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8 09:24:39

시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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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아파와는 별개의 종파로 분류되는 경우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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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특징
2.1. 분파2.2. 교리
2.2.1. 칼리파2.2.2. 이맘2.2.3. 마흐디2.2.4. 타키야2.2.5. 무타2.2.6. 아슈라
3. 차이4. 역사
4.1. 무함마드의 사위 알리4.2. 우마이야 왕조와 후세인의 죽음(카르발라 참극)4.3. 우마이야 왕조 치하
5. 시아파의 분파6. 오해

1. 개요

나의 가문은 노아의 방주와도 같은 것으로 그 방주에 승선한 사람은 구제될 것이나 그렇지 아니한 자는 익사할 것이다.[1]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age1-1754px-Tree_shia_islam_n3.pdf.jpg
시아파 이맘의 계보도

파일:external/sp.rpcs.org/map%20of%20sunni%20and%20shi'a%20islam.gif
무슬림 인구가 상당수 있는 지역의 지도. 짙은 초록색이 시아파. 연두색은 수니파.

이슬람의 종파 중 하나. 한국이슬람중앙회의 공식 표기에 따르면 '쉬아'이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촌인 알리를 예언자의 자리를 잇는 자로 받든다.

영어로는 시아 이슬람(Shia Islam), 시아파(Shi'ite)[2]라고 한다. 수니파 다음으로 가장 큰 종파라지만 신도 숫자로 따지면 확실히 소수종파이다. 인구는 2010년대 초 기준으로 대략 2억여 명 정도로, 전세계 무슬림의 10%-13%를 차지한다. 시아파 신도가 사회에 큰 영향력을 지니거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는 아래와 같다.
  • 이란
    사실상 전 세계 시아파의 구심점. 국민의 90%정도가 시아파.
  • 이라크
    시아파 인구가 60% 정도로, 이란 다음 가는 주요 시아파 국가이며 나자프, 카르발라 등의 주요 성지도 있다. 사실, 인구수와 현대의 영향력만 보면 이란이 시아파의 주도국이지만, 역사적인 시아파의 본산은 이라크라고 보는 쪽이 맞다. 이라크는 수니파도 30~40%에 달하고, 두 종파간 종교갈등이 극심하다. 이라크 바트당 및 다에시 세력은 수니파, 사담 정권 실각 이후의 현 집권층은 시아파이다.
  • 레바논
    인구의 50%가 무슬림, 그중 절반인 25%가 시아파. 인구 비중이 압도적이지는 않지만 헤즈볼라로 대표되는 레바논의 주요 정치, 무장 세력을 이루고 있다. 시아파와 헤즈볼라는 레바논 남부에 많다.
  • 시리아
    1974년에 시아파 종파로 공식 인정된 알라위파가 있다.이들의 인구 비중이 10% 남짓이라 총 시아파 인구비율은 걸프 연안의 수니파 왕정국가들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 소수의 알라위파가 바트당, 세속적 수니파, 기독교 세력과 연합하여 수십년간 기득권층으로 장기 집권중이다. 사실 알라위파는 종교적으로 이슬람(시아)의 일부로 보기 힘들다는 의견도 많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이란의 종교 지도자가 인정해줬기 때문에, 일단 시아파로 본다.

위의 중동 내에서 시아파의 지정학적 핵심 역할을 하는 네 국가, 즉 이란-이라크-시리아-레바논을 잇는 시아파 정치권력-인구 벨트를 시아파 초승달(Shia crescent)이라고 부른다. 보통 중동 내 수니파와의 종파갈등 차원에서 강조되는 개념으로 많이 등장한다.
  • 아제르바이잔
    인구의 80%가 시아파. 위 이란을 골수 시아파로 개종시켜버린 사파비 왕조가 이 지역에서 발흥하였다. 시아파 인구비율로만 따지면 이란 다음이지만, 실제적으로 국가 정체성으로서의 시아파의 영향력은 크지 않은 수준인데, 아제르바이잔은 20세기를 거치면서 튀르크, 시아파, 구소련[3]의 세 가지 정체성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타 시아파 국가들이 이란과 매우 친한 반면 아제르바이잔은 대표적인 수니파 대국인 친척 민족 터키와 매우 친밀하며 러시아와의 관계도 완만한 편이다. 미국이랑 다른 수니파 국가들과도 관계가 좋다. 일단 이란과의 사이도 나쁘지는 않은 편이지만 아제르바이잔은 철저한 세속국가이다보니 광신국가인 이란을 보는 시선은 좋은 편이 아니다.
  • 예멘
    수니파가 조금 더 많긴 하지만 시아파 역시 인구의 40%가량을 차지한다. 현재 진행중인 예멘 내전도 이 수니파(예멘 정부, 알카에다 계열)와 시아파(후티 반군)의 종파 갈등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참고로 예멘의 시아파는 이란의 12이맘파와는 다른 자이드파이다. 그러나 같은 시아파로서 예멘의 시아파는 이란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 바레인
    지배층 왕족들은 수니파 가문이지만 인구 대다수는 시아파이다. 때문에 정치 주류로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시아파들이 꽤 있는 상황.

그 외에도 터키, 인도, 사우디아라비아[4],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에도 시아파 인구가 상당한 규모의 소수종파로서 존재한다. 알제리, 리비아, 이집트, 나이지리아, 케냐, 탄자니아 등의 북아프리카를 비롯한 아프리카의 절반 지역들, 팔레스타인,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러시아 다게스탄에도 약간의 시아파들이 존재한다. 다만 이들은 터키[5]인도[6] 정도를 제외하면 수니파에게 매우 심각한 수준의 박해와 차별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7]

2. 특징

2.1. 분파

수니와는 달리 쿠란에 대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뒀기 때문에 하위 종파가 많다. 가장 주류는 12이맘파(이마미야)이고, 그 외에 예멘의 자이디야파, 과격한 이스마일파[8] 그리고 시리아알라위파 등이 있다.

