던 1930년대 및 그 이전 세대들 입장에서는 본격적인 해방, 전후 세대들이 등장했기 때문에 그 당시 기성세대들(1910~30년대생)의 기대가 특별히 컸던 편이었고, 이들부터 1960년대 초반생까지를 황금 세대라고 부르기도 한다.[2]

북한김일성 집권기였기 때문에 이 때까지도 남북이 대결관계를 보이고 있었다. 한때 1973년 7.4 남북 공동 성명("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과 적십자 회담을 통해 통해 남북한 UN동시가입까지 추진하기도 하였으나 이것이 성사된 것은 20년 후인 1991년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직후 1974년까지 북한에서는 주석제와 주체사상이, 남한에서는 10월 유신이 확립된다. 그리고 1976년 미군 장교들을 살해한 사건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터져서 미군이 출동하고 전쟁 직전사태까지 험악해지는 등 남북관계가 격랑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김정일로의 세습(계승)이 확정된 것도 이 때.

대학에 경찰이 배치돼 데모를 잡아 낸 것은 물론 남자는 장발, 여자는 미니스커트를 단속했다고 한다.

3. 경제

3.1. 세계

3.2. 한국

1971년 수출 규모는 1964년에 비해 10배 늘어나 10억 달러를 돌파했다. 그러나, 월남 특수 종료 및 1차 오일쇼크, 외채상환 압박, 부실기업 문제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에 대통령 박정희는 10월 유신 선포와 긴급조치 등으로 이를 무마하고, 베이비붐 세대 특수에 따른 노동력 및 미일의 원조를 바탕으로한 과다투자를 실시함으로써 경공업 수출 증가 둔화 속에서 제철이나 조선, 자동차제조 등 노동 집약형, 조립가공형 중화학 공업이 상대적으로 발달하였다.[3]

70년대 중공업화가 얼마나 성공했는지 기존 선진강대국들이 중공업 부가가치가 경공업을 추월하는 산업화가 최소한 50년 이상은 걸렸던 것을 10년 이내로 좁히게 되었다.이때의 경제성장이 국민전체에 잘 뿌려진 증거로, 노동소득분배율은 오일쇼크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급락없이 10년만에 10% 증가하였고, 개인 순 저축률은 71년 대비 5.5배나 증가하였다. 1979년 15.8%였는데 이것을 넘어서게 된 것은 7년이나 지난 1986년이었다.

8.3사채동결로 부도위기에 처한 기업들을 구제하는한편 오일쇼크로 세계경제가 침체에 빠지고 국내경제에 큰 타격을 입었으나 중공업수출증대 및 중동진출로 위기를 극복하는한편 노동집약 건설업[4]을 통해 중동지역에서 다량의 오일달러를 벌어옴으로써 성장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은 1976년 세계 19위의 무역국에 올라서고, 1977년 1인당 GDP 1,000달러를 돌파함과 동시에 수출 100억달러 달성[5]하였으나 기술, 제품 등의 해외의존율이 높았다.

다만 1970년대에는 막대한 외채를 들여온 시기였는데 1977년 갚지 못한 차관이 68억달러나(원리금43억, 이자 22억) 남은 상황에서 박정희정부는 3년간 73억불을 새로 들여온 것이다. 하지만 차관을 많이 도입한것은 자원이없는 한국이 막대한 자본투입이 필요한 중공업을 육성중이었기에 불가피했던 것이다. 대외채무액으로 산업을 육성해 수출을 하여 외화를 벌어 공업이 고도화되고 채무가 늘어나는 순환은 80년대까지 이어졌다

1970년대 말부터는 서울 강남 개발에 본격적으로 착수했고 1977년 부가가치세를 도입했다. 1979년에는 1인당 GDP 1,700달러를 달성하였다. 하지만 그만큼 주택 부동산가와 물가가 대폭 상승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에 제4기(~1982년)는 외적으로는 중화학공업의 제조업 비율 증가(53% 달성)를, 내적으로는 소득분배와 생활환경 개선, 주택 공급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78년 하반기에 이란발 2차 오일쇼크와 고도성장을 뒷받침한 과잉투자 부작용이 겹쳐 재고처리-기업정리 및 석유파동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20% 이상 치솟은 물가상승률에 10.26, 5.18등 정치적 격변까지 더해져 경제붕괴상태에 이를 뻔 했다.

