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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fff> 폴란드 왕국 피아스트 왕조 국왕 브와디스와프 1세 Władysław I | |
별칭 | 팔꿈치 높이(Łokietek) |
출생 | 1260년 4월 30일 폴란드 왕국 |
사망 | 1333년 3월 2일 (향년 72세) 폴란드 왕국 크라쿠프 |
재위 | 폴란드 왕국의 왕 |
1306년 9월 1일 ~ 1333년 3월 2일 | |
배우자 | 칼리슈의 야드비가 (1320년 결혼) |
자녀 | 쿠네군다, 카지미에시 3세, 엘즈비에타[1] |
아버지 | 쿠야비의 카지미에시 1세 |
어머니 | 오폴레의 에우프로지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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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 왕국 피아스트 왕조의 국왕.2. 생애
1260년 4월 30일 쿠야비아 공작 카지미에시 1세와 오포예 공작 카지미에시의 딸 에우프로시네의 아들로 출생했다. 친형제자매로 카지미에시 2세, 시에모비트, 에우프로시네가 있었고, 이복형제로 레첵 2세와 지에모미슈가 있었다. 별칭은 '팔꿈치 높이(Łokietek)'로, 15세기 폴란드 연대기 작가 얀 드우고시(Jan Długosz)는 그의 키가 작았기 때문에 이런 별명이 붙었다고 설명했다. 반면에 현대 폴란드 역사가 안제이 노박(Andrzej Nowak)은 그가 원대한 야망을 품은 것과는 달리 세습받은 공국의 규모와 힘이 보잘 것 없었기 때문에 정적들로부터 경멸의 의미가 담긴 이 별명이 붙여졌다고 주장했다.7살 때인 1267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폴란드 대공이자 가까운 친척인 볼레스와프 5세의 궁정에서 자랐고, 1273년 어머니 에우프로시네와 함께 대폴란드 공작 볼레스와프와 튜튼 기사단간의 회담에 참석했다. 1275년 쿠야비로 돌아가 남동생 카지미에시 2세, 시에모비트와 함께 명목상 영주가 되었다. 1277년 리투아니아인들이 쿠야비를 침공해 심각한 약탈을 자행하고 막대한 포로와 전리품을 획득했지만, 그는 이에 대해 별다른 반격을 시도할 엄두를 못내고 그들이 별다른 피해 없이 돌아가는 것을 허용했다.
1279년 이복형제 레셱 2세가 볼레스와프 5세의 뒤를 이어 폴란드 대공이 되자 즉시 충성을 맹세했고, 1280년 할리치나 공작 레프 2세가 자신이 크라쿠프 공작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리투아니아인, 타타르인 및 일부 루스인의 지원을 받으며 쳐들어왔을 때 레셱 2세에게 가담하여 그해 2월 23일 고즐리체 전투에서 레프 2세를 격파하는 데 기여했다. 1284년 포즈난 공작 프셰미수 2세, 이복형제 지에모미스우와 함께 술레유프의 시토회 수도원이 봉호츠크의 수도원 건물을 인수하는 것을 승인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1285년 4월 야누시 스타자, 크라쿠프 총독 제고타, 크라쿠프 주교 파베우 등이 레셱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레셱 2세는 이 반란을 예상치 못했기에 제대로 된 대응을 못하고 헝가리 왕국으로 피신했다. 반란군은 체르스크 공작 콘라트 2세를 폴란드 대공으로 옹립하려 했지만, 콘라트 2세는 레셱 2세에게 충성하는 크라쿠프 시민들이 방어하고 있던 바벨 성을 함락시키지 못해 크라쿠프에 입성하지 못했다. 그 사이 헝가리로부터 지원을 받은 레셱 2세가 돌아왔고, 그 역시 군대를 이끌고 레셱 2세에게 가담했다. 1285년 5월 3일, 레첵 2세는 보구지체 전투에서 콘라트 2세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콘라트 2세는 체르스크로 도피했고, 레셱 2세는 반란에 가담했던 인사들을 추방했다. 이 덕분에 그의 입지는 탄탄해질 수 있었다.
