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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 | | ||
| 주 | 니나와 주 | ||
| 면적 | 180㎢ | ||
| 인구 | 1,739,800명(ISIL 점령전~점령기) 1,892,300명(ISIL 해방후) | ||
| 언어별 명칭 | |||
| {{{#!folding [펼치기ㆍ접기] | 히브리어 | מוסול | |
| 아랍어 | الموصل | ||
| 영어 | Mosul | ||
| 독일어 | Mossul | ||
| 러시아어 | Мосул | ||
| 그리스어 | Μοσούλη | ||
| 힌디어 | बग़दाद | ||
| 중국어 | 摩苏尔 | ||
| 일본어 | モースル | ||
| 스페인어 | Mosul | ||
| 이탈리아어 | Mosul | ||
| 프랑스어 | Mossoul | ||
| 아시리아어 | ܢܝܢܘܐ (Nînwe) | ||
| 쿠르드어 | مووسڵ (Mûsil) | ||
| 튀르키예어, 이라크 튀르크멘어 | Musul (موصل) | }}} | |
| 앗 사파 성당과 모스크 |
| 티그리스강 서안의 바쉬 타피아 성채(12세기 건립) |
1. 개요
이라크 북부 니나와 주의 주도. 바그다드에서 북쪽으로 400㎞ 떨어져 있고 인구는 180만명으로 이라크 제2의 도시이며 이라크 북부의 중심 도시이다.바그다드와 마찬가지로 시가지는 티그리스강 양안을 끼고 조성되어 있다. 서안의 메디나 (구도심)에는 바쉬 타피아 성채와 앗 누리 모스크, 앗 사파 성당 등의 중세 건축물들이, 동안에는 주명의 유래이기도 한 니네베 유적이 신도심 한복판에 남아있다.[1] 직물의 일종인 모슬린이 도시 모술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 지역의 특산물이다.[2]
전쟁 전에는 아랍인, 아시리아인[3], 튀르크인, 아르메니아인, 쿠르드인, 야지디인, 샤바크인 등의 다양한 민족과 이슬람, 기독교, 만다야교 등의 신앙이 공존하던 국제적인 도시였다.[4] 아시리아 제국, 함단 왕조, 우카일 왕조, 장기 왕조 등의 수도로서 번영하였으며 많은 유적이 남아있다.
2014 ~ 2017년간 ISIS의 강점으로 알 누리 모스크와 베쉬타브 성채, 박물관의 아시리아 부조들 등 상당수의 유물, 유적들이 파괴되는 피해를 겪었고, 약 10만여 명의 기독교도들이 2천년간 살아오던 도시를 떠나야 했다. ISIS가 이라크에서 붕괴된 후 복구 작업이 진행 중이다.
2. 지리
티그리스강이 도시를 지나며 해발고도는 223m이다. 북동부는 니네베 평원이 위치하고 남서부는 사막 지대이고 동쪽에는 자그로스 산맥이 있으며 기후는 스텝기후와 지중해성 기후의 특성을 띈다.
큰 강과 넓은 평야가 있어 곡식이나 과일이 풍성하게 자라며, 석유도 많이 매장되어 있다. 또한 옛날부터 모술은 대리석 생산으로 유명했다.
3. 역사
모술 시가지. 강 동쪽의 성벽이 옛 니네베 유적
중동의 피사의 사탑이라 불린 하드바 미나렛과 강 서쪽의 구도심
티그리스강의 서쪽에서 발달했으며, 강 동쪽에는 옛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5]가 있었던 곳이다. 아케메네스 제국기 티그리스 서안의 아시리아인 마을이 멥실라 (Μέψιλα)로 기록되었고, 이것이 현 지명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사산 제국기 니네베는 아소리스탄 주의 치소였고 점차 기독교가 전해졌다. 4세기까지 기존 다신교가 남아있었으나, 결국 아시리아 동방교회가 주류를 이루었다.
3.1. 중세
사산 제국기인 595년 모술 남서쪽 외곽에 세워진 아시리아 동방교회의 마르 엘리야 수도원. 1743년 나디르샤에 의해 개종을 거부한 수도사들이 학살된 후 성지로 남았다가 이라크 전쟁 시에 피해를 입었고, 남은 유구도 2014년 다에시에 의해 폭파되어 사라졌다.
639년경 우트바 이븐 파르카드 앗-술라미가 이끄는 이슬람 제국군이 니네베 및 멥실라를 점령했다. 기존의 니네베는 버려지고 있었기에 멥실라가 아랍어로 '이어줌'이란 뜻인 모술로 개칭되어 자지라 지역의 중심 도시 중 하나로 부상했다. 이슬람 지배 하에서 아시리아 정체성은 약화되었다. 9세기 후반, 압바스 왕조의 쇠퇴를 틈타 이샤크 빈 쿤다즈와 그의 아들 무함마드가 모술에서 자립했으나 893년 칼리파 알 무타디드가 수복했다.
3.1.1. 함단 왕조
10세기 들어 모술은 압바스 칼리파 하의 총독에서 세습 왕정으로 전환한 함단 왕조의 수도가 되어 번영했다. 968년 모술을 방문한 이븐 하우칼은 주로 쿠르드 인이 거주하는 아름다운 도시라 기록하였다. 978년, 모술은 부와이 왕조의 아두드 앗 다울라에게 정복되었다. 다만 980년대 쿠르드계 마르완 왕조의 창건자 바드 빈 두스타크가 일대를 위협하자 부이 조는 현지인 사이에서 신망이 높은 함단 가문을 모술에 봉하여 대적하게 하였다.함단 왕공 알 후세인과 이브라힘 형제가 도착한 직후 봉기가 일어나 부이 조의 총독이 축출되었고, 이렇게 복원된 함단 조는 주요 지지 세력이던 바누 우카일에게 지즈레와 누사이빈 등을 하사하였다. (989년) 이듬해 바드는 재차 모술로 남하했으나, 발라드 전투에서 수적으로 열세인 바누 우카일 군에게 패하여 전사하였다. 뒤이어 알 후세인과 이브라힘은 디야르바크르로 역공세에 나섰는데, 패배하고 전자는 사로잡혔다.[6] 이브라힘은 아들 알리와 함께 누사이빈으로 피신했는데 우카일 부족장 무함마드 이븐 알 무사입에게 피살되었고, 후자는 모술을 장악하여 우카일 왕조를 세웠다.
3.1.2. 우카일 왕조
991년, 부와이 왕조의 장군 자파르 알 핫자즈가 우카일 군을 격파하였다. 이듬해 체결된 휴전에서 우카일 조는 부와이 조에 복속했고, 영토 대부분을 유지했으나 모술은 넘겨야 했다. 그후 자파르가 총독으로 부임했고, 996년 무함마드 이븐 알 무사얍이 사망하자 두 동생 알리와 알 무칼라드가 계승 분쟁을 벌였다. 알 무칼라드는 부와이 조에 협력하는 척하다 알리와 비밀리에 연대하여 함께 모술을 습격해 자파르를 축출하고 도시를 장악했다. 이후 부와이 조와 협상하여 모술 영유 및 쿠파 등지에서의 수조권을 대가로 매년 1만 디나르 금화의 연공을 약속했다. 한편 알 무칼리드와 알리는 통치권을 두고 다투다 전자가 모술을 비우면 후자가 대리하는 형태의 공동 통치에 합의하였다. 다만 1000년경 알리가 사망하자 알 무칼라드는 조카 하산을 축출하고 전권을 쥐었다. 티크리트, 안바르에 이어 바그다드 성밖의 앗 신디야까지 장악한 알 무칼라드는 1001년 1월에 드디어 바그다드 점령을 시도했으나 부와이 조와의 협상 도중 튀르크인 노예에게 암살당하였다.알 무칼라드 사후 그를 계승한 장남 키르와쉬는 숙부 알 하산과 계승 분쟁을 벌이다가, 친족이 아닌 부족원 카라드 빈 라디드가 도전해오자 연대하여 모술에서의 공동 통치에 합의했다. 다만 쿠파는 그대로 키르와쉬에 배정되었고, 그는 혼란을 틈타 쿠파를 점거하고 있던 카파자 부족을 축출했다. 1002년 7월, 키르와쉬는 아사드 부족과 연대하여 마다인으로 진군했으나 쿠파에서 부와이 군대에 패배하였다. 이후 부와이 장군 알 하자즈 이븐 우스타드 후르무즈는 카파자 및 쿠르드 인들과 연대해 반격했고, 키르와쉬는 재차 패하여 모술로 물러났다. 아사드 부족의 알리 빈 마즈야드는 부와이 조와 타협하여 사나 앗 다울라 호칭과 함께 자지라 총독으로 봉해졌다. 그러던 1005년, 카파자 부족이 바스라에서 벌어진 아불 압바스 빈 와실의 반란에 가담하자 부와이 조는 재차 키르와쉬에게 쿠파 지배권을 넘기며 무타미드 앗 다울라 칭호를 내렸다. 이듬해에는 알 하산이 사망하자 모술을 완전 장악한 키르와쉬는 비록 쿠파 탈환에 실패했지만, 1008년 파티마 왕조에 복속한 카파자 부족장 아부 알리 빈 티말로부터 라흐바를 빼앗을 수 있었다.
1010년 8월, 키르와쉬는 모술 대사원의 금요 예배문 (쿠트바)을 기존의 압바스 칼리파 알 카디르가 아닌 파티마 칼리파 알 하킴의 명의로 진행시켜 독립을 선포했다. 이는 곧 안바르, 마다인에서도 적용되었다. 다만 부와이 조에서 토벌을 준비하자 카이로에서의 선물이 도착하기도 전에 압바스 칼리파 명의로 환원되었고, 본토로 여겨진 이라크에서도 쉬아가 퍼질뻔한 일에 놀란 알 카디르는 파티마 조의 정통성을 공격하는 바그다드 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1012년 부와이 조의 아미르로 등극한 술탄 앗 다울라는 이라크 남부 습지의 호족들[7] 등 반대파를 진압하기 위해 키르와쉬의 누이 지브라와 결혼하여 동맹을 맺었다. 1018년, 부와이령 사마라에서 셰이크 가립 빈 마칸과 그의 친척 라피 이븐 알 후세인 간의 내분이 발생하자 아사드 부족의 두바이스 1세[8]와 부와이 조는 가립, 키르와쉬는 라피를 지지했다. 1020년, 아사드-부와이 군대는 키르와쉬를 격파하고 포로로 잡았다.
