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4-14 01:40:58

김용수

파일:나무위키+유도.png   대한민국의 과학기술정보통신부 2차관을 지낸 관료에 대한 내용은 김용수(공무원)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LG 트윈스 영구결번
파일:KBO_Retired_LG_41_svg.png 파일:KBO Retired LG 9.png
김용수 이병규


김용수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90 1994

파일:5p4rcEr.png KBO 한국시리즈
1990,1994 한국시리즈 MVP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80px-KBO_League.svg.png
1998 KBO 리그 다승왕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80px-KBO_League.svg.png
1998 KBO 리그 승률왕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80px-KBO_League.svg.png
1986,1987,1989 KBO 리그 구원왕

MBC 청룡 / LG 트윈스 등번호 41번
신계석(1983~1984) 김용수(1985~2000) 영구결번
}}} ||
파일:1994Kimyongsu.jpg
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의 순간
파일:external/5084a735f7e8e9c8a62247a211e59d851152dcd225ed9d7add7cbb029663d570.jpg
LG 트윈스 No.41
김용수(金龍洙 / Yong-Soo Kim)
생년월일 1960년 5월 2일
국적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대한민국
출신지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신체 173cm, 72kg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출신학교 홍릉초 - 동대문중 - 동대문상고 - 중앙대
프로입단 1983년 1차지명 (MBC 청룡)
소속팀 한일은행 야구단 (1983~1984)
MBC 청룡-LG 트윈스 (1985~2000)

1. 개요2. 선수 경력3. 지도자 경력
3.1. LG 트윈스 코치 1기 시절3.2. LG 트윈스 코치 2기 시절3.3. 투수코치로서의 논란3.4. 중앙대학교 감독 시절3.5. 여자 야구 국가대표팀 투수코치 시절
4. 해설가 경력5. 근황6. 연도별 주요 성적
6.1. 그가 남긴 기록

1. 개요

파일:no41.jpg
노송(老松)
LG 트윈스를 절대 지지않는 팀으로 만드는 것이 나의 할 일이다.
ㅡ 야구는 전설이다 LG 김용수 편 中

MBC 청룡, LG 트윈스의 투수. LG의 유일한 한국시리즈 MVP이자 통산 100승 - 200세이브의 기록 보유자로 LG 트윈스레전드.[1] 자신을 아끼지 않으며 한결같이 한 팀을 지켜 온 모습에서 따 온 노송이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명선수 출신이 지도자로 성공할 수 없다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 야구인.

MBC 청룡LG 트윈스의 역사를 잇는 산증인인 선수이기도하며 LG팬들이 자체적으로 구입해서 야구장에 입고 오는 청룡 유니폼에는 41번이 높은 확률로 마킹되어 있다.

2. 선수 경력

파일:MBCbluedragon41.png
청룡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한 푸른 소나무

동대문중학교 1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동대문상고중앙대학교를 졸업하고 실업 야구 팀인 한일은행을 거쳐 1985년 계약금 2,300만원에 MBC 청룡에 입단했다. 1984년에는 이상군, 선동열, 류중일 등과 함께 LA 올림픽에 참가했다.

LG 트윈스 최초의 영구 결번식을 가진 선수(41번)이며, 한국프로야구에서 최초의 200세이브-100승을 거둔 선수이기도 하다. 그의 41번은 자신이 당초 원했던 14번을 당시 같은 팀 선배 투수 이광권이 달고 있어서 뒤집은 것. 그런데 나중에 본인도 맘에 들었는지 이광권의 은퇴 이후에도 41번을 계속해서 달았다.[2]

투수 치고 상당히 작은 키[3]에 정확한 제구력을 갖춰 강속구보다 탄탄한 제구력을 바탕으로 한 선수라는 인상이 있지만, 데뷔 초기에는 직구와 슬라이더를 주 무기로 구사하는 강속구 계열의 투수였다. 흑마구를 던지는 선수는 아니었다고 전해진다. 주 무기는 데뷔 초기에는 슬라이더. 이후 청룡이 LG로 바뀐 1990년대 이후에는 포크볼을 추가로 구사했는데, 현재는 이 구종이 스플리터에 더 가깝다고 평가된다.

