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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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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자이언츠 영구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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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원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84

보유 기록
223개 한 시즌 최다 탈삼진
4승 단일 한국시리즈 최다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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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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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KBO 리그 MVP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80px-KBO_League.svg.png
1984 KBO 리그 다승왕
}}} ||
최동원의 역대 등번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11번
김일환(1982) 최동원(1983~1988) 김청수(1989~1994)
이정민(2009~2011.09.29) 영구결번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1번
홍성연(1988) 최동원(1989~1990) 최일언(1991)
한화 이글스 등번호 75번
조대현 최동원(2001~2008) 백재호(200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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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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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야구의 레전드 투수 선동열, 김시진과 함께.[1]
롯데 자이언츠 No.11[2]
최동원(崔東原 / Choi Dong Won)
생몰년도 1958년 5월 24일 ~ 2011년 9월 14일 (53세)
국적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대한민국
출신지 경상남도 남해군 [3] [4]
학력 구덕초 - 경남중 - 경남고 - 연세대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십이지 개띠
별자리 쌍둥이자리
신체 179cm, 95kg,[5], B형
가족관계 아버지 故 최윤식, 어머니 김정자, 동생 최수원, 부인 신현주, 아들 최기호
프로입단 1983년 1차지명 (롯데 자이언츠)
소속팀 롯데 자이언트 (1981)
한국전력 (1982)
롯데 자이언츠 (1983~1988)
삼성 라이온즈 (1989~1990)
지도자 한화 이글스 1군 투수코치 (2001, 2005~2006)
한화 이글스 2군 감독 (2006~2008)
종교 개신교[6]
기타 KBO 경기감독관 (2009~2011)
1. 개요2. 플레이 스타일3. 선수 경력
3.1. 고교야구 시절3.2. 대학야구 시절3.3. 실업 시절3.4. 프로 시절3.5. 연봉 문제
3.5.1. 1983년3.5.2. 1984년3.5.3. 1985년3.5.4. 1986년 ~ 1988년
4. 은퇴 이후5. 사망6. 최동원과 선동열
6.1. 영상화
7. 여담8. 기록9. 연도별 성적

1. 개요

그 때 감독님이 그러더라고, "동원아 우짜노... 여까지 왔는데..."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알겠심더. 마, 함 해 보입시더."
스포츠 2.0과의 인터뷰 中
대한민국의 전 야구선수. 뛰어난 활약으로 인해 롯데 자이언츠영구결번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혹사와 많은 나이가 아니였다면, 프로야구에서 더 대단한 성적을 남길 수도 있었다고 평가받은 무쇠팔. 더 놀라운 건, 이 사람은 아마 시절부터 상상을 초월하는[7] 혹사에 시달려 전성기에 약간 못 미치는 수준이 되어 프로에 데뷔했다는 것이다.

그의 투구 폼은 용틀임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역동적이었으며, 자기 공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고 공격적인 투구를 했다. 그것은 일본의 선진 야구를 배우게 한 아버지의 덕이 컸었다.[8] 부산에서 시청 가능하던 일본프로야구 중계방송을 보며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에이스 호리우치 츠네오의 투구폼을 아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최동원의 전매특허인 드롭[9]이 바로 호리우치의 주무기였다.

공격적인 투구 성향으로 피홈런률이 상당히 높았다.[10] 더불어 통산 고의사구가 15개 밖에 안 된다. 1년에 2개도 안 던진 셈. 정말로 공격적이라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기록이다.

아마 때부터 혹사를 달고 살았기 때문에, 프로 입단 당시부터 부상을 달고 살아서 구속이 많이 느려지고 고생했으나 시간이 지나자 진가가 드러나 몇 년간 선발 중간 마무리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나와 이닝을 소화했다. 덕분에 장명부 다음으로 많은 284.2이닝을 던졌으며, 한 시즌 개인 최다 탈삼진 기록인 223K를 기록한다. 이 기록은 2018 시즌 종료 후인 현재까지도 경신되지 않고 있다. 즉, 32시즌이 지나도록 여전히 깨지지 않은 불멸의 기록. 참고로 이 기록에 가장 근접했던 이가 1996년 221K를 기록한 주형광이었다. 현 시대 최고의 투수로 군림하고 있고 탈삼진왕을 5번이나 차지한 류현진조차도 200K 시즌은 2번(2006년, 2012년) 있었지만 끝내 최동원의 기록을 넘지는 못했다.

투구 전 송진가루, 신발끈, 겉양말, 안경, 모자챙을 차례로 만지고 공을 던지는 루틴이 있었다.

2. 플레이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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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구종은 패스트볼커브였는데 특히 커브는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커브라고 평가받는다.[11] 150km/h에 육박하는 패스트볼과 더불어서 빠른 커브, 그리고 완벽히 타이밍을 뺏기 위한 느리고 폭이 큰 커브 등을 무기로 많은 삼진을 잡았다. 공격적인 투구 성향, 그로 인한 좋지 않은 기록[12]도 있지만 그만큼 많은 탈삼진을 뽑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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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유의 폭포수 커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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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심 슬라이더[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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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플리터성 역회전 공[14] 본인 입으로는 떨어지는 공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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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쿠버 썬의 자료에 따르면 씽커도 던졌던 걸로 나와있다. 어쩌면 위의 움짤의 역회전 공이 싱커일수도 있다.

최동원의 공식적인 최고구속은 1981년 메이저리그 스카우터가 측정한 155km/h이다. 하지만 1978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구속 159km을 기록했다는 말이 있는데,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등지에 있는 당대 신문 기사에서 기자들은 최동원의 최고구속을 1981년 측정한 155km으로 보도했기 때문에 159km을 기록했을 가능성은 낮아보인다. 또한, 1981년 당시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는 최동원의 구속을 메이저리그 평균 수준으로 평가했었다. 아쉽게도 80년대 프로야구는 스피드건이 귀했던지라 프로 시절 최동원의 최고 구속은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프로시절 최고구속은 150km대 초반으로 추정된다.

3. 선수 경력

3.1. 고교야구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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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고등학교 야구부 시절, 그리고 본인이 말한 리즈 시절 때의 최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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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고 시절 최동원
처음에는 어머니의 제안으로 축구를 했다고 한다. 초등학교 5학년때 까지 축구로 활동했으나, 야구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하면서 경남중학교 야구부에 입단하게 된다. 그리고 경남고 시절부터는 전국구 투수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1학년때인 1974년, 황금사자기에서 대구상고를 상대로 구원 등판해 팀을 승리로 이끌기도 했다.

고등학교 2학년때인 1975년, 황금사자기에서 당시 2관왕을 기록 중이던 최강팀 경북고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거두기도 했으며, 17이닝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기도 했다. 동 시대의 라이벌이었던 김시진은 최동원이 가장 좋았던 시절로 경남고 1~2학년을 꼽을 정도. 고등학생 신분으로 팔 보험을 들어서 엄청난 화제를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15]

그의 전성기였던 1976년에는 청룡기에서 4강에서 선린상고를 상대로 11K 완봉승을 기록, 승자결승에서 군산상고를 상대로 20K를 달성하며 팀을 결승에 진출 시켰다. 그리고 최종 결승전에서 다시 마주한 군산상고를 상대로 12K 완투승을 기록하며 청룡기를 혼자 힘으로 우승 시키는데 성공한다.

참고로 이때 김성한이 회고하기를 최동원의 공이 너무 빨라서 이를 치기 위해 당시 한국에서 가장 빠른 배팅기계가 있던 한양대학교를 찾아가 150km/h짜리 공을 치는 훈련을 하기도 했으나 정작 본 게임에 들어가니 공이 안보였다고.

3.2. 대학야구 시절

원래 고려대학교에 입학하려고 했으나 중앙정보부의 강압에 의해 진학이 취소되었고, 이에 고향에 있는 동아대학교 진학을 하려했으나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로 진학을 거부받았다. 군대라도 빨리 다녀오려고 육군 경리단의 문을 두드렸지만 그 곳에서도 받아줄 수 없다고 했고, 고위 관계자의 공작에 의해 결국 연세대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고 한다.[16]출처 - 박동희 기자의 칼럼그렇게 중앙정보부 권력까지 동원하면서 최동원을 데려온 결과 연세대학교는 최동원이 재학중인 4년 동안 연고전에서 2승 1무로 무패를 거뒀다. 야구는 2승 1패[17]

연세대학교 시절, 1978년 대통령기 전국대학야구대회 준결승에서 동아대학교와의 맞대결에서 임호균과 18회 연장 승부는 굉장히 유명했다. 14회까지 0:0으로 진행되자 서스펜디드 게임이 선언되고 다음날로 이어져 결국 연세대학교 김봉연의 솔로홈런으로 최동원의 연세대학교가 1:0으로 승리를 거뒀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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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시절
그리고 사건이 벌어진다. 1979년 3월 21일, 대통령기 쟁탈 동국대와의 준결승에서 공군을 제대하고 2학년으로 복학한 박철순이 선발로, 3학년인 최동원이 마무리로 출전하였다. 이날 각각 2점씩 실점하여 경기는 4:2로 패배하였다. 경기에서 지자 연세대 선배들은 패배의 책임을 물어 최동원을 구타하였다.[19] 이때 허리를 잘못 구타하여 팬티가 피범벅이 되고 허리 아랫부분이 시커멓게 죽을 정도로 큰 부상을 입는다. 근 100일 동안 움직이지도 못하고 집에서 요양해야 할 정도였다고 이 과정에서 학교는 구타사실을 은닉하기 위해 최동원이 무단이탈했다는 언플을 한다. 훗날 야구계의 전설이 될 인재가 선배들의 조폭놀이 때문에 야구인생이 끝날뻔 한것이다.

연세대학교 시절 무시무시한 구위로 국제대회에서 맹활약하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스카우터들이 그를 주목했고,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계약,[20] 까지 했으나 병역특례 혜택을 받은 뒤에도[21] 5년 동안 국내에서 그것도 아마에서만 활동해야 대체복무로 인정되는 병역법 때문에 바로 해외에 나갈 수 없었던 점이 크게 작용했다.[22] 병역말고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계약이 최하급이었다는 말이 있지만 이건 사실과 다르다. 4년에 옵션 20만 달러[23] 포함 총액 61만 달러계약인데 이정도 금액이면 최하급이 아니라 오히려 특급대우다. 연봉도 첫해인 1982년에만 최저연봉인 33,500달러일뿐 바로 다음해 연봉은 66,500달러, 3년차에는 115,000달러, 4년차에는 185,000달러에 달했다. 당시 토론토의 1선발로 4년차였던 짐 크랜시의 1981년 연봉이 167,000달러라는 걸 생각하면 토론토 측에서 상당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수 있다. 아니 애초에 프로리그조차 없던 국가의 투수에게 4년간 연봉을 무조건 보장한다는 시점에서 상당한 기대를 가졌다고 볼수 있다.[24]

토론토는 프로 경험이 전무한 최동원이 입단 4년 차(1982년부터 뛴다는 가정 아래)가 되면 1981년 메이저리그 평균 연봉(19만 6천500달러)을 받을 수 있는 투수로 성장하리라 예상했고, 그래서 1985년 연봉을 18만 5천달러로 정한 것이었다.

