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16 21:18:01

게저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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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2a3e><colcolor=#ffffff> 헝가리 왕국 아르파드 왕조 제8대 국왕
게저 1세
I. Géza
파일:게저 1세.jpg
출생 1040년
폴란드 왕국
사망 1077년 4월 25일 (향년 37세)
헝가리 왕국 세케슈페헤르바르
재위 헝가리 왕국의 왕
1074년 ~ 1077년
배우자 소피아, 쉬나데네
아버지 벨러 1세
어머니 폴란드의 리헤자
형제 라슬로 1세, 람페르트, 소피아, 에우페미아, 옐레나 리예파
자식 칼만, 알모스

1. 개요2. 생애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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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헝가리 왕국의 제8대 국왕.

2. 생애

1040년경 폴란드 왕국에 망명한 헝가리 왕자 벨러와 폴란드 국왕 미에슈코 2세의 딸 리헤자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남동생으로 라슬로 1세, 람페르트가 있었고, 여자 형제로 소피아, 에우페미아, 옐레나 리예파가 있었다. 1046년 아버지가 백부 언드라시 1세와 함께 오르세올로 페테르를 무찌른 뒤 헝가리에 들어왔고, 1060년 아버지가 폴란드의 힘을 빌려 언드라시 1세를 무찌르고 왕위에 올랐을 때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1063년 8월, 신성 로마 제국마인츠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 하인리히 4세의 모후 푸아투의 아녜스의 결정에 따라 망명한 언드라시 1세의 아들 셜러몬을 헝가리 국왕으로 세우기로 결의했다. 신성 로마 제국 제후들이 헝가리로 진군할 태세를 갖추기 시작하자, 벨러 1세는 이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도모스에서 회의를 소집했다. 그런데 그해 9월 11일, 벨러 1세는 뜻밖의 사고를 당했다. 케페스 연대기에 따르면, 벨러 1세는 왕좌에 앉은 채 고심하던 중 왕좌가 돌연 부러지는 바람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수하들은 급히 왕을 들것에 실어서 세케슈페헤르바르 왕궁으로 데려가려 했지만, 왕은 키니저 강변에서 숨을 거두었다. 벨러 1세가 허망하게 죽어버리자, 그는 동생 라슬로, 람페르트와 함께 폴란드로 도피했고, 셜러몬은 제국군의 호위를 받아 세케슈페헤르바르에 입성하여 헝가리 왕으로 등극했다.

제국군이 철수한 직후인 1063년 가을, 그는 두 형제와 함께 폴란드군의 도움을 받아 헝가리로 쳐들어갔다. 여기에 벨러 1세를 심정적으로 지지하던 영주들이 가세했고, 민중들은 셜러몬이 독일의 꼭두각시 노릇할 거라 여기고 토벌군 모집에 응하지 않았다. 셜러몬은 적의 공세를 피해 독일 국경과 가까운 모손 성으로 피신한 후 제국군의 지원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리하여 대규모 내전이 발발하는 듯 했으나, 죄르의 데죄 주교가 양측을 오가며 평화 협약을 맺을 것을 호소했다.

1064년 1월 20일, 분쟁 당사자들은 죄르에서 데죄 주교의 중재 아래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벨러 1세의 세 아들은 셜러몬의 통치를 인정하고, 그 대가로 헝가리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공국을 맡았다. 셜러몬과 게저는 부활절을 함께 축하했고, 1064년 4월 11일 게저가 셜러몬의 머리에 왕관을 직접 씌워주었다. 그러나 당시 설러몬은 아직 11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어머니 아나스타시야와 비드 주교, 에르네 주교 등이 섭정을 맡았다.

1067년, 이스트리아 변경백 울리히가 슬라보니아의 반(Ban) 드미타르 즈보니미르의 영지인 크바르네르 만 일대를 공략했다. 즈보니미르의 아내 옐레나 리예파는 게저 1세의 여동생이었다. 그래서 그는 셜러몬과 함께 즈보니미르를 도와서 이스트리아군을 물리치고 영지를 되찾게 해줬다. 1068년 보헤미아-폴란드 전쟁 때 라슬로, 셜러몬과 함께 폴란드 편에 섰고, 보헤미아 공국에서 군사 활동을 수행했다.

1068년, 오술이 지휘하는 페체네그 군대가 에르데이로 침입해 도보카(오늘날 루마니아의 더바카), 사요사르바르(오늘날 이리오아라)를 비롯한 여러 요새를 파괴하고 여러 마을을 약탈했다. 여기에 에르데이 서쪽에 있는 니르세르 일대를 초토화시켰다. 페체네그인들은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본토로 귀환했지만, 셜러몬, 게자, 라슬로가 이끄는 헝가리군이 도보카 인근 케를레시 언덕에서 매복 공격해 이들을 섬멸했다.

