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관련 틀 | ||||||||||||||||||||||||||||||||||||||||||||||||||||||||||||||||||||||||||||||||||||||||||||||||||||||||||||||||||||||||||||||||||||||||||||||||||||||||||||||||||||||||||||||||||||||||||||||||||||||||||||||||||||||||||||||||||||||||||||||||||||||||||||||||||||||||||||||||||||||||||||||||||||||||||||||||||||||||||||||||||||||||||||||||||||||||||||||||||||||||||||||||||||||||||||||||||||||||||||||||||||||||||||||||||||||||||||||||||||||||||||||||||||||||||||||||||||||||||||||||||||||||||||||||||||||||||||||||||||||||||||||||||||||||||||||||||||||||||||||||||||||||||||||||||||||||||||||||||||||||||||||||||||||||||||||||||||||||||||||||||||||||||||||||||||||||||||||||||||||||
| ||||||||||||||||||||||||||||||||||||||||||||||||||||||||||||||||||||||||||||||||||||||||||||||||||||||||||||||||||||||||||||||||||||||||||||||||||||||||||||||||||||||||||||||||||||||||||||||||||||||||||||||||||||||||||||||||||||||||||||||||||||||||||||||||||||||||||||||||||||||||||||||||||||||||||||||||||||||||||||||||||||||||||||||||||||||||||||||||||||||||||||||||||||||||||||||||||||||||||||||||||||||||||||||||||||||||||||||||||||||||||||||||||||||||||||||||||||||||||||||||||||||||||||||||||||||||||||||||||||||||||||||||||||||||||||||||||||||||||||||||||||||||||||||||||||||||||||||||||||||||||||||||||||||||||||||||||||||||||||||||||||||||||||||||||||||||||||||||||||||||
|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Kurfürstentum Brandenburg Kurbrandenburg | ||
| | ||
| | | |
| 상선기 | ||
| | ||
| 국기 | 문장 | |
| 위치 | ||
| | ||
| 1618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의 영토 | ||
| 1157년 ~ 1806년 | ||
| 성립 이전 | 해체 이후 | |
| 북방 변경백국 | 프로이센 왕국 | |
| 위치 | <colbgcolor=#fff>독일, 폴란드 | |
| 수도 | 브란덴부르크안데어하펠, 탕어뮌데 (1157~1417) 베를린 (1486~1806) | |
| 정치체제 | 군주제 | |
| 국가원수 | 변경백 → 선제후 | |
| 주요 선제후 | 프리드리히 1세 알브레히트 3세 아힐레스 요아힘 2세 헥토어 프리드리히 빌헬름 프리드리히 대왕 | |
| 언어 | 독일어 등 | |
| 종교 | 가톨릭 → 루터파[1] | |
| 주요사건 | 1157년 10월 3일 건국 1356년 12월 25일 선제후국으로 승격 1415년 4월 30일 호엔촐레른 가문 집권 1618년 8월 28일 프로이센 공국과 동군연합 1701년 1월 18일 프로이센 왕국으로 승격 1806년 8월 6일 신성 로마 제국 해체 | |
| 통화 | 마르크 | |
1. 개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Mark Brandenburg) 또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Kurfürstentum Brandenburg)은 오늘날 독일 베를린을 중심으로 브란덴부르크[2]에 있던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국으로 프로이센 왕국과 독일 제국의 실질적인 중심지이자 발원지였다.[3]동방식민운동을 통해 옛 슬라브 거주 지역에 세워진 북방 변경백국을 기원으로, 1356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보헤미아 국왕 카를 4세가 선포한 금인 칙서에서 선제후로 공인되었으며, 1415년부터 호엔촐레른 가문이 집권하였다. 1486년 요한 치체로 선제후가 베를린과 인근 쾰른의 특권을 확인하고 백부 프리드리히 2세가 세운 베를린 왕궁과 베를린 대성당이 있는 곳을 영구 거주지로 확정하며 베를린이 공식적인 수도가 되었다. 1535년 요아힘 2세 헥토어 치세 기준 기준 넓이 26,000km2, 인구 40만 명 정도의 국가였다. 특히 17세기 프로이센 공국과의 동군연합과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아래 폭발적인 성장 덕분에 18세기 들어서는 영방국가 중에서도 손꼽히는 강국으로 성장하였다. 선제후들은 1701년부터 프로이센 국왕을 칭했고 1806년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합스부르크 가문의 뒤를 이은 실질적인 제국의 2인자 노릇을 했다.
