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19:33:09

유두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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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두열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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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리그 한국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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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M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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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33번
결번 유두열
(1983~1992)
강현철
(1993)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85번
결번 유두열
(1993~1999)
박계원
(2006~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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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유두열.jpg
유두열
柳斗烈|Yoo Doo-Yeol
출생 1956년 10월 29일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사망 2016년 9월 1일 (향년 59세)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마산월포초등학교 (졸업)
마산동중학교 (졸업)
마산상업고등학교 (졸업)
신체 186cm, 83kg
포지션 외야수, 지명타자1루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83년 1차 지명 (롯데)
소속팀 한국전력 야구단
롯데 자이언츠 (1983~1992)
지도자 롯데 자이언츠 1군 주루·수비코치 (1993~1997)
롯데 자이언츠 2군 타격코치 (1998)[1]
롯데 자이언츠 1군 타격코치 (1998~1999)[2]
한화 이글스 2군 타격코치 (2003~2004)
서울고등학교 야구부 타격코치
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2006)
김해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2007~2008)
설악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2009)
충훈고등학교 야구부 인스트럭터 (2012)
청주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2014)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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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문화 류씨[3]
가족 배우자 구은희
장남 유재준, 차남 유재신
}}}}}}}}} ||

1. 개요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2.2. 롯데 자이언츠 시절
3. 지도자 경력4. 연도별 주요 성적5. 투병, 그리고 별세6. 여담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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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쳤습니다! 좌측! 높게 날아갑니다! 높게 갑니다! 넘어가느냐? 홈런이냐? 홈~ 런~!!!! 유두열~!! 쓰리런 홈런~!! 유두열의 쓰리런 홈런~!! 아! 극적인 유두열의 쓰리런 홈런입니다!!"
1984년 한국시리즈 7차전 당시 MBC 김용 캐스터

대한민국의 前 야구인으로, 선수 시절 포지션은 1루수였다.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다. 그 시작한 동기가 재미있다. 유두열의 형이 초등학교 시절 야구부였는데 그가 야구를 하는 모습을 보고 형이 야구를 잘 못하는 것 같아 어머니한테 답답해서 내가 친다“내는 행님 맨쿠로 후보 슨수는 안 할 끼다.(나는 형처럼 후보 선수는 안 할 거다.)”라고 졸라 야구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형은 그 뒤로 초등학교 마치고 야구를 그만뒀지만 그는 야구선수를 계속하면서 아마추어 시절에는 최고의 타자로 명성을 날렸다. 그러나 마산상고가 대회 4강에 들지 못하면서, 당시 대학교 체육 특기생 선발의 조건이었던 4강이상의 성적을 올리지 못하게 되자, 그는 대학진학 대신 실업야구로 진로를 선택한다.

2.2. 롯데 자이언츠 시절

마산상고를 졸업하고, 프로야구 출범 전에는 실업야구 한국전력공사 야구단에서 선수생활을 했다. 실업야구 시절에는 1979년부터 국가대표에 선발되고, 1980년 실업야구 MVP에 선정될 정도로 타격 실력을 인정받았다. 최동원 등과 함께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의 출전멤버 일원이었으며, 그해 한국팀은 우승의 기쁨을 맛본다.

다만 이때의 출전 문제로 프로입단이 1년 유보되었다. 1983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할 때에도 당시 A급 선수에 해당하는 계약금 1700만원 연봉 1800만 원을 받으며 기대를 모았다. 당시 강남 아파트값이 2000만원 정도 이니 꽤 많은 연봉을 받고 시작한 셈. 그러나 이는 연봉 2000은 보장해준다는 입단 당시 롯데 구단과의 말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었고, 이 문제로 그는 롯데 구단과 다음해 연봉협상에서 진통을 겪게 된다. 데뷔시즌부터 기대에 부응하여 타율 3할7리 (전체 5위), 9홈런, 36타점으로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그 해 롯데 자이언츠의 팀 성적이 최하위에 그치면서, 그는 첫해부터 연봉협상에 난항을 겪게 되었고 구단과의 자존심 싸움 끝에 겨우 22.5%의 인상안에 도장을 찍게 되었다. 1984 시즌에는 그 여파로 89경기 타율 .229로 추락. 심한 부진에 빠졌다. 1984년 한국시리즈 내내 그는 매우 부진하였다. 7차전의 그 유명한 8회초 타석 전까지 그의 한국시리즈 기록은 고작 20타수 2안타, 즉 정확히 타율 1할에 불과했다.[4][5]

