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1-28 18:33:55

아파르트헤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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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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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 전용
본 공공시설과 토지는 백인만 사용하도록
지정되었습니다.[1]

1. 개요2. 배경3. 진행4. 실태
4.1. 대(大) 아파르트헤이트4.2. 소(小) 아파르트헤이트
4.2.1. 명예 백인4.2.2. 보어인 외 다른 인종에 대한 차별4.2.3. 백인에 대한 차별
4.3. 영토 불법 강점4.4. 대외 개입4.5. 경찰 폭력과 국가 테러4.6. 대중문화 검열과 백인 간 갈등
5. 폐지 후의 잔재
5.1. 종교 분야5.2. 기술 분야5.3. 군사 분야5.4. 스포츠 분야
6. 기타
6.1. 창작물
7. 관련 문서

1. 개요

파일:남아프리카 연방 국기.svg
남아프리카 연방~아파르트헤이트 당시의 남아공 국기[2]
제 존재 자체가 범죄였습니다.
트레버 노아, 남아공 출신의 코미디언으로 스위스계 아버지와 코사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이다.[3]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4]아프리칸스어로 분리, 격리를 뜻하며 냉전 시기부터 남아프리카 공화국 국민당(NP) 독재 정권이 실시한 인종차별 정책, 넓게는 남아프리카에서 1950년대 후반 ~ 199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국민당 독재 체제 그 자체를 말한다.

인종 간의 실질적인 신분제도를 설정한 정책으로 "백인과 흑인을 격리하는 것과 차별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라는 논리에서 시작했지만[5] 그 본질은 차별을 위한 정책이었다. 말이 분리지 비백인이 이용하는 시설들은 늘 백인들이 쓰는 것보다 열악하고 비위생적이었던 게 현실이었다. 여하튼 이 정책으로 인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이 정책을 실시, 고수하던 1960년대에서 1970~80년대까지 바로 이웃한 국가이자 모국과 똑같이 소수의 유럽계 백인 이주민의 후손들이 정권을 차지하며 다수의 아프리카 흑인들을 억누르던 로디지아와 함께 국제사회로부터 철저히 배척받아 고립되었다.

남아공의 노벨상 수상자 9명 가운데 6명[6]의 수상 이유가 아파르트헤이트와 관련[7]되어 있는 것이나 앙골라 내전 당시 미국중국의 개입을 전 세계가 비난한 이유가 '타국에 대한 무단 침공'이나 '대학살' 따위가 아니라 '남아공과의 협력' 그 자체라는 것을 보면 아파르트헤이트와 그를 행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대한 당시 세계의 인식을 알 수 있다. 강경한 반공주의 국가였던 대한민국 군사정권조차 비공산주의 국가 중 유일무이하게 남아공을 여행금지국가로 지정했다.[8]

2. 배경

17세기 케이프 식민지가 성립하면서 네덜란드인들과 독일인들이 남아프리카에 이주해 왔다.[9] 이들의 후손들이 '보어인' 또는 '아프리카너'라고 불리는 사람들로 훗날에는 유럽과의 연결고리를 아예 끊어버리고 스스로를 보어인이라는 독립된 '아프리카의 민족'이자 남아프리카의 주인으로 자칭하며 아파르트헤이트를 주도했다. 이들은 아프리카 토착 백인임을 자처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굴러온 돌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다수의 흑인 민족들에게 영토와 재산을 빼앗기고 흑백혼혈로 피가 더럽혀져 흑인들에게 흡수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과 수적 열세에 따른 공포감을 항시 가지고 있었고 이것이 곧 아파르트헤이트의 근원이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아프리카너들의 움직임은 남아프리카 연방 성립(1910년) 이후 남아프리카 국민당의 결성, 그리고 국민당의 1948년 집권 이후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실시, 영연방 탈퇴와 공화국 수립(1961년)으로 이어진다.

'보어'는 네덜란드어로 '농부'를 뜻한다. 이 단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보어인들은 1652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이었던 얀 판리베이크(Jan van Riebeeck)가 데리고 온 네덜란드 농부들로부터 시작해 칼뱅교도들과 독일 이민자들, 프랑스계 위그노들, 그리고 주류 종교에 탄압받던 여러 개신교 신자인 백인들이 종교 활동의 자유를 찾아 지금의 남아공 지역으로 옮겨간 사람들로 구성되었다.[10] 후술할 다니얼 프란수아 말란(Daniel François Malan)도 이름에서 딱 알 수 있듯이 위그노 프랑스인이었다. 일반적으로 '남아공에서 몇 세대 이상 산 백인이고 문화적으로는 칼뱅파 개신교적인 면을 강조하면서 비앵글로계이고 혈통과 상관없이 모국어로 아프리칸스어를 쓰는 사람들'을 아프리카너라고 한다면 크게 틀리지 않다. 이들에 대해서는 보어인 항목을 참고할 것.

이들이 서슴없이 인종차별적 정책을 감행할 수 있던 배경에는 이주하면서 같이 들여온 개혁교회[11]에서 유래된 남아공 네덜란드 개혁교회(NGK), 남아공 네덜란드 개혁교회(NHKA)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당연히 네덜란드 본토와 비교하면 매우 보수적이고 원리주의적인 성향을 띄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네덜란드 측은 아프리카너들을 내다 버린 꼴통 자식, 반대 방향으로는 믿음의 배신자 정도로 서로 적대시했기 때문에 남아공 아프리카너들이 네덜란드에 대하여 느끼는 유대감은 다른 영연방 국가들이었던 호주나 캐나다, 뉴질랜드의 백인계 국민들이 식민지배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에게 가진 우호적인 감정보다 훨씬 더 약하고 그 연결점도 느슨하였다.[12]

20세기 들어 남아프리카 연방에는 그동안 보어 전쟁 등으로 인해 억눌려 왔던 보어인들의 민족주의적 움직임과 반영 감정이 폭발하여 아프리카너 내셔널리즘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이른바 바스캅(Baaskap)이라 불리는 정치 용어가 등장한다. 바스캅은 영어로 '지배자 책임(Chief in Charge)' 혹은 'Boss-ship' 정도로 번역되며, 보어인이 항상 지배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상이었다. 소수 백인 인구에 의한 남아프리카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지배를 옹호하고, 특히 아프리카너에 의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지배를 추구하는 이론이었다. 한마디로 남아프리카는 아프리카너를 위한 국가라고 주장하며 이에 반발하는 흑인, 남아시아인, 말레이인 등 모든 비백인들과 영국계, 유대계 백인은 전부 2등 시민 취급하는 사상이었다. 이때까지는 훗날의 철저한 인종분리를 불러온 인종주의적 순수성 보존이라는 기본 이념과 달리 비백인들의 경제 참여 자체까지 막으려 하지는 않았다.[13]

그러나 50년대부터는 흑인들이 저숙련 또는 준숙련 노동 분야에만 종사하도록 엄격히 규정하는 등 비백인들을 남아공 경제에서도 철저히 배제해 버리려고 바스캅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킨 정책들이 시작되었으며, 아파르트헤이트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헨드릭 페르부르트는 한 술 더 떠서 흑인들을 모조리 대도시에서 쫓아내어 도시 거주를 금지시키고, 아예 이들의 시민권을 말소시켜 반투스탄으로 보내도록 주창했다. 페르부르트의 이러한 사상이 곧 아파르트헤이트 제도에 그대로 적용되어 30여년 간 이어지게 된다.

3.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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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실태

파일:남아프리카 공화국 및 남서아프리카의 반투스탄 지도.svg

아파르트헤이트주의는 반투스탄 혹은 홈랜드의 설정이라는 대(大) 아파트르헤이트와 일상 생활에서의 흑백 분리를 가리키는 소(小) 아파르트헤이트로 분리할 수 있다.

4.1. 대(大) 아파르트헤이트

흑인들은 대도시 중심가에 사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다. 대다수 흑인들은 반투스탄 혹은 홈랜드[14]라고 불리는 낙후된 구역으로 격리되었고, 도시에 살더라도 외곽에 있는 흑인 전용 주거지에서 살아야 했다.

남아공 정권은 격리를 확고히 하기 위해 이 홈랜드 영토들을 아예 국가로 독립시켜 버리기로 한다. 1970년 제정된 "홈랜드 시민권법"으로 반투스탄에 거주하는 흑인들의 남아공 국적을 아예 박탈해 버렸다. 남아공의 홈랜드는 총 10곳이었으며 그 중 4개(트란스케이, 보푸타츠와나, 시스케이, 벤다)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차례대로 독립했다. 백인 정부는 그곳의 땅을 떼서 흑인들에게 자치권을 주고 독립시켜 주는 것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남아공 국민의 자격을 주기 싫다는 뜻이었다.[15] 전 국토의 13%에 불과한 이 황무지에 인구의 과반 이상이 살았고 대도시 근교지역의 주거여건이 극도로 열악한 소웨토 같은 타운십에서 30% 가량이 살았다. 도시 외곽의 흑인들은 홈랜드와 달리 명목상으로나마 남아공 국민 자격을 유지하긴 했으나 2등 시민으로 차별받긴 마찬가지였다.

당연하지만 개발도 안 된 척박한 황무지였던 반투스탄이 갑자기 독립했으니 교육, 복지, 의료 등 기본적인 국가기능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결국 돈을 벌기 위해서 남아공으로 갈 수밖에 없었는데 남아공 법률상으로 이들은 외국인이었다. 홈랜드의 주요 수입원은 남아공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일하는 흑인 노동자들의 임금 수입과 남아공에서 오는 백인들의 관광[16] 수입뿐이었다.

물론 반투스탄을 승인한 나라는 남아공과 반투스탄 상호간 밖에 없다.[17] 결국 이 4개국뿐만 아니라 모든 반투스탄이 데클레르크와 만델라 정권 때 남아공으로 재편입되었다. 가장 마지막에 편입된 보푸타츠와나는 현지 기득권들이 권력을 놓기 싫다고 아프리카너 저항 운동(AWB) 같은 아프리카너 민족주의 및 네오나치 정치깡패들을 불러와서 시위대를 진압하려 했다가 민간인에게 총질을 하는 AWB의 행패에 반발한 보푸타츠와나 군경의 쿠데타 및 시민들의 거센 저항으로 3일만에 그 정치깡패들과 같이 쫓겨나고 말았다. 이를 1994년 보푸타츠와나 위기라고 한다. 이 일을 불러일으킨 보푸타츠와나의 독재자 루카스 맨고프는 보푸타츠와나 '독립' 이후부터 14년간 통치를 했음에도 보푸타츠와나 해체 예정일이었던 4월 27일까지 그 한 달을 못 기다려서 정치깡패들을 불렀다가 이 일의 책임을 묻는 남아공 데클레르크 정부의 압력으로 물러나게 되어 되려 1달 일찍 실업자가 되고 말았다.

경제/산업 분야의 차별도 당연히 존재했다. 남아프리카 연방 시절 성립된 1956년 산업 조정법은 전체 산업에 적용되는 직업 보류 제도(Job Reservation System)를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산업 조정법은 광산, 농업, 제조업의 단순 생산직 등 흑인들이 저숙련 또는 준숙련 노동 분야에만 종사하도록 엄격히 규정했다. 또한 백인 노동자들의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실시된 직업보류제도로 인해 고임금, 고숙련, 관리직, 기술직 등은 법적으로 백인들에게 독점되었으며, 비백인의 승진이나 직업 이동은 제한되었다.# 비백인들은 백인 지역에서 토지 소유가 금지되었으며, 사업을 시작하고 운영하는 데에도 심각한 법적, 행정적 제약을 받아 자본을 축적하고 대규모 기업을 성장시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또한 통행증 및 반투스탄 제도와도 결부되어 흑인들은 도시에서 함부로 일 할 수도 없었으며, 나중에는 대부분 반투스탄에 몰아넣어져 어쩌다 도시에서 일한다 해도 '외국인 노동자' 취급을 받았다.

남아프리카 노동당이라는 사회민주주의/민주사회주의 정당이 있었으나, 백인 노동자 권리를 보호하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하였기에 흑인, 인도계 등 비백인 노동자 권리는 신경쓰지 않았다.

4.2. 소(小) 아파르트헤이트

려행증이 있어야 지역간 이동이 가능한 요즘의 북한처럼 당시 남아공의 흑인들 역시 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다. 흑인들이 도시에 들어오려면 허가증(Pass)이 있어야만 했다. 주민등록증 같은 카드도 아니고 수첩처럼 두꺼운 것이었다고 한다. 흑인이 들어오는 경우는 주로 도시에서 노동자로 일하거나 관광 산업용이었다. 물론 허가증을 가지고 있는 이들도 백인들과 같은 시설을 이용할 자격이 없었다. 허가증이 없으면 바로 체포되었다.

한방울 원칙에 따라 피가 더러워진다흑백혼혈황백혼혈은 천시되었으며 비백인과 백인 간의 결혼과 성관계를 엄금하였다. 1949년 인종간 혼인 금지법 실시 이후 인종간 혼혈은 금지되었지만 이전에도 백인, 흑인, 황인, 인도인들이 수백년간 섞여 살았기 때문에 혼혈이 많이 일어났고 외모로 인종을 구분하지 못하는 일을 막기 위해서 신분증에 인종을 명시하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이런 구분도 상당히 자의적인 것이어서 형제 간이라도 피부가 많이 그을린 쪽은 흑인, 안 그런 쪽은 백인으로 구분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1950년 배덕법의 제정으로 흑백간 모든 성관계도 금지되었다.

유명 축구선수 스티븐 피에나르는 어린 시절 반투스탄이 아닌 도시에 살았는데 옆집 여자 아이가 백인들에게 능욕당하여 혼혈 아기를 출산하다가 죽었고 그의 친구가 백인들에게 살해되기도 했다.

더불어 아프리카에서 식민지를 지배했던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의 아프리카 식민정책과 비슷하게 남아공 백인 정권은 줄루족, 코사족, 은데벨레족, 스와지족, 코이산족, 벤다족, 츠와나족 등 남아공 국내의 흑인 부족들 간 분열과 대립을 키워 남아공의 흑인들이 단결하여 뭉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분열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분열 정책의 의도와는 무색하게 남아공 백인정권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자체가 워낙 악독해서 이 부족들끼리도 앙숙이었으면서도 서로 함께 손 잡고 백인 통치에 저항했다.[18] 일례로 백인 정권 통치에 대항하던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과 타보 음베키 전 대통령,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는 코사족 출신이었기에 줄루족이 상당수였던 남아공 내 흑인 세력들 사이에서 적개심이 컸지만 그래도 부족은 다르지만 잔인한 백인 놈들보다 아니꼬워도 같은 흑인인 코사족 놈들이 더 낫다며 만델라와 음베키, 투투를 지지하던 줄루족과 그 외의 흑인 부족들도 많았다. 보통 이런 부족간 이간질 작전은 성공률이 높은 편[19][20]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남아공 백인정권이 얼마나 악랄했나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친나치 행위의 흔적이 금세 사라진 것도 아니어서 한동안 남아공에는 아프리카너 저항 운동을 비롯한 네오나치들이 기승을 부렸다. 또한 아파르트헤이트 시기 남아공 정부 역시 나치에 그렇게 비판적이지도 않았기 때문에 당시 남아프리카 방위군 육군에서는 나치 독일의 군가였던 '에리카'를 아프리칸스어로 번안하여 부르기도 했다. '에리카'의 가사는 나치에 대한 찬양이나 전쟁에 대한 선동 등의 내용이 전혀 없는 서정적인 내용이지만, 작곡가인 헤름스 닐이 나치 독일의 선전에 적극적으로 부역한 특성상 전후 독일 연방군국가인민군[21] 에서도 잘 부르지 않던 곡이다.

4.2.1. 명예 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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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영국령 홍콩, 대한민국, 대만, 등 친서방 국가의 일부 동아시아인들은 명예 백인(Honourary white)으로 분류되어 백인과의 섹스 및 결혼과 투표는 금지였지만[22] 백인과 같은 시설[23]이나 백인 전용 학교 등은 이용할 수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명예 백인 참조.

