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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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cc21> 오스트리아 제국 제2대 황제 페르디난트 1세 Ferdinand I | |||
출생 | 1793년 4월 19일 | ||
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 대공국 빈 | |||
사망 | 1875년 6월 29일 (향년 82세) |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스라이타니아 보헤미아 왕국 프라하 | |||
재위기간 | 오스트리아 황제, 보헤미아 국왕,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 ||
1835년 3월 2일 ~ 1848년 12월 2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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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페르디난트 카를 레오폴트 요제프 프란츠 마르켈린 (Ferdinand Karl Leopold Joseph Franz Marcellin) | ||
아버지 | 프란츠 2세 | ||
어머니 |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테레사 공주 | ||
형제자매 | 마리 루이즈, 마리아 카롤리네, 카롤리네 루도비카, 마리아 레오폴디네, 클레멘티나, 요제프 프란츠 레오폴트, 마리아 카롤리네, 프란츠 카를, 마리아 안나, 요한 네포무크, 아말리에 테레지아 | ||
배우자 | 사보이아의 마리아 안나 공주 (1831년 결혼) | ||
종교 | 기독교 (가톨릭) | }}}}}}}}} |
1860년대의 사진[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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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 제국의 2대 황제이자 프란츠 1세(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2세)의 장남이다. 신성 로마 제국이 존속했다면 페르디난트 5세가 되었을 것이며, 실제로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및 보헤미아 국왕으로서는 페르디난드 5세(V. Ferdinánd), 페르디난트 5세(Ferdinand V.)이다.[2] 마지막으로 대관식을 치른 보헤미아 국왕이기도 하다.어릴 때 간질 때문에 고생했으며, 심할때면 하루에 20 번씩 간질이 도졌다. 성장하면서 간질 증상은 완화되었지만 거듭된 근친혼 탓으로[3] 평생 언어장애와 정신지체에 시달렸다. 더해서 뇌에 물이 차는 수두증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머리가 비정상적으로 컸다. 이 때문에 그는 재위 당시 정치적으로 실권을 갖고 있던 적이 전혀 없었다. 주로 외무장관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와 페르디난트 1세의 동생들이나 친척들이 의회를 만들어 섭정하는 식으로 통치했다.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마리아 안나를 황후로 맞아들였지만 잠자리를 가지려고 할 때마다 간질 발작을 일으켰기에 평생 동정이었고 당연히 자식도 없었다.
2. 생애
페르디난트 1세의 정신상태를 알 수 있는 일화로 어느 날 그가 평소 좋아하던 살구 페스트리(Marillenknödel)를 찾았는데 하필 살구가 수확철이 아니라 페스트리를 만들 수 없었다. 이에 그는 살구가 없다는 황실 요리사에게 "짐은 황제이니라, 짐은 페스트리를 원하노라!(Ich bin der Kaiser und ich will Knödel!)"라고 명령했다. 기본적인 사리판단도 거의 불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스페인의 바보왕 카를로스 2세와도 비교되는,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는 바보 군주.[4] 이 사람의 통치와 메테르니히의 경력을 끝장낸 1848년 혁명이 터졌을 때도 메테르니히가 불순분자들이 혁명을 일으키려 한다고 보고하자 한다는 대답이 "하지만 그거(혁명 작당질) 불법 아닌가?"나폴레옹 전쟁으로 촉발된 민족주의의 발흥과 오스트리아 제국 내 민족 문제, 정치 체제 등의 요인으로 오스트리아는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더구나 그의 재위 동안 메테르니히와 오스트리아 제국이 주도한 '빈 체제'의 와해는 점차 결정적인 것이 되었지만 메테르니히는 경찰과 검열을 통한 강압통치를 계속해 원성을 샀다. 1846년에는 명목상 독립국이던 크라쿠프 자유시의 폴란드인이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에 의해 삼분된 조국의 해방을 위해 궐기하자 다른 두 나라의 양해를 얻어 무력으로 진압, 크라쿠프를 오스트리아 영토로 병합했다.
