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this['this'] == null
'''이 문서는'''#!if this['this'] != null
'''이 문단은'''#!if 토론주소2 == null
''' [[https://namu.wiki/thread/PicayuneGullibleWiryHobbies|토론]]을 통해 현행 표제어와 같이 튀르키예어 고유명사 표기시 어말받침 사용하지 않기로 합의되었습니다.''' 합의된 부분을 토론 없이 수정할 시 [[나무위키:기본방침/이용자 관리 방침#편집권 남용|편집권 남용]]으로 간주되어 제재될 수 있습니다.#!if 토론주소2 != null
''' 아래 토론들로 합의된 편집방침이 적용됩니다.''' 합의된 부분을 토론 없이 수정할 시 [[나무위키:기본방침/이용자 관리 방침#편집권 남용|편집권 남용]]으로 간주되어 제재될 수 있습니다.{{{#!wiki style="text-align:center;"
{{{#!folding [ 내용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0px -5px;"
||<table width=100%><tablebordercolor=transparent><tablebgcolor=transparent><(>'''[[https://namu.wiki/thread/PicayuneGullibleWiryHobbies|토론]] - 현행 표제어와 같이 튀르키예어 고유명사 표기시 어말받침 사용하지 않기'''
----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2'''
----
{{{#!if 토론주소3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3'''
----
}}}{{{#!if 토론주소4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4'''
----
}}}{{{#!if 토론주소5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5'''
----
}}}{{{#!if 토론주소6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6'''
----
}}}{{{#!if 토론주소7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7'''
----
}}}{{{#!if 토론주소8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8'''
----
}}}{{{#!if 토론주소9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9'''
----
}}}{{{#!if 토론주소10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10'''
----
}}}{{{#!if 토론주소11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11'''
----
}}}{{{#!if 토론주소12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12'''
----
}}}{{{#!if 토론주소13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13'''
----
}}}{{{#!if 토론주소14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14'''
----
}}}{{{#!if 토론주소15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15'''
----
}}}{{{#!if 토론주소16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16'''
----
}}}{{{#!if 토론주소17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17'''
----
}}}{{{#!if 토론주소18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18'''
----
}}}{{{#!if 토론주소19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19'''
----
}}}{{{#!if 토론주소20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20'''
----
}}}{{{#!if 토론주소21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21'''
----
}}}{{{#!if 토론주소22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22'''
----
}}}{{{#!if 토론주소23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23'''
----
}}}{{{#!if 토론주소24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24'''
----
}}}{{{#!if 토론주소25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25'''
----
}}}{{{#!if 토론주소26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26'''
----
}}}{{{#!if 토론주소27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27'''
----
}}}{{{#!if 토론주소28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28'''
----
}}}{{{#!if 토론주소29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29'''
----
}}}{{{#!if 토론주소30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30'''
----
}}}{{{#!if 토론주소31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31'''
----
}}}{{{#!if 토론주소32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32'''
----
}}}{{{#!if 토론주소33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33'''
----
}}}{{{#!if 토론주소34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34'''
----
}}}{{{#!if 토론주소35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35'''
----
}}}{{{#!if 토론주소36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36'''
----
}}}{{{#!if 토론주소37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37'''
----
}}}{{{#!if 토론주소38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38'''
----
}}}{{{#!if 토론주소39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39'''
----
}}}{{{#!if 토론주소40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40'''
----
}}}{{{#!if 토론주소41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41'''
----
}}}{{{#!if 토론주소42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42'''
----
}}}{{{#!if 토론주소43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43'''
----
}}}{{{#!if 토론주소44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44'''
----
}}}{{{#!if 토론주소45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45'''
----
}}}{{{#!if 토론주소46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46'''
----
}}}{{{#!if 토론주소47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47'''
----
}}}{{{#!if 토론주소48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48'''
----
}}}{{{#!if 토론주소49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49'''
----
}}}{{{#!if 토론주소50 != null
'''[[https://namu.wiki/thread/|토론]] - 합의사항50'''
----
}}}||}}}}}}}}}| {{{#!wiki style="margin:-10px -10px; word-break: keep-all" | <tablebordercolor=#00732F> | }}} |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word-break: 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colbgcolor=#00732F> 이집트 | 카이로 · 기자 · 알렉산드리아 · 데숙 · 카프르엘셰이크 · 만수라 · 탄타 · 시빈엘콤 · 반하 · 아시유트 · 퀴나 · 룩소르 | |
| 모로코 | 탕헤르 · 우지다 · 페스 · 라바트 · 메크네스 · 카사블랑카 · 마라케시 · 아가디르 · 엘아이운 | ||
| 튀니지 | 튀니스 · 타바르카 · 비제르트 · 베자 · 카이로우안 · 수스 · 마흐디야 · 스팍스 · 토주르 · 가베스 | ||
| 세네갈 | 티바완 · 티에스 · 다카르 · 디우르벨 | ||
| 카메룬 | 야운데 · 두알라 · 응가운데레 · 응간하 | ||
| 리비아 | 트리폴리 · 데르나 · 벵가지 | ||
| 수단 | 하르툼 · 북하르툼 · 옴두르만 | ||
| 니제르 | 아가데즈 · 니아메 | ||
| 나이지리아 | 아부자 · 라고스 | ||
| 말리 | 바마코 · 팀북투 | ||
| 사우디아라비아 | 리야드 · 메디나 · 메카 · 바하 · 압하 · 지잔 · 타부크 · 나즈란 · 담맘 · 부라이다 · 하일 · 사카카 · 아라르 · 호푸프 | ||
| 팔레스타인 | 가자 · 나블루스 · 라말라 · 아리하 · 예루살렘 · 베이트 울라 · 사이르 · 알칼릴 · 칼킬리야 · 툴카름 · 제닌 · 칸유니스 · 할훌 | ||
| 레바논 | 베이루트 · 트리폴리 | ||
| 시리아 | 다마스쿠스 · 알레포 · 라타키아 · 홈스 | ||
| 이라크 | 바그다드 · 모술 · 바스라 | ||
| 요르단 | 암만 · 카라크 · 마안 · 살트 · 자르카 · 마프라크 · 이르비드 | ||
| 예멘 | 사나 · 아덴 · 타림 | ||
| 오만 | 무스카트 · 소하르 · 도파르 · 니즈와 | ||
| 아랍에미리트 | 아부다비 · 두바이 · 샤르자 · 라스 알카이마 · 아지만 | ||
| 이란 | 테헤란 · 이스파한 · 쉬라즈 · 카샨 · 타브리즈 | ||
| 튀르키예 | 앙카라 · 이스탄불 · 카이세리 · 이즈미르 · 에디르네 · 부르사 · 메르신 · 가지안테프 · 샨르우르파 | ||
| 북키프로스 | 파마구스타 · 레프코샤 · 키레니아 | ||
| 러시아 | 카잔 · 그로즈니 | ||
| 우즈베키스탄 | 타슈켄트 · 사마르칸트 · 부하라 | ||
| 그 외 국가 | 사라예보 · 티라나 · 그라나다 · 실베스 · 누악쇼트 · 리브르빌 · 반줄 · 와가두구 · 은자메나 · 코나크리 · 프리타운 · 비사우 · 파라마리보 · 지부티 · 모가디슈 · 캄팔라 · 마푸투 · 모로니 · 쿠웨이트 · 마나마 · 도하 · 바쿠 · 알마티 · 비슈케크 · 두샨베 · 아시가바트 · 카불 · 이슬라마바드 · 다카 · 말레 · 마라위 · 반다르스리브가완 · 쿠알라룸푸르 · 자카르타 | }}}}}}}}} | 
시타델 (성채)와 시가지 전경
알레윗데블레 (알라 웃 다울라) 모스크와 구도심
| 가지안테프 시 (가지안테프) Gaziantep | ||
1. 개요2. 상세3. 역사4. 현대5. 민족과 문화6. 기후7. 관광8. 경로9. 관광지
9.1. 가지안테프 성9.2. 에미네 괴위시 가지안테프 향토 요리 박물관9.3. 제우그마 모자이크 박물관9.4. 메두사 유리공예 박물관9.5. 귐뤼크 한(Gümrük Han) 살아있는 박물관9.6. 진지를리 베데스텐(Zincirli Bedesten)9.7. 동기 장인들의 시장(Bakırcılar Çarşısı)9.8. 하산 쉬제르 민속박물관9.9. 가지안테프 동물원(Gaziantep Hayvanat Bahçesi)9.10. 뒬뤼크바바 숲 (Dülük Baba Ormanı)9.11. 상코 파르크 (Sanko Park)
10. 특산품11. 스포츠12. 여담1. 개요
튀르키예어: Gaziantep, Antep[1]쿠르드어: Êntab / Dîlok
아랍어: عينتاب
아르메니아어: Այնթապ
튀르키예의 남동부에 위치한 도 및 시. 튀르키예에서 6번째로 큰 도시로, 인구는 약 200만명이다. 인류 역사상 현재까지 이어진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2] 이미 수메르 시절부터 도시가 들어서 있었다 한다. 전근대 시기 지명은 아인탑 (Ayıntap) 혹은 안테프 (Antep)였고, 1920년 현지 주민들이 외세에 저항해 튀르키예령으로 도시를 지켜낸 것에서 성전사인 가지 칭호를 붙여 현 지명이 되었다. 실크로드 교역 도시였기에 튀르키예 내외에서 미식의 도시로 유명하고 바클라바, 가지 케밥[3], 라흐마준 (피자), 베이란 (국밥) 등 여러 음식의 발상지이다. 구도심이 잘 보존되어 있어 관광객이 많이 찾는데, 2023년 튀르키예 가지안테프 지진 당시 큰 피해를 입었다.
