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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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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조성민(趙成珉)
생몰년도 1973년 4월 5일 ~ 2013년 1월 6일 (향년 39세)
신체 194cm, 110kg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
가족 누나 조성미
배우자 최진실 (2000-2004년)
자녀 아들 최환희(2001년생)
최준희(2003년생)
학력 신일고-고려대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6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입단(NPB)
2005년 한화 이글스 신고선수[1] 입단(KBO)
소속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996~2002)
한화 이글스 (2005~2007)
지도자 경력 두산 베어스 2군 재활코치 (2011)
두산 베어스 2군 투수코치 (2012)
일본시리즈 우승 2000(요미우리)
종교 천주교(세례명: 마리오)[2]
서명(싸인) 링크

1. 개요2. 선수 경력
2.1. 고등학교 시절2.2. 대학 시절2.3.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2.4. 한화 이글스 시절2.5. 연도별 주요 성적
3. 해설자 경력4. 지도자 경력5. 혼인
5.1. 첫 번째 결혼5.2. 두 번째 결혼
6. 말년7. 사망8. 평가9. 기타

1. 개요

요미우리 자이언츠, 한화 이글스 소속의 야구선수이자 두산베어스 코치.

고교 시절부터 뛰어난 야구 실력과 외모로 인기를 얻었던 야구선수였으며 NPB에서의 활약도 기대되었으나, 프로 진출 이후에는 기대 이상의 성적을 못 거두었으며 이 후 최진실과의 결혼 과정에서 있었던 여러 잡음으로 인생 자체는 그렇게 도덕적이게 살다가지 못했다. 단 말년에는 아이들에게 아빠로서 어느 정도 신경을 써주는 모습을 보여 이미지가 조금 개선되었다.

2013년 1월 6일 스스로 목숨을 끊어 세상을 떠났다. 장지는 스카이캐슬.

2. 선수 경력

2.1. 고등학교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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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일고 시절 조성민.

투수와 타자로 재능을 보였다. 190cm의 장신에서 내리꽂는 150km대의 강속구가 무기였다.

2.2. 대학 시절

박찬호(한양대), 임선동(연세대) 등과 함께 '황금의 92학번'[3][4] 중 하나였다. 그리고 신일고 재학 시절에는 휘문고 임선동, 경기고 손경수와 함께 서울지역 고교생 '투수 트로이카'라고 불렸다. 장신에 미남이라 신일고등학교 시절부터 여성팬들이 많았다.[5]

2학년 시절인 1993년 9월 영남대와의 추계리그 경기에서 7회까지 노히트 노런을 이어가다가 안타를 맞아 깨어지기도 했다. 문제는 이 경기에서 최남수[6] 감독이 조성민의 노히트 노런이 깨어지는 순간, 충격으로 심장마비를 일으켜 4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는 것. 결국 고려대는 10여일 후 열린 연세대와의 정기전을 감독 없이 치렀고, 끝내 승리하여 은사의 영전에 승리를 바칠 수 있었다.

2.3.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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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우리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은 조성민. 옆의 등번호 33번은 당시 감독직을 맡았던 나가시마 시게오.

뛰어난 체격 조건의 강속구 투수로 고교시절부터 주목받은데다 자기보다 뒤에 있던 박찬호의 해외진출로 자극을 받아 드래프트를 거부하고 1996년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일반적인 일본진출 사례와는 달리 유망주 시절 건너가 거인팜에서 길러진 선수. 그러나 1990년대까지만 해도 교진(巨人, 자이언츠)에게 관리 따위는 장식이었다.[7][8] 신일고 시절부터 혹사당해왔던 팔에 문제가 생기면서 거의 매일 재활치료를 받아야 했다.

1997년 7월 처음으로 1군에 등록, 중간계투와 중무리를 오가면서 1구원승 11세이브, ERA 2.89를 기록한다. 1998년에는 선발 로테이션에 정착, 전반기에만 7승을 올리며 올스타에 선발되었으나, 이 올스타전에서 팔꿈치 부상을 당해 꼬이기 시작하더만[9] 그 이후 재활로 허송세월을 보내다가 2002년 10월 방출되었다.

