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4 14:51:21

오타카르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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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자]: 프리드리히 2세의 자매인 마르가레테의 아들 하인리히와 프리드리히
마르가레테의 두 번째 남편 보헤미아 국왕 오타카르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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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트루드의 두 번째 남편 바덴의 헤르만
게르트루드의 세 번째 남편 로만 다닐로비치
게르트루드의 아들 바덴 변경백 프리드리히 1세가 혈연 관계를 근거로 오스트리아 공작위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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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체코의 국영방송 체코 텔레비전 방송공사가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위대한 체코인 100명을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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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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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1457E><colcolor=#FFF> 보헤미아 왕국 프르셰미슬 왕조 제5대 국왕
오타카르 2세
Otakar II
파일:오타카르 2세.jpg
제호 체코어 오타카르 2세
(Otakar II)
출생 1233년
보헤미아 왕국 므네스테츠 크랄로베
사망 1278년 8월 26일(향년 47~48세)
오스트리아 공국 마르히펠트(현재 뒤른쿠르트)
재위 모라비아 변경백국의 변경백
1247년 ~ 1278년
오스트리아 공국의 공작
1251년 ~ 1276년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의 공작
1251년 ~ 1254년
1261년 ~ 1276년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
1253년 ~ 1278년
케른텐 공국의 공작
1269년 ~ 1276년
카르니올라 변경백국의 변경백
1269년 ~ 1276년
배우자 바벤베르크의 마르가레트 (1225년 결혼 / 1261년 결혼 무효)
할리치나의 쿠니군다 (1261년 결혼)
자녀 쿤후타, 아네슈카, 바츨라프 2세, 마가레타 등
아버지 바츨라프 1세
어머니 호엔슈타우펜의 쿠니군데
형제 블라디슬라프, 보제나 체스카, 아네슈카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내치2.3. 대외 활동2.4. 몰락
3. 사후4.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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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헤미아 왕국 프르셰미슬 왕조 5대 국왕. 대공위시대를 이용해 보헤미아 왕국을 확장했으나 합스부르크 가문의 초대 로마 왕 루돌프 1세와의 정쟁에서 패사했다.

2. 생애

2.1. 초년기

1233년경 므네스테츠 크랄로베에서 보헤미아 국왕 바츨라프 1세로마 왕 필리프의 딸인 호엔슈타우펜의 쿠니군데 사이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제자매로 블라디슬라프, 보제나 체스카, 아네슈카가 있었다. 그는 일찍이 사촌인 케른텐 공작 베른하르드 2세와 오타카르 1세의 딸인 유디타의 아들인 필리프와 함께 교회에 들어가서 수도사가 될 준비를 했다. 그러다가 1247년 1월 형이자 보헤미아 왕국의 계승자이며 모라비아 변경백 및 오스트리아 공작을 역임하고 있던 블라디슬라프가 급사한 후, 그는 세속으로 나와서 아버지로부터 모라비아 변경백에 선임되었다.

당시 보헤미아 귀족들은 소수의 측근들 외에는 교류를 전혀 하지 않고 고립된 생활을 자처하면서 뇌전증과 유사한 발작을 종종 일으키곤 했던 바츨라프 1세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다. 오타카르 2세는 귀족들을 은밀히 포섭한 끝에 1248년 7월 31일 자신을 "젊은 왕"이라고 칭하며 반기를 들었다. 보헤미아 대귀족이자 대법관인 크티보르 등 보헤미아 대귀족들이 오타카르 2세를 지지했고, 프라하는 순식간에 오타카르 2세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바츨라프 1세는 자신을 추종하는 병사들을 끌어모은 뒤 프라하를 되찾으려 했지만 실패로 돌아가자 보헤미아 북서쪽으로 후퇴한 뒤 교황 인노첸시오 4세로마 왕 콘라트 4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구원은 제때 오지 않았고, 오타카르 2세는 1248년 가을 아버지를 마이센으로 밀어내고 보헤미아 전역을 장악한 뒤 자신을 보헤미아 국왕으로 칭했다.

이후 콘라트 4세와 바이에른 공작 오토 2세의 지원을 받은 바츨라프 1세는 반격을 개시했다. 리즈므부르크체코의 보레스 2세가 이끄는 바츨라프군은 모스트 인근에서 오타카르군을 격파하고 프라하를 압박했다. 이에 오타카르 2세는 보레스 2세와 협상해 자신이 "젊은 왕"이라는 칭호만 사용하고 보헤미아 왕국을 아버지와 양분하겠다고 제안했다. 보레스 2세는 이에 응하려 했지만, 아들의 반역에 잔뜩 분노한 바츨라프 1세는 이를 거부했다. 1249년, 바츨라프 1세는 본군을 이끌고 리토메르지체로 진군한 뒤 프라하를 향해 행진했다. 그해 8월 5일, 바츨라프 1세는 일부 주민이 성문을 열어준 덕분에 프라하 시에 입성했다. 오타카르 2세는 프라하 성채로 피신했지만, 포위 공격에 시달린 끝에 젊은 왕이라는 칭호를 포기하고 성을 내주는 대신 모라비아 변경백으로 돌아가는 데 동의했다. 그해 9월, 바츨라프 1세는 오타카르 2세와 반란 당시 오타카르 2세를 지원했던 자들을 티르조프 성에 초대한 뒤,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모조리 체포해 감옥에 가두었다. 오타카르 2세는 곧 사면을 받고 모라비아로 돌아갔지만, 반란의 주동자들은 감옥에 그대로 갇혀 있거나 처형되었다.

1250년 10월,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의 공작 헤르만 6세가 25세의 젊은 나이에 후계자를 두지 못한 채 급사했다. 이에 바이에른 공작 오토 2세와 헝가리 국왕 벨러 4세, 그리고 보헤미아 왕국이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오토 2세는 오스트리아로 쳐들어갔고, 벨러 4세는 슈타이어마르크로 진격하여 심각한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이에 견디지 못한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 귀족들이 보헤미아에 구원을 호소하자, 바츨라프 1세는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고, 벨러 4세는 보헤미아군과 맞붙고 싶지 않았기에 철수했다.

1251년 1월, 바츨라프 1세는 군대를 이끌고 바이에른을 침공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프라하로 돌아갔고 오타카르 2세가 군대를 지휘했다. 그는 바이에른과 보헤미아 변경 지대를 별다른 어려움 역시 약탈한 뒤 오스트리아로 방향을 돌려 바이에른군이 철수한 틈을 타 순조롭게 장악했다. 대부분의 오스트리아 귀족들은 바이에른과 헝가리에게 짓밟히느니 그에게 복종하기로 마음먹고, 1251년 12월 오스트리아 귀족 의회에서 오타카르 2세를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의 공작으로 추대했다. 그는 전임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6세의 50세된 딸 마르가레트와 결혼함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하고자 했다.

