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47:14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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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화해의 결과로 관계 개선을 위한 포옹을 하는 모습이다.

1. 개요2. 용서를 비는 방법3. 용서를 하려고 할 때4. 용서의 효과5. 강요되는 용서와 화해
5.1. 사회적 제도로써 악용5.2. 이미지 훼손
6. 어록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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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Forgiveness
친구의 잘못은 따뜻한 용서로 안아주고 친구의 실수도 이해로 안아줄래요
동요 '꼭 안아줄래요'의 가사.
다른 사람이 지은 나 잘못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너그럽게 봐주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는 말이 "죗값을 치르면 용서해주겠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건 용서의 사전적 의미인 '벌하지 않고 너그럽게 봐준다는 것'과 완전 정반대의 대척점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전혀 용서가 아니며 용서를 해주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말에 용서라는 단어가 있긴 하지만, 용서란 벌을 내리지 않고 사과를 받아주는 것을 말한다.

반대되는 개념(?)은 복수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단순히 용서와 복수가 상반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용서를 해주지 않아도 위해를 가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이 둘은 별개의 문제다. 순우리말로는 에누리라고 한다.

흔히 복수가 용서와 반대라고 생각하는 것은 복수가 용서와 상반된 방법이기 때문이다. 즉, 마음에서 부정적인 감정을 몰아내는 것이 용서라면 복수는 부정적인 감정을 극대화시키는 동시에 만족감을 얻는 행위가 될 수 있다. 현실적으로 가해자가 자신과 동등한 최소한에 고통에 시달리지 않으면 대부분의 사람은 용서보다는 복수를 택하기 마련인데, 그 이유는 억울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용서는 쉽게 이루어지기 어렵다. 물론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한 뒤 그 가해자가 마음을 고친 경우도 있지만, 가해자가 대인이 아닌 이상에는 일어나기 힘들며 설사 용서해도 가해자가 더 큰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도 있다.

기독교에서는 다른 사람을 용서해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있는 상태가 굳어진다면 그 사람은 죽어서 반드시 지옥에 간다고 본다.[1] 이는 아무리 친족이 살해당한 경우라고 할지라도 예외가 되지 않는다고 본다.

용서는 위에 나와 있듯 화해와 다른 개념이다. 절대로 죄인의 죄를 사하거나 봐주라는 것이 아니다. 아래, 용서라는 고통[2]에 쓰인 글을 보자.
용서는 화해와 다르다. 만일 내게 상처준 사람을 용서하면 그 사람과 다시 예전처럼 지내야만 한다는 생각에 용서를 두려워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건 마치 시간을 거꾸로 되돌린다는 말과 똑같다. 용서는 새로운 나,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는 새로운 방법이다. 용서는 상처와 피해를 묵과하지 않는다. 폭력과 죽음을 외면하지 않는다. 잔인한 진실을 더 넓은 목적과 현실이라는 맥락 안에서 숙고한다. 상처를 잊는 것이 아니라 상처의 기억이 남은 삶을 지배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2. 용서를 비는 방법

사죄의 1.1번 항목을 살펴보는 것도 좋다. 해당 부분에서는 피해자를 진정시키고 달래는 방법에 대해 서술하고 있으며, 여기서는 잘못을 빌기 위해 갖춰야하는 정신적인 자질에 대해 말한다.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1. 자신을 가해자라고 인식할 것.
인식의 전환을 필요로 하는 구간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어려운 단계다. 하지만 자신의 과오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2. 용기를 갖고 피해자에게 진심을 전달할 것.
잘못을 깨달은 가해자들은 피해자가 자신을 증오하고 용서하지 못할까봐 다시 접촉하는 것을 꺼린다. 피해자는 가해자를 보면 고통이 되살아 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멈춰버리는 것은 피해자가 평생 괴로운 상태에 머물게 내버려두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걸려서 평생 용서를 빌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개그맨이 관중을 웃기려는 목적으로 묘기를 부려도 관중이 웃지 않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잘못을 빌어도 피해자는 용서라는 감정 상태에 들어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묘기를 본 관중의 잘못이 아니라 관중의 웃음 요구에 부합하지 못한 개그맨의 부족함 때문인 것처럼, 이는 피해자의 자질 부족 때문이 아니라 사죄가 아직 피해자의 마음을 흔들어놓기에 부족했기 때문이다. 또한, 피해자가 용서하기 위해 가해자가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진정한 반성은 마음의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므로, 피해자가 용서했다고 바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용서한 후에서 변화한 모습을 그대로 가져가야 참된 용서와 반성의 관계가 성립된다.

