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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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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박한이 · 62 박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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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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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격 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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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수 22 홍성흔 · 44 김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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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이승호 · 51 조용준 · 55 김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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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야수 1 장성호 · 3 박진만 · 5 정성훈 · 14 김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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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야수 7 이종범 · 33 박한이
35 이진영 · 62 박재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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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국기.svg 70''' 김재박
타격 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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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비·주루 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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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 역대 로스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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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라.jpg
조용준
趙容浚 | Cho Yong Jun
출생 1979년 3월 17일 ([age(1979-03-17)]세)
전라남도 여수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백초초등학교 (졸업)
여수중학교 (졸업)
순천효천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 98 / 학사)
신체 175.6cm, 75kg[1]
포지션 마무리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98년 2차 5라운드 (전체 35번, 현대)
소속팀 현대 유니콘스 (2002~2007)
우리-서울-넥센 히어로즈 (2008~2010)
지도자 신일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2017)
덕수고등학교 야구부 투수코치 (2017)
해설위원 MBC SPORTS+ 야구 해설위원 (2013~2015)
병역 예술체육요원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야구 부문)
종교 불교천주교[2]

1. 개요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2.2. 프로 경력2.3. 국가대표 경력
3. 피칭 스타일4. 은퇴 후5. 여담6. 박명환야구TV 출연7. 연도별 성적8.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현대 유니콘스, 넥센 히어로즈의 야구 선수.

대학 야구 최고의 투수로 유명했으며, 데뷔 시즌부터 현대 유니콘스에서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며 현대의 우승에 큰 힘을 보탰으나 부상으로 인해 선수 생활을 일찍 마감하였다.

슬라이더를 잘 던져서 한때는 '조라이더'라는 별명이 유명[3]했다.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순천효천고등학교 시절에는 체구가 작고[4] 동기 강철민[5]에 밀려 뚜렷한 성적을 기록하지 못했다[6][7].

효천고를 졸업한 1998년 드래프트에서 2차 5순위로 현대 유니콘스에 지명되었으나[8]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1998학번-2002졸업)[9][10][11]에 진학. 대학에서 기량이 급성장하였다. 대학4년간 성적 16승1패. 대학최고의 선수로 신인최고의 계약금(5억4천만원)을 받았다.

2.2. 프로 경력

파일:external/img.khan.co.kr/20100122001056_r.jpg
연세대를 졸업하고 2002년 계약금 5억 4000만원을 받고[12][13] 현대 유니콘스에 입단하여 허리 부상을 당한 위재영[14]을 대신해 마무리 투수로 활약했다. 원래는 위재영 대신 전년도 팀내 투수고과율 1위인 신철인[15]과 베라스 라는 용병과 더블스토퍼 체제여서 7회부터 8회 2이닝만 던지고 9회에 마운드를 인계하는 역할이었지만 베라스가 불과 10경기도 안되어 개박살이나고 신철인은 전년도 혹사로 추격조로 편입이 되었다. 이후 자연스럽게 9회까지 던져 마무리 보직을 맡았다.

이해 조용준은 60경기 109이닝 9승 5패 28세이브 4홀드 ERA 1.90이라는 빼어난 투구 내용을 선보였고, 특히 탈삼진이 116개에 달할 정도로 위력적인 구위를 선보였다. 세이브 순위에서는 두산의 진필중에게 3개 차로 밀렸으나 세이브와 홀드를 합산한 구원 포인트는 1위였다. 이러한 활약으로 KIA 타이거즈김진우를 제치고 신인왕을 거머쥐었다.[16]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는 대표로 뽑혀 금메달을 따고 병역 특례를 받았다. 이 해 기록은 60경기 출장에 109이닝 116탈삼진 1.90의 평균자책점과 28세이브 4홀드.신인시절 세이브 영상

이후 2003년에는 약간의 소포모어 징크스인지 잠시 주춤했으나 그래도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일조하고 이듬 해에는 마치 페드로 마르티네즈을 연상시키는 "서클 체인지업"을 장착하여[17] 63경기 75이닝 10승 3패 34세이브 방어율 2.28의 좋은 성적을 기록, 다시 이전 모습을 되찾으며 팀의 4번째 우승이자 마지막 우승에 공헌하였다. 특히 이 해 정규시즌과 한국시리즈동안 무피홈런을 기록했다. 맞은 홈런이 단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 인상적.
파일:1594308237.gif
파일:1594547883.gif
현대 유니콘스의 V4를 확정짓는 조용준
삼성 라이온즈와의 2004년 한국시리즈 9차전에서는 빗발치는 폭우 속에서 승리를 지켜냈는데 이 장면은 지금까지도 역대 한국시리즈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조용준의 2004년 한국시리즈는 KBO 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포스트시즌 불펜 퍼포먼스 중 하나로 꼽히는데, 이 해 한국시리즈 성적은 7경기 12⅓이닝 2실점 비자책 3세이브 평균자책점 0. 한국시리즈 MVP도 당연히 그의 차지였다. 아직도 조용준 하면 2004년 한국시리즈와 삼성 라이온즈 그리고 오승환진필중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러나 화려했던 조용준의 초창기 커리어의 뒤에는 혹사가 가려져 있었다. 대학 시절부터 무리했는데 프로 입단 첫 시즌부터 순수 구원으로 100이닝을 넘게 먹일 정도로 조용준은 심하게 굴려졌다. 당시 김시진 투수코치는 권준헌, 이상열, 신철인, 마일영, 송신영을 제외하면 던질 만한 투수가 없어서 마무리 투수인 조용준을 8회에 집어넣을 때가 많았다.[18] 게다가 아시안게임에서 던진 부하도 있었으니... 이로 인해 2003시즌에 다소 페이스가 떨어졌고, 2004시즌에 반등했으나 이 해도 70이닝 넘게 소화한 데다 포스트시즌에서도 공을 많이 던졌기 때문에 조용준에게 가해지는 부담은 이미 컸다.

게다가 조용준은 부상을 입기 딱 좋은 요소가 많았다. 기본적으로 투수 치고 체구가 상당히 작은 편이라[19] 부상 리스크가 큰데, 작은 체구로 인한 한계를 극복하려고 투구폼을 굉장히 크고 역동적으로 가져가면서 몸에 가해지는 무리가 커졌다. 여기에 조용준의 주무기는 패스트볼이 아닌 슬라이더와 체인지업, 포크볼 등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팔에 가해지는 부하도 컸다. 심지어 자기 관리도 소홀한 편이었는데, 당시 일반 팬들 사이에서 잘 알려진 편은 아니었지만, 조용준의 자기관리 소홀은 노장진, 임선동, 김진웅, 프로 동기 고졸 김진우와 함께 야구계에서 꽤나 유명했다. 당시 코치였던 김시진의 말에 따르면, 갑작스럽게 유명세를 타면서 연예인 병에 걸려 자만에 빠졌다고.

