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5-21 23:57:38

박철순

두산 베어스 영구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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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순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대 등번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82 1995

보유 기록
단일시즌 최다 연승 22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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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 KBO 리그 M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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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 KBO 리그 다승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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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 KBO 리그 승률왕

OB / 두산 베어스 등번호 21번
창단 박철순(1982~1996) 영구결번
두산 베어스 등번호 90번
결번 박철순(1997~1998) 결번
}}} ||
파일:불사조박철순.png
두산 베어스 No.21
박철순(朴哲淳 / Cheol-Sun Park[1])
생년월일 1954년 3월 12일[2]
국적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대한민국
출신지 부산광역시 중구
신체 182cm, 72kg
학력 부산동광초[3] - 경남중 - 배명고[4] - 연세대(중퇴)[5]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2년 OB 베어스 창단멤버
소속팀 밀워키 브루어스 산하 마이너 (1980~1981)
OB 베어스 (1982~1996)
지도자 OB 베어스 플레잉코치 (1989)
OB 베어스 1군 투수코치 (1997~1998)
등장곡 권인하 - 에이스를 위하여[6]
프랭크 시나트라 - My Way
종교 개신교

1. 개요2. 선수 경력3. 플레이 스타일4. 은퇴 후5. 논란과 사건 사고
5.1. 최동원 구타5.2. OB 베어스 항명파동5.3. 소상영 후배 구타 옹호 사건5.4. 음주 운전
6. 기타7. 연도별 주요 성적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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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 여러분 이제 저는 떠나가지만, 영원히 여러분 곁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팬 여러분 사랑합니다.”
2017년 플레이오프 1차전 시구에서
[PO 1차] 두산 첫 우승 이끈 '불사조' 박철순, 우승 기원 시구 (10.17)

KBO 리그 원년부터 활약한 전 OB 베어스(현 두산 베어스) 출신의 투수. 별명은 불사조로 베어스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OB/두산에서 나온 첫 번째 프랜차이즈 스타이면서 KBO리그 통산 네 번째로 영구결번된 레전드.[7][8][9] 더불어 그는 한국프로야구 원년부터 21번을 등번호로 사용했으니 베어스 역사상 유일하게 21번을 단 선수가 된다.

전용 응원가는 권인하'에이스를 위하여'. 이 노래가 나오면서 상처투성이의 노장 박철순이 마운드 위에 오르는 순간의 감동은 잠실 야구장의 OB 팬들에게 전설이자 추억으로 남아있다. 은퇴식에서 울려퍼진 프랭크 시내트라My Way도 그를 상징하는 노래로 남아있다.

2. 선수 경력

프로야구 최초 투수 3관왕 기록(1982년의 다승&평균자책점&승률)[10]
단일 시즌 투수 22연승 기록(1982년)[11]
한국시리즈 최고령 등판 기록(39세 7개월 8일)[12]
경기 시작 6타자 연속 탈삼진 기록(1994년 8월 31일 vs. 해태전)[13]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박철순/선수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플레이 스타일

파일:박철순투구폼.gif
박철순의 투구폼

데뷔 시즌의 임팩트만 놓고 보면 데뷔시즌의 최동원이나 선동열 이상이었다. swar 기준 데뷔 시즌 성적 2위이자 국내 선수로는 1위이다.[14]

프로야구 초창기엔 스피드건이 드물었기 때문에 정확한 구속은 남아있지 않지만 리즈시절엔 최고 140km/h대의 빠른 직구를 던졌다. 또한 커브, 슬라이더, 역회전볼도 잘 던졌다고 한다. 패스트볼의 무브먼트가 굉장히 좋아서 당시 해설자들은 그의 몸쪽 직구를 역회전공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고 한다. 박철순이 던졌던 구질에 관해서는 아직도 상당히 말이 많은데 너클볼을 최초로 던진 투수로도 널리 알려져 있지만 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팜볼이었다고도 한다. 박철순 이후로 우리나라에서 팜볼을 던진 투수는 단 한명도 없었다는걸(윤석민이 한번 강정호를 상대로 던졌는데 그 이후로는 다시 사장되었다.) 감안하면 당시 한국 야구에서 생소하던 구질들을 던졌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다만 이 무브먼트와 스피드를 위해 상당한 하이키킹의 투구폼을 구사했는데 이것이 만성적인 허리부상의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은퇴할때까지 투구폼을 거의 수정하지 않고 이 폼을 은퇴할 때까지 고수했다.

