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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0년의 영토
1. 개요
페르시아어: اتابکان آذربایجان / ایلدگزیان아제르바이잔어: Eldənizlər / Eldəgəzlər
영어: Eldiguzids / Ildegizids / Ildenizids / Atabegs of Azerbaijan
셀주크 제국의 아제르바이잔 총독에서 시작하여 12세기 후반 ~ 13세기 초엽 현 아제르바이잔 남부 및 이란 서북부 (남아제르바이잔) 일대를 통치한 국가. 엘디귀즈 / 일데니즈 / 일데귀즈 / 일데기즈 / 엘데니즈 왕조 혹은 아제르바이잔 아타베그국 등으로도 불린다. 셀주크 제국을 멸망시킨 후에도 셀주크 술탄이 하사한 아타베그 (섭정인 베그) 칭호를 유지했고, 캅카스의 패자로 군림하다가 호라즘 왕조의 왕자 잘랄 웃딘 밍부르누에게 멸망했다. 수도는 타브리즈 혹은 나흐츠반이었고, 대부분의 중세 튀르크계 국가들처럼 공용어는 페르시아어였다.
2. 역사
1136년 셀주크 제국의 술탄 기야스 앗 딘 마수드가 킵차크인 해방 노예인 가신 샴스 앗 딘 엘디귀즈를 후계자인 조카 아르슬란샤의 아타베그 (섭정 / 대부)로 임명하고, 아제르바이잔을 이크타 (영지)로 주었다. 엘디귀즈는 베르데 (바르다)를 거점으로 삼아 개발했고, 자신에게 의탁한 아르슬란샤의 모친이자 토그릴 2세의 과부인 무미나 (모미네) 하툰과 결혼해 셀주크 왕실이 인척이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1146년까지 사실상 아제르바이잔에 독립 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1152년 술탄 마수드가 사망하고, 이듬해 하마단의 권신 카스 베그가 사망하며 일디귀즈는 제국 내에서 더욱 입지를 굳혔다 1153년 일디귀즈는 마라게를 기반으로 한 아흐마딜 왕조의 아르슬란 아바와 동맹하여 새 술탄 무함마드 2세에 맞섰고, 전쟁은 3년간 이어졌다.그 과정에서 일디귀즈는 1155년 마흐무드 2세의 아들이자 아르슬란샤의 사촌인 차그리샤를 사로잡아 간자에서 처형했다. 1156년 일디귀즈는 아르슬란샤의 숙부 쉴레이만샤 및 압바스 왕조의 칼리파 알 묵타피와 함께 하마단을 공격했으나 무함마드 2세에게 패배했다. 이후 무함마드 2세는 이간책으로 아르슬란 아바에게 아제르바이잔 총독위를 주는 대가로 그를 동맹에서 이탈시켰고, 결국 일디귀즈는 아제르바이잔을 잃었다. 다만 바그다드 공격에 실패한 무함마드 2세가 1159년에 사망하고 동맹이던 쉴레이만샤가 술탄이 되자, 1160년 일디귀즈는 아제르바이잔을 회복한 후 그해 말엽 쉴레이만샤가 장기 왕조에 의해 사로잡혀 모술로 끌려간 틈에 의붓아들 아르슬란샤를 술탄에 옹립할 수 있었다. 이로써 일디귀즈는 4년 간의 고난 후 셀주크 제국의 최대 아미르가 되었다.