그러나 헝가리 국왕 벨러 4세와 바이에른 공작 오토 4세는 오타카르 2세의 집권을 용인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폴란드 대공 볼레스와프 5세, 갈리치아-볼히니아 국왕 다니엘 로마노비치, 오폴레 공작 브와디스와프 1세와 함께 반 보헤미아 연합을 결성했다. 여기에 교황 인노첸시오 4세와 헤르만 6세의 미망인이자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의 상속녀인 바벤베르크의 게르트루드도 연합을 지원했다. 1253년 여름, 다니엘 로마노비치, 브와디스와프 1세, 볼레스와프 5세가 이끄는 폴란드-루스 연합군이 오파바를 침공했다. 그들은 오파바를 상대로 2차례의 공성전을 벌였지만 공략에 실패했고, 후브치체를 장악하려는 시도도 실패했다. 하지만 오파바와 후브치체 주변 일대를 철저히 약탈하고 수많은 주민을 생포해 본국으로 귀환했다. 여기에 쿠만족이 모라비아를 습격했고, 헝가리군은 슈타이어마르크 남부로 진군했다.

오타카르 2세는 우선 쿠만족을 격퇴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모라비아로 진격했다. 1253년 6월 25일 올로모우츠 성문 앞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그의 군대는 격전 끝에 수천 명의 병력을 상실하고 패퇴했다. 하지만 쿠만족 역시 큰 피해를 입었고, 올로모우츠를 잠시 포위했다가 물러났다. 이후 전력을 수습한 오타카르 2세는 슈타이어마르크 남부를 장악한 뒤 모라비아로 진군한 헝가리군을 상대로 반격을 시도했지만, 벨러 4세의 군대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였던 터라 적의 보급로를 습격하는 등 유격전을 벌이는 것 외에는 군사 활동을 벌이지 못했고, 아버지로부터 별다른 지원을 받지도 못했다. 하지만 헝가리군 역시 보급로가 자주 끊기면서 굶주림에 시달렸다. 이후 교황 인노첸시오 4세의 중재하에 평화 협상이 진행되었고, 헝가리군은 모라비아에서 철수헀다.

1253년 9월 17일, 오타카르 2세는 크렘즈에서 교황 특사 벨라스코의 설득을 받아들여 홀란드 백작 빌렘 2세를 로마 왕으로 받들었다. 이후 크라쿠프 주교 파벨의 도움을 받아 볼레스와프 5세가 보헤미아 포로들을 돌려주게 하고 오스트리아에서 피해 복구에 전념하는 등 분주하게 움직이던 그는 아버지가 그 해 9월 22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보헤미아로 이동해 한 달만에 도착했고 보헤미아 귀족들로부터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그 후 1254년 5월 3일 브라티슬라바에서 벨러 4세와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오타카르 4세는 슈타이어마르크 남부를 헝가리에 양도해야 했고, 벨러 4세는 오타카르 4세가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 북부를 통치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2.2. 내치

할아버지 오타카르 1세, 아버지 바츨라프 1세가 지속적으로 추진한 독일인 이주 및 도시 개발 정책은 오타카르 2세의 치세에 정점을 찍었다. 그의 치세 동안 보헤미아, 모라비아, 실레시아, 오스트리아, 슈타이어마르크 등지에 야로메르, 타호프, 이흘라바, 브루크 안 데어 무어, 마르체그 등 30개가 넘는 도시들이 새로 건설되었고, 하인부르크, 클라드스코, 크렘제, 리토메르지체 등 여러 도시가 확장되거나 재건되었다. 오타카르 2세는 마그데부르크 법을 이 도시들에 그대로 적용해 상업 및 무역 특권을 누리도록 해줬으며, 독일인들이 자신의 영지 전역의 주요 도시에 정착시켰다. 또한 토지 소유 등기, 의회 결의문, 법원의 판결 및 일반적인 규칙이 담긴 젬스케 데스키(Zemské desky)가 그의 치세에 작성되었는데, 이것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체코 법률이었다.

오타카르 2세는 보헤미아-모라비아 고원에 묻혀 있던 은을 채굴하기 위한 대규모 광산 사업을 벌였다. 이흘라바 시는 이 고원에서 채굴된 은의 품질을 관리하고 유럽 각지에 유통시키는 핵심 기지로서 번영했으며, 보헤미아-모라비아 고원에서의 채굴은 소위 이흘라바 광업법에 따라 수행되었다. 이에 따르면, 광맥을 발견한 사람이 토지 소유자에 대한 의무를 다했다면 그것을 사용할 우선권을 가질 수 있었다. 오타카르 2세는 이흘라바 법의 원칙을 다른 지역에도 적용했다. 보헤미아 귀족인 스밀에 의해 건설된 스밀루브 브로드 시(오늘날 하블리치쿠프브로트)는 이흘라바 법이 적용된 대표적인 도시로서 은 채굴로 인해 번영했다.

이렇듯 광산업이 크게 성행하면서, 오타카르 2세는 막대한 재원을 누릴 수 있었다. 그는 통치 초기에 연간 은화 80,000 ~ 100,000흐리브냐를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서 확보할 수 있었고, 말기에는 최대 110,000 ~ 120,000흐리브냐의 은화를 얻을 수 있었다. 여기에 오스트리아에서는 53,000 흐리브냐, 슈타이어마르크에서는 14,000흐리브냐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이 막대한 자금을 토대로 호화스러운 궁정 생활을 누리며 군주로서의 권위를 드높였고, 군사력 강화에도 힘을 기울여 보헤미아 왕국의 위세를 최대한 드높이고자 하는 야망을 충족시키는 데 활용했다.

오타카르 2세는 유대인들의 탁월한 상업 역량에 주목하고, 그들을 보호해주면 수입을 더 늘릴 수 있다고 보고, 기독교도들의 탄압으로부터 보호해주고자 노력했다. 1262년, 그는 32조항으로 구성된 <유대인의 규례(Statuta Judæorum)>를 반포했다. 그는 이 규례에서 유태인은 대부분의 경우 기독교도들과 동등한 권리를 누려야 하며, 기독교인과 동일한 관세를 지불하면서 자국을 언제든지 여행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 대신,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속한 도시의 주민들과 동일한 의무를 수행해야 하며, 국왕에게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대가로 공물을 납부해야 했다. 유대인이 기독교인을 살해했다는 거짓 고발을 받고 자신을 성공적으로 변호했다면, 고발한 기독교은 처벌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유대인이 살해된 경우에는 유대인 공동체 구성원들이 직접 조사를 진행해야 했다. 또한 유대인을 폭행하거나 강간한 기독교인은 손을 절단당하며, 유대인 어린이를 납치하는 자는 강도로 취급되어 교수형에 처해질 것이었다.

오타카르 2세는 통치 초기에는 군주가 귀족들의 특권을 인정하는 관행을 이어갔지만,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 그리고 케른텐 등지를 손에 넣으면서 막강한 권력과 권위를 확보한 뒤에는 귀족들의 영지 확장을 제한하고 분할시키려 노력했다. 그는 귀족들의 영지에 왕실 성과 도시를 건설하거나 재개발했으며, 영주 가족의 임시 행정에 맡긴 성을 왕실 소유권으로 되돌리고자 했다. 이에 귀족들의 불만이 점점 고조되자, 그는 이들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헝가리, 바이에른 등 외세와의 전쟁을 지속적으로 벌였다. 그러나 갈수록 귀족들을 제어하는 데 애를 먹었고, 결국 통치 말기에 귀족들의 잇따른 배신으로 그동안 쌓았던 모든 업적이 허물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2.3. 대외 활동

1254년, 오타카르 2세는 올로모우츠 주교 브루노가 조직한 프로이센 십자군에 보헤미아, 모라미아, 오스트리아의 영주들과 함께 참여했다. 원정대의 목표는 이교도인 프로이센인들을 복종시키고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원정을 통해 교황청의 신임을 얻어 후일을 도모하고자 했다. 1255년 1월 중순, 십자군은 엘블롱에서 튜튼 기사단의 기사단장 포포 폰 오스테르나와 합류한 뒤 프로이센인들이 지배하고 있던 메데나우를 기습해 공략했고, 뒤이어 루다바 성을 공격해 많은 프로이센군을 사살하고 성을 함락시켰다. 프로이센인들은 패배 후 항복을 선언하고 브루노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그는 튜튼 기사단이 프레골라 강변에 성채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지원했다. 튜튼 기사단은 그를 기리기 위해 "왕의 산"이라는 의미로 쾨니히스베르크라는 이름을 붙였고, 훗날 자신들의 본거지로 삼았다.

