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14:34:06

피아스트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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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피아스트 왕조 문장.svg.png
왕가 문장
존속년도 960년 ~ 1370년
국가 폴란드 왕국, 보헤미아 왕국
주요 군주 미에슈코 1세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
카지미에시 3세

1. 개요2. 역사
2.1. 피아스트2.2. 미에슈코 1세2.3.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2.4. 미에슈코 2세 람베르트2.5. 1차 혼란기와 카지미에시 1세2.6. 볼레스와프 2세 시초드리2.7.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2.8. 볼레스와프 3세 크쉬보우스티
2.8.1. 즈비그뉴와의 분쟁2.8.2. 포모제 정복2.8.3. 헝가리 내전 개입과 메르제부르크 협약2.8.4. 볼레스와프의 승계법과 폴란드의 분열
2.9. 2차 혼란기2.10. 레첵 1세2.11. 3차 혼란기2.12. 헨리크 1세2.13. 몽골 제국의 침략2.14. 볼레스와프 5세2.15. 레첵 2세2.16. 4차 혼란기2.17. 프셰미수 2세2.18. 프르셰미슬 왕조의 지배기2.19. 브와디스와프 1세2.20. 카지미에시 3세
2.20.1. 집권 당시의 상황2.20.2. 외치
2.20.2.1. 보헤미아 왕국과의 타협2.20.2.2. 튜튼 기사단과의 타협2.20.2.3. 헝가리 왕국과의 동맹2.20.2.4. 동방 원정2.20.2.5. 마조프셰 귀속
2.20.3. 내치
2.20.3.1. 왕권 강화 정책2.20.3.2. 군사 개혁2.20.3.3. 경제 진흥2.20.3.4. 문화 진흥2.20.3.5. 유대인 우대 정책
2.21. 피아스트 왕조의 단절
3. 역대 폴란드 대공 및 국왕 목록
3.1. 전설상의 피아스트 군주3.2. 역사상의 피아스트 군주3.3. 프르셰미슬 왕조의 지배기3.4. 피아스트 왕조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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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 왕국 최초의 역사적 왕조. 전설상의 인물 피아스트의 이름에서 유래했으며, 950~960년경 등장한 미에슈코 1세를 시작으로 1370년 카지미에시 3세가 사망할 때까지 폴란드를 통치했다. 피아스트 가문은 폴란드 공작 및 국왕 외에도 보헤미아 공국(1002~1003, 1003~1004)의 공작위에 오르기도 했다.

2. 역사

2.1. 피아스트

12세기에 알려지지 않은 작가가 집필한 <대 폴란드 연대기>에 따르면, 폴란의 대공 포피엘 2세가 두 아들이 머리를 깎는 성인식이 열리는 것을 기리기 위해 잔치를 열었다. 이때 두 명의 낯선 사람이 초대도 없이 잔치에 오자, 포피엘 2세는 이를 불쾌하게 여겨 테이블에 앉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수도 그니에즈노에서 쫓아냈다. 그 후 두 사람은 교외지를 떠돌다 피아스트라는 농부를 만났다. 피아스트는 두 사람을 자기 집으로 데려와서 환대했고, 두 사람은 이에 감사를 표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도착이 당신에게 기쁨이 되기를 바라며, 당신은 우리에게서 풍성한 번영과 후손의 영예와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후 피아스트는 아들의 머리를 깎는 의식을 거행했고, 이를 기리기 위해 두 사람과 함께 식사했다. 가난한 형편이었던 터라 음식이 변변치 않았는데, 이때 기적이 일어났다. 술통에 맥주가 떨어지지 않았고, 도살한 돼지가 열 그릇을 채울 만큼 많았던 것이다. 피아스트와 아내 줴피하는 두 손님과 상의한 뒤 마을 주민들을 모두 초대해 함께 즐기기로 했다. 이후 두 손님은 당시 7살이었던 피아스트의 아들에게 몸소 세례를 주고 시에모비트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이후 성장한 시에모비트는 포피엘 2세를 몰아내고 자신이 폴란의 대공이 되었다고 한다.

크라쿠프 수도사이자 폴란드 역사 연대기 저자인 빈센티 카드우벡(Wincenty Kadłubek, 1150년경 ~ 1223년 3월 8일)에 따르면, 피아스트를 찾아온 두 손님은 일반인이 아니라 천사가 된 사도 요한바울로였다고 한다. 또한 14세기에 라틴어로 편찬된 <폴란드, 러시아 및 그 이웃 연대기>에 따르면, 이 사건은 크루슈비차에서 벌어졌으며 대공으로 선출된 이는 시에모비트가 아니라 피아스트였다고 한다.

폴란드 성직자, 연대기 작가인 얀 드우고시(Jan Dlugosz, 1415 ~ 1480)에 따르면, 피아스트의 선출은 포피엘 2세 사후 이웃 부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이뤄졌다고 한다. 또한 그는 피아스트가 폴란인들의 수도를 크루슈비차에서 그니에즈노로 이전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피아스트는 120세까지 살았지만 레슈코 3세가 자녀들에게 분할하기 전에 존재했던 통합된 폴란인들의 나라를 복원하는 데 실패했다고 한다.

16세기 폴란드 역사가 마르친 비엘스키(Marcin Bielski, 1495 ~ 1575)에 따르면, 피아스트는 양봉가 또는 수레공이었으며, 포피엘 2세가 죽은 후 사람들이 호수 반대편에서 가장 먼저 올 사람을 대공으로 선출하기로 했을 때 호수 반대편에 위치한 양봉장에서 돌아오면서 대공으로 선출되었다고 한다. 또한 비엘스키는 그의 통치가 50년간 지속되었으며, 선출은 842년에 이뤄졌다고 덧붙였다.

현대의 역사학자들은 위의 이야기들을 후대에 지어진 전설로 취급하며, '피아스트'라는 명칭의 기원은 piasta (폴란드어로 "허브")와 piastun(폴란드어로 "관리인" 또는 "수호자") 중 하나일 거라 추정한다. 이중 두번째 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그가 다른 통치자의 궁정에서 메이저도모 (majordomo) 또는 "집의 청지기"를 맡았다가 점차 권력을 장악하여 원래 통치자를 몰아내고 폴란인의 지도자가 되었을 거라 추정한다. 프랑크 왕국의 궁재 가문이었던 카롤링거 가문이 원래 통치 왕조였던 메로빙거 왕조를 몰아내고 프랑크 왕국을 지배하게 된 것과 비슷한 맥락.

2.2. 미에슈코 1세

신화 및 설화를 배제하고 역사에 최초로 등장하는 폴란드 군주는 950~960년경에 등장한 미에슈코 1세였다. '미에슈코(Mieszko)'라는 이름은 여러 기록에서 Mieszk , Mieszka , Misika , Mieszek , Mysko 등 다양한 형식으로 기재되었다. 이 이름의 유래는 불분명하다. 폴란드 크라쿠프의 주교로서 교회 개혁가이자 역사가인 윈센티 카우베크(Wincenty Kadłubek, 1150 ~ 1223)에 따르면, 그의 부모가 맹인으로 태어난 그를 보고 혼란스러워 했기 때문에 '혼란'이라는 의미인 미에슈코로 지어졌다고 한다. 13세기에 편찬된 <대폴란드 연대기>에서도 맹인인 아들을 낳은 뒤 7년 동안 다른 아들을 낳지 못하자, 외아들이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들 거라며 이런 이름을 지어줬다고 밝혔다.

반면 15세기 폴란드 역사가 얀 디우고시(Jan Długosz)는 명성을 가질 것으로 예상된다는 의미인 미에치스와프(Miećsław)를 축약한 이름이라고 주장했으며, 19~20세기 슬라브어 문헌학자인 알렉산데르 브뤼크너(Aleksander Brückner, 1856 ~ 1939)는 불곰(miś/misko)에서 유래했다고 추정했다. 20세기 초반 독일의 몇몇 역사가들은 스칸디나비아 이름인 Dagome가 폴란드로 전해지면서 미에슈코로 변역되었으며, 그의 정체는 폴란인들을 복종시킨 노르만족이라고 주장했다. 현대의 일부 폴란드 학자들은 서슬라브족의 일원이었던 벤트인의 왕이라는 뜻의 'Vindakonungr'가 나중에 폴란드어로 번역되면서 미에슈코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미에슈코 1세는 통치 초기에 마조프셰와 포메라니아 중부 및 동부 일대, 그리고 오드라 강변 지역에 거주하는 폴리비안 슬라브 부족들을 빠르게 복속시켰다고 전해진다. 이에 대해 설명한 독일측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리시카비키(Licikaviki)라는 종족의 왕이었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리시카비키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 포메라니아에 거주하다가 미에슈코에게 복속된 루부시(Lubusz) 족의 오기라는 설, 미에슈코의 조부인 레스테크에서 파생되어 미에슈코가 다스리는 민족 전체를 가리킨다는 설 등이 제기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합의되지 않았다.

이 무렵, 독일 귀족들은 여전히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은 슬라브인들이 거주하는 오데르강 일대에 대한 확장 정책을 추구했다. 963년, 변경백 게로는 루사티아 부족과 슬루피아 부족을 정복했고, 이로 인해 미에슈코 1세의 영역과 맞닿게 되었다. 당시 미에슈코 1세는 포메라니아 서부 일대에 거주하는 울린인과 벨레티인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으나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게다가 작센 빌룽 가문의 비흐만 2세가 포메라니아 서부로 망명한 뒤 그곳에 사는 슬라브인들을 이끌고 963년 미에슈코 1세를 상대로 2차례 승리를 거두고 미에슈코의 이름없는 형제를 살해했다고 한다.

파일:Baptism_of_Poland.Mural_in_Gniezno.jpg

이렇듯 독일 제후들의 위협이 가시화되자, 미에슈코는 964년부터 보헤미아 통치자인 볼레슬라프 1세와 협상했다. 그 결과 965년에 볼레스와프 1세의 딸 두브라우카와 결혼했다. 그리고 966년에 세례성사를 받고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폴란드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두브라우카와 결혼하기 전에는 7명의 아내를 취했지만, 두브라우카와 결혼하려면 이들과 헤어지고 그리스도인이 되겠다고 약속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자 받아들였다고 한다. 미에슈코는 기독교 개종을 통해 독일 변경백들이 이교도들을 기독교로 강제 개종시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쳐들어올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했을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중앙 집중화 정책에 방해가 되는 "오래된" 사제 계급을 제거하기 위해 기독교 개종을 감행했을 거라 추정하기도 한다.

기독교 걔종 후, 라틴 문화가 폴란드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교육을 받고 글을 읽을 줄 아는 최초의 고문이 궁정에 신설되었고, 교회 조직의 창설이 시작되었다. 968년에는 포즈난에 라틴 예식을 따르는 선교 주교단이 설립되었다. 폴란드 최초의 주교로 일컬어지는 요르단(Jordan)이 창설한 이 주교단은 다른 지역의 대주교가 아닌 교황의 직속 주교구를 자처했다. 그러나 기독교 개종을 거부하고 옛 슬라브 신앙과 관습을 고집하는 슬라브인은 여전히 많았고, 미에슈코는 이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 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어야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파일:Poland.mieszko.jpg

기독교 개종을 감행해 독일과 보헤미아와의 관계를 개선한 뒤, 미에슈코는 포메라니아 정복 전쟁을 감행했다. 967년 2개의 기병부대로 구성된 보헤미아 지원군과 합세한 뒤 비흐만 2세가 이끄는 슬라브인들과 맞붙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비흐만 2세를 전사시킨 뒤 오데르 강 어귀를 정복했다. 뒤이어 노테치(Noteć)강 유역을 공략하고 970년 산토크(Santok)에 요새를 건설했댜. 972년 작센 동부 변경백 오도가 폴란인의 땅을 침공하자, 그는 이에 맞서 세디니아에서 2차례 맞붙었다. 첫번째 전투에서는 오도가 승리했지만, 두번째 전투에서는 미에슈코가 패퇴를 가장해 적을 유인하는 사이 그의 동생인 치데부르(Czcibor)가 적군의 측면을 기습하는 작전이 성공하면서 미에슈코가 승리를 거두었다.

973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는 미에슈코와 오도를 크베들린부르크에 소환해 두 사람이 자신의 허락 없이 전쟁을 벌인 것에 책임을 물으려 했다. 일부 사료에서는 미에슈코가 황제의 명령에 복종하여 크베들린부르크로 갔다고 하지만, 다른 사료에서는 위협을 느끼고 아들 볼레스와프를 대신 보냈다고 한다. 오토 1세가 어떤 판결을 내렸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크베들린부르크 회의가 끝난 지 몇 주 후인 5월 7일에 사망한 후 내전이 벌어졌기 때문에 판결이 집행되지 않았을 거라 추정된다.

오토 1세 사후,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가 오토 1세의 어린 아들 오토 2세를 밀어내고 제위를 차지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미에슈코는 보헤미아 공작 볼레스와프 2세와 함께 이 음모에 가담했다. 그러나 음모는 조기에 발각되었고, 오토 2세는 977년 보헤미아를 공격해 볼레스와프 2세를 복종시켰다. 979년, 오토 2세는 미에슈코 1세의 영역으로 진군했다. 원정의 과정과 결과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황제가 악천후로 인해 12월에 튀링겐과 작센 국경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이렇다할 승리를 거두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 후 양자는 980년 봄 또는 여름에 새로운 협정을 체결했고, 977년 아내 두브라우카가 사망한 뒤 홀아비로 지내던 미에슈코 1세는 북방변경백 디트리히의 딸인 할덴슬레벤의 오다와 재혼했다.

980년대 초, 미에슈코는 자신의 딸 또는 자매를 스웨덴 왕 에이리크 인 시그르셀리와 결혼시킨 뒤 스웨덴과 힘을 합쳐 포메라니아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덴마크인들을 몰아내려 했다. 덴마크인들은 991년경 폴란-스웨덴 연합군에게 패배했고, 포메라니아 방면 덴마크 세력 지도자는 추방되었다. 한편, 오토 2세는 982년 이탈리아에서 칼라브리아의 아랍인들에게 패배했다. 이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의 위세는 위축되었고, 983년 폴라비아의 슬라브인들이 대규모 봉기를 일으켜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같은 해 오토 2세가 사망하고 어린 아들 오토 3세가 제위에 오르자, 미에슈코 1세는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를 재차 지원해 이득을 챙기려 했다. 그가 제국 내전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기록이 부족해서 불분명하지만, 985년 자신의 영역으로 쳐들어온 폴라비아 슬라브인들을 상대할 때 오토 3세에게 충성을 바친 작센군의 지원을 받은 걸 보면 입장을 조기에 바꿔서 오토 3세에 가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986년 오토 3세의 군대가 보헤미아를 황폐화시키자, 미에슈코는 즉시 황제를 알연한 뒤 막대한 선물을 넘겼다. 일부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낙타를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오토 3세의 슬라브 원정에 가담해 각지를 황폐화하고 수많은 적병과 민간인을 살상했다. 두 사람이 공격한 지역의 위치는 기록이 미비해서 불확실한데, 일부 학자들은 폴라비아였을 거라 추정하고, 다른 학자들은 보헤미아였을 거라 본다. 990년, 미에슈코는 단독으로 보헤미아와 전쟁을 일으켜 실레시아 일대를 정복하고 브로츠와프, 글로구프, 오폴레에 요새를 건설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마워폴스카(Małopolska)를 정복하고 장남 볼레스와프의 영지로 삼았다.

991년경, 미에슈코는 다고메 유덱스(Dagome Iudex)로 명명된 유언장을 작성했다. 그는 이 유언장에서 자신의 국가를 교황의 보호하에 두고 자국의 국경이 어디까지인지를 설정했다. 이 유언장 덕분에, 미에슈코의 통치 말기에 폴란드 대공국의 국경을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당시 폴란드 대공국은 발트해에서 고대 프로이센, 루테니아, 크라쿠프, 모라비아 및 루사티아 상부, 그리고 그니에즈노를 포함한 오데르 강 어귀까지 이르렀다. 다만 문서에서는 모라비아에서 루사티아 상부까지 국경이 이어진다고 명시되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확립되었는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여기에 "인접 지역"으로 동부 포메라니아, 마조프셰, 시에라츠와 윙치차, 실레시아 및 루사티아의 일부가 거론되었다.

그 후 크베들린부르크 회의에 참석해 오토 3세와 황제의 모후인 테오파노 황후에게 선물을 교환하고 브레나 원정에 동행했던 미에슈코 1세는 본국으로 귀환한 직후인 992년 5월 25일 포즈난에서 열병에 시달리다 사망했다.

2.3.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

미에슈코 1세 사후, 그의 세 아들이 아버지가 물려준 영토를 나눠가졌다. 그러나 얼마 후 미에슈코 1세의 장남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가 정변을 일으켜 이복형제 미에슈코, 람베르트와 계모인 할덴슬레벤의 오다를 몰아내고 폴란드의 유일한 대공이 되었다. 볼레스와프 1세는 기독교가 아직 전파되지 않은 고대 프로이센에 영역을 확장하려 했다. 997년, 프라하에서 추방된 주교 보이치에흐 스와니코비치를 프로이센으로 보내 선교 사업을 벌이게 했다. 그러나 그 해 4월 23일에 보이치에흐가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아 살해당하고 수급이 베어져 기둥에 박히자, 그는 자신의 몸무게 만큼의 금을 원주민들에게 주고 보이치에흐의 유해를 받은 뒤 그니에즈노 교회에 안치했다. 999년 보이치에흐의 시성식이 거행되었고, 그는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하여 그니에즈노 대교구가 독일 대도시로부터 독립하도록 했다.

1000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3세가 그니에즈노에 방문해 성 아달베르트의 무덤을 순례했다. 이후에 열린 그니에즈노 회의에서, 그니에즈노에 대교구를 세우고 크라쿠프, 코워브제크, 브로츠와프에 주교구를 둔 독립된 폴람드 교회 조직을 설립하기로 했다. 또한 볼레스와프는 신성 로마 제국 황족의 형제로 인정받았고, 오토 3세와 선물을 교환했다. 학계에서는 오토 3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조짐을 보이는 폴란드를 붙들어두기 위해 이같은 조치를 취한 것으로 추정한다.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오토 3세가 볼레스와프를 마이센 변경백 에크하르트 1세에 이어 제국의 두번째 후계자로 지명했으며, 나중에 에크하르트 1세가 살해되자 볼레스와프가 신성 로마 황제로 즉위하고자 전쟁을 단행했을 거라 추정한다. 그러나 이 일이 실제로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11세기 프랑스 연대기 작가 샤반느의 아데마르에 따르면, 오토 3세와 볼레스와프는 아헨에서 카롤루스 대제의 황금 왕좌를 발견했다고 한다.

1002년, 오토 3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후 신성 로마 제국 내부에서 차기 황제를 놓고 내전이 벌어지자, 볼레스와프는 이 기회를 틈타 마이센, 루사티아, 밀스코 일대를 석권했다. 이후 내전에서 승리한 하인리히 2세는 밀스코와 루사티아의 지배를 인정하면서도 마이센을 볼라스와프와 동맹을 맺은 마이센 변경백 군젤린에게 넘겨줬다. 이후 남동생 블라디보이가 하인리히 2세로부터 보헤미아 공작으로 인정받도록 주선했다. 1003년 블라디보이가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사망하자, 일전에 보헤미아에서 폭정을 일삼다가 귀족들에게 쫓겨났던 볼레슬라프 3세가 보헤미아 공작에 세우도록 해줬다.

그러나 볼레슬라프 3세의 통치는 극도로 잔인했고, 자신을 세워준 그의 정책에 계속 어긋났다. 이에 그는 볼레슬라프 3세를 크라쿠프로 초대한 뒤 곧바로 체포한 후 실명형에 처한 후 알려지지 않은 곳에 죽을 때까지 가두고 프라하에 입성한 후 보헤미아 공작을 자처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보헤미아 귀족들은 하인리히 2세에게 개입을 요청했고, 신성 로마 제국 내부에 내전이 발발했을 때 루사티아, 밀스코 등을 빼앗아간 볼레스와프 1세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던 하인리히 2세는 이를 명분으로 삼아 폴란드 침공을 단행하기로 했다.

1004년, 하인리히 2세는 보헤미아를 침공해 보헤미아 귀족들의 호응에 힘입어 폴란드군을 몰아내고 보헤미아를 제국의 영역에 귀속시켰다. 뒤이어 1005년 밀스코를 장악했고, 포즈난으로 진군해 볼레스와프를 압박했다. 볼레스와프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밀스코와 루사티아의 지배권을 포기하는 대가로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하인리히 2세가 다른 곳에 신경 쓰던 1007년, 볼레스와프는 마그데부르크 대주교령을 공격해 큰 저항을 받지 않고 바우첸을 공략했다. 1010년 하인리히 2세가 반격을 가했지만 실레시아 일부를 파괴한 것 외에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012년, 볼레스와프 1세와 하인리히 2세는 5년간의 평화 협약을 맺었고, 1013년 메르제부르크에서 최종 합의를 맺었다. 볼레스와프 1세는 밀스코와 루사티아를 봉토로 획득하는 대신 하인리히 2세가 이탈리아 원정을 단행했을 때 군대를 지원해주기로 했다. 그러나 1015년, 볼레스와프 1세가 지원군을 보내주기를 거부하고 보헤미아 공작 올드르지흐와 함께 제국으로부터 독립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하인리히 2세는 폴란드와의 전쟁을 재개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017년, 하인리히 2세는 키예프 루스 대공 야로슬라프 1세와 동맹을 맺고 볼레스와프 1세를 다시 공격했지만 역시 성과가 없었다. 1018년, 양자는 바우첸 협약을 맺기로 했다. 이에 따르면, 볼레스와프 1세는 미스코와 루사티아를 더 이상 황제에게 부여받은 봉토가 아닌 자신의 재산으로 삼을 수 있었고, 키예프를 향한 원정을 벌일 때 신성 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대신, 하인리히 2세에게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고, 이탈리아 원정을 지원해주기로 했다.

1018년, 볼레스와프 1세는 사위인 스뱌토폴크 1세를 키예프 대공에 복위시키기 위해 키예프 원정을 단행했다. 그는 페체네그족과 연합한 뒤 부그 강 부근에서 야로슬라프 1세의 군대와 대치했다. 야로슬라프 1세가 진을 치고 병사들을 휴식시키고 있을 때, 그는 강을 몰래 도하한 뒤 기습 공격을 가해 대승을 거두었다. 야로슬라프는 본거지인 노브로고드로 도망쳤고, 스뱌토폴크 1세는 폴란드 군대를 앞세워 키예프에 입성했다. 그러나 볼레스와프는 스뱌토폴크 1세의 이복 여동생 프레드슬라바 블라디미로브나(Przedsława Włodzimierzówna)를 강제로 첩으로 삼았고, 폴란드군은 키예프에 주둔하면서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분노한 키예프 시민들이 폴란드군에 야습을 가해 큰 피해를 입혔고, 폴란드군은 곧 본국으로 철수했다. 그 후 스뱌토폴크 1세는 1019년 군대를 재규합해 쳐들어온 야로슬라프 1세에게 패배해 권좌에서 밀려났다.

1024년 하인리히 2세가 사망한 후 새 황제가 된 콘라트 2세가 귀족들의 반발을 무마하는데 전력을 기울이면서 폴란드 쪽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못하자, 볼레스와프 1세는 이 때를 틈타 폴란드 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하고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일반적으로 1025년 부활절 일요일에 대관식이 거행되었다고 전해지지만, 19세기 폴란드 역사학자 타데우시 보이치에호프스키(Tadeusz Wojciechowski, 1838 ~ 1919)는 1024년 12월 24일에 거행되었다고 주장했다. 대관식이 열린 장소는 그니에즈노 대성당이라는 설과 포즈난 대성당이라는 설이 갈리지만 어느 쪽이 맞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는 당시 새로 선출된 교황 요한 19세에게 막대한 뇌물을 넘기고 대관식을 허락받았다고 전해진다. 반면 19세기 폴란드 역사가 스타니스와프 자크르제프스키(Stanisław Zakrzewski, 1873 ~ 1936)는 콘라트 2세가 대관식을 인정했고 교황 요한 19세는 형식적으로 승인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2.4. 미에슈코 2세 람베르트

1025년 6월 17일, 볼레스와프 1세는 대관식을 치른 지 얼마 안 되어 사망했다. 이후 아들 미에슈코 2세 람베르트가 1205년 12월 25일 그니에즈노 대성당에서 그니에즈노 대주교 히폴리트의 주관하에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가 두 동생 베즈프림오토 볼레스와비치를 어떻게 대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일부 연대기에 따르면 두 사람을 추방했다고 하고, 또다른 연대기에는 두 사람이 숙청을 당할 것을 우려해 국외로 피신했다고 한다. 또다른 기록에 따르면, 오토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2세를 추종했다가 추방되었지만, 베즈프림은 루테니아에 머물렀다고 한다.