그 당시 블루제이스 측에서 해외 언론에 밝힌 최동원의 프로필을 보면 그를 당장 메이저 전력감으로 평가하며 메이저 평균 수준의 직구와 커브 그리고 메이저 상위 수준의 슬라이더와 제구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라는 말[25]도 있고 당시 나온 기사로는 토론토 수상이 직접 한국에 최동원을 위해 병역 면제를 건의했다는 말이 있지만 이건 그냥 단순히 최동원 선수를 알고 있고 관심을 가지고 있다던 기사에서 와전된 말인 듯하다. 다만, 토론토 시의회 의장이 한국정부에 최동원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희망하는 진정서를 넣은 것은 사실이다. 결국 블루제이스 측에서 계약 위반이라며 법정행 카드까지 들고 나오며 그후 몇년 동안이나 포기하지 않았으나 결국 최동원은 해외 진출을 포기하고 1983년에 롯데 자이언츠와 계약하게 된다. 다른 말로는 당시 프로야구 최대 흥행카드인 최동원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가면 흥행에 문제가 생길 것이라 생각한 높으신 분들의 압력이 있었다카더라... 최동원의 마지막을 생각해보면 이때 하다못해 더블A라도 가는게 나았을듯...

그리고 연세대학교 시절 최동원을 보고 가네다 마사이치 감독도 스카웃, 정확히는 양자로 맞이할려고 했으나, 조부의 반대로 인해 무위로 돌아갔다는 루머있었다. 하지만 가네다는 2011년의 인터뷰에서 최동원의 존재는 알았지만 양자 입적이야기는 사실무근이라고 하였다. 2012년 10월 26일 엠비씨 스포츠 스페셜다큐에선 김시진의 증언을 보면 뉘앙스적으로는 단순히 일본진출 방법을 설명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도 최동원에 놀람과 관심을 많이 가졌다는 모양. 최동원의 팬들은 최동원이 국내에서 시달린 혹사와 마지막 롯데의 토사구팽 때문에, 실패했더라도 이때 해외리그나 적어로 롯데로 가지는 말았기를 소망하는 팬들도 있다.

3.3. 실업 시절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최고 수준인 3,000만 원[26]의 계약금을 받고 1981년 실업야구 롯데 자이언트에 입단했다.그때부터 롯데 자이언트의 에이스가 되었다. 1981년 롯데 자이언트가 소화한 팀 이닝이 36경기 324이닝이었는데 그 중 206이닝을 신인이었던 최동원이 소화, 17승 4패를 기록하며 팀을 코리안시리즈[27]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는 팀을 위해 코리아 시리즈에서 불태웠다.

81년 실업야구 코리아시리즈 6차전까지 전부 등판
1차전 9이닝 3실점 완투 敗
2차전 7이닝 무실점 (2회부터 구원 등판) 敗[28]
3차전 7이닝 3실점 (5회부터 구원 등판) 무
4차전 7⅓이닝 3실점(희대의 기록인 1경기 1승 1세이브를 기록) 勝[29]
5차전 3이닝 무실점(7회 구원 등판)勝
6차전 9이닝 4실점 완투. 勝

코리아시리즈 6경기중 6경기 등판 42⅓이닝 2승 1패 1세이브. 방어율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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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진, 장효조 등이 포진되어있던 육군 경리단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면서 롯데가 실업야구 마지막 코리아시리즈에서 우승을 하는데 일조했다.

특이사항으로 4차전때 7회까지 선발로 던지다가 휴식을 주기위해 8회초 1루수로 보직을 변경했고, 8회말 2사 만루상황에서 구원등판해서 깔끔하게 막아 1경기 1승 1세이브를 기록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도 연출한다.[30]

롯데의 우승과 더불어 최동원은 실업야구 최우수선수, 다승왕(17승), 신인투수상을 수상하며 3관왕을 차지했다.

1981년 시즌이 끝나고 실업팀이던 한국전력공사에 이적하여 선수생활을 이어갔다. 이유는 세계(아마추어) 선수권 대회가 1982년에 있었는데 이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소속 팀이었던 롯데는 프로로 전환하였기에 아마추어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던 것. 그래서 날라다니는 선수들을 실업팀에 임시로 입단을 시켰고 이는 임호균, 심재원, 이해창, 김재박, 장효조 등이 한국프로야구 원년에 데뷔를 하지 못한 이유다. 세계선수권대회가 종료된 후, 다시 최동원은 (프로로 전환한) 롯데에 입단했다.

3.4. 프로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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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단 당시 사진. 옆에 있는 이는 당시 박영길 롯데 감독

3.4.1. 1983년(롯데 자이언츠)

최동원의 프로야구 첫 시즌은 '부진했다'는 평을 받았다. 본인 말로는 연봉협상 때문에 몸관리를 하지 못해서라고. 1983년 시즌종료 후 하루에 1,000개가 넘는 공을 던지며 몸관리에 들어갔다고 KBS 다큐멘터리에 코멘트가 되어 있다.

그러나 2010년대 야구관으로 보았을 때는 전혀 부진한 성적이 아닌 것이, (하단 기록 참조) 38경기(21선발)에 출장해 본인이 거둔 9승 중 8승이 완투승이었고, 선발 7.2이닝 - 이틀 쉬고 구원 2.2이닝 - 다음날 선발 완투승 - 이틀 쉬고 선발 완투패 등의 미친 듯한 혹사를 자랑했다.(5월 28일-6월 7일 11일간 5회 등판, 4회 선발, 3회 완투) 게다가 롯데는 당시 팀타율 0.244(6위)에 승률도 역시 꼴찌를 한 팀이었다. 다만 당시의 야구관이 '투수는 승리 기록이 최고 투승타타'이던 시절이었기에 혹평을 받은 것일 뿐. 더불어, 실업팀 시절의 롯데 자이언트는 우승 경력이 있는 강팀이었지만, 프로야구팀 롯데 자이언츠는 1983년까지 별볼일 없는 약팀일 뿐이었다. 따라서 '롯데 자이언트 시절 우승을 이끌었던 에이스 최동원이 겨우 9승에 그쳤기에' "부진했다" 라는 평이 나왔던 것이기도 했다. 사실 당시 롯데의 상황에 문제가 좀 있었다. 타선은 박용성-김용희-김용철-유두열이 있었으나 하위타선의 불균형은 원년과 같았고, 최동원 역시 혹사 여파와 몸관리 부족으로 부진했던 것이 컸다. 원년 에이스였던 원년도 탈삼진왕 노상수와 왼손 투수 천창호는 전년에 비해 부족했고, 안경쓴 투수 김문희[31]가 버텼으나 부족했다. 외야수의 고의실책도 있었다고...

3.4.2. 1984(롯데 자이언츠)

최동원을 불멸의 투수로 만들어준 경기가 바로 1984년 삼성과의 한국시리즈다. 당시는 전기/후기리그로 나누어서 전기 1위와 후기 1위 팀에게 한국시리즈 진출권을 주었다. 만일 한팀이 전후기 모두 우승하면 한국시리즈 없이 통합우승.[32]

1984년 전기리그 1위를 달성한 팀은 삼성이었다. 삼성 김영덕 감독은 후기리그에선 선수들을 쉬게 하여 전력을 보존하고, 각 팀을 분석해서 최대한 만만한 팀을 후기 리그 1위로 만든 뒤에 한국시리즈를 무난하게 가져가려고 했다. 결국 후기리그 막판에 완전히 노골적인 져주기 게임을 연발하면서 위협적인 OB 베어스를 떨구고, 대신 롯데 자이언츠를 후기 1위팀으로 만드는 추태를 부렸다.[33] 당시 삼성과 롯데의 마지막 3연전을 중계하던 방송캐스터가 '이 경기를 중계하고 있는 제가 부끄럽습니다.'라는 발언을 할 정도였다.[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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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막장같은 상황은 승리를 위해선 무슨 짓이던 서슴치 않는 삼성 김영덕 감독의 사고방식 때문이다. 게다가 OB 베어스 감독(김영덕)과 투수코치(김성근)으로 원년인 1982년 우승까지 이루었던 2명간의 악연이 겹처서 벌어진 일이다. 1983년 시즌 종료이후 김영덕은 감독 사퇴이후 미국으로 지도자 연수를 떠나기로 예정돼있었고, 이 상황에서 김성근에게 삼성 감독직 제안이 들어온다. 김성근은 이걸 김영덕에게 상의했는데, 김영덕은 김성근의 삼성행을 만류한다. 결국 김성근 투수코치는 OB에 잔류하는데, 열흘 뒤에 삼성 감독으로 김영덕이 발표된 것이다. 즉 자기 후배가 갈 자리를 가로챈 김영덕 감독...이 사건으로 1984년 시즌 내내 삼성과 OB 경기는 살벌한 분위기에서 치러졌고, 난투극도 여러번 불거졌었다.

이에 자존심이 상한 롯데는 최동원을 필두로 반격에 나선다. 당시 롯데 감독이었던 강병철 감독은 한국시리즈를 준비하면서 1, 3, 5, 7차전에 등판하도록 최동원에게 지시를 내린다. 이에 대해 너무 무리하는게 아니냐고 묻자[35], 강병철 감독은 무척이나 미안한 표정으로 두고두고 회자되는 "동원아, 우짜노 여기까지 왔는데"라고 했다. 결국 최동원은 "네, 알았심더. 함 해 보입시더"라고 답변하고 이를 수용한다.

그 결과 기록은 1차전 선발 등판 완봉승[36], 3차전 선발등판 12K 완투승, 5차전 선발등판 완투패, 6차전 구원등판 구원승, 7차전 선발등판 완투승[37]. 총합 5경기 등판 4승 1패 40이닝 투구 평균자책점 1.80 WHIP 1.08. 그리고 롯데 자이언츠는, 아니, 최동원은 우승했다. 현대야구로 보면 15전 8선승 정도 되어야 한다
인터뷰어[38]: 최동원 투수! 컨디션 어땠어요?
최동원: 글쎄요. 허허. 어제보다 좋았다고 할까요?
인터뷰어: 무리 아니었습니까?
최동원: 무리였죠. 무리지만 팀이 이길 수 있다면... 이제 올해 마지막 시합이잖습니까. 그래서 최대한 힘 있는데까지는 열심히 해가지고... 마 저희들이 노력한 만큼의 어떤 성과를 얻기 위해서는... 무리라는걸 알죠. 알지만도 마 나갈 수 있는 한 끝까지 나가서 이기야죠.
6차전 경기에서 구원승을 거둔 뒤 인터뷰
인터뷰어: 최동원 투수, 지금 제일 하고 싶은 말이 뭐에요?
최동원: 아이고~ 자고 싶어요.
7차전 경기 직후 인터뷰
마지막 7차전에서는 5번 유두열이 힘이 떨어진 김일융[39]을 상대로 역전 쓰리런 홈런을 치면서 우승하게 되는데, 사실 6번으로 나오려던 것을 기록원이 실수로 5번으로 적었고 강병철 감독은 그냥 그대로 가자고 했다 한다. 어찌되었던 이 뜬금포에 2009년 나지완이 로페즈를 제치고 한국시리즈 MVP를 받은 것과 비슷한 논리로 유두열이 한국시리즈 MVP가 되는 해프닝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라는 의견도 있지만, 최동원이 1984년 27승 다승왕, 탈삼진왕으로 정규시즌 MVP로 이미 선정되었으므로 한국시리즈 MVP까지 독식하기는 좀 그렇다는 이유로 유두열이 MVP가 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진실은 저 너머에...[40]

어쨌든 최동원은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5경기 등판 중 홀로 4승(1패)을 거두며 롯데를 창단 첫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국내 유일한 기록이다.[41] 이 당시 혹사에 대한 후폭풍이 경기 종료 후 바로 나타났는데 리포터가 마운드를 내려온 최동원에게 달려가 지금 무얼 가장 하고 싶냐고 묻자 자고 싶다고 답변한 일화가 유명하다.[42] 또 우승을 한 당일 밤에 롯데 구단 우승축하파티에 참석한 최동원이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코피를 쏟아버렸다는 것.[43] 단순히 어깨나 팔꿈치에만 무리가 간게 아니라 몸 전체 피로도가 심각했을 가능성이 크며, 그 한국시리즈 선발 4회 구원 1회 총 5회 등판이라는 기록이 얼마나 무식한 혹사였는지 눈치챌 수 있는 대목이다. 그 당시에는 선수들도, 지도자들도, 팬들도 이것이 혹사라는 걸 깨닫지 못했던 시절이었지만.

