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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하와 샤트 알 아랍 사이의 시가지
바스라 대교 (일명 이탈리아 다리)
구도심의 운하와 옛 건물
바스라 (이라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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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랍어: البصرة
영어: Basra
이라크 남부에 위치한 도시. 인구는 약 130만명으로 이라크 제3의 도시이다. 알 바스라라고 부르기도 한다. 바스라는 이라크의 유일한 초거대 항구도시로서 특히 석유 관련 운송에 중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수심이 얕아 심해로의 접근은 불가능하여, 그 경우는 걸프 해역에 직접 접한 움카스르 항구에서 처리한다. 중세 시기 번영할 때에는 복잡하게 놓인 운하 때문에 동방의 베네치아라 불리기도 했으나 현재는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오염된 상태이다. 다만 샤트 알 아랍을 이용한 수운은 여전히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이 지역이 격전지 중 하나였는데 이라크 입장에서 여기를 뺏기면 이라크는 내륙국 신세가 되기 때문이다. 내륙국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내륙국은 바다가 없어 갇혀있기에 발전에 좋지 않은데 수도 바그다드가 위치한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강 유역 일대와 산악지대가 많은 북부 쿠르디스탄 지역을 제외하면 사막 지형이 대부분인 이라크는 말이 필요없다. 그래서 이란군과 이 도시와 위성도시 움 카스르를 둘러싸고 격전을 벌여 간신히 사수해 내었다. 이 전쟁은 결국 이란이 무한 버티기로 나가 둘다 원하는 목표를 달성 못하는 상태여서[1] 이란도 이 도시를 손에 넣는데는 실패했었다.
쿠웨이트와 가까우며 실제로 사담 후세인은 오스만 제국 때 쿠웨이트가 바스라 주 소속이었단 것 하나만을 근거로 1990년 쿠웨이트를 무작정 침공했다가 걸프 전쟁에서 패퇴해 쿠웨이트를 토해내야 했을 정도였다.
2. 특징
지리적으로는 페르시아 만에서 55km 떨어져 있고 샤트 알 아랍 수로에 접해 있다. 이 지역은 과거 수메르 문명이 위치했던 곳과 가까운 곳이며 에덴동산의 위치로 추정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초기 이슬람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지역이다.
항구도시면서도 특이하게도 운하 도시다. 샤트 알 아랍 수로에 접해 있기 때문인데, 이리저리 연결된 운하가 도시를 관통하므로 중동의 베네치아라 불리기도 한다. 이 운하들은 20년 전까지는 실제 운송에 사용되었지만 지금은 강 상류 튀르키예의 댐 건설 사업으로 강물의 수량이 부족해져서 수질이 악화되고 운하 운송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실질적 무역항 역할은 위성도시인 움카스르가 행한다. 수로로 접한 항구도시라는 점에서 스페인의 아프리카라고 불리는 세비야와 유사하다.
2.1. 자원의 보고
이라크는 세계 4위의 원유 매장량을 가진 나라인데, 대부분이 바스라 근처에 묻혀있다. 바스라 지역 유전 예상 지역의 80%는 아직 탐사조차 안된 상태. 따라서 인근에 유정이 많다. 현재 키르쿠크, 모술과 함께 바스라와 나시리야가 주 유전지대이며 쿠르디스탄에 위치한데다 튀르키예와 국경 분쟁을 겪는 키르쿠크나 모술과 달리 바스라는 안정된 남부에 위치해 생산에 차질도 없다.[2]그리고 사막이라는 선입견과는 달리 의외로 풍요로운 곡창지대라서 주로 밀, 보리, 쌀, 옥수수, 귀리 등이 산출되고 있으며 가축 또한 생산되고 있다. 곡식 외의 농작물의 경우 오아시스에서 나는 고품질의 대추야자로도 유명하다.
3. 역사
주바이르 동북부에 남아있는 옛 바스라 (البصرة القديمة) 유적
바스라는 수메르의 고대 도시들과 가까이 위치하지만 메소포타미아 문명 시절에는 바다 아래에 존재하던 땅이었다. 이후 수면이 낮아지며 그 자리에 땅이 생기게 되었고 중동 지역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된다.
3.1. 중세
바스라는 636년에 이슬람 제국의 군사 주둔지 (암사르) 및 경비 초소로 건설되었다. 당시 기존 페르시아 도시인 바헤슈타바드 아르다시르의 폐허 위에 주둔지를 건립한 이는 남자 중 7번째로 무슬림이 된 우트바 빈 가즈완이었다. 다만 본격적인 도시가 된 것은 639년, 칼리파 우마르가 5개 구역으로 분할된 원형 도시를 세우면서였다. 바스라의 첫 총독 아부 무사 알 아슈아리는 이곳을 토대로 639-42년 후제스탄 정복을 수행했고, 이후 타와즈를 기반으로 더 내륙에서 싸우던 우스만 이븐 아비 알 아스를 도왔다.페르시아 만에 가깝고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 및 동쪽의 국경에 접근이 쉬운 바스라는 점차 주요한 도시로 성장했다. 정치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거점으로써 이슬람 정복 당시 페르시아 전역의 본부와도 같은 곳이었고, 바스라 총독은 이라크에서 호라산에 이르는 이슬람 제국의 동쪽 절반을 다스리는 중요한 역할이었다. 650년, 칼리파 우스만은 압둘라 빈 아미르를 바스라 총독에 봉했고 동남부 군대 전체의 지휘권을 주었다. 압둘라는 651년, 사산 제국군의 마지막 저항을 분쇄하며 이란을 석권하였다.알리는 그를 해임하고 우스만 빈 하니프, 압둘라 빈 압바스를 연이어 총독으로 봉했다. 656년에는 이슬람 제국의 첫 내전인 1차 피트나가 바스라에서 벌어진 낙타 전투와 함께 시작되었다. 1차 피트나를 거쳐 바스라는 결국 우마이야 왕조령이 되었다. (661년) 우마이야 시기 바스라 총독은 이라크 ~ 호라산의 군대를 통솔하며 시리아의 칼리파를 보좌하는 제국의 2인자 역할을 했다. 664년 바스라 총독에 오른 지야드 이븐 아비 수피얀 (이븐 아비히)는 공포 정치로 이라크를 통제했고, 673년 그의 사후 아들 우바이둘라 빈 지야드가 계승했다.