2. 상세
부촌인 이노조바의 야경
히타이트 시대에는 한타프(Hantap)라 불리었고, 로마 제국시대에는 '타르수스 맞은편의 안티오키아(Antiochia ad Taurus)'로 불리었다가, 우마이야 왕조 시기에 이슬람군에 정복되어 아인타프(Ayıntab, Ayıntap)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셀주크 제국과 맘루크 왕조를 거쳐 1516년에 셀림 1세가 이 도에 위치한 메르지다브크 평원(Mercidabık Ovası)에서 맘루크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둬 오스만 제국에 편입되었고, 알레포 도에 속해 있다가 튀르키예 독립 전쟁 당시 이곳을 지키던 민병대 300여 명이 1920년 3월부터 이듬해 2월 9일까지 11개월 남짓 사투를 벌인 끝에 1921년 3,000여 명의 프랑스군과 2,000여 명의 아르메니아 반란군을 저지시킴에 따라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와 튀르키예 대국민 회의 결정에 의해 '가지'(수호자)라는 영웅 호칭이 붙어 '가지안테프'(영웅 도시 안텝)가 되었다. 인근의 카흐라만마라쉬도 본래 단지 '마라쉬'였다가 같은해 프랑스 군을 물리친 후 용감하다는 뜻힌 카흐라만이 더해졌다.
가지안테프주 주의 면적은 7,642 km²이다. 중심지인 가지안테프 군에 속하는 샤힌베이(Şahinbey) 구와 셰히트캬밀(Şehitkâmil) 구 외에 누르다으(Nurdağı) 군, 이슬라히예(İslahiye) 군, 오우즈엘리(Oğuzeli) 군, 야부즈엘리(Yavuzeli) 군, 아라반(Araban) 군, 니지프(Nizip) 군, 카르카므시(Karkamış) 군 총 9개의 군(ilçe)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의 북쪽으로는 카흐라만마라쉬(Kahramanmaraş)와 아드야만(Adıyaman) 주, 서쪽으로는 오스마니예(Osmaniye)와 하타이(Hatay) 주, 남쪽으로는 킬리스(Kilis) 주와 시리아, 동쪽으로는 샨르우르파(Şanlıurfa) 주와 접하고 있다.
3. 역사
아인타브 성채
히타이트 시기부터 현 시가지 동부에 마을이 있었고, '왕의 땅'이란 뜻인 한타프라 불렸다. 헬레니즘 시기에는 타우루스의 안티오키아 (Ἀντιόχεια τοῦ Ταύρου)로 명명되었다. 로마 제국 시기 시리아 지역의 북쪽 끝으로 여겨졌고, 4세기 무렵 주교구가 되었다. 다만 동쪽 40km 지점의 제우그마, 북쪽 외곽의 돌리케 (뒬뤼크)에 가려져 중소도시로 이어졌다. 638년 이슬람 제국령이 되었고, 우마이야 왕조-압바스 왕조-툴룬 왕조-익시드 왕조-함단 왕조를 거쳐 962년 동로마 제국령이 되었다. 동로마 시기 돌리케는 텔루크 (Τελούχ)로 불리며 시리아 북부의 중요한 군사 거점이었다. 한편 이슬람 정복 후 안티오키아는 옛 지명이 변형된 아인 타브 (عين تاب)로 개칭되었다. 그 의미는 아람어 혹은 아랍어로 '좋은 샘' 혹은 '늑대의 샘'이다.
3.1. 중세
8세기 우마이야 칼리파 우마르 2세가 세웠다 전해지는 외메리예 자미 (우마리야 모스크). 십자군 시기 훼손되었다가 1150년에 재건되었고, 18세기 무렵의 중건을 거쳐 현재에 이른다. 미나렛에는 1920-21년 안테프 공방전 시기의 총탄 자국이 남아있다.
|  |  | 
| 1221년 ~ 1357년에 걸쳐 세워진 보야즈 모스크 | '1677년 이전'에 세워진 쉬르바니 모스크 | 
동로마 제국과 이슬람 세력 간의 전쟁 시기 여러번 파괴되었던 도시는 1067년 알프 아르슬란의 부관 아프신 베이에 의해 셀주크 제국령이 되었고, 아인 타브의 튀르크식 발음인 '안테프' 혹은 '아인탑'으로 불리게 되었다. 일대를 관장하던 시리아 셀주크의 투투쉬 1세가 1095년에 사망한 후 마라쉬의 아르메니아인 영주 토로스가 안테프를 지배했다. 1097년 1차 십자군이 점령해 한타프 혹은 하타프라 불렀고, 에데사 백국 소속 마라쉬 영주령에 속했다. 동남쪽 20km 지점의 투르베셀 (텔 바시르)는 에데사 백국의 제2의 수도로써 중시되었다. 1146년 에데사가 장기 왕조에 함락되자 백작 조슬랭 2세는 투르베셀에서 남은 영토를 영유했는데, 1150년 누르 앗 딘 마흐무드에게 사로잡혀 투옥되었다. 조슬랭 2세의 과부 베아트리스는 투르베셀, 안테프, 사모사타, 비레칙 등 남은 6개의 성을 동로마에 매각했다.[4]
1150년 8월, 동로마 지배를 거부한 옛 에데사 백국의 십자군 및 일부 주민들은 예루살렘 왕국의 보두앵 3세와 트리폴리 백국의 레몽 2세의 호위를 받으며 안티오크로 향했다. 이들이 안테프에 당도했을 때에 누르 앗 딘이 공격했으나 격퇴되었고, 보두앵 3세는 약속대로 도시를 동로마 군에 넘겼다. 다만 동로마 지배는 오래가지 못하여 1151년 봄, 룸 셀주크의 메수트 1세가 안테프와 투르베셀을 점령했다. 사모사타와 비레칙은 아르투크 왕조가 점령한다. 1155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이 안테프를 점령했으나 1157년 룸 셀주크가 탈환했고, 1172년에는 장기 왕조가 일대를 정복했다가 1183년 살라흐 앗 딘 유수프에 의해 아이유브 왕조령이 되었다. 아이유브 내전을 틈타 1204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령이 되었다 1206년 아이유브 령으로 돌아갔고, 1218년 룸 셀주크가 재점령한다.
