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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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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얀 후스 (Jan Hus)
국적보헤미아 왕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Wappen_K%C3%B6nigreich_B%C3%B6hmen.png
출생1372년?
보헤미아 왕국 후시네츠
사망1415년 7월 6일
콘스탄츠 주교령 콘스탄츠
직업가톨릭 신부
신학자, 교양학·신학 교수[1], 총장[2]
학력프라하 카렐 대학교 학사
프라하 카렐 대학교 석사

1. 개요2. 주요 활동3. 후스파4. 미디어에서5. 프라하 광장의 후스 기념비

1. 개요

"서로를 사랑하라. 모든 이들 앞에서 진실을 부정하지 마라.(Milujte se, pravdy každému přejte.)"[3]
옥중 서신
"진실만을 찾아라. 진실만을 들어라. 진실만을 배워라. 진실만을 사랑하라. 진실만을 말하라. 진실만을 지켜라. 죽음을 두려워 말고 진실만을 사수하라.(Hledaj pravdy, slyš pravdu, uč sě pravdě, miluj pravdu, prav pravdu, drž pravdu, braň pravdy až do smrti.)"
얀 후스는 현 체코의 전신인 보헤미아 왕국의 종교개혁자이다. 15세기종교개혁의 기틀을 마련한 신학자이며, 16세기에 활동한 마르틴 루터보다 100여 년 앞서 활동한 종교개혁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프라하 카렐 대학교 신학 교수총장을 역임했다. 당대 가톨릭 사제들의 부패상을 비판하며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강조하였다. 얀 후스는 콘스탄츠 공의회에 참석한 이후 화형당했지만, 그의 사상을 계승한 사람들이 나타났으니 이들을 후스파(Hussites, Husité)로 부른다.

2. 주요 활동

얀 후스는 보헤미아의 후시네츠라는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출생 년도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1372년으로 추정된다. 프라하 카렐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1398년에는 자신의 모교인 프라하 카렐 대학교의 교양학, 신학교수가 되었다. 그는 한때 가톨릭 사제였고, 교회의 설교자로도 활동하였다. 1402년에는 프라하 카렐 대학교 총장이 되었다. 그는 보헤미아어 철자를 개량하고, 찬송가를 보급하며, 체코인의 단결과 독일에 대한 저항을 강조하는 등 종교인으로서의 활동과 더불어 민족주의적 활동도 전개하였다.

종교인으로서 그는 수많은 설교와 강연, 저술 활동을 통해 가톨릭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며, 초대교회의 순수한 열정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청렴하고 순수한 교회, 재물과 부패에 찌들지 않은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은 가난한 민중들의 환영을 받았고, 그는 계속해서 농민 계몽에 열정을 쏟아 부었다. 그는 면죄부 판매, 성직매매에 저항했고, 성경과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자)의 저서를 보헤미아어로 번역하여 보헤미아인들이 읽을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사치를 부리는 가톨릭 교회를 비판하며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강조하였다. 이윽고, 더 나아가 성만찬에서 평신도포도주를 마실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 성만찬에서 포도주는 사제만 마실 수 있었는데, 얀 후스는 신약성경의 말씀에 근거하여 평신도에게도 포도주를 주었다. 그리고, 이는 현재 체코 개신교의 상징이 성찬용 잔(chalice, 성작)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자세한 것은 성만찬 문서 참고.

1411년, 가톨릭을 비판하던 얀 후스는 대립교황 요한 23세(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한 요한 23세와는 다르다)에 의해 파문당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교황청은 1414년 10월에 열리는 콘스탄츠 공의회에 얀 후스 본인이 참석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공의회가 자신을 암살하려는 교황청의 함정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기에 초기에는 가지 않으려 했으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지기스문트가 얀 후스를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하자, 그는 약속을 믿고 콘스탄츠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그는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전할 마음이였다.
"오늘 당신들은 한 마리의 거위를 태우지만 100년 뒤에는 백조 한 마리가 나타날 것인데, 당신들은 그 백조를 결코 구워 먹지 못할 것입니다."
후스의 유언. 그로부터 약 100년 후 마르틴 루터의 등장으로 종교개혁이 본격적으로 일어났으니, 대단한 선견지명이자 예언이었던 셈.
그러나, 가톨릭은 후스의 상상 이상으로 타락해 있었다. 교황청은 황제의 안전통행장을 무시하고, 그가 콘스탄츠에 도착하자마자 법정에 세웠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공의회에 의해 이단 판결을 받고, 체포되어 감옥으로 보내져 온갖 고문을 당하였다. 고통 속에서도 그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1415년 7월 6일 화형당했다. 얀 후스는 화형 당하면서 "오늘 당신들은 볼품없는 거위[4]를 불에 태우지만, 100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는 당신들이 영원히 태워 없앨 수 없는 백조노랫소리를 듣게 될 것이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백조는 루터파의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