1287년, 브와디스와프는 형제들과 함께 쿠야비를 분할 상속했다. 그는 브제그 공작이 되었고, 카지미에시 2세는 웽치차 공작이 되었으며, 시에모비트는 도브진 공작이 되었다. 1288년 이복형제인 레첵 2세가 사망하면서 시에라즈 공국을 물려받았다. 이후 마조프셰 공작 볼레스와프 2세와 브로츠와프 공작 헨리크 4세가 크라쿠프를 점거해 폴란드 대공이 되기 위해 대립하자, 그는 볼레스와프 2세 편에 섰다. 볼레스와프 2세는 친히 군대를 일으켜 크라쿠프로 진군했지만, 헨리크 4세를 대공으로 옹립한 니에지에비츠의 수웨크가 농성하는 크라쿠프를 정복하는 데 실패했다. 이후 브와디스와프가 군대를 이끌고 가담하면서 전력을 재정비한 그는 1289년 2월 26일 시웨리츠 인근에서 헨리크 4세 추종자들의 군대를 격파했다. 헨리크 4세를 지지했던 시치나와 공자 프젬코는 전사했으며, 오포예의 공자 볼코 1세는 브와디스와프에게 사로잡혔다.
하지만 볼레스와프 2세는 폴란드 대공을 계승하려던 것을 돌연 그만두고 브와디스와프에게 떠넘겼는데,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브와디스와프는 크라쿠프 주교 파베우의 도움을 받아 바벨 성을 공략하고 스칼라와 시비엥치체에 요새를 세우면서 크라쿠프를 압박했다. 그러면서 스스로 크라쿠프 및 산도미에시 공작이라고 칭했다. 이에 헨리크 4세가 친히 군대를 이끌고 크라쿠프로 진격했고, 1289년 여름 크라쿠프 인근에서 브와디스와프를 격파했다. 브와디스와프는 산도미에시로 피신한 뒤 그곳에서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의 후원을 받으며 헨리크 4세에 맞섰다.
1290년 6월 23일, 헨리크 4세가 돌연 사망했다. 그 후 대폴란드 공작 프셰미수 2세가 헨리크 4세의 유언에 따라 폴란드 대공으로 선임되었다. 프셰미수 2세는 굳이 브와디스와프를 산도미에시에서 몰아내려 하지 않았고, 소 폴란드는 크라쿠프와 산도미에시라는 2개의 공국으로 분열되었다. 프셰미수 2세는 1290년 6월에 크라쿠프를 잠깐 방문해 귀족 및 성직자 대표들을 만나 그들이 종전대로 특권을 누릴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하고 포즈난으로 돌아간 뒤에는 다시는 소폴란드로 돌아오지 않았으며, 포즈난으로 돌아갈 때 볼레스와프 2세 시초드리 시절부터 크라쿠프 대성당 재무부에 보관되었던 대관식 휘장을 가져갔다.
이 무렵, 보헤미아 국왕 바츨라프 2세는 자신의 숙모이자 레첵 2세의 미망인인 그리피나를 통해 소폴란드에 대한 권리가 있으며, 독일왕 루돌프 1세 역시 인정한 바 있다며 소폴란드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다. 프셰미수 2세는 보헤미아 왕국의 군사력과 부가 막강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힘만으로는 보헤미아에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1290년 10월 14일 그니에즈노 대주교 야쿠브 스빈카가 주재한 공의회에 참석해 여러 귀족 및 사제들과 두루 논의한 끝에, 보헤미아 국왕에게 소폴란드에 대한 권리를 넘기고 금전적 보상을 받기로 합의했다. 1291년 4월 10일, 바츨라프 2세가 크라쿠프 공작을 칭하는 문서를 발행했다. 뒤이어 4월 하반기에는 밤베르크 주교 아눌프가 이끄는 체코군이 소폴란드의 핵심 요충지인 바벨에 주둔했다.
