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6 15:37:56

김경환(야구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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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1983년 1984년 1985년 198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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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의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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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47번
김력
(1992)
<colbgcolor=#000><colcolor=#fff> 김경환
(1993~1997)
김진수
(1998~2003)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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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金敬煥
출생 1970년 7월 11일 ([age(1970-07-11)]세)
국적
[[대한민국|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경상남도 마산시
학력 성호초등학교 - 마산중학교 - 마산고등학교 - 경성대학교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93년 1차 지명 (롯데)
소속팀 롯데 자이언츠 (1993~1997)
지도자 마산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김해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008~2019)
경남야구AC 감독
가족 배우자, 아들 김기탁
1. 개요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2.2. 롯데 자이언츠
3. 지도자 경력4. 여담5. 연도별 주요 성적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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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산의 최동원이라 불리웠던 사나이. 프로에서도 큰 기대를 모았지만 아마 시절 혹사 후유증으로 빛을 보지 못한 불운의 아이콘. 가장 큰 무대인 한국시리즈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장렬한 불꽃을 내뿜고 산화한 선수.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성호초, 마산중, 마산고를 을 거친 후 고등학교 시절부터 묵직한 패스트볼과 위력적인 커브를 뿌리며 마치 최동원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다는 소리를 들었고, '마산의 최동원'이라는 별명도 그때 따라왔다. 경성대 진학 후에는 후배 신재웅과 원투펀치를 결성해 경쟁팀들을 죄다 관광을 보내버리는데 이 당시 김경환은 140km 중후반대의 패스트볼과 종으로 떨어지는 파워커브, 횡으로 휘어나가는 슬로우커브를 주무기로 삼았다. 구위는 그야말로 언터쳐블 수준. 특히 커브만큼은 전성기 때 커브의 달인이라고 불리운 김상엽김원형과 비교되는 수준으로 나중에 프로에서 잠깐 활약했을 때 프로 선수들조차 제대로 공략하지 못하는 레벨임을 입증했다.

이 당시 김경환에 대한 기대치가 어느 정도였냐면 국가대표 시절 일본프로야구 쪽에서도 관심을 보였고 당시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었던 김성근'너무 탐나는 선수'라는 말로 극찬을 했을 정도.[1] 졸업반 때 당연히 롯데의 1차 지명을 받았으며, 심지어 그 마해영이 김경환 때문에 1차지명을 받지 못하고 2차지명으로 밀렸을 정도였다.

계약금 9,000만원에 연봉 1,200만원, 총액 1억 200만원으로 박동희 이후 롯데 역사상 두 번째로 억대 몸값을 받고 입단했다. 이 당시 롯데가 김경환이 대학교 4학년 시절 어깨 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1차지명을 강행하고 억대의 몸값을 안겨준 것. 그만큼 김경환에 대한 기대치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하는 사례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해 연봉 포함 억대 계약금을 받은 선수가 네명 인데 이상훈, 구대성, 김홍집 그리고 김경환이었다.

2.2. 롯데 자이언츠

신인임에도 선발투수로 낙점받고 시즌을 준비했다. 전해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기 때문에 다소 여유가 있었던 팀 분위기 탓도 있었겠지만, 김경환에 대한 기대치를 입증해주는 또 하나의 사례이기도 했다. 프로 첫 해 신인이었음에도 10승 이상을 기대할 수 있다는 소리를 들었을 정도였으니…. 그러나 아마 시절부터 말썽이었던 어깨 통증에 일찌감치 발목이 잡혀버렸다. 시범경기에서 어깨 통증을 호소하며 전열에서 이탈했으며 진단 결과 어깨가 생각보다 많이 손상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결국 그 해 6월 어깨 수술을 받지만 예후가 좋지 않았던지 좀체로 회복하지 못하고 이듬해인 1994년 6월 다시 재수술을 받았다. 재활 기간동안 군 문제를 해결하고자 방위복무를 함께 병행했다.

