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31 03:41:03

비디오 대여점

1. 개요2. 특징3. 몰락4. 해외
4.1. 해외 교민 사회
5. 관련 문서6. 참조 문헌

1. 개요

1980년대부터 2000년대 후반까지 인기를 끌던, 주로 VHS 비디오테이프를 대여해주던 장소이다.

2. 특징

주로 개인이 창업하는 자영업 형태이며, 가격은 1990년대에 구작은 최저 200~1,000원 정도로, 신작은 2,000~3,000원선 정도로 가격이 형성되었는데, 이 비디오를 대여해 집이나 학교 등의 VCR에 삽입해 감상했다. 신작은 1박 2일이 기간이라 그 이상이 지났으면 연체료를 물려서 수일간의 연체료가 쌓여 어린이들은 부모님의 등짝 스파이크를 맞기도 하였다. 성인용 비디오는 주로 칸막이가 쳐진 곳이나 좀 구석지고 외진 곳에 놓여 있었으며, 일반적인 가격보다 더 비쌌다. 한국에서 금지된 일본 AV, 서양 포르노도 불법으로 들여온 곳도 있었으며[1], 드물게는 국산도 있었다.[2] 성인물은 당시에도 주민등록증을 확인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그 시대에도 소위 말하는 '뚫리는 곳'이 있었다.

아날로그 시절엔 굉장히 융성했던 사업 가운데 하나였으며, 1980년대만 해도 대우전자가 비디오테이프 대여점과 특약점 계약을 맺거나 전자제품 대리점에서 비디오테이프를 취급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여점용 애니메이션과 특촬물 비디오 테이프를 제작한 대표적인 회사인 대영팬더는 1990년대에 후뢰시맨 작품 하나 가지고 40억을 벌었을 정도로 많이 팔았는데, 이런 부흥기에 힘입어 '영화마을', '으뜸과 버금', '책과영화사랑', '스펀지', '비디오 넷', '영화랑 책이랑', '엑스트라' 같은 대형 프랜차이즈 대여점들도 생겨났다. 그래서 1990년대 초반에 전국 약 3만 여 곳이었던 비디오 대여점들이 1990년대 후반 기준 약 2만 여 곳으로 3분의 1 가량이 줄어들었는데, 이는 규모가 큰 대형 프랜차이즈 대여점들이 생기면서 소규모 영세 비디오 대여점들이 밀려났기 때문이다.

3. 몰락

1990년대까지만 해도 영화 및 애니메이션을 접할 수 있는 곳은 영화관이나 지상파 채널, 케이블 방송[3]이 대부분이었으며 인터넷은 고사하고 PC통신을 통해 동영상을 다운로드 받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던 시절이어서 비디오 대여점은 1980년대에 이어 1990년대에도 호황업종이었다. 그러나 2000년 전후로 CGV 강변, 메가박스 코엑스를 시작으로 멀티플렉스 영화관[4]이 등장하며 최신 영화를 더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고, 비슷한 시기에 케이블 방송이 본격적으로 보급화[5]되고 스카이라이프 위성방송의 등장과 함께 영화 전문 채널 수도 많아지면서 비디오 대여 문화가 서서히 주춤하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1990년대 후반부터 초고속 인터넷이 발전하고 보급되어서 집집마다 ADSL이나 광케이블 을 갖추게 됐고, 그 결과 토렌트, 불법 클론 프루나, eDonkey, 위니 등의 P2P 공유를 이용해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쉽고 빠르게 불법 다운로드할 수 있게 되면서 비디오 대여점은 급격히 위기에 봉착하게 됐다. 또한 초창기에 콘텐츠가 적다며 외면받은 DVD도 상용화되면서 날이 갈수록 콘텐츠가 증가하였고 VHS 비디오에 비해 훨씬 가볍고 보관이 용이하기에 비디오 대여점에 타격을 줬다.