2.4. 한화 이글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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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도 신인지명에 나왔으나 2차 1라운드 지명때 자신이 호명되지 않자 자리를 떠나 버렸다. 그리고 2004년도에 신인드래프트에 나서면서 2라운드 지명이면 계약을 할것이다 라고 했으나 어느 구단에도 지명받지 못한 뒤 '지명 받은 선수 중 몇 명이나 뛰는지 지켜보겠다'는 발언으로 까였다. 고려대 선배인 박노준처럼 스타 의식에 지나치게 젖어있다는 비판이 자연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개인 사업[10]과 국내야구 해설[11]을 하다가 2005년김인식 감독의 부름을 받아 한화 이글스에서 3년간 불펜투수로 활동하고 은퇴하였다. 한화에서는 이미 전성기가 지나서 별 기대가 없었으나 그래도 1년 정도는 쏠쏠한 활약을 해주었다.

2.5.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5 한화 이글스 16 19⅓ 2 2 0 4 0.500 6.52 30 1 9 6 8 15 14 2.017
2006 7 6⅔ 0 0 0 0 0.000 6.75 12 1 6 0 4 6 5 2.700
2007 12 43 1 2 0 0 0.333 4.19 41 3 19 5 18 23 20 1.395
KBO 통산(3시즌) 35 69 3 4 0 4 0.429 5.09 83 5 34 11 30 44 39 1.696

3. 해설자 경력

XTM에서 마해영과 함께 김태균이 출전하는 지바 롯데 마린스의 경기를 해설하기도 했다.

무난한 해설톤에 분석적인 해설을 했다는 평가. 특히 베이징 올림픽 야구에서 일본전의 경우 케이블에서 녹화 해설을 담당하였는데 투수와 포수의 움직임, 그리고 타자의 스탠스 등을 토대로 경기 흐름을 예측하는 해설을 했다.[12]

4. 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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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치 시절 조성민. (정민철?)

2011년 1월 27일자로 두산 베어스의 2군 재활 코치가 되었다. 해당 기사

2012시즌 이후 박동희의 기사에 따르면, 코치로서 능력은 있었지만 지각과 결근이 잦았다고. 두산 측에서는 해외 연수 등을 권유했지만 그가 거부하고 스스로 떠났다고 한다. 이혼 후 과음으로 여러 번 결근과 지각을 했고, 구단 측에서 지적해서 본인도 그다지 재계약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은 듯.

5. 혼인

5.1. 첫 번째 결혼

고등학생 시절부터 배우 최진실의 팬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의 고등학교 동창 친구의 증언에 의하면 최진실의 사진이 인쇄된 책받침과 여러 사진들을 갖고 다니며 나중에 꼭 최진실과 결혼할 거라고 밝혔다고 한다.

1998년 12월에 방송을 통하여 서로를 처음 만난 후, 조성민이 구애하여 둘의 관계는 연인 사이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그와 최진실의 연애는 순탄치 않았는데, 나이 차이[13]와 서로의 직업적 특성 등을 들어 조성민의 아버지[14]와 최진실의 어머니(정옥숙) 모두 결혼을 반대했기 때문이다.결혼 전 기사 이혼 직전 기사 조성민. 넌 진실을 감당할 수 없어! 이때 결혼 반대에 절망해서, 조성민이 약을 먹고 자살을 기도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양가의 허락을 받아내어, 2000년 12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최진실과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게 된다..

