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9 19:35:03

이강철

파일:나무위키+유도.png   동명의 정치인에 대한 내용은 이강철(정치인)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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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철의 감독직 / 기타 직책 역임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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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1983 1984 1985~1987 1988~1993 1994~1997
김봉연 김준환 김일권[A] 주장직 폐지 이순철
1998 1999~2001 2002~2004 2005 2006
이강철 이호성 이종범 김종국 이종범
2007 2008 2009 2010 2011
이종범장성호[B] 장성호김상훈[C] 김상훈 최희섭김상훈[D] 김상훈
2012 2013 2014~2016 2017~2018 2019~
차일목 김상훈 이범호 김주찬 김주찬안치홍[E]
[A]: 김일권 이후 긴 시간 동안 주장직을 폐지. 출처
[B]: 이종범의 부진으로 인한 주장 교체.
[C]: 시즌 중 조범현 감독의 지시로 인한 주장 교체.
[D]: 시즌 초 선수단의 반발로 인한 주장 교체.
[E]: 2019년 5월 15일, 김주찬의 재활과 부진으로 인한 주장 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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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철의 수상 이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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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89 1991 1993
1996 1997

보유 기록
10년 연속 10승 1989년~1998년
10년 연속 100탈삼진 1989년~1998년[1]

수상 기록
1996년 한국시리즈 MVP

해태 / KIA 타이거즈 등번호 19번
김만후(1987~1988) 이강철(1989~1999) 박충식(2000~2001)
박충식(2000~2001) 이강철(2002~2005) 신용운(2006~2007)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6번
이복연(1998) 이강철(2000~2001) 이준호(2002)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13번
성영재(2000) 이강철(2001) 홍찬영
KIA 타이거즈 등번호 72번
박창영(1995) 이강철(2006~2007) 장재중(2008~2001)
KIA 타이거즈 등번호 77번
김태룡(2004~2007) 이강철(2008~2012) 김종국(2013~2014)
넥센 히어로즈 등번호 89번
결번 이강철(2013~2016) 박도현(2017~ )
두산 베어스 등번호 71번
문동환(2013~2016) 이강철(2017~2018) 결번
KT 위즈 등번호 71번
이숭용(2014~2018) 이강철(2019~ ) 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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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71_이강철_profile.jpg
kt wiz No.71
이강철(李强喆 / Kang-chul Lee)
생년월일 1966년 5월 24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광주광역시 북구
신체 180cm, 78kg
학력 서림초-무등중-광주일고-동국대
포지션 투수
투타 우언우타
프로입단 1989년 1차 2순위 (해태)
소속팀 해태 타이거즈 (1989~1999)
삼성 라이온즈 (2000~2001)
KIA 타이거즈 (2001~2005)
지도자 KIA 타이거즈 2군 투수코치 (2006)
KIA 타이거즈 1군 투수코치 (2007~2012)
넥센 히어로즈 1군 수석코치 (2013~2016)
두산 베어스 2군 투수코치 (2017~2017.4.18)
두산 베어스 2군 감독 (2017.4.18~2017)
두산 베어스 1군 수석·투수코치 (2018)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 투수코치 (2017~2018)
kt wiz 감독 (2019~)
1. 개요2. 선수 경력3. 플레이 스타일4. 지도자 경력
4.1. KIA 타이거즈 코치 시절
4.1.1. 2010 시즌4.1.2. 2011 시즌4.1.3. 2012 시즌
4.2. 넥센 히어로즈 코치 시절
4.2.1. 2013 시즌4.2.2. 2014 시즌4.2.3. 2016 시즌
4.3. 두산 베어스 코치 시절4.4. kt wiz 감독 시절
5. 기타등등6. 연도별 주요 성적7. 지도자 시절

1. 개요

대한민국야구선수 출신 감독. 2019년부터 kt wiz 감독을 맡고 있다.

선수 시절 해태 타이거즈, 삼성 라이온즈, KIA 타이거즈의 투수. 현역 시절 등번호는 19번(해태), 16번(삼성), 13번(KIA), 19번(KIA).[2]

별명으로는 강fe, 깡통님, 강페이가 있다.[3]

2. 선수 경력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19990820000026396.jpg
최전성기를 보낸 해태 타이거즈 시절.(출처 : 포토로)
파일:attachment/이강철/52e8ec121dc1d32f54fb.gif
이강철을 상징하는 특유의 물흐르는듯한 부드러운 투구폼

