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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대관식을 받은 적이 없는 로마왕이지만 사실상 황제였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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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왕조 제8대 황제 페르디난트 2세 Ferdinand II. | |||
<colbgcolor=#ffcc20><colcolor=black> 제호 | 황제 페르디난트 2세 Kaiser Ferdinand II. | ||
출생 | 1578년 7월 9일 | ||
오스트리아 대공국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그라츠 | |||
사망 | 1637년 2월 15일 (향년 58세) | ||
오스트리아 대공국 빈 | |||
재위기간 | 신성 로마 황제, 로마왕 | ||
1619년 8월 28일 ~ 1637년 2월 15일 | |||
오스트리아 대공 | |||
1619년 3월 20일 ~ 1637년 2월 15일 | |||
보헤미아 국왕 | |||
1617년 6월 5일 ~ 1637년 2월 15일 | |||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국왕 | |||
1618년 7월 1일 ~ 1637년 2월 15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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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오노라 곤차가 (1622년 결혼) | |||
자녀 | 크리스티네, 카를, 요한 카를, 페르디난트 3세, 마리아 안나, 체칠리아 레나타[1], 레오폴트 빌헬름 | ||
아버지 | 내지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 2세[2] | ||
어머니 |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 | ||
형제 | 안나, 마리아 크리스티나, 카타리나 레나타, 엘리자베트, 카를, 그레고리아 막시밀리아나, 엘레오노레, 막시밀리안 에른스트, 마르가레테, 레오폴트 5세, 마리아 막달레나, 콘스탄체, 카를 | ||
종교 | 가톨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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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 보헤미아의 왕,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왕이다. 오스트리아 대공으로서는 페르디난트 3세이다.[3]재위 기간을 30년 전쟁으로 보냈다. 사실 존재 자체가 30년 전쟁의 방아쇠에 가까운 인물. 4차례를 넘는 30년 전쟁의 진행 상황이 이 사람의 고집과 연관되어 있다. 어쩌다 승리를 많이 해보았으나, 사실 페르디난트 2세 본인의 능력은 범재 정도였고 그보다는 당시 가톨릭 동맹에 워낙에 걸출한 인물인 제국군 최고의 충신이자 명장인 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 풍운아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 30년 전쟁 후기 최고의 명장 페르난도 데 아우스트리아 등의 유능한 인재를 막후조종하는 배후자로서의 능력이 탁월했다. 황제위를 얻어낸 인물답게 정치력은 말이 안 될 정도였는데 모든 국가는 이 배후조종자 황제가 한참 동안이나 재상이나 궁중의 다른, 위에 언급된 유능한 인재에게 조종당하는 꼭두각시왕이라고 착각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들이 사망하자 이들을 극한까지 짜내는 재능을 가지고 있던 페르디난트 2세의 능력도 빛을 보지 못하게 되면서 구교파는 빠르게 무너졌다. 대다수는 개신교 측이 약소하거나 오합지졸의 모임이라서 이긴 전쟁이 많았다. 차례대로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 프랑스의 참전에 끼친 영향을 보면 정치력을 제외한 그의 순수한 능력은 평가가 낮다. 게다가 전투 대부분이 일신의 야망을 위해서 무작정 이뤄진 것으로, 합스부르크 가문과 본인의 야망과 군사욕심은 원대했으나 식견이 넓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페르디난트는 본인이 일으킨 전쟁과 그로 인한 피해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다. 특히 거의 모든 전쟁의 원인과 장기화, 각종 외교와 내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원인을 제공했고 암군이라 불려 마땅한 실책들을 저질렀기에 페르디난트를 암군으로 보는 경우가 가장 타당하다.
1. 개신교 강세지역의 제후로 부임할 즈음, 개신교도들에 대한 무조건 추방으로 30년 전쟁의 배경에 일조했다.
2. 첫번째 전쟁만으로도 끝날 상황에서, 종교에 따른 강압적인 영지 재분배로 경제 공황과 추가적인 반란을 유발했다.
3. 개신교 동맹이 내분으로 자멸하자 과도한 자신감을 가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 중심 제국의 확장에 대한 야망을 드러냈다. 이로 인하여, 가톨릭 국가였지만 라이벌이었던 프랑스가 개신교 편, 스페인이 가톨릭 측으로 참전하여, 20여년 동안의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기도 전에 독일은 신흥국가들로 이뤄진 개신교 동맹 따위가 아니라, 훨씬 더 막강한 가톨릭 국가들의 싸움판으로 바뀌었다.
