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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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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세기
18세기 19세기 20세기 21세기 22세기
밀레니엄
제1천년기 제2천년기 제3천년기

1. 개요2. 세계적인 모습
2.1. 음악
2.1.1. 영미권 음악2.1.2. 한국 음악2.1.3. 일본 음악
2.2. 영화2.3. 게임2.4. 만화, 애니메이션2.5. 대량 학살
3. 한국의 경우4. 일본의 경우: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5. 중화권의 경우6.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7. 이 시대에 시작된 것들8. 이 시대에 쇠퇴한 것들9. 1980년대에 들어가는 해10. 관련 문서11. 참고/관련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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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계 경제가 전체적으로 호황을 맞고 있던 시기라 세기말적 분위기를 풍기는 1990년대와 석유 파동을 겪었던 1970년대와 달리 좀 더 밝게 묘사되는 부분이 있다. 로널드 레이건, 마거릿 대처, 미하일 고르바초프, 프랑수아 미테랑, 헬무트 콜과 같은 경제적 자유주의/신자유주의 성향의 지도자들이 서양에 등장했고, 이에 따라 강력한 신자유주의 정권이 막을 열었다. 이 시기에 빈부격차가 급속히 커졌기 때문에 이들 정권의 경제적 성과에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최소한 1970년대의 인플레는 사라졌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중남미나 동유럽권에서는 1980년대는 매우 암울한 시기로 기억된다. 미국이 인플레이션을 잡겠다고 고금리 정책을 펴면서 수많은 제3세계 국가들이 막대한 외채부담을 져야했고 그 과정에서 국가경제가 파탄난 나라가 한두 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빚을 갚기 위해 긴축정책으로 큰 고통을 겪어야 했던 국가들이 한두 곳이 아니었으며 공산권 가운데서 가장 자본주의 정책을 펼치던 유고슬라비아조차도 이때는 거액의 외채를 지고 있을 지경이었고, 거기에다가 지역갈등으로 경제위기를 극복하지도 못하였으며, 다른 동유럽 국가나 중남미 국가라고 해서 딱히 사정이 다른 것도 아니었다. 당시 중남미 국가와 동유럽 국가들이 빚을 갚기 위해 필사적으로 재정긴축을 하고 수입을 억제시켜서 매년 무역흑자를 거두고 있는데도 하도 이자율이 높다 보니, 이자조차도 못 갚았다는 슬픈 얘기도 전해져 내려오고,[1] 소련은 동유럽 국가와 중남미 국가와는 다르게 일단 채권자에 가까운 위치였지만 결국에는 소련-아프간전과 유가하락, 체르노빌 사태라는 3중고가 겹치며 재정적으로 궁핍해지는 바람에 결국엔 개혁개방정책을 펴게 되었지만 결국 버티지 못했다. 뭐, 그래도 긍정적인 면을 찾자면 중남미에서 1980년대에 민주주의가 대부분 회복되었으며, 동유럽도 1989년을 기점으로 공산당의 지배체제가 몰락하고,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가 정착되었다. 한국, 대만, 필리핀이 민주화 된 시기와 비슷하다.

다만 냉전이 마지막 절정기였기 때문에[2] 이에 따른 긴장 역시 풀 수 없었다. 그러나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집권으로 소련에서 개방정책을 시도하는 등 냉전이 풀어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1980년 이라크의 이란 침공으로 이란-이라크 전쟁이 8년에 걸쳐서 일어났다. 중동의 전쟁이 미국의 국내정치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등 중동 문제가 최중요 현안으로 급부상한 시기기도 하다. 이란 콘트라 사건도 그렇고.

미국 내에서는 크랙 코카인이 등장하면서 순식간에 퍼져 중독자들로 인해 여러 사회적 문제가 생겨난 코카인 위기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미국 내에서는 인종차별 문제와 교도소 수용 문제가 더욱 부각되기 시작했다. 약물과 관련된 사건은 결국 완전히 해결되지 못한 와중에 1990년대로 이어졌고, 오피오이드 계열 약물 처방에 대한 규제 완화와 이후에 새롭게 등장한 펜타닐로 인해 오피오이드 위기로 이어지면서 미국 사회는 마약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게 된다.

언론인이자 페미니스트인 수전 팔루디(S.Faludi)는 자신의 도서 《백래시》 에서, 이 시기를 가리켜서 "백래시의 시대" 라고 불렀다. 70년대에 여성운동이 이루어냈던 모든 성취들을 전부 부정하고, 다시 그 이전의 가부장적 사회로 회귀하려고 미국 사회 전반에 걸친 움직임이 일었으며, 그 중심에는 로널드 레이건이 있었다는 것. 자세한 내용은 해당 도서를 참조.

80년대 말에는 공산주의가 잇달아 붕괴되면서 자본주의 열풍이 불기도 했다.
파일:1980.jpg

1986년~1988년3저 호황으로 세계경제가 황금기에 있던 시기다.[3]

다른 나라 중 선진국에선 좀 흔하지만, 한국에선 이 시기 기준으로 19세기의 마지막인 1890년대에 태어난 노인들이 일부 살아있었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남자 9, 여자 0의 마지막 세대) 특히 유명인들 중에는 윤보선 전 대통령과 허정 전 국무총리, 윤치영 초대 내무부장관, 이원순 전 전국경제인연합회 고문, 김홍일 장군, 문익환 목사의 부모인 문재린 목사와 김신묵 집사, 함석헌의 스승 류영모, 백낙준 초대 참의원 의장, 이응준 초대 육군참모총장, 국어학자 이희승, 국사학자 이병도, 물리학자 최규남, 의학자 정구충, 성창기업 창업주 정태성, 조선무약 창업주 박성수, 김우현 목사 등이 있다.

이 연대에 음력 윤달이 생겼던 해는 1982년 (4월), 1984년 (10월), 1987년 (6월)이 있다. 특히 1984년은 가장 최근에 음력 10월 윤달이 생겼다.

2. 세계적인 모습

Top 10 Trends of the 1980s NewsChannel 9 - 1980s Video Timeline

2.1. 음악

2.1.1. 영미권 음악

마이클 잭슨, Beat It 프린스, Let's Go Crazy 밴 헤일런, Jump
건즈 앤 로지스, Paradise City 메탈리카, Master of Puppets Run-D.M.C., Walk This Way
필 콜린스, Against All Odds 마돈나, Like a Virgin 다이어 스트레이츠, Sultans of Swing

대중음악의 경우 마이클 잭슨의 등장으로 음악의 인종장벽이 무너지며 잭슨은 시대의 아이콘이 된다. 이는 20세기 대중음악이 인종적으로 분리되어 있던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대중문화의 확산에 큰 기여를 했다. 마이클 잭슨의 등장으로 대중음악은 흑인이 주도해 나가기 시작하는데 이 기조는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MTV의 개국과 마이클 잭슨, 프린스, 마돈나의 혁명적인 등장 이후로 '영상 음악'의 시대가 열렸다. 뮤직비디오와 같은 새로운 홍보매체와 70년대의 펑크(Funk), 디스코뮤직에 일렉트로니카가 뒤섞여 새로이 파생된 현대식 댄스팝, 정교한 퍼포먼스, 무대 장치와 화려한 비주얼등이 음악계의 주류로 떠오른 시대이다. 신디사이저를 적극적으로 사운드에 활용하기 시작한 시대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돈나, 신디 로퍼, 휘트니 휴스턴, 자넷 잭슨 등의 여성 뮤지션들이 엄청난 성공을 거두기 시작하면서, 여성 가수들도 남성 가수들 못지 않게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하드 록에서 파생된 메탈을 중심으로 하는 록 음악이 여전히 강세를 보이던 시절이기도 했다. 초반에는 모터헤드주다스 프리스트을 위시한 브리티시 메탈(NWOBHM)이, 중후반에는 메탈리카, 메가데스, 슬레이어, 앤스랙스 등의 스래시 메탈밴 헤일런, 건즈 앤 로지스, 본 조비, 머틀리 크루, 화이트 스네이크, 유럽, 스콜피온스를 위시한 글램 메탈의 전성기가 바로 이 시대. 특히나 헤비 메탈이 이정도로 높은 인기를 얻은 때는 1980년대 중후반 외에는 없었다. Jump의 5주 연속 빌보드 1위 이후 미국 LA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글램 메탈 밴드들의 야들야들한 글램 메탈 명곡들이 차트를 휩쓸었다. 1987년에는 건즈 앤 로지스가 등장하며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거뒀고 본 조비의 Livin' on a Prayer 등의 곡 역시 4주간 빌보드 1위를 하며 헤비 메탈 전성기의 포문을 열었다. 그러나 동시에 록 음악, 그중에서도 헤비 메탈 지나친 상업화로 인해 록 음악에 싫증을 내는 사람들이 이곳 저곳에서 등장하던 때 역시 1980년대 후반이었다.