실제로도 당시 GDP는 연간 7~8% 이상씩 성장했으며 잘나가는 해에는 12%까지도 성장했다. 당시 2,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국민들의 노력 등에 의한 영향력이 컸다. 지금은 사망해서 몇분 남지 않은 당시 기성 세대였던 1900~1930년대생들의 집단주의적 특성도 한몫을 했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이라고, GDP라는 국가 규모의 지표는 급격하게 발전 중이었으나 군부독재의 한계로 저임금 정책, 노동인권 탄압이 이루어지는 시기였다. 1970년은 전태일 열사의 분신 사건이 일어난 해였고 이 사건 직후 본격적으로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학생들과의 연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으며 이 때의 고착화된 노동인권적 가치가 현대까지도 '열정페이'로 대변되는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1973년에는 식량에서도 식량 자급 자족율이 100%를 넘어서 식량에서도 근대화를 일으켰으며, 북한과 1인당 국민 소득도 2배 이상으로 따돌렸다. 1960년대 중반만해도 한국보다 잘 살던 북한이었는데, 1973년에 1인당 국민 소득에서 이미 한국과는 비교할 가치가 없는 상대로 된 것이다. 1976년 세계 19위권의 무역국이 되었으며, 78년에는 17위까지 올라가 세계속의 한국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이로 인해 1인당 국민소득은 일시적으로 1800달러를 기록했으나, 2차 오일쇼크로 다시 1800 이하로 떨어졌다. 한강의 기적 문서 참조. 중화학 중복 투자와 8.3 사채 동결조치 등의 정부주도적인 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이 국가 부도 위기 등을 야기하며 큰 한계를 보였지만, 결국 부가세 문제와 함께 신민당이 득표 1당이 되고 부마항쟁이 일어나고 만다.

당시 정부의 과학기술 연구 지원과 원자력 발전 정책으로 인해 1978년 고리 원자력 발전소가 첫 가동되는 성과가 나타났다. KAIST의 성립 등 과학기술, 공업의 집중 투자가 두드러지던 시기였다. 또한 컴퓨터와 금융권 전자화가 진행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4. 문화

4.1. 음악

비틀즈1970년 해체하게 되면서 영미권 팝음악은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비틀즈와 함께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주도한 롤링 스톤즈더 후는 1960년대에 이어 큰 인기를 기록하게 되고, 핑크 플로이드 역시 1970년대 들어 음악이 성숙하면서 <The Dark Side of the Moon>이나 <The Wall>같은 역작을 탄생시켜냈다.

1960년대 말에 데뷔한 레드 제플린이 1970년대의 슈퍼 밴드로 부상하게 되고, 프로그레시브 록하드록이 전성기를 맞이한 시기이기도 하다. 블랙 사바스딥퍼플과 같은 밴드들이 커다란 인기를 얻었다. 한편 1970년대 후반이 되면 실질적으로 하드 록과 함께 록의 큰 흐름을 양분하는 펑크 록섹스 피스톨즈 등에 의하여 화려하게 등장한다. 엘튼 존, ABBA 같은 싱어송라이터와 그룹도 커다란 인기를 끌었으며 1970년대 말에는 디스코가 세계적으로 유행했다.

일렉트로니카가 처음 등장한 것이 이 시대다.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 등의 전자음악을 실험한 현대 클래식 음악가들의 영향을 받아 크라프트베르크 등의 테크노의 조상 뻘 되는 크라우트록 그룹들이 등장하였으며,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앰비언트가 태동하게 된다. 여러모로 다양한 장르가 가장 많이 시도되고 탄생한 시기이다.

