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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아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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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 알리 일 만수르 알 아미르 비 아흐캄 알라
영어 Abu'l-Qasim Ahmad al-Musta'li Billah

재위 1101년 12월 12일 ~ 1130년 10월 7일
생몰 1096년 12월 31일 ~ 1130년 10월 7일

1. 개요2. 치세
2.1. 알 아흐달과 십자군2.2. 알 마문 카이드 알 바타이히2.3. 친정
3. 죽음

1. 개요

파티마 왕조의 10대 칼리파. 알 무스탈리와 재상 바드르의 딸 사이에서 태어나 불과 5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태어나기 전부터 실질적으로 이집트를 지배하던 외숙 겸 장인인 알 아흐달이 실권을 지녔고 그동안 십자군에게 레반트 해안을 빼았겼다. 1121년 알 아흐달이 암살되자 알 아미르는 그의 재산을 몰수하고 알 아흐달의 부관 알 마문을 와지르로 봉하였다. 알 마문은 4년간 안정적으로 통치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전임자들과 같은 전권을 휘두르려 하였으나 알 아미르는 친위 쿠데타로 그를 제거하고 친정에 나섰다. (1125년 10월)

알 아미르는 매우 지적이고 똑똑했다고 하며, 쿠란을 통으로 암기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매우 사치스러웠고 30대 중반까지 후계를 위한 아들을 두지 못하였다. 1130년 초엽 독자 아불 카심 앗 타이브가 태어났는데 그해 가을 알 아미르는 자신이 늘 경계하던 니자리파의 아사신에게 암살되었다. 이로써 70년만에 회복된 칼리파 권위는 다시 하락하였고 알 아흐달의 아들 아흐마드 쿠타이파트가 2년간 칼리파 없이 독재자로 군림하다 살해된다. 이후 알 아미르의 사촌 알 하피즈가 칼리파가 되었는데 혼란기 동안 앗 타이브는 실종되며 무스탈리 이맘은 단절된다.

2. 치세

부왕 대의 권신이자 외숙인 알 아흐달이 실권을 유지하였고 알 아미르는 자신의 사촌이기도 한 그의 딸과 결혼해야 했다. 알 아흐달은 칼리파의 연소함과 십자군에 대한 지하드를 명분으로 부친 바드르를 능가하는 전권을 휘둘렀다. 새 칼리파의 즉위를 알리는 시내 행진 때에도 알 아미르는 장인 어른의 집 앞에 서 있어야 했다. 그 옆에서 알 아흐달은 말에 올라 더 높은 위치에서 행사를 지켜보았다. 즉위식 직후 반포된 칙령에서 알 아흐달은 와지르 직을 역임하였고 동시에 섭정 '알 말리크 알 아프달'로 선포되었다. 부친 바드르보다 더 나아가 왕을 칭한 알 아흐달은 전쟁에서의 승리로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려 하였다. 매년 아슈켈론의 파티마 군대는 십자군 영토를 습격하였다.

2.1. 알 아흐달과 십자군

1102년 알 아흐달은 아들 샤라프에게 대군을 주어 파병하였고 그는 2차 라말라 전투에서 십자군을 격파하였다. 하지만 보두앵 1세가 기적적으로 도주하였고 다음 목표로 예루살렘과 자파 중에 고민하던 중에 서유럽의 원군이 도착하며 승리의 기세를 활용하지 못하였다. 이후 알 아흐달은 아슈켈론으로 육군과 해군을 파견해 합동 작전을 지시했는데 전자를 맡은 환관 타즈 알 아잠이 협력을 거부해 무산되었다. 돌아온 타즈 알 아잠은 감금되었다. 세력을 회복한 십자군은 1104년 파티마 조의 주요 거점인 아크레를 함락하였다. 이에 이듬해 알 아흐달은 다른 아들 사마 알 물크 후세인에 대군을 주어 파병하였다. 하지만 다마스쿠스의 원군과 합세했음에도 연합군은 3차 라말라 전투에서 대패하였다.

