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01 00:54:46

박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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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 베어스 영구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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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순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대 등번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82 1995

보유 기록
최다 연승 22연승[1]

수상 기록
1982년 한국프로야구 MVP
1982년 한국프로야구 다승왕
1982년 한국프로야구 최우수 평균자책점
1982년 한국프로야구 승률왕

OB / 두산 베어스 등번호 21번
창단 박철순(1982~1996) 영구결번
두산 베어스 등번호 90번
결번 박철순(1997~1998) 결번
}}} ||
파일:불사조박철순.png
두산 베어스 No.21
박철순(朴哲淳 / Cheol-Sun Park[2])
생년월일 1954년 3월 12일[3]
국적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대한민국
출신지 부산광역시 중구
신체 182cm, 72kg
학력 부산동광초[4] - 경남중 - 배명고[5] - 연세대(중퇴)[6]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2년 OB 베어스 창단멤버
소속팀 밀워키 브루어스 산하 마이너 (1980~1981)
OB 베어스 (1982~1996)
지도자 OB 베어스 플레잉코치 (1989)
OB 베어스 1군 투수코치 (1997~1998)
등장곡 권인하 - 에이스를 위하여[7]
프랭크 시나트라 - My Way
종교 개신교
병역 공군 병장 만기전역 #

1. 개요2. 선수 경력3. 플레이 스타일4. 은퇴 후
4.1. 어록4.2. 박철순에 대한 말말말
5. 사건사고 및 논란6. 기타7. 연도별 주요 성적

1. 개요

파일:attachment/bears_pcs.jpg
“팬 여러분 이제 저는 떠나가지만, 영원히 여러분 곁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팬 여러분 사랑합니다.”[8]
2017년 KBO 플레이오프 1차전 시구 中

대한민국의 전 야구선수이자, OB 베어스에서 뛰었던 투수. KBO 리그 원년부터 활약했고 OB/두산 베어스의 첫 번째 프랜차이즈 스타였으며 한국프로야구 원년을 빛낸 선수로서 22연승을 포함해 베어스의 원년 우승을 이끌었다. 또한 이후 찾아온 수많은 부상들을 이겨낸 끝에 베어스의 두 번째 우승까지 함께 하고 1997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별명은 불사조.

KBO 통산 네 번째로 영구결번된 레전드 선수이기도 하다.[9][10] 더불어 그는 한국프로야구 원년부터 21번을 등번호로 사용했으니 베어스 역사상 유일하게 21번을 단 선수가 되었다.

전용 응원가는 권인하'에이스를 위하여'. 이 노래가 나오면서 노장 박철순이 마운드 위에 오르는 순간의 감동은 OB 팬들에게 추억으로 남아있다. 은퇴식에서 울려퍼진 프랭크 시내트라My Way도 그를 상징하는 노래로 남아있다.

2. 선수 경력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박철순/선수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external/yagusarang.com/eb51993c029254e98bdfa3418b51f12b_qKdNoN4iHrenFN8dR7ZY8Hd8y.jpg
  • 프로야구 최초 투수 3관왕: 1982년의 다승&평균자책점&승률[11] ||
  • 단일 시즌 투수 22연승 신화 기록(1982년): 단일시즌 연승으로는 세계기록이며, 일본의 다나카 마사히로가 2013년 2012시즌에 이어 23연승으로 경신하기 전까지는 아시아 기록이었다.
  • 한국시리즈 최고령 등판 기록(39세 7개월 8일)[12]
  • 경기 시작 6타자 연속 탈삼진 기록: 1994년 8월 31일 vs. 해태전. 이 기록은 2017시즌 앤디 밴 헤켄의 7타자 연속 탈삼진 기록으로 깨지게 되었다.

3. 플레이 스타일

파일:박철순투구폼.gif
박철순의 역동적인 투구폼태평양 스트존[]좌타석 배터박스에 걸치는 스트라이크에 당한 타자는 이건열 동국대 감독.]