2.1. 샴스 앗 딘 일디귀즈
아르슬란샤는 도움을 준 양부 일디귀즈에게 아제르바이잔에 더하여 아란 (간자), 시르반, 지발 (서부 이란), 하마단, 마잔다란, 길란, 레이, 이스파한 등 사실상 제국 주요부를 영지로 주었다. 이에 엘디귀즈는 기존 칭호에 '위대한'을 더한 아타베그-에-아잠을 칭했다. 그의 영토는 아르메니아에서 레이, 다시 카스피해에서 페르시아만에 이르렀다. 다만 쉴레이만샤를 옹립했던 레이의 아미르 이난츠 순쿠르는 새 술탄에 반발하며 마라게의 아르슬란 아바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고, 자신의 동생 무함마드를 술탄으로 옹립한다며 하마단으로 진격했다. 일디귀즈는 직접 나아가 연합군을 격파했고, 이난츠는 레이로 도주했다. 휴전의 일환으로 일디귀즈는 아들 무함마드 자한 팔라반과 (유일하게 자신에게 맞설만한 아미르인) 이난츠의 딸을 결혼해 사돈을 맺었다.한편 킵차크 용병들을 바탕으로 세력을 확대한 조지아 왕국은 1122년 트빌리시 점령에 이어 1138년 간자를 함락했고, 여러 차례 샤다드 왕조의 수도 아니를 함락했다. 그러자 1143년부터 샤다드 왕조는 일디귀즈에 복속했는데, 1161년 조지아 군대가 재차 아니를 함락하고 더 나아가 일디귀즈 령인 나흐츠반까지 공격했다. 이에 일디귀즈는 아흘라트샤 왕조의 쇠크멘 2세, 마라게의 아크 순쿠르, 에르주룸의 살투크 왕조 등 5만의 무슬림 연합군을 꾸려 1163년 조지아를 침공했다. 압도적인 무슬림 대군에 패배한 기오르기 3세는 본국으로 철수했고,샤다드 왕조는 일디귀즈의 속국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1165년 이난츠는 사위인 바반드 왕조의 하산 1세와 호라산으 신흥 강자로 성장하던 호라즘 왕조의 일 아르슬란과 연합해 재차 하마단을 공격했으나 격퇴되었다.
그리고 1166년 기오르기 3세가 재차 출병해 나흐츠반과 베일라간 일대를 초토화시킨 후 주민들을 포로로 끌고가자 일디귀즈는 다시 그와 전쟁을 치렀으나 소모전이 되자 휴전을 맺었다. 한편 1157년에 일디귀즈에 복속했던 호라산 총독 무아야드 아이 아바는 호라즘 왕조에게서 비스탐, 담간을 수복하고 바반드 군주 샤 가지 루스탐을 격파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1167년에 호라즘에 복속했다. 1169년 일디귀즈는 이난츠를 암살, 레이를 점령하고 아들 무함마드를 총독에 봉했다. 뒤이어 일디귀즈가 호라즘의 일 아르슬란을 격파하고 이스파한으로 진격하자 모술의 장기 왕조, 파르스의 살구르 왕조, 케르만 셀주크, 살투크 왕조, 아흘라트샤 왕조, 후제스탄의 슈믈라 등이 복속했다. 그 무렵 일디귀즈는 아르다빌을 정복했고, 아타베그이던 자말 앗 딘 무함마드는 보루제르드의 영지를 대신 주었다.
이로써 일디귀즈는 마잔다란과 마라게 정도를 제외한 이란 전역을 직접 / 간접 지배하게 되었다. 아르메니아 사가들은 그가 기독교도들에게 관용적이었다고 기록했다. 1174년 일디귀즈는 케르만의 아르슬란샤 2세를 복위시켰고, 차남 크즐 아르슬란은 아흐마딜 왕조에게서 타브리즈를 함락한 후 그 수도인 마라게를 포위했으나 함락하지는 못했다. 그 무렵 술탄 아르슬란샤는 전횡을 일삼는 일디귀즈에 맞서려 했으나 일디귀즈가 하마단의 군대와 국고를 (조지아 원정에 좋은) 나흐츠반으로 옮겨버리자 결국 타협했다. 이후 일디귀즈는 조지아를 침공했으나 격퇴되었고, 그는 후퇴한 나흐츠반에서 1174년 말에 사망하여 하마단에 자신이 세운 마드라사에 안장되었다. 그러자 기오르기 3세가 재차 아니를 장악했고, 샤다드 샤한샤는 포로가 되었다. 일디귀즈를 계승한 아들 무함마드는 1175년 여러 제후들과 아니를 수복했다.
