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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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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덕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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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 베어스 등번호 40번
팀 창단 <colbgcolor=#c0281f><colcolor=#fff> 김영덕
(1982)
사인상
(1984~1986)
OB 베어스 등번호 50번
결번 김영덕
(1983)
김창식
(1984)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60번
결번 김영덕
(1984)
황규봉
(1987~1989)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0번
결번 김영덕
(1985~1986)
신동주
(1991~1993)
빙그레 이글스 등번호 70번
결번 김영덕
(1988~1990)
다카시로
(2010)
빙그레 이글스 등번호 80번
결번 김영덕
(1991~1992)
강병철
(1994~1998)
빙그레 이글스 등번호 99번
결번 김영덕
(1993)
조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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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명
(1990~1992)
김영덕
(1997~1998)
노찬엽
(1999~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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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덕
金永德 | Kim Yeong-Duk
[1]
출생 1936년 1월 27일
일본 제국 교토부[2]
사망 2023년 1월 21일 (향년 86세)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즈시카이세이고등학교[3] (졸업)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56년 아마추어 자유계약 (난카이)
소속팀 난카이 호크스 (1956~1963)
해운공사 야구단 (1964)
크라운맥주 야구단 (1965)
한일은행 야구단 (1966~1969)
지도자 한일은행 야구단 감독 (1969~1971)
장충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1977)
북일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1977~1981)
OB 베어스 감독 (1982~1983)
삼성 라이온즈 감독 (1984~1986)
빙그레 이글스 감독 (1988~1993)
LG 트윈스 투수 인스트럭터 (1996)
LG 트윈스 2군 감독 (1997~1998)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코치 (1971)
대한민국 청소년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1978, 1981)
경력 KBO 규칙위원 (1996)
본관 언양 김씨 (彦陽 金氏)[4]

1. 개요2. 선수 경력3. 지도자 경력4. 사망5. 여담6. 평가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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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야구인. 재일교포 출신이다. 일본명은 가네히코 나가노리이며 개명 후에는 가네히코 히데시게이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 프로야구 난카이 호크스에서 투수로 활약하고 은퇴한 후 모국인 한국으로 건너와 한국실업야구를 평정한 투수가 되었다.

2. 선수 경력

한국의 역대 투수들을 정리할때 아마의 최동원[5], 실업의 김영덕[6], 프로의 선동열, 메이저리그의 박찬호, 류현진으로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

일본 교토부 출생으로 1956년 일본 프로야구 난카이 호크스에 입단했다. 1959년 1군에 데뷔하여 1963시즌까지 통산 69경기(158.2이닝)에 출장하여 7승 9패 평균자책점 3.57의 성적을 거두었다. 통산방어율을 보면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지만 그에 비해 출장 경기수는 많지 않은 편이다. 부상이 많았고, 무엇보다 이시절 난카이 호크스퍼시픽리그를 평정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팀 투수진이 워낙 좋았던 탓도 컸다. 그 시절 일본프로야구에서는 수퍼 에이스 투수들이 한 시즌에 350이닝 넘게 던지는 것이 예사였고 팀의 다른 투수들은 이닝 소화를 조금 거들어주는 경향이 강했다. 그리고 재일교포로 인한 차별도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한편 김영덕 본인 자신은 오사카판 최동원의 4연투 4연승이란 말도 안 되는 역투로 한 차례도 출장하진 못했지만 1959년 일본시리즈 우승을 경험하기도 했다. 아는 사람은 적지만 그가 콩라인이 아니라는 또다른 증거.

차별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차에 일본 사회인야구에서 별볼일 없는 선수였던 김성근이 한국 실업야구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김영덕은 자신도 고국 무대에서 뛰어보기로 결심했다. 만 28세였던 1963시즌을 끝으로 난카이 호크스에서 은퇴하고 대한민국으로 건너온 김영덕은 이후 그야말로 리그를 초토화시켰다. 실업 야구 데뷔 첫해인 1964년 33경기 255이닝 동안 단 9실점하여 방어율이 무려 0.32.

1967시즌은 특히 각종 기록들이 쏟아진 해로 그의 전성기에 해당하는 시절이었다. 1967시즌 25경기에 등판해 17승 1패 승률 94%라는 놀라운 기록을 수립했다. 시즌 평균자책점은 0.49. 프로야구 시절까지 포함하면 1위의 기록이다. 또 54이닝 동안 무실점을 기록함과 동시에 10연승을 달성한 전설적인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9월 25일에는 퍼펙트 게임까지 달성했다. 실업야구 최초의 퍼펙트 게임은 김영덕이 기록하기 이틀 전인 9월 23일 고순선이 먼저 했다고 한다. 김영덕은 2번째.

그밖에도 노히트 노런 2회를 기록하는 등 선수시절 동안 신화적 기록을 쌓았다. 여기에 1999년 한국야구위원회대한야구협회가 공동출판한 한국야구사에서는 슬라이더를 국내야구계에 최초로 도입한 인물로 꼽았으나 본인 인터뷰에 따르면 본인은 포크볼과 싱커를 처음 던진 사람이며, 슬라이더는 역시 재일교포출신인 신용균이 먼저라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타자로서도 뛰어난 활약을 보였는데, 데뷔시즌인 1964시즌의 경우 3할 타율로 타율 6위에 올랐고, 4개의 홈런으로 홈런 공동 2위, 출루율은 4할 7푼 6리로 3위에 올랐다.