패배한 라피는 가립에 귀순하고는 티크리트를 장악했고, 키르와쉬는 탈출했지만 재차 부와이 군에 패하였다. 다만 1021년 신임 부와이 아미르 무샤리프 앗 다울라와 협상하여 화해하였다. 그러나 1025년 무샤리프 앗 다울라가 사망한 후 부와이 조와 아사드 부족의 지원을 받은 카파자 부족이 1027년 북상, 쿠파 인근에서 우카일 군을 격파하고 안바르를 장악했다. 이후 누사이빈 총독인 동생 바드란, 카라드 빈 라디드의 아들이자 신디야 태수인 아부 만수르 카밀, 티크리트의 라피 등이 동맹하여 키르와쉬에 맞섰으나 협상을 통해 진정되었다. 한편 동맹이던 카파자 부족과 아사드 부족 간에 안바르를 두고 분쟁이 일었다. 결국 전자는 부와이 조, 후자는 우카일 조에 가담하였다. 이러한 어부지리로 키르와쉬는 안바르를 수복할 수 있었고, 대신 쿠파를 포기했다. 동시에 벌어진 부와이 조의 내전에서 키르와쉬는 아부 칼리자르를 도와 1029년 바그다드로 진격하기도 했으나 결국 승자인 잘랄 앗 다울라의 편에 섰다.[9]
1040년 키르와쉬는 티크리트 수복을 시도했으나, 라피의 후손들은 잘랄 앗 다울라를 매수해 신디야와 안자르를 공격하게 하여 위기를 모면했다.[10] 1044년 4월, 오우즈 튀르크 부족들이 처음으로 이라크를 침공하자 키르와쉬는 두바이스 1세와 함께 베두인 연합군을 라스 알 아일에서 격파하여 아제르바이잔으로 몰아냈다. 1048년에는 동생 아부 카밀 바라카가 도전해오자, 키르와쉬는 바드란의 아들 쿠라이쉬와 연합해 맞섰으나 이듬해 6월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부하들이 이탈하는 바람에 패하고 사로잡혔다. 바라카는 키르위쉬를 사로잡아 모술에 개선했고, 키르와쉬는 명목상 아미르로 남았으나 실권은 바라카에 있었다. 결국 1050년 키르와쉬는 감금되었고, 1052년 바라카가 사망하자 계승한 아들 알람 앗 딘 쿠라이쉬는 키르와쉬를 암살했다.
1055년 셀주크 제국의 술탄 토그릴 1세가 바그다드를 장악하자 쿠라이쉬는 그에 맞서다가 모술에서 축출되었다. 1057년 초엽, 쿠라이쉬는 부와이 왕조의 장군이다 파티마 왕조의 후원을 받게 된 튀르크 장군 아르슬란 알 바사시리와 연합해[11] 모술을 수복하고 파티마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의 명의로 금요 예배를 행했다. 이에 토그릴이 반격에 나서 알 바사시리를 격파, 모술을 재점령했다. 1058년 초엽 알 바사시리와 쿠라이쉬는 모술을 재차 공격, 성채의 셀주크 수비대를 4개월간 포위한 끝에 항복시키며 도시를 재점령했다. 다만 알 바사시리가 곧 라흐바로 철수하며 모술은 다시 셀주크 령이 되었다. 같은해 말엽 토그릴 1세의 동생 이브라힘 이날의 반란을 틈타 알 바사시리와 쿠라이쉬는 바그다드를 장악했다. 후자는 전체 6백 기병대 중 4백의 맘루크 기병대를 이끌었다.1059년 1월, 바그다드의 군중이 봉기를 일으키자 압바스 칼리파 알 카임 일가는 쿠라이쉬의 군영으로 대피했다가 라흐바 방면의 아나에 유폐되었다. 7월, 이브라힘 이날의 난을 진압한 토그릴 1세는 알 바사시리에게 복속한다면 바그다드 지배권을 인정하겠다 제안했다. 쿠라이쉬는 제안 수용을 주장했으나 알 바사시리가 거부하자 그와 틀어졌고, 토그릴 1세가 칼리파의 신변을 요구하자 넘겨주었다. 뒤이어 토그릴 1세가 진격하자 알 바사시리는 도주했다가 전사했고, 전향한 쿠라이쉬는 대가로 모술의 지배권을 회복했다. (1060년) 이듬해 쿠라이쉬가 사망하자 아들 샤라프 앗 딘 무슬림이 계승했다. 본래 파티마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를 인정하던 무슬림은 1066년 술탄 알프 아르슬란의 압박에 압바스 칼리파를 인정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시아파 신앙을 유지했다. 또한 무슬림은 술탄의 누이 사피야와 결혼했다. 1071년 무슬림은 시리아 북부, 킬라브 부족의 미르다스 왕조 방계가 통치하던 라카를 정복했다. 1077년 무슬림은 술탄 말리크샤 1세의 동생 투투쉬 1세와 함께 시리아 미르다스 왕조의 내전에 개입해 알레포를 포위했는데, 미르다스 군주 사비크에 우호적이던 무슬림은 내전에 튀르크인들을 끌어들인 킬라브 부족 지도부를 질타했다. 무슬림의 설득으로 킬라브 부족이 투투쉬 1세에서 이탈하고 반란을 일으켰던 동생 와타브와 샤비브가 형 사비크와 가담하게 했다. 이후 무슬림은 투투쉬 1세에게 포위망을 떠난다고 통보하며 몰래 이라크 성문을 통해 알레포에 입성해 주민들에게 식량과 물자를 팔았다. 한편 모술로 돌아가던 중 투투쉬 1세가 전에 요청한 1천의 셀주크 증원 병력과 신자르에서 마주친 무슬림은 그들에게 귀환을 설득했으나 실패하자 사비크에게 증원 병력 소식을 알렸다. 이에 사비크는 킬라브 부족장 아부 자이다 무함마드 이븐 자이다를 보냈고, 그는 베두인 연합군을 꾸려 와디 부트난에 매복했다가 증원 병력을 기습해 거의 전멸시켰다.
이에 투투쉬 1세는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1080년 투투쉬 1세의 압박에 사비크는 무슬림에게 항복했고, 1081년 무슬림은 하란을 접수해 누마이르 왕조를 멸했다. 이로써 무슬림은 알레포 ~ 하란 ~ 라카 ~ 모술에 이르는 광범위한 영토를 갖게 되었다. 강력해진 무슬림은 말리크샤 1세에 반란을 일으켜 패했지만 곧 사면되었다. 한편 안티오크의 동로마 총독에게 연공을 받던 무슬림은 1084년 12월 룸 셀주크의 쉴레이만샤 1세가 도시를 장악하자 그에게 연공 납부 지속을 요구했다. 쉴레이만샤 1세가 자신은 무슬림이라 의무가 없다며 거부하자 1085년 6월 무슬림은 안티오크로 진격해 그와 맞섰으나, 추바크 베이 휘하의 튀르크멘 병력이 이탈하고 베두인 병력이 도주한 결과 패하여 전사했다. 그 직후 알레포는 자립했다가 투투쉬 1세에게 항복했고, 쉴레이만샤 1세는 투투쉬 1세에 맞섰다가 전사했다. 한편 부고가 전해진 후 모술에서는 투옥되어 있던 무슬림의 동생 이브라힘이 석방되어 아미르로 추대되었다. 하지만 1089-90년 술탄 말리크샤 1세에게 소환된 이브라힘은 투옥되었다가 그의 측근이 되었다. 말리크샤 1세는 모술 출신의 장군 파크르 앗 다울라 이븐 자히르[12]를 총독으로 보내 도시를 통치했다. 후자가 속한 모술의 상인 출신인 바누 자히르 부족은 11-12세기 후기 압바스 왕조 및 셀주크 제국 하에서 재상이나 지방 총독 등 여러 요직에서 활약한 귀족 가문으로 유명했다. 1092년 말리크샤 1세가 사망한 후 무슬림의 부인 사피야는 아들 알리, 무함마드와 함께 모술로 돌아왔다. 알리는 아미르로 추대되었으나 곧 무함마드가 일으킨 반란에 패해 도주했다. 한편 말리크샤의 과부에 의해 석방된 이브라힘은 모술로 돌아왔고, 사피야를 설득해 지배권을 회복했다.