용서를 비는 자가 제일 가져야 하는 마음은 절대로 용서를 빈다고 용서 받을 것이라고 전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용서를 받지 못해서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 피해자에게 끊임 없는 죄책감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용서를 비는 것이 매우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용서를 빌고 싶지만 무섭다면, 피해자를 평생 피해다니는 것도 방법이다. 피해자는 가해자를 영원히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3. 용서를 하려고 할 때

피해자의 입장에서 가해자를 용서하려고 할 때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서술했다.
1.용서하지 않고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자신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하는지 스스로 생각해보라.
용서를 하든 하지 않든 그것은 오로지 피해자의 마음이다. 다만 용서를 하지 않는다는 건 상대방을 적으로 여기겠다는 것이니 용서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책임도 본인이 짊어져야 한다.[3]
2.가해자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생각하고, 앞으로 같은 상처를 입지 않으려면 가해자가 자신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요구하라.
용서를 하려고 할 때 가해자에게 피해를 입은 부분에 대해서 말하면서 이 것을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말라는 말을 할 수 있다. 그러면 진심으로 반성하는 가해자는 당연히 이에 따를 것이다. 같은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게 하려면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 판단할 것이다.

3.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자기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라.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만으로도 가해자에게 호의를 베푼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외에 자신이 가해자에게 할 수 있는 긍정적 행동은 스스로 판단할 문제다.

4.자꾸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을 보고 나아가라. 더 만족스러운 미래를 만들 수 있다면, 잘못된 상처의 과거를 잊기가 더 쉬워질 것이다.
용서를 하면 돌이킬 수 없다. 가해자에게 사과를 진심으로 받은 이후부터는 나중에 이 사안에 대해 문제를 내세우면 아무리 피해자라 하더라도 욕먹는 역효과가 일어난다. 애초에 사과를 받고 용서를 해주기로 결정하면서 다 끝난 사안을, 나중에 끄집어내는 것 자체가 미래를 전혀 못보고 과거에만 얽매이는 행동이다. 가해자의 사과와 피해배상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면 애초부터 가해자의 사과를 받지도 말고 피해배상도 받지 말았어야 한다고 비난받는다.

4. 용서의 효과

용서는 가해자에게 품었던 악감정을 풀어내는 결정으로서 원한과 적개심을 품으며 낭비되는 에너지를 없앨 수 있다. 실제로 용서가 우울감과 불안감, 분노를 감소시켜 신체적·정신적으로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연구결과가 많다.

대외적으로는 사회적으로 용서받기 어려운 행위를 용서해준 피해자한테 '가해자를 용서해준 것이 강자' '매우 관대한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생긴다.

가해자가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고 자신이 용서를 받지 못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피해자로부터 용서를 받게 되면 그때부터 가해자를 절대적인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다. 인간은 자신에게 해를 끼칠 것으로 예상했던 사람으로부터 좋은 대접을 받게 되면 그에게 애정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용서의 긍정적인 효과가 매우 극단적으로 작용한 실제 사례가 여럿 있다. 요한 바오로 2세자신을 암살하려고 했던 아자를 용서해줬다. 아자는 이후 갱생하여[4] 2014년에 요한 바오로 2세의 무덤을 참배했으며 2016년에는 가톨릭 사제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밝히기까지 했다. 2020년에는 완전히 갱생하여 길에 유기된 동물들을 구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보도되었다.# 살인자가 죄를 뉘우치고 40년 후 이제는 동물을 구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한국에서는 손양원 목사가 여순 사건자신의 두 아들을 살해한 안재선 씨를 용서해주고 양아들로 삼았다.[5] 그 결과 안재선 씨는 손양원 목사에 의해 마을 주민들로부터 처형당할 위기에서 목숨을 구했고,[6] 안재선 씨는 그후 정말로 자신의 행동을 평생 참회하며 살았다. 안재선 씨는 1950년에 양아버지인 손양원 목사의 장례식 때 상주를 맡았는데 그가 가장 슬퍼했다고 하며 1978년에 사망했을 때 양동생인 손동희에게 유언으로 천국에 가서 너네 두 오빠에게 무릎 꿇고 사죄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인터넷 상에서는 가해자를 용서를 해준 피해자나 유가족에 대해서 '개독'이라느니[7] '정신이 나갔다'거나 '죽은 OO은 용서해주는 걸 원했겠냐'면서 비난하는 이들이 있는데 당연하지만 용서를 해주는 건 피해자의 권리이며, 유가족이 용서를 해주는 것도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행동이다.[8] 이런 비난은 오히려 가해자를 용서해주고 싶은 피해자와 유가족의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 않은 매우 편협한 행동이다.[9] 그리고 사실 이런 비난은 인터넷에만 있지 현실에서 당사자에게 저렇게 표현하는 경우는 없다. 당사자들끼리 사과하고 용서해줘서 잘 지내는 걸 제3자가 뭐 어떻게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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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강요되는 용서와 화해

