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6 15:41:04

데자키 오사무

데자키 오사무
Osamu Dezaki | [ruby(出崎統, ruby=でざき おさむ)]
파일:TKY201104240073.jpg
국적 일본 파일:일본 국기.svg
출생 1943년 11월 18일
일본 제국 도쿄도 시나가와구
사망 2011년 4월 17일 (향년 67세)
도쿄도 미타카시
직업 애니메이션 감독, 연출가, 만화가, 각본가
활동 기간 1963년 ~ 2011년
역임 직위 일본영화감독협회 회원
형제 데자키 사토시

1. 개요2. 생애3. 연출 스타일
3.1. 연출 샘플
4. 작품 목록
4.1. 감독 작품4.2. 참가 작품
5. 관련 인물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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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애니메이션 감독, 연출가, 각본가.

대표작은 내일의 죠, 에이스를 노려라!, 감바의 모험, 보물섬, 베르사이유의 장미 (1979), 디어 브라더, 블랙 잭 등이 있다.

이름이 비슷한 데즈카 오사무와 혼동할 수 있으니 주의.[1] 실제로 데즈카 오사무와 연관이 깊은데, 데즈카 오사무의 회사 직원으로 데뷔했기 때문이다.

2. 생애

도쿄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만화를 좋아해서 잡지에 응모했다고 한다. 좋아하는 만화가는 역시 그 당시 가장 활약하고 있던 데즈카 오사무. 데즈카 오사무의 영향을 받아 영화적인 연출의 스토리 만화를 그렸다.

1960년 16살인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아마츄어 만화가로 데뷔해서 대본소용 만화를 그렸다. 당시에는 도쿄에는 망가 대여점(만화방)이 비디오 대여점처럼(요즘으로 치면 PC방) 동네마다 있었다. 친형인 데자키 사토시는 당시의 동생은 "영화를 좋아했다. 서부극을 좋아해서 액션을 흉내내기도 했고, 16살에 세미프로라고 할 수 있는 대본소 만화가가 된 것을 보면 재능이 있었다고 본다"고 말했다. 프로의 만화가를 지망했는데 , 고등학생 3학년 때는 TV 보급의 영향으로 도쿄의 대본소 만화업체는 점점 망하고 전문 출판사도 모두 오사카로 전향하고 만화가의 꿈을 접어야 했다. 데자키는 만화가로서는 무명이었고 일부 작품은 유실되어 현존하지 않는다. 다만 신기하게도 훗날 그의 파트너가 되는 스기노 아키오는 그의 만화를 보고 재밌다고 느꼈다고 한다. 그의 대본소용 작품은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찾아 볼 수 있는데, 당시의 많은 만화가처럼 그림 실력은 결코 잘 그린다고 말할 수 없고 화면구성이나 모든 면에서 아마추어적이고 조잡하다. #1 #2

고3 때, 이대로는 만화가로 먹고 살기는 힘들다고 생각해서, 대여본 만화가가 아닌 아동잡지에 연재하는 메이저 만화가가 되고 싶어서 도쿄에 있는 메이저 만화잡지를 출판하는 대형 출판사에도 원고를 가져갔지만 문전박대당하고, 본인 말로는 불량청소년이 되었다고 한다. 고등학생 시절 내내 만화만 그리고 있어서 공부를 안 해서 대학에 들어갈 만한 학습 능력도 없고, 출석일수도 부족해서 졸업을 할 수 있을 지도 위험한 지경이었다. 그래서 일단 취업을 하기로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형 데자키 사토시 연줄로 도시바 공장에서 1년 반 동안 일을 하다가, 1963년 9월에 무시 프로덕션의 구인 광고를 신문에서 보고 데즈카 오사무 선생님의 회사라서 만화를 그릴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해서 입사를 결심, 알고보니 애니메이터를 뽑는 거였다. 500명 정도가 입사시험을 봤으나, 3명이 합격하는 난관을 통과. 즉시 현장에서 써먹을 수 있는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을 뽑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 당시 면접에서 그를 채용하기로 결정한 스기이 기사부로는 "이 녀석은 이미 자신의 것을 가지고 있어서 앞으로 자신의 것을 하고 싶어서,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 공부하기 위해 왔구나"라는 느낌을 받았고, 일종의 작가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무시 프로덕션에서 1년정도 작화 스탭으로 일을 하다가, 1964년에 같은 무시 프로의 선배 스기이 기사부로와 함께 일본 최초의 작화 독립 프로덕션 '아트 프레시'를 설립한다. 무시 프로에 있을 때 다른 회사의 작품을 부업으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때 처음으로 그림 콘티를 그리게 되었는데, 만화를 그린 경험도 있고, 만화와 다르게 음악도 들어가고 목소리 대사도 들어가고 이쪽이 재미있다고 생각해서 연출을 지향하게 되었다. 이후 본인이 감독하고 연출한 작품은 거의 모든 그림 콘티를 직접 그렸다. 무시 프로의 입사 후배로 들어온 스기노 아키오의 작화 재능을 보면서 애니메이터로는 내가 지겠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영화를 만들고 싶어하는 형 데자키 사토시도 끌어들여 연출가로 만들었다.

