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6-16 11:32:09

무함마드 알 자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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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이맘 계승 논쟁2.2. 바그다드 체류와 혼인2.3. 요절
3. 후사4. 쉬아 지하 조직5. 기타

1. 개요

محمد بن علي الجواد
무함마드 빈 알리 알-자와드[1]

이맘위: 818년 6월 ~ 835년 11월 29일
생몰: 811년 4월 8일 ~ 835년 11월 29일

열두이맘파의 9대 이맘. 부친 알리 알 릿다의 급사 후 불과 7세의 나이로 이맘이 되었다. 기존의 약속대로 칼리파 알 마문의 딸과 결혼하여 압바스 왕조의 인척이 되었고, 따라서 알 마문의 치세 때까지는 보호를 받았다. 하지만 다음 칼리파 알 무타심이 즉위한 후 835년, 조부 무사와 마찬가지로 바그다드에 소환된 무함마드는 같은해 석연치 않은 환경 속에서 요절하였다. 사후 조부의 곁에 안장되었으며, 두 이맘이 안장된 카지미인 성지로 남아있다. 무함마드 대부터 이맘들은 어린 나이에 이맘이 되어 장성하면 이라크에 감금되었다가 사망하는 패턴을 반복하며 점차 약화된다.

2. 생애

알리 알 릿다의 장남으로, 누비아계 해방노예 사비카 (혹은 카이주란 / 두라)의 소생이다. 817년 칼리파 알 마문은 알리를 후계자로 봉하며 자신의 딸들 중 움 하빕을 그와 결혼시키고, 다른 딸 움 파들 (자이납)은 무함마드와 약혼시키기로 하였다. 다만 당시 무함마드는 6세에 불과하였고, 약혼이 정식으로 맺어진 것은 819년 알 마문이 바그다드에 입성한 후였다. 그동안 메디나에 머물던 무함마드는 (쉬아 전승에 따르면) 818년 부친의 사망을 예견, 기적적으로 호라산에 나타나 장례에 참가한 후 돌아갔다고 한다.

2.1. 이맘 계승 논쟁

무함마드는 이맘 알리 알-릿다의 유일한 아들이었지만, 당시 7세에 불과했기에 계승에 있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일부 세력은 작고한 알리를 최후의 이맘이자 마흐디로 모시거나 숙부 아흐마드 혹은 무사를 이맘으로 모시기도 하였다. 한편 주류 세력은 일단 무함마드의 계승권을 인정하였다. 다만 주류 내에서도 어린 이맘을 그대로 취임시켜야 하는가 여부는 논쟁거리였다. 818년 알리의 사후 그 제자들은 자파르-무사-알리의 3대 이맘을 모신 압둘라흐만 이븐 알 핫자즈의 바그다드 저택에 모여 후임 이맘에 대해 논의하였다. 유누스 빈 압둘라흐만은 무함마드가 장성하기 전까지 임시 이맘을 두자고 제안하기도 했지만, 논의 끝에 그들은 지혜에 있어 성년 여부가 전제 조건이 아니라고 결론 지었다.

그들은 이슬람의 사도 이사 (예수)와 야흐야 (세례자 요한) 역시 어린 시절 하나님의 지혜를 전수받았다는 쿠란 구절을 논거로 들며, 성년과 미성년을 막론하고 이맘은 초자연적인 지식을 전수받기에 나이에 상관 없이 동등한 지위를 지닌다고 규정하였다. 또한 선대 이맘의 지식은 그의 사망과 함께 후임 이맘에게로 이전된다는 교리가 세워졌다. 알리가 생전 무함마드를 '쉬아 최고의 축복'이라 한 것도 일종의 간접 지목 (나스)로 여겨졌다. 이에 따라 일단 이맘으로 등극한 무함마드는 핫지를 맞아 중동 각지에서 히자즈로 온 쉬아 인사들의 시험 역시 통과하여 그들의 의문을 해소하였다. 이로써 무함마드는 4년 후인 822년에 이르면 쉬아 지하 조직을 장악하며 이맘으로의 권위를 확립할 수 있었다.

