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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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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병"은 지원한 사람에게 봉급을 주어 병력에 복무하게 하거나 그렇게 채용된 군인을 뜻하는 단어다. 특별히 고용된 외국인 군인을 부르는 말로 쓰이기도 하는데 국제법상 해당국 공무원 신분이 부여된 경우는 용병이 아니다.
용병으로 이루어진 부대를 '용병대(傭兵隊)'라고 한다.
현대에는 단순히 전투 뿐만 아니라 군사학/전술연구, 모의전투, 컨설팅, 민사심리, 첩보 등의 다양한 전문 업무를 수행하게 되어 크든 작든 기업화가 되었기 때문에 민간군사기업으로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으며, 전쟁업 및 용병시장 규모는 해가 갈수록 천문학적인 단위로 기하급수적 증가 중이다.
이 용어에서 착안해, 스포츠계에서는 외국인 선수를 용병이라고도 부른다.
2. 정의
정규 혹은 계약직 공무원의 일종으로 직접 채용하는 모병제 혹은 징병제하에서 자원 입대한 정규 군인은 용병이 아니다. 따라서 외국인이 타국 군대에 복무한다고 해서 무조건 용병으로 정의할 수는 없다. 용병의 대표주자처럼 자주 언급되는 프랑스 외인부대도 프랑스 육군 군인공무원 신분으로 근무하는 이들로 구성돼 있으므로 국제법상 용병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또한 개인이나 전문적인 집단이 아니라 봉건 영주가 금전적 이익을 목표로 용병처럼 고용되는 경우들 또한 있었다.일반적인 직업군인과, '용병'으로 칭하는 집단과의 차이는 국가에 직속되어 있는가와 금전적 계약을 중시하는가[4]라고 할 수 있다. 용병은 보수만 주어지면 의뢰주와의 약속대로 의뢰받은 업무를 해주기 때문에, 의뢰주가 누구든 관계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당연히 직업 특성상 대부분 군사력이 필요한 분야에서 일하며, 따로 옵션으로 이것도 수행해주겠다고 사전에 계약을 맺거나 혹은 계약을 중도 변경하지 않는 한 일반적인 정규군이 하는 재난 구호 업무 등은 시킬 수 없다. 쉽게 말하면 일반적인 직업군인은 '직업 공무원'이라면 용병은 '기업', 그것도 '민간 기업'에 비유할 수 있다.
실제 역사에서는 애매한 부분도 많지만 스페인 내전의 국제 여단이나 무자헤딘 같은 민병대도 원칙적으로 용병이라 부르지 않는다. 이들은 이익 관계와 급여가 아니라 특정한 개인적, 이데올로기적, 신념적 이유로 남의 전쟁에 자진해서 뛰어든 것이며, 이들의 경우도 대부분 어떤 방식으로든 해당 분쟁이 끝나면 민간인 신분으로 복귀하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용병은 순전히 금전적 이유로, 장기 복무하는 전문 군인들을 의미한다.
3. 역사
전쟁을 왜 하느냐고 군인들에게 묻는다면 "내 나라와 민족, 그리고 내 가족을 지키려고 싸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오로지 돈을 벌려고 전쟁터에 뛰어든다. 이들이 바로 '용병'이다. 용병의 역사는 오래됐다.
2,200년 전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은 40마리의 코끼리와 함께 알프스 산맥을 넘어갈 때 많은 용병을 데려갔다. 로마 제국 본토로 쳐들어가 무려 15년 동안 싸웠던 한니발의 군대는 카르타고 출신보다 용병들이 훨씬 많았다. 그런 외인 용병들이 없었다면 한니발의 위대한 군사적 업적도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용병이 있다. 가장 많은 용병을 쓰는 나라가 미국이다. 민간보안기업에 고용된 무장 경비원들이 중동 지역에서 요인 경호, 시설 경비 등을 한다. 총으로 무장한 이들은 전투를 벌이기도 한다. 미국에서는 용병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보안 요원'이라 한다. 대부분은 특수부대원 출신으로 전투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이다. 이라크에서는 한창 많을 땐 1만 명쯤 있었다.
용병들의 활동무대는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콜롬비아 등 분쟁 지역이다. 용병들은 전쟁 흐름을 바꾸기도 했다. 다이아몬드 이권을 둘러싼 내전이 벌어졌던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의 예가 그랬다.
1991년 혁명연합전선(RUF)이 반란을 일으킨 뒤, 다이아몬드가 반군 지배 아래 들어갔다. 반군들은 살육과 성폭력을 일삼았다. '블러드 다이아몬드'라는 영화를 보면, 도끼로 사람들의 손목을 자르는 끔찍한 모습이 나온다.
1994년 수도 프리타운에서 20km까지 반군이 진격해 들어오자, 헬리콥터와 탱크를 탄 백인 전투원들이 나타나 반군을 몰아냈다. 그들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용병들이었다.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분쟁 지역의 일부 국가들은 용병에게 유전 또는 광산의 경비를 맡기면서, 그 대가로 채굴권을 넘기기도 한다. 시에라리온, 콩고, 앙골라 등 풍부한 자연자원의 이권을 둘러싼 내전은 용병들에게 돈벌이 기회를 주었다.
김재명, 병역 징병제냐 모병제냐, 80~81.
2,200년 전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은 40마리의 코끼리와 함께 알프스 산맥을 넘어갈 때 많은 용병을 데려갔다. 로마 제국 본토로 쳐들어가 무려 15년 동안 싸웠던 한니발의 군대는 카르타고 출신보다 용병들이 훨씬 많았다. 그런 외인 용병들이 없었다면 한니발의 위대한 군사적 업적도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용병이 있다. 가장 많은 용병을 쓰는 나라가 미국이다. 민간보안기업에 고용된 무장 경비원들이 중동 지역에서 요인 경호, 시설 경비 등을 한다. 총으로 무장한 이들은 전투를 벌이기도 한다. 미국에서는 용병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보안 요원'이라 한다. 대부분은 특수부대원 출신으로 전투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이다. 이라크에서는 한창 많을 땐 1만 명쯤 있었다.
용병들의 활동무대는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콜롬비아 등 분쟁 지역이다. 용병들은 전쟁 흐름을 바꾸기도 했다. 다이아몬드 이권을 둘러싼 내전이 벌어졌던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의 예가 그랬다.
1991년 혁명연합전선(RUF)이 반란을 일으킨 뒤, 다이아몬드가 반군 지배 아래 들어갔다. 반군들은 살육과 성폭력을 일삼았다. '블러드 다이아몬드'라는 영화를 보면, 도끼로 사람들의 손목을 자르는 끔찍한 모습이 나온다.
1994년 수도 프리타운에서 20km까지 반군이 진격해 들어오자, 헬리콥터와 탱크를 탄 백인 전투원들이 나타나 반군을 몰아냈다. 그들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용병들이었다.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분쟁 지역의 일부 국가들은 용병에게 유전 또는 광산의 경비를 맡기면서, 그 대가로 채굴권을 넘기기도 한다. 시에라리온, 콩고, 앙골라 등 풍부한 자연자원의 이권을 둘러싼 내전은 용병들에게 돈벌이 기회를 주었다.
김재명, 병역 징병제냐 모병제냐, 80~81.
3.1. 고대
용병은 고대 시절부터 존재해 온, 인류가 가진 오래된 직업 중 하나다. 함무라비 법전에는 용병의 대가에 대해서도 규정해놓았다.고대 이집트도 용병대를 운용했으며, 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 또한 용병을 많이 사용했다. 중장보병 위주였던 그리스는 주로 스키타이 출신의 기병과 크레타 섬 출신 궁병들을 용병으로 고용해서 잘 써먹었고, 반대로 궁병이나 기병이 강했던 페르시아에서는 그리스 본토의 폴리스나 그 식민도시 출신의 중장보병들을 용병으로 고용한 일이 많았다.[5] 이들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페르시아의 왕자 小 키루스가 고용한 1만여 명의 그리스 용병대다. 이 용병들은 반란을 일으킨 키루스를 따라 제국의 서쪽 끝인 리디아에서 메소포타미아까지 행군했고, 그곳에서 당시 샤한샤였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군대와 맞붙었다. 그러나 고용주인 키루스는 전투 중 전사하고, 남은 용병들은 티그리스 강을 따라 방향을 돌려 아르메니아, 캅카스 지역을 통해 흑해 연안으로 탈출한다. 적지 한가운데에서 페르시아군 추격대를 따돌리고,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토착민들의 공격을 버텨내며 행군한 이 과정은 용병대의 장교들 중 한 명이었던 저술가 크세노폰이 남긴 책 아나바시스(Anabasis)를 통해 매우 유명해졌다.
그리스 이후 용병으로 유명해진 고대 국가는 고대 카르타고다. 카르타고는 상업 국가로, 물론 자체적인 시민병이나 상비군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병력을 용병에 의존했다.[6] 카르타고가 용병으로 주로 고용했던 것은 이베리아 반도의 원주민들과 켈트족, 그리고 누미디아 기병대였다. 이들은 상당히 잘 싸웠지만, 월급 문제로 인해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는 등(용병 전쟁) 용병에 의존하는 것의 취약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물론 오랫동안 용병들을 다뤄본 경험으로 인해 반란이 일어나도 조기에 제압하는 등 용병단의 발호로 나라가 휘청인 적까지는 없었다.
그 외에도 메시나에 고용되었다가 오히려 반란을 일으켜 메시나를 정복함으로써 제1차 포에니 전쟁의 원인을 불러온 이탈리아 남부의 '마메르티니' 용병 등 상당수의 용병집단들이 지중해 세계에 존재했다.
상비군 중심의 편성을 고집했던 로마군도 적지 않은 용병들을 고용했다. 강력했던 보병, 공병에 비해 기병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탓에 누미디아 기병, 갈리아 기병, 게르만 기병을 수시로 고용하여 기병 전력으로 활용하였다. 또한 투석병, 투창병, 궁수같이 상대적으로 고도로 숙련된 특수한 기술이 요구되던 병과들이 용병으로 고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로도스섬 출신 투석병은 그리스군·마케도니아군에서, 발레아레스 섬 출신 투석병들은 로마군에서 그 명성을 떨쳤다. 다만 예시로 든 발레아레스 투석병이나 갈리아 기병대, 소아시아의 궁병대 등은 로마의 정복이 완료된 이후에는 속주병 혹은 보조병이 되었으며, 보조병은 용병과는 전혀 다른 로마 정규군이었다.
제정 말기에는 이미 공화정 말기에 진행된 중산 계급의 몰락과 국가 시스템의 붕괴로 용병의 비중이 올라갔는데, 18~19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저술가들은 이들 용병들의 정치적 타락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게 된 주요 원인으로 취급했으나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용병들의 발호를 로마 몰락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7]에 더 가깝게 보고 있다. 애당초 말기의 로마가 국방을 용병에게 의존했다는 얘기부터가 이미 붕괴한 지 오래라는 것이다. 게르만족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용병대가 아니라 그냥 로마 정규군으로서 복무한 것이 대부분이며, 이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로마에서 찾았지 게르만족에서 찾지 않았다. 당장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기둥이라 불린 스틸리코와 아에티우스도 게르만족 혈통이었지만 로마의 장군답게 살다 죽었다.
3.2. 중세
서로마가 붕괴되어 게르만족이 서유럽을 채우던 중세 초기부터, 중세 성기에 해당하는 12세기까지도 유럽의 주력 병력은 봉건제 원칙에 따라 소집된 자유민이었다. 게르만족은 자기자신의 무장을 갖출 수 있을 정도로 재산을 충분히 소유한 자유민들은 전사로서 역할을 겸하는 상무적 전통을 이어왔는데, 이런 전통이 기존 서로마의 습속과 결합해 나타난 것이 봉건주의였다. 서로마가 붕괴되었다고는 하지만 서유럽 땅에 살던 로마인들이 갑자기 다 죽은 것도 아니고, 그들이 다 농노가 된 것도 아니었고, 재산을 충분히 가진 사람들은 자유민으로 편입되었다. 물론 대부분의 자유민은 농노보다는 낫다 해도 그다지 부유하지 않았고, 투구와 방패와 창 혹은 활 정도만 간신히 갖춘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좀 더 부유하면 흉갑 등 다른 갑옷도 갖춰입어서 중보병이 되는 식.기사(역사)의 원래 유래는 이 시대의 비자유 예속민이었다. 일단 봉건주의 원칙 하에서 부족민이 부족장을 위해 전사로 봉사하는 날은 1년에 40일[8]이었다. 8세기 이래로 야만족의 침입이 상시화되어 각지에서 자율적으로 방어를 해야하는 상황이 되자, 프랑크의 군주들은 그 방어에서 손을 놔버리고 각지의 유력자들에게 관직을 주며 알아서 막게 해 군주들의 권위는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때 각지의 유력자들이 스스로 방어하는 와중에 이 징집령 40일이 턱없이 부족하자, 자유민을 동원하는 대신, 자기가 전부 먹여살려주고 있는 예속민을 무장시켜 전문 병사로 활용한 것.