2. 첫번째 전쟁만으로도 끝날 상황에서, 종교에 따른 강압적인 영지 재분배로 경제 공황과 추가적인 반란을 유발했다.
3. 개신교 동맹이 내분으로 자멸하자 과도한 자신감을 가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 중심 제국의 확장에 대한 야망을 드러냈다. 이로 인하여, 가톨릭 국가였지만 라이벌이었던 프랑스가 개신교 편, 스페인이 가톨릭 측으로 참전하여, 20여년 동안의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기도 전에 독일은 신흥국가들로 이뤄진 개신교 동맹 따위가 아니라, 훨씬 더 막강한 가톨릭 국가들의 싸움판으로 바뀌었다.
안그래도 저지른 다른 실책들이 많지만, 위의 3가지 만으로도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황제 개인의 야망을 위해 수많은 전쟁을 자초하여 큰 피해를 입게 한 터라 결코 좋게 보기 힘든 인물이다. 특히 페르디난트 2세는 독일 내와 주변국들에서 보면 그의 아집과 불관용으로 인해 귀족, 백성, 주변국들을 화나게 만들어[4] 저절로 반란과 침공이 일어나게 한, 정세 판단 능력이 정말로 없었던 인물이다. 다만 권좌를 차지하는 능력과 쓰고 버리기 좋은 인물을 발굴했으며 나아가 용도에 맞게 통제불가능한 상황이 되기 전에 빠르게 제거했다. 또한 위의 모든 폭정을 당시에는 꼭두각시 황제라는 오해를 이용해 자신은 하기 싫은데 권신들에게 휘둘린 것마냥 은근슬쩍 밀어붙여 해냈던, 음모와 정치는 아주 뛰어난 인물이었다.
2. 설명
2.1. 출생
1578년,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그라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내지 오스트리아(Innerösterreich)를 통치하는 페르디난트 1세의 3남 카를 2세[5]였고 어머니는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 출신의 마리아였다. 어려서부터 5년 동안 예수회가 세운 잉골슈타트 대학교[6]에서 교육을 받았다. 자연스럽게 어려서부터 예수회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7].1595년에 비로소 잉골슈타트 대학교를 졸업하고 내지 오스트리아 대공이 되었다. 루돌프 2세와 마티아스 형제의 권력 다툼에는 끼어들지 않고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마티아스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마티아스의 사촌 동생인 그가 자연스럽게 차기 황제 후보자로 떠올랐다.
2.2. 페르디난트 2세를 둘러싼 당시 독일의 딜레마
문제는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상황이었다. 유럽 중앙에 위치한 이 제국은 가톨릭 교회가 부여한 정당성에 의해서, 각 지방이 하나로 묶여있는 느슨한 봉건체제를 지니고 있었다. 교회의 권위를 빌리는 투표를 통해 제국 전체를 다스릴 수 있는 황제를 뽑고, 앞의 권위주의 체제를 통하여 온갖 정치가 통합되는 기묘한 형태였다.이런 상황에서, 하필이면 그 유명한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역도 바로 신성 로마 제국이 있는 독일 지방이었다. 즉, 수없이 많은 유력 제후 가문들의 연합 형태인 독일 지방을 묶어주던 유일한 이념이었던 가톨릭 신앙을 비판하는 세력이 하필이면 바로 그 독일 땅에서 큰 세력을 차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 전체의 황제 선출권을 지닌 선제후들도 가톨릭:프로테스탄트 선제후들이 60:40으로 갈라진[8] 일촉즉발인 상황에서, 그는 새로운 보헤미아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하지만 그가 즉위한 보헤미아 왕국의 민중 대다수는 개신교였다. 반면에 페르디난트 2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데다, 개신교도들에게 관용적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매우 싫어하며 핍박하고 몰아낸 강압적인 인물이었다. 결국, 보헤미아 지방의 개신교도 주민들은 그가 부임한다는 소식을 들은 것만으로도, 자신의 재산을 빼앗길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여 곧장 반란을 준비하기 시작했다.[9] 즉, 골수 가톨릭 신자인 페르디난트 2세가 개신교도가 많은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한다는 사건 자체만으로도, 당시 유럽 사회를 좀먹던 종교대립이 피를 흘리는 진짜 전쟁으로 바뀔 수 밖에 없는 시발점을 제공했다.