밤베르크 주교구의 기록에 따르면, 오타카르 2세는 1255년 봄 플랑드르 백작부인 마가렛 2세로부터 로마 왕 선거에 출마하라는 내용의 서신을 받았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그가 이 시기에 대공위시대의 혼란상에 휘말린 독일의 군주로 자리잡을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는 교황 알렉산데르 4세에게 자신이 독일의 혼란을 수습할 수 있다며, 통치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빌럼 2세를 사임시키고 자신이 로마 왕이 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알렉산데르 4세는 답장조차 하지 않았고, 그 사이에 비텔스바흐 가문이 빌럼 2세를 지지하면서 독일이 다소 안정되는 듯했다.

그러던 1256년 1월 28일, 빌럼 2세는 후그우드에서 프리슬란트인과 전투를 벌였으나 참패를 면치 못하고 홀로 얼어붙은 호수를 말을 타고 건너려 했다가 얼음이 깨지는 바람에 호수에 빠진 뒤 추격병들에게 살해되었다. 이리하여 로마 왕은 공석이 되었고,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알폰소 10세,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의 동생인 콘월 백작 리처드,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오토 3세가 로마 왕 후보로 나섰다. 여기에 전임 군주 콘라트 4세의 어린 아들인 콘라딘을 지지하는 이들도 있었다. 오타카르 2세는 이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1258년 1월 13일 쾰른의 콘라트 대주교, 팔츠 변경백 루트비히, 마인츠 대주교 게른하르트와 함께 콘월의 리처드를 로마 왕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그해 4월 1일, 알폰소 10세로부터 막대한 뇌물을 받은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오토 3세, 작센 공작 알브레히트 1세, 트리어 대주교 아르눌트가 알폰소 10세를 로마 왕으로 추대했다. 이때 그는 슈타이어마르크 주교이자 자신의 대리인인 인드르지흐를 통해 알폰소 10세의 집권을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이후 그는 리처드 세력과 알폰소 10세 세력이 서로 충돌하는 동안 중립을 고수하면서 이득을 마음껏 챙겼다.

1256년 4월, 오타카르 2세는 파사우의 오토 주교, 르제슈프의 알베르트 주교와 함께 빈에서 반 비텔스바흐 연합을 결성했다. 1년 후인 1257년 8월, 그는 어퍼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2세가 라인란트로 간 틈을 타 오스트리아-보헤미아 연합군을 이끌고 바이에른을 전격 침공했다. 그의 군대는 바이에른을 철저하게 약탈하면서 란츠후트까지 침투했다. 그러나 루트비히 2세가 서둘러 돌아오자, 오타카르 2세는 잘츠부르크 지역으로 철수했다. 그러나 뮐도르프 인근에서 추격군에 따라잡혀 크게 패했고, 많은 병사들이 인 강을 건너 달아나려다가 다리가 무너지는 바람에 강에 빠져 익사했다. 또다른 군인 400명은 어느 탑에 피신했다가 적병이 불을 지르는 바람에 몰살당했다.오타카르 2세는 잔여 병력을 겨우 수습해 묄도르프 성채로 피신한 뒤 며칠 동안 바이에른군에 포위되었다. 다행히 공성 준비가 덜 되었던 바이에른군이 공성전을 중단하고 물러난 덕분에 본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그 후 양측이 캄 시에서 평화 협상을 이어간 끝에 1257년 11월 보헤미아 측이 국경지대의 요새 몇 곳을 내주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1258년, 오스트리아 공국 제머링 계곡 남쪽 영토의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헝가리 왕자 이슈트반을 축출한 뒤 오타카르 2세에게 귀순했다. 이슈트반은 즉각 군사를 일으켜 반란군을 진압했고, 1259년 봄 반란군을 도운 케른텐 공국의 공작 울리히 3세를 보복하고자 케른텐으로 쳐들어가 약탈을 자행했다. 하지만 슈타이어마르크 영주들은 이슈트반 왕자의 강압적인 통치에 반감을 품고, 오타카르 2세의 후원에 힘입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페타우 일대를 제외한 슈타이어마르크 전역이 오타카르 2세의 편에 섰다. 이에 헝가리와 보헤미아 왕국의 갈등이 폭발하면서 대규모 전쟁이 발발했다.

헝가리 왕국은 쿠만, 키예프 루스, 폴란드 왕국, 세르비아 공국, 불가리아 제2제국,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았고, 보헤미아 왕국은 오스트리아, 모라비아 변경백국,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귀족들의 지원을 받았다. 1260년 6월 25일, 이슈트반은 모라바 강을 건너 오스트리아군 400여 명을 사살했다. 이에 사기가 떨어진 오스트리아 귀족들이 철수를 건의했지만, 오타카르 2세는 받아들이지 않고 모라바 강둑을 따라 이동해 크레센부룬에서 강을 사이에 둔 채 헝가리군과 대치했다.

이후 양자간 논의 끝에, 헝가리군이 7월 12일에 강을 건넌 뒤 다음날 정오에 전투를 벌이기로 합의했다. 이후의 전개에 대해 양측의 기록이 엇갈린다. 보헤미아 측 기록에 따르면, 이슈트반은 이 협의를 무시하고 강을 건너자마자 오타카르 2세의 군대를 향해 돌격했다고 한다. 반면 헝가리 측 기록에 따르면, 오타카르 2세는 합의를 준수하지 않고 이슈트반의 군대가 강을 건너자마자 공격했다고 한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보헤미아군이 상대를 압도한 것만은 분명하다. 헝가리 경기병들은 보헤미아 중기병들에게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고 패주했다. 뒤이어 보헤미아 보병대가 헝가리 보병대를 몰아붙이자, 헝가리 장병들은 혼란에 빠진 나머지 도주하다가 많은 이가 강에 빠져 익사했다. 보헤미아군은 다음날까지 패주하는 적을 추격해 10,000명 가량을 사살하거나 생포했다.

크레센브룬 전투에서 완승을 거둔 뒤, 오타카르 2세는 브라티슬라바로 진군해 그곳에 도망친 벨러 4세와 이슈트반 왕자를 압박했다. 결국 벨러 4세는 평화 협상을 하자고 요청했고, 오타카르 2세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벨러 4세는 슈타이어마르크에 대한 모든 소유권을 포기하고, 자신의 어린 아들 벨러와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오타 3세의 딸이자 오타카르 2세의 조카인 쿠니쿤다와 결혼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같은 해 12월, 오타카르 2세는 슈타이어마르크를 방문해 귀족들의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1261년 3월 말 빈에서 정식으로 평화 협상이 맺어지면서, 그는 슈타이어마르크 공작에 정식으로 복위했다.