그러다 소위 중세 성기로 분류되는 10세기-12세기에 봉건주의 심화 과정으로 인해 봉토를 급여로 받는 대신 전문직으로 일하는 관습이 퍼져 나간다. 기사는 점점 비자유 예속민이 아닌 봉토를 가진 준귀족 전문직 군인으로 변해갔다. 또 자유민 중 군인이 아닌 다른 전문직으로서 봉토를 수여받은 이들은 서전트로서, 징집령이 내려지면 기사에 대한 보조병으로 일했다. 그리고 12세기 중반 이후로는 봉토가 바닥나기 시작하여 예속민 출신들이 기사로 서임되는 것을 막는 법이 유럽 곳곳에서 제정된다. 또 중세 성기를 거치면서 법학과 행정이 발전하면서, 군주들은 기사를 자신들의 직속 가신으로서 행정관으로서 삼는 경우가 늘어난다. 이에 따라 기존의 기사들 사이에서는 평민기사(milites gregarii)와 귀족기사(milites nobiles)로 구분이 시작되었다.
봉토는 없고, 예속민제는 끝났고, 이도저도 아니게 된 기사 지망생들이 이 시기에 늘어났다. 기사(역사) 항목에서 현실 문단에서 말하는 날강도 기사들이 이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무장을 갖췄고 전투 훈련을 받은 전문적인 군사력으로 활용될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이러던 와중, 영주 중에서는 자기 집에 얹혀 사는 병사들을 놀리는 게 돈이 아깝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자유민들 중에서는 농사 지을 땅은 모자란데 무장은 있으니 다른 방식으로 먹고 살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따라서, 아주 자연스럽게 봉건 계약에 의해 병역 의무를 부가받지 않으나 병역을 수행이 가능한 회색 지대 인력이 생성되었다. 이렇게 정부의 직접적 통제를 받지 않은 병역 자원을 두고 Free Company (자유 부대)라고 불렀다.[9] 영주가 자신의 영향 하에 있는 인력을 요령껏 운용하는 경우는 "자유"롭지 않으므로 자유 부대라 하지 않았으나, 봉건 영주 vs. 자유 도시 같은 경우 처럼 실상 마케팅 표현(?)이고,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병역 자원"이란 점에선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이 개념은 21세기에 와서도 아직까지 유효하다.[10]
동아시아에서 자유 부대와 가장 비슷한 형태의 용병이 있는데 바로 왜구들이다. 실제 서유럽의 자유 부대도 말이 좋아 자유 부대지 실상은 그냥 날강도 산적떼에 불과했고, 일부 극히 유명한 용병대[11]을 빼면 그냥 일확천금 노리고 모인 싸움 좀 하는 어중이 떠중이들이었는데, 종종 용병업을 뛰던 왜구들이 이 자유 부대와 일맥 상통한다. 실제로 자유 부대들은 평소에 일거리가 없으면 그대로 산적으로 돌변해 약탈을 하고 다니기 일쑤였다. 프랑스어를 보면 더 노골적인데, 이들을 약탈자라는 의미로 '가죽을 벗기는 자' 즉 écorcheurs(에코르셔)라고 불렀기 때문. 이름 그대로 갑옷은 물론 옷까지 벗겨가며 약탈을 해댔다고 한다. 백년 전쟁 동안 약탈하는 쪽인 영국과 달리 용병대들에게 약탈당한 기억이 더 많은 프랑스에서는 용병대에 대한 시선이 더 나빴던 것. 심지어 이들을 토벌하기 위한 전투와 소집령도 왕왕 내려졌다. 이후 좀 더 조직화된 용병 사업이 발전한 이후부터는 고용주가 돈 안 줄 때 도적떼로 돌변하는 수준으로 안정화 되었지만, 본질이 결국 싸움 좀 한다는 어중이 떠중이라는 것은 아예 국가적으로 용병 사업을 펼친 게 아닌 한 변하지 않았으며[12], 바로 이것이 빅토리아 시대에 와서 용병 사업이 궤멸한 원인[13]이 되었다.
14세기에 들어서 왕국의 영역이 안정되자 현대의 총력전 수준은 아니어도 왕국대 왕국급의 대규모 전쟁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이에 봉건 영주들에게서 찔끔찔끔 40일 동안 병사가 동원되는 것으로는 턱없이 모자라게 되자 저런 용병대들의 활용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또한 군주들은 중앙집권을 강화하여 이전 시대에 있던 징집령을 부활시키기 시작한다. '왕국의 방어를 위한 명백한 필요가 있을 때' 신민들을 동원하여 병력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저러한 '회색지대 용병대'도 '봉토를 받은 기사'도 아닌, 군주와 직접 계약하여 급여를 받고 복무하는 새로운 형태의 군인들도 나타난다. 이들이 바로 맨앳암즈라고도 불리는 이들이다. 이제 돈이 필요해진 군주들 때문에 소위 '방패세'라는 개념이 등장하기도 했는데, 이는 봉건 계약 상 병력 제공 및 병역 이행 의무를 면제하는 대신 돈으로 때우는 계약 방식이었다.
서양 중세의 역사가 복잡한 만큼 용병의 활용 방식이나 유명한 용병 부대도 무수히 많으며, 국가와 시대에 따라 그 형태도 천차만별이었다.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위에서 말한 프리 컴퍼니 혹은 루티예라고 불리는 용병단이 주역이었으며, 스코틀랜드 출신 아일랜드 용병들인 갤로우글래스(Gallowglass)들도 활용되었다. 한편 이탈리아에서는 계약자라는 뜻의 콘도티에리(Condottieri)들이 나타난다.
이 와중에 돈으로 사는 떠돌이 전투원 수준을 넘어 뛰어난 무예와 전술, 집단 대오, 적에 대한 무자비함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성, 그리고 고용주에 대한 신의성실성까지 겸비한 중세 용병의 완성형이 등장하게 되었으니, 이가 바로 합스부르크와 오랜 교전으로 다져진 스위스 용병이다.
3.3. 중세 후기
토크멘터리 전쟁사 95회 전쟁의 패러다임에 변화를 준 용병2 |
르네상스기로 들어가면 신성 로마 제국(독일)의 란츠크네히트처럼 국가에서 관리하는 용병대도 있었다. 이와 유사하게는 프랑스 왕국에서 헌병대를 뜻하는 장다름은 원래 프랑스 국왕이 고용한 용병이었다고 하며, 또한 동로마 제국은 신체 강건한 노르만 출신 용병들을 근위대로도 활용하였는데 그게 바로 바랑인 친위대이다. 바랑인 친위대는 높은 충성도로 명성이 높았는데,[14][15] 1204년 베네치아군과 십자군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될 때도 용감히 맞서 싸웠다. 이탈리아 전쟁 초기의 이탈리아에서도 콘도티에로(Condottiero)라는 계약직 용병대가 성행했는데 젊은 나이에 용병대장이 된 후에 밀라노 공작까지 오르는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유명하다.
르네상스 시기의 전쟁은 주로 용병들에 의해 치러진 탓에 일부러 용병들이 짜고 나라 간의 분쟁을 일으켜 싸우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쌍방 피해 없이 보수만 타 먹는 일도 많았다. 이탈리아 도시국가에서 고용한 이탈리아 출신 용병대가 이런 짓을 많이 벌였다고하며 그 밖에도 예전부터 독일, 프랑스, 잉글랜드인 등등도 이탈리아에서 짜고 치는 고스톱판을 벌였다.
이러한 정치적 사정이 프리랜서(용병단)가 활약할 만한 환경을 조성했다. 15~16세기 유럽 대부분의 전쟁터는 프리랜서들의 무대였다. 하지만 애국심이나 승리에 대한 열정 따위는 10원어치도 없는 이 프리랜서들의 전쟁은 그다지 치열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전투는 누가 빨리 기동해서 주요 전략적 요지를 점령하느냐에 달렸으며 시일만 질질 끌다가 퇴각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돼도 양자가 치열하게 싸우는 전면전은 거의 없었으며 대부분 제한전(limited war)의 성격이 강했다.
프리랜서는 왜 '용병'이라고 부를까
프리랜서는 왜 '용병'이라고 부를까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두 용병단이 붙은 전투에서 서로 칼을 두어 번 휘두른 뒤 평원에서 쉰 후 보수로 서로 함께 술을 먹었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마키아벨리는 "용병을 쓰는 것이 최악, 동맹군은 악, 그리고 오직 국민병만이 최선.", "용병 대장은 유능할 경우 왕의 지위가 위험하며, 무능할 경우 왕의 돈이 아까우므로 결국 쓸모가 없다."라고 일갈하며 용병이란 군체계가 그야말로 최악의 체계이며, 개념 박힌 국가라면 절대 피해야 할 군제라고 주장하기도 했다.[16] 마키아벨리가 용병들의 먹튀를 보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여러가지 사정 때문에 반만 맞는 말이다.
결정적으로, 마키아벨리가 대안으로 내놓은 시민군은 용병보다 잘 싸우기는 커녕 지는 경우가 더 많았다는 점이 큰 문제였다. 당시의 시민병은 전투 경험이나 전문성 면에서도 용병들보다 떨어지며 열세에 있었지만, 그보다도 시민병은 장기간의 전쟁을 수행하기 어려웠다는 점에서 더욱 불리했다. 몇 십 km 떨어진 곳에서 짧게는 한두 달 길게는 몇 년이 넘는 기간동안 계속 전쟁을 치른다고 하면 농민이건 상인이건 생계가 곤란해지고[17], 이는 곧 세수의 감소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군주나 영주들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시민은 생업에 종사하게 하고 그들로부터 거둬들인 세금으로 용병을 고용하는 게 전쟁을 더 오래 수행할 수 있고 국가 내적인 피해도 최소화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다보니 각 국가의 규모가 커지고 전쟁이 장기화되고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자연스럽게 시민병은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 따지고 보면 로마 제국도 같은 과정을 밟았다고 할 수 있다. 공식적으로 모병제로 전환하기 오래전인 마리우스 시대에 시민병은 사실상 도태되기 시작했다. 물론 징집된 시민병의 개념을 넘어선 상비군 시스템을 사용한다면 저런 문제는 극복되나, 당시의 국가들의 재정이 상비군 시스템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에는 용병이 결국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저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전장에서 용병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사실 마키아벨리의 격렬한 용병 혐오는 그의 주된 관심사가 당시 이탈리아 내부의 정세와 조국인 피렌체의 이익이었다는 점에서 생각해야 한다. 신성 로마 제국이나 프랑스 왕국과 같은 대국들은 일개 용병단 수준에서는 어떻게 덤벼볼 엄두도 나지 않는 강력한 슈퍼 갑이었고, 따라서 이들에게 고용된 용병들은 충실하게 계약의 신의를 지켜 그 대가를 받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도시국가 수준의 소국들이 할거하던 이탈리아 내부에서는 소국의 군주(영주)가 직접 용병대장으로 나서는 일도 드물지 않았고, 따라서 고용주와 피고용 용병단의 세력 차이가 그리 크지도 않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던 것. 따라서, 용병이 불성실하게 굴더라도 고용주측이 그대로 때려 조지고 응징하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 첫번째 문제였다.
그리고 두번째 문제는, 용병단 수준으로는 끼어들 엄두도 낼 수 없는 대국들의 파워게임과는 달리 이탈리아 내부 갈등에서는 용병단 역시 그 정치적 위상에서 고용주측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 정세의 주요 구성요소들이었다는 점이다. 소국과 소국이 싸우는데 고용된 용병대장 역시 그 못지 않은 소국의 군주라면, 고용주의 입장보다는 '이 전쟁에서 누가 이기는 게 나에게 유리한가'를 먼저 따지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던 것. 실제로 마키아벨리의 용병 관련 일화중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피사 원정의 경우, 용병을 고용하여 여러 차례 시도했음에도 번번히 실패했던 피사 원정이 마키아벨리가 제안한 시민군을 동원하여 시도하자 단번에 성공한 사례가 있다. 전투력이 떨어지는 시민군으로도 단번에 성공할 수 있던 피사 원정이 이전까지 번번히 실패했던 것은, 피렌체나 피사와 나름 대등하게 영향력을 겨룰 수 있는 정치적 단위인 용병대의 입장에서 내륙 도시인 피렌체가 대규모 항구도시인 피사를 완전히 장악하여 세력을 크게 키우는 것이 달갑지 않았기에 의도적으로 태만하게 전투에 임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에 상당한 합리성이 있는 것. 물론,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처럼 피사는 피렌체에서 수십 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이웃 도시이기에 당시의 행정/교통통신 기술 한계에서도 시민군의 원정이 가능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이 외에도 이탈리아 소국중에서는 그나마 세력 규모가 큰 편이었던 베네치아 공화국에서는 용병을 고용할 때 대규모 용병단이 아니라 소규모 랜스 단위로 고용하고 관료들이 그때그때 지휘관에게 병력을 배정해주는 방식을 사용했음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순수하게 군사적 효율성만을 생각하면 평소부터 손발을 맞춰오던 대규모 용병단을 통째로 고용하여, 평소부터 익숙한 지휘관에게 지휘하게 하는 것이 당연히 훨씬 효율적이다. 하지만 고용주의 입장에서는 군사적 효율성을 포기하더라도 용병단이 독자적인 입장을 가지는 정치적 실체가 되는 것을 막을 필요가 있었다는 것. 결국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당시의 시대적 한계에서 제대로 된 대규모 국민군을 편성하여 유지하기 힘들었다는 반박에 대해서는 재반론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으나, 어쨌건 '이탈리아의 도시국가인 피렌체'의 공무원이 내놓은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행동방침으로 해석해야지, 신성 로마 제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대국의 사례와 비교하기는 어렵다는 것.