그래서 비디오 대여점들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도서대여점과 결합하며 VHS 비디오·도서·DVD 멀티대여점으로 재탄생하며 그 수명을 연장하려고 했고, 이러한 시도는 어느 정도 성공하여 2000년대에는 도서대여점과 비디오/DVD 대여점이 사실상 한 몸이 되기도 했었다. 당장 위의 비디오 대여점 프랜차이즈에도 '영화랑 책이랑'이나 '책과영화사랑'처럼 이름에 '책'[6]이 언급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인터넷을 통한 불법 다운로드 방식을 이길 수는 없었고 서적들도 소설/만화의 텍본과 스캔본이 등장하였으며, 웹툰과 웹소설을 비롯한 더 다양한 즐길거리가 등장하면서 이런 대여점들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사라지고 말았다. 특히나 대여하지 않아도 손쉽게 돈 주고 TV를 통해 볼 수 있는 VOD의 본격적인 대두는 치명적이었다.

얼마나 빨리 몰락했는지 부산을 예로 들자면, 1995년까지만 해도 3천 곳에 이른 부산 지역의 비디오 대여점들이 2003년부터 2009년까지 지속적으로 감소해서 2009년에 250여 곳으로 줄어들었을 정도이다. 2008년까지는 실생활에서 비디오테이프를 DVD와 병행하면서 대중적으로 꾸준히 사용했으나 2009년부터는 실생활에서 VHS를 사용하지 않기 시작해 사실상 DVD 대여점만 있었다.

그리고 2010년이 되면서 그마저도 완전히 몰락했다. 그 이전부터 업계에선 안 그래도 공테이프 공장이 문을 닫는다같은 소문이 돌았었고 VHS 비디오 테이프로 나오는 신작 영화 자체도 사실상 거의 없었던 상태라서 더이상 VHS 비디오 테이프로는 신작 영화가 발매되지 않을 수 있다란 분위기가 형성됐었다. 이후 2011년 초능력자를 마지막으로 더이상 VHS 비디오 테이프로 신작 영화가 발매되지 않자 이때를 마지막으로 대다수의 비디오 대여점들은 전부 문을 닫았으며 이때부터 스마트폰의 보급도 엄청 늘어나면서 사멸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2010년대 이후에 북카페만화 카페로 어찌저찌 대체된 도서대여점과는 다르게 비디오 대여점의 위치를 대체한 문화 시설은 없다. 그나마 과거 비디오방을 계승한 DVD방이 유사하긴 하나 대부분의 DVD방은 만 18세 미만 청소년 입장 불가인 경우가 많고, 비디오 대여점과 달리 법적으로 초/중/고등학교 앞 200m 구역(상대정화구역)에 못 차리며 컨텐츠를 대여해 주는 형태가 아닌 컨텐츠를 업장 내에서 감상할 수 있도록 하는 업종이기 때문에 경우가 다소 다르다.[7]

결국 2020년대에 넷플릭스 등의 OTT와 셋톱박스, 유튜브 VOD 등 모바일 기반의 VOD 서비스가 영상 컨텐츠 감상의 대세가 되었고, 비디오 대여점은 사실상 자취를 감추었다.

4. 해외

미국에선 비디오 전성기 때만 해도 '블록버스터'와 '비디오 팩토리' 같은 대여점 체인들이 즐비했고, 월마트 등 할인점에서도 비디오를 취급하기도 한다. 이원복 교수의 시사만화 <현대문명진단> 1996년 8월 26일 자 '팔고 싶으면 내 말을 따르라!' 편[8]에 따르면 미국의 비디오물 매체는 대여점용 외에 할인점용도 따로 있는데, 할인점 판매용의 경우 블록버스터나 월마트 등 유통업체들이 고객을 배려한다는 명분으로 비디오물 내용에 자체 검열을 해서 영화 제작자들과 갈등을 빚었다. 그 예로 영화 <올리버 스톤의 킬러>는 올리버 스톤 감독 측이 검열을 거부했다가 월마트와 블록버스터로부터 버림받은 바 있다.

