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천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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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석천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 |||||||||||||||||||||||||||||||||||||||||||||||||||||||||||||||||||||||||||||||||||||||||||||||||||||
1999 |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코치 | ||
2015 | 2016 | 2019 |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width=100%><table align=center><tablebordercolor=#f73600><tablebgcolor=#f73600> | 한화 이글스 역대 주장 (빙그레 시절 포함)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20272C,#d3dade | <rowcolor=#000000> 1986~1990 | 1991~1993 | 1994~1995 | 1996 | 1997~2000 |
유승안 ☆ ☆ | 이강돈 ☆ ☆ | 강정길 | 장종훈 | 강석천 ★ | |
<rowcolor=#ffffff> 2001 | 2002 | 2003 | 2004 | 2005~2006 | |
장종훈 | 김종석 | 임수민 | 이영우 | 이도형 ☆ | |
<rowcolor=#ffffff> 2007 | 2008~2010 | 2011~2012 | 2013 | 2014 | |
정민철 | 신경현 | 한상훈 | 김태균 | 고동진 | |
<rowcolor=#ffffff> 2015 | 2016 | 2017 | 2018 | 2018~2019 | |
김태균 | 정근우 | 이용규 → 송광민 | 최진행 송광민 (임시) | 이성열 | |
<rowcolor=#ffffff>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 |
이용규 최재훈 (임시) | 노수광 → 하주석 | 하주석 장민재 (임시) | 정우람 | 채은성 |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bordercolor=#131230><tablebgcolor=#131230> | 두산 베어스 2군 역대 감독 |
{{{#!wiki style="margin: 0 -10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20272c,#d3dade | |||||
초대 | 2대 | 3대 | 4대 | ||
강대중 (1983~1984) | 배수찬 (1985) | 이충순 (1986) | 이선덕 (1987) | 감독 대행 이광환 (1987) | |
5대 | 6대 | 7대 | 8대 | ||
이광환 (1988) | 감독 대행 이선덕 (1989~1990) | 윤동균 (1990~1991) | 정연회 (1991~1994) | 손상대 (1995~1996) | |
9대 | 10대 | 11대 | 12대 | 13대 | |
김윤겸 (1997) | 손상대 (1998) | 강태정 (1998) | 손상대 (1999~2003) | 송재박 (2004~2006) | |
14대 | 15대 | 16대 | 17대 | ||
박종훈 (2007~2009) | 김광림 (2010) | 박승호 (2011) | 송재박 (2012) | 감독 대행 김우열 (2012) | |
18대 | 19대 | 20대 | 21대 | 22대 | |
송일수 (2013) | 황병일 (2014) | 송재박 (2015) | 공필성 (2016~2017) | 이강철 (2017) | |
23대 | 24대 | 25대 | 26대 | ||
강석천 (2018~2019) | 박철우 (2019~2021) | 이복근 (2022) | 이정훈 (2023~ ) |
빙그레 / 한화 이글스 등번호 17번 | ||||
강만식 (1988) | → | <colbgcolor=#000><colcolor=#fff> 강석천 (1989~2003) | → | 차명주 (2004.6.6.~2006) |
한화 이글스 등번호 84번 | ||||
함학수 (1991~1993) | → | 강석천 (2004)' | → | 송진우 (2011~2014) |
한화 이글스 등번호 87번 | ||||
김성호 (1989~1993) | → | 강석천 (2005~2014) | → | 니시모토 (2015) |