한편 셀주크 내전에서 시리아에서 술탄을 칭한 투투쉬 1세는 이브라힘에게 쿠트바 (금요 예배문)에서 자신을 술탄으로 인정하고 군대 이동권을 보장할 것을 요구해다. 이브라힘이 거부하자 투투쉬 1세는 모술로 진격했고, 1093년 4월 2일 도시 외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격전 끝에 이브라힘은 숙부와 함께 전사했다. 승리 후 투투쉬 1세는 자신의 누이 사피야와 조카 알리를 자신의 모술 대리인으로 두고 회군했다. 다만 무함마드는 튀르크인 장군 케르보가 (카르부카)와 툰타쉬 형제를 고용해 모술 점령을 노렸다. 하지만 케르보가는 무함마드를 감금했고, 모술 점령을 시도했으나 알리에게 격퇴되자 무함마드를 처형했다. 뒤이어 케르보가는 재차 모술을 포위했고, 장기화되자 불안해진 알리는 이라크 중부의 마즈야드 토후국에 망명했다. 이로써 우카일 왕조는 1세기만에 멸망하고 케르보가는 모술을 장악했다. (1096년 말엽)
3.1.3. 모술 아타베그 정권 (셀주크 제국)
12세기에 세워진 바쉬타피아 (바슈타비야 / باشطابيا) 성채
케르보가 (카르부카), 제케르미슈 (지키르미쉬), 자왈리 사카와, 마우두드, 아크순쿠르 알 부르수키로 이어지는 셀주크 제국 시기 아타베그 (섭정 총독)들은 대부분 십자군에 대한 무슬림측 사령관으로 활약했으나 칼리파와 싸우기 바빴던 술탄의 저조한 관심과 각자도생이 우선이었던 시리아 무슬림 제후들의 이합집산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차 십자군 시기인 1098년 케르보가는 십자군이 막 점령한 에데사 (우르파)와 안티오크를 포위했으나 함락하지 못했다. 1102년 케르보가가 사망한 후 계승한 아들 제케르미슈는 아르투크 왕조의 소크만과 함께 1104년 하란 전투에서 십자군을 격파, 에데사 백국의 보두앵 2세 등을 사로잡았으나 포로 문제를 두고 갈등을 겪어 에데사 수복에 실패했다. 오히려 에데사 백국의 섭정 탕크레드의 공격으로 딸이 사로잡히기도 했다.[13]
1104년 10월 셀주크 술탄 무함마드 타파르가 모술을 포위했으나 12월에 형 바르키야루크의 사망으로 술탄이 되기 위해 떠났다. 위기에서 벗어난 제케르미슈는[14] 1105년 보에몽이 떠나며 탕크레드가 안티오크 공국의 섭정이 되자 재차 에데사를 공격해 승리했으나 결국 격퇴되었다. 1106년 하란 태수이던 자왈리 사카와는 제케르미슈를 죽이고 모술의 아타베그가 되었다. 이에 모술 주민들은 지키르미쉬의 의형제 이마드 앗 딘 장기를 지지했고, 1107년 3월 룸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1세를 불러들였다. 모술에서 축출되었던 자왈리는 알레포 군대와 연합해 클르츠 아르슬란 1세를 전사시키며 승리했고, 모술을 되찾았다. 쫓겨난 장기는 셀주크 궁정에 의탁했다. 다만 자왈리가 자지라 지방을 약탈하자 1108년 9월 무함마드 타파르는 휘하의 장군 마우두드를 모술의 아타베그에 봉했다.
다시 모술에서 자왈리는 보두앵 2세를 석방하고 동맹하여 알레포의 아타베그 리드완 및 안티오크의 탕크레드에 맞선다. 뒤이은 투르베셀 (텔바시르) 전투에서 알레포-안티오크 연합군과 하란-에데사 연합군이 격돌해 전자가 승리한다. 패전 후 자왈리는 무함마드 타파르의 사면을 받아 파르스의 아타베그가 되었고, 모술은 안정을 되찾았다. 1110년 마우두드는 에데사를 포위, 함락하지 못했지만 큰 피해를 입혔다. 1111년 마우두드는 투르베셀 포위 실패 후 무슬림 연합군과 안티오크로 진격, 샤이자르 전투를 벌인다. 1113년 산나브라 전투에서 십자군을 격파한 마우두드가 이듬해 급사했다. 뒤이어 모술의 아타베그가 된 아크순쿠르 알 보르소키는 재차 에데사를 포위하나 동맹이던 (소크만의 동생인) 아르투크 왕조의 일 가지와 대립하게 되어 실패한다. 알 보르소키는 이후 대십자군 공세를 삼갔고, 총독 직을 잃었다.
1114년 무함마드 타파르는 다른 장군 주유쉬 베그를 모술에 봉했고, 1115년 그는 하마단 총독 부르수크와 함께 안티오크 공국을 공격했으나 사르민 전투에서 섭정 로제르에게 패했다. 1117년 무함마드 타파르는 일 가지를 모술에 봉했으나 실제 이행되지는 않았고, 1121년 알 보르소키가 술탄 마흐무드 2세의 반란 진압을 도운 대가로 모술의 아타베그로 재임명되었다.[15] 1118년 알레포를 장악하고 아제르 상귀니스 전투에서 로제르를 전사시키며 명성을 떨치던 일 가지는 1124년에 사망했고, 후계자인 티무르타쉬가 마르딘으로 철수하자 1125년 2월 알 보르소키는 알레포를 접수했다. 이로써 무슬림 빈 쿠라이쉬 이후 40년만에 알레포 ~ 모술 제국이 설립되었다. 뒤이어 알 보르소키는 무슬림 연합군과 진격했으나 아자즈 전투에서 십자군 연합군에 격퇴되었다.
전력을 재정비하던 알 보르소키는 1126년 11월 26일, 모술 대사원에서 (술탄이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10명의 아사신 자객들에게 공격을 받았다. 그는 부상을 입은 채로 3명에게 부상을 입혔지만 결국 사망했고, 자객들은 모두 잡혀 처형되었다. 사후 아들 마수드가 모술, 장군 쿠만 (투만)이 알레포를 계승했다. 1127년 4월, 술탄 마흐무드 2세는 칼리파 알 무스타르시드와의 내전에서 활약한 이마드 앗 딘 장기를 모술과 알레포의 아타베그로 봉했다. 그해 7월 마수드가 독살 의심 정황 속에서 요절하고 어린 아들 알프 아르슬란이 계승하자, 장기는 섭정이 되었다. 장기는 1128년 1월 알레포까지 장악하며 다시금 알레포 ~ 모술 제국을 세웠고, 아르투크 왕조를 복속시키며 자지라 지역을 석권했다. 동부의 술탄 아흐마드 산자르는 마즈야드 토후국의 두바이스를 모술에 봉하려 했지만 실패했다.[16]
3.1.4. 장기 왕조
1171-72년에 누레딘이 의뢰한 앗 누리 모스크와 함께 세워진 45m 높이의 하드바 미나렛
1127년 이래로 모술은 장기 왕조의 수도가 되어 번영하였다. 1133년 7월 칼리파 알 무스타르시드가 모술을 포위했으나 술탄 기야스 앗 딘 마수드가 구원에 나서자 8일만에 철수했다. 본래 술탄들 편에서 칼리파에 맞서던 장기는 1134년 11월, 아들을 통해 모술 성문의 열쇠를 보내며 칼리파 편으로 전향했다. 다만 1135년 모술-칼리파 연합군은 마수드 진영의 두바이스에게 패했고, 알 무스타르시드는 마수드에 패한 후 암살되었다. 1136년 장기는 신임 칼리파 알 라시드와 함께 마수드를 격파했으나 알 라시드가 협상에 나서자 실망하여 모술로 귀환했다.[17] 마수드는 바그다드를 포위, 알 라시드를 폐위했다. 8월에 알 라시드는 모술로 피신했으나 한달 후 장기는 결국 마수드의 압박에 알 라시드를 축출했고, 후자는 결국 암살된다. 1144년 마수드가 모술을 위협하자 장기는 아들을 인질로[18], 돈과 함께 바쳐 무마시켰다.
1144년 12월, 장기는 에데사와 사루즈를 함락하여 무슬림들의 영웅이 되었다. 다만 모술에서 아미르 알프 아르슬란이 장기의 부관 샤자르를 죽이고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자 장기는 에데사 백국을 모두 정복하지는 못하고 회군했다. 주모자들을 숙청하고 알프 아르슬란을 감금한 자기는 아미르를 칭하고 칼리파 알 묵타피의 승인을 받았다. 1146년 9월, 장기는 우카일 부족이 반란을 일으킨 유프라테스 강변의 자베르 요새를 포위했다가 암살되었다. 사후 장남 사이프 앗 딘 가지 (가지 1세)가 모술, 차남 누르 앗 딘 마흐무드 (누레딘)가 알레포를 계승하며 장기 왕조는 동서로 양분되었다. 1149년 11월 가지 1세가 사망한 후 계승한 동생 쿠트브 앗 딘 마우두드는 1157년 1월 장군 자인 앗 딘을 보내 술탄 무함마드 2세와 바그다드의 칼리파를 포위했다가 누레딘의 반발과 포위 장기화로 6월에 철수시켰다.
1159년 무함마드 2세가 사망하자 마우두드는 모술에 망명해 있던 셀주크 왕자 쉴레이만샤를 술탄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아타베그 (섭정)가 되었다. 동시에 모술의 재상 자말 앗 딘 및 군사령관 자인 앗 딘 알리는 각각 제국의 재상과 군사령관이 되었다. 하지만 즉위 후 불과 몇 달 만인 1160년 10월, 아제르바이잔 아미르들과의 정쟁에서 밀려난 자인 앗 딘이 군대 함께 철수하면서 쉴레이만샤를 하마단 성문에서 생포한 뒤 모술로 끌고 갔다. 모술에 유폐되어 있던 쉴레이만샤는 1161년 3월 하마단 인근으로 보내져 살해되었다. 1164년 여름 마우두드는 누레딘과 연합해 하림 전투에서 십자군을 격파했다. 이후 누레딘이 십자군과 맞서는 동안 모술은 안정을 누렸고, 1165년 모술을 방문한 유대 여행가 투델라의 벤자민은 7천의 유대인이 살고 있다고 기록했다.