더 클래시를 위시로 한 펑크 록 역시 큰 인기를 끌었다. 핑크 플로이드는 리더 로저 워터스의 탈퇴로 혼란을 겪는 가운데, 전성기의 마지막을 누리고 있었으며, 폴 매카트니는 비틀즈 해체 이후 무려 15년이 지난 시점까지도 인기 가수 위치에 서있었다. 은 보컬 프레디 머큐리의 창법이 조금 바뀐 채 활동하며 명곡을 뽑는 등 전성기의 중후반이다. 한편 밥 딜런, 에릭 클랩튼, 조지 해리슨 등의 1960년대 뮤지션들은 대부분 시대의 큰 변화를 이겨내지 못하고 슬럼프를 겪게 되었다.

언더그라운드에서는 과거 펑크 록의 흐름을 변주한 포스트 펑크가 유행했으며, 이는 후에 얼터너티브, 슈게이징, 하드코어 펑크 등의 기원이 된다. 이러한 흐름은 이후 2000년대에 들어 크게 재조명받게 된다. 밴 헤일런의 등장으로 인해 록 음악의 주도권을 미국에게 빼앗긴 영국에서는 더 스미스 등의 밴드들이 맨체스터에서 활동했으나, 록 음악의 주도권을 다시 잡아오지는 못했고 이는 현재까지 반복된다. 즉 밴 헤일런, 에어로스미스, 본 조비 등 아메리칸 스타일이 다시 록 음악을 주도하기 시작한 것이 1980년대였다. 비틀즈 이후 20년 가량 주도권을 빼앗겼던 음악을 되찾은 때였다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후반에 뉴욕 클럽 등지에서 나타난 힙합이 본격적으로 주류음악권에서 활약하기 시작한 시기가 바로 이 시기. 이 무렵에는 비스티 보이즈와 같은 힙합밴드의 형태도 존재하였다. 1970년대에 태동한 일렉트로니카는 본격적으로 분화되어 테크노와 신스팝 등의 장르가 주류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여러 뮤지션들이 일렉트로니카와 자신들의 음악을 융합하려는 시도를 진행하기 시작한다.

2.1.2. 한국 음악

제5공화국3S정책에 힘입어 가요계의 히트곡들은 전체적으로 1970년대에 비해서 대단히 분위기가 밝아졌다. 그리고 전체적인 가요계의 시장 크기와 앨범판매량이 급증하기 시작한 시기였으며 이는 이후 1990년대를 거쳐 황금기를 맞이한다.

혹자에 따라선 1990년대를 한국음악의 전성기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90년대는 대중음악의 인기가 폭발적인 시기일 뿐, 장르의 다양성과 실험성에 있어서는 1980년대가 더 우위에 있었다는 여론이 있을만큼 상당히 음악적으로 발전한 시대다.

가왕 조용필이 신드롬적인 인기와 영향력, 뛰어난 음악성을 바탕으로 앨범판매량과 대상 수상기록, 가요톱텐 1위 기록등을 수시로 갈아치우며 한국 가요계를 완전히 평정했던 시절이다.

조용필 외에도 수많은 뮤지션들이 활동했다. 조용필의 어마무시한 인기와 영향력에 그나마 대항할 수 있었던 전영록, 김수철과 같은 네임드 남자가수들이 활약했던 시기이며 이선희와 같은 전설적인 여가수들도 등장했다. 기존의 한국음악계를 주름잡았던 트로트의 인기도 여전해서 주현미와 같은 트로트 가수들도 상당한 위치를 선점했던 시기다.

현 시점에 록의 불모지인 한국에서 가장 록 음악에 관심을 두었던 몇 안되는 전성기였으며 70년대 세시봉 출신 포크송 가수들의 직속 후배격이라 할 수 있는 들국화, 김현식, 한영애, 신촌블루스, 빛과 소금 등의 뮤지션들이 한국의 언더그라운드 음악계를 개척하며 블루스와 록 음악의 장르를 다양화 시켰다. 또한 1980년대 초반 당시 유일한 슈퍼밴드였던 송골매가 활약했으며 1980년대 중후반에는 위에 언급된 록 뮤지션들의 후배격인 백두산, 시나위, 부활 등이 하드 록, 얼터너티브 록 음악을 기반으로 한 밴드활동으로 크게 돋보였다.

한편 한국 발라드의 뿌리인 유재하와 작곡가 이영훈-가수 이문세 콤비도 이 시기에 나온 뮤지션이다. 이 들의 영향으로 현재까지도 한국 가요계의 주류 장르라 할 수 있는 발라드 장르가 성립되며 1980년대 후반경 변진섭이 음반 100만장을 돌파하면서 대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게 된다. 이는 이후 1990년대 신승훈의 등장으로 더욱 가세된다.

1980년대 중후반 이후에는 소방차, 김완선, 박남정을 비롯한 본격적인 1세대 댄스가수들이 등장하여 지금의 아이돌 가수처럼 큰 인기를 얻었던 시기였다. 이들의 인기 자체는 상당했지만 당시엔 댄스음악에 대해 일종의 차별적 시선이 존재하여 완전히 가요계의 주류였다고 일컫기엔 부족했으며 이는 이후 19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으로 판도가 뒤집히게 되었다.

즉, 1980년대에는 한국 가요계에서 좋은 음악들과 각종 실험적인 사운드가 많이 쏟아지던 시절이었으며 실상 현재 한국 가요계에서 즐길 수 있는 장르들은 거의 다 이때 나온거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물론 내부적으로 보면 가요 내용 검열이나 음반사의 음반판매 수입 독점, 창작자에 대한 저작권의 인식이 실상 전무했던 것과 같은 뿌리깊은 문제점이 여전히 자리잡고 있었다. 이는 1990년대를 거치면서 개선되기 시작했다.

2.1.3. 일본 음악

1980년대 일본 음악은 큰 틀에서 아이돌시티 팝 등의 뉴 뮤직으로 나눌 수 있다.

1980년대 일본 아이돌 전성기를 열어젖힌 장본인은 바로 쟈니스 사무소였다. 1979년 청춘드라마 '3학년 B반 긴파치 선생'에서 데뷔한 '타노킨(たのきん) 트리오'(타하라 토시히코, 노무라 요시오, 콘도 마사히코)가 남자 아이돌 황금기의 막을 올렸고, 이후 쟈니스는 시부가키대, 소년대, 히카루GENJI를 연이어 성공시키면서 일본 연예계의 큰 손으로 자리매김했다.

여자 아이돌 시장에서는 1980년 야마구치 모모에의 은퇴와 동시에 마츠다 세이코가 데뷔했고, 그 후 이른바 '꽃의 82년 데뷔조'(나카모리 아키나, 코이즈미 쿄코 등)가 등장하면서 일본 가요계는 아이돌 위주의 시장으로 재편되었다. 특히 마츠다 세이코와 나카모리 아키나는 상반되는 음악적 색깔로 전혀 다른 매력을 선보이며 80년대 일본 가요계 최대의 라이벌로 기억되고 있다.

메이저 록씬에선 라우드니스 같은 헤비메탈블루하츠같은 펑크 록이 인기를 끌었다.

언더그라운드에선 제패노이즈(japanoise)라고 하는 독자적인 노이즈 음악씬이 생겨났고, 하드코어 펑크씬도 활성화 되어있었다.