결국 혹사와 선천적 한계, 자기 관리 문제가 겹치며 2005시즌부터 조용준은 하향세를 탄다. 대학교 1학년 때도 어깨에 칼을 댔던 조용준은 이해 어깨 통증을 안고 공을 던지다 5월부터 급격히 얻어맞기 시작하면서 조라이더 대신 조라이터라는 별명을 얻었고, 한 때 ERA가 5점대를 넘나들기도 했다. 그나마 6월부터 안정세를 찾으면서 성적이 꽤 좋아졌고, 9월 들어서는 무실점 행진을 이어가기도 했으나 현대는 자팀 감독의 명언이던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를 본인들이 얻어맞고 7위까지 밀리던 상황[20]. 결국 조용준은 9월 중순 인간상성이던 삼성과의 3연전을 끝으로[21] 시즌을 조기에 마감하기로 한다.

이렇게 하향세를 보였음에도 조용준의 2005시즌 성적은 49경기 52⅓이닝 2승 1패 27세이브 평균자책점 3.27로 웬만큼 준수한 마무리 투수들의 성적이었다. 직전 시즌보다 20이닝 넘게 덜 던지고도 탈삼진은 61개까지 늘어난 것은 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시즌은 조용준이 1군에서 인상적인 투구를 한 마지막 시즌이 되고 말았다.

이 때 조용준이 받은 수술은 어깨 슬랩 수술, 즉 관절와순 수술이었다. 류현진의 복귀 사례에서 보이듯 관절와순 파열[22]은 투수가 받을 수 있는 최악의 부상 진단 중 하나로, 수술 후 기존 기량을 100% 회복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부상이다. 그나마 수술과 재활이 모두 성공적으로 이뤄지면 기존 기량에 가깝게 몸을 회복해 괜찮은 공을 뿌리는 것이 가능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진짜 말 그대로 재활이 완벽에 가깝게 이뤄져야만 한다.

이미 조용준은 대학생때 받은 수술 이후 재활을 제대로 하지 못해 프로 입단 후 수술을 받으라는 진단을 받은 상태였다. 현대는 이러한 몸 상태를 알고도 거액의 계약금을 안겼고, 대신 출전과 함께 어깨 재활을 병행할 것을 권유했다. 조용준 본인도 이에 응했고, 그렇게 4년을 더 던졌다. 심지어 그냥 던진 것도 아니고 혹사 수준으로 던졌으니 구단의 선수 관리가 완전한 실패였던 것.

그나마 조용준 본인이 2024년 6월에 박재홍이 주로 진행하는 야구 유튜브 체육공단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당시 조용준은 대선배 정민태와 같이 수술을 받고 재활에 돌입했으나 정민태와는 다르게 조용준의 재활은 상당히 수월하게 진행되며 수술 다음 해인 2006년 4월경 이미 최고구속 141Km를 찍었다고 한다. 그래서 구단에서는 조금 이르게[23] 2군 경기에 투입했고 여기서도 문제가 없자 언론에다가 6월 1일에 조용준이 복귀를 한다고 소식을 뿌렸다.

문제는 2군 3번째 등판에서 통증이 재발하고 만 것. 애초에 관절와순 수술 자체가 최소 "1년 이상"의 재활 기간[24]을 요구하는 점을 고려하면, 조용준은 아무리 재활이 수월했다 하더라도 너무 일찍 복귀 수순을 밟은 것[25] 아닌가 하는 생각을 거둘 수가 없다. 게다가 보통 통증이 재발하면 검진을 거쳐 재활 프로그램을 다시 짜야 하는데, 문제는 트레이너가 이미 1군에 조용준의 복귀를 보고한 상태라서 재활을 다시 하지 말고 살살 던져서라도 다음 경기를 소화하자고 제안했다 것. 결국 통증을 안고 공을 던지던 조용준은 예정된 등판을 마치지 못하고 중간에 내려갔다.

재활과정이 선수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최종구간에서도 통증을 느끼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한다는게 큰 문제인데 구단에서 서둘렀던 탓에 조용준은 다시 10m부터 던지는 재활을 시작해야만 했고 이로 인해 트레이너와 마찰까지 생긴 다음 그것이 구단쪽에 보고되자 300만원의 벌금까지 냈다고 한다. 조용준의 재활 과정에 관해서 조용준이 재활에 소홀했다는 이야기도 많이 나돌았지만, 본인의 이야기가 전부 맞다면 어찌 보면 기존의 자기 관리 소홀 때문에 생긴 편견인 셈이다. 오히려 구단의 재활 프로그램이 더 문제였던 셈. 실제로 재활에 차질이 컸음에도 2006시즌에 무리해서 복귀한 정민태는 2007년 승리 없이 7패 평균자책점 12.81을 기록하며 완전한 먹튀가 되어버린다.

그나마 정민태의 사례가 반면교사가 되면[26]서 구단은 조용준의 복귀를 천천히 기다렸고, 조용준은 더 무리하지 않고 2007시즌 내내 재활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 대신 1군에 얼굴을 비추는 일은 없었고, 심지어 2007시즌 후 현대가 해체된 뒤 우리 히어로즈로 재창단되는 과정에서 연봉 미계약자로 남아 창단식에도 불참했다. 때문에 한동안 조용준의 거취에 대한 기사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2008년 말에는 은퇴설, 잠적설 등 온갖 루머까지 나돌았다. 그런 와중에 히어로즈와의 연봉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지 않다는 뉴스만 나오다가 결국은 연봉 8천만원에 팀에 복귀한다.[27]

이후 2009년 8월 16일 마침내 1군에 모습을 드러냈고 9월 10일에는 무려 1,455일 만에 세이브를 기록했다. 하지만 그 다음 날, 9:8로 이기고 있던 9회 1사 1루 상황에서 등판해 김태균[28]에게 안타를 허용한 후 다음 타자 이도형에게 끝내기포를 얻어맞고 전대미문의 역전패의 마지막[29]을 장식하며 정민철의 은퇴식[30]을 더더욱 성대하게 만들어줬다. 그리고 그 경기는 조용준의 선수생활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31]