3.1.1. 우마이야 왕조기
다섯 부족들의 구역으로 이루어진 옛 바스라 지도[3]
우바이둘라는 680년, 야지드 1세의 명을 받아 쿠파로 북상하던 후세인 빈 알리를 저지하기 위해 출정했다. 우선 쿠파를 장악한 그는 후세인이 보낸 사촌 무슬림 빈 아킬을 처형했고, 수천의 병력을 보내어 카르발라에서 후세인 및 70여 일행을 참살했다. 다만 684년 무아위야 2세의 사후 혼란기에 우바이둘라는 칼리파를 칭했다가 주민들의 봉기로 축출되었다. 이후 하심 가문의 압둘라 이븐 알 하리트가 총독으로 선출되었고, 그는 압둘라 이븐 앗 주바이르에 복속하여 바스라의 유력자인 알 무할라브 이븐 아비 수프라와 함께 후제스탄에 기반한 나피 이븐 알 아즈라크 휘하의 카와리즈와 싸웠다. 685년, 압둘라 이븐 앗 주바이르는 우마르 빈 우바이둘라 빈 마아마르에 이어 자신의 동생 무사압을 바스라 총독에 봉했다. 무사압은 687년, 무크타르를 격파하고 이라크를 석권하였다. 다만 691년, 반격에 나선 우마이야 칼리파 아브드 알 말리크가 이라크를 재정복한 후 알 핫자즈 빈 유수프를 총독으로 봉하여 재차 철권 통치 하에 두었다.
701년, 압둘라흐만 이븐 알 아샤트의 반란 시에 바스라는 점령되었다가 사면 조건 하에 핫자즈에 항복했다. 하지만 후자는 약속을 깨고 1만 이상의 주민을 학살했고, 신도시 와시트를 세워 이라크의 새 중심지로 삼았다. 이후 바스라는 714년 핫자즈의 사망 시까지 숨죽인 채로 지냈다. 그러다 720년, 야지드 이븐 알 무할라브가 예멘계 부족들과 반란을 일으키자 바스라 역시 호응했다. 바스라 총독 이븐 아르타트가 그를 막으려 했으나, 성채에서 포위당한 후 항복했다. 다만 야지드는 바빌론 인근 아크르 전투에서 전사했고, 이후 가혹히 숙청을 당한 무할라브 가문은 3차 피트나 당시 압바시야 혁명에 적극 가담했다. 749년 9월, 쿠파 등과 함께 바스라는 압바스 군대에 무혈 접수되었다. 이어진 압바스 왕조기에 이라크 중부가 수도로 정해지며 바스라는 제국의 외항이자 이슬람권 제1의 항구로 번영하게 된다. 한편, 이 무렵 바스라는 오만의 아즈드 부족과 연락을 유지하며 온건 카와리지인 이바디파의 총본산으로써 오만과 마그레브 등지에 인원을 파견해 이바디 이맘국 등을 세운다.[4]
3.1.2. 담수화와 관개 농업
옛 바스라는 샤트 알 아랍에서 15km 나 떨어진 내륙에 위치하여 무역이나 농경이 어려웠기에 경제적 조건이 좋지 않았고, 기존 주거 유적도 없었다. 사하바 장군 알 아흐나프 빈 카이스는 칼리파 우마르에게 다른 무슬림 이주자들은 비옥한 농경지를 얻은 반면 바스라의 경우에는 소금기가 마르지 않고 풀이 나지 않는 갈대밭만 얻었다며 불평했다. 염수와 건조한 사막 사이에 놓인 바스라는 농경과 방목 모두 불가했다. 이러한 악조건에도 바스라는 이라크 제2의 도시로 성장했다. 공공 및 민간 차원에서 자산가들이 농경 인프라 구축을 위해 대규모로 투자했고, 이는 바스라를 식량 생산지로 전환시켜 군인들이 식량을 대가로 봉급을 소비하도록 했다.바스라 일대와 관개 농업 및 담수화를 위해 일반 노동자 및 동아프리카 출신 잔즈 노예들이 동원되었다.[5] 이러한 사업은 당국이 직접 나설 때도 있었지만, 주로 땅만 내어주고 민간 투자자들에게 개발을 맡겼다. H.S. Nelson은 약 4500만 톤의 흙이 옮겨졌고, 이는 최소 2만 5천의 인력이 10년간 일해야 하는 양이라 추정했다. 이로써 샤트 알 아랍과 (현재는 메마른) 티그리스 강의 서쪽 운하 사이에 5만 7천 헥타르에 달하는 농경지가 생겼다.[상세] 하지만 바스라 일대는 지나치게 평탄하여 자연적으로 물이 흐르기 어려운 낮은 경사를 이루었고, 이로써 인위적인 대규모 노동력 없이는 농경을 불가케 하는 염분 퇴적을 씻어낼 수 없었다.
즉, 막대한 노동력을 통해 인위적으로만 일대의 농경지가 유지된 것이다. 따라서 잔즈 반란 시기 노예들이 이탈하고, 역으로 바스라를 함락한 후 수로들을 파괴하자 이라크 남부의 농경지는 염분화와 함께 크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10세기 초에는 카르마트 역시 습격했고, 이로써 바스라 자체도 큰 피해를 겪으며 더이상 관개수로 및 농경지는 관리가 이루어지지 못해 방치되었다. 압바스 조의 쇠퇴 후, 962년 경에는 8천 헥타르의 대추야자 밭 외에 전부 사막화되었다.