2.2. 영화

  • 영화의 경우 특수효과의 사용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시기이기도 했다. 스타워즈 시리즈의 성공 이후 간간히 만들어지던 블록버스터가 보편화 되었다. 다만 CG 그래픽의 십분 활용은 90년대부터 확장되기 시작한다.
  • 잃어버린 10년을 겪기 전인 1980년대 일본은 유일무이한 아시아 강대국으로 여겨졌었다. 당시 일본은 경제규모 세계 2위였지만 미국을 추월하여 세계 제1의 경제대국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 여겨졌었다. 블레이드 러너, 로보캅 3, 떠오르는 태양(라이징 썬), 다이 하드 등 1980년대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일본에 대한 두려움이 잘 나타나 있다. 실제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은 일본의 경제성장을 매우 심각한 위협으로 여기고 두려워했다. 게다가 당장 눈앞에 놓인 비현실적인 환율이 심각한 문제였고 일본의 급성장은 이런 환율 탓이 크다는 게 당시 서구권의 인식이었다. 결국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의 5개국 경제 수장들이 모여 플라자 합의로 환율을 현실화하기로 합의한다.[4] 플라자 합의 이후 엔화는 파격적으로 평가절상되고 이런 엔화의 절상과 함께 일본 경제에 대한 과도한 환상은 거대한 거품을 만들어내고 거품 붕괴와 함께 일본의 성장은 서서히 끝이 나고 잃어버린 10년이 도래했다.
  • 다양한 장르가 성행했던 시기였다. 2010년대부터 저예산 영화와 블록버스터 영화가 분리되고 있다는 점에서 할리우드 대형 스튜디오에서 당시 제작비 예산이 블록버스터[5]와 저예산 영화들을 같이 만들어서 다양한 장르가 나올 수 있었다. SF 영화부터 청춘 영화, 슬래셔 영화까지 다양한 장르들이 고르게 흥행했다. 게다가 시나리오(각본)가 당시 기준으로 신선한 이야기들이 많이 성행하기도 했다. 그래서 흥행의 원동력되기도 했다. 복고풍이 불고 있는 2010년대에 들어서서 다시 리메이크로 제작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2010년대 들어서 흥행작들은 대부분 블록버스터에 한정되어있음을 감안하면, 이 시기까지는 아직 저예산 영화들이 힘을 쓰던 시기라는 말이 된다.

2.3. 게임

아타리 쇼크라는 사상 최악의 스캔들로 인해 비디오 게임 산업이 큰 타격을 입었지만, 이후 닌텐도의 마리오 시리즈패미컴이 대박을 치면서 일본 제작사들에 의해 시장이 재개편, 2001년에 마이크로 소프트의 엑스박스가 나오기 전까지 콘솔 시장은 일본 제작사들이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게 된다. 횡, 종스크롤 액션, 슈팅게임들이 이때부터 체계적으로 발전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했고, 80년대 중, 후반엔 일본식 RPG의 대표라 불리는 드래곤 퀘스트,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가 시작되었다.

2.4. 만화, 애니메이션

한국 만화에 대한 검열은 여전했지만 보물섬, 아이큐 점프 같은 만화잡지들이 등장하면서 만화 시장이 팽창했던 시기. 특히 1983년부터 보물섬에서 연재된 김수정아기공룡 둘리는 전 세대의 사랑을 받으며 국민 캐릭터로 자리잡았고, 이현세공포의 외인구단은 실사영화로 제작될 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70년대 후반 로보트 태권 V를 필두로 활발하게 이뤄지던 국산 극장판 애니메이션 제작이 1980년대 들어 소재고갈, 표절, 지나친 반공의식 주입 등을 이유로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했고 1986년 우뢰매 시리즈의 히트로 순수 애니메이션 대신 실사와 애니메이션이 결합된 한국형 특촬물이 어린이 극장가를 장악했다.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둔 1987년부터 TV 애니메이션 제작이 시작되면서 떠돌이 까치(KBS), 달려라 호돌이(MBC) 등 단편 애니메이션들이 제작되었고 1988년 최초의 TV 시리즈 만화영화 달려라 하니가 방영되었다. 이때부터 90년대 초까지 한국 TV 애니메이션이 전성기를 맞았다.

일본에서는 은하철도 999기동전사 건담이 일으킨 아니메 붐이 8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과거 TV판의 확장판 수준이었던 극장판이 오리지널 스토리로 제작되기 시작했고, 성인 소비자를 위한 OVA가 처음 등장했다. 그러나 80년대 후반에는 해외 합작의 감소와 어린이 시청 인구 감소 등 버블경제의 역풍을 맞으면서 침체기를 맞았다. AKIRA 같은 대작도 1988년 첫 상영 당시에는 흥행이 저조했다. 그 와중에 미야자키 하야오[6]타카하타 이사오스튜디오 지브리가 두각을 나타내면서 천공의 성 라퓨타, 이웃집 토토로, 마녀 배달부 키키 같은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히트시켰다.

1970년대 일본 만화계에 나가이 고가 있었다면 1980년대에는 토리야마 아키라가 있었다. 토리야마는 1979년부터 소년 점프에 개그 만화 닥터 슬럼프를 연재한데 이어 1984년에는 배틀물 소년 만화의 대명사 격인 드래곤볼의 연재를 시작했다.[7] 또한 캣츠 아이, 시티헌터를 히트시킨 호조 츠카사, 터치아다치 미츠루도 80년대를 대표하는 만화가였다. 여성 만화가 중에서는 시끌별 녀석들, 메종일각, 란마 1/2 등으로 러브 코미디 장르를 유행시킨 타카하시 루미코가 두각을 나타냈다.

1980년대 일본 TV 애니메이션은 후지TV닥터 슬럼프, 시끌별 녀석들 같은 개그물과 북두의 권, 드래곤볼 등 소년 액션물을, 테레비 아사히도라에몽을 필두로 한 후지코 후지오 애니메이션과 건담 시리즈로 대표되는 리얼로봇물을 주로 편성했다.

2.5. 대량 학살

전 세계 독재자들이 반정부 성향을 보이는 자국민들을 대량 학살하는 사건이 종종 발생했다.

3. 한국의 경우

3.1. 정치

역사다시보기 - 6월민주항쟁(The June Struggle for Democracy)

1979년 10월 26일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정부장에게 암살당하는 10.26 사건으로 인해 18년 철권통치가 끝났으나, 뒤이어 계엄령이 선포되고 최규하 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공백을 메웠고, 12월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거쳐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당시 여당이던 민주공화당유신정우회는 박정희 사후 구심점이 뚜렷치 않아 혼란에 빠졌고, 민주화 세력들도 갈팡질팡해서 정국은 안개처럼 보이지 않은 채로 예측불허 상태로 흘렀다. 이 상황 속에서 1980년 2월 29일에 정부가 윤보선김대중 등 687명을 복권하여 민주화에 호응하는 듯했고,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 통칭 '3김' - 이 등장하여 앞으로의 정국 주도권을 잡기 위한 경쟁을 벌였다. 그 사이 12.12 군사반란으로 실권을 잡기 시작한 전두환신군부 세력은 암약하며 언론포섭 계획인 'K공작계획' 같은 집권 시나리오를 은밀히 만들어 권력 장악을 할 채비를 했다.

1980년 봄 들어서 학생과 민주세력을 중심으로 민주화 열기가 다시 거세졌는데, 이들은 유신헌법 폐지, 전두환-신현확 퇴진, 비상계엄 해제, 민주정부 수립 등을 외쳤다. 학생운동 조직은 종전의 학도호국단 대신 학생회를 부활시켜 '학원민주화투쟁'을 시작했고, 4월 9일 성균관대 학생들의 군장검열 거부로 '병영집체훈련 반대투쟁'도 점차 퍼졌다. 5월 13일부터 연세대 등 6개 대학생 3천여명이 교문을 나서 광화문을 거쳐 서울역, 남대문, 종로 등에서 격렬히 가두시위를 벌였으나, 군 투입 움직임을 읽은 지도부는 서울역에서 '회군'을 결정했다.

