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8:15:17

잘랄 웃 딘 밍부르누

잘랄 웃딘 밍부르누에서 넘어옴
페르시아어: جلال الدين منكبرتي(Jalāl al-Dīn Menguberdī)
우즈베크어: Jaloliddin Manguberdi
투르크멘어: Jelaleddin Meňburun(젤랄레딘 멩부룬)

1199년 ~ 1231년

파일:external/pp.vk.me/x0GuRPe2qGk.jpg

1. 개요2. 생애
2.1. 조국의 멸망2.2. 파르완 전투, 무적의 몽골군에게 패배를 안기다.2.3. 인더스 강변 전투에서의 패배2.4. 서아시아의 폭풍2.5. 영웅의 최후
3. 평가4. 대중매체에서

1. 개요

호라즘 왕조의 마지막 술탄(제8대 술탄)이자, 칭기즈 칸에게 끝까지 대항했던 용맹스러운 전사였으며,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에서 최고의 영웅으로 칭송받는 위인이다. 호칭인 잘랄 웃 딘은 '영광'을 의미하며, 본명인 밍부르누는 튀르크어로 '하늘이 내린'이란 뜻이다.

2. 생애

2.1. 조국의 멸망

제7대 술탄인 알라 웃 딘 무함마드 2세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군사적인 재능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러던 중 궁정 내부에서 벌어진 대립으로 인해 제국의 남부 지방인 가즈니의 총독으로 부임하여 이 지역을 다스렸다.[1]

당시 호라즘 제국과 몽골 제국 사이에 사소한 외교적 트러블이 있었고, 그것이 눈덩이처럼 커져 끝내 몽골 제국은 호라즘 제국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날리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전쟁에서 자신감이 넘치던 무함마드 2세는 몽골군을 상대로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친정을 감행했다. 군대를 이끌고 나아간지 얼마 되지 않아 소규모 몽골군을 만나게 되어 즉시 공격했으나 하필 그 몽골군을 이끌던 장수가 인류 역사상 최고의 인간 흉기였던 우량카이 수부타이였기 때문에 시작부터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잘랄 웃 딘이 용감하게 전장에 뛰어 들어 몽골군의 포위를 물리치고 부왕을 구출해 무사히 빠져 나왔다. 양 제국은 전쟁 시작부터 우연히 상대측의 최고의 명장을 서로 만나게 된 것이었다.

1219년 여름, 칭기즈 칸이 전군에 동원령을 내리고 뒤이어 중앙아시아를 기습 공격할 때즈음, 잘랄 웃 딘은 몽골군의 침략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몽골군의 약점인 수전(水戰)을 벌일 것을 주장했다. 즉 강 어귀에서 몽골군이 도하하는 틈에 생기는 헛점을 파고 들어[2] 선제공격하여, 침략을 방어하자는 것이었다.[3]

그러나 술탄은 시르다리야 강을 중심으로 각 요새에 호라즘의 전체 병력 약 400,000명을 분산 배치하여 방어선을 세우는 전략을 채택했다. 이에 대해 경쟁 부족과 외척들의 반란을 걱정해서 일부러 병력을 집결시키지 않고, 분산 방어 전략을 채택했다는 설이 있다. 왜냐하면 호라즘 제국이 강대국이기는 했으나 새로 획득한 영토에 대해 지배력을 굳히려는 참에 몽골군의 선제 공격을 받은 상황이라서[4] 휘하 부족들이 배반할 수도 있었고, 외척의 입김도 강했기 때문이었다. 당장 몽골 제국의 침략을 유발한 이날축의 몽골 사신단 학살 사건에 대해 어떠한 조치도 없이 넘어간 것도 이날축이 선대 술탄의 황후인 테르켄 하툰의 친척이었기에 비호를 받은 덕분이었고, 잘랄 웃 딘이 처음에 후계자에서 밀려난 것도 바로 그 테르켄 하툰 때문이었다. 더욱이 무함마드 2세가 호라즘을 강력하게 만들 수 있었던 것도 테르켄 하툰이 속한 튀르크계 캉그리족의 덕이 컸으니, 외척 세력의 힘이 많았던 건 당연지사였다. 허나 나라를 키운 강한 외척이 결과적으로 나라를 망하게 만들었고, 테르켄 하툰 자신도 몽골군에 붙잡혀 노예로 전락해버렸으니 아이러니하다.