2. 역사
2.1. 북방 변경백국
| | |
| 북방 변경백국 | 1000년 독일 왕국의 영토 |
오토 1세는 동방식민운동 과정에서 이 곳에 북방 변경백국을 설립하고 국경방비를 맡겼다. 그러나 지나치게 가혹한 통치와 차별, 선교 등의 이유로 983년 슬라브 대반란이 일어나 북방 변경백국은 사실상 폐지되었고, 독일인은 다시 동쪽으로 쫒겨난 채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이 설립되기까지 근 150여년 간 이 곳에 찝적대지 못했다.[4]
한편 이 일대를 지배하던 슬라브계 헤벨리족의 프리비슬라프는 1127년 브란덴부르크안데어하펠의 브렌나 성에서 권력을 잡았다. 프리비슬라프는 서쪽의 독일 귀족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그 덕에 독일인들은 브란덴부르크안데어하펠부터 슈판다우까지 이르는 넓은 하볼라네 지방을 독일 왕국으로 편입시킬 수 있었다. 한편 아스카니아 가문 출신의 안할트 백작 알브레히트 1세(Albrecht der Bär 1100~1170)가 동방개척에 앞장섰다. 그는 1123년부터 프리비슬라프와 접촉을 시작했으며 프리비슬라프를 1134년 맏아들 오토(Otto I. von Brandenburg 1125/1126~1184)의 대부로 세워 차우체 일대를 세례선물로 받기까지 했다. 같은 해에 로타르 3세는 알브레히트 1세를 새 북방 변경백으로 임명했고, 알브레히트는 자식이 없던 프리비슬라프에게 브란덴부르크의 상속권을 얻어냈다. 프리비슬라프가 1150년 죽자 알브레히트 1세는 브렌나 성과 브란덴부르크의 지배권을 공식적으로 양도받으며 확고한 지배권을 굳혔다.
2.2. 아스카니아 가문
| | |
| 1250년 브란덴부르크의 영토 | 알브레히트 1세 |
현 독일의 브란덴부르크 주는 하벨란트와 차우체만으로 구성되어있으나 당시의 변경백국은 이보다 훨씬 넓었다. 변경백국은 150년 간의 확장을 통해 하벨강과 누테강 동쪽 우커마르크, 텔토우, 바르님까지 진출해 국경을 오데르강 너머까지 넓혔다. 이 오데르강 동쪽 새로 얻어낸 영토를 '새로운 경계'라는 뜻의 '노이마르크'라고 부른다.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의 치열한 외교술, 동맹, 결혼, 전쟁은 물론 폴란드 피아스트 왕조의 도움을 통해 겨우겨우 확장한 영토였다. 이때의 브란덴부르크 땅은 모래가 많아 '신성 로마 제국의 모래상자'라는 놀림거리가 되기도 했을 정도였는데 이를 개간하기 위해 독일 타 지역이나 네덜란드 일대에서 이주민들을 대거 받아들여 제방과 성을 쌓았다.[6]
초대 변경백 알브레히트 1세는 본래 안할트의 백작으로 하인리히 사자공 이전 작센 공작을 칭하기도 했다. 1170년 그가 사망한 후 아스카니아 가문의 영지는 맏아들 오토의 브란덴부르크, 7남 베른하르트(Bernhard. Herzog von Sachsen 1140~1212)의 작센과 안할트로 분할[7]되었다. 오토의 장자 계열 아스카니아 가문 변경백들은 이후 이웃한 포메른 공국에 집적거리며 발트해 쪽으로 진출하겠다는 야심을 키워나갔는데, 이는 기존에 독일 북부 해안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덴마크의 반발을 불렀다. 그러나 덴마크 국왕 발데마르 2세가 1227년 보른회베트 전투에서 독일 제후들에게 대패하며 쫒겨난 이후, 변경백 요한 1세는 포메른에 대한 권리를 주장해 1231년 프리드리히 2세 황제에게서 포메른-뎀민 공국을 받아냈다. 1250년에는 포메른-슈테틴 공국을 공격해 슈테틴과 우커마르크를 정복했으며,[8] 분열되어있던 폴란드에게서 노이마르크를 재정복하였고 13세기 후반에는 폴란드를 침공해 국경을 오데르강까지 확장했다. 최후의 아스카니아 가문 출신 변경백 하인리히 2세는 1320년 사망했다.