2.2. 교리

마음 속에 예언자의 가문을 사랑하다가 죽은 사람은 순교자의 죽음과도 같은 것이라. 그러나 예언자의 가문을 증오하다가 죽은 자는 천국의 향수를 맡을 수 없을 것이라.

2.2.1. 칼리파

최고 지도자가 반드시 무함마드의 정통 후손이어야 한다[9]혈통주의적인 면이 있다. 이는 칼리파를 어떤 위치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 수니파
    예언자무함마드로 끝났으며, 칼리파는 단순히 정치와 종교의 지도자일 뿐이라고 간주했다. 당연히 쿠란을 해석하거나 법적 판단을 할 권리는 없었다.
  • 시아파
    예언자는 신의 말씀을 전달해주는 자들이며 칼리프는 이 말씀을 일반인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석하고 적용하는 직위라고 생각했다. 이는 칼리파에 신성을 부여한 것이며 당연히 무함마드의 후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2.2.2. 이맘

칼리파는 이제 없어졌으니 이맘이 이를 대신한다. 같은 단어를 쓰지만 수니파의 이맘과는 크게 다르다.
  • 수니파
    이슬람에 대한 지식이 있는 무슬림이면 아무나 될 수 있으며 직위라고 할 것도 없다. 예배의 인도자일 뿐이며 혼자 예배할 때는 스스로가 이맘이 되며, 가족이 함께 예배를 할 때는 가족 중에서 가장 웃어른이 이맘이 된다. 기독교에 대입해서 설명하면, 개신교 비슷하게 성직자는 율법과 신학의 전문가일 뿐 영적 위상은 평신도나 다를 바 없다.
  • 시아파
    신성의 직위이며 무함마드로부터 '비전의 지식'을 물려받은 자들이다. 이슬람 공동체에서 무함마드가 무오류의 예언자였음을 상기해 본다면, 이맘 역시 무오류의 인간이 되는 셈. 기독교에 대입하자면 가톨릭이나 정교회처럼 교회 체계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고, 성직자들 또한 단순한 전문가가 아니라 신성과 영적 권위가 있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10] 그런데 종파 규모가 반대다

2.2.3. 마흐디

언젠가 개종한 시아파 중에 새로운 예언자(마흐디)가 강림할 것이라는 구세주신앙 비슷한 것이 있기에 무려 천오백 년간 수니파에게 탄압당하면서도 아직도 끈질기게 세를 불려나가고 있다. 그런데 이 '마흐디'를 누구로 보느냐는 점 때문에 시아파는 분열을 거듭했다.

2.2.4. 타키야

시아파들에겐 수니파인 척 가장하는 행위를 허용하는 일코 교리. 수니파는 전 세계 무슬림의 90% 이상인 절대 다수 주류이므로 수니파 무슬림이 아주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시아파 무슬림이라 거짓말 할 이유는 전혀 없어서 타키야(taqiyya, تقیة)는 일반적으로는 해당되지 않는다.

수니파 시아파 외에도 비신자를 속일 때도 타키야라고 한다.

2.2.5. 무타

임시로 결혼을 허용하는 교리. 일정기간 계약혼이라 할 수 있다. 시아파는 무하마드가 임시결혼을 허락한 사례를 들어 무타를 고유의 교리로 지키고 있으나 수니파는 무타는 무하마드 당대에 이미 취소된(나시크) 교리이며 사실상의 매춘 행위로 혐오시한다.

2.2.6. 아슈라

시아파 신도들은 카르발라의 참극을 애도하며, 후세인을 구하지 못한 자신들의 잘못과 슬픔을 참회하는 뜻에서 '아슈라(Ashura)'라는 행사를 가진다. 이 의식은 후세인의 순교를 묘사한 '애가'를 낭송하고, 타지예(ta'ziyeh, 수난극)라 불리는 연극으로 이 사건에 대하여 공연을 한다. 또한 단체로 음악 박자에 맞춰 칼이나 채찍으로 스스로를 치면서 자해를 하는 마탐(matam) 의식이 포함되기도 한다. 이 아슈라 행사의 마탐 의식이 비무슬림, 수니파들 사이에선 비판과 논란이 상당한데, 그냥 자기를 때리는 수준에서부터 심하면 칼로 머리 피부를 째거나, 과도한 채찍질, 칼질로 몸에 피가 철철 흘러넘칠 때까지 잔인한 자해를 하는 경우가 매우 많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우는 어린아이의 머리 피부까지 칼로 베어서 피를 나오게 만들기도 한다. 적지않게 충격적이고 인권문제도 심각하기 때문에 매우 미개하고 야만적인 행위라고 비판받기도 한다.

3. 차이

정치적 이유로 분리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상적인 면에서도 차이를 보인다.대표적인 차이가 상속론(al-wasiya)인데, 무함마드가 죽기 전에 알리를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주장하는 것. 이 전통에 따라 시아파의 이맘은 선임자의 유언에 따라 선임되어 바꿀 수 없다.

알리에 대한 신격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강화되어 알리의 지위가 무함마드와 비교해 다를 것이 없으며, 알리는 무오류의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자들까지 생겨나게 된다.

시아파의 사상을 닦은 자는 예멘 출신 학자인 압둘라 이븐 싸바 알 야흐디인데, 야흐디는 상속론의 이론을 재정비하는 한편, 재림(al-rajah)을 주장했다. 무함마드가 알리로 재림했다는 것. 시아파의 아주 중요한 사상으로, 이들의 분파인 12 이맘파의 경우에는 구세주가 돌아와 세상을 구제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정도다.

또 그 외에 시아파는 이슬람교 성인(이맘)들을 인정하는 관습이 있다. 마치 가톨릭처럼 성인들이 신자들의 기도에 도움을 준다고 여기는데, 바로 이 점도 수니파를 분노하게 만드는 생각이라고 한다.
  • 수니파
    개신교와 비슷하게 개인과 하나님 사이에는 일절의 우상숭배가 들어 가선 안 되며, 죽은 자는 하나님에 대한 기도에 있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보기 때문.
  • 시아파
    이러한 주장에 대해 시아파 교리를 오해하고 있는 것이며, 죽은 성인이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게 아니라 그저 신과 인간 사이의 중계인으로 대신 빌어 준다는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반박한다.

