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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두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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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한국시리즈 우승 후 MVP에 선정되었을 때 모습
이름 유두열 (柳斗烈 / Doo-Yul Ryu)
본관 문화 류씨 32세손
생몰연도 1956년 10월 29일~2016년 9월 1일
출신지 경상남도 창원시
학력 마산월포초 - 마산동중 - 마산상고
포지션 외야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3년 롯데 자이언츠 1차 8순위
소속팀 롯데 자이언츠 (1983~1992)
지도자 경력 롯데 자이언츠 타격코치
한화 이글스 타격코치 (2003~2004)
서울고등학교 타격코치
김해고등학교 코치 (2007~2008)
설악고등학교 코치 (2009)
충훈고등학교 인스트럭터 (2012)
청주고등학교 코치 (2014)
가족관계 차남 유재신(KIA 타이거즈)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84
1984년 한국시리즈 MVP
김봉연(해태 타이거즈) 유두열(롯데 자이언츠) 한국시리즈 무산[1]
1. 소개2. 데뷔 전3. 선수 시절4. 지도자 시절5. 성씨6. 투병, 그리고 별세7. 기타
"쳤습니다! 좌측! 높게 날아갑니다! 높게 갑니다! 넘어가느냐? 홈런이냐? 홈~ 런~!!!! 유두열~!! 쓰리런 홈런~!! 유두열의 쓰리런 홈런~!! 아! 극적인 유두열의 쓰리런 홈런입니다!!"
ㅡ 故 김용 1984년 한국 시리즈 7차전 당시 MBC 캐스터[2]

1. 소개

롯데 자이언츠 선수. 포지션은 외야수. 선수시절 등번호는 33번. 아들 유재신KIA 타이거즈에서 선수생활을 하고 있다. 1984년 한국시리즈 7차전 역전 쓰리런 홈런의 주인공으로 유명하다.

2. 데뷔 전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다. 그 시작한 동기가 재미있다. 유두열의 형이 초등학교 시절 야구부였는데 그가 야구를 하는 모습을 보고 형이 야구를 잘 못하는 것 같아 어머니한테 답답해서 내가 친다 “내는 행님 맨쿠로 후보 슨수는 안 할 끼다.(나는 형처럼 후보 선수는 안 할 거다.)”고 졸라 야구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형은 그 뒤로 초등학교 마치고 야구를 그만뒀지만 그는 야구선수를 계속하면서 아마추어 시절에는 최고의 타자로 명성을 날렸다. 그러나 마산상고가 대회 4강에 들지 못하면서, 당시 대학교 체육 특기생 선발의 조건이었던 4강이상의 성적을 올리지 못하게 되자, 그는 대학진학 대신 실업야구로 진로를 선택한다.

3. 선수 시절

마산상고를 졸업하고, 프로야구 출범 전에는 실업야구 한국전력공사 야구단에서 선수생활을 했다. 실업야구 시절에는 1979년부터 국가대표에 선발되고, 1980년 실업야구 MVP에 선정될 정도로 타격 실력을 인정받았다. 최동원 등과 함께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의 출전멤버 일원이었으며, 그해 한국팀은 우승의 기쁨을 맛본다.

다만 이때의 출전 문제로 프로입단이 1년 유보되었다. 1983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할 때에도 당시 A급 선수에 해당하는 계약금 1700만원 연봉 1800만 원을 받으며 기대를 모았다. 당시 부산의 고급 아파트 가격이 3000만원하던 시절이었으니 꽤 많은 연봉을 받고 시작한 셈. 그러나 이는 연봉 2000은 보장해준다는 입단 당시 롯데 구단과의 말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었고, 이 문제로 그는 롯데 구단과 다음해 연봉협상에서 진통을 겪게 된다. 데뷔시즌부터 기대에 부응하여 타율 3할7리 (전체 5위), 9홈런, 36타점으로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그 해 롯데 자이언츠의 팀 성적이 최하위에 그치면서, 그는 첫해부터 연봉협상에 난항을 겪게 되었고 구단과의 자존심 싸움 끝에 겨우 22.5%의 인상안에 도장을 찍게 되었다. 1984 시즌에는 그 여파로 89경기 타율 .229로 추락. 심한 부진에 빠졌다. 1984년 한국시리즈 내내 그는 결정적인 찬스에서 병살타를 기록하는 등 부진하였다. 7차전의 그 유명한 8회초 타석 전까지 그의 한국시리즈 기록은 고작 20타수 2안타, 즉 정확히 타율 1할에 불과했다.[3][4]