그나마 이건 나은 거라서 이전에는 세계에서 성공한 흑인들의 소개를 금지하기도 했다. 덕분에 남아공의 흑인들은 흑인 운동선수[24]나 가수들, 연예인들의 존재를 몰랐으나 오래 가지 않아 알려졌고 흑인들도 돈 많이 벌고 백인들에게 인기인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뒤늦게 정부에서 그 유명 흑인 인기인들은 명예 백인이라고 주장했으나 당연히 통할 리가 없다.

또한 자국민이야 문제가 안 되지만 외국 사람들에게까지 이런 짓을 하면 무조건 외교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해외에서 남아공에 찾아온 외교관이나 고위 국빈에게는 피부색과 관계 없이 무조건 백인 지위를 부여했다. 예를 들어, 1980년대에 사우디아라비아 외교관은 백인 전용 구역 출입이 허용되었다. 당시는 남아공이 석유 제재에 시달리기 시작한 시절이니만큼 사우디에게 함부로 밉보일 수가 없었다.

이렇게 강경 일변도로 막나가는 억압 정책을 편 주제에 상황에 따라 제 입장을 손바닥 뒤집듯 바꾼 박쥐 같은 나라가 그 악명 높은 나치 독일이다. 후술하겠지만 아파르트헤이트는 정말로 거기서 배워 온 짓거리였다. 정확히는 높으신 분들 중 몇몇이 현지 친나치 단체에 가담해 나치 편을 들지 않은 당대 남아연방 정부를 상대로 사보타주테러를 하며 이적행위를 한 것이긴 했다. 수상이었던 얀 스뮈츠부터가 1, 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편에 붙어서 매우 잘 싸웠고 국제연맹 창설에 많은 기여를 했으며 인도계의 처우 개선에 앞장서기도 했지만 정작 본인 역시 아파르트헤이트의 근본이 되는 인종간의 분리를 지지했다. 참고로 강경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1, 2차 세계 대전 때 괜히 전쟁에 끼어들어서 피를 흘렸다. 2차 세계 대전 때 나치 편으로 참전했어야 했다!'며 얀 스뮈츠를 배신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반대로 차별받은 흑인들도 이들의 반응에 대해 '2차 세계대전 때 참전했다가 전사하거나 뉘른베르크로 끌려가서 사형당했어야 한다!'며 비꼬면서 비난했다.

4.2.2. 보어인 외 다른 인종에 대한 차별

인도인, 중동인, 동양인, 케이프 말레이인 등 모든 비서양인 및 비백인들도 흑인만큼은 아니지만 차별 대우를 받았으며 백인과 흑인 혹은 비백인과의 혼혈인 케이프 컬러드(Cape Coloured)도 차별받았다.

같은 중화권인 대만인홍콩인들이 명예 백인 칭호를 받을 수 있던 반면 본토 중국인들과 기존부터 차이나타운에 살고 있던 중국계 남아공인들은 케이프 컬러드에 끼워져 '유색인종(Coloured)'이 되거나, 남아시아계에 끼워져 '아시아인(Asian)'으로 분류되는 등 남아공 정부도 차별은 하고 싶은데 초반에는 갈피를 못 잡다가 나중에는 그냥 '중국인(Chinese)'이라는 별도 계급을 만들어 기어코 분리시켰다. 일부 중국계 개인들은 정치적 또는 경제적 요인에 의해 개별 허가를 받아 백인 지역에 거주하거나 시설을 이용하는 등의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특혜를 받기도 했으나 이는 공식적인 지위가 아니었으며, 차별의 제도적 틀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나마 원래 남아공에 살던 화교들은 반공정신이 투철하여 비백인 중에서는 제일 대접을 잘 받았으나, 그 잘 받았다는 수준이라는 게 백인 지역에 거주할 수 있게 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1984년부터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가 백인 지역으로 선포한 지역에 중국인들이 거주할 수 있도록 하고, 그 안에 있는 시설을 사용하도록 단체 지역법이 개정되었다. 중국계 남아프리카인들은 백인 지역으로 이주하기 위해 정부로부터 허가를 신청해야 했는데, 신청이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그 교외의 모든 이웃들로부터 허가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사실상 없느니만 못한 정책이었다.#

이 과정에서 웃지 못할 일도 터지게 된다. 1970년대에 남아공에서 중국 음식점이 유행하자 중국인이 운영하는 중국집이 급증했는데 유색 인종이 운영하는 곳이라 백인 출입이 불가능해 중국 요리를 못 먹게 된 백인들이 항의를 하자 중국집에 한해 '백인 이용 가능'으로 지정했다. 그런데 이렇게 되자 기존의 중국인들이 중국집에서 식사를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결국 중국집에 한해 중국인도 백인이 이용 가능한 식당에 출입 가능으로 만들었다. 당연히 중국계 남아공인들도 이 따위 횡포를 좋아할 리가 없었으므로 많은 중국계들이 흑인과 연대하여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에 참여했다.#

당시 남아공에 적지 않았던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등 출신의 남아시아계 주민들도 비록 흑인들만큼은 아닐지언정 도시 내 할당 구역 밖으로는 마음대로 나오지도 못하고 교육도 전적으로 공동체 자체적으로만 해결해야 했으며 사석에서는 여전히 쿨리 소리 들으면서 멸시당하는 등 인간 대접 못 받았다. 1970~80년대를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이 대내외적으로 궁지에 몰리기 시작하면서 남아시아계는 투표권을 부여하고 어용 단체 몇 개 만드는 식으로 분열과 통치를 위한 사탕발림을 꺼냈지만 대부분의 남아시아계는 선거에 참여하지도 않고 남아공 인도인 의회를 비롯한 남아시아계 정치 단체들은 ANC와 연대하는 걸로 회답했다.

남아시아계들은 출신 상관없이 모두 퉁쳐져 '인도인(Indians)' 혹은 '아시아인(Asian)'으로 불리며 하나의 비백인 인종 그룹으로 묶여 직접적 차별의 대상이 되었다. 남아공의 인종분리를 심화시킨 집단 거주지법(Group Areas Act, 1950년)에 따라 남아시아계들 역시 흑인이나 유대인들처럼 백인 전용 구역을 만들겠답시고 강제이주를 당했고, 흑인들처럼 투표권이 없었으며 백인 전용 시설(학교, 병원, 대중교통 등)을 이용할 수 없었다. '인도인' 전용 시설은 흑인에게 제공되는 시설보다는 나았지만, 백인 시설에 비해 열등한 수준의 분리된 시설과 교육을 이용해야 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남아프리카 경제의 중간층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흑인들처럼 함부로 어딘가에 쫓아내거나 경제활동에서 아예 배제해버릴 순 없어서 사업체는 가만히 놔뒀으나, 백인 구역에서의 사업체 소유 및 운영을 제한함으로써, 남아시아계 주민들의 경제 활동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또한 흑인들은 흑인들대로 중간에 끼인 이들을 착취자나 중개상 정도로 보며 멸시하고 아파르트헤이트 붕괴 이후에는 흑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BEE에서 배제당하는 등 그야말로 중간에 끼여 설움을 당했다. 케이프 말레이인 역시 마찬가지로 '유색인종(Coloured)'에 끼워졌다가 나중에는 '말레이인(Malay)'으로 별도 지정당해 투표권을 박탈당하고 분리법과 배덕법의 적용을 받았다.

4.2.3. 백인에 대한 차별

당시 '같은 백인'으로써 투표권과 병력을 얻기 위해 끌어들였던 영국계/아일랜드계와 유대계 백인들은 일단 법적으로는 백인으로 인정받았으나, 은근히 2등 시민 취급을 받았다. 이는 아파르트헤이트가 띄고 있던 보어인 민족주의 및 보어인 우월주의적인 성향과 연관이 되어 있다.[25] 정부 주요 기관, 군대, 경찰, 공공부문 등 모든 분야에서는 보어인들이 우선순위와 특권을 누렸고 나머지는 보어인들의 자리를 내주기 위해 배제되었다.

영국계의 경우 보어 전쟁의 영향 탓에 보어계와 사이가 썩 좋지 못했다.[26] 남아연방이 영국으로부터 어떻게든 벗어나려 했던 이유에도 보어계와 영국계의 뿌리 깊은 갈등이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영국의 불만 표출은 물론 그 이전부터 계속되어온 남아연방 정부보다 더 위의 영국 정부의 상전 행세는 아프리카너 내셔널리즘 발흥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독립 시행에 중대한 역할을 했다. 특히 보어 전쟁 당시 영국의 강제수용소 수립 등 전쟁범죄는 보어인들에게 뿌리 깊은 반영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보어인들이 안정적으로 생존하려면 영국 놈들과 비백인을 모조리 쫓아내야 한다는 결론에까지 이르게 했다. 이에 영국이 시행하던 기존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적극 확대하여 실행하려 하자 영국 정부와 왕가가 합심하여 반대하는 모습에 보어인들은 마침내 분통을 터트렸고, 결국 헨드릭 페르부르트에게 표를 행사하여 남아공을 독립시키고 페르부르트를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르는 독재자로 만들어 주었다. 영국계와 비슷한 시기 들어온 아일랜드계도 영국계와 묶여 백안시당했으며, 이들은 인구수도 10만 명 이하로 극히 적은데다 케이프 컬러드(혼혈) 비중도 있어 보어인들의 공격에 더욱 취약했다.

유대계 역시 19세기부터 증오를 받고 있었다. 남아공의 경제 구조가 급변하던 19세기의 '광물 혁명' 당시 동유럽 지역에서는 광물 이권으로 발전하는 케이프 식민지에 정착하기 위해 수많은 유대인들이 남아프리카로 향했다.[27] 이들은 소매업, 금융, 전문직 등지에서 빠르게 성장하여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농업 기반 사회에서 도시 상공업 경제로 진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영국에게 크게 찍어눌려졌던 (백인 기준)절대 다수의 보어 빈곤층들은 이러한 유대인들의 세력 확장에 큰 위기 의식을 가졌다. 어쩌다 도시에 진입해도 이들은 교육 수준이 낮고 영어에 익숙하지 않아 도시화/산업화 과정에서 푸어 화이트로 전락하여 혜택에서 배제되고 말았다. 이러한 의식이 당대 유행하던 아프리카너 민족주의와 저 멀리 유럽에서 불어오던 파시즘/나치즘반유대주의 기조가 딱 맞아떨어지게 된다. 이는 보어인들이 예전에 유럽에서 남아프리카로 이주할 시절부터 있던 반유대주의 정서와 합쳐지게 되었고, 아프리카너 내셔널리스트들은 자연스럽게 반유대주의 의식까지 가지게 되었다. 보어 유력 정치인들은 성공한 유대인 이민자들을 향하여 '탐욕스러운 이민자', '착취적 상인', '대영제국의 사냥개이자 유대 볼셰비즘의 기수' 등 온갖 꼬투리를 잡아 비난하며 가난한 유권자들이 유대인들을 상대로 분노와 좌절을 뿝어내도록 선동했다.#

결국 남아연방이 남아공으로 분리 독립하자 기존에 정치적/경제적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영국계와 유대계는 하루 아침에 보어인에게 밀려 1.5등 시민으로 전락했다. 영국계들은 국민당보다 상대적으로 온건한 연합당[28], 남아프리카 노동당, 진보당 같은 다른 정당을 지지하며 맞섰고, 유대계들은 아예 넬슨 만델라 등이 이끌던 반아파르트헤이트 투쟁에 적극 참여하였다. 1963년 체포된 반아파르트헤이트 활동가들을 피고인으로 하여 진행된 리보니아 재판에서 백인 피고인들 중 절대 다수가 유대계였고, 나머지는 영국계였다.

국민당 정부는 영국계와 유대계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법적 제재를 두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문화적으로는 차별이 이어졌다. 그간 동등한 공용어 위치를 차지하던 아프리칸스어영어 관계에서 아프리카너 우월주의를 위해 아프리칸스어를 더욱 강조하는 정책을 폈고, 실제로도 당시 남아공에서는 방송이나 안내문에 아프리칸스어가 먼저 표기되거나 나중에 표기되더라도 영어보다 강조되어 있는 중 은연 중에 아프리칸스어를 먼저 우선했고, 정부, 공공기관, 군대, 경찰 등 주요 공직에는 아프리칸스어 사용자를 우선해서 배치시켜 자연스럽게 행정 전반에서 아프리칸스어가 우위를 점하도록 했다. 당시 불리던 남아공의 국가Die Stem van Suid-Afrika도 보통 아프리칸스어 버전이 우선해서 불렸고, 일반적으로 1절만 불렀기에 영어 버전은 생략되는 경우가 많았다. 가사 자체에도 아프리칸스 내셔널리즘적인 내용과 보어인 선조 찬양 일색에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흑인은 물론 케이프 컬러드, 케이프 말레이인, 남아시아계, 영국계, 유대계 등 다른 민족에 대해선 일언반구 언급도 없어 마치 남아공에 보어인만 사는 양 보여졌다.

또한 남아공 정부는 공교육에서의 아프리칸스어 사용을 영어와 50:50 비율로 확대하는 등 비중을 점차 늘려 나가더니 1974년부터는 아프리칸스어를 의무 교육화하고 수학, 사회 등 주요과목을 아프리칸스어만으로 가르치도록 강제하여 이에 반발하는 학생들은 처벌했다. 흑인들은 당연히 압제자들의 언어인 아프리칸스어 사용을 꺼렸고 이에 1976년 아프리칸스어 수업 반대 시위를 하자 경찰들이 비무장 학생들, 그러니까 미성년자들에게 발포하여 많은 사상자가 나기도 했다. 사망자는 공식 수치로만 176명, 부상자는 1139명으로 심지어 일각에서는 무려 500~700명 이상이 사망했다는 추정치를 내놓기도 했다. 언어 수업 하나가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것이다. 그럼에도 영어의 공용어 위치를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영어 역시 상당히 많이 사용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를 다룬 영화인 ‘파워 오브 원’에서는 주인공이 어렸을 적 사정으로 영국계 학교를 가지 못하고 독일계 학교를 갔는데, 독일계 학생들에게 오줌통이라 불리며 왕따와 멸시를 당해 큰 충격을 받고 시골로 가게 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29]

유대계 역시 문화적 차별을 받은 것은 마찬가지였고, 여기에 일부 제도적 차별까지 더해졌다. 남아연방에서는 이미 보어인들이 정치적 주도권을 가져오기 시작하던 1930년대부터 반유대정책이 마련되어 시행되고 있었다. 이는 D. F. 말란 등 국민당 정치인들이 주도한 것으로, 1930년 제정된 쿼터법(Quota Act, 1930)과 외국인법(Aliens Act, 1937)은 남아연방으로의 유럽발 유대인 이민을 '효과적으로' 제한하였다. 이 당시 국민당은 유대인의 당원 자격을 명시적으로 배제하기도 했으나, 1950년대 이후로는 표를 얻기 위해 완화했다. 페르부르트를 위시한 아프리카너 민족주의 정치인들은 해외에서 나치 독일홀로코스트를 피해 남아연방으로 도피한 500여명 정도의 유대인 난민들이 탄 난민선 '슈투르가르트' 입국을 반대하는 항의 집회가 열리거나# 아프리칸스 민족주의 성향 정간지에선 연일 나치 독일의 승전과 유대인, 영국, 자유주의 세력을 비방할 정도로 아프리칸스 민족주의자들의 반유대주의 성향은 강성했다. 또한 남아프리카 이방인 국가사회주의운동(South African Gentile National Socialist Movement, 회색셔츠단(Gryshemde))이나 오제바브란트바흐같은 친나치 조직들이 반유대주의 정책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거나 대놓고 공격하기도 했다. 백인 전용구역을 개발하기 위해 강제 이주당하는 일도 생길 만큼 당시 유대인들은 백인 아닌 백인 정도로 취급받았다.