1965년에 철완 아톰로 연출 데뷔[2], 1967년에는 '오공의 대모험'[3], '도로로' 등을 연출.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꼭 이것을 만들고 싶다고 직접 무시 프로에 기획을 들고 간 인기만화 '내일의 죠'(1970년부터 방영)를 총감독, 만화영화가 아직 2차원적인 평면적인 연출을 하던 시기, 화면 안쪽으로도 공간이 있는 3차원의 마치 실사영화같은 연출로 일약 세간의 주목을 받는다. 내일의 죠에서는 나중에 데자키 연출의 하나가 되는 3회 팬, 슬로우 모션 연출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원작자인 치바 테츠야도 만화에서는 2컷인 장면을 30초에 걸려서 천천히 보여주는 것에 "신선하다. 원작보다 훨씬 좋다고 느꼈다."고 감탄을 했다.

당시 프리랜서였던 토미노 요시유키는 내일의 죠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컷의 연결이 지금까지의 일본의 아니메나 디즈니에는 없는 것이었다. 상상을 뛰어넘는 방식이었다." "처음으로 일본 TV 애니메이션 계에 천재가 있다고 생각했다." 라는 생각을 해서 그의 재능에 질투가 나서 눈물이 날 정도로 분했지만, 도게자를 하는 심정으로[4] 내일의 죠를 만들고 있던 스튜디오에 찾아가 그의 밑에서 일하기를 자청했다. #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건담을 만든 토미노는 될 수 없었다" 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천재의 것은 빼앗을 수 없다." 라는 생각이 들어서 내일의 죠를 끝으로 데자키와 연을 끊었다고 한다.[5]

'내일의 죠'의 성공 이후에 1년 동안 프리랜서 그림 콘티맨으로 활동하다, 1972년 10월에 같은 무시 프로 출신인 프로듀서 마루야마 마사오 등과 함께 매드하우스를 설립한다. 매드 하우스는 설립 자금을 도교 무비로부터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후 도쿄 무비(훗날 TMS)가 기획하고 제작하는 작품에 참여한다.

도쿄 무비 제작의 야마모토 스미카 원작의 에이스를 노려라!(1973)에서 자신만의 캐릭터 해석, 인물의 심리묘사, 독자적인 영상연출 등의 데자키 스타일을 확립한다.

이런 '데자키 연출' 스타일을 유감없이 발휘한, 1975년 감바의 모험, 1977년 집없는 아이, 1978년 보물섬[6], 1979년 에이스를 노려라! 극장판, 1980년 베르사유의 장미 등은 일본 애니메이션사에 길이남을 걸작으로 꼽힌다.

당시 도쿄 무비는 도쿄무비의 자금원조를 받아서 설립한 매드하우스와 그 전부터 도쿄 무비와 업무협조를 해 온 A 프로덕션이 애니메이션을 실제작했는데, 함께 일을 한 작품도 있었는데, 데자키식 연출은 A 프로덕션의 스태프에게도 영향을 주었고, 업계에서는 카리스마적인 존재였다고 한다.

80년대에는 우주해적 코브라의 극장판 애니메이션과 티비판 애니메이션, 그 이듬해에 고르고13의 극장판을 감독한다. 그러나 '고르고 13'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데자키 감독은 미국으로 가서 마이티 오봇츠 같은 도쿄무비신사가 추진하던 미일 합작 애니메이션에 참여한다.