1169년 들어 마우두드는 와병했고, 누레딘은 동생의 사후 모술 접수를 염두에 두느라 파티마 왕조령 이집트 정복에 나선 살라흐 앗 딘 유수프 (살라딘)를 돕지 못했다. 1170년 9월 마우두드는 사망했다. 그는 장남 장기 2세 대신 차남 가지 2세를 후계자로 정했는데, 이에 전자가 반발하며 숙부 누레딘에 개입을 청했다. 곧바로 진격한 누레딘은 모술을 포위, 11월에 항복을 받아냈다. 다만 누레딘은 부관 귀뮈쉬테긴을 배치한 후 가지 2세를 명목상 아미르로 남겨두었고, 불만 가득한 장기 2세는 보상으로 신자르에 봉한 후 누사이빈과 하부르 강 유역을 자신의 영토로 편입했다. 1171년 9월에는 카이로에 있던 모술 출신의 설교자가 대사원에서 2세기 만에 압바스 칼리파의 명의로 예배를 진행했다. 1174년 5월, 이집트에서 자립한 살라딘을 토벌하려던 누레딘은 병사했고 아들 앗 살리흐 이스마일이 계승했다. 누레딘의 이집트 원정을 도우려던 가지 2세는 대신 누사이빈, 우르파 등을 재점령했고 귀뮈쉬테긴을 보내 알레포 총독 겸 이스마일의 섭정으로 봉했다. 다마스쿠스의 실권자 이븐 알 무캇담은 가지 2세가 연대를 거절하자 살라딘에 항복했고, 시리아 대부분이 신생 아이유브 왕조령이 되었다. 1176년 봄, 가지 2세는 시리아 정복을 시도했으나 알레포 인근의 텔 앗 술탄 전투에서 살라딘에게 패해 철수했다.[19] 1180년 6월 가지 2세는 사망했고, 동생 이즈 앗 딘 마수드가 계승했다. 1181년 12월 알레포의 이스마일은 요절하며 사촌인 마수드에게 도시를 넘겼다. 하지만 살라딘에 맞설 자신이 없던 마수드는 형 장기 2세에게 신자르와 알레포를 교환했다. 1182년 9월, 알레포를 포위했던 살라딘은 11월에 라카-우르파-누사이빈 일대를 정복한 후 모술을 포위했다가 셀주크 술탄 토그릴 3세가 구원에 나서자 12월에 철수했다.
대신 신자르를 점령한 살라딘은 1183년 장기 왕조 군대가 도주하자 아르투크 왕조를 복속시킨 후 5월에 재차 알레포를 포위했다. 이미 고립된 터라 버틸 수 없다 여긴 장기 2세는 6월에 살라딘과 협상하여 신자르, 니시비스, 라카, 사루즈, 하부르 강 유역의 영지[20]를 대가로 항복했다. 이로써 시리아를 석권한 살라딘은 1185년 4월에 재차 모술을 포위했고, 마수드는 일디귀즈 왕조에 도움을 청했다. 이에 일디귀즈 아타베그 팔라반이 아흘라트를 공격하자 살라딘은 대응하려다 와병했고, 12월에 하란으로 회군했다. 다만 1186년 2-3월 마수드는 칼리파 앗 나시르의 중재 하에 살라딘과 협상하여 복속하고, 십자군에 대한 지하드 참전을 약속하며 티그리스 강 상류를 아르투크 왕조에 할양했다. 실제로 마수드는 1191년 아크레 공방전 당시 지원군을 파견해주었다.
1193년 3월 살라딘이 사망하자 마수드는 아흘라트의 베그티무르와 함께 반란을 꾀했으나 둘다 곧 사망하며 무산되었고, 사후 아들 누르 앗 딘 아르슬란샤 1세가 계승했다. 1199년 봄 살라딘의 동생 알 아딜과 후자의 아들 알 카밀은 아르투크 왕조의 수도 마르딘을 포위했다. 알 아딜이 아이유브 내전에 개입하러 떠난 후 알 카밀은 1200년 초에 마르딘을 함락할뻔 했으나 아르슬란샤 1세가 구원하여 실패했다. 다만 아르슬란샤 1세 역시 마르딘을 노리며 아르투크 왕조와 대립하는 틈에 알 카밀은 하란을 점령했다. 1201년 5월 아르슬란샤 1세는 우르파와 하란을 공격했으나 전염병이 닥치자 철수했다. 1204년 봄 아르슬란샤 1세가 사촌 쿠트브 앗 딘 무함마드가 통치하는 신자르를 포위하자 알 아딜은 아들들 중 하란 총독인 알 아슈라프 무사와 디야르바크르 총독 알 아우하드 아이유브를 파병했다.
그해 4월에 누사이빈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한 아르슬란 1세는 모술로 도주했고, 아이유브 군대는 모술 근교를 약탈한 후 철수했다. 9월에 아르슬란샤 1세는 알 아딜과 휴전을 맺었다. 1209년 알 아딜이 신자르를 포위하자 아르슬란샤 1세는 (살라딘의 심복이던) 아르빌의 아미르 무자파르 앗 딘 쿠크부리 (괴크뵈리)와 함께 구원했다. 이어진 휴전 조약에서 아르슬란샤 1세는 알 아딜의 종주권을 주화에 나타내고 기존에 점령된 영토를 양도했다. 1211년, 아르슬란샤 1세는 용병대장 바드르 앗 딘 룰루[21]를 어린 아들들의 아타베그로 삼은 후 사망했다. 뒤를 이은 10세의 아들 마수드 2세는 1218년에 요절했고, 후자의 장남 아르슬란샤 2세 역시 이듬해 요절했다. 1219년 마수드 2세의 3살 아들 나시르 앗 딘 마흐무드가 즉위했고, 외조부 쿠크부리의 도움을 받았다.
3.1.5. 명품의 도시
| 13세기 모술에서 생산되어 중동과 지중해권 각지로 수출된 매우 정교한 황동 주전자인 이와르 (إبريق)들 (영국박물관 소장) | ||
10세기 들어 철과 철제 도구 및 용기들을 생산하던 모술은 13세기 들어 은으로 마감된 고급 동제 용기의 생산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본래 12세기, 은 부족에 직면한 호라산의 장인들에게서 시작한 기법은 12세기 중반 헤라트에서 발전한 후 모술로 유입되었다. 특히 1220년대 호라산 난민들을 수용하며 모술의 금속업은 급성장하였다. 상감 기법으로 장식된 모술의 은도금 유기는 그 화려한 장식 덕에 중세 이슬람 시기 동제 용기 중 가장 미학적이다고 평가되며, 당대에도 고가 명품으로 취급되었다.
12세기에는 특권층의 전유물이다 13세기 들어 상대적으로 대량 생산이 시작된 후에도 여전히 귀했고, 카샨의 도자기처럼 독보적인 특산물로 명성이 높았다. 모술의 금속장이들은 이슬람권에서 유일하게 사제 관계와 계약 관계를 기록으로 남긴 공동체였다. 제자들은 소형의 용기를 제작하여 스승의 평가를 받아야 했다. 이러한 모술의 은 도금 동제 용기들은 바드르 앗 딘 룰루가 다른 군주들과의 외교에 있어 의전 혹은 선물로 자주 활용할 정도로 인지도가 높았다. 위의 사진 속 주전자는 1232년에 장인 슈자아 이븐 만아가 제작한 것이다.
3.1.6. 룰루 왕조
1239년 룰루가 알리의 후손 무덤에 건립한 이맘 야흐야 아불 카심 성지 (مرقد الامام يحيى أبو القاسم). 2014년 다에시가 폭파해 사라졌다.
최소 8세기부터 있다가 13세기에 현재의 구조를 갖춘 시리아 가톨릭 대주교구인 마르 투마 (성 토마스) 성당[22]
섭정 룰루와 대립하던 쿠크부리는 1226년 다마스쿠스의 아이유브 왕공 알 무아잠 이사와 함께 모술을 포위했고, 룰루는 후자에 복속을 표했다. 그러던 1233년 6월 쿠크부리가 사망하자 이듬해 아미르 마흐무드는 요절했다. 정황상 룰루가 죽인 것이고 방법은 독살, 교살, 감금 및 아사 등의 설이 있다. 룰루는 더이상 장기 왕족을 아미르로 추대하지 않으며 아타베그로써 통치했고, 아이유브 술탄 알 카밀을 명목상 인정하며 압바스 칼리파의 책봉을 받았다.[23] 그는 모술에 1233-59년 카라 사라이 (검은 궁전)[24], 1239년 이맘 야흐야 성지, 1248년 아운 앗 딘 성지 등의 종교 건물들을 세우고 신자르 성문을 보수해쓰며 많은 카라반사라이를 세웠다. 룰루는 (야지디교 외에는) 종교적으로 관용적이었고 예술과 학문을 후원했으며, 여러 책[25]의 편찬을 후원했다.
13세기 중반 룰루의 치세 하에 번영을 누리던 모술은 점차 군사적 위기에 봉착했다. 1237년 룰루는 호라즘 왕조의 잔당인 콰레즈미야에 맞섰다가 패해 진영을 약탈당했고, 1254년에는 갈등을 빚던 야지디인 지도자 하산 이븐 아디와 그 추종자 2백여명을 처형했다. 1250년 기준 룰루의 영토는 모술, 신자르, 지즈레, 누사이빈, 카르키시야 (부사이라), 하부르 강 유역, 쿠르디스탄 산지에 이르렀다.[26] 1242년 쾨세다으 전투로 룸 셀주크가 붕괴되자 룰루는 몽골 제국에 복속했고, 1246년에는 귀위크 칸의 쿠릴타이에 소환되자 카라코룸으로 특사를 보냈다.[27] 1253년에도 룰루는 이웃한 마야파리킨의 아이유브 아미르 알 카밀 무함마드가 몽골로 향하자 특사단을 보냈다.[28] 1254년 룰루는 동전에 몽골에 대한 복종을 표했고, 시리아의 술탄 앗 나시르 유수프와 맘루크 왕조에 대한 동맹을 맺었다.[29]
1257년에는 이집트의 맘루크 술탄 이즈 앗 딘 아이바크가 룰루의 딸과 결혼을 앞두고 암살되었다. 그해 말엽 바그다드 공격을 앞둔 바이추의 몽골군이 모술에 주둔하자 룰루는 식량과 무기를 제공했으며 티그리스 강에 부교를 세웠다. 1258년 바그다드 포위 시에 룰루는 (무슬림임에도 불구하고) 병력을 보냈다. 바그다드 함락 후 룰루는 80세의 노구를 이끌고 직접 마라게로 가서[30] 훌라구 칸에게 복속했다. 또한 룰루는 훌라구 칸의 요구에 따라 아들 루큰 앗 딘 이스마일 (앗 살리흐)을 파견했고, 후자는 1259년 12월 디야르바크르의 항복을 받아냈다. 동시에 훌라구 칸은 12만 대군과 우르파를 지나 알레포를 공격했고, 결국 시리아를 정복한다. 1259년 말엽 룰루는 사망했고 장남 이스마일, 차남 알라 앗 딘 유수프 (알 무자파르), 삼남 사이프 앗 딘 이샤크 (알 무자히드)가 각각 모술, 신자르, 지즈레를 계승했다.