1026년 콘라트 2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서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 이탈리아로 원정을 떠나자, 슈바벤 공작 에르네스트 2세와 로렌 궁정백 프리드리히 2세를 중심으로 콘라트 2세에 대항한 반란 움직임이 일었다. 그들은 볼레스와프 1세로부터 강력한 세력을 물려받았고 하인리히 2세를 상대로 잘 싸워서 군사적 역량도 입증된 미에슈코 2세에게 콘라트 2세에 대항한 반란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1027년 슈바벤 공작 헤르만 2세의 딸이며 로렌 궁정백 프리드리히 2세의 아내인 슈바벤의 마틸다가 미에슈코 2세에게 보낸 기도서와 서신이 현존하는데, 마틸다는 서신에서 미에슈코 2세가 아버지 볼레스와프 1세처럼 기독교 전파에 헌신하고 라틴어와 그리스어에 대한 탁월한 지식을 갖췄다고 칭송했다. 미에슈코 2세는 에르네스트 2세와 프리드리히 2세에게 반란을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1027년 중반, 콘라트 2세가 독일로 돌아와서 에르네스트 2세를 격파하고 생포한 후 영지를 박탈하면서, 반란군은 지리멸렬해졌다. 하지만 미에슈코 2세는 원정을 감행하기로 하고, 1028년 작센을 습격해 수많은 포로를 납치했다. 작센측 기록에 따르면, 이때 입은 피해가 너무 커서 그의 군대가 지나간 자리에 풀이 자라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분노한 콘라트 2세는 1029년 가을 루세티아를 침공해 바우첸을 포위했지만 쉽사리 공략하지 못했다. 이때 콘라트 2세는 벨레티 부족에 사절을 보내 자신을 도와주면 그들이 폴란드로부터 독립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벨레티 족이 좀처럼 지원해주지 않는데다 헝가리 국왕 이슈트반 1세가 바이에른을 습격해 약탈을 자행하자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1030년, 미에슈코 2세는 헝가리 왕국과 동맹을 맺은 뒤 다시 한 번 작센을 침공해 또다시 큰 타격을 입혔다. 콘라트 2세는 이에 대항해 키예프 루스 대공 야로슬라프 1세와 동맹을 맺기로 했다. 야로슬라프 1세는 루테니아를 침공해 국경 도시 벨츠를 공략했다. 1031년, 보헤미아 공작 올드르지흐의 아들 브르제티슬라프가 폴란드의 지배를 받고 있던 모라비아를 공격해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공략했다. 이후 콘라트 2세는 헝가리 국왕 이슈트반 1세와 평화 협약을 체결해 전쟁을 종결한 뒤, 그 해 가을에 루세티아와 미스코를 공격해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공략했다. 여기에 야로슬라프 1세가 이끄는 루스군이 폴란드 중심부로 밀려들어왔고, 미에슈코는 수도 포즈난을 버리고 도주했다. 루스군은 포즈난에 입성한 뒤 그의 이복형제인 베즈프림을 권좌에 앉혔다.

미에슈코 2세는 루스군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정처없이 떠돌다가 보헤미아로 이동했지만 올드르지흐에게 체포되었다. 1014년에 올드르지흐에게 잡혔을 때는 하인리히 2세 덕분에 풀려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황제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다. 올드르지흐는 과거에 미에슈코 2세의 아버지인 볼레스와프 1세가 보헤미아 공작 볼레스와프 3세를 크라쿠프로 유인한 뒤 체포 후 실명형에 처했던 것을 보복하고자 미에스코 2세를 거세했다.

2.5. 1차 혼란기와 카지미에시 1세

미에슈코 2세가 신성 로마 제국과 키예프 루스의 협공에 버티지 못하고 도망친 뒤, 베즈프림이 루스군에 의해 권좌에 올랐다. 베즈프림은 권력을 잡은 직후 폴란드 왕복과 왕관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2세에게 넘기고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후 폴란드 대공을 자처한 그는 수많은 인사를 살해했다. 그 결과 많은 사회 엘리트들이 피살되거나 해외로 도피했다. 크라쿠프 장 연감에 따르면, 로만과 람베르트라는 이름의 두 명의 주교가 1032년에 사망했다고 한다. 학자들은 두 사람이 이 시기에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이로 인해 국가 체계가 파괴되었고, 정부의 권위가 약화되었다. 결국 1032년 봄, 그는 폭정에 분노한 자국민에 의해 피살되었다.

베즈프림이 피살된 후, 보헤미아 공작 올드르지흐에게 거세된 후 은거 중이었던 미에슈코 2세가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풀려나 폴란드로 돌아왔다. 이에 콘라트 2세가 메르제부르크에서 폴란드 원정을 다시 벌이려 하자, 도저히 대결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직접 메르제부르크로 가서 평화 협약을 맺자고 간청했다. 이후의 협상 결과, 미에슈코 2세, 오토 볼레스와비치, 그리고 미에슈코 1세의 세 아들 미에슈코, 시비엥토페우크 미에슈코비치, 람베르트 중 한 명의 아들인 디트리크는 폴란드를 삼분할하고 콘라트 2세에게 충성을 바치겠다고 서약했다.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미에슈코는 소 폴란드와 마조프셰를 받았고, 오토는 실레시아를 접수받았으며, 디트리크는 대폴란드를 받았다고 한다. 반면 또다른 학자들은 미에슈코가 포즈난을 비롯한 수도권 일대를 받고 나머지 지역은 오토와 디트리크에 의해 분할되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폴란드의 분열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1033년 오토 볼레스와비치가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사망하자, 미에슈코 2세는 오토가 가지고 있던 영지를 물려받고 디트리크를 추방해 폴란드를 통합했다. 그러나 이교도들이 혼란을 틈타 일으킨 반란 진압에 애를 먹다가 1034년 5월 10일 또는 11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후 외아들 카지미에시 1세가 폴란드 대공이 되었고, 폴란드 여대공이란 호칭을 사용한 어머니 리체차가 옆에서 보좌했다. 그러나 당시 폴란드의 상황은 매우 암울했다. 대폴란드 전역에 이교도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교회를 파괴하고 기독교 신자들을 학살했으며, 슬라브 족의 고유 종교로의 복귀를 꾀했다. 마조프셰에서는 미에슈코 2세의 전 관리인이었던 미에츠와프가 독자적인 나라를 세워 폴란드로부터 떨어져나갔으며, 포메라니아의 원주민들 역시 독립했다.

1038년, 보헤미아 공작 브르제티슬라프 1세가 폴란드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공세를 개시했다. 그는 먼저 이교도를 타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폴란드로 진군하여 수많은 인명을 학살하고 철저하게 약탈했으며, 포즈난과 크루슈비차 주교구를 파괴했다. 이후 폴란드의 수도 그니에즈노를 철저하게 약탈하고 미에슈코 1세가 성당에 기증했던 금 십자가를 비롯한 수많은 귀중품과 보석을 약탈했다. <대 폴란드 연대기>에 따르면, 그니에즈노, 포즈난, 크루슈비차는 이후로 오랫동안 버려졌으며 야생 동물들이 은신처로 사용했다고 한다.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여기에 더해 레드니카 호수 위의 섬에 있던 성과 석조 교회를 파괴했고, 별다른 저항 없이 항복한 기츠에 살던 수많은 공예가들을 보헤미아로 이주시켜 헤드차니에 정착히켰다. 이 시기에 실레시아와 소 폴란드가 보헤미아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당시 카지미에시 1세는 폴란드의 대혼란과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헝가리 왕국으로 피신해 이슈트반 1세의 궁정에서 지냈다. 1038년 8월 이슈트반 1세가 사망한 후 어머니 리체차가 있던 독일로 갔다. 1039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에게 경의를 표한 뒤 그로부터 중무장한 독일 기사 500명과 재정 지원을 받고 조국으로 귀환했다. 하인리히 3세는 브르제티슬라프 1세가 과도하게 강해지는 것을 우려했기에 그를 지원하기로 했다. 여기에 키예프 루스 대공 야로슬라프 1세도 그를 지원하기로 했고, 자신의 여동생인 키예프의 마리아 도브로니에가를 그와 결혼시켰다. 이후의 전쟁 과정은 전해지지 않으나, 1041년 레겐스부르크 협약이 체결되면서 보헤미아 측이 실레시아를 제외한 모든 폴란드 영토를 포기했다는 사실은 전해진다.

카지미에시 1세는 이교도의 대반란과 보헤미아의 침략으로 인해 초토화된 대폴란드를 대신해 소폴란드의 크라쿠프를 본거지로 삼았다. 1046년에는 실레시아를 되찾으려 했으나 브르제티슬라프 1세의 저지로 무산되었고, 양자는 마이센에서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1047년 야로슬라프 1세와 동맹을 맺고 마조프셰를 공격해 미에츠와프를 무너뜨림으로써 마조프셰를 폴란드의 영역에 재귀속시켰다. 뒤이어 포메라니아로 진군해 그단스크 포메라니아 일대를 재정복했다.

1050년 실레시아를 재차 침공해 일시적으로 공략했지만, 브르제티슬라프 1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에게 "카지미에시가 자신의 정당한 영지를 침략하고 있다"고 제소했고, 하인리히 3세는 그 해 11월 고슬라르에서 카지미에시 1세를 소환해 보헤미아와 적대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 후 1054년 5월 22일 크베들린부르크 회의에서, 카지미에시 1세와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하인리히 3세의 중재하에 협상한 끝에 카지미에시 1세가 실레시아를 갖고, 보헤미아는 그 대가로 매년 은 500 그지브나(grzywna)와 금 30 그지브나를 폴란드로부터 제공받기로 했다.

1046년 크라쿠프의 새 주교로 아일랜드 출신의 수도사 아론을 앉혔으며, 1051년 브로츠와프 주교구를 복원하고 리칭을 중심지로 삼게 했다. 또한 헝가리 왕국의 언드라시 1세를 상대하는 하인리히 3세의 원정에 병력을 지원했다. 한편, 그는 정규군을 영구적으로 두기에는 재정이 열악하다고 판단하고, 군 복무의 대가로 기사들에게 땅을 부여하는 봉건제를 폴란드에 도입했다.

2.6. 볼레스와프 2세 시초드리

1058년 3월 19일 카지미에시 1세가 사망한 후, 장남 볼레스와프 2세 시초드리가 폴란드 대공이 되었고 동생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과 미에슈코는 각각 마조프셰와 쿠자비의 공에 봉해졌다. 볼레스와프 2세는 독자적으로 은화를 발행했으며, 그리에즈노의 모길노, 크라쿠프의 티니에크, 브로츠와프, 루비인에 베네딕토회 수도원을 설립하고 독일 수도사들을 초청했다. 1064년에는 1038년 보헤미아 공작 브르제티슬라프 1세의 침략으로 파괴되었던 그니에즈노 대성당을 재건했다. 여기에 포즈난 주교단을 복원했으며, 프워츠크의 마조프 교구를 설립하기도 했다.

1060년, 볼레스와프 2세는 헝가리 국왕 언드라시 1세와 형제 벨러 1세간의 내전이 발발하자 벨러 1세를 지원했다. 언드라시는 이에 맞서 아녜스 황후의 지시에 따라 바이에른, 보헤미아, 작센에서 파견된 제국군의 지원을 받았다. 양자는 몬슨 인근에서 맞붙었고, 반나절 동안 이어진 격전 끝에 벨러가 승리했다. 언드라시는 신성 로마 제국으로 망명하려 했지만, 사전에 탈출로를 차단한 기병대에 의해 사로잡혔다. 이후 바코니 숲의 지르크 저택에 갇혀 지내다 1260년 12월 6일 이전에 사망했다. 그 후 벨러는 1260년 12월 6일 헝가리 국왕 벨러 1세로 등극했다.

한편, 볼레스와프 2세는 보헤미아 공국이 언드라시 1세를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한 틈을 타 슐레지엔 서부 지역인 오파비안 실레시아를 침공해 흐라데츠 나드 모라비치 시를 포위하려 했다. 그러나 현지 보헤미아군이 도중에 매복 공격을 감행하는 바람에 막대한 피해를 입고 가까스로 도주했다. 이후 1062년에 보헤미아 공작 브르제티슬라프 2세와 화해하고 여동생 시비엥토스와바 스와티와와 결혼시켰다. 1063년 보헤미아를 비롯한 신성 로마 제국 제후들이 셜러몬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헝가리를 침공했을 때, 그는 벨러 1세를 돕기를 거부했지만 벨러 1세의 세 아들 게저 1세, 라슬로 1세, 람페르트가 자국에 망명하는 것을 허용했다. 1063년 가을, 게저 1세, 라슬로 1세, 람페르트는 제국군이 철수한 틈을 타 폴란드군의 지원을 받아 헝가리로 진군했다. 이후 셜로몬과 세 형제간의 협상이 진행된 끝에, 벨러 1세의 세 아들은 셜러몬의 통치를 인정하고, 그 대가로 헝가리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공국을 맡았다.

1068년, 키에프 루스 대공 이자슬라프 1세가 민중 봉기에 휘말려 폐위된 뒤 폴란드로 망명했다. 이자슬라프 1세는 폴란드 국왕 미에슈코 2세 람베르트의 딸 거트루드의 남편이었기에, 볼레스와프 2세는 그를 복위시키고 했다. 1069년, 이자슬라프 1세는 폴란드군의 도움에 힘입어 자신이 도망친 뒤 키예프 루스 대공을 칭했던 브세슬라프를 폴로츠크로 몰아내고 권좌를 되찾았다. 그러나 이자슬라프 1세는 폴란드군이 떠난 뒤 각지의 반란에 시달리다가 끝내 1073년 프세볼로트 1세에게 축출되었다. 이자슬라프 1세는 아들 야로폴크를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보내 자신을 도와주면 키예프 루스를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고 교황청의 권위 하에 두겠다고 제안했고, 볼레스와프 1세에게도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그레고리오 7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와 성직자 서임권 문제를 놓고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었기에 그를 도울 여유가 없었고, 볼레스와프 1세 역시 하인리히 4세와의 전쟁을 준비했기 때문에 그를 돕지 않았다.

<대 폴란드 연대기>에 따르면, 1070년경 보헤미아인들이 폴란드로 쳐들어왔다가 볼레스와프 2세에게 패배했고, 볼레스와프는 그들을 모라비아까지 추격했다고 한다. 1071년 가을, 볼레스와프는 마이센에 있는 황제 하인리히 4세로부터 출두 명령을 받고 그곳으로 향했다. 연대기 작가인 헤르스펠트의 람페르트에 따르면, 그와 브르제티슬라프 2세 사이에 심한 갈등이 있었고, 황제가 그들에게 평화를 이루고 현재 국경에 만족하라고 명령해 관철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1072년, 볼레스와프는 마이센 협약을 파기하고 보헤미아를 공격했다. 이에 진노한 하인리히 4세는 1073년 5월 폴란드를 응징하기 위한 공세를 준비했다. 그러나 작센 귀족들이 황제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고, 하인리히 4세는 어쩔 수 없이 폴란드로의 원정 계획을 취소했다.

이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간의 성직자 서임권 분쟁이 벌어졌을 때, 그는 헝가리 왕국과 함께 그레고리오 7세의 편에 섰다. 그러면서 교황청에 사절을 보내 자신이 국왕이 되는 걸 허락해달라고 청해 승인을 받아냈다. 1076년 12월 25일, 볼레스와프는 교황 사절이 참석한 가운데 그니에즈노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고 그니에즈노 대주교 보구밀로부터 왕관을 수여받았다. 그 후 볼레스와프는 이자슬라프 1세를 복위시키기 위해 키예프 원정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크라쿠프 수도사이자 폴란드 역사 연대기 저자인 빈센티 카드우벡(Wincenty Kadłubek, 1150년경 ~ 1223년 3월 8일)에 따르면, 오랜 원정 동안 폴란드에 남겨진 폴란드 기사의 아내들이 영지를 대신 관리하던 가신들과 불륜 관계를 맺었다. 기사들은 이 소식을 듣고 왕의 동의 없이 조국으로 돌아갔다.

이로 인해 승리하지 못한 채 본국으로 귀환해야 했던 볼레스와프는 몹시 분노해 멋대로 돌아가버린 기사들과 불성실한 아내들을 무자비하게 처벌했다. 빈센티 카드우벡에 따르면, 그는 강아지를 여인의 가슴 속에 넣어 살을 물어뜯게 하는 고문을 가했다. 이에 크라쿠프 주교 스타니스와프가 볼레스와프의 잔인무도함을 규탄하며 저주를 내렸다. <대 폴란드 연대기>에 따르면, 볼레스와프는 이를 반역죄로 간주하고 즉시 체포한 뒤 팔 다리를 잘라 죽였다고 한다. 반면 빈센티 카드우벡에 따르면, 스타니스와프는 미사를 드리던 중에 납치되어 살해된 후 대중 앞에 공개되고 온갖 학대를 받았다고 한다.

이후 볼레스와프는 여러 귀족이 스타니스와프 주교와 내통했다고 간주해 숙청을 단행했다. 이에 분노한 귀족들은 1079년 반란을 일으켰고, 그는 반란군에게 패배한 뒤 헝가리로 망명해 라슬로 1세의 궁정에 지냈다. <대 폴란드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헝가리인들에게도 미움을 사는 바람에 1081년 또는 1082년 4월 2일에 오시아흐에서 누군가가 독을 탄 술을 먹고 사망했다고 한다. 전승에 따르면, 볼레스와프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기 위해 로마로 순례했고, 교황 그레고리오 7세로부터 '벙어리 회개자'로서 오시아흐에 있는베네딕토회 수도원에 들어가라고 지시했다. 그는 이곳에서 고해성사를 한 뒤 죽을 때까지 수도자로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전설은 볼레스와프가 축출된지 몇 세기 후에 창작된 이야기이기에 신빙성이 없다.

2.7.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

볼레스와프 2세 시초드리를 축출한 반란군은 마조프셰 공작이자 볼레스와프 2세의 동생인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를 권좌에 올렸다. 볼레스와프 2세는 1076년 12월 25일에 폴란드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한 바 있었지만, 브와디스와프 1세는 귀족들의 압력에 따라 국왕을 칭하는 것을 그만두고 대공에 취임했다. 이후 스타슈프-토포르치크 가문의 가주이며 볼레스와프 2세를 축출하는 반란을 주동했던 시에시에흐(Sieciech)가 궁정백의 자격으로서 실권을 잡았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동전을 주조할 정도로 사실상 공국의 통치자가 되었고, 브와디스와프 1세는 허수아비로 전락했다.

브와디스와프 1세는 본래 마조프셰 귀족 프셰츠와바와 결혼해 즈비그뉴를 낳았지만, 1079년 권좌에 오른 뒤 결혼 무효화되었다. 1080년, 브르제티슬라프 2세의 딸 유디트 프르세미슬디카와 결혼함으로써 폴란드와 보헤미아간의 오랜 갈등이 일시적으로 해소되었다. 1086년 12월 25일에 유디트 프르세미슬디카가 사망한 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의 딸이며 하인리히 4세의 누이인 슈바벤의 유디트와 재혼해, 볼레스와프 2세 시절에 벌어졌던 양국간의 갈등 역시 종식하고자 했다. 이후 시에시에흐는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성직자 서임권 분쟁을 벌이는 하인리히 4세를 지원해, 황제의 호의를 사고자 했다.

1089년, 볼레스와프 2세의 외아들이며 1086년부터 크라쿠프 공작에 봉해졌던 미에슈코 볼레스와비치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세간에는 시에시에흐가 잠재적인 대공위 경쟁자인 미에슈코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졌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여기에 브와디스와프 1세가 첫 아내 프셰츠와바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즈비그뉴가 수도원으로 보내져서, 브와디스와프 1세가 두번째 아내 유디트와의 사이에서 낳은 볼레스와프 3세가 대공위를 순조롭게 계승하도록 했다. 1090년, 시에시에흐는 그단스크 포메라니아를 향한 원정을 성공해 그곳을 폴란드에 종속시켰다. 이때 그는 그곳의 중요한 도시들에 수비대를 지키고 나머지 도시들을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포메라니아인들의 반란을 막기 위한 조치였지만, 포메라니아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1090년 말 반란을 일으켜 수비대를 몰아내고 폴란드 국경 지대를 연이어 습격했다.

1091년, 시에시에흐가 포메라니아인들을 향한 보복 원정에 착수했지만 우다 강변에서 패배했다. 그때부터 상황은 시에시에흐의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1093년, 실레시아 귀족 마그누스가 잠재적인 정적으로 간주되는 귀족들을 연이어 숙청하는 시에시에흐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마그누스는 보헤미아 국왕 브르제티슬라프 2세와 폴란드 귀족들의 협력을 받아 즈비그뉴를 수도원에서 빼돌린 뒤 브로츠와프로 모셨다. 시에시에흐는 헝가리 국왕 라슬로 1세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헝가리 지원군이 도착하자 즉시 브로츠와프로 진격했다. 그런데 헝가리군은 도중에 폴란드 귀족들의 로비에 넘어가 시에시에흐와 브와디스와프 1세의 어린 아들 볼레스와프 3세를 납치했다. 브와디스와프 1세는 두 사람이 풀려나게 하게 위해 사생아로 간주되었던 즈비그뉴를 정식 아들로 삼고 후계자로 삼아야 했다.

하지만 포로 생활에서 풀려난 시에시에흐는 복수를 벼르다가 1095년 라슬로 1세가 사망한 후 헝가리 왕국이 칼만과 알모스 왕자간의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군대를 일으켜 즈비그뉴를 공격했다. 그 결과 1096년 고프워 전투에서 즈비그뉴의 군대가 시에시에흐에게 패배했고, 시에시에흐는 즈비그뉴를 사로잡고 실레시아를 탈환했다. 그러나 민심이 갈수록 불온해지자, 1097년 또는 1099년에 즈비그뉴를 석방해야 했다. 이후 브와디스와프 1세는 내란이 일어날 조짐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즈비그뉴와 볼레스와프 3세를 포메라니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선임했다.

그러나 두 공자는 군대를 크라쿠프로 돌린 뒤 아버지에게 지금 즉시 분할 상속해줄 것을 강요했다. 브와디스와프 1세는 강요에 못 이겨 영지를 그들에게 상속했다. 볼레스와프 3세는 소폴란드, 실레시아, 대폴란드 서쪽 부분, 루부츠 일대를 상속받았고, 즈비그뉴는 그니에즈노를 포함한 대폴란드 동쪽 부분, 쿠아비아, 웽치차, 시에라츠, 마조프셰 등지를 상속받았다. 시에시에흐는 이렇게 분할되면 자신의 지위가 약화될 거라 보고, 두 왕자가 맡은 구역의 관리들을 자기 사람으로 채움으로써 실질적인 통치를 이어가려 했다. 여기에 두 형제를 아버지에 반역을 일으킨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기소할 준비를 했다.

볼레스와프 3세와 즈비그뉴는 시에시에흐의 계획을 눈치채고 스카비미르를 비롯한 폴란드 귀족들을 소집한 뒤 시에시에흐를 제거하기 위한 전쟁을 단행했다. 1099년, 필리차강 인근의 차르노비에츠에서 시에시에흐의 군대와 두 공자의 군대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그 결과 두 공자가 승리했고, 브와디스와프 1세는 시에시에흐를 해임하는 것에 동의했다. 1100년, 두 공자의 군대는 시에시에흐가 숨어 있던 시에시에호프를 포위했다. 그런데 브와디스와프 1세가 돌연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시에시에흐를 도우러 달려왔다. 이에 두 공자는 아버지를 완전히 실각시키기로 합의하고 프워츠크 인근에서 브와디스와프 1세와 시에시에흐의 연합군을 격파했다.

결국 두 공자에게 완전히 굴복한 브와디스와프 1세는 시에시에흐를 독일로 추방하는 데 동의해야 했고, 이후 대공위를 명목상으로나마 보장받는 대가로 모든 권력을 아들들에게 넘겨야 했다. 그 후 조용히 지내다가 1102년 6월 4일에 프워츠크에서 사망했다.

2.8. 볼레스와프 3세 크쉬보우스티

2.8.1. 즈비그뉴와의 분쟁

브와디스와프 1세 사후, 두 아들 볼레스와프 3세 크쉬보우스티즈비그뉴가 폴란드를 양분하고 각기 대공을 칭했다. 이후 두 사람은 미래에 폴란드 공국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길 희망한 귀족과 측근들의 부추김을 받고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포모제에 대한 의견이 엇갈리는 점도 갈등이 고조되는 요인이었다. 즈비그뉴는 이웃한 세력인 포모제와 경제적, 정치적으로 우호 관계를 맺고 싶어했다. 그러나 볼레스와프 3세는 포메른를 공략해 폴란드 공국의 영역으로 삼기를 희망했다. 볼레스와프 3세가 독자적으로 기사들을 이끌고 포모제로 쳐들어가서 비아워가르트를 공략하자, 포모제인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즈비그뉴의 영역을 침략했다. 이로 인해 자신의 동의 없이 포모제를 침략한 이복 형제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었다.

1103년, 볼레스와프 3세는 키예프 루스 대공 스뱌토폴크 2세의 딸 즈비슬라바와 결혼했다. 그는 즈비그뉴에게 청첩장을 보냈지만, 즈비그뉴는 결혼식에 참석하기를 거부했다. 즈비그뉴는 결혼 동맹을 맺은 두 세력이 자신을 조만간 협공하리라 의심하고, 보헤미아 공작 보르지보이 2세와 손잡고 볼레스와프 3세의 영역을 동시에 공격했다. 볼레스와프 3세는 이에 맞서 부하 젤리스와프에게 모라바를 습격하게 했다. 젤리스와프는 모라바의 많은 도시와 마을을 약탈했지만, 귀환하던 중 보르지보이 2세의 습격을 받고 패배했다. 이에 볼레스와프 3세 본인이 직접 모라바로 재차 출진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볼레스와프 3세는 힘으로 상대를 굴복시키지 못하자 외교술을 구사하기로 했다. 보르지보이 2세는 그로부터 막대한 뇌물을 받고 즈비그뉴와의 동맹을 끊었다. 이후 볼레스와프 3세는 즈비그뉴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포모제를 무너뜨리기로 마음먹고, 1104~1105년 포모제 원정을 단행해 수많은 마을을 파괴하고 많은 주민을 포로로 잡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다. 1105년, 두 이복 형제는 티에니크에서 평화 협정을 체결해 그동안의 갈등을 종식하고 외교 정책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의논하여 타협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1106년, 헝가리 왕자 알모스가 헝가리 국왕이자 자신의 형인 칼만에 맞서기 위해 볼레스와프 3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는 이에 응해 헝가리로 쳐들어가 어버우이바르(Abaújvár) 요새를 공략했다. 이에 칼만이 군대를 이끌고 가서 폴란드군과 대치했다. 볼레스와프 3세는 헝가리군이 생각보다 강력한 걸 확인하고 전쟁보다는 협상을 택했다. 칼만과 볼레스와프 3세는 서로 만나서 담화를 나눈 끝에 영원한 우정을 맺고 다시는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결의했고, 알모스는 어쩔 수 없이 칼만에게 복종했다. 이 무렵 보르지보이 2세스바토플루크 2세 사이의 분쟁이 벌어지자, 그는 스뱌토풀크에게 전쟁 물자를 지원했다. 그러나 스바토플루크가 축출되자 폴란드 궁정에 받아들였다.