저렴한 초고속 인터넷과 모바일 인터넷이 매우 흔한 한국과는 달리, 인프라에 차이가 있고 DVD블루레이 보급이 좀 더 되어 있었던 일부 서구권에는 온라인 서비스 열풍에도 불구하고 아직 DVD 대여점이 남아 있다. 오프라인 매장의 경우, 예나 지금이나 충분한 인프라를 자랑하는 보드게임, 카드게임류나 캐릭터 상품 등을 같이 취급하는 식으로 변화를 도모하고 있으며, 대형마트 근처에도 DVD 대여용 키오스크를 어렵잖게 찾을 수 있다. 이민자들이 불법 DVD를 파는 광경도 심심찮게 보인다. 다만 온라인 서비스 열풍이 너무나도 강하기 때문에 얼마나 오래 더 버틸 수 있을지는 미지수.

안정적인 인터넷 환경이 그림의 떡인 제3세계에서는 DVD 등 영상매체가 2020년대에도 아직 주류다. 이러한 곳은 전송속도도 당연히 처참해서, 대용량 파일을 업로드/다운로드하는 것보다 CD/DVD에 기록해 사람이 직접 갖다주는 게 더 빠르다.

4.1. 해외 교민 사회

외국 한인 커뮤니티에서는 한때 굉장히 중요한 장소였다. 인터넷 시대 이전에는 고국인 한국의 콘텐츠를 접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루트였기 때문이다.

인터넷 시대 이전 교민 사회에서는, 한국의 공중파 방송을 VHS 테이프로 녹화하여 현지 교민 비디오 대여점에서 이를 들여온 후 사람들이 빌려다 보는 문화가 매우 일반적이었다. 당연히 저작권/저작물배포권 등이 완전히 무시된 불법 사업. 한국에서나 현지에서나 불법이 자명했지만 당시엔 인식도 약했고, 지금처럼 국내 콘텐츠의 해외수출 판로가 없다고 봐도 될 정도였기 때문에, 국내나 해외나 단속할 이유도, 의지도 없었다. 영어자막도 없는 순수 한국 콘텐츠들 뿐이라 한인들 외에는 관심도 없었고, 철저히 현지 교민 대상의 사업이었기에 현지 단속 당국에 신고될 가능성도 매우 낮은 편인 데다가 한국 교민들이 한국 미디어에 접촉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9]인 점 등 단속의 대상은 되기 어려웠다.

내용물은 드라마/예능/다큐멘터리/애니메이션(공중파 더빙 포함) 등 아주 광범위하였으며, 녹화-복제-비행편으로 공수 등의 아주 아날로그한 과정이 있었기에 통상 방송일로부터 2주 가량이 소요되었다. 당연히 인터넷 시대 이후 인터넷으로 보급로가 바뀌며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교민 사회의 이런 문화로 인하여 살인사건 용의자를 검거하게 된 케이스도 있다. KBS 2TV 공개수배 사건 25시 1998년 방영분을 미국 LA 현지 교민이 시청 후, LA로 도피한 용의자를 현지에서 목격하여 한국으로 제보한 끝에 검거된 사건인 신안 예비신부 살인사건은 바로 교민사회에서 유통되던 비디오로 시청하게 된 것이다. 정상적으로라면 국내에서 1회 방영된 해당 방송의 수배 내용에 대해서 해외 교민들은 알기 어려운 것이 보통이었을 것이다.