3.1.1. 맘루크 왕조
1515년 둘카디르 후국의 알라윗데블레 (알라 앗 다울라) 베이가 세운 모스크
알라윗데블레 모스크 내부
13세기 중반 룸 셀주크의 쇠퇴기에 안테프는 다시 아이유브 령이 되었고, 1260년 맘루크 왕조령이 되었다. 1263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의 하이톤 1세가 바누 킬랍의 1천 베두인과 함께 아인탑을 약탈했다.[5] 13세기 후반 안테프는 맘루크 조와 몽골 제국 (일 칸국)의 국경 지대로써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다. 일 칸국은 1260년, 1261년, 1271-72년, 1280-81년, 1299-1317년 등 사실상 시리아를 침공할 때마다 안테프를 영유했다. 1280년의 경우 9월에 점령했고, 11월에 철수했으며 이듬해 10월에 재차 점령했다가 뒤이은 2차 홈스 전투에서 패배해 철수했다. 1300년경 돌리케 (텔루크)가 지진으로 파괴되며 안테프는 확고히 일대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 이는 야쿠트 알 하마위와 (하마 총독) 아불 피다 등의 지리가들도 폐허가 된 돌리케와 함께 비교하며 기술한 바이다.
14세기 안테프는 활발한 시장이 있는 교역 도시였고, 많은 학자들을 배출해 '작은 부하라'로 불렸다. 문화적 번영을 누리던 안테프는 1390년 9월, 알레포 총독 얄부가 알 우마리와 동맹해 1만 대군과 출정한 둘카디르 왕조의 세블리 (쉴리) 베이에게 점령되었으나 성채는 항전했다. 이듬해 세블리 베이는 맘루크 조에 복속했고, 1359년 안테프 영유를 인정받았다.[6] 안테프 출신의 외교관 겸 재판관이던 바드르 앗 딘 알 아이니는 당시 성채에 머물며 참상에 대해 저술했다. 1400년에는 티무르가 도시를 포위해 점령했으나 그의 사후 다시 둘카디르 령이 되었다. 1420년 백양 왕조의 카라 유수프가 안테프를 포위했으나 격퇴되었다.
1467년 둘카디르 조의 셰흐수바르 베이가 오스만 제국과 동맹해 반기를 들자 맘루크 군대는 1468년 5월에 안테프를 포위해 격전 끝에 점령했다. 다음달 셰흐수바르 베이는 4차례의 전투 끝에 안테프를 수복했으나 결국 사로잡혀 1473년에 처형되었다. 뒤를 이은 동생 알라윗데블레는 맘루크 조의 충실한 제후로써 일대를 통치했다. 알라윗데블레는 안테프에 중심 모스크와 저수지를 세웠고, 1481년에는 4년 전 시리아 북부를 순행한 술탄 카이트베이의 명에 따라 성채를 보강했다. 반세기 간 집권하던 알라윗데블라는 1514년 셀림 1세의 찰디란 전투 동참을 거부했고, 이듬해 6월 오스만 군에게 폐위된 후 처형되었다. 이로써 둘카디르 조는 멸망하고 일대는 오스만 령이 되었다.
3.2. 오스만 제국
1640년에 성채 기슭에 세워진 나이브 하맘 (목욕탕)
파일:쉬레 한.jpg
1885년 알레포 총독 제밀 파샤가 세운 쉬레 한 (카라반사라이)
1892년에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성모 마리아 성당으로 세워져 1915년 감옥, 1986년 모스크로 전환된 쿠르툴루쉬 자미
1516년 8월 20일, 시리아 원정에 나선 셀림 1세가 안테프 성 앞에 나타나자 맘루크 총독 유누스 베그는 저항하는 대신 성문의 열쇠를 넘겼다. 다음날 셀림은 성밖에 거대한 진영을 세우고 현지 군사 지휘관들을 초청해 둘카디르 조의 멸망 소식에 알레포로 북상한 맘루크 술탄 깐수 알 구리를 상대할 전략을 세웠다. 8월 24일, 안테프와 알레포 사이에서 셀림은 깐수 알 구리와 마르즈 다비크 전투를 치러 대승을 거두었다. 이를 발판으로 셀림은 맘루크 조를 멸하고 시리아와 이집트를 정복했다. 그 결과, 안테프는 동로마 제국 시기 이후 거의 천년 만에 거대 제국들의 국경 지대가 아닌 제국의 영토 한복판에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비록 전략적 중요성은 잃었지만, 평화와 안정을 얻었다.
오스만 시기 안테프는 알레포 에얄레트 산하 안테프 산작의 치소였고, 1530년대 안테프 산작은 신설된 둘카디르 에얄레트에 편성되었다. 1534-36년 쉴레이만 1세가 이라크를 정복한 이후 안테프는 더 이상 사파비 왕조와의 변경지가 아닌 후방이 되었고, 아나톨리아 & 시리아 & 이라크를 이어주는 교통의 요충지로 번영했다. 도시는 실크로드를 오가는 상인들의 왕래로 북적였고, 특히 현지 아르메니아인들은 중개업과 제조업 및 농업을 통해 많은 부를 축적했다. 다만 다른 시리아 북부 ~ 자지라 지방의 도시들과 달리 안테프 주민의 다수는 튀르크 무슬림이었다. 동시에 알레포와의 경제적 교류가 많았기에 주민들은 아랍어도 구사 가능한 경우가 많았다. 17세기의 여행가 에블리야 첼레비는 안테프에 3천 9백개의 상점과 2개의 베데스탄 (실내 시장)이 있다고 기록했다. 1818년 둘카디르 에얄레트의 폐지 후 안테프 산작은 알레포 빌라예트에 속했다. 19세기 후반 안테프는 인구 4만 5천의 대도시였다. 그중 2/3은 튀르크 및 아랍 무슬림, 1/3은 아르메니아 및 아시리아 기독교도였다. 그 무렵 많은 유럽 선교사들이 아르메니아 인들을 대상으로 방문했다. 1874년 아르메니아 선교단은 중부 튀르키예 고등학교를 세웠다. 하지만 1895년의 하미디예 학살과 1915년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로 아르메니아 주민들은 도시에서 추방 혹은 학살되었고, 중부 튀르키예 고등학교도 1916년 알레포로 이전되었다.
