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5-28 10:36:13

김준환

파일:나무위키+유도.png   NC 다이노스 외야수 김준완에 대한 내용은 김준완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파일:/image/295/2010/01/10/2.jpg
쌍방울 감독대행 시절.

파일:/image/450/2014/04/10/201820184_IMG_6997.jpg
원광대 감독 시절.
이름 김준환(金準桓 / Jun-hwan Kim)
생년월일 1955년 5월 9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전라북도 완주군
학력 전주동초-군산남중-군산상고
포지션 외야수
투타 우투우타
소속팀 상업은행 야구단 (1973~1981[1])
해태 타이거즈 (1982~1989)
지도자 쌍방울 레이더스 1군 타격코치 (1990~1999)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대행 (1999)[2]
SK 와이번스 1군 수석코치 (2000)
원광대학교 감독 (2003~2016)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83 1986 1987 1988
1987년 한국시리즈 MVP
김정수 (해태 타이거즈) 김준환(해태 타이거즈) 문희수 (해태 타이거즈)
1982년 한국프로야구 외야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프로야구 출범 김준환(해태 타이거즈)
양승관(삼미 슈퍼스타즈)
김성관(롯데 자이언츠)
김종모(해태 타이거즈)
장효조(삼성 라이온즈)
박종훈(OB 베어스)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1px"
1982~1983 1984 1985~1987 1988~1993 1994~1997
김봉연 김준환 김일권[A] 주장직 폐지 이순철
1998 1999~2001 2002~2004 2005 2006
이강철 이호성 이종범 김종국 이종범
2007 2008 2009 2010 2011
이종범장성호[B] 장성호김상훈[C] 김상훈 최희섭김상훈[D] 김상훈
2012 2013 2014~2016 2017~2018 2019~
차일목 김상훈 이범호 김주찬 김주찬안치홍[E]
[A]: 김일권 이후 긴 시간 동안 주장직을 폐지. 출처
[B]: 이종범의 부진으로 인한 주장 교체.
[C]: 시즌 중 조범현 감독의 지시로 인한 주장 교체.
[D]: 시즌 초 선수단의 반발로 인한 주장 교체.
[E]: 2019년 5월 15일, 김주찬의 재활과 부진으로 인한 주장 교체.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1px"
1990년 ~ 1999년
1대
김인식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2대
신용균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3대
한동화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4대
김성근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감독대행
김준환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 ||

1. 소개2. 선수 시절3. 지도자 시절4. 연도별 성적

1. 소개

해태 타이거즈의 공포의 KKKKK(김봉연, 김종모, 김성한, 김준환, 김일권)타선을 이끌었던 선수. 은퇴 이후 원광대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았었다.[3]

2. 선수 시절

1972년 군산상고의 극적인 황금사자기 결승전 대역전극의 주인공 중 한 명이 김준환이었다. 당시 김봉연, 김일권 등과 함께 결승전에서 3점차로 뒤지던 경기를 9회말 4점을 뽑으면서 역전할 때 주역이었다. 바로 우승을 결정짓는 역전 적시타의 주인공이 김준환이었기 때문이다. 고교 시절에는 말썽도 많이 부렸다고 한다. 당시 술먹고 싸우다가 걸려서 혼났다고. 그런데 당시 감독인 최관수씨가 "너희를 잘못 가르쳐서 일어난 일이니, 나를 때려라." 라고 한 말에 정신을 차리고 야구에 전념했다고 한다.[4]

1973년부터 상업은행에서 8년 동안 실업팀 선수로서 활약하다가 해태 타이거즈 창단 당시에 창단 멤버로 합류했다. 원래 포지션은 2루수였지만, 그 시점에서는 외야수로 전향한 상태였다. 그러나 수비 위치와 상관없이 이미 타격에 있어서는 궤도에 오른 선수였다. 초기 해태의 김씨 핵타선(김일권-김성한-김봉연-김준환-김종모)의 한 축이었다. 1982년 프로 원년시즌 그는 김봉연에 이어 백인천과 더불어 홈런 공동 2위에 오른다. 나머지 시즌은 성적이 아주 돋보일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1985년을 제외하면 다소 평범한 수준.

특히 1987년은 완전히 실패한 시즌이었다. 아내의 갑작스러운 중병으로 간호를 하면서 시즌을 치르다 보니 결국 타율 0.204로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33세로, 당시 기준으로는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던 시즌. 그러나 이 해 한국시리즈에서 3차전과 4차전에서 잇따라 역전 홈런을 쳐내면서 맹활약, 정규시즌에서의 부진을 완전히 만회하며 그 해 한국시리즈 MVP에 오른다. 역대 KBO 단일 한국시리즈 OPS 1위 기록은 덤. (타/출/장 .500/.625/1.083 OPS 1.708)[5]

그 뒤 2년 정도 선수 생활을 더 하다가 고향인 전라북도에 생기는 쌍방울 레이더스에 합류한다.[6][7] 선수로서 뛴 것은 아니고 플레잉코치로 첫 해 전지훈련에 합류했다가 그 뒤 그대로 코치로 남게 된다.

3. 지도자 시절

새롭게 창단한 고향팀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주로 타격코치를 담당하면서 팀에 계속 있게 되었다. 워낙 프런트와 코치진, 코치진 내부의 갈등이 심해 자주 코치진이 바뀌는 쌍방울이었지만 창단 당시부터 있었던 선수단 구성원 중 전라북도 출신으로는 가장 유명했던 스타였기에[8] 그 와중에서도 팀에 꾸준히 남을 수 있었다. 김성근 감독 체제에서도 여전히 타격코치를 맡았다.