3.1.3. 압바스 왕조 하의 번영기
바스라는 8세기부터 9세기까지 이슬람권의 문화적 중심지 중 하나였고, 종교와 문예가 발달하였다. 시내에는 쿠파의 문법 학교와 쌍벽을 이루는 바스라 학교가 들어섰고, 여러 학자들이 활약했다. 그중에는 대학자 알 자히즈, 이븐 알 하이삼, 이슬람 수피즘의 창건자 중 하나인 하산 알 바스리와 여성 수피 라비아 바스리 등이 있었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신밧드 역시 바스라 출신인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3.1.4. 위치 이전
다만 9세기 말엽 흑인 노예 봉기인 잔즈 반란군에게 871년 도시가 함락되고, 923년 카르마트의 파괴를 겪으며 경제적인 쇠퇴와 함께 토양의 염분화 조절이 실패하자 930년경 기존 도시가 버려지고 현 위치에 새 도시를 세웠다. 옛 도시는 현대 주바이르 내에 유적으로 남아있고, 새 도시에는 금요 모스크 (대사원)가 세워졌다. 930년대 중반부터 바스라와 와시트에선 쉬아 호족 아부 압둘라 알 바르디스가 자립해 있었다가, 944년 아들 아불 카심이 계승한 후 947년 부와이 왕조가 정복했다.3.1.5. 부와이 왕조
10세기 중후반 바스라 총독을 맡은 이즈 앗 다울라의 동생 사나드 앗 다울라 알 하바쉬는 1만 5천권의 장서를 자랑하는 거대한 도서관을 건립했다. 983년 아두드 앗 다울라의 사후 그의 아들들이 제국을 분할했다. 다만 상속을 받지 못했던 피루즈샤는 이라크의 삼삼 앗 다울라와 이란의 샤라프 앗 다울라가 다투는 틈에 전자의 영토이던 바스라에서 자립, 디야 앗 다울라를 칭했다. 그는 지발의 파크르 앗 다울라에 복속해 영토를 보전하려 했으나, 986년 샤라프 앗 다울라에게 정복된다. 그후 바스라는 반세기 이상 부와이 령으로 남았다.3.1.6. 셀주크 제국령
11세기 후반, 바스라를 포함한 이라크는 셀주크 제국령이 되었다. 1122년 이마드 앗 딘 장기가 총독으로 부임한 후 1123년 성벽이 둘러졌다. 1126년, 바스라의 반란을 진압한 장기는 이후 모술로 임지를 옮겼고 1129년 마즈야드 후국의 두바이스는 바스라의 국고를 약탈하는 등 도시에 피해를 입혔다. 1131-35년경에는 시리아 아사신 지도자 라시드 앗 딘 시난이 바스라에서 태어났다. 12세기 후반, 바스라는 약 3세기만에 압바스 칼리파령으로 환원되었다.3.2. 중근세
16세기 말엽, 포르투갈이 묘사한 바스라 지도
1258년 몽골 침공기에는 바그다드의 선례를 보고 바로 항복하여 그와 같은 파괴와 학살을 당하지 않았다. 1290년, 바스라의 제노바 상인들이 기벨린 (황제파)과 구엘프 (교황파) 파벌로 나뉘어 내전을 벌였다. 1300년경 맘루크 왕조의 지도에 바스라가 자국령으로 표기되는 등 일 칸국의 지배력은 강하지 않았다. 14세기 중반 바스라를 방문한 이븐 바투타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항구로, 면적이 넓으며 고상한 궁정이 있고 담수와 염수가 만나 독특한 맛을 내는 많은 과실수 정원들이 두드러진다고 묘사했다. 또한 그는 후다일, 바누 하람, 아잠 (이란)의 세 구역 (마할라트)로 구성되어 있다고 기록했다. 이렇듯 바스라는 아랍-페르시아권의 교역창으로써 번영을 이어갔고, 1411년 ~ 1432년까지 잘라이르 왕조의 수도이기도 하였다.
3.2.1. 무가미스 후국
잘라이르 조의 멸망 후 1436년, 쿠파 ~ 바스라 일대에 거주하는 문타피크 연맹의 일부인 알 무가미스 부족이 바스라에서 집권했다. 무가미스 부족은 흑양 왕조, 백양 왕조의 명목상 지배를 받으면서도 후제스탄의 무샤샤 후국[7]에 복속했다. 따라서 1508년, 이스마일 1세가 무샤샤 후국을 복속시키자 바스라 및 무가미스 부족 역시 사파비 제국령이 되었다. 다만 1524년 이스마일 1세의 사후 무가미스 부족은 바스라에 대한 완전한 통치권을 확립하여 자립했다. 다만 쉴레이만 1세의 오스만 제국군이 바그다드를 정복하자 1536년 부족장 라쉬드 빈 무가미스는 그에게 명목상 복속하여 총독으로 봉해졌다. 다만 오스만령 이라크는 자체적인 수조권 및 군대를 갖는 등 강한 자치권을 누렸고, 바스라 에얄레트는 특히 코스탄티니예에서 더 멀어 사실상 독립 상태였다. 그러던 1546년, 바스라 인근 자키야의 호족과 무샤샤 후국 간의 부족 분쟁을 틈타 오스만 군대가 파견된 후로 바스라에 대한 중앙의 통제권이 조금이나마 강화되었다.16세기 들어 바스라는 성장하는 인도양 교역, 이슬람 순례길 등의 이유로 지정학적으로 중요성이 커졌다. 우선 시리아-이라크와 인도를 이어주어 상인들이 자주 왕래했고 이슬람권 동부의 무슬림들에게 메카, 메디나 뿐만 아니라 쉬아 성지인 나자프, 카르발라의 방문 시에도 바스라는 꼭 거치는 중간 거점이었다. 따라서 오스만, 사파비 양 제국이 모두 소유권을 주장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현지인들의 수중에 있었다. 한편 1523년 안토니우 텐레이루 휘하의 포르투갈 상단이 알레포에서 바스라까지 여행한 이후 포르투갈인들은 바스라에 종종 왕래했다. 1550년에는 무가미스 가문의 바스라 총독이 조정에 대항하여 포르투갈 측에 동맹을 맺었고, 이후로 포르투갈은 몇 차례 바스라를 점령하겠다며 엄포를 놓거나 무력 행사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다 1595년에 포르투갈은 당시에 충돌하던 사파비 조에 맞서 오스만령 바스라와 방위 협정을 맺았고, 실제로 1624년 아바스 1세가 바스라를 공격했을 때에 수비대를 도와 수성을 성공시켰다. 그 대가로 포르투갈은 관세의 면제 및 그 일부를 할당받는 특권을 얻었다.
3.2.2. 아프라시얍 가문
1596년, 당시 바스라 총독 알리 파샤는 작위를 셀주크 제국의 후예인 튀르트계 수니파 상인 아프라시얍에 매각했다. 이후 아프라시얍 가문이 70년 이상 바스라 총독위를 세습했다. 한편 17세기 들어 사파비 조의 샤 아바스 1세는 자신이 세운 항구 도시인 반다르아바스의 경쟁 도시인 바스라에 대해 1624년, 1625년, 1628–1629년 등 여러 차례 정복 시도를 했으나 포르투갈 측이 개입했고 다른 전선이 급해지며 점령하지 못했다. 그리고 1639년 바스라의 오스만 지배를 인정한 주하브 조약 이후로는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한편 1624년 사파비 조의 바그다드 점령 후 바스라와 습지 지대는 오스만 및 사파비 조 모두에게서 독립적인 현지 부족장들의 통치 하에 놓였다. 오스만 조는 바그다드를 수복하고도 30여년이 지난 1668년에야 무력으로 아프라시얍 가문을 복속시키고 바스라를 수복할 수 있었다.16-18세기 이라크는 북부의 쿠르드, 남부 (사와드)의 베두인들로 인해 카라반의 통행이 안전하지 않았다. 여기에 남부 지방의 기후는 건강에 나쁠 정도로 더웠고, 바스라 등지는 종종 치명적인 역병을 겪었다. 여기에 당시까지 수니파가 다수였고 이란 고원과 분리된 메소포타미아 충적분지가 방어에 적합히지 않았기에[8] 군대가 약하고 군주는 무기력한 상태였던 사파비 조는 한동안 바스라를 포함한 이라크를 노리지 못했다. 1667년, 오스만 조정이 아프라시얍 가문의 바스라 총독 후세인 파샤를 토벌하자 그는 주민들을 사파비 영토로 피신시키고는 사파비 조에 바스라 점령을 제안했다. 하지만 샤 솔레이만 1세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기에 응하지 않았다. 이렇듯 이라크 남부의 분쟁이 사파비 조에 흘러들었음에도 개입하지 않는 등 당시 사파비 조는 모험을 꺼렸다. 따라서 1668년 오스만령 바그다드 총독이 바스라에 대한 통제권을 확립했다.