1989년, 해태에 입단한 국가대표 투수 3인방 중 하나였다. 나머지 둘은 조계현이광우. 3500만원을 받고 입단했으나, 당시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한 송진우가 신인 최고 계약금(4200만원)을 받자 해태는 기를 세워준답시고 송진우와 같은 금액인 4200만원으로 부풀려 발표했다. 막 입단한 선수의 기를 살려준다고 계약금을 부풀려 발표한 걸 보면 해태가 꽤나 기대를 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기대에 부응하듯이 이강철은 1989년 데뷔시즌부터 15승을 거두며 타이거즈의 통산 6번째 우승에 기여했으며, 삼성으로 이적하기 전인 1998년까지 매년 150~200이닝을 기록하면서도 평균자책점은 최대 3.64만 기록할 정도로 기복없는 훌륭한 활약을 보이며 해태 왕조의 9번째 우승까지 큰 공헌을 했다. 또한 평균 자책점 2점대도 2번이나 기록했고 15승 이상을 5차례나 기록했을 정도로 화려함도 갖추었던 선수였다. 이강철하면 떠오르는 10년 연속 10승 150이닝 100삼진이상[4]의 기록이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진 기록이다. 또한 1996년의 경우 한국시리즈에서 5경기에 나와 2승 1세이브 1완봉 평균자책점 0.56을 기록하며 한국시리즈 MVP에도 오르기도 했다.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00527220238468B3.jpg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10815231402355B3.jpg
잠시 머물다 간 삼성 라이온즈 시절.(출처 : 포토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KIA 타이거즈 시절.(출처 : 포토로)

1998 시즌 후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 수술을 받고 1999 시즌을 통째로 쉰 후,[5] 2000 시즌을 앞두고 FA 자격을 얻어 3년 간 8억 원의 조건으로 FA 계약을 맺고 삼성 라이온즈에 이적했다.[6] 그러나 무릎 수술 후유증과 노쇠화가 겹쳐 2000 시즌은 1승 7패에 그치는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김응용 감독이 삼성으로 이적해오면서 다시 만나게 되었지만 결국 팀에 적응하지 못하고 2001년 7월 30일 2억 원의 현금 트레이드를 통해 KIA 타이거즈로 돌아갔다. KIA 타이거즈로 돌아온 이후 적지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2002년부터 2004년까지 평균자책점 2.79 17승 29홀드 33세이브 WAR 7.08을 기록하며 계투로나마 부활을 알렸고, 특히 2002년부터 2004년까지 각각 66경기 105이닝, 67경기 68이닝, 79경기 85이닝을 소화하며[7] 롱릴리프, 셋업맨, 마무리를 가리지 않는 불펜의 핵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2004년 말부터 다가온 노쇠화와 혹사의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2005 시즌 종료 후 은퇴를 선언했다.

사실 KBO리그에서 이강철의 커리어를 보면 비교적 떨어지는 존재감에 비해 세운 기록이 어마어마하다. 한국시리즈 우승[8] 경력과 위의 프로야구 사상 유일한 10년 연속 두자리 승수와 세자릿수 이닝, 탈삼진 동시 기록은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 기록. 10년 연속 세자릿수 탈삼진만 해도 역시 굉장한 기록인데 2017년 장원준이 타이를 기록하기 전까지 리그에서 유일한 사례였다. 조계현과 이강철이 우위가 갈리는 시즌이 뚜렷한데,(1989~92는 이강철 우세, 1993~96은 조계현 우세, 이후 다시 이강철 우세) 이강철은 탈삼진에서만큼은 조계현한테 한번도 밀리지 않았다. 뿐만아니라 2018년 기준, 통산다승 3위, 통산이닝 3위, 통산 삼진 2위, 통산WAR 6위, 통산완투 6위, 통산완봉 5위, 등, 누적성적에 관련해서는 KBO리그에서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명실상부한 레전드이다.

그러나 하필 같은 시기에 선동열, 조계현, 이대진, 임창용과 같은 전설적인 선수들의 임팩트가 워낙 강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2인자 이미지가 있다.[9] 어떻게 보면 이강철은 단순 기록의 비교 뿐 아니라 선동열을 중심으로 한 80년대 말~90년대 초반 해태의 마운드 운영의 최대 피해자라고 할 수도 있는데, 잘 던지다가고 4이닝 원아웃 내지는 투아웃에 위기가 온다치면 바로 선동열이 등판해버리는 바람에 승수를 챙기지 못하는 경우도 꽤 잦았다. 그리고 그런 역경을(?) 딛고 얻은 승수는 많았지만[10], 한국시리즈 MVP를 차지했던 1996년을 제외하면 큰 경기에서 타자를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부족해서 팬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주지 못한 것도 있으며,[11] 정작 시즌 최다승을 기록한 1992년과 이종범의 일본진출과 모기업의 몰락으로 해태가 망하기 시작한 1998년을 제외하면 그가 팀내 최다승을 거두지 못해 팬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점이 떨어졌던 것도 있다. 또한 선동열이나 조계현, 이대진보다 비교적 피홈런도 많았던 선수였기 때문에[12] 더욱 선입견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선동열을 제외하더라도, 90년대 타이거즈를 함께 지탱했던 조계현의 1993~96년과 이대진의 짧고 강했던 전성기인 1995~98년이 워낙 좋았던 점도 있었다. 선동열이 부상으로 이탈했던 1992년에는 팀내 최고 에이스 자리를 맡았지만 데뷔시즌부터 4년 평균 200이닝이 넘는 혹사를 당한 여파인지 1993~96년에는 조계현에게 확실히 밀렸고, 그때 조계현은 4년간 60승을 거두며 해태의 에이스자리를 꿰찼으며, 조계현의 경우는 당시 2년간 왕좌를 양분하였던 LG 트윈스에게 12연승을 거두며 절대 에이스로 자리매김한 탓도 있다. 거기에 1995년부터 기량이 만개해 4년간 평균 2점대 방어율에 59승을 쌓으며 탈삼진 1위를 2번이나 석권한 이대진의 활약이 너무나도 커[13] 사실상 1997년, 1998년 해태 타이거즈의 1선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타이거즈의 에이스 호칭은 이대진에게 내주는 등 2인자 이미지가 굳어진다.[14]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10승과 150이닝, 100삼진을 꼬박꼬박 챙기며 선발진의 한 축을 맡아 90년대 타이거즈 왕조에 큰 역할을 했던 레전드임을 부정할 수 없다.