바츨라프 2세는 프셰미수 2세와는 달리 산도미에시에서 할거하는 브와디스와프를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브와디스와프는 이를 눈치채고 헝가리 용병들을 고용한 뒤 크라쿠프 지역에 위치한 비실리카 시를 공격했다. 바츨라프 2세는 이에 반격할 준비에 착수했다. 1291년 9월 1일 리토미슐에서 소폴란드 귀족들을 소집해 그들의 특권을 보장하는 대가로 지원을 약속받았다. 이후 브란덴부르크와 상부 실레시아의 지원군을 규합한 뒤 산도미에시로 진격하여 우키에테크 시를 별다른 희생을 치르지 않고 공략했다. 뒤이어 1292년 여름 시에리츠에 입성했고, 브와디스와프의 항복을 받아냈다. 브와디스와프는 형제 카지미에시 2세와 함께 보헤미아군에게 사로잡힌 뒤 1292년 10월 9일 소폴란드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하고 바츨라프 2세에게 경의를 표하는 대신 쿠야비의 소유권을 인정받는 협약을 체결했다.
프셰미수 2세는 대폴란드 공국의 코앞인 시에라즈까지 군대를 진주시킨 바츨라프 2세의 행보에 위협을 느끼고, 이에 맞설 준비에 착수했다. 1293년 1월, 그는 브와디스와프와 카지미에시 2세 형제를 칼리슈로 불러들인 뒤, 크라쿠프의 지위를 계승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그 결과 처음에는 프셰미수 2세가 크라쿠프 공작이자 폴란드 대공을 맡고, 그가 후계자를 두지 못하고 죽으면 브와디스와프가 뒤를 이어 맡고, 마지막에는 카지미에시 2세가 맡기로 합의했다. 그러면서 보헤미아로부터 소폴란드를 회복하는 걸 목표로 삼고 서로 힘을 합쳐 협력하기로 했으며, 그니에즈노 대주교에게 순은 300 그지브나(grzywna)를 매년 지불하고 첫 2년 동안엔 그 두배를 지급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그와구프 공작 헨리크 3세와도 동맹을 체결하고 실레시아의 병력 지원을 약속받았다.
1294년 카지미에시 2세가 리투아니아인과의 전쟁을 치르던 중 사망하자, 브와디스와프는 형제가 맡고 있던 웽치차를 인수했다. 1295년 6월 26일 프셰미수 2세가 폴란드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했지만 불과 7개월 만인 1296년 2월 8일 로고즈노에서 열린 카니발 행사에 참석하던 중 괴한들의 습격으로 피살되었다. 그 후 프셰미수 2세의 영역은 일전에 합의한 대로 브와디스와프에게 넘어가게 되었지만, 그워구프 공작 헨리크 3세가 이에 반발하면서 내전이 벌어질 조짐이 보였다.
하지만 브와디스와프는 내전을 피하고 싶었던 데다 이복형제 지에모미스우의 아들이자 그의 조카인 레셱 지에모미슈비치가 그단스크 포메라니아 일대에 대한 상속권을 요구하며 반기를 들었기 때문에 조속히 평화 협상을 하기로 했다. 이후 양자간의 협상이 진행된 끝에, 그 해 3월 10일 크자빈에서 합의가 이뤄졌다. 그는 오브라 강과 바르타 강을 따라 노치 강 어귀까지 이어지는 경계를 설정하고, 헨리크 3세에게 대폴란드의 서쪽과 남쪽 일부를 떼어주고 나머지는 자기가 가지기로 했으며, 자신이 후계자를 두지 못한 채 사망할 때 헨리크 3세가 영지를 인계받도록 했다. 또한 헨리크 3세의 장남인 헨리크 4세는 브와디스와프의 양자가 되었으며, 헨리크 4세가 성년이 되면 포즈난 공국을 물려받기로 했다.