언제나 변함없는 모습이기에 별명은 "노송"이지만 이건 35세 이후에도 꾸준히 활약해서 붙은 별명. 데뷔 초기의 별명은 슬라이더가 날카롭다고 "면도날". LG가 잘나가던 시절에는 '제국의 파수꾼'이라는 별명도 잠시 있었다. 심지어 1998년에는 만 38세의 나이로 18승을 기록하면서 역대 최고령 다승왕에 등극했다.[4] 심지어는 은퇴한 후에도 40대 후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130km/h대의 공을 던진다는 소문이 있다.[5]

영구 결번식을 가진 선수지만, 은퇴식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은퇴식을 본인과 구단 모두 원하지 않았고, 은퇴 당시에는 선수 생 말활을 더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고 한다. 실제로 현역 생활을 한 마지막 해인 2000년에는 마무리 자리를 장문석에게 넘겨 줘서 기록으로만 따졌을 때는 6승 4패 4세이브에 방어율 5.24였지만, 소화한 이닝은 무려 127이닝이었다. 구단이 등 떠밀듯이 은퇴만 시키지 않았으면 마무리로서는 아닐지라도 중간계투 투수로 몇 년 더 뛰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6][7]

불암콩콩코믹스 레전드 - 김용수 편

3. 지도자 경력

3.1. LG 트윈스 코치 1기 시절

2000년을 끝으로 은퇴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서 코치 연수를 받고 2002년에 귀국하여 2004년까지 LG의 2군 코치로 재임했다.

2003년에는 LG의 2군 감독이 공석 이었기 때문에 책임코치 라는 직함을 달고 사실상 2군 감독으로 활동 하였고, 2004년에는 다시 2군 투수코치가 되었는데[8] 1군에서 난타 당하고 내려온 투수들이 2군에 갔다 오면 투구 밸런스가 잡혀 제법 좋은 투구를 해서, 팬들 사이에선 이 시절만 해도 평가가 매우 좋았다[9]. 이동현, 김광삼 등의 젊은 투수들이 멘토처럼 따르던 코치였으나 시즌 후 재계약을 하지 못했는데, 당시 감독이었던 어떤 사람김용수가 나이가 많아[10] 자신이 팀을 운영하는데 불편하다고 내쳤다.

더군다나 그 사람은 잠실구장에 걸려있던 김용수의 41번 영구결번 유니폼 까지 떼어내게 하는 졸렬함의 끝을 보여주며 가뜩이나 이상훈 강제 이적, 유지현 은퇴, 김재현 FA 이적으로 인해 이미 화난 팬들의 분노를[11] 그야말로 극한까지 시험했다. LG 팬들이 마산아재의 전투력을 가졌었다면 이순철2004년에 초상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진짜다. 인천이였으면 아마도 전쟁났을듯(...)

3.2. LG 트윈스 코치 2기 시절

김재박 감독의 취임과 동시에 2군 투수코치로 부임했다. 이 시절 사이버 투수 김유선의 투구를 보고 "내가 저 새끼 던지는 거 보면 돌아버릴 지경입니다."라는 말을 남겼다는 카더라가 있지만, 그의 평소 성품으로 봤을 때 실제로 그런 말을 했었는지는 의문이다. 물론 그만큼 김유선이 개판이었다는 뜻이겠지만......

그 후 2008 시즌 종료 후 양상문 1군 투수코치가 롯데 자이언츠의 2군 감독으로 자리를 옮기자 영입했던 일본인 코치 다카하시 미치타케 투수코치가 김재박 감독과의 커뮤니케이션 부족을 이유로 시즌 도중 2군으로 내려오자 다카하시를 대신하여 2009년 시즌 중반부터 1군 투수코치를 맡았다.

그러다가 2009년 시즌 도중, 주전 포수인 조인성심수창이 경기 중에 말다툼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그런데 이 둘이 말다툼을 할 때도 강하게 말리는 모습을 보이지 못하자, '얼마나 김용수 코치가 만만하게 보였으면 김용수 코치 보는 앞에서 저랬겠느냐'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외부적으로 이런 모습을 보이자 코치로서의 평가는 더 떨어지게 된다. 결국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겠지만, 시즌이 끝나고 윤학길[12]로 1군 메인 투수코치가 바뀌었고, 동시에 김용수 코치는 스카우트 팀으로 전보되었다.