84년 한국시리즈를 배경으로 한 최동원 영상

3.4.3. 그 이후

결국 1984년의 혹사는 이후 최동원의 선수생활을 갉아먹게 된다.

사람들이 흔히 한국시리즈의 혹사만 생각하는데, 당해 최동원은 페넌트레이스에서도 기록적인 혹사를 당했다. 전년도의 장명부에 비견될 만한 혹사였다. 총 51경기 중 선발로 20경기를 나와 14경기를 완투했고, 계투로 31경기를 나와서 거의 300이닝에 근접한 투구를 했다. 현대야구의 관점에서 보면 선발로 등판한 경기를 다 빼고(150이닝 가량을 빼고) 구원등판한 경기만 봐도 상당한 수준의 혹사다. 최훈은 이 당시를 그리면서 롯데가 리그 최강의 투수진을 가졌다고 평하기도 했다. 최고의 선발진 최동원과 최고의 계투진 최동원(..)[44] 그러나 그는 은퇴 후 세월이 흐른 후의 인터뷰에서도 "우승은 나 혼자만의 영광이 아니라 팀과 팬들의 기쁨이기 때문이다.", "무리는 역시 대가가 있게 마련이더라. 그러나 후회한 적은 없다. 다시 그날로 돌아가도 난 1차전부터 7차전까지 던질 거다. 왜냐? 그게 최동원이니까."라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본인의 선수 생명까지 바쳐가면서 구단에 우승을 안겨준 선수에 대한 롯데의 태도는...이 때문인지 아래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 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그렇게까진 안던질거다"라는 말도 남겼다.[45]

3.4.4. 삼성 라이온즈 트레이드 이후

최동원의 선수 생활 중 중대한 고비를 맞이한 것이 1988년으로, 바로 이 때 가장 먼저 선수협을 만들려고 했다. 그 결정적 계기가 당시 해태의 투수 김대현이순철과 함께 승용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달리다 휴게소 진입 도중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46] 이 때 최동원은 선수들의 복지를 위해 선수협을 구성하려 했으나, 당시 7개 구단들의 반대로 실패로 돌아갔다. 이 사건 이후 연봉협상 등의 이유로 마찰이 심하던 롯데 구단과 완전히 틀어지게 된다. 선수협의 여파로 최동원은 삼성의 김시진 등의 거물투수와 트레이드를 당하게 된다. 이 당시의 트레이드는 규모와 네임 밸류에서 역대 최고로, 롯데의 '최동원-오명록-김성현'과 삼성의 '김시진-전용권-오대석-허규옥', 그리고 추가로 롯데의 '김용철-이문한'과 삼성의 '장효조-장태수'의 총 규모 5:6 트레이드가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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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인터뷰에서 롯데에 관한 질문에서 최동원은 "그래요. 롯데는 처음부터 나와의 약속[47]을 지키지 않았어요. 이런 상태에서 프로 롯데라고 믿음이 갔겠습니까. 그래도 나는 롯데를 위해 1984년을 통째로 바쳤어요. 하지만, 그 대가가 무엇이었습니까. 그 대가가."라는 것으로서 짙은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렇게 롯데에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최동원은 야구를 더이상 못 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미국으로 출국한다. 이후 1989년 후반기부터 삼성에 복귀하지만, 신혼여행 및 야구를 떠나 방황하면서 체중은 불어나고 그에 더해 전체적인 훈련량이 모자랐던 것+그 전까지의 혹사의 여파로 구속도 떨어지고 제구도 안 잡히게 되는 전체적인 기량 하락으로 이어졌고, 지금 관점으로 본다면 야구선수 치고는 이른 나이에 은퇴했다.[48] 인터뷰로는 당시 감독이던 김성근 감독이 가더라도 1년 더 하고 가라고 말렸으나, 자신이 강력하게 은퇴를 요청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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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해서 보는 그의 혹사.jpg
완투율은 70%가 넘었고 규정 이닝의 2배를 뛰어섰으나, 승리를 챙기지 못하였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전성기가 조금 지나서 프로 데뷔했고 프로 팀 실력이 영 좋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감독이 미친 듯이 굴렸고 미친듯한 성적을 거뒀다는것.

이후 동생인 최수원 심판이 밝힌 바에 따르면, 이미 어깨 인대 2곳이 끊어져 있었다고 한다.

3.5. 연봉 문제

박동희 기자의 취재로 인해 당시 옵션계약, 이면계약 등이 밝혀진 바 여기에 해당 내용을 기술한다.[49]

3.5.1. 1983년

최동원 측은 메이저리그 진출을 포기했으니 그에 걸맞는 몸값을 달라며 롯데 측에 요구했는데, 당시 실업야구 롯데 시절 계약금 가운데 절반 이상인 2천9백만원을 약속어음으로 받았다가 롯데 측이 지급을 미루는 바람에 그 돈을 송두리째 떼였던 일이 있던 상황이었다.

롯데는 1억원은 힘들다고 난색을 보였으나 최동원의 태도가 강경하자 결국 편법을 이용하여 1억을 지급하는데, 방법은 이렇다. 일단 롯데는 최동원에게 계약금 5천만원, 연봉 3천만원을 줘 8천만원을 채우고. 실업 롯데시절 미지급한 계약금 2천 9백만원 중 2천만원을 보너스 형태로 추가 지급하기로 하여 총 1억원을 채운다. 다만 몸값은 계약금과 연봉만 발표하자고 요청하여 언론에 보너스는 발표하지 않았다.

3.5.2. 1984년

연봉협상의 기초가 되는 83년 최동원의 성적은 38경기(선발 21경기) 9승 4세이브 16패 탈삼진 148개 평균자책점 2.89이다. 롯데는 적은 승수와 많은 패수 등을 이유로 한국 최고투수라는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성적이라며 최동원의 연봉을 3천만원에서 2천750만원으로 삭감한다. 83년 롯데의 팀 타율, 팀 출루율이 리그 꼴찌였으며, 리그 최다실책팀임을 감안하고 최동원이 선발로 나온 21경기 중 16경기를 완투하여 완투승 8번, 완투패 8번을 기록한 것을 감안하면 2010년도 프로야구계의 일반적인 시각에서는 당연히 연봉이 상승되었어야 할 것이다. 다만, 당시 시대상 투수의 클래식 스탯인 승-패. 평균자책점 등에 비중이 컸던 것도 고려하고 넘어가야 한다.

3.5.3. 1985년

84년 최동원은 정규 시즌에서 51경기(선발 20경기) 284 2/3이닝, 27승 6세이브 13패, 평균자책점 2.40을 기록한다. 게다가 한국시리즈에서 4승을 거두며 팀을 우승으로 이끈 전설적인 해이기도 하다.

최동원과 롯데는 84년부터 등판간격과 승수에 따라 보너스 명목의 연봉을 따로 챙겨주기로 이면 계약을 맺었는데, 이에는 당시 연봉상승 25% 상한선 제도가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83년 9승이라는 승수에만 치우쳐 연봉이 깎이는 상황이 되자 최동원의 아버지 측에서 롯데에 제안한 것이기도 하다.

결국 84년 성적을 볼 때 최동원은 연봉과 보너스를 합산시 1억이 넘는 돈을 받았어야 하나 협상 끝에 7천4백만원에 연봉계약을 체결한다. 또한 최동원 측은 롯데 측에 연봉 25%상한선 제도는 독소조항이므로 없어져야 하고, 연봉과 보너스는 모두 연봉으로 계산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롯데로부터 연봉과 보너스를 합한 금액을 연봉으로 발표하겠다는 다짐을 받아낸다.

3.5.4. 1986년 ~ 1988년

1985년 20승을 기록한 최동원은 8100만원의 연봉을 받는다.
1986년 19승을 기록한 최동원은 8910만원의 연봉을 받는다.
1987년 14승을 기록한 최동원은 8910만원으로 연봉이 동결된다.

이에는 롯데와 최동원 측이 맺은 이면계약 합의서의 내용에 기반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15승을 기준으로 15승을 거둘시에는 동결. 15승 미만의 승수를 거둘시에는 연봉삭감. 15승 이상 거둘시에는 연봉상승. 참 쉽죠? 대표적으로 87년 동결된 연봉계약의 이면계약 합의서의 내용은 23승 이상(25% 상승), 22승(22% 상승), 21승(20% 상승), 20승(15% 상승), 19승(10% 상승), 18승(8% 상승), 17승(5% 상승), 16승(2% 상승), 15승(동결), 14승(2% 삭감), 13승(8% 삭감), 12승(15% 삭감), 10승(20% 삭감)이다.

1988년 연봉이 동결되기까지의 과정이 우여곡절이 긴데, 이면계약서 내용에 따라 14승을 거두면 2%가 삭감되지만, 2세이브는 1승으로 친다는 조항 역시 존재하였고, 마침 최동원은 2세이브를 기록하였기에 계약내용에 따르면 동결이었다. 이 과정에서 한 언론사가 "약간의 연봉 인하 요인이 있으나 에이스라는 점을 감안해 깎지 않기로 했고 동결시켜줄 계획"는 롯데의 입장을 기사로 내면서 최동원 측의 반발이 시작된다.

이 과정에서 이루어진 막장스러운 배틀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으며, 이때부터 롯데 프런트의 막장행보가 시작되었다고 볼수있다.(...)

이 막장스러웠던 배틀은 최동원 90만원 사건 항목 참조. 롯데에게 최동원은 결론적으로 눈엣가시였으며 그가 선수협을 창설하자 이를 빌미로 강제 트레이드를 시킬수있는 구실을 만들게 된다.가뜩이나 연봉협상으로 굉장히 밉상이 찍힌 상대였기 때문.[50]

4. 은퇴 이후

은퇴 후엔 의류사업가로 나서 뒷모습 누드 사진을 넣는 파격적인 광고를 선보이다 망했다. 이후 잠시 정치계에 입문하여 출마하지만, 낙선한다.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91 1991년 지방선거 (부산직할시의회 서구 1선거구) 민주당 10,667 (37.8%) 낙선 (2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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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민주당 소속의 최동원. 포스터는 최동원 스스로 직접 디자인했다고 하며, 포스터나 선거문구 모두 정치계에서도 상당히 세련되었다고 평가받았다. 20여년 전의 포스터임을 상기하자.[51]

원래 최동원은 당시 경남고 선배였던 김영삼이 여당인 민주자유당으로 출마할 것을 권유를 받는다.[52] 그러나 최동원은 이를 거절하고 1991년 5월 1일 3당합당에 반대하던 통일민주당 탈당파인 이기택과 노무현이 있었던 꼬마 민주당에 입당한다.[53] 그리고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부산직할시 시의원 후보로 출마한다. 여기서 최동원은 부산 서구에서 출마했는데, 부산 서구는 김영삼이 1956년부터 대통령 취임전까지 출마해서 당선되었던 지역구로[54] 김영삼 본인과 소속당인 민주자유당의 사실상 성지같은 지역구이다. 이런 상황에서 최동원은 민주자유당의 골수 지역구에서, 그것도 해당 지역구의 국회의원이자 정당 대표인 김영삼에 대한 반대[55]를 선거 홍보물에 드러내면서 직할시의원 선거에 출마한다.