4.1.1. 한국 음악

한국에서는 7080 세대들의 노래가 처음으로 세상에 선보였던 시기이기도 했다. 1970년대 초반 가요계의 아이콘이었던 나훈아-남진라이벌 투톱 체제와 하춘화 등의 트로트 가수들이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또한 세시봉으로 대표되는 송창식, 양희은, 김민기와 같은 초창기 포크가수들이 등장하여 한국 음악 장르를 더 확장시키는 것에 기여했다. 가왕 조용필이 이 시기에 데뷔하면서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크게 히트시켰다.

한편, 한국에서도 신중현에 의해 록 음악이 본격적으로 태동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한국에서 가장 독특한 음악을 한 것으로 칭송받는 산울림이 전설로 남은 초기작들을 발매하였다. 또한 70년대 후반에 들어서 대학가요제, 강변가요제등이 개최되어 한국 밴드음악에 활기를 불어넣기 시작한 시대이기도 하다.

반면 대마초 파동과 금지곡 지정 등 한국 가요의 흑역사가 많았던 시기이기도 했다.

4.1.2. 중화권 음악

중화민국에서는 외성인 문화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는 등려군이 가수로서 주가를 올려가고 있었다.

4.2. 영화

현재의 미국 영화를 완성한 시기이다. 그 전까지 1960년대에 남았던 검열이 이 때에 거의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시기도 한다. 바로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가 크게 형성하였다. 이 운동이 현재까지 미국 영화들을 질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공을 세울 뿐만 아니라 훗날 블록버스터 영화들을 대항할 수 있는 조류를 남긴 것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죠스>를 필두로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다. 1977년 <스타워즈>가 개봉하면서 20세기 가장 히트한 영화 시리즈의 시작을 알렸다.

4.3. 방송

1969년 KBS, TBC, MBC 3사 체제가 확립되면서 본격적인 텔레비전 시대가 개막했다. TV가 널리 보급되어 라디오의 지위를 추월한 것도 이 시기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유신 정권의 통제가 극심했던 시기여서 1973년 12월 에너지 절약 명분으로 아침방송이 폐지되고,[6] 1976년 4월에는 시간대별 편성 지침[7]과 외래어 사용 금지 지침[8]이 각 방송사에 내려졌다. 이때 종합뉴스 시간대가 밤 9시로 정해지면서 뉴스는 9시라는 인식이 201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다.[9]

70년대 최고의 TV 컨텐츠는 드라마였다. 당시 뉴스는 정권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코미디는 툭하면 저질 시비에 시달렸으니 방송사 입장에선 무난하면서도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드라마를 선호할 수 밖에 없었다. 1970년 TBC 일일연속극 아씨가 대히트하면서 각 방송사들이 앞다투어 연속극을 편성했고 하루에 방송사당 4~5편의 드라마가 편성되기도 했다. 또 당시에는 탤런트 전속제가 실시되었기 때문에 각 방송사의 간판 배우[10]들이 연달아 드라마의 주인공을 맡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일례로 당시 MBC 전속 배우였던 최불암김혜자는 70년대에 이미 십 여편의 드라마에서 부부 역할로 출연했다.[11]

코미디에서는 구봉서, 배삼룡, 서영춘, 송해, 이기동 등 1세대 코미디언들의 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시기였고 극후반이긴 하지만 이주일도 이 연대에 처음 TV에 등장했다. 또 TBC 쇼쇼쇼 1대 MC 곽규석[12]의 후임 MC로 허참이 등장하고 KBS의 김동건, TBC의 황인용, MBC의 변웅전, 차인태 등 명아나운서들이 활약한 시대이기도 했다.