결국 입단하고 2년 반이나 지난 1995년 후반기에야 가까스로 데뷔전을 치를 수 있었다. 데뷔전은 8월 10일 마산 해태전에서 구원등판하여 1이닝 퍼펙트를 기록. 그러나 아마 시절의 구위는 많이 잃어버린 상태였으며, 실제로 정규리그 종료때까지 선발등판 1경기 포함 총 9경기에 등판해서 1승 1패 5.89의 평균자책점이라는 평범한 성적을 기록했다. 투수의 어깨 부상은 팔꿈치 부상과는 달리 지금도 예후가 좋지 못한 부상이다. 최근의 사례로 봐도 손민한이 은퇴 위기에서 4년의 공백을 겪은 뒤 가까스로 재기에 성공했고, 전병두는 5년이 넘는 재활로도 결국 재기하지 못하고 은퇴를 해야만 했다. 조정훈 또한 6년 동안 재활을 반복하다가 2017시즌에야 복귀했고 결국 얼마 뛰지도 못하고 은퇴했다. 지금도 이런 상황인데 하물며 90년대 중반의 어깨 부상은 어떠했을지 짐작이 갈 따름.[2]

김경환의 진가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여준 것은 포스트시즌이었다.[3] LG 트윈스와의 플레이오프에서 비록 한 차례 패전을 기록하긴 했지만 2.08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는 호투로 조금씩 예열을 하더니 한국시리즈에선 정규리그 1위팀 OB 베어스를 상대로 2승에 평균자책점 제로라는 엄청난 활약을 뽐냈다.

역동적인 투구폼과 날카롭게 제구가 되는 패스트볼, 각도 큰 폭포수 커브에 OB 베어스 타자들은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졌다. 당시 한국시리즈에서 김경환의 피칭을 직접 보거나 중계로 시청한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저건 못 친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1승 2패로 뒤진 상태에서 김경환이 4, 5차전에서 연달아 승리투수가 되는 맹활약으로 롯데는 시리즈 스코어 3승 2패로 앞서나갔다.

김경환 본인은 그때도 어깨에 통증이 있었지만 코칭스태프보다 본인이 등판에 더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김경환이라는 존재를 한번만이라도 팬들에게 각인하고 싶었다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무대에서 자신을 택해준 김용희 감독에게 보답하는 승리를 거둘 수 있어서 매우 기뻤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러나 1승만 추가하면 통산 세 번째 우승을 달성할 수 있었던 롯데는 6차전을 완패한데 이어 7차전마저도 선발투수 윤학길의 부진과 박정태의 실책으로 내주며 한 끗 차로 우승에 실패하고 말았다. 김경환은 최종 7차전에서도 6회부터 등판해 경기 종료때까지 무실점으로 막아냈지만 팀의 패배를 지켜봐야만 했다.

결과론이긴 하지만 만약 이 때 롯데가 한 경기만 더 잡아 한국시리즈 우승을 했다면 한국시리즈 MVP는 김경환의 몫이었기에 더 많은 팬들이 좀 더 오랫동안 기억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깝게 준우승에 머물렀고 그나마도 훗날 1999시즌의 극적인 플레이오프의 임팩트 때문에 이 당시 김경환의 불꽃 투혼은 철저히 묻혀버리고 말았다.[4]

어쨌든 한국시리즈의 맹활약 덕택에 박동희 이후의 마무리투수를 찾아야 했던 팀은 반색했고 본인도 부쩍 자신감이 붙었다. 1996년은 일찌감치 팀의 마무리투수로 낙점받고 다른 투수들보다 더 일찍 동계훈련에 매진했지만, 불행히도 시즌을 시작하기도 전에 다시 어깨 통증이 찾아와 전열에서 이탈했다.[5][6]

재활로도 좀체로 어깨 상태가 회복되지 않자 선수생명을 걸고 1996년 9월 미국으로 건너가 프랭크 조브 박사에게 세 번째로 어깨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2년에 걸친 재활에도 불구하고 패스트볼의 최고구속이 130Km대에 머무르는 등 구위가 좀체로 살아나지 않았고, 결국 1998 시즌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본인이 구단에 자퇴서를 제출한 뒤 퇴단하여 선수생활을 마쳤다. 당시 김용희 감독을 비롯해 주변에서 많이 말렸지만 본인의 의지가 확고했다고.

아마시절 최고의 투수는 그렇게 프로에서 단 한 번, 최고의 무대에서 반짝한 뒤 조용하게 선수생활을 마감하게 되었다. 김경환이 퇴단을 결심하기 이전부터 롯데 구단에서는 김경환의 재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출하지 않고 끝까지 김경환의 재활을 도왔다고 한다.