또한 저런 지뢰(?) 용병단의 반대 급부로 독일의 란츠크네히트나 스위스의 유명한 스위스 용병대는 충성심과 신용도가 높기로 유명했다. 이들이 충성심으로 유명할 수 있었던 것은 반대로 충성심과 신용도가 떨어지는 용병도 있었다는 것이며, 이것은 현대에도 물건 조사 제대로 안 했다가 지뢰 밟는 것과 특별히 차이가 없는 것이다.
또한 베네치아 공화국은 용병에 의한 정치 불안을 겪지 않으면서 신성 로마 제국, 프랑스, 교황 등이 연합한 캉브레 동맹의 공격을 물리침으로써 이탈리아 용병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면 어느 정도의 군사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이는 베네치아의 관료들이 경험을 통해 용병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방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인들은 대규모의 용병을 거느린 용병대장과 계약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소규모의 단위인 '랜스(lance)'별로[18] 각각 직접 계약을 체결했고, 용병대장은 자기가 직접 거느린 병력이 아니라 관료들이 그때 그때 배정해 준 '랜스'들로 이루어진 부대를 지휘하도록 했다.[19] 또한 관료들은 전체 병력을 유지하기 위한 재정을 계획-관리했으며, 각 랜스와의 계약을 장기화함으로써 고용주인 베네치아에 일체감과 충성심을 가질 수 있도록 했고, 또한 정기적으로 점호와 사열을 통해 각 랜스가 계약한 대로의 인원과 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지 확인했다. 이는 그 후의 국가들이 관료체계를 통해 정규군을 운영하는 방식의 모범이 되었다. 대국이 용병대에 의해 나라가 좌지우지되는 경우도 드물었으며, 마키아벨리 자신이 강조한 '징집된 민병'이 용병들에게 처참히 발리는 바람에 피렌체도 결국 용병을 고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16세기 후반이 되자 스위스 용병대나 란츠크네히트의 위명도 점차 사라져갔지만, 유럽 대륙에서 용병이라는 개념 자체는 절대 사라지지 않고 멀쩡하게 건재하고 있었다. 당장 17세기 초반에 일어난 대전쟁인 30년 전쟁만 봐도, 이 전쟁 자체가 근대적 국민 국가의 성립 이전에 일어난 일이다.[20] 당연히 이 시기의 전쟁에서는 현대적 의미의 국민병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이 시기까지도 대다수의 군대는 순수하게 소득을 찾아 참전한 용병들이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가톨릭 동맹군들의 경우 용병에 의존하는 비율이 굉장히 높았으며, 이 용병들은 마키아벨리의 편견과 같은 허당 무리가 아니라 도리어 무시무시하게 잘 싸웠다. 사실 이 때야말로 유럽 용병의 전성기로 이 시기를 상징하는 인물이 바로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이다.[21][22] 심지어는 국민병 제도의 근간을 닦았다고 평가받는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스웨덴군마저도 국민병 못지않게 용병을 많이 사용했을 정도로, 이 시기까지도 용병은 사실상 유럽 각국 군의 중추였다. 주로 독일인과 스코틀랜드인이 유럽 각국에서 용병으로 활동했으며, 특히 스코틀랜드의 경우 전체 스코틀랜드 남성의 15%인 약 4만 명 가량이 30년 전쟁 기간 동안 용병 노릇을 했다. 30년 전쟁 때 종군한 스코틀랜드 용병들은 전쟁 말기 본국의 상황이 찰스 1세와 급진 개신교 세력의 갈등으로 엉망이 되자 조국으로 돌아와 결국 언약도 혁명과 잉글랜드 내전 때 의회파가 본격적으로 크롬웰의 지휘 아래 신모범군을 창설할 때까지 그나마 영국에서 실전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 장병들로 맹활약했다.
3.3.1. 유럽 이외의 지역
지금까지 주로 유럽 지역의 상황을 다루었지만 세계 다른 지역에서도 용병이 활발히 활용되었다. 북아프리카도 유럽인 용병을 고용하고 고대 유럽도 북아프리카인들을 용병으로 고용했다. 아시아 역시 마찬가지로, 임진왜란을 기록한 류성룡의 징비록을 보면 명나라군에도 용병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도 흑인에서 백인까지 골고루 있었으며 이들은 돈을 받고 명나라군에서 싸웠다. 류성룡은 이런 인종을 직접 보는 게 처음이라 신기해했는데 명나라 장수는 놀리듯이 좀 뻥을 쳤고 이걸 고스란히 징비록에 기록했는데 "이들은 보통 한족과 달리 강인하고 한참 굶어도 힘이 딸리지 않으며 화낼 때 무섭게 싸운다오." 라는 투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이런 아예 다른 곳에서 온 용병은 매우 드문 케이스이고, 역사적으로 중국이 가장 많이 고용한 용병은 우호적인 관계에 있는 유목민족 기병이다. 특히 몽골 기병을 즐겨 썼다.일본에서는 전란이 끊이지 않는 센고쿠 시대 들어서 용병 사업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가장 유명한 용병으로는 숙련된 포수들을 대량으로 보유했던 사이카슈가 있다. 센고쿠 시대에 일반 병사 역할을 했던 계급인 아시가루는 순수 용병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징병제스러운 면모도 있지만, 어쨌든 기본적으로는 계약을 통해 고용되는 형식을 했기 때문에 용병이라고 볼 수 있다. 아시가루 중에는 농사와 용병 일을 둘 다 하면서 투잡을 뛰는 경우도 많았으며, 자기가 사는 곳과 다른 곳으로 출장을 가기도 했다.[23]
그 밖에 태국도 용병으로 스페인과 네덜란드 백인 용병을 고용해 싸웠고, 이들이 유럽으로 가서 태국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게 남아있다. 용병들은 코끼리를 타면서 총을 쏘며 버마군(현재 미얀마)과 격돌했던 일을 쓰고 있는데 이들의 기록을 봐도 당시 태국군 군대 체제가 상당히 잘 잡혀있으며 전략이나 여러 요소에서도 유럽 강대국 못지않게 잘 잡혀 있었기에 아시아 야만족 전쟁이라 단순하게 생각했다가 고생했고 되려 많이 배웠다고 적혀있다. 또한 태국 등 동남아에서는 일본인 용병도 활발히 활동했는데, 실제로 태국,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지에서는 일본인만 모여 사는 촌락도 있었다.
이들 중 가장 출세했고 유명한 인물로는 야마다 나가마사가 있다. 그는 원래 무사였으나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정국이 안정되면서 출세길이 막히자, 아유타야 왕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그곳에서 1,500명 규모의 일본인 촌락의 수장이 되었고, 평소에는 일본과 태국을 왕래하며 상인 일을 하다가 전란이 터지면 용병을 하며 명성을 쌓는다. 당시 아유타야의 국왕은 손탐이었는데,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아유타야는 캄보디아와 지속적인 전쟁을 벌였고 그 와중에 스페인 함대가 해안가를 노략질하는 등 전란이 끊이질 않았다. 이때마다 야마다 나가마사 휘하의 일본인 용병부대는 네덜란드 용병과 함께 대활약을 펼쳤고, 이에 손탐은 나가마사를 매우 신뢰하게 된다. 그 결과 나가마사는 출세가도를 달렸고 1628년 들어서는 아예 장성급으로 승진하여 정치적으로도 위세를 떨친다. 이때 그의 위상은 매우 유명했는데, 실제로 같은 해 네덜란드 군함이 그가 가진 무역선을 나포했다가 선주가 야마다 나가마사라는 것을 알고 곧바로 풀어준 적도 있다.
손탐이 사망할 무렵, 야마다 나가마사는 태국의 강력한 정치적 거물 중 하나로 성장해 있었다. 그는 손탐의 사촌동생 시월라원과 함께 손탐의 아들 체터 친왕의 후견인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자신이 왕이 되고자 하는 야망을 품고 있었던 시월라원은 야마다 나가마사를 탐탁치 않게 여겼고, 이에 그를 리골 총독으로 임명한다[24].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나가마사는 리골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 등 승승장구했는데, 1년 뒤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는다[25]. 이후 시월라원이 왕위에 오른 뒤 아유타야의 일본인 촌락은 사라진다.
또한 무굴 제국도 일부 백인 용병을 고용하여 싸웠다. 여기서 백인 용병들은 야만인이라고 무굴 제국군을 우습게 보다가 큰 코다쳤다고 할 정도[26]였고, 고아를 비롯하여 아시아 일부를 식민지삼던 포르투갈이 무굴제국으로 쳐들어가려고 할 때 무굴제국에서 용병으로 참전한 포르투갈인 일부가 포르투갈로 돌아가서 거리도 멀거니와 중남미랑 다르게 그들의 힘이나 무기들은 결코 포르투갈에 밀리지 않으니 우리만 큰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반대했을 정도였다. 즉 용병들은 이 당시 돈 벌기 위하여 아시아로 간 게 아니라 밀정으로써 임무를 띠고 파병되기도 했다.
오세아니아에서도 여러 나라들 전쟁에 백인들이 용병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좀 더 고대로 가서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묵자가 조직한 용병대가 존재하며, 삼국시대 무렵에 나오곤 하는 객장[27]은 어떻게 보면 변형된 용병단으로 볼 수 있다.
3.4. 근대
17세기가 지나고 18세기가 되어서까지도 용병은 유럽의 군대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물론 이전 세기의 발렌슈타인처럼 유력한 귀족 한둘이 용병대를 좌지우지하는 일은 없어졌고, 중앙정부가 군사 업무에 관한 권한을 확실히 장악하게 되었지만 그것이 군대의 성질을 국민군으로 바꿔놓은 것은 절대 아니었다. 비교적 민족 의식이 강했던 프랑스를 봐도, 프랑스 혁명 이전의 경우 전체 보병 연대의 무려 3분의 1이 외국인이었다. 18세기에 들어서도 민족적 정체성이 약했던 독일의 영방국가들이나 오스트리아는 프랑스보다도 더 심했다. 사실 민족주의 자체가 제대로 대비를 하지 못했던 기존 기득 세력을 엿먹였다고 봐도 된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주장은 용병들에게 민족주의가 심리적인 타격[28]을 입힌 후에야 현실[29]이 되었다.또한 근대 용병집단들 중 특기할 만한 곳이 있으니, 독일의 헤센카셀 방백국이다.[30] 헤센카셀은 본래 신성 로마 제국의 소규모 영방국가 중 하나였는데, 17세기 말엽부터 18세기에 걸쳐서 용병업을 국책사업으로 삼았다. 본래 농업국가였는데, 30년 전쟁의 여파로 국토가 초토화되어 먹고 사는 것조차 힘겨워지고 활용할 자원이 인력뿐이자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것. 즉 전격 현실판 용병 국가. 헤센카셀은 고작해야 도시 한두 개 정도 크기의 아주 작은 연방국가였지만 대대적인 징집으로 전 국민의 무려 7% 정도를 계속 군인으로 유지했으며 이를 유럽 각국의 여러 영주들에게 용병으로 대여해주며 외교적 안정과 경제적 이득을 챙겼다. 7년 전쟁 때는 또 국토가 초토화되었는데, 이 여파로 군국주의화는 한층 더 심화되었다. 그리고 7년 전쟁 이후에는 일반 병사들도 장교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급료는 꽤 많이 받았고[31] 복무하면 가족들의 세금은 면제되었지만, 문제는 세금을 못 내는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징병제고 기간이 무려 24년이었다는 점이다. 징병대상이 되지 않으려면 엄청난 세금을 내야 했다.[32] 약탈은 공식적으로는 금지되었지만 실제로는 약탈을 할 수 있으면 했으며 특히 미국 독립 전쟁에서는 약탈로 악명이 높았다. 또 헤센 카셀은 신교도 국가에만 고용된다는 원칙이 있었고, 이슬람 세력을 상대할 때만 예외였다. 헤센군이 유명해진 것은 당대의 강국인 영국과 자주 계약을 하면서 바로 그 미국 독립전쟁에도 참전했기 때문인데, 이때문에 미국에서 헤센인은 용병과 동의어로 쓰였다. 미국 독립전쟁에는 다른 지역 독일 병사들도 참전했는데 헤센 출신들이 숫자가 다수고, 유명하다 보니 그냥 통칭해서 헤센인이라 불렸다.[33] 미국 독립전쟁 이후로도 헤센카셀은 여전히 용병업을 계속했으며, 프랑스 혁명 전쟁에도 참전했고, 1798년 아일랜드 독립 운동에도 영국편으로 참전했다. 헤센카셀이 용병업을 그만둔 것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의 일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헤센카셀을 점령한 뒤의 일이다. 이후 헤센카셀은 선제후국이 되었지만 빌헬름 9세[34]가 쫓겨나고 베스트팔렌 왕국이 되었으며, 나폴레옹 몰락 이후 빌헬름 1세도 복귀했지만 용병업은 그만두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 각국에 불어닥친 민족주의의 바람과 함께 이러한 국가 용병 군대의 입지는 상당히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용병은 유럽의 군사 제도 속에서 주목할 만한 비중을 가지고 있었다. 19세기 초엽에 이르기까지도 영국군은 군 내부에 독일인 병사들로 이루어진 KGL(King's German Legion)을 유지하고 있었고, 일종의 기업군이라고 할 수 있는 동인도 회사군은 아예 영국 정규군의 명령 체계를 따르지 않는 사설 군대였다. 또한 프랑스도 프랑스 외인부대를 창설해 식민지 전쟁에 선봉대로 투입하기 시작했다.