같은 시기 사회 저명인사 100여명이 학생들의 입장을 지지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했고, 학생운동에 놀란 각 정당들도 계엄령 해제 건의를 준비했으나 정치권과 재야세력들은 앞으로 들어설 정부에 관심을 기울여 주도권 다툼을 하다 신군부의 암약에 대응하지 못했다. 노동운동계에선 4월 21일 동원탄좌(현 넥스트사이언스) 사북광업소 노동자들의 파업(사북 사건)이 있었고, 동국제강, 일신제강, 남화전자, 롯데제과 등지에도 민주노조 쟁취운동 등 노동쟁의가 일어났다.

이를 기회로 신군부는 5월 17일에 국무회의에서 각료들로 하여금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쪽으로 찬성토록 했고, 다음날 0시를 기해 본격 선포하여 김종필과 이후락 등에게 부정축재자 혐의를 씌워 연행했고, 김대중 등 재야인사들도 소요 조종 혐의로 강제 연행하며 학생운동 지도자 등 민주인사에 대한 수배를 개시했다. 더 나아가 이들은 언론을 검열하고, 시위 등 정치활동 자체를 금지시키며 대학까지 휴교시켰다. 5월 18일 전남대 교문 앞 시위를 계기로 이른바 '5.18 민주화운동'이 발생했으나 신군부는 광주 시민 전체를 '폭도'로 규정하여 무자비하게 짓밟음으로서 9일여만에 비참하게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이 투쟁은 훗날 살아남아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원천이 됐다.

신군부는 동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발족하여 실권을 잡고 박정희처럼 '반공과 안보'를 국시로 유지했으며, 공화당과 유정회, 신민당 출신 등 구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규제했으며, '삼청계획'을 통해 먼저 고급공무원 등 공직자들을 대거 숙청했고, 언론인 933명을 해직했다. 또 불량배 소탕을 명분으로 '삼청교육대'를 만들어 전 국민을 혹독하게 다뤘다. 같은 시기 김대중도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죽음의 문턱까지 오기도 했다.

8월에 전두환이 군복을 벗고 유신헌법에 따라 정식으로 대통령에 뽑혔고, 10월에는 대통령 간선제와 7년 임기제, 국회의원 1/3 전국구 배정, 국회 해산권 부여 등을 골자로 한 8차 개정헌법을 공포했다. 이후 '국가보위입법회의'가 만들어져 반공법을 흡수한 '개정 국가보안법'을 비롯해 노동쟁의 제3자 개입금지를 골자로 한 '개정 노동쟁의조정법', 기업별 노조제를 골자로 한 '개정 노동조합법', '사회보호법', '언론기본법' 등 체제 안정을 뒷받침할 각종 법률들을 만들었다. 1981년 1월에는 미국을 방문하여 김대중의 감형을 조건으로 미국으로부터 전두환 정부를 인정받았고, 2월 대선에선 선거인단제에 따라 재선임되어 '제5공화국'이 본격 출범됐다. 3월 25일엔 11대 총선이 열려 여당 민주정의당과 관제야당 민주한국당-한국국민당으로 대표되는 '1대대-2중대-3소대' 체제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광주항쟁으로 지핀 불꽃은 아직 꺼지지 않았으니, 학생운동권은 무림-학림 논쟁 등을 통해 전열을 정비했고,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을 계기로 '반미자주화 투쟁'의 봉화가 점차 피기 시작했다. 1983년 12월에 5공 정권은 정국의 안정을 이유로 제적 학생들을 복교시키고 경찰을 대학에서 철수시키는 등의 이른바 '유화 정책'을 실시하자 1984년부터 점차 여러 대학에 총학생회가 결성되어 다시금 가두투쟁이 시작됐고, 노동운동권에선 1980년대 초반에 원풍모방, 콘트롤데이타, 남화전자, 청계피복 등 기존 민주노조들이 정권의 탄압으로 와해됐음에도 1984년을 기점으로 청계피복 노동조합이 재결성되고 서울 구로공단과 가리봉공단 등을 중심으로 대우어패럴, 로옴코리아, 삼경복장,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대한마이크로 등지에서 새 민주노조들이 결성돼 1985년 구로동맹파업으로 불씨를 키웠으며, 대학생들도 공장에 위장취업까지 하며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노동운동을 했다. 또 '농활'과 '공활'도 급증했다. 이렇듯 민주화운동은 학생과 지식인을 넘어 농민과 노동자 등 기층민중까지 파급됐으며, 나아가 광주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는 것으로 발전했다. 특히 민주-민중운동은 5공 독재반대 투쟁과 더불어 민중생존권 쟁취, 반미자주화와 통일 등의 투쟁을 해왔다.

1983년 김영삼의 단식투쟁을 계기로 이듬해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가 발족되어 김영삼의 상도동계와 김대중의 동교동계가 손을 잡았고, 1985년 2월 12일 12대 총선에서 김영삼, 김대중 등 민추협 중심으로 만든 '신한민주당'이 돌풍을 일으켜 '선명야당'으로서 5공 정권과 싸우기 시작했고, 1986년에는 민주-민중운동 세력과 연합하여 대통령 직선제 쟁취 투쟁을 시작했다. 궁지에 몰린 전두환 정권은 호헌론으로 맞서며 재야 민주세력을 폭력적으로 탄압했으나, 1986년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과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같은 정권의 폭력성을 드러낸 사건들이 잇따라 터져 대중들의 반감이 커졌다. 이는 1987년 6월 항쟁이란 전민항쟁으로 이어져 또 궁지에 몰린 신군부 정권은 6.29 선언을 발표해 직선제를 수용하는 등 정국 전환을 시도했다. 12월에 열린 13대 대선에서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양김의 분열을 틈타 대통령에 당선됐고, 1988년에 새 헌법이 발효되면서 제6공화국이 출범됐다.

새로 출범한 노태우 정부는 내각과 군부 등 요직에 하나회 혹은 전 정권 시기 인사들이 그대로 있기에 '5.5공화국'이란 소리를 들었으나, 대신 법적/제도적 측면에서 민주주의가 보장됐고 직접선거로 뽑힌 대통령이기에 정치권력도 어느 정도 정당성을 유지했다. 또 전임 정권과 달리 입법 및 사법부의 권한이 강해지고 헌법재판소도 세워졌기에 삼권분립에 대한 견제와 균형이 일정해졌다.

그해 4월 13대 총선에서 민정당이 과반수 장악에 실패해 여소야대가 되어 정권은 야당과 민주세력들의 개혁적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야당 측은 청문회를 열어 일해재단 같은 5공 때 비리들을 파헤치며 '5공 청산'을 부르짖었고, 전두환의 형 전경환 등 친인척들이 구속되고 전두환 부부도 백담사로 '유배'를 떠났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개혁 바람은 보수 세력들에게 좋게 보일 리 없었으니, 1988년 정권 출범 초기부터 양동안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가 월간 <현대공론> 8월호를 통해 "이 땅의 우익은 죽었는가"라며 민주화에 따른 좌익 세력들의 득세에 대해 우익 인사들의 각성을 호소했고, 오홍근 테러사건 같이 정보기관이나 극우 세력에 의한 백색테러들이 주를 이루기도 했다. 1989년에는 노태우 정권이 중간평가까지 거부하며 '공안정국'을 선포한 뒤 공권력을 총동원해 재야세력에 용공혐의를 씌워 탄압하는가 하면, 온갖 공안사건을 발표하여 여론을 호도했다. 같은 시기 탈냉전 바람이 일자 정권은 1988년 헝가리 한국대표부 설치를 시초로 '북방정책'을 추진하여 동구권 등 공산권과의 관계를 개선코자 했지만, 다른 한쪽에선 동구권 관계개선을 명분으로 북한을 고립시키겠다는 냉전적 사고에서 못 벗어났다는 견해도 있었다.

남북관계에선 통일 관련 제안이 빈번히 제시됐던 때였다. 최규하 정권 때인 1980년 1월 12일과 24일에 남북한 양측이 처음으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공식 호칭을 처음 쓴 후 남북총리회담 예비접촉까지 하면서 전임 대통령 때보다 좀 나아질 듯했으나, 5.17 내란 후 5.18 민주화운동을 진압한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다시 파탄났다. 그해 10월에 먼저 북한이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설방안'을 먼저 제시하자 전두환 정권도 1982년에 '민족화합 민주통일 방안'을 같이 내세웠고, 1984년 수해 때 북한의 구호물자를 받아들인 후 이듬해 남북 고향방문단 및 예술단의 상호 교환 방문이 이뤄져 남북관계에도 빛이 보였고, 남북정상회담도 비밀리에 계획됐으나 여건상 성사되지 못했다.