3.3. 투수코치로서의 논란

LG 트윈스 팬들이 그토록 그리워하는 레전드이지만, 투수코치로써의 평가는 상당히 나쁘다. 굳이 말하자면 이상군보다 조금 나은 정도이고, 조계현 & 윤학길 등과 동급으로 취급될 정도로 실적이 없다. 그러나 1군 투수코치로 재임했던 기간이 고작 몇개월 이었던걸 감안한다면 너무 가혹한 평가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1군 투수코치로 재임했던 기간이 짧았던 만큼 코치로써 평가를 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

다만 2군에서 투수코치로서 꽤 오래 있었는데도, 2군에서 이렇다 할 투수 한 명 제대로 키워내질 못했고, 현역 시절의 그 날카로운 변화구를 전수하지도 못한 건 어느 정도 비판의 여지가 있다. 또 공교롭게도 그 시기가 바로 LG의 암흑기였다.

일단 기본적으로 사람 좋고 선수들 편하게 해 주는 걸로는 높이 평가받지만, 성격 자체가 너무 순하고 선수들을 강하게 채찍질하지 못한다는 게 문제다. 속사정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외부에서 대부분 그렇게 생각할 정도니... 암흑기 시절 LG 선수들 노는 거 좋아하는 것도 크게 작용했지만 그리고 심수창, 조인성의 말다툼 사건 이후로는 평가가 더 나빠졌고, 이는 해임으로 이어진다.

3.4. 중앙대학교 감독 시절

파일:external/sccdn.chosun.com/2012092101001481700120601.jpg
스카우트 일을 잠시 하다가 2010년, 모교인 중앙대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부임했다. 미우나 고우나 LG의 레전드이고 대학 감독으로써 지도자로써의 역량을 확실히 레벨 업하길 바라는 LG 팬들이 많다. 그러나 어느 날 중앙대학교 투수들은 하나같이 월미도 바이킹 제구 를 선보이고... 제발 지도력 업그레이드 좀 좀!

중앙대학교 감독 시절 LG 트윈스에 포수 조윤준을 1차 지명자로 강력 추천 했다는 루머가 있으나 본인은 이 루머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부인하였다. 다만 LG 구단에 유희관을 추천한 적은 있다고 한다. 링크 다만 유희관을 추천했었다는 말은 걸러 들어야할게 유희관은 2009 KBO 신인드래프트 에서 두산에 지명 되었다. 즉 김용수가 중앙대 감독을 맡았을 당시에는 이미 프로 선수였었다. 다만 중앙대 감독 시절이 아닌 LG 코치 시절에 2군 연습경기에서 유희관의 투구를 보고 추천을 했었을수도 있다.

거기에다가 심판에게 식사비로 100만 원을 건넨 혐의가 드러나, 대한야구협회로부터 3년 간 지도자 자격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2012년 11월 고정식에게 중앙대학교 야구부의 감독직을 넘긴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참고로 100만원은 본인의 돈으로 건넨 게 아니라 학부모들이 돈을 모아 건낸 것이다. 관행상 있었던 일이었다고 그를 비호하는 주장도 있긴 하지만, 심판에게 뇌물 공여는 넓은 의미로 보면 승부조작으로 연결될 수도 있는 중대한 사안이고, 오히려 관행상 있었던 일이었기에 징계가 약하게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014년 12월 16일 롯데 자이언츠의 2군 투수코치로 계약했다는 기사가 나왔으나, 다음 날인 12월 17일에 위의 징계를 이유로 계약을 철회하며 야인으로 돌아갔다.[13]

2015년 3월 25일, 대한야구협회가 이사회를 열어 그의 자격정지를 전면 해제했다.

3.5. 여자 야구 국가대표팀 투수코치 시절

현재는 여자 야구 국가대표팀에서 투수코치 겸 인스트럭터로 여자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는데, 선수 시절 감독이었던 이광환의 요청에 의해서라고 한다.

2017년 2월 포항제철고제주도 전지훈련에 인스트럭터로 참여한다고 한다. LG 시절 절친한 팀 동료였던 김영직의 요청이 있었던 걸로 추정된다.