3.5. 20세기 이후(민간군사기업)
자세한 사항은 PMC 문서 참조.민족주의의 시대 동안 사그라들었던 용병이 다시 역사에 등장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봇물 터지듯 잇달았던 신생 독립국 붐에 의해서다. 다수 신생국이 정비되지 못한 군대 체계를 대신하여 용병을 필요로 했고 현대 병기에 익숙한 유럽의 전직 군인들이 그 수요를 충당시켰다. 대표적인 사례로 콩고 내전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등지에서는 백인우월주의와 아프리카 민족주의의 갈등 속에서 흑인들과 벌인 전쟁이 크게 터졌고,[35] 공산 국가들도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위해 의용군이나 원조군이라는 명목 아래 용병들을 만들어서 온갖 전쟁들에 뛰어들었다.
특히 쿠바 내무성 정보관리국 제5과가 대표적이며, 아프리카와 남미 등지에서 사주하지도 않은 공산혁명을 일으키는 제3세계 국가들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반면에 공산주의를 극도로 싫어하던 아일랜드 출신의 전직 군인이자 사업가였던 '미친' 마이크 호어가 1964년에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총리 모이즈 촘베, 콩고 국군(Armée Nationale Congolaise, ANC) 지원하에 여러 국적의 백인 용병과 항공 지원을 담당하는 반 카스트로 쿠바인 조종사, 현지 지원자 등 총 300명으로 구성된 제5 코만도(5 Commando)를 창설했으며, 이후 CIA의 지원을 받으며 1967까지 활동했다.[36] 비슷한 시기에 영국, 프랑스와 벨기에 같은 유럽 출신의 Bob Denard#, Roger Faulques[37], Jean Schramme[38]과 같은 전설적인 콘도티에로(condottiero, 용병 집단 지도자/사령관)가 등장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맹주라고 할 수 있는 미국과 소련이 자신들은 냉전을 벌이고 있는 동안, 가끔 이들의 영향 아래 있는 국가들에서 대리전이 벌어졌고, 그들이 흩뿌린 용병들은 어딘가에서 거의 항상 싸우는 것이 진정한 냉전기의 모습이었다.
특히 50 ~ 70년대에 걸쳐 세계 각지에서 벌어진 전쟁과 내전은 모조리 용병이 관련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시장은 넘쳐났으므로, 냉전 시기에 유행한 '현대적 용병 산업'은 급속도로 성장했다. 또한 이들은 신생국 정부뿐만 아니라 구 종주국 정부와도 계약을 맺고 경제적 이권 보장, 거류민 보호 등에 종사하였으며 이것이 현재의 민간군사기업(PMC)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2020년대 기준으로 전세계에서 용병시장이 가장 활성화되었고 그 규모도 압도적인 곳은 홍해와 아라비아해 일대이다. 지리적 특성상 땅덩어리는 더럽게 큰데 그에 비해 사람이 거주하기 어려운 환경이다보니 필요한만큼의 군인을 모집하기도 어렵고, 설상가상으로 주변에 자리잡은 국가들 대부분이 부족사회의 영향력이 강하게 남아있어서 통일된 정체성을 필요로 하는 정규군을 운용하기엔 난감한 상황이기에 넘쳐나는 오일머니로 외국에서 용병들을 고용하여 전력투사가 필요한 곳에 인정사정없이 투입하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현대에서 용병 중심의 군대를 가진 국가라 한다면 사우디 아라비아가 그 대표주자였다. 이건 어쩔 수 없는 것이 사우디는 세계 최대의 산유국이다 보니 국민들한테 석유를 팔아서 번 돈을 듬뿍 뿌려주고, 그러다보니 국민들이 기본적인 생계 유지에 문제가 없다보니 군대 같이 위험한 직업에 좀처럼 가서 일하기를 꺼린다. 따라서 사우디는 방글라데시 같은 가난한 이슬람교 국가들의 국민들을 상대로 돈을 주고 용병처럼 고용하여 군대를 꾸려나갈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대립 구도를 보이는 국가인 아랍에미리트의 국민군 체제와 달리 사우디 아라비아는 철저한 용병 중심의 군대다. 이들은 대체로 무기, 장비, 전략을 자체적으로 개발하기보다는 용병들을 무지성으로 고용해 누수를 틀어막는 것에 가깝게 사용하고,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 사고들은 전쟁 전문가들을 고용한다기보단 거액의 돈을 미끼로 비합리적인 형태의 징병제를 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이러한 상황은 사우디군을 국방의 주체라기보다는 사실상 용병들의 소굴이나 다름 없는 형태로 만들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예멘내전에 개입하고 정규군이 후티 반군과 붙는 족족 깨지면서 크게 체면을 구겼는데 이후 대규모 용병 투입으로 전략을 수정하면서 그야말로 미친듯한 충원률을 바탕으로 몰아붙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용병의 효용성을 입증했다. 애초에 자국민도 아니어서 사상자가 얼마나 발생하든 짊어질 정치적 부담도 없거니와 여기에 투입한 용병들은 몸값이 높은 1세계 군대 복무경험자가 아닌 동아프리카 출신 무경력자들이기 때문에 비용 부담도 적다. 여기에 감명받은 다른 아랍국가들도 이러한 기류에 적극적으로 편승하여 UAE 같은 경우는 아예 경찰까지도 파키스탄 출신 외국인 용병들을 받고 있다.
보안, 경호 업무가 아닌 실제 전투에 투입하기 위해 고용되는 용병은 현재 지역별로 분업화가 벌어지고 있다. 예컨대 비싼 돈 주고 사 온 장비들의 운용은 1세계 용병들에게 맡기고, 대침투작전 혹은 게릴라 소탕은 마약 카르텔과의 전투로 이골이 난 남미 출신 용병들에게, 전술한 예멘내전 같이 인명피해가 다수 발생하는 소모전 상황에서는 동아프리카 출신들을 고용하는 식이다.
골때리게도 동네 백화점이나 상점가 경비원으로 채용된 (줄 알았던) 이들이 정신차려보니 사우디더라...라는 썰도 돌아다닌다. 그런데 월급이 많아서 울며 겨자먹기로 복무했다고.
4. 장단점
4.1. 장점
현대 노동경제학에서는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징병제와 모병제보다는 용병 고용이 그 사회에 최대한의 효율을 가져다준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용병의 오랜 시간에 걸친 학습(learning by doing)과 기술 개발을 통해 군사 직종에 최적화된 노동력이라는 특징 때문. 용병을 활용한 역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이론이 상당부분 고스란히 녹아들어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특히 근대적인 개념의 민족국가(nation state)가 등장하고 국민군이 보편화되기 이전인 전근대의 국가들은 그 정도의 군대를 항상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을 갖춘 경우가 드물었으며, 특수한 능력과 기술을 다른 민족들에서 '구입'할 필요가 있는 경우도 있었다. 누미디아족의 기마술, 갈리아족과 게르만족의 완력과 체력, 로도스 섬과 발레아레스 섬의 투석구, 제노바의 쇠뇌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전쟁터에서 구르다보니 전투력이 좋고 일반적인 징집병보다 사기도 높으며, 체력이나 용맹함 등 용병이 갖춘 덕목은 일반적인 병사들보다 훨씬 유용했다. 이러한 특징은 종종 특정 민족의 특기로 간주되었다.
예컨대 페르시아인들은 그리스 용병을 고용해서 잘 써먹었고(문제는 내전에서 그 짓을 했다는 것), 스파르타 용병대장 크산티포스는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레굴루스의 공격을 막아내었으며, 한니발도 갈리아 용병을 잘 활용했고, 누미디아 기병들은 포에니 전쟁 시기 카르타고와 로마 모두에서 고용되어 전쟁의 한 축으로 활약했다. 동로마 제국 역시 페체네그 기마궁수, 노르만 중기병 등의 용병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이를 토착군대와 조합시켜 주변국을 캐관광 태우는데 성공했다. 중국에서도 사실상 후한대에서부터 당나라 시대까지 기병의 핵심 전력을 차지한 것은 북방 유목민족 용병이었던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봉건제 사회인 중세 유럽에서 용병들은 상비군으로 활용되기 좋은 군대였기 때문에 영주와 국왕들에게 자주 고용되었으며 카탈루냐 용병대 같은 경우 초창기 오스만 제국과 동로마 제국을 둘 다 버로우시켰고 15세기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 마차시 1세의 용병대인 검은 군대는 보헤미아 왕국, 폴란드 왕국과 2대 1로 싸우고도 가볍게 승리했으며 급기야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오스트리아 대공국과 전쟁을 벌여 그 수도인 빈을 함락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대표적인 성공 사례는 30년 전쟁 당시의 발렌슈타인으로, 용병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30년 전쟁 중 독일 최고의 실력자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국민군을 창설한 것으로 유명한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군대도 상당수는 용병으로 채우고 있었다.
일부의 주장과는 달리 잘 관리된 용병 집단은 용맹성과 신뢰성은 어느 시대이든지 믿을 수 있는 요소다. 크고 작은 전쟁들이 수시로 일어났고 수많은 용병단이 신규 설립되거나 해체되는 때였다. 당연히 용병단간에 서로 부유한 왕조, 가문들과 계약을 이뤄내려는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만일 어떤 용병단에 대해 비겁하거나 믿을 수 없다는 인식이 용병을 필요로 하는 고용주들에게 퍼질 경우엔 계약을 맺을 수 없으며, 계약하더라도 열약한 조건 하에 이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용맹성, 신뢰성이 우수하다고 알려지면 자신들과 계약하려는 고객들이 늘어나고 높은 보수나 선불 지급, 장기 계약 같은, 더 나은 고용조건을 제시할 수도 있다. 이로 인해 용병단의 수입이 올라가고 소속 병사들에게 더 나은 급여와 근무조건도 제시할 수 있는데 실력있는 병사 영입에도 유리해지며 용병단의 질적 상승에도 연결된다. 이러한 긍정적 순환효과 때문에 용병단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용맹하며 신뢰성이 있는지를 국가와 가문들에 어필하고 다녔는데 가장 확실한 방법은 실전에서 증명하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스위스 용병, 네팔 구르카 용병이다.이렇게 잘 관리된 용병 집단은 자신들의 출신지에 대한 소속감, 자존심도 있지만, 무엇보다 용병으로서 비겁한 모습, 믿을 수 없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싫어했다.[39]
유럽사를 기준으로 보면 중세 후기부터 아예 '용병 수출'을 국가 산업으로 육성했다 할 만큼 용병들이 많이 쏟아져 나온 지방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중세 후기에는 스위스, 근세에는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와 우크라이나, 발칸반도, 그리고 헤센같은 독일계 공국 등 지역적인 연고가 확실히 있고, 근세 후기로 넘어가면 이런 용병 수출의 전통이 자국 내의 상무적 이데올로기, 사회적 자의식 (ethos) 형성에 지대한 역할을 끼쳤다. 이렇게 전통적으로 용병 배출 지방에서 나온 용병들이 비겁하거나 믿을 수 없는 모습을 보이면 그 민족 용병 전체의 위신에 흠집을 내고, 자신뿐만이 아니라 고향 후배들의 '취직'길까지 막아버리기 때문에 이런 용병 수출의 전통은 부대, 개인 단위로 내려가면 더더욱 열심히 싸울 동기 기제가 된다. 그래서 보통 이들은 자신의 용병 부대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 말 그대로 죽을 때까지 싸웠다.
대표적인 사례가 사코 디 로마 사건 당시에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도망칠 때까지 시간을 끌다가 189명 중 42명만이 살아남은 스위스 근위병이나(이 사건 이후 대대로 바티칸 경비병은 스위스 용병을 쓴다), 프랑스 혁명 때 튈르리 궁을 지키고 있다가 몰살당한 786명의 스위스 근위병.[40] 또한 용병이면서 동시에 엄청난 충성심을 자랑한 바랑인 근위대[41]나 헝가리 왕국 최후의 명군이었던 마차시 1세의 용병이자 근위대였으며 상비군이었던 검은 군대 같은 사례도 있다. 때문에 한탕 해먹고 튀는 양아치들이 아니라 '제대로 된 용병집단'을 고용할 경우, 급료만 제대로 지불한다면 정규군 못지 않게 믿을만한 군대를 얻을 수도 있다.