그러다 일본으로 복귀, 1988년부터 1990년까지 에이스를 노려라!2와 에이스를 노려라 파이날 스테이지를 감독, 다시 한번 자신만의 스타일을 선보이며 건재를 과시한다.

1991년에 감독한 창룡전 애니메이션판은 감독의 이름값에 많이 못 미치는 작품이었지만, 창룡전 직후의 작품인 이케다 리요코 원작의 디어 브라더는 섬세한 연출과 캐릭터 묘사로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으며 데자키 감독의 능력을 또 한번 확인케 했다. 1993년부터는 블랙잭 ova를 제작하기 시작했고 96년에 개봉한 블랙잭 극장판은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TV로 복귀해 백경전설을 만들었는데 제작의 어려움으로 중간에 중단되었으나 제작사를 옮겨 완결은 냈다.

2000년대 이후의 작품들로는 2005년에 방영된 눈의 여왕 ~THE SNOW QUEEN~과 2005년 극장판 AIR, 2007년 극장판 CLANNAD, 그리고 2008년의 울트라 바이올렛 TV판이 있다.

이후 2009년 1월에 겐지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TV 애니메이션 "겐지 이야기: 천년기"의 감독을 맡았으나 2011년 4월 17일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3. 연출 스타일

파일:external/zenmetu.sakura.ne.jp/20110418a.jpg
입사광 연출의 예
데자키 씨의 영상은 영상시(映像詩)라고 부를 만합니다. 산문(散文)적이지 않습니다. 시(詩)에요.
코바야시 시치로 [7]

드라마, 코미디, 액션, 서스펜스, 관능, 하드보일드 연출은 기본으로 다 하고 동물 애니메이션, 로봇 애니메이션, 스포츠 애니메이션 같은 일반적이지 않고 남들은 못하는 어려운 장르의 연출까지 소화한 만능 연출가이다. 이러한 다양한 연출을 구사하면서도 누구나 데자키임을 알아볼 수 있는 확고한 특징이 있다. 그의 연출 스타일은 지금도 "데자키 연출"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후배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데자키 오사무는 자신은 디즈니를 목표로 하지 않다며 실사영화적인 영상물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있다. 그가 원래는 정지화를 그리는 만화가에서 출발해서 무시 프로덕션에 입사하고 당시 '테레비 망가'라고 불린 저예산 TVA를 연출하게 되었는데 그에게 애니메이션이란 그림이 움직이는 만화적인 개념이었다. 거기에 대사를 성우가 하고 효과음과 음악이 들어가는 영상물, 그리고 빠듯한 제작 예산에서 동화 매수를 풍족하게 써서 그림을 마음껏 움직일수도 없는 여건이라[8] 궁리끝에 적은 그림 매수만으로 효과적인 연출을 보여주는 기법을 추구하게 되었다. 고품질의 원화를 한 장 그려서 대사를 길게 넣어 오랜 시간 보여주는 기법, 액션 신에서 프레임을 많이 넣지 않고도 움직임이 부드러워 보이는 슬로우 모션을 자주 넣는 것이 데자키 오사무의 특징인데 이게 다 돈을 아끼기 위함이다. 대신 데자키 오사무는 이렇게 한 만큼 그림 한 장 한 장의 품질을 올렸다. 한 작품에 사용되는 그림이 적어 작화감독과 원화 애니메이터의 부담이 적기 때문에 그만큼 공들여 그릴 수가 있었다. 코바야시 시치로가 산문적이지 않고 영상시라고 시적이라고 한 말의 의도는 여기서 나온다.