3. 지도자 경력

잠시 모교인 마산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지냈으며 2008년부터 2019년 중반까지 김해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재직했다. 김해고 야구부는 창단 이후 한동안 뛸 선수조차 없어서 고교야구에선 동네북 취급을 받았는데, 김경환 감독 부임 후 차근차근 전력을 끌어올렸고 그 결실로 2020년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우승을 이끌어 냈다. 참고로 팀의 좌완투수 김태현이 2016년 NC 다이노스로부터 1차지명을 받아 김경환 감독이 지도한 선수 중 최초로 프로 1차지명을 받은 선수가 되었다.

2021년에 13세 이하 스포츠클럽 팀인 경남야구AC의 감독을 맡았다.

4. 여담

  • 지금도 사인을 해 줄때면 프로 시절 소속팀과 배번인 'LOTTE 47'을 함께 써 준다고 한다. 본인에게 큰 좌절을 안겨준 프로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별개로 아직까지 롯데에 대해선 애정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 만약 1995년 한국시리즈에서 롯데가 우승했다면 MVP가 유력했다. 6차전까지 2구원승에 평균자책점 제로였고 최종 7차전도 6회부터 등판해 끝까지 무실점으로 막았기 때문에, 만약 롯데가 9회초에 잡은 찬스를 살려 역전승을 거뒀다면 3승째를 거뒀을테니 시리즈 MVP로는 충분했다. 여담이지만 김경환 또한 이 한국시리즈 이후 어깨 부상이 재발해 결국 한 경기도 뛰지 못하고 은퇴를 했기 때문에, 만약 이 해 롯데가 우승해서 V3를 달성했다면 매 우승마다 에이스 투수 하나씩을 제물로 바친 셈이 되므로, 아마 지금까지도 롯데의 빼도박도 못하는 우승 징크스가 되었을 확률이 높다.

5.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rowcolor=#373a3c>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1993 롯데 1군 기록 없음
1994
1995 9 18⅓ 1 1 0 0.500 5.89 19 2 6 16 12 12
1996 1군 기록 없음
1997
KBO 통산
(1시즌)
9 18⅓ 1 1 0 0.500 5.89 19 2 6 16 12 12
플레이오프 역대 기록
<rowcolor=#373a3c>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1995 롯데 3 4⅓ 0 1 0 0.000 2.08 5 0 3 3 1 1
한국시리즈 역대 기록
<rowcolor=#373a3c>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1995 롯데 3 7⅓ 2 0 0 1.000 0.00 2 0 3 5 0 0

6. 관련 문서


[1] 김성근 뿐 아니라 훗날 롯데 감독이 되는 김명성을 비롯해 다른 코치들로부터도 김경환의 구위라면 일본에서도 통하는 수준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고 한다.[2] 김경환과 같은 해에 프로로 들어온 이대진이 어깨부상을 당한 뒤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감안하면 더욱 그러하다.[3] 당시 김용희 감독과 코칭스태프가 포스트시즌 엔트리를 구성하면서 투수쪽의 마지막 한 자리를 놓고 윤형배와 김경환 중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고심 끝에 김경환을 택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선택은 신의 한수가 되었다.[4] 강상수처럼 죽도록 욕을 먹어도 나름 오랫동안 활약하거나, 가득염처럼 가늘고 길게라도 선수생활을 했으면 모르겠지만, 김경환은 단 한 시즌도 제대로 풀타임으로 활약한 적이 없고 그나마 반짝했던 포스트시즌조차도 준우승에 그치는 바람에 어지간한 골수 부산아재들마저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당장 이 위키만 해도 1995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포함된 투수 중에서 가장 늦게 만들어졌다(…).[5] 앞서 언급했듯이 전해 한국시리즈에서 맹활약을 하면서도 어깨에 통증이 있었다는 것으로 봐서는 재활이 충분하게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서둘러 복귀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십중팔구는 다시 부상이 찾아온다. 김경환 이후에도 주형광이 그랬고 손민한 또한 그러했다.[6] 김경환이 낙마한 마무리투수 자리는 이 해 입단한 신인 차명주에게 돌아갔다.[7] 이후 파주 챌린저스에 입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