1106년 즈비그뉴가 포모제를 향한 원정을 돕기를 거부한 데다 볼레스와프 3세가 사냥하던 중 암살자의 습격으로 죽을 뻔한 사건이 벌어지자, 볼레스와프 3세는 키예프 루스 대공 스뱌토폴크 2세와 헝가리 왕국의 국왕 칼만의 지원을 받고 즈비그뉴를 공격했다. 볼레스와프 3세와 루스-헝가리 연합군은 큰 문제 없이 칼리시, 그니에즈노, 스피시미에즈, 웽치차를 공략했다.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고 판단한 즈비그뉴는 크라쿠프 주교 발드빈의 중재를 통해 웽치차에서 볼레스와프 3세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즈비그뉴는 공식적으로 볼레스와프 3세를 폴란드 공국 전체의 대공으로 인정하고, 대폴란드, 쿠야비아, 시에라츠를 포기하며, 웽치차, 마조프셰 등지에서만 영지를 가질 수 있었다.

1107년, 볼레스와프 3세는 헝가리 국왕 칼만과 연합해 보헤미아로 쳐들어가 보르지보이 2세를 축출하고 그 해 5월 14일에 스바토플루크를 보헤미아 공작 스바토플루크 2세로 앉혔다. 그러나 즈비그뉴는 푸와비 인근의 요새 중 하나이며 자신에게 반기를 든 이들이 농성하는 쿠로프를 파괴하라는 볼레스와프 3세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이에 볼레스와프 3세는 그가 명령 불복종에 포모제 원정군에 식량을 제때 제공하지 않겠다는 혐의를 덮어씌워 그를 반역자로 고발했고, 1107/1108년 겨울 루테니아와 헝가리 출신 전사들을 고용해 마조비아를 침공했다. 즈비그뉴는 이렇다할 저항을 못하고 굴복했고, 목숨을 부지하는 대가로 폴란드에서 추방당한 뒤 추종자들과 함께 프라하로 피신했다.

1108년, 볼레스와프 3세가 지난해 보헤미아 원정을 통해 공략했던 시비엥토페우크 시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폴란드 대공에게 공물을 바치기를 거부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여기에 그 덕분에 보헤미아 공작이 되었던 스바토플루크는 정작 그의 간섭을 받기를 거부했고 즈비그뉴를 보호했다. 이에 분노한 볼레스와프 3세는 보헤미아 측이 하인리히 5세의 헝가리 침공에 동참하느라 병력을 헝가리에 보낸 틈을 타 보르지보이 2세를 보헤미아 공작에 복위시키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도중에 포모제인이 북쪽 국경을 넘어 여러 마을을 파괴하자, 군대를 북쪽으로 돌려 포모제인을 격파했다.

1109년, 즈비그뉴는 하인리히 5세에게 형제에게 빼앗긴 영지를 되찾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마침 폴란드 공국이 갈수록 강해지는 것을 우려하던 하인리히 5세는 이를 명분삼아 볼레스와프 3세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 내용은 즈비그뉴에게 전 영토의 절반을 제공하고, 신성 로마 제국의 권위를 인정하고, 정기적으로 연간 은화 300 그지브나(grzywna)를 공물로 보내거나 군사 원정을 위한 기사 300명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볼레스와프 3세를 몰아내기 위한 원정군을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볼레스와프 3세가 이를 딱 잘라 거부하자, 하인리히 5세는 대규모 원정군을 일으켰다.

에어푸르트에 집결한 제국군은 작센, 바이에른, 프랑켄, 로트링겐의 기사가 포함된 약 10,000명의 전사였다. 여기에 보브르 강 어귀에서 보헤미아군이 합세했다. 원정군은 1109년 8월 22일 비톰 오드잔스키에 이르러 공성전을 벌였지만 큰 손실만 볼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않자 그대로 지나쳐서 8월 24일 구워구프에 도착해 포위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9월까지 이어진 포위 공격에도 좀처럼 함락되지 않자, 하인리히 5세는 방어 수준이 구워구프보다 열악한 브로츠와프를 향해 진격했다.

볼레스와프 3세는 병력이 일천했기 때문에 정면 대결을 최대한 피했다. 그 대신 적의 보급로를 연이어 습격했고, 적의 진군로 주변의 모든 마을을 불사르고 농지를 뒤엎고 우물에 독을 타는 등 청야작전을 구사했다. 여기에 폴란드 농민들은 숲과 늪지대에서 침략자들을 끊임없이 습격했다. 하인리히 5세는 이러한 곤경에도 굴하지 않고 구워구프에 도착한 뒤 공성전을 감행했지만 막대한 희생만 치렀다. 13세기의 연대기인 <대 폴란드 연대기>는 하인리히 5세가 브로츠와프를 공격했지만 산 자 대신 시체만 얻었다고 묘사했다.

하인리히 5세는 볼레스와프 3세에게 항복하지 않으면 크라쿠프를 파괴하겠다고 위협했지만, 제국군의 보급 물자가 바닥났고 병사들도 연이은 패배로 사기가 꺾이고 사상자가 많다는 점을 꿰뚫어 본 볼레스와프 3세가 응하지 않으면서 무산되었다. 하인리히 5세는 다시 사절을 보내 공물을 보낸다면 군대를 철수하고 평화 협약을 맺겠다고 제안했지만, 볼레스와프 3세는 이번에도 거부했다. 이후 병사들이 굶주림에 시달려 죽어가자, 하인리히 5세는 결국 남은 병력을 이끌고 본국으로 퇴각했다.

1110년, 볼레스와프 3세는 하인리히 5세를 도와 자국을 침공했던 보헤미아로 쳐들어가서 보르지보이 2세의 형제이며 역시 자신에게 의탁한 소베슬라프 1세를 보헤미아 공작에 앉히려 했지만, 보헤미아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실패했다. 그는 본국으로 귀환하다가 보헤미아군의 추격을 받았지만 1110년 10월 8일 트루티나 전투에서 보헤미아군을 격멸했다. 하지만 전쟁 물자가 바닥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물러난 뒤 1111년 보헤미아 측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보헤미아 측은 소베슬라프 1세가 블라디슬라프 1세를 보헤미아 공작으로 인정하는 대신 흐라데츠 크랄로베 시의 통치권을 얻게 했다. 볼레스와프 3세는 즈비그뉴가 폴란드로 돌아와서 시에라츠를 영지로 삼고 평온하게 살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즈비그뉴가 국내로 돌아온 뒤 왕실 강림절 의식에서 즈비그뉴 앞에 검이 옮겨지고 무리의 추앙을 받는 모습을 본 볼레스와프 3세는 형제가 언젠가 영지를 되찾기 위해 추종자들을 끌어모아 반기를 들 거라 여겼다. 결국 즈비그뉴는 체포된 뒤 실명형에 처해졌다. 볼레스와프 3세는 이 일로 인해 그니에즈노 대주교 마르친으로부터 공개석상에서 저주를 받았고, 수많은 인사의 지탄을 받았다. 이에 볼레스와프는 40일 동안 금식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었으며, 귀족 및 성직자들에게 선물을 나눠주었다.

1113년, 볼레스와프 3세는 형제를 해친 것을 속죄하겠다는 명분으로 헝가리의 소모기바르 수도원을 순례해, 불온한 민심을 가라앉히고자 했다. 헝가리 국왕 칼만의 영접을 받고 돌아온 뒤 가난한 주민들과 성직자들에게 수많은 선물과 귀중품을 주었다. <대 폴란드 연대기>에 따르면, 볼레스와프 3세는 참회를 마친 뒤 즈비그뉴로부터 용서를 받았으며 저주가 풀렸다고 한다. 루비인에 있는 베네딕토회 수도원의 기록에 따르면, 즈비그뉴는 1113년 7월 8일 티니에츠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에서 사망했고 그곳에 묻혔다.

2.8.2. 포모제 정복

볼레스와프 3세는 한때 폴란드의 영역이었지만 카지미에시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독립해버린 포모제를 정복해야만 폴란드 북쪽 국경의 안보를 보장받을수 있고 신성 로마 제국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질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먼저 포모제와 폴란드 사이의 국경 지대의 방비를 강화했다. 오브라 강 입구에서 바르타강까지, 그리고 노테치 강을 따라 비스와 강으로 이어지는 방어선에 여러 요새를 세웠다. 산토크, 비엘렌, 나크워나드, 차른쿠프, 우이시치에, 위쇼그로드 등이 이 시기에 건설되었다. 1114년에는 니사크워츠카강 유역에서 보헤미아에서 할거하던 브와디스와프 1세, 흑기사 오토 2세, 소베슬라프 1세와 협상한 끝에 폴란드와 보헤미아간의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후 즈비슬라바가 사망하자, 보헤미아의 베르크 가문 출신이며 브와디스와프 1세와 흑기사 오토 2세의 누이인 베르크의 살로메아와 결혼함으로써, 보헤미아간의 관계를 돈독히 했다.

1115년, 볼레스와프 3세는 고대 프로이센을 향한 원정을 개시해 그곳의 여러 부족을 굴복시켰다. 이리하여 모든 전선이 평화로워지자, 그는 포모제 정복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1115년 ~ 1119년, 볼레스와프 3세는 매년 포모제로 진격해 여러 전투에서 포모제인을 물리쳤다. 그 결과 그단스크 포모제와 스웁스크 일대가 폴란드의 영역이 되었다. 볼레스와프 3세는 새로 정복한 영토를 관리하기 위해 주교구를 새로 설립하고 관리들을 파견했다. 당시 폴란드 공국의 북쪽 국경은 그우다 강과 우니에스타 강을 따라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포모제 정복에 사활을 걸던 1117년, 궁정백으로서 그를 대신해 내치를 담당하던 스카비미르가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이 일어난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많은 학자들은 볼레스와프 3세가 승계 규졔를 정한 것에 "왕위 계승자의 선택은 그가 임의로 정하는 게 아니라 귀족들이 정해야 한다"며 반발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스키비미르의 반란은 실롱스크의 대귀족이며 스카비미르를 대신해 궁정백에 오른 피오트르 블로스토비치에 의해 1118년 진압되었다. 볼레스와프 3세는 사로잡힌 스키비미르를 실명형에 처했다.

1120년 키예프 루스 대공 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가 폴란드 동쪽 영역을 침략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1121년, 볼레스와프 3세는 이에 보복하고자 1117년 모노마흐에게 축출된 뒤 폴란드에 망명했던 보히니아 공작 야로슬라프를 앞세워 체르므노를 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이후 루스 공자들이 폴란드로의 약탈 원정대를 계속 이끌자, 1122년 피오트르 블로스토비치가 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에 의해 보히니아 공작으로 선임되었던 볼로다르 로스치슬라비치를 납치한 것으로 보복했다. 1125년, 볼로슬라프 3세는 야로슬라프를 복위시키려는 헝가리 국왕 이슈트반 2세의 원정에 지원군을 보냈다. 이슈트반 2세는 키예프로 진군해 포위 공격을 퍼부었지만, 도중에 야로슬라프가 사망한 데다 루스 주민들의 맹렬한 저항에 부딪치자 결국 철수했다.

한편, 볼레스와프 3세는 서부 포모제까지 공략하기로 했다. 1121년 ~ 1122년, 볼레스와프 3세는 포모제 지도자 바르치스와프 1세와 시비엥토페우크를 니에크와츠 전투에서 격파하고 슈체친을 포위했다. 슈체친은 오데르 강과 늪지대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데다 그 자체도 강력한 방어 시설을 갖췄기에 공략하기 어려웠다. 요새의 성벽 아래로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얼음으로 뒤덮인 늪지대를 통과하는 것뿐이었다. 볼레스와프 3세는 그 길로 기습 부대를 파견했고, 이들은 큰 희생을 치른 끝에 방심하고 있던 수비대를 빠르게 제압하고 요새를 공략했다. 수많은 주민이 학살당했고, 살아남은 이들은 볼레스와프 3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122년, 볼레스와프 3세는 서부 포모제 지도자 바르치스와프 1세를 자신의 가신으로 삼고, 매년 은화 500달란트를 바치며 군사 지원을 제공하게 했다. 1123년, 볼레스와프 3세의 전사들은 포모제에서 가장 큰 섬인 뤼겐 섬을 약탈했지만 점령하지는 않았다.

이리하여 포모제 전역을 직할 통치하거나 가신으로 삼는 데 성공한 볼레스와프 3세는 포모제의 기독교화 정책을 추진했다. 선교사들을 포모제로 초빙해 슬라브 신앙을 고수하는 현지인들을 개종시키도록 했으며, 500명의 무장한 기사들이 포모제 각지의 주교들을 지키게 했다. 또한 슬라브 종교의 성지를 철거하고 성당을 그 자리에 세웠다. 1124년, 서부 포모제에 루부츠 주교구가 설립되었고, 그단스크 포모제에는 크루슈비차 주교구가 설립되었다. 두 주교구는 그니에즈노 대주교구에 종속되었다.

1127년 폴란드가 부과한 높은 공물과 개종 강요에 반감을 품은 이교도들이 이교도 사제들의 선동에 따라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이 폴란드 북부 국경지대를 습격하자, 볼레스와프는 1128년 여름 대대적인 원정을 감행하려 했다. 하지만 포모제의 기독교화 정책을 진두지휘하던 밤베르크의 오토가 "칼로 강요하지 말고 말로 설득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를 받아들여 원정을 중단했다. 이후 현지 주민들은 공물을 줄이고 자신들이 자치를 누리는 조건하에 폴란드의 지배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후에도 포모제에서 종종 이교도들의 폭동이 벌어졌지만, 볼레스와프 3세가 이에 굴하지 않고 기독교화 정책을 꾸준히 밀어붙이면서 포모제 주민들은 점차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1130년에는 덴마크 왕자 망누스와 동맹을 맺고 뤼겐 섬으로 원정대를 파견해 뤼겐의 영주 라나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1130년대, 마그데부르크 대주교 노르베르트가 포모제를 마그데부르크 대교구에 통합시키려는 계획을 추진했다. 그는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포즈난의 운게르 주교가 마그데부르크 대주교의 '참정권 주교'[1]임을 밝히는 문서를 위조한 뒤 교황 인노첸시오 2세에게 자신이 포모제를 이끌게 해달라는 서신을 보냈다. 인노첸시오 2세가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폴란드 주교들을 초대했지만, 그들은 참석을 거부했다. 인노첸시오 2세는 이를 괘씸하게 여기고 1133년 교서 <로마나의 거룩한 전례(Sacrosancta Romana)>를 반포해 포모제에 대한 마그데부르크 대주교의 주권을 확인했다. 이에 볼레스와프 3세는 1136년 7월 피사 공의회 대 폴란드 주교들을 파견해 대립교황 아나클레토 2세에 대적하던 인노첸시오 2세를 지지하도록 했고, 인노첸시오 2세는 이에 만족하여 그니에즈노 대교구가 포모제를 계속 관장하게 했다.

2.8.3. 헝가리 내전 개입과 메르제부르크 협약

1131년 헝가리 국왕 이슈트반 2세가 사망한 뒤 집권한 벨러 2세가 대대적인 숙청을 벌이면서 정계가 혼란해지자, 과거에 이슈트반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해 해외로 망명했던 보리스는 왕위를 쟁취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보리스는 폴란드로 가서 볼레스와프 3세의 지원을 받고 헝가리로 진격했다. 벨러 2세는 이에 맞서 오스트리아 변경백과 군사 동맹을 맺고, 전국의 백성들에게 보리스는 칼만의 아들이 아니니 다들 사칭범에게 속지 말라고 경고했다. 1132년 7월 22일, 사요 강 계곡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헝가리-오스트리아 연합군이 보리스와 볼레스와프 3세의 폴란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벨러 2세는 여세를 몰아 폴란드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 보헤미아의 소조슬라프 1세, 페레미실의 볼로디미르코와 손을 잡고 폴란드 공격을 획책했다. 여기에 소조슬라프1세와 함께 신성 로마 제국에 사절을 보내 볼레스와프 3세를 규탄했다. 벨러 2세, 소조슬라프 1세, 볼로디미르코의 연합군은 폴란드로의 공세를 개시해 소폴란드로 진입하여 비실리카를 공략했다. 이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타르 3세로부터 마그데부르크로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받자, 볼레스와프 3세는 사절들을 파견했다. 그러나 로타르 3세는 사절단의 입국을 거부하고 폴란드 대공이 직접 오라고 하면서, 이번에는 1135년 8월 15일에 메르제부르크로 오라고 요구했다.

볼레스와프 3세는 로타르 3세와 합의를 하지 않으면 오래도록 공들였던 포모제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하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동맹을 맺고 있던 스웨덴 왕 마그누스가 1134년 사망했고, 헝가리, 보헤미아와 적대하게 된 상황에서 신성 로마 제국까지 돌아선다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황제의 요구에 따라 메르제부르크로 간 뒤 협의 끝에 포모제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는 대신 포모제 영지의 지배자로서 황제를 주군으로 보시고, 은 6,000 달란트를 조공으로 바치기로 했다. 또한 헝가리 국왕 벨러 2세를 인정하기로 하고, 자신의 딸 유디트를 벨러 2세의 아들 게저와 약혼시키기로 했지만, 결혼은 성사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신성 로마 제국과의 분쟁을 매듭지은 볼레스와프 3세는 1137년 크워츠코에서 보헤미아 측과 평화 협약을 맺었지만, 이 협약에 대한 세부 사항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아들 볼레스와프와 루테니아 왕자 브세볼로드 마시스와비치의 딸 비에르츠소스와바를 결혼시키고, 또다른 아들 미에슈코 3세와 헝가리 국왕 벨러 2세의 딸 엘리자베타를 결혼시키는 등, 자녀들의 결혼을 통해 이웃 국가들과 가급적 화목하게 지내기를 희망했다.

2.8.4. 볼레스와프의 승계법과 폴란드의 분열

1138년 10월 28일, 볼레스와프 3세는 소하체프에서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에 일명 <볼레스와프의 승계법>으로 명명된 유언장을 작성했다. 오랫동안 궁정백으로서 국정을 담당하던 피오트르 블로스토비치가 이 유언장의 수탁자이자 집행자로 임명되었다. 이에 따르면, 그는 폴란드 공국을 다음과 같이 분할했다.
  • 소폴란드 서부, 대 폴란드 동부, 쿠야비야 서부, 시에라츠는 볼레스와프 3세의 장남이자 폴란드 대공위 계승자 브와디스와프 2세 비그나니에츠에게 할당된다. 또한 볼레스와프 3세의 아내인 베르크의 살로메아는 웽치차의 영주로 선임되며, 살로메아가 사망한 후에는 브와디스와프 2세가 물려받는다.
  • 1124년부터 브와디스와프 2세의 영지였던 실롱스크는 그대로 브와디스와프 2세의 통치를 받는다.
  • 마조프셰와 쿠야비야 동부로 구성된 일명 마조프셰 공국은 볼레스와프 3세의 차남인 볼레스와프 4세에게 할당된다.
  • 대폴란드 서부는 볼레스와프 3세의 셋째 아들 미에슈코 3세에게 할당된다.
  • 산도미에시를 중심으로 하는 소폴란드 동부는 볼레스와프 3세의 넷째 아들 헨리크 산도미에르스키에게 상속된다.
  • 폴란드 공국의 수도 크라쿠프를 포함해 폴란드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중앙 폴란드 일대는 누구에게도 분할되지 않는다.
  • 볼레스와프 3세의 다섯째 아들 카지미에시 2세는 어떤 영지도 상속받지 못했다. 학자들은 카지미에시 2세가 볼레스와프 3세 사후에 태어났거나 애초에 사제로 길려지기로 예정되었을 거라 추정한다.

이에 따라 폴란드는 5개의 공국으로 분할되었다. 이때 볼레스와프 3세는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진 대공이 나머지 공작들보다 상위의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대공의 특권에는 포모제 가신들을 봉신으로서 통제하고, 다른 공작을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할 권리, 국경 방어 권리, 외교 정책을 수행할 권리, 성직자 감독, 화폐 주조 등이 포함되었다.

볼레스와프 3세는 이 조치를 통해 모두가 영지를 공정하게 분할 상속받고 서로 협력함으로써, 자신이 과거에 즈비그뉴와 내전을 벌인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그의 예측과는 달리 그의 아들들은 대공위를 놓고 치열한 분쟁을 벌였고, 그의 승계법은 폴란드가 200여년간 분열 상태에 놓이게 하는 단초로 작용했다.

2.9. 2차 혼란기

볼레스와프 3세 크쉬보우스티 사후 폴란드 대공에 선임된 브와디스와프 2세 비그나니에츠는 1141년 계모인 베르크의 살로메아가 웽치차에서 귀족 회의를 소집한 뒤 볼레스와프 3세가 생전에 낳은 막내딸인 아그네스를 키예프 루스 대공 프세볼로트 2세의 아들들 중 하나와 약혼시키려 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이에 개입해 결혼이 성사되지 않도록 훼방놓았고, 1142년에 큰아들 볼레스와프와 프세볼로트 2세의 딸인 즈비에니스와바와 결혼시켰다. 이리하여 키예프 루스과 결혼 동맹을 맺게 된 그는 본격적으로 이복 형제들을 몰아내고 폴란드를 독차지하려는 계획을 진행시켰다. 1142년 겨울, 브와디스와프 2세는 마조프셰를 침공해 체르스크 요새를 파괴했고, 루스군은 많은 포로를 키예프로 끌고 갔다. 이로 인해 그와 두 이복 형제간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1144년 7월 27일, 베르크의 살로메아가 사망했다. 볼레스와프 3세의 유언에 따르면, 살로메아가 관리하던 웽치차는 그녀가 사망하면 브와디스와프 2세에게 돌아가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볼레스와프 4세와 미에슈코 3세 등은 이에 반대했다. 막내 동생 카지미에시 2세가 아무런 영지도 받지 못했다며, 그에게 웽치차를 물려줘야 하니 자신들이 인수하겠다는 것이었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무력으로 두 사람을 침묵시키기로 마음먹고, 프세볼로트 2세에게 지원을 요청한 뒤 루스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군대를 이끌고 두 이복 형제의 영지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마조프셰의 보이보이드인 비세보르에게 뜻밖의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이후 전세가 불리해졌지만, 프세볼로트 2세가 파견한 루스군이 볼레스와프 4세와 미에슈코 3세의 군대를 격파한 덕분에 겨우 역전시킬 수 있었다.

이후의 협상 결과, 윙체차는 브와디스와프 2세의 영지로 귀속되었고, 볼레스와프 4세는 위즈나를, 미에슈코 3세는 칼리슈와 그니에즈노를 브와디스와프 2세에게 추가로 넘겨야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도와준 대가로 프세볼로트 2세에게 폴란드의 여러 거점을 넘겨줘야 했다.

한편, 볼레스와프 3세의 유언장을 집행하는 역할을 맡았던 피오트르 블로스토비치는 그와 이복 형제들이 반목하지 말고 볼레스와프 3세의 뜻에 따라 화목하게 지내라고 촉구했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그런 그가 존재하는 한 자신이 이복 형제들을 밀어내고 폴란드를 통합시키기는 요원하다고 판단했다. 1145년, 그는 피오트르를 돌연 체포한 뒤 실명형에 처하고 재산을 몰수한 뒤 국외로 추방했다. 폴란드 귀족들은 이 사건에 반감을 품었고, 피오트르는 키예프 루스의 세력권에 속한 루테니아로 망명한 뒤 루스 공자들을 설득해 브와디스와프 2세를 적극적으로 돕지 않게 했다.

1146년 초, 브와디스와프 2세는 루스군의 지원 없이 이복 형제들을 몰아내기 위한 원정을 단행했다. 그의 군대는 마조프셰를 석권하고 볼레스와프 4세와 미에슈코 3세가 포즈난으로 피신하게 했다. 그니에즈노 대주교 야쿠브를 포함한 교회 인사들은 당장 형제간의 골육상쟁을 중단하라고 촉구했지만, 그가 무시하자 파문을 선고했다. 이후 브와디스와프 2세가 포즈난으로 진군해 두 형제와 대치했을 때, 그의 휘하에 있던 폴란드 귀족들이 대거 두 형제의 편으로 돌아서는 바람에 참패하고 말았다. 이후 두 형제가 그의 영지를 쳐들어오고 수많은 귀족들이 반란에 동참하자, 그는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아내 아그네스와 자식들과 함께 크라쿠프로 간 뒤 그곳에서 농성했으나 끝내 함락을 피할 수 없게 되자 프라하로 망명했고, 뒤이어 신성 로마 제국으로 망명했다.

브와디스와프 2세가 축출된 뒤, 볼레스와프 4세가 크라쿠프에 입성한 뒤 폴란드 대공을 칭했고, 브와디스와프 2세의 영지였던 실레시아와 루부슈를 인수했다. 여기에 웽치차는 그와 미에슈코 3세, 헨리크 산도미에르스키에 의해 분할되었다. 아직 미성년자였던 카지미에시 2세는 영지를 배분받지 못했고, 볼레스와프 4세의 보살핌을 받았다. 한편, 브와디스와프 2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3세의 궁정에 도착한 뒤 경의를 표하면서 자신이 권좌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폴란드가 신성 로마 제국의 완전한 봉신이 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콘라트 3세는 이에 혹해 폴란드로 군대를 파견하려 했지만, 오데르 강이 범람한 데다 브란덴부르크의 알베르트 1세와 마이센의 콘라트가 자신을 상대로 반기를 들자 원정을 중단했다. 그 후 콘라트 3세는 십자군 원정을 떠났기 때문에 브와디스와프 2세를 더이상 돕지 않았고, 브와디스와프 2세는 알텐부르크 성과 그 주변 지역을 영지로 수여받고 조용히 지냈다.