이후 김시진 감독이 2010년에는 전문 마무리로 기용해 보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시즌 직전에 신종플루에 걸려 훈련이 힘들어진 데다가 어깨 통증까지 재발하면서 스프링캠프 도중 신철인과 함께 조기 귀국했다.[32] 마무리 보직은 경찰청에서 갓 제대한 현대 유니콘스 시절 후배 손승락에게 넘어갔으며, 손승락은 그 해 세이브왕을 차지한다. 이후 2010년 시즌 내내 강진 2군에서 재활만 하다가 2010년 10월 8일 자로 신철인, 황두성과 함께 구단에서 방출되었다. 기사에 따르면 6월부터 아예 훈련이 불가능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향후 복귀가 어려워진 만큼 사실상 은퇴 수순을 밟게 되었다. 신철인, 조용준 둘 다 30대 초~중반으로 아직은 더 활약할 수 있던 나이였지만 아쉬운 부분.

다만 본인은 현역 연장의 의지를 보였고, 다른 팀에서라도 새출발 하겠다는 마음으로 자택 근처에서 개인 훈련에 매진했다. 그러나 부상 후유증, 자기관리 문제 등이 겹치면서 2010년 이후 어떤 팀에도 둥지를 틀지 못했고, 끝내 은퇴를 선언한다. 은퇴 당시 나이가 32세로 상당히 젊은 편이었는데, 이 무렵 동기라고 할 수 있던 선수들이 현역으로 많이 뛰었던 걸 생각하면 여러모로 아쉽다.[33] 조용준 본인은 오랜 재활로 인해 야구에 대한 열정도 어느 정도 떨어진 상황이었고, 아예 야구계를 미련 없이 떠날 생각이었다고 한다.

통산 116세이브로, 제대로 마무리로 뛴 시즌이 불과 4시즌밖에 안 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커리어를 쌓았다고 볼 수 있다. 만약 관리가 조금만 더 잘 됐다면 오승환[34]과 더불어 KBO를 대표하는 양대 마무리가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야만없. 그리고 조용준이 은퇴한 뒤, 그 오승환은 2016년 메이저리그에까지 진출했다 KBO에 복귀했고, 2024년 현재, KBO 통산 세이브 1위는 오승환이다.

2.3. 국가대표 경력

2.3.1. 1998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2.3.2.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획득하며 병역특례를 받았다.

2.3.3.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3. 피칭 스타일

파일:조용준 투구폼.gif
투구폼. 팔을 휘두르면서 고개도 같이 꺾이는게 특징.[35]이종범.][36]
"슬라이더는 조용준과 김수경이 가장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 박경완 인터뷰[37]
기본적으로는 작은 체구를 가졌음에도 강력한 구위로 윽박지르는 파워 피쳐의 유형의 투수로, 최고 150km/h 초반의 포심과 140km/h를 상회하는 고속 슬라이더가 주무기였다. 특히 슬라이더는 역대 프로야구 최고의 슬라이더 순위를 매긴다면 항상 상위권에 위치할 정도의 마구였고, 오죽하면 선수 시절 별명이 조라이더였다.[38] 04년에는 서클체인지업을 장착하면서 재미를 보기도 했다.

공을 던지면서 고개가 꺾이는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몸이(특히 상체, 어깨가) 극단적으로 나가는 형태의 투구폼을 갖고 있었다. 작은 체구에서 최대한 힘을 짜내기 위해 고안된 폼으로 여겨진다. 이런 투구폼인데 입단 당시부터 어깨부상을 안고 있었다. 거기에 훈련에 불성실하기로는 유명했는데도 구원왕에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할 정도였으니, 이 정도면 역대급 재능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다.

4. 은퇴 후

2011년에는 5월에 목동야구장에서 야구를 관람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2011년 6월 29일 간암에 걸렸다는 기사가 나와 팬들을 걱정하게 했다. 그나마 초기 수준이었다는 게 다행. 8월 23일 기사에 의하면 간암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한다.해당 기사 이때 가족 이외에는 아무도 입원 사실을 안 알렸는데 박승민 등 지인이 수소문해서 병원을 찾아왔다고 한다.

2013년부터 엠스플에서 박재홍과 해설을 맡기 시작했다. 해설 첫 데뷔전은 시범경기 삼성 라이온즈 vs. LG 트윈스 경기. 차분하면서도 조곤조곤한 말솜씨를 보였으며, 목소리가 좀 지루하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체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39]

다만 메이저 리그 해설에서는 지식이 부족해서인지 평이 좋지 않았다. 팬들은 제발 웬만하면 한국프로야구 해설만 하라는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2014년에는 메이저 리그 해설만 했다. 그것도 새벽 경기만.[40] 2015년도 다를 것이 없어서 여전히 메이저리그 해설만 하고 있으며 국내 프로야구는 하이라이트 프로그램만 출연했다. 나중에 밝히길 해설을 하면서 맞지 않는 분야[41]와 비난에 스트레스가 많았던 듯 하다. 결국 2015년을 끝으로 해설위원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이 해 연예인야구 자선 경기에 출장하기도 했다. 타자로 나와서 상대해야 했던 말년 최병장이 자신의 유행어를 응용해서 외쳤던 건 덤.이런 젠장 바뀐 투수가 조용준이라니!!

2014년 9월 24일 네이버 해외야구 MLB SHOW 코너의 "빅리그의 슬라이더 - 구간2. 슬라이더의 이면 with 조용준 위원" 편에서 한 청자가 삼성에게 강했던 이유를 묻자 당시 던졌던 시속 140km 대의 공이 슬라이더가 아니라 써클 체인지업이었다고 답했다. 자세한 내용

2016년 RSB스크린야구 일산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일산센터 카페 최근 투구 영상(프로동네야구 유튜브)

2017년에는 강혁 감독의 부름을 받아 신일고 코치로 변신했다가, 몇 개월 뒤에는 어떤 이유인지 덕수고의 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강혁 감독이 물러나면서 같이 사임한 것으로 추정. 그리고 2018년부터 인천[42]에서 유소년 야구 지도를 하고 있다고 한다.