이러한 교리적 차이만이 아니라 종교적 인물의 초상화(알리후세인뿐만 아니라 심지어 무함마드까지도)의 활용이나 기타 여러 의례적 차이[11]들이 많다.

이런 차이들 때문에 수니파는 시아파를 "이런 이단 새끼들!!" 하면서 이를 갈고 시아파는 "저런 덜 떨어진 꼴통들!" 하면서 이를 갈고 있는 실정. 이렇게 자기들끼리 싸우다 보니 현재 시아파랑 수니파는 서로보다 가톨릭과 더 친할 지경이며, 이러한 현상은 심지어 역사적으로도 최근에 새로 일어난 일조차 아니다.[12] 수니파 : 메카메디나 내지는 예루살렘에서 시아파 이단자들의 터번[13]을 보느니 교황의 주교관을 보겠다.[14]

이슬람의 양대정파인 수니파와 시아파는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다. 시아파는 수니파와 구별되는 독특한 신앙과 교리, 그것도 기성 체제를 뒤엎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믿음을 갖춘 시아파는 '내부의 배신자'로 몰릴 위협을 항상 안고 있었다. 중세에 들어서는 아주 이런 박해성 공격이 정례화되어 매주 토요일마다 수니파들이 "불신자들아, 이슬람으로 개종해라!" 라고 외치면서 시아파가 다니는 알 카르크의 시아 모스크 등을 습격했다. 마치 무슬림이 기독교도와 쉽게 결혼할 수 없듯이, 수니파는 시아파와 결혼할 수 없었으며 시아파는 수니파의 예배를 인도할 수도 없었고 심지어 시아파가 도축한 고기는 할랄로 인정되지도 않았다고 한다. 즉 시아파는 아예 무슬림 취급도 받지 못했던 것이다. 시아파를 겨냥한 테러는 대부분 수니파 테러 단체들이 먼저 일으킨 경우가 많은데, 이는 종파 갈등으로 인한 보복뿐만 아니라 다에시, 알 카에다 등 글로벌 테러 단체들이 지하드를 펼치는 데 있어서 배교자 겸 우상 숭배자나 다름없는 시아파를 박멸한다는 의미가 맞다.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 같은 악랄한 다에쉬 지도자도 "기독교인은 종교세를 내면 살려주되, 시아파는 그냥 죽여라"자기들은 수니파 신도들도 무자비하게 죽이면서고 설교했으며, 다에쉬 대변인 아부 무함마드 알 아드나니도 시아파를 이슬람의 분파가 아닌 별개의 종교이며, 종파 갈등이 아닌 거룩한 종교 전쟁이라는 발언을 늘어놓은 적이 있다.

이 분쟁의 핵심에는 정치적인 패권 이유와 함께 중동 전역을 뒤흔드는 수니파-시아파 이슬람 간의 묵은 교리적 갈등 및 서로를 원수로 여기는 광신에 기반한 원한감정이 작용하고 있는 게 맞다. 실제로 이란, 사우디 두 나라 집권세력의 이슬람 근본주의적 정체성만 생각해봐도.이슬람 세계의 정사분쟁

4. 역사

4.1. 무함마드의 사위 알리

이슬람의 교조 무함마드의 사위 알리가 시아파의 시초이다. 알리는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와 결혼하여 사위가 되었기 때문에 혈연적으로 무함마드의 가장 가까운 인물이었다. 또한 최초의 남성 무슬림이었고, 무함마드에 대한 믿음도 깊었으며 능력도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다.[15]

이런 상황이었으니 당초부터 무함마드의 후계자로 주목받았지만, 무함마드 사후에는 아부 바크르가 칼리파로 선출되었다. 알리 지지파들은 당초부터 이에 불만을 품었는데, 정통 칼리파는 알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리는 이에 승복하였고, 이후 2대 칼리프 우마르의 즉위도 지지하였다.

제3대 정통 칼리파우스만 이븐 아판이 사망한 뒤에, 그 뒤를 이을 후계자 자리를 두고 벌어진 다툼이 시아파 분리의 계기가 되었다.

우스만의 뒤를 이어 당초부터 많은 지지를 받던 무함마드의 사위 알리가 4대 칼리파로 선출되었으나,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우스만의 6촌인 무아위야가 우스만 암살에 복수를 한다며 반란을 일으켰고, 이 반란은 결국 진압되었다. 궁지에 몰린 무아위야는 쿠란의 낱장을 창 끝에 붙이고자기네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경전을 이런 식으로 다루다니 이거야말로 신성모독이네 낭송가들이 뒤를 따르면서 쿠란을 낭송하게 하며 알리의 군대로 돌진하도록 했다. 신앙심이 깊었던 알리의 군대는 쿠란을 더럽힐까봐 공격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알리는 이에 무아위야와 협상하였다.

이전부터 알리는 같은 무슬림 내에서는 매우 신사적이고 관대한 인물로, 자신의 권력보다 이슬람 세계의 통합을 중시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자신을 거역하는 정적들에게도 관대하게 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전에도 무함마드의 마지막 아내 아이샤와 관대하게 협상한 적이 있었고. 하지만 이런 알리의 관대한 태도에 반발하는 이들이 나타났으니, 이들은 급진적이고 젊은 세력이었다. 이들은 알리에게 실망했다면서 알리 진영에서 이탈하면서 이탈자라는 뜻으로 '하리지파'로 불리게 된다.

알리의 세력이 분열되면서 여유를 얻고 세력을 확대해나가던 무아위야는 예루살렘에서 칼리프를 칭하게 되었다. 이에 반발한 하리지파는 무아위야를 암살하려 시도하고, 알리는 무아위야와 싸우면서 하리지파와도 싸워야 했기 때문에 세력이 피폐해졌다.