공화국 독립 이후에도 유대인에 대한 사회/문화적 차별은 여전했다. 공식적으로는 아프리카너 민족주의 정권이 전후 이미지 세탁 과정에서 반체제 파시스트 단체 시절의 반유대주의를 버리고 무엇보다 냉전 시대 국제 역학 관계와 지정학적, 전략적 유사함에 따라 이스라엘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면서 공식적인 차별은 없었지만 문화, 사회적 차원에서 멸시는 여전히 흔했다. 백인 전용 사교 클럽이나 스포츠 클럽에서는 '백인'만 받는다며 유대인 가입을 거절하는 등 법적 백인 취급조차 하지 않거나 가게에서 대놓고 유대인 금지 팻말을 걸기도 했다. 또한 영국 파시스트 연합오스왈드 모슬리 같은 반유대주의자들을 총리와 내각 구성원들이 직접 나가서 환대해주기도 했다.[30]

이스라엘이나 재외 유대인들 역시 이런 반유대주의에 가만히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2013년 11월 25일 이스라엘 방송 우브다에 나온 유대계 미국인 영화 제작자 아르논 밀천(Arnon Milchan)(그의 제작, 기획영화)이 말하길 1970년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실시하던 남아공에게 이스라엘 유대인 이민도 받아들이고 친미, 친이스라엘 정책을 취하면 그 댓가로 할리우드 영화를 통하여 남아공을 좋게 받아 주겠다고 거래가 시도되었다고 하지만 남아공에서 기득권을 가진 보어 및 백인계들이 거부한 탓에 빡돈 할리우드에서 남아공 백인층과 아파르트헤이트를 까는 영화를 제작하는 것으로 보복했다는 것이다. 이에 미국 유대인 영화 단체들은 입을 다물었다. 이 때문인지 확신할 수는 없으나, 확실히 1970년대 이후부터 1994년에 아파르트헤이트가 폐지될 때까지 아파르트헤이트를 신나게 까는 영화가 할리우드 기득권을 잡고 있던 유대계 미국인들에 의해 영미권을 중심으로 쏟아져 나왔다.

아파르트헤이트를 입안한 페르부르트는 두 번의 암살시도 끝에 암살당했는데, 이 사건들의 범인은 둘 다 비백인이 아니라 남아공이 법적으로 인정한 백인들이었다. 샤프빌 학살에 분노한 영국계 백인 사업가이자 반아파르트헤이트 활동가 데이비드 프랫(David Pratt)에 의한 페르부르트 암살 미수가 있었으나 페르부르트는 가까스로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6년 후 페르부르트는 흑백 쿼터 디미트리 차펜다스(Dimitri Tsafendas, Δημήτρης Τσαφέντας)에게 살해당했다. 차펜다스는 흑백혼혈이었으나 법적으로는 백인으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흑인의 유전적 형질이 나타났기에 본인 스스로는 비백인이라 생각하여 자신을 재분류해달라 청원했으나 거절당했다. 차펜다스는 흑백혼혈 외모 때문에 남아프리카 사회에서는 차별을 당했고, 본인 역시 유럽에서 지낼 때부터 사회주의, 자유주의 성향을 갖췄기에 페르부르트를 철저히 증오하여 사전조사를 꼼꼼히 한 후 페르부르트의 연락원이 되어 활동하다가 암살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페르부르트가 자기들이 법적으로 인정한 백인에게 공격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는지, 남아공 당국은 법정에서 자신이 '아파르트헤이트의 화신'을 저격했다고 당당하게 주장하고 아파르트헤이트를 폐지해야 한다고 조리 있게 호소한 프랫을 정신병자로 몰아서 블룸폰테인에 있는 정신병원에 수감해 버렸고, 사전에 철저한 준비를 거쳐 페르부르트 암살에 성공해낸 차펜다스도 '몸 속에 있는 거대한 벌레가 페르부르트를 죽이라고 지시했다'라고 증언했다면서 그를 정신병자로 몰아 사형조차 시키지 않고 정신병원에 수감했다. 프랫과 차펜다스가 실제 정신병이 있었는지는 지금도 논란거리지만 적어도 프랫의 친구들은 프랫의 법정 심리 전후에 친구들은 그가 정신병자가 아닌 완벽하게 제정신이라고 증언했으며, 차펜다스 본인도 벌레 이야기는 웃기는 소리라며 죽기 전까지 그러한 주장을 비웃었고 오히려 당시 남아공 공권력에게 고문당했다고 증언했다. 프랫은 수감된 지 1년이 막 지난 53번째 생일날 질식사한 채로 발견되어 찜찜한 죽음을 맞았다. 당대에는 남아공 보안군에 의한 자살을 위장한 암살이 많았던 때였고, 가석방 심사가 진행되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그의 죽음을 남아공 공권력이 자행한 암살로 의심하는 의견도 있다. 차펜다스는 아파르트헤이트가 폐지된 이후에도 살아 있었으나 세월이 너무 오래 지난 나머지 세상에서 잊힌 채 계속 정신병원에서 살다가 1999년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러한 움직임에도 국민당의 보어인 정부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표와 병력[31]이 필요할 때는 같은 백인 취급해주고 다른 때에는 아프리카너보다 밑으로 보기 일쑤였던 영국계와 유대계에 대한 차별은 아파르트헤이트가 끝날 때까지 은연 중에 계속되었다. 또한 영국계와 유대계에도 침묵하는 다수들이 백인 특권과 공동체 안정에 매몰되어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반아파르트헤이트 활동가들은 이러한 무관심과도 맞서 싸워야 했다. 남아공 유대인 공동체(South African Jewish Board of Deputies)의 주류 지도부 역시 공개적인 비판을 자제하고 체제에 순응하는 입장을 취하는 등 반유대주의에 대한 조치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물론 당시 남아공 정부는 이득관계는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영국마거릿 대처 행정부와 이스라엘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나 그건 외교의 일이었을 뿐이었다. 대외관계 단락에서도 보듯 남아공 정부는 내치에서는 반영, 반유대주의 감정을 숨기지 않을지언정 외부적으론 무기를 거래하거나 핵실험을 함께 하는 등 친하게 지냈다. 외부의 영국인, 이스라엘인들이 뭐라 하건 어차피 자기 울타리 밖의 일이니 남아공과는 상관 없는 반면에 내부의 영국계, 유대계들은 남아공 내부 정치의 일이었기에 영향을 줄 수 있었으니 찍어 누른 것이었다.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아르헨티나가 내적으로는 각종 반유대주의, 반공주의 발언과 정책을 쏟아냈지만 외부로는 이스라엘의 무기를 수입하고 다른 남미 군정들이 외교를 끊는 가운데 소련, 쿠바와도 잘 지내고 밀까지 수출해주는 얼마 안 되는 국가였던 것과 비슷하다.

이에 따라 남아공 유대계, 영국계와 남아시아계를 비롯한 비백인 공동체들은 좌익 노선이든, 자유주의적 개혁주의 노선이든 많은 수의 저명한 반아파르트헤이트 인사들을 대거 배출했다.[32]

한편 중동계는 나라나 종교마다 달랐다. 이란 제국(팔라비 왕조) 시절 이란 사람들과 중동 출신 중 기독교 신자인 사람들[33]은 명예 백인도 아니고 대체로 그냥 백인으로 인정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 많은 이들, 특히 무슬림들은 종교와 문화 등 많은 면에서 이질적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후술할 영국계, 유대계처럼 은연중에 차별을 받거나 간혹 유색인종으로 분류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다.

적지 않은 수를 자랑하는 케이프 컬러드 역시 한방울 원칙에 따라 흑백혼혈, 황백혼혈이라고 천시받았다. 이들은 백인의 피가 섞여 있고 모국어도 대부분 아프리칸스어를 사용하는 등 보어 문화와 그렇게 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중앙 보어 기득권들은 이들을 외면하고 아예 '유색인종(Coloured)'이라는 별도의 인종으로 묶음으로써 법적 비백인으로 지정해 버렸다.

4.3. 영토 불법 강점

당시 남아공은 유엔의 신탁통치령 전환 요구도 거절하며 나미비아 지역을 남서아프리카 위임통치령으로써 자국 영토로 불법 점유하고 있었다. 남서아프리카는 원래 독일령이었다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국제연맹위임통치령으로 맡겨 놓은 영토였다. 때문에 영구적인 영토도 아니고, 위임통치 기간이 끝나면 정해진 때에 독립시켜야 했지만 남아연방은 이를 불법으로 점유하여 일개 주로써 공식적으로 자국에 포함시켰다. 이는 당시 남아연방을 통치하던 헨드릭 페르부르트의 소행으로, 남서아프리카 거주민들[34]의 표까지 끌어모아 인종분리 정책과 영연방 탈퇴, 영국으로부터의 분리독립, 반투스탄 분리 등 자신이 원하는 정책들을 손쉽게 통과시키기 위함이었다.

강제점령된 남서아프리카 역시 인권탄압과 인종차별이 이어지게 되었고, 남아공은 남서아프리카 병합 덕분에 남서아프리카의 드넓은 해안선과 지하자원까지 공짜로 손에 넣게 되었다. 국제연합은 남아연방/남아공에게 내내 남서아프리카를 분리독립시키라고 요구했으나 남아프리카는 무시로 일관했다. 남서아프리카 내부의 여론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고, 이들은 남서아프리카 인민기구(SWAPO)를 구성하여 무장투쟁에 나서 남아프리카 국경 전쟁이 벌어진다. 남서아프리카는 24년간 이어진 전쟁 끝에 데클레르크 정권이 세워진 1990년에야 나미비아로 독립한다.

4.4. 대외 개입

사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국제사회의 압력에도 이렇게 똥배짱을 부려댈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아프리카에서 백인들이 지배하는 국가였던 로디지아[35]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식민지로써의 모잠비크, 앙골라와 협력하면 고립을 타개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36] 즉 아프리카의 백인 국가&잔존 식민지와 협력하면 언제까지고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게다가 남아공은 당시 본인들의 아파르트헤이트 강행을 국내의 혼란을 부추기는 '저 멀리 소련쿠바 빨갱이들의 내란선동을 막기 위한 특단의 조치'라고 포장하며 자신들은 아프리카의 안보를 지키는 반공의 기수라고 국내외에 선전해댔다. 미국영국을 비롯한 서방 주요 국가들과 중국이 비록 인종차별 정책을 펼치는 남아공 정부를 공식적으로 비난하기는 했지만 당시 냉전 상황에서 반공주의반소 정책을 표방한 남아공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의 교역이나 비공식적인 교류는 계속 해 왔기 때문에 냉전 시기에 그리 치명적인 타격은 입지 않았다.[37]

이에 따라 남아공은 1960~70년대 앙골라, 모잠비크 등 당시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국가들의 식민지 독립전쟁에서 포르투갈군의 식민지 독립 운동 진압을 거리낌없이 지원하여 자국과 이웃한 포르투갈령 식민지인 모잠비크와 앙골라[38]의 독립을 막으려고 했으며, 이들이 독립하고 나서도 이들 국가에서 벌어진 내전에 무단으로 개입하기까지 하여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들을 포함한 전세계적인 반감과 비난을 받았음에도 백인 정부는 이를 무시하였다. 로디지아 이언 스미스 행정부의 흑인 게릴라 탄압 역시 지원하였다.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은 비록 욕은 뒤지게 먹었을지언정 보수 기독교 국가를 표방하며 반공을 국시로 제창해서 남아공을 소련쿠바의 아프리카 진출 방패막이로 여기고 있던 미국영국[39], 프랑스, 중국 등이 암묵적으로 지지하였고[40] 특히 1971년 2월에는 이스라엘과 상호 승인 조약을 체결하고 짝짜꿍이 맞아[41] 1975년 4월 비밀 군사동맹 협정을 체결, 이스라엘의 핵실험을 남아공 영토 내에서 돕고 남아공에 재래식과 비대칭 무기, 핵개발의 노하우가 이스라엘서부터 전래되었다. 1976년에는 前 나치 지지자인 발타자르 포르스터 수상이 이스라엘을 방문했였는데 이 때문에 상당한 파문이 일었다.

또한 흑인 국가일지라도 반공주의를 목표로 국교를 맺고 서로 대통령이 교환 방문하는 등 친남아공 행보를 보인 말라위헤이스팅스 반다 정부, 우호적 중립인 잠비아, 그리고 앙골라 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도 우호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부터 남아공의 '동맹'들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1974년에는 카네이션 혁명으로 포르투갈 제2공화국이 무너지고 포르투갈 구국군정이 세워지며 다 이겨놓은 전쟁에서 발을 빼게 된다. 포르투갈령 마카오를 제외한 포르투갈의 모든 식민지가 분리독립하여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은 결과적으로 식민지들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포르투갈이 발을 뺀 자리에는 친공산주의 국가인 앙골라 인민공화국모잠비크 인민공화국이 들어섰다.

로디지아 역시 로버트 무가베가 이끄는 흑인 게릴라들과의 협상 끝에 1979년 이언 스미스 정부가 무너지고 짐바브웨 로디지아가 세워졌다. 스미스는 어떻게든 흑인 정권을 허수아비로 내세우고 백인 기득권들이 권력을 유지하게 하려 애썼으나 짐바브웨 아프리카 국민연합 - 애국전선(ZANU-PF)의 반대와 미국 지미 카터 행정부의 압력으로 실패했고, 결국 짐바브웨 로디지아도 무너져 1980년 정권이 완전히 ZANU-PF에게 넘어가 신생 흑인 중심 독립국 짐바브웨가 세워졌다. 결국 남아공은 주위를 보호해 주던 방패막이 동맹들을 다 잃고 그 자리를 남아공의 적성국들이 채워 나가게 되었다. 말라위가 남아 있긴 했지만 국력이 워낙 약하고 헤이스팅스 반다 대통령도 대외 군사력 투사에는 관심이 없어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80년대의 남아공은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 이후 터진 앙골라 내전에서 앙골라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지원하는 데 사활을 걸며 앙골라 완전독립 민족동맹(UNTIA) 조나스 사빔비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이 모든 노력은 1980년대 말 동구권이 붕괴되고 앙골라, 모잠비크 등도 탈공산주의 행보를 보이자 그간 남아공을 묵인해 오던 제1세계가 남아공에게 본격적으로 태클을 걸기 시작하고, 1992년 남아공 독재정권이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무너지면서 모두 허사가 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 폐지 이후 남아공은 UNITA 지원을 그만두고 MPLA 지원으로 선회하며 남아공에 특수부대를 보내 UNITA 진압에 협조했다.

4.5. 경찰 폭력과 국가 테러

남아프리카 공화국 경찰(SAP, South African Police)과 경찰 산하 보안국(Security Branch)의 폭력성은 아파르트헤이트 시기에 극에 달했다. 아파르트헤이트 독재 정권 시절의 남아공 경찰은 말이 경찰이지 국민당 정부의 정치경찰 역할을 하며 온갖 대내 정치공작은 물론 주권 영역이 아닌 대외 국가 테러 행위까지 수행했다. 특히 보타 행정부는 앙골라, 모잠비크, 보츠와나, 영국, 프랑스, 잠비아 등 엄연한 해외 주권국가들에서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가들을 상대로 병력을 보내거나 우편폭탄 테러를 벌였다. 보타 행정부는 올로프 팔메 총리 암살사건의 배후 중 하나로 의심받는 주체이기도 하다. 올로프 팔메 스웨덴 총리는 생전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거센 비난을 가했고, 이에 보타가 팔메 총리를 남아공에 비판적인 해외 인사들을 침묵시키기 위해 암살했다는 것이다.

디르크 쿳시(Dirk Coetzee)와 유진 드 콕(Eugene De Kock)이 이끌던 남아공 경찰 소속 대분란전 담당부서 'C10', 혹은 위치한 부지 이름을 딴 '블락플라스(Vlakplaas)'는 노쿠툴라 시멜레인(Nokuthula Simelane), 루스 퍼스트(Ruth First)와 같은 반아파르트헤이트 인사들에 대한 끊임없는 암살과 우편폭탄 테러로 악명이 높았다. 특히 피터르 빌럼 보타 독재정부 당시 드 콕은 그 잔혹성이 극에 달해 서구권에서 '악의 화신(Prime Evil)'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블락플라스는 올로프 팔메 총리 암살사건의 배후로 의심되는 곳이기도 하다.

드 콕은 블락플라스에 오기 이전 남서아프리카에서 나미비아 독립 전쟁이 한창일 시 남서아프리카 인민기구에 맞서 싸울 대분란전 담당 경찰특수부대이자 무자비한 인권 탄압으로 유명했던 '쿠푸트'(Koevoet)[42]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43] 드 콕은 아파르트헤이트 붕괴 이후 1996년 6건의 살인을 포함하여 총 89건의 혐의로 기소되었고 212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진심인지 아니면 가석방을 노리고 한 행동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드 콕은 남아공이 올로프 팔메를 암살한 범인이 맞다고 구체적인 부분까지 고백하기도 했고, 자신의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편지를 여러 차례 쓰는 한편 프레데리크 빌럼 데 클레르크 역시 아파르트헤이트 원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드 콕은 2015년 가석방되었다.