동생들이 곧 맘루크 왕조로 귀순한 것에 반해 이스마일은 부친처럼 계속해서 몽골 (일 칸국)에 협력했다. 하지만 1260년의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몽골군이 패배하자 1261년 4월, 이스마일은 몽골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카이로로 향해 맘루크 술탄 바이바르스에 복속했다. 그곳에서 이스마일은 동생 유수프, 이샤크와 재회했다. 가을에 삼형제는 바그다드 수복에 나선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 2세를 따라 자지라로 향했다.[31] 라흐바에서 칼리파와 헤어진 삼형제는 계속 북상하자 신자르에 이르러 유수프와 이샤크는 남고 이스마일은 모술에 당도했다. 다만 곧 칼리파의 패전과 죽음을 접한 유수프와 이샤크는 다시 시리아로 도주해 바이바르스에게서 많은 영지를 받았다. 11-12월 삼다구가 이끄는 1만의 몽골군은 모술을 포위했고, 이스마일은 각지에 구원을 청했다.
3.2. 파괴와 중흥
파일:1262 모술.jpg1261-62년 모술을 포위한 몽골군
1262년 4월, 훌라구 칸은 모술 포위를 직접 이끌기 위해 남하하다 킵차크 칸국의 침공 소식에 회군했다. 한편 혼란기를 틈타 하란을 장악하고 있던 튀르크인 군벌 아쿠쉬 알 바를리가 1천 4백의 기병대와 모술 구원을 향해 출격했다. 원군 소식에 삼다구는 철수를 고려했으나 몽골측 조언자인 자인 앗 딘 알 하피지가 그 숫자가 1/8 수준으로 적다며 맞설 것을 설득하자 삼다구 역시 출정했다. 알 바를리는 5월에 신자르 부근에서 삼다구에게 대패해 부상을 입은 채로 도주했고, 훌라구 칸의 알 비라 (비레직) 영지 제안에도 결국 바이바르스에 귀순했다. 계속 저항하던 이스마일은 6-7월에 항복했으나 처형되었고, 9개월 간의 공방전 후 모술을 점령한 몽골군은 도시를 파괴했다. (1262년 여름) 이로써 모술은 쇠퇴했고, 남쪽의 신자르나 북서쪽의 마르딘에게 밀려나게 되었다.
모술의 번영을 견인하던 금속업 역시 1250년대부터 장인들이 대거 다마스쿠스를 거쳐 카이로로 이주하며 쇠퇴했다. 대신에 후세인 빈 무함마드를 필두로 3대째 이어진 모술 장인 가문[32]이 맘루크 왕조 하의 시리아와 이집트를 새로운 금속업의 중심지로 부상시켰다. 14세기 초에는 라술 왕조 하의 예멘, 일 칸국 하의 파르스 및 서부 이란에도 모술의 은도금 유기 기법이 전수되었다.[33] 다만 모술의 금속업 역시 축소된 형태로 유지되었다. 1286년 알레포의 맘루크 주둔군이 모술을 습격하고, 총독 루큰 앗 딘 이븐 알 바하 알 무갈리가 도주한 것 외에는 반세기 이상 평화가 유지되었다. 14세기 일 칸국과 잘라이르 왕조 시기 모술은 점차 도시 규모를 회북했고, 바그다드와 달리 티무르의 파괴를 피하여 과거의 위상을 되찾을 수 있었다.
3.3. 오스만 제국
1631년 모술을 점령하는 무스타파 파샤
모술은 15세기 티무르 제국, 흑양 왕조, 백양 왕조를 거쳐 1508년 이스마일 1세가 점령하여 사파비 왕조령이 되었다. 1515년 셀림 1세의 일시 점령에 이어 1538년 쉴레이만 1세의 오스만 제국군이 점령하였고, 바그다드 및 바스라와 함께 이라크의 3대 거점이 되었다. 오스만 시기 모술은 7개의 성문과 거대한 성탑을 지닌 요새도시이자 명성 높은 마리스탄 (병원), 실내 시장 (카이사리야)를 갖추고 직물을 특산물로 하는 무역 도시로 발전하였다.
1622년, 이라크를 재정복한 아바스 1세는 카셈 술탄 아프샤르를 총독으로 봉했다. 그러다 아바스 1세 사후 1631년 무스타파 파샤의 오스만 제국군이 모술을 재점령햇다. 1638년, 바그다드를 수복한 무라트 4세는 기존에 리와 (군)의 치소이던 모술을 독자적인 윌라야 (도)의 치소로 전환시켰다. 17-19세기 동안 모술은 평화와 높은 자치를 누리며 기존 아랍 색채를 유지했다.
3.3.1. 잘릴리 가문
18세기 들어 오스만 제국은 유럽 전선에 몰두하며 아랍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점차 잃어 갔다. 바그다드의 조지아계 맘루크 정권과 알레포의 아젬 가문처럼 모술에서는 잘릴리 가문이 호족으로 득세했다.[계보] 17세기 후반 디야르바크르에서 모술로 이주한 아시리아인 기독교도 압둘 잘릴리는 이발소에서 무슬림 손님들을 기다려야 하는 것에 분노하여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잘릴리 가문은 빠르게 곡물 중개업으로 부를 쌓았고, 이를 통해 예니체리 부대 및 조세권 등을 장악하면서 모술의 실권자로 떠올랐다.1726년 이스마일 파샤 잘릴리의 임명 후 18세기 중엽 잘릴리 가문은 간헐적이지만 지속적으로 총독에 올랐고, 그중 후세인 파샤와 아민 파샤는 각각 7번과 6번이나 임기를 지냈다. 1743년 후세인 파샤가 민병대만을 이끌고 정규군도 연전연패하던 나디르 샤를 격퇴, 그의 이라크 정복 야욕을 마침내 꺾어버린 일은 잘릴리 가문의 입지를 더욱 탄탄히 해주었다.[35] 1770-80년대의 술레이만 파샤 역시 4차례나 임명되며 잘릴리 가문의 독점 체제를 견고히했고, 1786년 마지막으로 임명된 후에는 1808-10년을 제외하고는 반세기 가까이 잘릴리 가문만이 모술 총독을 지내는 등 사실상 왕조를 구축했다. 아민 파샤의 아들 무함마드 파샤는 1789-1806년의 17년간 최장 집권을 이루었다. 그후 10여년간 술레이만 파샤 가문이 집권하다 1818년 아민 파샤 가문이 투쟁 끝에 찬탈했으나, 1822년 다시 전자의 야흐야 파샤가 집권했다.
잘릴리 시기 모술은 유럽과 인도 및 이란을 잇는 교역 도시로써 번영하며 13세기 바드르 앗딘 룰루 시기의 영광을 회복했다. 잘릴리 총독들은 권세 과시 및 정당성 확보를 위해 학교, 모스크, 상점, 칸 (카라반사라이), 함맘 (공중목욕탕) 등의 건설 사업으로 도시의 인프라를 확대했다. 당시 20개에 달하는 학교들에서는 쿠란, 문법, 수학, 천문학 등의 과목이 있었고 인근 쿠르드 및 베두인들도 교육을 위해 모술로 유입되었다. 학문적으로 철학, 역사, 문학, 시 암송, 문학비평 등이 발달했고 풍자, 비유, 대유, 수사, 문법, 통사론 등에 대한 짧은 논문과 사전들이 편찬되었다. 역사서만 왕조사, 연대기, 인물사, 지역사, 동시대사, 편람, 영웅기 등 다양한 형식으로 20권 이상이 발견되었다. 핫다비, 라브타키, 와이즈 등의 유명 선생 가문들 때문에 서아시아 각지에서 몰려든 유학생 및 학자들이 모술에 단기 체류하며 일종의 교환 학생이 되기도 하였다.
당시 모술의 문화 향유 장소는 크게 두 곳이 있었다. 먼저 120개가 넘는 카흐베하네에서 예니체리 장교들이 조정 사절, 엘리트층 등과 둘러앉아 시 낭송을 곁들이며 정치적 동맹과 무역 협정 등을 논하였다. 왕공 및 귀족들의 마즐리스 (궁정)에선 그들의 친우와 손님들이 모여 시와 음악을 감상했다. 가장 인기 많은 장르는 시였고, 권력자들의 후원을 받기 위한 칭송시가 번성했다. 그외에도 공공 시 대회와 상금 부여를 통해 마와일 (추모시), 이크와니야트 (형제애시), 가잘 (사랑시), 카므리야트 (음주시) 등을 진흥했다. 시는 대화, 웅변 결투, 답장 등의 소통 수단이었고 현지 정치 상황 및 귀족들의 권세와 위상의 척도였으며 맘루크와 아얀 (호족)들의 궁정에 의해 회자되고 후원되었다.
한편 근대 시기 모술은 수피 성향 강한 순니 도시였다. 원리주의 수니파의 불만에도 오스만 조정이나 예니체리, 잘랄리 가문 모두 수피에 긍정적이었고 교육과 상업을 위해 새로 정착한 쿠르드 인들도 수피 성향이 강하여 새로운 수피 교리를 모술에 들여오기도 했다. 시내에는 여러 칸카 (수도원)들이 세워졌고, 우스만 베이 이븐 술레이만 파샤 등은 수피 근본주의에 기반한 이슬람 정화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잘랄리 시대의 상업 발달로 알 우마리, 타신 알 무프티 가문 등은 유럽의 젠트리와 같은 중상층을 형성하며, 기존 부족들의 기득권을 대체했다. 그들은 주로 토지 임대, 제조업 대한 세금 등의 개인 사업으로 세력을 확장했고, 1826년 거상 하산 알 우마리의 아들 카심의 주도 하에 잘릴리 가문에 대한 봉기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봉기군은 1828년 압둘라흐만 파샤를 총으로 사살했고, 1829년 무함마드 아민 파샤를 축출하며 한세기 간의 잘릴리 시대를 종식시켰다. 그후 카심이 카심 파샤로 총독에 올랐다.