하여튼 술탄 무함마드 2세의 방어전략은 대실패로 끝났다. 칭기즈 칸은 휘하 병력을 4로로 나누어 아들들과 자신이 이끌고 나아가 1220년 초부터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그런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국경의 요새와 도시들이 연달아 무너졌고 몽골군은 수도인 사마르칸트로 집결했다. 술탄 무함마드 2세는 수도가 함락되기 직전에 피신했다가 1220년 말, 카스피해의 한 섬[5]에서 병에 걸려 씁쓸한 최후를 맞았다. 사마르칸트 역시 1221년 4월에 함락되었다.

술탄은 죽기 전에 아들 잘랄 웃 딘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겼고, 이에 따라 잘랄 웃 딘은 1221년에 수도인 사마르칸트로 돌아와서 술탄에 즉위함[6]과 동시에 자신의 본거지였던 가즈니로 돌아와 지역의 큰 세력들을 규합하고 병력을 모았다. 주력은 튀르크용병 및 아프가니스탄 지역의 토착민들이었다.

2.2. 파르완 전투, 무적의 몽골군에게 패배를 안기다.

그리고 1221년 여름, 잘랄 웃 딘이 이끄는 호라즘의 병력 60,000명은 카불 근교의 파르완에서 시기 쿠투쿠(忽都忽)[7]가 이끄는 몽골군의 선봉부대와 조우했다. 당시 몽골군은 약 30,000명 규모로 추정되는데, 이 전투에서 잘랄 웃 딘은 원수인 몽골군에게 궤멸에 가까운 참패를 안겨주는 대승을 거두었다.

참고로 역사상 파르완 전투라 불리는 이날의 격돌은 몽골군이 상대방과 싸우다가 패배한 최초의 전투이기도 했다.

2.3. 인더스 강변 전투에서의 패배

칭기즈 칸은 파르완 전투에서의 참패와 함께 손자인 무투겐이 전투 도중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는 소식에 격노했다. 이에 칭키즈 칸은 자신이 직접 사마르칸트에 진주하고 있었던 본군을 이끌었다.[8] 이 때문에 호라즘군은 각지에서 연전연패하며 인더스 강 근처까지 밀려가게 되었는데, 1221년 11월 25일에 벌어진 인더스 강 전투에서 질랄 웃 딘은 용맹스럽게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삼면에서 몽골군에게 포위되어 죽을 고비를 겪게 되었다.

여기서 그가 한 선택은 폭풍우로 불어난 인더스 강에 말을 타고 뛰어들어 강 건너편으로 탈출하는 것이었는데, 이런 용맹함을 지켜본 칭기즈 칸이 감탄하면서
"저런 아들을 둔 아비는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로다."
라며 크게 칭찬하고, 더 이상 뒤를 쫓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9]

이렇게 해서 잘랄 웃 딘은, 소수의 부하들과 함께 구사일생으로 인도 북부로 도망칠 수 있었다. 하지만 잘랄 웃 딘이 돌아올 것을 염려한 칭기즈 칸은 아들 오고타이에게 지시하여 잘랄 웃 딘의 본거지인 가즈니를 공격하도록 했다.

한편, 인도로 탈출한 잘랄 웃 딘은 노예 왕조의 술탄 일투트미쉬를 곧장 찾아가 몽골에 맞서 함께 싸우자고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이후 1224년에 몽골군의 본대가 돌아가자 그 틈을 타서 이란 중부의 이스파한으로 향했다. 여기서 이란 지역에 남아있었던 몽골측 수비군들과 충돌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아제르바이잔으로 옮겨갔고, 가던 도중에 시스탄[10] 지방의 나스르 왕조를 무너뜨리고 이란 북부의 타브리즈를 본거지로 삼아 캅카스의 기독교 왕국인 조지아(그루지야) 지역을 수중에 넣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자 잘랄 웃 딘은 천부적인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여 근처 지역의 세력을 제압하고, 계속해서 호라즘의 세력을 넓혀 나갔다.

