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6 15:28:18

기야스 앗 딘 마수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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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주크 술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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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28b6c6> 셀주크 제국 술탄
마수드 빈 무함마드 빈 말리크샤
مسعود بن محمد بن ملكشاه
본명 기야스 앗딘 아부 알 파흐 마수드 이븐 마훔마드 이븐 말리크샤 알 셀주크
غياث الدين أبو الفتح مسعود ابن محمد بن ملكشاه السلجوقي ‎
출생 1108년
사망 1152년 9월 13일
재위 셀주크 제국 술탄
1133년 5월 ~ 1152년 9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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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계승 전쟁2.2. vs 압바스 칼리파2.3. 치세 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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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셀주크 제국의 11대 술탄. 무함마드 타파르의 아들로, 형 마흐무드 2세 사후 3년 간의 내전 끝에 조카와 동생들을 제압하고 술탄에 올랐다. 다만 호라산의 숙부 아흐마드 산자르의 우위를 인정해야 했고, 영토는 이라크와 이란 서부에 국한되었다. 그나마 내전을 틈타 실권 회복에 나선 압바스 칼리파 알 무스타르시드알 라시드에 맞서 전자와 다이마르그 전투, 후자와 바그다드 공방전을 치러 모두 승리한 결과 이라크 만큼은 확고히 유지할 수 있었다. 1138년 후로는 전쟁을 기피한 채로 내부 정비에 나서며 안정적으로 통치하였다.

치세 초반 여러 도전에 직면해야 했던 마수드는 휘하 아미르들에게 이크타 (영지)를 남발하며 왕권의 약화를 묵인하였고, 이는 향후 셀주크 제국 붕괴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따라서 역사가 이븐 알 아시르는 마수드 대부터 셀주크 조의 급격한 쇠퇴가 예정되어 있었다고 평가하였다. 1152년 마수드가 아들 없이 조카 말리크샤를 후계자로 지목하고 사망하자 동생들이 반발하며 재차 내전으로 이어졌고, 마수드에게 옹립되어 와신상담하던 칼리파 알 묵타피가 이라크 남부를 장악하고 (이번에는 완전히) 자립하게 된다.

2. 생애

술탄 무함마드 타파르의 차남으로, 1114년 불과 7세의 나이로 모술 총독 알-보르소키의 에데사 원정에 종군하며 경력을 시작하였다. 이때 아르투크 왕조의 일 가지가 마수드를 일시 체포하자 부왕이 분노하기도 하였다. 마수드는 이듬해 하마단 총독 부르수크의 시리아 원정에도 동행하였다. 1118년 무함마드 타파르가 사망하자 제국은 그의 친족들 간에 분할되었다. 장남 마흐무드 2세는 술탄으로서 이라크와 아제르바이잔, 차남 마수드는 파르스이스파한, 삼남 토그릴은 카즈빈을 영지로 받았고 그들의 숙부이자 동생인 아흐마드 산자르호라산을 접수하였다.
다만 1119년 마흐무드와 산자르가 격돌하여 후자의 승리로 귀결되었고,[1] 이로써 술탄의 권위가 하락하자 마수드는 반란을 일으켰다. 다만 불과 13세였던 마수드는 이듬해 알-보르소키에게 진압되었고, 마흐무드에게서 모술 총독으로 복권되었다. 마흐무드는 사로잡힌 어린 동생을 용서하였다. 1123년 마수드는 이라크 힐라의 베두인 부족장 두바이스와 동맹하여 바그다드를 습격하였으나 압바스 조는 이마드 앗 딘 장기와 함께 격퇴해내었다. 칼리파 알 무스타르시드와의 악연의 시작이었다.

2.1. 계승 전쟁

한동안 잠잠히 지내던 마수드는 1131년 8월, 마흐무드가 사망하고 어린 아들 다우드가 계승하자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제위에 도전하였다. 술탄 다우드는 이라크의 마수드, 파르스와 후제스탄의 셀주크샤, 토그릴 2세 등의 숙부들과 맞서야 했다. 마수드는 셀주크샤와 동맹하였는데, 1132년 5월 둘다 산자르에게 패배하고 그에 복속하였다. 이후 마수드는 산자르의 사면을 받아 아제르바이잔 총독에 봉해졌다. 한편 내전을 틈타 셀주크 술탄의 이름을 쿠트바 (금요 예배)에서 제외하고 힐라를 점령하는 등 자립의 행보를 보이던 칼리파 알 무스타르시드에 대해 마수드는 모술의 장기를 시켜 바그다드를 공격하게 하였다. 하지만 그해 8월에 벌어진 전투는 칼리파의 승리였다.

한편 1132년 가을, 산자르가 호라산의 반란에 대처하러 회군하자 마수드는 복속을 철회하고 다우드와 함께 산자르가 술탄으로 옹립한 토그릴 2세에 맞섰다. 하지만 둘은 패배하였고, 함께 바그다드로 도주하였다. 셀주크 조의 분열을 원하던 칼리파는 과거의 적을 수용한 후 1133년 1월 바그다드 아미르들의 지지를 받던 마수드를 술탄으로 책봉하였다. 마수드는 다우드와 함께 칼리파 군대를 이끌고 북상, 그해 5월 토그릴 2세를 격파하고 하마단에 입성하였다. 이로써 마수드는 술탄에 올랐고, 즉시 칼리파와의 약속을 철회하며 양측의 대립이 재개되었다. 알 무스타르시드는 자신에게 남은 다우드와 이란 중부에 웅거하던 토그릴을 도와 북상하여 모술을 포위하였고, 마수드가 구원병을 파견하자 철수하였다.