부상이 잦았지만 신기할 정도로 선수 커리어 내내 구속은 유지된 편이다. 선수 생활 내내 허리가 좋지 않았던데다가 아킬레스 건 부상은 수술을 한다고 해도 고질처럼 지속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 부상을 내내 달고 다니면서도 구속이 유지되었다는 것은[15] 이 선수가 얼마나 열심히 그리고 진지하게 훈련을 해왔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4. 은퇴 후

이후 OB 베어스에서 투수코치를 맡기도 했으나, 1998년 시즌 중 후술할 사건으로 인해 사임하고 1999년 이후로는 야구계를 떠나 '알룩스포츠'라는 스포츠 용품 회사를 경영하였다. http://www.alrook.com 한때 연매출 100억 가량의 우량기업으로 성공적인 사업가로 자리잡았으나, 2007년도 대장암으로 투병중이라는 사실이 언론에 공개되었다. 이 암 투병이 계기가 되어 건강상의 문제로 사업가 생활도 정리하고 완전히 은퇴하여 요양과 소일거리를 하며 지내는 듯.

사업가로 활동할 당시 사업을 경기도 의왕시에서 했던 인연으로 박철순을 의왕시 홍보대사로 위촉한 적이 있었다.

그 후로는 인터넷 방송이나 olleh TV에서 야구 해설을 맡는 등의 소일거리 정도를 하며 지내고 있다. 기아자동차의 광고 나레이션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다만 예전 2군 코치 시절의 흑역사 때문인지 지도자로 나설 생각은 없다고 한다.

KBS의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유소년 야구 코치도 하고 있는 듯.

그러다가 2015년 3월말에 갑자기 스리랑카 야구 코치가 되었다. 5월에 열린 동아시안컵 야구대회에서 3승 2패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후 그만둔 듯. 아마 단기로 와서 지도한듯 하다. 2017년 스리랑카 야구 국대팀이 야구로 훨씬 강호급인 파키스탄을 그것도 파키스탄 원정에서 열린 서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제치고 첫 우승하여 찍은 기념사진을 봐도 박철순은 없었기 때문.

2015년 두산의 한국시리즈 우승 축하 인사를 남겼다.

2017년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두산 베어스 유니폼을 입고 시구를 했다. 공교롭게도 3루 덕아웃에서 그의 시구를 지켜본 사람이 원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함께 했던 동료 포수 김경문 감독. 김경문 감독이 두산 베어스 감독이던 시절인 2007년 6월 박철순이 시구, 김경문 감독이 시포를 한 뒤 마운드에서 서로 포옹한 적이 있다.시구영상 참고로 이날 경기는 두산이 패했지만 2, 3, 4차전을 전부 이겨 한국시리즈 진출을 확정지었다.

5. 논란과 사건 사고

베어스의 레전드이지만, 정작 야구 내외적으로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던 인물이기도 하다.

5.1. 최동원 구타

연세대 재학시절 얼차려라는 명목으로 후배인 최동원을 구타하여 병원신세를 지게 한 적이 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최동원은 연세대에서 다른 학교로 옮기겠다고 학교와 갈등을 빚다 결국 선후배간의 위계질서라는 명목으로 인해 불리한 상황에 놓여있던 최동원측에서 몇달 후에 학교에 사죄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증언이 엇갈리는 편인데, 최동원이 나중에 학교로부터 오히려 사과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한다.

2011년 박동희 기자가 최동원과 김성한을 인터뷰한 기사를 보면, 당시 박철순의 구타로 인해 최동원은 허리에서 피가 날 정도였다고.[16][17] 그로 인해 전치 2주 판단을 받아 고향에 내려가 쉬고 있었는데 학교 측의 음해로 인해 무단이탈이라는 기사가 나갔다고 한다. 연세대와 박철순의 흑역사인 셈.