90년대에 이강철은 프로 입단 동기인 송진우와 라이벌 구도가 있었다. 입단 당시 송진우가 신인 최고 계약금을 받았다고 이강철도 같은 금액으로 부풀려 발표했었고,[15] 1992년에는 송진우와 다승왕 경쟁을 했는데, 김영덕 감독의 노골적인 다승왕 만들어주기를 등에 업은 송진우에게 아쉽게 패한다.[16][17] 본인이 회상하길 처음에는 담담하게 받아들이려고 했지만 사람들이 아깝다고 얘기를 하니 허탈하고 눈물도 나고 그랬다고.[18] 그 해에 최다 탈삼진을 기록했지만 1992년 당시에는 탈삼진 타이틀이 없어서 타이틀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19]또 12년 뒤 선동열의 통산 최다 탈삼진을 경신했지만 그마저도 회장님에 의해 깨지고 말았다.

송진우 뿐 아니라 주로 비슷한 시기에 전성기를 구가했으며 꾸준하게 선발로테이션을 지켰던 정민철과 비교되는 경우가 많은데, 대체적으로 누적 스탯은 정민철이(sWAR 정민철 60.02 이강철 50.75), 비율 스탯은 이강철이(스탯티즈 기준 ERA+ 정민철 117.9 이강철 123.8) 각각 우세한 면을 보인다.[20] 그러나 다른 누적스탯인 탈삼진에선 이강철이 (1749 vs 1661), 비율스탯인 FIP+에서는 정민철이(스탯티즈 기준 정민철 116.3 이강철 109.2)각각 우세한 면을 보인다. 이러한 점을 전반적으로 고려해본다면 비슷해 보이지만 WAR에서 명백한 차이를 보이고 있으므로 정민철의 근소 우위라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세이버 스탯으로 가지 않아도 정민철은 90년대 당시 선발투수 중 평균자책점 1위(2.80)에 해외진출까지 성공했다는 점도 고려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3. 플레이 스타일

전성기 시절 구속은 당시 언더스로우 투수의 기준으로 빠른 편인 130km/h 중후반대까지 나왔다. 당시 해설자들의 단골 레퍼토리가 '이강철의 직구가 속도는 느리지만 우완 정통파 투수의 140km/h대 직구 이상의 위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을 정도로 속도에 비해 위력적인 직구[21] 를 뿌렸다. 또한 언더핸드답게 공끝의 움직임이 상당히 지저분 했으며 그의 커브와 슬라이더는 당대에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았던 구질들이었다. 특히 이강철의 주무기였던 슬라이더는 남아있는 영상을 보면 살짝 떠오르면서 우타자 바깥쪽(혹은 좌타자 몸쪽)으로 예리하게 휘어져 들어가는데, 이강철이 선발로 롱런했던 이유도 이 슬라이더가 당시 좌타자들에게 잘 먹혀 들어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외로 언더핸드 투수들의 주무기로 많이 이용되는 싱커는 별로 안 던졌는데, 많이 맞아나가서인지 당시 배터리를 이루던 장채근과의 상의 끝에 봉인했다고 한다.[22] 사실 이강철의 플레이 스타일이 삼진을 잡는 데 맞춰져 있어 땅볼 유도에 효과를 보이는 싱커를 쓸 필요는 크게 없었다. 그래도 별로 안 던졌다 뿐이지 주력 구종 중 하나였는데, 주로 삼진을 잡기 힘든 선수를 처리하거나 투구 패턴에 변화를 주기 위해, 혹은 체력 소모를 막기 위해 쓰곤 했다. 싱커 자체도 꽤나 훌륭했던지라 당시에도 최고의 싱카볼 투수로 정평이 나 있었다. 여기에 이강철은 완급조절 역시 뛰어나 완급조절에 있어서는 리그에서도 수준급 투수로 정평이 나있었다. 다른 타이거즈 에이스들에 비해 떨어지는 구위를 완급조절을 통해 커버하는 영리한 투구를 보여주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구위가 떨어지는 나이에도 선수로 뛰며 롱런 할 수 있었다.