또한 2017년 1학기부터 서울대에서 교양과목 강의도 한다고 한다. 서울대 야구부 감독으로 있는 이광환의 추천이라는 듯.

여담으로 LG를 떠났지만, 아직까지도 팀에 대한 애정이 상당하고, 팀의 선수들이나 코칭스텝들과 연락하며 지내는 것 같다. 강연 자리나 지인들 혹은 팬들을 만나면 LG와 LG 선수들에 대해 많은 썰들을 푼다고 한다. 한희가 많은 기회를 받지 못해 아쉽다는 이야기, 양상문 감독과도 친구라 자주 이야기를 나누는데, 양상문이 팀에 우타자가 없다고 맨날 징징대더니 정의윤을 보내 버렸다는 이야기, 이병규와 자주 전화 통화를 한단 이야기 등등 그를 직접 만났던 어떤 팬의 이야기

4. 해설가 경력

2005년부터 2006년까지 KBS SKY 스포츠에서 해설위원으로 있었다. 카더라에 의하면 다른 팀에서도 코치 제안을 받았었지만, LG가 아닌 다른 팀에서 야구하는건 아무 의미가 없다며 코치 제안을 거절 했다고 한다. 하지만 해설로서는 좋지 못한 평을 받았다. 특히 2006년 7월 2일에 김동수안영명이 빈볼 시비가 일어나자[14], "저건 고의성이 있는 빈볼이다. 저래선 안 된다."라는 말을 남기면서[15][16], 한화 팬들에게 많은 욕을 먹었고, 한동안 김용수 위원은 해설을 하지 못했다. 결국 2007 시즌을 앞두고 LG에 코치로 복귀했다.

5. 근황

파일:lg41&9.jpg
2017년 7월 9일 LG 트윈스의 2호 영구결번 이병규의 영구결번식에 깜짝 등장하여 꽃다발을 주고 포옹을 하면서 LG팬들을 감동시켰다.[17]

코치로는 실수가 많았지만, 현역 시절의 활약이 워낙 압도적인 데다가 현재에도 LG 트윈스 역대 투수 중에서는 감히 노송을 넘볼 만한 선수도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에 LG팬들에게는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는 인물이다.

현재는 서울대학교에서 야구 교양 수업 교수로 출강중이다.연고지에서 영구결번된 것에 대한 예우?

2019년 홈 개막전에 1990 + 1994 우승멤버들이 초청되어 오랫만에 줄무늬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섰다. 이 날은 시구는 김용수, 시구포수는 김동수, 시타는 유지현이 맡았다. 다만 중계를 맡은 SPOTV가 라인업 소개를 하다가 시구 중계를 패스하여(...) TV 중계는 되지 못하고 나중에 LG 공식 SNS에서 공개되었다. 이 날 LG는 토미 조셉의 홈런을 앞세워 아슬아슬하게 승리했다.

6.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5 MBC 6 21⅔ 1 2 2 - 0.333 3.74 22 2 7 14 9 9 1.338
1986 60
(1위)
178 9 9 26
(1위)
- 0.500 1.67
(4위)
128 4 62 74 40 33 1.051
1987 52
(1위)
141 9 5 24
(1위)
- 0.643 1.98
(2위)
109 6 40 71 34 31 1.028
1988 34 98⅔ 3 5 11
(3위)
- 0.375 4.47 118 5 34 51 51 49 1.510
1989 47
(1위)
104⅓ 5 5 22
(1위)
- 0.500 3.19 107 2 32 51 43 37 1.304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0 LG 33 149⅔ 12 5 5 - 0.706
(3위)
2.04
(3위)
122 4 41 119 40 34 1.069
1991 41 190 12 11 10
(5위)
- 0.522 2.79 172 5 70 129 71 59 1.232
1992 14 61 5 4 0 - 0.556 5.16 62 5 20 27 37 35 1.295
1993 50
(1위)
75⅔ 6 2 26
(2위)
- 0.750 1.55 53 3 22 60 16 13 0.965
1994 42
(5위)
63⅓ 5 5 30
(3위)
- 0.500 2.56 46 1 11 44 24 18 0.884
1995 48
(2위)
69 4 2 30
(2위)
- 0.667 1.43 59 1 11 44 12 11 1.000
1996 48 130⅔ 16
(3위)
7 9 - 0.696
(3위)
2.82 123 6 39 92 55 41 1.217
1997 28 177⅔
(4위)
12 8 0 - 0.600 3.70 163 16 51 121 82 73 1.159
1998 32 175 18
(1위)
6 2 - 0.750 3.45 176 11 52 116 74 67 1.263
1999 46 68⅔ 3 9 26
(3위)
- 0.250 2.88 70 5 16 48 23 22 1.209
2000 32 127 6 4 4 1 0.600 5.24 142 10 51 85 83 74 1.449
KBO 통산
(16시즌)
613 1831⅓
(9위)
126
(7위)
89 227
(3위)
1 0.586 2.98
(8위)
1672 86 559 1146 694 606 1.185