브와디스와프는 크자빈 협약을 체결한 뒤 레첵 지에모미슈비치와도 협상한 끝에 비쇼그로드 일대를 영지로 가져가되 자신의 가신이 되도록 했다. 하지만 이후 대폴란드에서의 통치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곳곳에서 도적떼가 창궐했고, 포즈난 주교 안제이 자렘바(Andrzej Zaremba)는 그의 권위를 노골적으로 부정하고 그가 다스리는 영지에 성무 금지령을 내렸다. 또한 대폴란드 귀족들은 그워구프 공작 헨리크 3세와 접촉해 장차 브와디스와프를 밀어내고 그를 대폴란드 공작으로 추대할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브와디스와프의 권위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다른 곳에서 찾아왔다. 1299년 8월, 보헤미아 국왕 바츨라프 2세는 콜레카에 머물고 있던 브와디스와프에게 사절을 보내 프라하로 찾아와서 자신에게 경의를 표한다면 그가 프셰미수 2세가 사망 후 확보한 영지들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브와디스와프는 그의 요구를 따르겠다고 약속했지만 지키지 않았다. 이에 바츨라프 2세는 1300년 브와디스와프 1세에게 반감을 품은 대폴란드 귀족 및 성직자 대표들과 접견한 뒤 브와디스와프 대신 자신이 그들의 지도자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게 했다. 그 후 보헤미아군을 대폴란드 공국으로 파견했고, 대다수의 대폴란드 귀족과 튜튼 기사단이 호응하면서 삽시간에 대폴란드 대부분을 석권할 수 있었다. 이후 바츨라프 2세는 폴란드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했고, 크라쿠프 주교 얀 무스카타는 브와디스와프에게 파문을 선고했다.
브와디스와프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여기고 국외로 망명했다. 그가 정확히 어느 곳에 머물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학자들은 갈리시아의 루테니아나 헝가리에 갔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 그의 아내 야드비가와 자식들은 평범한 마을 주민으로 위장한 채 쿠야비의 라지예우프에 숨어지냈다. 1304년경, 브와디스와프는 헝가리의 대귀족 어버 아메데의 도움에 힘입어 병력을 끌어모은 뒤 산도미에시로 진군해 비실리카와 를로프를 장악했다. 당시 바츨라프 2세는 아들 바츨라프 3세를 헝가리 국왕으로 안착시키기 위해 전쟁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던 중이었던 터라 그의 이같은 움직임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1305년 6월 21일 바츨라프 2세가 결핵에 시달리다 사망하자, 브와디스와프는 이 때를 틈타 1305년 연말까지 산도미에시, 시에리츠, 웽치차 및 쿠야비아 공국을 탈환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보헤미아 왕위에 오른 바츨라프 3세는 헝가리 왕위를 니더바이에른 공작 오토 3세에게 넘기고 그들의 지원을 받아 폴란드 왕위를 유지하고자 했다. 이후 군자금을 끌어모은 뒤 1306년 7월 올로모우츠에서 용병들을 모집해 장차 브와디스와프를 무찌르려 했다. 그러나 1306년 8월 4일 보텐슈타인의 기사 콘라트에게 피살당했고, 보헤미아는 이후로 바츨라프 3세의 처남 인드르지흐 코루탄스키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알브레히트 1세의 아들 루돌프 1세간의 내전에 휘말렸다.
바츨라프 3세가 암살당하자, 소폴란드 귀족들은 브와디스와프를 주군으로 받들기로 했다. 그는 이들의 초대를 받아들이고 1306년 9월 1일 크라쿠프에 입성한 뒤 바츨라프 2세의 폴란드 국왕 대관식을 주관하고 자신에게 파문을 선고했던 크라쿠프 주교 얀 무스카타와 화해했다. 뒤이어 포메라니아의 스와프노에 군대를 파견해 점령했고, 그해 12월 쿠야비의 비제보에서 그단스크 포메라니아 귀족 대표들을 접견해 그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이제까지는 시비엥츠 가문이 피아스트 왕가를 대리하여 그단스크 포메라니아를 통치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그는 걸핏하면 반기를 일으키는 이들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고 보고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먼저 트레츠와 그단스크 시에 대한 통치권을 빼앗았고, 쿠야비의 주교 거워드를 부추겨서 피오트르 시비엥츠가 그동안 횡령한 주교구의 수입을 반환하라고 요구하도록 했고, 이어진 재판에서 피오트르에게 2,000 플로린에 달하는 거금을 벌금으로 지불하라는 판결을 내리게 했다.