다만 박철순의 단독행동이 아닌 연세대 야구부가 집단으로 저지른 행동이라는 말도 있으며 최동원 본인의 설명에 의하면 선배들이 후배들을 구타할 사람으로 박철순을 지목해서 그가 악역을 맡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선배 지시설은 사실이 아닐 확률이 높다. 박철순은 복학생이었고 오히려 4학년들 보다 나이도 많았고 학번도 빨랐다. 당시 4학년들은 57년생이고 박철순은 54년생이었다. 당시 박철순에 지시를 할 수 있는 선배가 없었고 박철순이 구타를 주도했을 확률이 높다. 또 박철순은 후배가 건방져서 때렸을 뿐이라고 했고 지시설을 직접 부인했다. 박철순의 미국 진출도 연세대에서 뛸 수 없는 상황에 사실상 쫒겨난 것이다.

이때만 하더라도 선배가 후배에게 기합을 주고 빠따를 치는 것은 용인하던 악습이 팽배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의 기준으로도 도를 넘은 행위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언론에도 나오고 퇴학 이야기 까지 나온것.훗날 OB베어스 항명사건을 생각하면 더 터무니 없어진다

5.2. OB 베어스 항명파동

1994년 시즌 말 쌍방울 레이더스와의 군산 원정경기가 끝난 뒤 전주 숙소에서 다혈질의 윤동균 감독이 경기에서 패배했다는 이유로 화를 내며 체벌하려 하자[18] 최고참이었던 박철순과 장호연, 김형석 등이 이에 반발했다. 지도 폭력범이었던 주제에 무슨.. 추순아 철하다결국 주축 선수 17명이 윤동균 감독의 퇴진을 요구하며 숙소를 떠나 서울로 돌아온 한국프로야구 초유의 항명 파동이 일어났다. 구단 측은 본보기 차원에서 박철순을 비롯한 주축선수 5명을 트레이드하고 윤동균 감독의 연임을 시도했으나, 당시 여론은 폭력을 휘두른 윤동균 감독보다 선수들을 지지하는 쪽이 많았다.

결국 박철순이 경창호 구단 사장에게 "나도 은퇴할 테니 윤 감독도 같이 물러나게 해라"고 배수의 진을 친 끝에, 윤동균 감독이 사임하고 후임으로 김인식 감독을 영입하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사실 박철순이 주동자가 아니라 후배들과 윤동균 감독 사이에 불화가 커질까봐 이런 말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기자들이 요상하게 해석을 해서 박철순이 주범이라는 기사를 쓴 것이다. 그러나 신임 김인식 감독의 선처 요구와 팬들의 성화로 박철순과 김형석, 김상호 등은 연봉이 삭감되는 선에서 팀에 계속 남았고, 강영수는 방출당했지만, 바로 강타자를 원하던 태평양에서 데려갔으니 퇴진한 윤동균 감독만 책임진 꼴. 그래도 다음 해의 기적적인 우승으로 결과적으로는 감독 교체가 잘 된 일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결국은 흑역사로 남았다. 또한 이 당시 스포츠 서울의 故 이종남 기자가 칼럼과 개인적인 인맥을 통해 선수들의 구제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박철순은 그렇다 쳐도, 거의 팀에 남을 가능성이 없었던(실제로 대만프로야구 트레이드설이 들렸던) 장호연과 구단 측을 직접 중재해서 OB에 잔류시킨 것도 이종남 기자 본인. 이종남 기자는 원래 인천 토박이로 특별히 OB 팬은 아니었으며, 이 때 선수들 편에 선 것도 OB 구단 수뇌부의 좀스러운 운영에 예전부터 불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1995 KS 우승 이후 OB는 1996년 1월에 기다렸다는 듯이 장호연을 방출했다.[19]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OB 베어스 항명파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3. 소상영 후배 구타 옹호 사건

그가 OB를 떠난 이유도 구타와 간접적 관련이 있었다. 2군 투수코치로 일하던 1998년 OB 2군의 주장인 소상영 선수가 자신의 심부름을 하지 않은 후배를 구타했고, 구단이 소상영을 방출하려 하자 "선배가 후배를 좀 혼낼 수도 있는 것 아니냐" 면서 반발, 결국 사표를 제출하고 팀을 떠났다. 자신이 선배에게 폭력을 당한 것은 부당하고, 내가 폭력을 당하지 않으면 그럴 수도 있다는 사고방식. 지도자로서는 실격감이다. 결국 박철순이라는 보호자가 사라진 소상영은 시즌 끝나고 방출되었다.

5.4. 음주 운전

OB 코치 재임 시절이던 1997년, 음주운전을 하다 적발되어 면허정지처분을 받기도 했다. 적발된 시기가 정규 시즌이 진행되던 7월이라 더 말들이 많았다.