동쪽의 섬나라 일본에선 코미디 그룹 더 드리프터즈가 전국을 들썩이게 만든 최고의 전성시대다. 특히 토요일 밤 8시 일본 TBS에서 방송한 "8시라구! 전원집합(8時だヨ!全員集合)"은 앞으로도 깨지지 않을 일본 예능 역대 최고 시청률 50.5%를 기록하며 "괴물 프로그램"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도쿄발 버라이어티 방송이 전국을 장악했던 시대이기도 하며 이것을 주도했던 것이 바로 도리후. 당시 오사카요시모토 흥업은 쪽도 못썼다

서쪽의 섬나라 영국에선 몬티 파이선이 시대를 초월한 병맛개그를 시전하고 있었다.

4.4. 만화, 애니메이션

60년대 후반 반짝했던 한국 애니메이션은 70년대 초반 침체기를 겪다가 1976년 김청기 감독의 로보트 태권 V로 최초의 전성기를 맞았다. 이후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 똘이장군 등이 히트하면서 한국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시대가 열렸다.

한국 극장판 애니메이션에서 거대로봇물이 주류가 된 이유는 일본의 영향 때문이다. 1972년 마징가 Z의 히트로 거대로봇물이 일본 애니메이션의 대세로 자리잡았고 토에이 동화가 일본 애니계의 큰손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1974년 우주전함 야마토가 매니아층을 중심으로 인기를 얻으면서 애니메이션이 더 이상 어린이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이는 곧 1, 2차 아니메 붐으로 이어진다.

4.5. 게임

세계 최초의 가정용 게임기, 마그나복스 오디세이를 비롯한 1세대 게임기들인 , 테레비 테니스, 아타리 비디오 핀볼 (일본에 수입되어 로컬라이징된 타이틀은 에포크 TV 블록), 컬러 TV 게임등이 출시되었다. 이 시기는 이른바 게임계의 석기시대. 이때를 보통 게임 산업의 태동기로 본다.

한국에서 전자오락실이 처음 생긴 것이 1974년이고, 1976년 아타리의 브레이크아웃이 인기를 얻어 시내 중심부에만 있던 전자오락실이 점차 변두리로 확산되고, 1978~1979년, 타이토스페이스 인베이더가 일본 뿐만이 아니라, 한국, 미국, 유럽에서도 큰 인기를 끌게된다.

1970년대에 등장한 게임으로 대표적인 것들은 다음과 같다.
  • 1972년 아타리
  • 1973년 타이토 축구 - 퐁의 변형으로 개량형으로 최초의 Made in Japan 게임. 한국에선 1975년 이 게임을 기본으로 축구, 탁구, 스쿼시, 사격1, 사격2 가 들어간 게임기를 제작.
  • 1974년 타이토 스피드 레이스 - 세계 최초의 드라이브/레이싱 게임
  • 1975년 타이토 웨스턴 건 - 한국에서는 무법자 란 이름으로 유통
  • 1976년 아타리 브레이크아웃 - 벽돌깨기 게임의 원조
  • 1977년 엑시디 서커스 - 시소를 이용한 풍선 터뜨리기 게임
  • 1977년 아타리 아타리 비디오 핀볼 - 최초의 가정용 벽돌깨기 게임. 1978년, 일본 에포크社에서 수입, '에포크 TV 블록'으로 로컬라이징


    • Epoch Terebi TV Block System Console JP
  • 1978년 타이토 스페이스 인베이더

5. 대중문화 속의 1970년대

시대적으로 마루코는 아홉살의 배경이기도 하다. 사실 1960년대 후반의 배경인 검정고무신이 컨셉이나 그림체를 따다왔으나 두 나라의 경제적 차이가 전혀 다른 작품으로 만들었다.

게임 어 웨이 아웃 역시 오일 쇼크가 벌어지던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게임 팀 포트리스2의 배경 또한 1970년대이다.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는 1973년을 다루고 있는 히어로 영화이다.