이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시비엥츠 가문은 브와디스와프에게 반기를 들기로 마음먹고, 1307년 7월 17일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발데마르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포메라니아에 대한 주권을 인정받았다. 그해 8월, 발데마르는 그단스크 포메라니아로 진군해 브와디스와프의 군대를 몰아내려 했다. 현지군이 그단스크 요새에서 격렬하게 저항해 침략군의 기세를 주춤하게 만들었지만, 브와디스와프는 자신이 현재 보유한 병력으로는 브란덴부르크군을 물리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그단스크의 도미니코회 수도원의 조언에 따라 튜튼 기사단에게 구원을 요청하기로 했다. 헤움노의 영주이자 튜턴 기사단장 군터 폰 슈바르츠부르크는 이 기회에 포메라니아로 영역을 확장하기로 마음먹고 요청을 받아들였다.
군터가 이끄는 기사단은 그단스크에서 브란덴부르크인들을 격파한 뒤 연이어 트체프, 노베를 공략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확보한 영토를 브와디스와프에게 돌려주길 거부했다. 1309년 4월, 쿠야비의 그라비에서 그단스크 포메라니아의 지배권을 놓고 브와디스와프와 튜튼 기사단간의 회의가 열렸지만, 양자간의 의견차가 컸기 때문에 결렬되었다. 1309년 7월, 튜튼 기사단은 시비에시를 포위 공격해 9월에 함락시켰다. 이후 자신들의 행위를 합법화하기 위해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으로부터 그단스크 포메라니아에 대한 지배권을 구입했다. 그후 튜튼 기사단은 본거지를 그단스크 포메라니아의 도시인 말보르크로 옮기고 통치를 행사했다.
튜튼 기사단이 그단스크 포메라니아 대부분을 가져가는 상황이었지만, 브와디스와프는 제때에 이를 저지하지 못했다. 크라쿠프 주교 얀 무스카타가 또다시 그에게 반기를 들기로 마음먹고, 오포에 공작 볼코 1세를 소폴란드의 주인으로 삼으려 들었던 것이다. 이에 그는 그니에즈노 대주교 야쿱 시윈카를 설득해 1308년 6월 14일 얀 무스카타를 파문 및 주교직 박탈을 선고하게 한 뒤 얀 무스카타를 체포해 반년간 감옥에 가뒀다. 그후 크라쿠프에서 추방된 얀 무스카타는 1317년이 되어서야 브와디스와프에 대한 파문을 취소하는 조건으로 크라쿠프로 돌아올 수 있었다.
1311년, 크라쿠프 시장 알베르트가 브와디스와프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 그는 오포예 공작 볼코 1세를 불러들여 소폴란드의 주인으로 삼으려 했다. 소폴란드의 여러 도시는 반란에 가담했지만, 바벨 성은 브와디스와프를 지지하는 군대에 의해 철통같이 방비되었다. 1312년 4월 볼코 1세가 크라쿠프에 도착했지만, 바벨 성을 공략하는 데 실패했다. 이후 브와디스와프는 헝가리 왕국으로부터 지원군을 받아낸 뒤 반격을 개시했다. 먼저 산도미에시를 평정했고, 1312년 6월 크라쿠프로 진격해 볼코 1세가 물러나게 했다. 볼코 1세는 알베르트와 함께 오포예로 퇴각한 뒤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알베르트를 투옥했다. 이렇게 반란을 진압한 뒤, 브와디스와프는 반란에 가담한 귀족들을 교수형에 처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으며, 크라쿠프 시 역시 일부 특권을 박탈당했다. 여기에 크라쿠프에 거주했던 독일인들이 반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했기 때문에, 이후로는 도시의 공식 기록에 독일어 대신 라틴어가 도입되었다.
