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4 19:00:27

윤동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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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윤동균(尹東均)
생년월일 1949년 7월 2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강원도 삼척군[1]
학력 동대문상고
포지션 외야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 입단 1982년 OB 베어스 창단 멤버
소속팀 기업은행 야구단 (1969~1977[2])
포항제철 야구단 (1978~1981)
OB 베어스 (1982~1989)
지도자 OB 베어스 코치 (1990~1991)
OB 베어스 감독 (1991~1994)
한화 이글스 코치 (2001~2002)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3]
1982
OB 베어스 등 번호 10번[4]
팀 창단 윤동균
(1982~1991)
문희성
(1998)
OB 베어스 역대 주장
김우열
(1982)
윤동균
(1983)
이홍범
(1984~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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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 현재
1대
김영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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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김성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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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이광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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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이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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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윤동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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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대행
최주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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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김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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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김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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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대행
김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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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대
김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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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대
송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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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김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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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2. 선수시절3. 선수 시절 주요 성적4. 지도자 시절5. 감독 성적6. 트리비아

1. 소개

OB 베어스의 전 야구선수이자 전 감독. 등번호는 10번.

2. 선수시절

강원도 삼척 출신으로 야구는 대전에서 시작했다. 대전 문창초등학교와 충남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동대문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한다. 배명고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할 정도의 실력을 가진 투수 유망주였지만, 연습경기 도중 팀 동료의 머리를 맞추는 사건 때문에[5] 이후 투수로서의 자신감을 상실, 야수로 전향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9년부터 기업은행, 포항제철에서 실업야구 선수를 했으며, 강타자로 맹활약했다. 또한 국제대회에서 강한 면모를 보여 '국제용 선수'라는 명성을 얻기도 했다.

1982년[6] OB 베어스의 창단 멤버로 들어와 1번과 3번을 오가며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큰 기여도를 했다.[7] 1989년 8월 17일 잠실 롯데 전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크보 사상 첫 은퇴 기념 경기에서 김시진으로부터 적시 2루타를 치며 큰 인상을 남겼다. 통산 594경기 출장에 0.285의 타율과 277타점을 기록했다.

3. 선수 시절 주요 성적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출루율 장타율
1982 OB 베어스 77 284 0.342
(2위)
97
(3위)
20
(3위)
5
(1위)
8 47 54
(3위)
9 46 0.428 0.532
1983 97 353 0.275 97 19 1 10 54 49 7 55 0.370 0.419
1984 99 349 0.287 100 14 4 10 40 54 14 61 0.389 0.436
1985 85 286 0.290 83 12 6
(2위)
8 41 41 6 45 0.383 0.458
1986 102 345 0.267 92 14 4 2 37 32 5 46 0.352 0.348
1987 93 294 0.276 81 17 1 0 48 32 0 36 0.350 0.340
1988 35 44 0.205 9 1 0 0 8 2 0 5 0.280 0.227
1989 6 8 0.125 1 1 0 0 2 0 0 0 0.125 0.250
KBO 리그
통산(8시즌)
594 1963 0.285 560 98 21 38 277 263 41 294 0.375 0.415
  • 1989년은 플레잉 코치

4. 지도자 시절

이후 OB의 코치를 하다가, 1991년 이재우 감독이 성적부진으로 사임하자 감독대행을 맡고, 이듬해 프로선수 출신 1호의 감독에 올랐다. 1992년에는 시즌을 5위로 마감했지만, 1993년에는 시즌 3위까지 올라 준플레이오프에 오르는 등 선전을 하긴 했었다.

그러나...

OB 베어스 항명파동과 연루되어 1994년 감독직을 물러났다. 이 사건으로 OB 베어스의 잔여 경기 몰수패가 논의되었으며 결국 윤동균 감독이 자진 사퇴하고 선수단의 대대적인 징계로 막을 내렸다. 사태의 원인은 감독의 책임이 크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물러난 건 감독 혼자라는 면에서 억울한 면도 있다. 이 사건 이후로 윤동균 감독은 선수들과 화해하였다.

그 후 SBS 야구 해설위원, 음식점 경영 등 개인 사업을 하다 2001년부터 한화 이글스의 코치를 맡아 야구계에 복귀했지만 2002년 말에 이광환 감독이 경질되면서 코치 직에서 사퇴했다.