2.3. 황제 선출 및 30년 전쟁이 시작되다
1617년에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 국왕으로 선출[10]되었다는 것은 보헤미아의 개신교도들을 매우 불안하게 했다. 그동안 루돌프 2세가 내려준 칙서 덕분에 신앙의 자유를 누렸는데, 페르디난트는 이를 무시하고 자신의 영지에서 개신교도들을 몰아낸 일로 상당히 유명했던 가톨릭 신자였다. 결국 이들의 예상대로 페르디난트 2세는 보헤미아 국왕이 되었을때 개신교도의 재산을 빼앗고 그의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가차없이 처형하며[11] 개신교도들한테 가톨릭으로 회심할 것을 강요했다. 이 때문에 보헤미아에서는 페르디난트 2세에 대한 반감이 커졌으며 나중에는 과격한 개신교 상인들에 의해서 가톨릭 성직자들을 종탑에서 떨어트리는 '프라하 투척' 사건이 발생했다.[12] 앞선 사건의 충격과 함께, 보헤미아 상인과 주민들이 페르디난트 2세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여 그와 싸울 준비를 하자, 그는 제국 보수파들한테 이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해야 한다는 강경책을 주장하며 군대를 파견하면서 내전의 맞불을 지폈다.특히 마티아스 황제의 총신인 멜히오르 클레즐 추기경이 보헤미아의 반란에 미지근하게 대응하자, 1618년 페르디난트 2세는 이를 빌미로 클레즐 추기경을 투옥하여 인스브루크의 암브라스 성에 가둬버렸고, 신성 로마 제국 의회의 전권을 장악하였다. 이에 보헤미아의 개신교도들이 반발하며 1619년 8월 27일, 의회에서 페르디난트의 폐위를 선언하였으나[13] 팔츠 선제후를 제외한 다른 선제후들의 지지로 명목상으로는 보헤미아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고생
2.4. 발렌슈타인의 영입과 암살
30년 전쟁의 방아쇠는 페르디난트 2세였지만 정작 전쟁 중에는 별다른 역할을 하진 않았다. 그래도 쓰고 버릴 인물들은 잘 선택했는데, 초기 팔츠 전쟁 때는 막시밀리안과 틸리 백작을 잘 썼고, 덴마크와 스웨덴 전쟁에서 영입한 부하가 명장인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이었다. 페르디난트 2세는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을 정규군으로 계약했다. 발렌슈타인은 뛰어난 전략으로 덴마크군, 독일 내의 개신교 용병들을 죄다 몰아냈다.그다음, 1629년에 페르디난트 2세는 "열교인들이 빼앗은 교회 재산을 다시 원상회복시킨다"는 복구령(Restitutionsedikt)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이는 독일 지방들의 채무관계를 뒤틀어 제국의 경제를 혼란시켰다.[15] 더불어 페르디난트 2세는 절대군주정을 수립하기 위한 정책을 펼쳤는데 이로 인해 제국의 수많은 제후들이 페르디난트의 정책에 대해 반발했다. 특히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는 이것이 발렌슈타인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더불어, 발렌슈타인이 황제가 하사한 지휘권을 남용하며 월권행위를 일삼으면서 많은 영주들의 분노를 샀기 때문에, 그들의 불만을 견딜수 없었던 페르디난트 2세는 결국 발렌슈타인을 직위해제시켰다.
1630년에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개입했다. 제국군이 연달아 패전하고 신상로마제국 북부가 완전히 초토화되고 틸리마저 전사하자 페르디난트는 즉시 발렌슈타인을 재등용했다. 1632년 뤼첸 전투에서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전사하지만 전투가 패배로 끝나자, 발렌슈타인은 멋대로 스웨덴과 평화 협상을 진행했다. 거기에 한 발 더 나가 발렌슈타인이 페르디난트 2세를 제거하고 보헤미아의 왕이 되려는 음모를 꾸민다는 소문이 돌았고, 분노한 페르디난트 2세는 발렌슈타인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1634년에 결국 발렌슈타인은 페르디난트 2세에게 매수된 부하들한테 암살당했다. 그 뒤에 제국군은 레겐스부르크를 재점령하고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의 동생인 페르난도 추기경과 자신의 아들 페르디난트가 정예 테르시오로 스웨덴군을 물리치면서 스웨덴을 약화시켰다.