하지만 브와디스와프 2세는 여전히 권좌를 되찾을 꿈을 포기하지 않고 교황청에 사절을 보냈다. 교황 특사 귀도는 이에 호응해 정당한 통치자를 불법적으로 몰아낸 그의 이복 형제들과 폴란드 주교들에게 저주를 내렸지만, 폴란드에서 그를 복위시키려는 어떠한 움직임도 없었기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교황 에우제니오 3세는 교황청의 처벌을 무시한 폴란드 주교들을 엄중하게 질책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1153년 에우제니오 3세가 사망하고 새 교황에 오른 하드리아노 4세는 폴란드에 걸었던 저주를 무효화하고 1155년 4월 브로츠와프 주교구와 체르빈스크의 수도원 대학을 보호한다는 교서를 반포했다.

1152년 콘라트 3세가 사망한 뒤 프리드리히 1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새 황제에 등극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브와디스와프 2세와 아내 아그네스의 간절한 설득에 폴란드 원정을 단행하기로 마음먹고, 1157년 폴란드로 진군했다. 볼레스와프 4세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포즈난으로 피신한 뒤 곧 제국군에게 포위되었다. 이후 황제와 협상한 끝에 목에 십가자 형태로 밧줄을 묶은 채 큰 가방에 넣어져서 황제 앞으로 간 뒤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는 굴욕적인 의식을 해야 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자신이 폴란드의 주권자임을 인정하고 수천 그지브나(grzywna)를 벌금으로 지불해야 하며,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 마그데부르크에 출두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그가 폴란드 대공으로 남는 데 동의했다. 볼레스와프 4세는 약속을 지키겠다고 맹세하며, 이를 보증하고자 남동생 카지미에시 2세를 인질로 보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1세가 돌아간 후, 그는 약속과는 달리 마그데부르크에 출두하지 않았다.

한편, 볼레스와프 4세는 대공이 된 후 고대 프로이센을 정복하고 기독교화하려는 정책을 꾸준히 추진했다. 1147년부터 군사 원정을 지속적으로 벌여 많은 프로이센 부족들의 조공을 받아냈다. 그러나 1166년 친히 군대를 이끌고 프로이센으로 진군했다가 마수리아 늪지대에서 프로이센인들의 매복 공격으로 인해 전군이 궤멸되는 참사가 벌어졌다. 이때 동생인 헨리크 산도미에르스키가 전사했고, 그는 가까스로 탈출했다. 이후 헨리크가 가지고 있던 영지를 온전히 자기 것으로 삼으려 했지만, 산도미에시 귀족들이 이에 반발해 1167년 가을 얀제이우프(Jędrzejów)에서 의회를 소집해 산도미에시 공국 전체를 카지미에시 2세에게 넘기고 미에슈코 3세를 폴란드 대공으로 받들려 했다. 그는 프로이센인들에게 참패해 막대한 병력 손실을 입은 상황에서 반란군을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보고 그들과 협상했다. 그 결과 카지미에시 2세는 비실리카를 수여받았고, 미에슈코 3세는 알려지지 않은 영지들을 받았으며, 그는 산도미에시 지방을 게속 가질 수 있었다.

1163년, 볼레스와프 4세는 브와디스와프 2세의 두 아들인 볼레스와프와 미에슈코가 실레시아와 루부슈로 돌아와서 영주로 군림하는 걸 허락했다. 그 대신 실레시아와 루부슈의 주요 도시인 브로츠와프, 레그니차, 글로구프, 오폴레, 라시보르즈를 계속 지배함으로써 실레시아와 루부슈를 계속 통제했다. 두 조카는 초기에는 삼촌에게 공손하게 대했지만, 삼촌이 프로이센인들과의 전쟁에서 완패하자 실레시아와 루부슈를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볼레스와프 4세가 통제하고 있던 도시들을 모조리 확보하고 볼레스와프 4세를 따르던 관료들을 축출했다. 이 소식을 접한 볼레스와프 4세는 진압군을 파견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그는 두 조카가 실레시아와 루부슈를 완전 지배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1172년 미에슈코와 볼레스와프의 장남 야로스와프가 볼레스와프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면서 실레시아가 혼란에 휩싸이자, 볼레스와프 4세는 반군을 지원해 조카 볼레스와프가 국외로 도망치는 데 기여했다. 1173년, 조카 볼레스와프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지원을 받고 실레시아로 돌아와서 브로츠와프 공작으로서 실레시아를 계속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그 대신, 형제 미에슈코와 장남 야로스와프에게 자신의 영지를 떼어주는 것에 동의해야 했다. 또한 볼레스와프 4세는 프리드리히 1세에게 8,000달란트 상당의 벌금을 지불하고 실레시아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1159~1178년, 신성 로마 제국과 교황청간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신성 로마 제국이 내세운 대립교황들이 잇따라 등장했다. 볼레스와프 4세는 프리드리히 1세에게 복종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1세가 내세운 교황들을 일관되게 지지했다. 1160년 2월 그가 보낸 사절들은 대립교황 빅토르 4세가 개최한 파비아 공의회에 참석해 빅토르 4세를 교황으로 인정했다. 1164년 빅토르 4세의 뒤를 이어 교황에 오른 파스칼 3세 역시 폴란드 측의인정을 받았다. 프워츠크의 베르너 주교는 파스칼 3세가 아헨에서 주관한 카롤루스 대제의 시성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프리드리히 1세가 파스칼 3세의 뒤를 이어 교황으로 내세운 갈리스토 3세를 지지했는지는 문헌상에서 확실하지는 않으나, 1172년 프리드리히 1세가 폴란드로 진군해 그로부터 복종을 재차 받아낸 뒤 갈리스토 3세를 인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1172년 큰아들 볼레스와프가 22살의 나이에 사망해버리자, 볼레스와프 4세는 깊은 충격을 받았고 1173년 1월 5일 크라쿠프에서 사망했다. 그는 유언장에서 자신의 영지를 유일하게 살아남은 레첵에게 마조프셰를 상속하고 카지미에시 2세가 그를 돌봐주며, 레첵이 조기에 자녀 없이 사망할 경우 카지미에시 2세가 레첵의 영지를 물려받으라고 밝혔다.

볼레스와프 4세 사후, 미에슈코 3세가 폴란드의 새 대공에 선임되었다. 그는 자신을 모든 폴란드의 공작(dux totius Poloniae)이라고 명시한 동전을 주조했다. 그러면서 대폴란드 영지에 그대로 남아있으면서 소폴란드에 헨리크 키에틀리츠를 총독으로 세워서 감독하도록 했다. 이후 귀족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중앙 집권화를 이루고자 했지만, 귀족들은 이에 반감을 품었다. 여기에 그의 장남 오돈이 아버지가 계모인 에우독시아 사이에서 낳은 아들들을 선호하고 자신을 수도원에 보내려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귀족들에게 가세했다.

1177년 부활절. 여러 공작과 귀족들이 그니에즈노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부활절 행사를 개최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모인 것이었다. 그후 그들이 봉기를 일으키자, 소폴란드 총독 헨리크 키에틀리츠도 가세했고 실레시아의 볼레스와프와 그의 장남 오돈도 반란에 가담했다. 미에슈코 3세는 이에 맞서 항전했고, 한 때는 실레시아의 미에슈코가 볼레스와프를 축출하고 그에게 충성하면서 상황이 유리하게 돌아가는 듯했다. 그러나 카지미에시 2세가 반란군의 회유에 따르면서 전세는 점점 좋지 않게 흘러갔고, 1179년 추종자들과 함께 실레시아의 라치부시로 퇴각했다.

그후 카지미에시 2세가 폴란드의 새 대공이 되었고, 실레시아의 미에슈코는 소 폴란드에서 분리된 시비에르츠, 오시비엥침, 비톰 등지의 영주에 선임되는 대가로 미에슈코 3세를 저버렸다. 이후 적군이 라치부시를 압박해오자, 미에슈코 3세는 보헤미아로 피신해 보헤미아 공작이자 사위인 소비에슬라프 2세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하자 다시 프리드리히 1세를 찾아가 자신을 복위시켜주면 10,000달란트를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역시 거절당했다. 오직 서부 포메라니아 공작이자 사위인 보구스와프 1세만이 그를 도와주겠다고 나섰고, 그니에즈노 대주교 즈지스와프 역시 그를 지지했다. 1181년, 미에슈코 3세는 이들의 도움에 힘입어 그니에즈노와 칼리슈를 포함한 대폴란드 동부를 탈환했다. 그 후 1182년 아들 오돈과 공식적으로 화해하고 오돈이 오브라 강 지역 남부를 다스리는 것을 받아들였다.

이 당시 폴란드 대공이었던 카지미에시 2세는 미에슈코 3세가 대폴란드 영지를 되찾는 것을 막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 대신, 자신이 대공위를 확보한 것을 합법화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1180년 웽치차에서 열린 회의에서 사망한 성직자의 사유 재산인 동산을 인수할 수 있는 군주의 권리 및 군주가 전국을 여행하는 동안 관리들에게 어떠한 비용도 지불하지 않고 숙식할 수 있는 권리 등을 남용하는 문제를 규제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폴란드 내 강력한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을 공의회에 초대해 자신을 폴란드 대공으로 받들도록 했으며, 웽치차에서 채택된 결의안을 교황 알렉산데르 3세에게 보내, 사망한 주교들의 사유 재산을 모조리 몰수하는 군주들을 탐탁치 않게 여기던 그에게 앞으로는 주교의 재산을 몰수하지 않겠다고 약속함으로써, 교황청이 자신을 대공으로 인정하도록 유도했다.

카지미에시 2세는 알렉산데르 3세에게 사절단을 보낼 때 성인의 유물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알렉산데르 3세는 이를 약속했지만, 얼마 후인 1181년 8월 20일에 사망하는 바람에 이행하지 못했고, 뒤를 이어 교황에 선임된 루치오 3세가 1184년 모데나의 주교 이지에게 성 플로리안의 유물을 폴란드로 보냈다. 이 유물은 크라쿠프 대교구에 보관되었고, 폴란드에서 플로리안에 대한 숭배 의식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카지미에시 2세는 수도원을 열심히 후원하기도 했다. 1179년에는 원초크에 시토회 수도원을 건설하고 해당 지역의 수입을 기부했으며, 1185년 부르고뉴의 모나몬트 수도원에서 활동하던 시토회 수도사들을 코프르지브니카로 데려와서 그곳에서 사역하게 하고, 크프르지브니카와 여러 인근 마을을 기증했다. 일부 학자들은 카지미에시 2세가 안제이우프, 술레오프, 원초크, 크프르지브니카에서 설립한 4개의 시토회 수도원은 해당 지역의 경제적, 종교적, 문화적 기반 마련에 큰 보탬이 되었다고 본다. 그는 이외에도 수도원 대학을 여러 곳에 세워서 신학자들을 지속적으로 길려내, 폴란드에 기독교가 완전히 자리잡도록 힘을 기울였다.

한편, 카지미에시 2세는 동방에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182년, 카지미에시 2세는 볼레스와프 3세의 딸 아나스타샤의 아들인 스뱌토슬라프 므스티슬라보비치를 할리치-블라디미르 루테니아의 공작에 앉히기 위해 브레스트로 진격했다. 그는 모든 저항을 물리치고 브레스트를 공략한 뒤 스뱌토슬라프를 공작에 앉혔다. 1183년 스뱌토슬라프가 중독 증세를 보이며 사망하자, 그는 또다른 조카인 로만 므스티슬라보비치를 새 공작에 세웠다.

1184년, 미에슈코 3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에게 상당한 액수의 돈을 제공해 자신이 폴란드 대공으로 복위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다. 하지만 카지미에시 2세가 하인리히 6세에게 더 많은 금액을 지불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미에슈코 3세는 목표를 바꿔 형제 볼레스와프 4세의 아들이며 마조프셰 공작이었던 레첵을 설득해 카지미에시가 아닌 자신의 아들 미에슈코를 후계자로 지명하게 했다. 그러나 1185년, 레첵은 미에슈코가 통치를 무능하게 하는 데다 지나치게 권위적이라고 판단하고 카지미에시를 다시 후계자로 지명했다. 1186년 레첵이 사망한 후, 카지미에시는 미에슈코 3세와 협상한 끝에 마조프셰 일대를 자신이 가지는 대가로 미에슈코 3세의 아들 볼레스와프 미에슈코비치가 일부 영지를 수여받게 했다.

1187년 갈리치아 공작 야로슬라프 오스미오미슬이 사망하자 올렉 야로슬라비치가 새 공작에 선임되도록 지원했다. 그러나 그의 이복형제인 블라디미르 야로슬라비치가 반란을 일으켜 올렉을 몰아내고, 올렉을 지원한 폴란드에 보복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폴란드를 침공해 여러 마을을 약탈했다. 1188년, 카지미에시는 보복 원정을 감행해 할리치나에서 블라디미르를 몰아내고 로만 므스티슬라보비치가 갈리치아 공작을 겸임하도록 했다. 블라디미르는 헝가리로 도주한 뒤 그곳의 국왕 벨러 3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벨러 3세는 할리치나로 진군해 로만을 몰아내고 블라디미르를 복위시켰지만, 그를 계속 붙잡아두고 자신의 아들인 언드라시를 갈라치아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삼았다.

1189년 또는 1190년, 블라디미르는 헝가리 감옥에서 탈출해 폴란드로 망명했다. 카지미에시는 앞으로는 폴란드의 영토에 침범하지 않고 우호적인 관계를 맺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뒤 할리치나로 군대를 보내 언드라시를 축출하고 블라디미르를 공작에 복위시켰다. 당시 벨러 3세는 세르비아 방면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데 골몰하고 있던 터라 그의 이같은 움직임데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1191년, 카지미에시 2세에게 불만을 품은 소폴란드 귀족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미에슈코 3세는 이들에게 가담해 크라쿠프를 공략한 뒤 그곳의 권력을 아들 미에슈코 또는 볼레스와프 미에슈코비치에게 맡겼다. 그러나 카지미에시 2세는 신속하게 크라쿠프를 되찾고 그의 아들을 붙잡았다가 미에슈코 3세에게 돌려줬다. 이후 북동쪽 국경을 끈질기게 습격하는 이교도 세력인 요트빙거 부족으로 시선을 돌렸다. 1192~1193년, 카지미에시는 브르자 강 북쪽 지역을 점령하고 있는 요트빙거에 대한 원정을 개시했다. 요트빙거족은 이 전쟁에서 크게 패하고 그에게 충성을 서약했으며, 매년 상당한 공물을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1194년 5월 5일, 요트빙거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귀환한 카지미에시 2세는 크라쿠프에서 승리를 기념하는 연회를 벌였다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크라쿠프 수도사이자 폴란드 역사 연대기 저자인 빈센티 카드우벡(Wincenty Kadłubek, 1150년경 ~ 1223년 3월 8일)에 따르면, 그는 잔치 중에 술을 마신 직후 사망했다고 한다. <폴란드 왕국의 연대기> 작가 얀 드우고시( Jan Długosz, 1415 ~ 1480)에 따르면, 작은 잔에 든 물을 마신 후 의식을 잃고 쓰러졌고, 몇 시간 후 병이 심해져서 사망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잔치 참석자 일부는 그가 병으로 쓰러졌다고 믿었고, 다른 이들은 크라쿠프 출신의 여인이 그가 자신을 사랑하도록 만들기 위해 약을 타넣은 것이 잘못되어 죽었다고 믿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 기록의 신빙성은 의심되며, 현대 학자들은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 때문에 누군가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떠돌았을 테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고 본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56세라는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나이인 점을 들어 병에 걸려 사망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카지미에시 2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미에슈코 3세는 이 기회에 소폴란드를 공략하고 폴란드 대공에 복위하려 했다. 그러나 소폴란드 귀족들은 카지미에시 2세의 아들인 레첵 1세를 대공으로 추대하기로 했다. 미에슈코 3세는 이를 막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고 실레시아의 공작 미에슈코 4세와 야로슬로프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1195년 9월 13일 모즈카와 전투에서 참패했다. 이때 아들 볼레스와프 미에슈코비치가 전사했고, 그는 중상을 입은 채 가까스로 탈출했다. 이후 실레시아에서 파견된 군대가 현장에 도착하여 레첵 1세를 따르는 귀족들을 격파했지만, 미에슈코 3세가 패퇴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전해듣고 귀환했다.

그 후 미에슈코 3세는 무력으로 대공이 될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 카지미에시 2세의 마망인인 츠노쳄의 헬레나와 협상한 끝에 1198년 쿠야비야를 카지미에시 2세의 두 아들인 레첵과 콘라트에게 양도하는 대가로 폴란드 대공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1199년, 크라쿠프 총독 미코와이와 페우카 주교가 미에슈코 3세를 폐위시키고 레첵 1세를 폴란드 대공에 복위시켰다. 3년 후인 1202년, 귀족들은 그가 명목상 대공으로 복위하도록 허용했지만 모든 권력을 내놓게 했다.

1202년 3월 13일, 미에슈코 3세가 사망했다. 당시 크라쿠프 총독이었던 미코와이 그리피타는 카지미에시 2세의 아들인 레첵 1세에게 측근들을 해임하고 자신의 직위를 유지시켜주면 대공에 세우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레첵 1세가 거부하자, 미코와이는 미에슈코 3세의 장남인 브와디스와프 3세 라스코노기를 폴란드 대공에 세웠다. 그는 4년간 대공 직을 유지했지만, 1206년 미코와이가 사망하자 귀족들이 레첵 1세를 대공으로 추대하는 바람에 물러나야 했다.

2.10. 레첵 1세

우여곡절 끝에 폴란드 대공에 자리잡은 레첵 1세는 볼히니아의 공자 로만 므스티슬라보비치가 자신과 형제 콘라트의 영토를 침범하여 각지를 약탈하면서 깊숙히 들어오자, 콘라트와 함께 출진해 자비호스트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로만을 전사시켰다. 그 후 레첵 1세와 콘라트는 로만이 가졌던 영지의 소유권을 놓고 분쟁을 벌였다. 이때 헝가리 왕국의 국왕 언드라시 2세가 로만의 어린 아들 다니엘 로마노비치를 지켜주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키예프 루스 분쟁에 개입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지난날 아버지 벨러 3세에 의해 할리치나 공작을 맡았다가 쫓겨났던 아픔을 씻어내고 왕국의 영역을 확장하려는 것이었다. 레첵은 체르니코프 공작 프셰볼로드 스뱌토슬라비치와 손잡고 언드라시 2세에 맞섰지만, 스뱌토슬라비치는 헝가리의 공세에 밀려 철수해야 했다. 그후 언드라시 2세는 할리치나와 로도메리아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두 공국의 종주권을 주장했다.

언드라시가 헝가리로 돌아온 후, 프셰볼로드 스뱌토슬라비치의 먼 사촌인 블라디미르 이고레비치가 할리치나와 로도메리아를 점령하고 다니엘 로마노비치 일가를 추방했다. 다니엘 일가는 폴란드 대공 레첵 1세에게 도주했고, 블라디미르 이고레비치는 헝가리나 폴란드가 개입할 것을 우려해 레첵 1세와 언드라시 2세에게 막대한 선물을 바쳤다. 그러던 중 블라디미르 이고레비치의 형제인 로만 이고레비치가 헝가리로 찾아와서 자신을 할리치나의 공작으로 세워달라고 요청했다. 로만은 곧 언드라시가 보내준 헝가리군에 힘입어 블라디미르를 추방했다. 이후 로만 이고레비치와 보야르들간에 갈등이 심화되자, 언드라시 2세는 헝가리 귀족 베네덱에게 군대를 맡겨 할리치나로 파견했다. 베네덱은 1208년 또는 1209년에 로만 이고레비치를 사로잡았고, 언드라시 2세로부터 할리치나의 총독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베네덱이 할리치나에서 폭정을 일삼자, 로만 이고레비치와 블라디미르 이고레비치는 1209년 또는 1210년 초에 동맹을 맺고 베네덱을 협공해 보야르들의 호응에 힘입어 승리를 거두고 할리치나에서 헝가리인들을 몰아냈다. 이후 할리치나에 자리를 잡은 블라디미르 이고레비치가 역시 폭정을 자행하자, 보야르들은 언드라시 2세에게 사절을 보내 헝가리에 망명해 있는 다니엘 로마노비치를 할리치나의 통치자로 복위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언드라시 2세가 다니엘을 복위시키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자, 키예프 루스를 헝가리에게 내줄 수는 없다고 판단한 레첵 1세도 군대를 파견했다. 두 군대는 곧 다니엘을 공동으로 옹립하기로 합의하고 블라디미르를 몰아내고 다니엘을 공작으로 복위시켰다.

1210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실레시아 귀족들의 로비에 따라 피아스트 왕조 일원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실레시아의 미에슈코를 폴란드 대공으로 삼으라는 교령을 반포했다. 그니에즈노 대주교 헨리크 키에틀리츠는 교황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반대할 수도 없었기에 그 해 7월에 보르지코바에서 공작과 귀족들도 참석한 공의회를 소집해서 이 문제를 논의하기로 했다. 이 회의에는 레첵 1세, 콘라트 1세, 교황에 의해 대공으로 추천받은 미에슈코의 아들 카지미에시, 헨리크 1세 등이 참석했다. 이들은 논의 끝에 군주가 사망한 주교의 재산을 몰수하는 특권을 완전히 포기할 테니 교령을 취소해달라고 호소하는 사절단을 보내기로 결의했다.

이때, 교황에 의해 폴란드 대공에 선임된 미에슈코는 바벨로 들어가서 대공을 칭하며 통치를 시작했다. 이로 인해 내전이 벌어질 기미가 감돌았지만, 1211년 5월에 미에슈코가 노환으로 사망하면서 흐지부지되었다. 이후 교황청에 방문한 사절단은 인노첸시오 3세로부터 레첵 1세를 폴란드 대공으로 인정한다는 확약을 받아내는데 성공했고, 헨리크 1세는 루부슈 공작에 선임되었다.

1214년, 할리치나에서 보야르들이 반란을 일으켜 다니엘 로마노비치를 몰아내고 브와디스와프 코르밀리치를 새 지도자로 선출했다. 레첵 1세는 폴란드로 망명한 다니엘을 복위시키기 위해 할리치나를 침공했으나 공략에 실패했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던 언드라시 2세는 아예 자기 아들 칼만을 할리치나의 통치자로 세우기로 마음먹고, 1214년 가을 레첵 1세와 협상한 끝에 레첵 1세의 딸 살로메아와 칼만을 결혼시키고 서부 갈리시아의 두 도시인 프셰미실과 루바초프를 폴란드에 양도하는 대가로 할리치나의 공작에 칼만을 선출하는 것을 인정받았다. 헝가리-폴란드 연합군은 공세를 개시해 1214년 말 브와디스와프 코르밀리치를 축출하고 칼만을 할리치나의 공작으로 옹립했다.

할리치나 문제가 매듭지어진 뒤, 레첵 1세는 프로이센 방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초기에는 교역로를 통해 선교자들을 파견해서 프로이센인들을 개종시키려 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자 1222년 프로이센을 향한 십자군 원정을 개시했다. 그러나 원정은 포메라니아 공작 시비앵토페우크 2세가 도중에 이탈해버리는 바람에 흐지부지되었다. 이후 프로이센인들이 국경지대를 침범해오자, 그는 국경을 보호하기 위해 기사 근위대(stróże rycerskie)를 창설하기로 하고 모든 영지의 기사들이 여기에 참여하도록 했다. 그러나 1224년 프로이센인들이 국경을 습격했을 때, 이를 막아야 했던 기사 근위대가 뿔뿔이 도주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는 이에 분노해 적에게 맞서 싸우지 않고 도망친 근위대 지휘관을 추방했다.

그런데 이 지휘관은 폴란드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그리피치 가문의 일원이었다. 그리피치 가문은 이에 반감을 품고 1225년 루부츠의 헨리크를 폴란드 대공으로 옹립하기로 했다. 마침 레첵 1세가 루사티아인들의 국경 습격을 저지하기 위해 동진하자, 헨리크는 군대를 일으켜 크라쿠프 인근으로 진군했다. 그때 튀링겐 변경백이 예기치 않게 루부츠를 침공하자, 헨리크는 본거지가 털리는 것을 막기 위해 회군했다. 레첵은 동생 콘라트와 함께 맹렬히 추격했고, 드우브니아 강 유역에서 헨리크의 군대를 따라잡았다. 하지만 유혈충돌을 피하고 싶었던 양자는 협상 끝에 원래대로 돌아가기로 합의했다.

1227년, 대폴란드의 공작 브와디스와프 3세가 조카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와의 내전에서 밀린 끝에 레첵 1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레첵 1세는 이 기회에 아들이 없는 브와디스와프 3세로부터 대폴란드를 상속받기로 마음먹고 중재에 나섰다. 마침 포메라니아 공작 시비앵토페우크 2세의 지원이 끊어져서 내전의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던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도 중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해 11월, 그는 대폴란드 국경지대에 있는 고싸바에서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는 레첵 1세,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 헨리크, 마조프셰 공작 콘라트 1세가 참석했다. 그런데 이 회담 결과에 관심이 가장 많았을 브와디스와프 3세는 알 수 없는 이유로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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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싸바에서 암살당한 레첵 1세>, 얀 알로이지 마테이코(Jan Alojzy Matejko, 1838 ~ 1893) 작.

1227년 11월 24일 아침, 그날 열릴 회의에 참석하기 전에 목욕을 하던 공작들은 암살자들의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았다. 헨리크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지만 그의 충직한 기사인 비젠부르크의 페레그리누스가 자기 몸으로 가려서 끝까지 지켜준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 반면에 레첵 1세는 반쯤 발가벗은 채 말을 타고 마르싱코보 마을로 달아났지만, 추격대에게 따라잡혀 피살되었다. 당대 연대기 작가들은 포메라니아 공작 시비엥토페우크 2세가 피아스트 왕조의 지배로부터 포메라니아를 독립시키기 위해 암살했다고 밝혔다. 반면 후대의 여러 학자들은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가 암살을 주도했을 거라고 주장한다.