5. 감독 성적

역대 감독 전적
연도소속팀경기수정규리그포스트시즌
1991 OB 베어스 47 26 20 1 8위 -
1992 126 56 66 4 5위 -
1993 126 66 55 5 3위 3위[8]
1994 120 50 69 1 7위[9] -
­통산 419 198 210 11
  • 1991년은 감독 대행 성적

6. 트리비아

  • 비록 성적에 너무 부담을 못 이겨 경력에 큰 흠집을 남겼지만, 김민호, 안경현, 임형석, 장원진 등 훗날 OB의 황금기를 이끄는 선수들을 발굴해 1995년 OB 베어스의 창단 두 번째 우승의 초석을 다졌다는 호평을 듣기도 했다. 실제로 두산 베어스 공식 홈페이지의 역대 감독 소개에서도 "베어스 간판 선수 출신으로서 코치 수업을 받고 있던 윤동균 제 5대 감독은 부임 후 무명 선수 발굴 등 부족한 환경 속에서 팀의 경쟁력을 키워내며 베어스의 팀 재건과 상위권 토약의 기틀을 마련했다."라고 소개되어 있다.
  • 당시로서는 은퇴할 나이인 33살에 프로 데뷔해서 40살까지 활약할 수 있었던건 김성근 감독 덕분이라고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기업은행에 들어갔는데 당시 김성근 감독이 투수코치였다. 김 감독이 보기에 제구는 떨어지지만 볼이 빨라 투수로 키워보려고 해 김 감독 집으로 잡혀 들어가 하숙생활을 하면서 매일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오전 5시만 되면 뒷산에 올라가 훈련하고 출퇴근도 함께 해 술 마실 틈이 없었는데 그 덕분에 선수생활을 오랬동안 할수있었다고 한다.
  • 한국프로야구 은퇴 선수 협회 제3대 회장, 일구회 제14대 회장을 지냈다.
  • 현재는 KBO에서 경기 운영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호쾌하고 듬직한 인상을 지녀 OB 베어스 초창기의 얼굴 마담으로서 광고 모델로도 자주 기용됐다. 근데 허구연을 닮았다1990년대 초반 지금도 가끔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대웅제약의 소화제 '베아제'의 광고 모델로 나오기도 했다. 다만 목소리는 더빙.
  • 1982년부터의 경력 때문에 삼미 슈퍼스타즈의 감사용을 다뤘던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에서도 등장한다. 배우는 이명수.
  • 은퇴하고서 영구결번을 받았지만, 항명사태가 터져서 윤동균 감독이 반 쯤 흑역사로 전락하자, 영구결번이 해제되는 안습한 일을 겪었다. 1990년부터 1997년까지 10번은 누구도 달지 않았다.
  • 아들 윤준호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야구선수였다. 한국프로야구/1996년/신인드래프트 당시 OB의 마지막으로 지명된 윤준호는 서울고 졸업 후 대학 대신 상무에 입대하여 기량이 성장했지만 사실 프로에서 활약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이 지명은 의외라는 평을 들었다. 대체로 구단에서 우승도 했고, 한때 프랜차이즈였던 윤동균 감독에게 화해의 의미로 지명했다는게 중론이다. 당시 프로야구 최초의 부자(父子) 야구선수로 화제를 모았으나, 결국 많은 전문가들의 예상대로 아무런 활약 없이 조기 은퇴를 하고 말았다. 이후 베트남으로 건너가서 침향 관련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1] 현 강원도 삼척시. 야구를 대전에서 시작했으나 실제 출생지는 강원도 삼척 원덕면이라고 한다. 류중일이나 이만수처럼 야구를 시작한 곳이 고향으로 잘못 알려진 것과 유사 사례.[2] 1970~1973년까지는 군 복무.[3] 82년 우승은 우승 반지가 생기기 전이지만 훗날 2011년에 베어스 구단에서 직접 우승 멤버들을 초청해서 우승 반지 수여식을 가졌으므로 우승 반지라고 해도 무방하다[4] 그의 등번호였던 10번이 영구결번 된 적이 있다. 그러나 후술할 항명파동으로 경질되면서 영구결번도 해제되었다.#[5] 이때 윤동균에게 투구를 맞은 동료 선수는 한동안 기억상실증을 앓다가 기적적으로 회복되었다. 윤동균은 당시 동료가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면 야구를 포기하고, 인생도 망쳤을 것이라고 회고했다.[6] 프로야구 선수 생활을 시작했을 이 해의 나이가 무려 33세로 노장 중에서도 최고 노장 선수 군에 속했다. 참고로 이 당시는 30대 초반만 돼도 노장 소리를 듣던 시절이었다.[7] 더불어 1982년 원년 프로야구 개막식 당시 전 구단 선수 대표로 나와서 선서문을 읊은 사람이기도 하다.[8] 준플레이프에서 4위 LG에게 패했지만, LG가 한국시리즈 진출 실패하여 최종 3위.[9] 사퇴 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