두산 베어스 등번호 86번 | ||||
송일수 (2013~2014) | → | 강석천 (2015~2024) | → | 결번 |
}}} ||
강석천 姜錫千 | Kang Seok-Chun | |
출생 | 1967년 12월 7일 ([age(1967-12-07)]세) |
충청북도 청주시[1]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신탄진초 - 한밭중 - 대전고 - 인하대 |
신체 | 185cm, 87kg, AB형 |
포지션 | 3루수, 외야수[2], 지명타자[3]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 입단 | 1989년 1차 지명 (빙그레) |
소속팀 | 빙그레-한화 이글스 (1989~2003) |
지도자 | 한화 이글스 1군 플레잉코치 (2002~2003) 시애틀 매리너스 연수코치 (2004) 한화 이글스 2군 수비코치 (2005) 한화 이글스 1군 수비코치 (2006~2008) 한화 이글스 1군 타격코치 (2009) 한화 이글스 2군 타격코치 (2010~2011)[4] 한화 이글스 1군 타격코치 (2011~2012)[5] 한화 이글스 2군 타격코치 (2012)[6] 한화 이글스 2군 수비·주루코치 (2013)[7] 한화 이글스 1군 수비·주루코치 (2013~2014)[8] 두산 베어스 1군 수비코치 (2015~2017)[9] 두산 베어스 1군 타격코치 (2017)[10] 두산 베어스 2군 감독 (2018~2019)[11] 두산 베어스 1군 수석코치 (2019~2022)[12] 두산 베어스 잔류군 재활코치 (2023) 두산 베어스 2군 수비코치 (20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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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못 치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하는 것이다. 못 치면 경기 끝나고 숙소까지 뛰어간다는 생각으로 악을 갖고 야구를 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야구인. 前 두산 베어스 재활/잔류군 코치.
1990년대 초반 한대화, 1990년대 중반 홍현우, 1990년대 후반 김한수에 가려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본적은 없지만, 묵묵히 이글스의 3루를 지키며 프랜차이즈 스타로 남은 선수. 바로 강석천이다.팀 동료들이 경쟁하듯 빛을 내뿜던 시절에는 그 빛에 묻혀있어야 했지만, 하나 둘 불이 꺼진 암흑기에도 홀로 남아 묵묵히 고군분투하며 팀을 치욕에서 구하고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선수였다. 강석천은 신인지명된 1989년부터 1990년대 초반 사이 한국시리즈의 단골손님이었던 최강팀 빙그레 이글스의 주축선수였다
그러나 이정훈과 이강돈도 떠나버리고, 장종훈의 방망이도 서서히 식어가며 침체기로 빠져들던 1990년대 후반에 강석천은 자신의 전성기를 맞이했고, 1999년 팀의 유일한 우승을 이끌어낸 주역이 되기도 한 선수였다.
2. 선수 경력
2.1. 빙그레-한화 이글스
데뷔 첫 해 강석천은 70경기에 출장해 .289를 기록했고, 이듬해에는 확실한 주전 3루수로서의 입지를 굳히며 역시 2할 8푼대의 방망이 솜씨를 과시했다. 그러나 타격왕(89년 고원부, 91~92년 이정훈), 타점왕(89년 유승안, 90~92 장종훈), 최다안타왕(87년 이정훈, 89~90년 이강돈, 91년 장종훈), 홈런왕(90~92년 장종훈)이 있었기에 2할8푼정도의 기록은 눈에 띄지 못했다. 빙그레 이글스 전성기의 다이너마이트 타선에서 6번 7번을 맡아 상대팀에 쉬어갈 틈을 주지 않은 선수.
1990년 태평양전에서 싸이클링 히트를 치고, 1992년까지 매년 두자릿 수 언저리의 홈런, 도루 모두 해낼 수 있는 호타준족 내야수였으나,[13] 1993년 시즌 후반에 부상을 입고 장타력이 사라져버렸다. 부상 이후 95년부터 외야수로 전향하였고 99년에 다시 3루수로 복귀했다. 장타력이 줄었지만 두자릿수 도루가 가능한 빠른 발과 2할 9푼~3할 정도의 타격을 보여주며 한화 3루수 자리를 지켜왔고, 더불어 이영우가 등장하기 전까지 리드오프 역할도 했었다.
커리어 하이는 1997 시즌. 중견수와 지명타자로 123경기에 출장해, 타율 0.322, 7홈런, 17도루를 기록하며 생애 첫 3할 타율을 기록했고, OPS도 0.809, wRC+는 126.6을 기록했다.