2.11. 3차 혼란기

대폴란드 공작 브와디스와프 3세 라스코노기는 레첵 1세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일전에 맺은 합의에 근거해 레첵 1세의 영지를 승계받았다고 선언했다. 1228년 초, 그는 실레시아 공작 헨리크 1세의 지원군을 받고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를 공격해 단숨에 격파하고 생포했다. 이후 크라쿠프에 입성한 뒤 레첵 1세의 후계자인 볼레스와프 5세가 아직 1살에 불과한 점을 들어 자신이 볼레스와프 5세를 대신해 폴란드 대공을 맡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레첵 1세의 형제인 마조프셰 공작 콘라트 1세는 이에 불복해 크라쿠프로 진군했다.

1228년 5월 5일 비실리차에서 열린 회의에서 진행된 선거 결과, 대부분의 폴란드 귀족들과 주교들은 브와디스와프 3세를 폴란드 대공으로 받들기로 결의했다. 그 대신, 브와디스와프 3세는 교회에 몇 가지 특권을 보장하고 레첵 1세의 어린 아들 볼레스와프 5세를 후계자로 삼겠다고 약속했으며, 소폴란드 귀족과 성직자들의 동의 없이는 새로운 법률을 도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로써 폴란드에서 처음으로 군주가 선거에 의해 선임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곧 악화되었다. 앞서 그에게 패배하고 생포되었던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는 감옥에서 탈출해 프워츠크로 도피한 뒤 전쟁을 재개했다. 브와디스와프 3세는 조카를 토벌하러 가야 했지만, 마조프셰 공작 콘라트 1세가 언제라도 크라쿠프로 쳐들어와서 대공 직을 탈취할 수도 있었다. 이에 따라 실레시아의 헨리크 1세를 크라쿠프 총독으로 세우고, 대폴란드에 대한 상속을 약속했다. 이는 그가 앞서 비실리차에서 귀족들과 성직자들에게 볼레스와프 5세를 유일한 상속인으로 정하겠다는 약속을 위반한 것이었다.

1228년 여름, 콘라트 1세가 군대를 일으켜 크라쿠프로 쳐들어갔다. 이에 헨리크 1세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헨리크 2세가 반격을 가해 바위 전투, 브로치에레즈 전투, 미엥지보르제 전투 잇따라 격파하고 침략자들을 몰아냈다. 콘라트 1세는 포기하지 않고 1229년 재차 원정을 개시해 상당한 성과를 거뒀고, 급기야 스피트코비체에서 평화 협상을 논의하기 위해 찾아온 헨리크 1세를 사로잡았다. 이후 헨리크 1세의 아내인 실레시아의 헤드비히의 간절한 청원에 따라 헨리크 1세를 석방했지만, 소폴란드 대부분을 공략했다. 콘라트 1세는 즉시 산도미에시 공국에서 자신의 조카 볼레스와프 5세를 몰아내고 자기 아들 볼레스와프를 산도미에시 공작으로 삼았다.

이후 폴란드 대공을 칭한 콘라트 1세 마소비에츠키는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와 맞붙고 있던 브와디스와프 3세를 공격해 칼리슈를 포위 공격했지만, 루스인들을 용병으로 고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공략에 실패했다. 하지만 브와디스와프 3세는 1229년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 라시보르즈에 있는 오폴레 공작 카지미에시 1세의 궁정으로 도피했다. 이후 대폴란드와 소폴란드에 대한 모든 권리를 실레시아의 헨리크 1세에게 양도함으로써 헨리크 1세와의 동맹을 갱신했다. 1231년 봄, 헨리크 1세는 브와디스와프 3세와 함께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를 상대로 원정을 단행했다. 초기에는 여러 차례 승리를 거뒀지만, 그니에즈노 성벽에서 대폴란드 귀족들의 방해 공작으로 인해 저지되었다. 그 후 브와디스와프 3세는 스로다 실롱스카로 이동했다가 1231년 11월 3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2.12. 헨리크 1세

1232년, 실레시아 공작 헨리크 1세는 브와디스와프 3세가 자신에게 대폴란드와 소폴란드에 대한 모든 권리를 양도한 것을 명분으로 삼고 1232년 소폴란드를 향한 원정을 개시했다. 당시 콘라트 1세 마소비에츠키는 소폴란드에서 강압적인 통치를 실시해 소폴란드 귀족들의 반감을 샀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존중하겠다고 약속한 헨리크 1세를 따르기로 했다. 여기에 콘라트에게 산도미에시 공국을 빼앗긴 레첵 1세의 미망인 그지미스와바와 아들 볼레스와프 5세도 헨리크 1세를 지지했다. 이리하여 광범위한 지지를 확보한 헨리크 1세는 1232년 크라쿠프에 입성한 뒤 폴란드 대공으로 선포되었다. 콘라트 1세는 웽치차와 시에라츠만 간신히 지배할 수 있었다.

1233년, 콘라트 1세는 그지미스와바와 볼레스와프 5세에게 평화 협상을 제의했다. 두 사람은 회담에 참석하러 갔다가 현장에서 콘라트 1세의 부하들에게 체포되어 심한 구타를 당한 뒤, 처음에는 체르스크에 투옥되었다가 나중에는 시에시에호프의 어느 수도원에 감금되었다. 그지미스와바는 포로 생활 동안 콘라트 1세에게 뺨을 얻어맞는 등 많은 굴욕을 견뎌야 했다. 그러다가 루부슈의 클레멘스를 비롯한 그라피치 가문이 경비원들이 술에 취하게 만들어준 덕분에 수도원에서 가까스로 탈출했다. 이후 헨리크 1세에게 피신한 뒤 스카와의 성에 은거했다.

1233년, 헨리크는 콘라트 1세와 헤움에서 협약을 체결했다. 그는 여전히 콘라트 1세의 영지였던 웽치차(Łęczyca)와 시에라츠(Sieradz)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기로 했고, 그 대가로 크라쿠프에서 자신의 권위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후에도 소폴란드에서 양측간의 크고 작은 충돌은 지속되었다. 1234년 여름, 헨리크는 대폴란드에 다시 개입하기로 했다. 당시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는 그리에즈노 대주교 펠카에게 공작들의 특권 중 일부를 부여함으로써 일부 귀족들의 지지를 잃었다. 이 전쟁에서 속절 없이 밀린 오도니치는 교회 인사들의 중재하에 헨리크와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헨리크는 바르타 강까지에 이르는 대폴란드의 절반을 확보할 수 있었고, 칼리슈와 포즈난은 두 세력의 경계선이 되었다. 하지만 대폴란드는 소폴란드와 마찬가지로 양측간의 무력 충돌이 종종 벌어졌다. 가령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는 1235년에 은밀히 스렘 요새를 무력으로 탈환했다. 헨리크는 칼리슈와 루다를 오포예 공작에게 할당하고, 그 대가로 오포예를 직접 통제했다.

헨리크는 실레시아에 이어 소폴란드, 대폴란드에서의 지배력을 꾸준히 강화하는 한편, 기사단을 후원해 귀족들의 강대한 권력을 억제하려 했다. 특히 성주들의 권력을 억제해, 대공 및 공작의 뜻과 어긋나는 행보를 걷지 못하도록 했다. 다만 그지마와, 리스, 그리피체 등 대귀족들의 특권을 보장하고, 그 대가로 그들의 협조하에 통치를 행사했다. 한편, 그는 가톨릭 교회와 심각한 마찰을 벌였다. 특히 브로츠와프 주교구에 속해 있던 오트무후프-니사 일대의 금광에서 나오는 수입을 자신에게 돌리자, 브로츠와프 주교 토마스 1세는 그가 역대 대공들이 보장했던 교회 재산에 손을 댔다며 반발했고, 급기야 파문을 선고했다. 그렇지만 루부슈 주교들에게 할리치나 공국의 선교 관리를 맡기는 등 교회와 마냥 마찰을 벌이지는 않았다.

그는 경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실레시아 일대를 적극적으로 개발해 국고를 증진하고자 하였고, 수데텐 산기슭과 국경림의 무인 지역을 집중적으로 개발하고 주민들을 이주시켰으며, 여러 도시에도 자치권을 부여했다. 이때 독일인들을 실레시아에 대거 끌여들였는데, 후대의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은 이 때문에 "명백한 폴란드인의 영토였던 실레시아가 급격히 독일화되었다"고 비판했다.

헨리크는 자신의 직위를 아들 헨리크 2세에게 물려주려 노력했다. 1234년 아들을 공동 통치자로 삼고 영지와 권한을 분할했다. 이때부터 헨리크는 실레시아 공작과 크라쿠프 공작을 맡았고, 헨리크 2세는 실레시아 공작과 대폴란드 공작을 맡았다. 여기에 아들이 대공으로서 대관식을 치를 수 있도록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시칠리아 국왕 프리드리히 2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교회와 갈등을 벌이면서 대관식 보장이 제대로 되지 않다가 1238년 3월 19일 크로스노 오드잔스키에에서 사망했다. 당시 그는 파문이 풀리지 않은 상태였기에 수도원에 안장되는 게 거부되었지만, 헨리크 2세가 오트무후프-니사 일대의 금광 수입을 브로츠와프 주교구에 되돌려주겠다고 약속해 아버지에게 걸린 파문이 풀리게 한 덕분에 겨우 안장될 수 있었다.

2.13. 몽골 제국의 침략

헨리크 1세의 뒤를 이어 폴란드 대공에 선임된 헨리크 2세는 여러 문제에 직면했다. 대폴란드에서는 헨리크 1세와 치열한 내전을 벌였던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가 여전히 건재했고, 소폴란드에서는 마조프셰 공작 콘라트 1세가 도사렸다. 또한 폴란드 귀족들은 군주의 직위 세습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들이 투표를 통해 군주를 세우기를 선호했다. 한편, 오포에와 산도미에시에서는 어린아이인 오포에의 미에슈코 2세, 볼레스와프 5세가 명목상 공작을 맡았고, 그는 이들의 후견인으로서 실질적인 통치를 행사했다. 하지만 두 아이가 장성하면 오포에와 산도미에시를 넘겨줘야 했다. 결국 그가 온전히 다스릴 수 있는 영지는 실레시아 뿐이었다. 계다가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은 헨리크 1세가 사망한 틈을 타 산토크 요새를 점령하고 루부슈를 위협했다.

그러던 1239년 6월 5일, 아버지와 대폴란드 영지를 놓고 오래도록 전쟁을 벌였던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가 사망했고, 그의 두 아들 프셰미수와 볼레스와프는 아직 어렸다. 그는 이 때를 틈타 그니에즈노를 비롯해 오도니치의 영지 대부분을 인수하고, 나크워와 우이시치에를 두 아이에게 명목상으로 넘겼다. 이후 아버지가 가담했던 호엔슈타우펜 왕조간의 관계를 끊고 교황청의 편에 합류해 교회와의 갈등을 즉시 종식시켰으며, 자신의 딸 콘슈탄치어를 마조프셰 공작 콘라트 1세의 아들 카지미에시와 결혼시킴으로써 콘라트 1세와 결혼동맹을 맺었다. 이후 1239년 루부슈를 포위 공격하던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군을 요격해 대승을 거두었고, 일전에 빼앗겼던 산토크 요새를 탈환했다.

이렇듯 산적한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하던 그였으나, 동방에서 최악의 상대가 등장했다. 1241년 1월, 바투 칸이 이끄는 몽골 제국군헝가리 왕국으로 쳐들어갔다. 이때 바투는 폴란드 대공국이 헝가리를 도우려 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이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10,000명 가량의 기병대를 오르다[2], 바이다르[3], 카단[4]에게 맡겨 폴란드를 공격하게 했다. 그들은 먼저 투르스크 비엘키와 타르체크에서 크라쿠프와 산도미에시 기사들을 격파했고, 1241년 3월 18일에는 크라쿠프 보이보드(voivode) 브워지미에르츠와 크라쿠프 영주들을 상대로 크미엘니크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브워지에르츠를 사살했다. 이후 몽골군은 크라쿠프와 산도미에시를 포함한 소폴란드 전역을 파괴했다.

몽골군이 심각한 파괴를 자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헨리크 2세는 소폴란드에서 겨우 빠져나온 병사들을 수습하고, 대폴란드, 실레시아 전역에서 병사들을 가능한 한 긁어모았으며,[5] 독일,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등 서방 통치자들에게 구원병을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서유럽의 통치자들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교황 사이의 대립에 더 관심이 있었기에 별다른 지원을 하지 않았고, 오직 보헤미아 국왕 바츨라프 1세성전기사단, 구호 기사단이 구원병을 보냈다. 그나마도 바츨라프 1세는 레그니차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군대를 배치해 두고 상황을 지켜봤다.

1241년 4월 9일, 헨리크 2세가 이끄는 폴란드군 및 기사단과 몽골제국군레그니차 평원에서 맞붙었다. 그는 군사적 역량이 뛰어난 편이었으나, 불행히도 몽골제국군은 너무도 강한 상대였고, 결국 패배를 면치 못했다. <유명한 폴란드 왕국의 연대기> 작가인 얀 드우고시(Jan Długosz, 1415 ~ 1480)에 따르면, 그와 함께 전투에 참여했던 오포에 공작 미에슈코 2세가 도중에 휘하 기사들을 이끌고 달아나자, 헨리크 2세는 다음과 같이 절규했다고 한다.
"spadło na nas wielkie nieszczęście!"
"큰 불행이 우리에게 닥쳤구나!"

얀 드우고시에 따르면, 헨리크 2세는 어떻게든 포위를 뚫기 위해 분전하던 중 검을 쥔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앞을 막은 타타르인을 쳐 죽이고자 했다. 이때 또다른 타타르인이 창으로 그의 팔 아래를 찔렀다. 헨리크는 치명상을 입고 말에서 떨어졌고, 타타르인들은 그를 잡고 전투 지역에서 석궁 2발이 닿는 거리까지 끌고 나간 뒤 칼로 머리를 자르고 배지를 찢고 벌거벗은 몸만 남겼다고 한다. 반면 폴란드 출신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자 베닉딕토가 귀위크 칸의 궁정으로 가는 여정을 함께 했던 드 브리디아가 1247년에 작성한 <타타르의 역사(Historia Tartarorum)>에 따르면, 타타르인들은 헨리크 2세를 붙잡은 뒤 산도미에시에서 살해된 귀족 앞에서 무릎을 꿇으라고 명령한 뒤 그의 목을 벤 후 머리를 가지고 모라비아를 거쳐 헝가리로 가서 바투 칸 앞에서 다른 머리들 사이에 던졌다고 한다.

헨리크 2세가 몽골군과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뒤, 장남 볼레스와프 2세 로가트카가 폴란드 대공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헨리크 1세와 헨리크 2세가 애써 구축했던 세력은 몽골군의 침략으로 산산조각났기에, 볼레스와프 2세 로가트카가 권좌를 유지할 가망은 없었다. 1241년 7월 10일, 마조프셰 공작 콘라트 1세 마소비에츠키는 폴란드 대공국의 수도인 크라쿠프에 입성한 뒤 지난날 자신에게 맞섰던 루부슈의 클레멘스를 비롯한 소폴란드 귀족들의 복종을 받아냈다. 여기에 대폴란드에서는 지난날 헨리크 1세에게 대적했던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의 두 아들인 프셰미수 1세와 볼레스와프 포보즈니가 대폴란드를 갈라먹고 치열한 세력 다툼을 벌였다. 볼레스와프 2세는 레그니차 전투의 참상이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이들을 대적할 도리가 없다고 여기고, 콘라트 1세 마소비에츠키에게 폴란드 대공위를 넘겨줬다.

그러나 콘라트 1세가 후환을 없애기 위해 볼레스와프 5세의 추종자들을 모조리 체포하라는 지시를 내리자, 클레멘스를 위시한 소폴란드 귀족들은 이에 격분해 볼레스와프 5세를 받들어 봉기를 일으켰다. 1243년 5월 25일, 콘라트 1세는 수호도우 전투에서 대폴란드 공작 프셰미수 1세와 오포에 공작 미에슈코 2세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클레멘스가 이끄는 볼레스와프 5세의 군대에게 참패했다. 콘라트 1세는 이로 인해 소폴란드를 잃었고, 볼레스와프 5세가 폴란드의 새 대공에 선임되었다.

2.14. 볼레스와프 5세

17세의 볼레스와프 5세에게 밀려난 콘라트 1세는 어떻게든 볼레스와프 5세를 몰아내고 폴란드 대공이 되려 했다. 1246년, 콘라트 1세는 리투아니아와 오폴레로부터 지원군을 받아낸 뒤 아들 카지미에시와 함께 소폴란드를 침공했다. 자리슈프 전투에서 볼레스와프 5세의 군대를 격파하고 를로프(Lelów), 티니에크(Tyniec), 크라쿠프를 공략하고 루다와 강 어귀에 요새를 건설했다. 그러나 더 진군하는 것을 망설이다가 시에리츠로 철수했다. 볼레스와프 5세는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약혼자 쿠니군다로부터 대출을 받고 노비 송치(Nowy Sącz) 일대를 그녀에게 제공했다. 그 해 가을, 보레스와프 5세는 반격을 가해 를로프를 탈환했다.

1247년 8월 31일, 콘라트 1세가 사망했다. 이해에 약혼자 쿠니군다와 정식으로 결혼한 볼레스와프 5세는 콘라트 1세의 아들로서 폴란드 대공이 되려는 야망을 물려받은 카지미에시를 상대로 항전했으며, 1254~1255년에 카지미에시에게 사로잡힌 마조프셰 공작 시에모비트와 그의 아내를 석방시키는 데 일조했다. 1258년, 실레시아의 볼레스와프가 헨리크 2세가 카지미에시에게 양도했던 카스탤란을 도로 빼앗기 위해 카지미에시와 전쟁을 시작했다. 볼레스와프 5세는 즉시 실레시아의 볼레스와프 편에 섰고, 카지미에시의 본거지인 쿠야비야를 약탈했다. 양자는 1259년 11월 29일에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1260년, 카지미에시가 그의 영지를 급습해 를로프 요새를 공략하면서 전쟁이 재개되었다. 1260년 12월 12일, 볼레스와프 5세는 프셰드보르츠 회의에서 카지미에시와 마조프셰 공작 시에모비트 사이의 분쟁을 중재하여 평화 협약을 맺도록 했다.

한편, 볼레스와프 5세는 헝가리 국왕 벨러 4세의 사위로서 그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1245년, 볼레스와프 5세는 헝가리 왕자이며 할리치나 공위 계승 후보였던 로스시스와프의 원정을 지원했으나 그 해 7월 17일 야로스와프 전투에서 다니엘 1세 로마노비치에게 패배한 뒤 웽치차에서 다니엘 1세를 할리치나의 공작으로 인정하고 전쟁을 종식한다는 내용의 협약을 맺었다. 1253년 6월과 7월 초, 볼레스와프 5세는 키예프 루스에서 파견한 군대와 함께 헝가리의 오스트리아 원정을 지원하고자 모라비아를 공격했다. 이 전쟁은 별다른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지만, 폴란드-루스군은 많은 전리품을 탈취했다. 보헤미아 국왕 오타카르 2세는 크라쿠프 주교 파벨의 도움으로 볼레스와프 5세를 설득해 보헤미아 포로들을 돌려받았다.

1260년 헝가리 왕자 이슈트반이 카린시아 일대를 약탈하면서 헝가리와 보헤미아간의 또다른 갈등이 일어났다. 그 해 6~7월, 볼레스와프 5세는 시에라츠 공작 레첵 2세와 함께 보헤미아에 맞서 싸우는 헝가군을 지원했으나 7월 12일 크레센브룬 전투에서 헝가리군이 패배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1262년 1월 29일 이와노비체에서 열린 회의에서, 그는 보헤미아를 지지하는 실레시아의 헨리크 3세에 맞서 싸우는 실레시아의 볼레스와프에게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6월 7일에는 단쿠프에서 회의를 열고 헨리크 3세와의 평화 협상이 이뤄졌다. 이때 오포예 공작 브와디스와프가 볼레스와프 5세와 실레시아의 볼레스와프를 납치해 보헤미아로 끌고 가려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헝가리 국왕 벨러 4세와 이슈트반 왕자간의 내전이 벌어지자, 볼레스와프 5세는 1266년 3월 아니 쿠니군다와 함께 부다에서 열린 평화 회의에 참석해 두 사람간의 갈등을 중재했다. 이슈트반 왕자는 이 자리에서 볼레스와프 5세, 레첵 2세, 실레시아의 볼레스와프, 그리고 오타카르 2세와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겠다고 약속했다. 1270년 벨러 4세의 뒤를 이어 헝가리 왕이 된 이슈트반 5세가 볼레스와프 5세가 있는 크라쿠프로 찾아가 영구적인 평화 협약을 맺었다. 같은 해에 이슈트반 5세가 바벤베르크 땅을 놓고 보헤미아와 전쟁을 재개했으나 패배하자, 볼레스와프 5세는 1271년 루스 공작들과 함께 보헤미아 왕국을 지원하는 브로츠와프 공작 헨리크 4세를 공격했다. 1272년 4월 6일 이슈트반 5세가 사망한 뒤, 헝가리 왕국이 심각한 내우외환에 휩싸이자, 볼레스와프 5세는 1277년 오파바에서 보헤미아 왕국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볼레스와프 5세는 소폴란드 북동쪽 국경지대 너머에 있는 요트빙거족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데에도 힘을 기울였다. 1248~1249년, 그는 마조프셰 공작 시에모비트가 요트빙거족에 대항하는 원정을 지원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그후 1256년과 1264년에 요트빙거족이 소폴란드를 침략하고 심각한 약탈을 자행하자, 그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1264년 원정군을 파견해 요트빙거 지도자 코마트를 사살했다. 이후 우쿠프에 주교구를 조직하고 누이 살로메아와 함께 요트빙거족을 상대로 기독교 포교에 힘을 기울였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258년, 킵차크 칸국의 통치자인 베르케 칸이 부하 부룬다이가 이끄는 군대를 서쪽으로 파견했다. 할리치나 공작 다니엘 1세 로마노비치는 즉시 귀순했고, 부룬다이가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루테니아를 상대하는 원정에 동참했다. 부룬다이는 리투아니아와 루테니아를 순조롭게 복속시킨 뒤, 루테니아인들을 대거 징집한 후 1259년 11월 폴란드로 쳐들어가 산도미에시, 루블린, 크라쿠프를 초토화했고, 볼레스와프 5세는 레첵 2세가 통치하는 시에라츠로 피신했다. 1260년 2월 몽골군이 소폴란드를 떠나자, 볼레스와프 5세는 소폴란드로 귀환했다.

볼레스와프 5세는 1262년 타르나와에서 몽골을 도왔던 다니엘과 평화 협약을 맺었지만, 1265년 다니엘이 사망한 뒤 리투아니아-루테니아 군대가 소폴란드를 재차 침공하여 스카르셰프, 타르체크, 비실리카 일대를 황폐화시켰다. 1265~1266년, 그는 루테니아 공작들, 다니엘의 아들인 스즈와른, 와실레크의 2번째 공세에 맞서 싸웠지만 1266년 6월 19일 스즈와르노 전투에서 패배를 면치 못했다. 1266년 양자는 평화 협약을 맺었고, 그는 요트빙거 족에 대한 지배권 주장을 포기했다. 1273년 7월, 리투아니아인들이 루블린 일대를 침공해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레첵 2세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1273년 12월 리투아니아를 공격했다. 1278년 리투아니아인들은 재차 루블린을 공격했지만 레첵 2세에게 패배했다.

이렇듯 심각한 내우외환에 시달리면서도, 볼레스와프 5세는 도시 개발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1253년 2월 27일 보흐니아에 도시 특권을 부여했으며, 1257년 6월 5일 크라쿠프 시에게 마그데부르크 법에 의거해 특권을 부여했고, 1258년 노비 코르친 시, 1264년 스카리셰프, 1271년 옌제이우프 시에 특권을 부여했다. 이들 도시들은 이에 힘입어 급속한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또한 1251년 보흐니아에서 소금 광산이 발견되자 즉시 자신의 영지에 통합시켜 영구 수입원으로 삼았다.

그는 통치 기간 동안 교회에 많은 후원을 했다. 1252년 8월 28일 오글렌도프에서 열린 회의에서 어머니 그지미스와바와 함께 크라쿠프 주교직에 대한 면칙 특권을 발령해 경제 및 사법 문제에서 성직자들의 폭넓은 독립성을 보장했다. 1253년 9월 17일,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볼레스와프 5세와 크라쿠프 주교의 탄원을 받아들여 슈체파노프의 스타니스와프를 성인으로 시성했다. 1254년 5월 8일 스타니스와프를 기리는 축하 행사가 크라쿠프에서 거행되었다. 그 해 6월 18일에는 오글렌도프의 크라쿠프 주교단에게 부여된 면제 특권을 승인했다.

1257년 웽치차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주교를 납치한 통치자는 자동으로 파문을 선고받고, 그가 통치하는 구역에서는 성무 금지령이 발동된다는 교령을 반포했다. 1258년 6월 11~13일 산도미에시에서 공의회를 소집하고 소폴란드 교회에 대한 특권을 승인했다. 한편, 그는 누이 살로메아와 함께 자비코스트에 가난한 성 클라라 수도원을 세웠고, 바벨 성의 목조 및 흙 요새를 대대적으로 재건하기도 했다.

볼레스와프 5세의 아내인 쿠니군다는 어렸을 때부터 순결을 평생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그녀는 비록 정치적인 이유로 그와 결혼하기는 했지만, 하느님에게 맺은 맹세를 어길 수는 없다고 선언했고, 신앙심이 투쳘했던 그도 이를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후계자를 볼 가망이 없었던 그는 1265년 시에라츠 공작 레첵 2세를 양자로 삼고 크라쿠프-산도미에시 공국의 정당한 후계자로 삼았다.