3.3. 안테프 공방전 (1920-21년)
프랑스 군에 항복하는 주민 대표단
1차 대전 후 1918년 11월, 시리아에서 북상한 영국군이 안테프를 장악했다. 1919년 11월, 안테프는 사이크스-피코 밀약에 따라 프랑스 영향력 하에 놓여 프랑스 군이 주둔했다. 1920년 2월에는 마라쉬에서 철수한 프랑스 군대 및 아르메니아 인들이 안테프에 당도했다. 그해 4월, 무스타파 케말을 지지하는 3천의 튀르크 민병대 (쿠바-이-밀리예)가 결성되어 성채의 프랑스 주둔군을 포위했다. 터키 대국민 의회의 지원으로 민병대는 10여정의 기관총도 확보했다. 5-6월의 휴전 후 7월에 민병대는 재차 포위했고, 프랑스 군이 일단 철수하며 성채를 비롯한 안테프 전역을 장악했다. 하지만 8월에 증원된 프랑스 군이 역으로 안테프를 포위했다.
시간이 지나며 프랑스 군은 탱크 4대, 전투기 6대, 대포 11문 등을 동원했고 병력은 1만 2천에 달했다. 주민들과 민병대는 결사 항전 했지만, 1921년 2월의 마지막 저항을 끝으로 화력 격차를 극복하지 못하며 항복했다. 그 과정에서 민병대 및 민간인 6천 3백명, 프랑스군 (장교 4명 포함해) 1천 6백명이 전사했다. 다만 승리에도 불구하고 큰 피해를 입은 프랑스 군은 앙카라 조약에 의거해 1921년 10월 20일에 철수했고, 안테프는 터키 대국민 의회를 거쳐 터키 공화국 령이 되었다. 전투가 끝나던 1921년 2월에 터키 대국민의회는 안테프를 영웅 도시로 지정하며 성전사인 '가지'를 붙여 가지안테프 (غازى عینتاب)로 명명했고, 1928년의 문자 개혁으로 Gaziantep 가 되었다.
4. 현대
2017년에 도시 서쪽에 조성된 신도심인 이노조바
1927년 기준 가지안테프의 인구는 4만명이었다. 20세기 중반 유대인들이 떠났고, 식품 생산 및 가공업을 중심으로 급속한 도시 발전과 함께 20세기 후반에 쿠르드 인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5% 미만이던 쿠르드 인구는 2010년대 들어 40만을 넘기며 20%에 이르렀다. 한편 시리아 내전 발발 후, 시리아와 가장 가까운 터키의 대도시인 가지안테프에는 엄청난 수의 시리아 난민이 몰려들었다. 이로써 시가지는 더욱 빠르게 동서로 팽창했고, 북쪽으로는 공단이 시가지에 버금갈 정도로 확장되어 뒬뤼크 등 인근 소도시들을 둘러싸며 가지안테프 광역권을 형성했다. 2011년에 첫 트램이 개통한 이래로 2012년과 2014년에 추가 개통하여 현재 3개 노선의 트램이 운영 중이다.
4.1. 2023년 튀르키예 가지안테프 지진
보수 공사가 끝나고 5년도 안되어 큰 피해를 입은 성채 (칼레시)
많은 역사적인 모스크들의 미나렛이 붕괴했고, 쿠르툴루쉬 자미의 경우 돔까지 무너졌다.
빠르게 성장하던 가지안테프는 2023년 튀르키예·시리아 대지진 당시 진원과 매우 가까웠기에 도시 전체가 궤멸적인 피해를 입고 수많은 사상자와 이재민이 발생했다. 2025년 기준 도심부는 완전히 재건되었지만, 외곽에는 임시 주택 등 이재민 시설이 많이 있다.
5. 민족과 문화
가지안테프의 전통 춤 할라이(Halay)와 이 지역의 전통 의상을 입은 사람들의 모습.
가지안테프는 전통적으로 튀르키예인과 아랍인이 다수를 이루었으며, 소수의 아르메니아인이 함께 살았다. 가지안테프 동쪽에 위치한 샨르우르파(Şanlıurfa)도 동부에 쿠르드족이 거주하는 것과 달리 가지안테프에는 쿠르드족이 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랫동안 아랍 문화권인 시리아의 영향을 받아왔기 때문에 튀르키예에서도 특히 아랍 문화의 영향이 짙은 곳으로 도시 전체를 이루는 라임스톤으로 된 석조건물들과 모스크, 대상의 숙소에서 이국적인 모습을 느낄 수 있다.
또한 가지안테프는 튀르키예에서도 수공업이 특히 발전한 곳으로 동기공예(Bakırcılık), 자개공예(Sedefçilik), 쿠트누(Kutnu)라고 불리는 비단과 면을 혼방한 전통 옷감과 가죽신(Yemeni), 레이스 공예로 이름나 있으며 시리아 요리의 영향을 받은 이 지역 특유의 토속 요리는 튀르키예에서도 가장 맛있기로 알려져 있다. 튀르키예 요리 문서에서도 볼 수 있지만, 바클라바, 수십 종류의 케밥들이 이 지역에서 탄생했으며, 가지안테프의 바클라바는 지리적 표시제/유럽연합에도 등록되어 있다. 2015년에는 유네스코 세계 무형문화유산에 가지안테프의 전통 요리가 등록됐다.
과거 실크로드가 지나던 곳으로, 아직도 살아남아 있는 수많은 시장들과 상인들의 숙소에서 과거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가지안테프의 바라크(Barak) 부족의 민속 음악과 전통 노래들 또한 유명하며, 다른 지역에서도 한두번쯤은 들어볼 수 있다. 바락은 이라크, 시리아, 이란에 걸쳐 분포하는 튀르크계 유목민인 투르크멘계 부족 이름으로 가지안테프에 다수가 거주하고 있는데, 이들 덕분에 가지안테프 사투리가 더더욱 알아듣기 힘들게 변했다고 한다. 실제로 가지안테프 사투리로 이라크, 시리아의 튀르크멘인에게 말하면 "이야! 우리말은 언제 배웠니?" 하고 신기해한다.
그리고 튀르키예의 동부가 그러듯이 이슬람 색체가 많이 남아있는 지역이기도 하며 이스탄불이나 앙카라 등에 비하면 지역의 분위기는 보수적이다.
5.1. 요리
가지안테프의 향토 요리로 차린 밥상의 모습.
앞서 언급했지만 가지안테프는 튀르키예에서도 가장 종류가 다양하고, 맛있기로 유명한 요리를 자랑하는 미식의 도시다. 이는 실크로드 상에 놓인 가지안테프는 튀르크, 아랍, 쿠르드 문화권이 겹치고 과거에는 아르메니아 문화의 영향도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사람들이 수시로 왕래하며 다채로운 식문화가 혼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을 포함한 해외 튀르키예 음식점에서 주력으로 내는 요리들도 대부분 가지안테프 요리일 정도. 2014년 가지안테프는 유네스코 음식창의도시에 지정되었다.
가지안테프의 향토 요리는 고기(특히 양고기[7])를 주로 쓰며, 고기를 쓸 때도 한식처럼 뼈부터 내장, 기름까지 하나도 버리는 부위 없이 모두 요리에 쓰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로 범벅된 향신료를 사용하는 다른 남동부 지방 요리들과 달리 대체로 한 가지, 혹은 두 가지 정도의 향신료만을 쓴다. 예를 들면 같은 케밥을 만들 때도 가지와 함께 꼬치에 꿸 때는 단지 소금과 후추만으로 양념을 하고, 양파와 함께 꼬치에 꿸 때는 석류 농축액(Nar ekşisi)과 소금만으로 간을 한다. 그리고 쿠민은 육고기 요리에만 사용하고, 민트는 닭고기 요리에만 사용하는 등 향신료의 쓰임새가 정해져 있다. 요리에 사과, 자두, 석류같이 과일을 쓰는 것도 다른 지방에서는 볼 수 없는 가지안테프만의 특징이며, 또한 가지안테프 요리만의 독특한 향을 내는 재료로 타르흔(Tarhın)이라는 서양쑥을 사용하는데 이 또한 가지안테프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다른 지방과 달리 전통적으로 양파가 귀했던 지방이라 대신 마늘을 퍼붓는다는 점은 한식과도 왠지 비슷하다.