6. 1970년대생

1970년부터 1979년 사이에 출생한 사람들로, 2019년 기준으로 50세~41세에 해당된다. 70~80년대 에 학창시절을 보냈다.[13] 90년대~2000년대 초반에 대학생활 혹은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사교육 자유화가 되면서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사교육으로 길러진 세대이기도 하다. 대치동과 목동 등의 학원가 출현이 바로 70년대생의 고등학생 때부터다.[14] 아파트 키즈들도 이 세대부터 시작된다.

2019년 기준으로 70년생은 50대에 돌입했고, 79년생이 41세가 되었다.

이 세대가 청춘이었던 시절을 다룬 드라마가 바로 응답하라 1988응답하라 1994인데, 응8은 60년대생과 겹치는 반면, 응4는 완벽히 70년대생 이야기다.

SKY 캐슬의 작중 부모들이 70년대생이다. 응답하라 1994의 등장 세대가 나이를 먹어 SKY 캐슬의 작중 부모 세대가 된 것이다. 자기 세대부터 시작된 사교육 열풍을 아이들에게 이어가고 있고, 치맛바람 속에서 성장한 첫 세대인만큼, 작중 강준상처럼 부모가 정해준 길로 쭉 걸어왔지만, 정작 자신이 어디를 향해 가야할지 헤매는 면모도 보인다.

이 시기에 태어난 사람들은 형제자매 수가 평균 3~4명이었고,[15] 이들 세대의 자녀들은 1~2명, 아주 가끔 3명 수준이다. 이들 중에는 결혼은 필수가 아니라는 인식이 생겨서인지 아직도 미혼인 사람들도 소수 있다.

문화적으로는 비디오 게임을 처음 접하던 세대이기도 하고 아이돌 문화를 처음 접하던 세대이기도 한다. 이 세대와 그 이전의 세대의 세대차이는 꽤나 심한 편이지만 이 세대와 그 이후의 세대의 세대차이는 기성세대와의 차이만큼 심하지 않다. 이 때문인지 1970년대 초반생들과 1970년대 후반생들과의 세대 차이도 심하다는 사람들도 꽤 있을 정도. PC통신을 청소년 ~ 청년기에 가장 적극적으로 사용했던 세대이며 또한 1970년대 후반생들 한정으로 바로 후세대인 1980년대생들과 같이 초창기 인터넷 문화를 이끌었던 세대이기도 하다.

정치적으로는 진보성향이 강하지만, 사안에 따라 보수정당을 지지했던 세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는 진보성향이 아주 강해졌는데 주요 정치인들도 진보성향의 40대들이 아주 많다. 냉전이 종식되면서 남북 간의 화해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고, 북한에 대해서도 강경론보다는 화해 같이 온건론을 주요 중요시하며 반미, 반일 감정 역시 많고 민주화 이후의 운동권 세대로 한총련을 이끌며 학생운동을 하면서 보수정권에도 제법 저항한 세대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회의 안정을 중요시한다. 다만 한국 특유의 정치적 변화 때문에 이 세대는 정치적으로 진보정당에 강한 호의를 보이지만 정작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는 진보적이기보단 오히려 보수적인 모습이 보인다.

아마 1970년대생의 일부로 가장 근접되는 모습으로 이들임에 틀림없다. [16][17][18]

대표적으로 더불어민주당의 박주민, 이재정, 박용진, 김해영 등이 1970년대생 출신이다. 하지만 변희재, 김용남, 김세연, 문대성, 오신환, 김희정, 홍정욱 같은 보수정당 정치인들도 제법 있다. 이들은 2017년 기준으로 정계에서는 거의 가장 어린 축에 속하는 이들이다.