유두열이 7차전 8회 타석에 들어섰을 당시, 롯데는 1사 이후 김용희김용철이 연속 안타로 출루하면서 1사 1, 3루라는 절호의 찬스를 잡게 된다. 이때쯤 삼성의 김일융 역시 연투로 지쳐 있었고, 최동원보다 안타를 더 많이 맞은 상황이었기에 몇번이나 덕아웃을 쳐다보며 구원 요청을 한다. 김영덕 감독은 구원투수로 황규봉을 내보낼지 망설였지만, 한국시리즈 타율이 1할에 불과한 유두열 정도는 김일융이 지쳐있어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듯 그대로 진행한다.[5]


희생플라이만 맞더라도 동점이 되는 상황, 초구는 벗어난 공에 방망이가 나가다가 멈춘 게 노스윙 판정으로 볼이 된 후 다음 공은 스트라이크 존으로 들어오면서 볼카운트 원스트라이크 원볼에서 김일융은 패스트볼로 승부했고, 유두열은 병살만은 치지 않겠다는 각오로 그 공을 풀스윙한다. 그런데... 그 타구는 좌측담장을 넘기는 역전 쓰리런 홈런이 되고, 이로써 1984년 한국시리즈의 승부는 결정되고 만다. 그리고 한국시리즈의 승부를 결정지은 이 한방으로, 유두열은 한국시리즈 MVP에 오르게 된다.

선수 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맞는 순간 담장을 넘기는 것은 확실했으나 몸쪽공을 강하게 당겼기 때문에 파울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고. 그런데 공은 폴대안으로 넘어갔다.

이날 유두열의 홈런에 관하여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7차전에 유두열은 원래 5번이 아닌 6번으로 내려고 했었으나 기록원의 실수로 5번으로 적혔다. 원래 5번타순에는 박용성을 기용할 계획이었다. 기록원이 다시 라인업을 적을려고 했으나 강병철 감독은 그냥 그대로 놔두라고 했다고... 그리고 이 타순 변경이 한국 시리즈 우승의 향방을 결정짓게 되었다. 훗날 강병철 감독은 "왠지 그냥 바꾸고 싶지가 않았다" 라고 말했다. 또한 유두열의 타순이 돌아오자 강병철 감독은 스퀴즈를 대비하라는 지시를 하였는데, 3구가 되도록 싸인이 오지 않자 냅다 휘둘렀는데, 처음에는 파울홈런인 것 같이 느껴졌는데 진짜 홈런이 되었다는 유두열의 회고도 있다. 이 때 강병철 감독은 유두열에게 스퀴즈를 준비하라고 했더니 자신없는 표정이라 치게 하는 게 더 낫겠다고 여겨 내버려뒀다고 회상했다.

물론 1984년의 한국시리즈는 최동원의 혼신의 역투를 빼놓고 논할 수 없기에, 유두열의 MVP수상은 인생 한방인거냐며 다소 논란을 일으키긴 했지만, 그의 역전 홈런이 준 임팩트는 엄청나게 큰 것이었기에 당시로서는 그럭저럭 납득이 되는 분위기였다. 게다가 그의 역전 홈런이 없었다면, 최동원은 승리투수가 못 되었을 것이고. 지금처럼 한국시리즈 각 경기별로 MVP를 선정하는 제도가 없었던 점도 고려할 만 했다.