2.2. 바그다드 체류와 혼인

한편 바그다드를 장악한 후 공식 색상을 녹색에서 다시 흑색으로 환원시키며 기존의 순니 칼리파 정체성을 회복한 알 마문은 819년 말엽, 8세의 무함마드를 바그다드로 소환하여 자신의 궁정에 머물게 하였다. 알 마문은 (무함마드의 짙은 피부색을 지적한)[2] 여러 압바스 왕공들의 우려에도 약속대로 자신의 움 알-파들과 무함마드의 약혼을 추진하였고, 무함마드는 왕공들의 요구한 수석 판관 야흐야 빈 아크탐의 신학 질의에서 군중들의 참관 하에 통과하며 자신의 자격을 증명하였다. 이에 알 마문은 약혼을 성사시켰고, 이러한 일화는 열두이맘파에 있어 무함마드의 특출한 지혜의 증거로 여겨졌다. 830년, 정식으로 혼인한 무함마드는 이듬해 핫지 (메카 순례)를 겸하여 메디나로 돌아갔다.[3]

인척을 맺어 쉬아 세력을 견제, 포섭하려 했던 알 마문과 달리 그 후계자 알 무타심은 강경책으로 일관하였다. 이는 파티마 빈트 무사의 순교 후 쉬아 거점 도시가 된 쿰에서 연이어 반란이 일어난 것과 관련이 있다. 825년 쿰에서는 북이란의 라이와 마찬가지로 감세를 원하는 봉기가 일어나자 알 마문은 아들 아부 이샤크 무함마드 (미래의 알 무타심)을 보내었고, 그는 봉기를 잔혹히 진압하고 세금을 4배로 올려버렸다. 그 과정에서 쿰의 성벽은 파괴되었고, 주민 다수가 학살되었다. 비록 무함마드는 공식적으로 중립이었지만, 현지 쉬아 세력이 반란에 적극 동참하였고 쿰의 와킬 야흐야 이븐 아비 이므란이 토벌군에 맞서다 전사하며 압바스 당국의 의혹을 자아내었다. 얼마후 알 마문이 무함마드를 재차 바그다드로 소환하여 자신의 사위로 삼은 것은 쉬아 측의 반발을 무마시키려는 의도로도 해석된다. 하지만 830년대 쿰에서 반란이 지속되며 압바스 당국은 유화책을 버리게 된다.

2.3. 요절

1차 반란 후 이집트로 추방된 쉬아 간부 자파르 빈 다우드 알-쿠미는 유배지에서 탈출하여 쿰으로 돌아와 831년 재차 거병하고 압바스 군대를 격파하였다. 이에 알 무타심은 재차 진압에 나서 832년 그를 처형했지만, 이후로도 쿰에서는 반란이 지속되었다. 그러한 상태에서 알 마문의 사망과 함께 칼리파에 오른 알 무타심에 의해 무함마드는 부인과 함께 835년 재차 바그다드로 소환되었고, 그곳에 도착한 후 불과 10개월 만에 향년 2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순니 측 기록은 대부분 무함마드의 죽음에 대해 침묵하는데, 이에 대해 쉬아 측에서는 압바스 정권의 압력 행사 정황으로 해석한다. 임종 시에 무함마드는 역시 7세에 불과했던 장남 알리에게 그의 이맘위 계승을 전하며, 동생 무사와 다른 여동생들을 잘 챙겨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쉬아 전승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그가 쿰과 탈리칸 (아프간 북부)에서 벌어진 쉬아 반란의 상징이 될까 염려한 알 무타심에 의해 암살된 것이라 한다. 혹은 무함마드가 알 무타심이 맡긴 몇몇 재판에서 현명한 판결을 내리자 판관 이븐 아비 다우드가 이러한 기류가 계속되면 여론이 응집될 것이라 간언하여 알 무타심이 독살한 것이라 한다. 그외에 알 무타심이 무함마드를 음독시킨 후 조리돌림시키려 하자 관료 아흐마드 알 마르와지가 그럼 역풍이 불거라며 말렸다는 일화도 있다. 사후 무함마드의 주요 간부이던 무함마드 이븐 알-파라즈가 알리의 계승을 전하였고, 이미 무함마드의 선례와 나이를 불문한 지혜의 완벽성 교리 덕에 알리는 비교적 순조롭게 이맘위에 올랐다. 이는 후세인 이후 가장 이의 없는 이맘위 계승이었다.