아침 식사로 고기, 그것도 맵고 얼큰한 양 간꼬치나 베이란(Beyran),[8] 아니면 버터와 크림, 피스타치오가 듬뿍 들어간 일종의 페이스트리인 카트메르(Katmer)를 먹는다는 것도 다른 지방 튀르키예인들에게는 컬처쇼크로 다가온다.
가지안테프의 대표 케밥 요리라 할 수 있는 가지 케밥(Patlıcan kebabı)의 모습. 숯불에 꼬치로 꿰서 구운 것과 오븐에 구운 것 두 종류가 있는데 이건 오븐에 굽기 위해 준비한 모습이다. 남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지만, 집에 오븐이 없는 사람들은 이렇게 요리를 준비한 다음에 빵집에 가져가서 일정액의 대여료를 지불하고 빵집 오븐에 굽는 풍습이 있다.
파일:external/36.media.tumblr.com/tumblr_inline_nnumrf5ylU1tpsssr_500.jpg
카트메르가 올라간 가지안테프의 아침상. 버터를 듬뿍 바른 생지 위에 피스타치오와 크림, 약간의 설탕을 올리고 구운 다음 피스타치오 가루를 듬뿍 뿌린 카트메르를 뜨거운 우유와 함께 먹는데, 유제품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먹으면 배탈나기 딱 좋다.
가지안테프의 아침을 책임지는 국밥 베이란(Beyran)의 모습. 보통 레몬을 쳐서 먹으며 빵과 아주 매운맛이 나는 피망과 생양파를 곁들여 먹는다. 먹기 전에 레몬즙을 넣는다는 것만 빼면 정말 육개장 맛이 난다.
5.2. 방언
가지안테프 방언(Gaziantep şivesi)은 크게 분류하면 튀르키예어중 남동 아나톨리아 방언에 속하지만, 주변의 아랍인과 쿠르드인, 그리고 오래전부터 이 땅에서 살아왔던 투르크멘인과 아르메니아인의 영향을 받아 다채로운 외래어가 섞여있다. 개중에는 현대의 아랍인들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고어도 섞여있다. 전반적으로 남동 아나톨리아 방언의 특징인 현재형 접사 -iyor가 -iy로 짧아지는 현상과 미래형의 -acak, -ecek 접사의 뒤모음까지도 모음조화하는 현상, 인두음이 존재하며, 여기에 다른 민족들에서 비롯된 외래어가 섞여 있는 형태이다. 또한 가지안테프에서만 사용하는 호칭과 감탄사, 욕설만 들어도 이 사람이 가지안테프 출신이라는걸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을만큼 이질적이기도 하다.* 가지안테프에서만 사용하는 호칭: aam (손윗사람에게), yoorum (손아랫사람에게), rafıg (매우 가까운 사이에게)
- 예시
- Rafığım neyding? ← Ortağım, nasılsın?
- Yoorum hele bi sahreye gedeg yav ← Kardeşim, hele bir pikniğe gidelim ya
- Aam bu otoboz nerye gediy? ← Abi bu otobüs nereye gidiyor?
- Bacım ne zaman Sanko Park'a gedicin kele? ← Ablam ne zaman Sanko Park'a gideceksin?
- Balcan var yinmi? ← Patlıcan var yiyer misin?
- Eyi eddin yoorum, arvadım her şey yapıy amma. ← İyi yaptın kardeşim, Eşim her şeyi yapar da.
- Eyi olur zaar! ← İyi olur belki
 "아마도 잘 되겠지"라는 뜻. 정말 많이 들을 수 있는 말이다.
- Antep'e gelince mutlak balcan kebabı yiycin. Hele gel de yiyek! ← Antep'e gelince mutlaka patlıcan kebabını yiyeceksin. Hadi gel de yiyelim!
가지안테프에서 사용하는 단어들을 모아놓은 영상.
참고로 튀르키예권의 나무위키급 사이트인 엑시 쇠즐뤼크(Ekşi sözlük)에는 자매 사이트로 에시킬리 우파크 쇠즐쥐크(Eşkili Ufak Sözlük)라는 사이트가 있는데, 사이트 메뉴부터 서술 전체가 가지안테프 사투리로 작성된 것을 볼 수 있다.
6. 기후
쾨펜의 기후 구분에 따르면 지중해성 기후(Csa)이다. 따라서 여름에는 덥고 건조하고 겨울에는 한랭다습하다. 대륙성 기후가 나타나 연교차가 크다. 여름에는 낮에 섭씨 35도에서 42도까지 올라갈 만큼 기온이 높지만, 습도는 15~20%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한국과 비교했을 때 그렇게 덥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저 그늘에 들어가있거나, 긴팔 옷과 모자와 선크림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물만 자주 마셔 준다면 더위 때문에 여행하기 어렵지는 않다. 심지어 매우 건조해서 그늘에 들어가면 춥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겨울에는 지중해성 기후의 특성답게 습하고 비가 많이 내리며 가끔씩 눈도 온다.7. 관광
구도심의 길거리
1563년에 세워진 셰이흐 페툴라 모스크
구 시가지(Tarihi Şehir)를 중심으로 볼거리가 매우 풍부하며, 동부 튀르키예 여행에 있어서 주요한 관광지 중 하나이다. 주로 내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보이지만, 확실히 볼거리도 먹거리도, 살거리도 많은 곳으로 매력적인 관광지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튀르키예의 맛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타지역의 튀르키예 사람들도 이곳으로 여행 왔다가 살쪄서 돌아간다고 할 정도다.
하지만, 한국에 출간된 튀르키예 가이드북이나 여행사의 코스는 이스탄불–카파도키아–에페소스 중심의 서부 튀르키예 중심 루트에 한정되어 있기에, 이곳까지 오는 한국인 여행객의 숫자는 적다. 영어보단 불어나 아랍어가 더 잘 통하는 동네기도 하고. 시리아 내전으로 인해 시리아 국경 연선이 위험해지면서, 당분간 한국인 여행객의 큰 관심을 받을 일은 없을 듯. 가지안테프 이남으로는 시리아 국경과 가까운데다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의 준동으로 인해 출국권고 지역으로 지정되었으며,[9] 2016년 튀르키예 쿠데타 미수 사건 이후 가지안테프 전체를 포함한 터키 남동부 지역에 출국권고가 발령되었다.
시리아 국경에서 가까운 데다 여행경보 3단계 지역이지만, 현지인이나 현지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그다지 위험하지 않다고 한다. 막상 가보면 거리 분위기도 상당히 평온하며, 튀르키예 서부의 소도시와 별 차이가 없다. 다만, 고속도로로 오고 가는 중에 버스 안에서 검문을 받을 수 있다. 만약 사전에 한국에서 비행기편을 발권한다면 우려와 함께 인터뷰를 하는 등의 상당한 관심을 받을 수도 있다.