남북한 양측은 상대방을 적대시하면서도 권력 유지를 위해 제안을 하는 핑퐁게임을 해왔는데, 이 과정에서 1983년 아웅산 묘소 테러나 1986년 김일성 사망 오보 사건, 금강산댐 건설 소동 같은 게 터졌다. 다른 한편 전두환 정권은 통일운동을 탄압하여 1986년에는 유성환 신민당 의원이 국회에서 국시와 관련해 "반공보다 통일이 상위개념"이라 했다가 안기부에 구속된 것도 당시 상황을 증명한다.

그러나 1987년 6.29 선언 후 1988년에는 김중기 서울대 총학생회 후보의 남북한 대학생 공동체육대회와 국토순례대행진 제안을 계기로 통일운동 열기가 28년 만에 다시 살아났고, 5월 서울대생 조성만의 투신을 계기로 통일운동의 필요성이 학생들의 가슴 속에 와닿기 시작했다. 전대협은 6월 10일과 8월 15일 두 차례 남북학생회담을 시도했다가 경찰에 의해 무산됐지만, 이 경험을 바탕으로 통일운동의 역량이 더더욱 키워졌다. 다른 한편 국보법 철폐운동과 더불어 '북한 바로알기 운동'도 같이 퍼졌으며, 1989년에 터졌던 문익환, 임수경, 서경원, 황석영 등 재야인사들의 무단방북 사건들도 이 흐름에서 일어난 것이다. 노태우 정권은 창구단일화를 내세워 재야세력의 통일운동을 억누르는 한편 '7.7 선언'을 발표했고, 1989년엔 현 통일정책의 기반인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마련했다.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한국 진보세력의 사상과 이념이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진보정치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시기였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 한국 전쟁의 기원 등의 서적으로 대표되는 친일파 청산론, 반공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북한에 대한 재평가와 북한과의 화해 및 통일의 추구, 그리고 5.18 민주화운동에서 비롯된 미국에 대한 재평가는 이후 이때 민주화 운동을 벌인 86세대들이 정권을 잡게 된 2000년대에 과거사 청산 활동, 북한과의 화해, 협력 및 외교 다각화 노선 등으로 현실정치에서 시도되게 된다.

3.2. 경제

1980년 경제는 제2차 오일 쇼크 때문에 마이너스에서 시작했다가 1981년부터 다시 플러스 성장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외채는 갈수록 늘어 1985년 기준 총외채 468억 / 순외채 355억 달러로 올라가 '외채망국론'까지 제기되기도 했다. 다행히 1986년 3저 호황으로 인해 숨통이 트였으나, 미국의 수입개방이 거세져 농축산물 개방이 무차별적으로 행해지자 농민들이 생계에 큰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1984년 함평/무안 농민투쟁, 1985년 소몰이 투쟁 등이 벌어졌고, 1985년에는 '함평농민회'라는 자주 농민운동조직을 결성했다. 이는 1987년 전국농민협회, 1988년 전국농민운동연합으로 각각 발전되었다. 공산품 역시 정부가 점진적으로 수입개방을 감행해 1986년 수입담배가 허용됐고, 1987년 물질특허, 1988년 영화직배 등이 각각 개방되었다. 1989년에는 GATT BOP원용조항이 폐지되고 GATT 11조(수출입 수량제한 철폐) 이행국이 되어 농산물 88.5%, 공산품 99.9%로 각각 증가했다. 금융시장 역시 1987년 외국보험사 지사 개설을 허용했고, 1988년에 현지법인 설립까지 허용했다. 또 기업들도 기술개발에 주력하기보다 비업무용 부동산 매입에 주력했다.

1981년을 계기로 석유파동의 후유증을 극복하면서 중산층의 비율이 증가하기 시작하고 1986년부터 1989년에 이르기까지 3저 호황이라고 해서 경제 성장과 수출 증가를 거치면서 전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할 정도로 중산층의 비중이 두터워졌다.[9] 또한 70년대까지만 해도 극소수의 부자들만이 소유할 수 있었던 자가용 자동차를 보유한 가정이 크게 늘게 되어 '마이카'(My Car)가 유행어가 되었다(마찬가지로 ‘오너드라이버’라는 말도 유행했다) 1가구 1자동차 시대는 90년대의 일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8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해서 보급률이 크게 늘어났고 주차난도 8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되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1985년의 한국의 GNP는 2,310달러로 낮지는 않은 수준이었다.

3.3. 사회

1980년대 대학가
1980년대 초 고속버스 안내양 멘트

- 유튜브 'KBS 옛날티비' 채널 《그땐 그랬지》: 이십세기 708090 관찰기도 참고.
  • 대학 졸업자들은 대기업취업이 잘 되고[10] 공무원의 경우에는 당시에는 그리 돈을 못 버는 직종으로 여겨졌기 때문에[11] 시험경쟁률이 낮아서 하급 공무원이 되기 쉬웠다. 다만 그때도 행정고시의 경우에는 엘리트가 되기 수월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경쟁률이 높은 건 마찬가지였기는 했다. 물론 당시 중소기업은 물론이고 대기업도 근로환경이 열악했다는 것은 넘어가자(...) 참고로 공무원시험은 1988년까지는 쉬웠으나 1989년부터 3저호황이 종료되고, 취업률이 둔화되면서 한국 경제가 예전만큼 시원찮치 못하게 되자 조금씩 어려워졌다. 1991년 이후 만만치 않은 시험으로 어려워졌는데, 참고로 1980년대 후반에 대학 입학한 학생들이 대학 안가고 7급이라도 시험 쳐서 들어갔다면 들어갔을 텐데 5~6년 만에 너무 어려워졌다고 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대기업도 대졸자라면 80년대에는 C-성적도 골라서 갈 수 있던 것을 91년 이후에는 성적이 B-이하라면 대기업 들어가는 것도 어렵게 되었다. 석유 가격도 80년대 중반부터 좀 안정화 되어서 마이카를 일단 사기만 하면 부담 없이 끌고 다니던 시기였다.
  • 사회 분위기는 70년대에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대학을 나오지 못한 4/5의 청년들은 주 6일 고강도 노동으로 저임금으로 굴려졌다. 경제 성장이 중요하던 때라 노동운동을 조직한다면 기업과 경제에 장애가 된다면서 금기시 되었다. 이 탓에 노동자의 권리라는 개념은 없었다. 열악한 환경 탓에 본인에게 문제가 생겨도 스스로가 책임져야 했다. 해고가 쉬워서 고용주의 권력이 강했다. 그 때문에 고용주가 무엇을 지시하던 노동자는 따르는 것이 최선이었다. 다만 민주화 운동의 영향으로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이 성장하면서, 80년대 중후반에 들어서면 근무 환경이 점진적으로 나아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 개발도상국 시대였기 때문에 물가상승률이 두자릿수를 기록하는 것은 예사였다. 그만큼 이자율도 높았다. 대출 이자 또한 높았던 것은 마찬가지였고, 일반인이 대출받기 까다로웠다.
    지금의 사채 수준으로 대출 이자가 높았기 때문에 상당수의 국민들은 자가보다는 임대월세, 조금 사정이 좋으면 전세로 집을 구했다. 다만 시대가 시대인지라 세들어 사는 사람의 권리 같은 건 보장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사가 잦았다. 재개발한다고 통보 받으면 그대로 집을 내주어야 했다.
  • 의료보험은 거의 보장되지 않았고 사보험 역시 전무했다. 혹여 일부 양심 없는 병원에서 사기를 치거나 터무니없는 진단을 내려서 비용을 뻥튀기해도 아무것도 모르는 시대였다. 일반인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창구 같은 것은 부재했기 때문이다. 아프기라도 하면 비싼 병원비를 그대로 내야해서 상류층 이하의 사람들, 특히 돈을 벌어오는 아버지가 아프기라도 하면 집이 휘청거리는 위태로운 가정이 상당히 많았다. 이런 상황은 80년대가 지속되면서 개선되었다.
  • 전두환 정권이 박정희 정부와 차별화하려는 목적도 있었고, 올림픽 개최에 따라서 시민을 학살한 독재정권이었다는 점을 희석시켜야 되었기 때문에 문화적으로 부분적으로 자유로워지는 면이 있어서, 통금이 해제되고, 교복이 자율화되었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개인 과외가 금지됨에 따라 사교육 없이도 원하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던 세대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몰래 할 사람은 다 하고 과외 가격만 올랐다. "입학은 쉽게 졸업은 어렵게"란 명분으로 대학 정원도 급속하게 불어났는데, 이것이 결국엔 전두환의 의도와 달리 학생운동의 활성화(...)로 이어진다. 그리고 실제로 졸업 못한 사람은 자퇴율 때문에 많지 않았다.
  • 대령으로 예편하고 체신부 차관으로 임명된 오명의 전화 전전자교환기 도입 추진에 따라 1987년 DDD가 전국에 깔리면서 재래식 전화의 현대화가 완료되었고, 이는 1990년대 PC통신삐삐의 시대를 거쳐 21세기 정보화 시대로 가는 기틀을 닦았다.
  • 3S정책의 일환으로 <애마부인>을 위시한 에로영화들이 대거 제작되었고, 1988년 미국의 영화시장 개방 압력으로 직배가 허용되자 토종 영화인들이 반발해 시위까지 벌였다.
스포츠로 지배하라! 5공 3S 정책(프로야구)