2001년 8월 1일(2001년생임에도, 2000년생과 같은 학년이다.) 첫째 환희를 낳았다. 후에 정옥숙이 밝히기를 이 시기에는 두 사람의 사이가 완만해서 조성민은 환희 육아에 엄청난 공을 쏟았다고 하며, 3살 무렵까지 아버지, 어머니 사랑을 듬뿍 다 받았던 아이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2년 12월 18일 조성민은 자신의 사무실에 기자들을 불러서 기자회견을 자청한 뒤 최진실을 유책배우자라고 비난하였고, 이 과정에서 자신이 출산을 앞둔 최진실을 폭행했다고 밝히기까지 했다. 그러나 최진실이 이혼을 강하게 반대하여 결국 소송은 못 걸었고, 대신 별거를 택했다. 이에 조성민은 2004년 9월까지 최진실에 대해 자주 명예훼손을 일삼았다. 2003년 3월에는 저 유책배우자 발언 때문에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이 시기의 행동 때문에 조성민에게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남겼으며 최진실의 가족들과 아이들에게도 큰 불행을 떠안겨 준 셈이 되었다.

결국 2004년 8월 조성민은 자택에서 최진실을 폭행하였고, 최진실은 더 이상 혼인 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9월 합의이혼했고, 조성민이 슈크림빵 사업을 하며 최진실 가족을 상대로 빌렸던 돈을 갚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친권은 모두 최진실에게 넘겨주었다.

2002년부터 2004년 사이 최진실을 향해 명예훼손을 일삼은 건 사후인 아직까지도 대중들에게 조성민이 용서받지 못한 큰 과오 중 하나였다. 기자회견의 내용이 전부 최진실을 비난하거나 불륜에 대한 자기합리화, 혹은 최진실의 혼전 사생활등을 논하는 명예훼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성민이 최준희를 임신하고 있었던 시기부터 최진실을 여러 차례 폭행한 사실 또한 대중들의 비판을 받았다.

2008년에 전처 최진실이 사망한 이후에 아이들의 친권[15]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등 논란을 야기했다.[16]여론은 조성민이 친권을 갖게 될 경우 아이들이 물려받은 최진실의 재산을 조성민이 관리하게되는 결과를 초래하므로 네티즌들이 다음 아고라에서 반대 투표를 하기도 했다. 정옥숙 또한 그가 최환희와 최준희의 생일에 한 번도 오지 않았다면서 반발하였다. 이에 조성민은 돈문제에 관해서 최진실의 개인재산을 신탁재산으로 바꾸어 아이들을 위해 관리하려는 생각이었다고 해명했다.

5.2. 두 번째 결혼

그리고 아내 최진실과 이혼하지 3년뒤인 2007년 말에 재혼 사실이 알려졌다. 2년 전인 2005년에 재혼했는데, 상대가 이혼 과정 당시 연인관계를 부인했던 '심마담'으로 알려져 '아니라고 우기더니만 사실이었군'이란 눈초리를 받았다. 2008년 10월호 여성잡지에서 자신의 아내는 사업 수완이 좋은 사람이고 엔터테인먼트 분야에 지인도 많은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2002년부터 2004년 사이에 조성민과 심마담은 멋진 언론플레이를 구사했는데 그 구체적인 모습은 다음과 같다. 심마담은 조성민의 공범으로서 톡톡히 역할을 했다.

1. 조성민은 심마담과 이런저런 애정행각을 펼쳤지만 장난이었을 뿐이라고 떠들고 다녔는데 심마담도 인터뷰를 통해 조성민을 거들었다. '정조의 의무를 위반했지만 장난으로 그랬다'는 거고 이는 '음주운전은 했지만 장난으로 그랬다'고 한 것과 같다. 이 둘은 인터뷰를 통해 최진실을 의부증 환자로 몰았지만 '의부증 환자 최진실은 왜 이혼 소송 안 당하고 있는 거임?'에 제압된 사안이다.

2. 조성민은 임신부 최진실을 폭행했다고 떠들고 다녔는데 이 폭행에 대해서 쌍방폭행이라고 했고 심마담도 이 폭행에 대해 인터뷰를 통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조성민을 거들었다. 역시나 '폭행범 최진실은 왜 이혼 소송 안 당하고 있는 거임?'에 제압된 사안이다.