2019년 6월 26일. 박명환야구TV에 출연해서 경기도 지역화폐 슬라이더 게임을 했다. 오상민-박명환-조용준이 슬라이더만으로 과녁을 맞추면 경기도 지역화폐로 이뤄진 빙고판에 하나씩[43] 붙여서 빙고가 되면 그 상품을 기부하는 게임이었는데 은퇴 이후에도 녹슬지 않는 슬라이더 구사력을 보여줬다.

5. 여담

  • 원래는 불자였으나, 후에 천주교개종하였다. 어깨 수술 후 재활을 할 때 어깨에 성모 마리아 문신을 새겼다고 한다[44]. 더는 어깨가 아프지 않게 해달라는 의미로 새겼다고. 큰 수술을 한 사람들이 보기 흉한 수술자국을 가리기 위해 문신을 하는 일이 종종 있는데, 그것도 겸해서 새겼을 것이다.
  • 2000년대를 대표하는 삼나쌩 중 하나로, 특히나 2004년 한국시리즈에서의 활약은 1984년 최동원, 1993년 이종범, 2021년 쿠에바스와 더불어 삼성 팬덤의 뇌리에 가장 강렬하게 각인된 선수[46]이다. 동기간 선발에 미키 캘러웨이가 있다면 불펜에는 조용준이 있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인데, 통산 33경기 51⅔이닝을 던지며 7승 3패 16세이브 1홀드 ERA 2.44로 극강의 모습을 보였다. 오죽하면 삼성 팬들은 현대와의 경기에서 캘러웨이가 선발로 나오면 그냥 경기를 안 보고, 다른 경기는 보다가도 조용준이 등판하면 채널을 돌려버렸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사실 정규시즌 성적만 보면 삼성에 강하긴 해도 악몽까진 아닌데, 아무래도 2004년 한국시리즈의 영향이 큰 편. 실제로 조용준의 성적이 떨어졌던 2005시즌에도 삼성을 상대로는 11⅔이닝 무실점으로 삼성 타선을 갖고 놀았다. 타 팀 팬들이 느끼는 "오승환" 등판의 체감을 삼성 팬이 궁금해 한다면, 그 때 야구를 봤던 사람 한정으로 2004년 조용준 등판한 느낌이라고 말해주면 아마 200% 공감할 것이다. 대충 불펜으로 뛰는 윌리엄 쿠에바스같은 선수였다고 보면 된다.
  • 배우 안재모의 혼삿길을 열어준 사람이기도 하다.[47]
  • 아마추어 시절 같은 연세대 선수였던 이현곤과 함께 도핑 테스트를 거부하여 2000 시드니 올림픽/야구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한 전과가 있다.[48] 그러나 이 두 선수가 도핑을 거부한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는데, 당시는 도핑 자체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을 뿐더러 둘 다 정황상 약물을 안 했다는 쪽에 무게가 실리기 때문. 물 도핑이라는 게 약을 한다고 바로 야구 실력이 올라가는 게 아니라 약물과 함께 반복되는 고강도 훈련으로 근육 부하를 버텨주면서 벌크업이 되어 파워가 늘어나는 것인데 두 선수 모두 체격 벌크업이 없었고, 롱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둘은 연습을 많이 하는 성실한 선수 또한 아니었다. 이현곤은 당시 이때부터 간염을 앓고 있어서 자율 훈련을 하고 있었고, 간염 환자에게 약물 도핑은 그야말로 자살행위다. 조용준의 경우 아마추어부터 프로까지 훈련 태도가 매우 불성실한 것으로 유명했다. 혹은 둘은 당시 연세대 동기이자 절친한 관계였는데 향간에는 둘이 도핑 테스트가 있는 줄 모르고 테스트 전날까지 신나게 노는 바람에 도핑 테스트 당일 거부했다는 루머가 있다.[49]]
  • 2002년 김진우와 한국프로야구 신인왕 경쟁을 하던 도중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김진우는 시원하게 말아먹은데 비해 조용준이 호투를 해서 둘의 희비가 갈린 것 같다고 밝혔다. 아시안게임에서 김진우가 부진하자, 대표팀 수석코치이자 원 소속팀 감독이었던 김성한이 "똑바로 던져 이 XX아."를 시전했다고.
  • 프로에 있으면서 선발로 등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50] 다만 연세대 시절에는 선발 투수로 활동하기도 했고, 대학 시절 출전한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국가대항전에서는 한국 대표팀의 선발 투수로 출전했다. 국대 선발투수로 기용되었을 정도면 선발 투수로서의 능력은 충분했다는 이야기지만, 조용준이 마무리로만 기용되었던 건 작은 체구 및 어깨 수술 경력 등으로 인해 코칭스태프가 부상 위험이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 KBO 데뷔전 이후 연속이닝 무실점/무자책 기록을 갖고 있었으나, (무실점:18이닝/무자책:29 2/3이닝) 무실점 기록은 2024년 팀의 후배인 김인범이 19 2/3이닝 무실점을 기록하며 빼았겼다.
  • 2020년 현재 대졸 신인 투수들 중 유일하게 구원으로 입단 첫 해 부터 100이닝을 돌파한 선수이며, 고졸로는 임태훈이 마지막이다.[51]
  • 현역 막바지 시절 후배 문성현에게 자신의 슬라이더 그립을 전수[52]했다고 한다.
  • 마구마구에서는 2002년 신인왕과 1점대의 방어율 및 마무리 100이닝을 찍었음에도 불구하고 저평가되어 레어밖에 없다가 엘리트 등급의 카드가 뒤늦게 추가되었다. 단지, 너무 짧은 전성기 때문에 레전드 카드 구현이 어려울 뿐. 현재 엘리트 카드는 2개다. 조용준의 최고 전성기라 불린 04년도 카드의 경우 레어, 엘리트 둘 다 속성으로 출시되었다. 04년도 한국시리즈의 폭우에서 보인 혈투 때문으로 보인다.
  • 꽤 젊은 나이에 은퇴한 게 한인지 의외로 영상 출연이 잦다.[53]
  • 은퇴 후에는 한동안 야구와 인연을 아예 끊고 살았다. 애초에 넥센에서 방출 통보를 받았을 때도 더 이상 야구에 미련을 갖지 말고 은퇴하자는 생각을 했고 곧바로 전화번호까지 바꿔버렸을 정도였다고 한다.
  • 한창 스타크래프트가 유행하던 2002년 말, 현대 대표로 프로야구 스타크래프트 대회에 참여한 적이 있다. 종족은 저그, 좋아하는 선수로는 이기석을 꼽았다고...
  • 데뷔를 앞둔 2001년 말에 중고로 그랜저 XG를 마련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연세대 동기인 김민우와 강철민이 엔터프라이즈를 샀다고 한다. 그러자 그 길로 혹해서 아버지의 지나가는 말을 듣고 쌍용차 대리점에 가서 바로 아이보리색 체어맨을 계약해서 끌고 왔다고 한다. 그리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벤츠를 중고차로 샀다고[55] 밝혔다. 그래서 계약금 5억 4천 받고 바로 외제차를 뽑았다는 루머가 생겼다.
  • 프로 동기인 서승화강철민이 LG와 기아에서 계약금 각각 5억[56]을 받자, 조용준에게 현대에서는 5억 1천을 제시했다. 조용준은 2번째 만남에서 6억원을 제시했고, 결국 훈련을 앞 둔 3번째 만남에서 구단 측의 1군 캠프 동행 제안 및 특급 관리에 따라[57] 5억 2천부터 시작했고, 결국 계속 합의점을 찾다가 계약금 5억 4천만원에 연봉 2천만원으로 합의를 했다. 이 때 번 계약금으로 가계의 부채를 청산했다고.[58]
  • 등번호인 51번은 고등학교 - 대학교 - 프로에서 내내 달았다. 효천고 시절에는 61번을 달고 싶었는데, 강철민이 이미 자리를 비운 새에 61번을 스틸차지했고, 결국 이치로를 보고 51번[59]을 선택했다고 한다.
  • 한때 사고싶은 게 있으면 이것저것 사느라 신용카드를 마구 긁는 등 소비습관이 잘 들여진 편이 아니었다. 결혼한 후 아내가 조용준의 카드값을 보고 경악했고 끝내 체크카드로 갈아타게 되었다.