이외에도 크레이그 윌리엄슨(Craig Williamson)이 유명하다. 크레이그 윌리엄슨은 남아공 경찰 보안국 소속이었고, 마찬가지로 반아파르트헤이트 인사 마리우스 슈훈(Marius Schoon)의 일가족을 앙골라 인민공화국에서 우편폭탄으로 암살하거나 해외에서의 불법 무기 거래[44], 모잠비크 인민공화국 정부 전복 기도 등의 온갖 불법 행위로 악명이 높았다. 윌리엄슨 역시 올로프 팔메 암살의 배후로 의심받는 사람 중 한 명이다.[45]

소웨토 항쟁이 시작된 후에는 남아프리카 방위군과 남아공 철도경찰까지 보안군에 편성되어 시위 진압 및 정적 탄압에 동원되었다. 1985년 10월 15일에는 이른바 '트로이 목마 학살'이라 하여 위장된 트럭에 사람들이 돌을 던지자 숨어 있던 경찰관, 군 장병, 철도경찰관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주변에 돌아다니는 모든 이들에게 발포하는 사건이 터지기도 했다. 미성년자 2명을 포함해 3명이 즉사했고, 부상자들 대부분은 평범하게 출근하는 직장인과 노동자들, 그리고 밖에 나와 놀고 있던 아이들이었다.

정보기관 역시 정적 탄압에 기여했다. 남아공의 정보기관들은 여느 독재국가들의 정치경찰 조직이 그렇듯 내부 보안을 명목으로 영장 없는 수사, 내부 감시, 선전선동, 사법 외 처형, 강제실종 등을 일으켰다. 페르부르트 시기에는 공화국 정보국(RI, Republican Intelligence), 포르스터 시기에는 국가안전국(BOSS, Buro vir Staatsveiligheid, Bureau of State Security), 보타 시기에는 국가정보국(NIS, National Intelligence Service)이 그 역할을 맡았다. 이외에도 민사협력국(CCB, Civil Cooperation Bureau, Buro vir Burgerlike Samewerking)은 경제제재 우회와 외국으로 도피한 요인 암살에 관여했다. 이들은 1980년대 후반에야 그 정체가 밝혀질 정도로 비밀스러운 집단이었으며, 철저히 민간인으로 위장한 채 활동했다.

남아공 방위군 중에서도 특히 앙골라 내전에서 자진 귀화한 앙골라인 장병들을 모아 만든 일종의 외인부대남아프리카 육군 32대대(버팔로 대대, 끔찍한 자들(Os Terríveis))가 악명이 높았다. 이들 대부분은 MPLA와 경쟁 관계에 있던 앙골라 민족해방전선(FNLA, Frente Nacional de Libertação de Angola) 출신이었다. 32대대는 남서아프리카 위임통치령과 소웨토에 진압군으로 투입되어 유혈진압 및 민간인 학살에 참여했다.

아파르트헤이트가 붕괴된 후 남아프리카 경찰은 해체되고 남아프리카 경찰국(SAPS)으로 재편성되었다. 국가정보원도 해체되고 국가정보국(NIA, National Intelligence Agency)으로 재편되었다. 남아프리카 방위군 역시 해체되어 정치탄압에 관여하지 않은 전직 방위군 장병들에 민족의 창, 아자니아 민족해방군 등 전직 흑인 게릴라 대원들을 추가로 더해 현대 남아프리카 공화국군으로 재편되었다. 이에 참여하지 못하거나 참여를 거부한 전 남아공 방위군 장병들과 흑인 게릴라 대원들은 대부분 민간군사기업으로 빠져나갔다.

32대대 역시 남아공 방위군이 해체될 때 대부분 강제전역당했다. 이들은 아파르트헤이트가 붕괴된 이후 1993년에는 다른 부대로 전속된 인원을 제외하고는 칼라하리 사막 한가운데 있는 석면 오염지대 폼프렛에 버려졌다. 4분의 1 정도는 신흥 남아공군 제2남아프리카보병대대을 건설하는 데 허락받아 참여했으나 1999년 대대가 제루스트로 이전되어 많은 장병들이 폼프렛에 남기로 결정하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후 잔류 인원들은 똑같이 버려진 신세였던 전 남아공 군경 인원 및 아프리카 민족회의 소속 민족의 창 멤버들과 함께 유명 민간군사기업 익스큐티브 아웃컴즈샌드라인 인터내셔널에 합류하여 시에라리온 내전에서 싸우거나, 불상 세력에게 스카웃되어 2004년 적도 기니에서 발생한 쿠데타 미수 사건에 참여하거나, 도로 앙골라 내전으로 돌아가 앙골라 완전독립 민족동맹에 합류하여 MPLA에 맞서 싸웠다. 지금까지 남아서 계속 살고 있는 인원도 많다. 때문에 폼프렛 지역에서는 영어나 아프리칸스어보단 포어가 많이 쓰인다고 한다.

4.6. 대중문화 검열과 백인 간 갈등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의 본질은 단순한 인종차별 정권이 아니라 '유사 파시즘', '네오나치'라고 경멸당할 만큼 아주 폭압적이고 불온한 체제였다. 사실 기본적으로는 민주주의 체제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명목상 민주주의가 지켜질 뿐 사실상 수많은 독재정권들이 되뇌어 온 '우리식 민주주의' 정도 수준에 불과했다. 비자유민주주의의 대표주자들인 싱가포르, 오르반 빅토르헝가리, 에르도안의 튀르키예, 그나마 정상인 코스프레라도 하던 2010년대의 블라디미르 푸틴,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시절 러시아 등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고 오히려 프란시스코 프랑코 시절 스페인국이나, 현재의 이란, 사우디아라비아와 비슷한 정도로 억압적인 정권[46]이었으며, 일부 극우파를 제외한 백인들 역시 이 독재정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실제로도 당시 정권의 요직을 차지한 자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시절 공개적으로든, 사적으로든 나치즘에 동감하고 이를 모델로 삼았다. 전후 남아공의 총리가 되는 발타자르 요하너스 포르스터르(B. J. Vorster) 등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의 거물 지도자들 중 일부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반영, 친독 성향 파시즘 단체였던 '오제바브란트바흐'(Ossewabrandwag, 포장우차 파수대)에 가담했던 파시스트들이었다.[47]

2차 대전이 끝난 뒤로는 국제사회의 눈치가 보였는지 표면적으로 노골적인 파시즘 색채는 버렸지만, 그 대신 '반공'을 명분삼아 권위주의적인 경향은 계속 유지했다. 아프리카너계 백인들이 많이들 신봉했던 네덜란드 개혁교회 교단들도 국민당 정권과 유착했고, 신학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되어먹지 않은 사이비스러운 궤변을 내세워 아파르트헤이트 정당화에 앞장섰다. 이렇게 정치적으로는 권위주의적이며, 문화적으로는 종교적 엄숙주의를 표방한 정권이었기에 대중문화 역시 철저하게 검열되었고, 조금이라도 아프리카너 민족의 '전통적 가치관과 미풍양속'에 반한다고 여겨지는 것들은 가차없이 편집되어야 했다. 이렇게 폭압적인 체제다 보니 명목상으로는 우월한 대우를 받는 백인들조차 답답함을 느꼈고, 따라서 인종을 불문하고 남아공인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쌓이게 된다.

심지어 텔레비전조차 페르부르트 정권까지는 아예 금지된 문물이었고 포르스터르의 집권기인 1976년에야 비로소 보급과 방송이 개시되었다.[48]

더군다나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은 건물마저 백인과 흑인을 분리하는 구조로 짓길 강요했는데, 그래서 폰테 타워는 55층 건물임에도 흑인은 엘리베이터 탑승을 금지하는 바람에 흑인 직원들이 상주하는 52층 ~ 55층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수 없어서 엘리베이터는 51층 까지만 설치하도록 지시했다.

국민당 정부는 동성애[49], 음란물, 도박[50], 낙태[51] 등 사회적, 종교적으로 불온하다고 판단되는 것들을 모조리 금지시켰고 일요일에는 안식일이라고 백화점이나 극장 등에 대한 휴무를 강제했다. 그리고 아무리 백인일지라도 공산주의자를 포함한 좌파자유주의자들은 얄짤없이 감옥에 집어넣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흑인과 비슷한 처지였던 백인 공산주의자들이 당시 ANC와 협력하며 반정부 활동을 펼쳤고 조 슬로보, 브람 피스허르, 루스 퍼스트 등 수많은 좌파 성향 백인들을 반아파르트헤이트 진영으로 가게 만들었는데 이들은 무장 투쟁, 문화 사회 계몽 운동, 법률 투쟁 등에서 ANC에게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안드레 브링크, 브라이턴 브라이턴바흐 등 당시 문학계의 아프리칸스어 문학 르네상스를 주도하던 인사들은 죄다 반체제 진영으로 넘어가 전 세계 학계, 문화계에서 남아공을 보이콧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거기에 당시 영화 산업도 상당히 최악이었다. 배우들은 거의 백인들만 나왔으며 흑인들은 그냥 단역만 따내면 감사할 정도로 안 나왔다. 그나마 흑인들로만 이루어진 영화가 나오긴 했으나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은 이 영화의 상영을 금지하였고 아파르트헤이트가 끝난 뒤에도 상영금지가 풀리지 않다가 4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뒤에야 상영금지가 해제되고 리마스터링되어 상영되었다.

특히 남아프리카 공산당의 최대 거물 중 하나였던 브람 피스허르(Bram Fischer)는 보어 전쟁 당시 오렌지 자유국의 거물 정치인이자 남아프리카 연방 내무장관을 지낸 아브라함 피스허르(Abraham Fischer)를 조부로 두었을 만큼 혈족 중심의 폐쇄적인 아프리카너 사회에서도 뼈대 있는 성골 집안 출신이었는데[52] 보장된 그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신념에 따라 반정권 인사로 투신함으로서 넬슨 만델라의 변호를 담당했으며 결국 자기도 만델라 따라 감옥에 들어가 장기간 감옥 생활을 하다가 병보석 석방 이후 2주일 만에 죽어 남아공 당국만 빼고[53] 전 세계에서 살아 있는 양심이라고 칭송받았다. 상류층이고 명문가 출신이라 남아공 당국에서도 부담스러웠는지 추방과 망명을 조건으로 석방 제의를 했는데 이를 거부하면서 한 말이 "나는 자랑스러운 아프리카너이고, 나의 조국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다. 내 정부와의 정치적 마찰 때문에 내가 조국을 떠나야 할 이유는 없다."였다. 한 마디로 자신은 하나도 부끄러울 게 없으며 떠나야 할 쪽은 아파르트헤이트 당국이란 소리. 이를 두고 유대계 여성 운동가이자 반아파르트헤이트 투사였던 루스 퍼스트(Ruth First)는 자신을 심문하는 아프리카너 경찰들에게 "브람 피스허르는 내 소중한 친구이자 동지이며, 정말 멋진 사람이다. 무엇보다 당신들 아프리카너란 종족 전체의 오명을 뒤집어 쓰고 이를 깨끗히 하는 아프리카너의 마지막 양심이다" 라고 평했다.

역시 남아공 공산당의 간부였던 조 슬로보(Joe Slovo)와 루스 퍼스트도 유명한 편인데 이 둘은 부부로 활동하다가 루스는 1982년 모잠비크 인민공화국에서 남아공 경찰이 보낸 편지 폭탄[54]을 받고 사망했고 조 슬로보는 아파르트헤이트 폐지 후 넬슨 만델라 정부에서 주택부 장관에 임명되는 등 고생 끝에 보상을 받는 듯했으나 퇴임 직후인 1995년 암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이 둘의 생애는 1988년 조와 루스의 자식인 숀 슬로보(Shawn Slovo)가 각본을 쓴 '갈라진 세계(A World Apart)'[55]를 통해 영화화되었다.

영화 감독인 얀스 라우턴바흐(Jans Rautenbach)가 아프리칸스의 정체성과 흑백혼혈에 대한 영화를 많이 발표했는데 대표적인 작품이 디 칸디다트(Die Kandidaat, 1968)[56], 카트리나(Katrina, 1969)[57]로 현재까지 남아공 영화사에 남아 있다.

1970~80년대 들어 대외적으로 남아공 정부는 로디지아 전쟁, 나미비아 독립 전쟁, 앙골라 내전 같은 주변의 냉전의 대리전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고 남아공 정부 반대편에는 쿠바소련의 지원을 받는 좌파 민족주의 게릴라들이 있었기 때문에 매카시즘 공안 정국을 유지했다. 상술된 조 슬로보, 브람 피스허르 같은 진성 좌파 반아파르트헤이트 인사들이야 도덕적 명분은 둘째치고 어쨌든 법적 기준으로는 분명히 적성 외부 세력과 깊게 협조하는 이적단체 소속이라서 때려잡을 수 있다고 쳐도 냉전기 전체주의적 독재 국가들이 그랬듯이 여기서도 좌파나 남아공 내외의 게릴라들과 전혀 상관없는 자유주의 계열 백인 정치 세력도 탄압했다. 웨스턴케이프의 주지사이자 최근까지 남아공 제1야당인 민주연맹의 당수였던 헬렌 질은 당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다 1977년 흑인 민족주의 사상가이자 반아파르트헤이트 혁명가였던 스티브 비코가 불법 체포 후 구타당해 죽은 사건[58]을 취재하다가 높으신 분들의 압력으로 사퇴해야 했고 이후 반아파르트헤이트 여성 단체에서 활동하다 당국에게 찍혀서 도주 생활을 해야 했다. 심지어 당시 자유주의 계열 거대 야당의 지도자격 인물들로서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백인들의 입장을 대변했던 해리 슈바르츠(Harry Schwarz), 헬렌 수즈만(Helen Suzman) 같은 전국구 정치인들도 도청, 감시 등의 당국의 위법적인 방해와 탄압에 자유로울 수 없었다.