1273년, 오포예 공작 브와디스와프가 폴란드 대공위를 노리고 크라쿠프로 쳐들어갔다. 크라쿠프의 귀족들은 엄격하기로 유명한 레첵 2세가 폴란드 대공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브와디스와프에게 호응했다. 그 해 6월 4일, 볼레스와프 5세는 보구친 전투에서 브와디스와프의 군대와 귀족들의 반란군을 격파했지만, 흐샤누프를 포함한 크라쿠프 일대의 일부 영토를 빼앗겼다. 이후 볼레스와프 5세와 레첵 2세가 군대를 집결시켜 오포예로 진격할 준비를 하자, 브와디스와프는 협상을 제안했다. 1274년, 볼레스와프 5세와 레첵 2세는 브와디스와프가 폴란드 대공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고 흐샤누프를 돌려주는 대가로, 브와디스와프가 점령한 크라쿠프 영지를 계속 가지도록 허용하는 내용의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2.15. 레첵 2세

1279년 12월 7일 볼레스와프 5세가 사망한 뒤 폴란드의 새 대공이 된 레첵 2세는 곧 도전에 직면했다. 1280년 2월, 할리치나 공작 레프 2세가 자신이 크라쿠프 공작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리투아니아인, 타타르인 및 일부 루스인의 지원을 받으며 쳐들어온 것이다. 그의 군대는 루블린 지방을 휩쓴 뒤 비스툴라 강을 건너 산도미에시로 쳐들어갔다. 하지만 산도미에시 시를 공략하는 데 애를 먹었고, 그 사이에 병력을 규합한 레첵 2세가 반격을 가했다. 1280년 2월 23일에 벌어진 고즐리체 전투에서, 레첵 2세는 적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레프 2세를 몰아냈다. 이후 그는 보복 원정에 나서 르비프 등 폴란드-할리치나 국경지대 도시 및 마을들을 파괴했다.

1281년, 브로츠와프 공작 헨리크 4세가 브로츠와프 공국에 위치한 한 마을에서 열린 상호 협력을 논의하기 위한 회의에 참석한 글로고프 공작 헨리크 3세, 브르주하티의 헨리크 5세, 대폴란드 공작 프셰미수 2세를 모조리 체포해 투옥한 뒤 정치적 양보를 하라고 강요했다. 레첵 2세는 공작들을 구출하겠다는 명분을 걸고 브로츠와프 공국을 공격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헨리크 4세는 이에 보복하고자 크라쿠프를 공격했지만 격퇴되었다. 1282년, 발트해 연안에 거주하던 요트빙거족이 루블린 일대를 심각하게 파괴했지만 우오피엔니크 전투에서 현지군에게 패퇴했다. 레첵 2세는 철수하는 침략자들을 추격했고, 나레프 강 어귀에서 그들을 따라잡고 철저하게 살육했다. 1283년 리투아니아인들이 요트빙거족의 참패에 보복하고자 쳐들어와서 산도미에시 일대에 진입한 뒤 약탈을 자행하자, 그는 로위니 마을 인근에서 그들을 함정으로 유인해 격파했다.

이렇듯 뛰어난 군사적 역량을 발휘했지만, 폴란드 대공으로서의 그의 입지는 그다지 강력하지 않았고, 재위 기간 내내 내부의 정적들과 맞서 싸워야 했다. 1280년대 초, 그는 성직자들이 너무 많은 면책 특권을 누린다고 여기고 일부 특권을 회수했다가 크라쿠프 주교 파벨의 비난을 받았다. 또한 볼레스와프 5세의 미망인인 쿠니군다가 지참금으로 보유하고 있는 노비사치가 헝가리 왕국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여겨 직할지로 삼아버리면서, 선행을 많이 베풀고 기독교 신앙이 투철한 쿠니군다를 존경했던 귀족 및 백성들의 반감을 샀다.

1282년, 산도미에시 총독 야누스 스타자가 레첵 2세가 요트빙거족 및 리투아니아인들과 전쟁을 벌이느라 바쁜 틈을 타 산도메이시와 라돔 성을 체르스크 공작 콘라트 2세에게 넘기려다가 발각되었다. 레첵 2세는 야누스 스타자의 입지가 탄탄한 상황에서 함부로 처벌했다가는 후폭풍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여겨 불문에 붙였다. 1282년 또는 1283년에는 와구프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한 파벨을 체포해 시에리츠로 압송했다가 폴란드 교회의 거센 반발에 부딪치자 어쩔 수 없이 석방했고, 1286년 11월 30일 3,000 그지브나(grzywna)를 지불하고 성잭자들의 면책 특권을 종전대로 허용한다는 내용의 합의를 맺어야 했다.

1285년 4월, 야누스 스타자와 크라쿠프 총독 제에고타, 주교 파벨 등이 그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레첵 2세는 이 반란을 예상치 못했기에 제대로 된 대응을 못하고 헝가리 왕국으로 피신했다. 반란군은 체르스크 공작 콘라트 2세를 폴란드 대공으로 옹립하려 했지만, 콘라트 2세는 레첵 2세에게 충성하는 크라쿠프 시민들이 방어하고 있던 바벨 성을 함락시키지 못해 크라쿠프에 입성하지 못했다. 그 사이 헝가리로부터 지원을 받은 레첵 2세가 돌아왔고, 1285년 5월 3일 보구지체 전투에서 콘라트 2세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콘라트 2세는 체르스크로 도피했고, 레첵 2세는 반란에 가담했던 인사들을 추방했다. 이 덕분에 그의 입지는 탄탄해질 수 있었다.

1287~1288년, 킵차크 칸국의 6대 칸인 탈라부가 칸과 노가이 칸이 루스 공작들의 지원을 받으며 소폴란드로 쳐들어갔다. 기사들과 주민들은 요새화된 도시로 피신해 농성했고, 레첵 2세는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헝가리로 향했다. 소폴란드는 1241년과 1259년에 몽골군이 쳐들어왔을 때보다 준비가 잘 되어 있었고, 대부분의 요새화된 도시, 특히 크라쿠프와 산도미에시는 적의 맹공을 잘 막아냈다. 여기에 헝가리군이 소폴란드로 밀려올 예정이라는 정보가 입수되자, 탈라부가 칸과 노가이 칸은 소폴란드의 농촌들로부터 약탈한 전리품들을 챙기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레첵 2세는 1265년에 막소(Macsó)의 바나테이자 할리치나 공자인 로스티슬라프 미하일로비치의 딸 그리파나와 결혼했다. 그러나 1271년 그리피나가 레첵 2세가 발기부전이기 때문에 부부간의 결합이 좀처럼 성립되지 않는다고 폭로했고, 이로 인해 두 사람은 1274년까지 별거했다. 이후 볼레스와프 5세의 중재로 재결합했고, 레첵 2세는 여러 의사들의 치료를 받았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이로 인해 후계자를 두지 못하던 레첵 2세는 1288년 9월 30일 크라쿠프에서 사망했다.

2.16. 4차 혼란기

레첵 2세 사후, 크라쿠프를 위시한 소폴란드 일대에서 프워츠크 공작 볼레스와프 2세와 브로츠와프 공작 헨리크 4세 지지자들간의 내전이 발발했다. 볼레스와프 2세는 친히 군대를 일으켜 크라쿠프로 진군했지만, 헨리크 4세를 대공으로 옹립한 니에지에비츠의 수웨크가 농성하는 크라쿠프를 정복하는 데 실패했다. 1289년 2월 26일, 시웨리츠 인근에서 볼레스와프 2세와 쿠야비아 공작 브와디스와프의 군대와 헨리크 4세 추종자들의 군대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그 결과 볼레스와프 2세가 승리를 거두었고, 헨리크 4세를 지지했던 시치나와 공자 프젬코는 전사했으며, 오포예의 공자 볼코 1세는 브와디스와프에게 사로잡혔다.

하지만 볼레스와프 2세는 폴란드 대공을 계승하려던 것을 돌연 그만두고 쿠야비아 공작 브와디스와프에게 떠넘겼다. 브와디스와프는 크라쿠프 주교 파벨의 도움을 받아 바벨 성을 공략하고 스칼라와 시비앵치체에 요새를 세우면서 크라쿠프를 압박했다. 이에 헨리크 4세가 친히 군대를 이끌고 크라쿠프로 진격했고, 1289년 여름 크라쿠프 인근에서 브와디스와프를 격파했다. 이후 헨리크 4세는 크라쿠프 대성당에 들어가 기도를 올린 뒤 자신이 폴란드의 왕이 되어야 한다는 신의 메시지가 담긴 표징을 보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브와디스와프는 포기하지 않고 산도미에시에서 계속 도전했다.

1290년 6월 23일, 크라쿠프에서 브로츠와프로 귀환한 뒤 승리를 기념하는 연회를 벌이던 헨리크 4세가 돌연 사망했다. 연대기 작가인 스티리아의 오타카르에 따르면, 헨리크 4세는 교황에게 폴란드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치르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때 그는 교황에게 선물로 12,000 그지브나(grzywna)를 로마로 보냈다. 그러나 사절이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때, 이동 중에 400 그지브나가 도난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분노한 교황은 헨리크 4세와의 모든 협상을 취소했다. 헨리크 4세가 어떻게든 횡령범을 잡으려 들자, 그 자는 헨리크 4세를 제거하기로 했다. 헨리크 4세의 궁중 의사 중 한 사람의 형제가 브로츠와프 궁정에 고용된 뒤 소량의 독극물을 음식에 타서 천천히 독살시키려 했다. 하지만 헨리크 4세의 중독 증상을 눈치챈 군젤린이라는 의사가 헨리크 4세의 구토를 유도하는 방식으로 치유했다. 암살자는 이번에는 헨리크 4세가 빵을 자르는 데 사용하는 검에 독을 발랐다. 헨리크 4세는 이로 인해 중독되어 숨을 거뒀다고 한다.

이 긴 이야기는 다른 출처에서 일부 요소만 확인되었기 때문에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으며, 여러 학자들은 아예 허구적인 이야기로 간주한다. 그렇지만 얀 드우고시의 <폴란드 왕국 연대기>를 비롯한 여러 연대기에도 그가 중독 증세를 보이며 죽었다고 기술되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이 단순한 병사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일부 학자들은 브로츠와프 공국의 권력을 얻고자 했던 경쟁자 헨리크 5세가 암살극을 주도했다고 주장하지만 별다른 증거는 없다.

2.17. 프셰미수 2세

생전에 아들을 두지 못했던 헨리크 4세는 브로츠와프 공국을 사촌이며 자신을 충직하게 따라줬던 그워구프 공작 헨리크 3세에게 넘겼고, 크워츠크를 보헤미아에 넘겼으며, 크라쿠프를 비롯한 소폴란드를 프셰미수 2세에게 넘겼다. 그리하여 대폴란드 공작 프셰미수 2세가 폴란드 대공이 되었지만, 1290년 6월에 크라쿠프를 잠깐 방문해 귀족 및 성직자 대표들을 만나 그들이 종전대로 특권을 누릴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하고 포즈난으로 돌아간 뒤에는 다시는 소폴란드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포즈난으로 돌아갈 때 볼레스와프 2세 시초드리 시절부터 크라쿠프 대성당 재무부에 보관되었던 대관식 휘장을 가져갔다.

한편, 보헤미아 국왕 바츨라프 2세는 자신의 숙모이자 레첵 2세의 미망인인 그리피나를 통해 소폴란드에 대한 권리가 있으며, 독일왕 루돌프 1세 역시 인정한 바 있다며 소폴란드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다. 프셰미수 2세는 보헤미아 왕국의 군사력과 부가 막강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힘만으로는 보헤미아에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1290년 10월 14일 그니에즈노 대주교 야쿠브 스빈카가 주재한 공의회에 참석해 여러 귀족 및 사제들과 두루 논의한 끝에, 보헤미아 국왕에게 소폴란드에 대한 권리를 넘기고 금전적 보상을 받기로 합의했다. 1291년 1월 6일에 발행된 문서에서 '크라쿠프 공작'을 칭한 것을 끝으로 더 이상 폴란드 대공을 공식적으로 칭하지 않았고, 1291년 4월 10일 바츨라프 2세가 크라쿠프 공작을 칭하는 문서를 발행했다. 뒤이어 4월 하반기에는 밤베르크 주교 아눌프가 이끄는 체코군이 소폴란드의 핵심 요충지인 바벨에 주둔했다.

프셰미수 2세는 폴란드 대공을 맡았을 때 산도미에시에서 할거하던 브와디스와프를 굳이 공격하지 않고 내버려뒀다. 반면, 바츨라프 2세는 그를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브와디스와프는 이를 눈치채고 헝가리 용병들을 고용한 뒤 크라쿠프 지역에 위치한 비실리카 시를 공격했다. 바츨라프 2세는 이에 반격할 준비에 착수했다. 1291년 9월 1일 리토미슐에서 소폴란드 귀족들을 소집해 그들의 특권을 보장하는 대가로 지원을 약속받았다. 이후 브란덴부르크와 상부 실레시아의 지원군을 규합한 뒤 산도미에시로 진격하여 우키에테크 시를 별다른 희생을 치르지 않고 공략했다. 뒤이어 1292년 여름 시에리츠에 입성했고, 브와디스와프의 항복을 받아냈다.

프셰미수 2세는 대폴란드 공국의 코앞인 시에리츠까지 군대를 진주시킨 바츨라프 2세의 행보에 위협을 느끼고, 이에 맞설 준비에 착수했다. 1293년 1월, 그는 브와디스와프와 형제 카지미에시 2세를 칼리슈로 불러들인 뒤, 크라쿠프의 지위를 계승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그 결과 처음에는 그가 크라쿠프 공작이자 폴란드 대공을 맡고, 자신이 후계자를 두지 못하고 죽으면 브와디스와프가 뒤를 이어 맡고, 마지막에는 카지미에시 2세가 맡기로 합의했다. 그러면서 보헤미아로부터 소폴란드를 회복하는 걸 목표로 삼고 서로 힘을 합쳐 협력하기로 했으며, 그니에즈노 대주교에게 순은 300 그지브나(grzywna)를 매년 지불하고 첫 2년 동안엔 그 두배를 지급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그와구프 공작 헨리크 3세와도 동맹을 체결하고 실레시아의 병력 지원을 약속받았다.

칼리슈 회의를 마친 뒤, 프셰미수 2세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알베르트 3세의 딸 마가레타와 결혼했다. 이는 장차 있을 보헤미아와의 무력 충돌 때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의 지원을 확보하고, 그단스크 포메라니아 공작위를 계승받을 때 이들의 용인을 받아내기 위한 조치였다. 1294년 12월 25일 메스트윈 2세가 사망하자 친히 그단스크로 가서 장례식에 참석했고, 스스로 "폴란드와 포메라니아 공작(dux Polonie et Pomoranie)"이라는 칭호를 체택했다.

그 후 포즈난으로 귀환한 그는 그니에즈노 대주교 야쿠브로부터 폴란드 국왕으로 즉위하는 것에 대한 승인을 받아낸 뒤, 1295년 6월 26일 일요일에 그니에즈노 대성당에서 아내 마가레타와 함께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 대관식에는 루부슈의 콘라트 주교, 포즈난 얀 2세 주교, 브워츠와벡의 위슬라프 주교, 프워츠크의 게드코 2세 주교 등 여러 폴란드 주교들이 참석했다. 프셰미수 2세는 폴란드 국왕으로 즉위한 뒤 그단스크 포메라니아로 가서 올리바, 자르노비에츠에 있는 시토회 수도원의 특권을 확인했다. 이후 그단스크, 트체프, 시비에 등 주요 도시들을 잇따라 방문해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바츨라프 2세는 이에 대응해 프셰미수 2세가 교황청의 허가도 받지 않고 대관식을 거행한 것은 불법이라고 주장했지만, 대폴란드와 그단스크 포메라니아 주민들은 프셰미수 2세를 정당한 통치자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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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마테이코(Jan Matejko) 작, <프셰미수 2세의 죽음>

그렇게 입지를 한창 다지던 1296년 2월 8일, 그는 로고즈노에서 카니발 행사에 참석하던 중 괴한들의 습격으로 인해 피살되었다. 12세기에서 16세기 초 사이에 쓰여진 대폴란드의 중세 연대기 모음집인 <비엘코폴스카 연대기>에 따르면,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오토 5세와 프셰미수 2세의 조카인 콘라트의 아들 얀이 무장병들을 무방비 상태였던 로고즈노로 보냈다. 이들은 처음에는 프셰미수 2세를 브란덴부르크로 납치하려 했지만, 그가 끝까지 저항하고 중상을 입어서 데려갈 수 없게 되자 죽였다. 암살의 동기는 폴란드 국왕을 자처한 것에 대한 독일인의 증오였다고 한다. <올리프스카 연대기> 또한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에 의해 암살되었다고 주장하면서, 그가 과거에 전 아내 루드가르다를 죽인 대가를 치렀다고 주장했다. 하트퍼드의 하인리히 연대기에 따르면, 프셰미수 2세는 브란덴부르크와 대폴란드 간의 전쟁 중에 사망했다고 한다. 뤼벡의 디트마르는 프셰미수의 아내 마가레타도 가문의 의사에 따라 남편을 죽이는 데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마워포스카 연감(Rocznik małopolski)> 등 폴란드의 여러 연대기와 1339년 폴란드-튜턴 기사단 전쟁 당시 포즈난 주교였던 얀 우치아(Jan Łodzia)의 증언에 따르면, 프셰미수 2세를 죽인 이들은 대폴란드 귀족들이라고 한다. 얀 드우고시 등 폴란드 역사에 주요 사료를 제공한 연대기 작가들 상당수도 이에 동의했고, 보헤미아 및 키예프 루스 등 해외의 몇몇 연대기에서도 이를 뒷받침했다. 마워포스카 연감은 일찍이 프셰미수 2세에게 처벌받았던 자렘바 가문이 암살을 주도했다고 주장했고, 얀 드우고시는 자렘바 가문과 나웽치 가문이 "몇몇 작센인"의 도움을 받아 암살을 주동했다고 주장했다. 한편, 몇몇 연대기에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과 폴란드 귀족 가문들이 협력하여 암살을 주동했다고 주장했다.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그가 죽으면서 가장 큰 이득을 얻은 바츨라프 2세가 암살을 사주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지만, 사실 여부는 불명확하다.

2.18. 프르셰미슬 왕조의 지배기

프셰미수 2세가 피살된 뒤, 그의 영역은 일전에 합의한 대로 쿠야비 공작 브와디스와프에게 넘어가게 되었지만, 그워구프 공작 헨리크 3세가 이에 반발하면서 내전이 벌어질 조짐이 보였다. 하지만 브와디스와프는 내전을 피하고 싶었던 데다 이복형제 지에모미스우의 아들이자 그의 조카인 레셱 지에모미슈비치가 그단스크 포메라니아 일대에 대한 상속권을 요구하며 반기를 들었기 때문에 조속히 평화 협상을 하기로 했다. 이후 양자간의 협상이 진행된 끝에, 그 해 3월 10일 크자빈에서 합의가 이뤄졌다. 그는 오브라 강과 바르타 강을 따라 노치 강 어귀까지 이어지는 경계를 설정하고, 헨리크 3세에게 대폴란드의 서쪽과 남쪽 일부를 떼어주고 나머지는 자기가 가지기로 했으며, 자신이 후계자를 두지 못한 채 사망할 때 헨리크 3세가 영지를 인계받도록 했다. 또한 헨리크 3세의 장남인 헨리크 4세는 브와디스와프의 양자가 되었으며, 헨리크 4세가 성년이 되면 포즈난 공국을 물려받기로 했다.

브와디스와프는 크자빈 협약을 체결한 뒤 레첵 지에모미슈비치와도 협상한 끝에 비쇼그로드 일대를 영지로 가져가되 자신의 가신이 되도록 했다. 하지만 이후 대폴란드에서의 통치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곳곳에서 도적떼가 창궐했고, 포즈난 주교 안제이 자렘바(Andrzej Zaremba)는 그의 권위를 노골적으로 부정하고 그가 다스리는 영지에 성무 금지령을 내렸다. 또한 대폴란드 귀족들은 그워구프 공작 헨리크 3세와 접촉해 장차 브와디스와프를 밀어내고 그를 대폴란드 공작으로 추대할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브와디스와프의 권위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다른 곳에서 찾아왔다. 1299년 8월, 보헤미아 국왕 바츨라프 2세는 콜레카에 머물고 있던 브와디스와프에게 사절을 보내 프라하로 찾아와서 자신에게 경의를 표한다면 그가 프셰미수 2세가 사망 후 확보한 영지들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브와디스와프는 그의 요구를 따르겠다고 약속했지만 지키지 않았다. 이에 바츨라프 2세는 1300년 브와디스와프 1세에게 반감을 품은 대폴란드 귀족 및 성직자 대표들과 접견한 뒤 브와디스와프 대신 자신이 그들의 지도자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게 했다. 그 후 보헤미아군을 대폴란드 공국으로 파견했고, 대다수의 대폴란드 귀족과 튜튼 기사단이 호응하면서 삽시간에 대폴란드 대부분을 석권할 수 있었다. 이후 바츨라프 2세는 폴란드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했고, 크라쿠프 주교 얀 무스카타는 브와디스와프에게 파문을 선고했다. 브와디스와프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여기고 국외로 망명했다.

바츨라프 2세는 폴란드 국왕에 등극한 뒤 프셰미수 2세의 딸 리체차 엘즈비에타와 결혼해 정통성을 강화하고자 했다. 다만 대폴란드 일부 지역에서는 브와디스와프를 추종하는 이들이 여전히 항거했다. 그러던 1301년 1월, 헝가리 국왕 언드라시 3세가 후계자를 두지 못한 채 사망했다. 언드라시 3세 생전부터 헝가리 왕을 자처하던 나폴리 왕국카로이 로베르트 왕자가 에스테르곰으로 가서 에스테르곰 대주교의 추대를 받으면서 헝가리 국왕이 되는 듯했지만, 헝가리 귀족들은 교황이 지지하는 그를 왕으로 받아들이면 자신들이 교황의 간섭에 시달릴 것을 우려했기에 추대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전통적으로 대관식이 거행되는 세케슈페헤르바르가 아닌 에스테르곰에서 대관식이 거행된 것은 무효라며 카로이 로베르트의 집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소집된 헝가리 의회에서, 바츨라프 2세의 아들이자 언드라시 3세의 딸 에르제베트와 약혼한 바츨라프 3세와 니더바이에른 공작 오토 3세가 유력 후보로 거론되었다.

바츨라프 2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마음먹고, 헝가리 귀족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안겨줬다. 이에 헝가리 귀족들은 바츨라프 왕자를 헝가리 국왕으로 추대하기로 결의했다. 1301년 8월 27일, 바츨라프 3세는 아버지가 보내준 수행원과 보헤미아군과 함께 세케슈페헤르바르에 도착한 뒤 컬로처 대주교로부터 왕관을 쓰고 '라슬로'라는 왕호를 사용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그를 '라슬로 5세'라고 칭하기도 한다. 헝가리 귀족들은 대부분 바츨라프 3세의 집권을 받아들였지만, 크로아티아 영주들은 카로이 로베르트만을 왕으로 모셨다. 이에 1301년 8월 말, 이반 쾨체그가 이끄는 왕실군이 출진해 에스테르곰을 공략했고, 카로이는 헝가리 남부로 피신했다. 하지만 카로이를 따르는 주들을 본격적으로 정벌하려는 시도는 이뤄지지 않았고, 헝가리는 카로이를 지지하는 세력과 바츨라프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그나마도 강력한 권세를 떨치는 귀족들이 국정을 주도했고, 바츨라프와 카로이 모두 별다른 실권이 없었다.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바츨라프 2세에게 자신의 허락 없이 아들을 헝가리 왕으로 세운 것에 항의하는 서신을 보냈다. 1301년 9월 헝가리를 방문한 교황 사절 니콜로 보카시니는 헝가리 고위 성직자들에게 "교황이 헝가리 왕으로 인정한 카로이를 지지하라"고 설득했다. 이에 보헤미아 왕국은 헝가리 귀족들을 묶어두기 위해 그들에게 큰 영지와 높은 관직을 주었다. 그 결과, 바츨라프를 헝가리 왕으로 세우는 데 일조했던 컬로처 대주교 이슈트반을 포함한 많은 고위 성직자들이 1302년 상반기에 카로이 지지로 돌아섰지만, 귀족들은 바츨라프 3세를 계속 왕으로 모셨다.

1302년 9월, 카로이가 바츨라프 3세가 있던 부더를 포위했다. 그는 부더 시민들에게 바츨라프 3세를 인도하라고 요구했지만, 수비대와 시민들은 끝까지 바츨라프를 지지했다. 그 사이, 이반 쾨체그가 이끄는 군대가 도착하여 포위를 풀었고, 카로이는 어쩔 수 없이 달마티아로 철수했다. 교황 사절 니콜로 보카시니가 부더에서의 성무 집행을 금지한다고 선언하자, 부더의 사제들은 교황과 헝가리의 주교들을 파문했다. 1303년, 보니파시오 8세는 바츨라프 2세에게 로마로 출두해서 입장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바츨라프 2세가 응하지 않자, 그해 5월 31일에 "바츨라프 왕의 헝가리 왕 선출은 무효이며 카로이야말로 헝가리 왕이 되어야 한다"는 교령을 반포했다. 여기에 독일왕 알브레히트 1세도 바츨라프 2세에게 "아들을 헝가리에서 내보내라"고 요구했다.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자, 많은 헝가리 귀족들이 카로이 편에 돌아섰고, 바츨라프 3세의 세력은 부더와 그 주변 지역으로 축소되었다. 바츨라프 2세는 아들을 구하고 카로이를 무찌르기 위해 1304년 5월 대군을 이끌고 헝가리로 진군했다. 그의 군대는 슬로바키아 서부 일대를 행진하며 무자비하게 약탈한 뒤 에스테르곰을 공략하고 에스테르곰 주교 에호르를 생포했다. 그러나 카로이를 지지하는 영주들의 세력이 만만치 않은 데다, 아들을 왕으로 받든 영주들도 제대로 협조해주지 않고 자기들 권익을 챙기는 데 급급한 모습을 보이자, 그는 '아들이 헝가리에 계속 체류했다간 위험해지겠다'고 판단했다. 이에 아들을 보헤미아로 데려가되 헝가리 왕위는 계속 유지하고 이반 쾨체그를 왕을 대신하여 헝가리를 이끌 통치자로 세웠다. 이때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왕관 역시 보헤미아로 이송되면서, 헝가리 민심이 악화되었다.