이는 처음부터 극장용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들기 위해 창립한 토에이 애니메이션과 처음부터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 원작을 텔레비젼용 TVA를 만든 무시 프로덕션은 그 연출 방식이 다를 수 밖에 없었는데, 극장은 큰 스크린에서 보기 때문의 인물의 전신컷과 많은 사람이 모여있는 군중씬과 그 뒤로 웅장한 배경 그림을 파노라마로 펼쳐 넣을 수가 있고, 가로로 긴 화면에서 좌우로 이동하면서 펼쳐지는 액션 장면을 동화를 마음껏 써서 부드러운 움직임과 화려한 볼거리를 집어넣을 수 있었다. 이에 비해 4:3 비율의 24인치(대각으로 61센치)로 조그만 당시의 브라운관 텔레비젼에서는 극장용처럼 현란한 액션을 보여주기에는 불리했고, 집안에서 시청하기 때문에 산만한 어린이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는 화려하고 자극적인 연출 장면을 집어넣고, 화면은 주로 상반신 컷과 얼굴의 클로즈업을 다용했다.[9] 무시 프로덕션도 군중씬을 집어넣기는 하는데 그 장면이란 많은 사람이 모여있는 장면을 원화만 기껏 2장~4장을 이용해서 번갈아 보여주면서 군중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주는 식이었다. 게다가 같은 그림을 재활용하는 뱅크 시스템으로 작화비를 절약했다. 일본의 리미티드 기법은 미국의 정통 리미티드가 아니라 자린고비 절약 리미티드라고 볼 수있다.

데자키 오사무는 선이 많고 대사가 많은 극화의 애니메이션화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시절에 동화 수를 최대한 줄이면서 최대한 많은 내용을 화면에 넣는 기법을 창시해 내일의 죠를 완결까지 훌륭하게 애니화한 사람으로, 극화 애니메이션의 아버지라 불린다. 말이 아버지지 이때 그의 나이가 26세. 심지어 이게 감독 데뷔작이다.

이런 연출은 비단 무시 프로에서만 아니라, 선라이즈에서 활약한 나가하마 타타오는 인형극 연출 경험에서 색깔이 들어있는 불빛으로 비추는 것으로 감정과 상황을 표현하는 것을 애니메이션 연출에도 도입해서 위급상황이면 화면 전체는 붉은 톤으로 칠해서 어린이 관객이 그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연출이나, 로봇이 공격을 당할 때 조종사 소년이 으아악~!하고 함께 고통을 느끼며 비명을 지르는 연출이나, 화면분할을 해서 여러 명의 얼굴을 조그만 텔리비젼의 한 화면에서 동시에 보여주는 것 등등. 동화 매수를 아끼면서도 최대한 그럴 듯하게 보여주는 연출을 궁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점은 애니메이터라면 카나다 요시노리가 혁명적인 발명을 많이 했고 연출면에서는 데자키 오사무의 업적이 크다. 토미노 요시유키도 이 데자키와 나가하마 두 감독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내일의 죠2, 에이스를 노려라 블루레이 PV
이 PV에 하모니, 3회 팬, 입사광, 파라핀 그림자, 화면분할이 다 들어있다.
그가 개발한 연출 방식은 같은 장면을 되풀이해서 보여주는 3회 팬(pan)[10], 중요한 장면은 화면을 멈추고 일러스트풍의 한 장의 그림으로 보여주는 하모니 기법[11], 필름으로 촬영할 때 셀화 위에 반짝반짝 빛나는 빛을 찍은 셀을 겹쳐 찍어서, 화면 안으로 빛이 쏟아져 내리게 보이도록 화려한 배경효과를 주는 입사광(入射光) 기법[12][13]과, 연극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 효과를 주듯이 인물 주변의 배경화면을 검게 칠하는 '파라핀(paraffin) 그림자'. 슬로우 모션으로 보여주면서 시간의 길이를 확장, 화면을 쪼개서 다른 장면을 각각 보여주는 화면분할 등을 본격적으로 선보이기 시작했다.[14] 이런 연출 기법들은 등장하는 캐릭터의 심리를 이 캐릭터는 이 장면에서는 이런 식으로 보였을 것이다 라는 머리속의 인식을 표현한 것이다. '하모니' 기법도 원래는 슬로우 모션으로 천천히 보여주다가 결국 어떤 중요한 한 순간은 영원처럼 길게 느껴지게 보였을 것이다 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정지화면을 보여주고 배경을 수채화로 칠해서 효과를 준 것이 그 시작이었다.

또한 이런 기법은 주로 촬영 쪽에서 이루어지는 기술이다. 데자키 오사무는 특히 촬영 과정에 공을 들이고 촬영 감독 타카하시 히로카타와 늘 협의하며 촬영에서 어떤 새로운 시도가 가능할지 연구했다고 한다.