2.5. 합스부르크 제국의 야망과 프랑스의 참전
1635년, 신교도들과 프라하 평화 협정을 체결하면서 페르디난트 2세는 전쟁이 거의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프랑스 왕국의 재상 리슐리외 추기경과 루이 13세가 전쟁에 직접 개입하기로 결심했다. 이 둘은 신성 로마 제국에서 합스부르크 왕조가 더 이상 강력해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결국, 같은 가톨릭인 프랑스는 네덜란드, 스웨덴을 꼬셔 독일의 신교도를 도우러 가담했다.이전까지의 개신교 동맹이 신흥세력에 불과했다면, 프랑스와 스페인은 유럽의 진짜 강대국이었던 가톨릭 왕국들이었다. 이 덕분에, 가뜩이나 황제와 제후들간에 연속으로 전쟁을 겪었던 신성로마제국은 전쟁터가 되는 과정에서 매우 피폐해졌다. 앞선 세 차례의 전쟁에서 가톨릭 리그는 우위를 점했었지만, 4차 전쟁에서는 프랑스와 스웨덴을 감당하지 못하고 폭망한 후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은 사실상 이름만 남은 허수아비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페르디난트 2세 본인은 30년 전쟁의 끝을 보진 못하고 1637년에 사망했다.[16] 유해는 그라츠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3. 가족
3.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페르디난트 2세 (Kaiser Ferdinand II.) | <colbgcolor=#fff3e4,#331c00> 내지오스트리아 대공 카를 2세 (Karl II. von Innerösterreich) | <colbgcolor=#ffffe4,#323300> 페르디난트 1세 (Kaiser Ferdinand I.) | |
펠리페 1세 (Rey Felipe I de Castilla) | |||
후아나 1세 (Reina Juana I de Castilla) | |||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언너 (Anna Česká a Uherská) | |||
울라슬로 2세 (Vladislav II.) | |||
푸아캉달의 안 (Anne de Foix) | |||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 (Maria Anna von Bayern) | |||
바이에른 공작 알브레히트 5세 (Herzog Albrecht V. von Bayern) | |||
바이에른 공작 빌헬름 4세 (Herzog Wilhelm IV. von Bayern) | |||
바덴슈폰하임의 마리아 야코바 (Maria Jakobäa von Baden) | |||
오스트리아의 안나 (Anna of Austria) | |||
페르디난트 1세 (Kaiser Ferdinand I.) | |||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언너 (Anna Česká a Uherská) |
3.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남 | 요한 카를 대공 (Erzherzog Johann Karl) | 1605년 11월 1일 | 1619년 12월 26일 | |
2남 | 페르디난트 3세 (Ferdinand III.) | 1608년 7월 13일 | 1657년 4월 2일 | 스페인의 마리아 아나 슬하 2남 1녀[17] |
오스트리아티롤의 마리아 레오폴디네 슬하 1남 | ||||
엘레오노라 곤차가 슬하 2녀[18] | ||||
1녀 | 바이에른 선제후비 마리아 안나 (Maria Anna, Kurfürstin von Bayern) | 1610년 1월 13일 | 1665년 9월 25일 |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 슬하 2남[19] |
2녀 | 폴란드의 왕비 체칠리아 레나타 (Cäcilia Renata, Królowa Polski) | 1611년 7월 16일 | 1644년 3월 24일 |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 슬하 1남 1녀 |
3남 |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20] (Erzherzog Leopold Wilhelm von Österreich) | 1614년 1월 5일 | 1662년 11월 20일 |
모든 자녀는 첫 번째 부인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Maria Anna von Bayern)에게서 얻은 것이며, 두 번째 부인 엘레오노라 곤차가(Eleonora Gonzaga)와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4. 기타
1600년, 첫 부인인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장남과 장녀가 모두 어릴 때에 죽고 마리아 안나도 1616년에 죽었다. 3남인 페르디난트 3세가 합스부르크 왕조의 후계자가 되어 황제로 선출되었다.참고로 기상학 연구를 후원한 전적이 있다.[21]