결국 하리지파의 인물인 Abd-al-Rahman ibn Muljam는 무아위야의 회유에 넘어가서, 모스크에서 기도를 하던 알리를 을 바른 단검으로 찔러서 살해하고 말았다.

알리의 아들 하산이 칼리프 지위를 이어받았다. 무아위야는 군대를 이끌고 가서 하산의 세력을 토벌하려 하였고, 하산은 어쩔 수 없이 협상을 할 뜻을 밝혔지만 같은 편에게 공격당해서 부상을 입었다. 몇 차례 전투를 거친 다음 하산은 결국 불리한 상황에서 평화와 화합을 위하여 무아위야에게 항복하고 칼리프 지위를 포기하였다. 하산이 이후 죽게 되자 시아파 내에서는 무아위야의 음모로 인한 독살설에 나오게 되었다.

4.2. 우마이야 왕조와 후세인의 죽음(카르발라 참극)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ImamHusaynMosqueKarbalaIraqPre2006.jpg
이라크 카르발라에 있는 이맘 후세인 모스크. 현재 시아파의 대표적인 성지이자, 마치 시크교의 황금사원처럼 시아파 이슬람교도의 정체성이 된 곳이다. 이곳엔 세계 각지에서 항상 성지순례하러 오는 시아파들로 북적인다.

알리의 아들 하산이 죽고 나서 그 동생 후세인이 알리 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680년 다마스쿠스에서 무아위야가 죽고 야지드가 칼리파에 오르는데, 당시까지 칼리파는 공동체에서 투표로 뽑히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러나 무아위야는 이러한 전통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세습해 버린 것이다. 이것이 최초의 세습 칼리프 왕조인 우마이야 왕조의 시작이다.
비록 쿠파의 백성들의 마음은 후세인과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창검은 시리아인들과 함께 있을 것이네.

ㅡ 7세기 말의 시인 파라즈다크

이라크의 쿠파에서 후세인의 지지자들은 야지드에 대한 반란을 준비하였다. 후세인은 메카에서 야지드의 군대를 피하고 있었는데, 요청을 받고 쿠파로 이동하였다. 이 상황을 알게 된 야지드는 군대를 파견했다. 추종자들과 함께 이동하던 후세인은 쿠파의 도착을 앞두고 카르발라에서 야지드가 보낸 3000명의 군대에 포위당했다.

이때 전설이 하나 전해져 내려온다. 야지드의 군대가 유프라테스 강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후세인의 추종자들은 물을 구할 수 없었다. 후세인의 형제 압바스[16]가 유프라테스 강으로 물을 구하러 가서 가죽 물통에 물을 채우고 돌아갔다. 압바스는 후세인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강에서 물을 뜨면서도 한 방울의 물도 마시지 않았다. 야지드 군은 압바스가 물을 가지고 돌아가면 후세인과 추종자들이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압바스를 공격하였다. 압바스는 왼팔에 물통을 가지고 있었는데 칼에 맞아 왼팔이 떨어지자 오른팔로 들었고, 오른팔도 칼에 맞아 잘리자 입으로 물통을 물었다. 그러자 화살을 쏴서 물통이 망가져 물이 쏟아지고 압바스는 눈에 화살을 맞았다. 야지드 군이 머리를 메이스로 내리치자 압바스는 결국 말에서 떨어졌고 "Ya Akkha!"("형제여!") 라고 외치며 죽음을 맞았다.

전설에 따르면, 결국 궁지에 몰린 후세인은 단신으로 야지드의 군대에 싸움을 걸었고 무수한 적을 쓰러뜨렸다. 하지만 결국 적이 많아 후세인은 머리에 돌을 맞고, 가슴에 화살을 맞아 큰 부상을 입었다. 중상을 입은 후세인은 얼굴의 피를 닦고 하나님을 향하여 호소하였다. 후세인은 포위를 뚫었지만 결국 큰 부상을 입은 그의 말이 쓰러졌고, 나무 아래에 있던 후세인을 야지드의 군대가 붙잡아 갔다. 후세인은 참수를 당하게 되었는데, 그를 처형하려던 자(Shimr ibn Dhiljawshan)에게 "오늘 당신은 기도를 마쳤는가?"라고 물었다. 이때는 3번째 기도 시간이었다. 후세인은 기도를 할 시간을 요청하였고, Shimr는 후세인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었다. 기도를 마친 다음 후세인은 참수 되었다.

카르발라의 참극은 단순히 이슬람교가 분열된 '정치적 사건'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전통적으로 시아파에서 해석된 이 사건은 이슬람교에서 말하는 '과거의 예언자들이 겪었던 수난'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며, 아슈라에서 후세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현세의 불의를 드러내지만 동시에 내세의 축복을 약속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 억압받는 '현실'에서 미래의 구세주(마디)를 약속한다는 의미가 추가된다. 그리하여 후세인의 죽음인 카르발라의 참극은 '영적인 사건'으로 여겨지게 되며, 시아파의 종교적 정체성, '영성'과 연결된 중대한 사건이 되는 것이다.

4.3. 우마이야 왕조 치하

결국 후세인은 죽고 그 자손들은 살해당하거나 노예가 되거나 감시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성립한 우마이야 왕조는 누가 봐도 정통성이 부족했다. 알리를 지지하던 시아파는 지속적으로 '찬탈자' 우마이야 왕조에 대해서 저항 활동을 벌였다.

시아파가 이렇게 세를 불릴 수 있던 것은 우마이야 시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아랍인과 비아랍인 무슬림과 마왈리에 대한 차별이 심한 것을 잘 이용한 덕. 시아파는 '개종자중 구세주 강림설'을 퍼뜨리며 개종자들에게 큰 선교 효과를 가지고 왔다. 8대 칼리파 우마르 2세의 3년의 선정으로 인해 이런 현상은 많이 타파됐지만 쉽게 바뀌는 게 아니라 시아파는 그 틈을 이용해 세를 꾸준히 불렸다.