유두열이 7차전 8회 타석에 들어섰을 당시, 롯데는 1사 이후 김용희김용철이 연속 안타로 출루하면서 1사 1, 3루라는 절호의 찬스를 잡게 된다. 이때쯤 삼성의 김일융 역시 연투로 지쳐 있었고, 최동원보다 안타를 더 많이 맞은 상황이었기에 몇번이나 덕아웃을 쳐다보며 구원 요청을 한다. 김영덕 감독은 구원투수로 황규봉을 내보낼지 망설였지만, 한국시리즈 타율이 1할에 불과한 유두열 정도는 김일융이 지쳐있어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판단했는지 그대로 진행한다.[6]

희생플라이만 맞더라도 동점이 되는 상황, 초구는 벗어난 공에 방망이가 나가다가 멈춘 게 노스윙 판정으로 볼이 된 후 다음 공은 스트라이크 존으로 들어오면서 볼카운트 원스트라이크 원볼에서 김일융은 패스트볼로 승부했고, 유두열은 병살만은 치지 않겠다는 각오로 그 공을 풀스윙한다. 그런데...

그 타구는 좌측담장을 넘기는 역전 쓰리런 홈런이 되고, 이로써 1984년 한국시리즈의 승부는 결정되고 만다. 그리고 한국시리즈의 승부를 결정지은 이 한방으로, 유두열은 한국시리즈 MVP에 오르게 된다.

선수 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맞는 순간 담장을 넘기는 것은 확실했으나 몸쪽공을 강하게 당겼기 때문에 파울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고. 그런데 공은 폴대안으로 넘어갔다.

이날 유두열의 홈런에 관하여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7차전에 유두열은 원래 5번이 아닌 6번으로 내려고 했었으나 기록원의 실수로 5번으로 적혔다. 원래 5번타순에는 박용성을 기용할 계획이었다. 기록원이 다시 라인업을 적을려고 했으나 강병철 감독은 그냥 그대로 놔두라고 했다고... 그리고 이 타순 변경이 한국시리즈 우승의 향방을 결정짓게 되었다. 훗날 강병철 감독은 "왠지 그냥 바꾸고 싶지가 않았다" 라고 말했다. 또한 유두열의 타순이 돌아오자 강병철 감독은 스퀴즈를 대비하라는 지시를 하였는데, 3구가 되도록 싸인이 오지 않자 냅다 휘둘렀는데, 처음에는 파울홈런인 것 같이 느껴졌는데 진짜 홈런이 되었다는 유두열의 회고도 있다. 이 때 강병철 감독은 유두열에게 스퀴즈를 준비하라고 했더니 자신없는 표정이라 치게 하는 게 더 낫겠다고 여겨 내버려뒀다고 회상했다.