K리그KBO 리그, 민속씨름이 시작되는 등 프로 스포츠가 활성화되기도 하였다. 또한 야구에 있어서는 해태 타이거즈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 1980년에는 아시안 게임을 한국에서 하기로 결정된 해이기도 하며, 1981년 9월에는 서울에서 올림픽을 하기로 결정되었는데 이때를 계기로 대한민국의 세계적 지위를 알림으로 인해 한국인들의 자부심이 커지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다.
  • 유소년층의 인구가 본격적으로 줄기 시작했을 때이기도 하다. 여성들의 취업률이 높아지는 등 사회적인 변화와 함께 1980년대 중반부터 산아제한 정책이 제대로 약빨(...)을 받아서 신생아수가 1987년에 62만으로까지 떨어지기까지 했고 출생아수 70만을 다시 넘기려면 1991년까지 기다려야 했다.[12] 더욱 중요한 점은 이 시기를 기점으로 출산율 2명대를 더이상 넘기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 1960년대생들이 성인이 된 시기다.
  • 컬러방송이 시작되었다. 사실 그 이전에도 컬러방송을 하려고 했으나,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계층 간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다 같이 흑백방송 보자는 기존의 흑백TV 사용자들을 배려(?)한 정책 때문에 무산됐다. 텔레비전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대한민국은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네 번째로 늦게 컬러방송을 개시한 국가다.
  • 1980년 코미디언 이주일이 전성기를 맞이하여 전 국민을 TV 앞으로 불러모으고 배를 잡고 뒹굴게 만들었다. 가히 이주일 신드롬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사회적으로 거대한 파장을 일으켰다. 이주일의 데뷔는 컬러방송의 시작과 거의 일치한다. 80년대 중반부터는 KBS에서 유머 1번지, 쇼 비디오 자키등이 방영되며 콩트시대의 황금기를 맞이한다. 컬러방송, 이주일, 조용필은 당시의 연예계를 관통하는 키워드였다.
  • 이때부터 지금의 서울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특히 강남, 특히 송파구잠실이 더욱 엄청난 속도로 개발되었다.
  • 이때까지도 학교에 공공연히 금전을 주는 행위가 만연했다. 60년대, 70년대가 지난 뒤에도 일부에서는 가난 등의 이유로 돈을 가져오지 않는 학생이 얻어맞거나 반 수십명이 보는 앞에서 개쪽을 당했고, 아예 학교 밖으로 쫒겨나기도 했는데, 이때에도 당국은 이를 신경 쓰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90년대에 들어서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점차 사라진다.
  • 70년대 이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어느 곳이든 권위주의가 굉장히 짙었다. 국민학교마저 선생님의 심기를 거스르면 바로 폭력으로 응징당했다. 80년대에는 부조리를 부조리라고 생각도 못하던 시대여서, 지금 기준으로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몽둥이 찜질을 당해도 그냥 잘못했다고 비는 것이 최선의 대책이었다.
  • 인권의식이 아직도 열악한 시기였다. 그 유명한 삼청교육대의 시대로, 범죄자뿐 아니라 길거리에 나뒹굴던 죄 없는 술고래들이나 노숙자들이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 몸이고 정신이고 망가지기도 했다. 할당을 정해주고 무작정 다 채우라고 강요하던 시대여서, 경찰들도 묻지도 따지지 않고 좀 불량해 보이는 사람이면 족족 잡아넣기 바빴던 탓이다.
  • 남아선호사상, “남자는 바깥일, 여자는 집안일” 관념이 여전히 통념이던 시절이라 여성들의 경우 능력을 갖추고도 대학에 가지 않거나, 집안의 반대로 가지 못한 경우가 흔했다. 부모와 동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바로 공장으로 취업하거나, 아니면 시집을 가서 집안일을 시작했다. 학교에서도 오늘날에는 남자, 여자 모두 기술, 가정을 다 배우나 당시에는 남자에게는 기술을, 여자에게는 가정을 교육하는 경향이 있었다.
    고등 교육은 자식 모두보다 주로 장남에게 시키는 경우가 더 많았고, 딸이나 다른 아들은 대부분 중졸이나 고졸로 학업을 마감했고, 잘해봤자 전문대를 다니는 것이 최대였다. 이들은 대부분 공장 노동자, 미숙련 사무직, 공무원으로 흩어졌다.
  • 출산율의 경우 1982년까지 출산율 2.1명 이상으로 대체출산율 이상을 유지했으며 출생아 수도 80면명대를 기록해서 70년대 중후반의 추이가 이어졌으나, 산아제한정책의 영향으로 1983년에는 출산율 2.06명으로 대체출산율을 약간 밑돌고 출생아 수도 76만명을 기록해 저출산 시대에 진입하더니, 1984년에는 출산율 1.74명으로 1명대로 진입하고 출생아 수도 60만명대로 진입하게 되었다. 1984년~1990년의 출산율과 출생아 수는 1991년~1997년보다도 낮을 정도로 상대적으로 낮은 출산율을 보였다. 자세한 사항은 1980년대의 저출산 경향 문서를 참고. 다만 2002년 이후 시작되는 1.3명 미만의 초저출산으로 진입하지 않았고, 출생아 수는 절반 이상인 60만명대를 유지해서 5000만명 정도의 인구를 유지할 수 있는 수치였기에 저출산 문제가 본격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은 시기였다.

신데렐라 노래에 뜬금없이 1980년대라는 말이 나온다고 한다

4. 일본의 경우: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

1980s Tokyo, Japan - Traffic, Busy Streets, Shibuya Crossing, Rare 35mm Footage 80's Japanese TV Commercials (Part 1 of 4)[13]
  • 거품경제의 호황을 누리던 시기라 자신감이 충만해 있었고, 이 시기에 서브컬처에서는 미래 지향적인 작품들이 자주 제작되었다.
  •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은 희망적이고 자신에 차 있는 경우가 많다.
(1980~1989)일본과 주요국가의 명목 GDP 흐름[14] 1980년1981년19821983년1984년1985년1986년1987년1988년1989년
단위: 10억 달러(약 1조 원)
미국 전체 명목 GDP 2,862 3,210 3,345 3,638 4,040 4,346 4,590 4,870 5,252 5,657
일본 전체 명목 GDP 1,086 1,201 1,116 1,218 1,294 1,384 2,051 2,485 3,015 3,017
독일 전체 명목 GDP 826 695 671 669 630 639 913 1,136 1,225 1,216
프랑스 전체 명목 GDP: G7 704 621 589 564 534 559 775 939 1,025 1,031
영국 전체 명목 GDP: G7 542 520 492 466 441 468 570 704 855 865
중국 전체 명목 GDP 309 292 286 307 316 312 303 330 411 459
대한민국 전체 명목 GDP 67 76 81 90 99 103 119 150 202 248
[kakaotv(fXo1TNEKO6g$@my)]
이웃 나라 이야기 1부 불패신화

