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5 18:54:36

이슈트반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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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2a3e><colcolor=#ffffff> 헝가리 왕국 아르파드 왕조 제14, 17대 국왕
이슈트반 3세
III. István
파일:III_István.jpg
출생 1147년
헝가리 왕국 세케슈페헤르바르
사망 1172년 3월 4일
헝가리 왕국 세케슈페헤르바르
재위 헝가리 왕국크로아트 왕국의 왕
1162년(1차 재위)
1163년 6월 19일 ~ 1167년(2차 재위)
헝가리 왕국의 왕
1167년 ~ 1172년 3월 4일
배우자 오스트리아의 아그네스
(1166년 결혼)
아버지 게저 2세
어머니 키예프의 에우프로시네
형제 벨러 3세, 게저, 아르파드, 엘리자베트, 오돌라, 엘레니
자녀 벨러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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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헝가리 왕국 제14, 17대 국왕. 재위기간 내내 삼촌들을 앞세운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였다.

2. 생애

1147년경 헝가리 국왕 게저 2세키예프 루스 대공 므스티슬라프 1세의 딸 에우프로시네의 장자로 출생했다. 형제로 벨러 3세, 게저, 아르파드, 엘리자베트, 오돌라, 엘레니가 있었다. 1147년 제2차 십자군 원정을 단행한 루이 7세프랑스군이 헝가리를 통과했을 때, 게저 2세는 그를 환대하면서 갓 태어난 아들의 세례식에 참석해달라고 부탁했다. 루이 7세는 기꺼이 세례식에 참석한 뒤 갓난아기의 대부가 되어주었다. 1152년 5살의 나이에 아버지의 공동 통치자로 발탁되어 후계자로 일찌감치 공인되었다. 게저 2세의 동생인 이슈트반과 라슬로는 공작에 선임되었지만, 왕위에 욕심을 내어 반기를 들었다가 곧 축출되어 동로마 제국으로 망명했다.

1162년 5월 31일 게저 2세가 사망한 뒤, 그가 헝가리의 새 국왕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 황제 마누일 1세는 자국으로 망명한 이슈트반 왕자에게 군대와 물자를 지원해 새 왕을 상대로 반기를 들게 했다. 이슈트반 왕자는 곧 자신이 헝가리 귀족들에게 인기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상대적으로 인기가 많은 형제 라슬로를 왕으로 추대했다. 헝가리 귀족들은 동로마 제국의 위세를 두려워한 데다 황제로부터 뇌물을 듬뿍 받자 라슬로를 왕으로 추대하기로 했다. 라슬로는 순식간에 세케슈페헤르바르를 공략한 뒤 에스테르곰 대주교 루카스에게 대관식을 주관하라고 요구했다. 루카스가 이를 거부하며 저주를 퍼붓자, 라슬로는 루카스를 감옥에 가두고 1162년 7월 중순 컬로처 대주교 미코의 주관하에 라슬로 2세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한편 이슈트반 3세는 지지자들과 함께 포조니로 도주했다.

라슬로는 왕위에 오른 뒤 일찍이 게저 2세가 교황과 맺었던 "교황의 동의 없이 고위 성직자를 해임하거나 이송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떠올리고 루카스를 석방했다. 그러나 루카스는 저주를 철회하지 않고 오히려 라슬로가 곧 죽을 거라고 예언했다. 라슬로는 이에 격분해 루카스를 다시 감옥에 집어넣었지만, 공교롭게도 1163년 1월 14일에 돌연 사망했다. 이후 라슬로의 추종자들은 그의 형제 이슈트반을 이슈트반 4세로 추대했다. 그러나 이슈트반 4세는 동로마 제국에 편향적인 정책을 추진했기에 헝가리 귀족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이슈트반 3세는 이 때를 틈타 영주들을 회유해 자신에게 가담시키고 독일 용병들을 모집했다.

1163년 6월 19일, 이슈트반 3세는 세케스페헤르바르에서 숙부 이슈트반 4세를 격파하고 사로잡았다. 이로써 왕위에 복귀한 그는 감옥에서 풀려난 루카스 대주교의 조언에 따라 이슈트반 4세를 석방했다. 처음에 이슈트반 4세는 신성 로마 제국으로 도주했다가 다시 동로마 제국으로 망명했고, 마누일 1세는 그를 왕으로 복위시키기 위해 헝가리에 군대를 파견했다. 이슈트반 3세는 보헤미아 국왕 블라디슬라프 2세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블라디슬라프 2세는 동로마 제국의 위세를 두려워했기에 거부했다. 이슈트반 3세는 마누일 1세에게 사절을 보내 평화 협약을 맺자고 간청했다. 이후의 협상 끝에, 그는 황제로부터 헝가리 국왕으로 인정받는 대가로 동생 벨러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인질로 보내기로 했고, 동생 벨러가 아버지 게저 2세로부터 부여받은 아파치 공국(달마티아, 크로아티아 등 헝가리 왕국의 일부 영역)을 동로마 제국이 장악하는 것을 허용하기로 했다.