데뷔 시즌의 임팩트만 놓고 보면 데뷔시즌의 최동원이나 선동열 이상이었다. swar 기준 데뷔 시즌 성적 2위이자 국내 선수로는 1위이다.[14]

프로야구 초창기엔 스피드건이 드물었기 때문에 정확한 구속은 남아있지 않지만 리즈시절엔 최고 140km/h대의 빠른 직구를 던졌다. 또한 커브, 슬라이더, 역회전볼도 잘 던졌다고 한다. 패스트볼의 무브먼트가 굉장히 좋아서 당시 해설자들은 그의 몸쪽 직구를 역회전공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고 한다. 박철순이 던졌던 구질에 관해서는 아직도 상당히 말이 많은데 너클볼을 최초로 던진 투수로도 널리 알려져 있지만 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팜볼이었다고도 한다. 박철순 이후로 우리나라에서 팜볼을 던진 투수는 단 한명도 없었다는걸(윤석민이 한번 강정호를 상대로 던졌는데 그 이후로는 다시 사장되었다.) 감안하면 당시 한국 야구에서 생소하던 구질들을 던졌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다만 이 무브먼트와 스피드를 위해 상당한 하이키킹의 투구폼을 구사했는데 이것이 만성적인 허리부상의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은퇴할때까지 투구폼을 거의 수정하지 않고 이 폼을 은퇴할 때까지 고수했다.

부상이 잦았지만 신기할 정도로 선수 커리어 내내 구속은 유지된 편이다. 선수 생활 내내 허리가 좋지 않았던데다가 아킬레스 건 부상은 수술을 한다고 해도 고질처럼 지속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 부상을 내내 달고 다니면서도 구속이 유지되었다는 것은[15] 이 선수가 얼마나 열심히 그리고 진지하게 훈련을 해왔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4. 은퇴 후

이후 OB 베어스에서 투수코치를 맡기도 했으나, 1998년 시즌 중 후술할 사건으로 인해 사임하고 1999년 이후로는 야구계를 떠나 '알룩스포츠'라는 스포츠 용품 회사를 경영하였다. http://www.alrook.com 한때 연매출 100억 가량의 우량기업으로 성공적인 사업가로 자리잡았으나, 2007년도 대장암으로 투병중이라는 사실이 언론에 공개되었다. 이 암 투병이 계기가 되어 건강상의 문제로 사업가 생활도 정리하고 완전히 은퇴하여 요양과 소일거리를 하며 지내는 듯.

사업가로 활동할 당시 사업을 경기도 의왕시에서 했던 인연으로 박철순을 의왕시 홍보대사로 위촉한 적이 있었다.

그 후로는 인터넷 방송이나 olleh TV에서 야구 해설을 맡는 등의 소일거리 정도를 하며 지내고 있다. 기아자동차의 광고 나레이션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다만 예전 2군 코치 시절의 흑역사 때문인지 지도자로 나설 생각은 없다고 한다.

KBS의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유소년 야구 코치도 하고 있는 듯.
파일:2009년박철순시구.jpg
2009년 시구하는 모습

2007년과 2009년 시구로 모습을 비추었으며, 2011 시즌 개막전에서는 팀의 레전드인 김우열, 김경문과 함께 시구 시타 시포를 하여 명장면을 연출했다.

그러다가 2015년 3월말에 갑자기 스리랑카 야구 코치가 되었다. 5월에 열린 동아시안컵 야구대회에서 3승 2패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후 그만둔 듯. 아마 단기로 와서 지도한듯 하다. 2017년 스리랑카 야구 국대팀이 야구로 훨씬 강호급인 파키스탄을 그것도 파키스탄 원정에서 열린 서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제치고 첫 우승하여 찍은 기념사진을 봐도 박철순은 없었기 때문.

2015년 두산의 한국시리즈 우승 후 축하 인사를 남겼다.
파일:2017플옵시구박철순.jpg
2017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시구하는 모습

2017년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두산 베어스 유니폼을 입고 시구를 했다. 공교롭게도 3루 덕아웃에서 그의 시구를 지켜본 사람이 원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함께 했던 동료 포수 김경문 감독. 김경문 감독이 두산 베어스 감독이던 시절인 2007년 6월 박철순이 시구, 김경문 감독이 시포를 한 뒤 마운드에서 서로 포옹한 적이 있다.시구영상 참고로 이날 경기는 두산이 패했지만 2, 3, 4차전을 전부 이겨 한국시리즈 진출을 확정지었다.
파일:박철순니퍼트2.jpg 파일:박철순니퍼트1.jpg
니퍼트의 데뷔전, 그리고 2017 플레이오프 1차전 시구자가 모두 박철순이였다.[16]

니퍼트박철순 본인이 니퍼트라면, 기꺼이 자신의 21번을 양보하겠다라는 말까지 꺼낸 선수다. 그런 선수의 데뷔전과 두산에서의 마지막 가을야구 무대의 시작에서 시구자가 모두 박철순이였다는 점이 뭉클함을 자아낸다.