국민당이 집권 초기 주 유권자로 노렸던 백인 청년층 역시 세월이 지나면서 아파르트헤이트를 달갑게 보지만은 않았다. 이유는 당시 남아공이 징병제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아공의 징병제는 백인 남성만을 2년여간 의무적으로 징병했으며 아파르트헤이트를 공고히 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이용되었다. 이 때문에 아파르트헤이트를 반대하는 백인 징집병과 그들의 가족 사이에서 징병제를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병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특성상 징집병 역시 최전선에 투입되기 일쑤였던지라 이 당시 징병된다면 나미비아/앙골라로 끌려가 베트남 전쟁이나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체첸 전쟁처럼 진짜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또한 징집이 해제된 후에도 예비군에 복무하며 주기적으로 소집되었는데, 소웨토 항쟁이 터진 후에는 그 준전시 상태 소웨토에 들어가 무기를 든 시민들과 전투를 펼쳐야 했다. 징집을 거부한다면 당연히 징역형, 그것도 상술한 1963년 법 개정으로 한 번 구금되면 법무장관 마음에 따라 언제 풀려 나올지 모르는 징역형이 기다리고 있었다. 양심적 병역 거부 역시 인정되지 않아 최대 6년의 징역을 살아야 했다. 때문에 많은 징병 대상자들이 국외로 도피하여 망명했다. 남아공에서 태어나 거주하고 있던 일론 머스크도 이 때 징병을 피하기 위해 1989년 캐나다로 이주하였다. 남아공의 징병제는 아파르트헤이트가 폐지된 후 같이 폐지되었다.[59]

물론 인력제한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백인들만으론 주류 보어인과 은근히 2등 시민 취급하던 영국계, 유대계를 다 합쳐도 광범위한 지역과 인구를 모두 통제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군대나 경찰이나 흑인이나 남아시아계, 말레이계 등 비백인들의 입대/입사를 막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가끔 1980년대의 남아공 영상에서 비백인 군인/경관을 보며 비백인도 군경으로 채용하는 그 시절 남아공이 얼마나 민주적이었냐고 설파하는 사람들이 보이는데, 정작 당시 남아공 정부는 본인이 자원입대/자원입사를 원한 비백인들에게도 제도적으로 입대 제한을 주면서 대놓고 배척했다. 일반적으로 남아공 방위군과 반투스탄 괴뢰군의 고위 장교는 콩고 독립국이 그랬듯 전부 백인들이 맡았으며, 승진 기회와 급여 등에서 비백인들은 백인과 비교해 차별을 받았다. 군 성립 초기에는 거주 지역 내에서만 활동하도록 제한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비백인이 제대로 된 직업 갖기에도 힘들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적지 않은 수의 비백인들이 안정적인 수입을 얻기 위해 군경에 입대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조치도 부족하다 느꼈는지 1985년에는 요한 샤보르트(Johan Schabort) 교수에 의해 백인해방운동(BBB, Blanke Bevrydingsbeweging)이라는 네오나치 테러조직이 결성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이들은 87년부터 공개적으로 조직원을 모집하거나[60] 아프리카너 저항 운동과 함께 당시 슈판다우 교도소에서 자살한 나치 전범 루돌프 헤스를 추모하는 집회를 열기도 했다. 아파르트헤이트를 유지하기 위해 그 숱한 인권 탄압과 국가 테러를 저질렀던 당시 피터르 빌럼 보타 행정부도 이들에 대해서는 기겁하며 BBB를 1988년 테러조직으로 지정했다. 이는 남아공 내 극우 조직에 대해서는 최초로 행해진 조치였다. 당시 법무장관 아드리안 플록(Adriaan Vlok)은 이들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면서 "폭력을 선호하여 인종차별을 극단으로 몰고 가는 우익 광신적 극단주의자"라고 지칭했다. BBB는 이후 백인민족운동(Blanke Nasionale Beweging)이라는 위장단체를 세워 활동하려 했으나 말 그대로 기존 BBB가 이름만 바꾼 수준이었기 때문에 1989년 또 금지당했다. BBB에 대한 금지는 1990년 해제되었다. 남은 BBB 회원들은 조직을 계속 이끌어 나가고 국가사회주의당(NSP)이라는 하부 조직을 또 만들었다. 1991년에는 NSP 당원들이 루이 트리샤르트에서 흑인 3명을 살해하여 체포되었고, 1994년에는 BBB 소행으로 보이는 폭탄 테러가 일어났으나 샤보르트는 이를 부인했다.

이외에도 1988년에는 백인 우월주의 테러리스트인 바런트 스트레이돔(Barend Strydom)이 프리토리아 스트레이돔 광장에서 총기난사를 벌여 8명이 사망하고 16명이 부상당했다. 사망자 7명은 흑인, 1명은 인도계였다. 스트레이돔은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1992년 데 클레르크 행정부에 의해 '정치범'이라는 이유로 석방되어 진실화해위원회에 의해 사면되었다. 이는 당시 로버트 맥브라이드(Robert McBride) 등의 석방으로 인한 백인 계층의 민심 이반을 막기 위한 일종의 유화책이었다.[61] 스트레이돔은 원래 경찰이었으나 자동차 사고 현장에서 과 흑인 운전자의 잘려나간 머리를 들고 찍은 사진으로 인해 해고되었다. 당시 남아공 경찰이 어떤 조직인지 생각하면 스트레이돔의 행동이 그 때 당시 기준으로도 한참 선을 넘었음을 알 수 있다.

5. 폐지 후의 잔재

넬슨 만델라에게 있어 평생의 타도 대상이었으며 결국 그의 당선과 함께 아파르트헤이트도 막을 내렸다. 그러나 너무 오래 지속된 정책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그 잔재가 말썽을 일으키고 있다.[62]

흑인과 백인은 평등해졌지만 아파르트헤이트 때문에 자산도 없고 교육도 받지 못한 흑인들은 여전히 가난했다. 그 결과 남아공은 세계 최악의 빈부격차를 자랑하는 국가가 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가 무너지기 직전인 1980년대부터 상당수의[63] 남아공 백인들이 타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1990년대에는 흑인정권의 보복을 두려워해서라면 2000년대 이후에는 해외에서 양질의 일자리를 구하려는 목적이 강하다. 호주, 뉴질랜드뿐만 아니라 언어적으로 비슷한 영국, 아일랜드, 캐나다, 미국, 네덜란드, 벨기에, 스페인, 그리고 폴란드, 러시아, 아르헨티나, 브라질, 멕시코, 조지아[64] 등으로 이민 간 사람들도 있다.[65][66] 그리고 20대 백인들은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로 원어민 강사 일을 하러 많은 수가 이주했다.[67][68]

사실상 아파르트헤이트가 단순 차별을 넘어서서 경찰이나 자경단의 잔학행위도 수반했기 때문에 보복이 두려웠던 건 사실이었다. 문제는 그것이 일부 계층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만델라조차도 "용서하되 잊지는 말자"라는 구호 아래 "잔학행위도 솔직히 공개적으로 자수하면 봐 주겠음" 하는 식으로 나갈 정도였다.

아파르트헤이트의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는 국민당은 노선을 전환하고 1997년에 신국민당으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1999년 총선에서 당세를 크게 잃고 궁여지책격으로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의 야당인 민주당[69]과 합당하여 민주동맹을 창당했다가 얼마 가지 않아 다시 분리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다가 결국 2005년에 아프리카 민족회의에 흡수되어 해산되었다. 이들로부터 갈라져나왔던 재건국민당(HNP)은 군소정당으로 간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와 별개로 2008년 8월에는 극우 포퓰리즘 정당으로 이름이나마 부활했다. 하지만 비백인 유권자들의 거의 다수를 적으로 돌리고 있고 백인들조차도 대부분이 민주동맹에 표를 던지는 만큼 그냥 듣보잡이었다.

한편으로 흑인들이 정치적인 기득권을 차지하면서 다른 의미로 남아공이 개판이 되었다는 얘기[70]도 많다. 1994년 이후 남아공에선 새로운 다른 3,000만의 국민을 먹여살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으며[71] 경제성장률은 1980년대에 비해 오르기는 했지만 재정건전성에 신경쓴다고 예산 지출을 대규모로 하거나 하지는 않았기에 높지는 않아서 대규모의 일자리 창출을 하기에 충분치 않은 수준이었다.[72] 당연히 대도시 지역에서 실업자가 급속히 불어나면서 범죄율이 크게 높아졌고 그 여파로 백인 중산층들이 대거 교외지역으로 빠져나가면서 요하네스버그나 프리토리아 등 주요 대도시의 중심가는 슬럼화가 가속화되었다는 것.

거기다가 흑인 우대 정책(BEE:Black Economic Empowerment)으로 인해서 백인들이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어졌고 백인들의 유출이 가속화된다는 것이고 백인 빈민층이 40만에 달한다는 등[73] 문제가 심하다. 그리고 남아공 경제의 근간이 되는 전력사업이나 공공교통, 통신사업 등이 ANC 출신이나 그 지인들로 채워졌고 아파르트헤이트 재현은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절대 백인은 최고경영자 자리에 오르는 경우가 없지만 실력보다는 인맥으로 인사가 진행되고 경영이 이뤄져 부실화된 경우가 다반사였다.

사실 아파르트헤이트가 반 세기에 가깝게 길어지면서 경제 및 과학에 뛰어난 전문지식을 갖춘 흑인은 거의 전무했다. 새 남아공의 기득권은 절대다수가 민주화 투쟁 경력만 있는 사람들이어서 전문성이 극히 부족했고 거기에 그동안 고생 좀 했으니 이제 좀 누려도 되는거 아니냐는 식의 멘탈리티가 사회지도층은 물론 일반 흑인 서민들한테도 팽배해 있다.[74] 이렇게 하여 민주화된 남아공은 아파르트헤이트 때 이상으로 부정부패가 심각해졌지만 그나마 제이콥 주마를 거처 시릴 라마포사 시기에 접어들자 아파르트헤이트를 시작부터 직접 피부로 겪은 노년층들이 사망하면서 반 ANC 감정이 90년대 이후 태생의 젊은 세대로부터 팽배해졌고[75][76] 나름 형식적으로나마 부정부패 해소 및 관련 인물들의 처벌이 2020년에 벌어졌지만 한편으로는 투쟁 시기 원로들[77]로부터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서던 우국지사들을 박대하냐는 비난도 받았다.

또 반투스탄을 다시 남아공에 흡수하는 과정에서 반투스탄 지역의 공무원들[78]이 구조조정되는 일 없이 그대로 남아공 공직사회에 흡수되면서 남아공 공직사회의 부패에 기여했고 더군다나 BEE가 시행된다고 한들 백인은 백인대로 불만을 가지고 흑인들 중 빈민층은 여전히 낮은 교육 수준을 지니고 있기에 기회가 돌아가지 않는 건 마찬가지다.[79]

남아공은 1994년 이후 아프리카화가 급격히 진행됐는데 그러다 보니 아프리카에서 가장 튼튼한 경제기초를 갖춘 남아공인 만큼 국경이 열리자마자 타 아프리카 국가에서 기하급수적으로 이민이 늘었고 이들은 대부분 저학력 막노동자들이라 요하네스버그와 더반 등 대도시에서 하류층을 이루게 된다. 물론 남아공 내에도 거의 외국인 취급받던 반투스탄과 타운쉽 인구가 많았지만 외교에서 신생 흑인 정부가 타 아프리카 국가들을 의식하지 않고 가려 받을 상태가 아니었고[80] 더군다나 행정력의 마비가 있어서 불법 이민이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특히 위의 짐바브웨가 1990년대 이후 막장화가 가속되자 수많은 사람들이 남아공으로 월남했고 이들은 불법 이민자들이 대부분이라 3D 업종을 차지해 기존 남아공 흑인들을 밀어냈다. 당연히 현지인들과 사이가 좋지 않아 번번히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남아공 내 타 아프리카 국가 출신 흑인들도 마냥 당하지만은 않았다. 일례로 극악의 범죄율로 악명높은 요하네스버그 다운타운의 경우 가장 강한 갱 세력이 나이지리아 출신이었고, 남아공 흑인들이 반 외국인 제노포비아 성향의 폭동을 일으키면 비교적 소수더라도 맞서 싸우는데다 본국에서도 이에 대응해 반 남아공 운동이 일어난다. 그래서 아파르트헤이트 종결 이후 이웃 국가들과의 관계 회복이 현재 여러모로 남아공 정부 및 사회에 근심거리가 되고 있다.

더군다나 전력 같은 걸 민영화한다거나 파업 강경 진압 드립을 치고 노조와 공산당과 연합하면서[81] 정권을 잡고 있는 주제에 최저임금도 정하지 않기 때문에 일반 흑인들은 여전히 먹고 살기 힘들다며 불만이 강하고 BEE로 새로 등장한 흑인 중산층 입장에서도 잘 먹고 잘 사게 되었다지만 치안이 열악해서 길을 마음대로 돌아다니기 힘들고, 대학 등록금도 비싸서 자식들을 제대로 공부시키는 건 물론이고 취업해도 월급이 적다며 불만이 많다. 요약하자면 극심한 탄압이 폐지되고 자유를 제한하는 조치도 없어졌다지만 흑인, 백인, 컬러드, 아시아계 어느 하나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위에 나오는 불만이나 현상의 원인은 사실 ANC 정부의 무능이 원인이다. 만델라 시기야 아파르트헤이트의 후유증과 경험 미흡, 국민당과 인카타 자유당과의 연정, 과거사 청산 등으로 인해 여러모로 복잡한 사정이 많아서 그렇다지만[82] 타보 음베키 때부터 그 문제점이 여실히 드러나기 시작해 경제는 성장했지만 이 시기를 기점으로 부패가 횡행하기 시작하고 인프라 공사의 구축도 늦어지는 일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경제성장의 과실이 골고루 돌아가지 않으면서 흑인들 사이에서의 불만이 팽배해지기 시작했고 그 악명 높은 요하네스버그 가이드라인이라던가 흑인들이 백인 농장을 습격해 인종범죄를 저지르는 등 치안 문제도 해결되지 못했다. 여기에 BEE의 실행으로 백인층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커졌고 음베키의 대안으로 집권한 주마도 애당초 백인들에게 상당히 적대적인 언행을 보여 온 데다가 집권 후에 공약(부의 재분배)을 지키지 않았고 치안 문제는 상당 부분 해결되었다지만[83] 경제는 원자재 값 하락의 여파로 침체일로에 있고 그 자신도 부정부패를 일삼으면서 흑인도 백인도 만족하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것. 애초에 아파르트헤이트는 절대적인 수적 열세 세력이 절대다수 위에 군림한다는 존립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운 체제였고 결국 멸망이 당연했지만 ANC를 비롯한 남아공 민주세력의 정권 이양 및 인수인계 준비도 전혀 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동안 고생한 게 있으니 꿀 좀 빨겠다는 식의 멘탈리티가 사회의 제일 높은 곳으로부터 낮은 곳까지 팽배해 책임감보단 탐욕으로 점칠된 국가경영이 발현되었고[84] ANC 스스로도 갈수록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다.

따져보면 요하네스버그 가이드라인이라는 도시전설은 아파르트헤이트가 초래한 최악의 괴담이다.

아파르트헤이트가 폐지된 현재는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거주 구역/지역 등에 전혀 구애를 받지 않으나, 아직도 대도시 혹은 근교 위성도시 지역에 백인, 비백인, 흑인 구역을 분리시켰던 흔적과 잔재가 남아있다. 굳이 남아공에 가지 않더라도 구글맵으로 대략적인 유추가 가능한데, 집 위치 및 외관이 깔끔하게 정리된 지역들은 백인 구역, 도로망은 깔끔하게 정리된 계획도시인데 집 배치 구조가 좀 정돈되지 않고 어질러진 부분이 있으며 외관이 깔끔하지 않고 좀 낡아서 소위 "못 살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살고 싶지 않을 법한" 곳이라면 컬러드 구역, 그리고 지명이 흑인 토착언어로 되어 있고 도로망도 정돈이 안 되어있고 위에서 봐도 너무 슬럼 같은 곳은 흑인 구역이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지명이 유럽계 언어로 되어 있다고 해서 백인 구역이라고 마냥 단정을 지을 수는 없는데, 비백인 구역들도 종종 네덜란드어로 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비백인이라도 구 백인 지역에 문제 없이 거주하거나 돌아다닐 수 있는 오늘날에는 구 백인 구역에 가더라도 흑인 및 비백인들 위주로 보일 지경이지만, 그 반대로 구 비백인 혹은 흑인 구역은 비록 남아공 인종 구성 비율을 고려하더라도 백인을 찾아보기 매우 어렵다. 아직도 구 흑인 구역들은 열악한 슬럼으로 방치된 곳이 한둘이 아니며 인프라가 처참한 수준이 아니라 각종 전염병이 창궐하고 온갖 범죄가 판을 치는 탓에 경제력이 꽤 되는 사람이라면 이런 곳에 오고 싶을지 생각해 보자. 다만 요즘에는 얘기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데, 이러한 구 흑인 구역들은 그야말로 재개발 열풍이라,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서서히 탈바꿈하는 중이다. 어떻게 보면 "흔적 지우기"가 아닌가 싶지만 아파르트헤이트 자체가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흑역사인 탓에 이런 흔적을 남겨두는 것이 좋을 것도 없다.

5.1. 종교 분야

남아공 개혁교회도 한동안 인종차별과 사회 분열을 조장한 종교적 배후 세력이었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으며 당연히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이후에는 신자 수가 감소하고 몰락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이후에는 그 시절에 대한 반성으로 비백인 신자를 적극적으로 포섭하여 겨우겨우 남아공 최대의 개혁교단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다만 이러한 경향을 자유주의 신학이란 핑계로 물고 늘어진 일부 백인들은 아프리카너 개신교회(AP Kerk)라는 백인 전용 교단을 만들어서 분리했다.[85]

현대 남아공은 과거와 달리 백인들은 네덜란드나 영국 본토처럼 무종교인이 늘어나서 더 이상 젊은 교인들은 증가하지 않으며 사실상 백인계 기독교는 멸망했다고 보는 추세라는 말도 있으나, 보수적인 보어인과 위그노 문화, 그리고 여전히 결속된 이들의 공동체로 인하여 보어인 그리고 혼혈 컬러드계는 아파르트헤이트 도입 훨씬 전인 네덜란드령 시절부터 영향력이 강한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기에 여전히 신자 수가 만만치 않은 편이다.[86] 특히 옛 트란스발 주나 오렌지 자유주의 시골이나 교외 지역으로 가면 그 세가 절대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영국계의 이민등으로 인하여 영국계 성공회는 멸망하는 것이 확실하다. 반면 흑인 기독교인들은 만델라와 데즈먼드 투투라는 구심점이 있었고 신심이 대단해서 증가하는 추세다. 그렇지만 흑인 사회의 기독교는 토착종교와 사이가 극히 나빠 예배당 테러나 청부살인 등이 간혹 벌어지기도 한다.