1261년 10월 18일, 오타카르 2세는 프라하로 돌아간 뒤 나이가 많이 들어서 아이를 낳을 가망이 없는 마르가레트와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하고 오스트리아로 보냈다. 이후 그해 10월 25일에 브라티슬라바에서 헝가리 국왕 벨러 4세의 손녀이자 갈리시아 공작 로스티슬라프의 딸인 쿠니군다와의 결혼을 거행했다. 이 조치는 교황 우르바노 4세의 승인 없이 이뤄졌다. 교황청은 절차를 문제삼으며 한동안 승인하지 않았지만, 갈수록 강력해지는 보헤미아 왕국과 적대하는 건 곤란하다는 걸 인식하고 1262년 4월 20일에 승인했다. 오타카르 2세는 쿠니군다와의 결혼식을 거행한 뒤 그때까지 미뤘던 보헤미아 국왕 대관식을 성 비투스 대성당에서 거행했다. 이 대관식에는 프라하 주교, 올로모우츠 주교, 파사우 주교, 프로이센 주교, 마인츠 주교도 참석했고, 아내 쿠니군다도 보헤미아 왕비로서 참여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마인츠 대주교 베르너 2세에게 보헤미아 왕위 계승권을 인정하고 여행과 관련된 모은 비용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해 호의를 얻어냈다.

한편, 신성 로마 제국은 여전히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로마 왕을 자처한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0세와 콘월의 리처드는 자국 문제에 전념하느라 독일에 들리지 못했고, 제후들은 황제가 국내에 없는 틈을 타 세력 다툼을 벌였다. 오타카르 2세는 이러한 상황을 관망하다가 1262년 여름 리처드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리처드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그 해 8월 9일 그에게 보헤미아 왕국, 모라비아 변경백국, 오스트리아 및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의 영지를 수여하겠다는 문서를 발행했다. 그가 갑자기 리처드를 지지하기로 한 이유는 알려진 바 없지만,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2세가 콘라트 4세의 아들이자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마지막으로 남은 계승자인 콘라딘을 로마 왕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의 상속녀인 바벤베르크의 게르트루드가 아들 프리드리히 1세와 함께 보헤미아에서 바이에른으로 망명한 뒤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 공작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것에 대응하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264년 10월 5일, 헝가리 왕자 벨러와 오타카르 2세의 조카 쿠니군다의 결혼식이 브라티슬라바에서 거행되었다. 이리하여 헝가리 왕국과 결혼 동맹을 맺게 된 오타카르 2세는 1266년 5월 어머니의 지차금을 회수하겠다는 명목으로 체브스코를 점령하고 그곳 주민들에게 특권을 부여했다. 이후 체브스코와 인근 로케츠크의 행정권을 보헤미아 슬리브노 가문의 야노스에게 맡겼다. 이후 보헤미아군과 바이에른군이 국경지대에서 소규모 접전을 벌였다. 1266년 7월, 오타카르 2세는 도마즐리체에서 바이에른 공작으로부터 독립하기를 갈망한 르제츠 시민 대표와 협상한 끝에 동맹을 맺었다.

1266년 8월, 오타카르 2세는 "정당한 로마 왕 리처드를 받들지 않는 바이에른 공작을 응징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두번째로 바이에른을 침공했다. 그의 군대는 레겐슈타우프, 니테나우 등 여러 성을 공략했고, 그와 동맹을 맺은 올로모우츠 주교와 슈타이어마르크 총독 브루노가 이끄는 슈타이어마르크-케른텐 부대는 동쪽에서 바이에른을 침공했다. 오타카르 2세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레겐스부르크 공략에 성공했지만 식량 부족으로 인해 체브스크로 후퇴했고, 브루노 역시 로어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8세의 역습을 받고 후퇴했다. 그해 11월 하인리히 8세가 파사우를 공격했지만 함락에 실패했다. 1267년 보헤미아군이 바이에른을 재차 침공해 리트를 공략했다. 이후 양자는 평화 협약을 맺고 전쟁을 종식했다.

1267년 9월, 오타카르 2세는 프로이센에서 발발한 대규모 이교도 반란에 시달리고 있던 튜튼 기사단과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그는 첼름스크, 삼비아, 바르미아, 나탄지아에서 기사단의 권리를 인정했고, 기사단은 오타카르 2세가 갈린디아, 자트베시스크,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획득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여기에 올로모우츠 주교구를 대주교구로 승격시키고 갈린디아, 자트베시스크, 리투아니아에 설치될 주교구를 올로모우츠에 종속시키려는 계획이 세워졌다. 이렇게 준비를 갖춘 오타카르 2세는 1267년 11월에 프로이센으로 군대를 파견했다. 크라쿠프 연대기에 따르면, 보헤미아군은 폴란드를 지나가면서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약탈을 자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비스툴라 강 여울목의 얼므이 갑자기 녹으면서 진군이 중단된 데다 교황청이 올로모우츠 주교구를 대주교구로 승격시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1268년 10월 29일, 시칠리아 왕국을 탈환하기 위해 이탈리아 남부로 진군했던 콘라딘이 시칠리아 국왕 카를루 1세에게 참패하여 생포된 뒤 나폴리에서 처형되었다. 이후 교황청은 오타카르 2세의 첫째 딸 쿤후타와 카를루 1세의 아들의 결혼을 중재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오타카르 2세는 쿤후타가 이미 튀링겐 변경백 알브레히트 2세의 아들인 마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와 약혼했다며 거절했다. 그 후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0세와 콘월의 리처드 모두 독일에 별다른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을 지켜보던 그는 마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를 로마 왕이자 시칠리아 국왕으로 내세우기로 했다. 마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는 예비 장인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시칠리아 국왕이란 칭호를 썼고, 이탈리아 내 기벨린파 역시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교황청과 카를루 1세가 단호히 거부했고, 오타카르 2세가 프리드리히 1세를 옹립하기 위해 시칠리아로 내려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면서 무용지물이 되었다.

이 무렵, 오타카르 2세는 슈타이어마르크 귀족들이 자신에게 반역을 꾸미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는 실레시아의 트제브니차에서 슈타이어마르크 귀족들을 소환한 뒤 체포해 반역죄로 고발하고, 성채를 개방하거나 철거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귀족들이 응할 때까지 계속 가둬두다가 1269년 3월 17일 귀족들이 지시에 따르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하자 풀어줬다. 그는 슈타이어마르크 총독 브루노에게 이를 이행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브루노는 얼마 후 총독 직위를 사임하고 그곳을 떠났는데, 그 이유는 알려진 바 없다. 이후 하소브의 오스트리아 판사 오토와 리히텐슈타인 출신의 하인리히가 슈타이어마르크 총독에 선임되어 그곳을 안정시켰다.