7. 1970년대에 들어가는 해

1970년 - 1971년 - 1972년 - 1973년 - 1974년 - 1975년 - 1976년 - 1977년 - 1978년 - 1979년

[1]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 등.[2] 1960년대 중반생부터는 외환위기가 겹치면서 그렇게 쉽게 평가하지 못하게 됐고, 1970년대생들은 명백한 외환위기 이후 세대다.[3] 1980년도 주요 산업별 취업계수는 다음과 같다. 반도체54.65, IT 39.21, 음식숙박 39.44, 농림어업 30.04, 정밀기계 29.62, 전자부분품 21.92, 자동차 19.24, 일반기계 19.21, 도소매 15.86, 섬유의복 14.79, 자동차를 제외한 수송기계 14.02, 가전 13.71, 화학 12.41, 음식료품 9.7, 1차금속제품 7.08, 비금속광물 9.67, 건설 6.71, 광업 3.82, 금융서비스 2.09, 석유석탄 1.76. 한편 자본집약도가 그나마 올라간 2000년도의 경우 반도체는 0.86, IT 3.53, 농림어업은 8.96, 정밀기계는 4.22, 전자부분품은 1.74, 자동차는 2.55, 도소매 10.97, 석유석탄 0.48, 음식료품 3.76, 광업 0.85. 덧붙여 21세기 제조업은 조선업 등을 빼고 1 밑으로 빠르게 떨어지고 있으며 취업계수가 낮을수록 자본집약도가 높은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시기의 중공업은 일자리를 늘리는 데 크게 기여하는 노동집약 중공업을 위주로 발달한 것이다. 이외에 http://www.ceoscoredaily.com/news/article.html?no=4957, http://www.hanjinsc.com/rnd/ship/labor_intro.aspx 등 참고[4] http://news.joins.com/article/2309981, http://www.hani.co.kr/arti/PRINT/158438.html[5] 1977년 12월 22일[6] 아침방송은 1981년 5월에야 부활한다.[7] 6시대 어린이 프로그램, 7시대 뉴스와 청소년 대상 프로그램, 8시대 가족 대상 프로그램, 9시대 뉴스와 드라마 등.[8] 특히 민영의 탈을 쓴 국영방송 MBC가 이 지침을 철저히 지켜서 뉴스데스크는 뉴스의 현장으로, 그랜드쇼는 토요일토요일밤에로 제목을 변경했고, 가수들의 이름도 바니걸즈를 토끼소녀로, 어니언즈를 양파들로 바뀌었다.[9] 1991년 신규 개국한 SBS가 종합뉴스를 8시에 편성하면서 9시=종합뉴스 공식이 처음 깨졌지만 실질적으로 이 공식이 힘을 잃은 건 2012년 MBC 뉴스데스크의 시간대 이동과 이후 JTBC 뉴스룸의 영향이 컸다.[10] 70년대 충무로 트로이카로 불리던 정윤희, 유지인, 장미희는 모두 TBC 전속 배우들이었다.[11] 두 사람의 부부연기 대표작인 전원일기는 1980년에 시작했다.[12] 후라이보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1세대 MC.[13] 70~72년생은 제외. 이들은 77~79년도에 입학했다.[14] 서울 3대 학원가로 불리는 대치동, 목동, 중계동 중 대치동과 목동이 90년대에 생겼고, 중계동은 그보다 조금 늦은 2000년대에 학원가가 형성되었다.[15] 1970년대 초반생중에서는 막내로 형제수가 5명 이상인 집안도 있고, 서울 등 도시권에서는 형제수가 2명인 사람들도 있다. 물론 후반으로 갈수록 줄어들긴 하지만.[16] 이 연대 말년엔 분명 생일이 빠른 1980년생까지 일부 포함되었을 것이다.[17] 1989년 ~ 1998년 기준으로 모든 1970년대생이 완전한, 온전한 성인이 되었다. 물론 후반 말년대에 극초반인 빠른 1980년생 역시 일부 포함되겠지만서도.[18] 조기졸업 그리고 몇 년 이상 휴학-재학한 경우 등등의 일부 역시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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