이런 평면적이고 정적인 연출 말고도 동적인 연출도 매우 잘한다. 이러한 정적인 연출은 중요한 순간에 쓸 동화를 아끼기 위한 연출이고 움직일 때는 동화를 마구 써서 폭발적인 움직임을 보여준다. 초기작은 일본 경제가 좋지 않던 시기에 나온 작품이고 해서 컷을 많이 쓰지 않은 어쩔 수 없는 저예산 기법이었지만 나중에 가면 다른 감독 이상으로 컷을 썼다. 힘을 줄 곳과 안 줄 곳을 구분하는 감독이었다. 간혹 이걸 모르는 사람들은 다짜고짜 정지 컷이 많다고 성의없는 감독이라고 하는데 이는 심각한 오해이다.

또한 화면에 마치 안쪽이 있는 듯한 입체감이 있는 연출도 지금은 당연하지만 평면 구도 애니메이션이 많던 당시로선 충격적인 것이었다. 토미노 요시유키는 내일의 죠를 처음 봤을 때 그동안 다른 애니메이션에선 느끼지 못한 이질감을 느꼈는데 나중에야 이 사람의 연출에는 공간 축이 하나 더 있어서 그렇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이런 연출은 이후에 모든 연출가들이 다 배워서 따라하게 되었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들 수가 있다. 그러나 데자키 오사무만큼 잘 구사하는 사람이 없다. 당장 3핀만 해도 똑같이 3번 반복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속도에 따라 느낌이 크게 달라진다. 이런 걸 조절하고 분위기의 간을 맞추는 것은 오로지 데자키 오사무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어설프게 흉내내려 해 봐야 유치하거나 웃길 뿐이다. 토미노 요시유키가 저 위의 연출 배워서 다 따라하고 있지만 데자키의 느낌이 나지 않고 토미노가 "천재의 것은 빼앗을 수 없다" 라고 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새로운 창작을 하기보단 원작이 있는 작품을 주로 만들었다.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여러 작품을 찾아보고 그 중에 자신에게 맞는 것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면서 자신에 맞게 변형을 시킨다. 게임 원작의 AIR나 CLANNAD도 직접 플레이해봤던 모양이다. 작품 선정 기준이 굉장히 다양해서 아동용,소년 만화, 순정 만화, 청년 만화, 성인 만화, 서양 문학, 일본 고전문학, 미소녀 게임, 동성애까지 폭넓은 작품을 다뤘다.

평가가 좋아서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마가와 야스히로 못지않은 원작파괴 감독이다. 시나리오가 있어도 시나리오를 무시하는 것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원작 설정을 완전히 무시하거나, 새로운 설정을 추가하는 것을 즐겼는데 내일의 죠도 "죠의 복서로서의 인생은 그의 인생의 일부다" 라면서 인간관계 묘사를 더 추가하였고, 에이스를 노려라에서도 무나카타 진 코치가 오카 히로미를 단련시킨 이유를 돌아가신 어머니와 연관시킨 것은 원작에 없는 설정이다. 보물섬에서는 기존의 악당 이미지인 롱 존 실버를 아버지가 없이 자란 주인공 소년 짐 호킨슨이 아버지상으로 여기며 좋아하는 미워할 수 없는 악당으로 준주연급으로 그렸다. 이런 해석은 철저한 원작 분석에 기반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대부분의 원작 팬들에게 환영을 받는다. 베르사이유의 장미(만화) 원작자 이케다 리요코는 데자키의 연출에 감탄해서 더 자유롭게 하라고 하기도 했다.

데자키가 중요시한 것은 원작에서 확립된 것, 원작이 가진 핵심은 절대 바꾸지 않는 대신 예를 들면 캐릭터를 깊이 이해한 후에 그 내면에 자신만의 해석을 덧붙여 모색한 것이었다. 그래서 시나리오 작가가 써 온 각본의 대사도 자신이 납득할 만한 대사로 고쳐 썼다. 토미노 요시유키는 데자키는 캐릭터를 지극히 중립적으로 보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스기이 기사부로는 그는 '하모니'라든가 '입사광'이라든가 그런 기법이 아니라 어떤 소재라도 인간이 가진 내면의 드라마를 파고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소녀 게임계이자 감동적인 스토리의 명작인 AIR극장판Key 팬들에게 원작을 망쳤다는 이유로 항의를 받았고[15] 데자키 감독은 "미안하다. 비판은 받아들이겠다."라고 말하고 후속작으로 클라나드를 선정했다. 이것도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비판을 받아들였는지 원작 개변은 최대한 줄였다. 그러나 이것도 코드 차이와 세대 차이로 인해서 끝내 받아들여지지 못해 이쪽 계열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유독 key 작품만 평가가 안 좋은 이유는 데자키 오사무가 기계치라 게임을 직접 플레이하지 않아서 그런 것일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요코타 마모루에 따르면 자신이 내용을 알려주면서 만든 거지 데자키가 게임을 한 건 아니라고 한다. 심지어 쿄애니에서 제작된 TVA판 AIR, 클라나드가 데자키가 제작한 극장판 버전을 완전히 능가하는 퀄리티의 뛰어난 스토리와 아름답고 섬세한 캐릭터 디자인 등으로 엄청난 극찬을 받으면서 더더욱 비교 대상이 되었다.