1268년 12월 초, 케른텐 공작 울리히 3세는 자신이 사망하기 전에 상속인을 얻지 못할 경우 오타카르 2세에게 영지를 물려주겠다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1269년 6월, 오타카르 2세는 즈노이모에서 바이에른 주교들을 초대해 그들의 호의를 사고자 노력했다. 그 해 9월 아퀼레이아 총대주교 그레고리오가 사망하자, 그는 즉시 프리올리를 점령한 뒤 아퀼레이아의 보호자를 자처했다. 이후 아퀼레이아 대주교구는 오타카르 2세와 울리히 3세의 압력에 굴복하여 울리히 3세의 동생이자 전 잘츠부르크 대주교였던 필리프를 새로운 총대주교로 선출했다.

1269년 10월 27일 울리히 3세가 사망하자, 오타카르 2세는 울리히 3세의 유언장에 따라 케른텐 공국을 점거하고 케른텐 공작을 자처했다. 이에 필리프는 자신이 고인의 동생이었으니 마땅히 자신이 케른텐 공작이 되어야 한다며 반발했고, 헝가리 왕자 이슈트반에게 서신을 보내 보헤미아 국왕의 전횡에 맞서 싸우자고 제의했다. 오타카르 2세는 이에 대응해 1270년 2월 초 프리지아 주교와 브릭센 주교로부터 케른텐과 카르니올라 주교구의 재산을 자신의 관할하에 들어가는 것을 인정하게 했다. 이후 케른텐 총독으로 사촌인 헌부르크의 올드르지흐를 세웠다가 곧 해임하고 사위인 드른홀레츠의 올드르지흐를 총독으로 선임했다.

1270년 5월 3일, 헝가리 국왕 벨러 4세가 사망했다. 이후 이슈트반 왕자가 이슈트반 5세로서 헝가리 왕위에 올랐다. 이보다 전, 벨러 4세는 아들 이슈트반이 가족들을 해칠 것을 우려해, 오타카르 2세에게 아내 마리아와 딸 언너를 지켜달라고 부탁하는 서신을 보냈다. 벨러 4세의 딸이며 이슈트반 왕자와 심한 갈등을 벌였던 언너는 아버지가 죽고 이슈트반이 즉위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아버지의 심복들과 함께 보헤미아로 도주했다. 이때 그들은 헝가리 서쪽 국경 지대의 여러 요새를 오타카르 2세에게 넘겨줬다. 이슈트반 5세는 중신들이 떠난 자리에 심복들을 앉힌 뒤 잃어버린 영토를 탈환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1270년 8월 말에 볼레스와프 5세와 동맹을 맺었고, 포조니 인근의 도나우 강 유역의 한 섬에서 오타카르 2세를 만나 땅을 돌려달라고 요청했지만, 오타카르 2세는 벨러 4세의 서신을 제시하면서 자신은 고인의 뜻에 따랐을 뿐이라고 답했다. 결국 양자는 2년간의 휴전 협정만 맺었을 뿐 별다른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1270년 말, 오타카르 2세는 케른텐의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남쪽으로 진군해 필리프를 지지하던 류블랴나 시를 점령했다. 이에 필리프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를 케른텐 공작으로 인정하고, 아퀼레이아 대주교 직위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 사이, 이슈트반 5세는 휴전 협정을 무시하고 습격대를 오스트리아에 파견해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오타카르 2세는 1271년 4월 도나우 강 북쪽 지역을 공격하여 데베니, 포조니, 너지솜버트를 포함한 여러 요새를 공략했다. 그는 여세를 몰아 5월 15일 모숀머저로바르 전투에서 이슈트반 5세의 헝가리군을 격파했다. 하지만 병력을 수습한 이슈트반 5세가 반격을 가했고, 5월 21일 라이카 강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보헤미아군을 격멸했다. 이후 그는 소수의 추종자만을 이끌고 달아나는 오타카르 2세를 맹추격해 까지 이르렀다. 이후 양자는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슈트반 5세는 오타카르 2세의 적들을 돕지 않기로 했고, 오타카르 2세는 언너와 추종자들이 넘겨줬던 요새들을 헝가리에 돌려주기로 했다.

이 무렵, 아퀼레이아 대주교를 맡고 있던 필리프가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 그에게 반감을 품은 아퀼레이아 사제들과 시민들에 의해 쫓겨났다. 이에 케른텐 총독인 드른홀레츠의 올드르지흐는 1272년 5월 프리올리를 장악한 뒤 교황청이 아퀼레리아 대주교를 선임할 때까지 오타카르 2세를 임시 대주교로 옹립했다. 필리프는 모든 소유권을 포기하고 오타카르 2세로부터 케른텐 및 오스트리아 영지의 관리자 직함을 받았다. 이로서 오타카르 2세는 보헤미아 국왕, 오스트리아, 슈타이어마르크, 케른텐 공작에 이어 아퀼레이아 일대까지 통제하면서 유럽 전역에 위세를 떨쳤다.

1272년 8월, 이슈트반 5세가 10살된 아들 라슬로를 납치해 코프리브니차 성에 연금한 크로아티아 영주 요아킴 펙타르를 응징하기 위해 진군하던 중 급사했다. 이후 라슬로의 어머니 에르제베트가 라슬로를 세케슈페헤르바르로 데려온 요아킴과 서둘러 협상한 뒤 라슬로 4세로서 헝가리 국왕에 올렸다. 그러나 이슈트반 5세의 측근들은 엘리자베트 왕비가 어린 아들을 왕으로 올리기 위해 요아킴과 짜고 음모를 꾸몄다고 의심했다. 이슈트반 5세의 재무관 에기디우스 모노즐로는 여러 인사를 포섭한 뒤, 우선 라슬로를 빼돌린 후 왕비의 숙소를 공격했다. 하지만 요아킴의 지지자들이 이들의 공격을 격퇴했고, 모노즐로는 포조니로 후퇴한 뒤 그곳을 거점으로 삼은 후 오타카르 2세에게 투항했다. 오타카르 2세는 모노즐로를 따뜻하게 맞이하고 막대한 선물을 제공했다.

이에 헝가리의 실권자인 쾨세그 공작 헨리크는 오타카르 2세가 헝가리 왕국을 분열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여기고 특단의 조치를 내리기로 마음먹었다. 1272년 11월, 귀족들이 퀼락 섬에서 향락을 즐기고 있을 때 헨리크가 마초 공작 로스티슬라프와 이슈트반 5세의 누이 언너의 아들인 벨러를 반역 혐의로 고발했다. 벨러가 이에 격하게 항변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그러다가 헨리크가 검을 뽑아 벨러를 찔러 죽였다. 이후 헨리크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왕실로부터 사면을 받고 슬라보니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벨러는 오타카르 2세의 처남이기도 했기에, 오타카르 2세는 이를 구실로 삼고 지난날 이슈트반 5세에게 잃었던 영토를 되찾기로 마음먹었다.

1273년 4월, 오스트리아 공국과 모라비아 군대가 헝가리를 전격 침공했다. 그들은 죄르솜버트헤이를 공략하고 헝가리 서부 일대를 약탈했다. 요아킴이 두 달 후에 두 요새를 탈환했지만, 얼마 후엔 보헤미아 왕 오타카르 2세가 헝가리를 침공하여 죄르와 쇼프론을 포함한 많은 요새를 공략했다. 헝가리 왕국에 귀속되어 있던 쿠만족이 이에 대응해 모라비아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고, 오타카르 2세의 사위이자 케른텐 총독인 드른홀레츠의 올드르지흐가 헨리크를 추종하는 무장병들의 습격으로 암살당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오타카르 2세가 이끄는 보헤미아군이 헝가리를 압도했다. 오타카르 2세는 쇼프론을 함락시키는 것으로 원정을 마무리하기로 하고, 그곳을 포위해 몇 달간 공세를 퍼부었다. 그러나 그가 헝가리 원정에 전념하는 사이, 성공을 구가하던 그의 운명은 전환점을 맞이했다.