가지안테프 시에서 시리아 국경까지는 40여 km 떨어져 있으며 버스를 타고 대략 2시간 정도 가야 한다. 가장 가까운 국경 관문은 킬리스에 있으며, 그 외에 샨르우르파의 악차칼레(Akçakale)와 하타이의 하르비예(Harbiye)에 관문이 있다. 2014년 11월에 코바니가 한창 ISIL의 공격을 받고 있을 때 가지안테프에서도 일부 PKK 지지자들이 "왜 튀르키예군은 코바니를 돕지 않는가?"라면서 폭동을 일으킨 적은 있었지만 그 후로는 최소한 관광지인 옛 시가지는 조용한 편이다. 이곳에도 시리아 내전 이후 시리아인들이 꽤 많이 눌러앉아 살고 있지만,
덤으로 난민들도 몰려들어 인구가 갑자기 폭발했다. 2010년만 해도 약 70만 명이던 이 도시가 5년도 안 되어 40만 명이 넘게 인구가 늘어났다. 시리아 출신 난민들이 늘어났고 안 그래도 평소에 시리아인들이 자주 넘어와서 가지안테프에 시리아인들을 대상으로한 가게가 늘어나고 아랍어 글자 간판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 하지만 이 시리아 난민들이 문제를 많이 일으켜서 치안이 많이 불안해져[10] 가지안테프 시민들이나 튀르키예인들한테 평판이 아주 안 좋다.
현재 튀르키예인들에게 "다마스쿠스, 알레포에 이은 시리아 제3의 도시"란 말이 나올 정도로 평판이 떨어졌다. 게다가 2023년, 대지진으로 도시가 초토화되면서 관광 명소들이 아예 파괴되거나 손상을 입어 관광업에 직격탄을 맞아버렸다. 그나마 시리아 내전이 끝난 2025년에는 난민들이 시리아로 돌아가기 시작하고 도시 복구도 진척되며 안정을 찾고 있다.
8. 경로
이스탄불, 앙카라, 이즈미르 등지에서 비행기를 타고 갈 수 있으며, 이스탄불 사비하 괵첸 공항에서 대략 2시간 정도 소요된다. 버스로는 세치(Seç), 벤 투리즘(Ben Turizm)이 가지안테프를, 차이으르아아스(Çayırağası)가 킬리스를 본부로 하는 회사이며 이외에 앙카라에서 샨르우르파로 가는 타틀르세스(Tatlıses)나 마르딘으로 가는 마르딘 딜멘레르(Mardin Dilmenler) 등이 가지안테프를 경유해서 운행한다. 이스탄불 기준으로 15시간, 앙카라에서는 9시간, 네브셰히르와 카이세리에서는 4시간 30분, 샨르우르파에서는 3시간, 카흐라만마라시에서는 1시간이 소요된다. 과거에는 시리아의 알레포와 라타키야, 다마스쿠스, 레바논의 베이루트까지 가는 국제버스도 운영했었지만 현재는 모두 끊긴 상태. 하지만 알레포까지는 버스로 2시간 반 정도밖에 안 걸릴정도로 가깝다.도시 내에서는 버스 터미널(오토가르)과 공항에서 시내까지 버스를 운행하는데, 요금은 2튀르키예 리라로 학생일 경우 1.50리라이다. 카흐라만마라시에서 미니버스를 타고 왔을 경우 관광지에서 가까운 가지안테프 대학교(Gaziantep Üniversitesi)에 경유하니 그곳에서 내려도 된다. 버스 터미널에서 시내 버스를 타고 구 시가지로 갈 경우 Düztepe-Otogar라고 쓰여 있는 버스를 타면 구 시가지 중심지까지 바로 버스를 타고 갈 수 있다. 이맘 차으다시(İmam Çağdaş)나 칼레알트(Kalealtı)[11]에서 내리면 된다.
가지안테프 도의 공항인 오우젤리 공항에서는 시내까지 버스를 운행하고 있으며, 관광지가 밀집한 구시가지까지는 약 30분 정도 걸린다. 가려면 차르시(Çarşı)나 에스키 아들리예(Eski adliye, 구 검찰청)로 가겠다고 미리 말하면 도착하기 전에 알려준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올 때, 우선 셰흐레퀴스튀(Şehreküstü)를 들리고 에스키 아들리예로 들어가는데, 셰흐레퀴스튀에서 내려도 되긴 하다. 다만 구 시장 가장자리 지역이기 때문에 구 시가지 중심부까지는 500m 정도 걸어야 한다. 에스키 아들리예에서 내릴 경우, 카라괴즈 거리(Karagöz caddesi)를 따라 300m 정도 걸어야 한다.
9. 관광지
9.1. 가지안테프 성
2023년 이전의 모습
2023년 튀르키예·시리아 대지진으로 처참하게 파괴된 모습.
Gaziantep Kalasi
구 시가지 한복판에 자리잡은 성으로, 동로마 제국 시절에 만들어져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튀르키예 독립 전쟁 당시 격전이 벌어진 곳으로, 내부에는 별달리 남아 있는 시설은 없지만, 성 안으로 들어가는 길목마다 당시에 분전한 민병대들을 형상화한 동상들을 볼 수 있다. 2015년 파노라마 박물관(Panorama Müzesi)으로 개방 중이며, 내부에는 튀르키예 독립 전쟁 와중 이곳에서 벌어진 공방전에서 프랑스군에 맞서싸운 가지안테프의 영웅들, 샤힌 베이(Şahin bey), 셰히트 캬밀(Şehit Kâmil),[12] 카라 일란(Kara Yılan), 프랑스군과 아르메니아인에 의해 학살당한 12인의 순교자 등을 형상화한 조형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성내는 2018년 1월 2일부터 복원 공사를 완료해 개방하고 있었다. 구 시가지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성 공사가 마무리되면서 그전까진 무료였던 성에 입장료가 생겼고 성인은 1리라이며, 학생은 무료였다.
튀르키예의 역사적으로 상징성이 큰 성채로, 2018년 복원하여 관광지로 활용하고 있었으나 복원을 완료하고 불과 5년 만에 발생한 대지진으로 완파에 가깝게 파괴되면서 원래의 모습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불투명해졌다.
9.2. 에미네 괴위시 가지안테프 향토 요리 박물관
Emine Göğüş Gaziantep Mutfak Müzesi
다녀온 사람의 소감
튀르키예에서도 유일했던 요리 박물관으로 현재 2024년을 기점으로 폐업했다. 튀르키예에서도 맛있기로 소문난 가지안테프의 향토요리들을 소개하기 위해 만들어진 박물관이었다.
내부에는 가지안테프 특유의 동제 식기와 주방 도구들, 부엌을 재현한 공간 등이 재현되어 있다. 박물관의 이름은 본래 이 집의 주인이었으나 가지안테프 시에 기증한 사람(Emine Göğüş)의 이름을 따왔다.
9.3. 제우그마 모자이크 박물관
Zeugma Mozaik Müzesi
튀르키예에서 가장 큰 모자이크 박물관으로, 로마사 애호가라면 꼭 방문해야 할 명소이다. 도내의 니지프 군에 위치한 벨키스 마을에서 1996년부터 비레지크 댐(Birecik Barajı)을 만들기 위한 공사 와중에 발굴된 고대 도시인 제우그마(Zeugma)에서 발굴된 모자이크 작품들을 발굴 당시의 모습 그대로 재현해서 전시하고 있다.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은 집시 소녀 모자이크로 이동하면서 감상할 때에 시선이 따라오는 느낌이 난다고 한다. 과거에는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었는데, 2014년 현재 고고학 박물관은 내부공사 중이고 제우그마 모자이크 이외에 가지안테프에서 발굴된 다른 유물들과 함께 전시할 예정이다.