한화의 유일한 우승 시즌이던 1999년에는 팀의 주장을 맡았고, 두번째 3할 타율을 기록하고 20도루를 하는 등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여러모로 소리없는 강자라는 이미지가 어울리는 선수. 2000년 시즌 종료 후에는 FA 자격을 얻어 한화와 3년 총 5억 1,000만원에 재계약했다.
포지션이 3루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방 쳐줄 수 있는 장타 능력이 부족한 대신 컨택이 준수하고 발이 빨라 주루 능력이 괜찮은 선수였다. 또한 1999년에는 16개의 사구를 맞으며 나갔을 정도로 공필성 못지않게 근성 있는 플레이를 선보이기도 했다.
2001년까지 한화의 주전 3루수 자리를 지켜오다가, 2001년부터 노쇠화가 겹침과 동시에 신인임에도 상당한 임팩트를 보이던 김태균 등에게 밀려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기 시작했고, 2002년 시즌을 앞두고 플레잉코치로 전환되었다. 유승안 감독의 리빌딩 계획에 따라 결국 2003년 시즌 중 은퇴를 선언하며 15년 간의 선수생활을 마무리했다. 은퇴식은 2003년 9월 20일 대전 KIA전에서 열렸다.
박한 연봉으로 주목받은 적이 있는데, 1996년도에 연봉이 고작 2,900만원이었다. 당시 야구선수들 연봉은 지금의 그것에 비해 많이 적긴 했지만, 1996년에도 2900만원의 연봉은 주전에 어울리지 않았던 액수.[14] 다행히 1997년부터에는 그럭저럭 주전에 어울리는 연봉을 받았다.
3.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 ||||||||||||||
<rowcolor=#fff> 연도 | 소속팀 | 경기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1989 | 빙그레-한화 | 70 | 135 | .289 | 39 | 11 | 0 | 5 | 24 | 23 | 1 | 12 | .481 | .347 |
1990 | 113 | 356 | .281 | 100 | 24 (2위) | 1 | 12 | 49 | 67 | 16 | 51 | .455 | .367 | |
1991 | 126 | 465 | .275 | 128 | 21 | 4 | 11 | 57 | 72 | 17 | 49 | .409 | .342 | |
1992 | 109 | 393 | .257 | 101 | 21 | 5 | 12 | 54 | 57 | 9 | 31 | .427 | .310 | |
1993 | 76 | 269 | .249 | 67 | 16 | 1 | 9 | 38 | 33 | 12 | 21 | .416 | .299 | |
1994 | 46 | 150 | .227 | 34 | 8 | 0 | 3 | 13 | 24 | 5 | 21 | .340 | .322 | |
1995 | 81 | 257 | .245 | 63 | 10 | 3 | 4 | 16 | 33 | 12 | 17 | .354 | .290 | |
1996 | 113 | 357 | .286 | 102 | 15 | 2 | 4 | 49 | 44 | 18 | 36 | .373 | .349 | |
1997 | 123 | 447 | .322 (7위) | 144 (6위) | 19 | 4 (9위) | 7 | 34 | 66 | 17 | 44 | .430 | .379 | |
1998 | 125 | 471 | .276 | 130 | 23 | 5 (5위) | 6 | 42 | 58 | 20 | 28 | .384 | .316 | |
1999 | 130 | 433 | .303 | 131 | 22 | 2 | 5 | 42 | 65 | 24 | 49 | .397 | .370 | |
2000 | 123 | 433 | .286 | 124 | 24 | 2 | 7 | 49 | 57 | 15 | 44 | .400 | .349 | |
2001 | 120 | 407 | .260 | 106 | 18 | 1 | 2 | 45 | 44 | 19 | 33 | .324 | .315 | |
2002 | 94 | 242 | .289 | 70 | 11 | 1 | 6 | 28 | 27 | 7 | 22 | .417 | .347 | |
2003 | 8 | 18 | .167 | 3 | 2 | 0 | 0 | 3 | 0 | 0 | 1 | .278 | .211 | |
KBO 통산 (15시즌) | 1457 | 4833 | .278 | 1342 | 245 | 31 | 93 | 543 | 670 | 192 | 459 | .399 | .338 |
4. 지도자 경력
4.1. 한화 이글스
4.1.1. 2014년 이전
현역 막바지이던 2002년부터 플레잉코치 신분으로 지도자 수업을 받기 시작했고, 2003년 시즌 후 공식적으로 은퇴한 뒤 한화 구단의 도움으로 2004년 한 해 동안 미국으로 건너가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1년간 코치 연수를 받았다. 연수 후 귀국해 2005년 친정팀 한화 이글스의 2군 수비코치로 지도자 경력을 시작했다. 2006년부터 1군 수비코치로 승격했다. 한화에서는 수비코치, 주루코치, 타격코치 등 다양한 보직을 거쳤다.