3.3.2. 근대
| 8세기 마르완 2세가 세우고 1810년에 중건된 무사피 (우마위) 모스크 | 1900년경에 세워진 나아만 앗 답바그 저택 |
| 19세기 말의 하드바 모스크(좌)와 나비 유누스(우) | |
19세기 들어 중앙 집권화에 나선 오스만 제국은 1834년 현지인들의 총독 선출권을 박탈하여 잘릴리 및 우마리 가문 등 현지 호족들의 영향력을 꺾었다. 이후 바이락타르 메흐메트 파샤를 시작으로 (세력화를 막기 위해) 4년 전후의 짧은 임기의 비모술 출신의 총독들이 부임했고, 세율이나 행정 조직 등이 다른 제국 도시들과 통일되었다.
비슷한 시기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무역에 있어 모술의 중요성은 크게 하락했다. 한편, 근대 시기까지도 다수의 기독교도 공동체가 있던 모술에는 여러 선교사들이 파견되었다. 1750년 교황 베네딕토 14세가 파견한 도미니코회 수사들과 1873년 당도한 수녀들은 근대식 학교, 진료소, 인쇄소, 고아원, 자수를 가르치는 공방 등을 세웠다. 도미니코회 수녀들의 회당은 2010년대까지 기능했다. 수녀들 중에는 120명의 아시리아-아랍인 수녀도 있었다.
3.4. 근현대
| 13세기 요나의 무덤 추정지에 사원을 건설, 1924년 터키인 건축가가 미나렛을 더하고, 90년대 사담이 확장한 나비 유누스 모스크[36] | |
1393년 티무르가 건설, 1853년에 미나렛이 더해지고 1910년의 대지진 후 다시 세워진 앗 나비 지르지스 (성 게오르기우스) 모스크. 위의 나비 유누스 모스크와 함께 2014년 다에시에 의해 상당 부분 파괴되었다.
그러다가 1차 대전 이후 통일 아랍국가로서 이라크가 영국의 보호 하에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하고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튀르키예 공화국[37]과 국경을 정할때, 모술을 포함한 북부 이라크 지역[38]의 다수 민족이 튀르크멘 및 노가이 타타르 등 튀르크계 부족들과 쿠르드인임을 들어 민족자결주의원칙에 따라 튀르키예에 속한다는 사실을 확인받았으나, 영국 측에서는 이 지역에서 채굴되기 시작한 석유에 욕심을 들이고 있었고, 튀르키예측에서도 튀르크 민족국가를 형성하는데에 이 지역이 혼란을 유발시킬 수 있다는 이유[39]로 미적지근하게 나서면서 결국 1923년 로잔 조약 당시 튀르키예 측에서 영유권을 포기했다.
로잔 조약당시 튀르키예 공화국 측이 영유권을 포기한 지역이 이 외에도 이집트와 키프로스가 있는데, 이집트와 키프로스는 둘 다 당시에는 사실상 독립상태이고 명목상 종주국만 오스만 제국이었던 상황이었던 것에 반해 1918년 10월 무드로스 평화 조약 당시까지 오스만 제국 하에 있었기 때문에 예외적인 사례이다. 그 때문에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정부 들어서 모술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튀르키예인들이 늘고 있다. 당연히 이라크인들은 기겁하며 튀르크 놈들이 다시 쳐들어오면 수니, 시아, 쿠르드 이럴 거 없이 모두 손잡고 튀르크 놈들부터 격퇴하겠다는 만응을 보인다.
3.5. 현대
| 1977년 모술의 봄 축제 행진 | 1985년 사담 후세인 정권기에 착공된 미완성의 모술 대사원 |
1926년 국제연맹은 튀르키예를 압박해 모술을 영국의 이라크 위임통치령으로 인정하게 했다. 1920년대 키르쿠크 등에서 석유가 발견된 후, 모술에는 이라크 북부의 석유를 튀르키예 및 시리아로 보내는 송유관과 타르를 정제하는 키우아라 공장이 들어섰다. 영국 위임통치와 1932년에 세워진 이라크 왕국 시기 오스만 제국의 공공 건축물 상당수는 철거되었다. 1933년 6천여 명이 희생된 시멜레 학살 후 이라크 북부 산간 지방에 살던 아시리아인 기독교도 상당수가 모술로 이주해 정착했다.
1958년 이라크 혁명 후 압둘 카림 카심 총리는 영국-왕정 시기의 기념물들을 파괴했다. 1959년 대령 압둘와하브 앗 사아디가 이끄는 아랍민족주의 군부가 모술에서 봉기했으나 강경 진압되었고, 앗 사아디는 처형되었다. 1967년 압둘 라흐만 아리프 대통령 시기에는 모술 대학교가 설립되었고, 70년대 이라크 군부를 모술 출신들이 주도할 정도로 교육열이 높았다. 1968년에 집권한 바트당의 아흐마드 하산 알바크르 역시 기존 정권들의 기념물들을 파괴했다. 한편 1947년에 13만이던 인구는 1965년에는 26만으로 18년만에 2배 늘었다.
모술은 사담 후세인 정권의 쿠르드인 부통령 타하 야신 라마단, 아시리아인 부총리 타리크 아지즈 등의 많은 바트당 고위 인사를 배출했다. 바트당 정권은 1972년 석유를 국유화하여 얻은 막대한 수익으로 모술에 인프라를 구축했고 직물, 제당 공장을 세웠다.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 시기 모술은 일부 폭격을 맞았지만 큰 피해는 없었다. 다만 1991년 쿠르드 봉기 후 (2003년까지) 비행 금지구역으로 설정되었고, 미국과 영국 공군의 감시 하에 놓였다. 사담 후세인 시기의 아랍화 정책에도 모술은 여전히 아랍, 아시리아, 쿠르드, 아르메니아, 튀르크멘, 야지디, 체르케스인 및 소수의 유대인 등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공존하는 도시로 남았다.
사담 후세인이 모술 북쪽 외곽에 건설한 알 리마흐 궁전
20세기 말엽 들어 확장된 알 누리 모스크바트주의 이라크 시기 모술은 다수의 주민들이 입대하는 등 바트당에 충성을 보였다. 동시에 살라피즘 이슬람을 후원한 이자트 이브라힘 알 두리의 영향으로 여러 모스크가 세워졌고 아랍 무슬림 셰이크 (부족장)들이 요직에 임명되어 권력자가 되었다. 이라크 전쟁 당시 바트당의 중심 중 하나던 모술에서는 2003년 7월까지 우다이 후세인과 쿠사이 후세인 형제 등 후세인 정권 잔당이 치열히 저항했고, 약탈이 벌어지기도 했다. 모술, 아르빌 등 이라크 북부는 대한민국 국군 자이툰 부대가 비전투병으로 파병간 지역이기도 하다.
2004년 12월 폭탄 테러로 미군 14명 등 22명이 사망하는 등 전후 혼란이 이어지자 종교와 민족을 망라한 지식인 계층이 도시를 떠났고, 2008년까지 1만 2천에 달하는 아시리아인 기독교도들이 박해와 위협을 피해 시리아 및 튀르키예 등 외국이나 교회 혹은 수도원에 몸을 피했다. 2007년 12월 모술 국제공항이 (1993년 이래 최초로) 재개항했다. 2008년 1월에는 아파트에서 벌어진 폭발로 36명이 사망했다. 2008년 5월에는 미군의 지원 하에 이라크 군이 민병대 거점을 포격하기도 했다.
3.5.1. 다에시의 강점
문타다 중령과 모술 탈환의 다큐멘터리.
이라크 군이 내분으로 불과 6일만에 패퇴하며 2014년 6월 10일에 IS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그들이 지배하는 지역 가운데서는 가장 큰 도시였다. IS는 제일 먼저 모술의 감옥에 갇혀있던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범들을 전면 석방하고 지하디스트로 포섭했으며, 차량 퍼레이드를 벌인 직후 도시에 있는 모든 사람 형상의 동상들과 조각들을 파괴하고, 기독교 교회를 때려부수고 이슬람 센터로 개조하는가 하면, 샤리아를 전면 시행하여 공포 정치를 시작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여성들은 부르카를 강제로 착용해야 하며 그렇지 않은 여자들과 비무슬림 여인들은 대놓고 성노예로 만들어버렸으며, 공개 투석형과 도둑질에 대한 손목 절단형을 대놓고 시행하고, 모술의 동성애자를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떨어뜨려 죽이기도 했다.
점령 얼마 후인 2014년 7월, 다에시는 우상숭배로 여겨지는 성인 숭배를 근절한다며 요나 (유누스)의 성지인 나비 유누스 모스크를 폭파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3세기에 세워져 20세기에 확장된 모스크는 폐허로 남았다. 모스크가 자리한 언덕은 지하의 발굴로도 확인되었듯 본래 아시리아 시절 니네베의 궁전 중 하나가 있었기에 추가 문화재 피해도 우려된다.[40]
모술의 시민들은 공포에 떨고 있지만, 떠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IS에 엄청나게 많은 돈을 내야 했었다.[41] 문제는 전쟁통에 그런 돈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리가 없으므로, 사실상 200만명에 가까운 시민들이 IS에 인질로 잡혀있는 신세나 다름없는 것. 거기다 이라크 정부군은 모술을 탈환하기에는 너무나 무능하고, 쿠르드족은 자기들의 영역이 아니라고 봐서 모술 탈환에 소극적이라[42] IS 점령 이후 1년이 넘은 상황인데 장기적으로 탈환 전망에도 답이 없다.
부수고 죽이고…IS 모술 정복 1년
3.5.2. 모술 탈환전 (2016-17년)
"MAKE MOSUL GREAT AGAIN!"