구 시가지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데, 공화국 광장(카라괴즈 모스크를 등지고 대로로 쭉 걷다가 왼편에 보이는 아타튀르크 동상이 있는 광장)에서 버스 터미널(오토가르)로 가는 버스를 붙잡고 "Bu otobüs Zeugma Müzesini geçiyor mu?"'이 버스 제우그마 박물관 지나가나요?)라고 묻고 타자.[13] 아니면 가지안테프 성 뒤편의 나이브 하맘(Tarihi Naib Hamam) 앞에 있는 버스 정거장에서 타도 된다. 버스 터미널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경우, 구 시가지로 가는 거의 모든 버스가 제우그마 박물관 앞이나 근처를 지나기 때문에 본격적인 시내 구경을 하기 전에 우선 이곳에 내려서 구경하고 시내로 들어가도 된다. 택시를 탈 경우 구시가지 어디서든 박물관까지 대략 15~20리라 정도 나온다. 인지도나 규모에 비해 방문객은 상당히 적은 편이니 편하게 둘러볼 수 있다.
9.4. 메두사 유리공예 박물관
Medusa Cam Müzesi현재는 폐관한 개인 박물관으로 고대 수메르 시대부터 동로마 시대에 이르기까지 각종 유리공예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또한 유리 공방을 함께 운영하고 있어서 고대 로마 방식대로 향수병 같은 유리 공예품을 만들어 판매하기도 했으며 직접 체험해볼 수도 있었다.
9.5. 귐뤼크 한(Gümrük Han) 살아있는 박물관
Gümrük Han Nihalin Sanat Atölyesi가지안테프에 위치한 수십 개의 한(Han, 대상들의 숙소) 중 하나로, 과거 숙소 및 시장으로 쓰였던 건물을 복원해 가지안테프의 수공업 제품들을 전시 및 판매하고 있다. 안에 들어가면 장인들이 직접 제품들을 만드는 과정을 시연해서 보여주며, 마당에서는 홍차와 튀르키예 커피 등을 마실 수 있는 카페도 마련되어 있다.
이름이 귐뤼크, 즉 튀르키예어로 세관이라는 뜻인데, 오스만 제국 후기부터 공화국 초기까지 이 건물을 세관으로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위치도 상당히 절묘한 곳에 있어서, 가지안테프의 어느 곳에서든 시장으로 들어가려면 이 건물 주변을 반드시 지나야 한다. 때문에 공화국 초기 이곳이 세관으로 쓰였던 시절을 기억하는 노인들이 당시에는 이 시장에서 물건을 가려가서 팔려는 대상들은 무조껀 세워서 돈을 걷어갔다며 치를 떠는 모습도 볼 수 있다.
9.6. 진지를리 베데스텐(Zincirli Bedesten)
이스탄불의 카팔르차르시(Kapalıçarşı, 그랜드 바자르)와 같이 천장이 지붕으로 덮여 있는 옛 상가 건물로 이곳에서도 가지안테프의 각종 특산품들을 볼 수 있다. 과거 이곳은 양과 고기를 팔던 시장이었으며 현재 가게들이 자리잡은 각 방들은 원래 가축들을 수용하던 곳이었다. 약 18세기경에 건물이 만들어졌고 현재의 건물은 1865년에 완성되었다.
9.7. 동기 장인들의 시장(Bakırcılar Çarşısı)
진지를리 베데스텐 옆에 위치한 작은 골목으로 가지안테프의 특산품인 동기공예를 전문으로 하는 공방들이 모여있다. 튀르키예 전역의 기념품 가게에서 판매되는 각종 동기 제품들은 거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만들어지며, 안에 들어가보면 장인들이 작업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망치질 소리와 동 두드리는 소리, 흥정하는 소리로 굉장히 어수선한 모습이 시장의 활기찬 모습을 보여준다. 이 외에도 골목마다 사과장수 시장(Elmacı Pazarı)[14], 카페트 상인들의 시장(Halıcılar Çarşısı)와 같이 품목별로 가게들이 모여서 시장을 이룬 모습을 볼 수 있다. 가격도 굉장히 저렴해서, 흥정을 하지 않더라도 공장제와 비교해도 별로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가지안테프에서 생산되는 동기 제품은 크게 방짜(Dövmeli)와 조각(İşlemeli)으로 그 기법이 구분된다. 방짜 기법은 한국의 전통 방짜 유기처럼 동그릇을 망치로 두들겨서 자국을 내 가면서 튼튼하게 만드는 기법이고, 조각은 위의 사진처럼 겉에 망치와 정만을 이용해서 무늬를 파서 장식하는 기법이다. 이렇게 만든 동기는 내부에 (혹은 겉에도) 주석을 입히는데, 구리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차 검게 변색되기도 하고, 가지안테프에서는 동기를 가지고 프라이팬이나 냄비, 찻주전자 같은 조리 기구로도 만들어 썼기 때문에 무독성이고 부식되지 않는 주석을 입힌 것이다. 동으로 만든 조리 기구들은 전열성이 매우 좋기 때문에 약한 불로도 금방 음식이 끓고, 특히 두툼한 고기도 속까지 완전히 익힐 수 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이 지방에서 널리 쓰인다. 두껍게 만든 동솥으로는 밥도 가마솥밥 맛 못지 않게 맛있게 된다.
또한 가지안테프 동기의 중요한 특징은, 솥을 만들 때 몸통을 긴 판으로 만든 다음에 둥글게 말아서 만들고, 그 다음에 바닥을 따로 만들어서 주석을 이용해 접합시키는 방식을 사용하는 유럽이나 튀르키예 타 지방과 달리 가지안테프에서는 둥근 원판을 준비한 다음 이걸 망치로 때리고 때려서 솥 모양을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망치로 때려서 자국을 만들거나 그 위를 조각하는 건 꾸미는 기법일 뿐이지 진짜 중요한 특징은 바로 이 점이다. 바닥을 접합시킨 게 아니라 통짜이기 때문에 훨씬 더 튼튼하며 음식을 가열하다가 주석이 녹아 밑창이 떨어지거나 하지도 않는다.
9.8. 하산 쉬제르 민속박물관
Hasan Süzer Etnografya Müzesi
가지안테프 전통 가옥을 보존한 곳으로, 과거 이 집의 주인이었던 하산 쉬제르(Hasan Süzer)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가지안테프의 전통적인 생활 방식들을 생생하게 재현한 곳으로, 중앙에 가지안테프 방언으로 하야드(Hayad)라 불리는 마당을 중심으로 공간들을 둘러치고 있는 이곳 전통 가옥의 모습과 함께 새신부의 방부터 집안의 웃어른이 거주하던 방, 손님들을 위한 방, 사랑방, 남성들의 공간과 여성들의 공간 등등 과거 이곳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볼 수 있다. 각각의 방에는 베란다와 함께 사방에 벽장이 붙어있는 모습과 자개장식된 가구, 이곳 특유의 문양을 담은 카페트, 실제로 사용되었던 각종 도구들과 침구들도 볼 수 있다.