루팡 3세 팬들하고도 코드가 맞지 않아서 이쪽에서의 평가도 좋지 않다. 사실 데자키는 TV 시리즈 1기부터 참여한 원로 스태프로 1기 3화 같은 경우는 뛰어난 연출력으로 팬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루팡 3세는 빠르고 방정맞은 움직임이 핵심인데 데자키가 만든 루팡 3세는 매우 느릿느릿하게 움직여 액션으로는 평이 영 좋지 않았다. 다만 느린 것 외에는 연출은 괜찮아서 루팡 3세 바이바이 리버티 위기일발 같은 작품은 꽤 인기가 있다. 루팡 3세 팬덤에서는 Key 작품 정도의 악명은 없다.

물론 데자키의 스타일은 어느 작품이고 살아있기 때문에 그의 팬이라면 대부분의 작품은 기본 이상은 한다. 코드가 안 맞으면 안 되겠지만 말이다.

3.1. 연출 샘플

조명, 빛의 표현에 주목.
[nicovideo(sm650353)]
보물섬 OP, ED
콘티 데자키 오사무 / 작화 오오하시 마나부
에이스를 노려라 극장판
콘티 데자키 오사무 / 작화감독 스기노 아키오
원화 오오하시 마나부 등 / 미술감독 코바야시 시치로 / 촬영감독 타카하시 히로카타 /
내일의 죠 2 극장판
콘티 데자키 오사무 / 작화감독 스기노 아키오 [16]
원화 오오하시 마나부 등 / 하모니 채색 코바야시 시치로 / 촬영감독 타카하시 히로카타
우주해적 코브라 극장판
콘티 데자키 오사무 / 작화감독 스기노 아키오
원화 오오하시 마나부 등 / 미술감독 코바야시 시치로 / 촬영감독 타카하시 히로카타
고르고 13 극장판
콘티 데자키 오사무 / 작화감독 스기노 아키오
원화 오오하시 마나부 등 / 미술감독 코바야시 시치로 / 촬영감독 타카하시 히로카타
블랙잭 데자키 오사무 감독 극장판A
콘티 데자키 오사무 / 작화감독 스기노 아키오
촬영 감독 타카하시 히로카타
디어 브라더 2화 中
콘티 데자키 오사무 / 작화감독 스기노 아키오
촬영감독 타카하시 히로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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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작품 목록

4.1. 감독 작품

4.2. 참가 작품

※ 콘티 전문가라 연출로 참가한 작품도 콘티는 대부분 그렸다고 한다.
※ 가명으로 참가한 작품이 많다.