5.2. 기술 분야

남아프리카 항공에 아직도 A340 기종이 많고 한때 보잉 747 기종이 많았던 것도 아파르트헤이트의 잔재이다.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이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항의로 남아프리카 항공에 대해 항로를 열어주지 않았고[87] 이로 인해 남아공에서 인도/홍콩 등지로 가기 위해서는 인도양을 건너야 했다.[88] 또한 남아공에서 서구권으로 가기 위해서도 아프리카 대륙을 거치지 않고 대서양으로 빙 둘러서 갔다는 것. 당시 ETOPS 규정이 매우 빡빡하여 대양을 건너거나 가로지를 경우 쌍발기로는 이동할 수 없었다. 따라서 남아프리카 항공이 수요가 나지 않는 구간을 운항할 때에도 대형기를 사용하였으니 대형기를 선호했다는 것은 아파르트헤이트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남아공은 현재 전 세계 최고 수준의 석탄석유화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것도 아파르트헤이트의 산물이다. 석탄을 원료로 하여 각종 탄화수소(즉 석유)를 얻는 공정인 피셔-트롭슈 공정은 꽤 오래전인 1923년에 개발된 공법이고 2차 대전 말기 독일의 석유 공급을 지탱하기도 했지만 이후 유전이 활발히 개발되어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반응식만 남은 채 사장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제재로 석유를 대량 수입하기 어렵던 남아공만큼은 이 기술을 적극적으로 연구해 석유 수요의 상당 부분을 석탄석유화 공정으로 조달해 왔기 때문에 기술적 노하우가 계속 축적되어 이 분야에서 거의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을 갖추게 되었다.

5.3. 군사 분야

무기 시장에서도 남아공은 독자적으로 나름 견실한 무기들을 자체 개발해 생산하는 것으로 나름 명성이 있는데 이것도 아파르트헤이트가 낳은 것이다.[89]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국제사회로부터 왕따를 당해 왔으니 성능 좋은 무기를 외국에서 수입해 올 수가 없어 거의 모든 무기를 자체개발하거나, 기존에 운용하던 구식 무기를 개량해서 충당해야 했던 것. 더불어 소수의 백인만으로 군대를 편성해서 넓은 국경지대를 방어해야 했기 때문에 남아공군은 각종 차량을 이용하는 기계화가 잘 되어 있고 전투원의 생존성을 매우 중요시하게 되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남아프리카 공화국군 항목 참조. 상기됐듯 10%가 나머지 90%를 무력으로 짓누르는 걸 몇십년 동안 하다 보니 용병과 보안업체 등의 산업은 전세계 최고 중 하나지만 그 말인 즉슨 남아공에 무기가 관리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많이 풀려 있고 범죄율도 그만큼 높다는 소리이다.

민간군사기업(PMC)의 효시이자 PMC를 처음 대중에게 알려서 관련 업계에서는 나름 유명한 'Executive Outcomes(EO)'라는 회사도 남아공에서 나온 PMC였다. 아파르트헤이트 폐지 이후 인력 감축으로 일자리를 잃은 이븐 바로우(Eeben Barlow)를 비롯한 당시 남아공 국군 남아프리카 방위군(SADF)[90] 특수부대 출신 인원들이 EO를 결성했는데 이때 만델라의 거국적 화해로 똑같이 일자리를 잃은 ANC-남아프리카 공산당 산하 무장단체 민족의 창(Umkhonto we Sizwe) 인원들과 해임된 남아공군 장병, 쿠푸트, 민사협력국, 그리고 코사족 세력인 아잔 인민해방군(APLA, 혹은 포코(Poqo)) 출신들을 대거 영입했다.[91] 이 때문에 EO는 소련 붕괴해당 지역 출신들이 대거 들어오기 이전까지 한때 서로 죽이고 싸웠던 세력들이 한 지붕 아래 한솥밥을 먹는 특이한 광경이 연출되게 되었다. 하지만 원래 있던 일자리를 잃었다는 동질감 때문인지 이들의 전우애 자체는 매우 끈끈했고 이는 이들이 시에라리온 내전앙골라 내전 등지에서 활약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EO는 남아공 군경 복무 당시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한 때 적이었던 앙골라 해방인민운동(MPLA) 측에서 싸웠는데, 1992년 선거 결과에 불복하고 또 반란을 일으킨 앙골라 완전독립 민족동맹(UNITA)을 진압하기 위해 앙골라 인민공화국 측에서 이들을 고용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MPLA는 탈공산주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어디 출신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외에도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정부와 드비어스, 리오 틴토, 쉐브론, 텍사코 등 다양한 다국적 기업이 이들과 계약을 체결했다. 영국의 다른 PMC이자 마찬가지로 남아공 출신들이 많이 입사한 샌드라인 인터내셔널과도 연계되어 있었다. EO는 자신들을 사칭하여 활동하는 남아공 기업들이 너무 많아지자 자기들이 앞장서서 민간군사기업 규제 시행을 독려하고, 규제 법안 통과에도 적극 찬성했다. EO는 1998년 해체했다.

5.4. 스포츠 분야

남아공의 고립은 스포츠 분야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1960년대부터 30년간 국제 경기에 출장 금지. 남아공이 낳은 세계적인 육상 천재 졸라 버드(Zola Budd)가 영국으로 귀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오랜 고립으로 인한 경험 부족 탓에 남아공 스포츠계의 질적 저하도 문제가 되고 있다. 특히 축구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는데, 1996년 자국에서 치른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는 우승을 달성했고 1998년 부르키나파소 대회에서는 준우승을 기록했으며 1998년 프랑스 월드컵2002년 한일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하였으나, 2006 FIFA 월드컵 독일에서는 예선에서 탈락하였다.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같은 해에 열리는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예선과 겸하는 바람에 불가피하게 월드컵 2차 예선에 진출하였고, 한물간 나이지리아에게 패하고 탈락했지만, 개최국 자격으로 월드컵에는 자동으로 참가했다. 하지만 여기서도 개최국의 이점을 살리지 못하고 1라운드에서 탈락하면서 개최국이 2라운드에 진출 실패한 최초의 사례를 남겼다.[92] 게다가 2014년 월드컵에서는 한 술 더 떠서 1차예선부터 올라온 초약체 에티오피아에게 밀리고 탈락했다.[93] 에티오피아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잡고 FIFA 랭킹이 50계단 이상 상승했다. 이후 2018 월드컵 예선 때도 최종 예선에서 조 4위 꼴찌를 차지하여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실감케 하였다.[94]

다만 축구와 더불어 가장 인기있는 3대 스포츠 중 나머지인 럭비크리켓의 경우 세계구급 강자이며 럭비는 아예 럭비 월드컵 우승 4회로 럭비 월드컵 최다 우승국이다.[95] 아무래도 축구에 비해 타 국가들과의 교류가 활발했고 특히 두 종목의 종주국인 영국과는 아파르트헤이트 극후반인 1980년대 후반까지 교류가 있어 축구에 비해 피해가 덜했고 오히려 발전할 수 있었다. 반면 축구는 백인이 아닌 흑인 위주의 스포츠였고 현재도 그러하여 남아공 축구 국가대표팀에 백인이 뽑히면 실력과 상관없이 희귀성으로 스타가 되는 경우가 많기에 앞서 언급된 럭비나 크리켓과는 달리 발전 가능성이 몹시 낮은 상태이다.

앞서 언급했듯 아파르트헤이트의 여파로 인종별로 선호하는 스포츠가 분리되어 있는데, 가장 인구 비율이 높은 흑인은 축구, 백인은 럭비, 대부분이 인도계인 아시아계는 크리켓을 가장 선호한다고 한다. 이 때문에 외국에 나와 있는 남아공인에게 ‘남아공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스포츠가 무엇인가요?’라고 묻는다면 인종별로 대답이 갈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6. 기타

  •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 남아공에서 흑인들이 반 아파르트헤이트 항쟁을 벌였을 때 자신들이 백인에게 당한 수모를 그대로 백인들에게 돌려주자는 감정이 그들 사이에 팽배해 있었다. 이드리스 엘바 주연의 만델라: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2013년작)을 보면 반 아파르트헤이트 시위에서 죽은 아들의 시체를 끌어안고 오열하는 흑인 여자가 넬슨 만델라의 부인인 위니 만델라에게 꼭 복수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한다. 물론 아들의 죽음에 충격과 분노가 커서 나온 말이겠지만 당시 흑인들 사이에 이런 분위기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델라와 데즈먼드 투투 주교 그리고 F.W. 더클레르크가 노벨상을 받은 이유 중 하나가 이런 상황에서 흑인들에 의한 대(對) 백인 테러와 폭력을 어느 정도 막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 디스트릭트 9은 남아공의 인종차별을 비판한 영화이다. 실제로 당시 백인들이 흑인을 대한 태도는 일반적인 인종차별적인 생각인 '더럽다, 하층민'의 수준이 아니었고 인간의 형태는 갖추고 있지만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 정도의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기에 영화적으로 차별 대상을 외계인으로 설정한 것. 앞부분에 장황하게 나오는 외계인의 범죄나 두려움에 대한 다큐는 실제 나이지리아 입국자 및 흑인들에 대한 백인들의 다큐에서 따 왔다. 그리고 케이프타운 인근에 나이지리아에서 건너온 흑인들이 모여 사는 슬럼가가 있었는데 도시가 커지면서 그곳이 노른자 땅이 되었고[96] 백인들은 여러 민족이 모여 사는 그곳을 '여러 민족이 교류하면 다툼만 일어날 뿐' 이라면서 강제로 백인 거주지로 설정하고 기존 주민들을 몰아내었다. 그곳이 바로 디스트릭트 6. 작중에서 나이지리아 갱들이 여기서 활개치는 것도 그 때문이다.
  • 역설적이지만 최근 흑인 우월주의 운동 대부분이 흑백분리주의를 주장하고 있다. 당연히 이는 인종이 분리된 상태에서 한 인종이 더 큰 권리를 갖고 다른 인종을 통제하는 사회를 원한다는 점에서 어느 쪽을 지배 인종으로 설정하는지만 제외하면 아파르트헤이트와 일맥상통한다. 마틴 루터 킹이나 로자 파크스 등의 흑인민권운동가들이 인종 분리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투쟁했던 과거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자해 행위가 아닐 수 없다.
  • 유명한 애너그램이기도 하다. 영어 명칭인 The apartheid를 재배치하면 Hit, rape, death(구타, 강간, 죽음)가 나온다.
  • 남아공의 코미디언트레버 노아는 어린 시절 이 아파르트헤이트를 경험한 적이 있어서 공연에서 이를 언급하기도 한다. 트레버는 어머니가 흑인이고 아버지가 스위스계 백인이었는데 위에 나와 있듯이 흑백 결혼은 불법이어서 오랫동안 이를 숨겨야 했다. 심지어 부모와 함께 길을 걷다가도 멀리 경찰이 보이면 어머니와 아버지가 서로 남남인 척 길 맞은편으로 걸어야 했다고 한다.
  •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해 쉽고 자세하게 알고 싶다면 도미니크 라피에르의 《검은 밤의 무지개》라는 책을 읽어 보는 것도 좋다. 1652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일원인 얀 판리베이크의 남아공 도착부터 아파르트헤이트 철폐까지 이야기 형식으로 읽기 쉽게 쓰여진 책이다.
  • 영화 프리즌 이스케이프(Escape from Pretoria)가 1970년대 남아공을 배경으로 줄거리를 진행하고 있다.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반대하는 팀 젠킨 등 두 사람이 각각 프리토리아(Pretoria) 감옥에서 각각 12년, 8년형을 선고받고 탈출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6.1. 창작물