1999 시즌 이미 주전 선수를 다 팔아먹은 쌍방울 수뇌부는 자존심이라고 성적 부진의 책임을 물어 김성근 감독을 중도 해임하고 감독 대행으로 김준환을 앉혔다. 그러나 천하의 김성근 감독도 어쩔 수 없었던 팀을 그가 바꿀 수 없는 노릇이었다. 11승 38패를 기록했으며 해도 해도 안 되는 전력으로 분투하며 승과 패를 반복하지만 결국 시즌 말기 전력이 완전히 동이 남으로써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두번째 최다 연패인 17연패로 내몰렸다. 그나마 시즌 마지막 경기는 승리함으로써 18연패는 피하고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었다.

시즌 후, 감독으로 정식 임명된다. 그러나 팀은 2000년 2월, 해체의 비운을 맞고, 그 해 3월 3일 쌍방울의 선수들을 가지고 만든 SK 와이번스가 탄생한다. 이 때 감독으로 임명되었다면, 정식으로 게임을 치뤘겠지만 신임 감독에는 강병철이 임명되고, 그는 수석코치로 발령이 났다. 그리고 1년 뒤에 SK가 쌍방울의 색을 지우기 위해 대거 선수들을 방출하고, 코치진을 교체하는 과정에서 그도 짤린다. 그래서 한국프로야구 감독 중에 유일하게 정식 게임을 치르지 못한 감독이 되었다. 안습. 그래도 강병철 감독이 시드니 올림픽 코치진에 선임되어 준비하는 과정에서 잠시 감독 대행을 몇 경기 동안 맡기도 했다.

2000년도 SK는 44승 3무 86패에 역대 최다 피홈런인 195피홈런을 찍었다. 물론 쌍방울의 전력을 사실상 그대로 계승한 후 신생팀에 걸맞는 지원만 어느 정도 받은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뒤 한동안 야인으로 있다가 2003년 말 원광대학교 감독을 맡아 2005년 대통령기 전국대학야구대회 우승, 2006년 전국종합야구선수권대회 준우승, 2006년과 2008년 전국대학야구선수권대회 준우승, 2010년 회장기 전국대학야구 춘계리그 우승, 2013년 회장기 전국대학야구 하계리그 우승을 거뒀고, 2016년까지 지휘한 뒤 손동일 코치[9]에게 감독직을 이양하고 정년퇴임으로 물러났다.

원광대학교 감독 퇴임 후 아마추어 경기의 경기감독관으로 활동함과 동시에 SPOTV에서 퓨처스리그 해설을 맡고 있다. 또 전주고등학교 야구부의 인스트럭터를 맡는 등 고향인 전북지역을 중심으로 야구계 재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4.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2 해태 80 306 .301 92 13 3 19 45 50 10 22 .549 .347
1983 90 326 .248 81 5 1 10 43 35 11 30 .362 .308
1984 91 307 .267 82 10 0 6 29 29 5 23 .358 .314
1985 99 336 .301 101 20 0 5 38 45 7 31 .405 .355
1986 42 84 .274 23 0 0 4 15 11 2 8 .417 .326
1987 63 167 .204 34 7 0 2 23 17 2 15 .281 .265
1988 100 314 .293 92 11 1 11 48 41 3 30 .439 .348
1989 103 330 .252 83 10 2 4 44 27 1 29 .330 .310
KBO 통산
(8시즌)
668 2170 .271 588 76 7 61 285 255 41 188 .330 .310


[1] 1976~1978년까지 군 복무.[2] 감독 대행을 맡고 감독으로 승격되었으나 쌍방울이 인수가 아닌 해체 후 재창단 형식을 취해 고용 승계가 되지 않아 수석코치가 되는 데 그쳐 프로 야구 팀 감독으로는 단 1경기도 지휘하지 못했다.[3] 10년 이상 길게 감독을 맡다가 정년퇴임으로 퇴임했다.[4] 실제로 감독이라 못 때리겠다고 하면, 때릴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스승이 자기를 때리라고 하니 진짜 때린 삼성의 스타 포수도 있긴 한데...[5] 2위는 2010년 SK의 최정, 3위는 2015년 두산의 정수빈.[6] 해태 선수단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넘어 온 전북 출신 스타였다. 군산상고가 배출한 불세출의 슈퍼스타들이 해태에 많았지만 김준환을 빼면 모두 쌍방울로 넘어올 상황이 아니었다. 특히 위에 언급된 김씨 타선 5명 중에 광주상고 출신인 김종모를 빼면 모두 군산상고 출신이었는데 김일권은 1988년 초 태평양 돌핀스로 트레이드됐고 김성한은 이 당시 해태 타선의 핵심 멤버였으며 김봉연은 은퇴 후 해태에서 코치를 맡고 있었다. 그나마 상황이 자유로웠던 김준환이 해태를 떠나 고향팀에 오게 됐다.[7] 해태 시절 수석코치인 김인식과 투수코치였던 임신근도 같이 옮겨갔다. 김인식은 쌍방울 초대 감독이 됐고 임신근은 수석코치로 갔다.[8] 쌍방울의 창단식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면 선수단 소개 때 가장 많은 환호를 받은 사람이 김준환이었다. 전북 출신이었고 쌍방울 이전의 전북 연고팀이던 해태 타이거즈 시절에 출중한 활약을 펼쳤기에 쌍방울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았던 스타였다.[9] 1994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던 선수이다. 등번호가 8번이었고, 입단 당시에는 잠깐 ‘작은 거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적이 있었다. 이후에는 활약이 미미하여 외야수 백업을 전전하다가 1998시즌 이후 방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