3. 후사

무함마드는 베르베르계 노예 출신의 여성 사마라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얻었다. 이러한 그의 축첩에 대해 정실 부인 움 알-파들 (제이납)은 불만이 컸다고 하며, 부친 알 마문에게 호소하기도 했으나 후자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다. 쉬아 전승에 의하면 움 알-파들은 오빠 알 무타심의 제안대로 무함마드를 독살시켰다 한다. 무함마드의 두 아들로는 이맘위를 계승한 알리 알 하디와 막내아들 무사 알-무바라카가 있다. 무사는 여러 자녀를 두어 그 후손들은 리즈비 (혹은 라자비 / 리다위 / 라즈비) 가문을 이루었다. 딸들도 있었는데, 그중에는 하키마가 하디스 전수자로 알려져 있다.

4. 쉬아 지하 조직

조부 무사 대부터 본격적으로 설치된 지방 대리인 (와킬) 체제는 알리와 무함마드 대에 완전히 정립되었다. 비록 무함마드의 계승 후 일부 와킬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디만, 대부분 후일 포섭되었다 한다. 아래는 무함마드 이맘기의 와킬 목록으로, 이집트 와킬은 그의 재임기에 신설되었다.
  • 바그다드 - 알리 빈 하산 와세티
  • 쿠파 - 사프완 빈 야흐야
  • 바스라 - 유누스 빈 압둘라흐만, 아부 아므르 알-하다다
  • 이집트 - 알리 빈 아스바트
  • 아바즈 - 알리 빈 마지야르
  • 하마단 - 이브라힘 빈 무함마드 함다니
  • 라이 - 야흐야 이븐 아비 이므란
  • - 살라흐 빈 무함마드 빈 사흘, 자카리야 빈 아담

무함마드 대부터 이맘들이 감금 상태에 놓이는 기간이 길어지며 핫지 때를 제외하면 신도들과 직접 소통할 수 없게 되자, 신자들에 대한 실질적인 교류와 통제권을 가지게 된 와킬들은 기존의 중간 간부 역할에서 벗어나 더욱 자치성을 띠게 되었다.

이에 무함마드는 감금 상태에서도 가끔 특사들을 파견하여 쿰스 등의 종교세를 직접 징수하기도 하였다. 한편 일부 쉬아 인사들은 무함마드의 승인 하에 쉬아 공동체의 이익 증진을 조건으로 압바스 조정의 공직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그 사례로는 보스트시스탄의 태수 후세인 빈 압둘라 앗-니샤푸리와 바레인 태수 하캄 빈 알리아 알-아사디, 바드다드와 쿠파의 카디 (판관) 누흐 빈 다라즈 등이 있다.

5. 기타

역대 쉬아 이맘들 중 가장 단명하였다.

교리에 있어 무함마드는 기존에 혼용되던 알-카임과 알-마흐디를 구분, 전자는 최후의 이맘이고 그가 후일 마흐디로 재림한다고 정리하였다.

이전 이맘들과 마찬가지로 무함마드 역시 하디스 전수를 위해 노력하여 116개의 하디스를 남겼다.

그의 제자 이븐 마지아르는 마흐디가 이미 출생했지만, 박해를 피하기 위해 대중에게서 숨겨졌다고 주장하였다.

쉬아 전승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어린 시절 메디나에서 호라산까지 순간 이동 (타이 알-아르드)을 하고, 병자를 치유하거나 기도가 이루어지거나 남의 속마음을 맞추거나 (자신의 죽음을 포함한) 미래를 예언하는 등의 초능력 (카라마)을 행했다고 한다.

무함마드는 여러 어록을 남겼는데, 그중 일부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동료를 하나님(의 신앙)으로 인도한 자는, 천국에 저택을 보장받은 것이다.


[1] 호칭인 알-자와드는 '자비로운 자'란 뜻이다[2] 모친, 조모, 증조모가 모두 베르베르 혹은 누비아계 여성이라 백인계 여성과 주로 결혼했던 압바스 왕가보다 피부색이 짙을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압바스 왕공들은 무함마드가 부친 알리처럼 정치적 위상을 얻을까 염려했던 것 같다.[3] 다른 기록에 의하면 무함마드는 825년경 결혼한 후 계속해서 압바스 궁정에 머물며 가르침을 베풀다 833년 알 마문의 사망 후에야 메디나로 돌아갔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