당시 최동원 출마에 대한 여론이 여러가지 있었다. 괜히 정치판에 나갔다가 이미지만 망가질 것을 우려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운동선수 출신인데다가 이전까지 딱히 정치 경력이 없었기 때문에 불안감을 가진 유권자도 있었다.

최동원은 비록 낙선했지만 37.8%라는 적지 않은 득표율을 올렸다. 원래 김영삼의 지지 성향이 강한 부산 중에서도 특히 부산광역시 서구는 위에서 말한 김영삼의 존재 때문에 보수 지지 성향이 특히 강한 지역으로, 당장 IMF와 정권교체로 김영삼과 한나라당의 지지율이 폭락했던 1998년에 같은 최동원이 출마했던 서구 시의원 선거에서도 민주당 후보는 24%밖에 표를 얻지 못했고 탄핵 속에 치룬 17대 총선때 열린우리당 후보가 겨우 30%를 넘겼고, 19대 총선에서는 29%에 그쳤다. 요약하자면, 최동원은 야권 열세 지역구 + PK 정계 최대거인 김영삼 지역구 + 대놓고 김영삼 비판이라는 상황에서 다른 야당 후보들은 엄두내기도 힘든 성적을 거둔 것이다. 최동원 사후, 야당에서 최동원이 살았다면 영입해서 부산 선거에 나설 텐데... 하는 말이 간혹 나오는 이유다.

3당합당 이후 민주당계 후보들이 저 득표율을 넘어서려면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의 조경태와 김정길까지 가야 한다.그나마 김정길은 낙선 물론 시의원 선거, 총선, 시장 선거를 동등히 볼 수는 없지만 이후 국회의원, 시장에 나선, 야권이 부산에 낼 수 있는 최고의 카드라는 노무현도 33~35% 득표율에 그쳤다.

낙선 이후 최동원은 방송계에 진출하여 걸출한 입담을 과시하며 여러 군데를 전전했다. 이 때문에 나이 어린 사람들은 연예인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아 많은 롯데팬들이 씁쓸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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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이글스 2군 감독 시절
이후 2001년 한 해동안 잠시 한화 이글스의 투수코치로 있다가 2003년부터 KBS 스포츠에서 야구 해설을 맡으며 야구계로 돌아왔고,[57] 2006년 시즌을 앞두고 김인식 감독의 부름을 받고 다시 한화 투수코치로 부임, 류현진 성장에 이바지[58], 이후 한화 이글스 2군 감독으로 활동했다. 다만, 대장암으로 요양하느라 2군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고 한다. 때문에 2009년 시즌부터는 2군 타격코치였던 우경하가 감독직을 계승했다.

은퇴 후에도 롯데 팬들은 최동원을 간절히 찾았다. 마침 5위로 2008년 시즌을 마친 한화 이글스가 최동원 감독과 재계약을 안 한다는 기사가 떴고, 이에 롯데 자이언츠 팬들은 롯데 프런트와 최동원 간의 과거사 때문에 부정적으로 보면서도 "없는 자리를 만들어서라도 최동원을 모셔오자"라고 하는 등 급반응을 보였으나... 결국은 KBO 경기감독관에 임명되었다. 여전히 야구계에서 그의 입지는 좁았다. 롯데에 오고 싶어도 프런트 양상문 당시 2군 감독[59] 때문에 힘들 것 같다는 게 대세. 그리고 암 투병 경력 등 이래저래 건강이 좋지 않아 일이 많은 1군 코칭스태프는 현실적으로 무리다.

경기감독관으로 재임하면서 우천취소 문제로 인해 징계를 먹었던 흑역사가 있다.

2009년 시즌부터 롯데 자이언츠 기념관이 생기면서 역대 레전드의 유니폼이나 장비들을 전시했는데 최동원 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롯데와 최동원의 관계를 보여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래도 나중에는 최동원 칸도 채워졌다.

2009년 7월 4일, 최동원은 21년 만에 롯데 유니폼을 입고서 사직에서 감격적인 시구를 했다. 21년 만에 롯데 유니폼을 입은 최동원의 시구는 많은 화제가 되었고, 당시 중계를 하던 KBS N 스포츠에서 특별히 캠을 가까이 붙여서 최동원의 역동적인 투구폼을 담아내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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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폼을 벗은지 10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역동적이다. 게다가 엄청 빨랐다. 이날 롯빠들도 울고 모든 야구팬이 울었다.

많은 팬들은 롯데가 최동원을 초청해서 시구를 했으니 서로의 관계가 좋아진 게 아닌가 하는 희망적인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사실은 롯데가 초청한게 아니라 2009년 프로야구 타이틀 스폰서인 CJ 마구마구에서 전설적인 선수를 초청해 시구 행사를 벌이는 '레전드 시리즈(legend series)' 이벤트였다고 한다.

사직구장에서의 두번째이자 마지막 시구장면.최동원은 2004년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린 올스타전에서도 시구한 적이 있었다.


당시 사직구장에서 틀어줬던 영상.

참고로, 그때 구장에서 최동원의 시구를 본 관중 가운데 롯데 올드팬들은 위에 적혀 있듯 21년만에 최동원이 롯데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로 올라오자 눈물까지 흘렸다. 그만큼 최동원이 롯데 팬들에게 있어서 큰 존재이다. 게다가 이 날은 경남고 후배 송승준이 당대 최강이었던 SK[60]를 상대로 완봉승을 거둠으로서 경기의 의미가 한층 더 커졌다.

MBC ESPN '날려라 홈런왕'에서 유소년 야구 감독직을 맡고 있다. 웃기도 많이 웃고 의외로 웃기기도 하신다. 최근 방영분에선 카라의 깜짝방문에 차명주 코치와 함께 좋아서 입이 찢어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셨다(...). 미래, 야구계에 '최동원의 아이들'이 출현하길 기대해본다.

한 때 인터넷 상에 간암으로 인해 투병 중이라는 카더라가 돌았으나, 사실무근으로 판명되었다.[61] 자기는 등산 열심히 하고 내려왔는데 무슨 이야기냐며 당황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본인이 극구 부인하니 정말 건강하게 잘 지내시는 듯 했으나...

2011년 7월 22일, 경남고와 군산상고 간의 레전드 리매치에서 심하게 야윈 모습으로 나와 충격을 주었다. 일단 인터뷰에서는 건강에 이상이 없고, 체중이 많이 불어 식이요법을 통한 다이어트를 하다가 너무 심하게 살을 뺀 것이라며 와병설을 부인하기는 했지만 많은 팬들은 그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고... 이미 그당시 외견은 굳이 암이 아니라 하더라도 다이어트라고 볼 수준도 아닐 정도로 너무 심각했으며, 대놓고 얘기만 안 할 뿐 큰 병환이 있다는 것을 대다수의 팬들은 이미 알았다.

결국 그날 마운드에는 오르지 못하고 계속 벤치에 앉아 있었다. 한 타석이라도 서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지만, 본인은 너무 야인 생활을 오래해서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어중간하게 서는 것은 싫다고, 솔직히 말한다면 허리를 삐끗해서 올라가지 못하겠다고 했다.[62] 동생인 최수원 심판이 "건강에 이상이 있다는걸 다 알아채지 않겠냐! 굳이 나가야겠냐!" 말리기도 했으나 끝내 끝까지 말리지는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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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것이 최동원 생전에 마지막으로 입은 유니폼이 되고 말았다. 수척한 얼굴에 비해 가 나와 있던 것은 대장암 말기로 인해 복수가 차 있던 것이었다. 고교 선배인 허구연이 이를 눈치채고 괜찮은 거냐고 묻자 최동원은 모른 척 해달라고 부탁했다고... 병원에서는 절대 나갈 수 없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건강이 악화된 상태에서 레전드 매치에 나온 것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라운드에서의 추억을 되새기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유족들은 말하고 있다.
이 레전드 리매치가 있기 전 박동희김성한과 함께 긴 시간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가 길어서 최동원 파트만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 초등학교 때까진 축구부에서 뛰다가 축구에 대한 흥미를 잃고, 어머니가 마침 야구부가 있는 학교로 전근을 가게 되어 어머니를 따라가 야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 연세대 출신들의 정치 공작으로 최동원이 어쩔 수 없이 고려대가 아닌 연세대로 갔다는 사실을 최초로 밝혔다.
  • 83년 데뷔 시즌을 9승 16패로 부진한 성적으로 마감한 후, 하루 400개를 던져가며 훈련한 끝에 페이스를 끌어 올렸다고 한다. 하지만 인터뷰에서 그는 후배들에게는 이렇게 무식하게 훈련하지 말고 '가늘고 길게 선수생활을 해라'고 할거라고... 그래도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굵고 짧게 선수 생활을 할 것 같단다. 그게 자신의 인생이기 때문에.
  • 지금 84년 한국시리즈로 돌아가 그 때처럼 등판하라고 한다면 답을 유보할 거란 말을 했다. 최후가 그런 것(트레이드)인 줄 알았다면 그렇게 던지진 않았을 것이다라는 말을 덧붙이면서.[63]
그 밖에도 심금을 울리는 그의 말들이 많다. 최동원의 팬이라면 한번쯤 꼭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5.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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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병 중 생전 마지막으로 쓴 싸인볼
최동원은 레전드 매치 당시 와병설을 부인했던 것과 달리 실은 2010년부터 지병인 대장암이 재발해 경기도 포천 등에서 요양 중이었다. 그러던 중 병세가 급속도로 악화되어 일산의 병원으로 옮겼지만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2011년 9월 14일 새벽 2시 2분, 향년 53세로 세상을 떠난다. 공교롭게도 장효조 감독이 숨을 거둔 직후인 1주일 전부터 병세가 악화되었다고.[64] 사실 레전드 매치 당시 괜찮다고 한 인터뷰 기사도 기자에게 아프다는 말을 절대 쓰지 말라고 간곡하게 부탁해서 쓴 거짓이었다는 것이 뒤늦게 알려졌다. 팬들에게 자신의 병세가 알려지는 것을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본인의 마지막 소원은 고향팀에서 감독을 하는 것이었지만, 결국 친정팀 롯데와의 화해는 살아서 이루어지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일했던 한화 이글스에서도 비록 프랜차이즈 스타는 아니지만 4년간 코치로 연을 맺었던 점을 고려하여 한화그룹 임직원이 상을 당한 경우에 준해서 지원을 해주겠다고 했지만 롯데 자이언츠 구단에서는 기일 오후까지 별다른 대응이 없어 폭풍같이 까였다. 성적만 잘 나가면 다냐? 롯데 구단에서 명예감독 임명, 최동원 데이 명명을 검토하겠다고 한 것이 전부였다. 이미 한화에서 빈소까지 차린데 비해 롯데는 고작 이 정도냐며 폭풍같이 까였다.

결국 롯데는 팬들의 여론을 의식한 듯, 앞서 언급했듯 최동원을 명예감독으로 추진하는 것을 검토하겠다고 밝헜으며, 영구결번과 9월 30일을 최동원 데이로 지정[65]하겠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15일 조문에서 밝혀 극적 화해의 마지막 실마리는 남겨두고 있다. 검토드립 돋네[66]

더군다나 최동원의 등번호 11번에 대한 영구결번 역시 당시 롯데 자이언츠 사장이었던 장병수가 "해당 번호를 달고 뛰고 있는 이정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는 말과 함께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더더욱 팬들의 화를 돋구었다.

불암콩콩코믹스에서도 이를 까는 만화를 그리기도 했다.