1107년 파티마 군대는 헤브론을 습격하였고 이듬해 포위된 트리폴리가 파티마 조에 복속하였다. 이에 알 아흐달은 도시에 막대한 물자를 보내주었다. 하지만 1109년 결국 트리폴리는 7년의 포위 끝에 함락되었다. 이듬해 십자군은 베네치아 함대의 도움으로 시돈을 포위하였다. 티레의 파티마 함대가 일시적 성공을 거두었으나 격퇴되었고 결국 시돈 역시 함락되었다. 1111년 십자군의 1차 아슈켈론 포위[* 총독 샴스 알 칼리파 와 이듬해 1차 티레 포위를 이겨낸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1113년 파티마 군은 셀주크 군과 협력해 예루사렘 인근을 습격하였고 1115년엔 자파 탈환을 시도했으나 격퇴되었다. 1117년엔 십자군이 침공해 펠루시움을 점령하는 위기가 닥쳤는데 보두앵 1세가 원정 중 사망하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한편 십자군과 전쟁을 수행하며 알 아흐달은 조세의 이집트의 이크타 (봉토) 개혁을 감행하였는데 이는 살라흐 앗 딘의 집권 시까지 반세기 이상 유지되었다. 비록 여러번 패하긴 했지만 이집트만큼은 안정적으로 지켜낸 알 아흐달은 '잘랄 앗 이슬람' (이슬람의 영광), 나시르 앗 딘 (신앙의 보호자) 등의 칭호가 붙었다. 이븐 알 칼라니시도 그를 군대와 민간 모두에 있어 정의롭고 신앙에 충실한 사람이었다고 기록하였다. 한편 니자리파의 아사신은 니자르를 감금하고 (혹은 생매장해 살해한) 알 아흐달을 증오하였다. 1115년 첫 암살 시도가 있었으나 호위대에 막혔다. 다만 이때부터 알 아흐달은 건강이 악화되어 동생 자파르에게 문서 서명을 맡기고 아들 사마 알 물크를 대리인 겸 후계자로 지목하였다.

1118년 또다른 암살 위기를 넘긴 알 아흐달은 자신의 아들들을 공모자로 의심하였고 그들의 지위와 수입원을 압수하였다. 그러던 1121년 12월 13일, 라마단 마지막 날 예배 도중 알 아흐달은 아사신에게 암살당하였다. 다만 이븐 알 칼라니시는 이를 칼리파 알 아미르와 알 아흐달의 비서인 알 마문 알 바타이히의 사주였다고 기록하였다. 진상을 알 수는 없지만 암살 직후 알 마문은 주인의 시신을 재상 궁전으로 옮겼고 알 아미르에 보고하고 나서야 부고를 공표하였다. 다음날 아침, 알 아미르는 알 마문을 와지르로 봉하여 정무를 맡겼다. 알 마문은 당일 이드 알 피트르 행사를 주관하는 것으로 임기를 시작하였다. 알 아미르의 명에 따라 알 아흐달의 장성한 아들들은 모두 체포되어 감금되었다.[1]

2.2. 알 마문 카이드 알 바타이히

파일:알 아크마르 모스크.jpg
1125년에 완성된 알 아크마르 마스지드 (달의 사원)

알 아흐달의 장례식과 매장은 그 위치에 걸맞게 성대히 치러졌다. 공모 혐의가 있던 알 아미르 역시 공식 석상에선 애도의 모습을 보였다. 동시에 그는 서둘러 알 아흐달의 막대한 재산에 대한 몰수에 나섰다. 그중 그중 유동적인 재산은 모두 자신의 궁전으로 가져왔는데, 알 아흐달이 모은 보물은 전대미문의 규모라 옮기는데만 40일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다만 숙청과 재산 몰수는 알 아미르의 실권 행사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정치에 손을 대지 못하여 복잡한 정국 운영에 익숙치 않았던 알 아미르는 알 아흐달의 오랜 보좌관으로써 정치에 익숙했던 와지르 알 마문에게 정무를 맡겼던 것이다. 다만 그 권세는 전임자들에 비해 약한 편이었다. 알 아미르는 빼앗겼던 여러 권리를 회복하였고 정치에 개입할 수 있었다.