2.2. 누스라트 앗 딘 무함마드 (자한 팔라반)
무함마드는 1176년 실권 회복을 시도하던 술탄 아르슬란샤를 독살한 후 7세의 토그릴 3세를 옹립하며 셀주크 제국의 전권을 장악했다. 이후 그는 중심지를 나흐츠반에서 하마단으로 옮겼고, 동생인 무자파르 앗 딘 크즐 아르슬란 우스만을 타브리즈를 중심으로 한 아제르바이잔 부왕에 봉했다. 무함마드는 조지아의 침공들을 격퇴하고 호라즘 왕조와 친교를 유지하며 전쟁으로 지친 이란에 평화를 가져왔다. 그는 또한 과학, 수공예, 무역, 예술을 후원했고 나흐츠반에 금요 모스크 및 아타베일라르 모스크 등을 건설했다. 말년에는 아들들 중 누스라트 앗 딘 아부 바크르를 아란 (간자), 무자파르 앗 딘 우즈베크를 하마단, 아미르 아미란 오마르와 쿠틀루크 이난츠 마흐무드를 레이와 이스파한 등지에 봉했다. 1186년, 평화를 유지하던 무함마드가 사망하자 아제르바이잔 부왕인 동생 우스만이 아타베그로 계승했다.2.3. 무자파르 앗 딘 크즐 아르슬란 우스만
대시인 니자미 간자비를 환영하는 크즐 아르슬란
크즐 아르슬란의 계승에 불만을 품은 계모 이난츠 하툰은 자신의 아들 쿠틀루그 이난츠 무함마드를 추대하려 했고, 꼭두각시 신세에서 벗어나려 했던 술탄 토그릴 3세 및 바반드 왕조의 후삼 앗 다울라와 연합하여 1186년 10월에 하마단을 장악했다. 아제르바이잔으로 피신한 크즐 아르슬란은 바그다드로 사절을 보내 칼리파 앗 나시르에게 지원을 청했고, 후자는 고민 끝에 수용하여 재상 잘랄 앗 딘 우바이둘라 이븐 유누스 휘하의 군대를 파견했다. 압바스 군대는 크즐 아르슬란과 합류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진군했으나 1188년 5월, 다이마르그 전투에서 튀르크멘 부대의 전향으로 토그릴 3세에게 패배했다. 하지만 앗 나시르는 재차 원정군을 꾸려 파병했고, 이번에는 크즐 아르슬란과 합류해 하마단을 점령했다. 크즐 아르슬란은 토그릴 3세의 5촌 당숙인 산자르 이븐 쉴레이만샤를 술탄으로 추대했다.
이에 토그릴 3세는 아제르바이잔의 튀르크멘 영주 이즈 앗 딘 하산 이븐 킵차크의 성채로 피신했고, 크즐 아르슬란과 앗 나시르에 사절을 보내 협상을 시도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결국 2년의 공성전 끝에 토그릴 3세는 크즐 아르슬란에게 항복했고, 아들 알프 아르슬란과 함께 타브리즈 인근의 카흐란 성채에 구금되었다. 거칠 것이 없어진 키질 아르슬란은 앗 나시르의 동의하에 술탄 산자르를 폐위하고 형수 이난츠 하툰과 결혼한 후 하마단에서 술탄으로 즉위했다. (1190년 10월) 따라서 크즐 아르슬란은 셀주크 제국의 유일한 비셀주크 혈통의 군주였다.[1] 그는 자신의 술탄 등극을 반대한 쉬르반샤 왕국을 공격해 1191년 데르벤트까지 진격했고, 쉬르반샤 아크시탄 1세를 복속시켰다. 하지만 1191년 가을, 크즐 아르슬란은 여전히 야심이 있던 왕비 이난츠 하툰에 의해 침대에서 암살당한다.