6.1. 그가 남긴 기록

은퇴일자는 2000년 11월 20일로 선수 생활 동안 걸어온 발자취는 다음과 같다.
  1. 1985년 MBC 청룡 소속으로 데뷔.(6경기 1승 2패 2세이브) 경기 도중 타구에 무릎을 맞는 중상으로 시즌 종료.
  2. 1986년 구원 1위 (35SP).
  3. 1987년 구원 1위 (33SP). 통산 100경기 출장(8.15 잠실 OB전).
  4. 1989년 구원 1위 (26SP).
  5. 1990년 선발 전향 성공(33경기 12승 5패 5세이브).
  6. 1991년 통산 100세이브(8.10 잠실 OB전).
  7. 1992년 부상(좌골 신경통) 후유증으로 부진.(14경기 5승 4패)
  8. 1993년 마무리 복귀.(구원 2위, 32SP, 50경기 6승 2패 26세이브)
  9. 투수 최초 300경기 출장(5.26 잠실 OB전).
  10. 1994년 통산 150세이브(7.28 태평양전). 통산 200세이브 포인트(9.23 삼성전).
  11. 1995년 2년 연속 30세이브 투수 최초 400경기출전(6.25 쌍방울전).
  12. 1996년 선발·마무리 겸직. 통산 250세이브 포인트(6.6 잠실 롯데전), 전구단 상대 승리(8.6 롯데전, 시즌 3번째).
  13. 1997년 프로투수 최초 투수 500경기 출전 및 97시즌 4호 전구단 상대 승리(잠실 해태전).
  14. 1998년 개인통산 100승 달성(4.22 잠실 쌍방울전 달성).
  15. 3년 연속 전구단 상대 승리(9.2 잠실 롯데전 달성).
  16. 1998년 역대 최고령 다승왕 기록 달성(18승, 당시 38세)
  17. 통산 1천탈삼진 달성(9.11 잠실 쌍방울전). 시즌 다승 및 승률 1위 (18승, 0.750).
  18. 1999년 통산 200세이브(4.15 인천 현대전). 통산 100승 200세이브는 국내 최초이자[18] 일본에도 기록이 없고 미국에서도 4명뿐인 진기록.
  19. 국내 최초 영구 결번식을 치룸(4.19 잠실 한화전).
  20. 2000년 투수 최초 통산 600경기 출장(7.15 잠실 한화전).
  21. 포스트시즌 통산 최다 경기 출장(28경기).
  22. 통산 613경기에 등판.
  23. 126승 89패 227세이브(방어율 2.98) 1146삼진 기록.

KBO 리그 역사적으로 본다면 최초로 '1이닝 클로저'라는 보직을 확립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전에 마무리라는 개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김용수에 앞서 최초의 전문 마무리 역할을 한 권영호도 있었다. 하지만 권영호의 경우는 7회부터 구원등판하는 경우도 잦았으므로 어떻게 보면 불펜 투수로서 보는 시각도 존재하기도 한다. 김용수도 이광환이 부임한 1992년 이전에는 2, 3이닝 이상도 던지는 고전적 의미의 마무리 역할이었다. 1이닝 클로저의 역할은 이광환이 LG의 투수 운용시스템에 중간계투에 역할을 부여하는 분업체계를 도입하면서 확립되었고[19] 1991년, 백골프백인천 말기 선발-중간-마무리를 가리지 않는 무리한 등판으로 지병이 되어 버린 좌골 신경통을 얻은 그가 다시 마무리 투수로서 재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김용수 은퇴 무렵의 인터뷰 기사를 보면 자신의 투구 이닝을 철저하게 관리해서 재기할 수 있게 해 준 이광환 감독에게 감사의 뜻을 표한 내용도 있다.