너무 높은 화폐가치로 인해 쌍둥이 적자[15]에 시달리던 미국은 수출을 증가시키기 위해 자국의 화폐가치를 절하할 방법을 찾는다. 결국 1985년 9월 22일 미국 뉴욕의 플라자 호텔에서 G5 경제선진국인 미국, 프랑스, 서독, 일본, 영국플라자 합의를 맺는다. 절상됐던 달러의 가치는 하락했고 독일, 일본의 화폐가치는 상승했다. 일본의 돈은 더욱 부동산에 몰리게 된다.[16]

당시 일본의 경제규모는 미국을 추월할 것처럼 보였다. 일본은 미국 경제규모 절반에 해당하는 명목 GDP를 달성했다. 그 수치가 1987년에는 51.0%, 1988년에는 57.4%, 1989년에는 53.3%에 달했다. 일본의 남아도는 돈들은 주식과 부동산에 집중적으로 쏠렸다. 덩달아서 부동산 불패신화가 불었고 거품도 증가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절상된 화폐가치 때문에 수출에 어려움을 겪을 것을 두려워했다. 때문에 일본 정부는‘엔고 불황’을 막기 위해 지속적으로 저금리정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독이 되어 일본의 부동산거품과 주식거품에 더욱 불을 지르게 된다.
(1980~1989)일본과 주요국가의 1인당 명목 GDP 흐름
[17][18]/단위: 달러
1980년1981년19821983년1984년1985년1986년1987년1988년1989년
일본 1인당 명목 GDP: G7 9,312 10,217 9,431 10,216 10,786 11,464 16,890 20,367 24,604 24,522
핀란드의 1인당 명목 GDP: 북유럽국가 11,497 11,198 11,242 10,724 11,074 11,682 15,249 18,949 22,482 24,369
노르웨이의 1인당 명목 GDP: 북유럽국가 15,569 15,307 15,003 14,701 14,737 15,449 18,495 22,020 23,706 23,805
스웨덴의 1인당 명목 GDP: 북유럽국가 15,781 14,395 12,672 11,645 12,092 12,643 16,689 20,252 22,761 23,805
미국 1인당 명목 GDP: G7 12,575 13,965 14,410 15,531 17,099 18,231 19,078 20,062 21,442 22,879
덴마크의 1인당 명목 GDP: 북유럽국가 13,609 11,782 11,513 11,571 11,289 11,974 16,880 20,950 22,075 21,454
프랑스 1인당 명목 GDP: G7 13,111 11,493 10,858 10,329 9,733 10,146 14,003 16,869 18,324 18,324
독일 1인당 명목 GDP: G7 10,699 8,984 8,681 8,691 8,222 8,358 11,929 14,841 15,904 15,632
영국 1인당 명목 GDP: G7 9,629 9,227 8,746 8,281 7,818 8,292 10,071 12,395 15,035 15,171
대한민국 1인당 명목 GDP 1,778 1,968 2,075 2,268 2,474 2,542 2,906 3,627 4,813 5,860
중국 1인당 명목 GDP 313 292 281 298 303 295 282 301 370 407

1980년대 일본은 1인당 명목 GDP에서는 이미 미국을 추월하고 있었고, 같은 시기 미국 대중문화에서는 '일본위협론'처럼 보이는 사상들이 각종 매체에서 광범위하게 투영되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SF 작가 마이클 크라이튼의 소설 <라이징 선>이다.
Robocop 3 Ninja fight (scene)

1993년의 작품이지만 그러한 시대적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로보캅 3[19]다. 이 작품은 1980년대 일본의 경제성장에 대하여 미국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20]

사실 일본의 미국 추월에 대한 우려는 80년대와 함께 종말을 맞은 것이 아니라, 일본의 거품붕괴가 일어난 이후인 90년대 중반을 지나며 사그러들었다. 일본의 주식시장은 1989년, 부동산시장은 1991년에 최고점을 찍은 후 급격한 하락세를 겪으며 거품이 본격적으로 빠지기 시작했는데, 따라서 미일간 경제규모 격차가 가장 적게 났던 시점은 80년대가 아닌 1995년이었다. 이 해 일본 GDP는 미국 GDP의 71.1%까지 도달했으나, 거품붕괴와 아시아경제위기의 본격적인 영향을 겪으며 96년 59.7%, 97년 51.3%, 98년 44.4%까지 뚝뚝 떨어지게 된다.

1980년대 당시 일본의 모습을 다룬 한국 다큐멘터리로는 MBC의 <일본인 그들은 누구인가(1981)>, <일본을 알자(1983)>, <일본 21세기를 어떻게 준비하나(1985)> 등이 대표적이다.

5. 중화권의 경우

6.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

해당 시기에 제작된 작품들 제외. 가상역사/SF물인경우 ▼.

7. 이 시대에 시작된 것들

지금도 널리 쓰이고 있는 것들을 적을 것.

8. 이 시대에 쇠퇴한 것들

이전 시대에 나와 지속적으로 쓰인 것들을 적을 것.
  • 대한민국 프로레슬링
  • 언론통폐합으로 폐사된 언론사들
    • 합동통신, 동양통신 등 5개 뉴스통신사: 연합통신으로 통폐합됨.
    • 신아일보: 1980년 폐간 후 사원과 기자재 등이 경향신문으로 넘어감.
    • 경남일보: 1980년 폐간 후 1989년부터 '신경남일보'로 복간됐다가, 2000년부터 본래 제호를 되찾았다.
    • 전남매일신문: 1980년 전남일보에 합병됨.
    • 제남신문: 1980년 제주신문에 통폐합됨.
    • 동아방송: 1980년 KBS에 흡수돼 KBS 라디오서울이 됨.
    • 동양방송: 1980년에 KBS에 합병되어 KBS 2TV로 바뀌었다. 물론 2011년에 JTBC로 부활했지만...
  • 흑백 TV
  • 석유풍로(곤로) - 1980년대 후반까지 사용된 조리도구. 도시가스 사업이 본격화되면서 가스렌지로 점점 대체되기 시작한다.
  • 버스 안내양 - 1989년 자동차운수사업법 개정으로 제도 자체가 없어졌으며, 대신 여성 버스 운전기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 동마장터미널
  • 가쿠란 교복: 교복 자율화 조치에 따라 1983학년도부터 전국의 중고등학교에서 폐지된다.
  • 남자 어린이들의 삭발: 위생상태의 개선과 함께 1982년 중고교생 두발자유화 조치가 초등학생 이하 어린이들에게도 파급되어 사라진다.
  • 민간에서의 국기하강식: 자율이 아닌 의무적 애국심 고취라는 이유로 논란이 되어 1989년 1월부터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 6.25 전쟁이 일어날 때 쓰였던 자동차들: 1983년까지 폐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1970년대까지 쓰였던 전통적인 패션들
  • 공연물 사전검열: 1989년 공연법 개정으로 폐지.
  • 내무부훈령 제410호: 1987년 3월 폐지.
  • 보안감호제도: 1989년 사회안전법이 '보안관찰법'으로 바뀌면서 폐지.
  • 유언비어 유포죄: 1989년 경범죄처벌법 개정으로 폐지.
  • 자택장: 1980년대 들어 병원에서 사망자가 급증하면서 영안실에서 치르는 빈도가 늘어 쇠퇴했다.
  • 장발 및 미니스커트 단속제도: 1980년 이후 사문화됐다가 1989년 경범죄처벌법 개정으로 폐지됨.
  • 프레스카드 제도: 1987년 정간법 제정으로 폐지됨.
  • 한국 섬유/방직/신발업계: 1987년 노동자 대투쟁 후 노동운동 활성화와 인건비 상승 등으로 인해 개발도상국으로 생산설비를 이전했다.
  • 한국 해외건설업계: 1980년대 초반 제2차 오일쇼크와 중동 건설 붐의 침체로 쇠퇴한 바 있었다.
  • 국제그룹, 명성그룹, 동명그룹, 화신그룹, 광명그룹, 삼호그룹 등 일제강점기와 6~70년대를 호령하던 재벌들: 화신그룹을 제외한 나머지 그룹들은 거의 전두환의 산업합리화 조치 등에 의해 해체되었는데 특히 국제그룹과 명성그룹이 전두환의 미움을 사 억울하게 해체되었다.
  • 기계식 시계 - 손목시계를 제외한 나머지 분야에서 쿼츠 시계디지털 시계로 대체되었고 더 이상 기계식으로 돌아가는 다른 종류의 시계가 생산되지 않고 있다.심지어 손목시계 마저도 실용성에서 멀어진 고가의 명품 내지 사치품목이 되었다.
  • 1종 소형면허 제도: 1984년 폐지.
  • 3륜 화물자동차: 1972년 고속도로 진입금지 시행 후 1984년 1종 소형면허 폐지에 따라 사라졌다.
  • 다산풍조: 최대한 늦게 잡아도 1980년대 초반이 마지막이다.
  • -읍니다: 1988년에 개정된 맞춤법으로 인해 상당수가 -습니다로 바뀌었다.