그 후 이제 나이로 인해 건강상의 문제에 유의하며 각종 사회인야구 행사 등등에 참석하여 사인회 및 팬들과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다.

4.1. 어록

그 당시에는 그 때 그 순간이 제일 중요했었어요. OB 베어스라는 팀. 1년 동안 같이 동고동락하고 고생했던 팀. 선수 전원.. 꼭 우승해서 팀 선수들하고 기쁨을 나누고 싶었죠. 그런 욕심 밖에 없었어요.
1982 한국시리즈 허리 부상투혼 당시를 되돌아보며
그래도 오랫동안 잊지 않고 사랑해주시고 기억해주시는 팬들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놈이죠. 행복한 야구선수였죠.
첫사랑이고 목숨 바쳐 사랑했던 여인하고의 첫 키스보다 더 진하게 했다면 상상이 가시겠어요?
1997년 본인의 은퇴식에서 마지막으로 마운드에 입맞춤 한 당시를 회고하며

4.2. 박철순에 대한 말말말

당시 미국 야구는 TV에서나 볼 수 있다, 사람이 아니라 짐승들이 야구하는 것이다. 이런것으로만 상상했을 때에요. 그런데 그 미국에 박철순 선수가 혼자, 그것도 최초로 진출해서 선수생활을 했을 때 얼마나 두려웠겠어요.
이병훈 해설위원.
특히 박철순 선배는 작은 것이라도 본인이 마운드에 섰을 때 야수들이 도움을 줬다면 항상 야수들한테 와서 행동이나 말로 고맙다는 표현을 했던 선수였어요.
김광수 코치
단순히 야구에 소질이 있거나, 야구의 주무기나 구질만 가지고 연승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22연승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강한 정신력이 뒷받침이 안된다면 안 되는 것이죠.
하일성 해설위원.
철순이가 아픈데도 진통제를 맞고 나가는 것을 선수들 다 압니다. '우리 한 번 해보자! 이기자!' 이렇게 팀이 하나로 뭉칠 수 있었던 것은 철순이가 아픈데도 던져준 것에 선수들이 감동했기 때문이었고..
1982년 당시 김영덕 OB 베어스 초대 감독.
박철순 선배가 얼마나 팀에서 비중을 차지하시고, 존경받는 선배님이셨는지는 목말을 태워드린 그 장면을 보면 알 수 있죠. 누가 하랄 것도 없이 자동으로 그게 된 거에요.
1995 한국시리즈 우승 후 박철순을 목마를 태운 세리머니가 어떻게 나올 수 있었냐는 질문에 당시 OB 선수 김상호
다른 선배님들이 열 마디 하는 것보다 박철순 선배님은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시고 솔선수범해주셨기 때문에 그냥 옆에 계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큰 힘이 됐습니다. 저희 후배들한테.
95년 당시 OB 베어스 선수 이도형
박철순 선배님, 저희 선수들에게 항상 우상이자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송진우 #

5. 사건사고 및 논란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박철순/사건사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기타