2.4. 서아시아의 폭풍

칭기즈 칸에게 대항하기 위해 잘랄 웃 딘은 자신의 세력을 점점 키웠다. 1225년 그는 아제르바이잔의 엘디귀즈 왕조와 마라게의 아흐마딜 왕조를 멸망시킨 후, 전자의 중심지였던 타브리즈를 수도로 삼았다. 비록 호라산 지역에서 몽골군에게 패배하긴 했지만 아직 이란의 대부분은 그와 동생인 기야스 앗 딘 피르샤의 수중에 있었다. 몽골군에게 중과부적이라는 것을 깨달은 잘랄 웃 딘과 기야스 앗 딘은 서아시아에서 호라즘 제국을 재건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동생 기야스 앗 딘이 후제스탄을 두고, 아바스 칼리파조와 충돌하는 동안 잘랄 웃 딘은 1225년 시스탄의 나스르 왕조를 무너뜨린 뒤, 1226년 조지아 왕국에 쳐들어가 가르니 전투에서 조지아 군대를 무찌르고 트빌리시를 손에 넣었다. 이는 20여년 전 이란 북부 지역을 공격한 것에 대한 복수전이기도 했다.

1226년 잘랄 웃 딘은 반란을 일으킨 케르만 총독 부라크를 복속시키며 대내외에 영향력을 과시했다. 이에 그를 경계하는 세력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먼저 아나톨리아 반도의 룸 셀주크 왕조와 이집트의 아이유브 왕조가 잘랄 웃 딘을 제압하기 위해 동맹을 맺었고, 이에 잘랄 웃 딘은 아이유브 왕조의 변경을 공격해 반 호 인근의 아흘라트를 함락시켰다. 1227년, 몽골군이 이스파한 방면으로 진격해오자 잘랄 웃 딘은 그에 맞서 싸웠고 비록 패배했지만 적에게도 큰 피해를 입혀 그들을 아무다리야강(옥수스강) 너머로 후퇴시켰다. 이에 잘랄 웃 딘의 명망이 높아지자 불안해진 동생 기야스 앗 딘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곧 진압되었다(1228년). 이후 그는 케르만으로 달아났지만 잘랄 웃 딘의 칼날을 두려워한 부라크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이로써 재통합된 호라즘 제국은 아나톨리아 반도의 동부 ~ 아제르바이잔 ~ 하마단, 파르스 ~ 케르만에 이르는 제법 광대한 영토를 지니게 되었다.

몽골군에게 빼앗긴 호라산 대신 캅카스 지방과 서부 이란을 중심으로 새로운 제국을 세운 잘랄 웃 딘은 당연히 주변 국가들의 경계 대상으로 부상했다. 특히 인접 세력인 룸 셀주크 왕조아이유브 왕조와는 관계가 크게 악화되었다. 이것은 그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2.5. 영웅의 최후

