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16 20:52:35

셜러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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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2a3e><colcolor=#ffffff> 헝가리 왕국 아르파드 왕조 제7대 국왕
셜러몬
Salamon
파일:Solomon_(Chronica_Hungarorum).jpg
출생 1053년
헝가리 왕국 세케슈페헤르바르
사망 1087년 (향년 33~34세)
동로마 제국 불가리아 테마
재위 헝가리 왕국의 왕
1063년 ~ 1074년
배우자 슈바벤의 유디트
아버지 언드라시 1세
어머니 키예프의 아나스타시야
형제 다비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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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헝가리 왕국의 제7대 국왕. 이름의 유래는 당연히 솔로몬이다.

2. 생애

1053년경 헝가리 왕국 5대 국왕 언드라시 1세키예프 루스의 대공 야로슬라프 1세의 딸인 키예프의 아나스타시야의 아들로 출생했다. 남동생으로 다비드가 있었다. 1058년, 언드라시 1세는 신성 로마 제국과 평화 협약을 체결하고, 어린 독일왕 하인리히 4세의 누이인 슈바벤의 유디트와 그를 약혼시켰다. 이후 언드라시 1세는 그를 공동 왕으로 세워 차기 후계자로 공인했다. 그러자 숙부 벨러가 반발하여 1060년 폴란드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언드라시 1세는 그해 12월 반란군을 상대로 몬슨 전투를 치렀으나 패배를 면치 못하고 사로잡힌 뒤 곧 죽었다. 그는 어머니, 남동생과 함께 헝가리를 탈출하여 신성 로마 제국으로 망명했다.

그 후 3년간 오스트리아 공국의 멜크 성에 은거했던 그는 1063년 8월 마인츠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 하인리히 4세의 모후 푸아투의 아녜스의 결정에 따라 헝가리 국왕으로 옹립되었다. 신성 로마 제후들이 헝가리로 진군할 태세를 갖추기 시작하자, 벨러 1세는 이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도모스에서 회의를 소집했다. 그런데 그해 9월 11일, 벨러 1세는 뜻밖의 사고를 당했다. 케페스 연대기에 따르면, 벨러 1세는 왕좌에 앉은 채 고심하던 중 왕좌가 돌연 부러지는 바람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수하들은 급히 왕을 들것에 실어서 세케슈페헤르바르 왕궁으로 데려가려 했지만, 왕은 키니저 강변에서 숨을 거두었다. 벨러 1세가 허망하게 죽어버리자, 그의 자식들은 폴란드로 도피했고 셜러몬은 제국군의 호위를 받으며 세케슈페헤르바르에 입성하여 헝가리 왕으로 등극했다.

그는 왕위에 오른 후 약혼자인 슈바벤의 유디트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그러나 제국군이 철수한 직후인 1063년 가을, 벨러 1세의 자식들이 폴란드군의 협조에 힘입어 헝가리를 공격했다. 여기에 벨러 1세를 심정적으로 지지하던 영주들이 가세했고, 민중들은 그가 독일의 꼭두각시 노릇할 거라 여기고 토벌군 모집에 응하지 않았다. 그는 적의 공세를 피해 신성 로마 제국의 국경과 가까운 모손 성으로 피신한 후 제국군의 지원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리하여 대규모 내전이 발발하는 듯 했으나, 죄르의 데죄 주교가 양측을 오가며 평화 협약을 맺을 것을 호소했다.

1064년 1월 20일, 분쟁 당사자들은 죄르에서 데죄 주교의 중재 아래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벨러 1세의 세 아들 게저, 라슬로, 람페르트는 셜러몬의 통치를 인정하고, 그 대가로 헝가리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공국을 맡았다. 셜러몬과 게저는 부활절을 함께 축하했고, 1064년 4월 11일 게저가 셜러몬의 머리에 왕관을 직접 씌워주었다. 그러나 당시 설러몬은 아직 11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어머니 아나스타시야와 비드 주교, 에르네 주교 등이 섭정을 맡았다.

1067년, 이스트리아변경백 울리히가 슬라보니아의 반(Ban) 드미타르 즈보니미르의 영지인 크바르네르 만 일대를 공략했다. 즈보니미르의 아내 헬레나는 벨러 1세의 딸로 게저의 여동생이었다. 그래서 셜러몬은 게저와 함께 즈보니미르를 도와서 이스트리아군을 물리치고 영지를 되찾게 해주었다. 1068년 보헤미아-폴란드 전쟁 때 게저 형제와 함께 폴란드 편에 섰고, 보헤미아 공국에서 군사 활동을 수행했다.

1068년, 오술이 지휘하는 페체네그 군대가 에르데이로 침입해 도보카(오늘날 루마니아의 더바카), 사요사르바르(오늘날 이리오아라)를 비롯한 여러 요새를 파괴하고 여러 마을을 약탈했다. 여기에 에르데이 서쪽에 있는 니르세르 일대를 초토화시켰다. 페체네그인들은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본토로 귀환했지만, 셜로몬, 게저, 라슬로가 이끄는 헝가리군이 도보카 인근 케를레시 언덕에서 매복 공격해 이들을 섬멸했다.