3.2.3. 사파비령 (1697 ~ 1701)
한편 바스라는 갈 수록 사파비 조와의 경제적 교류가 밀접해졌다. 실제로 발굴 결과 17세기 중반의 사파비, 무굴 주화가 다수 발견되었다. 특히 쉬아 순례객 및 무역 등의 이유로 이란과의 관계가 깊었고, 남부 이라크의 정세 불안은 사파비 조에게 침공의 동기를 제공했다. 여기에 오스만 당국은 나자프 및 카르발라 순례를 위해 바스라에 당도하는 이란 순례객들을 종종 박대했고, 그럴 때마다 양측의 긴장감은 올라가 간혹 사파비 조가 순례객들의 바스라 경유를 아예 금하기도 할 정도였다. 1683년, 오스만 제국이 대튀르크 전쟁으로 유럽 전선에 묶인 틈에야 사파비 조는 재차 바스라 점령을 시도했으나 그맞저도 실패했다. 그러던 1695년에 즉위한 술탄 호세인은 전임자들과 달리 이란 쉬아 무슬림들의 나자프 & 카르발라 순례를 적극 장려했고, 유례없는 수의 행렬이 이라크로 향했다. 동시에 그는 이라크의 성지들을 회복하겠다는 의지가 강했고, 따라서 첫 관문인 바스라에 대한 야욕을 더욱 드러냈다. 마침 남부 이라크의 정세도 어지러웠다.1690년, 기근 및 역병 창궐과 함께 셰이크 마네 빈 무가미스 휘하의 문타피크 부족이 이라크 남부에서 소요를 일으켰다. 이는 곧 조정에 대한 반란으로 이어졌고, 오스만측 토벌군도 격퇴되었다. 한편 1694년에는 솔레이만 1세가 사망하고 좀더 적극적인 솔탄 호세인이 즉위한다. 그리고 1695년, 그는 현지인들의 호응 및 무샤샤 술탄 겸 후제스탄 (아라베스탄) 총독 파라졸라 칸의 조카 세이드 마흐무드 휘하 5천의 병력으로 오스만 총독 및 주둔군을 축출하고 바스라를 장악했다. 이후 2년여간 셰이크 마네는 관용적인 통치로 지지를 받았다. 다만 사파비 측은 반군이 봉기 도중 인근의 이란 순례단을 약탈한 것에 불만을 표했고, 사파비령 후제스탄 총독 파라졸라 칸 역시 무샤샤 후국과 무가미스 부족 간의 연대를 우려했다. 따라서 파르졸라 칸은 비밀리에 선제 타격을 준비했고, 여전히 자신에 충성하는 무샤샤 군대와 함께 출정하여 셰이크 마네 및 세이드 마흐무드 연합군과 충돌했다.
결과는 파르졸라 칸의 승리였고, 무샤샤 후국은 재차 사파비 왕조 명의로 바스라를 점령했다. 다만 셰이크 마네가 바스라 수복 및 후제스탄의 주도 호베이제를 노린다 여긴 술탄 후세인은 칙령을 내려 로레스탄의 파일리 부족장 겸 코흐길루예 총독 알리 마르단 칸에게 바스라 진격을 명했고, 후자는 1697년 3월 26일에 바스라를 접수하여 총독이 되었다. 이로써 바스라는 사파비 왕조 직할령이 되었고, 얼마 후 알리 마르단 칸은 다우라크 (현 샤데간) 총독 에브라힘 칸으로 교체되었다. 다만 여전히 사파비 조는 약한 군대로 오스만 제국과의 전면전은 꺼렸고, 바스라에 대한 지배권을 대외적으로 주장하지도 않는 등 오스만 제국을 자극하지 않는 평화 노선을 추구했다. 또한 쿠르드계 바반 후국의 술레이만 바바가 아르달란 후국 및 우르미아를 함락하는 등 이란 서부를 위협하자, 사파비 조는 양면 전선을 떠안게 되었다.
그리고 1697년 말엽, 셰이크 마네가 (졸지에 바스라를 잃은) 파르졸라 칸과 화해하고 사파비 조를 이탈한 무샤샤 병력과 함께 쿠르마 성채에서 사파비 대군을 격파하자 술탄 호세인은 바스라 포기를 결심했다. 따라서 상징적인 의미로 바스라 성문의 순금 열쇠를 제작해 사절 로스탐 칸 잔가네를 통해 코스탄티니예의 술탄 무스타파 2세에 전달했고, 이에 오스만 측도 이스파한에 2차례 사절을 보냈다. (1698년 12월, 1699년 4월) 그때마다 사파비 측은 환대하며 바스라 환원의 뜻을 밝혔으나, 셰이크 마네가 차지할까 우려하며 바로 돌려주지 않았다. 그러던 1700년 초엽, 셰이크 마네가 바스라 성 앞에 나타나 500 토만의 조공을 요구했다. 병력이 부족했던 총독 에브라힘 칸은 우선 300 토만을 주며 그를 돌려보냈고, 코흐길루예로부터 6천의 병력을 증원받았다.