화해는 피해자의 감정상태인 용서가 아니라, 가해자가 개입되는 행동이다. 사실 용서를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는 두 개념을 제대로 분리해서 생각하지 못했을 때 발생한다. 학교폭력 현장 등에서 선생들이 강요하는 것은 사실 용서가 아니라 화해다.

용서나 화해는 둘 다 짧은 시간 안에 뚝딱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나 갈등이 일어나자마자 억지로 두 손 잡게 하고 "자 이제 화해한 거다, 끝!"이라고 하는, 너무나 쉽게 상상되는 이 장면이 만연해있다. 유아교육자들이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절대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이 미안해를 강요하지 않기다.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가능하게 하려면, 일단 피해자와 가해자를 분리해서 진정시키고 각자의 위치를 깨닫게하는 오랜 시간이 중요하다.

미안한 감정과 용서하는 감정을 경험시켜야 앞으로 커서도 빈번한 갈등 속에서 원만한 감정을 처리할 수 있는데, 그런 것 없이 화해를 강요하다 보면 용서와 반성의 감정을 배우지 못한 피해자는 반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엄격 근엄 진지한 공문식 사과문을 요구하고, 가해자는 반성하지 못하고 어떻게 하면 책임을 회피할 수 있을까 용서를 엿보게 된다.

학교 생활 등지에서 화해를 강요하는 분위기는 기존에 관리하는 아이들이 많은 상황에서 피해자와 가해자를 분리하고 시간을 투자하는 비용을 아끼기 위해 사건을 일찌감찌 마무리시키려는 욕구에서 나온다. 다수를 위한다는 이기심이 소수를 탄압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피해 당사자도 아니면서 피해자에게 용서를 강요하거나 그렇게하지 않는 피해자를 매도하는 것은 강요죄로 처벌되는 범죄다. 용서가 행동보다는 감정상태에 가깝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제부터 슬퍼해라", "이제부터 기뻐해라"라고 말하는 것이 말이 안되는 것처럼 "이제부터 용서해라"라는 말도 넌센스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막상 사과해야하는 가해자에게는 아무말도 하지 않으면서 피해자에게만 용서를 강요하는 경우가 많다.

5.1. 사회적 제도로써 악용

그럼에도 용서를 강요하는 딜레마가 생기는 이유는 용서의 실용성 때문이다. 사회적 혹은 제도적인 차원에서 용서는 사회적 충돌을 없애버릴 수 있는 특효약이다. 이는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제 3자인 관리자의 이득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용서를 권장하는 사회적 압력이 생겨난 것이다.

용서라는 이름의 고통이라는 책에서 한 예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흑인을 압제하는 아파르트헤이트를 시행한 정권 인사들을 용서해줬는데, 정작 피해자들의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적 충돌과 폭발이 일어났다고 한다. 용서가 진짜가 아니라 사회적 장치로 작용해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학교폭력의 현장에선 교사가 피해 학생에게 용서를 강요하는 형태가 흔하다. 교내 평판이나 학급 분위기 등을 내세워 변명하지만, 실상은 학폭위에 관한 부담감 혹은 번거로움 그리고 진급에 감점요소가 되기에 꺼리는 태도 때문인 경우가 대다수다. 결코 반성하지 않는 가해자의 등 뒤에는 막장 부모가 있는 경우가 많다.