사실 하인리히 2세는 고작 2년도 안되어 죽어버렸기 때문에 실질적인 최후의 아스카니아 변경백은 하인리히 2세 전대 변경백으로 대변경백이라 불리는 발데마르였다. 발데마르가 1319년 죽자 브란덴부르크에 눈독을 들이던 친척 작센비텐베르크, 인근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메클렌부르크, 포메른-볼가스트, 야보르, 야간 등등 수많은 공국들이 브란덴부르크를 놓고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거기다가 보헤미아 왕국, 폴란드 왕국, 덴마크, 튜튼 기사단까지 끼어들며 브란덴부르크 일대는 무주공산이 되었다. 앞서 언급한 공국들이 브란덴부르크가 기껏 확장해놓은 영토들을 강제로 점령했고 하인리히 2세는 이를 막기에 무력했다.
2.3. 비텔스바흐 가문
무주지가 되어 황폐화된 브란덴부르크에 눈독을 들인 인물은 독일왕이자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4세였다. 1322년 뮐도르프 전투에서 라이벌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사촌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미남왕[9]을 꺾은 루트비히 4세는 이듬해 맏아들인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1세[10]에게 주인없는 땅 브란덴부르크를 공식 하사하여 브란덴부르크는 바이에른계 비텔스바흐 가문에게 떨어졌다. 하지만 루트비히 1세는 쉽게 브란덴부르크를 장악하지 못했다. 주인없는 브란덴부르크를 갈라서 점령하고 있던 경쟁국들은 새 주인이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똘똘 뭉쳐 저항했고, 그해 10월 교황 요한 22세마저 루트비히 1세의 브란덴부르크 영유를 불법으로 선언했다.1325년 브란덴부르크의 사제이자 고위학자이던 니콜라스 폰 베르나우가 루트비히 1세의 변경백국 영유를 대놓고 거부하다가 성난 군중들에게 맞아죽자, 교황은 이를 빌미로 브란덴부르크에 모든 미사를 금지했다. 루트비히 1세와 바이에른 군대는 서서히 브란덴부르크에 입성을 시도했다. 그러나 혼란기를 틈타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1세가 쳐들어왔고 메제리츠[11] 일대를 다시 뺏어갔다. 1328년부터 루트비히 1세는 포메른의 그라이펜 가문에 복속을 요구해[12] 5년 간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루트비히 1세의 길은 험난했다. 브란덴부르크의 귀족들은 그를 변경백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거기다 1347년 루트비히 4세 황제마저 죽자 옛 아스카니아 변경백 발데마르를 참칭하는 '가짜 발데마르'가 나타났다. 루트비히 4세의 대립왕에서 출발해 독일왕으로 공인받은 룩셈부르크 가문 출신 보헤미아 국왕 카를 4세는 가짜 발데마르를 1348년 10월 2일 진짜 변경백으로 인정해주기까지 했다. 결국 비텔스바흐 가문이 황권을 포기하는 대가로 룩셈부르크 가문과 평화조약을 체결하며 브란덴부르크는 다시 비텔스바흐 가문의 땅으로 확정되었다. 루트비히 1세는 1351년 이복형제 루트비히 2세와 오토 7세에게 오버바이에른의 독자적인 통치권을 받고 브란덴부르크를 넘겨주었다.
가짜 발데마르를 완전히 쫒아낸 루트비히 2세는 1356년 금인칙서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로 선정되었고, 제국시종장직도 함께 겸했다. 황제를 선출할 최상위 7명의 선제후들 중 하나라는 엄청난 권력을 얻었지만 정작 본가인 바이에른 공국은 장자 계열인 라인 궁정백국에 밀려난데다가 바이에른계 비텔스바흐 가문의 손윗 계열이 브란덴부르크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선제후로 공인받지 못했다. 1365년 루트비히 2세가 사망하자 오토 7세가 새 선제후로 즉위했다. 그러나 곧 국정에 흥미를 잃은 오토 7세는 니더라우지츠 일대를 1364년 카를 4세 황제에게 팔아치우는가 하면 1년 뒤에는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3세 대왕에게 도이치크로네(Deutsch Krone)[13]를 빼앗겼다.