어쨌거나 팬들한테 욕은 욕대로 먹었지만 결국 롯데는 최동원의 등번호 11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하였다.[67]

먼저 세상을 떠난 장효조와 여러모로 묘한 우연의 일치가 있다. 최동원은 롯데에서 데뷔했지만 위의 트레이드로 인해 삼성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해야 했고 장효조는 최동원의 맞상대로 트레이드되어 롯데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 전설이 일주일 간격으로 작고한 2011시즌 페넌트레이스 1, 2위는 경상도 지역 연고의 삼성과 롯데. 만약 두 팀이 한국시리즈에서 붙게 되었다면 여러가지의 관점에서 많은 의미가 부여될 한국시리즈가 되었을 것이다.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공을 던지고 싶다.라고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의식불명 상태에서도 운명하는 순간까지 야구공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까지 쥐고 있던 공은 그의 501, 502탈삼진 공.[68] 진정 뼛속까지 야구인.

그가 마지막으로 공식석상에 나왔던 2011년 7월의 인터뷰에서, "별은 하늘에만 떠있는다고 별이 아니에요. 누군가에게 길을 밝혀주고, 꿈이 돼줘야 그게 진짜 별이에요. 그래서 생각한 건데, 이제 야구계를 위해 나도 뭔가를 하려고 해요. 이젠 그냥 '최동원'이란 이름 석 자가 빛나는 별이 아니라, 젊었을 때 나처럼 별을 쫓는 사람들에게 길을 밝혀주는, 그런 별이 되고 싶어요. 야구가 뭐냐고요? (금테 안경을 고쳐 쓰며) '최.동.원' 이름 석 자지. 야구가 전부였지…."라는 말을 남겼다.

9월 16일 아침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그의 발인이 엄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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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유족과 롯데 구단 관계자, 동료 및 선후배 야구인 등 약 100여명이 모여 최동원의 마지막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장효조의 발인 때와 마찬가지로 전혀 쓸쓸하지 않은 발인이었다. 최동원의 영정이 영구차에 실리자 롯데 시절 동료였던 양상문 해설위원과 1988년 트레이드 당시 같이 삼성으로 갔던 후배 김성현 인창고 코치는 참았던 눈물을 흘리며 최동원의 영면을 기원하였다. 최동원의 시신은 벽제 화장장에서 생전에 그가 아끼던 글러브와 유니폼과 함께 화장되어 한줌 재가 되었고, 경기도 파주의 청아추모공원에서 영원한 안식을 갖게 되었다...

최동원 모친 "동열아, 너라도 건강챙겨라"

최동원의 부고 소식을 접한 많은 팬들이 십시일반하여 조화를 보내고 장례식장에 직접 조문을 가기도 하였다. 롯데 자이언츠 갤러리에서는 250만원을 걷어 조화와 부조금을 유족 측에 전달했고 한화 이글스 갤러리[69]와 "롯데사랑 거인사랑"에서도 조화를 보내어 최동원을 추모했다. 아버지가 팬이었다는 10대 소녀가 장례식장을 찾아가 조문하기도 했고, 심지어는 춘천에서 한달음에 달려온 팬도 있었고, 수산시장에서 장사를 하다가 온 차림의 팬도 있었다. 최동원이라는 존재가 팬, 특히 롯데팬들에게 얼마나 큰 존재였는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70]최동원이 세상을 떠나고 얼마 후, 2011년 당시 한국프로야구에서 뛰고 있던 외국인 투수 세 명, 레다메스 리즈벤자민 주키치, 브라이언 고든에게 최동원의 1984년 한국시리즈 7차전 투구 영상을 보여주며 그를 평가해 달라고 했는데[71] 세 명 모두 엄지를 추켜세우며 감탄했다.
  • 레다메스 리즈: "(옆에 있던 임찬규의)영웅이 될 만한 투수이다. 커브와 역회전공 모두 평가가 어려울 정도로 대단하다. 저렇게 온 몸을 사용하는 큰 투구폼으로 제구가 되는 투구 메커니즘은 처음 봤다. 임찬규가 저런 우상을 잃었다니, 참으로 안타깝다."
  • 벤자민 주키치: "역회전공 하나만 봐도 대단한 파워 피쳐였다는 걸 알 수 있다. 한국시리즈 최종전같은 중요한 경기에서 저렇게 자신 있게 몸 쪽 공을 던질 수 있다는 건 평소 몸 쪽 공에 대한 자신감이 있다는 뜻이다. 나는 이렇게 공격적인 투수를 좋아한다. 위기의 순간에 이런 공을 던질 수 있는 투수는 거의 없을 것이다. 커브도 저렇게 각이 큰 커브는 오랫만에 본다. 특히 저런 투구폼에서 나오는 커브는 처음 봤다. 역회전공과 커브를 던질 때 타점도 약간 다른 것 같은데 정말 특이하다. 내 투구 폼보다도 훨씬 독특하고, 타자들이 아주 곤란해 했을 것 같다."
  • 브라이언 고든: "이런 공을 던지려면 아주 강한 마지막 동작이 필요하다. 마지막 동작에서 공을 때리듯(hit) 던져야 저런 역회전이 걸릴 텐데 그 동작이 매우 자연스럽다. 보통 2스트라이크 이후에 몸 쪽 공으로 삼진을 잡기 위해 이런 공을 던지는데 1스트라이크에서 던진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커브도 크게 휘는 좋은 커브지만 역회전공이 더 대단한 것 같다. 이런 커브와 역회전공을 한 사람이 동시에 구사한다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다."
출처

2011년 9월 30일, 언론에 보도된 대로 두산 베어스와의 홈경기를 "최동원 데이"로 명명하고 경기 전 최동원 선수의 현역 시절 등번호였던 11번의 영구결번식이 거행 되었다. 이날 최동원 선수의 모친과 아들을 비롯한 유족이 참석하였으며, 최동원 선수의 외아들인 최기호 씨가 시구자로 나섰다. 그리고 이날 경기는 선발 라이언 사도스키가 2회초에 두산 윤석민에게 쓰리런 홈런을 두들겨 맞고 조기강판 하며 흔들렸지만 곧바로 등판한 장원준이 7⅓이닝 4피안타(탈삼진 4개, 사사구 1개) 무실점으로 쾌투하였고, 타선에선 강민호이인구가 먼저 간 선배를 추모하는 홈런포를 가동하며 롯데가 6-3으로 뜻깊은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부산에서 최동원 기념 야구박물관 출범식이 열렸고 이 자리에는 부산시장을 비롯해 부산시 인사들이 모였다고 한다. 물론, 롯데는 화환 하나 보내고 직원 하나 보낸걸로 끝.

2013년 들어 사직야구장에 최동원의 바람이었던 롯데 감독의 금의환향하고 싶다는 꿈을 추모하기 위해 동상 제작 모금을 했고 2013년 9월 들어 동상이 공개, 정식 제막식은 9월 14일에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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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구장에 세워진 최동원의 동상

2013년 12월 24일부터 2014년 3월 2일까지 열려있을 예정인 부산 벡스코 2013 야구체험 스토리에서는 최동원의 유품 전시관이 마련된다. 모친이 찾았으며, 금의환향한 부산 출신 메이저리거 추신수도 12월 31일 이곳을 찾아 사인볼을 남기기도 하였다.

한편, 박동희 기자가 쓴 칼럼에 따르면 이만수 감독(11년도 당시는 감독대행)이 사망 사흘 전부터 매일 찾아와 문병을 했었다고 한다.
박동희 기자가 이외에도 여러가지 최동원에 관한 일화가 담긴 기사를 시리즈로 다.

2016년 11월, 문재인 대통령(당시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 겸 대통령 후보)이 부산 촛불집회에서 밝히길 최동원이 선수협을 만들기 위해 법률 상담을 받았던 곳이 바로 법무법인 부산으로 문재인이 직접 상담했다고 한다. 그리고 2012년부터 최동원을 추모하는 발언을 몇 차례 한 것을 보면 단순한 립서비스가 아닌 듯. 같은 중-고등학교 선후배라는 점도 한 몫 했을거 같다.[72]

하지만, 최동원 동상이 세워진 이후에 매일 동상 주변은 흡연자들과 흡연자들이 버린 담배꽁초들과 쓰레기 무단투기한 흔적들이 보이기도 한다. 심지어는 동상 부근에서 대놓고 혹은 숨어서 노상방뇨 및 대변을 보거나, 애 기저귀를 가는등 매우 모욕적이고 상상도 하지못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물론 구단 자체 환경미화원 및 극소수의 롯데팬들과 모친 김정자 여사님이 쓰레기를 치워도 파렴치한 인간들 때문에 쓰레기들이 금방 불어나기도 한다.

실제로 기사까지 났으며, 물론 원정팬 및 타 지방 사람들도 최동원 동상에서 몹쓸짓을 했으나 압도적으로 죄다 대다수의 롯데팬들과 부산시민들, 부산내에 있는 대학생들 포함 총학생회 일부 간부들도 이랬다는 사실이 까발려진 상태이다. 거기다 최동원 동상에 평소에 무관심하고 노상방뇨와 쓰레기투척 흡연하다가 최동원 관련날짜에 반성도 없이 안면몰수하고 보여주기식 최동원 운운하는 롯데팬 및 부산시민들의 실태도 역시 들통난 상태이다.

덤으로 관리 제대로 하지도 않은 부산시의 보여주기식 행정처리역시.

6. 최동원과 선동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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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가 약간 지난 시점에서 프로데뷔를 했지만 그가 남긴 족적은 크며, 전성기 때의 선동열과 비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수일 것이다. 선동렬은 최동원을 라이벌이자 존경하는 선배로 인식하였고 최동원 또한 선동렬을 라이벌이자 인정하고 존중하는 후배로 인식했다고.

대결과 관련된 항목은 최동원 VS 선동열 항목 참조.

덧붙여 이선희, 장효조와 더불어 프로야구가 5년만 일찍 생겼더라면의 단골 떡밥 중 하나.

6.1. 영상화

2011년 12월 22일에 개봉하는 영화 '퍼펙트 게임'에서 최동원과 선동열의 3번의 선발 맞대결을 그렸다. 조승우·양동근, '퍼펙트게임'서 최동원·선동렬 변신 최동원 역은 조승우가, 선동열 역에는 양동근이 맡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두 레전드가 나란히 영화를 관람하는 것은 보지 못하게 되었다.

이와는 별도로 2011년 9월 25일 KBS 스페셜 무쇠팔 최동원 인생을 던지다 편이 방송되었다.[73] 야구팬이라면 무조건 감상하자. 이 방송에 나온 바로는 영화 퍼펙트게임 제작진에게 '내 투구폼이 워낙 와일드하기 때문에 배우가 다칠수도 있다. 꼭 정확하게 따라하지 않아도 된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해당 다큐에서는 마이클 민민훈기, 박촉새박동희[74], 강병철, 유두열, 김시진, 김일융, 한문연, 송승준 등의 인터뷰도 곁들여져 있다. 대본은 스포츠 다큐멘터리 작업을 많이 하는 민혜경 작가가 썼다.