1304년 9월, 카로이와 오스트리아 공작 루돌프 3세가 모라비아를 침공했지만 바츨라프 2세에게 격파되었다. 이후 알브레히트 1세와 바츨라프 2세간에 평화 협상이 진행되었으나, 이 무렵 결핵에 걸려 건강이 악화된 바츨라프 2세는 1305년 4월부터 병상에 누워서 사경을 헤매다가 1305년 6월 21일에 사망했다. 사후 보헤미아, 폴란드, 헝가리 왕위에 오른 바츨라프 3세는 아버지 치세 말기에 거듭된 전쟁을 치르면서 생긴 막대한 빚 때문에, 폴란드와 헝가리를 모두 경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봤다. 그는 일단 헝가리 왕위를 니더바이에른 공작 오토 3세에게 양도하고, 그 대가로 니더바이에른 공국과 군사 동맹을 맺고 그들의 지원을 받아 폴란드 왕위를 유지하고자 했다.

한편, 바츨라프 2세를 피해 해외로 망명했던 브와디스와프는 바츨라프 2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헝가리 대귀족 어버 아메데의 지원에 힘입어 1305년 연말까지 산도미에시, 시에리츠, 웽치차, 쿠야비야 공국을 탈환했다. 바츨라프 3세는 군자금을 끌어모은 뒤 1306년 7월 올로모우츠에서 용병들을 모집해 장차 브와디스와프를 무찌르려 했다. 그러나 1306년 8월 4일 보텐슈타인의 기사 콘라트에게 피살당했고, 보헤미아는 이후로 바츨라프 3세의 처남 인드르지흐 코루탄스키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알브레히트 1세의 아들 루돌프 1세간의 내전에 휘말렸다. 바츨라프 3세가 암살당하자, 소폴란드 귀족들은 브와디스와프를 주군으로 받들기로 했다. 그는 이들의 초대를 받아들이고 1306년 9월 1일 크라쿠프에 입성한 뒤 바츨라프 2세의 폴란드 국왕 대관식을 주관하고 자신에게 파문을 선고했던 크라쿠프 주교 얀 무스카타와 화해했다.

2.19. 브와디스와프 1세

1306년 프르셰미슬 왕조를 밀어내고 폴란드 대공에 등극한 브와디스와프 1세는 여세를 이어가 포메라니아의 스와프노에 군대를 파견해 점령했고, 그해 12월 쿠야비의 비제보에서 그단스크 포메라니아 귀족 대표들을 접견해 그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이제까지는 시비엥츠 가문이 피아스트 왕가를 대리하여 그단스크 포메라니아를 통치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그는 걸핏하면 반기를 일으키는 이들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고 보고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먼저 트레츠와 그단스크 시에 대한 통치권을 빼앗았고, 쿠야비의 주교 거워드를 부추겨서 피오트르 시비엥츠가 그동안 횡령한 주교구의 수입을 반환하라고 요구하도록 했고, 이어진 재판에서 피오트르에게 2,000 플로린에 달하는 거금을 벌금으로 지불하라는 판결을 내리게 했다.

이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시비엥츠 가문은 브와디스와프에게 반기를 들기로 마음먹고, 1307년 7월 17일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발데마르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포메라니아에 대한 주권을 인정받았다. 그해 8월, 발데마르는 그단스크 포메라니아로 진군해 브와디스와프의 군대를 몰아내려 했다. 현지군이 그단스크 요새에서 격렬하게 저항해 침략군의 기세를 주춤하게 만들었지만, 브와디스와프는 자신이 현재 보유한 병력으로는 브란덴부르크군을 물리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그단스크의 도미니코회 수도원의 조언에 따라 튜튼 기사단에게 구원을 요청하기로 했다. 헤움노의 영주이자 튜턴 기사단장 군터 폰 슈바르츠부르크는 이 기회에 포메라니아로 영역을 확장하기로 마음먹고 요청을 받아들였다.

군터가 이끄는 기사단은 그단스크에서 브란덴부르크인들을 격파한 뒤 연이어 트체프, 노베를 공략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확보한 영토를 브와디스와프에게 돌려주길 거부했다. 1309년 4월, 쿠야비의 그라비에서 그단스크 포메라니아의 지배권을 놓고 브와디스와프와 튜튼 기사단간의 회의가 열렸지만, 양자간의 의견차가 컸기 때문에 결렬되었다. 1309년 7월, 튜튼 기사단은 시비에시를 포위 공격해 9월에 함락시켰다. 이후 자신들의 행위를 합법화하기 위해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으로부터 그단스크 포메라니아에 대한 지배권을 구입했다. 그후 튜튼 기사단은 본거지를 그단스크 포메라니아의 도시인 말보르크로 옮기고 통치를 행사했다.

튜튼 기사단이 그단스크 포메라니아 대부분을 가져가는 상황이었지만, 브와디스와프는 제때에 이를 저지하지 못했다. 크라쿠프 주교 얀 무스카타가 또다시 그에게 반기를 들기로 마음먹고, 오포에 공작 볼코 1세를 소폴란드의 주인으로 삼으려 들었던 것이다. 이에 그는 그니에즈노 대주교 야쿱 시윈카를 설득해 1308년 6월 14일 얀 무스카타를 파문 및 주교직 박탈을 선고하게 한 뒤 얀 무스카타를 체포해 반년간 감옥에 가뒀다. 그후 크라쿠프에서 추방된 얀 무스카타는 1317년이 되어서야 브와디스와프에 대한 파문을 취소하는 조건으로 크라쿠프로 돌아올 수 있었다.

1311년, 크라쿠프 시장 알베르트가 브와디스와프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 그는 오포예 공작 볼코 1세를 불러들여 소폴란드의 주인으로 삼으려 했다. 소폴란드의 여러 도시는 반란에 가담했지만, 바벨 성은 브와디스와프를 지지하는 군대에 의해 철통같이 방비되었다. 1312년 4월 볼코 1세가 크라쿠프에 도착했지만, 바벨 성을 공략하는 데 실패했다. 이후 브와디스와프는 헝가리 왕국으로부터 지원군을 받아낸 뒤 반격을 개시했다. 먼저 산도미에시를 평정했고, 1312년 6월 크라쿠프로 진격해 볼코 1세가 물러나게 했다. 볼코 1세는 알베르트와 함께 오포예로 퇴각한 뒤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알베르트를 투옥했다. 이렇게 반란을 진압한 뒤, 브와디스와프는 반란에 가담한 귀족들을 교수형에 처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으며, 크라쿠프 시 역시 일부 특권을 박탈당했다. 여기에 크라쿠프에 거주했던 독일인들이 반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했기 때문에, 이후로는 도시의 공식 기록에 독일어 대신 라틴어가 도입되었다.

한편, 프셰미수 2세의 후계자로 자처하며 대폴란드 공작을 자칭했던 그워구프 공작 헨리크 3세는 1309년 12월 9일에 사망하면서 자신의 영지를 다섯 아들에게 분할했다. 1314년, 귀족과 기사들이 헨리크 3세의 아들들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포즈난을 장악한 뒤 브와디스와프에게 자신들을 보호해달라고 요청했다. 브와디스와프는 즉시 군대를 파견해 그들을 도왔고, 그해 8월 포즈난에 입성한 뒤 귀족과 기사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헨리크 3세의 자식들은 속절없이 밀려났고, 대폴란드 공국의 상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후 브와디스와프는 덴마크 왕국, 스웨덴 왕국, 노르웨이 왕국스칸디나비아반도의 여러 국가와 동맹을 맺고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과 튜튼 기사단에 대항했다.

이제 폴란드를 어느정도 통합한 브와디스와프는 폴란드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치르기로 마음먹었다. 1318년 6월 20~23일 술레오프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폴란드 성직자 대표 전원이 그를 폴란드 국왕으로 옹립하고 교황청에 승인을 요청하기로 했다. 그리고 6월 29일, 피즈드리에서 열린 귀족 및 기사 회의에서도 브와디스와프의 폴란드 국왕 취임이 받아들여졌다. 브워츠와베크의 주교 거워드가 아비뇽 유수 중이던 교황청으로 파견되었다. 이에 보헤미아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가 폴란드 국왕으로서의 권리는 자신에게 있다며 격렬하게 항의했다. 교황 요한 22세는 이 때문에 결정을 미루다가, 브와디스와프가 성 베드로의 날 계산 방법을 교황권에 더 유리하게 변경하겠다는 제안을 하자 1319년 8월 20일에 브와디스와프의 대관식이 얀 루쳄부르스키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다고 판정하고 대관식을 승인했다.

파일:브와디스와프 1세의 대관식.jpg
카지미에시 알치모비치(Kazimierz alchimowicz, 1840 ~ 1916) 작, 브와디스와프 1세의 대관식

1320년 1월 20일, 크라쿠프의 바벨 대성당에서 그니에즈노의 야니스와프 대주교의 주관하에 브와디스와프의 폴란드 국왕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바츨라프 2세가 일전에 사용했던 휘장은 보헤미아로 옮겨졌기 때문에, 폴란드 왕실 휘장이 새로 만들어졌다. 그가 그니에즈노가 아닌 크라쿠프에서 대관식을 거행한 것은 얀 루쳄부르스키와의 마찰을 피하고 싶었던 교황청의 압력이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얀 루쳄부르스키는 이를 빌미삼아 브와디스와프는 단지 크라쿠프의 왕일 뿐이며, 폴란드 전체의 왕은 바로 자신이라고 주장했다.

1320년 4월 14일, 브제시치 쿠야브스키에서 튜튼 기사단이 그단스크 포메라니아를 점거한 사건에 관한 교회 재판이 열렸다. 1321년 2월 10일, 판사는 폴란드 측의 증인 25명의 진술을 들은 뒤 브와디스와프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르면, 튜튼 기사단은 그단스크 포메라니아를 즉시 브와디스와프에게 반환하고 그동안 수익을 징수한 대가로 은화 30,000 플로린을 지불해야 하며, 재판 비용도 내놔야 했다. 튜튼 기사단은 이에 따르지 않고 교황청에 항소를 제기했다. 교황은 삼비아 주교에게 검토를 맡겼지만, 폴란드 측이 항의하자 항소를 고려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튜튼 기사단이 끝까지 판결을 거부했기 때문에 집행은 이뤄지지 않았다.

브와디스와프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 튜튼 기사단, 보헤미아 왕국을 동시에 적대하는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헝가리 왕국과 동맹을 맺기로 하고, 1320년에 자신의 딸 엘즈비에타를 헝가리 국왕 카로이 로베르트와 결혼시켰다. 1322년 실레시아 공국에서 내전이 발발했다. 이때 브로츠와프 공작 헨리크 6세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브와디스와프에게 자신에게 군대를 보내준다면 브로츠와프의 주권을 넘기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는 이 제안을 거부했다.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군사적, 경제적으로 막강한 보헤미아 왕국이 이를 문제삼아 전쟁을 벌일 것을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1325년에는 할리치 루테니아에서 벌어진 내전을 헝가리와 함께 수습하고 볼레스와프 예르지 2세를 그곳의 공작으로 앉힘으로써 루테니아에 대한 폴란드의 영향력을 강화시켰다. 여기에 리투아니아 대공 게디미나스의 딸인 알도나와 자신의 아들 카지미에시 3세를 결혼시킴으로써, 강력한 군사력을 갖춘 리투아니아 대공국과의 결혼 동맹을 맺었다.

1326년, 교황 요한 22세로부터 교황청과 심한 갈등을 벌이고 있는 바이에른의 비텔스바흐 가문이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을 물려받는 것을 막아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그는 교황의 지지자로서 이를 받들기로 하고, 리투아니아군의 지원을 받으며 브란덴부르크로 진군해 그해 2월 10일에 입성한 뒤 미엥지르제츠를 병합했다. 그러나 리투아니아인들이 브란덴부르크의 여러 부유한 교회와 수도원을 약탈했기 때문에, 그는 이교도와 야합하여 기독교도들을 해치는 범죄를 저지른 사악한 왕이라는 비난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는 이에 신경쓰지 않고 공세를 이어가 니에모들린 공작 볼코로부터 비엘룬을 탈취했다.

1327년, 브와디스와프는 프워츠크를 공략하고 마조프셰를 폴란드 왕국의 영역으로 삼기 위한 공세를 개시했다. 원정군은 프워츠크를 공략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그러나 튜튼 기사단이 그를 규탄하며 전쟁을 단행하면서, 폴란드-튜튼 기사단 전쟁이 발발했다. 보헤미아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는 이 때를 틈타 1327년 2월 브와디스와프의 공세에 위협을 느끼고 있던 상부 실레시아 공작들을 오파바에 불러들인 뒤 그들을 지켜주는 대가로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이후 브와디스와프가 튜튼 기사단을 상대로 국경 지대에서 연이어 전투를 치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얀 루쳄부르스키는 본격적으로 폴란드와의 전쟁에 착수하기로 결심했다.

1329년, 얀 루쳄부르스키는 튜튼 기사단의 지원을 받아 도브쥔을 공략한 뒤 튜튼 기사단에게 넘겨줬다. 여기에 프워츠크 공작 볼레스와프도 그해 3월에 얀 루쳄부르스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후 튜튼 기사단은 비스툴라 강을 건너 브워츠와베크(Włocławek), 라치용쉬(Raciąż), 프세드제(Przedcze) 주교구를 파괴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브와디스와프는 헝가리 국왕 카로이 로베르트에게 도움을 요청하고자 아들이자 후계자인 카지미에시 3세를 헝가리로 파견했다.

카지미에시는 헝가리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아내는데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그는 카로이의 궁정에 머무는 동안 카로이의 아내인 폴란드의 엘즈비에타의 시녀 클라라 자(Clara Záh)에게 외설스러운 농담을 던졌다. 그러자 클라라 자의 아버지 펠리키안 자(Felician Záh)는 딸이 모욕당하는 와중에 왕족들이 만류하지 않는 것에 격분했고, 그들에게 복수하기로 마음먹었다. 1330년 4월 17일, 펠리키안 자는 왕궁 식당에 칼을 들고 난입하여 카로이와 왕비의 오른손에 상처를 입힌 뒤 카로이의 두 아들 러요시와 언드라시를 죽이려 했다가 왕실 근위대에게 사살되었다. 클라라를 제외한 펠리키안 자의 아이들은 고문을 당해 죽었고, 클라라는 입술과 손가락 여덟 개가 잘린 뒤 말에 묶인 채 여러 마을에서 조리돌림 당했다.

1330년, 튜튼 기사단은 쿠야비와 대폴란드의 여러 도시를 성공적으로 약탈했다. 이에 브와디스와프는 리투아니아군의 지원을 받아 비스툴라 강을 건넌 뒤 튜튼 기사단의 핵심 영토인 헤움노를 기습 공격했다. 그 해 9월, 그의 군대는 튜튼 기사단을 코왈레보 포모르스키에 성에 몰아넣고 공성전을 벌였다. 그러나 원정 도중에 브와디스와프와 게디미나스간의 개인적인 다툼으로 인해 동맹이 파탄나버리자, 1330년 10월 18일 튜튼 기사단과 7개월간의 휴전 협약을 맺고 폴란드로 귀환했다. 1331년, 디트리히 폰 알텐부르크가 지휘하는 튜튼 기사단은 보헤미아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와 함께 폴란드를 협공해 칼리슈 성벽 아래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그해 중반기에 원정을 개시한 튜튼 기사단은 피즈드리 마을 인근에서 폴란드군을 격파하고 그니에즈노 일대를 약탈했다.

그러나 당초 합의했던 것과는 달리, 얀 루쳄부르스키는 시비드니차 공작 볼코 2세의 저항으로 인해 전진하지 못하다가 그워구프 공작 프셰미수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워구프로 방향을 돌려 그해 10월 2일에 함락시켰다. 이 때문에 홀로 폴란드군과 대적하게 된 튜튼 기사단은 칼리슈를 한동안 포위 공격했으나 공략이 쉽지 않자 쿠야비 정복으로 목표를 변경했다. 1331년 9월 23~24일, 칼리슈의 코닌으로 진군한 튜튼 기사단은 브와디스와프이 친히 이끄는 폴란드군과 격돌했다. 전투는 결판이 나지 않았지만, 브와디스와프는 승리를 확신하지 못하고 철수했다. 그 후 튜튼 기사단이 브제시치 쿠야프스키로 진격하자, 브와디스와프와 카지미에시 3세 부자는 5,000명의 폴란드군을 이끌고 튜튼 기사단의 후방 경비대를 라지예우프에서 급습해 격파하고 디트리히 폰 알텐부르크를 생포했다.

1331년 9월 27일, 후방 경비대가 격파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튜튼 기사단 주력 부대가 아군을 구하기 위해 방향을 돌려 진군하던 중 프워프체 마을 인근에서 브와디스와프, 카지미에시 부자가 이끄는 폴란드군과 격돌했다. 처음에는 폴란드 군대가 우위를 점해 고위급 기사들을 사살하거나 포획했고, 튜튼 기사 일부는 달아났다. 그러나 황혼 직전에 플라우엔의 하인리히 로이스가 이끄는 튜튼 선봉 부대가 전장에 도착해 반격을 가하면서, 폴란드군은 큰 피해를 입고 패퇴했고 디트리히 폰 알텐부르크를 비롯한 기사단 포로 대부분이 구출되었다. 이후 어둠이 깔리자, 브와디스와프는 전장에서 철수했고, 튜튼 기사단은 가장 귀중한 폴란드 포로 56명만 살려주고 나머지는 처형했다. 튜튼 기사단의 독일 전령이자 연대기 작가인 마르쿠브르크의 비간트에 따르면, 전투 후 사망자 수를 헤아린 결과 양측에서 4,187명이 전사한 사실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일련의 전투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은 튜튼 기사단은 더 이상의 원정은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비스툴라 강 너머로 철수했다. 하지만 그들은 전력을 재정비한 뒤 1332년 오토 폰 루터베르크의 지휘하에 재차 쿠야비로 진격해 현지군의 미약한 저항을 물리치고 4월 20일에 쿠야비의 수도인 브레스트를 함락했다. 뒤이어 이노브로츠아프 마저 튜튼 기사단에게 넘어가자, 그니에프코프 공작 카지미에시 3세는 적에게 넘어가기 전에 그니에프코프 시를 파괴하고 주민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송시켰다. 이후 폴란드와 튜튼 기사단간의 평화 협상이 진행된 끝에 1333년 3월 2일 그해 오순절(5월 23일)까지 이어지는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휴전 협정이 체결된 날, 브와디스와프는 크라쿠프에서 사망했고 바벨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2.20. 카지미에시 3세

2.20.1. 집권 당시의 상황

브와디스와프 1세 사후, 성인이 될때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아들인 카지미에시 3세가 폴란드 왕위에 올랐다. 당시 폴란드 왕국은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당시 폴란드는 대폴란드와 소폴란드로 구성되었고, 시에라츠와 웽치차는 카지미에시의 두 조카인 프셰미수와 블라디슬라프가 왕의 가신으로서 각각 맡아서 별도로 통치하고 있었다. 두 조카는 카지미에시에게 충실했지만, 카지미에시의 자식들에게도 똑같이 순종할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았다. 여기에 본래 폴란드 왕국의 영토었던 쿠야비, 도브진, 그단스크 포메라니아는 튜튼 기사단에게 점령되었고, 실레시아와 마조프셰의 공작들은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 역시 폴란드 왕국에 적대적이었다. 게다가 튜튼 기사단과의 휴전은 1333년 5월 23일에 만료되기 때문에, 그들이 더욱 치고 들어가서 폴란드의 영토를 갉아 먹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브와디스와프 1세는 튜튼 기사단, 보헤미아 왕국에 맞서기 위해 리투아니아 대공국, 헝가리 왕국과 동맹을 맺었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어서 폴란드가 그나마 이 정도라도 유지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지만,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유럽 국가들로부터 "이교도들과 손잡고 기독교도들을 해치는 사악한 범죄를 저지른다"라는 비난을 받았다. 게다가 브와디스와프 1세 통치 말기에 리투아니아 대공 게디미나스와 개인적인 불화가 발생하는 바람에 동맹이 끊어졌다. 헝가리 왕국은 가톨릭에 충실한 나라였고 피아스트 왕가에 지극히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헝가리는 폴란드 외에도 여러 국가들과 동맹을 맺고 있던 반면에, 폴란드는 헝가리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다. 다른 나라들은 1300년 바츨라프 2세그니에즈노에서 폴란드 국왕 대관식을 거행한 이래로 보헤미아 국왕이 폴란드 국왕을 겸하는 것을 대체로 받아들였고, 크라쿠프에서 대관식을 거행한 브와디스와프 1세와 카지미에시를 '크라쿠프의 왕'으로 취급했다.

내부 상황 역시 매우 좋지 않았다. 1138년 볼레스와프 3세 크쉬보우스티의 유언에 따라 폴란드가 볼레스와프 3세의 자식들에게 분할된 이래 200여 년간 폴란드 전체의 대공 및 국왕 직위를 놓고 피아스트 가문 출신 공작들간의 내전이 끊임없이 일어났으며, 대공과 국왕이 피살당하는 일도 종종 벌어졌다. 폴란드 귀족과 성직자들은 자기들 잇속에 맞는 이를 추종하고 내전을 부추기면서 세력을 키웠다. 그 결과 폴란드 군주의 명령은 크라쿠프와 주변 지역 외에는 잘 먹히지 않았고, 그 외의 지역에서는 대귀족들이 자기들 뜻대로 통치를 행사했다. 폴란드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은 영주의 가혹한 착취에 시달리며 매일 피폐하게 살아가야 했다. 여기에 신성 로마 제국, 몽골 제국, 킵차크 칸국, 리투아니아,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 튜튼 기사단, 보헤미아 왕국 등 외세의 침략이 빈번하게 이어지면서, 국토는 황폐해지고 경제 활동은 거의 마비되었다. 이렇듯 카지미에시가 집권할 당시의 폴란드는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파탄국가였다.

2.20.2. 외치

2.20.2.1. 보헤미아 왕국과의 타협
카지미에시는 왕위에 오른 직후 튜튼 기사단과 보헤미아 왕국을 상대하는 전쟁을 조속히 끝내고 화해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튜튼 기사단과 맺었던 휴전 협약을 최대한 갱신해 시간을 벌면서, 보헤미아 왕국과의 평화 협상에 중점을 두었다. 보헤미아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는 1332년 8월 26일 튜튼 기사단에게 "크라쿠프의 왕과 어떠한 협정도 체결하지 않겠다"라고 약속하는 문서를 발행한 바 있었기 때문에, 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보헤미아 국왕이 협상에 응하게 만들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차지하고 있던 비텔스바흐 가문과 동맹을 맺기로 했다.

1333년 7월 31일, 카지미에시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이자 황제의 아들인 루트비히와 약탈을 일삼는 무법자들에 맞서 국경지대에서 양군이 2년간 긴밀한 협력을 하자는 내용의 협정을 체결했다. 이후 1335년 4월 카린티아 공작 하인리히 6세가 사망하자, 그의 영지를 놓고 보헤미아 왕국을 거머쥐고 있던 룩셈부르크 가문, 오스트리아와 스티리아 등지를 거머쥐고 있던 합스부르크 가문, 그리고 비텔스바흐 가문간의 경쟁이 벌어졌다. 카지미에시는 이 기회를 틈타 비텔스바흐 가문, 합스부르크 가문에 사절단을 꾸준히 보내서 룩셈부르크 가문을 고립시키고자 했다. 1335년 5월 16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대폴란드 귀족으로 구성된 폴란드 대표단이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루트비히와 예비 동맹을 체결했다. 여기에 합스부르크 가문에서도 폴란드와 손잡는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얀 루쳄부르스키는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을 인지하고 카지미에시와 협상을 시작하기로 마음먹고, 아들 카를을 폴란드로 파견했다. 카지미에시는 산도미에시에서 카를과 만나 협상한 끝에 1335년 5월 28일에 1336년 7월 24일까지 휴전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면서 양자가 휴전을 위반할 경우 칼리슈와 브로츠와프에 특별히 설립된 법원에 의해 처벌받기로 했다. 튜튼 기사단은 이 협상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보헤미아 왕국과 그들간의 협력 관계에 금이 갔다. 이렇게 룩셈부르크 가문과 휴전 합의를 맺은 후, 카지미에시는 포즈난 총독 미코와이, 포즈난 영주 이브노 야로스와프, 대폴란드 재상 오토 등을 호이나로 보내 비텔스바흐 대표단과 협상하게 했다. 그 결과 1335년 6월 20일에 카지미에시의 딸인 쿠네군다와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루도비코를 결혼시키고 양자가 상호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이 협약 비준 및 문서 교환 날짜와 장소는 9월 8일 비엘렌 또는 도비에그니에보로 정해졌다.