다만 이후로도 아랍 부족들이 계속 바스라를 위협, 근교를 습격하자 술탄 호세인은 에브라힘 칸을 해임하고 기존의 쿠르나 태수이던 다부드 칸으로 교체했다. 그럼에도 바스라에 대한 아랍 부족들의 봉쇄는 계속되었고, 이로써 시내에는 기근이 발생했다. 사태가 악화되던 1701년 2월, 급여 체납에 불만이 쌓이던 6천의 사파비 수비대는 오스만 대군의 남하 소식에 반란을 일으켜 물자를 약탈했다. 3월 9일, 오스만 측이 임명한 바스라 총독 알리 파샤 및 바그다드 & 키르쿠크 & 시바스 총독 등이 이끄는 3만 대군이 근처에 당도하여 항복을 요구하자 다부드 칸은 수비대와 함께 미리 준비시켜 둔 배를 타고 떠났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알리 파샤가 입성했고, 이로써 바스라는 6년만에 오스만 조정의 직할령이 되었다. 4년간 이어진 사파비 지배기에 바스라는 총독 에브라힘 칸 하에서 안정을 누렸다. 당대 유럽인들의 기록은 무역을 진흥시켰다는 평가와 무역이 쇠퇴했다는 평가가 공존한다.
3.3. 이라크 맘루크 왕조
비록 1701년 후 다시 얼마 안가 무가미스 부족이 자립했지만, 1708년 바그다드 총독 하산 파샤가 점령한 후 자신의 수하를 태수 (왈리)로 봉하였다. 바스라는 뒤이어 하산 파샤에게서 시작된 이라크 맘루크 왕조의 지배 하에 놓였다. 18세게 전반, 바스라는 유례없는 평화를 누렸다. 하산 파샤의 아들 아흐마드 파샤는 사위 술레이만 파샤 아부 라일라를 바스라 태수로 봉했고, 그는 1749년 정변을 일으켜 조정이 임명한 바그다드 총독 티르야키 하즈 메흐메트 파샤를 축출한 후 이라크 맘루크 정권을 공고히 했다. 술레이만 파샤는 세력을 키우던 문타피크 등 여러 부족들을 제압하고 바스라를 완전히 바그다드 정권 하에 두었다. 1762년 그의 사후 분쟁 끝에 바스라 태수이던 알리 파샤가 조정의 지지 하에 바그다드 총독에 올랐다. 1763년, 바스라에 영국 동인도 회사의 상관 건설을 허가했다. 하지만 그는 7인 중 유일하게 캅카스 출신이 아니었고 페르시아계였기에 불만을 자아냈고, 아흐마드 파샤의 아들인 우마르 파샤가 정변을 일으켜 찬탈했다.3.3.1. 잔드 왕조령 (1776 ~ 1779)
한편, 1763년 약 39세의 나이로 바스라 태수에 오른 술레이만 아가가는 여러 행정 개혁을 단행하여 지지를 받았다. 바그다드에 이어 1774년 바스라에 아브 자프지르란 역병이 돌았고, 순니 학자 셰이크 아흐마드 바쉬 아얀을 포함한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태수 쉴레이만 아가는 병자 및 발병 구역들을 격리하고 위원회 및 기병대를 구성해 치료약이라 여겨진 마늘을 먹게 하는 등의 대책을 내놓았다. 또한 그는 대추야자도 효과가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고 한다. 이렇게 상황이 호전되던 1775년, 잔드 왕조 군주 카림 칸의 동생 사디크 칸이 바스라를 공격해왔다. 술레이만 아가의 강한 저항에도 가뭄과 기근으로 주민들이 개, 고양이, 죽은 동물들의 사체를 먹는 지경에 이르며 여럿이 사망하는 등 상황이 어려워졌다. 오만, 영국측 원군도 바스라 구원에는 살패하고 회군하였다.그러자 술탄 압뒬하미트 1세는 아스피나크지 무스타파 파샤를 새 바그다드 총독에 봉하며 바스라 구원을 명했지만, 이 역시 카자일 부족에게 격퇴되자 결국 무스타파 파샤는 술레이만 아가에게 항복을 명하였다. 이로써 14개월 간의 공방전 끝에 1776년 바스라는 점령되어 술레이만 아가 등은 쉬라즈로 유배되었다. 잔드 군대는 상점들을 약탈했고, 이때 아편을 비롯한 고가품이 모두 몰수되었다고 한다. 한편 바스라 함락에 분노한 조정은 9개월만에 새 바그다드 총독으로 현지 맘루크 출신의 미르미란 (대장) 카브키 압디 파샤를 봉하였고, 해임된 무스타파 파샤는 살해되어 수급이 조정에 보내졌다. 다만 압디 파샤는 역시 부임 직후 나선 바스라 구원에 실패한 후 해임되었다. 이후 아흐마드 파샤의 또다른 사위인 압둘라 파샤가 바그다드 총독에 부임하며 자산, 바드란 등 일부 실지를 회복하고 바스라를 더욱 압박했다.
그러나 그의 재무관 무함마드 아젬이 바스라 원정을 위해 조정에서 하사한 재물을 횡령하는 등 내각은 부패했고, 1778년 압둘라 파샤의 사후 바그다드는 내전에 돌입했다.[9] 한편, 잔드 조는 바스라 쉬아 공동체의 아크바리 열두이맘파를 우술리 교리로 바꾸려 했으나 3년에 걸친 지배로 실현되지 못했다. 그리고 1779년, 카림 칸의 사후 잔드 조가 내전에 휩싸인 틈을 타 문타피크 부족장 타메르가 바스라 총독 알리 모하마드 칸의 복속 요구를 거부하고 그를 전사시키는 공을 세웠다. (파딜리야 전투) 후임 총독인 모하마드 알리 칸 역시 조공 및 1~3대 칼리파 저주를 요구하다가 베두인 연합군에 패하고 전사했다. (아부 할라나 전투) 이후 바스라의 사디크 칸이 내전 참가를 위해 철수하자, 바그다드의 하산 파샤는 휘하의 누만 베이를 바스라 태수에 봉하였다. 누만 베이는 수니파 교리를 회복시키고 성벽을 재건했다. 이후 바스라에선 문타피크 부족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3.3.2. 연이은 반란
1779년, 3년간 쉬라즈에 갇혀 있었다가 석방된 술레이만 아가는 바스라 인근 하위지야에 당도하여 자신의 통치가 번복된 적이 없다며 지배권을 요구했지만 효력이 없자 조정에 상소했다. 기다림 끝에 조정의 책봉을 받은 술레이만 아가는 베이로 승격되며 바스라 태수가 되었다. 그리고 옛 권신 무함마드 아젬의 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하산 파샤가 축출되자 술레이만 베이는 조정에 의해 바그다드 총독에 봉해져 술레이만 파샤로써 20여년간 안정적으로 이라크를 통치한다. 1786년 이라크에는 극심한 가뭄 (카스바크, خصباك)으로 인한 기근과 역병이 돌았고, 사우디령 카심 태수 후질란 빈 하마드가 하일에서 바스라로 향하던 상단을 공격해 물품을 빼앗고 상인들을 죽였다. 이에 문타피크 부족장 투와이니가 부족 연합군과 남하하여 타누마를 함락, 뒤이어 부라이다를 포위하는 등 보복하였다. 