2016년에 들어 체질개선으로 이전보다 훨씬 강력해진 이라크 정부군과 페쉬메르가를 필두로 한 반 IS 세력의 공세에 IS가 밀리고, 이제는 IS 측에서 주요 거점이었던 모술의 함락까지 걱정하며 수비전을 준비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군의 모술 탈환의 가능성이 계속 점쳐지고 있고, IS 지도부는 계속해서 떨어지는 지하드 전사들의 사기 저하와 공습으로 인한 자금 손실에 고민하고 있으며, 심지어 13살 여자 아이들까지 위안부으로 무장시켜 모술을 지켜야 하는 상황이다. 시민들을 대상으로 칼 같이 집행되었던 복장 규제나 잔혹한 샤리아 형벌도 최근엔 자금이 궁해져서 직접 형벌 대신 벌금 거두기로 대신하는 경우가 늘었다고 한다. 심지어 보석금을 많이 내면 샤리아를 위반해 감옥에 들어가도 쉽게 나올 수 있다고 한다.
2016년 5월 30일, 이라크 쿠르드족 세력인 페쉬메르가 측에서 5,500명의 군대를 동원해 소수 민족들이 주로 살고 있는 동부 모술의 9개 마을을 IS로부터 탈환했다. 이들은 IS 지하디스트 140명을 사살하고 차량폭탄 14개도 파괴했다.
현재 갈수록 패색이 짙어가는 모술에서 IS가 최후의 발악으로 잔혹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 이번엔 성노예가 되기를 거부한 비무슬림 여성 19명을 불태워 죽이는 짓을 저질렀다.
6월 19일, 이라크군이 팔루자를 탈환하는데 성공하면서 이제 이라크 내 IS의 거점은 이곳 하나만 남았다.
7월, 전황은 IS에게 계속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7월 9일 이라크 정부군은 모술 부근 공군 기지를 탈환했으며, 7월 13일에는 모술 부근 마을 하나를 더 탈환했다. 앞선 7월 11일에는 미국이 모술 탈환 작전을 대비해 미군 560명을 추가 파병했다.
8월 4일 미 국방부가 모술의 IS 세력이 약화되고 있으며, IS는 전투 실패시 처형하는 극강수를 두고 있다고 한다. 적어도 2016년 하반기에 모술 탈환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10월 17일, IS로부터 모술을 탈환하기 위한 작전이 드디어 시작되었다고 한다. 모술 주민들은 음식을 사재기하고 있으며, IS는 긴급히 지하 땅굴을 파고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주민들을 처형하며, 부상한 대원들은 시리아의 라카로 피신시키고 있다고 한다. 이라크 정부군 약 6만, 페시메르가 4만, 준군사조직 1만의 병력이라고 한다. 약 5천으로 추측되는 IS 전사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아 보이지만, 도시 곳곳에 지뢰와 폭발물을 설치함으로 인하여 수주에서 수월에 달하는 전투가 될 것이라는 예상.
# 미 지상군이 투입이 확인되었다. 대규모 육군병력은 아니고 수백명 정도가 작전 지원을 위해 투입되었다. 정밀폭격 유도를 위한 Joint Terminal Attack Controller 병력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2016년 11월, 2년 4개월만에 이라크군이 입성하였으며, IS와 시가전이 벌어지고 있다.# IS는 이라크군이 탈환한 모술 지역을 포격하고 있다.#
2017년 1월 18일, 이라크 군이 모술 동부(티그리스강 동부)를 완전 탈환했다.# 그리고 2월말. 모술 동부를 이라크군이 탈환하며 타격을 입은 IS 수괴 알 바그다디는 이라크에서의 패배를 인정하고 이라크내 잔존 병력들에게 자결하거나 도주해서 게릴라전을 하라고 지시했다. IS이 거둔 점령지 가운데 가장 큰 도시이자 본거지나 다를 거 없던 모술을 도로 빼앗겼다는 점은 크나큰 타격일수 밖에 없다.
IS는 2017년 6월 21일 자기들이 칼리프 선언을 했던 모술의 명물 알-누리 모스크를 폭파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 전쟁 이전의 알 누리 모스크 |
| 다에시가 폭파시킨 후 알누리 모스크 |
그리고 이미 해방되었던 모술 서부 일부 지역 및 티그리스 강가 일대의 병원 지역을 IS이 갑자기 장악하는 일이 벌여져, 주민들이 대피하는 등 소동이 벌어지고 있다. 다행히 6월 30일 현재 지지부진하던 구시가지의 장악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일단, IS가 모술에서 축출이 되면 이라크의 모든 주요 근거지를 상실하고 시리아로 쫒겨나게 되며 하위자 등의 땅이나 시리아 국경 일부를 점유중인 잔당들을 제외하면 이라크 내전이 사실상 종료를 맞게 된다.
해방된 모술 화보 - 2017.5.29.
물론 시아파 민병대가 수니파를 문제의 원인으로 보고 보복행위를 하려 들 가능성도 있는 등 여전히 시아-수니간의 종파분쟁소지가 있을 수 있으나, 이라크 정부가 2016년 이후로 통제력을 되찾으면서 진정될 기미가 보이고 이라크 쿠르디스탄이 문제가 될 소지는 있으나 애초에 이라크의 쿠르드인은 후세인 축출 이후로 미국에 의해 광범위한 자치권을 보장받았고 정부에 협력 중이었으므로 전후 IS를 2년 동안 탱킹 한 공로로 자치권이 확대되는 사실상의 분리 독립선에서 정리될 가능성이 크다. [44]
탈환 직후의 모술 시가지 모습
전란으로 일부 파괴된 1880년 도미니코회가 세운 시간의 성모 성당
드디어 이라크 정부군이 모술 탈환 작전 1년만에 모술을 IS로부터 사실상 탈환해내는데 성공했다.
이라크군의 이라크내 IS 최대거점 모술 완전 탈환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IS가 모술에서의 패배가 짙어지자 자폭테러와 도주로 이라크군에게 저항하고 있다.
작전 개시 9개월 만에 이라크군의 모술 완전 탈환이 마침내 임박했다는 소식이다. 하지만 모술 완전 탈환으로 이라크와 IS와의 전쟁이 완전 끝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 이라크 북, 중부의 탈아파르와 하위자, 이라크-시리아 국경 지역의 IS의 점령지들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모술 탈환 후 이라크 내전의 전세는 탈 아파르와 하위자, 이라크-시리아 국경 지역의 IS 세력들에 대한 이라크군의 토벌 공세로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2017년 7월 9일, 모술 탈환이 공식 선언되었다. 작전 개시 9개월 만에 값진 승리를 이루어낸 것이다. 하이델 알 아바디 이라크 총리가 직접 모술에 방문하여 승리를 선언했다. 다만 IS가 도망치거나 섬멸되면서 남긴 부비트랩이나 탈환 과정에서의 전투로 인해 도시가 폐허가 되어 인프라 재건에는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라고 한다.
3.5.3. 현황 (탈환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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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 누리 모스크의 첨탑이자 모술의 랜드마크이던 하드바 미나렛 (좌)과 복원 공사 중인 모습 (우) | |
다음과 같이 복원할 예정이라고.
모술 탈환 이후 현재 이라크 정부군의 통제 아래 점차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고 있다. 잔존 부비트랩들이 속속들이 제거되고 모술 내 교회가 다시 예배를 시작하고 시민들이 길거리에서 다시 마음껏 노래를 부르는 등 예전의 모습을 점차 되찾고 있다.
# 이라크 내전 당시 IS와 맞섰던 이라크 정부 소속의 니네베 경찰특공대 대원들의 분투를 다룬 2020년작 영화 '모술'이 넷플릭스를 통해 개봉하였는데 숨겨진 명작이라는 밀리터리 매니아들의 입소문을 타고 있다.
4. 튀르키예의 영유권 주장
원래 이 모술 지역은 물론 이라크 전역이 1차 세계대전 직후까지만 해도 오스만 제국에 속해 있었다.
그러다 이 지역을 점령한 영국의 개입으로 현대 이라크를 구성하는 오스만 제국의 3개 주인 모술, 바으다트, 바스라를 합쳐서 이라크가 이루어졌다.
영국과 튀르키예 독립 전쟁당시 튀르키예 대국민회의(Türkiye Büyük Millet Meclisi)를 이끌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사이에 체결된 로잔 조약에서 양측은 바으다트(=바그다드)와 바스라의 독립은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이라크를 아랍국가로 독립시킴에 대해 합의했다.
하지만 현 이라크 북부의 모술 주에 대해서는 아랍 민족이 아닌 쿠르드인과 튀르크계 투르크멘[47] 및 노가이 타타르인임을 들어 튀르키예에 속함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튀르키예는 이 지역에서 지속되고 있던 튀르크멘과 쿠르드 그리고 아랍인 간의 갈등을 들어 튀르크 민족국가를 형성하는데 방해가 되리라 판단, 결국 튀르키예 측이 영유권을 포기하는 쪽으로 매듭지어졌다.
하지만 같은 시기 튀르키예가 영유권을 포기한 이집트, 키프로스는 애초에 다수 민족이 각각 이집트인과 그리스인으로 튀르크 민족국가라 할 수 없었고, 이미 사실상 독립상태로 떨어져나가고 명목상 주인만 오스만 제국이었던 판이라 딱히 이의를 제기할 껀덕지도 없었지만 모술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튀르크멘을 들어 영유권을 주장할 거리가 있다.[48]
아타튀르크 이후 튀르키예는 모술의 영유권에 대해 침묵했지만,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정부에 들어 다시 이 지역을 튀르키예 영토로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5. 여담
- 내륙 도시임에도 수산물이 풍부하여 생선 요리가 유명하다. 특히 잉어 종류의 민물고기를 토막내어 튀기고 토마토 소스를 올려 향신료 뿌린 밥과 함께 먹는 음식이 시장에 많으며, 현지 주민들의 주식 중 하나이다.
- 역사가 매우 오랜 도시임에도 구도심과 신도심이 잘 구분되어 있지 않고, 20세기 후반에 대대적인 도시 개발이 이루어지며 옛 유적이 별로 남아있지 않다. 그나마 남아있던 종교 유적들 중 상당수는 또 다에시에 의해 파괴되는 아픔을 겪었다.