타격코치 시절 평가는 꽤 괜찮았다. 2011년 코칭스태프 보직 변경 전 27경기에서 팀 타율 0.221, 경기당 평균 3.0점밖에 못했지만, 강석천이 1군 타격코치로 올라온 뒤 17경기에서 팀 타율 0.247, 경기당 평균 4.2득점으로 눈에 띄게 공격력이 향상됐다. 타율 상승의 원인은 바로 짧은 스윙을 강조했다고 한다. 1군에 올라오니 선수들이 죄다 홈런 스윙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후 타격폼을 수정하여서 소총수는 소총타격으로 전부 고쳐주었다.
이에 강석천 코치는 "성적이 좋지 않으면 스타도 없는 것이다. 팀이 이겨야 스타가 만들어지는 것 아닌가. 상황에 맞는 스윙을 하도록 주문하고 있다. 개인주의로는 절대 안 된다. 각자 해서는 예전 빙그레 시절처럼 좋은 타선은 만들기 어렵다. 하나의 팀으로 생각해야 한다. 각자 역할을 잊지 않고 에버리지에 중점을 둬야 한다"고 했다.
2012년 2군 타격코치로 보직을 변경했고, 2013년 7월 23일 코칭스태프 개편 과정에서 다시 1군으로 올라왔다. 보직은 1군 수비 및 주루코치.
4.1.2. 2014년
2013년 후반부터 1군 수비코치를 맡았고, 2014 시즌 개막 후에도 수비코치 보직을 유지 중. 하지만 송진우 2군 투수코치, 정민철 1군 투수코치, 조경택 1군 배터리코치와 함께 칰무원으로 한화 이글스의 하위권에 큰 일조를 하는 중이며 과거 타격코치 시절 좋았던 평판마저 깎아먹고 있는 상황이다.대표적으로 수비에서 어이없는 외야 실책이 벌어지면 상당수가 강석천 코치의 수비 시프트로 인한 결과. 그에 따라 2014시즌, 좌익수 최진행과 중견수 피에가 매우 힘들게 수비를 하고 있다. 원래 위치에 있었다면 잡을 수 있는 평범한 외야플라이를 2루타, 3루타로 만들어버린다며 한화 이글스 팬들은 강석천 코치의 퇴진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중.
6월 29일 포항 야구장 삼성 라이온즈전 펠릭스 피에와 수비문제로 말다툼이 있었는데 그가 내뱉은 욕설이 입모양으로 다 나와서 논란이 일었다. #
결국 2014 시즌 후 김성근 감독이 새로 부임한 후 재계약에 실패, 25년간 입었던 친정팀 유니폼을 벗고 말았다.
4.2. 두산 베어스
그 후에 조경택과 함께 두산 베어스 쪽에서 모습을 보여 두산 베어스로 간 것이라는 카더라 통신이 유포되었고, 결국 11월 30일 '곰들의 모임'의 신임 코치 환영식을 통해 두산의 코치로 영입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보직은 1군 수비코치. 전형도와 같이 수비코치를 맡게 된다.