즉 중세봉건시대에 주군에게 충성하는 기사도, 무사도와는 다른 용병단 특유의 프로의식이라는 것도 생겨났는데, 돈을 받았으면 받은 만큼은 해야 한다는 상도(商道)와 많이 비슷하다. 당장 이라크 전쟁 중 팔루자 전투 당시 모두가 주저하고 있을 때 시내의 미군을 지원하기 위한 증원 전력의 최선봉에는 악재가 있었지만[42] 스스로 나선 블랙워터들이 있었다. 현대의 PMC들도 이그제큐티브 아웃컴즈가 활동하던 시기의 아프리카 같이 고용주와 순수하게 경제적 이익으로만 계약이 되는 경우에는 정부와 용병 사이에 깊은 신뢰가 생기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현재의 강대국 산하 PMC들은 해당 국가, 혹은 동맹국의 군경 출신으로 구성원이 이루어져 있다는 점도 신뢰 문제를 불식시키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돈이 지급되는 동안은 충성을 바치기 때문에 역으로 친위대 등의 임무를 수행하는 경우가 흔했다. 자국의 정치세력에 휘둘릴 수 있는 자국민보다 돈이면 되는 용병이 더 믿음직스러웠던 것이다.게다가 용병은 순수하게 물질적인 대우에 따른 충성심만으로 유지되기 때문에, 정치 세력으로 변질될 위험도 적은 편이다.
현대에 있어서도 정규군을 움직이는 것보다는 용병이 싸고 또 용병을 고용하면 용병의 군사활동은 정규군의 것과는 별도로 계산되기 때문에 자국 내의 반전여론을 억제하기 쉽다. 다만 PMC 수준으로 넘어가면 오히려 정규군보다 돈이 많이 들어가기는 한다. 물론 일반적인 육군이나 해병대 병사들을 동원하는 정규 작전보다 돈이 더 들어간다는 것이지 비싸기로 소문난 용병조직의 대표적 사례인 블랙워터를 이용한다고 하면 그 비교대상은 델타 포스나 네이비 씰이 되어야 한다. 넵튠 스피어 작전 같은 걸 기획하는 CIA, 실행하는 데브그루 등은 유지비 많이 들어가기로 유명한 조직이라 이런 수준의 작전을 외주화할 수 있다면 비용 낭비는 크지 않을 수 있다. 게다가 여전히 정규군과는 달리 피해를 입는 것에 대해서도 여러모로 제약이 덜해서 많이 계약한다.[43] 특히나 보수적이고 관료주의적인 성향 탓에 정규군은 엉덩이가 무겁고 뭘 하든 간에 규정과 절차가 복잡한데, 민간군사기업은 매우 발빠르게 움직이는 장점이 있다.
4.2. 단점
나라 꼴이 막장으로 치달으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봉급이 나오지 않거나 전황이 밀려버리면 우루루 이탈해버리거나, 본국의 정치가 불안정한 때에는 용병 대장이 쿠데타로 직접 나라를 접수해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용병 조직 구성과 출신에 따라서 통제가 잘 안되는 용병이 있기 때문에 약탈을 비롯한 잔혹행위를 저지르는 경우도 있다.[46][47] 용병들은 약탈을 비롯한 잔혹행위를 고용주가 막으려 들면 오히려 고용주를 죽이고, 심지어 고용주의 가족들이나 그 영지의 사람들을 잔혹하게 학살하고 강간하고 약탈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래서 고용주들은 용병들에게 승리하면 며칠간의 자유로운 약탈을 비롯한 잔혹행위를 통제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등의 방법으로 용병들을 겨우 통제했었다. 그렇지만, 르네상스 당시 이탈리아 용병들은 약탈을 덜 했는데, 그 이유는 간단한데 여기서 계약이 끝나면 그 다음은 누가 그들을 고용할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상대가 미래의 고용주가 될 수도 있는데 시덥잖게 약탈을 시도했다가 척을 지면 앞날이 보장되지 않게 된다. 그냥 당장 좀 벌어보고자 약탈하는 경우가 절대 다수였지만, 그래도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는 약탈이 비교적 적었다. 더구나 징집병 미화와 달리 민중 십자군 같은 군대는 의외로 전쟁보다 부수적인 것[48]들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악명이 높았다.[49][50] 전문적인 군인들은 의외로 전쟁이 밥벌이라 학살이나 약탈도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었고 수입[51]에 더 관심이 많아서 전쟁범죄가 어느 정도 억제되었다.
하지만 카를 5세의 군대인 황제군이 로마를 함락시킨 로마의 약탈 무렵, 가장 약탈과 살인으로 악명을 떨친 집단은 독일인 용병들인 란츠크네히트였다. 이유는 그들이 워낙 오랫동안 월급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14세기 동로마에 고용된 용병들인 카탈루냐 용병들은 고용주인 동로마가 막대한 금화를 털어 월급을 주는데도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높은 봉급을 요구하다가 질려버린 동로마에 의해 대장인 루지에로 데 플로르가 죽임을 당하자, 오히려 대장의 복수와 약탈을 위해 동로마 곳곳에서 마구잡이로 잔혹한 학살과 약탈을 벌여 동로마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이것과 별개로 봉급이 밀리는 경우 이탈하거나 태업을 하며, 최종적으로 봉급을 고용주한테 강제징수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이건 고용주가 문제긴 하지만.
더 심한 경우는 아예 고용주의 뒷통수를 치고 반란을 일으켜 고용주의 국가를 빼앗으려 하기도 한다. 포에니 전쟁의 원인이 된 '마메르티니' 용병부대나, 13세기 동로마 제국에 고용되었다가 역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아테네 공국을 찬탈하기까지 한 카탈루냐 용병 등이 그러했다.
사실 프랑스 혁명 당시의 시민병들은 프랑스 본국의 혼란으로 원활한 보급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거의 전적으로 그들에게 '해방된' 지역으로부터 보급을 의존했고 잔혹행위와 약탈이 용병들에 비해 적지 않았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이런 면에서 유명하지만, 아무래도 나폴레옹이 악인들을 뛰어난 군인으로 여겨 총애한 면도 있고 본인부터가 해적 가문의 후예[52]라 그럴 수도 있다. 이러한 현지조달에 의존하는 방식은 비옥한 지역에서는 보급에 얽매이지 않는 기동으로 강한 힘을 발휘했지만 가난한 지역인 스페인과 러시아에서 한계를 드러내게 된다.
현재의 PMC(Private Military Company)들은 이런 용병의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 직원들은 대부분 세계의 유명 특수부대 출신들인데다 대원 개개인 한 명 한 명이 각자 전투의 프로라고는 한다. 그러나 여전히 윤리 문제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는데, 일례로 유명한 PMC '블랙워터'의 경우 이라크에서 자신들이 신변의 위협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무차별 총격을 가해 수많은 민간인들이 살해되게 하기도 했다. 제일 황당한 케이스는 이라크 시내에서 차 타고 가다가 길이 막힌다는 이유로 도심 한복판에서 차에서 내려, 인근 민간인들 상대로 무차별 난사를 한 사건이다. 이 일이 얼마나 황당했는지, 미국 의회에서 청문회까지 열렸고, 그 때 블랙워터 측에서 내놓은 주장이 '전쟁 중이었으니까 자기 보호를 했다'라는 주장이었다. 블랙워터는 2년간 195건의 총기사건에 휘말렸고, 이는 모두 블랙워터에서 먼저 발포한 사건이었다.[53]
더군다나 과거에서부터 용병들의 고용주로 유명했던 중동/아프리카 국가들의 용병 사용을 본다면 '전문노동직'이라기보단 '막노동 직종'이라고 보는 것이 어울릴 정도로 굉장히 심하게 굴린다. 단순히 자국의 민주화 혹은 인권 운동을 탄압하는 것을 넘어서 타국과의 전쟁에 동원하거나 지연전용 미끼로 던지거나, 아니면 압도적인 기량 차이를 보이는 적들에게 어떻게든 맞아라라는 식으로 용병들을 던지는 것에 가까운 운용을 보이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전문가들보다는 비숙련자들이 더욱 많으며, 보통 이들은 전장에서 빠르게 목숨을 잃는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중에 발생한 예브게니 프리고진의 쿠데타도 정규군의 막무가내식 전선배치와 방치가 이유가 되었을 거라는 분석이 있다. 본래 바그너 그룹은 국가의 (사실상 푸틴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서 전차와 장갑차는 물론 항공기까지 보유하는 대규모의 용병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푸틴의 총애 때문에 바그너 그룹과 정규군 사이에서는 보이지 않는 파벌싸움이 존재했다. 전쟁은 두 집단의 갈등에 기폭제가 되었고 용병단장 프리고진은 러시아 정규군의 졸전과 바그너 그룹에 대한 의도적인 전투지원 요청무시를 수시로 질타했다. 쿠데타 직전에는 아예 러시아 국방장관인 세르게이 쇼이구를 지목하며 욕설과 폭언을 날리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는 원래도 프리고진이 푸틴의 최측근이었기에 바그너 그룹 역시 푸틴의 사병(私兵)이나 다름 없는 위상의 조직이었지만, 이들이 전면전에서도 정규군 보다 월등한 성과를 내기 시작하니 러시아군 수뇌부가 견제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배경을 염두에 둔 분석이다.[54] 비록 프리고진은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 정말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지만, 이 사건은 용병에 너무 의지하지 말라는 수 천년의 전쟁사 교훈을 다시 증명하는 사건이 되었다.
5. 오늘날의 용병
민간군사기업 문서 참조. 현대에서는 인도주의의 기본이 되는 제네바 조약조차도 용병을 전투원으로서 인정하지 않고, 잡힐 경우 전쟁 포로로 인정해 주지도 않고 있다. 또한 많은 회사들이 편법을 이용해 일부러 용병을 민간인으로 취급한다[55]. 관련 조항은 제네바 협약 제1 의정서에 명시되어 있으며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제47조 용병 1. 용병은 전투원 또는 전쟁포로가 될 권리를 가지지 아니한다. 2. 용병은 다음의 모든 자를 말한다. 가. 무력충돌에서 싸우기 위하여 국내 또는 국외에서 특별히 징집된 자 나. 실지로 적대행위에 직접 참가하는 자 다. 근본적으로 사적 이익을 얻을 목적으로[56] 적대행위에 참가한 자 및 충돌당사국에 의하여 또는 충돌당사국을 위하여 그 당사국 군대의 유사한 지위 및 기능의 전투원에게 약속되거나 지급된 것을 실질적으로 초과하는 물질적 보상을 약속받은 자 라. 충돌당사국의 국민이 아니거나 충돌당사국에 의하여 통치되는 영토의 주민이 아닌 자 마. 충돌당사국의 군대의 구성원이 아닌 자 바. 충돌당사국이 아닌 국가에 의하여 동국의 군대구성원으로서 공적인 임무를 띠고 파견되지 아니한 자 |
현재는 군소 용병 조직은 표면상에서는 거의 사라지고, 있다 하더라도 대부분 민간군사기업(PMC)으로 전환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2001년 10월 22일 유엔은 ‘용병 모집과 이용, 재정 지원 및 훈련을 금지한 국제협약’을 발효시켜 용병이란 개념 자체를 없애려고 노력 중이다. 하지만 해당 협약엔 고작 수십 개국만 비준한 상태이고 그나마 미국, 영국, 중국 등 상임이사국과 심지어 국군이 없는 일본조차도 비준을 한 상태가 아니라 유명무실하단 비판이 있다. 여하튼 용병에 대해 돈 받고 오는 녀석들이라고 나쁘게 보는 시각도 많아서인지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그 유명한 디엔비엔푸 전투 때 포로가 된 외인부대원들은 베트민에게 더더욱 학대를 당했다고 한다. 프랑스군 포로들도 학대당했지만 외인부대는 따로 둬서 더 악랄하게 패고 학대했던 게 돈만 주면 싸우는 녀석들이라고 한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외인부대도 맹렬하게 싸워 무려 1만 명이 넘게 전사했기에 베트민에게는 더더욱 이가 갈렸을 듯 하다. 다만 당시 외인부대는 국제법상 프랑스 육군 소속 군인공무원으로 구성된 정규군이지 용병이 아니기 때문에 엄연한 국제법 위반이었다.
물론 이런 규정이 있다고 해서 용병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용병의 대부분이 활동하는 곳은 제네바 협약 따위는 무시하는 집단들이 분쟁을 벌이는 곳이라 정규군이 잡혔다고 해도 잔혹하게 살해되는 것은 똑같기 때문. 애당초 용병으로 지원한다는 것 자체가 정규군이 제 기능을 못하고 전시국제법의 개념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자기 목숨을 담보로 큰 돈을 노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현대 용병은 대부분 독자적으로 활동하지 못하고 정규군에 배속된 민간군사기업(PMC)부대원의 형태로 전투에 임하며 국가에 고용되므로 사실상 군인이나 다름없어 제네바 협약을 적용하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는 비판도 있다.