6. 박명환야구TV 출연

2020년 8월 박명환야구TV에 출연하여 선수 생활의 경험담을 이야기했다.
  • 2002년 신인 시절 계약금 5억 4000만원을 일시불로 달라고 요구했고[60] 그 계약금으로 바로 수입차를 구매했다고 알려져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는 받은 계약금으로 아버지 빚을 갚았다고 한다. 채무를 갚은 뒤 부친은 조용준에게 "아들 고맙다" 라고 처음으로 말했다고 한다.
  • 신인 시절[61] 룸메이트가 전준호, 신철인, 이상열 등으로 계속해서 바뀌었는데, 새벽 3시에 클럽에서 전화가 오면 이들을 같이 데려가서 클럽에서 술을 마셨다고 한다. 조용준은 적당히 양주만 마시고 왔지만 정작 나머지 셋은 숙취로 드러누워서 벌금을 내는 일이 비일비재[62]했다고.
  • 신인 시절 주전 포수였던 박경완과 배터리를 짤 때 조용준이 박경완이 낸 사인을 거부한 일이 있었는데, 오히려 그냥 너 편한대로 던지라면서 잘 달랬다고 한다. 조용준과 박경완 두 사람의 연차가 7년으로[63] 상당히 큰 편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박경완이 이래저래 비범하게 보이는 부분. 다만, 장기영이 투수 시절 장광호의 사인을 거부하고 던졌던 적이 있었는데, 제법 잘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박경완이 장기영을 두들겨팼다고 한다.[64]
  • 선수시절 하루는 본인이 블론 세이브를 적립하고 팀 패배에 일조했는데, 경기 끝나고 라커룸에서 이숭용에게 한 대 맞고 또 맞을뻔 했으나 클리프 브룸바가 이를 막으면서 타일렀다고 하였다. 그날 브룸바가 없었으면 자기는 아마 이 세상 사람도 아니였을거고 온몸에 상처가 많이 났을거 라는 개드립을 쳤다. 이숭용은 당시 팀에서 주장을 2번이나 했었다.
  • 은퇴 후인 2012년 12월 여자친구와 결혼식을 올렸는데,[65] 결혼식은 조촐하게 했다. 은퇴 후 한동안 야구와 인연을 끊고 살았다 보니 야구계 지인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30명 정도만 초대했다고. 그런데 프로 동기이자 동갑내기인 박용택이 오고, 현대 시절 스승이던 김재박 감독도 어떻게 알고 축하해주었다고 한다. 아내는 친구의 아내의 동생이라고 한다. 의외로 조용준의 아내는 조용준의 활약을 본 적이 없다.
  • 다만 입단한 지 얼마 안 돼서 중고로 외제차를 샀다는 썰도 동시에 풀었는데, 바로 산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아직 신인이 계약금 외엔 외제차를 구입할 만한 돈이 있을 리가 없으니 그 외제차 값은 빚 갚고 남은 계약금이 맞고, 결론적으로 계약금을 일시불[66]로 받았고 그 돈으로 수입차를 산 사실은 맞긴 하다. '바로' 산 게 아니었을 뿐. 바로 샀다는 얘기는 입단한 지 얼마 안 된 신인이 외제차를 끌고 다니니 그 이야기가 어찌어찌 와전된 듯. 방송에서 "그랜저XG를 타다 벤츠 SLK 중고차를 샀다"고 설명했다.
  • 현대 유니콘스/2군 시절 2군에 내려갔을 때 2군 선수단 회식에 참석한 썰을[68] 풀었다. 1군은 매일 소고기 회식을 하는 반면 2군은 소고기보다 싼 돼지갈비로 어쩌다 한 번씩 회식을 했는데 1군보다 2군의 선수 숫자가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재정 상황이 좋지 않아서인지 250만원으로 리미트를 걸어놓고 회식을 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회식을 하다가 금액 한도를 넘겼다는 이유로 회식을 중단시킨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자 매니저에게 "스톱! 그런게 어딨어요? 오버된 금액은 제가 낼께요" 라고 하며 선수단은 회식을 계속할 수 있었다.
  • 선수협 현대 구단 대표[69]였는데 현재의 선수협이 창단 당시 선수협의 취지[70]에서 많이 벗어났다는 의견을 표시했다. FA 제도 개선 등의 활동들이 1군 선수들에게는 좋지만, 2군 선수들의 복지개선을 위한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지적을 했다.