6. 기타

한국프로야구의 원조 레전드이며 지금은 나이가 들면서 대인관계도 좋아졌지만 예전에는 사생활이나 야구인생 모두 우여곡절이 많았다.
  • 대학생 시절(호적상 나이 20세)에 결혼을 했으며 한 차례 이혼 경력이 있다. 이혼의 이유가 박철순 잘못이 아니라 전부인의 빚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선수시절 내내 빚쟁이에 시달려야 했기에 마음고생이 심했는데, 당시 OB 베어스 감독이던 김성근이 어느날 무작정 박철순을 데리고 은행으로 가서 당시 기준으로 엄청난 거금인 2000만원을 자신의 명의로 대출받아 빌려주고 본인의 돈인 2천만원을 빌려줬다. 참고로 저 당시 9급공무원 초봉이 20만원을 조금 넘던 시절이다. 박철순은 김성근을 인생의 은사이자 은인으로 존경한다고. 50대 중반 나이에 벌써 손자까지 둘이나 본 할아버지기도 하다.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부상을 극복한 사연은 유명한 이야기인데, 지금의 부인인 채수정씨와의 만남과 그녀의 도움도 컸다.
  • 선발 22연승 기록에 대해, 박철순 본인은 자신의 기록이 아닌 팀의 기록으로 생각하며 자신의 선발경기에 야수들의 득점지원 호수비가 있었기에 가능한 기록이라 생각한다고 한다. 최동원이 그때 자신 대신 던졌다면 22연승보다 훨씬 높은 기록을 찍었을꺼라고 밝혔다
  • 투수 출신임에 불구하고 야구는 타자놀음이라고 생각하는 케이스다. 전술한 22연승 기록과 맞물려 말하길, 투수가 아무리 잘해봤자 퍼펙트게임, 노히트노런에 불과하며 이걸 평생에 몇번 해볼 수 있냐고 반문하며 완봉승도 야수가 점수를 내주지 않으면 할 수 없다고 한다. 박철순 본인의 생각으로는 결국 야구는 타자놀음, 야수놀음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같은 투수출신인 선동열 등의 감독과 비교하면 상당히 대조적이다.
  • 1988년 속옷광고 빅맨의 모델로 나선 적이 있다. 그러나 한강 둔치에서 CF를 찍다가 아킬레스건을 다쳐서 시즌 아웃.박철순 빅맨 광고
  • 1989년 이광환 감독 재임 당시 1년동안 1군 투수코치(플레잉코치)로 활약했는데 구동우, 김동현 등의 신인투수들을 육성하고 팀 방어율 역시 중상위권을 기록하면서 나쁘지 않은 능력을 보여 주었다. 1997~1998년 리빌딩기에도 이혜천, 김유봉, 최용호 등의 신인투수들을 지도한 경력으로 볼 때 투수코치로는 의외로 괜찮은 능력자였을지도. 이미 야구계를 떠난 지 10년이 넘은지라 별 의미없는 가정이긴 하다.
  • 던진 구종중 무회전 체인지업때문에 유난히 이야기가 자주 회자되는 편이다.왜 무회전 체인지업이라고 애매모호하게 적냐면 박철순선수 본인이 너클볼이라고도 할때도 있고 팜볼이라고 할때도 있기 때문. # 같은 인터뷰를 하고 적은 기사들을 보면 너클볼이라고 언급되는데, 인터뷰 기사인 # 에서만 봐도 팜볼이라고 언급하시고.두 기사를 근거로 정리하면 81년 당시 미국에서 직접 인터뷰했을때는 너클볼이라 밝혔지만 근래엔 팜볼이라고 하시는 듯.이는 인터뷰의 언급을 봤을때 두 변화구 다 구질이 비슷한 무회전계통인데 박철순선수 본인의 사용 방식이 체인지업과 같았기 때문에 팜볼이라 정의하신 것 같다.마구마구나 프로야구 매니저에선 박철순 카드가 팜볼과 너클볼 둘 다 가지고 있고 마구매니저에서는 너클볼설을 채택하였다. 또한 나무위키에서도 근래 인터뷰를 따라 체인지업의 팜볼 문단에 박철순선수가 팜볼을 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2016 넥센 히어로즈 용병인 로버트 코엘로만 봐도 포크볼을 팜볼형태로 무회전에 가깝게 던지는 등 던지는 방식이나 그립, 구질명을 떠나 무회전에 가까운 공을 던졌다 자체가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고.
  • 젊은 시절 굉장한 미남이었다. 지금의 이대형이나 심수창급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듯. 요즘처럼 열광적이지는 않았지만 박철순 좋아서 야구본다는 젊은 여성팬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30대 들어서 조금 일찍 탈모가 찾아왔고 세월의 풍파와 탈모를 견디지 못하며 그 미모를 오래 유지하진 못했다.
  •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에서는 공유가 1982년 당시 박철순 역을 맡았는데, 젊은 시절 박철순과 굉장히 싱크로율이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그 당시 박철순이 정말 얼마나 잘생겼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 파일:external/image.sportsseoul.com/20160913014055_9.jpg
    선수 박철순, 감독 김용희 시절. 김용희롯데-SK 감독과는 초등학교 동창이다. 때문에 아주 재미있는 장면이 나온 적이 있다.
    • 김용희가 처음으로 롯데 감독을 맡았던 1994년 4월 12일, OB 베어스와의 홈 개막전에서 있었던 일이다. 스코어 4:4로 맞선 연장 11회 말 OB의 투수 강길용이 2루타와 실책, 고의사구로 무사 만루를 만들어 놓은 상황에서 OB는 투수 교체를 단행했다. 당시 대부분의 팬들은 지난 해(1993년) 데뷔하자마자 평균자책점 1.11, 이는 선동열을 제외한 다른 선수가 기록한 가장 낮은 평균차책점이다. 9승에 23세이브라는 엄청난 기록을 세운 마무리 김경원이 마운드에 오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마운드로 올라온 투수는 그가 아니었다. 다름아닌 박철순이 등판한 것. 당연히 조금이나마 사직 야구장에 응원을 왔던 OB 팬들은 난리가 났고, 롯데 팬들마저도 그의 등판에 기립박수를 보냈다. 홈 팀의 감독과 초등학교를 같이 다닌 선수가 마운드에 오르는 장면 자체부터가 너무나도 희귀한 상황이었고, 등판한 상황도 매우 긴박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마운드에 올라온 박철순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공을 던졌고, 8번 타자 홍순기와 9번 타자 공필성을 모두 삼진으로 잡아내며 2사 만루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 다음 타자였던 1번 타자 전준호에게 끝내기 중전 안타를 내주면서 팀의 패배를 막지는 못했다.
  • 젊거나 야구를 본 지 오래지 않은 팬들에게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선수 시절의 박철순은 진정한 전국구 스타였다. 특히 그의 투혼에 모든 야구팬들이 찬사를 보내었다. 1995년 한국 시리즈에서 패배한 롯데 자이언츠의 팬들조차 '박철순의 OB에게 진 것은 괜찮다.' 라는 말을 할 정도. OB의 박철순이 아니라 박철순의 OB라고 부를 정도였으니, 팀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던 것.
  • 전성기 시절에는 저음의 목소리에 뛰어나게 잘 생긴 용모로 국내에서 미남 운동선수 하면 종목을 불문하고 첫손에 꼽히는 외모 덕에 야구에 관심없는 여성들도 박철순의 팬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30대부터 일찍 탈모가 진행된 후에는 약간 안습. 초코파이 광고에도 나온 적이 있다. # 한 영화에서도 그는 여성팬 엄청 많이둔 역으로 나왔다.