  • 살인의 강: 중3부터 원양어선을 타고 3년간 세계를 돌아다닌 동식(신성록 분)과 고등학교 전교 1등을 하고 있는 승호(김다현 분)가 만나 술자리에서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동식은 남아공에서 흑인들이 백인의 버스를 타지도 못하게 한 목격담을 이야기하고 이를 알고 있던 승호는 곧바로 이를 아파르트헤이트라고 이야기한다. 동식은 한 번도 남아공을 가지 않은 승호가 아파르트헤이트를 알고 있는 것을 신기해한다.
  • BNA: 작중 체제의 모티브를 아파르트헤이트에서 따 왔을 가능성이 있다.
  • 보물찾기 시리즈: 월드컵 시즌에 맞춰 나온 '남아공에서 보물찾기'에서 중요한 스토리적 장치로 작용한다. 과거 어느 백인 기업가 남성과 흑인 노동자 여성은 서로 한눈에 반했지만, 이 시기는 냉혹한 아파르트헤이트가 시행되던 시기였고 끝내 그들의 사랑은 이뤄지지 못했다.[97]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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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인 전용임을 알리는 표지판이다. 사진 기준으로 윗 문장이 영어, 아래 문장이 아프리칸스어 표기이다.[2] 아파르트헤이트를 의도로 만든 것은 아니지만, 현재 남아공에서는 백인 우월주의와 아파르트헤이트 시기의 상징으로 여겨져 교육 및 연구 이외의 사용이 일절 금지되어 있다.[3] 아파르트헤이트 당시에는 부모님 두 명이 같이 다닐 수는 당연히 없었고 어머니와 손을 잡고 걸어다니다 경찰이 보이면 바로 손을 놓고 서로 모르는 척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본인은 "마치 대마초 한 봉지가 된 기분이었죠"라고 회상했다. 남아공은 대마초가 불법이다.[4] 남아프리카식 영어로는 '아파테이드' 라고 발음하며 미국/영국식 영어로는 '아파타이트'라고 발음한다.[5] 이런 아이디어는 '분리하되 동등한(Separate but Equal)'이라고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유지한 적이 있었고 20세기 초반에는 어느 정도 인정받았다. 심지어 저 판결이 나왔을 때 반대했던 사람은 존 마셜 할란이라는 사람 딱 한 명밖에 없었다.(9명 중 8명 찬성, 1명 반대) 그러나 현실에서 인종 분리는 곧 차별과 다를 바 없다는 지적을 받았고 결정적으로 1954년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사건에서 판례가 뒤집혔고 위헌 판결을 받아 폐지되었다.[6] 앨버트 루툴리(노벨평화상, 1960년), 데즈먼드 투투(노벨평화상, 1984년), 나딘 고디머(노벨문학상, 1991년), 넬슨 만델라 & F. W. 더클레르크(노벨평화상 공동, 1993년), 존 맥스웰 쿳시(노벨문학상, 2003년).[7] 아파르트헤이트 철폐를 주도했거나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이유로 노벨상을 받았고 문학상을 받은 2명도 "아파르트헤이트 체제 시절의 남아공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했다"는 이유로 노벨상을 받았다.[8] 남아공은 익히 알려져 있듯이 6.25 전쟁 참전국으로, 휴전 후 대한민국의 최우선 외교 대상이었다. 이들 중 에티오피아의 경우, 훗날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이 일으킨 쿠데타로 한국을 지원했던 에티오피아 제국이 무너지고 친북 공산국가 에티오피아 인민민주공화국이 세워졌음에도 대한민국은 외교 관계를 단절하지 않고 공산 정부가 무너질 때까지 없는 관계나마 계속해서 유지했던 적이 있다. 공산국가임에도 이럴진대 남아공은 참전국에 반공 진영임에도 외교 관계가 칼같이 단절되고 여행금지국으로 지정되는 수모를 겪을 정도로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남아공의 인식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9]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다른 지역과 달리 남아프리카에는 백인들이 아예 눌러앉는 경우가 많았다. 흑백갈등이 유독 남아프리카에서 격렬했던 이유도 이런 환경에서 태어난 남아프리카 토착 백인들의 존재 탓이 컸다. 아프리카의 다른 지역들이야 식민지배가 끝난 뒤 본국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으나 여기 사람들은 아프리카가 고향이었다.[10] 다만 좀 시간이 흐른 뒤에는 그냥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해서 이주한 사람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11] 네덜란드 본토처럼 남아공 개혁교회도 시간이 흐르면서 분열 과정을 겪었고 현재는 크게 3개의 교파로 나뉘어 있다.[12] '아프리카너(Afrikaaner)와 '아프리칸스어(Afrikaans)'라는 말 자체도 아프리카인이라는 뜻에서 나왔다. 그러니까 토착 아프리카 백인이라는 것이었다.[13] 물론 순수한 의도는 아니고 백인들, 특히 보어인들이 상석에 앉아 비백인들을 값싼 노동력으로 부려먹기 위함이었다.[14] 아프리칸스어로는 '퇴위스란트(Thuisland)'라고 부른다. 언뜻 보면 이들의 민족을 침해하지 않고 보호해준다는 듯한 뉘앙스이지만 실상은 도시를 포함한 좋은 땅을 백인들이 다 먹고 나머지 낙후지역을 대충 묶어놓고 격리구역으로 설정해버린 것이었다. 이런 배경을 알고 보면 홈랜드라는 말도 '백인들 사는 도시에서 얼쩡거리지 말고 네 집으로 돌아가라'는 의미로 보이게 된다.[15] 남아공은 외부에는 이것을 긍정적인 정책이라는 듯이 선전하였고 간혹 속아넘어가는 이들도 있었다. 실제로 1980년대에 나온 동아세계대백과사전에는 남아공의 이 정책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 홈랜드가 원주민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별쇄 화보 속의 미소를 짓는 원주민을 보여주면서 설명하는 내용이 나온다.[16] 정확히 말하면 섹스관광, 곧 환락 산업으로부터 얻는 수입이었다. 당시 남아프리카 국민당은 종교와 유착하여 같은 백인에게도 도덕적 엄숙주의를 강요하였으며 인종간 흑백 성관계도 금지되어 있었는데 홈랜드는 명목상 외국이었기 때문에 카지노와 흑인과의 성관계를 즐길 수 있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곳이 보푸타츠와나선시티였다. 결국 반투스탄에는 아비 모르는 흑백혼혈이 넘쳐났고 새로운 사회 문제가 되었다. 그래 놓고 백인 정권은 홈랜드에 사는 흑인들이 가난하고 도박과 섹스에 물든 자들이라고 선전하였다. 당연하겠지만 흑인들을 가난, 도박, 섹스에 몰아넣은 이들이 바로 백인 정권이었다.[17] 단, 일단 국가 체제로 돌아가기는 했기 때문에 당시 브리태니커나 일부 자료에서는 세계의 국기를 수록할 때 이 4개국을 빼놓지 않았다. 홈랜드 깃발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이 링크를 참조할 것.[18] 다만 이들 간의 알력과 내부 정치도 분명히 있어서 1980년대 이후 줄루족계의 잉카타 자유당은 ANC와 대립하기 시작하면서 남아공 정부와 손을 잡았고 총선 실시 과정에서 깽판도 좀 쳤다.[19] 대표적으로 르완다 내전부룬디 내전, 비아프라 전쟁만 봐도 알 수 있다. 식민지 시기 벨기에영국르완다부룬디, 나이지리아에서 저지른 투치족과 후투족, 이보족과 요루바족, 하우사족 간 식민지 내 종족 분열 정책의 여파로 인해 이들의 갈등이 유럽 열강에서 독립 후에 내전으로 벌어진 것이었다. 민주화가 이루어져 아프리카 민족회의(ANC)가 집권당이 되어도 부족간의 반목이 강하다.[20] 정확히 말하자면 줄루족과 코사족의 사이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만델라야 모든 민주화 투쟁을 이끈 영웅이니 부족에 상관없이 존경받았지만 후임인 음베키는 코사족이었고 줄루족으로부터 고까운 평가를 받았다. 전직 대통령들이자 반 아파르트헤이트 투쟁의 공산주의계 네임드였던 줄루족 출신 제이콥 주마와 음베키는 앙숙지간이었다. 2008년 9월 음베키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이듬해 대선에서 주마가 압승함으로 줄루가 정권을 잡은 이후에도 코사와 줄루의 종족 경쟁은 현재진행형이다.[21] 공산국가 동독의 군대였으나 프로이센 왕국군의 전통을 이으려 노력하고 그 시절 군가도 잘 사용하고 다니기도 했다. 그런데도 에리카는 잘 부르지 않았다. 대신 엇비슷한 포지션의 기젤라를 불렀다.[22] 황백혼혈로 자손이 태어나는 순간 그 아이는 바로 '유색인종'으로 분류되었다.[23] 예를 들면 화장실. 맨 위의 사진에서도 나오지만 당시에는 공원 벤치조차 흑인용과 백인용이 따로 있었다.[24] 특히 NBA에서 성공한 농구 선수들[25] 반대로 영국계, 아일랜드계 백인들이 주류였던 옆 나라 로디지아백호주의 시절 호주 자치령에서는 영국계와 아일랜드계가 흑인 및 비백인에 대한 차별을 주도했다.[26] 일례로 보어 전쟁 당시 보어 코만도로 활약했던 군인 프리츠 듀케인(Frederick "Fritz" Joubert Duquesne)은 보어 전쟁 이후 유럽에서 지내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에게 원수를 갚기 위해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후 독일 제국으로 가서 자진하여 간첩 활동을 했다. 듀케인은 독일 제국 해군 정보국(MND, Marinenachrichtendienst)에 들어가 독일과 전쟁 중인 나라들의 상업 교통을 방해하거나 영국 상선과 군함들 위치로 유보트를 유도하여 폭침시키는 등 활약했다. 이후에는 미국으로 가서 살인과 탈옥 혐의로 기소되거나 친나치 단체에 들어가 활동하다가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진 이후 또 나치 독일 아프베어빌헬름 카나리스와 접촉하여 노든 폭격조준기 청사진을 훔쳐내는 등 자진 간첩 활동을 했다. 2차 대전 당시의 간첩 활동은 스케일이 더욱 커져 아예 자신이 미국 내 간첩단을 진두지휘하며 활동했다. 이 간첩단을 이른바 듀케인 간첩단(Duquesne Spy Ring)이라 한다.[27] 특히 리투아니아 지역에서 많이 이주했다.[28] 상대적으로 온건하긴 했으나 남아연방 시절부터 내려온 인종차별 정책을 펴는데 기여한 정당이라 비백인들에게는 마찬가지로 별 인기가 없었다. 그럼에도 아파르트헤이트의 확대에는 열렬히 반대하였다. 50년대 초반 선거에서는 국민당보다도 많은 득표율을 얻었으나 국민당의 게리맨더링으로 패배하고, 이후 남아프리카 노동당과 연립하여 또 많은 득표율을 얻었으나, 이번에도 국민당의 게리맨더링으로 패배한다. 국민당은 이후 눈엣가시였던 연합당을 갖은 편법을 통해 한낱 구색정당으로 만들어 몰락시킨다.[29] 보어인에는 네덜란드계만 있던 것이 아닌지라 네덜란드계와 비슷하게 정착한 독일계, 위그노계 백인들은 전부 보어인으로 쳐 줬다. 보어인들이 나치 독일에 더 친밀함을 느낀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30] 모슬리는 이에 남아공에 두 번째 세포조직을 운영하기도 했다.[31] 남아공군이 백인들만 징집했기 때문에 징집 병력을 유지하려면 영국계, 유대계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32] 그 중, 대표적으로 헬렌 수즈만이 리투아니아계 유대인 출신이라 남아공 내 반유대주의와 함께 고통을 겪어야 했다.[33] 대표적으로는 레바논인마론파들. 사실 이들은 문화적으로도 아프리칸스어나 영어를 사용하는 등 남아프리카 사회에 잘 동화되어 있었다. 또한 이란인과 레바논인들은 원래도 코카소이드가 맞다.[34] 특히 당시 남서아프리카에 거주하던 독일계, 보어계 백인들의 표.[35] 그러나 당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로디지아를 인정할 경우 국제사회로부터 고립이 더욱 심화될 것을 우려해 로디지아를 정식 국가로 인정하거나 공식적으로 수교하지 않았다. 다만 두 나라 모두 아프리카와 국제사회에서 시대 역행과 흑인 인종차별 정책으로 고립된 왕따 국가 처지였는지라 사실상 실체를 인정해 대표부를 만들어 협력, 지원했다.[36] 이건 이웃의 백인 국가 로디지아 역시 마찬가지로 바로 옆의 모잠비크가 포르투갈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포르투갈을 지원했고, 이후에도 모잠비크 민족저항운동(RENAMO)이라는 우익 반군조직을 로디지아 중앙정보기관(CIO) 주도로 의도적으로 조직하여 모잠비크가 성장하는 것을 방해하도록 내부 혼란을 부추겼다.[37] 사실 당시 다른 서방 국가들도 자국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인종차별 정책을 펼치지 않았을 뿐이지 사회적인 인종차별 수준은 남 말할 처지가 아니었으며 특히 미국은 남부맹방이 멸망하고도 한참이 지난 1960년대까지 미국 남부뿐만 아닌 미국 전역에서 흑백분리와 같은 제도적 인종 차별이 살아 있어 흑인 민권 운동이 한창이었다. 짐 크로우 법이 폐지된 것이 1964년이고, 짐 크로우 법이 폐지된 이후에도 썬다운 타운 등의 형태로 인종차별을 저지른 곳이 남아 있었다. 중국 역시 그 시절부터 티베트위구르, 내몽골에 대한 탄압을 이어나갔고 그 빈 자리에 중앙 한족들을 끼워넣었으며, 문화대혁명으로 나머지 소수민족들의 문화도 구습 타파를 이유로 쓸어버리고 있었다.[38] 역시 포르투갈령 식민지였던 기니비사우는 자국과 거리도 멀고 이익도 되지 않는다는 판단으로 인해 지원을 하지 않았다.[39] 특히 마가렛 대처.[40] 정확히 말하면 암묵적 지지와 제재를 왔다갔다 하는 수준[41] 사회적으로는 남아공이 흑인,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들 컨트롤에 애를 먹는 동질감이 있었고 둘 다 제2세계, 특히 소련하고 아주 사이가 엿같아서 국제 사회에서 제재를 당했다는 데 있다. 여기에 1970년대 유엔에서 나가 외교적 고립을 겪던 백색 공포 시절의 대만 중국국민당 정권도 1976년 4월 남아공과 수교, 이 유대 관계에 합류해서 이 세 국가 사이 아주 깊은 유대와 연대가 자리하게 된다. 1977년 4월 외무장관에 취임한 피크 보타(Pik Botha)는 취임사에서 "마사다 정신'으로 외부의 적들에게 '항전'할 것"을 국민들에게 호소하기도 했다.[42] 아프리칸스어크로우바라는 뜻이다.[43] 아돌프 히틀러와 같은 악인들의 일화처럼 드 콕도 사석에서는 한없이 친절하고 가정에 충실한 사람이었으며 책임감 있는 가장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품라 마디키켈라의 '그날 밤 한 인간이 죽었다'의 내용에 따르면 드 콕의 가족들은 그가 기소되기 전까지 경찰도 아니고 해외 출장이 잦은 사업가인줄로만 알고 있었다고 한다.[44] 북아일랜드 분쟁에서 IRA얼스터 방위협회를 비롯한 영국 연합주의 민병대 양 쪽에 무기를 거래했다.[45] 드 콕이 윌리엄슨을 팔메 암살의 진범으로 지목했다.[46] 남아공까지 넷 다 종교를 내세우며 자국 내 민주주의를 탄압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스페인은 전통주의 가톨릭, 이란은 시아파 이슬람, 사우디는 수니파 이슬람, 그리고 남아공은 네덜란드 개혁교회를 내세웠다.[47] 반대로 네덜란드 이민자 출신 페르부르트는 나치당과 우생학이 득세하던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수학했음에도 반나치 성향 교수들의 강의를 듣고, 의도적으로 우생학을 멀리하던 청년이었으나 유학 직후 갔다 온 미국에서 짐 크로우 법을 본 이부터 사고방식이 바뀌어 강성한 아프리카너 민족주의자이자 인종차별주의자, 나치 지지자로 전향한 인물이었다.[48] 그러니까 이미 200m 이상 마천루(칼튼 센터. 223m, 50층. 1973년 완공. 2019년까지 남아공 최고층 건물)가 세워지고 보잉 747(남아프리카 항공에서 1971년부터 운용 시작)도 운용 중이던 나라가 흑백 TV조차 없었다는 것이다.[49] 당시 남아공 정부에서 동성애를 교정한답시고 게이, 레즈비언들을 강제로 군에 입대시켰으며 이들은 그 과정에서 온갖 잔혹한 치료 과정을 거쳤고 치료가 더디다고 판단되면 레즈비언에게는 교정강간, 게이에게는 강제 성전환 수술로 강제적 여성화를 자행했다. 이를 '혐오감 프로젝트'(The Aversion Project)라고 명명하며 피해자는 약 9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웃긴 것은 이 프로젝트를 주도한 의사 오브리 레빈은 캐나다로 도피한 후 남성 환자들을 강간한 게 발각되었다. 소도미법은 1996년에 폐지되었으며 현재 남아공은 아프리카에서는 유일하게 동성결혼을 허용하는 국가이다. '국민당 정권 하에 탄압받은 모든 이는 내 형제자매'라는 정치적 합의 하에 아파르트헤이트가 폐지된 후 새로 수립된 헌법에서 모든 종류의 차별을 금지했고 성적 지향도 거기에 포함된 것이다. 물론 지금도 동성애자들이 차별을 받거나 범죄의 표적이 되는 경우가 많지만 개인이 편견을 가지고 차별을 행하는 것과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차별 정책을 운영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50] 1990년대 이후 복권, 경마와 카지노를 전면적으로 합법화했다. 특히 카지노에서 거두어지는 수입이 상당하고 동시에 카지노를 위한 사회간접시설 확충 및 흑인들의 고용창출도 이루어지고 있다.[51] 참고로 남아공에서 1996년에 낙태가 합법화되었는데 임신 13주까지는 본인 선택에 의해서, 이후에는 건강상 문제가 있을 때 허용된다.[52] 다만 정당은 남아프리카당-연합당 계열이긴 하다.[53] 현재까지 몇몇 보어계 극우파들은 희대의 배신자라며 말도 안 되는 고인드립을 치고 있다.[54] 말 그대로 뜯으면 폭약이 바로 터지는 소포 폭탄이다.