[1]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의 왕비[2] 페르디난트 1세의 4남.[3]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2세는 본 항목의 페르디난트 2세에게는 삼촌이 된다.[4] 그 중에서 보헤미아의 개신교도들을 탄압한 것은 명백한 악행이자 폭정이다. 그의 사촌형인 마티아스처럼 개신교도들에게 관용이라도 베풀었다면 그나마 내전을 막을 수 있었지만 그의 폭정으로 내전이 일어나는 원인을 제대로 제공하였다.[5] 페르디난트 1세는 생전에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헝가리 서북부, 크로아티아를 통치했으며 형 카를 5세가 짬때린 독일 종교개혁 문제까지 처리해야 했던지라 몸이 10개라도 모자랐다. 그래서 맏아들 막시밀리안 2세에게는 오스트리아 중심부와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왕위를 물려주었고, 둘째 페르디난트에게는 티롤과 슈바벤, 알자스 일대의 외지오스트리아(Vorderösterreich)를, 막내 카를에게는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케른텐 공국, 크라인 공국, 괴르츠 백국, 트리에스트의 내지오스트리아(Innerösterreich)로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분할 상속하여 맏형 막시밀리안 2세를 보좌하도록 하였다.[6] 여기에서 가톨릭 리그의 창설자이자 30년 전쟁에서 합스부르크 왕조의 우방이 되는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을 만났다. 참고로 둘은 동문이다[7] 아버지 카를 2세는 페르디난트 1세의 영향으로 알음알음 대항종교개혁을 시행했지만, 그렇다고 프로테스탄트를 공개적으로 탄압하지도 않았다.[8] 어차피 성속 제후인 마인츠, 쾰른, 트리어 대주교는 가톨릭이었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에서 준세습하던 보헤미아 왕국도 가톨릭이었다. 작센 선제후국은 루터파였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22]과 팔츠 선제후국은 칼뱅파였다.[9] 30년 전쟁 자체가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은 개신교 자유도시 vs 국가의 통합과 군사확장에 더 신경쓰는 가톨릭 보수귀족들의 경제적인 대립에 가까운 성향도 짙었기에, 페르디난트 2세가 무작정 개신교도들의 재산을 빼앗고 쫓아냈던 경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상업도시가 많았던 해당 지역의 반란의 동기가 될 수 있었다.[10] 보헤미아 왕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는 날까지 선출제였다.[11] 특히 공개적으로 참수형에 처했는데 이는 개신교도들의 분노를 샀다.[12] 다행히도 전부 살았다고 한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내전의 시발점이 될만한 사건이라서, 보헤미아 주변은 심심하면 치고받는 전쟁터가 된다.[13] 클레즐은 가톨릭 추기경이었으나 개신교도들을 관대하게 대하며 가톨릭 교회와의 화합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그런 인물을 페르디난트가 가둔 것 자체가 개신교에 대한 관용을 보여주지 않겠다는 의미가 되었다.[14] 30년 전쟁을 끝낸 베스트팔렌 조약에 따라 바이에른은 선제후 직위와 오버팔츠의 영유를 확정지었고, 팔츠 비텔스바흐 가문도 선제후 직위를 돌려받았다. 덕분에 선제후가 7명에서 8명으로 늘어났다.[15] 사실 당시 교회 재산을 먹튀한 게 꼭 개신교도 뿐만이 아니었다. 가톨릭 교도들도 잘만 뺏어 썼다. 거기다 70년 동안 내내 있었던 일이라 얼마나 빼돌렸는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16] 사실 30년 전쟁 도중에 몇 번이나 전쟁을 끝낼 기회가 있었으나 페르디난트 2세의 고집으로 불씨가 되살아났다. 결국 신성 로마 제국은 계속된 전쟁으로 피폐해지면서 국력을 전부 소진하고 말아 종이호랑이가 되었고, 합스부르크 가문도 제국 내 영향력 행사를 포기하고 동유럽으로 확장 방향을 바꾼다.[17] 페르디난드 4세, 스페인 왕비 마리아나, 레오폴트 1세[18] 폴란드의 왕비 엘레오노라(미하우 코리부트 비시니오비에츠키의 왕비), 팔츠 선제후비 마리아 안나 요제파(요한 빌헬름의 첫번째 아내)[19] 페르디난트 마리아 등[20]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총독이었다.[21] Richard hamblyn,'Invention of clouds',Picador,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