1071년, 페체네그인들이 발코 주 일대를 약탈했다. 셜러몬은 동로마 제국이 페체네그인들을 부추겼다고 여기고, 이에 보복하고자 게저 1세와 함께 동로마 제국의 북방 요새인 난도르페헤르바르를 포위 공격했다. 3개월간의 공성전 끝에, 난도르페헤르바르 성주 니케타시가 백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는 셜러몬이 아니라 게저에게 항복하겠다고 밝혔고, 이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불화의 씨앗이 뿌려졌다. 게다가 전리품의 분배를 놓고 양측 추종자들 사이에 분쟁이 벌어졌고, 동로마 황제가 평화 협상을 요구하는 사절을 보낼 때 셜러몬이 아닌 게저에게만 보낸 일로 인해 갈등이 더욱 심해졌다.

1072년, 셜러몬은 게저 1세와 함께 동로마 제국을 향한 공세를 재개했다. 헝가리군은 니시까지 침투해 많은 제물을 확보하고 귀환했다. 그러나 이무렵 그와 게저와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1073년 두 진영 사이에 무력 충돌이 벌어지기 직전까지 이르렀다. 그러다 주교들의 중재로 에스테르곰 성에서 협의 끝에 1073년 11월 11일부터 1074년 4월 24일까지 휴전하기로 했다. 이후 양자는 상대방을 꺾기 위해 동맹국을 찾았다. 셜러몬은 신성 로마 제국에 군대를 보내달라고 청했고, 게저는 키예프 루스, 보헤미아 공국, 폴란드 왕국으로 잇따라 사절을 보내 병력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먼저 증원군을 확보한 쪽은 셜러몬이었다. 1074년 2월 26일, 셜러몬은 독일 제후들이 보내준 병력과 함께 케메즈넬에서 게저를 습격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 게저가 바츠로 도주하자, 그는 즉시 추격했다. 그러나 게저의 남동생 라슬로와 게저의 처남인 올뮈츠 공작 오토 1세가 군대를 이끌고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1074년 3월 14일, 모교로드 전투에서 예상치 못한 적군의 급습을 받아 참패한 그는 독일과의 국경 지대에 위치한 모손 성으로 달아났고, 게저와 라슬로는 헝가리의 요충지들을 모조리 장악하고 헝가리의 수도인 세케슈페헤르바르에 입성했다.

그 후 셜러몬은 독일과 인접한 서부 일대를 다스리면서 헝가리 왕을 자처했고, 게저 1세는 헝가리의 나머지 영토를 다스렸다. 1074년 여름, 하인리히 4세가 "저를 도와주신다면 왕국 전체를 제국의 봉토로 기증하겠습니다."라는 셜러몬의 제안을 받아들여 헝가리로 진격했다. 셜러몬은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독자적으로 움직여 니트러에서 게저 1세의 군대를 격파했다. 그러나 제국군은 바츠로 이동하는 동안 청야 전술로 인해 보급난에 시달리다가 퇴각했다. 그 후 셜러몬은 신성 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으면서 게저 1세와 1077년 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라슬로 1세를 상대로 항전했다.

그러나 하인리히 4세가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의 분쟁에 얽매이면서, 그에게 돌아가는 지원은 점점 줄어들었다. 1079년 봄에 제국군을 보내주긴 했지만, 그저 셜러몬이 다스리는 영토를 지키는 역할만 수행했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라슬로 1세에게 압도당하자, 셜러몬은 1081년 봄 자신의 신변을 보장해주고 재산을 보전해주는 대가로 왕위에서 물러나 라슬로 1세의 신하가 되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1082년경 추종자들을 은밀히 끌어모아서 라슬로 1세를 축출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되어 비셰그라드 성에 연금되었다.

1083년 8월 20일, 헝가리 초대 국왕 이슈트반 1세가 가톨릭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라슬로 1세는 이 날을 기리기 위해 셜러몬을 특별 사면하기로 했다. 하지만 셜러몬은 아직 헝가리 왕관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먼저 레겐스부르크에 있던 하인리히 4세를 찾아가 자신을 복위시켜달라고 청했다. 하인리히 4세가 그레고리오 7세와의 갈등 때문에 도와줄 여력이 없었고 아내 유디트 마저 외면해버리자, 그는 다시 페체네그와 연합하기로 했다. 그는 페체네그 지도자 쿠테스크(Kutesk)에게 복위시켜준다면 트란스다뉴비아를 페체네그에게 넘겨주고 쿠테스크의 딸을 아내로 삼겠다고 약속했다.

1085년 셜러몬은 페체네그와 함께 헝가리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라슬로 1세가 반격을 개시해 문카치에서 페체네그인들을 격파했다. 셜러몬은 이후에도 페체네그인들과 함께 했고, 1087년 페체네그 지도자 첼구(Celgu)와 함께 동로마 제국의 불가리아 테마를 습격했다가 동로마 제국군의 반격으로 패한 뒤 어느 산채에 피신했다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이때 죽지 않았고 페체네그인들을 떠나 헝가리에 은밀히 들어간 뒤 수도자로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구호품을 배포하던 라슬로 1세 앞에 변장한 채 나타났다가 왕이 자신을 알아보자 달아났다. 이후 이스트리아 반도의 풀라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