성범죄에서도 가해자와 가해자 가족, 변호사와 경찰이 합의를 핑계로 피해자와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강요하는 경우도 많다. 심지어 가해자 측에 매수된 주변 사람들이 피해자에게 용서할 것을 강요하는 사례가 종종 뉴스에 나온다.[10]

군대에서는 지휘관의 진급문제 등의 이유로 인하여 용서를 강요하는 분위기가 만연해있다. 용서를 하지 않는 피해자에게 다른 혐의[11]를 씌우는 것이다. 예를 들면 복무부적응을 씌워서 현역부적합심의에 회부하거나 타부대로 전출시키고, 강제로 전역시켜버리기도 한다. 특히 가해자가 장교일 경우 지휘관과 가해자가 같은 ROTC인 데다가 지휘관과 가해자가 같은 대학교를 졸업한 경우[12]라면 되려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를 뒤바꿔 놓는 경우가 있다.

용서가 사회통합이나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 하려는 얄팍한 수법으로 자행되어서는 안된다. 용서는 어디까지나 피해자의 고통을 최소화시키는 행위로, 그렇기에 사회는 피해자들이 용서를 통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도록 권장하는 가능성만을 열어두는 것에 그쳐야하며 강제로 화해시키는 것은 끔찍한 범죄에 불과하다.[13] 현재도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할 것을 거부하면 오히려 가해자와 가해자 주변인물 그리고 피해자 가족을 포함한 피해자 주변인물들도 피해자를 속좁은 인물로 매도하거나 비판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본래 용서라는 것은 피해자가 진심으로 가해자를 용서하고 가해자는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쳐야 성립되지 피해자에게 용서를 강요하고 용서하지 않으면 오히려 소인배로 낙인 찍는 사회적인 문화도 개선이 필요하다.

용서를 강요하면 지금 당장은 해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강제적으로 피해자에게 굴복을 강요하는 것이며 오히려 피해자에게 더 심각한 상처를 준다. 실제로 강요된 용서로 억지로 용서해 주었다가 몇 년 뒤 피해자가 폭발하여 가해자와 용서를 강요했던 주변인물들을 살해한 사건도 있었다. 거기다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강요된 용서로 처벌을 피한 가해자는 되려 이를 이용하여 다른 피해자들을 양성하다가"바늘 도둑이 소도둑이 된다"처럼 자신이 저지르는 잘못에 점차 무감각해지고 더 큰 잘못을 저질러버리는 경우도 있다.

또한 용서받은 가해자가 진짜로 자신의 잘못을 참회한다면 다행이지만 순간의 위기만 모면하자는 심리가 강하며 위기가 지나간 후 되려 자신의 용서해준 대상을 원망하고 복수하고자 하는 적반하장격인 경우를 보듯이 진정한 용서는 피해자의 배려도 중장 중요한 건 가해자의 진실된 참회다.

5.2. 이미지 훼손

용서는 피해자가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한 행위이지 가해자와의 관계를 예전으로 돌려 놓는 것이 아니다. 용서함으로써 악감정을 최소화시키고 복수라는 극단적인 행위로 피해자의 삶이 피폐해지지 않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잘못을 청하고 설사 용서받지 못해도 그런 행위를 통해 다시 잘못에 빠지지 않기 위함이다. 이렇듯 용서는 매우 어려운 동시에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 무척 고차원적인 도덕적 문제로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용서가 가지는 힘을 오용하기 쉽다는 것이다. 마치 용서하면 예전처럼 돌아가는 것이라 여기는 잘못이다. 용서는 악감정을 덜어내고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함이다. 그래서 피해자가 용서하지 않고자 하면 그것을 강요해서는 안 되는데 용서를 하면 복수를 하지 않고, 그러면 관계는 개선 된다고 생각되고, 그로 인해 용서를 핑계로 강제로 화해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이는 마치 모든 문제를 해결해버리는 특효약처럼 사용되는 수법이지만, 실제로는 용서를 이용해 소위 말하는 물타기를 하는 것에 불과하다. 용서를 받을 만큼 회개한 가해자라면 자신이 용서 과정에 받는 여러 악재에도 의연하게 대처하고 받아들일 각오가 되었다는 이야기나, 용서를 이용하려는 가해자는 결국 자신이 피해 보지 않고자 하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입은 손실과 고통을 고려하지 않고 사건을 일찌감찌 덮기 위해 반성 - 사죄 - 용서의 단계를 거치지 않은 채 곧바로 용서하지 않으면 소인배로 매도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원인이다. 이를 이용해서 피해자를 소인배로 둔갑시켜 가해자로 모는 경우가 여론몰이에 취약한 넷상에서 적지 않게 유포되었고, 용서에 대한 이미지는 더욱 안 좋아졌다.