2.4. 누스라트 앗 딘 아부 바크르
크즐 아르슬란의 사후 조카이자 아제르바이잔 총독이던 아부 바크르가 제일 먼저 진격해 하마단을 장악[2], 아타베그-에-아잠 및 알 말리크 알 무아잠 (존경받는 왕) 칭호를 얻었으나 술탄을 칭하지는 않았다.[3] 한편 혼란을 틈타 아미르 카말 앗 딘 아바리와 마흐무드 아나스오를루의 도움으로 유배지를 탈출한 토그릴 3세는 아부 바크르의 추격병들을 따돌리고 재차 튀르크멘들을 포섭하여 군대를 편성했다. 그러곤 동쪽으로 진군하여 1192년 6월 22일, 카즈빈 부근에서 쿠틀루그 이난츠와 아미르 아미란 형제를 격파했다. 이후 잔여 병력을 흡수한 토그릴은 4년만에 하마단을 점령하고 술탄으로 복위하였다. 그는 술탄의 재물고와 지발에서 이스파한에 이르는 영토를 확보했다. 쿠틀루그 이난츠, 아미르 아미란 형제는 아제르바이잔으로 철수한 아부 바크르에게 도전했으나 패하여 각자 레이와 시르반으로 도주했다.그리고 아부 바크르는 공동의 적이 생긴 토그릴 3세와 동맹을 맺었다. 한편 레이의 쿠틀루그 이난츠는 점차 강해지던 호라즘 왕조의 테키쉬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에 테키쉬는 군대를 이끌고 와 쿠틀루그 이난츠를 축출하고 레이를 점령하였다. (1192년) 이후 군대를 준비하던 토그릴 3세에 대해 테키쉬는 협상에 나섰다. 그리고 토그릴 3세는 자신의 딸을 호라즘 왕자 유누스 칸과 결혼시키며 테키쉬와 사돈을 맺으며 그에게 복속하였다. 하지만 테키쉬가 동생 술탄 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아잠의 세금을 거둔 후 회군하자 토그릴 3세는 1193년 3월에 레이를 장악했다. 이후 예상되는 테키쉬의 반격에 대비하기 위해 토그릴 3세는 이난츠 하툰을 통해 모든 일디귀즈 왕공들과 휴전을 맺었고, 이를 공고히 하기 위해 엄청난 연상인 그녀와 결혼했다. 하지만 곧 이난츠 하툰이 토그릴 3세까지 암살하려다 실패하며 관계는 파탄났다.
쿠틀루그 이난츠는 잔잔으로 도주해 재차 테키쉬에게 개입을 청했고, 카리파 앗 나시르 역시 그와 동맹을 맺었다. 1194년 토그릴 3세는 직접 진격해 쿠틀루그 이난츠와 호라즘 연합군을 격파했다. 하지만 곧 테키쉬가 이끄는 호라즘 대군이 셈난에 당도했고, 쿠틀루그 이난츠와 합류했다. 토그릴 3세는 호라즘 측의 레이 할양 요구를 묵살했고, 다른 제후들의 원군이 올 때까지 기다리자는 아미르들의 충언도 묵살한 채로 쿠틀루그 이난츠의 전향 밀약을 확신한 채 적진으로 돌격했으나 패배했다. 낙마한 토그릴 3세는 쿠틀루그 이난츠에 의해 참수되었고, 몸통과 머리가 분리되어 각각 레이와 바그다드에 효수되었다. (1194년 3월) 이로써 셀주크 제국은 완전히 멸망했다. 얼마 후 아부 바크르는 쿠틀루그 이난츠를 암살하고 아미르 미란을 추방했는데, 후자는 매부인 시르반샤 아크시탄 1세에게 망명했다.