9. 1980년대에 들어가는 해

1980년 - 1981년 - 1982년 - 1983년 - 1984년 - 1985년 - 1986년 - 1987년 - 1988년 - 1989년

10. 관련 문서

11. 참고/관련 문헌

  • 강좌 한국근현대사 - 역사학연구소 저. 풀빛. 1995.
  • 고쳐 쓴 한국현대사 - 강만길 저. 창작과비평사. 1994.
  •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3권 - 박세길 저. 돌베개. 1992(초판)/2015(재판).
  •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 교과서포럼 저. 기파랑. 2008.
  • 대한민국사: 1945~2008 - 임영태 저. 들녘. 2008.
  • 들어라 역사의 외침을 - 정인(황광우) 저. 거름. 1985(초판)/1991(개정판).
  • 바로보는 우리역사 2권 - 구로역사연구소(현 역사학연구소) 저. 거름. 1990.
  • 불의 기록, 피의 기록, 죽음의 기록 - 김종찬 저. 실천문학사. 1988.
  •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개정증보 3판) - 서중석 저. 웅진지식하우스. 2020.
  •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6~20권(완결) - 서중석/김덕련 저. 오월의봄. 2019~2020.
  •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 재벌과 빈곤의 경제 - 정인(황광우) 저. 거름. 1985(초판)/1989(개정판).
  • 우리역사 이야기 3권: 8.15에서 6월 민주항쟁까지 - 조성오 저. 돌베개. 1993.
  •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한국 현대사 - 윤대원 저. 거름. 1990.
  • 청년을 위한 한국 현대사 - 박현채 저. 소나무. 1992.
  • 한국현대사 4권 - 한국역사연구회 저. 풀빛. 1991.
  •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전 4권) - 강준만 저. 인물과사상사. 2003.
  • 한국현대사 이야기주머니 3권 - 한국정치연구회 저. 녹두. 1993.
  • 함께보는 한국근현대사 - 역사학연구소 저. 서해문집. 2003(초판)/2016(개정판).
  • 80년대 한국사회 대논쟁집(월간중앙 1990년 신년호 부록) - 월간중앙 편집부 저. 중앙일보사. 1990.
  • 80년대 한국사회와 학생운동 - 한용 외 저. 청년사. 1989.


[1] 다만 이들 나라 중에서도 루마니아는 그 비싼 이자율에도 어떻게든 빚을 다 갚기는 했고, 덕택에 차우셰스쿠 정권이 붕괴되었다.[2] 대표적으로 1983년 핵미사일 오발 직전까지 간 사건.[3] 3저호황[4] 플라자 합의를 서방 여러 나라가 연합하여 일본을 굴복시킨 걸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은데 절대 아니다. 오히려 일본 경제의 실력을 인정한 미국의 인증 선언에 더 가깝다. 플라자 합의는 근본적으로 환율의 현실화에 불과했고 실제로 그 효과가 나타날지도 당시에는 의심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당시에도 환율에 대한 결정권은 이미 정부가 아닌 민간으로 넘어간 상황이었고 때문에 5개국 정부가 합의했다고 하더라고 과연 환율이 정상화 될지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현실 속에서 플라자 합의가 장래에 일본의 거품경제를 만들어내고 잃어버린 10년을 만들어 내는 간접적인 한 원인이 될 거라는 걸 누가 짐작이라도 할 수 있단 말인가.[5] 당시 블록버스터는 1000만 달러 이상이었다. 1991년 개봉한 터미네이터 2 이후에 들어서서 1억 달러 기준으로 올랐다.[6] 지브리 창립 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제작했다.[7] 드래곤볼도 초기에는 닥터 슬럼프의 개그 노선을 따르다가 점차 능력자 배틀물로 변화했다.[8] 다만 아놀드 피터슨은 800명 사망, 조선대민주투쟁위원회 측은 2,000여 명 사망이라고 주장했다. 게다가 계엄군이 학살당한 시민들을 암매장하는 바람에 정확한 수는 아직 모른다.[9] 다만 이때 호황의 여파로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부동산값이 급속히 올라가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10] 물론 당시 대학진학률이 20%대에 불과했다는 것은 감안해야 된다.[11] 사실 이때는 대기업은 물론이고 중견기업 정도만 되어도 평생직장은 보장해주는 분위기였기에 공무원이 그리 메리트 있는 직종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물론 공장 다니는 것이나 농사짓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겨지던 수준.[12] 하지만 그마저도 1996년부터 다시 60만 명대로 떨어졌다.[13] 세 번째 아이브로우 광고에서 나오는 여성이 기무라 타쿠야의 부인 쿠도 시즈카.[14] (1980~1989)일본과 주요국가의 명목 GDP 흐름[15] http://www.lec.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550[16] 관련 기사[17] (1980~1989)일본과 주요국가의 1인당 명목 GDP 흐름[18] 북유럽 국가 1인당 gdp[19] http://movie.daum.net/moviedetail/moviedetailStory.do?movieId=11817&t__nil_main_synopsis=more[20] 미국의 정의를 상징하는 로보캅이 일본문화를 대표하는 닌자에게 팔이 잘리고 얻어맞아 쓰러지는 등의 장면에서 당시 미국이 일본에게 느끼던 공포와 불안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21] 작중 시대배경은 12.12 군사반란이 벌어진 1979년 12월 12일이라, 실질적으로는 1980년대 초반이다.[22] 소련 - 아프가니스탄 전쟁이나 콩고 내전등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무대이지만 워낙에 시리즈 자체가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는(물론 현재에도) 오버테크놀로지나 초능력자등을 묘사하기에 SF 물이나 다름없다.[23] 타임슬립물로, 당시 일본의 시대상을 보여주고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를 풍자한 일본 영화.[24] 이 시기의 TV 영상물들을 짜집기해서 해당 소재가 90년대 초까지 커버하는 경우도 있지만, 80년대 영상클립들이 압도적이다.[25] 1988년 일본 거품경제 절정시기를 다루는데 이를 게임내 반영해서인지 거의 모든걸 돈으로 해결한다. 기존에 경험치를 삭제하고 돈으로 해결하는데 오죽하면 조무래기 적을 패기만 해도 10만엔 단위 돈이 쏟아져나온다. 각 챕터가 끝날 때도 벌어들인 게임내 소지금이 당시 기준으로 얼마만큼의 가치인지도 나타내준다. 이는 버블 시대를 경험한 나이든 유저에겐 당시 향수를 느끼게 하고 거품경제 이후 세대에겐 당시 시대상 대한 분위기가 어떠했는지를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고..[26] 대개는 유신을 다루고 있지만 전두환의 집권 과정도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엄밀히 따지자면 5.17 쿠데타가 터진 80년도 4공은 4공이었다. 5공은 전두환이 11대 대통령에 이은 1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1981년부터 시작된다.[27] 2025년의 가상역사와 이어지기도 하고 해서 반쯤은 가상역사. 그리고 고증오류문제도[28] 전통적 개념의 코스프레는 18세기부터 있었지만, 서브컬처계 코스프레는 이때부터 일본을 중심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한국에 정식적으로 대중화가 된건 2000년대 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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