언더핸드하면 땅볼 투수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강철은 슬라이더와 직구의 변화각과 완급 조절을 이용해서 삼진을 많이 잡아내던 투수이기도 했다. 언더핸드 투수 중 이닝대비 탈삼진율이 매우 높은 게 그 증거.. 그래서 선동열, 정민철, 주형광 같은 괴물 같은 탈삼진 능력을 가진 투수들이 리그를 호령하던 1990년대에도 심심챦게 탈삼진 순위에 이름을 올리던 투수였다. 특히 통산 최다 탈삼진 기록을 갖고 있는 송진우보다 앞서 통산 최다 탈삼진 기록을 세웠다는 것은 특기할 점이다.[23]

다만 당시 대표적 홈런 공장장 중 하나가 이강철인데 통산 218개의 피홈런을 맞아 통산 3위에 올라와 있다.유독 이강철이 홈런을 많이 맞았던 건 사실이다. 오죽하면 투고타저 시기에 주로 활동했음에도 홈런공장장이라는 별명이 있었을 정도. 하지만 언더핸드는 투구폼 특성상 배팅볼로 던져주는 각도와 비슷한데다 구속도 다른 폼에 비해 불리하다 보니 피홈런에 매우 취약하다. 이 때문에 이강철에 앞선 언더핸드 에이스였던 한희민 역시 홈런 공장장이라는 오명이 붙곤 했다.[24] 그런데 유독 이강철의 피홈런은 임팩트있는 경우가 많아 더욱 그 이미지가 지워지지 않는 편이다. 김기태이승엽의 프로 커리어 첫 홈런을 허용했고, 2004년 준플레이오프에서 홍성흔에게 만루홈런을 맞고 나서는 빵 사건이 일어났다.

4. 지도자 경력

4.1. KIA 타이거즈 코치 시절

KIA 타이거즈 No.72[25]
이강철(李强喆)
KIA 타이거즈 No.77[26]
이강철(李强喆)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70113103313044.jpg
(출처 : 포토로)

2005 시즌 끝나고 은퇴했으며[27], 은퇴 후 KIA 타이거즈에서 불펜코치와 투수코치를 맡았다. 특히 옆구리 투수 키우는 데 일가견이 있어, 불만 질러대던 손영민을 필승조 불펜으로 키워내는데 성공했고 2009 시즌 유동훈을 언터쳐블 클로저로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기사보기 다만 2009년 유동훈의 무시무시한 성적(대표적으로 0점대 방어율)은 다른 시즌의 성적과 비교해봤을 때, 플루크에 가깝다는 게 중론이다. 특히 BABIP 수치가 유독 낮게 나왔다.

하지만 다른 부분에선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KIA 타이거즈의 몸에 맞는 공 숫자로 대표되는 제구력 문제는 이강철 코치도 책임을 면하기 힘들다는 평이 대세.

4.1.1. 2010 시즌

불펜코치를 맡다가 데스기모토. 즉 스기모토 타다시가 2군으로 내려가자 1군 투수코치로 승격되었다. 하지만 후반기에도 불펜진이 여전히 엉망이어서 스기모토와 함께 비난을 한몸에 받았다.

코치로 승격되자마자 8월 1일 인천 SK전에서 선발투수 로페즈가 4회말 투구 도중 스트라이크 존에 대해 나광남 주심에게 항의하고 계속 궁시렁대자 마운드 위에 올라가서 진정시키고 공수교대 이후 또 덕아웃에 내려와서 궁시렁대자 락커룸으로 로페즈를 끌고가서 야이 개새끼야!라고 우리말 육두문자를 시전하면서 곧바로 진정시켰다.[28]

4.1.2. 2011 시즌

2011 시즌을 앞두고 그대로 1군 투수코치를 맡았는데, 불펜진이 '완전히' 붕괴되고 치솟은 방어율과 미친듯이 늘어나는 볼넷과 피홈런수때문에 KIA 타이거즈 갤러리에서 가장 많은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 올드 타이거즈 팬들의 본거지인 호사방에서까지도 예외는 아니였다.

결국 건강을 이유로 야구계에 은퇴하여 일본에서 요양중인 칸베 토시오 전 기아 투수코치가 무너진 기아 투수진을 살리기 위해 투수 인스트럭터로 방문하여 일시적인 성과는 냈으나 칸베옹의 귀국 뒤 다시 원상복귀. 준PO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4.1.3. 2012 시즌

하지만 감독이 선동열로 바뀌었음에도 살아남았다. 사표를 냈었지만 선동열이 만류하고 같이 하자고 했다고. 현역시절에 원정을 가면 숙소에서 항상 선동열과 같은 방을 쓰던 방장-방졸관계라 워낙 둘이 친한 측면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1군 불펜코치로 2012년 시즌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시작부터 기아 투수진이 붕괴되자, 4월 25은 선동렬 감독은 다카하시 미치타케 투수코치를 2군으로 보내고 이강철을 1군 투수코치로 발령.

2012년 신인드래프트 중하위 픽이었던 홍성민을 잘 굴려 1군에서 요긴하게 써먹는 모습을 본다면 분명 언더투수 육성 능력은 있지만, 역시 문제는 그것 말고는 투수코치로서 이렇다 할 강점이 없다는 것. 그나마 선동열 감독이 투수진을 직접 관리해서 그런지 2011년보다는 욕을 덜 먹고 있는 상황였이다.