지금은 나이가 들면서 대인관계도 좋아졌지만 예전에는 사생활이나 야구인생 모두 우여곡절이 많았다.
  • 대학생 시절(호적상 나이 20세)에 결혼을 했지만 1986년 이혼한 경력이 있다. 이혼의 이유가 박철순의 잘못이 아니라 전부인의 빚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전처의 빚 때문에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는 통에 마음고생이 심했는데, 이를 보다못한 당시 OB 베어스 감독이던 김성근이 어느 날 무작정 박철순을 데리고 은행으로 가서 당시 기준으로 엄청난 거금인 2천만원을 자신의 명의로 대출받아 빌려주고 추가로 본인 통장에서 2천만원을 인출하여 도합 4천만원을 주면서 "철순아, 이걸로 빚 갚아라" 라고 했다 한다. 참고로 그 당시 9급 공무원 초봉이 20만원 조금 넘던 시절이다. 그래서 박철순은 김성근을 인생의 큰 스승님이자 은인으로 존경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 일찍 결혼한 덕분에 50대 중반 나이에 손자를 둘이나 본 할아버지 이기도 하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부상을 극복한 사연은 유명한 이야기인데, 지금의 부인인 채수정 씨와의 만남과 그녀의 도움도 컸다.
  • 선발 22연승 기록에 대해, 박철순 본인은 자신의 기록이 아닌 팀의 기록으로 생각하며 자신의 선발경기에 야수들의 득점지원 호수비가 있었기에 가능한 기록이라 생각한다고 한다. 최동원이 그때 자신 대신 던졌다면 22연승보다 훨씬 높은 기록을 찍었을꺼라고 밝혔다
  • 투수 출신임에 불구하고 야구는 타자놀음이라고 생각하는 케이스다. 전술한 22연승 기록과 맞물려 말하길, 투수가 아무리 잘해봤자 퍼펙트게임, 노히트노런에 불과하며 이걸 평생에 몇번 해볼 수 있냐고 반문하며 완봉승도 야수가 점수를 내주지 않으면 할 수 없다고 한다. 박철순 본인의 생각으로는 결국 야구는 타자놀음, 야수놀음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같은 투수출신인 선동열 등의 감독과 비교하면 상당히 대조적이다.
  • 1988년 속옷광고 빅맨의 모델로 나선 적이 있다. 그러나 한강 둔치에서 CF를 찍다가 아킬레스건을 다쳐서 시즌 아웃.박철순 빅맨 광고
  • 1989년 이광환 감독 재임 당시 1년동안 1군 투수코치(플레잉코치)로 활약했는데 구동우, 김동현 등의 신인투수들을 육성하고 팀 방어율 역시 중상위권을 기록하면서 나쁘지 않은 능력을 보여 주었다. 1997~1998년 리빌딩기에도 이혜천, 김유봉, 최용호 등의 신인투수들을 지도한 경력으로 볼 때 투수코치로는 의외로 괜찮은 능력자였을지도. 이미 야구계를 떠난 지 10년이 넘은지라 별 의미없는 가정이긴 하다.
  • 던진 구종중 무회전 체인지업때문에 유난히 이야기가 자주 회자되는 편이다.왜 무회전 체인지업이라고 애매모호하게 적냐면 박철순선수 본인이 너클볼이라고도 할때도 있고 팜볼이라고 할때도 있기 때문. # 같은 인터뷰를 하고 적은 기사들을 보면 너클볼이라고 언급되는데, 인터뷰 기사인 # 에서만 봐도 팜볼이라고 언급하시고.두 기사를 근거로 정리하면 81년 당시 미국에서 직접 인터뷰했을때는 너클볼이라 밝혔지만 근래엔 팜볼이라고 하시는 듯.이는 인터뷰의 언급을 봤을때 두 변화구 다 구질이 비슷한 무회전계통인데 박철순선수 본인의 사용 방식이 체인지업과 같았기 때문에 팜볼이라 정의하신 것 같다.마구마구나 프로야구 매니저에선 박철순 카드가 팜볼과 너클볼 둘 다 가지고 있고 마구매니저에서는 너클볼설을 채택하였다. 또한 나무위키에서도 근래 인터뷰를 따라 체인지업의 팜볼 문단에 박철순선수가 팜볼을 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2016 넥센 히어로즈 용병인 로버트 코엘로만 봐도 포크볼을 팜볼형태로 무회전에 가깝게 던지는 등 던지는 방식이나 그립, 구질명을 떠나 무회전에 가까운 공을 던졌다 자체가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고.
  • 젊은 시절 굉장한 장발 미남이었다. 지금의 이대형이나 심수창급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듯. 요즘처럼 열광적이지는 않았지만 박철순 좋아서 야구본다는 젊은 여성팬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30대 들어서 조금 일찍 탈모가 찾아왔고 세월의 풍파와 탈모를 견디지 못하며 그 미모를 오래 유지하진 못했다.
  •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에서는 공유가 1982년 당시 박철순 역을 맡았는데, 젊은 시절 박철순과 굉장히 싱크로율이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파일:감사용철순.jpg
  • 김용희롯데-SK 감독과는 초등학교 동창이다. 때문에 아주 재미있는 장면이 나온 적이 있다. 김용희가 처음으로 롯데 감독을 맡았던 1994년 4월 12일, OB 베어스와의 홈 개막전에서 있었던 일이다. 스코어 4:4로 맞선 연장 11회 말 OB의 투수 강길용이 2루타와 실책, 고의사구로 무사 만루를 만들어 놓은 상황에서 OB는 투수 교체를 단행했다. 당시 대부분의 팬들은 지난 해(1993년) 데뷔하자마자 평균자책점 1.11, 이는 선동열을 제외한 다른 선수가 기록한 가장 낮은 평균차책점이다. 9승에 23세이브라는 엄청난 기록을 세운 마무리 김경원이 마운드에 오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마운드로 올라온 투수는 그가 아니었다. 다름아닌 박철순이 등판한 것. 당연히 조금이나마 사직 야구장에 응원을 왔던 OB 팬들은 난리가 났고, 롯데 팬들마저도 그의 등판에 기립박수를 보냈다. 홈 팀의 감독과 초등학교를 같이 다닌 선수가 마운드에 오르는 장면 자체부터가 너무나도 희귀한 상황이었고, 등판한 상황도 매우 긴박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마운드에 올라온 박철순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공을 던졌고, 8번 타자 홍순기와 9번 타자 공필성을 모두 삼진으로 잡아내며 2사 만루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 다음 타자였던 1번 타자 전준호에게 끝내기 중전 안타를 내주면서 팀의 패배를 막지는 못했다.
    파일:external/image.sportsseoul.com/20160913014055_9.jpg