[55] OST를 무려 한스 짐머가 맡았다. 이 영화를 본 배리 래빈슨의 부인이 그를 레인 맨의 OST 담당자로 추천하면서 지금과 같은 전설적인 작곡가로 떠오를 수 있었다.[56]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초의 정치 스릴러 영화로 알려져 있다.[57] 흑백혼혈과 백인의 사랑을 다룬 영화로 당시 남아공 사회를 생각해 본다면 상당히 파격적인 영화였다.[58] 역시 백인 저널리스트였던 도널드 우즈도 자기 친구였던 비코의 잔인한 죽음을 알리려다 가택연금당했는데 그가 영국으로 망명해서 쓴 책 덕분에 비코의 이름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고 1987년에는 자유의 절규라는 영화까지 제작되었다. 비코 사건으로 인한 파장이 남아공 정부도 감당하지 못할 수준이었던지라 당시 법무부 장관이자 상원 의장이었던 지미 크루거는 사퇴하고 국민당 당원 자격까지 잃었다. 그나마 아파르트헤이트가 폐지되기 전인 1987년에 죽어 법의 심판은 면했지만.[59] 머스크는 원래부터 90년대는 세계가 미국 중심으로 움직일 것이라 확신해서 부친에게 미국으로 이민을 가자고 조르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 시민권 심사에서 탈락되었고 대신 부모 중 하나라도 시민권자면 시민권을 부여하도록 법이 개정되었고, 미국의 법적 배려 등으로 미국에 진출하기에도 쉬운 캐나다로 눈을 돌려 이민에 성공하게 된다. 머스크는 이에 대해 인종 갈등이 만연한 남아공 사회에 강한 경멸감을 느꼈기 때문에 국가를 위하여 군 복무를 하는 것은 시간낭비니 입대하고 싶지 않았다고 밝혔다. 지금이야 극우 행동으로 비판받는 머스크이지만 현재까지도 생각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는지 머스크는 지금도 자기는 그 때의 병역기피 결정은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의도에서 벌인 양심적 병역 거부였기 때문에 양심적이고 좋은 선택이었다고 회고하곤 한다.[60] 주로 보어인을 모집하긴 했으나 네오나치 답게 백인 민족주의를 표방하여 영국계 백인에게도 문이 열려 있었다. 단, 유대계에게는 굳게 닫혀 있었다.[61] ANC와 남아공 공산당의 무장조직 민족의 창(Umkhonto we Sizwe)에서 활동하며 더반 해변 폭탄 테러를 일으킨 테러리스트였다. 테러가 이루어진 이유는 테러 대상인 나이트클럽 마구스 바(Magoos Bar)와 와이 낫 레스토랑(Why Not Restaurant)에 남아공 보안군 장병들이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진실화해위원회에 의해 사면되었으나 위원회는 테러 공격 자체는 분명한 인권침해 행위라고 짚고 넘어갔다. 맥브라이드는 이후 외무부와 경찰 등에서 고위 관료로 재직하게 되나 스트레이돔과 마찬가지로 깨끗한 사람은 전혀 아니었기 때문에 1998년에는 모잠비크에서 남아공으로 무기를 밀수한 혐의로 모잠비크 현지에서 도주하려다 체포되거나 1999년에는 범죄조직 사람 시릴 비카(Cyril Beeka)와 함께 매춘부를 폭행하는가 하면, 2006년에는 음주운전을 하다 걸리고는 해당 지역 경찰들을 시켜 목격자를 폭행하고 누구든 경찰에 신고하는 자는 살해하겠다고 협박하는 등 온갖 사고를 치고 다녔다. 능력 역시 무능하기 짝이 없어 그가 남아공 국가안보국(SSA) 해외지부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에는 마푸토에서의 첩보 작전이 대실패하여 4명의 요원이 모잠비크 당국에 체포되었다가 겨우 송환되기도 했다.[62] 공식적인 폐지는 34년, 사실상 폐지는 30년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아직도 잔재가 남아 있다.[63] 대략 80만 명으로 추산된다.[64] 국가적 차원에서 농업 이민을 유치했다.[65] 1990년대 초반에는 백인 인구가 500만을 넘는 수준이었는데 대대적인 이민과 출산율 저하(2.1명에서 1.8명)로 한때 430만에 못 미치는 수준까지 감소하다가 2000년대 중반부터 다시 인구가 늘기 시작해 2010년대 초반에는 460만 명까지 늘어났다.[66] 대표적으로 1989년 일론 머스크가 징병제와 남아공의 뒤숭숭한 분위기를 피하기 위해 어머니의 고향인 캐나다로 이주했다.[67] 한국 기준으로 남아공은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와 더불어 원어민 교사를 채용하는 국가 중 하나이다.[68] 싱가포르에도 수많은 남아공 출신 영어 교사들이 있는데 주로 국제학교나 학원 등지에서 일한다.[69] 계보상으로 보면 위에 언급된 연합당(UP)계열이다.[70] 다만 여기서 걸러들어야 할 건 있는데 1990년대 이전에도 흑인 거주지의 상황은 애초에 좋지도 않았기에 치안이 좋을 수 없었고 주요 대도시 지역에서도 컬러드와 아시아계의 항의로 인해서 수시로 시위 같은 것이 일어나기도 했다. 단지 흑인이 범죄를 저지르면 혹독하게 처벌하기 때문에 생계형 범죄가 덜 벌어진 것이다. 물론 1990년대 이후에는 대도시 지역의 슬럼화가 가속화되면서 범죄율이 급증했다.[71] 아파르트헤이트 때는 전체 인구의 10%를 겨우 차지하는 백인들이 남아공 영토 대부분을 썼고 거기에 있는 산업시설들도 전부 다 그들만을 위한 것이었다. 나머지 90% 이상의 흑인들은 홈랜드에서 백인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빈약한 인프라로 살았다. 그런데 아파르트헤이트가 철폐되고 나니 10%의 인구를 위한 산업기반을 100%의 인구를 위해 써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72] 아파르트헤이트 이후의 평균 경제성장률은 넬슨 만델라 시기에는 3%대였고 타보 음베키 시절에는 5%대를 기록했고 주마 때 와서는 원자재 가격 하락의 여파로 성장률이 다시 떨어졌다. 서구권 기준에서 볼 때는 높지만 문제는 당시만 해도 남아공의 연 인구증가율이 2%에 달했고 1960~70년대 당시에 출산율이 6명대에 달했기 때문에 노동력 증가율은 5%대에 달하던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교육정책의 여파로 인해서 이들의 교육 수준도 낮았기 때문에 숙련직으로 진출할 기회도 적었으며 주변국에서도 노동자들이 몰려오는 상황인지라 실업률은 전혀 줄지 않았다.[73] 사실 1960년대에 거의 사라졌던 백인 극빈층이 늘어난 건 1980년대에 남아공의 경제제재가 가속화되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에 남아공의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로 떨어지고 흑인들의 저항이 가속화되어 군사예산이 크게 늘어났는데 그 반대급부로 복지예산이 크게 줄어들어서 자연히 백인들에게 제공되었던 복지정책도 급속히 축소되었다. 2등 시민 취급받긴 했으나 그래도 식민지 시절부터 경제권을 쥐고 있던 영국계, 유대계 백인들은 일단 쌓아 놓은 게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빈곤층으로 떨어지는 사람이 적었지만 상대적으로 못 먹고 못 사는 사람이 많았던 보어인들 사이에서 중산층에서 빈민층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이 많았다. 보어인은 만약 흑인정권이 들어서면 더 못 먹고 못 사는 흑인들이 자기들을 제치고 지원 대상이 될 게 뻔했으므로 이들은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보였다. 아파르트헤이트 후반기에 국민당보다 꼴통인 보수당이 원내 2당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백인 빈민층들이 지닌 두려움 덕분이었는데 이들은 흑인 정권이 세워지면 백인들은 쩌리 오브 쩌리가 된다거나 흑인들이 백인들을 강간한다거나 이웃 짐바브웨처럼 인종청소하여 흑인 천국을 만들 수 있다며 두려워했다. 물론 아파르트헤이트가 끝난 후에 이들에게는 다행히도 백인들을 인종청소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정책지원에서 밀리면서 쩌리 신세가 된 건 맞고 이들은 해외에 이주할 여력도 못 되기 때문에 그대로 남아공에서 눌러 살고 있다. 당장 3,000만이 넘는다고 추산되는 흑인 빈민층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 판에 쪽수 자체가 적은 백인 빈민층 문제가 해결되기는 앞으로도 요원할 것이다.[74] 더욱이 ANC 정부가 "우리를 지지 안하면 백인들이 다시 돌아와 억압할 것이다"는 식의 프로파간다를 꽤 유용히 사용했고 잘 먹혔다. 남아공 총선과 지선을 보면 흑인이 다수인 시골은 ANC의 득표율이 거의 99%에 가까울 정도였다.[75] 2020년대의 20대 흑인들의 대부분은 ANC는 50대 이상 기성세대나 지지하는 부패하고 무능한 집단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더 급진적이고 흑인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강제적인 흑인 위주 경제개편 모토에 충실한 경제자유투사당(EFF)을 주로 지지한다.[76] ANC 지지자들의 지지 이유는 대체적으로 만델라를 비롯한 반 아파르트헤이트 운동가들에 대한 부채의식과 백인에 대한 분노+두려움인데 90년대 이후 태어난 사람들에겐 아파르트헤이트는 역사책에나 나오는 얘기일 뿐이고, ANC가 기득권이었던 걸 보고 자랐기에 부채의식이 옅은 편이다. 대신 백인에 대한 분노는 타 세대에 비해 강한 편이라 오히려 더 강경하다 못해 극단적인 EFF와 줄리어스 말레마에 대한 호감도가 높다.[77] 주로 줄루족 출신의 인카타 자유당 계열.[78] 반투스탄도 명목상으로는 국가였기에 당연히 국가가 돌아가려면 공무원을 고용해야 하니 공무원을 고용하기는 했다. 물론 대다수의 반투스탄이 상황이 막장이었던지라 공무원들도 부패하기 좋은 환경이기는 했다.[79] 사실 대학등록금이 비싸서 그렇다는 얘기가 많다. 대학에 들어와야 좋은 일자리를 얻을수 있는 건 남아공도 매한가지인데 빈민층들이야 아파르트헤이트 해체 이후에 학교가 대대적으로 늘어나면서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을 받는 비중이 크게 늘어났기는 하지만 대학 등록금이 비싸다 보니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아무리 성적이 좋아도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경제력이 안 되어 갈 수 없고 자연히 기회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허드렛일이나 해야 한다는 것이다. 참고로 남아공의 대학 등록금 수준은 연간 평균 10만 랜드로 약 850만원 수준인데 빈민층은 감당이 안 되고 중산층들도 감당하기 부담되는 수준이다.[80]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남아공뿐만 아니라 짐바브웨, 모잠비크, 앙골라 등 유럽 식민지들에도 ANC와 비슷한 흑인 독립운동 세력들이 있어 연대했고, 이들은 먼저 독립하자 자국에 망명정부를 세우는 걸 허용해 주고 군사훈련 및 재정 지원을 했다. 일례로 앙골라 지역에서 ANC와 연계된 나미비아의 SWAPO와 쿠바의 지원으로 ANC가 활발히 활동하자 남아공에서 앙골라 내전에 참전해 깊이 관여하였고 이는 큰 부담이 됐기에 아파르트헤이트의 몰락에 일조했다. 이러다 보니 만델라 집권 이후의 남아공이 이들을 무시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81] 공식적으로 ANC는 남아공 최대 노조인 남아프리카 노동 조합 회의(COSATU)와 남아공 공산당과 삼자 동맹(Tripartite Alliance)이라는 선거 연합을 맺고 있다. 물론 여기 서술된 이유로 현대 들어와 코사투와 공산당 내에서도 이 연합을 깨 버려야 한다는 의견도 심심찮게 부상하고 있다. 첨언으로 이것 가지고 실재로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은 어설픈 반공 메카시즘 기믹을 띄워 ANC를 공산주의자, 소련 첩자라고 불렀고 현대에도 몇몇 인종차별주의자들과 극우들은 여전히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저항은 공산주의자들의 사주니 뭐니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넬슨 만델라 본인이 자서전에서 한 말 한 마디로 반박된다. "공산당이 우리를 이용해먹으려고 들었다고 주장할 사람들은 항상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면 우리(ANC)가 공산당을 이용해먹었다고 못할 건 뭔가?"[82] 사실 1990년대 초반에 남아공이 백인 극우파의 반발과 흑인내의 갈등, 반투스탄 기득권층의 저항 등 여러 가지 요인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백인 대학살이나 내전이 일어날 수 있다는 예측까지도 나왔던 걸 보면 ANC가 무능했던 건 아니다. 물론 아파르트헤이트 청산을 너무 온건하게 했다는 불만도 있는 데다 에이즈의 확산을 막지 못했다는 문제점이 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흑백화합정책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이끈 건 사실이었다.[83] 이것도 2010 남아공 월드컵 때문에 급하게 처리한 셈이었다. 주마는 2009년에 집권했는데 당시 범죄율이 전혀 낮아질 기미가 안 보여 FIFA에서 이 꼬라지 그대로 가면 호주나 영국한테 개최권 넘긴다고 통보했다. 워낙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강력한 경찰권으로 인권유린에 폭력이 많았던 터라 만델라 시절 경찰이 선제발포를 못 하게 하는 등 과도한 반작용이 있었고 범죄율 상승에 기여했지만 주마가 등극한 후 그 법부터 개정한 뒤 특수경찰부대를 전국에 투입해 엔간한 강력범죄는 잠재우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월드컵 때 완벽하게 안전했던 건 아니고 월드컵이 끝난 후 남아공의 범죄율은 하강하는 경제와 함께 다시 상승하면서 도로 원상복귀된 상태이다.[84] 사실 이건 단순히 ANC뿐만 아니라 아프리카나 제3세계의 다른 구 서구 식민지 국가들의 독립운동 세력이 탈식민화 후 지배세력으로 전환됐을 때 흔히 보이는 트렌드이다.[85] 신학적, 정치적 성향이 모두 보수적이라 비백인의 입교를 금하고 있다. 네오나치이자 테러 조직 아프리카너 저항 운동의 수괴 외젠 테르블랑슈(Eugene Terre'Blanche)가 생전에 이 교회를 다녔다.[86] 한 예로, 아프리카너 민족문화 보존을 위해 만들어진 아프리카너 전용 도시 오라니아의 홍보 영상인데, 여전히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내세운다는 것을 볼 수 있다.[87] 당연하지만 영공을 열지 않으면 그 국가에 취항하는 것도 불가능하다.[88] 아파르트헤이트가 한창이던 1980년대에 한국에서 남아공 가려면 중동에서 한번 인도 혹은 태국에서 한번 환승해서 갔어야 했다. 즉 최소 2번 정도는 환승이 필요했다.[89] 센추리온 전차를 독자개량해서 만든 올리판트 전차, 미라주 III의 독자개량형 치타 전투기 등이 대표적인 예시이다.[90] 현대의 남아프리카 공화국군(남아프리카 국가방위군)은 이들이 한 번 해체된 후 기존 장병들과 더불어 민족의 창, 아자니아 인민해방군, 잉카타 자유당 자경단 등 게릴라 출신들을 합류시켜 재개편된 결과물이다.[91] 군경이나 게릴라들이나 모두 신생 남아공군 개편 당시 스카웃되거나 채용될 수는 있었으나 늘 그렇듯 통과되지 못한 사람들은 영락없이 실업자 신세였다. 또한 들어간다 해도 아프리카 민족회의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아 마찰을 빚거나 자진해서 나오는 인원들도 많았다.[92] 승점 자체는 멕시코와 동점이었지만 득실차에서 3점이나 차이나서 탈락. 그나마 같은 조에 속하는 팀들이 세계구급 강팀인 멕시코와 프랑스, 우루과이라서 참작의 여지는 있던데다, 조직력이 병맛이었던 프랑스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2 : 1로 승리하면서 조 꼴찌는 면한게 위안.[93] 2014년 월드컵에서는 비록 지역 예선에서는 떨어졌지만 놀라운 능력을 보여준 팀이 딱 3팀 있었다. 독일과 박빙의 승부를 연출한 스웨덴, 아르헨티나를 잡아서 세상을 놀라게 했던 베네수엘라, 그리고 남아공을 잡고 최종예선까지 가서 나이지리아와 박빙의 승부끝에 탈락한 에티오피아이다.[94] 사실 아파르트헤이트도 어느 정도 영향이 있지만 남아공의 축구 스타일 자체가 신체능력을 기반으로 한 피지컬 축구이며 이런 류의 축구는 신체능력이나 조직력이 더 뛰어난 팀들한테 쌈싸먹히고 아프리카 대륙 내 축구 강국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이지리아이집트, 세네갈, 코트디부아르, 카메룬 등은 신체능력이 훨씬 더 뛰어난 선수들과 높은 조직력을 갖추고 있다. 또 아프리카에서 축구 산업이 가장 큰 나라 중 하나여서 이미 남아공 내부에서만 놀아도 어느 정도 활발하니 딱히 자정능력도 없는 풍토도 한 몫한다.[95] 남아공 내 럭비는 한국에서의 야구와 같은 위치이며 그동안 거의 모든 선수들이 백인이어서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남아공의 상징과 같았다. 만델라 당선 1년 후 자국에서 유치한 월드컵을 우승했고 12년 뒤인 2007년에도 우승했다. 그리고 또 12년 뒤에 흑인 주장이 이끄는 럭비 국대가 우승해 인종을 뛰어넘는 하나의 남아공인으로서의 유대감이 있었다.[96] 강남이 논밭이었다가 서울특별시가 개발되면서 노른자땅이 된 것과 비슷하다.[97] 흑인 여성이 남긴 그림 중에는 '차라리 어느 한쪽의 피부색만 달랐더라면'을 염원한 듯한 흑인으로 그려진 기업가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