헌데 시즌이 끝난 후 뜬금없이 넥센 히어로즈의 수석코치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 2012년 시즌 종료 후부터 넥센의 감독을 맡게 된 염경엽과 광주일고 선후배 사이라는 친분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29]

4.2. 넥센 히어로즈 코치 시절

넥센 히어로즈 No.89
이강철(李强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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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센 히어로즈 코치 시절 고교 후배이기도 한 염경엽 전 넥센 감독과 커플룩

4.2.1. 2013 시즌

2013 시즌 시작전 투수총괄 겸 수석코치의 보직을 부여받았으나 사실상 투수쪽으로는 사이드암 선수들만 신경썼을뿐 투수에 대한 운영은 최상덕 코치가 했다.

시즌 초반 옆구리 김병현한현희는 확실히 작년보다 좋아진 모습을 보였다.

시즌 종료 후 결산을 하자면, 한현희는 완전히 필승조로 자리를 잡았고, 마정길은 쏠쏠하게 전천후로 역할을 맡아주었지만 김병현은 결국 후반기 이후 모습을 감추었다.

4.2.2. 2014 시즌

2014년 4월 25일 5.2이닝 12피안타 2피홈런 3볼넷 11실점을 기록하며 내려간 문성현을 조련하여 6일만인 5월 1일 6이닝 6이닝 무실점 퀄리티 스타트, 82구 4피안타 1볼넷 4K을 던지는 투수로 변신시켰다. 구속도 5km/h 넘게 올라가서 최고구속 148km/h를 찍었다. 문성현의 투구폼을 미세조정하여 하나 '두울' 셋의 리듬으로 던지게 하고 여타 세세한 것을 조정한 것이 큰 효험을 보였다. 팬들은 이강철이 투수코치까지 겸해 달라며 기쁨의 환성을 올리고 있었는데... 문성현5월 7일에 등판하여 2이닝 12실점하였다. 이강철도 투수코치로 좋은 평을 못 들었던 이유가 있었고 문성현답이 없다.

5월 중순 이후 6월까지 넥센 투수진이 급격히 무너지면서 팬들의 비판도 슬슬 늘어나는 추세다.

6월 11일 재활코치로 있던 류영수 코치[30]가 1군 메인 투수코치로 올라오게 되면서 수석코치의 본 임무로 돌아갔다.

6월 13일 "요즘 투수들은 요령이 없어" 라는 인터뷰를 했다. 기사

8월 이후 언더핸드 김대우가 평자 2.70을 찍으며 선발진에 안착하자 다시 넥센 팬들의 호감이 상승하고 있다.

김동수 배터리코치가 친정 팀 LG 트윈스의 2군 감독으로 선임되어 복귀하면서 이강철도 두산 베어스 이적설이 기사로까지 나왔으나, 구단과 본인이 낭설이라고 밝혔다. 내년에도 수석코치로 염경엽 감독을 보좌하는 건 마찬가지라고. 혀갤에서는 두산의 영입 시도 자체는 사실이나 염감에게 의리를 지켜 남은 게 아니냐고 추측.

4.2.3. 2016 시즌

2016년 혜성같이 등장한 신인 사이드암 투수 신재영에게 불펜코치 박승민과 더불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시에 시즌 시작 전 언더투수코치가 없는 삼성으로 이적한 김대우가 폭망하면서 이강철의 코칭 능력에 대한 평가가 올라가고 있다. 하지만 염경엽 감독이 사퇴한 이후 심재학 수석코치로 내정되어 결국 팀을 떠나게 되었다.

11월 5일 이영미 기자와의 인터뷰가 나왔다. 이강철 전 코치 “넥센과 함께 한 4년, 잊지 못할 것”, 여기서 감독을 해보고 싶다는 의중을 강력하게 드러내기도.

4.3. 두산 베어스 코치 시절

두산 베어스 No.71
이강철(李强喆)

파일:이강철 두산.jpg

2016년 12월 1일 조웅천, 이용호, 최경환과 함께 두산 베어스 코치로 부임한다는 소식이 떴다.

2017년 두산 베어스의 2군 감독직을 맡게 됐다.

2017년 11월 2일 한용덕 수석코치가 한화감독으로 가는 바람에 자리가 공석이 되어서 2018년 시즌 수석코치로 내정 되었다. 1군 투수코치 자격도 겸하며 작년 한용덕의 포지션을 그대로 맡게 되었다.

2016 시즌에 비해 두산 투수들의 혹사가 많이 줄었다. 특히 선발진의 투구수 관리가 칼같아졌다. 김강률김승회의 부진과 부상, 이닝을 너무 많이 먹어서 과부하가 걸린 유희관장원준 때문에 영건 불펜들이 많이 굴렀지만, 차츰 상태가 좋아지면서 연투나 투구수도 관리해주는 편이다. 4월에 곽빈, 박치국, 함덕주가 그렇게 굴렀지만 단 한 번의 3연투도 없었다는 것은 특기할 점. 6월 15일 현재까지 불펜 투수의 3연투는 이영하가 딱 한 번 했었고, 이마저도 3일 내내 투구수가 적었다.