7.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기록
연도소속경기이닝승률ERA피안타피홈런4사구탈삼진실점자책점WHIP
1982OB 36 224⅔
(2위)
24
(1위)
4 7
(3위)
- 0.857
(1위)
1.84
(1위)
151 7 73 108
(2위)
60 46 0.970
1983 4 10⅓ 0 1 0 - 0.000 3.48 10 0 4 4 4 4 1.355
1984 1군 기록 없음
1985 9 50⅓ 1 4 0 - 0.200 2.68 36 2 16 34 19 15 0.993
1986 13 53⅓ 5 3 0 - 0.625 3.54 46 3 22 29 23 21 1.275
1987 5 24 2 0 1 - 1.000 2.25 17 0 9 11 7 6 1.083
1988 1군 기록 없음
1989 12 16⅓ 1 1 0 - 0.500 4.96 17 1 9 14 11 9 1.592
1990 18 96 4 9 0 - 0.308 4.78 104 6 41 58 53 51 1.510
1991 18 102⅔ 7 5 0 - 0.583 3.51 97 5 53 55 48 40 1.403
1992 30 99⅔ 7 6 9
(5위)
- 0.538 2.80 92 5 35 68 35 31 1.264
1993 25 116⅔ 7 5 2 - 0.583 2.08 99 3 39 90 30 27 1.183
1994 20 93 7 7 0 - 0.500 2.61 73 3 32 66 31 27 1.097
1995 20 94⅔ 9 2 0 - 0.818 4.47 98 8 50 67 54 47 1.479
1996 21 68⅔ 2 6 1 - 0.250 2.62 68 0 38 44 26 20 1.485
KBO 리그
통산(15시즌)
231 1050⅓ 76 53 20 - 0.589 2.95 908 43 421 648 401 344 1.237