물론 1984년 한국시리즈최동원의 혼신의 역투를 빼놓고 논할 수 없기에, 유두열의 MVP수상은 인생 한방인거냐며 다소 논란을 일으키긴 했지만, 그의 역전 홈런이 준 임팩트는 엄청나게 큰 것이었기에 당시로서는 그럭저럭 납득이 되는 분위기였다. 게다가 그의 역전 홈런이 있었기에 최동원도 승리투수가 될 수 있었고, 지금처럼 한국시리즈 각 경기별로 MVP를 선정하는 제도가 없었던 점도 고려할 만 했다. 그리고 최동원은 당해 시즌 MVP를 수상했기에 유두열이 한국시리즈 MVP를 받은 것에 큰 불만을 가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비슷한 사례로는 1982년 한국시리즈김유동 사례가 있었고, 이후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이승엽이 같은 상황을 겪게 된다.[7] 그 뒤로도 마치 이때의 데자뷰와 같은 상황이 2009년 한국시리즈에서도 발생하게 된다. 그리고 9년 후에 재연된다.[8] 또한 2022년 한국시리즈에서도 5차전에서 김강민이 끝내기 3점 홈런을 쳤고, 이 홈런이 시리즈의 향방을 결정짓게 되어, 다시금 유두열의 결승 홈런이 오버랩되기도 했다.[9] 물론 최동원은 당시 시즌 MVP를 받았기에 논란 또한 그리 크지 않았다.[10] 기록만으로 따진다면 타자 최초로 타율, 홈런, 타점의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였던 이만수가 MVP를, 최동원은 한국시리즈 MVP가 더 적합하게 보였겠지만, 당시 삼성이 이만수의 기록을 위해 타격 2위인 롯데 홍문종을 8연타석 연속 사사구로 출루시켜 빛이 바래면서 이만수의 MVP 수상은 무산되었다.[11] 유두열 또한 당시를 회고하는 인터뷰 기회 때마다 "한국시리즈 우승은 최동원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최동원에게 공을 돌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1984년의 홈런이 워낙 뇌리에 박혀 있어서 그를 장타자 이미지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만, 본래 장타자의 이미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이는 정규시즌 기준으로 최고의 해를 기록했던 1985년의 홈런이 13개인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간혹 내보이는 일발 장타가 일품이긴 했어도 데뷔시즌 이후에는 한 번도 3할 타율은 기록하지 못했고, 시즌 최다 홈런이 13개였다는 점은 이후 공필성과 무척 유사하다. 그는 1985시즌에 홈런뿐만 아니라 안타 수에서도 팀내 최고를 기록하며 팀 타선을 이끌었다. 이후에도 1980년대 계속 출전하며 롯데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사랑받았다. 근데 그시절 13개면 지금의 25개 이상에 해당된다는 게 함정

3. 지도자 경력

1991시즌을 마친 뒤 은퇴하였다. 이후에는 롯데 자이언츠, 한화 이글스의 코치를 역임했고, 김해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및 설악고등학교 야구부 타격코치와 충훈고등학교 야구부 인스트럭터를 거쳤다.

4.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rowcolor=#ed1c24> 연도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삼진 출루율 장타율
1983 롯데 93 293 .307 90 18 0 9 36 34 7 37 35 .394 .461
1984 89 292 .229 67 8 3 11 32 42 9 26 38 .306 .390
1985 103 356 .287 102 23 4 13 50 61 15 25 38 .384 .483
1986 87 259 .239 62 9 1 4 29 30 4 34 17 .331 .328
1987 67 234 .299 70 15 2 4 22 24 6 22 17 .362 .432
1988 99 331 .281 93 9 2 7 38 46 9 31 22 .348 .384
1989 58 134 .187 25 6 1 1 11 10 1 16 19 .286 .269
1990 50 107 .206 22 7 0 2 14 21 3 24 14 .366 .327
1991 88 218 .261 57 7 1 7 36 30 2 21 20 .333 .399
<rowcolor=#373a3c> KBO 통산
(9시즌)
734 2224 .264 588 102 14 58 268 298 56 256 220 .350 .401

5. 투병, 그리고 별세

2014년 11월쯤에 아들 유재신의 인터뷰에 의하면, 2014년 중반부터 으로 투병 중이라고 한다. 팬들은 쾌유를 바라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가족여행 떠나는 유재신 "아버지 사랑합니다"

이후 1년 가까이 새로 이사한 김포 집에서 칩거하다가 박정태 前 롯데 2군 감독의 전화를 받고 자신의 병명을 밝히게 되었다. 병명은 신장암. 롯데에 첫 우승 안긴 유두열, 신장암 투병. 2014년 9월에 진단을 받았을 때 이미 온몸에 암세포가 퍼진 상태였다고 한다.

이후 2016년 8월 중순 박정태 전 코치가 SNS를 통해 병세가 위중하다고 전했고, 9월 1일[12] 국제신문의 부고란에 별세 기사가 올라왔다. 향년 59세. # 결국 4월 5일 롯데의 홈 개막전 시구가 팬들의 눈에 비친 마지막 모습이었다. 롯데 자이언츠 팬들은 1984년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였던 최동원, 서말구에 이어 유두열까지 세상을 떠나자 슬픔을 참지 못했다.