그리고 역시나 한화 때와 다름 없는 무능함을 보여주며 권명철과 함께 무한 까임을 맡고 있다.[15] 시즌 초에는 1루 주루코치를 겸임했으나, 강동우 코치를 콜업하면서 수비만 맡게 된다. 이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어갔고, 팀이 우승을 함에 따라 99년 이후 16년만에 우승 반지를 획득했다.
OSEN 조인식 기자에 따르면 2016년 전지훈련 때 나는 행복합니다를 불렀다고 한다.
2016년 들어서 이미지가 가히 기적적으로 바뀌면서 재평가를 받고 있다. 두산이 리그 최고 수준의 성적과 함께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놀라운 수비력을 보여주면서 강석천의 수비 코칭이 팀에 도움이 되고 있다는 인식이 팬들 사이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또한 코치로써의 실적과는 별개로 늘 선수들과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이 잡히며, 특히 어린 선수들이 호수비를 펼칠 경우,
이런 식으로 예뻐 죽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16]
또한 수비이닝이 끝나고 들어올 때도 야수들과 열심히 소통하는 모습이 보이고 있는데, 특히 주전 키스톤 콤비 오재원, 김재호와는 토의를 하는 수준이라고 한다. KBS N Sports의 송진우 해설위원에 따르면,[17] 두산 선수들이 강석천 코치를 굉장히 잘 따른다고 한다. 이에 돡갤을 비롯한 야구 커뮤니티에서도 강석천을 매우 좋아하고 있으며, 도대체 이런 분을 왜 칰무원이라고...라는 반응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17년 스프링캠프 때 짬뽕밥을 시켜놓고 전형도 코치가 시킨 짬뽕을 먹어버려 한소리 들었다.
2017년 12월 2일 이강철 2군 감독이 수석코치로 임명된 후 공석이 된 2군 감독으로 내정되었다.
2019년 7월 6일 이천 베어스 파크 KIA 타이거즈전 경기 도중 판정에 항의하며 심판에게 폭언 등의 언행을 한 KBO 리그 규정 벌칙내규 3항과 7항에 의거해 제재금 50만원을 부과했다. #
7월 19일 1군 수석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 이에 대해 김태형 감독은 야수들을 위해 바꾸었다고 한다. 26일 콜업된 강동우 코치와 함께 야수들의 타격감 반등에 도움을 주겠다고 한다. 2군 감독은 박철우 코치가 맡는다.
수석코치로 보직을 변경한 뒤에도 여전히 팬들의 평가는 괜찮은 편. 수석코치로 올라온 후 두산 팀 타격이 침체되어 있다가 반등한 데다, 김태형 감독을 보좌하며 서로 케미를 잘 맞추고 있기 때문.
2020 시즌 종료 후 새 감독을 찾는 친정팀 한화 이글스의 감독 후보군 중 하나로 유력하다는 기사#가 나왔으나, 한화의 감독은 외국인 카를로스 수베로가 내정되며 2021 시즌에도 두산 수석코치를 맡게 되었다.
2022 시즌 종료 후 두산이 김태형 감독과의 재계약을 포기한 뒤 이승엽을 새로운 감독으로 선임하고, 수석코치 자리에는 김한수를 앉히면서 사실상 2022년을 마지막으로 팀을 떠나는 게 유력한 상황이었으나, 잔류군 코치로 보직을 변경했다.
2024년부터 다시 1군 수석코치로 보직을 옮길 것이라는 전망이 흘러 나오고 있다. 다만 이승엽 감독을 보좌할 신임 수석코치로는 박흥식 코치가 영입되면서 위 썰은 루머였고, 2024년엔 2군 수비코치로 보직이 바뀌었다. 그리고 시즌이 끝나고 재계약에 실패했다.