알 마문은 뛰어난 행정가였다. 우선 1119년 알 아흐달이 폐쇄시켰던 다르 알 히크마 (지혜의 집)을 부활시키고 관료들의 봉급을 인상한 그는 카이로-푸스타트의 재건에 나섰다. 11세기 후반의 혼란으로 도시에는 무너진 집이 꽤 있었는데, 알 마문은 그러한 가옥들의 소유자들에게 보수하여 살거나 팔거나 임대할 것을 명하였고 불복할 시에 몰수한다는 정책을 공표하였다. 이로써 카이로는 외관상으로나마 전성기의 모습을 얼추 되찾았다. 그외에 알 마문은 알 아크마르 모스크 (1125년 완공)를 세웠고 동부 궁전에 정원 3개를 추가하였다. 한편 약화된 시아파 사상의 회복을 위해 그는 무함마드, 파티마, 알리, 그리고 알 아미르의 마울리드 (탄신절)를 각각 4일 밤의 축제 휴일로 지정하였다.[2]

한편 알 아흐달의 암살 이후 가장 큰 화두는 조직망을 넓혀가던 니자리파의 위협이었다. 이에 1122년 12월, 무스탈리파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대규모 집회가 소집되었다. 지혜의 집 소장인 아부 무함마드 이븐 아담 등 많은 원료 관료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알 아미르의 고모이자 무스탈리와 니자르의 누이가 장막 뒤에서 알 무스탄시르가 임종 시에 자신에게 후계자로 알 무스타일을 지목했다는 사실을 맹세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알 마문은 법원 서기 아불 카심 알리 이븐 알 사이라피에게 알 무스타일의 정당함을 선포하는 싯질 (서신)을 작성하게 하였고 이집트의 모든 사원의 민바르 (설교대)에서 이를 낭독하게 하는 한편 시리아에도 사본을 보냈다. 이는 다마스쿠스의 니자리파 공동체의 공분을 샀다.[3]

정통성 확립 집회 후 알 아미르는 정치적으로 더욱 활발한 모습을 보였고 특히 외교적으로 돋보였다. 1123년 그는 부왕 알 무스탈리 때와 마찬가지로 예멘의 무스탈리 이스마일파 국가인 술라이히 왕조의 여왕 아르와 앗 술라이히에게 선물을 보냈다. 같은해 시칠리아 왕국과의 전쟁에 돌입한 과거의 제후국 지리 왕조의 아미르 하산이 사절을 파견해 재차 파티마 조의 수위권을 인정하고 노르만에 대한 군사 지원을 청하기도 하는 등 파티마 조의 위상은 어느정도 회복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키레나이카의 루와타 베르베르인들이 이집트를 침공해 알렉산드리아에 당도하였다. 비록 알 마문이 이를 격퇴하였지만 그 틈에 십자군은 막 당도한 베네치아 함대의 도움으로 파티마 해군을 격파하고 레바논 해안에 마지막 남은 파티마 영토인 티레의 포위에 나섰다.

2.3. 친정

1124년 2월, 십자군이 티레를 포위하였다. 알 아미르는 사전에 다마스쿠스의 툭테긴에 부탁하여 수비대를 보충하였고 알레포의 발라크와 함께 십자군에 대한 협공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5월 발라크가 사망하였고 다음달 파견된 파티마 군대는 예루살렘 부근을 약탈하고 돌아가는데 그쳤다. 티레 주민들은 영웅적으로 저항했지만 결국 7월에 항복하였다. 티레의 상실에 구원을 주도했던 알 아미르의 위상은 하락하였고 그 틈에 알 마문은 칼리파의 권한을 다시 축소시키려 하였다. 이에 분노한 알 아미르는 알 마문과 그의 동생, 보좌관들을 체포하게 하였다. (1125년 10월) 그리고 더이상의 재상을 임명하지 않은채 친정에 나섰다. 하지만 반세기간 지속된 허수아비 칼리파 역할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았다.