다만 바그다드에서 반란을 일으켜 축출된 우바이드 부족장 술레이만 앗 샤위가 망명해오자 투와이니는 회군하였고, 카자일 부족장 하마드 알 하무드를 초청해 베두인 연합군을 결성했다.이들은 주바이르에 주둔하며 바스라에도 병력을 보냈다. 이에 바스라 태수 이브라힘 베이가 갑자기 군대가 모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주바이르로 오자, 투와이니는 그를 체포했다. (1787년 봄) 그후 투와이니는 5천의 병력으로 바스라 및 그 함대를 무혈 접수하였다. 제독 겸 태수 이브라힘 에펜디는 배에 태워 무스카트로 보내졌다. 한편 투와이니는 식량을 비축하고 독점업자 30여명을 처형하는 등 시장을 통제하여 바스라의 기근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특히 셰이크 무함마드 빈 압둘라 알 파이루즈의 감독 하에 도둑을 처형할 교수대 13개를 설치했고 병자들을 주거지에서 격리했으며 프랑스 주재원과 협상하여 프랑스 의료진의 왕진을 받았다. 또한 투와이니의 지배 하에 대외무역이 활성화되었기에 바스라의 기근은 곧 해결되었다. 투와이니는 조정에 바스라 태수직의 공식 임명을 청했지만 주민들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반란 일으킨 아랍인'에 대한 책봉은 없었다. 셀림 3세는 사절로 파견된 바스라의 무프티를 죽이려 했고, 그는 야밤에 도주하여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1787년 가을, 술레이만 파샤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남하했고 투와이니의 경쟁자인 카압 부족장 하무드와 연합했다. 이에 투와이니는 그외에도 아랍, 페르시아인은 물론 바반 후국 등 쿠르드 지원군까지 합쳐 6천여 병력을 편성했다. 한편 남하 도중 술레이만 파샤는 카자일 부족을 잔혹히 격파했고, 카자일 부족장 하마드 알 하무드는 패잔병과 함께 투와이니에게로 피신했다. 그러자 부친의 원수를 받아준 것에 분노한 투와이니의 조카 하무드 빈 타메르는 불만을 품고 전투 직전, 술레이만 파샤에게 망명했다. 뒤이어 벌어진 바스라 인근의 움물 한타 전투에서 양측 모두 대포까지 동원하여 4일간 격돌했다. 부족 연합군은 1천 이상, 맘루크 군은 5백여 명이 전사했다. 결과적으로 패배한데다 부상까지 입은 투와이니는 다른 두 부족장들과 쿠웨이트 토후국에 망명하여 자흐라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투와이니는 사죄 서신을 보냈지만 술레이만 파샤는 거부하고 하무드와 무스타파 아가 알 쿠르디를 각각 문타피크 부족장 및 바스라 태수에 봉했다.
동시에 바스라에는 무거운 벌금형에 내려졌고, 남은 해동안 생필품 등에 대해 관세가 2배로 매겨졌다. 할당된 벌금을 내지 못한 주민들은 고문과 감금에 처해졌고, 여인들은 벌금 마련을 위해 혼수품과 가구까지 팔아야 했다. 심지어 아이까지 2토만에 팔았다는 증언도 있다. 한편 술레이만 파샤는 무스타파 아가 휘하에 일단의 맘루크와 비정규군인 레벤드 남기고 회군했다. 하지만 1787년 말엽, 신임 태수 무스타파 아가는 장교들을 돈과 선물로 매수 및 포섭하고 투와이니에게 부족장 복위를 약속하며 반란을 꾀했다. 이에 술레이만 파샤는 투와이니에게 화해 의사를 전하고 무스타파 아가에게 우바이드 부족장 무함마드 앗 샤위를 통해 서신을 전달하며 경고하개 했다. 동시에 그는 바스라 주둔 기병대의 바그다드 이전을 명하고 제독 무스타파 히자지에게 무스타파 아가를 무혈로 사로잡되, 불가하다면 죽이라는 밀명을 내렸다. 하지만 이는 말각되어 무스타파 아가가 무스타파 히자지를 죽였고, 납세를 거부하며 반란을 선포했다. (1788년 1월)
소식을 들은 술레이만 파샤는 신속히 군대와 남하했고,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던 무스타파 아가는 동생 마루프 아가 및 50여 튀르크 기병대와 최대한 많은 재물을 챙겨 쿠웨이트령 자흐라로 망명했다. 가만히 있다가 부자가 된 쿠웨이트의 셰이크 압둘라 알 사바는 망명자들과 재물을 인도하라는 술레이만 파샤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에 술레이만 파샤는 셰이크와 친분이 있던 바스라의 영국 동인도 회사 주재부에 중재를 부탁했지만, 침공 가능성에도 압둘라 알 사바는 손님을 지키려면 전쟁도 불사하겠다며 맞섰다. 그러면서 망명객들이 쿠웨이트에 있는 한 바스라를 공격할 일은 없을 것이라 말했지만 술레이만 파샤의 분노를 잠재울 수는 없었다. 한편 1788년, 사우디로 진격했다가 패배한 후 쿠웨이트와 바스라 사이의 사프완에 주둔하던 투와이니는 무스타파 아가와 자흐라에서 합류한 후 바스라를 공격했다.
하지만 신임 태수 겸 문타피크 부족장 하무드가 주바이르 부족군과 함께 사프완에서 격파했고, 패배한 투와이니와 무스타파 아가는 각각 후제스탄과 메카로 망명했다. 술레이만 파샤는 쿠웨이트 측이 제공한 무스타파 아가의 재물 일부를 받고는 회군했다. 알 아흐사, 디리야, 다시 쿠웨이트로 망명을 전전하던 투와이니는 셰이크 압둘라의 조언대로 그의 중재 하에 바그다드로 향하여 용서를 빈 후 파샤와 술탄의 사면을 받았다. 격동의 1780년대가 지나고 1790년대 중반까지는 한동안 이라크는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한편 가택연금에 처해졌던 투와이니는 파샤의 의중을 꿰뚫어 보곤 사우디 토벌에 지원하여 바스라와 주바이르 일대의 부족 연합군을 꾸려 1792년에 남하했으나 알 아흐사 지역에서 암살되며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1798년 말에는 술레이만 파샤의 맏사위 알리 파샤가 바스라에 예니체리 및 부족 연합군 등 1만 병력을 집결시켜 이듬해 남하했으나 사막 기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대치하다가 휴전을 맺고 회군했다.