비슷한 사례로는 1982년 한국시리즈김유동 사례가 있었고, 이후에도 마치 이때의 데자뷰와 같은 상황이 2009년 한국시리즈에서도 발생하게 된다. 그리고 9년 후에 재연된다. 물론 최동원은 당시 시즌 MVP를 받았기에 논란 또한 그리 크지 않았다.[6] 기록만으로 따진다면 타자 최초로 타율, 홈런, 타점의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였던 이만수가 MVP를, 최동원은 한국시리즈 MVP가 더 적합하게 보였겠지만, 당시 삼성이 이만수의 기록을 위해 타격 2위인 홍문종(하필 롯데 선수다)을 8연타석 연속 사사구로 출루시켜 빛이 바래면서 이만수의 MVP 수상은 무산되었다.[7] 유두열 또한 당시를 회고하는 인터뷰 기회 때마다 "한국시리즈 우승은 최동원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최동원에게 공을 돌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1984년의 홈런이 워낙 뇌리에 박혀 있어서 그를 장타자 이미지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만, 본래 장타자의 이미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이는 정규시즌 기준으로 최고의 해를 기록했던 1985년의 홈런이 13개인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간혹 내보이는 일발 장타가 일품이긴 했어도 데뷔시즌 이후에는 한 번도 3할 타율은 기록하지 못했고, 시즌 최다 홈런이 13개였다는 점은 이후 공필성선수와 무척 유사하다. 그는 1985시즌에 홈런뿐만 아니라 안타 수에서도 팀내 최고를 기록하며 팀 타선을 이끌었다. 이후에도 1980년대 계속 출전하며 롯데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사랑받았다. 근데 그시절 13개면 지금의 25개 이상에 해당된다는 게 함정

4. 지도자 시절

1991시즌을 마친 뒤 은퇴하였다. 이후에는 롯데 자이언츠, 한화 이글스의 코치를 역임했고, 김해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및 설악고등학교 야구부 타격코치와 충훈고등학교 야구부 인스트럭터를 거쳤다.

5. 성씨

참고로 실제 성은 ''씨(버들 류)라고 한다. 그래서 원래는 류씨로 하는게 맞지만 우리나라 행정상 공문서에 류씨를 유씨로 기록하던 관례로 학교다닐 때부터 성인된 이후까지 유씨로 계속 등록되어 와서 본인도 그냥 유씨로 살았다고 한다.[8]

6. 투병, 그리고 별세

2014년 11월쯤에 아들 유재신의 인터뷰에 의하면, 2014년 중순부터 으로 투병 중이라고 한다. 팬들은 쾌유를 바라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가족여행 떠나는 유재신 "아버지 사랑합니다"

이후 1년 가까이 새로 이사한 김포 집에서 칩거하다가 박정태 前 롯데 2군 감독의 전화를 받고 자신의 병명을 밝히게 되었다. 병명은 신장암. 롯데에 첫 우승 안긴 유두열, 신장암 투병. 2014년 9월에 진단을 받았을 때 이미 온몸에 암세포가 퍼진 상태였다고 한다.

이후 2016년 8월 중순 박정태 전 코치가 SNS를 통해 병세가 위중하다고 전했고, 9월 1일 국제신문의 부고란에 별세 기사가 올라왔다. 이 때가 향년 59세. # 결국 4월 5일 롯데의 홈 개막전 시구가 팬들의 눈에 비친 마지막 모습이었다. 롯데 자이언츠 팬들은 1984년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였던 최동원, 서말구에 이어 유두열까지 세상을 떠나자 슬픔을 참지 못했다.

유두열 선수의 부고가 전해진 날, KBS N SPORTS아이 러브 베이스볼에서 제작한 추모영상. 두 사람의 인터뷰를 통해 유두열-유재신 부자의 애틋한 가족애를 담았다. 영상에서 아들의 성공을 바라는 마음과 본인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담담하게 준비하는 유두열 선수의 모습이 보는 이를 안타깝게 했다. 결국 이 날 오효주 아나운서가 오프닝을 진행하면서 눈물을 보이기도 하였다.