특히 영건 사이드암 박치국에게 투구 밸런스와 커브 구사, 체인지업까지 전수하였고, 박치국은 입단 2년차만에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며 리그 구원 WAR TOP10에 드는 불펜 투수이자 두산의 셋업맨으로 거듭났음은 물론, 아시안게임 국가대표에까지 선발되어 금메달까지 얻고 병역특례도 받았다. 강철매직

다만 한국시리즈에선 젊은 투수들의 발전가능성만 보였을 뿐 준우승으로 마감짓고 2018년 11월 12일 두산 베어스 수석 코치직을 마무리지었다.

4.4. kt wiz 감독 시절

kt wiz No.71
이강철(李强喆)

2018년 10월 20일, 김진욱 감독의 뒤를 이어 kt wiz의 3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나름대로 kt 위즈로선 사정이 있었다. 2018년 10월 19일 이숭용 단장이 후임감독을 고심한 끝에 이강철 수석에게 제안을 했었고 고심한 끝에 이강철 수석은 김태형 감독과 김태룡 단장과 의논한 끝에 수락을 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전년 작년까지 수석이었던 한용덕 감독 때의 선례를 고려한 두산의 배려가 있었다. 지난해는 팀 분위기를 고려해 발표 시기를 한국시리즈를 마친 뒤로 미뤘는데, 그 결정이 오히려 팀 분위기를 뒤숭숭하게 만들었다고 판단했다. 이미 결정된 일, 이런저런 말이 나오기 전에 발표를 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이에 대해 이숭용 단장은 "장기적 강팀을 꿈꾸는 KT의 그림을 가장 잘 그려주실 분"이라는 판단을 했으며 “경험과 인성이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선수단을 하나로 모으고 육성과 성적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분으로 생각했다. 이 감독님 특유의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선수단을 하나로 모으고 KT라는 팀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색깔을 입힐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이강철수석은 현재 두산의 한국시리즈 준비를 위해 일본 미야자키 교육리그에 참가 중이라 대면이 아닌 유선으로 제의를 받고 승락을 얻었다. 이 단장은 “찾아뵙고 말씀드리는 것이 도리이지만 일본에 계셔서 부득이하게 유선으로 말씀드렸다. 2018년 10월 19일 제안을 했고 2018년 10월 20일 확답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시리즈 전에 대승적으로 발표를 허락해준 두산에도 감사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선임 배경
두산 동의

4.4.1. 2019년


이강철/2019년 항목으로.

5. 기타등등

  • 2013년 정규리그가 끝나고 KIA의 차기 감독 후보군으로 분류되었다. 염경엽 감독 옆에서 수석코치를 하고 있는 이강철이 메리트를 가질 수 있다는 것. 김평호 기아 코치도 팬들과 소통을 잘하고 평가도 괜찮아 감독 후보로 거론되지만 외야수 출신이라는 점에서 투수 출신인 이강철이 더 유리하다는 지적도 있다.
  • 2013년 열린 제2회 한일 올드스타 슈퍼게임 9회초에 등판하여 평균 100km/h의 공으로 일본측의 올드스타을 상대로 우세를 보였다.
  • 장채근이 말하길 동료시절, 자주 자신의 피부를 유독 좋아 했다한다. 장채근 자신이 상의를 탈의하고 있으면 자신 곁으로 와선 “형 피부가 너무 뽀얗고 부드럽다”며 몸 구석구석을 만지곤 하던 이상한 녀석이라고.#
    파일:/image/410/2012/12/08/20121206_1354784088.jpg_59_20121208092402.jpg
    1990년대 초 무등산에서 해태 선수들과의 야유회에서 장채근과 찍은 사진.
  • 뛰어난 성적과 더불어 곱상하고 여린 외모로 여성팬들을 몰고 다닌 것으로도 유명하다. 50이 넘은 현재도 상당히 잘생긴 외모를 자랑하는 편. 자기 관리도 잘 해서 배도 거의 안 나왔다.그래서 이강철이 스승인 김응용을 벤치마킹해 심판한테 배치기를 시전할 때 김응용을 기억하는 올드 팬들은 다 빵 터졌다고 다만 피부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어서 젊었을 때 하얀 피부의 곱상한 외모를 기억하는 팬들은 많이 안타까워 한다.
  • 그가 코칭을 해준 사이드암 투수들이 그가 팀을 떠난 후 불을 지르는 경향이 있어 사이드암 코칭에만 특화된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이 있다. 대표적으로 KIA의 0점대 마무리였던 유동훈과 넥센의 2016시즌 신인왕 신재영. 그럼 박치국도? 현재 박치국역시 부진하다.