    선수 박철순, 감독 김용희
  • 전성시절에는 저음의 목소리에 빼어난 용모로 국내에서 당대의 미남 운동선수 하면 종목을 불문하고 첫손에 꼽히는 외모 덕에 야구에 관심없는 여성들도 박철순의 팬인 경우가 많았다. 얼빠의 원조격??? 그러나 30대 부터 일찍 탈모가 진행된 후에는 약간 안습. 한 영화에서도 그는 여성 팬이 줄을 서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 나이가 든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한창 시절 기억력, 특히 이전 경기에 대한 복기에 굉장히 능했다. 큰 게임 뿐 아니라 정규시즌 중 사소한 상황에 대해서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도 기억하여 회고할 정도였다. 현역시절 말년에 고 이종남 기자와의 인터뷰 때, 1982년 시즌 막판 롯데 자이언츠김용철에게 끝내기 안타를 맞고 22연승 행진을 마감하던 상황을 아래와 같이 얘기한 바 있다.
    박철순: 2루에 주자를 둔 상황에서 투수가 안타를 맞으면 보통 어디로 가죠?

    이종남: 그야 포수 뒤쪽이지.

    박철순: 맞아요. 저도 (김용철에게 안타를 맞고)바로 (포수)경문이 뒤로 백업을 갔다가 "아이고 이 멍청이!" 라고 자책했어요. 투수가 포수 뒤를 받치는 건 공이 빠졌을 때 주자가 추가로 진루하는 걸 막는게 목적인데, 그 때는 동점에 끝내기 상황이니까 포수 뒤로 송구가 빠지던 말던 주자 한 명만 들어오면 끝이잖아요? 그건 말도 안되는 플레이였어요. 그 때 저는 홈과 3루 사이에서 중계를 했어야 맞는 거에요.

    참고로 선동열도 현역으로 뛸 때 박철순 처럼 비상한 기억력을 자랑하던 선수였다. 역시 투수도 기억력이 좋아야 잘 하는 모양이다 [17]