한편, 무함마드의 삼촌 압바스의 자손인 압바스 가문은 중앙 정계에서는 멀어졌지만, 무하마드와 비교적 가까워서 하심 가문의 일족이므로 존경 받는 위치에 있었다. 압바스 가문의 당주 무하마드는 '하시미야'라는 비밀 결사를 만들었는데, 이 비밀 결사는 같은 반체제 운동 집단인 시아파와 협력 전선을 펼쳤다. 하시미야의 조직원으로 라산에 파견되었던 아부 무슬림은 8000명을 이끌고 거병하여 세력을 펼쳤고 이라크에 도달했다. 시아파 역시 이 거병에 함께 하였다.

물론 우마이야 왕조 역시 이 반체제 운동을 감지하고 있었으므로 대응에 나섰다. 무하마드의 뒤를 이어 당주가 된 아브라함 이븐 무하마드는 우마이야 왕조에 붙잡혀 처형당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동생 '아부 알 압바스' 등 14명은 탈출에 성공하여 후세인과는 달리 잡혀 죽지 않고 이라크 쿠파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라산에서 일어난 반란군은 쿠파를 점령하였고, 압바스 가문의 아부 알 압바스가 칼리프로 추대되었다. 우마이야 왕조는 패배를 거듭하다 대패하였고 결국 다마스쿠스가 함락되어 우마이야 왕조의 왕족 대부분이 살해되었다. 이렇게 압바스 왕조가 성립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힘을 보탠 시아파들은 결국 압바스와는 함께 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시아파는 '알리의 후손'을 칼리프로 추대하는 것이 목표였지만, 압바스 가문은 우마이야 가문보다는 무함마드의 가까운 혈통이지만 '알리의 후손'은 아니기 때문이다.아바스조는 시아파를 탄압하기 시작했고 다시 시아파는 지하로 숨어들어야 했다. 물론 칼리프의 권위를 훼손할 우려가 있는 개국공신 아부 무슬림 등 역시 탄압을 당했다.

5. 시아파의 분파

시아파는 분파가 매우 많다. 기본적으로 알리-알리의 큰 아들 핫산-작은 아들 후세인 순으로 이어지는 것을 인정하지만, 후세인 다음 '이맘'의 지위를 계승한 자손이 누가 되느냐를 놓고 논쟁개싸움이 많이 있다.

현존하는 시아파의 대부분은 이란에서 융성한 12이맘파이다. 이 분파는 지역에 따라서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예멘의 경우는 자이드파가 주류이다.

크게 보면 10여 개 정도 파벌이 되고, 역사적으로 잠깐 있었다가 사라진 파벌까지 합치면 정말 굉장히 많은 숫자가 있다.

5.1. 4이맘파

통칭 카이산파. 알리의 셋째 아들 무함마드 이븐 알 후나피야(Muhammad ibn al-Hanafiyyah)를 이맘으로 추종했던 집단이다.[17] 후나피야는 카르발라의 참극으로 후세인이 죽은 뒤 알리 가의 당주가 되었고, 그 부하 알 무크타르(Al-Mukhtar)가 후세인의 복수를 내걸고 무아위야 왕조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키자 '마디'로 추앙받았다. 무크타르는 일시적으로 거대한 카이산파 세력권을 건설햇지만 무아위야 왕조에 토벌되어 전멸당했다.

무함마드 이븐 알 후나피야가 죽은 뒤 카이산파는 그가 죽은게 아니라 모습을 감춘 것이며, '마디'로서 재림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파벌, 무함마드의 자식을 이맘으로서 세우려는 파벌 등으로 분열이 계속되었다. 압바스 왕조의 성립에 공적을 세우기도 했지만 다른 시아파와 마찬가지로 탄압을 받았다.

누구를 이맘으로 세우느냐는 문제로 분열이 많아 세력이 쇠퇴하다가 결국 12이맘파에 흡수되어 소멸하게 된다. 사실 카이산파가 '숨겨진 이맘' 이론과 '마디 재림론'의 원조격이다.

5.2. 5이맘파

Zaydīyah

통칭 자이드파. 후세인의 손자 자이드 이븐 알리(Zayd ibn Ali)를 이맘으로 추종하는 파벌. 12이맘파와 자이드파의 분리는 5대 이맘인 무함마드 알 바키르(Muhammad al-Baqir)를 놓고 분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둘 다 알리 이븐 후사인의 아들인데, 무함마드 알 바키르는 우마야 왕조 치하에서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재야에 머물려 하였고, 자이드는 스스로 반란을 일으켜서 대항했기 때문에 분열이 일어난 것이다.

사실, 자이드 파는 사파비 왕조 이전까지는 시아파 가운데 가장 큰 그룹이었으며, 현재도 시아파에서 12이맘파에 이어서 두 번째로 큰 그룹이다. 예멘에 자이드파 신도가 많다. 2014년에 벌어진 예멘의 후티 반란은 시아파 자이드파가 중심이 되어 일어났다

교리상의 특징은, 자이드파는 후세인 이후의 이맘은 '무오성'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우마르, 우스만 등 수니파 정통 칼리프나 그들의 가르침 역시 인정하고 있다. 그 때문에 자이드파의 교리는 시아파 가운데서는 비교적 제일 수니파에 가깝다고 평가되고 있다.

5.2.1. 이드리시 왕조

무함마드의 손자 하산 이븐 알리의 후손들이 모로코 지역에 세운 왕조. 사실 이드리시 왕조뿐만 아니라 하산의 후손들은 북이란 카스피해 연안에 자이드파 왕조를 세우기도 했고 예멘을 1962년 까지나 자이드파 아래 통치하기도 했다.

5.3. 7이맘파

Isma'ilism

8세기 후반에 성립하였다. 이스마일파라고도 불린다.