1230년, 잘랄 웃 딘은 재차 아흘라트를 점령하고, 아나톨리아 반도까지 넘보았다. 이에 위기를 느낀 룸 셀주크의 술탄 케이쿠바드 1세는 아이유브 군대와 연합해 그와 맞섰고, 에르진잔 인근에서 벌어진 야스체멘 전투에서 잘랄 웃 딘을 물리쳤다.[11] 이로써 그동안 길러온 정예병의 대부분을 잃은 술탄 잘랄 웃 딘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고타이 칸이 보낸 초르마간 노얀 휘하의 몽골-튀르크 토벌군까지 상대하게 되어 캅카스 지방으로 도망쳤다. 이후 잘랄 웃 딘은 디야르바크르로 돌아왔는데, 그곳에서 또 한 번 몽골군에게 참패하여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디야르바크르 전투) 깊은 산 속을 전전하다가 1231년 8월, 마야파리킨 인근에서 그에게 원한을 가진 쿠르드계 아이유브 에미르(아미르) 알 무자파르 가지의 습격으로 피살당하면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잘랄 웃 딘의 사후 호라즘군 병사들은 부관이었던 키르칸의 주도하에 아이유브 왕조에 몸을 맡겼고, 일부는 룸 셀주크로 귀순했으나 1243년 쾨세다으 전투 당시 몽골군에게 대패하고 전멸했다. 한편 1238년 아이유브 왕조의 내전 당시 시리아에서 용병으로 쓰인 호라즘인들은 그 풍족함에 맛들려 1241년부터 통제에서 벗어나 함부로 시리아를 약탈하기 시작했고, 1244년에는 팔레스타인까지 남하하여 그해 7월 십자군예루살렘을 함락하기에 이르렀다. 이집트의 아이유브 술탄 앗 살리흐 아이유브는 호라즘 전사들의 용맹함을 보고 그들을 고용하여, 라 포르비에 전투에서 십자군을 무찔렀으나 승전 이후 약속을 어기고 영지를 주지 않은 채 그대로 토사구팽시켰다. 이에 분노한 호라즘 용병들은 시리아 각지를 공격했지만 1246년 아이유브 제후들의 연합군에 대패하고 축출되어 몽골 혹은 아바스 칼리파조로 넘어갔다. 일부만이 요르단의 카라크에 남아있었으나 아인 잘루트 전투 이후 이집트 맘루크 왕조맘루크 편제에 흡수되었다.

3. 평가

아버지 무함마드 2세와 조국 호라즘의 원수를 갚기 위해 몽골 제국과의 전투에 일평생을 바치면서, 패배하고 또 패배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끈질기게 저항했던 잘랄 웃 딘 밍부르누는 끝내 패배한 후 이민족의 손에 목숨을 잃고 말았지만 호라즘 제국 최후의 영웅으로서 후세에 길이 그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한편 파르완 전투에서 몽골군에게 대패를 안기거나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파르스, 케르만 등 주변의 크고 작은 나라들을 연이어 제압하면서 호라즘 제국을 일시적으로나마 재건하기까지 하는 등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치나 외교 능력은 영 신통치 않아 끝내 운명을 바꾸지 못했다.

우선 정치적인 면에서는 파르완 전투 이후 부하들 사이의 다툼을 중재하지 못해 일부 장수들의 이탈을 막지 못하면서 이로 인한 군사력의 약화로 인해 칭기즈 칸에게 반격을 받아 참패한 실책이 있었다.

또 외교적인 면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영토 팽창 정책을 추진하여 룸 셀주크 왕조나 아이유브 왕조 등 같은 이슬람 국가와도 척을 지면서 사방에 적을 많이 만들었다. 비참한 최후조차 쿠르드계 무슬림 제후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감안하면 강경 일변도로 나갔던 잘랄 웃 딘의 행보가 아쉽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