3.4. 근대
바스라 구도심의 고택들
사우디 국왕 압둘아지즈는 1799년의 협상 시에 바스라를 포함한 유프라테스 서안의 영토를 요구하는 등 이라크에 야욕을 보였고, 1802년에 사우디 군이 일시적으로 카르발라를 함락하는 등 위세를 떨쳤다. 1807년에 사우디 군은 나자프 함락에 실패한 후 바스라 인근의 주바이르를 공격했고, 부족 연합군이 반격한 후에야 회군했다. 사우디의 위협은 디리야 토후국이 멸망하는 1810년대에야 종식되었다. 한편 1810년, 재차 조정이 임명한 맘루크계 바그다드 총독 압둘라 파샤는 술레이만 파샤의 아들 무함마드 사이드 베이와 문타피크 부족장 하무드의 반란에 직면했다. 1812년 말엽, 압둘라 파샤가 토벌에 나서자 바스라 역시 8척의 수송 선단을 보태었다. 다만 이듬해 초엽의 글리윈 (수크 슈유크) 전투는 반군의 승리였고, 압둘라 파샤가 처형된 후 사이드 베이가 사이드 파샤로써 바그다드 총독에 올랐다.
하무드에 의존하던 사이드 파사는 바스라의 재정으로 문타피크 부족의 약탈 피해를 갚아주었고, 그가 뒤이어 결혼하자 아예 바스라 등 샤트 알 아랍 연안의 도시들에 대한 수조권을 내주었다. 이는 매년 양 2만 마리에 달하는 수준이었고, 이라크 전체 세수의 1/3에 달했다. 이로써 하무드가 술탄으로 불릴 정도로 위세를 떨치자, 샴마르와 카자일 등 적대 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혼란 속에서 술레이만 파샤의 사위인 다우드 파샤가 조정의 책봉을 받은 후 1816년에 반란을 일으켜 집권했고, 외세 격퇴 및 문타피크 부족 제압과 근대화에 나서는 등 개혁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1831년 오스만 중앙군에게 바그다드가 점령되며 맘루크 이라크 정권이 붕괴하였다. 그후 바스라는 한세기 가까이 오스만 지배 하에 안정을 누렸다. 이미 17 ~ 18세기에 영국, 네덜란드, 포르투갈의 무역상들이 들어와 국제적 도시가 되었던 바스라는 비록 19세기 들어 쿠웨이트와 경쟁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남부 이라크와 걸프의 최대 도시였다. 20세기 초까지 걸프 혹은 페르시아 만은 '바스라 만으로도 불렸다.
3.5. 근현대
영국 위임 통치기의 우표 |
본래 탄지마트 개혁 시기 바그다드 빌라예트에 편성됐던 바스라는, 쉬아 주민들의 탄원으로 1884년에 독자적인 바스라 빌라예트로 분리되었다. 1911년 기준 바스라 빌라예트에는 약 6천의 기독교도 및 4천의 유대교도 주민이 있었다 한다. 튀르크 주민은 주둔군 뿐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4년 11월에 영국에 의해 점령당했다. 뒤이은 영국의 위임통치 기간 동안 바스라는 제국주의의 중동 거점으로 성장하였다. 1947년 기준 인구는 약 10만명이었고 1957년 20만으로 10년새 2배로 늘었다. 1964년에는 바스라 대학이 설립되었고, 석유 산업 도시로의 발전 및 이촌향도로 1977년에 150만을 찍은 인구는 이란-이라크 전쟁기 거듭된 폭격으로 40만까지 줄기도 했다.
1970년대, 샤트 알 아랍 강변의 바스라 시가지 |
전후 사담 후세인은 바스라의 샤트 알 아랍을 따라 이란을 가리키는 99개의 전몰자 추모 동상을 건립했다. 그럼에도 바스라는 반정권 운동의 거점이 되며 1991년과 1999년 봉기를 일으켰고, 걸프전 후 비행 금지 구역이 설치되었다. 이는 1999년 1월에 미군의 오폭으로 11명의 민간인이 숨지는 참사로 이어졌다.
아무래도 국경과 가까운 데다가 주요 항구도시이다 보니 근대 및 현대에도 이래저래 전쟁이나 혁명에 휩쓸린 이력이 있다. 근현대에서의 바스라와 관련된 주요 역사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 제1차 세계 대전
영국과 오스만 제국 간에 바스라 전투가 있었다. 전투에서 승리한 영국이 바스라를 점령하였다. - 제2차 세계 대전
러시아로의 보급물자의 많은 부분을 담당하는 중요한 항구 역할을 했다. - 이란-이라크 전쟁
심심하면 이란의 포격을 받았고, "라마단 작전"이나 "카르발라 5 작전" 같은 여러 격렬한 전투의 전장이 되었다. - 걸프전(1991)
제 2의 도시이므로 당연히 전쟁에 휘말렸고 수많은 유적과 시가지가 파괴되었다. 걸프전 중에 일어난 전투 중, 쿠르스크 전투 이후 최대의 전차전이라 불리는 "메디나 능선 전투(Battle of Medina Ridge)"의 무대가 바스라 근처이다. - 반정부 봉기(1991, 1999)
걸프전 후에는 바스라가 사담 후세인에 반대하는 장교들이 이끄는 저항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지만 이 저항은 폭압적으로 진압되었다. 1999년에 다시 한번 저항 운동이 일어났지만 이 역시 대량 처형 등을 통해 진압되었다. - 이라크 전쟁(2003)
바스라 외곽이 초기 이라크 전의 격전지가 되었다. 이라크군 400여, 다국적군 11명이 전사했다. - 바스라 전투(2008)
반미 무장단체인 메흐디 민병대를 바스라로부터 몰아내기 위해 이라크군이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 6일간에 걸친 전투에서 1,000명의 사상자가 났다.
3.6. 현대
자유 광장의 야경
시내 풍경
사담 후세인 정권 말엽, 잦은 반란으로 정권이 대신 움카스르를 무역 거점으로 개발하는 등 소외되었던 바스라는 2003년 바트당 정권의 붕괴 후 중요성을 되찾았다. 다만 2003년 4월 ~ 2007년까지 이어진 영국군의 군정 하에서 74명이 죽은 2004년 5월의 테러와 2005년 7월의 석유 노조 파업 등 여러 불상사가 있었다. 이후로도 2008년의 내전을 겪고 2018년 식수 관련 시위로 10명 이상의 시위대가 사망하는 난관이 있었지만 점차 안정을 찾았다. 특히 2013년에 완공된 바스라 스포츠 시티는 2023년, 제25회 아라비안 걸프컵 이라크을 성공적으로 개최하였다.