6대 이맘 자파르 알 사디크(Ja'far al-Sadiq)의 장남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Isma'il Ibn Jafar)의 장남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Muhammad ibn Ismail)을 7대 이맘으로 추종한 분파. 이와는 달리 12이맘파는 자파르 알 사디크의 차남 무사 카딤(Musa al-Kadhim)을 7대 이맘으로 세웠다. 장남인 이스마일 이븐 자파르는 자파르 알 사디크보다 먼저 사망 하였다.

교리는 시아파 가운데서도 영지주의, 신비주의 경향이 강하며, 분파가 매우 많다.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의 사후에 그 자손이 이맘을 계승하였는데, 이스마일파의 전승에서는 이들은 아바스 왕조의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스스로 정체를 숨겼다고 알려져 있다. 8대 이맘, 9대 이맘, 10대 이맘이 정체를 숨겼으며, 이들은 스스로 이맘임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기록에서는 완전히 다른 일반인 신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압둘라 마흐디 빌라흐(Abdullah al-Mahdi Billah)가 스스로 이맘임을 드러내고 파티마 왕조의 칼리프가 되었다.[18]

카이로에서 번영을 누렸으나, 하킴의 실종 이후 실권을 잃었고 군인과 관료들에게 휘둘렸다. 살라딘의 아이유브 왕조가 압바스 칼리프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파티마 칼리프를 더 이상 세우지 않음으로서 사실상 멸망하였다.

현재는 타지키스탄 동부에 제일 많으며, 아프가니스탄 북부와 파키스탄 북부(정확히는 카슈미르),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지방에도 일부가 거주하며, 그 외 키르기스스탄 남부, 우즈베키스탄 남부와 투르크메니스탄 북부에도 극소수가 존재한다.

5.3.1. 파티마 왕조

압바스 왕조 치하에서 시아파 이맘들은 탄압받았는데, 감금당하거나 독살당하는 등 영향력을 상실했다. 하지만 이맘의 혈통임을 주장하는 파티마 왕조가 튀니지에서 봉기, 이집트까지 점령하고 카이로에 도읍을 하고 칼리프를 선언하면서 압바스 왕조의 헤게모니는 크게 흔들리게 된다. 파티마 왕조에 대항하여 후우마이야 왕조까지 칼리프를 자칭하면서 이슬람 세계는 세 칼리프가 공존하는 삼국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5.3.2. 무스탈리파

Mustaali/ Taiyabi

파티마 8대 칼리프 Al-Mustansir Billah 사후 자식 형제들 간의 분쟁이 일어났는데, 이 분쟁에서 동생 무스탈리(Musta'li)를 추종한 자들의 집단이다.

오늘날 대부분 아가 칸을 중심으로 뭉쳐있는 니자리파와 달리 여러개의 분파로 분열되어 있는 상태다. 보흐라파(Bohra) 신자의 대부분은 예멘과 인도에 분포한다

5.3.3. 니자리파

Nizāri

파티마 8대 칼리프 알 무스탄시르 빌라하(Al-Mustansir Billah) 사후 자식 형제들 간의 분쟁이 일어났는데, 이 분쟁에서 형 니자르(Nizar)를 추종한 자들의 집단이다.

반란 직후 니자르는 살해푹찍되어 생을 마감했지만, 추종자들은 니자르는 모습을 감췄을 뿐이고 언젠가는 재림할 것이라고 믿었다. '이맘'과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지도자가 하산 사바흐이며, 유명한 어새신들이 바로 이들이다. 한때 상당한 세력을 쌓아올렸지만 훌라구의 서정으로 참패하여 정권이 붕괴하였다.
5.3.3.1. 아가 칸
페르시아로 이동한 니자르 파에서 44대 이맘 하산 알리 사하(Ḥassan ʻAlī Shāh)(1800~1881)가 페르시아의 샤의 공주와 결혼하고 아가 칸(Aga Khan)베이비 칸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 아가 칸은 나중에 인도로 이동하였으며 (현재 근거지는 영국이다.), 아가 칸의 지위는 현대까지 계승되고 있다.(현재 아가 칸 4세, 1936년생)

'아가 칸'은 영토는 없지만 막대한 부와 엄청난 수의 추종자[19]를 보유하고 있어 사실상 일국의 군주와 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20] 본래 아가 칸 파벌은 이스마일=니자리파의 한 갈래였지만, 이스마일=니자리파 가운데 가장 확고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보니 현대에 이르러서는 시리아 등에 퍼져있던 니자리계 분파들 가운데 상당수가 아가 칸을 이맘으로 인정하고 따르게 되어서 세력이 더욱 확대되었다.

사실상 현재 이스마일파의 분파 가운데서는 가장 세력이 크며, 이스마일=니자리파의 종주를 칭하고 있다..

5.3.4. 드루즈파

시리아에 주로 분포하며, 요르단, 레바논, 이스라엘에도 소수 신도들이 있다. 실종된 파티마 왕조 6대 칼리프 하킴이 사실 마흐디이며, 그는 지금 모습을 감추고 있고 언젠가 재림할 것이라고 믿는 파벌이다. 교리적으로 신비주의적인 경향이 매우 강하며, 가르침에서 여러모로 이슬람에서 동떨어진 것이 많다.[21] 사실, 이 때문에 대다수 근본주의 성향 무슬림들은 드루즈파를 일종의 떨어져 나간 사이비 종교로 취급하고 주류 이슬람으로 치지도 않는다.

5.4. 12이맘파

통칭 마흐디파, 자파리파. 현대 시아파의 대부분을 차지[22]하는 12이맘파는 후세인의 아들들 가운데 알리 이븐 후사인(Ali ibn Husayn Zayn al-Abidin)을 정통으로 보았다.