2.4. 룩셈부르크 가문
| |
|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들의 정궁인 탕어뮌데 성 |
그러나 카를 4세가 1378년 사망하고 브란덴부르크를 물려받은 장남 바츨라프 4세는 잉여인간에 불과했다. 지기스문트는 독일왕 황제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사촌인 요프스트에게 브란덴부르크를 저당잡혔고, 1402년에는 폴란드와 조약을 맺어 1200년대에 폴란드에게 빼앗아왔던 노이마르크 일대를 팔아넘겼다. 또한 인근 튜튼 기사단의 브란덴부르크의 영향력 확대를 용인하는 등, 비텔스바흐 가문과 룩셈부르크 가문 지배기 동안 브란덴부르크는 중앙정부의 통치력이 갈수록 약해지고 토착 귀족들의 목소리가 강해졌다.
2.5. 호엔촐레른 가문
독일왕 지기스문트가 1410년 황제선거에서 자신의 선출을 도왔던 뉘른베르크 성백(Burggraf) 프리드리히 6세에 대한 보답으로 1411년 자신이 가지고 있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을 수여하면서 마침내 호엔촐레른 가문이 다스리기 시작했다. 키초프 가문 등 일부 토착 귀족들이 반발하긴 했지만 프리드리히[14]는 포병을 동원해 쓸어버린 뒤 귀족들의 재산을 몰수하면서 잠잠해졌다. 프리드리히는 1414년 3월 20일 탕어뮌데 성에서 귀족들에게 충성 서약을 받았고,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이자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로 인정받았다.토착 귀족들에 질린 프리드리히 1세는 1425년 고향인 프랑켄으로 은퇴했다. 그는 선제후 작위는 유지했으나 브란덴부르크의 실질적인 통치권은 장남 요한에게 넘겼다. 그러나 요한은 연금술에 더 관심이 많은 데다가 무능했고, 결국 프리드리히 1세 사후 선제후직은 요한이 아닌 차남 프리드리히 2세에게 넘어갔다. 프리드리히 2세는 자신에게 반발하는 베를린과 쾰른(Cölln) 일대를 제압해 브란덴부르크의 기강을 다시 잡고 베를린 성과 베를린 대성당을 세웠다. 그리고 콜린메베 조약으로 튜튼 기사단으로부터 노이마르크 일대를 되찾아와 재건 작업에 돌입했다.
유럽을 뒤흔든 종교 개혁 당시 요아힘 1세 네스토어는 골수 가톨릭 신자로서 동생 마인츠 선제후 알브레히트와 함께 종교 개혁에 극렬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프랑켄계 분가인 게오르크 안스바흐 변경백과 프로이센 공국의 공작 알브레히트의 영향을 받은 요아힘 2세 헥토어는 1539년 마르틴 루터의 주관으로 슈판다우에서 루터교회로 개종하였고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루터교회가 공인되자 국가 단위의 종교 개혁을 실시하였다. 요아힘 2세의 후계자 요한 게오르크대까지 계속된 종교 개혁 이후 브란덴부르크 주민 대부분은 루터교회로 개종했다.
호엔촐레른 가문의 선제후들은 북방에 치우친 좁은 영토 탓에 항상 외부로의 팽창을 꾀했는데 당연히 주변 국가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라마르크 가문의 율리히클레베스베르크 공작 요한 빌헬름이 1609년 자식없이 사망하자, 당시 선제후 요한 지기스문트는 자신이 요한 빌헬름의 조카 프로이센의 아나와 결혼했음을 근거로 요한 빌헬름의 라인란트 영지 일부를 꿀꺽하려 시도했고, 네덜란드 공화국의 지원을 얻기 위해 칼뱅교회로 개종까지 했다. 그는 영지에 병사들을 보내 영지를 가지려 했는데, 불행하게도 이게 30년 전쟁의 도화선이 된 율리히 영지 갈등과 꼬여버리면서 대대적인 전쟁에 휘말렸다. 결국 1648년, 30년 전쟁이 끝날 때 즈음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은 라인란트의 클레베 공국, 베스트팔렌의 라벤스베르크와 마르크 등 율리히 영지 절반의 상속권을 인정받았다. 이 영지는 기존 브란덴부르크 영지와 무려 서쪽으로 100km 넘게 떨어져 있는 월경지로, 미래 프로이센령 라인란트의 기반이 되었다.