이후에도 2011년 11월 11일에[75] MBC 스페셜에서 불멸의 투수 최동원편이 방송되었다.[76] 직후에 만들어졌던 KBS보다 양이라든가 자료 면에서 풍부하니[77] 팬이라면 보는 것을 추천. 중간에 보면 은퇴 이후에도 팬들이 편지를 보내거나 하면 빠짐없이 답장엽서를 보낸 장면이 나오는데 그곳에 롯데 자이언츠라는 문구가 있다. 자신을 그렇게 내팽겨쳤던 구단임에도 불구하고 끝내 롯데 자이언츠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

7. 여담

  • 평소 생활도 소탈했다고 한다. 술, 담배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고기조차 거의 안 먹었다고... 가장 좋아했던 음식은 모친 김정자 여사가 해주던 김치쌈이었는데, 실제로 1980년대 모 잡지에서 프로야구 선수들의 여름 보양식에 대해 인터뷰를 할 적에 다른 선수들은 보약, 장어, 홍삼 등 오만 보양식을 논했지만 최동원은 찬 물에 밥 말아서 김치 싸먹으면 그게 보양식이라는 대답을 했다고. 물론 고기나 보약같은 선물들이 들어올 때가 있긴 했지만 항상 지인들에게 나눠줬고, 특히 1958년 개띠라서 개에 대해 애착을 보였던지라 누군가 개소주를 보내주면 진심으로 화냈다는 일화가 있다. 유일하게 보양식으로 먹었던 것이 인삼대추를 달인 물. 그런데 정작 서구화된 식습관이 주원인으로 지목받는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난게 참으로 아이러니 하지 않을 수 없다.[78] 이를 놓고 자존심이 강한 최동원이 롯데에서 트레이드된 이후 겪었던 엄청난 스트레스가 원인이 된게 아니냐는 추측이 있기도 한데, 오죽했으면 야구를 그만두고 평생 입에 대 본 적이 없는 술을 마실 법했음에도 주변 사람들 모두 최동원이 술을 마시는 장면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
  • 그라운드에서의 자신만만하고 오만하기까지한 이미지와는 달리 사적으로 만나면 겸손하고 수수했다고. 1990년대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한 모습을 보면 구수한 말투에 주위사람들과 어울리려고 노력하는 태도를 볼 수 있다.
  • 정치적 이유로 각종 데모와 시위가 많던 1980년대, 시위에 참여하는 군중속에 끼어있던 최동원 선수에게 놀란 행인들이 혹시 야구선수 최동원 아니냐고 묻자, "예, 저 최동원 맞심더." 하고 태연하게 시위를 계속하더라는 일화가 있다.(2011년 9월 방영된 KBS 스페셜 참조) 그리고 1980년대 말 노사분규가 극심했던 시기, 부산지역 언론노조에서 총파업을 했을 때 무기명 후원금을 기탁했다고도 한다.(MBC 다큐스페셜 '불멸의 투수, 최동원' 참조)
  • 동료 선수들의 기본생계권을 보장하기 위해 선수협을 창단했던 것을 보면 야구실력뿐이 아니라 인간적인 정의감과 소명감도 있던 것으로 보인다. 실력뿐 아니라 인성까지 갖추었던 진정한 1인자.
  • NC 다이노스 창단 당시 초대 감독 후보로 물망에 오른 사람들 중 1인이었다. 특히 NC의 김택진 구단주가 최동원의 팬이었기 때문에 영입을 강력하게 추진했는데, 당시에는 암 투병 중이었기 때문에 무산되고 그 대신 건강이 회복된 뒤에 프런트나 코칭스태프로 모셔올 계획이었다. 그러나 끝내 최동원이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별세하면서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 2012년 9월 11일 사직야구장 두산 베어스 vs 롯데 자이언츠전에서 그의 아들인 최기호 군의 시구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피는 못 속이는지 특유의 역동적인 투구폼과 묵직한 구위를 선보이며 팬들을 아련하게 만들었다.[79] 타석에 있었던 이종욱이 놀랐을 정도. 영상
  • 2012년 10월 25일, 매니지먼트 게임인 프로야구매니저는 원년시즌까지의 선수카드를 업데이트 했으며 최동원이 활약했던 시즌의 카드를 업데이트했다. 특히 한국시리즈 4승의 역투로 기억되는 1984년 카드는 EX카드로 나와 최동원을 모르는 어린 야구팬들도 최동원의 위대함을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다.
  • 2014년 4월 17일, 한국판 사이 영 상최동원 상이 탄생하였다. 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조.
  • 2015년 2월 5일, 불법 소금물 관장 시술을 하던 목사 부부가 체포되었는데 이들이 진행한 9박 10일 캠프에 암 투병 중이던 최동원도 사기를 당했던 사실이 확인되었다.[80]

    (추가) 17.09.14 6주기 시구 영상
  • 2015년 3월 28일, 최동원 모친 김정자 여사가 2015 한국 프로야구 kt 위즈롯데 자이언츠의 개막전 경기에 앞서 시구를 했다. 최동원의 현역시절 투구폼을 그대로 재현한다고 해서 많은 롯데팬들의 기대를 받았는데, 아니나다를까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비슷하게 투구폼을 소화해냈다. 투구폼 뿐만 아니라 생전 공을 던지기전에 버릇[81]까지 똑같이 보여주면서 뭇 야구팬들의 눈시울을 붉혔다.
  • 2015년 쿠바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인 빅토르 메사가 박동희와의 인터뷰에서 그에 관해 언급했다.(위 멘트 참고)
  • 원년팬의 평가
  •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하는 과정에서는 당시 감독이었던 박영길의 인맥이 작용했었는데, 박영길은 최동원의 조부가 부산 충무초등학교 교장으로 있었을 때 만든 야구부에서 야구를 배웠다고 한다. 이로 인해 박영길 감독이 최동원을 롯데로 데려올 때 조부의 도움을 받았었다고.
  • 롯데 구단은 2016년 11월 1일자로 최동원의 아들 최기호 군을 육성팀 직원으로 채용하기로 결정했다.
  • 어머니 김정자씨가 자주 사직구장 광장에 있는 아들의 동상을 보러 가시는게 포착되어 팬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하셨다. 수영구에 있는 집에서 구장까지 지하철로 40분이 걸리는데, 한번 들르면 1-2시간은 보내신다고 한다.
  • 그리고 시사IN은 이걸 소재로 정치적인 만평을 싣는 패륜적인 사고를 터트렸다. 욕을 엄청나게 먹고 사과문을 올렸지만, 그 사과문 자체도 정상적인 것이 아니어서 이미지가 시궁창에 빠진 상태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 전술했듯 최동원이 1988년 선수협회를 만들기 위해 찾았던 변호사가 바로 문재인이었다. 문재인이 직접 상담했고 이는 문재인 본인이 2016년 11월에 다시 언급하기도 했다. 훗날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한국시리즈 1차전 시구를 하게 되는데, 이 날 구심이 우연찮게도 최동원의 동생 최수원 심판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마운드 위에서야 구본능 KBO 총재로부터 전해들은 문재인 대통령은 깜짝 놀라며 반가운 표정을 짓기도 했다.
  • 2017년 부산KBS의 '부네스코 위원회'라는 프로그램에서 부산을 상징하는 인물로 최동원을 다뤘다.

8. 기록

  • 5년연속 규정이닝 2배이상 투구
  • 2년연속 225이닝-14완투-1점대 ERA-1점대 FIP
  • 5년연속 208이닝-14완투-2점대이하 ERA-2점대이하 FIP
  • 5년연속 전구단 상대 완투
  • 6년연속 선발승 전경기 완투승
  • 6년연속 선발등판경기 2/3이상 완투
  • 3년 776.2이닝 66승 45완투 1.97ERA 1.86FIP (3년간 연평균 259이닝-22승-15완투)
  • 4년 1000.2이닝 80승 60완투 2.16ERA 1.95FIP (4년간 연평균 250이닝-20승-15완투)
  • 5년 1209.1이닝 89승 76완투 2.28ERA 2.05FIP (5년간 연평균 242이닝-18승-15완투)
  • 1984년 324.2이닝 31승 6세 18완투 258탈삼진, 후기리그 우승, 한국시리즈 우승 (한국시리즈 40이닝 4승 4완투 포함)
  • 단일 한국시리즈 8개 부분 1위 (이닝, 다승, 선발등판, 선발승, 완투, 완투승, 완봉승, 탈삼진)
통산 기록은 8시즌(248게임, 1414.2이닝)동안 103승 74패 26세이브, 평균자책점 2.46 , WHIP 1.15, 1019탈삼진을 기록. 커리어하이는 1984년 시즌으로 27승(!)[82] 13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2.40, WHIP 1.04, 223탈삼진[83]을 기록했다.

특이한 기록은 1984년 8월 16일 MBC 청룡을 상대로 '4번 타자'로서 1사 만루 상황에 2타점 적시 2루타를 때린 기록이 있다. 4번타자 1루수였던 김용철이 자신이 친 타구에 부상을 당하여 물러나자, 지명타자였던 김민호가 1루수로 들어오면서 김용철의 타순에 투수였던 최동원이 들어가야 했던 것이다. 이것은 그대로 결승타가 되었으며, 유일한 프로에서의 타격 기록이다. 따라서 그는 타율이 10할, OPS가 3.000이다.[84]

9. 연도별 성적

  • 푸른 글씨는 KBO 최다,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진한 글씨는 리그 5위 내 입상 성적.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3 롯데 38
(5위)
208⅔
(5위)
9 16 4 0.360 2.89 202 17 59 148
(4위)
89 67 1.21
1984 51
(2위)
284⅔
(1위)
27
(1위)
13 6
(5위)
0.675
(4위)
2.40
(4위)
229 18 82 223
(1위)
91 76 1.04
1985 42
(5위)
225
(4위)
20
(3위)
9 8
(3위)
0.690
(3위)
1.92
(2위)
170 7 49 161
(2위)
60 48 0.94
1986 39 267
(1위)
19
(2위)
14 2 0.576 1.55
(2위)
204 7 61 208
(2위)
60 46 0.97
1987 32 224
(2위)
14
(4위)
12 2 0.538 2.81 218 6 68 163
(1위)
80 70 1.25
1988 16 83⅓ 7 3 3 0.700 2.05 77 4 25 83
(4위)
24 19 1.21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9 삼성 8 30 1 2 0 0.333 2.10 36 2 19 9 12 7 1.80
1990 22 92 6 5 1 0.545 5.28 113 9 56 24 62 54 1.82
KBO 통산
(8시즌)
248 1414⅔ 103 74 26 0.582 2.46
(2위)
1249 70 419 1019 478 387 1.15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출루율 장타율
1984 롯데 1 1 1.000 1 1 0 0 2 0 0 1.000 2.000
완투, 완봉기록
년도 완투 완봉
1983년 16완투
(3위)
1완봉
1984년 14완투
(2위)
1완봉
1985년 14완투
(1위)
4완봉
(1위)
1986년 17완투
(3위)
4완봉
(3위)
1987년 15완투
(2위)
4완봉
(1위)
1988년 3완투 1완봉
1990년 2완투 0완봉
통산 81완투
(2위)
15완봉