제네바 협약의 기본적인 구성은 일단 전쟁터에 있는 사람을 '전투에 참여하는 사람'과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으로 나누고,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정하고 있다. 그리고 '전투에 참여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합법적으로 전투에 참여할 권리', 즉 교전권을 인정받기 위한 조건을 따져서 교전권을 가진 전투원에 대한 처우를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제네바 협약의 47조가 정하는 바는 '용병은 정당한 교전권을 가진 전투원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고[57] 이에 따라 포로로서의 처우 등에 대한 인도주의적 원칙의 적용 대상으로도 보지 않는다는 것. 사실 제네바 협약 자체가 국민병만 전투에 참여하는 게 당연했던 19세기 중반~20세기 중반 서구 문화권의 사회상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21세기의 변화한 국제정세 및 정치경제사회적 상황에는 부합하지 않는 면이 있다는 지적은 꾸준히 제기되어왔다. 이런 이유로, 그리고 용병들을 굳이 적대시할 필요가 없다는 점 때문에 어느 정도 질서가 잡혀 있는 군 조직이라면 제네바 조약과 무관하게 용병들이 전시국제법을 잘 지키다가 항복했을 때는 포로로 대우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영국이 고용하는 구르카족 용병부대나 프랑스의 외인부대등은 일단 형식적으로는 용병과 다름없다. 다만 구성원들이 용병이고 핵심 지휘관을 자국인으로 쓰며 편제도 일단 정규군으로 운용하기에 국제법상으로는 정식 군인이나 외국인 의용병으로 취급되며 정식 민병대/의용병의 조직은 국제법상으로는 정규군과 동일한 대우를 받는다. 현대의 스위스 근위대는 본래 스위스 용병이었으나, 위의 국제법뿐만 아니라 스위스 국내법에서도 용병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어서 형식상 '치안 경찰'로 분류하고 있다. 또한, 구성원들의 처우나 국제법상 문제 등까지 신경쓰는 PMC들은 계약하는 국가에 계약 기간 중 투입되는 자사 인원들에게 계약직 공무원 신분 부여를 요구하기도 한다.
게임, 영화, 소설, 애니메이션 등에서 자주 나타나며 보수에 따라 바로 적이 되는 모습도 잘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실제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용병대를 해산하고 새로 결성하지 않는 한, 한쪽의 용병대가 적측에 가담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30년 전쟁에서는 보수를 받지 못한 용병대가 고용주를 갈아타는 바람에 당시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준 사례가 한 번 있었지만, 이조차도 보수를 주지 못한 고용주측의 문제였고 같은 신교도 진영 안에서 고용주를 바꾼 것이었지 적측에 붙은 것은 아니었다. 특히 스위스 용병대는 뛰어난 전투력과 함께 충성도 높기로 정평이 나 있다. 특히 16세기 초, 신성 로마 제국군이 로마를 공격하자 교황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우다 괴멸된 스위스 근위대(Swiss Guard)는 지금도 회자되는 사례이다. 가장 중요한 문제인 급여만 제대로 지급해주면 용병이 계약 중에 배신한 역사적 사례는 없다고 보면 된다.
현재 PMC가 전근대의 용병과 가장 차이나는 점은 바로 자국의 통제를 받는다는 것이다. 대체로 서방의 군사 강국들이나 러시아, 중국 같은 국가들에서 운영되는 군사 공급이나 군사 자문 관련 PMC는 해당 국가의 군부, 정보기관, 사법부, 국회 등의 감시를 높은 강도로 받고 있고 어느 정도의 불법 행위를 용인해주는 것은 이 반대급부로 제공되는, 그래서 일종의 공식적으로는 서류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림자 군대 같은 취급을 받고 있어 사실상 목줄이 매진 맹수 같은 처지라고 볼 수 있다. 아래쪽에 있는 수호이의 사례는 러시아를 비롯한 구 소련 국가들이 워낙에 막장이던 시절 정말로 나라에 돈이 없어서(…) 고객 국가 측의 돈을 받아 생계형 용병을 했던 사례이고 2020년대 현재 러시아가 관여하는 전 세계의 전장에서 미국의 블랙워터 만큼이나 언론에 자주 언급되는 바그너 그룹은 철저하게 러시아의 외교 안보의 이익을 위한 분야에만 활동을 집중하고 있고 블랙워터의 주 고객이 미국 정부인 것처럼 바그너 그룹의 수입도 러시아 정부에서 나오고 있기 때문에 러시아도 90년대와 같은 짠내 나는 생계형 용병회사를 수출하는 상황은 아니다. 물론 이건 강대국에서 운용하는 PMC 얘기고 아프리카의 이그제큐브 아웃컴즈처럼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난 이들도 있긴 있다.
여하간 대다수는 말이 용병단이지 사실상 국가가 운용하는 준정규군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제네바 조약에 포함시켜 전시국제법을 준수하도록 강제하고[58] 대신 정규군에 준하는 보호를 해주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래서 서방 국가 PMC가 중국 정부의 의뢰로 신장 위구르 지역의 무력 저항을 진압하는데 도움을 주거나 서방 국가가 국가기간시설의 경비에 중국, 러시아 PMC의 자문을 받는다던가 하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기 힘들고, 만약 실제로 이루어진다면 이미 해당 국가 간의 외교적 레벨에서 합의가 이루어진 상황이 아니라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를테면 러시아의 우주기업 흐루니체프는 군사위성 발사 및 미사일 개발 용역 수주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넓은 의미의 PMC에 해당하지만 한국 정부의 KSLV-I 나로 로켓 개발 및 발사에서 엔진 납품 및 기술 자문을 제공한 것은 당연히 흐루니체프의 단독으로 이루어진 결정이 아니다.
용병이 잘 관리되는가는 기본적으로 그 고용주인 정부나 전장이 어느 정도 '제대로 된' 상태인가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는데, 현대에 용병을 고용하는 지역은 기본적으로 막장 그 자체니 난장판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59] 계약 만료 후 적대 세력에 고용되어 전 고용주에게 총부리를 겨눈 용병도 많으며 반대로 후환이 두려워 용병을 적에게 넘기거나 등 뒤에서 총을 쏜 고용주도 많다.
용병들이 전투 중, 또는 계약 만료 전에는 고용주가 먼저 계약을 어기지 않는 한 적에게 붙지 않으며, 계약을 어겼다 해도 바로 배신하는 일이 적은 이유는 용병 자체도 일종의 사업인 만큼 계약 엄수에 대한 평판이 곧 사업적 신뢰성이기 때문이다. 돈에 눈이 멀거나 고용주가 마음에 안 든다고 고용주를 배신하는 행위는 해당 용병이나 단체의 경력과 평판에 큰 오점이 되어 새로운 고용주를 찾기 어렵게 하고, 설령 고용된다 해도 고용주측의 지속적인 의심의 눈초리를 사고 다음에 만난 동료들에게도 백안시당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더욱이, 배신당한 고용주가 완전히 몰락한 것이 아니라면 배신한 용병을 응징하려 시도할 수도 있다.[60] 특히 일부 창작물에서 용병단을 '오갈 곳 없는 떠돌이들의 모임'처럼 묘사하는 경우가 많은 것과는 달리, 용병은 다른 어떤 직업보다도 철저한 신용이 요구되는 직업이다. 아무리 병력이 급하더라도 믿을 수 없는 자에게 무기를 쥐어주고 자신의 안전을 맡기는 바보는 없다. 근대 이전까지는 주요 용병 수출국이라는 개념이 있던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특정한 국가나 지역의 기존 공동체 단위로 계약을 맺는 경우가 많았고[61] 여기서 계약을 위반하여 고용주측의 신뢰를 상실하는 행위는 자신뿐 아니라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평판까지 떨어트리는 행위로써 공동체 내부에서도 백안시당하는 행위였다는 것. 주요 용병 수출국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현대에도 주로 특수부대 전역자등이 용병의 주축을 이루면서 자신의 행동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평판과 직결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즉, 당장 몇 푼의 이익을 얻기 위해 바가지를 씌우는 장사꾼들이 장기적으로는 신용을 잃어 큰 손해를 보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과 마찬가지인 셈. 더구나 이 거래가 국가나 단체의 안전과 존망이 달린 '전쟁'에 관한 것임을 생각한다면, 고용주는 그만큼 용병부대의 신용도를 철저히 따질 것이다.
또한, 기본적으로 자기 목숨 담보로 돈 버는 용병들이, 자기 좋자고 업계 전체의 신용도를 깎아먹는 놈들을 어찌 처리할지 당연하다. 무례한 문명인은 살 수 있지만 무례한 야만인은 살해당한다는 격언은 여기서도 적용될 수 있다. 현대의 용병도 기업이나 계약자 개인이 소속된 국가의 이익에 명백히 반하는 계약과 활동을 하게 되거나 정당한 이유 없이 민간인을 해치면 남는 건 경찰서 정모와 콩밥밖에 없고. 인터폴의 수배자 목록에 오르거나 테러리스트로 국제적인 제재대상이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업계에서 앞으로 살아남는게 문제가 아니라 목숨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특히 민주국가에서는 이런 행위가 정권의 묵인을 받았다고 해도 국회에서 사건을 적발하거나 정권이 교체된다던가 하면 온 나라가 뒤집어지는 초대형 스캔들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다.
대신 용병은 정규군이 아니기 때문에 승산이 없다고 판단될 때, 항복 의사를 밝히면 어지간히 잔인한 적장을 만나거나 적에게 큰 피해를 입히지 않은 한 포로가 되어 몸값만 지불하면 풀려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 때문에 용병이 돈만 밝힌다는 것은 오해의 여지가 있다. 빈사의 사자상의 일화에서도 드러난다. 여기서 용병의 항복을 거부하고 다 죽여버리거나 하면 그 군주는 다른 용병을 고용하기 어려워진다는 측면도 있다.
수호이 전투기 시리즈로 유명한 수호이사가 아프리카에 전투기를 팔면서 전투기를 조종할 조종사와 유지 관리 보수를 해줄 정비사를 포함한 부대를 아예 세트로 판매한 일도 있다. 덕분에 에티오피아-에리트레아 전쟁[62] 당시 러시아 출신과 우크라이나 출신 용병이 서로 수호이 전투기를 타고 격돌한 실화가 있다. 그 밖에도《에어리어88》수준의 제트 전투기 부대는 아니어도, 프로펠러기나 헬기 조종사를 구하기 어려운 나라들이 용병을 고용하고 있기도 하다.
쿠웨이트 공군에서는 F/A-18 전투기의 조종사는 쿠웨이트 공군이 직접 맡지만 정비사는 미국 해군에서 제대한 사람들을 고용해서 운용하고 있다.
또한 돈 많은 서구 국가등에 고용된 용병들은 장비나 제대로 된 보급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가난한 아프리카 국가 등에 고용될 경우 물론 그런 건 없고 본인이 알아서 다 챙겨야 한다. 그 경우에는 급료도 매우 짜서 그 돈을 가지고는 본국으로 돌아와서 넉넉하게 생활하는 것은 힘든 경우가 많다고 한다. 단, 전투는 물론 고용주측의 군대 양성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유능하거나, 다이아몬드 광산이나 금광 등을 둘러싼 분쟁일 경우엔 이들보단 훨씬 많은 급료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만큼 상대해야 할 적들이 많고 강하기 때문에 무사히 고향에 돌아갈 확률은 그만큼 떨어질 것이라는 게 문제이다.
현대에는 다른 나라 정부군이나 특수부대가 정체를 숨기고 내전지역에 용병으로 참전하기도 한다. 사실 정식 참전의 부담을 지기 싫어하는 현대 열강들의 주된 무력개입 수단 중 하나로, 몇몇 사례는 확실히 드러났지만 공식적으로는 정부군이라는 증거가 없다. 이스라엘군이 앙골라 내전에 용병으로 참전했다든지. 시리아 내전과 이라크 내전의 경우 미국 특수부대가 쿠르드자치정부 무장조직인 페쉬메르가나 YPJ의 국기 패치를 성조기 대신 걸고 겉보기엔 용병인 것처럼 참전하는 경우도 목격되고 있다. 이란 혁명수비대 역시 이런 방식으로 시아파 민병대들 사이에서 목격되는 사례가 많다. 러시아의 바그너 그룹도 사실상 러시아 스페츠나츠 대원들이 소속만 형식적으로 바꾼 것이라는 심증이 높다.
그 밖에 타카베 마사키(高部正樹)라는 사람이 항공자위대 출신으로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첫 용병 생활을 시작한 이후 1990년대에 미얀마 민족분쟁(카렌 민족해방군), 보스니아 내전(크로아티아) 등에 참여했다가 2007년에 은퇴했다. 일본 밀리터리 창작물에서 용병을 낭만적으로 묘사하게 된 건 이 사람의 일대기나 회고록 등이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돈바스 전쟁과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도 양측 용병들이 많이 참전한 것으로 보인다. 2023년 6월에는 바그너 그룹이 바그너 그룹 반란을 일으키며 역시나 과도한 무력을 가진 사병 또는 용병 집단을 국가가 지나치게 밀어줬을 때 발생하는 기형적인 문제점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6. 용병 목록
- 고중세의 용병
- 다윗 : 사울에게 쫒겨나 이스라엘 남단에서 용병단을 운영하다가[63] 사울 사후에 이스라엘을 접수하여 왕이 되었다.