인터넷 시대가 도래한 이후인 2010년대 초까지도 비디오 대여점이나 한인마트 등에서 한국 예능이나 드라마, 영화 등을 DVD에 구워놓고 대여/판매하거나 한국산 정발품을 따로 취급하였다. 인터넷 시대 이후에도 PC와 인터넷에 밝지 않아 기존의 루트로 한국 콘텐츠를 시청할 수밖에 없던 중년이상층의 수요 때문으로 추정된다. 덕분에 해외에서도 안재모, 장서희, 안내상과 같은 국내 배우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역시 인터넷 시대의 흐름에 따라 주류 시청 방식은 인터넷 쪽으로 이동되었다. 외국 현지 교민들 및 한류 팬들을 대상으로 부실한 단속의 틈을 타 온라인 VOD형태로 한류 컨텐츠를 제공하는 불법 사이트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데다, 유명 한국영화도 제법 외국 현지 개봉을 하기 시작하고, 특히 넷플릭스 등에서 일부 한국 예능이나 영화 컨텐츠를 아예 정식으로 접할 수 있게 된 이후로는 동네에서 한류 DVD를 구해다 보는 일은 대폭 줄어들었다. 게다가 시장이 큰 미국의 경우 OnDemandKorea를 필두로 아예 한국 지상파 방송 3사가 공동 출자해서 세운 '코리아콘텐트플랫폼(현 웨이브아메리카스)'을 통해 kocowa라는 이름의 공식 VOD 서비스를 시작하고 이에 맞서 현지 통신사업자 소유의 DirecTV 등도 한국 방송 라이브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하며 동네 DVD를 통한 한류 컨텐츠 배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다시피한 상태. 단, 이런 식으로 보급되는 컨텐츠는 라이센스 문제가 걸려 있어 넷플릭스같은 전세계 대상 서비스가 아닌 한에는 보통 엄격한 지역 제한이 걸려 있으며[10], 심지어 넷플릭스도 같은 이유로 국가마다 보급하는 컨텐츠 종류가 달라 VPN을 동원하는 사람이 있는 등 모든 수요를 다 대체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런 수요는 결국 국내에서 몰래 해외로 스트림을 재전송하는 편법에 가까운 실시간 IPTV 서비스를 이용하거나[11], 상술한 불법 사이트쪽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편.

5. 관련 문서

6. 참조 문헌

  • 이원복 교수의 현대문명진단 4권 - 이원복 글/그림. 조선일보사 출판국. 1998. p112~113.


[1] 주로 세운상가, 용산전자상가, 주한미군 부대에서 들여왔다. 이런 비디오는 보통 사전에 주인과 전화로 얘기해서 주인이 지하에 숨겨진 곳에서 꺼내주었다.[2] 그 사이에는 언론에서 소개됐을 정도로 유명한 빨간 마후라도 있었다. 단, 이건 아동 포르노이다.[3] 1995년에 케이블 방송을 시작하면서 DCN(현 OCN) 등의 영화 전문채널도 있었지만 당시 케이블TV 시청료가 15,000원, 거기에 컨버터 대여료 2,000원까지 포함해서 한 달에 17,000원을 내야 했다. 당시 물가를 감안한다면 2020년 기준으로 약 4만 원 그 이상의 비싼 가격이고 채널 숫자도 30여 개 밖에 되지 않아서 1990년대 케이블 방송 가입자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다만 지역 중계유선방송에서 옛날 애니나 지상파 더빙 영화를 재송신 하기도 했다. 심지어 TV방영도 안한 최신 영화를 불법(?)으로 틀어주기도 했다.[4] 그 이전의 영화관은 대부분 단관이었으며 끽해야 스크린 수가 2개 정도 뿐이었다. 당연히 최신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를 극장에서 보기가 하늘에 별 따기일 정도로 힘들었다.[5] 이 때부터 별도의 컨버터 설치 필요 없이 30개부터 50여 개까지의 채널을 RF 필터로 제한하는 6,600원 ~ 8,800원/월 정도의 경제형&보급형 상품이 출시되었다. 이 때는 중계유선방송(RO)사들이 하나 둘 케이블TV(종합유선방송)SO에 인수 합병되어 가던 시기였다. 거기에 2003년 하반기부터 100여 개 이상의 채널이 있는 QAM Opencable방식의 디지털 케이블TV가 시범 출시되었다.[6] 만화책과 소설책.[7] 애시당초 비디오 대여점비디오방은 별개의 업소로 간주되었다.[8] 단행본 4권 수록.[9] KBS WORLD조차도 2003년에 와서야 개국된 서비스이며, 그 이전에는 KBS의 미국 현지 자회사인 미주한국방송(KTE)이 한국 방송 프로그램을 방영하는 정도였다.[10] 즉, DIRECTV나 코코와 등은 미국 외의 지역에선 원칙적으로 시청할 수 없다[11] 한인타운에 가면 관련 제품을 홍보하는 광고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