6. 연도별 주요 성적

  • 붉은 글씨는 리그 1위 기록. 진한 글씨는 리그 5위 내 기록.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9 해태 36 195⅓ 15 8 5 - .652 3.23 153 13 85
(5위)
137
(4위)
74 70 1.17
1990 44
(3위)
220⅔
(1위)
16
(3위)
10 5 - .615 3.14 163
(3위)
24
(1위)
93
(3위)
165
(2위)
84
(3위)
77
(1위)
1.12
1991 36 214⅔
(2위)
15
(5위)
11 3 - .577 3.19 158 29
(공동 1위)
69 193
(2위)
87
(3위)
76
(3위)
0.99
(3위)
1992 33 217⅓
(2위)
18
(2위)
9 0 - .667 3.44 179
(4위)
29
(1위)
87
(5위)
155
(1위)
88
(4위)
83
(2위)
1.15
(5위)
1993 31 154 10 10 1 - .500 3.04 113 9 78
(5위)
131
(4위)
60 52 1.16
1994 33 185⅔ 12 15 1 - .444 3.64 150 19 122
(1위)
140
(5위)
86
(2위)
75
(5위)
1.37
1995 29 150 10 10 1 - .500 3.30 127 15 71 126 60 55 1.20
1996 28 153⅔ 10 9 1 - .526 2.46 114 11 60 119 43 42 1.05
(5위)
1997 30 162⅔ 11 3 2 - .786
(2위)
2.99 130 14 75 128 63 54 1.17
1998 31 179⅓
(5위)
15
(3위)
11 0 - .577 3.11 165 18 65 160
(4위)
70 62 1.18
1999 1군 기록 없음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0 삼성 14 37 1 4 0 0 .200 7.30 45 8 22 20 33 30 1.68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1 KIA 27 56 2 3 1 1 .400 6.91 59 9 31 50 43 43 1.41
2002 66 105 5 2 17
(5위)
8 .714 3.17 82 12 46 97 41 37 1.12
2003 67 68⅓ 6 4 9 14
(3위)
.600 1.98 42 7 31 57 21 15 0.95
2004 79
(3위)
85⅓ 6 2 7 7 .750 2.95 68 9 39 56 29 28 1.16
2005 18 19⅔ 0 1 0 3 .000 3.20 23 1 12 15 7 7 1.58
KBO 통산
(17시즌)
602 2204⅔
(3위)
152
(3위)
112 53 33 0.576 3.29 1771 218
(3위)
986
(2위)
1749
(2위)
889 806 1.17
완투, 완봉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89년 8완투 3완봉
1990년 10완투
(공동 1위)
1완봉
1991년 11완투
(공동 4위)
2완봉
(공동 4위)
1992년 12완투
(4위)
2완봉
(공동 4위)
1993년 2완투 1완봉
1994년 5완투 1완봉
1995년 4완투 2완봉
1996년 5완투 2완봉
1997년 5완투 2완봉
1998년 3완투 2완봉
KBO 통산 65완투 18완봉
(5위)

7. 지도자 시절

역대 감독 전적
연도 소속팀 경기수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2019 kt wiz 144(예정[31])
2020
2021