5. 사건사고/논란
5.1. 음주운전 뺑소니 사건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1996년 초[18] 음주운전 뺑소니 사고라는 흑역사를 저지른 바 있다. 1996년 1월 6일, 한화 이글스 소속으로 뛰던 시절, 대전광역시 갈마동 경성큰마을아파트 앞에서 술을 마신 상태로 자신의 쏘나타 승용차를 몰고 가던 도중 중앙선을 침범에 마주오던 택시를 들이받은 뒤 도주했고, 마침 사고현장을 발견한 다른 택시기사가 강석천의 차를 뒤쫓아 붙잡혔고 이후 경찰에 입건되었다. 조사 결과 혈중 알코올 농도는 0.06%로 면허정지에 해당하는 사항이었다. #5.2. 수베로 감독에 대한 인종차별 발언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전부터 한화와의 경기에서 상대 투수가 투구할 때만 시끄러운 소음이 반복적으로 들렸고, 그걸 자제해달라고 경기전에도 부탁했지만 계속 그러자 결국 폭발하여 터진 일이다.2021년 9월 26일 두산과 한화의 경기에서 한화 덕아웃 소리가 너무 시끄럽다는 이유로 양팀 간 신경전이 나자는 사실이 아니고 당시 선발 투수였던 최원준이 세트 포지션에서 공을 던질 때마다 그 던지는 타이밍에 갑자기 상대 덕아웃에서 시끄러운 소음이 노골적으로 들려왔다. 그 행동이 계속 반복되었고 이 일은 그 전에도 한화의 상대팀들은 알겠지만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두산 덕아웃이 결국 폭발하여 터진 것이다. 심판은 싸인을 훔치는 것이 아니라 파이팅을 외치는 거라고 해명을 하였으나 이에 "그걸 왜 세트 포지션에 들어가서 하냐. 그럴 거면 베네수엘라 가서 야구하라 해라"라고 받아치면서 인종차별 발언을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결국 다음날 강석천 본인이 당시 상황을 해명하면서 직접 사과했다.
위 링크의 기사에서는 이미 카를로스 수베로 감독 부임 이후 한화 이글스 덕아웃에서는 상대 투수의 세트포지션 때에 소리를 내는 행위가 존재해왔고, 이 행위가 두산 베어스와 해당 시리즈에서도 계속되자 경기 전 강석천 코치가 카를로스 수베로 감독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강석천 코치는 '한국에서는 그것이 비매너 행위이니 웬만하면 자제해달라'고 요청을 했으나 카를로스 수베로 감독은 '이것이 베네수엘라 스타일 야구'라고 반박성 겸으로 이야기했고, 결국 해당 경기에서도 같은 문제가 발생하자 '베네수엘라 가서 야구하라'고 맞대응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다만 후속 보도들이 이어지면서 더 논란이 커지고 있다. 강석천 본인은 당일 해명에서 경기 전 만난 수베로 감독이 덕아웃의 응원이 '베네수엘라 스타일의 야구'라 했다고 발언했고, 다음날 기사에서는 '베네수엘라, 미국, 도미니카 공화국 등은 이런 야구에 익숙하다'고 했다고 발언했다. 그러나 야구부장의 취재에 따르면 수베로 감독은 "나는 이런 식으로 해왔지만 앞으로 자제하겠다"고 말했고, 두산 프런트도 확인했고 한다. 강석천 본인이 "베네수엘라로 가라"는 말을 할 배경도 없던 것이다. 그럼에도 다음날 미국과 도미니카 공화국까지 수베로 감독이 언급한 듯이 언플을 했다. 한화 이글스에는 현재 도미니카 공화국 국적이 없으며, 수베로 감독 역시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일한 경력은 없다.