7.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2002 현대 64 109 9 5 28
(2위)
4 1.90 80 42 116
2003 47 53⅔ 2 7 26
(3위)
1 3.52 52 19 39
2004 63 75 10 3 34
(2위)
0 2.28 67 25 56
2005 49 52⅓ 2 1 27
(2위)
0 3.27 47 23 61
2006 1군 기록 없음
2007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2008 우리 1군 기록 없음
2009 히어로즈 11 9 0 1 1 0 4.00 11 7 6
2010 넥센 1군 기록 없음
KBO 통산
(5시즌)
234 299 23 17 116 5 2.59 257 116 278

8. 관련 문서



[1] 당시에는 176으로 반올림해서 말했다.[2] 언젠가부터 어깨성모 마리아 문신을 하고 난 이후로 개종하였다. 아마 2010년 넥센 2군 구장인 강진 베이스볼 구장에서 사진이 나왔다.[3] 블론세이브를 하면 라이터가 되기도 하였다.[4] 프로필상 키는 176cm이지만 이보다 더 작다는 말이 있다. 본인은 175.6cm인데 반올림해서 176cm이라고 말했다.[5] 김상현박기남의 트레이드로 유명한 투수이다.[6] 고등학교 시절 위계질서 문화(단체집합)와 코치들의 간섭으로 인한 자괴감에 야구를 그만두려 했는데 때 마침 선수 시절 자유 분방한 성격을 가진 부임한 장호연 감독과 면담 후 어깨가 좋다는 이유로 코치들의 일체 간섭을 받지 않는 약속과 함께 투수로 전환했다고 한다. 영상 링크[7] 고2 때 연세대 입학을 확정지었다고 한다. 시작은 고려대학교 야구부와 연습경기를 했는데, 조용준의 공을 못 치자 고려대 감독의 눈에 먼저 들어왔고(2이닝 무실점에 4타자 연속 삼진), 이후 장호연 감독이 조용준의 이 활약상을 연세대 감독한테 얘기하여 연세대학교 야구부 감독 앞에서 라이브 피칭을 했는데 슬라이더를 미리 알려주고도 연세대 타자들이 공을 못 치자 그 다음날 계약을 했다고 한다. 어찌보면 장호연 감독이 본인 선수생활에 최고 은사라면 은사인셈. 영상 링크[8] 당시는 드래프트 지명권이 영구 유지되었기 때문에 대학 진학을 선언했거나 성장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고졸선수를 적당한 라운드에서 지명[71]한 후 대학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조용준의 팀 후배였던 손승락장원삼 역시 이러한 케이스로 고교시절 신인지명을 받고 대학에 진학했으며 둘 다 대학에서 재능이 만개한 케이스이다.[9] 하필이면 왜 국어국문학과일지 궁금해할 수도 있는데, 지금은 체육특기자는 체육 관련 학과에 학적을 등록하지만 이 당시엔 체육 특기자는 어차피 수업은 안 들을거 아무 학과나 원하는 대로 넣어주는 아름다운(?) 관행이 있었다. 당연히 국어국문과 동문 취급은 안해준다...만 연세대 운동부 출신이었기 때문에 연세대 자체의 동문취급은 받는다. 그런데 그걸 감안해도 국어국문학과는 특이하기는 했다. 당시 운동선수들은 원하는 과를 고를때 어느 정도 여학생들이 있으면서 수업을 안 나가도 학고를 안 맞기 쉬운, 그리고 프로에서 실패하거나 프로에 못 가도 취준을 하기 용이한(물론 IMF 이전 취준자 한정) 법학과, 경영학과 등을 선호했기 때문. 참고로 이건 지금까지도 체육 특기자가 원하는 과를 갈 수 있고, 운동부 출신이 오히려 취직에서 가산점을 받는 일본에서는 자주 일어난다. 다만 일본은 법이나 경영 말고 순수 인문사회 전공을 택하는 선수도 꽤 많다.[10] 은퇴 후 유튜브 박명환야구TV에서 썰을 풀었는데, 당시 일본프로야구를 동경해서 일본에 진출하고 싶었다고 한다. 당시 98년도는 일본에서는 선동열, 조성민, 이종범, 이상훈 등 한국 선수들이 NPB에서 활약하던 시절이다. 그래서 일본어를 배워둬야겠다고 생각을 해서, 일어일문학과로 등록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막상 연세대에 진학해보니 연대에 일어일문학과가 없어서 그냥 꿩 대신 닭이라고 비슷한(?) 어문계열인 국어국문으로 등록을 했다고.[11] 선수들이 거의 다 대학생활 중 강의를 등한시하여 딱히 배우는게 없지만, 예외적 케이스가 있는데 유민상이 있다. 부상 재활 중에 심심해서 강의도 들어가고 사이버 강의도 자주 들으면서 과제제출도 재미로 하나둘씩 해서 내다가 자기도 모르게 재미붙이는 바람에 공부를 성실히 해서 A나 B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게다가 어릴 때 미국에 살아서 영어를 할 줄 알기에 영어가 많이 필요한 과제도 잘 냈다고 한다. 물론 운동부 선수가 과제에 성실한 것을 교수들이 매우 긍정적으로 본 부분도 있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선수들은 그것도 안 하기도 하고, 그것만으로 A를 쉽게 주기는 힘들다. 어느 정도 유민상의 학업성취도가 있던 것. 유민상은 조용준처럼 연세대학교 출신이다.[12] 현대 유니콘스 투타 통틀어 신인 계약금 중 최다액. 2위가 그 박재홍(4억 3000만원). 당시 현대 구단이 재정 상황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조용준에게 거액의 계약금을 준 것[72]은 그만큼 조용준에 대한 기대치가 컸다는 거다.[13] 이 때 고교 동기 강철민 역시 한양대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기록하고(98 아시안게임 멤버이기도 하다.) KIA 타이거즈에 입단해 비슷한 계약금(5억)을 받았다. 강철민이 먼저 KIA와 5억원에 계약했기 때문에 조용준이 더 높은 계약금을 부를 수 있었다.