- 욤스비킹
- 바랑인 친위대
- 노르만 기사
- 루티에[64]
- 제노바 쇠뇌병
- 카탈루냐 용병[65]
- 스위스 용병 - 스위스 근위대
- 헤센 용병대
- 프리랜서
- 란츠크네히트
- 콘도티에리 - 이탈리아의 용병단의 대장들로, 가장 유명한 인물로는 밀라노 공국의 상속녀와 결혼해 공작 작위를 꿰찬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있다. 그외 알렉산더 파르네제도 유명한 인물이다.
- 사이카슈
- 아부레모노(溢物)[66]
- 반데 네레: 이탈리아의 용병 대장인 루도비코 디 지오반니 데 메디치(Ludovico di Giovanni de Medici)가 1517년에 만든 용병 부대.#
- 묵자 -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로 많이 알려졌지만, 강력한 군사기술을 보유한 용병대를 만들어 운영한 특이한 이력이 있다. 전쟁을 일으킨 나라를 물리쳐 평화를 지킨다는 것을 목표로 하여 각지에 사람을 보내 방어전을 펼쳤다. <묵공>이라는 만화에서도 이를 제법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 갤로글라스: 스코틀랜드 북부의 하이랜드와 서부의 헤브리디스 제도에서 아일랜드로 온 용병들이었다. 비디오 게임 토탈 워: 미디블2에서 아일랜드나 스코틀랜드에서 고용할 수 있는 용병 부대가 바로 이들#.
- 근현대의 용병
7. 창작물
자세한 내용은 용병/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8. 같이보기
[1] 중국어[2] 일어[3] 파생어들이 가장 많은데, Mercenario(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이탈리아어), Mercenaire(프랑스어), Mercenar(루마니아어)등이 있다. 최근엔 Merc라는 약칭으로 부르기도 한다.[4] 물론 이 경계는 상황에 따라 모호해지기도 한다. 가령 중근세에는 헤센 병단처럼 군주의 직속 부대이나 해외에 용병으로 투입되는 경우가 많았고, 현대에도 어떤 국가들의 경우 자국의 이익을 위해 분쟁지대에 용병으로 투입되기도 한다.[5] 그렇게 한 진짜 이유는 페르시아의 대군을 그리스가 물리친 이후, 페르시아의 지배층들이 그리스 군사가 자기네 백성들보다 더 용감하다고 여겨서였다. 보다 자세한 사항은 아나바시스 항목을 참조바람.[6] 이는 카르타고에서 시민권자들이 적어 시민권자 하나하나를 아껴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포에니 전쟁 이전 시라쿠사와의 전쟁에서 수많은 시민병을 잃었던 것도 용병 의존도를 높이는 데 한 몫 했다.[7] 국가재정의 악화, 인구의 감소로 인해 종전과 같은 직업군인 체제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게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8] 게르만 관습법 시절부터 '40번의 밤이 지나는 동안' 으로 전해진 것이다.[9] 혹은, 그냥 Comapny라고 불렀다. 어원적으로는 '함께'라는 의미의 접두어 com + '빵'이라는 의미의 어간 pan 으로 이뤄진 것으로, 함께 빵을 먹는 사람들, 즉 동료나 동업자를 뜻한다.[10] 다만, 21세기 현대 국가들은 기본적으로 징병 가능한 성인 남성 인구를 전부 유사시 징병 대상으로 군역부에 기록해 관리하기 때문에, 21세기판 자유부대란 보통 퇴역병으로 구성되며 따라서 21 세기의 용병 사업은 소위 PMC, PIC라 부르는 군사 자문업을 최고로 치고, 전장에서 직접 인력으로 갈려나가는 고전적 유형의 용병 사업은 막장 국가 출신이라 다른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저급한 용병업으로 취급되고 있으며 운용하는 국가 또한 사우디 아라비아 같이 주변 지역의 정세가 극도로 불안정해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기 어려운 곳들로 한정되고있다.[11] 화이트 컴퍼니, 그레이트 컴퍼니 등.[12] 애초에 스위스 용병대나 헤센 용병대 같이 국가적으로 관리되는 용병대들은 자유 부대라고 하지 않는다.[13] 간단히 말해 '단두대 매치'에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이 용병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이다. 총력전 상황의 경우 기본적으로 단두대 매치를 깔고 들어가는 것은 물론 애초에 정부 통제를 벗어난 "자유 인력"이 돌아다닐 상황이 아니기에 당연히 자유 부대를 통한 용병 사업이 무용해진다. 전 지구적 단두대 매치를 2번이나 해서 더 이상 단두대 매치격 전쟁을 아무도 하고 싶어하지 않게 된 요즘들어 오히려 용병 사업이 부활한 것엔 다 이유가 있다.[14] 안나 콤니니의 알렉시아스에 따르면, 바랑인 친위대는 제국 토착 엘리트 병사들과 비견될 정도로 높은 충성심과 용맹함을 가지고 있으며, 황제 수호가 대대로 물려받은 사명이라고 생각하여 회유하기 몹시 어려우니 일찌감찌 그런 생각은 포기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알렉시오스 1세는 바랑인 친위대를 피해 옆 성벽에 있던 독일 용병을 회유하여 수도에 입성하는 방식으로 니키포로스 3세를 축출하고 제위에 올랐다.[15] 이는 대부분의 용병이 외국 출신이기에 해당 국가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상대적으로 무관했기 때문에 나온 이야기이다. 현대와 같은 세련된 행정기술을 가진 것도 아닌 근대 이전, 국내에서 징병된 군대는 이렇게 저렇게 국내의 정치적 유력세력과 연줄을 가지는 경우가 많았고, 각 부대의 지휘권 역시 이러한 연줄에서 자유롭기 힘들었다. 따라서 정치적 대립 상황이 발생할 경우 토착 병력들은 그 갈등 구조에서 한쪽 편을 들어버릴 가능성이 높았던 것. 하지만 외국 출신 용병은 해당 국가의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기에 고용주(왕이나 황제)에게만 충성할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16] 군주론 12장 참조.[17] 때문에 용병이 아닌 시민병들이 반란을 일으켜는 경우도 꽤 많았다.[18] 창기병 한 명마다 여러 수행원과 보조원이 붙었기 때문에 정규 랜스 하나면 6명 정도로 이뤄진 기병 분대가 구성되었다.[19] 이러한 자유계약 용병을 지칭하는 단어가 오늘날에 와서는 계약직 노동자를 지칭하는 단어가 된 프리랜서(freelancer)이다.[20] 이때 르네 데카르트가 네덜란드에서 마우리츠 공의 휘하에 용병으로 있었다.[21] 입지전적인 용병이라면 단연 발렌슈타인이 꼽힌다.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는 사생아로 태어나기는 했지만 부친부터가 당대의 유명한 용병대장이었고, 그 영향력으로 어린 시절에 나폴리에서 후작 작위까지 인정받았다. 그가 밀라노 공작이 된 것도 전임 공작이 후사 없이 사망한 틈을 노린 공화국을 밀어버린 결과였다. 이에 비해서 용병과는 아무 상관없는 하급귀족으로 시작한 발렌슈타인은 운 좋게 부유한 과부와 결혼해서 돈을 번 이후로는 바닥부터 용병대를 조직하고 황제와 딜을 하고, 당대 최강국들과 전쟁을 벌였다.[22] 그러나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을 용병으로 볼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오직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 한테만 충성을 바쳤고, 보상도 돈이 아니라 영지와 지위로 받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의 공식 직함은 용병대장 따위가 아니라 제국군 대원수 겸 프리드란트 공작 겸 메클렌부르크 공작이였다. 사비를 털어서 황제의 재정 지원을 거의 안 받으면서 활동한 발렌슈타인의 모습은 자신의 주군과 이권을 위하여 싸우는 제후에 훨씬 가깝다. 실제로 동시대 사람들은 발렌슈타인을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이자 제국군 총사령관으로 봤지 용병으로 보진 않았다. 이 사람은 구스타브 2세 아돌프와 함께 17세기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되었을지도 모를 인물로 거론되는 수준이다.[23] 임진왜란 당시 대마도 도주는 병력 5,000명을 동원했는데, 이 수치는 당시 대마도에서 절대 뽑아낼 수 없는 숫자이다. 당장 행주대첩 당시 전라도 순찰사였던 권율 휘하의 병력이 3,000여 명이었는데, 아무리 일본이 조선보다 평균적으로 병력 수가 많은 경향이 있다고는 해도 대마도같은 작고 척박한 땅에서 그 정도 병력을 뽑아내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즉 대마도 도주는 본토에서 아시가루를 고용해 온 것이다.[24] 리골은 말레이반도 동안에 위치한 곳으로, 전략적 요충지이기는 했으나 동시에 국경지대였기 때문에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한 마디로 벽지로 쫓아낸 것[25] 야마다 나가마사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타이밍이 우연찮게 들어맞았을 뿐 그냥 자연스럽게 죽었다는 설, 시월라원이 그를 궁중에 초청하여 연회를 연 뒤 독살했다는 설, 반란을 진압하는 도중 입은 상처에 고약을 발랐는데 그 고약을 만든 사람이 시월라원의 사람이라 독이 섞여 있었다는 설 등이 있다. 단 독살설은 정설은 아니다.[26] '군략이나 군사, 장비 모두 서양에 떨어진 건 하나도 없었다. 총기들도 자체적으로 개발하고 화약도 자체 수급하니 이걸 못 만들게 막을 수도 없다'라고 하면서 서술했다. 사실 무굴 제국은 유럽과 교류를 많이하였고 화약무기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화약무기로 무장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무굴 제국의 정복왕인 아우랑제브만 해도 영국과 프랑스에서 무기 기술자들까지 초빙해서 화약무기를 도입하고 개발했다.[27] 유비가 한때 객장 신세였던 것으로 유명하다.[28] 타 민족을 도왔다가 토사구팽을 당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29] 무조건 중립 포지션이라 그러한 타격이 적은 스위스 용병 같은 경우는 여전히 잘 싸웠다.[30] 종교 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의 지지자인 헤센 방백 필리프 1세는 1567년 죽으면서 네 아들들에게 헤센을 분할 상속해 헤센 방백국이 넷으로 갈라졌다. 이 중 차남의 마르부르크와 3남의 라인펠스는 헤셀카셀로 합쳐져 최종적으로는 헤센카셀 방백국과 헤센다름슈타트 방백국만 살아남았다. 용병업은 헤센카셀 방백국의 이야기지, 헤센다름슈타트 방백국과 그 후신인 헤센 대공국과는 무관하다.[31] 헤센 병사는 한 달 급료로 소 한 마리나 돼지 두 마리를 살 수 있었으며 이는 당시 일반적인 농민의 수입보다 훨씬 많았다.출처 하지만 지원병이 아니라 무려 24년의 징병제라는 근본적인 한계 때문에 미국에 간 헤센인 중 상당수는 농지와 시민권을 준다는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미국에 정착했다.[32] 250 탈러 이상 재산 보유자 및 기술자 등 필수직은 면제.[33] 슬리피 할로우에 나오는 목 없는 기사의 정체와 어새신 크리드 3에서 나오는 양측 특수병인 헤센 병사가 바로 이들이다. 물론 게임과 달리 현실에서는 미국측이 공식적으로 헤센병 부대를 고용하지는 않았지만, 이들에게 미국의 차고 넘치는 빈 땅을 준다고 꼬드겨 탈영과 해산을 종용하기도 하였으며 실제로 미 대륙의회에서는 헤센 병사들이 미군 쪽으로 전향하는 대가로 50 에이커의 토지와 시민권을 제공하기도 하였다.[34] 헤센카셀 방백국의 영주로는 빌헬름 9세지만 헤센카셀이 헤센 선제후국이 된 뒤로는 빌헬름 1세(초대)이다.[35] 현대 용병전쟁의 대표라고 보는 로디지아 내전에 참가한 로디지아군이 대표적인데, 정확히는 로디지아군의 일부 병력이 '의용병' 형식으로 참전한 케이스가 대부분이며 진짜 용병은 몇 되지 않았다. 과거에서부터 밀덕계에서 높이 평가받긴 하나, 당시 로디지아의 상황과 이후 행동을 보면 단순히 민주주의적으로 결정된 의사결정에 반대하며 군사 반란을 일으킨 쿠데타 정권의 군대일 뿐이다. 이들은 로디지아가 붕괴된 이후 아파르트헤이트를 시행 중이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몰려갔다.[36] 제5 코만도의 이야기를 다룬 The Wild Geese(국내 제목: 지옥의 특전대)라는 영화가 1978년에 개봉하기도 했으며 마이크 호어가 직접 기술고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37] 로저 "르네" 폴크스는 자도빌 포위작전 영화에서 UN 아일랜드군과 대치하는 용병 부대로 등장한다.[38] 벨기에 출신의 장 "블랙 잭" 슈람은 영화 Mister Bob(2011)과 자도빌 포위작전에서 블랙 잭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39] 만일 어떤 용병단의 병사가 비겁한 모습을 보이거나 계약상에 없는 민간인 약탈이나 학살을 벌인 경우엔 해당 용병단이 자체적으로 처벌을 가했다.[40] 루이 16세가 정규군을 믿을 수 없어 고용한 용병들로, 프랑스 혁명 당시 다른 정규군은 모두 도망갔지만 이들만은 여전히 남아서 자리를 지켰다. 프랑스의 왕이자 고용주였던 루이 16세는 대세가 기울었음을 깨닫고 "그대들은 임무를 다했으니 철수해도 좋다."