6. 관련 문서
[1] 어떻게 보면 모술을 서울에 비유한다면 니네베는 한성백제 유적과 비슷한 상황. 강을 두고 현재의 도시와 유적이 마주하는 점, 신도심에 유적이 있는 점, 유적의 역사가 수천년이나 된다는 점,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다가 근현대에 발굴이 진행된 점이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2] 모직물 중에 캐시미어가 카슈미르 지역에서 유래된 것과 유사하다[3] 모술은 아시리아인들에게 특히 중요한 지역인데 자신들의 조상이 세운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였던 곳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ISIL이 모술을 침공하기 전에는 아시리아인이 모술 인구의 약 40%를 차지했었다.[4] 중동에 흔한 유대인들은 1950년대에 이라크 대부분 지역에서 추방되었다.[5] 구약성경에 나오는 니느웨가 바로 이 니네베이다.[6] 이후 그는 파티마 조의 개입으로 석방되어 이집트에 정착한다. 그의 손자 나시르 앗 다울라는 재상을 지내다가 반란을 일으키고 숙청된다[7] 수십년째 바그다드 조정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 한다[8] 알리 빈 마즈야드의 손자이자 후계자[9] 1036년, 전 부와이 조의 재상 이븐 마쿨라가 망명해오자 키르위쉬는 그를 수용했다가 3년 후 교살시켰다. 이듬해에는 잘랄 앗 다울라를 도와 튀르크 장군 바르스토간의 반란을 진압했다[10] 이후 키르와쉬는 티크리트 상실을 인정함[11] 알 바사시리가 라흐바에 파티마 칼리파의 사절과 함께 나타나자 쿠라이쉬가 마즈야드 토후국의 두바이스 1세, 미르다스 왕조의 나스르 등과 함께 찾아와 복속함[12] 1062-68년 압바스 칼리파의 재상이었고 1085년 마르완 왕조를 멸망시켰다[13] 이에 제케르미슈는 보두앵 2세와의 포로 교환 혹은 1만 5천 디나르의 몸값을 제안했는데, 탕크레드는 섭정직 유지를 위해 돈을 택했다.[14] 1105년 1월에 무함마드 타파르에게 충성 서약해 지배권 인정받음[15] 다만 1122년 마즈야드 토후국의 두바이스에겐 패함[16] 술탄 마흐무드 2세가 장기에게 모술 포기 명령하자 장기는 무력 시위 후 10만 디나르와 선물 바쳐 술탄의 책봉 (예복)받음[17] 마수드는 장기가 돌아가자마자 강경한 태도로 나왔고,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다. 이후 마수드는 남하하여 1136년 8월 3일부터 바그다드를 포위했다.[18] 장남 사이프 앗 딘 가지[19] 살라딘은 많은 재물을 얻음[20] 이미 살라딘이 1182년 말에 점령한 영토들[21] 아르메니아계 혹은 쿠르드계 해방 노예[22] 사도 토마스의 유해 일부가 안장되어 있다.[23] 알 말리크 알 라힘[24] 1980년대까지만 해도 그 잔해가 남아있었다[25] 그중 키탑 알 아그니, 즉 음악의 서에 그의 삽화가 남아있음[26] 1249년 아이유브령 자지라 총독 투란 샤는 룰루의 방해 우려해 우회하여 이집트로 향함[27] 특사단은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의 헤툼 1세, 조지아 왕국의 다비드 6세, 룸 술탄 클르즈 아르슬란 4세, 블라디미르의 야로슬라브 3세, 트레비존드 제국의 마누일 1세, 에르주룸의 군주 등과 함께 감[28] 아르투크 왕조 역시 특사단 보냄[29] 유수프, (바흐리 맘루크 수용으로) 이집트와의 대립 피할 수 없게 되자 카말 앗 딘 이븐 알 아짐을 모술의 바드르 앗 딘 룰루와 마르딘의 아르투크 아미르 알 사이드 가지에게 파견해 양측 간의 누사이빈 대한 영토 분쟁 중재하고 맘루크와의 전쟁 터질 시 지원 확답 얻어냄[30] 이떄 룸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4세, 카이카우스 2세, 시리아 술탄 앗 나시르 유수프의 아들 알 아지즈와 동행함[31] 본래 바이바르스는 1만 대군을 준비했으나 모술에서 온 한 아미르가 원정이 성공하여 칼리파가 바그다드를 장악한다면 그를 제거하려 들 것이고 권좌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고 간하자 바이바르스는 소수의 병력만을 제공했다[32] 아들들 알리, 아흐마드 및 후자의 아들 후세인 등[33] 이는 이스파한 등지에 현존한다[계보] 이스마일 파샤 1726-27 / 후세인 파샤 1730 후 1758까지 7번 임명 / 파타흐 파샤 1769-71 (당주) VS 후세인 파샤 / 아민 파샤 1752 ~ 1775 6차례 총독. 1768-74 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 술레이만 파샤 1771-75 후 3차례 재임명. 1786-89 마지막 / 압둘 바키 이븐 우바이드 아가 1785-86. 우바이드 아가 : 예니체리 대장 / 무함마드 파샤 1789-1806. 아민 파샤 아들. 17년 최장 기간 / 누만 파샤 1806-08. 술레이만 파샤의 아들 / 사달라 파샤 1810-12. 할레트 에펜디 로비로 임명 / 아흐마드 파샤 1812-17, 1818-21. 술레이만 파샤 아들 / 하산 파샤 1818. 후세인 파샤 아들 / 마흐무드 파샤 1818-21. 무함마드 파샤 아들 / 압둘라흐만 파샤 1821-22. 압둘라 베이의 아들 / 야흐야 파샤 1822-27. 누만 파샤 아들. 1826 카심 우마리의 모술 주민 봉기. 잘릴리 가문 쇠퇴 / 압둘라흐만 파샤 1827-28. 마흐무드 파샤의 아들. 반군의 총에 피격되어 사망 / 무함마드 아민 파샤 1829. 우스만 베그의 아들. 반란에게 축출됨. 이후 하산 알 우마리 아들 카심 파샤가 총독[35] 이후 오스만 조정은 반세기 이상 이라크에 자치를 묵인해준다[36] 요나의 무덤은 팔레스타인의 할훌에 있다고도 한다[37] 정확하게 말하면 공화국 수립 이전의 일로 '튀르키예 대국민회의'(Türkiye Büyük Millet Meclisi)라고 불리었다.[38] 구 오스만 제국 당시 모술 주이다.[39] 당시 튀르키예는 튀르크 민족국가를 추구하고 있었는데 모술에는 튀르크인 뿐 아니라 쿠르드인과 아랍인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1910년대 디야르바크르와 하캬리 등지에서 학살당한 아시리아 기독교도들이 이라크 북부에 다수 살고 있었다[40] 성인 숭배를 극혐하는 이슬람 근본주의 특성상 성지 파괴는 자주 벌어졌다. 특히 사우디 와하비주의자들이 메카 정복 후 영묘와 고택을 비롯해 많은 이슬람 유적을 파괴했다. 하지만 그들조차 모스크를 파괴하지는 않았다. (쉬아 모스크라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41] 3일 통행증이 있긴 하지만, 가족과 재산을 볼모로 두고 3일 내로 돌아오지 않으면 가족을 처형하고 재산을 압수하는 무시무시한 제도였다[42] 그런데 이걸 욕할 수만은 없는 게, 이라크처럼 부족주의/종파주의가 극심한 나라에서 쿠르드 군사조직이 수니파 최대 도시인 모술을 점령하려고 시도했다가는 전투 과정에서의 피해는 둘째치고, 점령에 성공한다고 해도 극심한 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시아파들은 이라크 내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니까 가능성이 있지만, 순니 아랍보다 더 소수인 쿠르드가 모술을 차지했다가는 순니, 시아 양쪽의 반발과 경계심이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질 수도 있다.[43] 그의 이름을 딴 근본주의 조직도 있을 정도[44] 다만 이라크 쿠르디스탄은 신자르 일대를 텃밭으로 삼고 시리아의 로자바 정부와 밀접한 PUK와 현 자치주 통령의 소속 세력이자 터키와 밀접한 PDK로 이라크 쿠르드 자치주의 정치지형, 군 전투서열까지 양분되어있어서 상황에 따라 쿠르드 자치주간 내분이 벌어질 수도 있으며 덤으로 자국의 고토라며 호시탐탐 모술을 노리던 터키가 개입할 수 있다.[45] 위 지도는 에르도안이 실제로 자국의 영유권을 주장하는데 인용하는 1920년 오스만 제국 의회가 선언한 1차 대전 전후 터키의 영역이다. 참고로 저 지도에서 북서부 트라키아(그리스 동부, 불가리아 남동부), 키프로스, 모술 모두 현재까지 튀르크계 소수민족들이 거주하고 있는 땅이다. #[46] 실제로는 1차대전 패전 이후 열강들에게 땅을 뜯길대로 뜯겨서 아나톨리아 북쪽에 쳐박힌 형국이었다. 현재의 튀르키예 영토는 그리스-튀르키예 전쟁 전후 당시 확정된 것이다.[47] 이라크 중북부에 위치한 케르쿠크와 모술을 중심으로 거주하는 오우즈 튀르크어를 사용하는 유목민족을 투르크멘이라 한다. 나라 이름 투르크메니스탄의 기원도 이 투르크멘. 오우즈 계통 언어를 써서 현대 튀르키예어와 말이 통한다.[48] 일방적인 튀르키예의 극단적인 주장일뿐 이미 튀르키예는 명목상으로도 포기했었으며 해당지역의 다수민족은 터줏대감 쿠르드와 아랍계 민족이며 아무도 이를 정당한 명분이라 생각안한다. 같은 논리라면 이란의 소수민족들이 쿠르디스탄에 거주하는데 동부 터키가 이란의 영토라고 명분이 되는 매우 극단적인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