잘못과 전혀 관련이 없는 이유를 내세워 용서를 주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른바 후광효과에 의한 논리적 오류로 범죄자의 신체적 특징이나 재력 유무, 혹은 사회적 지위나 개인적인 관계를 보고 무조건 선처를 주장하는 것으로 얼짱강도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는 어떤 연예인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도 일어나는데, 정상적인 이라면 잘못을 인정시키고 책망하면서도 애정을 잃지 않고 깊이 반성시키면서 재기를 응원하지만 악성는 '그분은 원래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사소한 잘못이니 용서해라'와 같이 잘못 자체를 부정하며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결국 용서가 이기주의와 결합하여 용서에 대한 이미지까지 나빠진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6. 어록

논자들마다 견해가 은근히 미묘하게 갈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원래 용서도 힘 있는 놈이 해주는 거 아니냐? 응? 그게 진짜 용서여. 센 놈이 약한 놈한테 베푸는 거.
영화 짝패[14]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마태오 복음서 6장 12절, 주님의 기도(공동번역성서)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 6장 14~15절(공동번역성서)
그 때에 베드로예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15]
마태오 복음서 18장 21~22절(공동번역성서)
네 형제가 잘못을 저지르거든 꾸짖고, 뉘우치거든 용서해 주어라. 그가 너에게 하루 일곱 번이나 잘못을 저지른다 해도, 그때마다 너에게 와서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루카 복음서 17장 3~4절(공동번역성서)
약한 자일수록 상대를 용서하지 못한다. 용서한다는 것은 강함의 증거이다.
마하트마 간디
사람들은 용서가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한다. 정작 자신이 용서할 일을 당하기 전까지는.[16]
C.S.루이스. 나니아 연대기 작가다. 참고로 그는 성공회 평신도이며 기독교 변증서를 다수 서술했다.
'어리석은 자는 용서하지도 잊지도 않는다. 순진한 자는 용서하고 잊는다. 현명한 자는 용서하나 잊지는 않는다.
토머스 사즈(Thomas Szasz). 헝가리 출신의 미국 정신의학자.
若復有人觀彼怨家,如己父母,心無有二,即除諸病
만일 어떤 사람이 원수를 대함을 자기 부모를 대하듯 하면 마음에 둘이 없어 모든 병을 제하리니
원각경
용서는 보내지 않기로 한 편지와 같아야 한다. 반으로 찢어 불태워버려야 한다. 그래서 다시는 꺼내 보이지 말아야 한다.
헨리 워드 비처(Henry Ward Beecher). 미국의 성직자.[17]
주먹을 꽉 쥔 손과는 악수를 할 수 없다.
인디라 간디
내 삶의 평화와 행복을 반대하는 세력은 싸워 이겨야 할 대상이지 용서의 대상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용서하라는 것이다.
조너선 색스(팀 페리스, 《지금 하지 않으면 언제 하겠는가》, 248면). 현대 랍비의 주장인데, 공교롭게도, 마태오의 복음서 5:43에서 아마도 당대 랍비들의 주장으로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를 연상시킨다.
爲無爲, 事無事, 味無味, 大小多少, 報怨以德.
(하는 것 없이 하고, 일 없음으로 일을 삼고, 맛없음을 맛으로 삼고, 작은 것을 크게 적은 것을 많게 여기며. 원한을 덕으로써 갚는다.)
도덕경, 63장
或曰: "以德報怨, 何如?"
子曰: "何以報德? 以直報怨, 以德報德."
어떤 이가 말했다. "덕으로써 원한을 갚는 것은 어떻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면) 무엇으로써 덕을 갚을 것인가? 곧음으로써 원한을 갚고, 덕으로써 덕을 갚는다."
논어 〈헌문〉