한편, 프셰미수 2세의 후계자로 자처하며 대폴란드 공작을 자칭했던 그워구프 공작 헨리크 3세는 1309년 12월 9일에 사망하면서 자신의 영지를 다섯 아들에게 분할했다. 1314년, 귀족과 기사들이 헨리크 3세의 아들들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포즈난을 장악한 뒤 브와디스와프에게 자신들을 보호해달라고 요청했다. 브와디스와프는 즉시 군대를 파견해 그들을 도왔고, 그해 8월 포즈난에 입성한 뒤 귀족과 기사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헨리크 3세의 자식들은 속절없이 밀려났고, 대폴란드 공국의 상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후 브와디스와프는 덴마크 왕국, 스웨덴 왕국, 노르웨이 왕국 등 스칸디나비아반도의 여러 국가와 동맹을 맺고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과 튜튼 기사단에 대항했다.
이제 폴란드를 어느 정도 통합한 브와디스와프는 폴란드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치르기로 마음먹었다. 1318년 6월 20~23일 술레오프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폴란드 성직자 대표 전원이 그를 폴란드 국왕으로 옹립하고 교황령에 승인을 요청하기로 했다. 그리고 6월 29일, 피즈드리에서 열린 귀족 및 기사 회의에서도 브와디스와프의 폴란드 국왕 취임이 받아들여졌다. 브워츠와베크의 주교 거워드가 아비뇽 유수 중이던 교황령으로 파견되었다. 이에 보헤미아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가 폴란드 국왕으로서의 권리는 자신에게 있다며 격렬하게 항의했다. 교황 요한 22세는 이 때문에 결정을 미루다가, 브와디스와프가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축일 계산 방법을 교황에 더 유리하게 변경하겠다는 제안을 하자 1319년 8월 20일에 브와디스와프의 대관식이 얀 루쳄부르스키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다고 판정하고 대관식을 승인했다.
카지미에시 알치모비치(Kazimierz alchimowicz, 1840 ~ 1916) 작, 브와디스와프 1세의 대관식
1320년 1월 20일, 크라쿠프의 바벨 대성당에서 그니에즈노의 야니스와프 대주교의 주관하에 브와디스와프의 폴란드 국왕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바츨라프 2세가 일전에 사용했던 휘장은 보헤미아로 옮겨졌기 때문에, 폴란드 왕실 휘장이 새로 만들어졌다. 그가 그니에즈노가 아닌 크라쿠프에서 대관식을 거행한 것은 얀 루쳄부르스키와의 마찰을 피하고 싶었던 교황령의 압력이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얀 루쳄부르스키는 이를 빌미삼아 브와디스와프는 단지 크라쿠프의 왕일 뿐이며, 폴란드 전체의 왕은 바로 자신이라고 주장했다.
1320년 4월 14일, 브제시치 쿠야브스키에서 튜튼 기사단이 그단스크 포메라니아를 점거한 사건에 관한 교회 재판이 열렸다. 1321년 2월 10일, 판사는 폴란드 측의 증인 25명의 진술을 들은 뒤 브와디스와프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르면, 튜튼 기사단은 그단스크 포메라니아를 즉시 브와디스와프에게 반환하고 그동안 수익을 징수한 대가로 은화 3만 플로린을 지불해야 하며, 재판 비용도 내놔야 했다. 튜튼 기사단은 이에 따르지 않고 사도좌에 항소를 제기했다. 교황은 삼비아 주교에게 검토를 맡겼지만, 폴란드 측이 항의하자 항소를 고려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튜튼 기사단이 끝까지 판결을 거부했기 때문에 집행은 이뤄지지 않았다.
브와디스와프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 튜튼 기사단, 보헤미아 왕국을 동시에 적대하는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헝가리 왕국과 동맹을 맺기로 하고, 1320년에 자신의 딸 엘즈비에타를 헝가리 국왕 카로이 로베르트와 결혼시켰다. 1322년 실레시아 공국에서 내전이 발발했다. 이때 브로츠와프 공작 헨리크 6세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브와디스와프에게 자신에게 군대를 보내준다면 브로츠와프의 주권을 넘기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는 이 제안을 거부했다.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군사적, 경제적으로 막강한 보헤미아 왕국이 이를 문제삼아 전쟁을 벌일 것을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1325년에는 할리치 루테니아에서 벌어진 내전을 헝가리와 함께 수습하고 볼레스와프 예르지 2세를 그곳의 공작으로 앉힘으로써 루테니아에 대한 폴란드의 영향력을 강화시켰다. 여기에 리투아니아 대공 게디미나스의 딸인 알도나와 자신의 아들 카지미에시 3세를 결혼시킴으로써, 강력한 군사력을 갖춘 리투아니아 대공국과의 결혼 동맹을 맺었다.