2.5.1.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 |
|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확장 |
당시 선제후국의 영토는 크게 최서단의 라인란트-베스트팔렌 영지, 브란덴부르크 본토, 동단의 프로이센 공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따라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들의 다음 200년 동안 최우선 목표는 뿔뿔히 나뉘어진 이 영지들을 지리적으로 하나로 통합해 이어 하나된 영토를 만드는 것이었다. 브란덴부르크는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힌터포메른을 얻어내 브란덴부르크 본토에서 발트해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17세기 중후반은 바야흐로 위대한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시대로 브란덴부르크를 독일의 주요 세력으로 발전시킨 시대였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어찌보면 독일 제국 해군의 모태라고도 볼 수 있는 브란덴부르크의 첫 해군을 창설했고 비록 짧긴 했지만 저멀리 아프리카의 모리타니의 아르긴 섬, 골드코스트 등지에 식민지를 세우기까지 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는 1657년 폴란드와 브롬베르크-벨라우 조약을 맺어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의 간섭을 배제한 프로이센 공국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얻어냈으며, 1661년에는 쾨니히스베르크 융커들의 반란을 제압하여 베를린 중심의 중앙집권제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 낭트 칙령을 폐지하고 개신교도들을 탄압하는 동안, 반대로 이들을 끌어안는 포츠담 칙령을 반포해 2만 명에 달하는 위그노 이민자들을 브란덴부르크에 정착시킨 것도 업적이었다.
2.5.2. 프로이센 왕국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프로이센 왕국#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프로이센 왕국#|]]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
| 쾨니히스베르크 성에서 프로이센 국왕으로 즉위하는 프리드리히 1세 |
법적으로 엄밀히 따지면 브란덴부르크는 여전히 제국의 일부였고 호엔촐레른 선제후는 그저 제국 밖의 프로이센 왕국과 동군연합을 했을 뿐이었다. 때문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들은 여전히 왕 대신 선제후라는 직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때쯤 가면 제국이 반쯤 의미를 잃어버린 상태인데다가 황권도 약해질대로 약해져 제후국들이 마음대로 행동하던 때였던지라, 브란덴부르크는 별개의 영지가 아닌 사실상 프로이센 왕국의 일부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1701년부터 1946년까지 브란덴부르크의 역사는 곧 프로이센 왕국의 역사이다. 군인왕이라 불린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프로이센군의 근대화에 앞장섰고 그 아들 프리드리히 대왕은 슐레지엔 전쟁과 폴란드 분할을 거쳐 프로이센을 유럽에서 손꼽히는 강대국으로 만들었다. 브란덴부르크는 날로 강해지는 왕국의 중심이자 국제정치의 무대로 떠올랐다. 한편 1806년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며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봉건적인 그 의미를 잃어버렸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1815년에는 행정구역상 브란덴부르크주(Provinz Brandenburg)로 재편되었다. 하지만 프로이센 국왕들은 여전히 공식 석상에서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이라는 유서깊은 직함을 즐겨 사용했고 오늘날까지도 호엔촐레른 가문의 주요 작위로 남아있다.