당사자인 수베로 감독은 덕아웃 소음에 대해 실수라 인정하고 강석천 코치의 발언을 인종차별이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답했다. #
9월 30일 KBO는 강석천 코치와 관련해 두산 구단에 주의 조치를 내렸다. #
시즌 종료 후 아구부장은 사건 당시 주한 베네수엘라 대사관이 KBO와 한화, 두산을 상대로 공식 공문을 보냈었다고 보도했다. KBO 리그 내 일부 관계자들의 베네수엘라 출신 선수들을 향한 인종차별적 발언에 유감을 표한다는 내용이다.[19] 한화 구단은 사건 후 베네수엘라 대사관에 사과 및 재발 방지 조치를 약속하는 공문을 보냈다고 밝혔다.
6. 여담
- 날렵한 이미지와는 달리 3루 수비에서는 구멍이나 다름없었다. 95~98시즌에 황대연(96년 시즌 중 LG로 트레이드), 이민호, 홍원기에 밀려 외야수 수비를 잠시 하게 된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황대연은 1996년 시즌 중 LG로 트레이드, 이민호가 버거씨병으로 리타이어하고, 홍원기는 두산 베어스로 트레이드되면서 3루수로 복귀한 1999년에 유일무이한 한국시리즈 우승의 일원이 되면서 이는 추억보정으로 어느 정도 묻혔다. 그 다음 시즌 2000년까지 주전 3루수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2001년에 김태균[20]과 이범호,[21] 3루수 용병들의 등장으로 입지가 좁아져 은퇴하였다.
- 공필성과 많은 공통점이 있다. 호적상 1967년생, 3루수, 선수시절에 돌글러브 수비와 근성으로 유명했던 점, 코치시절의 무능함과 생명력까지. 다만 타격코치나 주루코치로는 어느 정도 역할에 충실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적성에 맞지 않는 수비코치 보직을 맡아 본의 아니게 비난받는다는 소수의견도 있다. 사실 위에서 말한 대로, 현역 시절 수비에서는 구멍이나 다름 없었던 선수를 왜 수비 코치를 시키는지. 이후 2016년부터 공필성이 두산 베어스 2군의 감독으로 부임하며 같은 팀 코칭스태프로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게다가 둘 다 두산에서 이미지가 바뀌고 있다.
- 정민철에 가려졌지만, 모자나 헬맷을 벗으면 상당한 미남이었다.
7. 관련 문서
[1] 정확히는 현재 청주시와 통합된 청원군 출신.[2] 주로 중견수로 나왔으며 생각보다 외야수로 활동한 시기도 3루수 못지않게 제법 많다. 95년부터 98년까지 활약했다.[3] 02시즌 김태균에 3루수 자리를 넘기고 주전 지명타자로 출장했다. 이외에도 외야수를 맡던 97년 시즌에도 3분의 1 이상을 지명타자로 출전했으며, 다른 시즌에도 이따금씩 지명타자로 나왔다.[4] ~5월 5일[5] 2011년 5월 6일~2012년 5월 11일[6] 5월 12일~[7] ~7월 17일[8] 7월 18일~[9] ~4월 17일[10] 4월 18일~[11] ~7월 18일[12] 7월 19일~[13] 92년에는 도루가, 93년에는 홈런이 하나씩 부족했다.[14] 롯데 자이언츠가 있어서 묻힌 감이 없지 않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화는 비용 지출에 대해 상당히 인색한 구단 중 하나였다.[15] 한화에서 말이 많던 강석천 시프트를 그대로 보여줬다.[16] 당시 조수행 선수가 했던 호수비 링크[17] 2016년 4월 24일 경기 중계[18] 훗날 하주석 때와는 달리 그 당시는 인터넷이 발달하지 못한데다 음주운전이 그렇게 중대한 범죄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하주석의 경우는 그의 음주운전 징계기간 중에 한화의 연고지에서 대전 스쿨존 음주운전 사망 사건이 터지면서 여론이 폭발했던 것.[19] 쿠바처럼 벌이가 션찮고 독재적인 조국을 떠나 더 나은 삶을 기대하고 오는 사람들이 과반수다.[20] 그 다음 시즌인 2002년부터 1루로 전향.[21] 2005년 3루수를 전담하기까지 유격수와 3루수를 번갈아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