4. 대중매체에서

  • <원조비사>에서 원판의 경우, 호라즘 제국의 왕자로 등장하는데 능력치는 정치 C, 전투 C, 지도 A, 매력 B로 나름 준수한 편이다. 하지만 국내 정발판에서는 호라즘 대신 고려가 선택국가로 지정되어 버려서 그대로 얼굴 데이터만 남고 삭제되어 버렸다. <원조비사>의 비운의 인물, '잘랄' 이야기
  • <징기스칸 4>에도 등장하는데, 그 명성에 걸맞은 우수한 능력치를 자랑한다. 특이한 점으로는 시나리오에 따라 능력치가 상승하여 등장한다는 점이다.
    • 정치 47 / 무력 85 / 지력 63 병과적성 BBBE 전투특기 기병 돌격(최초등장시)
    • 정치 51 / 무력 91 / 지력 74 병과적성 AAAE 전투특기 화공 추가(상승시)
    • 재야무장으로 등장할 시, 플레이어의 국가가 몽골과 적대관계에 있으며, 국경을 접하고 있는 경우에 임관을 청하는 이벤트가 발생한다. 평생 몽골에 대항한 잘랄 웃 딘다운 이벤트라 할 수 있다.
  •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도 등장한다. 게임 시작연도를 1218년으로 맞추고 Turkestan 베이러베이를 선택하면 플레이해 볼 수 있는데 1218년 기준으로 28세이므로 이전에는 알랄 웃딘 무함마드 2세의 궁정에 있다. 그리고 1218년, 1219년 2년 동안 전성기를 구가하던 호라즘은 1220년 단 1년만에 몽골군에 의해 대충 망하는 수순을 밟는다.[12] 1221년에는 북부와 남부가 분리된 땅 2조각만이 남아있고, 1222년부터는 그나마도 북부가 이탈한다. 이 때문에 잘랄을 시작 시점에서 플레이할 수 있는 것은 6, 7년 정도의 길지 않은 시간 뿐이다. 그리고 잘랄의 능력은 기대와 달리 전혀 높지 못하다. 한 자릿수 전투력은 기가 막힐 정도이다. 장점은 호라즘 왕국이 존재할 때는 당연히 왕위 계승권자이고, 호라즘이 술탄국 지위를 상실한 1221년 이후에는 명목상 페르시아에 대한 강한 명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 정도뿐이지만 해당 시점의 페르시아는 모두 몽골 영토이다.
  • KBS에서 방영한 바 있는 드라마 <칭기즈 칸>에서도 후반부에 등장했다. 무함마드 술탄과 돌궐(튀르크) 출신 후궁의 아들로 나오는데, 술탄의 모후인 타르겐 태후는 잘랄 웃 딘을 '출신이 더럽다'며 썩 탐탁지 않게 여기고, 다른 왕자를 후계자로 생각하는 모습을 보인다. 술탄 역시 아들을 그리 정겹게 대하는 편은 아니라서, 잘랄 웃 딘이 사마르칸트를 자신에게 맡기고 피신하라고 할 때는 '날 쫓아버리고 나서 네가 술탄이 되겠다는 게냐'라며 몰아 세우기도 한다. 군사적 재능은 뛰어나서 몽골 침공 초기에 전 병력으로 대적해야 한다고 간언하지만 술탄은 그의 조언을 듣지 않고, 테무얼메리(티무르 말리크) 장군을 제외한 이들의 견제를 받아서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닫는다. 무함마드 술탄이 죽을 때는 결과적으로 후계자로 지명되어 왕위를 계승하지만 그 직후에 이에 반발하는 반란이 일어나기도 한다. 하지만 반란 세력이 술탄으로 삼으려던, 타르겐 태후와 무함마드가 총애하던 왕자와는 형제간의 우애가 깊어서 왕위 다툼을 벌어진 않고 왕자는 잘랄 웃 딘을 술탄으로 인정한다.[13] 술탄이 된 이후 각지를 다니며 민심을 안정시키고 병력을 모으는 등 상황을 타개하려고 백방으로 노력을 하지만 결국 몽골군에게 패배해 도주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극중에서는 테무얼메리[14] 장군과 함께, 막장스러운 호라즘에서 유능했던 비운의 인물로 묘사된다.
  • 2020년 튀르키예와 우즈베키스탄에서 그의 삶을 배경으로 한 합작 드라마가 나왔다.