7.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연도소속경기이닝승률ERA피안타피홈런4사구탈삼진실점자책점WHIP
1982OB 36 224⅔
(2위)
24
(1위)
4 7
(3위)
- 0.86
(1위)
1.84
(1위)
151 7 73 108
(2위)
60 46 0.97
1983 4 10⅓ 0 1 0 - 0.000 3.48 10 0 4 4 4 4 1.36
1984 1군 기록 없음
1985 9 50⅓ 1 4 0 - 0.200 2.68 36 2 16 34 19 15 0.99
1986 13 53⅓ 5 3 0 - 0.625 3.54 46 3 22 29 23 21 1.28
1987 5 24 2 0 1 - 1.000 2.25 17 0 9 11 7 6 1.08
1988 1군 기록 없음
1989 12 16⅓ 1 1 0 - 0.500 4.96 17 1 9 14 11 9 1.59
1990 18 96 4 9 0 - 0.308 4.78 104 6 41 58 53 51 1.51
1991 18 102⅔ 7 5 0 - 0.583 3.51 97 5 53 55 48 40 1.40
1992 30 99⅔ 7 6 9
(5위)
- 0.538 2.80 92 5 35 68 35 31 1.26
1993 25 116⅔ 7 5 2 - 0.583 2.08 99 3 39 90 30 27 1.18
1994 20 93 7 7 0 - 0.500 2.61 73 3 32 66 31 27 1.10
1995 20 94⅔ 9 2 0 - 0.818 4.47 98 8 50 67 54 47 1.48
1996 21 68⅔ 2 6 1 - 0.250 2.62 68 0 38 44 26 20 1.49
KBO 통산
(15시즌)
231 1050⅓ 76 53 20 - 0.59 2.95 908 43 421 648 401 344 1.24


[1] 2013년 다나카 마사히로에게 깨지기 전까지 아시아 연승 기록이기도 했다. 물롣 리그가 달라서 별 의미는 없지만.[2] 미국 진출 당시 등록명[3] 호적상 출생년도는 1956년, 똑같은 부산 출신의 장효조도 1954년 생이지만 호적상으론 1956년 생이다.[4] 현재의 부산광일초등학교. 1998년 남일초교와 동광초교가 통합되어 광일초등학교가 되었다.[5] 부산고등학교에 진학했다가 대전 대성고등학교로 전학했으나, 야구부 사태로 팀이 해체된 후 상경하여 배명고등학교로 다시 전학했다.[6] 법학과(1974학번)에 재학했는데, 학점도 안 나오고 공부도 안 되어서 그만둔 후 공군에 입대하여 복무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학교는 다르지만 허구연, 김병현, 최희섭 등도 모두 법학과 출신이다. 다만 허구연은 공부해서 법학과로 입학했다.[7] 박철순 헌정곡으로 구단에서 제작한 응원곡이다.[8] 이 말은 박철순이 본인의 은퇴식에서 한 말인 "팬 여러분 이제 저는 마운드를 떠나가지만 언제나 여러분 옆에 남아있을 것입니다."를 그대로 말한 시구 멘트였다.[9] KBO 리그 통산 첫 번째 영구결번은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던 김영신이다. 이전에 명시된 '두 번째 영구결번'이라는 표현보다는 두 번째로 영구결번식을 가지고 결번 처리된 선수가 맞다. 참고로 KBO 통산 첫 영구결번식 수혜자는 LG 트윈스의 김용수 선수이다.[10] 정확히는 KBO 리그 선수 중 영구결번식과 은퇴식을 모두 경험한 첫 번째 선수가 맞는 표현. 은퇴식은 1997년 4월 29일에 열렸고 영구결번식은 2002년 4월 5일에 열렸다.[11] 이 해 박철순은 24승 4패 7세이브, 승률 0.857, 평균자책점 1.82를 기록했다.[12] 호적상 생년 기준. 실제로는 41세 7개월 8일.[] [14] 데뷔 시즌 성적 1위는 다시는 나와서는 안될 혹사를 당한 장명부. 참고로 최동원과 선동열은 데뷔 시즌에 기대보다는 못한 편이다. 물론 그 성적도 swar 5~6 이상으로 훌륭했다.[15] 선수생활 마지막 시즌이었던 1996년에도 당시 잠실구장 스피드건 기준으로 140km 초반대의 구속을 어렵지 않게 찍었다. 고질적인 부상에다 당시 실제나이가 만 42세였음을 감안하면 대단한 스터프.[16] 2017시즌은 니퍼트의 두산에서의 마지막 시즌이라는 점에서 시작과 끝을 팀의 레전드와 함께하는 장면이 뭉클함을 자아낸다.[17] 어찌보면 당연한 말이다. 타자를 상대할 때 '예전에 이 타자한테 이런 공을 던졌다가 맞았지' 라고 기억을 되살려서 투구 패턴에 참고하면 도움이 안 될 리가 없다. 이것은 당장 포수부터 해당되는 얘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