3. 조성민은 최진실을 납치범이라고 떠들고 다녔는데 심마담도 인터뷰를 통해 조성민을 거들었다. 역시나 '납치범 최진실은 왜 이혼 소송 안 당하고 있는 거임?'에 제압된 사안이다.

2008년 10월호 여성잡지에서 최환희와 최준희에게 면접교섭의무를 이행한 적 없고, 그들을 만나는 게 자기 아내에게 미안한 일이라고 했다. 편지를 쓰며 면접 교섭 의무를 준수할 수도 있는데 이렇게 말하고 다니며 욕을 벌었다. 이 때 여성조선 백은영과 우먼센스 하은정이 스피커 역할 했다. 이 스피커들에 의해 달랑 하나 있는 부모 역할인 면접 교섭 의무도 하지 않겠다고 떠드는 이야기는 영원히 기록으로 남게 된다. 백은영은 지금은 TV조선을 근거지 삼아 정옥숙, 최환희, 최준희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다.

조성민은 가해자로서 피해자 탓 한다거나 자기 의무 자기가 이행 안하는 것도 남탓 하는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하는 특기가 있었는데 면접 교섭 의무를 이행하지 않겠다고 할 때도 그런 화법을 구사하는 걸 잊지 않았다.

2008년 10월 조성민이 최진실이 남긴 재산에 관심을 보이면서 이들의 만행이 다시 인구에 회자되었다. 2010년 10월 이들이 별거한다는 기사가 나왔다. 그러면서도 같이 사업을 하는 게 2011년 12월 기사화되기도 했다. 리누이[17]

6. 말년

2008년 10월 전 아내 최진실이 사망하자 시신이 발견되었던 아파트에 찾아와서 시신확인을 했다. 그 후 삼성서울병원에서 3일 내내 빈소를 지켰고, 발인 후 안치 과정까지 동행했다.[18]

이 후에는 두산 베어스 코치 등을 역임하며 환희, 준희와 자주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환희와 준희는 여전히 아빠에게 어색한 감정을 가지기는 했지만, 야구장에도 같이 오고 최진실의 추모식에도 참석하는 등 아빠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사족으로, 사망하기 3개월 전에는 아이들의 운동회에 나가서 아이들과 좋은 한 때를 보내며 "아버지로서 책임을 다하겠다" 라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이 시기 대중들의 반응은 "아이들의 아빠로서 도리를 다하고 아이들을 마음껏 사랑해줘라. 그것이 당신이 용서받을 수 있는 방법이다" 였으며 대중들도 조성민에게 어느 정도 악의적인 감정을 풀게 되었다.

그러나...

7. 사망

2013년 1월 6일에 그는 전 애인의 집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사건 당시 그가 남긴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그의 죽음으로부터 1주일이 지난 1월 13일에 그가 남긴 유서가 발견되어 그의 사망 원인은 자살로 확정되었다.

전날 그는 그의 여자친구의 집을 방문했는데, 이 집에 머물던 중 그는 여자친구로부터 이별을 통보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이별 통보를 받은 뒤, 전 여자친구가 잠시 외출한 사이에 같은 집에서 자살한 것이다.

죽음에 앞서 그는 그의 어머니에게 "저도 한국에서 살 길이 없네요. 엄마한테 죄송하지만 아들 없는 걸로 치세요"라는 내용의 자살을 암시하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는 유서를 통해서 유산은 자신의 누나 조성미에게 남겼다. 그의 아내의 존재가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조성미의 증언에 따르면 그들은 이혼한 상태였다고 한다.

2013년 2월 여성잡지에서 조성미는 "(조성민과 최진실이)서로 너무 좋아해 더 싸웠던 것 같다"라고 말을 했다.

조성민까지 스스로 생을 마감하면서 조성민의 자녀들은 어머니 최진실, 외삼촌 최진영, 아버지 조성민이 모두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결과가 되었다. 우연이겠지만, 셋 다 향년 39세이다.

출관예식은 2013년 1월 8일, 고려대학교 안암병원 장례식장에서 치렀다.[19][20]

8. 평가

아마추어까지는 박찬호보다 훨씬 뛰어난 수준의 선수로 평가받았던 인물.