2.4. 몰락

1272년 4월 콘월의 리처드가 사망한 후,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독일 제후들에게 모두의 인정을 받을 만한 로마 왕을 세우라는 압력을 가했다. 당시엔 알폰소 10세가 여전히 로마 왕을 자처하고 있었지만 독일에 단 한 번도 발을 들이지 않았고 교황청 역시 그를 무시했다. 또다른 후보인 팔츠 변경백 루트비히 역시 교황청의 신임을 얻지 못했다. 시칠리아 국왕이자 앙주 공작 카를루 1세는 자신의 조카이자 프랑스 국왕인 필리프 3세를 로마 왕 후보로 제시했지만 프랑스 왕국의 통치를 받고 싶지 않았던 독일 제후들로부터 경원시되었다.

오타카르 2세 역시 로마 왕 후보로 종종 거론되었다. 그는 보헤미아 국왕으로서 국왕 선거에 투표를 행사할 권리가 있었고, 브란덴부르크와 작센 선제후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1254년 콘라트 4세가 사망한 이래 20년 가까이 이어진 대공위시대의 혼란에 지칠 대로 지친 독일의 많은 영주들도 강력한 군사력과 부를 갖춘 그라면 혼란을 잠재우고 제국을 재건할 수 있을 거라 희망했다. 일부 연대기에 따르면, 1271년 쾰른 대주교가 프라하를 방문하여 오타카르 2세에게 로마 왕이 되어달라고 제안했지만 오타카르 2세가 거부했다고 한다. 대다수 역사가들은 이 기록은 신빙성이 없다고 간주하지만, 오타카르 2세가 로마 왕으로서 진지하게 고려되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본다.

그러나 오타카르 2세는 로마 왕이 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히지 않았고, 헝가리와의 전쟁에 전념하느라 독일의 동향에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로부터 "선제후들이 로마 왕을 선출하지 않는다면 내가 추기경들과 함께 로마 왕을 직접 세우겠다"는 통보를 받은 마인츠의 베르너 대주교는 1273년 9월 팔츠 백작 루트비히와 함께 선제후들을 불러모으고 논의한 끝에 안할트의 지그프리트 1세와 합스부르크의 루돌프 4세를 후보자로 삼기로 했다. 9월 11일, 선제후들은 보파르트에서 지그프리트 1세를 배제하고 루돌프 4세를 로마 왕으로 세우는 것에 대한 가부를 결정하기로 합의했다. 9월 29일, 7명의 선제후 중 오타카르 2세를 제외한 6명이 프랑크푸르트에 모여 최종 회의를 가졌고, 10월 1일 루돌프 4세가 로마 왕 루돌프 1세로 선포된 뒤 10월 24일 아헨에서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당시 쇼프론을 포위 공격하고 있던 오타카르 2세는 새 로마 왕이 그토록 신속하게 공략했다는 소식에 깜짝 놀라 전쟁을 중단하고 프라하로 귀환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선거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레고리오 10세에게 루돌프 1세가 로마 왕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호소했다. 보헤미아 왕실의 공증인이자 연대기 작가인 이세르니아의 인드르지흐에 따르면, 그가 교황에게 보낸 편지에는 아래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맹인 선거인들은 빈곤의 무게에 짓눌린 무일푼 백작을 로마 왕으로 선출했습니다!"

로어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13세 역시 루돌프의 1세의 집권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두 사람은 1274년 3월 중순 도마즐레치에서 만나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도 했다. 그러나 교황청과 대다수의 독일 제후들은 루돌프 1세의 선출이 독일의 혼란을 종식시켜줄 거라고 믿고 오타카르 2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루돌프 1세는 교황청의 호감을 사기 위해 예루살렘 해방을 위한 십자군을 벌이겠다고 약속하는 한편, 슈파이어 제국 의회에서 대공위시대 동안 소외된 땅에 대한 제국의 지배권을 재확보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오타카르 2세에게 오스트리아, 슈타이어마르크, 체브스코, 케른텐, 카르니올라를 제국에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그 땅들은 본래 원주인이 있었는데 오타카르 2세가 무력으로 빼앗았으니 마땅히 원주인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타카르 2세는 이에 대해 본인은 콘월의 리처드에게 그 땅들을 봉토로 수여받았다고 반박했지만, 루돌프 1세는 이를 묵살하고 오타카르 2세를 "독일 땅을 정복하고 폭정을 자행한 오만한 슬라브인"이라고 비방하는 선전물을 제국 각지에 퍼트렸다.

오타카르 2세와 루돌프 1세의 대립이 갈수록 심해지자, 이로 인해 독일이 또다시 내란에 휘말릴 것을 우려한 그레고리오 10세는 올로모우츠 주교인 샤우엔부르크의 브루노와 세카우 주교인 마르츠바추의 배른하르트를 통해 오타카르 2세에게 루돌프 1세를 로마 왕으로 인정해준다면 루돌프 1세가 그의 영토를 건드리지 않도록 중재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오타카르 2세는 1274년 7월 12일 교황청에 답신을 보내 십자군 전쟁을 마친 후에야 중재 판결에 따르겠다며 사실상 거부했다. 이후 그레고리오 10세는 1274년 9월 26일 제2차 리옹 공의회에서 루돌프 1세가 로마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것을 최종적으로 승인했다.

루돌프 1세는 잘츠부르크 대주교 프리드리히, 티롤-고리스키 백작 멘하르트와 알베르 등 오타카르 2세와 자주 다투었던 인사들을 반 보헤미아 연합에 끌어들였다. 1274년 아퀼레이아 대주교에 선임된 레이몬도 델라 토레 역시 아퀼레이아를 장악하고 대주교 직위를 1년간 임시로 맡기까지 한 오타카르 2세를 적대시해 루돌프 1세의 편에 섰다. 1274년 11월, 루돌프 1세는 뉘른베르크에서 제국 의회를 소집했다. 오타카르 2세가 그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참석하지 않고 대표를 보내지도 않자, 루돌프 1세는 그가 의무적인 공물을 지불하지 않았고 자기 땅을 봉토로 수여받는 의식도 하지 않았기에 불순종하다고 비난했다. 이후 1275년 초에 열린 뷔르츠부르크 의회에 반드시 참석해서 자신을 변호하라고 통보했지만, 오타카르 2세는 이번에도 불응했다.

1275년 2월 초, 루돌프 1세는 케른텐과 카르니올라 영주들에게 오타카르 2세에게 복종하지 말라고 촉구했고, 지난날 오타카르 2세에 의해 케른텐과 카르니올라 계승권을 잃어버린 필리프를 그 곳의 영주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오타카르 2세는 이에 대응해 데디체의 밀로타를 슈타이어마르크 총독으로 선임했고, 알프스 지역에서 벌어진 반란을 가혹하게 진압했다. 1275년 3월 9일, 오타카르 2세는 교황청에 서신을 보내 루돌프 1세의 부당한 조치에 대해 비난을 퍼붓고 자신이 4년 이내에 예루살렘으로 십자군 수행을 하러 가겠으니 루돌프 1세가 자신의 영지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1275년 5월 초에 로마 왕에게 복종하라는 답신을 보냈다.