공화국 광장 바로 길 건너편에 위치해 있으며, 이 박물관이 위치한 호슈괴르 동(Hoşgör Mahallesi)은 과거 가지안테프 부유층들이 주로 거주하던 동네라 오스만 제국 시절 가지안테프의 부촌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9.9. 가지안테프 동물원(Gaziantep Hayvanat Bahçesi)
튀르키예에서 가장 큰 동물원이자 유럽에서 3번째로 큰 동물원으로 유명하다. 굉장히 방대한 크기를 자랑하며, 동물들이 원래 살던 환경을 최대한 재현한 가운데 살아있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입장료도 매우 저렴해서 2015년 기준으로 일반인이 4리라, 튀르키예내 재학중인 학생은 2리라이다.9.10. 뒬뤼크바바 숲 (Dülük Baba Ormanı)
가지안테프 서북쪽에 자리잡은 방대한 휴양림으로, 현지 방언으로 '사흐레(Sahre)'라고 부르는 소풍 장소로 각광받고 있다. 사흐레란 한여름의 뜨거운 햇볕을 피해 그늘진 숲과 개울가에 앉아서 케밥을 굽고,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를 하는 등 흥겹게 노는 가지안테프 특유의 문화이다.9.11. 상코 파르크 (Sanko Park)
가지안테프에서 가장 큰 백화점이다. 가지안테프스포르 유니폼을 구하려면 여기 있는 전용 숍에서 구할 수 있으며, 각종 브랜드 제품들을 구입할 수 있다. 상코 파르크 앞에는 카바클르크(Kavaklık), 가지안테프 사투리로는 가와글르그(Gavaglıg)라고 부르는 공원이 있는데, 과거에는 주말마다 가지안테프 사람들이 여기서 케밥을 굽는 연기로 자욱했지만 현재는 케밥을 굽는 행위가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뒬뤽 바바 숲으로 옮겨갔다. 대신 거기서 주말마다 산불이라도 난 모양으로 연기가 자욱한 것을 볼 수 있다.상코 파르크 근처에서는 가지안테프 대모스크(Ulu camii) 등의 옛 건물들도 볼 수 있다.
10. 특산품
가지안테프 특유의 옷감 쿠트누로 만든 신발.
가지안테프 킬림으로 벽과 바닥을 장식한 방의 모습.
파일:external/www.antepdukkani.com/bakir%20islemeli%20cezve%20takimi-356.jpg
손잡이에 자개장식을 한 동제 제즈베(cezve). 튀르키예 커피를 끓이는 도구이다.
피스타치오가 매우 유명하다. 튀르키예어로 피스타치오가 '안테프 땅콩(Antep fıstığı)'일 정도로 가지안테프는 피스타치오의 특산지로 유명한데, 이곳에서 생산되는 피스타치오는 튀르키예 전체 생산량의 거의 70%를 차지한다.
이외에도 동기 공예품, 자개 공예품, 쿠트누, 가죽신발 등이 유명하다. 특히, 쿠트누와 자개공예는 튀르키예에서도 오로지 가지안테프에서만 생산되기 때문에 특히 귀하다. 킬림(Kilim)도 유명한데, 가지안테프의 킬림은 다른 지역과 차별성 있는 무늬로 유명하다. 가격도 매우 저렴해서 작은 크기의 킬림이 20리라(한국돈으로 8000원) 정도밖에 안 한다.
11. 스포츠
축구팀으로는 가지안텝스포르(Gaziantepspor)가 있었으나 현재는 파산하여 해체되었고 대신 가지안테프 FK가 튀르키예 쉬페르리그에, 가지안테프 뷔윅셰히르 벨레디예스포르가 PTT 1. 리그에 있다. 가지안텝스포르는 나름 고정 팬베이스가 있는 팀이지만 가지안테프 뷔윅셰히르 벨레디예스포르는 거의 없다시피하다. 그래서 가지안테프 뷔윅셰히르 벨레디예스포르 경기 때 가지안텝스포르 팬들이 응원 오는 광경을 자주 볼 수 있다.그리고 농구팀으로는 로얄 할르 가지안테프(Royal Halı Gaziantep)가 있는데, 이 팀은 위에 얘기한 가지안테프 뷔윅셰히르 벨레디예스포르의 농구팀이다. 사실 이런 건 튀르키예에서도 흔하고 다른 유럽에서도 무척 흔하다. 한 스포츠 클럽에 여러 종목팀이 있는 형식인데 바로 레알 마드리드나 FC 바르셀로나도 그렇기에 축구 말고도 농구나 배구, 수구, 럭비, 핸드볼 다양한 종목에서도 엘 클라시코가 벌어진다. 튀르키예에서도 그렇기에 이스탄불 더비로 유명한 페네르바흐체나 갈라타사라이 둘 다 축구, 농구, 배구, 육상 등 여러 종목끼리 더비가 존재한다.
12. 여담
- 구도심의 모스크들을 보면 시리아나 레바논의 모스크와 양식이 비슷하다. 특히 아블라크 (흰-검은 돌 교차)와 우산 모양 지붕을 지닌 미나렛 등이 유사하다. 그만큼 가지안테프가 역사적으로 시리아, 특히 북부 시리아와 교류가 많았다는 증거이다.
- 시리아 인들이 많다보니 시리아 음식도 쉽게 접할 수 있다. 다만 그만큼 기존 터키인들의 시리아인들에 대한 차별도 흔하다.
- '가지'안테프의 특산물 중 하나가 바로 '가지' 케밥이다. 터키어로 하면 구분이 되는데 한국어로만 우연히 같은 가지..
[1] 방언으로 인두음을 넣은 Gazi'antep이라고 하며, 이를 강조하기 위해 Entep이라고 쓰기도 한다.[2] 이를 자칭하는 도시는 많지만, 연속적인 거주의 기준을 취락 단위부터 잡을지, 아니면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도시급부터 잡을지에 대해서는 보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라 신뢰할 수 있는 순위 같은 것은 없다.[3] '가지'안테프라서 '가지' 케밥이 아니라.. 진짜로 채소 가지를 통채로 썰어 고기와 함께 끼워 먹는 케밥이기에 가지 케밥이다. 한국어로만 우연히 겹치는 것이고, 터키어로 하면 파틀르잔 케밥으로 구별된다[4] 그녀에게는 칼라트 룸 성이 주어졌으나 그마저 아르메니아 인에게 맡기고 안티오크로 이주한다[5] 다만 1277년 맘루크 군대의 킬리키아 원정 후 바누 킬랍은 맘루크 편으로 전향한다.[6] 위키피디아에서는 맘루크 조의 안테프 지배가 1317–1341, 1353–1378, 1381–1389년에 그쳤다고 하나 근거가 부족하다[7] 이 동네에선 쇠고기나 닭고기를 싸구려 취급한다. 양고기를 쓸 때도 케밥같이 굽는 요리에는 1년생 숫양을, 삶거나 찌는 요리에는 어린양을 쓰는 등 세세히 구분해서 사용한다.[8] 양의 목뼈와 다리뼈, 살코기를 넣고 푹 고은 국에 고춧가루와 밥을 넣고 한번 더 센 불에 끓여서 내는 음식. 육개장과 맛이 비슷하다.[9] 한국 청소년 이슬람 국가 가담 사건에서도 김군이 이곳을 거쳐 킬리스로 들어간 뒤 시리아로 넘어갔다.[10] 어느 한국인 여행자가 음료수를 사러갔다가 시리아인 거지를 만났는데 돈달라는 걸 거절했다가 그 거지가 돌변해서 해를 당할 뻔했다가 그 한국인을 찾아나선 튀르키예인 친구의 도움으로 그 자리를 모면한 적이 있다.[11] 가지안테프 사투리로는 갈라알트(Galaaltı)이라고 하며 이게 더 잘 통한다.[12] 사망 당시 15세의 소년이었으며, 프랑스 군인이 그의 어머니를 강간하려 하자 돌을 던져 그 군인을 공격하고, 결국 총검에 맞아 죽었다. 이뇌뉘 거리에 그의 집이 있으며 현재 기념물이 세워져 있다.[13] 나이 든 사람들은 제우그마 박물관 자리에 있던 국영 담배공장을 더 잘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Eski Tekel fabrıkası"(옛 단독 공장) 라고 묻는 게 더 빠를 수도 있다.[14] 사투리로 Almacı Pazarı라고도 쓰며 두 표기가 혼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