라고 했고 무장 시민들도 같은 가난한 월급쟁이 신세인 이들에게 동정적이었으니 물러서도 상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스위스 용병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 성난 수만 명의 시민들을 막다가 단 한명도 남김없이 죽었다. 당연히 정예 전투원들이였던만큼 이들과 충돌한 시민군의 피해도 커서 시민들의 화를 돋궈 시신도 처참하게 모욕당했는데 시신에서 발견된 편지에 따르면 물러서는 것 자체는 계약 위반이 아니지만 고용주를 포기하고 빠진 것 자체로 자손들이 비겁자의 후손으로 낙인찍혀 용병일을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승산이 전혀 없음을 알지만 여기서 죽을 수밖에 없다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스위스의 루체른에 있는, 부르봉 왕조의 문장인 백합이 그려진 방패를 껴안고 죽어가는 사자의 모습을 묘사한 '빈사의 사자상'은 이들을 표현한 것이다. 물론 이처럼 고용주가 계약 종료를 선언했음에도 남아서 싸운 것은 스위스 용병으로선 이례적인 일이긴 하다.[41] 이들은 고용주(황제) 개인이 아닌 황제 직위에 충성했기 때문에 기존 황제가 사망하거나 폐위되면 즉시 새로운 황제에게 충성했다.[42] 블랙워터 사는 4명의 용병을 작전지역으로 보내면서, 제대로 된 방탄차량은 커녕, 지도조차 주지 않았다. 그래서 일반 지프를 타고 목표지역의 정문을 찾아서 수차례나 빙빙 돌다가 수상하다는 것이 발각당해서 제압당했다. 더구나 이 사건의 경우는 알고 봤더니 블랙워터가 받은 다음에 하위 용병 단체에 다시 하도급을 주면서 용병들이 결국 총알받이로 내몰린 케이스라서, 갑을병정 놀이는 용병이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엄연히 죽을 수도 있지만 살 수도 있는 전투임무를 수행하러 들어온 용병들을 100% 죽는 자살돌격 임무에 보낸 거나 마찬가지여서 4명의 유가족들이 나중에 블랙워터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내기도 했다.[43] 실제로 이라크 전쟁에서 다수의 용병이 전사했고,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는 아예 용병 전사자가 미군 전사자보다 오히려 더 많았다.[44] 여기서 도적은 용병을 일컫는다.[45] 그런데 이는 마키아벨리가 왕들의 신임을 얻어 취업을 하기 위해 시민군을 지나치게 밀어주고 나머지 방식들(용병)은 다 쓰레기다 라고 주장한 것이기 때문에 어느정도 걸러들어야 한다. 자세한 것은 군주론에 나와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가 나름대로 용병의 해악을 대한 구체적 사례를 언급한 것을 보면 지나칠지언정 일리가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다.[46] 다만, 시민병이나 징집병 일부는 때로는 용병들보다 심한 경우도 가끔씩은 생기곤 했다. 대표적으로 마피아 정치를 하며 귀족들과도 패싸움을 벌이던 고대 로마의 시민병들의 잔인함(적의 시체를 잘 매장해 주는 대신 팔다리를 썰어댔다)이 용병과 용병 생활에 익숙한 그리스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시민군이라고 할 수 있는 나치 독일군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상습적으로 민간인 및 포로 학살과 대규모 약탈과 강간을 했다는 점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더구나 프랑스 민중들 역시 영국 귀족들보다 식민지를 가혹하게 대우하였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예외의 사례이다. 대부분의 시민병/징집병들은 용병들보다 더 잘 통제됐고 전쟁범죄도 더 적었다.[47] 다만 잔혹행위를 심심하면 저지르던 용병들은 원래부터 그런 인간들로 유명한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 않은 용병들의 경우는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런 행위를 어이없이 보기도 했다. 그냥 전쟁을 잘하던 인간들 중에 그런 인간들이 많아서 좋지 않은 이미지를 얻었을 뿐이다.[48] 전쟁보다 학살약탈강간 같은 자신의 욕망을 마음대로 충족시켰다.[49] 귀족들의 군대도 학살, 약탈을 했지만 백성들을 징집해서 만든 군대도 마찬가지거나 더 심해서 같은 백성들에게도 딱히 신뢰를 받지 못하였고 그래서 맨날 귀족들에게 패배했다.[50] https://www.quora.com/What-happened-to-disabled-people-in-the-Soviet-Union/answer/Misha-Firer?ch=10&oid=278035111&share=edeab9dc&srid=6Luzi&target_type=answer 소련 참전용사들의 비참한 최후와 스레브레니차 학살, 중동과 동남아에서 발생한 끔찍한 혼란은 민중이 원하고 선택한 결과였다.[51] 스위스인들도 경제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데려가서 대우하기도 했고 그 결과로 산업이 발전했다.[52] 나폴레옹의 야만성을 기존 귀족들은 외국은 물론 프랑스에서부터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53] 이 문제는 블랙워터가 특히 네이비 씰 출신이 많아서 심각하다. 그린베레 같은 경우 현지 우호 세력을 만드는 민사작전 등을 한다. 이는 겉으로 보이는 성과는 적지만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네이비 씰은 그냥 가서 다 때려 부수는 직접 타격을 많이 해서 눈에 보이는 전과는 많지만 민사 개념이 없어 적을 양산한다.[54]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은 이전부터 러시아의 상류층에게 바그너 그룹에 대한 지원을 자제해달라는 부탁을 공공연하게 했다고 한다. 정작 본인도 바그너 그룹을 견제한다는 핑계로 민간군사기업을 설립했다는 건 아이러니하지만.[55] 이러면 사상자 통계에서 빠져나기 때문에 미국 같이 정치가 중요한 나라들에게 매력적이고, 회사의 입장으로서도 일이 잘못되면 민간인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책임을 회피 할 수 있다. 그 예로 PMC가 대량학살을 해도 법적으로 별 다른 처벌을 받지 않는 것도 이런 특수한 민간인을 처벌할 강력한 법이 없다.[56] 실제 조항에는 없으며, 임의로 강조 표시를 했다. 실제로 용병의 판정에 있어 '사적 이익'은 아주 중요한 판단 요소 중 하나이다.[57] UN 체제 이후 그 어떠한 사유로도 무력을 이용한 위협이나 공격은 금지되어 있고, 부득이하게 전쟁이 터졌을 때 이를 가능한 최소한의 피해로 끝내기 위해 공격당한 국가의 무력 행사를 조건부로 허용하는 것이다. (필요성의 원칙, 비례성의 원칙, 마르텐스 조항 등) 그러니 '사적 이득을 위해' 참전하지 않아도 될 전쟁에 뛰어드는 용병은 정당한 교전권을 가진 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58] 물론 용병들이라고 민간인을 닥치고 학살하거나 강간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정도로 인성에 문제가 있는 자들은 오히려 미군보다 더 엄격하게 지원자를 선별하는 PMC에서 절대로 뽑지 않는다. 군법의 적용을 받지 않더라도 부득이한 사고가 아닌 용병들 개인의 문제로 사고가 계속 터지면 계약 유지에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전장에서 침착성을 유지하고 민간인이 휘말리지 않게 잘 처리할 확률은 제대로 고용했다는 전제하에 용병들이 미군보다 더 낫다. 하지만 이들도 결국 인간인지라 이성을 영원히 유지할 수는 없고, 대부분의 사고는 악에 받친 채로 죽기살기로 반군과 싸우다가 길 가던 민간인이 피해를 입거나 게릴라전으로 다수의 동료를 잃고 본인도 죽을 뻔해 신경이 곤두선 상황에서 적대적인 민간인에게 돌을 맞았다가 결국 리미터가 풀려서 닥치고 당겨버리거나 하는 것인데 미군은 정상참작 사유가 있어도 처벌받지만 용병은 전시국제법의 적용을 받지 않기 때문에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이다. 미 본토에서 기소하려 해도 증거도 부족하고 엄벌을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로 무차별 양민학살 등 스케일이 너무 크지 않으면 덮어버린다.[59] 똑같은 용병 기업에서 똑같은 인물을 파견했다고 해도 치안이 정상적인 곳에서는 그냥 경비원이나 경호원이라는 직함을 받게 된다.[60] 용병의 고용 주체는 국가와 같은 거대한 세력인 경우가 많고, 이런 큰 세력은 어느 정도 세력 손실을 입더라도 쉽게 멸망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61] 말하자면, 용병 전통이 있는 마을이나 부족등의 단위로 경력자들이 마을의 젊은이들에게 노하우를 전수하고, 이 단위로 부대를 이루어 계약을 맺고 참전하는 형태였다.[62] 1998~2000년 사이 벌어진 전쟁. 양측의 국경 문제가 무력 충돌로 번진 결과인데 둘 다 가난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에 전투 양상은 화력과 기갑전력이 총동원된 대공세가 아니라 어설픈 포격을 등에 업고 보병이 투입되는 한국 전쟁 초기에나 볼 법한 형태의 전투를 치렀다. 사망 및 실종자가 수만 명에 달했지만 다만 전선 쟁탈전 위주였기에 민간인 피해는 크지 않다.[63] 이때 다윗은 이스라엘의 적인 블레셋인들을 위해서 싸우는 용병대장 노릇을 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는 이 무렵 다윗의 행적에 대해 약간 얼버무리고 있다.[64]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싸운 백년전쟁 때,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용병들. 주로 약탈을 노리고 참전했기 때문에 약탈을 하는 입장인 잉글랜드의 편에 서서 싸웠다. 병사들 개개인은 잉글랜드인, 프랑스인, 이탈리아인, 독일인 등 다양한 출신이었으나 지휘관들은 대부분 잉글랜드인들이었다. 이들은 농민과 교회를 상대로 무자비한 살인과 강도와 강간을 저질렀으며, 이들의 포악함에 질린 프랑스 왕실은 이탈리아나 카스티야 같은 다른 나라로 보내버리려고 했으나 제대로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의 횡포로 인해 프랑스인들 사이에서는 잉글랜드에 대한 적개심이 높아졌으며, 결국 백년전쟁에서 프랑스가 잉글랜드를 몰아내는 계기로 작용하였다.[65] 이름처럼 오늘날 스페인 동부 카탈루냐 지역 출신들로 이루어진 용병 부대로 원래는 시칠리아를 지배하던 아라곤 왕조가 북아프리카 원정을 하러 만들었는데, 원정 계획이 취소되면서 실업자 신세가 되었다가 전직 성당기사단 출신의 용병 대장인 루지에로가 시칠리아를 방문하자, 그를 지도자로 추대하여 동로마 제국과 용병 계약을 하여 동로마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이스탄불)로 이주했다. 이들은 매우 용맹스러워서 동로마를 위협하던 소아시아의 투르크족들을 크게 무찔렀으나, 너무 잔인하고 탐욕스러워서 동로마 주민들을 마구 약탈하고 심지어 동로마 황제를 위협하여 급료를 뜯어냈으나 만족하지 못하고 영토까지 달라고 윽박지르는 바람에 동로마의 반발을 사서 결국 동로마와 싸움이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루지에로가 죽는 바람에 동로마 영토를 돌아다니며 미친듯이 살육과 약탈과 방화를 저지르다가 남쪽의 도시인 아테네로 달아나 그곳에 아테네 공국을 세워 지배하던 프랑스인 귀족들을 죽여 없애고 80년 동안 아테네를 지배하였다.[66] 이들은 아부레모노토모(溢物共)라고도 부르는데, 14세기 일본의 남북조시대 무렵에 정해진 주인이나 영지가 없이 전쟁터를 떠돌아다니면서 난폭한 행동을 일삼았던 일본의 무사들이었다. 1370년에 나온 일본의 문헌인 태평기에 의하면, 이들 아부레모노들이 수천 척의 배를 타고 원나라와 고려의 여러 항구로 쳐들어가 명주(明州)와 복주(福州)의 재보를 빼앗고, 관청과 사원을 불태웠지만 원나라와 삼한(三韓: 고려)의 관리와 백성들이 아부레모노를 막지 못해 포구와 가까운 수십 개 지방이 모두 사람들이 못 살게 되어 황폐해졌다고 한다. 즉, 이 아부레모노들이 바로 고려말 왜구들이었던 것이다.[67] 로디지아군이 용병 활동을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고용한 용병대가 유명하다.[68] 시에라리온 내전을 포함한 아프리카 국가의 내전에서 활동한 최초의 민간군사기업. 현대의 민간군사기업들과는 규모나 합법성 등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다[69] 상술한 로디지아군이 고용했던 용병. 5코만도로도 불린다[70] 튀르키예 정부의 의도로 튀르키예군 대신 파병될 용병으로 고용되어 리비아,아제르바이잔 등에서 활동했다.[71] 러시아의 용병조직. 시리아, 리비아, 돈바스, 수단, 말리 등 곳곳에서 활동을 하며 전직 스페츠나츠 등으로 이루어진 PMC를 표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푸틴의 개인 사병과 다름없는 행보로 러시아의 이너서클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