유두열 선수의 부고가 전해진 날, KBS N SPORTS아이 러브 베이스볼에서 제작한 추모영상. 두 사람의 인터뷰를 통해 유두열-유재신 부자의 애틋한 가족애를 담았다. 영상에서 아들의 성공을 바라는 마음과 본인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담담하게 준비하는 유두열의 모습이 보는 이를 안타깝게 했다. 결국 이날 오효주 아나운서가 오프닝을 진행하면서 눈물을 보이기도 하였다.

최훈은 최훈 카툰에서 박용택의 KBO 최초 5년 연속 150안타를 축하하면서 동시에 유두열의 명복을 빌었다. 공교롭게도 박용택의 등번호가 유두열의 현역 선수시절 등번호와 같은 33번이다. #

6. 여담

  • 생전의 등번호였던 33번은 아들 유재신이 물려받아 은퇴할 때까지 이어서 사용했다. 이후 유재신은 은퇴한 이후 처음에 두산에서 코치생활을 하다가 2024시즌부터 아버지가 뛰었던 롯데에서 코치 생활을 한다.

7. 관련 문서


[1] ~6월 14일[2] 6월 15일~[3] 32세손 ○열 항렬로 유희열과 같은 항렬이다. 두 아들은 33세손 재○ 항렬.[4] 그래서 모바일 야구게임 이사만루2 KBO에서 유두열 전용 스킬로 공포의 1할타자가 있다.[5] 그런데 그 2개뿐의 안타 가운데 하나가 7차전 당일, 그것도 그 유명한 8회 역전 홈런의 바로 전 타석에서 친 것이었다. 나름 타격 감각을 되찾고 있었다는 의미.[6] 결국 황규봉김일융이 유두열에게 역전 홈런을 맞은 직후에야 뒤늦게 교체 투입된다.[7]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의 동점 홈런 직전까지 이승엽은 유두열과 똑같이 20타수 2안타를 기록하고 있었다.[8]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2018년 한유섬(당시 한동민)의 홈런은 7차전이 아닌 6차전에서 나왔다. 그럼에도 한유섬의 홈런이 시리즈의 향방을 결정지었고, 이 홈런이 나오지 않았다면 7차전이 예측불허로 전개되었을 지도 모른다.[9] 이 홈런은 5차전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만일 이 홈런이 나오지 않았다면 키움 히어로즈의 승리로 끝날 뻔한 데다가, 시리즈 패권마저도 내줄 수 있었기 때문에 이 홈런이 사실상 시리즈 향방을 결정지었다고 봐야 한다. 또한 이 홈런으로 김강민한국시리즈 MVP를 차지하였다.[10] 1984년 시즌에 최동원은 27승으로 최다승을 올렸고, 비록 정식 시상은 아니었지만 탈삼진 1위도 기록했다. 한국시리즈에서의 활약을 빼고 보더라도 시즌 MVP로서의 후보 자격은 충분했던 셈. 또한 스탯티즈에 따르면 당해 시즌 WAR 1위는 이만수가 아니라 최동원이다. 그럼 뭐해. 당시에는 없었던 통계인데[11] 게다가 이만수는 바로 전 시즌인 1983년의 MVP 수상자였는데, 본인의 프로선수 시절 유일한 MVP 수상이었다. 이를 두고 이만수 본인도 1983년에는 받지 말아야 할 정규시즌 MVP를 받았고, 1984년에는 받아야 할 MVP를 못받았다고 아쉬움 섞인 회고를 했다.[12] 환갑을 두 달도 안 남긴 날이었다.[13] 실제로 그 당시 부산 지역에서 돌던 음담패설이기도 했다. 좀 더 정확한 내용은 "여자 두 명이 지나가면 '질투', 여자 다섯 명이 나란히 서 있으면 '유두열'"이었다.[14] 투투 출신의 황혜영과 함께 2000년 프로젝트 록 밴드 "오락실"로 활동한 그 사람 맞다.[15] 공교롭게도 이 두 부자 모두 아버지가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