7. 관련 문서


[1]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태복음 6:15)[2] 스티븐 체리 교수신부가 작성한 책으로 용서의 본질을 말하고 있다.[3] 가해자한테 아무런 악감정이 없는 제3자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했다고 하면 피해자가 용서를 해주지 않았더라도 "그래도 피해자한테 사과는 했구나" 하고 넘기며 더 이상 남의 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제3자에게 피해자가 원하는 대로 반응해 줘야 할 의무는 없다.[4] 아자는 암살 미수 사건 19년 만인 2000년에 이탈리아에서 석방되어 고국인 튀르키예로 돌아갔으나 교황 암살 이전에 저지른 기자 살인죄로 튀르키예에서 재수감되었다가 2011년 1월에 감옥 생활 19년+11년을 채우고 석방되었다.[5] 그러나 그도 사람이라서 두 아들의 유품이 전달받았을 때 하염없이 통곡했다고 한다.[6] 이때 손양원 목사가 처형장으로 딸인 손동희 씨를 보냈는데 손동희 씨는 처음에는 아버지의 결정에 당연히 반발했으며 처형장으로 가는 길에 수백 번이나 "이놈을 죽일까? 살릴까?" 고민했다. 이후로도 안재선 씨를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우리 오빠들을 살려내던가, 자살로 사죄하라"는 식의 원망을 많이 했다고 한다. 하지만 진정으로 참회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그를 용서하고 오빠로 받아들였다고 한다.[7] 용서를 하는 피해자나 유가족이 거의 대부분 용서를 중요시하는 기독교를 믿기 때문이다.[8] 유가족이 가해자를 용서해준 것은 복수를 하고 싶지 않고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증오심을 떨쳐버리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타인이 멋대로 복수심을 가지라고 하는 것 자체가 주제넘는 행동이다.[9] 설령 그 말을 한 사람이 비슷한 사건을 겪었던 피해자나 유가족이더라도 해당 사건에서는 제3자 입장이다. 그걸 전혀 고려하지 않고 다른 사건의 피해자나 유가족에게 용서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분명히 주제넘는 행동이다.[10] 악명 높은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도 피해자에게 평소 연락도 없던 친척들이 가해자 가족들에게 돈을 받고 피해자와 피해자 친모에게 협박 형식으로 합의 및 용서를 강요했고, 심지어 피해자 이웃 주민들도 합의와 용서를 거부하는 피해자를 냉혹하다고 악담을 퍼부는 등 용서를 강요했다.[11] 지휘관의 진급에 방해가 안되는 범위 내에서의 혐의.[12] 육사나 3사보다도 더 무서운 게 같은 대학 ROTC이다. 2중으로 동문이기 때문에 이들의 유대관계는 육사나 3사를 웃돈다.[13] 용서라는 개념은 절대로 화해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용서는 그에게 복수하지 않겠다는 의미이지 절대로 하하호호 하자는 것이 아니다. 용서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더 큰 고통을 주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14] 극중 장필호(이범수 扮)의 대사. 지극히 현실적인 말이라 뉴스에도 인용될 정도.[15] 단순 용서의 의미가 아니다. 당시 이 시대에는 피의 보복자와 이로 인해 도피성이 존재했다. 행정력 부재로 가족이 피해를 당하면 피의 보복자가 복수하는 것이 당연했고, 혹시 모를 사태를 막기 위해 도피성이 존재한다. 이런 배경에서 용서를 빌러 가라는 것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대가를 치를 준비를 하라는 의미가 된다. 다시 말하면 상대의 막연한 선의에 기대어 자신의 목숨 혹은 가족의 안위까지 모두 걸어야 하는 것 이다. 예수께서 살았던 시대와 법치주의가 당연시 되는 시대와는 많이 다르다.[16] 용서가 쉽사리 요구할 수 없는 어려운 일임을 뜻하는 말이다. 그리고 단적으로 용서의 딜레마를 말하는 말이기도 하다. 용서를 권하고 말하는 것과 자신이 용서하는 행위는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동시에 기독교적 관점에서 얼마나 진정한 용서가 값진 것인지 역설하는 말이기도 하다.[17] 남북 전쟁 당시에 북부의 편에 서서 노예제도 폐지를 주장한 인물이다. 그는 용서는 증오를 완전히 없애는 것으로 봤으며 증오를 가지고 있는 상태는 용서를 하지 않은 상태와 같다고 여겼다.[18] 이 경우 잘못되면 가해자와 가해자의 가족은 물론이고 아무런 상관없는 제3자가 피해를 입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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