유능한 운동선수였지만 신체 부상, 자기 관리 부족, 사업에 대한 욕심, 전처 최진실에 대한 각종 위법행위로 사회적으로 추락했다.

9. 기타

한국에 복귀한 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대해 종종 서운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는데 임창용의 이적설이 터져나왔을 때 임창용에게 요미우리로는 이적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1] 입단 후 대우는 신고선수가 아니었지만 공식적으로는 신고선수 입단이었다. 신인드래프트에 참가한 적이 없어 국내팀에 뛰기 위해서 신인드래프트에 참가했으나 지명받지 못했다.[2] 하지만 사실상 무종교에 가까웠다. 성당에 잘 나가지 않았기 때문. 또한 사망하기 몇 해 전부터는 前 부인이 생전 다니던 교회인 강남침례교회에 출석하기도 했다. 그래도 장례식은 천주교식으로 치뤘다.[3] 이외에 타자로는 박재홍(연세대), 김종국, 송지만(인하대)이 대표적이다.[4] 간혹 정민철을 포함시키기도 하는데, 정민철은 대학에 간 일이 없으므로 '92학번'이라는 분류는 사실관계상 부정확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같은 연도에 졸업한 선수라는 의미로 많이 쓰인다.[5] 고려대 92학번 동기로는 손혁,홍원기(이상 공주고), 김종국, 김선섭(이상 광주일고), 김지훈(신일고), 유진호(중앙고)가 있다. 자신을 포함한 7명이 동기회 '칠갑산회'를 만들었다. 김선섭과 유진호는 광주일고와 중앙고에서 감독을 역임하기도 했다.[6] 고려대에서만 17년이나 감독을 역임한 인물이다. 김경문, 양상문, 선동열, 박노준, 김응국, 박동희, 이상훈 등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초 고려대 출신의 스타 선수들은 모두 그의 제자였고 이들만 모아놔도 국가대표급이다. 그리고 무섭기로 소문난 감독이었다.[7] 관리 따위는 장식인 팀 운영뿐만 아니라, 교진 내부의 정치적인 문제, 그리고 언제나 화끈하게 지를 수 있는 일본프로야구 최고의 자금력을 자랑하는 구단이라 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신인급 선수들이 성장하기에는 영 좋지 못한 환경이라 할 수 있다. 이건 뭐 줍키스가 하는 짓과 똑같다.[8] 그러나 요미우리도 문제지만 본인도 그다지 성실과는 먼 생활을 했다는 이야기가 도쿄에서는 파다했다. 가끔 고종수와 비교되는 것 보면 재능이나 신체조건만 믿고 자기관리에 소홀하지 않았나싶다.[9] 조성민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팔도 못 들 정도로 팔꿈치가 아프니 등판시키지 말아달라고 직접 일본어로 호소했으나 센트럴리그팀 투수코치인 곤도 히로시(당시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감독)가 "너만 아픈 줄 아냐?" 면서 무시했다고 한다. 이 말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하는 측에선 곤도 자신이 혹사로 일찍 선수생활을 마감해야 했던 아픔을 겪었는지라 투수코치로썬 승리를 위해 무리한 투수기용을 하는 것을 혐오했던 것으로 유명하기 때문.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조성민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은채 마운드에 등판시킨 후 조성민은 부상을 당하고 요미우리가 즉시 항의했기 때문이다. 곤도 감독은 그 후 유감을 표명했다. 당시 요미우리와 요코하마가 1위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했던 점. 