1275년 5월 초, 오타카르 2세는 아우크스부르크 제극 외희에 세카우 주교 마르바추의 베른하르트를 사절로 파견했다. 베른하르트는 오타카르 2세의 지령에 따라 루돌프 1세의 황제 선출은 무효이며 새 로마 왕을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돌프 1세는 이에 격노해 오타카르 2세가 영지 공물을 미납했으므로 모든 영지를 몰수하겠다고 선포했다. 6월 24일, 루돌프 1세는 제국 추방령(Reichsacht)을 선포하고 그를 제국의 적으로 낙인찍었으며, 신민들에게 오타카르 2세에게 불복종하라고 지시했다. 여기에 마인츠 대주교 베르너는 오타카르 2세에게 파문을 선고했다.

1276년 6월, 루돌프 1세는 뉘른베르크에 오타카르 2세를 정벌하기 위해 제국군을 소집시켰다. 오타카르 2세는 이에 대응해 빈을 요새화하고 귀족과 시장들에게 자식들을 인질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이때까지 오타카르 2세와 동맹을 유지하고 있던 로어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13세는 보헤미아 왕국에 대항하는 원정을 지원해주는 대가로 어퍼 오스트리아 영지를 주겠다는 루돌프 1세의 제안에 혹해 동맹을 파기하고 황제를 돕기로 했다. 1276년 8월, 티롤-고리츠키 백작 멘하르트와 알베르가 남쪽에서 오타카르 2세의 영지를 공격했다. 그들은 아퀼레이아 대주교의 지원을 받으며 카르니올라와 케른텐을 공격해 그곳을 다스리고 있던 드른홀레츠의 올드르지흐를 격파하고 카르니올라와 케른텐 귀족들의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그들은 여세를 몰아 슈타이어마르크를 침공해 디데체의 밀로타의 저항을 물리치고 유덴부르크를 공략했다.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자, 마르바추의 베른하르트를 포함한 오타카르 2세의 지지자들이 점차 루돌프 1세 편으로 돌아섰다.

1276년 10월 초, 루돌프 1세의 군대가 바이에른-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어퍼 오스트리아를 침공해 린츠를 점령했다. 뒤이어 엔체, 이브스, 툴른안데어도나우 등지가 루돌프 1세에게 복종했고, 일전에 오타카르 2세에게 진압당했던 알프스 주민들이 다시 반기를 들어 오타카르 2세로부터 독립했다. 올로모우츠 주교인 샤우엔부르크의 브루노가 이끄는 기병대가 후방에 있던 클로스터노이부르크를 공략해 루돌프 1세가 빈으로 진군하는 걸 한동안 미루게 했지만, 10월 16일 팔츠 변경백 루트비히가 이 성을 탈환하면서 루돌프 1세가 빈으로 진군할 수 있게 되었다. 10월 18일, 루돌프 1세는 빈 인근에서 티롤 백작 멘하르트 및 알베르와 합세한 뒤 여전히 오타카르 2세를 추종하는 빈을 포위했다.

한편, 오타카르 2세는 여전히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귀족들의 사병들을 끌어모으고 데디체의 밀로타와 합세한 뒤 다뉴브 강변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보헤미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루돌프 1세에게 평화 협상을 맺자고 제안했다. 1276년 11월 21일, 두 사람 사이에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오타카르 2세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를 제외한 모든 영지를 포기하고 루돌프 1세를 로마 왕으로 인정하고, 루돌프 1세는 그가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를 다스릴 권리를 인정하고 제국 추방령을 해제하며, 오타카르 2세의 아들 바츨라프 2세와 루돌프 1세의 딸 중 한 명의 약혼을 거행하기로 했다.

굴욕적인 평화 협약을 맺고 보헤미아로 돌아온 오타카르 2세는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보복에 착수했다. 그의 군대는 반란의 주모자인 팔켄슈타인의 자비슈가 소유한 주요 도시인 유인드르지후프 흐라데츠와 크룸코프를 순식간에 공략했고, 자비슈는 독일로 피신한 뒤 루돌프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1277년 5월 6일, 루돌프 1세는 오타카르 2세에게 오스트리아에 아직 남아있는 그가 소유한 성과 마을들을 자신에게 넘기며, 최근에 그가 자비슈로부터 빼앗은 모든 재산을 자비슈가 속한 비트코프 가문에게 돌려주라는 내용의 보충 협약을 제시했다. 이후에도 비트코프 가문은 보헤미아 국왕에게 계속 저항했고, 오타카르 2세는 루돌프 1세에게 저들이 왕의 영지를 약탈하고 불지르고 있으니 막아달라고 요청했다.

1277년 9월, 루돌프 1세의 장남 알브레히트가 프라하를 방문해 오타카르 2세 및 비트코프 가문과의 협상을 중재했고, 9월 12일에 최종 협약이 맺어졌다. 이에 따르면, 오타카르 2세는 로마 왕의 명령에 따라 군사적 지원을 하거나 직접 이끌고 전장에 참전해야 했다. 또한 비트코프 가문을 사면하되, 그들이 계속 저항한다면 응징할 권리가 주어졌다. 한편, 로마 왕은 "모든 해충과 적"으로부터 보헤미아 왕국을 보호할 의무가 부여되었다. 이렇게 합의가 맺어졌지만, 오타카르 2세와 루돌프 1세간의 관계는 개선되지 않았다. 본래 루돌프 1세의 아들과 결혼할 예정이었던 쿤후타는 프라하의 성 아네슈카 수도원에 들어갔고, 루돌프 1세는 보헤미아에서 오타카르 2세를 상대로 저항을 이어가는 비트코프 가문에 동조했다. 이에 오타카르 2세는 반란 진압에 전력을 기울인 끝에 1278년 초 반란군을 결정적으로 섬멸한 뒤 반란군 지도자 보레슈를 체포해 유죄 판결을 내린 뒤 즉결 처형했다. 여기에 자비슈와 로슈므베르크의 인드르지흐 1세 등은 보헤미아에서 추방되었다.

보헤미아 반란을 수습한 뒤, 오타카르 2세는 복수전을 준비했다. 그는 먼저 어퍼 오스트리아를 주겠다던 약속을 좀처럼 이행해주지 않는 것에 실망한 로어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13세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여기에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오토 5세와 알브레히트 3세, 요한 2세 형제, 브로츠와프 공작 헨리크 4세와 마이센 변경백 하인리히 3세도 갈수록 강대해지고 점점 고압적으로 나오는 루돌프 1세를 경계해 그의 편에 섰다. 1278년 6월 말, 오타카르 2세는 오스트리아로 진군해 오스트리아-모라비아 국경을 따라 여러 도시와 성채를 공략했다. 드로젠도르프는 2주만에 공략되었고, 라바 성도 2주간 저항한 끝에 항복했다. 한편, 루돌프 1세는 티롤의 멘하르트 백작, 잘츠부르크의 프리드리히 대주교, 뉘른베르크 변경백 프리드리히와 헝가리 국왕 라슬로 4세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빈에서 대기했다.