5. 관련 인물

6. 기타


  • 오오츠카 야스오는 일본 애니메이션 역사에 남을 천재 연출가로 미야자키 하야오, 타카하타 이사오, 요시카와 소지와 함께 데자키 오사무를 뽑았다. 다만 오오츠카가 꼽은 데자키의 단점은 현장에 안 오는 것이라고 한다. 기본적으론 콘티만 열심히, 많이 그리고 현장엔 잘 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놓고 러시 체크할 때 와서는 "아 이건 내가 의도한 게 아닌데." 라고 한숨만 계속 쉬는 걸 보고 좀 실망했었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 말로도 현장 연출과 관리는 주로 작화감독인 스기노 아키오가 했다고 한다.
  • 구토물을 빛이 떨어지는 것처럼 묘사해서 더럽게 보이지 않게하는 기법을 창시했다.
  • 콘티가 매우 지저분하고 알기 힘든 것으로 유명했다. 전직 만화가였고 그림을 못 그리는 것은 아니다. 단지 빨리 그리기 위해서 대충 그린 것이다. 데자키 오사무의 느낌을 이어받아서 연출할 수 있는 연출가가 몇 없어서 데자키 작품은 대부분 데자키 오사무가 직접 콘티를 수정하거나 직접 작성한 애니가 대부분이다. 그런 상황에서 대충 그릴 수 밖에 없게된 것. 이것 때문에 현장에서 혼란이 있기도 했다고 한다. 근데 스기노 아키오는 유독 그걸 정확히 읽어냈다고. 아라키 신고도 잘 알아봤다고 한다.
  • 미야자키 하야오는 데자키를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토미노 요시유키처럼 라이벌 관계 같은 것도 아니라 그냥 대놓고 싫어했다고, 연출 방식도 취향도 정반대인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같이 일한 작품도 있어서 사무라이 자이언츠, 극장판 코브라에서는 데자키 연출에 미야자키가 작화를 했다. 오시이 마모루 말로는 미야자키는 데자키를 싫어했으며 명작이라고 칭송받는 내일의 죠도 욕했다고 한다. # 그런데 미야자키와 같이 일하는 애니메이터 엔도 마사아키는 자신의 앞에선 데자키 이야기도 잘 했다면서 그렇게 싫어하는 것 같진 않다고 한다. 다만 자신 앞에서는 데자키 욕을 안 하고 친한 오시이한테는 한 걸지도 모르니 진실은 잘 모르겠다고 한다. #
  • 업계에 소문난 기계치다. 기계는 전혀 다루지 못했다고 한다. 당연히도 컴퓨터도 잘 모른다. 그래서 그가 SF 작품을 작품을 만들면 좋게 말하면 상상력이 풍부한, 나쁘게 말하면 비현실적인 묘사가 자주 나온다. 다만 그럼에도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은 좋아해서 고르고 13에서는 일본에서도 선구적으로 CG 애니메이션을 도입했고 [20] 눈의 여왕이나 겐지 이야기 천년기 같은 말년의 작품에서는 디지털 채색과 촬영을 적극 활용했다.
  • 젊은 시절부터 긴 파마머리와 선글라스를 하고 히피 패션을 입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했으나 백경전설을 만들고 스트레스로 탈모가 오면서 하지 못하게 되었다.
  • 그의 사후 마루야마 마사오의 증언에 의하면, 마작을 매일 할 정도로 좋아하고, 젊은 여자를 병적으로 좋아했다고 한다. [21] 그렇다고 농땡이를 피는 것은 아니고 그림 콘티는 혼자서 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부탁한 콘티도 다시 고쳐 그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혼자서 하지 그러냐 라고 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고 한다.