[1] 미국 진출 당시 등록명[2] 호적상 출생년도는 1956년, 똑같은 부산 출신의 장효조도 1954년 생이지만 호적상으론 1956년 생이다.[3] 현재의 부산광일초등학교. 1998년 남일초교와 동광초교가 통합되어 광일초등학교가 되었다.[4] 부산고등학교에 진학했다가 대전 대성고등학교로 전학했으나, 야구부 사태로 팀이 해체된 후 상경하여 배명고등학교로 다시 전학했다.[5] 법학과(1974학번)에 재학했는데, 학점도 안 나오고 공부도 안 되어서 그만둔 후 공군에 입대하여 복무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학교는 다르지만 허구연, 김병현, 최희섭 등도 모두 법학과 출신이다. 다만 허구연은 공부해서 법학과로 입학했다.[6] 박철순 헌정곡으로 구단에서 제작한 응원곡이다.[7] KBO리그 통산 첫 번째 영구결번은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던 김영신 선수이다. 이전에 명시된 '두 번째 영구결번'이라는 표현보다는 두 번째로 영구결번식을 가지고 결번 처리된 선수가 맞다.[8] 정확히는 KBO리그 선수 중 영구결번식과 은퇴식을 모두 경험한 첫 번째 선수가 맞는 표현. 은퇴식은 1997년 4월 29일에 열렸고 영구결번식은 2002년 4월 5일에 열렸다.[9] 참고로 KBO 통산 첫 영구결번식 수혜자는 LG 트윈스의 김용수 선수이다.[10] 이 해 박철순은 24승 4패 7세이브, 승률 0.857, 평균자책점 1.82를 기록했다.[11] 단일시즌 연승으로는 세계기록이며, 일본의 다나카 마사히로가 2013년 2012시즌에 이어 23연승으로 경신하기 전까지는 아시아 기록이었다.[12] 물론 이 기록은 호적상 생년을 따른 것이다. 실제 정확한 기록은 41세 7개월 8일.[13] 이 기록은 2017시즌 앤디 밴 헤켄의 7타자 연속 탈삼진 기록으로 깨지게 되었다.[14] 데뷔 시즌 성적 1위는 다시는 나와서는 안될 혹사를 당한 장명부. 참고로 최동원과 선동열은 데뷔 시즌에 기대보다는 못한 편이다. 물론 그 성적도 swar 5~6 이상으로 훌륭했다.[15] 선수생활 마지막 시즌이었던 1996년에도 당시 잠실구장 스피드건 기준으로 140km 초반대의 구속을 어렵지 않게 찍었다. 고질적인 부상에다 당시 실제나이가 만 42세였음을 감안하면 대단한 스터프.[16] 보통 얼차려를 하더라도 엉덩이를 때리지 허리를 때리진 않는다. 아니 조선시대에도 허리를 치는 것은 사람 죽이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태형을 할때도 엉덩이를 때렸고 허리를 때를 때는 태형을 빙자해 누구하나 죽이려고 할때나 하는 짓이었다.[17] 이 허리 부상은 최동원 커리어 내도록 그를 괴롭혔다.[18] 선수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전에도 선수나 코치의 뺨을 때리는 등의 폭력이 몇 번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까지의 체육계의 분위기를 감안하면 윤동균 감독이 유난히 심했다고만 볼 수는 없다.[19] 박동희 기자가 라디오에서 감독 이기는 선수는 없다고 했는데 사실이 아니다. 이 양반은 감독을 사실상 이긴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