7. 기타

  • 불암콩콩코믹스를 그린 최불암의 마구마구 레전드 코믹스에서는 최동원편에서 1984년 한국시리즈 7차전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여기서 유두열은 유두가 열개(...)인 타자로 나온다. ten nipples[9][10]
  • 1987년 배경인 영화 퍼펙트 게임에서는 배우 공정환[11]이 당시 롯데 주장이었던 유두열을 연기했다.
  • 1984년 롯데 자이언츠 우승 후에 찍은 빼빼로 광고에도 등장한다. 강병철 감독의 두열이, 빼빼로 먹고 내년에도 홈련을 쳐.가 압권.
  • 아들인 유재신이 2017시즌에 KIA 타이거즈로 트레이드 되고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어간 뒤 우승함으로써, 박철우, 박세혁 부자 이후 두번째로 우승반지를 가진 부자가 되었다.

[1] 당시 한국시리즈는 전반기 우승팀과 후반기 우승팀이 대결을 가졌으나, 1985년에는 삼성이 전후반기 통합 우승을 하며 한국시리즈가 열리지 않았다.[2] 故 김용 아나운서는 1941년에 태어났으며, 1962년에 KBS에 입사하여 아나운서 생활을 시작하여 활동하다가 1969년에 MBC로 자리를 옮겼다. 프로야구 초창기에 MBC 스포츠 프로야구 중계 전담 캐스터로 활동하였으며, 온갖 외래어가 난무하던 야구 용어를 우리말로 고쳐 부르기도 하였다. 이후 양진수, 고창근, 임주완, 송인득 아나운서의 등장으로 언제부터인가 프로야구 중계에 나오지 않았는데 2002년 모친의 병을 수발하던 중 뇌졸중으로 쓰러져 8년 여를 병상에서 지내다가 2010년에 별세하였다.[3] 그래서 모바일 야구게임 이사만루2 KBO에서 유두열 전용 스킬로 공포의 1할타자가 있다.[4] 그런데 그 2개뿐의 안타 가운데 하나가 7차전 당일, 그것도 그 유명한 8회 역전 홈런의 바로 전 타석에서 친 것이었다. 나름 타격 감각을 되찾고 있었다는 의미.[5] 결국 황규봉은 김일융이 유두열에게 역전 홈런을 맞은 직후에야 뒤늦게 교체 투입된다.[6] 1984년 시즌에 최동원은 27승으로 최다승을 올렸고, 비록 정식 시상은 아니었지만 탈삼진 1위도 기록했다. 한국시리즈에서의 활약을 빼고 보더라도 시즌 MVP로서의 후보 자격은 충분했던 셈.[7] 게다가 이만수는 바로 전 시즌인 1983년의 MVP 수상자이기도 했다.[8] 실제로 한국에는 많은 류씨들이 행정상 유씨로 살고 있다. 류현진의 경우에도 과거 데뷔 초 언론에서 '유현진'이라고 표기한 적이 많았다. 2007년 법이 개정되어 대법원이 호적예규 변경을 통해 두음 법칙을 적용하는 성(姓)에 예외를 둠에 따라 '류'씨로 정정신청을 할 수 있게 되어서 신청한 사람들이 있지만 실제로 신청할 때 아버지 호적까지 류씨로 바꿔야 하는 규정이 있어 행정상 복잡한 부분도 있고 하기에 대부분의 류씨들이 안 하는 걸로 알려져 있다. 류현진의 경우에는 이를 신청하여 이후 언론에서 유현진이 아닌 류현진으로 표기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세한 사항은 문서 내에 관계된 내용을 찾아 보면 알 수 있다. 이게 다 윗 동네 때문이다.[9] 실제로 그 당시 부산 지역에서 돌던 음담패설이기도 했다.[10] 좀 더 정확한 내용은 여자 다섯 명이 나란히 서 있으면 정답은 유두열이었다.[11] 투투 출신의 황혜영과 함께 2000년 프로젝트 록 밴드 "오락실"로 활동한 그 사람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