1071년, 페체네그인들이 발코 주 일대를 약탈했다. 셜러몬은 동로마 제국이 페체네그인들을 부추겼다고 여기고, 이에 보복하고자 게저와 함께 동로마 제국의 북방 요새인 난도르페헤르바르를 포위 공격했다. 3개월간의 공성전 끝에, 난도르페헤르바르 성주 니케타시가 백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는 셜러몬이 아니라 게저에게 항복하겠다고 밝혔고, 이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불화의 씨앗이 뿌려졌다. 게다가 전리품의 분배를 놓고 양측 추종자들 사이에 분쟁이 벌어졌고, 동로마 황제가 평화 협상을 요구하는 사절을 보낼 때 셜러몬이 아닌 게저에게만 보낸 일로 인해 갈등이 더욱 심해졌다.

1072년, 셜러몬은 게저 1세와 함께 동로마 제국을 향한 공세를 재개했다. 헝가리군은 니시까지 침투해 많은 제물을 확보하고 귀환했다. 그러나 이무렵 그와 게저와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1073년 두 진영 사이에 무력 충돌이 벌어지기 직전까지 이르렀다. 그러다 주교들의 중재로 에스테르곰 성에서 협의 끝에 1073년 11월 11일부터 1074년 4월 24일까지 휴전하기로 했다. 이후 양자는 상대방을 꺾기 위해 동맹국을 찾았다. 셜러몬은 신성 로마 제국에 군대를 보내달라고 청했고, 게저는 키예프 루스, 보헤미아, 폴란드에 잇따라 사절을 보내 병력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먼저 증원군을 확보한 쪽은 셜러몬이었다. 1074년 2월 26일, 셜러몬은 독일 제후들이 보내준 병력과 함께 케메즈넬에서 게저를 습격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 게저가 바츠로 도주하자, 그는 즉시 추격했다. 그러나 게저의 남동생 라슬로와 게저의 처남인 올뮈츠 공작 오토 1세가 군대를 이끌고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1074년 3월 14일, 모교로드 전투에서 예상치 못한 적군의 급습을 받아 참패한 그는 독일과의 국경 지대에 위치한 모손 성으로 달아났고, 게저 1세와 라슬로는 헝가리의 요충지들을 모조리 장악하고 수도 세케슈페헤르바르에 입성했다.

그 후 게저가 헝가리 왕위에 올랐지만, 셜러몬은 독일과 인접한 서부 일대를 다스리면서 진정한 헝가리 왕은 자신이라고 선포했다. 그는 셜러몬이 왕관을 가져가버렸기 때문에 대관식에 쓸 왕관이 없다는 이유로 대관식 진행을 미뤘다. 1074년 여름, 하인리히 4세가 "저를 도와주신다면 왕국 전체를 제국의 봉토로 기증하겠습니다."라는 셜러몬의 제안을 받아들여 헝가리로 진격했다. 셜러몬은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독자적으로 움직여 니트러에서 게저 1세의 군대를 격파했다. 그러나 제국군은 바츠로 이동하는 동안 청야 전술로 인해 보급난에 시달리다가 퇴각했다.

게저는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자신을 헝가리 국왕으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셜러몬과 화해하고 왕국을 양분하라는 답신을 받자, 이를 거부하고 동로마 제국과 손을 잡기로 했다. 1075년, 그는 동로마 황제 미하일 7세에게 왕관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황제는 금과 에나멜로 된 왕관을 보냈는데, 이 왕관에는 "헝가리의 신실한 왕 게저"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그는 훗날 성 이슈트반 왕관으로 불리는 이 왕관을 쓰고 비로소 대관식을 치렀다. 미하일 7세가 그에게 왕관을 보내준 것은 셀주크 제국이 아나톨리아를 집어삼키고 있고 경제는 파탄 지경에 처한 상황에서 발칸 반도 전선이라도 평온을 유지하려면 헝가리와 친해야 할 필요성이 있기도 했고, 게저가 동로마군 사령관 테오도로스 쉬나데노스의 딸 쉬나데네와 결혼했던 점도 고려되었다.

1076년 크리스마스 축하 행사 중에 게저는 헝가리 교회의 주교단 앞에서 평화를 이루기 위해 헝가리 영토의 2/3을 셜러몬에게 넘기고 나머지 1/3만 다스릴 의향이 있다고 밝했다. 그러나 평화 협상을 개시하기 전인 1077년 4월 25일에 사망했다. 일부 기록에서는 그가 명백한 중독 증세를 보이며 죽었다며 독살설을 제기했지만, 대다수 사료에서는 그가 병사했다고 밝혔다.

그는 생전에 두 번 결혼했다. 1060년대 초에 룬 백작 에모의 딸 소피아와 결혼하여 두 아들 칼만, 알모스를 낳았다. 이후 1075년 대관식 전후에 동로마 제국 사령관 테오도로스 쉬나데노스의 딸이자 니키포로스 3세의 조카딸인 쉬나데네와 재혼했다. 일루미네이션 연대기는 칼만에게 "그보다 먼저 죽은" 형제들이 있었다고 서술하지만 정확한 신상명세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사망했을 때 칼만과 알모스 모두 매우 어렸기에 동생 라슬로 1세가 대신 헝가리 왕위에 올랐다.

3. 기타

헝가리 국권의 상징인 성 이슈트반 왕관동로마 제국 양식은 황제 미하일 7세가 그에게 이슈트반 왕관을 선물하면서 등장한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