이윽고 지원군과 합세한 루돌프 1세는 에덴슈파이켄 마을 앞에 숙영지를 세웠다. 8월 20일, 오타카르 2세가 루돌프 진영에서 5km 떨어진 곳에 진을 치고 대치했다. 8월 26일, 양자는 모리비아 평원, 일명 마르히펠트에서 격돌했다. 오나카르 2세는 첫번째 대열에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출신의 중기병대를 배치했고, 두번째 전선엔 튀링겐, 마이센, 브란덴부르크, 바이에른에서 파견된 부대를 배치했으며, 세번째 대열에 폴란드와 실레시아에서 파견된 경기병대를 배치했다. 첫번째 대열은 전 슈타이어마르크 충독 데디체의 밀로타가 맡았고, 2번째 대열은 오타카르 2세가 지휘했다. 각 대열은 약 2,000명의 군인을 구성되었다. 한편, 루돌프 1세가 편성한 첫번째 대열에는 2,000명의 헝가리 경보병대가 배치되었고, 활과 화살로 무장한 쿠만군 500명이 그들과 함께 했다. 두번째 대열에는 1,150명 이상의 오스트리아군이 배치되었고, 세번째 대열에는 슈타이어마르크, 케른텐, 카르니올라, 슈바벤, 알자스, 스위스 및 뉘른베르크 출신의 전사들이 배치되었다. 루돌프 1세는 세번째 대열을 직접 지휘했고, 50~60명의 기병과 300명의 맨앳암즈를 예비대로 배치해 적군이 아군의 측면을 돌파하거나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출몰하는 등의 비상 상황에 대비하도록 했다.

이윽고 쿠만인들이 화살을 쏘며 도발하자 데디체의 밀로타 휘하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중기병대가 돌격하면서 전투의 막이 올랐다. 중기병대는 처음에는 기세좋게 전진했지만 쿠만인과 헝가리인들의 화살 세례에 말들이 중상을 입고 쓰러지거나 달아나면서 점점 기세가 줄어들더니 결국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흩어졌다.[1] 이후 오타카르 2세의 2번째 대열이 전진하자 헝가리, 쿠만 경보병대는 후방으로 물러섰고, 루돌프 1세의 두번째 대열이 응전했다. 오타카르 2세의 부대는 상대에 비해 잘 훈련되었고 전투 경험이 풍부했으며 무장 수준도 뛰어났기 때문에 적군을 점차 압도했다.

이에 루돌프 1세는 3번째 대열을 투입시켜 아군을 돕게 했고, 보헤미아군은 다시 뒤로 천천히 밀려났다. 하지만 후방에 있던 폴란드와 실레시아 경기병대를 투입시킨다면 상황을 뒤집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타카르 2세가 최전선에서 정신없이 싸우느라 후방에 있던 경기병대를 투입시킬 생각을 못했던 반면, 최후방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루돌프 1세는 사전에 빼두었던 예비대를 적군의 측면을 요격하게 했다. 전혀 예상치 않은 방향에서 공격받은 보헤미아군은 혼란에 휩싸여 도망쳤고, 후방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폴란드, 실레시아 경기병대도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도주했다. 오타카르 2세는 얼마 남지 않은 병사들과 함께 끝까지 항전하다가 결국 전사했다.

그가 전사한 상황에 대해 연대기들의 설명이 엇갈린다. 퓌르스텐펠트 수도사의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자신 때문에 형제가 살해당했던 기사에 의해 피살되었다고 한다. 빈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낙마한 뒤 그에게 각각 삼촌과 친구를 잃었던 2명의 군인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에르푸르트 연대기에 따르면, 아버지의 죽음에 원한을 품은 귀족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잘츠부르크 연대기는 그가 체포된 뒤 여러 병사에게 난도질당했다고 밝혔다. 콜마르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생포된 뒤 불명예스럽게 끌려가던 중 그를 알아본 기사가 내려진 무기에 머리를 가격당해 사망했다고 한다.

3. 사후

루돌프 1세는 전투가 끝난 뒤 오타카르 2세의 유해를 확보한 뒤 방부 처리한 후 빈 시민들을 모아놓고 공개해 그가 죽었다는 것을 널리 알렸다. 빈 시장 파틀림 바츠는 그의 유해가 소처럼 잘린 다음 물고기처럼 내장이 찣겨졌다고 묘사했다. 이후 한동안 방치되었던 유해는 1279년 봄 그의 아내였던 쿠니군다의 요청에 따라 즈노이모에 있는 소수 수도원(Minorite Monastery)에 안장되었다. 1296년, 오타카르 2세의 아들 바츨라프 2세가 아버지의 유해를 즈노이모에서 프라하로 이송한 뒤 성 비투스 대성당에서 성대한 장례식을 거행하고 성 아네슈카 수도원에 안치했다.

1373년, 오타카르 2세를 자신의 위대한 선조로서 존경했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는 오타카르 2세의 유해를 프라하 성채에 마련된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옮기고 체코의 저명한 조각가 페트르 파를레르에게 중갑옷과 왕실 예복을 착용하고 머리에 왕관을 쓴 그의 동상을 묘지 인근에 세우도록 했다. 무덤 앞 비문에는 라틴어로 적힌 아래의 글귀가 새겨졌다.
HIC IACET PRZEMISL ALIAS OTAKARUS REX BOHEMIE ET AUSTRIE STIRIE CARINTHIE DUX MARCHIO MORAVIE ET DOMINUS PORTUS NAONIS FILIUS WENCESLAI REGIUS
프르셰미슬의 후손이며, 보헤미아와 오스트리아의 왕, 스티리아(슈타이어마르크) 공작, 카린타리아(케른텐) 공작, 모라비아 변경백이며 포르데노네의 영주이며, 바츨라프의 아버지인 오타카르가 여기에 잠들었다.

4. 가족

  • 바벤베르크의 마르가레트(1204 ~ 1266):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6세의 딸.
  • 할리치나의 쿠니군다(1245 ~ 1286): 헝가리 국왕 벨러 4세의 손녀이자 갈리시아 공작 로스티슬라프의 딸.
    • 쿤후타(1265 ~ 1321): 마조프셰 공작 볼레스와프 2세의 부인.
    • 아네슈카(1269 ~ 1296): 오스트리아 공작 루돌프 2세의 부인.
  • 사생아
    • 미쿨라시 1세(1255 ~ 1318): 오파바 공작.
    • 아네슈카(1259년 이전 ~ 1318년 이전): 보헤미아 귀족인 스트라코니체의 바보른 2세의 부인.
    •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딸(1260년 이전 ~ ?): 드른홀레츠의 올드르지흐의 부인.
    •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딸(1260년 10월 21일에서 1266년 사이 ~ ?): 크라바 베네소바 공작 보크의 부인.
    • 얀(? ~ 1296): 비셰흐라드 주교구의 감독.
    • 알즈비에타(1263년 이전 ~ 1296): 오스트리아 귀족 쿠엔링의 하인리히 5세의 부인.
    • 엘리슈카(1278년 이전 ~ 1315년 이후): 폴나의 비카르트의 아내.


[1] 많은 연대기 작가들은 데디체의 밀로타가 오타카르 2세를 배신할 마음을 진작에 품었기에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도망쳣다고 주장했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