본인의 인터뷰에 따르면 재일교포 출신 야구인으로 실력에 있어서는 그닥 차별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이를 뒤집어 말하면, 실력 외적인 면에서는 차별이 존재했다는 이야기도 된다. 실제로 2010년의 한 인터뷰에서 김영덕 본인이 일본에서는 조센징, 한국에서는 반쪽바리 소리를 들었다고 직접 언급하고 있다. 김성근보다 일본에서 훨씬 오래 살았고 서른살에야 고국땅을 밟았지만 재일교포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했다. 다만 연로한 후로는 말투가 느려졌고 발음도 예전보다 부정확해지면서 일본어투가 많이 느껴지기는 한다.

3. 지도자 경력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김영덕/지도자 경력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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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현역 은퇴 이후 실업야구와 고교야구 지도자로 활동하였고, 프로야구 출범 후 OB 베어스, 삼성 라이온즈, 빙그레 이글스 등에서 감독을 역임하며 1980~90년대 한국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감독 중 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감독 재임 시절 맡았던 팀에서 꽤 혁혁한 공적을 쌓았는데 OB(현 두산)에서는 프로야구 원년 우승 감독이라는 업적을 이뤘고 삼성에서는 전후기리그 통합 우승이라는 전무후무의 기록을 남겼으며 빙그레에서는 허약한 전력의 신생팀을 한국시리즈 우승권 팀으로 변모시킨 성과를 냈다. 무엇보다 프로야구 원년 우승 감독이라는 타이틀 하나만으로도 한국야구사에 자신의 독보적인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김종건의 아날로그 베이스볼 김영덕편 상, 김종건의 아날로그 베이스볼 김영덕편 하 KBO 특별기획 야구를 말하다 - 김영덕 편

4. 사망

2023년 1월 21일,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향년 86세. 관련기사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우승 기록인 1982년 한국시리즈 우승 당시 소속팀이던 두산 베어스[7] 및 6년간의 재임 기간 중 4번이나 한국시리즈 진출을 이끌던 옛 소속팀 한화 이글스[8]는 구단 공식 SNS를 통하여 김 전 감독의 별세 소식에 조의를 표했다.두산한화 반면 삼성 라이온즈팀의 첫 번째 우승[9] 이끌었고 임기 중 1~2위를 늘 유지했던 감독이었음에도 조의를 표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1986년 시즌 후의 매끄럽지 못했던 결별 과정에서 생긴 양측의 불편한 관계를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아니면 단순히 삼성 SNS 관리자가 팀의 옛 역사에는 딱히 관심이 없는 걸 수도 있고.

5. 여담

  • 현역 시절 별명은 변태였다. 아마 1번 항목의 그 변태로 추정된다. 김성근의 야신이나 김응용코끼리 같은 별명과 다르게 좀 그렇다. 그냥 지어낸 것도 아니고 1980년도 초부터 김성근 OB 베어스 감독이 삼성으로 야반도주하듯이 떠난 김영덕 감독을 비하하려고 선수들에게 변태라고 붙였다는데 왜 이런 별명이 생겼는지는 당사자들만 알 듯. 실제로 삼성 감독 재임 시절 OB의 신인 포수 배원영이 선배들 지시로 멋모르고 삼성 덕아웃을 향해 "변태, 변태"라고 외쳤다가 김영덕 감독의 불꽃 싸대기를 맞았다고 한다. 그 전까지는 할배였다.
  • 빙그레 감독 시절 김영덕 밑에서 코치생활을 했던 이선희의 증언에 따르면 선수뿐만이 아닌 코치들에게도 엄격한, 상당히 하드코어한 스타일을 가진 감독이였던듯 하다. 그 일례로 선수들이 400m 트랙 달리기를 하고 있으면 가만히 서있는 코치들에게도 선수들하고 같이 뛰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6.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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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관련 문서


[1] 한국 국적 완전 취득전 일본명 가네히코 나가노리(金彦永徳), 개명 후 가네히코 히데시게(金彦任重). 김영덕은 "내 일본명이 가네히코 히데시게(金彦任重)다. 원래 가네히코는 일본인 사이에서 '성'이 아닌 '이름'으로 쓰인다. 그런데도 아버지가 가네히코를 이름이 아닌 성으로 쓴 건 내가 '언양(彦陽) 김(金)씨'의 후손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언양 김씨들은 뿌리를 잊지 않으려고 '언양'의 뜻이 포함된 '가네히코(金彦)'라는 이름으로 창씨 개명했다. 조선 이름으로 살았으면 좋았겠지만, 일본에 사는 교포들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름을 바꿔야 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의 뿌리가 어딘지 절대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2] 이후 소학교 4학년 때 가나가와현 즈시시로 이주해 그곳에서 자랐다. 부모님의 고향은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3] 逗子開成高等學校.[4] #[5] 아마시절이 최전성기라는 당시 선수들의 증언이 많고, 박철순에게 구타당한 허리부상으로 프로에서는 도리어 기량이 떨어졌다는 평들이 많다.[6] 통산 0점대 ERA를 기록했다. 박철순, 백인천 등 해외에서 뛰던 선수들이 한국 프로야구 초창기에 리그를 폭격했으니 난카이 호크스 프로 출신인 김영덕이 한국 실업야구를 초토화하는 건 그야말로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일본 현역 프로야구 1군 선수가 한국 사회인야구에서 뛰는 것과 같은 수준.[7] 재임 당시 OB 베어스[8] 재임 당시 빙그레 이글스[9] 한국시리즈로 범위를 국한한다면 2002년 한국시리즈가 첫 우승이지만 엄연히 1985년 통합우승도 KBO가 인정한 우승으로 한국시리즈 우승과 가치가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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