이러한 1이닝 클로저라는 역할의 확립으로 인해 LG는 흔히 말하는 리드를 빼앗기면 뒤집기 힘든 팀으로 거듭날 수 있었고, 이를 많은 팀들이 모방, 그 후로 선발-중간계투-마무리라는 체계가 다져지게 된다. 하지만 도입초기에는 2~3이닝을 책임지면서 시즌 규정투구이닝을 채우는 경우도 다반사였던 고전적 마무리에 익숙해 있던 대한민국의 야구팬들에게 매우 생소하게 비쳤으며, 9회 1이닝만 던지고 세이브 숫자를 쌓아올리는 모습을 보면서 김용수의 임무를 아주 편안한 임무로 생각하기도 했다. 당시의 LG까들이 김용수를 깔 때 가장 많이 하던 말이 '김용수는 1이닝만 던지고 편하게 세이브를 챙긴다'였다.

하지만 이 역할이 얼마나 어려운 역할인지는 그 후의 세계 프로야구의 흐름을 보면 명약관화. 또 은퇴한 후 2012년까지, 즉 12년 동안이나 그가 보유한 통산 세이브의 기록은 깨지지 않았다. 그동안 수많은 후배들이, 때로는 1년에 40~50세이브씩 거두면서 5~6년안에 그의 기록을 넘어설 수 있을 것처럼 보였지만 한국에서 통산 200세이브를 거둔 투수는 2012년 시즌 후를 기준으로 그를 제외하면 구대성오승환, 임창용밖에 없다. 물론 구대성과 임창용은 중간에 5년간 해외리그에서 외도를 한 탓도 있지만, 김용수도 때로는 팀의 필요에 의해 선발로 전향할 수 밖에 없었던 시기(1990~1992년, 1997~1998년)도 있었고, 대졸에 LA 올림픽 참가를 위하여 실업 야구팀인 한일은행에서 뛴 탓에 실질적인 KBO 데뷔 시즌에 이미 27세(...)였던 것과, 은퇴를 종용받아 김용수 역시 마무리로서 뛴 기간에 손해를 봤다는 사실들도 고려해야 할 듯.

그의 기록에 도전했던 수많은 도전자들이 3~4년 화려하게 불태우면서 기록에 접근하지만 그 뒤로는 부상과 부진 등으로 5년에 10세이브도 추가하지 못하면서 은퇴하게 되는 상황이 반복되고, FA 도입으로 선수들의 해외진출이 자유로워지면서 김용수의 저주라고 불리기도 하며 몇십년간은 깨지지 않을 기록으로 남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하지만 결국 오승환이 2012년 7월 1일자로 개인 통산 228세이브를 거둬 통산 세이브 기록을 갈아치우며 12년간 변하지 않던 통산 최다 세이브 기록은 다시 쓰여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통산 세이브 기록은 오승환에게 넘겨주고 2위로 내려앉았다. 하지만 통산 세이브 1~2위였던 오승환임창용불법 도박에 연루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다른 의미로 저주에 걸려버렸다.

허나 김용수의 100승 - 200세이브는 선발-중간-마무리로 분업된 현대 야구의 특성상 앞으로 나오기 힘든 대기록은 틀림없다.[20][21]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면서 선발로는 기본 10승 정도는 해줬으며, 마무리로는 최소 20세이브 이상을 꾸준히 해온 결과 그런 대기록을 만들 수 있었다. 선발 투수의 덕목인 완급조절, 지구력, 경기운영과 마무리 투수의 덕목인 배짱, 집중력을 두루 갖춘 흔치 않은 유형의 투수였던 것. 이것만 봐도 김용수가 얼마나 대단한 투수였는지 그대로 말해준다.