2.2. vs 압바스 칼리파

1134년 6월, 마수드는 재차 토그릴에게 패배하여 하마단을 내어주고 바그다드로 향하였다. 다만 이미 배신 전적이 있는 마수드를 불신한 칼리파는 10월 초엽 그를 바그다드에서 추방하였다. 하지만 불과 9일 후에 토그릴이 후계자를 두지 못하고 요절하자 마수드는 곧장 하마단으로 돌아가 술탄에 복위하였다. 11월 모술의 장기는 칼리파 진영에 가담하였고, 이듬해 5월 장기-압바스 군대는 마수드의 동맹 두바이스와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그러자 바스라 총독 베그 아바는 비밀리에 마수드 측으로 전향하였다. 이를 모르던 알 무스타르시드는 재상의 반대에도 바그다드를 출정하였고, 마수드 역시 셀주크 제후들을 소집하여 남하하였다.

1135년 6월, 케르만샤 부근에서 벌어진 다이마르그 전투는 마수드의 승리였고, 그는 포로가 된 칼리파와 함께 하마단에 개선하였다. 마수드는 알 무스타르시드가 바그다드의 궁전을 벗어나지 않는 조건으로 사면하였다. 칼리파를 배신한 베그 아바는 바그다드 총독에 봉해졌는데, 이에 시민들이 반발하자 마수드는 저항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성벽 일부를 허물었다. 이후 아제르바이잔을 원정하던 마수드에게 칼리파의 장인이기도 했던 산자르는 두바이스를 넘기라 요구했으나 마수드가 거부하자 하마단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그러자 8월 마수드는 약속을 파기하고 알 무스타르시드의 폐위를 선포한 후 아제르바이잔으로 유배형을 내렸다. 동시에 후자의 아들 알 라시드가 칼리파로 추대되었다.

따라서 하마단 외곽에서 떠날 채비를 하던 알 무스타르시드는 마침 산자르의 군대가 당도하자 재기를 노리며 그 축하연에 참석하였다. 하지만 그는 술탄이 부재한 틈에 자신의 막사에서 쿠란을 읽던 중 (마수드가 사주한 것으로 여겨진) 아사신 단원에게 살해되었다. 후임 칼리파 알 라시드는 그해 10월 바그다드에 귀환한 즉시 복수를 천명하였다. 그는 약속된 배상금을 요구하는 술탄의 사절단과 셀주크 총독 베그 아바를 축출한 후 도시 성벽을 재건하며 공성전에 준비했다. 동시에 모술의 장기와 동맹하였고, 마수드와 대립하던 다우드가 바그다드의 칼리파 진영에 가담하였다. 이후 쿠트바에서는 마수드와 산자르 대신 다우드가 언급되었다.

군대를 모은 알 라시드는 1136년 5월 출정했으나 이듬달 장기가 마수드의 매복을 알리자 회군하였다. 7월에는 장기가 직접 이라크로 진군해 마수드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하지만 알 라시드가 마수드와 협상에 나서자 장기는 모술로 돌아갔고, 그러자 마수드는 강경 태세로 전환하여 협사을 파기하였다. 그리고 8월 마수드는 남하하여 바그다드를 포위하였다. 도시의 수비는 견고했으나, 보급품이 충분하지 않아 보름 만에 함락이 임박해지자 알 라시드는 장기의 초청을 받아 모술로 도피하였다. 다음날 바그다드는 항복하였고, 도시에 입성한 마수드는 이틀 후 카디 (법관)들을 소환하여 알 라시드의 폐위를 선언하고 그 숙부 알 묵타피를 칼리파로 추대하였다.

이듬달에는 장기에 압력을 가하여 알 라시드를 모술에서 추방하게 하였고, 알 라시드는 아제르바이잔 서부의 다우드에게 의탁하였다. 이스파한 접수를 위해 도시를 사전 방문한 알 라시드는 1138년 6월, 그곳에서 (부친과 마찬가지로) 아사신 자객에게 암살당하였다. 후임 칼리파 알 묵타피는 장기에게 아미르 직위를 하사하는 것 외에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기에 마수드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한편 같은해 동로마 제국의 침공에 직면한 장기는 바그다드에서 시위를 조직하여 술탄에게 지원에 나설 것을 촉구하였다. 이에 마수드는 2만 병력을 파견했으나, 이미 샤이자르 공방전에서 전세를 역전한 장기는 '원군'의 시리아 접수를 우려하여 갖은 이유를 둘러대며 돌려보내었다.

2.3. 치세 후반

비록 이라크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였으나 술탄의 직접 지배령은 과거에 비해 크게 축소된 것이었다. 산자르의 호라산은 차치하더라도 다우드가 서부 아제르바이잔에 웅거하였고, 이란 서부 역시 아미르 보자바가 점거하고 있었다. 1144년 마수드는 모술 정복을 선포했으나 장기가 많은 재물과 아들 사이프 앗딘 가지를 인질로 바치자 철회하였다. 이는 진정 전쟁을 원한 것보다는 장기와의 주종 관계를 재확인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1147년 마수드는 여타 아미르들과 보자바를 격파하고 이란 서부를 장악, 향후 이어질 이라크-하마단 셀주크의 영토를 확보하였다. 이듬해에는 또다른 조카 말리크샤를 옹립하려는 음모를 제압하였다. 아들이 없던 마수드는 앞서 용서한 조카 말리크샤를 자신의 딸과 결혼시켜 후계자로 삼았고, 1152년 9월 사망하자 후자는 말리크샤 3세로 계승하였다.

[1] 산자르는 조카의 술탄 칭호를 인정하는 대신 마잔다란과 라이를 가져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