1326년, 교황 요한 22세로부터 교황령과 심한 갈등을 벌이고 있는 바이에른의 비텔스바흐 가문이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을 물려받는 것을 막아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그는 교황의 지지자로서 이를 받들기로 하고, 리투아니아군의 지원을 받으며 브란덴부르크로 진군해 그해 2월 10일에 입성한 뒤 미엥지르제츠를 병합했다. 그러나 리투아니아인들이 브란덴부르크의 여러 성당과 수도원을 약탈했기 때문에, 그는 이교도와 야합하여 기독교도들을 해치는 범죄를 저지른 사악한 왕이라는 비난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는 이에 신경쓰지 않고 공세를 이어가 니에모들린 공작 볼코로부터 비엘룬을 탈취했다.
1327년, 브와디스와프는 프워츠크를 공략하고 마조프셰를 폴란드 왕국의 영역으로 삼기 위한 공세를 개시했다. 원정군은 프워츠크를 공략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그러나 튜튼 기사단이 그를 규탄하며 전쟁을 단행하면서, 폴란드-튜튼 기사단 전쟁이 발발했다. 보헤미아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는 이 때를 틈타 1327년 2월 브와디스와프의 공세에 위협을 느끼고 있던 상부 실레시아 공작들을 오파바에 불러들인 뒤 그들을 지켜주는 대가로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이후 브와디스와프가 튜튼 기사단을 상대로 국경 지대에서 연이어 전투를 치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얀 루쳄부르스키는 본격적으로 폴란드와의 전쟁에 착수하기로 결심했다.
1329년, 얀 루쳄부르스키는 튜튼 기사단의 지원을 받아 도브쥔을 공략한 뒤 튜튼 기사단에게 넘겨줬다. 여기에 프워츠크 공작 볼레스와프도 그해 3월에 얀 루쳄부르스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후 튜튼 기사단은 비스툴라 강을 건너 브워츠와베크(Włocławek), 라치용쉬(Raciąż), 프세드제(Przedcze) 주교구를 파괴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브와디스와프는 헝가리 국왕 카로이 로베르트에게 도움을 요청하고자 아들이자 후계자인 카지미에시 3세를 헝가리로 파견했다.
카지미에시는 헝가리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아내는데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그는 카로이의 궁정에 머무는 동안 카로이의 아내인 폴란드의 엘즈비에타의 시녀 클라라 자(Clara Záh)에게 외설스러운 농담을 던졌다. 그러자 클라라 자의 아버지 펠리키안 자(Felician Záh)는 딸이 모욕당하는 와중에 왕족들이 만류하지 않는 것에 격분했고, 그들에게 복수하기로 마음먹었다. 1330년 4월 17일, 펠리키안 자는 왕궁 식당에 칼을 들고 난입하여 카로이와 왕비의 오른손에 상처를 입힌 뒤 카로이의 두 아들 러요시와 언드라시를 죽이려 했다가 왕실 근위대에게 사살되었다. 클라라를 제외한 펠리키안 자의 아이들은 고문을 당해 죽었고, 클라라는 입술과 손가락 여덟 개가 잘린 뒤 말에 묶인 채 여러 마을에서 조리돌림당했다.