3. 후스파

개신교의 주요 교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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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키백과에 의하면 재림파(Adventism)는 감리회(Methodism)에서 파생된 주요 교파(Major branches)로 분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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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후스에게 가해진 부당한 처사를 본 보헤미아인들은 공포를 느꼈으며, 공포는 곧 분노가 되었다. 1415년 가을, 체코의 귀족들은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을 거부하는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공의회의 결정을 거부한다는 것은 곧 가톨릭에 반기를 든다는 뜻이었다. 후스파 일원들은 후스가 그랬듯이 성만찬에서 평신도에게도 포도주를 주었다. 성경대로 살 것을 다짐한 후스파의 수는 날이 갈수록 늘어났고, 가톨릭의 탄압도 후스파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1419년, 강경 후스파들이 동료 후스파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의원들을 창문 밖으로 내던지는 1차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5]이 발생했고, 얼마 후 후스파는 체코의 흐름을 주도하는 세력이 되었다.

시간이 더 흐르면서 후스파는 가톨릭에 대한 태도를 놓고 온건한 개혁을 추구하는 양형파(utrakvisté)와 과격한 타보르파(táboři)로 분열되었다. 타보르파는 얀 지슈카를 중심으로 활동하여 네차례에 걸친 가톨릭 십자군에 맞서 전설적인 전적을 세웠지만, 그가 죽은 뒤 구심점이 사라져 타보르파[6]는 1434년 리파니 전투에서 양형파-가톨릭 연합군에게 대패했고, 1437년에는 잔존 병력들도 가톨릭 측에 항복하면서 타보르파는 궤멸되었다.

한편 양형파는 1436년 가톨릭 측과 평화 협정을 맺었다. 교황과 보헤미아 왕에게 순종하며 가톨릭 의식을 받아들이되, 성찬식에서 빵과 포도주를 모두 받는 기존 후스파의 방식은 인정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후스파는 이렇게 17세기 경까지 존속되었으나, 30년 전쟁 직후 합스부르크의 반종교개혁 압력을 견뎌내지 못했다. 이후 후스파는 지하로 숨어 들어갔고, 이 때문에 시골 지역에서는 낮에 가톨릭 미사를 보고, 밤에는 개신교 예배를 보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후일 요제프 2세 때 관용 칙령이 반포되고 나서야 후스파는 다시 양지로 나오는 것이 허락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 직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후스파 교회는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인정받았고, '체코 복음주의 형제단'(ČCE)이란 이름의 칼뱅파-루터파 연합 교단으로 이어졌다. 이와 별개로 가톨릭에서 이탈한 체코 민족주의 성향의 성직자들이 '체코슬로바키아 후스파 교회'라는 교단을 만들기도 했다.

20세기 격동과 혼란의 현대사를 거치며 비록 후스파를 믿는 인구는 극소수로 전락했지만, 여전히 대다수 체코인들은 얀 후스를 민족주의 영웅으로 존경하고 있으며, 같은 맥락에서 후스파 교회들도[7] 역사적 상징성을 인정받아 근대 문화 유산으로 보존되고 있다.

현대 체코 공화국의 표어인 "진실이 승리한다"(Pravda vítězí)도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초대 대통령인 토마시 마사리크(Tomáš Masaryk)가 상기한 후스의 명언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출처]

4. 미디어에서

1403년 보헤미아를 배경으로 한 게임 킹덤 컴: 딜리버런스에서도 간접적으로 등장한다. 게임의 배경이 되는 시골에서는 '프라하에서 활동하는 설교 잘 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며 히로인인 트리사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긍정적으로 언급한다.

5. 프라하 광장의 후스 기념비

파일:husprague.jpg
프라하의 구시가 광장에 들어서면 후스의 기념비가 한눈에 보인다. 후스가 대체 누구지 하며 찾아온 위키니트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에서도 이 기념비 주변이 중요한 장소로 나온다.


[1] 프라하 카렐 대학교 교수[2] 프라하 카렐 대학교 총장[3]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7863[4] 보헤미아어로 후스는 거위를 뜻하며, 평소에도 후스는 스스로를 거위에 비유하곤 했다고 한다.[5] 일반적으로 주로 이야기되는 프라하 투척 사건은 1618년 발생하여 30년 전쟁의 시발점이 된 2차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이다.[6] 얀 지슈카의 사망 후 그의 후계자로 프로코프가 있었으나, 그 역시 전투 중 전사하고 말았다.[7] 다만 대다수가 상기한 요제프 2세의 관용 칙령 이후, 혹은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시기에 지어진 교회들이다.[출처] 출처: 라디오 프라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