[1] 장원준과 타이기록[2] 여담으로 현역 시절에 달았던 19번은 그의 은퇴 이후 이강철이 키워낸 사이드암이나 언더핸드 투수가 가장 달고싶어 하는 번호가 되었다. 신용운손영민이 이 배번을 달았었다. 그러나 손영민이 임탈되고, 이강철이 넥센으로 가면서 언더핸드와 사이드암이 아닌 뜬금없는 좌완 손동욱이 달더니 이젠 노장 우완 최영필이 달았다가, 최영필의 은퇴 다음엔 2015년 1차지명 투수 이민우가 달았다. 이후 2018 시즌이 되어 투수인 손영민이 다시 19번을 가져가면서 원래대로 사이드암 투수가 달게되었다. 한편 넥센에서도 한현희가 이 번호를 달았지만 19번을 달았던 언니가 돌아오면서 한현희는 원래 달던 63번을 달게 되었다.[3] 유사품으로 순페이가 있다.[4] 장원준도 10년연속 10삼진을 기록했는데 이강철은 최소 119개였던 반면 장원준은 102,103,107,108개등 조금 아슬아슬하기도 하였고 최다삼진도 이강철이 크게 앞선다.[5] 당시 이강철의 이탈은 해태 타이거즈에게 크나큰 불행이었다. 그나마 곽현희가 팀내 최다승인 11승을 거뒀지만 방어율이 무려 6점대였다. 나머지 투수들도 규정이닝을 채우면서 3점대를 기록한 선수는 없었다. 엄청난 타고 시즌이지만 타선이 210홈런을 치면서 역대 최강에 근접하는 포스를 보여주었음을 생각하면 이강철의 부재가 너무나 뼈 아팠다. 특히 이강철의 이탈이 팀에 큰 구멍으로 다가온 이유가 있는데, 2년간 WAR 13에 20승 60세이브를 거두었던 임창용이 99년 삼성으로 트레이드 되고, 선발진의 무게감을 양분하던 이대진도 이 해에 어깨 부상으로 인한 재활의 터널에 들어갔다. 거기에 어린나이에도 선발로테이션을 훌륭히 책임지던 김상진은 위암으로 인해 22살이라는 나이에 요절했다. 즉 1998년 팀의 핵심투수 4명이 이듬 해 이대진의 단 한 경기를 제외하면 전부 이탈해버린 것이다.[6] 당시 FA 보상선수는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박충식이었다. 박충식은 고향 팀 해태로 이적한 후 해태의 열악한 재활 시스템에 기겁했다고 한다. 자세한 건 해태 타이거즈박충식 항목 참조.[7] 이때 그는 역대 만 36~38세 선수 중 최다 등판을 기록하기도 했다.당시 계투가 엄청나게 불안했던 기아에서 팬들이 그나마 조금이라도 안심하고 볼 수 있었던 중간계투는 이강철과 신용운 뿐이었다.[8] 우승 횟수 자체는 말할 것도 없고, 1996년 한국시리즈 MVP 경력이 있다.[9] 해태의 경우 모든 투수들이 선동열과 비교 당할 수 밖에 없는데 선동열과 비교해서 기복이 심하지 않았다라고 할 만 한 투수는 전성기의 최동원, 김시진, 최근의 류현진 정도이다.[10] 특히 1992년 기록한 18승 중 17개가 선발승이었는데 이 것은 역대 잠수함 투수 최다 선발승 기록으로 남아 있다[11] 통산 포스트시즌 방어율이 4.12로 나쁘지 않지만 93년(평균자책점 7.71)과 97년 한국시리즈(1회 5실점 강판)에서 신통치 않은 모습을 보여준 것이 크고, 더욱이 말년 마지막 포스트시즌에서 결정적인 홈런을 안경현홍성흔에게 2방이나 얻어맞은 모습 때문에 더욱 그렇게 비추어졌다. 그에 비해 선동열이 포스트시즌에서 약했다고는 하지만 그 약했던 모습도 평균자책점 2.24였으며(...) 문희수김정수같이 한국시리즈에서 뛰어난 임팩트를 보여준 선수들이 많아 비교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12] 통산 피홈런이 조계현의 2배 가까이 된다.[13] 1998년의 10타자 연속 탈삼진 기록은 그야말로 화룡점정.[14] 사실 이대진과의 공헌도 차이는 두 해다 크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팀의 에이스라고 부르기 어려웠다. 또한 이대진 뿐 아니라 1997,98년의 타이거즈 투수진 운용의 핵심키를 가진 투수는 임창용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임창용은 2년간 123경기에서 268이닝 평균자책점 2.11 22승 60세이브 261삼진 WAR 13.29 라는 엄청난 성적을 거두며 타이거즈의 투수진의 큰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15] 실제로는 이강철이 적음[16] 1992년 빙그레와 해태는 시즌 마지막 2연전에서 대결했는데, 첫 경기에서 장종훈의 시즌 40홈런 달성 등으로 빙그레가 여유있게 앞서자 김영덕 감독은 잘 던지던 선발 한희민을 5회부터 송진우로 교체해 당시 이강철과 18승으로 다승 공동 1위였던 송진우에게 1승을 선사했다. 다른 상대도 아니고 직접적 경쟁 당사자의 팀을 상대로 노골적인 타이틀 만들어주기를 시도하니, 이에 대한 비판이 거세었다.[17] 이강철은 다음날 빙그레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에 선발로 나서 '공동' 다승 1위의 가능성에 도전했지만, 장종훈의 시즌 홈런 기록을 41개로 늘려주는 제물이 되며 패전투수가 되었다.[18] 하지만 당시 자료를 보면 '송진우를 선배로 생각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는 기사도 나왔다고 한다. 당사자인 송진우는 "내가 아는 강철이는 그런 말 할 애가 아니다" 라고 말했다. (출처 - 1992년 10월 7일 주간야구)[19] 바로 그 다음 해인 1993년에 탈삼진 타이틀이 신설되었다.[20] 둘은 같은 16시즌을 뛰었다.[21] 떠오르는 직구도 주무기였다. 낮게 깔려서 오다가 대략 포수 머리 근처 또는 약간 높은 정도의 범위에서 형성되는 직구였는데, 당시에는 이 볼이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제대로 들어가면 타자는 맞추기도 어려운 마구급 구질이었지만, 반대로 홈런을 맞기도 쉬운 구질이었다.[22] 정작 마구마구에서는 싱커의 등급이 높은편.#[23] 송진우가 통산 최다 탈삼진 기록을 뺏긴 했지만 이는 송진우가 이례적으로 롱런했기 때문이다. 둘은 같은 1989년에 데뷔했다. 이강철이 송진우와 비슷한 커리어를 썼다면 지금까지도 통산 최다 탈삼진 기록 소유자는 이강철이었을 것이다.[24] 8시즌 동안 104홈런[25] 2006~2007 시즌[26] 2008~2012 시즌[27] 이 시즌 끝나고 베테랑 이강철, 조규제, 홍현우가 옷을 벗었으며, 최상덕+마해영은 LG로 트레이드 되는 팀 개편이 있었다.[28] 이 경기 이후 이순철 MBC ESPN 해설위원의 트위터에 올라온 내용.파일:external/lh3.googleusercontent.com/20100801.jpg[29] 신기하게도 선동열, 염경엽, 이강철 모두 광주일고 선후배 사이다.[30] 오랫동안 태평양 돌핀스, 현대 유니콘스에서 투수코치 생활을 한 사람이라 분위기를 잘 아는 코치다.[31] 중간에 경질되지만 않는다면야 144경기를 모두 치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