[1] 전승에 따르면 잘랄의 어머니는 힌두계로, 곧 알라 웃 딘 무함마드 2세의 서자였다. 따라서 무함마드 2세의 모후이자 본인에게는 할머니가 되는 테르켄 하툰(이 사람은 튀르크계 킵차크족의 한 갈래인 캉그리족이었다.)에게 핍박을 당했다고 한다.[2] 상대편이 물을 건너고 있을 때 공격하라는 이른바 반도이격(半渡而擊)은 이미 《손자병법》에 "적이 물을 건너 공격해오면 물가에서 공격하지 말고, 반쯤 건너게 한 다음에 공격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구절에서 나온다. 또한 《오자병법》 <요적>(料敵)편에도 위나라무후(武侯)가 반드시 적을 공격해야 할 때가 언제냐고 묻자 오기가 대답하기를 "물을 반쯤 건너왔을 때 공격해야 한다"고 했다. 《백전기법》<수전>(水戰)편에서는 “만일 적이 강을 건너 도전해왔을시, 적의 반이 건너왔을 때를 살펴 공격하면 유리하다”라고 했는데, 이를 보면 그 발상은 아주 오래되었다. 도하중인 군대는 자연히 대오가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고, 움직임이 둔해지는 것은 물론 제대로 엄폐를 할 수가 없었기에 이때를 노려서 공격하자는 주장은 전술적으로 틀린 발상이 아니었다. 흔히 수공으로 알려진 살수 대첩이 이런 식으로, 살수를 건너면서 대오가 흐트러져 있었던 수나라군을 고구려군이 공격해서 궤멸시키고 대승을 거둔 전투였다.[3] 문제는 이 전략을 선택했어도 몽골군의 침략을 막지는 못했을 것이고, 상당 기간 지연시키는 정도에 그쳤을 것이다.[4] 당시 호라즘 제국은 최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는데, 문제는 이것이 단지 영토 수준에만 그쳤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함마드 2세가 영토를 최대로 넓히기는 했지만 이 영토를 안정적으로 지배할 기초를 아직 다지질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게 무함마드 2세의 죄는 아닌 것이 지금의 이란 지역은 몰라도 아프가니스탄 지역은 부족이나 민족이 중요한 사회였고, 그의 치세 중 가장 많이 충돌하던 고르 왕조를 완전히 멸망시킨 것이 몽골 제국의 침공으로부터 불과 3년 전의 일이었다.[5] 지명은 아베스쿤으로 지금은 물에 잠겨서 흔적도 남지 않은 섬이다.[6] 그 와중에도 잘랄 웃 딘의 술탄 즉위에 반대한 왕족들은 그의 이복 동생이었던 우즐라흐(Uzlagh)를 술탄으로 추대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우즐라흐는 이를 형인 잘랄 웃 딘에게 제보했다.[7] 칭기즈 칸의 의제(혹은 양자)로, 본래 타타르족 출신의 전쟁 고아였지만 칭기즈 칸이 당시 영아였던 그를 모후인 호엘룬에게 맡겨 키웠다. 《원조비사》에는 이 사람의 에피소드가 몇 가지 나오는데 칭기즈 칸이 시기 쿠투쿠를 대단히 아꼈고, 가족으로 여겼다는 것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들이다. 칭기즈 칸의 황금 일족들 가운데 제일 먼저 몽골 문자를 익혔으며, 《원조비사》를 쓴 저자의 유력한 후보로 꼽히는 인물이다. 또한 몽골 제국의 법률인 《예케 자사크》에 따라 법을 다루는 재판관이기도 했다.[8] 중국 드라마 <칭기스칸>에서는 도시의 '살아있는 것은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려, 이 지역을 황폐화시키지만 이것은 실제 역사와 다르다. 당시 칭기즈 칸에게 튀르크계 기병들은 매우 중요했고, 튀르크인들을 군대로 쓰기 위해선 도시를 폐허로 만들거나 모든 자들을 죽이는 것은 불리했다. 물론 화약을 사용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건축물이 무너지는 것은 있었다.[9] 라시드 앗 딘의 《집사》에 나오는 일화이다.[10] 호라산 남부 지역[11] 잘랄 웃 딘을 무찌른 케이쿠바드 1세는 이 야스체멘 전투에서의 승리로 룸 셀주크 왕조의 전성기를 이끌면서 현재 튀르키예에서 가장 추앙받는 술탄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12] 1220년 '몽골인들' 시나리오에서 알라 웃딘 무함마드는 시나리오 기본 선택인물들 중 한 명이지만, 몽골의 맛있는 먹이로 존재하는 상황이다. 몽골의 둠스택이 바로 밀려오기 시작하고, 설상가상으로 무함마드는 죽기 직전의 몸상태이다.[13] 심지어 우르겐치에서 잘랄 웃 딘을 죽이고 자신을 술탄에 올리려는 음모를 밤중에 몰래 찾아가 알려주며, 도망쳐야 한다고 권할 정도였다.[14] 호라즘 제국의 대표적인 명장인 티무르 말릭(Timur Malik)이다. 말릭은 이슬람권에서 왕 또는 통치자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티무르 공' 정도의 의미로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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