알리 이븐 후사인은 아버지가 후세인이고, 어머니는 페르시아 사산 왕조의 마지막 황제 야즈데게르드 3세(Yazdegerd III)의 황녀인 샤흐르바누(Shahrbanu)로서, 전설에 따르면 샤흐르바누는 페르시아가 패배한 뒤 우마르 혹은 우스만 혹은 알리의 노예가 되었는데 알리는 여성들을 해방시켜주고 누구와 결혼할 지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하였다. 샤흐르바누는 후사인을 선택하여 혼인을 하였다. "그리하여 알리 이븐 후사인은 아랍인의 최고 혈통인 쿠라이쉬와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실의 혈통을 이어받았던 것이다"라고 12이맘파는 주장한다.

아바스 왕조 치하에서 알리의 정통을 계승한다고 여겨지는 시아파의 이맘들은 지속적으로 감시를 받았고 가택연금 상태에 놓여있었다. 시아파 전설에 따르면 대부분의 이맘이 아바스 왕조에게 독살 당했다고 한다.

아바스 왕조의 10대 칼리프 알 무타와킬(Al-Mutawakkil)의 치세에 시아파의 10대 이맘 알리 알 하디(Ali al-Hadi)는 아바스 왕조의 궁정이 있는 사마라로 소환되어 사실상 연금 상태에 놓였다가 독살되었다. 알리 하디의 아들 11대 이맘 하산 알 아스카리(Hasan al-Askari)는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그의 자손은 나타나지 않았고 시아파 이맘의 대는 공식적으로는 끊어졌다.

그리고 12대 이맘에 대한 시아파의 전설은 이렇다. 참고로 수니파에서는 12대 이맘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산 알 이스카리는 자손이 없이 죽은 듯이 보였지만, 노예를 가장하여 아라비아를 여행[23]하던 동로마 제국의 공주 나르지스(Narjis)와 결혼하여 아들을 보았다.[24] 하지만 압바스 왕조의 탄압을 우려하여 아들을 낳은 것을 비밀로 하였다. 그 아들이 바로 12대 이맘 무함마드 이븐 하산 알 마디(Muhammad ibn Hasan al-Mahdī). 마디는 5살 때 아버지의 장례를 치룬 다음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는 하나님이 마디를 박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그 모습을 감춘 것("Ghaybah")이며, 마디는 미래에 이사(예수)와 함께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인류를 심판하게 될 것이다.

아무튼 아바스 왕조가 우마이야를 답습해 더 쎈 수니파 제국을 건설해버렸기에 저항은 끊어지지 않았고 이집트나 페르시아 같은 비아랍계 지방과 동아나톨리아, 아제르바이잔 같은 산골 깡촌에서 세력을 불렸다.

5.4.1. 부와이 왕조

아바스 왕조 중기에 일시적으로 페르시아 시아파 12이맘파 맘루크들이 부와이 왕조로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었다.

5.4.2. 사파비 왕조

시아파인 사파비 가문이 12이맘파를 국교로 하는 사파비 왕조를 이란에 건국하면서 이란 지역에서 12이맘파의 영향력이 확고하게 뿌리내리게 된다.

이슬람의 도래 이후 이란은 10-11세기의 부와이 왕조와 북부 타바리스탄의 국가들 (알라비 왕조, 바반드 왕조, 아사신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수니파였다. 수니파 교리를 정립한 대 셀주크 제국의 명재상 니잠 알 물크는 이란인이었다! 현존하는 페르시아권 국가 중에서도 타지키스탄아프가니스탄은 이란과 달리 현재까지도 수니파가 주류다. 하지만 사파비 왕조 이후로 이란은 시아파 국가가 되었다.

사파비 왕조는 수니파와 노골적으로 대립하며 성립되었고, 이는 10%가량에 달하는 시아파의 급성장으로 이어졌으며 그 시아파 절반이 이란이다. 언제나 소수파로 존재할 줄 알았던 시아파가 수니파의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신호탄은 수니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게 큰 충격이 되었다. 실제로 현대 순니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이란이나 시아파를 칭할 때 사파비라는 용어를 아직도 사용하는 편이다. 이 구도는 현대 이란, 그리고 현 무슬림 세계의 수니 시아의 대결 구도로 이어졌다.

5.4.3. 알라위파, 알레비파

자프리파(Jafri)가 분열되면서 12 이맘파에서 떨어져 나간 방계집단 정도 된다.

자세한 건 알라위파, 알레비파 문서로.

6. 오해

현재 사우디를 비롯한 수니파, 특히 다에쉬 등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대두하여 지즈야를 바치지 않는 이교도의 생존권 자체를 부정하며 워낙 미쳐돌아가고 있어 세계의 평가가 크게 떨어진 반면, 시아파 이란은 최소한의 정치적 처신을 보이고 있다는 점 때문에 수니파=강경파, 시아파=온건파라는 관념을 갖고 있는 경우가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이는 단순히 수니파가 이슬람 절대다수를 차지해서 근본주의 극단파 역시 많을 뿐이다. 애초에 가톨릭이나 정교회, 개신교를 믿는 국가들이 다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듯 수니파를 따르는 국가라고 해서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시아파, 특히 이란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낫다뿐이지, 이슬람 원리주의에 기반을 둔 정권의 한계와[25] 내부 강경파 때문에 이란에 대한 서방의 경계심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이란 이슬람 혁명 당시만 하더라도 시아파가 강경파이고 수니파가 온건파로 평가받았던 걸 생각해본다면 상전벽해.[26]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그 온건 정도가 다소 부각되어 보인다. 단지 수니파 광신도들이 세계에서 워낙 테러를 많이 저질러서 안에서만 문제를 일으키고 사는 시아파가 대비되어 온건하게 보일 뿐이다.