하지만 한 번 혁명과 자유의 물결이 프랑스와 영국에서 일어나고 이탈리아 반도와 독일어권에서도 부글부글 끓고 있던 상황에서 언제까지 강압적인 반동정치가 유지될 수는 없어서 결국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을 도화선으로 그 해 3월 빈과 베를린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당시 오스트리아 내각의 주요 인물들은 모두 물러나야 했고 메테르니히는 재빨리 사직하고 영국으로 망명했다.[5] 당초 혁명의 불길에 놀란 황실은 티롤의 인스브루크로 몽진했으나 혁명세력과 협상하여 수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정부와 황실의 보수적인 자세, 혁명과 개혁에 대한 미온적이고 반동적인 입장에 분노한 시민들이 다시 봉기하자 황실은 오스트리아를 떠나 보헤미아 왕관령의 올로모우츠로 몽진했다. 1년 사이 두 차례나, 그것도 시민봉기로 일어난 혼란으로 황실이 몽진한 사건은 황권을 땅에 떨어뜨렸으며, 황실과 내각에서도 현재의 상태로는 수습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고 이미 사임하여 망명한 메테르니히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노릇이라 실질은 어쨌건 최고통치자인 황제가 책임을 지는 것으로 결정되어 1848년 12월 2일, 페르디난트 황제가 퇴위했다.
퇴위하기 전 황제는 남동생 프란츠 카를 대공(1802~1878)에게 양위했으나 형과 정신상태가 크게 다를 바 없었던 프란츠 카를 대공은 아내 조피 대공비(1805~1872)와 원로들의 권고에 따라 자신의 아들 프란츠 요제프에게 제위를 양보했다.
2.1. 퇴위 이후
퇴위한 페르디난트는 주로 보헤미아에 머물렀으며 82세로 장수한 끝에 1875년 6월 29일에 사망했다. 프라하에서는 프라하성에서 살며 적당히 늙은 전직 황제 뒷방 영감으로 지방의 명사 대접을 받았으며 본인도 프라하 생활을 마음에 들어하여 종종 산보를 나서면 친근한 이웃으로 대접받은 모양. 나중에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을 직관하기도 했다.[6]개인적인 인품도 모나지 않고 순박한 편이라 프라하 시민들은 그를 선량왕 페르디난트(Ferdinand Dobrotivý)라고 불러줬는데, 이것도 사실 당시 문맥과 어조를 생각해보면 선량왕보단 "호구"에 가까운 별명이다. 게다가 이걸 또 주워들은 빈 시민들은 여기에 독일어 말장난을 더해 선량왕 페르디난트(Ferdinand der Gütige)에서 G와 F의 위치만 살짝 바꾸어 끝장난 (혹은 볼장 다 본) 귀티난트(Gütinand der Fertige)라고 부르며 놀았다.(...)
[1] 딱 한 장 남은 사진이다.[2] 페르디난트 4세는 페르디난트 3세의 아들로 독일왕이었으나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여 동생이 레오폴트 1세로 선출되었다.[3] 프란츠 1세와 마리아 테레사는 친가와 외가 쪽으로 모두 사촌이었다. 때문에 4대조까지의 결혼이 모두 족외혼이었다면 16명의 4대조가 있어야 할 것이나, 가계도를 보면 페르디난트 1세의 4대조는 8명, 3대조는 4명에 불과하다.[4] 카를로스 2세는 신하들과 친척들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인지 아닌지 정도는 구분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항목 참조. 카를로스 2세는 페르디난트 1세의 직계조상은 아니지만 같은 가문 출신으로 혈연관계가 있다. 펠리페 1세 및 펠리페 3세가 두 사람의 공통조상이 된다. 그나마 페르디난트 1세가 카를로스 2세에 비해 좀 나았던 건 다른 형제들이 모두 요절한 카를로스와 달리 페르디난트는 동생이 잘 자라서 자손을 얻은 덕에, 황통이 끊어지는 일만은 피할 수 있었다는 점과 이런저런 신체적 및 정신적 결함이 있긴 했어도 어쨌든 장수했다는 점이다.[5] 새 황제가 즉위하고 헝가리 혁명까지 진압된 1851년 9월이 되어서야 메테르니히는 귀국하였고 1855년까지 살았다. 그는 젊은 새 황제의 조언자이나 원로로서 프란츠 요제프 1세 치세 초기의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통치체제의 유지에 일조했다.[6] 쾨니히그레츠에서 전투를 직관하기도 했는데 오스트리아 제국군의 패배를 보고 내가 지휘해도 저거보다는 잘싸우겠다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