[14] 실제로 2000년~2001년 2시즌간 마무리를 뛰었다. 본인이 블론 세이브 할 때마다 너무 멘붕이 오고 머리도 아프고 고통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부상까지 겹쳤기에 2002년부터 선발로 다시 되돌아갔다. 하지만 2년간 뚜렷한 성적없이 망하고 2004년 끝에 방출 당한다.[15] 2001년 96이닝을 던지며 13세이브를 올렸다.[16] 조용준은 대졸이고 김진우는 고졸이라 프리미엄이 있고 고졸 신인 첫 탈삼진왕을 거머쥔 김진우의 신인왕 수상이 유력했으나 김진우가 그 해 부산 아시안 게임 중국전의 2이닝 2실점, 플레이오프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여 신인왕 수상에 실패했다. 이어서 조용준이 등판했다가 호투를 한 것도 가산점을 받은 원인이다. 김진우의 부진을 본 당시 국가대표팀 코치이자 소속팀 감독인 김성한은 이를 태업으로 의심하고 김진우에게 쌍욕을 했다고.[17] 특히 좌타자에게는 거의 마구 수준이었다고[18] 그나마도 신철인과 송신영은 4점대 자책점, 이상열도 평균자책점 3.93을 기록할 정도로 썩 좋지 않아서... 그냥 유니콘스 선수들 방어율이 처참했다. 1선발 김수경만 봐도 방어율이 4점대 후반이자 거의 5점대에 근접했고, 임선동은 3선발이지만 허리부상으로 말 그대로 하락세가 시작되었다. 용병 멜퀴 토레스가 기대이상으로 많이 선전했으나 하필 타고투저의 흐름 및 득점율이 좀 떨어지면서 빛이 바랬다.[19] 이 때문에 관리했던 김시진 투수코치나 고교시절 은사였던 장호연도 보자마자 선발투수로는 롱런은 힘들고 평범한 "중간계투"가 되겠다고 생각했다.[20] 안그래도 타순은 심정수와 박진만이 빠지니 교타자들 보다는 심각하게 뻥타선으로 변화 되었다.[21] 그런 와중에도 조용준은 3연전을 전부 등판하며 3연투를 했다. 심지어 마지막 경기는 멀티 이닝을 소화했다.[22] 특히나 회전근개쪽에 문제가 큰 부상이다.[23] 같은 영상에서 본인이 설명한 바에 따르면 10m, 20m 이렇게 서서히 던지는 거리를 늘린 후 하프피칭, 라이브 피칭, 실전경기 투입이 재활 프로그램의 순서라고.[24] 배영수의 반대 사례를 생각하면 된다.[25] 대선배 정민태를 쉽게 생각하면 되는데, 정민태는 통증 때문에 오히려 런닝을 하면서 푹쉬게 되면서 부상을 어느정도 극복했다. 하지만 이후 허벅지를 다치면서 선수생명이 끝나버린것.[26] 다만, 정민태의 부상은 전신인 태평양 돌핀스 시절 이였기에 유니콘스 프런트들이 재활에 너무 안일한 것이다.[27] 당시에도 히어로즈는 그보다 높은 연봉을 받는 선수들이 수두룩했는데 시즌 후 60%의 선수들이 타팀으로 떠나거나 새롭게 계약을 했다. 다만 그 동안 보류수당 문제가 꼬이면서 실제로 조용준이 수령한 금액은 거의 없다시피 한 수준에 가까웠다. 조용준 본인은 당시 상황을 회고하면서 터무니 없는 수준의 삭감율(김동수전준호는 70% 이상 연봉이 삭감되어 1억 미만으로 재계약을 했다. 심지어 송지만김수경은 해체 후 재창단이었기 때문에 FA 계약도 사라졌다.)을 보고 선수협 현대 유니콘스 대표였던 본인의 입장에서는 도의적 책임 때문에 가장 먼저 계약을 할 수 없는 입장이었고 가장 늦게 계약을 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고 한다.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박노준 단장[73]이 아예 언론플레이를 통해 조용준을 이런 식으로 밀고 갔다고.[28] 김태균이 한화 1기 시절 2년차 징크스를 겪은 해를 빼면 이해에 유일하게 규정타석 미달이였다. 시즌 초중반에 뇌진탕을 겪고 부상자 명단에 올라갔기에 팀의 최하위도 막을 수 없었다.[29] 이날 서울 히어로즈는 9:0으로 리드하다가 막판에 무려 "11점을 내주고 역전패"했다. 당시 9점차 역전승한국프로야구 기록이었다. 2013년 5월 8일 SK 와이번스두산 베어스를 상대로 10점차를 뒤집는 승리를 거두면서 기록을 경신했다.[30] 이날 팬들과 정민철은 은퇴식 중에 눈물을 보였다.[31] 이 날은 같이 몸을 풀던 송신영이 올라가겠거니 싶었는데 투수코치가 조용준의 등판을 지시했다고. 이 날의 역전 쓰리런 홈런을 맞은 이후로 코칭스태프가 잔여 시즌에 올리지 않았다.[32] 이때 야갤에서 김시진 감독 담배 타임이 더 늘어난다는 개드립이 있었다.[33] 과거 현대 시절 팀 선배인 송신영이나 박준수보다도 더 일찍 은퇴했다. 동갑내기 친구인 김수경이 좀 더 선수 생활을 하고 은퇴를 했었다가 번복한 것이 2013년. 김수경은 2014년 독립 야구단인 고양 원더스에서 새롭게 선수생활을 시작하였지만, 결국 한계를 느끼고 완전 은퇴를 선택했다.[34] 조용준이 세운 최소경기 100세이브(197경기)를 돌파한(180경기) 유일한 선수[35] 상대 타자는[36] 영상은 신인상 특집 하이라이트였다. 공교롭게도 상대팀인 KIA의 김진우와 당해년도 신인왕 대결을 하여 조용준이 승리를 했다.[37] 박경완은 조용준과 1년간 현대에서 함께한 적이 있고, 김수경이 현대에 입단한 그해 트레이드로 현대에 와서 4년 동안 같이 했다.[38] 조용준과 마찬가지로 프로야구 역대급 슬라이더를 구사했던 선배 투수 염종석의 별명에서 따왔다.[39] 여담으로 박재홍과 조용준은 현대 유니콘스 시절 2002년 한 시즌간 함께 팀 선수로 있었다. 또한 연세대학교 선후배지간이다.[40] 그래도 송진우, 염종석, 최원호, 진필중 등 이런 분들의 해설을 듣다 보면 저들에 비해 조용준 위원은 양반이다.[41] 송재우 위원 처럼 메이저리그 한 분야쪽에 오래 했으면 몰라도 허구연 처럼 국내와 해외리그 해설을 해야하니 도저히 맞지가 않았다고 한다.[42] 인천과는 별다른 인연은 없지만, 드래프트 지명 당시 그해 현대는 인천을 연고지로 삼던 구단 이였다.