1330년, 튜튼 기사단은 쿠야비와 대폴란드의 여러 도시를 성공적으로 약탈했다. 이에 브와디스와프는 리투아니아군의 지원을 받아 비스툴라 강을 건넌 뒤 튜튼 기사단의 핵심 영토인 헤움노를 기습 공격했다. 그 해 9월, 그의 군대는 튜튼 기사단을 코왈레보 포모르스키에 성에 몰아넣고 공성전을 벌였다. 그러나 원정 도중에 브와디스와프와 게디미나스간의 개인적인 다툼으로 인해 동맹이 파탄나버리자, 1330년 10월 18일 튜튼 기사단과 7개월간의 휴전 협약을 맺고 폴란드로 귀환했다. 1331년, 디트리히 폰 알텐부르크가 지휘하는 튜튼 기사단은 보헤미아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와 함께 폴란드를 협공해 칼리슈 성벽 아래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그해 중반기에 원정을 개시한 튜튼 기사단은 피즈드리 마을 인근에서 폴란드군을 격파하고 그니에즈노 일대를 약탈했다.
그러나 당초 합의했던 것과는 달리, 얀 루쳄부르스키는 시비드니차 공작 볼코 2세의 저항으로 인해 전진하지 못하다가 그워구프 공작 프셰미수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워구프로 방향을 돌려 그해 10월 2일에 함락시켰다. 이 때문에 홀로 폴란드군과 대적하게 된 튜튼 기사단은 칼리슈를 한동안 포위 공격했으나 공략이 쉽지 않자 쿠야비 정복으로 목표를 변경했다. 1331년 9월 23~24일, 칼리슈의 코닌으로 진군한 튜튼 기사단은 브와디스와프이 친히 이끄는 폴란드군과 격돌했다. 전투는 결판이 나지 않았지만, 브와디스와프는 승리를 확신하지 못하고 철수했다. 그 후 튜튼 기사단이 브제시치 쿠야프스키로 진격하자, 브와디스와프와 카지미에시 3세 부자는 5,000명의 폴란드군을 이끌고 튜튼 기사단의 후방 경비대를 라지예우프에서 급습해 격파하고 디트리히 폰 알텐부르크를 생포했다.
1331년 9월 27일, 후방 경비대가 격파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튜튼 기사단 주력 부대가 아군을 구하기 위해 방향을 돌려 진군하던 중 프워프체 마을 인근에서 브와디스와프, 카지미에시 부자가 이끄는 폴란드군과 격돌했다. 처음에는 폴란드 군대가 우위를 점해 고위급 기사들을 사살하거나 포획했고, 튜튼 기사 일부는 달아났다. 그러나 황혼 직전에 플라우엔의 하인리히 로이스가 이끄는 튜튼 선봉 부대가 전장에 도착해 반격을 가하면서, 폴란드군은 큰 피해를 입고 패퇴했고 디트리히 폰 알텐부르크를 비롯한 기사단 포로 대부분이 구출되었다. 이후 어둠이 깔리자, 브와디스와프는 전장에서 철수했고, 튜튼 기사단은 가장 귀중한 폴란드 포로 56명만 살려주고 나머지는 처형했다. 튜튼 기사단의 독일 전령이자 연대기 작가인 마르쿠브르크의 비간트에 따르면, 전투 후 사망자 수를 헤아린 결과 양측에서 4,187명이 전사한 사실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일련의 전투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은 튜튼 기사단은 더이상의 원정은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비스툴라 강 너머로 철수했다. 하지만 그들은 전력을 재정비한 뒤 1332년 오토 폰 루터베르크의 지휘하에 재차 쿠야비로 진격해 현지군의 미약한 저항을 물리치고 4월 20일에 쿠야비의 수도인 브레스트를 함락했다. 뒤이어 이노브로츠아프 마저 튜튼 기사단에게 넘어가자, 그니에프코프 공작 카지미에시 3세는 적에게 넘어가기 전에 그니에프코프 시를 파괴하고 주민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송시켰다. 이후 폴란드와 튜튼 기사단간의 평화 협상이 진행된 끝에 1333년 3월 2일 그해 성신 강림 축일(5월 23일)까지 이어지는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휴전 협정이 체결된 날, 브와디스와프는 크라쿠프에서 사망했고 바벨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사후 아들 카지미에시 3세가 폴란드 국왕으로 등극했다.
3. 가족
- 칼리시의 야드비가(1266년에서 1270년 사이 ~ 1339): 대폴란드 공작 볼레스와프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