2.4.1. vs 조지아 왕국
13세기 초엽 조지아 군대의 이란 원정
아미르 미란과 아크시탄은 트빌리시로 향해 후자의 주군인 조지아의 타마르 대왕에게 도움을 청했다. 환대와 함께 지원을 약속한 타마르 대왕은 남편 다비트 소슬란에게 대군을 주어 파견했고, 1195년 6월에 그는 주력군과 함께 아제르바이잔 각지를 습격하며 분견대를 보내 일디귀즈령 삼키르를 공격했다. 요새화된 샴키르를 방어하던 아부 바크르는 열악한 도로에 어려움을 겪던 다비트 소슬란을 공격했지만 패배했고, 샴키르 역시 함락되었다. 칼리파의 깃발[4]을 포함한 많은 전리품과 포로를 얻은 다비트 소슬란은 패잔병을 쫓아 간자로 향하여 현지 귀족, 카디 (법관), 상인, 학자들의 항복을 받았다.
아부 바크르의 궁전에 들어가 옥좌에 앉은 그는 축하연을 벌인 후 회군하며 아미르 미란을 샴키르의 영주로 봉했으나, 반격에 나서 간자와 샴키르를 수복한 아부 바크르는 아미르 미란마저 암살한다. 1208년 일디귀즈 왕조의 제후인 아르다빌의 아미르가 부활절을 틈타 조지아령 아니를 약탈하고 1만여 기독교도 주민들을 학살하자 반격에 나선 타마르 대왕은 자카레 왕자 휘하의 원정군을 파견했다. 1209년의 라마단에 자카레는 아르다빌을 점령해 보복 학살을 가했다. 그리고 1210년 아부 바크르가 사망하자 자카레는 재차 출정해 나흐츠반을 공격해 함락하지 못했으나 계속 나아가 줄파, 타브리즈, 미아네, 잔잔, 카즈빈을 거쳐 호라산의 입구인 고르간까지 약탈한 후 트빌리시로 회군했다.
2.5. 무자파르 앗 딘 우즈베크
우즈베크의 즉위 직후 맘루크 장군 나시르 앗 딘 멩글리가 반란을 일으켜 1212년 1월에 다른 맘루크 장군 아이토그미쉬를 격파하고 이스파한, 하마단, 레이를 장악했다. 우즈베크는 칼리파 앗 나시르 및 아사신 수장 하산 3세와 동맹하여 1215년 9월에야 멩글리를 격파할 수 있었다. 뒤이어 이라크-에-아잠 지역의 총독에 봉해진 아미르 아글라미쉬는 호라즘의 알라 웃 딘 무함마드에게 복속을 표했다가 1217년에 암살되었고, 우즈베크는 이스파한을 수복할 수 있었다. 다만 나머지 레이 등지는 살구르 왕조의 사드 1세의 수중에 들어갔다. 사마르칸트에서 아글라미쉬의 암살 소식을 접한 알라 웃딘 무함마드는 이란으로 진격, 사드 1세를 격파하고 그를 복속시켰다. 우즈베크는 파라진 성채를 강화해 농성하자는 재상 라비브 앗 딘 단단의 충고를 무시하고 2백의 굴람 심복들과 함께 아제르바이잔 산지로 숨었다.동시에 그는 제후인 아하르 영주 누스라트 앗 딘 피슈킨에게 재상 단단과 함께 왕실 보물을 챙겨 타브리즈로 향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피슈킨과 단단은 미야네에서 호라즘 군대에게 패해 보물과 함께 사로잡혔고, 호라즘에 복속하게 되었다. 뒤이어 이라크 정복을 위해 바그다드로 진격하려던 알라 웃딘 무함마드는 자그로스 산맥에서 눈폭풍을 만나 많은 병력을 잃었고, 복속을 표하며 함께 조지아에 맞서자는 우즈베크의 요청을 거절한 채로 임박한 몽골 제국의 침공에 맞서기 위해 회군했다. 그리고 1220년 제베와 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이 아제르바이잔에 진입하자 우즈베크는 나흐츠반으로 달아났고, 1222년에 타브리즈로 돌아왔으나 몽골에 복속해야 했다. 1224년에는 호라즘 왕자 기야스 웃 딘 피르샤가 아제르바이잔을 침공하자 우즈베크는 그에게도 복속하고 나흐츠반을 할양했다.