마누일 1세는 이 정도면 헝가리를 약화시키고 제국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목표를 충분히 달성했다고 여기고 이슈트반 4세에게 등을 돌렸다. 이에 이슈트반 4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게 접근했고, 헝가리의 여러 성직자와 귀족들이 신성 로마 황제에게 서신을 보내 그의 종주권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이슈트반 3세는 낌새를 읽고 프리드리히 1세에게 사절을 보내 공물을 바칠 테니 개입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일단 헝가리의 상황을 지켜보기로 하고, 그의 신하들인 보헤미아 국왕 블라디슬라프 2세, 오스트리아 공작 하인리히 2세에게 헝가리를 예의주시하라고 지시했다.

1164년, 이슈트반 3세는 동로마 제국이 가져갔던 벨러 3세의 영지인 중앙 달마티아를 탈환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이슈트반 4세가 용병대를 규합해 시르미움을 공략하고 주민들의 환대를 받았다. 이슈트반 3세는 이에 맞서 보헤미아-오스트리아-할리치나의 지원군을 받고 이슈트반 4세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마누일 1세가 곧 헝가리로 진군하여 바치까지 진군하자, 보헤미아 국왕 블라디슬라프 2세는 이슈트반 3세에게 평화 협약을 맺을 것을 권고했다. 이슈트반 3세는 보헤미아가 전쟁에서 발을 빼려 하자 어쩔 수 없이 시르미움을 포기하기로 하고, 그 대신 황제가 이슈트반 4세를 지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 후 이슈트반 3세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를 받던 달마티아 해안지대를 침공해 자다르 시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그 일대를 순조롭게 공략한 뒤, 1165년 봄에 시르미움으로 쳐들어가 이슈트반 4세를 포위했다. 마누일 1세는 협약을 위반한 이슈트반 3세를 응징하려 했지만, 때마침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가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헝가리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그 대신, 이전에 이슈트반 3세를 지지했던 군주들에게 사절을 보내 헝가리 내전에서 중립을 지키도록 설득했다. 그 후 이슈트반 3세는 이슈트반 4세를 지모니 요새에 몰아넣고 포위 공격했고, 이슈트반 4세는 1165년 4월 11일 농성 도중 독살당했다.

이리하여 내전을 종식했지만, 곧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의 반란을 진압한 마누일 1세의 대대적인 공세에 직면했다. 마누일 황제가 친히 이끄는 동로마 제국군은 지모니를 순조롭게 탈환했고, 또다른 분견대는 보스니아와 달마티아로 쳐들어가 공략했다. 이때 베네치아 공화국도 동로마 제국의 편에 서서 일전에 잃어버렸던 자다르를 탈환했다. 이슈트반 3세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고 여기고 시르미움과 달마티아를 완전히 포기하는 조건하에 마누일 1세와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1166년 봄, 이슈트반 3세가 시르미움을 재차 침공해 현지 동로마군을 격파하고 지모니를 제외한 모든 시르미움 일대를 탈환했다. 마누일 1세는 즉각 3개의 분견대를 급파했다. 알렉시오스 악수흐는 이슈트반 3세의 동생 벨러 3세를 대동한 채 다뉴브 강으로 진격했고, 레온 바타체스와 요안니스 두카스가 이끄는 2개의 분견대들은 트란실바니아로 쳐들어가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이슈트반 3세는 오스트리아 공작 하인리히 2세의 중재 하에 마누일 1세와 평화 협약을 맺고, 1166년 연말에 하인리히의 딸 아그네스와 결혼했다.

1167년, 이슈트반 3세는 달마티아를 침공해 동로마 총독 니키포로스 찰루페스를 사로잡고 그 일대를 장악했다. 이에 마누일 1세는 시르미움에 군대를 파견하고 함대를 지모니에 집결시켰다. 헝가리군은 이에 맞서 독일인들을 용병으로 모집해 동로마군의 침략을 근절하려 했다. 그러나 1167년 7월 8일에 벌어진 시르미온 전투에서, 바치 백작 데네시가 이끄는 헝가리 주력군 15,000명이 안드로니코스 콘토스테파노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에게 궤멸되었다. 결국 이슈트반 3세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여기고 동로마 제국이 달마티아, 시르미온, 크로아티아를 가지는 것을 받아들였다. 여기에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비탈레 2세 미키엘와도 평화 협약을 맺고 1167년 12월 17일에 도제의 아들 니콜라오에게 조카딸 마리아를 아내로 주었다.

그 후 동로마 제국에게 더 이상 도전하지 않으면서도 독일인들에게 세제 해택을 부여해 헝가리로 이주하게 하는 등 피폐해진 국력을 회복하려 노력했다. 그러다 1172년 3월 4일에 사망했고, 에스테르곰에 안장되었다. 사망 당시 나이가 불과 25세였기에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그는 생전에 오스트리아의 아그네스를 아내로 맞이했고 1167년 아들 벨러를 낳았으나 그 해에 아들이 요절하는 불행을 겪었다. 아그네스는 그가 사망했을 때 두 번째 아기를 임신했지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오스트리아로 이송되었다. 둘째 아기는 무사히 태어났지만 이후의 운명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아그네스는 케른텐 공작 헤르만과 재혼했다. 이슈트반 3세 사후 동생 벨러 3세가 왕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