[43] 슬라이더로 한가운데 맞추면 두개씩[44] 과거에는 댓글달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졌다. 사라지기전 어떤 네티즌들이 저걸보고 김시진 감독님 담배량 또 늘어났다 라고 개드립 치기도 했다.[45] 프로야구 선수들 몇몇도 이 프로그램에 나왔는데 두산 베어스홍성흔정수근 그리고 강병규가 있었다. 강병규는 입담이 유명해져서 나중에 은퇴 후 방송인으로 살기도 하였다. 또한 팀 후배 이택근고려대학교 재학 시절에 참가를 했었다. 또한 훗날 입단하게 되는 구단도 이 방송에서 출현하는데 친구 김수경이 참가했었다고 한다.[46] 여기에 2013년 최준석 역시 악랄한 수준의 맹활약을 펼쳤으나 니느님도 이 2013년 한국시리즈에서 두산이 패했으므로 저들만큼의 악명은 없다시피하다.[47] 드라마 야인시대의 청년기 김두한, 드라마 정도전에서 이방원 역으로 유명한 그분.[48] 관련기사[49] 도핑 거부에 대한 또 다른 의견으로는 국가대표는 예비 엔트리라 무조건 차출이 아니었고, 당시 연세대는 정기전과 연고전 등의 경기가 남아 있어 의도적으로 거부했을 거라는 추측도 있다. 2000년 연고전이 시드니 올림픽 야구 결승 이틀 후인 9월 29~30일에 걸쳐 치러졌기 때문에 신빙성은 있는 추측. [[http://mlbpark.donga.com/mlbpark/b.php?m=search&p=1&b=kbotown2&id=2771795&select=sct&query=%EC%A1%B0%EC%9A%A9%EC%A4%80+%EC%95%BD%EB%AC%BC&user=&reply=]|링크][50] 그러니깐, 역대 신인상 기준 수상 선수들 중 선발 없이 순수 불펜으로 신인상을 받은 선수 중 하나였다. 이후에 등장하는 선수가 오승환 그리고 흑역사를 쓴 임태훈도 있었다. 대신 오승환은 선수생활 말년인 2023년에 전반기 이벤트 딱 한번 선발투수[74]를 하여(하지만 패전투수) 조용준과는 다른 커리어가 되었다.[51] 임태훈 역시 중간계투로만 나왔고 별개로 2007년 한국시리즈때 첫 데뷔 선발로 뛴 적은 있었다. 문제는 시리즈 내내 장렬하게 홈런 3방이나 쳐맞고 침몰했다.[52] 2014년 까지는 선발투수로는 뛰긴 했지만 더이상의 성장이 없고 부상만 많아지자 군복무 후 포지션을 마무리와 중간계투로 보직을 옮겼다.[53] 선수 소개에 있던 영상도 다시 찾아보기 힘든 영상이다. 유튜브의 주인이 계정 탈퇴를 하면서 채널이 폭파 되어 옛 영상 자료들을 볼 수 없다.[54] 같은 조 씨 투수에 2003 한국시리즈 우승멤버지만 조규제의 경우에는 이미지나 실제 활약은 쌍방울, SK 초기 쪽이 훨씬 존재감이 강했기 때문에 현대 쪽에서는 잘 언급되지 않는 편이다. 게다가 조웅천과 같이 뛴적은 없고(드래프트 지명 당시에는 조웅천이 현대에 있었다. 그러나 입단 1년전인 SK로 조규제와 함께 신생팀 보상선수로 팀을 옮겼었다. 조규제는 박경완의 FA 보상선수로 다시 팀에 왔다가 본인이 FA가 되어 고향팀KIA 타이거즈로 이적했다.), 조용훈의 경우 서울 히어로즈 시절 1년을 함께 했었다.[55] 2001년 당시 팀 입단 동기인 김민우, 이대환전지훈련대만에서 이 차를 보고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56] 서승화는 프로입단은 말이 많아서 개인 항목을 보는것을 추천한다. 강철민의 경우 해태 타이거즈 시절 지명권이 효력을 발동 했는데 김진우 처럼 해태 구단이 KIA 타이거즈로 간판을 바꾸면서 거액을 받게 되었다.[57] 심지어 시작을 1군에서 했다.[58] 조용준의 부친이 평소에 칭찬을 안 하던 사람인데, 빚을 다 청산하자 아들에게 칭찬을 했다고. 효자 노릇했는데 오히려 계약금 전부 차에 몰빵했다는 팬들에게 서운하다 한 것은 덤.[59] 전직 LG 트윈스 투수 봉중근도 유니폼 등번호에 대한 비하인드를 밝힌적이 있었다.[60] 보통 신인이나 FA등 계약금은 분기로 나눠서 준다. 7월과 12월.[61] 팀 후배인 조용훈도 이런적이 있었다.[62] 결론적으로 조용준이 조금만 먹자고 하다가 셋이 어이없게 뻗어버린것.[63] 더군다나 대학 졸업 후 2002년에 프로에 데뷔한 조용준과 달리 박경완은 1991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프로 무대로 직행했기 때문에 프로 입단 연도로 따지면 무려 11년이나 차이가 난다.[64] 다만 박경완의 구타가 잘 했다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장광호는 은퇴를 앞둔 36살의 베테랑 포수였고, 장기영은 그 전 해에 입단한 21살의 신인이었다. 15살이나 어린 신인 투수가 베테랑 포수의 사인을 거부하고 있으니, 그걸 지켜보던 박경완의 입장에서는 기가 찰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거기다가 더 붙히면 장광호 코치는 그 당시 대졸 + 90년대에도 유효하던 실업 야구 출신으로 프로 데뷔가 꽤나 늦었다. 경력만 따져보면 거진 20년이나 차이나는 대선배의 사인을 거부한 격....[65] 사실 결혼식을 올리기 전인 2012년 2월 이미 득남한 상태였다. 원래 2011년에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으나 조용준이 간암 수술을 받는 바람에 1년 뒤로 미뤘다고 한다.[66] 위에 소개된 신인왕 라이벌 김진우도 일시불로 받아 집을 수리하는데에 썼다고 한다.[67] 박진만은 현재 2024년 삼성 라이온즈 감독을 하고 있다.[68] 후배 조용훈도 회식에 대한 썰을 풀었다.[69] 이전만해도 김인호, 김동수, 전준호, 이숭용이 팀내 대표로 나간적이 있었다.[70] 이때문에 영상에서 조용준을 보고 선수협이 지금까지 하는 틀이 어긋났구나 라고 대부분 납득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