[1] KBO 리그 전체로 봐도 레전드. 누적 WAR이 선동렬, 송진우 다음으로 WAR계산을 어떻게 하더라도 투수 5손가락 안에 든다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현역생활이 길었으니 어느정도 감안을 해야 겠지만 이강철이나 정민철도 WAR이 마이너스인 해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김용수는 그런거 없이 꾸준했던 게 특징.[2] 본인이 염두에 두지는 않았겠지만, 41번은 1960~80년대 메이저리그의 명투수인 톰 시버의 번호이기도 했다.[3] 전성기였던 1980년대 ~ 1990년대 초반 기준으로도 작은 편이었다. 동 시기 최고의 선발이였던 최동원이 180cm, 선동열이 184cm이었다.[4] 시즌 막판에 16승 상태로 다승왕 경쟁을 하고 있었는데, 감독의 배려로 2일 연속 등판해서 모두 승리를 기록했다. 하지만 주어진 찬스를 놓치지 않고 모두 승리로 연결시킨 부분은 분명 선수의 능력이다.[5] 49세였던 2008년 LG 러브 페스티벌에서 잠실야구장 전광판에 132km/h를 찍었다.그리고 2018년 한 인터뷰에서 말하길 최근에 스피드 건으로 구속을 측정하니 128km/h가 나왔다고 한다.[6] 더군다나 후임 감독이 이광은과는 정 반대로 베테랑 선수를 신뢰하는 김성근이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최소한 2002년까지 현역으로 뛸 수도 있었을 지도 모른다.[7] 스텟을 봐도 조정방어율은 리그 평균치보다 낮았지만 조정FIP은 111.8으로 낮은 편이 아니였으며 2000년이 꽤 심한 타고투저 시절이였다는 걸 상기하면 최소 1년은 더 두고 볼만한 상황이였다.[8] 이광환 감독이 2군으로 좌천되었다.[9] 사실 1군 투수코치 정삼흠이상군이 너무 막장이었기 때문에 당시 김용수의 성과가 반사적인 효과로 더욱 좋게 보인 점도 없지 않다. 그리고 정삼흠은 김재현 음주운전 차량에 동석했다가 2003년 시즌 끝나고 해임되었다.[10] 김용수는 이순철보다 2년 선배(나이는 1살 차이, 이순철은 62년생들과 학교를 같이 다녔다.)이며, 출신대학이 달라서 접점도 없었다.[11] 이 일이 모두 2004년 한 해에 일어났다. 가을야구도 못한데다가 병풍까지 터져서 LG팬들은 짜증나는 상황인데 이런 상황에서 현역 시절 신바람 야구의 상징과도 같았던 투수코치를 내쳤으니...[12] 그 전 시즌에는 히어로즈의 2군 감독을 하고 있었다.[13] 아무런 말이 없으면 2015년 11월까지 징계가 유효한 상태지만, 한국야구위원회와 대한야구협회간에는 징계 조항의 상호 규약이 없다. 따라서 아마추어 팀이라면 몰라도, 롯데에서 활동해도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는 없었다. 문제는 법규보다 사람들 사이에서 크게 벌어질 논란이지만.[14] 이 경기에서 김동수안영명에게 싸대기를 때리자, 송진우가 덕아웃에서 나와 김동수에게 니킥을 날렸다. 그렇긴 한데, 정작 송지만심광호가 맞았다.[15] 진실은 본인만이 알겠지만, 현역 시절에 항상 같이 배터리를 짜던 김동수가 빈볼을 맞자 편파적으로 해설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16] 보통 해설위원들은 이런 상황에서 눈치껏 "볼이 손에서 빠졌군요."라던가 "당사자들만이 알겠죠." 같이 유연하게 대처한다.[17] 그리고 본인도 정말 오랜만에 잠실야구장 그라운드를 밟았다.[18] 2015시즌에 임창용이 한국에서만 100승 200세이브를 올리면서, 국내에 100승 200세이브를 올린 선수는 역사상 단 2명이다.[19] 사실 메이저리그도 선발-중간계투-1이닝클로저 일명 '라루사이즘'이 등장한 건 1980년대 말 토니 라루사 감독부터다. 미국도 그전까지는 중무리 투수 운용이 만연했다.[20] 대한민국보다 야구 역사가 훨씬 오래 된 일본프로야구에서도 100승 - 200세이브를 달성한 선수는 아예 없다. 흠좀무.[21] 하지만 일본-미국을 거쳐 국내로 복귀한 임창용이 두 번째로 이 기록을 달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