그리고 엔트리에 사사키가 있었음에도, 조성민의 등판을 강요했다는 점에서, 우승에 눈이 멀어 상대팀 에이스를 망가뜨렸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 수정전까지 본항목에선 조성민과 곤도와의 사건을 거짓일 가능성이 크다고 왜곡되어 있었지만 그의 사생활로 인해 현역 시절까지 폄훼하는 것은 자제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이 때 조성민을 몰아내고 선발 로스터에 들어간 선수가 바로 우에하라 고지.[10] 일본에서 선수생활하던 시절 좋아했던 슈크림 브랜드 '비어드 파파'(보통 동네 빵집에서 파는 베이비 슈보다 크기가 크고, 크림 종류도 다양함)를 국내에 팔아볼 생각으로 들여왔으나 분쟁 등이 겹쳐 대차게 말아먹었다. 애초에 사전 시장조사가 미비해 무턱대고 사업에 뛰어든게 문제였다. 이 때문에 하술될 막장이미지와 겹쳐서 국내야구팬들에게 '슈크림 조'라는 별명(혹은 혐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래도 사업도 말아먹고 사기까지 당한 채 몰락한 이호성보다는 양반. 참고로 그 운영권은 '비어드파파 코리아'가 넘겨받아 지금도 전국 곳곳에서 매장을 볼 수 있다.[11] 2005년에 국내 프로야구 중계를 재개한 MBC ESPN에서 잠시 해설자로 있었는데, 고려대학교 선배인 허구연의 권유로 이루어졌다고 한다.[12] 당시 그의 해설은 엠스플에서 틀어주는 베이징올림픽 야구 하이라이트에서 들을 수 있다.[13] 5살 차이인데.. 1968년생인 최진실이 조성민보다 연상이었다. 대략 누나와 남동생, 사촌동생과 사촌누나 수준으로 나이 차가 났던 셈. 당시만 해도 여성 연상의 커플은 드물었다.[14] 1947년생으로 은행원이었다.[15] 부모가 이혼한 뒤 친권이 한쪽에게만 주어졌을 때, 친권을 가졌던 쪽이 사망한 뒤 다른 쪽이 친권을 회복하는지, 아니면 다른 쪽이 친권을 상실한 것과 같이 봐서 후견이 개시되는지는 명문의 규정이 없었다. 결국 2011년 법이 개정되어 친권자동부활 금지 법안이 명문화되었고, 2013년부터 일명 '최진실법'이 발효되기 시작했다.[16] 이게 더 씁쓸한게 최진실의 자살 이후 찾아온 조성민을 보고 여론은 욕하던 마음을 거두는 분위기였으며 그래 그래도 불같이 사랑해서 결혼한 사람이었는데 자기도 마음이 안좋겠지 라는 동정론까지 일었다. 어떤 신문은 따로 칼럼을 써 그를 응원 할 정도로 분위기가 숙연했다. 그런데 그 직후 갑자기 재산을 노린듯 느닷없이 친권주장이라니. 여론은 전보다 더 악화됐고 조문도 재산노리고 온거였어? 등등 경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17] 심마담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사진이 '강남패치'에 공개되서 논란이 있다. 실제 인물인지는 불분명. 또한 심 모씨가 판매하는 가방 브랜드 리누이는 고영태와도 연관이 있어서 일각에서는 최순실 게이트와 간접적인 연결 고리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나돌았다. 명예훼손의 우려가 있어서 그대로 퍼오지는 못하지만, 트위터에 이 루머와 관련된 글이 꽤 있으니 궁금하면 찾아보도록.[18] 이 시기 최진실의 장례식에 참석하므로써 대중들은 조성민에게 어느 정도 동정을 가졌다. 물론 얼마 후 친권 관련 논란으로 또 다시 부정적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만약 그가 오지 않았다면 그는 더욱 더 큰 비난을 받았을지 모른다. 이미 대중들은 세상을 떠난 최진실과 그의 가족이었던 최진영, 환희 준희, 그녀의 어머니에게 큰 걱정을 가지고 있었고 그녀의 우울증이 조성민과의 이혼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대중들은 조성민을 천하의 개쌍놈 취급하고 있었다.[19] 자살했기 때문에 장례미사는 받지 못했지만, 출관예식은 치렀다.[20] 공교롭게도 서울권 트로이카의 하나였던 손경수도 3년 뒤 조성민의 뒤를 따르게 된다. 사망 원인은 지병 악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