3. 역대 선제후
| ''''''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ad0a0a, #CC0D0D 20%, #CC0D0D 80%, #ad0a0a); color: #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비텔스바흐 왕조 | 룩셈부르크 왕조 | |||
| 루트비히 1세 | 루트비히 2세 | 오토 7세 | 벤첼 | 지기스문트 | |
| 룩셈부르크 왕조 | 호엔촐레른 왕조 | ||||
| 요프스트 | 지기스문트 | 프리드리히 1세 | 프리드리히 2세 | 알브레히트 3세 아킬레스 | |
| 호엔촐레른 왕조 | |||||
| 요한 치체로 | 요아힘 1세 네스토어 | 요아힘 2세 헥토어 | 요한 게오르크 | 요아힘 프리드리히 | |
| 요한 지기스문트 | 게오르크 빌헬름 |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 프리드리히 3세 |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 |
| 프리드리히 4세 |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 |||
|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 프로이센 공작 · 프로이센 국왕 북독일 연방 · 독일 제국 · 프로이센 자유주 총리 | }}}}}}}}} | ||||
[1] 요한 지기스문트가 클레베-베르크-마르크 공국의 계승을 위하여 칼뱅파로 개종한 이후 선제후들은 칼뱅파를 믿었다.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된 이후인 1817년 루터파와 칼뱅파를 절충한 프로이센 연합 교회(Evangelische Kirche der altpreußischen Union)을 창설하면서 두 신앙이 융합되었고, 2004년 이후로는 복음주의교회연합(Union Evangelischer Kirchen)에 속한다.[2] 다만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시절의 브란덴부르크와 독일 제국 시절의 브란덴부르크 주(Provinz Brandenburg), 현재 독일연방공화국의 브란덴부르크 주(Land Brandenburg)는 경계가 모두 다르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시절의 영토는 현재 브란덴부르크와 작센안할트, 폴란드의 루부시 주와 서포모제 주에 걸쳐있었다.[3] 프로이센이라는 이름은 왕을 칭하기 위한 우회조항에 불과했고, 호엔촐레른 가문에게 가장 중요한 곳은 수도 베를린과 위성도시 포츠담이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전쟁으로 전세가 불리해지면 동프로이센은 포기하고, 본토인 브란덴부르크와 상공업지대 슐레지엔, 중요 주교구 마그데부르크와 할버슈타트를 우선으로 사수하라는 유언을 남겼을 정도였다.[4] 다만 명목상의 북방 변경백과 주교들은 여전히 임명되었다.[5] 알브레히트 1세는 이미 기존 북방 변경백을 겸하고 있었기에 따로 황제의 임명 없이도 변경백국 건국이 가능했다.[6] 주로 이런 요새화된 성들은 국경지대인 동쪽 노이마르크 지대에 많이 세워졌는데, 14세기 후반 황권이 약해지면서 성을 기반으로 한 기사들의 권력과 독립성이 강해졌다.[7] 베른하르트는 1180년에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하인리히 사자공에게 제국추방령을 선언하고 작센 공국을 해체시킨 후 명목상 작위만 남은 작센 공작 칭호를 주워가 사용하기 시작했다. 베른하르트가 죽은 후 하인리히(Heinrich I. Fürst von Anhalt 1170~1252)의 안할트계와 알브레히트(Albrecht I. Herzog von Sachsen 1175~1260)의 작센계로 분할되었고 이중 알브레히트의 작센계는 1356년 금인 칙서에서 비텐베르크 가계가 작센 선제후로 공인되었다. 그러나 아스카니아 가문의 작센비텐베르크 가계는 3대 5명만에 절손되었고 공위가 된 작센 선제후 작위를 받은게 베틴 가문이다. 작센라우엔부르크 가계는 1689년 율리우스 프란츠(Julius Franz von Sachsen-Lauenburg 1641~1689)가 두 딸만 남기고 사망하며 단절되었다. 하인리히의 안할트계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8] 개중 슈테틴은 다시 포메른-슈테틴 공국에게 잃었다.[9] 독일왕이자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1세의 차남.[10] 바이에른 공작으로는 루트비히 5세고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으로서는 루트비히 1세다. 해당 문서에서는 루트비히 1세로 통일 서술한다.[11] 현 폴란드 미엥지제치(Międzyrzecz).[12]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시칠리아 왕국의 국왕 프리드리히 2세가 포메른에 대한 아스카니아 가문의 종주권을 인정했으나 포메른의 그라이펜 가문 통치자들은 인정하지 않았고 종주권 문제는 수 백년에 걸쳐 브란덴부르크와 포메른의 주요 갈등 원인이었다. 이 갈등은 1529년 그림니츠 조약으로 브란덴부르크가 포메른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하는 대신 포메른 그라이펜 가문이 절손되면 포메른을 이어받는 것으로 합의하며 끝났다.[13] 현 폴란드 바우치(Wałcz).[14] 앞서 언급한 프리드리히 6세.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으로는 프리드리히 1세다.[15]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의 맏사위기도 했다. 다만 요아힘 2세 헥토어와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가 루블린 조약 이후 개별 체결한 조약에 따르면 어디까지나 혈연을 통한 가문의 친척 자격으로 획득하는 것이었지 통혼을 통한 획득이 아니었다.[16] 이때부터 프로이센 공작 겸임.[17] 이때부터 프로이센 안의 왕(König in Preußen) 겸임.[18] 이때부터 프로이센 국왕(König von Preußen) 겸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