[1] 1987년 올스타전 당시 모 잡지사에서 찍은 사진으로, 그 다음 해인 1988년의 트레이드로 11번과 29번은 유니폼을 서로 바꿔 입게 된다. 이들의 손동작의 의미는 선동열의 등번호와 최동원의 등번호를 더하면 김시진의 등번호가 나온다는 뜻이다. 즉 18+11=29. 양쪽 선수의 손모양이나 최동원의 서 있는 자세로 봐서는 양 옆에서 최동원을 떠받들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2] 영구결번[3] #, #[4] 국민학교 입학 직전에 부산으로 이주했다고 한다.[5] KBO 프로필.[6] 개신교 신자가 별로 없는 롯데 자이언츠에서 박정태, 조성환과 함께 몇 안 되는 개신교 신자였다고 한다. 실제로 롯데의 주축 선수들 중 종교 비율을 보면 불교 신자들이 꽤 많다.[7] 실업야구 코리아시리즈 6경기에 모두 등판(선발로 세 번)하여 무려 42.1이닝을 던졌다. 경기당 평균 7이닝을 소화한 셈.[8] 최동원 선친은 본래 소싯적에 축구에 재능이 있었으나 집안의 반대로 인해 꿈을 접어야 했고, 그 후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다리를 잃은 아픈 기억을 안은 사람이었다. 그 때문인지 아들의 재능을 발견한 뒤로는 누구보다도 강력하게 아들의 성장을 위해 헌신했었고, 구설수에 휘말린다 싶으면 "모든 욕은 내가 먹겠다"고 하며 아들을 감쌌다.[9] 낙차 큰 커브.[10] 이후 인터뷰에 보면 정말 대단한 자신감을 가졌다는 것이 보이는데 홈런을 맞으면 다음 상대 때 다시 똑같은 코스에 던져서 "칠테면 쳐봐라. 이번에도 또 치면 넌 실력이었고 못 치면 운이 좋아서 네가 쳤을 뿐이다."라는 마인드를 가졌었던 게 나온다. 홈런을 허용하고도 호탕한 웃음을 보여주었다.[11] 보통 최동원, 정민철, 김상엽을 역대 최고의 커브볼러 3순위로 꼽는다.[12] 피안타, 피홈런, 볼넷[13] 참고로 투심과 슬라이더의 영상은 지칠대로 지쳐있던 한국시리즈 7차전 영상이다. 그래서 그런지 투구폼이 상당히 무너져있는것을 볼수있다.[14] 흔히 슈트라고 부르는데 슈트는 구질이 아니라 구종을 말한다. 싱커나 포크볼 등이 슈트성 공에 포함된다.[15] 기사의 동해생명보험은 현재의 KDB생명보험이다.[16] 1980-90년대의 영남의 야구선수들은 고려대에 진학한 선수들이 많았다. 특히, 롯데 자이언츠의 야구선수 및 코칭스태프는 부산고-경남고/고려대 중 하나 혹은 둘 다 거친 경우가 굉장히 많다. 당장 롯데출신 유명 선수들 중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나오고 고려대를 졸업한 경우는 김용희, 양상문, 박동희, 마해영, 손민한등 매우 많은 반면, 연세대에 진학했던 롯데 선수 중 유명 선수는 최동원 외엔 윤학길뿐이다. 지금이야 부산출신 고려대 선수들이 롯데 자이언츠 쏠림이 줄었지만, 진갑용, 정근우, 이택근 등 부산지역 고교-고려대를 거친 유명 야구선수들은 결코 적지 않다. 반대로, 이순철, 조계현, 이호성 등 1980년대 호남출신 야구선수들은 연세대학교로 진학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국보급 투수라 불린 선동열고려대학교로 진학했다. 이는 아버지 선판규씨의 선택에 의한 것으로, 자세한 것은 선동열/선수 경력 참조.[17] 최동원이 4학년이었던 1980년은 정국 불안으로 인한 학원 사태의 영향 때문에 신군부가 연고전을 일방적으로 취소시키면서 열리지 못했다.[18] 그리고 곧바로 같은날 다시 결승전에 선발로 출전해서 승리투수 가 또 되었다.뻥?아니다! 진실이다.[19] 선배들은 박철순이 폭행을 저지른 이유를 두고 박철순의 의도였는지 다른 선배들의 지시였는지를 두고 논란이 많은데 인터뷰와 당시 상황을 조합해보면 박철순의 의도 쪽에 무게가 실린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박철순 문서 참조.애초에 박철순이 73학번인데 그 때 4학년인 77학번 학생들이 73학번 선배한테 78학번 후배를 때리라고 지시를 했을 리가... 운동부 군기는 학년순으로 잡는게 아니라 학번순으로 잡는건데[20]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 공식허가를 받은 계약이었다. 1981년 9월 28일 승인[21] 당시 최동원은 1977년 니카라과에서 열린 야구 슈퍼 월드컵 우승으로 혜택을 받았다.[22] 이후 아마가 아니라 프로에서 뛰는 것도 허용으로 바뀐다.[23] 올스타 선정시 해당 연도 2만 5천달러, 사이영상 수상시 해당연도 2만 5천달러[24] 토론토가 계약서에 최동원의 향후 5년간 연봉을 명기하던 1981년 메이저리그 평균 연봉은 19만 6천500달러였다. 1980년 평균 연봉 14만6천500달러에 비해 34.13%가 증가한 액수였다.[25] 메이저리그에는 이런 말이 있다. "평균 이상의 구속과 뛰어난 제구력, 그리고 명품 커브를 갖춘 투수는 두 자리 승수를 보증한다." 하지만 이런 강속구와 커브 위주의 정통파 올드스쿨 피쳐는 메이저리그에서도 박찬호가 마지막이다. 그 박찬호마저도 슬럼프를 극복한 후엔 변화구로 슬라이더를 주로 던졌다.[26] 최동원의 인터뷰에서는 5,000만원이었는데 2,100만원은 현금지급이었고, 2,900만원은 6개월 어음이었다고한다.이게 무슨 개소리야? 최동원은 이 말도 안 되는 계약을 믿었으나, 롯데는 그 어음을 그가 사망할 때까지 결제해 주지 않았다. 그리고 최동원은 프로구단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하면서 "다시는 속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그와 롯데와의 인연은 시작부터 악연이었다.[27] 한국시리즈의 실업야구 버전[28] 이미 1회에 롯데가 5실점한 상황이라 패전이 아님[29] 현대 야구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기록인데 과거의 야구 룰 상으로는 충분히 가능한 기록이다. 투수를 교체할 때 아예 빼지 않고 야수 자리에 넣었다가 다시 투수로 기용할 경우 이런 기록을 세울 수 있다. 주로 고교야구 등 아마추어 야구에서나 볼 수 있는 상황이며 프로야구에서는 10년에 한 번 볼까 말까한 빈도로 이런 광경이 벌어진다. 김성근 감독이 SK 감독 재임 시절 이런 식으로 경기를 치른 적이 있다.[30] 참고로 현재 야구 규칙으로는 한 투수가 동일한 경기에 승리와 세이브를 동시에 채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KBO 규칙 10.20조에는 세이브 투수의 요건으로 '승리 기록을 얻지 못한 투수'라고 명시하고 있기 때문에 투수는 승리 혹은 세이브 두 기록 중 하나만 가질 수 있다.[31] 나중에 충수염수술을 받는데,이 수술로 인해 기량이 하락하여 은퇴한다.[32] 1985년부터 전체승률 1위는 한국시리즈 진출권을 얻고 리그 우승팀인 두 팀이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됐다. 그러나 1985년 전체승률 1위+전기리그 후기리그 우승을 싹쓸이하며 삼성이 통합우승을 하자 최고의 흥행카드인 한국시리즈를 버릴 수 없었던 KBO는 결국 1986년부터 전,후기리그 1,2위팀에게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주고 진출권 2장이면 한국시리즈 직행하는 제도로 바꾸고, 1989년부터는 단일리그제로 바뀌면서 준플레이오프가 도입된다.[33] 객관적인 전력상 최동원 빼면 롯데는 삼성보다 한수 아래라는 평가가 많았다. 게다가 최동원조차 고의패배 경기를 제외하면 1984년 삼성전 전적은 2승 4패 3세이브로 썩 좋지 않았다. 즉 김영덕 감독은 7전제 한국시리즈에서 최동원이 기껏해야 선발로 2경기 나올 걸로 보고 나머지 경기를 모두 이기면 된다고 계산한듯 싶다.[34] 당시 롯데는 마지막 2경기를 모두 이기면 OB 경기의 결과에 상관없이 1위가 되는 상황에서 김영덕 감독의 배려를 사전에 감지하고(?) 노골적으로 2군과 후보 선수들을 기용해서 주전을 쉬게하면서 무난하게 2연승을 한다.그리고 이게 전국에 TV생중계 되면서 일파만파... 김영덕 감독은 지금까지도 '이기기 위해선 무슨 짓이든 한다' 란 감독의 대명사로 불린다. 최근 몇년간은 김성근 감독도 그런 욕을 먹지만 이 사람에 비하면 애들 장난 수준이다. 김성근 감독은 그래도 자기 팀의 전력을 최대한으로 쥐어짜서 승리하려고는 할 지언정 고의로 져주기 게임 따위는 하지 않았다.[35] 당시 롯데의 투수진은 그야말로 최동원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할만큼 비참 그 자체였다. 노상수는 1983시즌 종료 후 현역 입대로 전열에서 이탈했고, 장명부와의 불화로 삼미에서 롯데로 건너와 1984시즌 10승을 따낸 임호균 외에는 돋보이는 투수가 없었다. 더구나 만년 하위 단골에서 첫 한국시리즈 진출이라는 쾌거를 낳은 이상 우승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던 롯데로서는 어쩔 수 없는 대책이기도 했고...[36] 한국시리즈 최초의 완봉승이다. 완투승은 원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박철순이 최초로 달성했다.[37] 우천으로 경기가 하루 순연했기에 선발 등판 한것이다. 원래는 6차전 때처럼 5회쯤 등판시키려 했다고[38] 1980년대부터 1990년대 말까지 각종 프로그램에서 리포터로 활동하던 김승규 씨가 당시 인터뷰어로 활동했다. 참고로 김승규 씨는 농구선수 출신이기 때문에 이 당시 스포츠 현장을 주로 다녔다. 한국시리즈 7차전 종료 직후 최동원에게 "하고 싶은 말이 뭐에요?"라고 묻는 사람도 이 사람이다.[39] 사실 김일융도 이 시리즈 3승을 기록하고 있었다.[40] 성적대로 하자면 최초의 트리플 크라운이만수가 정규시즌 MVP를 받고, 최동원이 한국시리즈 MVP를 받는 것이 맞다. 그러나 기네스북까지 오른 아홉 타석 연속 고의사구로 홍문종을 걸러내면서 '비난은 잠시지만 기록은 영원하다'라는 어그로를 잔뜩 끈 김영덕 감독 때문에 기자진들이 외면한 이만수는 정규시즌 MVP를 놓쳤다.[41] 참고로 일본프로야구에서는 1958년 니시테츠 라이온즈의 이나오 가즈히사와 1959년 난카이 호크스의 스기우라 타다시가 일본시리즈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상대로 시리즈 4승을 기록한 적이 있다.[42] 실제로 2011년 9월 25일 방영된 KBS 스페셜 '무쇠팔 최동원 인생을 던지다' 편에서 당시의 인터뷰를 볼 수 있다.[43] MBC 스페셜 '불멸의 투수 최동원' 편을 보면 코에 휴지를 끼우고 노래를 부르는 최동원의 모습이 나오는데 표정으로 보기에도 매우 피곤해 보인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 최동원의 팀 후배이자 전담포수이자 한국시리즈 7차전 종료 직후 기뻐서 최동원에게 가장 먼저 달려가 끌어안았던 사진으로도 유명한 한문연이 2015년 최동원을 추억하며 기리는 의미의 SBS Sports 주간야구 방송에서 이 사건이 실제 일이냐는 질문에 맞다고 직접 증언했다.[44] 하지만 1984년의 엄청난 혹사에도 1985년에는 20승을 달성하고 1986, 1987년까지 꾸준히 두자리수 승수를 올리는 등 괴물같은 활약은 지속되었다. 선동열과 그 유명한 15회 완투 대결도 바로 1987년에 나온 것. 밑에서도 후술하겠지만 최동원이 비교적 이른 은퇴를 한 것은 혹사로 인한 후유증도 후유증이지만 그보다는 선수협 창설 시도로 인해 구단에게 찍혀서 삼성으로 버림받은트레이드를 당한 충격과 그로 인해 야구에 대한 동기부여와 의욕 상실이 가장 컸다. 롯데맨에 대한 자부심이 컸다고 한다. 