그러던 1225년 5월, 호라즘 술탄 잘랄 웃 딘 밍부르누가 아흐마딜리 왕조의 내분에 개입해 우즈베크의 며느리이자 마라게의 여왕인 술라파 하툰[5]과 결혼한 후 도시를 점령했다. 이로써 아흐마딜리 왕조는 멸망했고, 우즈베크가 부인 말리카 하툰마저 버리며 간자로 피신하자 타브리즈 역시 잘랄 웃 딘에게 항복했다. 다만 얼마 후 타브리즈 주민들이 호라즘 병사들을 죽이자 잘랄 웃 딘 밍부르누는 그해 7월에 도시를 포위, 일주일의 공성전 끝에 함락했다. 이로써 남아제르바이잔을 평정한 그는 말리카 하툰을 코이 & 살마스 & 우르미아의 영주로 봉하고, 위조된 증거로 우즈베크와의 결혼을 무효화한 후 그녀와 결혼했다. 뒤이어 호라즘 장군 오르칸이 북상하자 간자 총독 잘랄 앗 딘 알 쿠미가 항복했고, 우즈베크는 나흐츠반의 알린자 요새로 피신했다가 며칠 후 말리카 하툰의 결혼 소식에 절망한 채로 사망했다.
2.6. 부흥운동 및 후일담
우즈베크의 사후 누이 잘랄리야가 나흐츠반을 계승했다. 그녀는 일디귀즈 왕조의 아미르들인 베클리크 앗 사디디, 사이프 앗 딘 순쿠르자, 나시르 앗 딘 아쿠쉬, 말리카 하툰 등과 동맹했다. 1227년 잘랄리야는 귀머거리에 벙어리였던 우즈베크의 아들 카무쉬를 코이에서 석방해 아타베그인 크즐 아르슬란 카무쉬로 선포했고, 잘랄 웃딘 밍부르누의 재상 샤라프 알 물크를 격파해 샤미란으로 몰아냈다. 1228년에는 우즈베크의 아미르이던 이즈 앗 딘 발반 알 칼칼리가 거병하여 아르다빌 남쪽의 칼칼을 점령했다. 하지만 조지아를 격파한 잘랄 웃딘 밍부르누가 직접 나서 모든 반란을 진압했고, 간자에 당도하자 카무쉬가 제후를 자처하며 항복했다.이후 잘랄 웃딘 밍부르누는 아나톨리아 진출에 나섰다가 1230년 야스체멘 전투에서 룸 술탄국 및 아이유브 왕조 연합군에게 대패하며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그 틈에 카무쉬는 아사신 군주 무함마드 3세의 신하가 되었고, 잘랄 웃딘 밍부르누의 사후에는 술라파 하툰과 결혼했다. 한편 우즈베크의 손자 누스레트 앗 딘은 룸 술탄국으로 망명했다가 1250년 무렵 나흐츠반으로 돌아와 뭉케 칸에게서 아제르바이잔의 만호장으로 임명되었고, 일 칸국 시기에도 귀족으로 여생을 보냈다.
3. 역대 군주
- 샴스 앗 딘 일디귀즈 (1136-74)
- 누스라트 앗 딘 무함마드 자한 팔라반 (1174-86)
- 무자파르 앗 딘 크즐 아르슬란 우스만 (1186-91)
- 누스라트 앗 딘 아부 바크르 (1191 - 1210)
- 무자파르 앗 딘 우즈베크 (12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