[1] 다만, '데즈카'를 '테즈카'로 쓰는 건 상관없지만 (づか)이쪽은 테츠카로 쓰는 사람이 은근히 많고, 이 사람은 절대로 '테'자키 오사무가 아니라 '데'자키로 써야 한다. (ざき) 이름 후리가나 표기를 유심히 살펴 볼 것. 구글 '테자키 오사무' 검색 결과[2] 112화, 123화, 132화.143화, 175화. 데자키는 아톰의 로봇으로써의 정체성에 심각하게 고민하는 내용을 그렸는데, 데즈카 오사무한테 좀 더 즐겁고 액션도 집어넣는 것은 어떠냐는 말을 들었다.[3] 이 가운데 데자키 오사무의 연출은 1,4,6,12,14,20,29,35. 몇편은 내용이 어둡다는 이유로 창고로 직행했다고 한다. 중국 고전 서유기를 바탕으로 데즈카 오사무의 <나의 손오공>을 원작을 1,2,3화 부터는 서유기의 내용을 따라가다가 4화부터는 개그 노선으로 폭주하기 시작..당시 어린이 시청자들은 이해하기 힘들었는지, 시청율은 낮았다.[4] 토미노 요시유키가 2살 연상이었고, 데뷔도 더 빨리 했다. 심지어 이 작품이 방영 중일 때는 말 못할 사고를 쳐서 무시 프로와 관계가 멀어져 있었다고 자서전 '그래도 나는'에서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연출 배우겠다고 고개를 숙이고 들어간 것이다.[5] 대신 토미노는 다카하타 이사오,나가하마 다다오 밑에 들어가서 공부했다.[6] 인상적인 카리스마를 가진 롱 존 실버를 창조.[7] 데자키 오사무의 작품 대부분의 배경을 담당한 일본 애니메이션 미술 감독[8] 동화를 셀화로 만들기 위해서는 시아게(트래스+채색), 촬영, 필름으로 인화라는 과정에서 시간과 인건비와 재료비가 든다. 심지어는 도화지와 그림물감, 완성된 셀화를 운반하고 나르는 것에도 인건비가 발생한다.[9] 팔 다리가 보이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으니까 돈이 드는 동화 셀 매수를 줄일 수 있다. 입술 없는 그림 원화 한 장에 입술만 그린 동화 2장만 쓰면 입만 벙긋벙긋하면 제작비를 줄일 수도 있다.[10] 장면을 하나만 보여주면 기억에 안 남기 때문에 3번 보여주면서 애니메이션의 재생 시간을 늘리고, 동화를 아끼면서 사람들에게 부자연스러움을 주지 않는 기법이다. 여러번 시도했지만 3번이 가장 효과적이라 3번으로 했다고 한다.[11] 셀화에 색을 칠하지 않고 선화만으로 통과시킨 다음 이를 배경 미술 쪽에서 담당해 이후 배경 미술 쪽에서 담당한 결과물과 선화의 셀을 겹쳐서 촬영하는 것으로, 셀 특유의 부드러운 느낌이 아닌 거친 터치로 박력있게 보인다.[12] 어떻게 빛을 저렇게 리얼하게 그렸냐고 하는 경우가 있을 수가 있는데 저건 그린 게 아니고 라이트를 켜서 넣는 진짜 빛이다. 옛날 애니메이션은 그림을 작업대에 올려놓고 카메라로 하나하나 찍어서 만들기 때문에 저렇게 라이트를 켜서 빛을 넣을 수 있었다. 지금은 촬영이 디지털화가 되면서 저런 식으로는 넣기 힘들어졌고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후처리로 넣는 경우가 대부분이다.[13] 이 기법은 데자키 오사무가 창안한 것은 아니고 무시 프로덕션의 선배였던 실험적인 기법을 많이 사용한 야마모토 에이이치가 먼저 선보인 것이다. 영화 이지 라이더에서 화면에 빛줄기가 들어간 장면에서 힌트를 얻었다. 본래 할리우드 영화에서라면 실패한 촬영이지만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전위적인 이 영화에서는 야외촬영의 현장감을 주는 오히려 신선한 효과를 냈다. 다만 크리스마스에 쓰는 은박지 장식물로 빛 효과를 넣는 건 데자키 오사무와 당시 촬영감독 구상이라고 한다.[14] 이 기법을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최초로 쓴 건 야마모토 에이이치인데 이를 변형하고 현대식으로 계속 쓴 건 데자키이다. 데자키는 영화 그랑프리를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15] 거의 테러 수준으로 항의가 이루어졌다. 오구로 유이치로가 운영하던 데자키 오사무 공식 팬 사이트가 폐쇄됐을 정도라 데자키 오사무 팬들은 키 팬들과 사이가 좋지 않다.[16] TV판의 에피소드 중에서도 데자키와 스기노가 직접 콘티와 작화감독을 맡은 에피소드 위주로 재편집한 극장판이다.[17] 극장판을 만들 것을 전제로 TV판의 명장면은 극장판 수준의 고 퀄리티로 만들었다.[18] 데자키에게 연출 가르침도 받고 감독도 해봤지만 자신의 연출 능력에 한계를 느끼고 각본가로 전향했다.[19] 극장판 에이스를 노려라!를 몇 번이고 돌려보고 거기에서 연출 기법을 배웠다고 한다.[20] 다만 너무 초기에 도입한 탓에 평은 좋지 않았다.[21] 그래서 생전 데자키를 알고 있던 사람들, 특히 이타가키 신은 유작 겐지모노가타리/애니메이션 (2번째 항목)을 보고 자서전적인 얘기라 밝히기도 했다. 겐지모노가타라 얘기를 보면 알겠지만, 주인공 히카루 겐지는 뛰어난 재능과 미모를 가지고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인물 (속되게 말하자면 여자랑 희롱하고 놀자판 벌이는 인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