4. 기후
북쪽 시리아와는 다르게 아라비아 사막에 있다보니 당연히 날씨가 매우 덥다. 특히 바스라 일대는 아랍 지역에서도 가장 더운 지역 중 하나이다. 눈은 꿈도 못꿀 정도이다.쾨펜의 기후 구분으로는 더운 사막기후(BWh)에 속한다. 그나마 해안에 접해있기 때문에 내륙의 도시보다는 강수량이 약간 많은 편.
7월의 평균 기온은 34°C로 사막의 높은 일교차를 생각해 보아도 매우 높은 편이고, 평균 최고 기온은 41°C에 달한다. 이 경우 체온보다 높은 기온이기 때문에 선풍기를 쐬면 더 덥다. 덥다기보단 뜨겁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당연히 한국에서 제일 더운 대구광역시 정도는 그냥 쌈싸먹는다. 스페인에서 유일하게 겨울에도 더운 세비야보다도 덥다. 바스라 등 남부 이라크 일대는 덥다고 알려진 아프리카 어지간한 곳보다 덥다.[10] 그나마 습도가 동부 아시아보단 낮다는게 위안이면 위안.
한겨울인 1월달의 최저 기온 평균은 12°C, 낮 기온은 18°C 정도로서 평균 13도로 서울의 4월 기온, 아열대인 홍콩 및 타이베이의 1월 한겨울 기온과 비슷하다.
1921년 7월 8일에 58.8°C를 기록, 사람이 거주하는 지역의 기온으로 최고기록.
이렇게 어마무시한 날씨는 덥다기보단 뜨겁다고 해야 맞을 정도인데 옆의 쿠웨이트도 이와 비슷한 날씨를 보인다.
5. 석유 중심 경제
바스라의 쇼핑몰
길거리 풍경
이라크라는 나라가 그렇듯이, 이 도시도 주로 석유가 주 수입원이다. 이라크 최대의 유전 중 몇 개가 이 근처에 있고[11] 대부분의 석유 수출분이 이 도시의 알 바스라 석유 터미널에서 출항한다. 직접적인 원유 산업뿐만 아니라 관련 석유화학 산업도 있어서 폴리에틸렌이나 PVC 같은 석유 화학 제품을 생산하기도 한다.
석유 덕분에 운송 및 물류 산업도 발달했다. 바스라는 이라크의 6개 항구 모두에 대한 근거지인데, 이들 항구 중 움 카스르(Umm Qasr)가 가장 크다.
허나 석유의 주산지임에도 불구하고, 오랜 전쟁으로 인하여 파괴된 기반시설 복구 부진 등 정부의 무능이 장기화 됨에 따라, 2018년 소요사태가 일어났다. 산유국임에도 석유값이 비싸 에너지가 모자라는 상황은 베네수엘라와 비슷하다.
향후 시내 중심부에 대대적인 개발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이른바 이라크의 맨해튼을 만들려는 계획이다.
6. 기타
- 이곳은 한번도 ISIL에게 점령당하지 않았다. 이라크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 최후방이기 때문. 현재 이라크 내 ISIL이 거의 소탕된 상태라 과거 전쟁이 있었지만 이제는 축복의 도시라고 불린다. 아직도 정국이 불안한 모술이나 바그다드를 대체할 이라크 경제의 미래로 전망된다.
- 역시나 대항해시대로 꽤나 잘 알려진 도시이다. 대항온에서는 우르를 끼고 있기 때문에 아덴에서 줄기차게 드나들어야 한다.
- 범우사의 아라비안 나이트에서는 '바소라'로 오역되었다. 중역의 폐해로 추정된다.
- 1991년 도라에몽 극장판 도라비안 나이트에서 하룬 알 라시드 왕의 친필 통행증서를 받으면서 8세기 당시의 바스라 항구으로 가는 장면에 등장한다.
7. 갤러리
[1] 애당초 인구라든지 경제력이라든지 국력이라든지 군사력이라든지 모든 면에서 이라크가 이란에 열세였다. 이란혁명 이후 미국과 이란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된 틈을 타서 이라크의 후세인이 무모하게 선빵을 날렸다가 발리다시피한 전쟁이었다. 당시 이라크는 주로 소련제 구식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으나 이란은 당시로써는 최첨단 미국제 전투기 F-14를 보유하고 있었다.[2] 모술 그리고 키르쿠크 등은 튀르키예가 과거 오스만 제국 때 행정구역이었다는 것과 튀르크계 주민이 일부 거주한다는 것을 근거로 영유권을 주장 중이다.[3] 무할라브 가문은 아즈드 부족 소속[4] 719년 바스라의 카와리지 공동체에서 카이로우안으로 선교사 살마 빈 사드가 파견된 것을 시작으로 카와리지파는 베르베르인 사이에서 빠르게 퍼졌다.[5] 잔즈 노예만 동원되었다는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그들은 일부였다[상세] 관개 수로의 양옆에는 2m 높이의 둑이 있었고, 소금기 가득한 둑에는 20cm 두께의 염분층이 있었다. 인근에는 염분에 저항이 강한 풀들이 자랐다. 당대 사가들이 기록한 잔즈 노예들이 소금층을 깨어 만든 수로들은 현재도 흔적이 남아있다.[7] 종종 후제스탄 총독 하에서 남부 이라크의 아랍 부족들과 대리전을 치르는 등 사파비 조에 중요한 동맹이었다. 다만 평화 시기에 무샤샤 후국은 양 제국 사이의 완충지였다.[8] 또한 이란-아나톨리아 고원에 특화된 키질바시 역시 게릴라, 매복 후 산지로 치고 빠지는 전술과 전혀 다른 회전 형식의 평원 및 늡지 전투에 능하지 못했다[9] 약 반년 후, 조정이 봉한 카르쿠클리 하산 파샤가 집권한다.[10] 사실 아프리카는 덥다는 인식이 있지만 이는 사하라 사막 등 북아프리카 일부의 이미지에 불과하고 적도 근처는 의외로 비가 자주 와서 그렇게 덥지 않다. 아시아에 비해서 아프리카는 대륙 서안이라 건조한 편이라 그늘에 들어가면 쾌적하기까지 하다.[11] 키르쿠크, 모술 그리고 이 바스라와 나시리아 등이 이라크의 주요 유전지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