비록 친정에 나섰지만 여전히 정무에 익숙하지 않았던 알 아미르는 각 부서들의 장관들에 의지했는데, 그 중에서도 기독교도인 아부 나자흐 이븐 판나가 실세로 떠올랐다. 그는 유대인과 같은 기독교도는 물론 기득권층인 무슬림에게도 세금을 수탈하여 칼리파에게 바치며 그의 환심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다만 3년간의 총애 끝에 아부 나자흐는 격하된 후 체포되어 알 마문의 일당과 함께 처형되었다. (1128년) 그럼에도 아부 나자흐의 전횡을 오래간 묵인한 알 아미르의 평판 역시 그의 사치 및 낭비 풍조와 함께 나빠졌다. 알 아미르의 궁정은 매달 5천마리의 양을 소비하였고 총신들에게 주었던 선물 역시 값비싼 것으로 회자되었다. 한편 알 아미르는 30대 중반이 되도록 아들이 없어 후계 걱정에 골머리를 앓았다.

3. 죽음

1130년 2-3월, 마침내 늦둥이 아들 앗 타이브가 태어나자 알 아미르는 매우 기뻐하며 공적인 축제를 열었고 국외에도 후계자의 출생을 알렸다. 그러나 이 정보를 입수한 니자리파의 아사신은 무스탈리파가 계속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음모를 꾸몄고 그해 10월 7일 알 아미르를 암살하였다. 당시 후계자인 앗 타이브는 겨우 6개월 난 아이였고 알 아미르가 와지르나 섭정을 지목하지 못한채 갑작스레 사망하며 겨우 칼리파의 힘을 찾아가던 파티마 조는 존립 자체가 위태롭게 되었다. 알 아미르의 사후 앗 타이브는 기록에서 사라져버렸고 알 아미르의 부인들 중 한명에 의해 그의 사촌 중 가장 연배가 있는 압둘 마지드가 섭정으로 선포되었다.

하지만 이 체제도 얼마안가 알 아흐달의 아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흐마드 쿠타이파트의 쿠데타로 무너졌다. 아흐마드는 파티마 조를 폐하고 열두이맘파 중심 정권을 수립하였다. 다만 그 역시 1131년 12월 파티마 근왕병들에 의해 암살되었고 투옥되었던 압둘 마지드는 풀려나 이번엔 섭정이 아닌 '사라진' 5촌 조카를 대신하여 1132년 1월 칼리파 알 하피즈 리 딘 알라로 즉위하였다. 이로써 세계사상 매우 이례적으로 부자 상속이 계속되던 파티마 왕조도 10대에 그 막을 내리고 방계 혈통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한편 다수의 무스탈리파는 '은둔한' 앗 타이브를 이맘으로 따르며 무스탈리, 니자리파로 갈라졌던 이스마일파는 결국 타이비, 하피지, 니자리로 삼분되었다. 이집트-시리아는 하피지, 예멘은 타이비를 고수하였다.[4]

[1] 다만 그외의 자녀들은 풀려났고 이드 행사에 참가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들 역시 칼리파의 외가 친척이었기 때문이다[2] 이 시기에 돈이나 장미수 등의 향수, 꿀과 견과류 등 단것들이 선물로 제공되었다. 이 모든 것은 국비로 지원되었으며 이후 관례로 정착하였다[3] 니자리파의 계승권 박탈을 공식화한 알 히다야 알 아미리야 문서는 현재까지도 보존되어 있다[4] 이후 예멘의 파티마 조의 다이 아흐마드 알 무카람의 과부 아르와 앗 술라이히가 '이맘의 대리인' (다이 알 무틀라크)가 되어 무스탈리파를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