그러나 분명 구속이 많이 떨어졌고 변화구 궤적의 수준도 많이 떨어졌기 때문에 정신 충격이 혹사보다 더 높은 비중의 원인으로 보는 건 부적절하다고 보는 쪽도 많다. 롯데에 대한 자부심도 컸지만 한국 야구의 스타선수로서의 자부심 역시 컸던 최동원이 아무리 모욕적인 상황이라 해도 자기가 그만두면 뒀지, 팀에서 쫓겨났다고 일부러 공을 안 좋게 던지고 그럴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45] 정확히는 마지막이 배신(강제 트레이드)당하는 것임을 알았더라면 아마 그 자리에서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을 것이라고 말했다.[46] 여담으로 이순철은 운전 중이던 김대현이 자고 있는 동안 의자를 젖혀줘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47] 1981년도 실업 롯데에 입단하기로 하면서 약속한 2,900만 원을 주지 않은 것을 말한다.[48] 삼성 선수로 뛰던 1990년에 당시 롯데 최대 신인이었던 박동희를 상대하게 된다. 롯데 팬들이 영웅으로 여기던 투수와 기대하는 최유망주가 붙은 셈. 결과는 최동원이 김민호 등에게 홈런을 얻어맞으며 패로 기록된다.[49] 원문 기사의 부분부분을 인용한 내용으로 보다 상세하게 원문을 보고픈 사람들은 기사를 참조하기 바라며, 저작권상 문제가 있다면 해당 부분은 기사 링크만 시키고 내용 삭제해줄 것을 바람.[50] 이점은 삼성에서도 연봉협상 당시 똑같이 분쟁을 일으킨 장효조김시진도 동일하다.특히 장효조도 최동원과 마찬가지로 88년 시즌 시작전 연봉협상으로 분쟁을 일으켰기 때문이다.그나마 장효조는 합의에 성공하여 시즌을 날려먹진 않았다.[51] 보면 알겠지만 민주당계 정당인데 파란색 계통을 썼다. 사실 꼬마민주당이나 그 이후의 새정치국민회의 시절 파란색 계통도 민주계의 보조색이었다. 이 컬러는 2013년까지 사장되었다가 부활하여 현재의 더불어민주당의 주 컬러가 된다.[52] 출처는 최동원의 선거 포스터로 비록 최동원 본인의 주장이기는 하지만 공식 선전물에 직접 언급한것으로 보아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53] 여담으로 이때 같이 민주당에 같이 가입했던 사람이 김을동이다.[54] 56년 선거는 낙선했고 가택연금을 당한 전두환 정권때는 출마가 불가능했다.[55] 김영삼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 거대여당의 대표라고 했지만 사실상 김영삼을 직접 지목한 것이다.[56] 방송사의 어떤 프로그램에 박경림과 같이 출연했었는데 최동원의 현역시절 모습이 자료화면으로 나오자 박경림은 해설자로만 알았지 실제 한국 프로야구 선수로 뛰었는 줄은 몰랐다면서 놀라 하는 모습이 나온 적 있었다.[57] KBS 스포츠 해설위원으로 있었는데 홈런이 나올 때마다 너머너머너머너머...너머가써요오!!가 주특기였다.당시 최악의 성적을 찍던 롯데 경기를 중계할 때 목소리가 가라앉는 모습을 보여주기도...(...)[58] 김인식 감독이 WBC 대표팀을 이끌고 경기를 치르던 도중에 국제전화 걸어서 "감독님, 물건 하나 왔습니다."라고 말하였고, 이후 시범경기에서의 부진으로 개막 로스터에 오르지 못한 류현진을 다시금 강력하게 추천하여 로스터에 포함되도록 힘썼다. 최동원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류현진은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59] 하지만 후에 작고한 뒤에 양상문이 했던 말로 보아 선수 시절에는 최동원이 이것저것 잘 챙겨줬으며, 장례식장에도 양상문이 두 번이나 참가한 것 등을 볼 때 그와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다만 롯데와의 관계가...[60] 당시 2년 연속 우승팀이었고 그 해에는 준우승을 했고 2009년 9월 아시아 연승기록인 19연승을 찍을 정도로 강팀이었다.[61] 실제로는 대장암이었다.[62]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당시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암으로 투병 중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오지 못했던 것.[63] 이 때부터의 혹사로 한때 팔로 수저들고 식사하기도 불편한 어깨를 가지게 되었던 그의 비참하던 몸상태에 대한 언급이 없다. 롯데와의 최후가 그렇지 않았다면 몸이 다시 그렇게 된다 해도 다시 그렇게 던졌을 거라는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64] 그러나 최동원의 병세가 악화될까 장효조의 부고는 알리지 않았다. 불세출의 스타들끼리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통했던 듯... 참고로 당시 보복성 트레이드로 유니폼을 갈아입은 선수 또한 장효조였다. 자신의 팀을 위해 살가죽이 까질 정도로 노력하던 타격왕이였음을 생각하면 정말 아이러니한 경우.[65] 이 날은 1984년 최동원이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완봉승을 거둔 날이기도 하다.[66] 사실 최동원에 대한 대응이 늦어진 것은 당시 구단주 대행이던 신동인이 평소 최동원과의 사이가 굉장히 좋지 않았다는 점도 한몫했다. 최동원의 빈소에 롯데 직원들이 가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신동인이 "거길 왜 가느냐" 며 압력을 넣었다고 한다(...) 사실 최동원과 롯런트의 관계는 매우 안좋았는데, 최동원의 아버님(참전용사로 다리를 잃으셨다.)에게 다리가 잘렸다며 고깃덩어리라는 매우 모욕적인 발언을 했다. 거기다 상술하다 싶이 연봉협상도 매우 지지부진했고 이대호나 마해영 같은 레전드도 이런 사건으로 다른팀으로 이전하게 된다. 오죽했으면 타격 7관왕인 이대호가 "내가 이만큼하고 연봉이 겨우 7천만원 오르면 후배들은 뭐로 먹고 사느냐"라고 말하고 일본으로 갔을 정도. 사실상 고향, 부산에서 야구를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참아온것이지 롯데가 좋아서 야구를 한게 아니였다는 말이었다. 사실 롯런트가 프랜차이즈 스타 푸대접하는 것은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유명하다. 애초에 이쪽이 원조. 말을 막 하기로 유명한 치바 롯데 마린즈의 프랜차이즈 스타 카쿠나카 카츠야는 타격왕을 차지한 다음 해에 연봉이 1억 엔을 돌파했는데 그것에 대한 인터뷰 자리에서 솔직히 다른 팀이었으면 연봉 2억엔 정도는 줬겠지만 롯데니까 뭐... 라고 대놓고 프런트를 깠다.[67] 최동원의 영구결번판은 당초 외야 펜스에 설치됐다가 2015년 전광판 좌측 기둥 밑에 옛 롯데 유니폼 컬러인 하늘색 바탕에 붉은색 등번호로 디자인돼 다시 설치됐다.[68]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쥐고 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손에 잡힌 것을 들고 있었다고 한다.[69] 다소 의외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데뷔시즌 시범경기에서 죽쒔던 류현진이 붙박이 선발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당시 한화 이글스의 투수코치였던 최동원이 류현진은 무조건 선발로 써야 한다고 강하게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최동원이 아니었다면 류현진 또한 비슷한 시기에 지명되어 노예로 굴려지다가 망가진 다른 유망주들과 같은 운명을 맞았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칰갤에서 조화를 보내는 것은 전혀 이상하거나 의외인 일이 아니다.[70] 일설에서는 롯데 팬의 절반은 최동원이 만들어 준거라고 할 정도다.[71] 선입견이 없도록 최동원이 어떤 선수였는지 사전 설명 없이 동영상을 보여줬다고 한다. 다만 레다메스 리즈는 동료인 임찬규에게 "이 분이 나의 영웅이었다"라고 살짝 귀띔받았다고.[72] 문재인이 경남중-경남고 6년 선배인 셈이다.[73] 자세히 보면, 처음 최동원의 투구 자세를 재연하는 장면에서 공을 던졌는데 글러브 안에 공이 있다거나 우완투수였던 재연배우가 좌완으로 바뀌어있는 등(이 경우는 재다른 영상일 가능성도 있다.) 눈에 거슬리는 장면이 있다. 마지막 최동원의 대사. "승부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라운드에 들어와서 야구복을 입고 자기의 모든 것을 즐거워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게임한다 그러면 그보다 더 보람된 것이 없을 것 같아요. 저는 그것을 여러분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습니다."[74] 과거 노리타 전적이 있어서 까이긴 하지만, 원래 이 사람은 최동원을 존경했었다고 한다. 그 증거가 바로 자신의 아들 이름을 동원이라고 지은 것이다. 매년 기일에 참석하는 것은 덤.[75] 정확히는 20111111일 밤 11시에 MBC는 11번 채널이다. 등번호 11번의 최동원을 기념하기 위한 너무나도 완벽한 숫자의 조합.[76] 그러나 그시간에 부산MBC에서는 자체방송을 하였다.[77] 다른 것은 몰라도 MBC의 1980년대 KBO 리그 영상자료 보유량은 타 방송사가 넘볼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다. 왜냐하면 그 당시 회사 산하에 MBC 청룡이라는 프로야구단을 운영하고 있었고 매주 화요일이나 수요일 저녁 시간대에 지상파 프로야구 생중계를 반고정 편성할 정도로 야구를 자주 보여줬다. 각 구장의 경기 영상을 종합해서 보여주던 프로야구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을 시작한 것도 MBC가 먼저였다. 그래서 영상자료가 많다. 이 때문에 유독 MBC에서 옛날 야구 영상을 쉽게 볼 수 있다. 다만 그 방대한 영상자료를 인터넷 다시보기로 제공하지 않는다는 게 단점.[78] 이 부분은 일반 의학으로 의문점이 남지만 한의학에서는 어느 정도 진단이 가능하기도 하다. 예를 들자면 체질상 고기가 맞고 해산물/야채가 잘 안 맞는데, 육식을 금하고 해산물 혹은 야채만 먹는다면 몸에 문제가 올 수 있다는 논리.[79] 야구를 배우긴 했지만, 너무 늦게 시작한 탓인지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그만뒀다고 한다. 이후로는 일본 도쿄의 데이쿄 대학교(帝京大学) 경영학과에서 스포츠 경영과 마케팅을 공부하고 있는 중이라고[80] 최동원이 불법 시술에 동조한 것이 아니라, 암 투병 중인 상태에서 시술을 받기 위해 캠프에 참여한 것. 참고로 캠프에 참여하면 9박 10일동안 매일같이 소금물 관장만 한다. 여담으로 SBS에서 방영된 궁금한 이야기 Y에서도 해당 소금물 관장에 관한 내용을 다루며 최동원의 자료를 인용하였다. 실제로 방영된 영상의 최동원을 보면 롯데팬들 입장에서는 씁쓸함이 절로 밀려올 정도다.[81] 투구 전 송진가루, 신발끈, 겉양말, 안경, 모자챙을 차례로 만지고 공을 던지는 버릇[82] 1983년 장명부의 30승 다음으로 한국프로야구 단일시즌 최다승 2위 기록이다.[83] 이는 2018년 현재까지 단일시즌 최다 탈삼진 기록이다.[84] 출루율 1.000 + 장타율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