물론 해외에 가서는 비교적 조용하다. 원체 소수인 무슬림 중에서 시아파는 더욱 소수라 시아파 모스크는 매우 희귀하고, 구심점이 되어야 할 이란계 주민은 이란 이슬람 혁명 당시 망명 온 세속주의자/사회주의자들이 주류라서 포교에도 매우 소극적이고, 폭력적인 면모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랍계나 남아시아계와 비교할 경우 확실히 비종교적인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사람이 대부분이다. 이란계 미국인 참조. 물론 보수적인 시아파 신도들도 수니파 광신도들마냥 테러를 일으키지는 않지만...[27]


[1] 알리가 직접 말했는지는 불분명하나 7세기 초기 알리당이 퍼뜨린 말이다[2] '~ite'는 종교나 사상의 추종자, 어느 지역 출신자나 원주민, 부족 소속원 등을 가리키는 영어 접미사. 우리말로는 단어에 따라 파(派), ~ 사람 등으로 번역할 수 있어 주의할 필요가 있다.[3] 러시아 문화의 영향력, 공산주의 경험으로 인한 세속적 사회 등.[4] 사우디 동부에 상당한 숫자의 시아파 교도들이 거주하고 있다.[5] 시아파가 주류인 아제르바이잔과 사이가 좋으며 언어, 문화적으로도 아제르바이잔과 매우 가깝다.[6] 인도를 지배했던 이슬람 왕조들은 모두 수니파 왕조였기 때문에, 인도의 힌두교도들은 자신들을 억압한 역사가 없는 시아파에 대해선 그냥 단순히 외국에서 들어온 종교 정도로만 여길 뿐, 수니파와 같은 강한 악감정은 없다.[7] 사우디에서는 와하비즘이 국교라서 시아파는 국가에 의해 공식적으로 이단 취급당하고, 정치/사회의 모든 면에서 비주류 신세인 상황이며, 아프간/파키스탄에서는 잊을 만하면 탈레반ISIL이 주도한 시아파 모스크 테러가 발생하는 상황.[8] 이 종파에는 니자르파라는 분파가 있는데, 이들이 그 유명한 암살단파, 즉 어쌔신이다.[9] 반대로 수니파는 무함마드의 혈통이 아니라도 상관 없다고 주장한다.[10] 이인태,'끝없는 테러공격: 테러리즘의 이해와 중동 테러 공격전술',책과나무,2016,pp102-103[11] 대표적으로 시아파는 기도할 때 머리를 편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머리가 바닥에 닿는 부분에 작은 원형 나무조각을 사용하는데, 수니파에서는 이를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 또 수니파는 하루 5번 기도를 시간에 따라 철저히 나누는 반면, 시아파는 5번 기도는 하되, 특정 시간에 기도를 두번 하는 식으로 하루 3번 기도하는 경우가 많다고.[12] 과거 오스만 제국잉글랜드가 우호 관계를 맺었을 때 오스만 제국 황제가 엘리자베스 1세에게 보낸 편지가 있는데, 거기에는 천주교와 개신교보다 개신교와 이슬람이 더 공통점이 많다는 흠좀무한 주장이 적혀 있다. 우상 숭배를 하지 않는 게 똑같다나.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이유에서 나온 말일 뿐이다.[13] 흔히 알려진 터번 쓴 무슬림 남성의 이미지는 시아파의 모습에 가깝다. 전근대에는 오스만 제국, 무굴 제국 등 수니파 국가에서도 터번을 쓰는 경우가 많았지만 현대의 무슬림들 중 터번을 쓰는 이들은 거의 대부분이 시아파 무슬림이다. 수니파에서 시아파를 비하하는 말 중 하나가 '터번쟁이' 다.[14] 비잔티움 제국의 재상 루카스 노타라스가 한 말인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라틴인의 주교관을 보느니 술탄의 터번을 보겠다." 를 패러디했다.[15] 무함마드의 아들들은 모두 어린 나이에 요절하여 후사를 남기지 못했다. 무함마드의 장녀 자이납은 무슬림이 되기를 거부하고, 아버지를 선지자로 인정하기 또한 거부하여 결국 무함마드도 고집을 꺾었다. 자이납과 파티마를 제외한 다른 딸 2명은 무슬림이 되어 결혼은 하였으나 역시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시아파 전승에서는 무함마드의 장, 차, 삼녀가 친딸이 아니라 카디자 전 남편의 딸이라고 본다. 이 전승이 사실이라도, 무함마드는 양아버지로서 딸들을 책임졌다.) 결국 알리-파티마 부부만이 무함마드와 육체와 종교를 모두 포함하여 가장 가까운 혈족으로 통했다.[16] 알리가 파티마 전에 결혼한 여자의 아들이다.[17] 근데 다른 시아파와는 달리 무함마드 이븐 알 후나피야의 어머니 후나피야는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가 죽은 다음 알리가 결혼한 아내로서 이 사람은 알리의 자손이긴 하지만 무함마드의 자손은 아니다.[18] 여기서 "아무리 봐도 이거 족보 날조한 거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종교적 신념이니 그렇다고 치자(...)[19] 2500만~3000만. 전체 시아파의 20%라 카더라.[20] 영국으로부터는 전하(His Highness), 팔레비 왕조 이란으로부터는 전하(His Royal Highness) 칭호를 받았으나, 후자는 현재 쓰지 않는 듯.[21] 특히 복장이 다른 이슬람 종파들과 확연히 구분될 정도로 다르다.[22] 이란, 이라크, 아제르바이잔, 바레인, 아프가니스탄 중부 지방[23] 이 시점에서 굉장히 윤색이 강하게 느껴지지만 종교적인 설화니까 그렇다고 치자(...)[24] 조상의 아내는 페르시아 왕녀, 직계 모친은 동로마 왕녀라는 점에서 역시 종교적으로 윤색한 경향이 엄청 많이 느껴지지만(...)[25] 특히 이란의 광신과 인권탄압은 굉장히 악명높다.[26] 이란 내 수니파인 쿠르드인들과 발루치인들만 해도 종교가 아닌 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독립 국가건설을 추구한다.[27]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현 이란 신정체제부터가 이란 토착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와 숙적인 수니파에 대한 탄압과는 별개로, 조로아스터교를 믿던 이슬람화 이전 페르시아 왕조나 사파비 제국에 의해 시아파가 주류가 되기 이전 수니파 왕조의 문화재를 파괴하기는커녕 오히려 보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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