하지만 카지미에시는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비텔스바흐 가문과의 협약 비준 날짜를 계속 미뤘고, 확실한 약속을 하는 것도 피했다. 당시 비텔스바흐 가문은 폴란드 왕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교황청과 심각한 갈등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협약을 체결했다가 교황청이 폴란드를 적대시하게 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얀 루쳄부르스키에게 계속 압력을 가하는 용도로 활용할 뿐이었다. 얀 루쳄부르스키는 여기에 넘어갔다. 1335년 8월, 카지미에시는 대표단에게 양보의 한계를 설정하는 서면 위임장을 주고 트렌친으로 파견했다. 얀 루쳄부르스키는 아들 카를을 대표로 내세우고 협상에 진지하게 응했다. 며칠간의 협상 끝에, 8월 24일에 얀 루쳄부르스키와 카를은 폴란드 왕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할 준비가 되었음을 선언하는 문서가 발행되었다. 카지미에시가 어떤 대가를 치르고 이런 선언을 이끌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19세기 역사가들은 카지미에시가 실레시아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완전히 포기했다고 추정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실레시아와 마조프셰에 대한 보헤미아 왕국의 소유권을 침해하지 않겠으며, 해당 지역 공작들에게 폴란드의 종주권을 인정하라고 강요하지 않기로 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1335년 11월 19일 비셰흐라드 회의에서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보헤미아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 헝가리 국왕 카로이 로베르트가 참석한 가운데 폴란드와 보헤미아 왕국간의 종전 협상이 시작되었다. 이때 카지미에시는 트렌친에서 설정된 조건은 지나치다며, 자신의 대리인이 권한을 초과했다고 밝혔다. 이에 카로이 로베르트는 새로운 협상을 중재했고, 카지미에시는 트렌친 협약 때보다 훨씬 더 유리한 조건을 얻어냈다. 그는 20,000 프라하 그로셴을 지불하고 폴란드 왕관에 대한 얀 루쳄부르스키의 권리를 구입했고, 볼레스와비에츠 성채를 비롯한 루다 일대의 일부 영토를 되찾았다. 게다가 이 협약에는 실레시아에 대한 카지미에시의 의무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룩셈부르크 가문과 피아스트 가문간의 결혼 동맹을 맺기로 약속했다. 이후 카지미에시는 얀 루쳄부르스키의 초대에 응해 프라하로 찾아와서 며칠간 머물렀다.

이후 카지미에시는 비텔스바흐 가문과의 협상을 완전히 끝내고 룩셈부르크 가문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1336년 6월, 그는 수백 명의 기사단과 함께 모라비아로 가서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원정을 준비하고 있던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국왕들에 가세했다. 1338년 3월 1일 룩셈부르크 가문과 앙주 가문이 폴란드가 실레시아 영지를 침공할 경우 앙주는 보헤미아를 돕기로 합의하자, 카지미에시는 1339년 2월 9일에 룩셈부르크 가문에 보헤미아의 영토를 절대로 침해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발송했다. 이렇게 룩셈부르크 가문과 동맹을 굳건히 해, 그들이 튜튼 기사단과의 협력을 영구적으로 끊도록 유도했다.

1341년 7월, 그는 얀 루쳄부르스키의 딸인 룩셈부르크의 마가레타와 결혼함으로써 폴란드-보헤미아 동맹을 확고히 굳히려 했다. 그러나 그가 프라하에 도착했을 때, 마가레타는 이미 병사했다. 하지만 그는 동맹 협상을 이어갔고, 7월 13일에 공식적으로 폴란드-보헤미아 협정을 체결시켰다. 카지미에시는 시비드니카 공국과 헝가리 왕국을 제외한 국가들이 보헤미아를 침공할 때 보헤미아를 돕겠다고 약속했다. 보헤미아의 의무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학자들은 군사적 지원을 약속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한편 룩셈부르크 가문은 카지미에시에게 헤센 백작 하인리히 2세의 딸인 헤센의 아델하이트와 재혼하라고 권했다. 그는 이를 받아들이고 9월 29일에 포즈난에서 아델하이트와 결혼했다.

이후 카지미에시는 보헤미아 왕국과의 약속을 굳건히 지켰다. 1343년 자간 공작 헨리크 5세가 보헤미아 왕실에 대한 충성 서약을 거부하고 전쟁을 단행해 그워구프를 탈취하자, 카지미에시는 즉시 군대를 파견해 올레시니차 전투에서 보헤미아군이 헨리크 5세를 격파하는 데 일조했다. 보헤미아-폴란드 연합군은 시치나와를 점령하고 황폐화시켰고, 뒤이어 자간 공작령을 약탈했다. 이후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고, 카지미에시는 보헤미아를 도와준 대가로 워쇼와 일대를 받아냈다. 헨리크 5세는 1344년 보헤미아 왕에게 경의를 표했고, 그때부터 보헤미아 통치자들의 충실한 가신이 되었다.
2.20.2.2. 튜튼 기사단과의 타협
카지미에시 3세는 즉위 직후부터 튜튼 기사단과 지속적으로 사절단을 보내 협상을 이어갔고, 1133년 5월 23일로 설정된 휴전 만료일을 1336년 6월 24일까지 여러 차례 연장했다. 그러면서 비셰흐라드에서 중재를 맡은 교황측 사절단에게 튜튼 기사단이 점유하고 있는 영토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증명하는 문서를 제출했고, 튜튼 기사단 대표단 역시 자신들의 권리를 증명하는 문서를 제출했다. 사절단은 양측의 주장을 들은 뒤 11월 26일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르면, 쿠야비와 드브진 일대는 카지미에시가 조건을 충족할 때까지 바르샤바 공작 시에모비트 2세 또는 쿠야비 주교에 의해 임시로 관리되고, 이후에는 폴란드에 반환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단스크 포메라니아는 튜튼 기사단의 소유로 남게 했으며, 카지미에시는 자신의 조상이 부여한 권리에 따라 기사단이 헤움노를 계속 소유하는 것에 동의했다. 또한 양자는 모든 전쟁 보상을 포기하고 지난 전쟁 중에 적의 영토로 도망친 신민들에게 사면을 제공하기로 했다.

하지만 카지미에시와 튜튼 기사단 모두 중재 결과에 만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판결을 완전히 이행하기를 열망하지 않았다. 카지미에시는 그단스크 포메라니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겠다는 문서를 발행하지 않았고, 튜튼 기사단은 쿠야비와 도브쥔을 반환하지 않았고 시에모비트 2세 또는 쿠야비 주교의 통치를 허용하지도 않았다. 그러다 휴전 종료일이 가까워지자, 카지미에시는 1136년 5월 26일 중재인의 판결을 수락하며 6월 24일부터 1년 이내에 해당 조항을 이행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기사단을 앞으로는 공격하지 않겠으며, 기사단의 신민들에 대한 습격으로 인한 피해도 보상하겠다고 약속했다. 튜튼 기사단 역시 비슷한 문서를 발행했고, 양측은 1337년 6월 24일까지 유효한 새로운 휴전을 맺었다. 이렇듯 시간을 끄는 동안, 카지미에시는 아비뇽 유수 중이던 교황청에 사절을 보내 튜튼 기사단의 2가지 만행을 고발했다. 하나는 튜튼 기사단이 그니에즈노 대주교가 관할하던 교회 재산을 약탈하고 교회를 파괴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폴란드 왕국에 속한 땅을 무단으로 점령했다는 것이었다.

1337년 3월 초, 카지미에시는 도브진 공작 브와디스와프와 협정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브와디스와프는 공식적으로 자신에게 속한 도브진을 왕에게 넘기고 그 대가로 웽치차를 수여받기로 했다. 이후 보헤미아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의 중재하에 이노브로츠와프에서 폴란드와 튜튼 기사단간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양자는 다음과 같은 합의를 맺었다.
1. 카지미에시 왕은 튜튼 기사단이 그단스크 포메라니아를 영구적으로 '임대'하는 것을 받아들인다.
2. 카지미에시 왕은 그의 조상에 헤움노 일대를 튜튼 기사단에게 부여한 계약을 존중한다.
3. 카지미에시 왕은 이교도인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동맹을 맺지 않는다고 약속한다.
4. 카지미에시 왕은 튜튼 기사단 편에서 전쟁에 참여한 폴란드 귀족들과 튜튼 기사단에 항복했던 도시들을 사면하며, 폴란드 왕국에 억류된 모든 튜튼 기사단 포로들을 석방하고, 전쟁 보상을 포기한다.
5. 튜튼 기사단은 쿠야비와 도브진을 폴란드에 조속히 반환하며, 그 동안 얀 루쳄부르스키가 대리 통치한다.
6. 헝가리 국왕 카로이 로베르트는 얀 루쳄부르스키 다음의 두번째 평화 중재자로서 폴란드와 튜튼 기사단 양자간의 평화를 보증한다.

이렇게 합의가 맺어진 뒤, 튜튼 기사단은 쿠야비와 도브진에서 즉시 철수했고, 얀 루쳄부르스키는 곧바로 이 땅을 폴란드에 넘겼다. 하지만 카지미에시는 협약의 최종 비준을 미루면서 교황청의 통보가 내려지기를 기다렸다.

1338년 5월 4일, 교황 베네딕토 12세는 폴란드의 튜튼 기사단에 대한 고발에 관한 교회법 절차의 시작을 명령하는 교령을 반포했다. 그는 프란츠 출신의 교황 특사이며 폴란드에서 성직 활동을 했던 갈하르 드 카르세리부스를 판사로 선임했고, 심리 날짜를 10월 27일로 정했다. 법원은 1339년 2월 4일에 시작되었으며, 중립 지역인 바르샤바에서 진행되었다. 튜튼 기사단은 이에 분개해 교황에게 항의서를 보내고 재판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 재판에는 폴란드를 대표하는 126명의 증인이 참석해, 튜튼 기사단이 차지한 영토는 전부 국왕 브와디스와프 1세의 땅이었는데 기사단이 무력으로 빼앗았다고 주장했다. 재판이 진행 중이던 1339년 3월, 갈하르는 토룬에 있던 기사단 대표들에게 카지미에시의 제안을 제시했다. 이에 따르면, 카지미에시는 소송을 철회하고 이전의 중재안을 이행하겠지만, 14,000 그지브나(grzywna)를 제공받겠다고 밝혔다. 튜튼 기사단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고, 카지미에시는 15,000 그지브나를 아비뇽에 바침으로써 교황청을 자신의 편에 확고히 만들고자 했다.

1338년 9월 15일, 바르샤바 재판정은 튜튼 기사단에게 그단스크 포메라니아, 쿠야비, 헤움노, 도브진 및 미하우프를 폴란드로 반환하고 194,500 그지브나를 보상금으로 지불하며, 1,600 그지브나에 달하는 재판 비용을 부담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여기에 튜튼 기사단장 디트리크 폰 알텐부르크와 휘하 장성들, 튜튼 기사단국의 시장들은 파문을 선고받았다. 튜튼 기사단은 즉시 교황청에 항소했고, 튜튼 기사단과 완전히 척지기를 원하지 않은 베네딕토 12세는 절차상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판결을 승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르샤바 재판 과정에서 제공된 증거와 판결 내용이 유럽 각지에 전파되면서, 튜튼 기사단이 점거한 영토가 사실 폴란드 왕국에 속한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폴란드 왕국은 이를 토대로 튜튼 기사단으로부터 빼앗긴 영토를 되찾는다는 명분을 내걸고 그들과 대결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교황 특사의 중재하에 양자간의 분쟁 해결을 위한 협상이 여러 차례 이뤄지고 중재안이 수 차례 도출되었지만, 양자 모두 자신들의 의사를 고집하면서 끝내 해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카지미에시는 루테니아 등 동방으로의 원정에 전념했기에 튜튼 기사단이 점거한 영토를 건드리지 않았고, 튜튼 기사단 역시 갈수록 강해져가는 폴란드를 괜히 건드리는 대신 리투아니아 대공국으로 관심을 돌리면서, 양자간의 충돌은 오랫동안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1356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사이에 평화 협약이 맺어지자, 튜튼 기사단은 이를 자신들에 대한 위협으로 여기고 강하게 반발했다.

1360년, 카지미에시가 튜튼 기사단의 영지와 인접한 라지그로드에 성채를 건설하자, 튜튼 기사단은 강력하게 항의했다. 카지미에시가 결정을 바꾸지 않자, 그들은 라지그로드를 전격 침공했다. 이로 인해 양자간의 무력 충돌이 벌어졌지만, 카지미에시가 한 발 물러서서 성채 건설을 취소하면서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다. 카지미에시는 1365년, 1366년 또는 1368년에 튜튼 기사단장 윈리히 폰 크니프로데의 초대를 받아들여 튜튼 기사단의 본거지인 말부르크에 3일간 방문했다. 그는 아마도 튜튼 기사단의 상황을 살펴보고 폴란드가 튜튼 기사단을 무너뜨릴 만큼 충분한 병력을 보유했는지를 알아보고 싶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튜튼 기사단을 압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는지, 그는 이들과의 전쟁을 위한 어떤 준비도 취하지 않았다.
2.20.2.3. 헝가리 왕국과의 동맹
카지미에시는 카로이 로베르트와 그의 아들 러요시 1세 치세에 갈수록 강성해지는 헝가리 왕국이 폴란드와 동맹을 이어가게 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자신이 죽고 피아스트 가문이 단절된다면, 카로이 로베르트와 러요시 1세가 속한 앙주 가문이 폴란드 왕좌를 차지할 것이라는 약속을 여러 번 반복했다. 1339년 7월, 그는 비셰흐라드에 도착한 뒤 러요시를 자신의 후계자로 선포했다. 카로이 로베르트는 이에 대한 대가로 할리치나와 블라디미르에 대한 헝가리의 권리를 카지미에시에게 양도하고, 카지미에시의 동방 원정 및 튜튼 기사단에 대한 무장 재판 때 군사 지원을 충실히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1350년에는 카지미에시가 만약 남자 아이를 낳는다면, 앙주 가문은 할리치나-블라디미르를 100,000플로린을 지불하고 가져간다는 내용의 추가 합의가 맺어졌다.

1351년, 러요시 1세는 리투아니아에 대한 합동 원정을 시작하기 위해 그의 군대와 함께 폴란드로 찾아왔다. 양군이 통합된 직후, 카지미에시는 중병에 걸렸다. 이에 러요시 1세는 폴란드 왕국의 고관들로부터 카지미에시가 죽으면 자신을 통치자로 받아들이겠다는 약속을 얻어냈다. 다만 러요시 1세는 독일인을 폴란드 궁정의 요직에 앉히는 것이 허용되지 않으며, 이를 위반할 경우 폴란드인들은 러요시 1세에 대한 충성을 거둘 수 있었다. 또한 러요시 1세는 자신을 위해 복무하는 폴란드 군인들에게 급료를 지불하기로 했다. 이 협약은 카지미에시가 회복되면서 이행되지 않았다. 1355년, 폴란드 대표단이 부더에 도착한 뒤 폴란드 왕국의 모든 주민을 대신하여 앙주 가문의 폴란드 왕위 계승을 수락하는 조건을 확립했다. 그해 1월 14일, 러요시 1세는 이를 확정하고 해당 조건을 명시한 문서를 발행했다. 이리하여 러요시 1세는 카지미에시의 잠정적인 후계자로 인정받았고, 헝가리 왕국은 폴란드의 충실한 동맹자가 되었다.
2.20.2.4. 동방 원정
카지미에시는 즉위 직후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주요 인사들 및 루테니아 공작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특히 루테니아의 할리치나-볼히니아 공작 볼레스와프 예르지 트로이데노비츠와 비셰흐라드에서 협상해, 볼레스와프가 자녀 없이 죽을 경우 할리치나를 자신에게 넘기며, 카지미에시는 볼레스와프에게 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던 1340년 4월 7일, 당시 30세였던 볼레스와프가 중독사했다. 이 소식을 접한 카지미에시는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루테니아로 진격해, 리비프에 입성한 뒤 그곳에서 볼레스와프의 보물 등 여러 전리품을 탈취하고 마을을 불태운 뒤 가톨릭 교도들과 상인들을 데리고 폴란드로 돌아갔다. 그 해 5월에는 헝가리군과 힘을 합쳐 루테니아로의 원정을 수행했지만, 원정의 경과 및 결과는 알려지지 않았다.

1340년 6월 말, 카지미에시는 훨씬 더 큰 군대를 동원하여 루테니아로 진군해 할리치나 등지를 폴란드에 종속시켰다. 여기에 그곳의 보야르인 디미트르 데트코는 폴란드로서 루테니아의 나머지 부분을 담당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디미트르는 폴란드의 지배를 받기를 원하지 않았고, 킵차크 칸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1341년 초, 킵차크 칸국이 파견한 타타르군이 소폴란드를 침공해 비스툴라 강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들은 카지미에시가 친히 이끄는 폴란드군에 격퇴되었고, 귀환하던 중 루블린을 점령하려 했으나 역시 패퇴했다. 이에 디미트르는 카지미에시에게 재차 복종했고, 총독으로서 광범위한 권한을 받았다.

1349년, 카지미에시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최근에 튜튼 기사단에게 패배하면서 위세가 꺾인 틈을 타 리투아니아의 영토로 귀속된 루테니아의 블라디미르 시를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그해 9월에 군대를 일으켜 블라디미르를 기습 공격해 그 일대를 순식간에 평정했다. 1350년 5월, 리투아니아인들이 마조프셰를 침공해 바르샤바와 체르스크를 파괴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양산하고 윙체차까지 진격했다. 이에 카지미에시는 군대를 일으켰고, 약탈을 마친 뒤 철수 중이던 그들을 추격해 주코프 전투에서 격파했다. 그러나 그해 8월, 리투아니아인들은 재차 군대를 일으켜 루테니아를 침공하여 혼란을 일으키고 많은 포로를 잡았으며, 브워지미에시, 벨츠, 브레스트 및 여러 마을을 점령한 뒤 우쿠프, 산도미에시, 라듐으로 쳐들어가 많은 폴란드인을 납치했다. 카지미에시는 이들을 완전 제압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리비프 땅을 제외한 블라디미르 전역을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돌려주는 대가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1351년, 카지미에시는 교황으로부터 4년 동안 내는 십일조의 절반을 리투아니아와 타타르와의 전쟁에 쓰는 것을 승낙받은 뒤 원정을 준비했다. 그해 6월, 러요시 1세가 헝가리군을 이끌고 폴란드군과 함께 리투아니아를 침공할 준비를 갖췄다. 양군은 루블린에서 합류했는데, 카지미에시는 도중에 중병에 걸려 본국으로 귀환했고 러요시 1세가 그를 대신해 폴란드-헝가리 연합군을 이끌었다. 1351년 7월, 러요시는 리투아니아 대공 켕스투티스(Kęstutis)를 공격했다. 이에 켕스투티스는 8월 15일 러요시 1세에게 사절을 보내 헝가리 왕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형제들과 함께 부더에서 세례를 받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켕스투티스는 폴란드-헝가리 연합군이 철수한 뒤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러요시 1세는 켕스투티스를 징벌하기 위해 재차 공세를 개시했지만, 그의 원정에 참여한 프워츠크 공작 볼레스와프 3세가 리투아니아군의 습격으로 전사하면서 군대의 사기가 떨어지자 어쩔 수 없이 부더로 철수했다.

1352년, 병이 나은 카지미에시는 다시 리투아니아 원정을 개시해 벨츠를 포위했다. 그해 3월, 러요시 1세가 카지미에시 3세와 합류한 뒤 벨츠를 성공적으로 함락시켰다. 리투아니아 대공 알기르다스(Algirdas)가 타타르 용병들을 대규모로 고용해 포돌레로 쳐들어오자, 러요시 1세는 본국이 침탈당할 것을 우려해 헝가리로 귀환했다. 교황 클레멘스 6세는 그해 5월에 리투아니아와 타타르에 대한 십자군을 선포하고, 러요시 1세가 향후 4년간 헝가리 교회 수입에서 십일조를 징수할 권리를 승인했다. 그러면서 헝가리에 인접한 이교도들과 교회 분열주의자들의 땅을 점령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이에 고무된 러요시 1세는 1354년 4월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킵차크 칸국을 향한 원정을 개시했다. 헝가리군이 킵차크 칸국에 밀려와서 각지를 약탈하고 파괴하자, 자니베크 칸은 두려움을 느끼고 다시는 리투아니아인들을 돕지 않고 헝가리를 적대하지 않겠다는 조건하에 러요시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후 킵차크 칸국은 헝가리를 공격하지 않았다.

한편, 카지미에시는 추가 군사 작전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그니에즈노 대성당의 귀중품을 기부하도록 강요했다. 여기에 브와디스와프가 사망한 폴란드 왕국에 통합된 도브진을 튜튼 기사단에게 저당잡히고 그 대가로 상당한 돈을 받아냈으며, 프워츠크 땅을 바르샤바 공작 카지미에시 1세에게 저당잡히고 역시 돈을 받아냈다. 이후 대규모 병력을 일으켜 폴란드-리투아니아 국경에 이르렀다가, 리투아니아 사절단과 협상한 끝에 양자가 서로의 영토를 침략하지 않고 지금까지 확보한 영토를 그대로 가지는 것이 허용되며, 양측은 휴전 기간 동안 요새를 건설하거나 재건하지 않고, 리투아니아인들은 타타르족이 폴란드 본토를 침공할 경우 폴란드를 도와야 하지만 루테니아를 침공할 때는 그럴 필요가 없고, 카지미에시는 헝가리 왕이 리투아니아를 공격하면 리투아니아인을 지원해야 하지만 루테니아를 침공할 때는 돕지 않는다는 내용의 협약을 맺었다. 또한 리투아니아 공작 중 누군가가 휴전을 위반하면 대공이 그를 심판해야 하며, 양자는 서로에게 도망자들을 인도해야 했다.

카지미에시가 협정에 만족하며 돌아간 뒤, 리투아니아인들은 협정을 재빨리 깨뜨렸다. 1353년, 그들은 리비우를 침공해 파괴했으며, 7월 7일 할리치나를 공략하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이후 소폴란드로 진군해 자비코스트 주변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이에 분노한 카지미에시는 그해 10월 보복 원정을 단행했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1354년 11월 10일, 교황청은 폴란드, 체코, 헝가리에 리투아니아와 타타르족에 대항하는 십자군을 요청했고, 폴란드가 십일조를 군자금으로 쓰는 것을 허용한다는 내용의 교서를 반포했다. 1355년, 카지미에시는 헝가리 국왕 러요시 1세로부터 지원군을 받아낸 뒤 블라디미르 일대에 대한 공세를 개시해 블라디미르 요새를 공략했다. 1356년 타타르인들이 이 요새를 빼앗자, 카지미에시는 스타니스와프 치올레크에게 병력을 맡겨 블라디미르 탈환 작전을 수행하게 했다. 그러나 작전은 실패했고, 스타니스와프는 전사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6세는 1356년 9월 17일 튜튼 기사단이 리투아니아인들과의 전쟁을 치르는 카지미에시를 돕지 않는 것을 질책하는 교령을 반포했다. 그러나 튜튼 기사단은 끝내 폴란드를 돕기를 거부했다. 1356년 여름 말 또는 초가을, 카지미에시는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 협약에 대한 내용은 알려진 바 없지만, 1357년 1월 24일에 발행된 교황 교령에서 이를 언급했다. 인노첸시오 6세는 이 문서에서 카지미에시가 이교도들과 평화 협약을 맺은 것을 비난했다. 1357년 12월 17일, 카지미에시는 아비뇽에 사절을 보내 리투아니아를 폴란드 교회 관구에 종속시킬 것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는 카지미에시를 견제하기 위해 1358년 4월 18일에 리투아니아 공작들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보호 아래 기독교를 받아들일 것을 호소했다. 그해 7월, 리투아니아 대공 중 한 명이 뉘른베르크에 있던 카를 4세에게 리투아니아가 기독교화를 원하므로 대공이 크리스마스에 세례를 받으러 올 것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황제는 몹시 기뻐하며 브로츠와프에서 세례 행사를 벌이기로 했다. 그러나 대공은 정해진 날짜에 오지 않았고, 그 대신 사절을 보내 튜튼 기사단이 리투아니아에게서 빼앗은 땅을 반환할 때까지 세레를 받지 않겠다고 알렸다.

1358년, 카지미에시의 외손자인 스웁스크 공작 카지미에시 4세와 리투아니아 대공 알기르다스의 딸 케나(Kenna)간의 결혼이 성사되었다. 여기에 마조프셰 공작과 리투아니아 사이에 국경 협약도 체결되었다. 이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간의 평화는 1366년까지 이어졌다가 1367년 카지미에시가 루테니아 원정을 단행하면서 깨졌다. 카지미에시는 리투아니아령에 속한 루테니아를 성공적으로 공략하고, 그 땅의 주군인 루바트로부터 블라디므르와 루스크를 계속 다스리는 대가로 모든 적에 맞서 자신을 돕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1368년 리투아니아인들은 마조프셰를 침공해 프워츠크, 체르빈스크, 비쇼그로드, 풀투스크를 파괴했지만, 폴란드 본토를 공격하지는 않았다. 이후 카지미에시가 1370년에 사망할 때까지, 양측은 더이상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2.20.2.5. 마조프셰 귀속
마조프셰는 본래 폴란드의 영토였지만 브와디스와프 1세 치세 때 보헤미아 왕국에 복종했다. 하지만 보헤미아 왕국은 너무 멀리 떨어진 마조프셰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고, 카지미에시가 폴란드 왕국의 국력을 급속도로 회복시키고 군사력을 증강하면서, 마조프셰 공작들은 카지미에시에게 의존해야만 리투아니아인들의 침략으로부터 버틸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1343년, 바르샤바의 카지미에시 1세를 제외한 모든 마조프셰 공작들은 칼리슈에 대표단을 파견해 카지미에시와 동맹을 맺었다.

1351년 9월 18일 프워츠크 공작 볼레스와프 3세가 자녀 없이 사망하자, 카지미에시는 보헤미아 왕국이 가신의 영지를 자기들 것으로 삼으려 들기 전에 즉시 프워츠크 공국을 점령했다. 이후 바르샤바 공작 시에모비트 3세 및 카지미에시 1세와 협의해 프워츠크, 비스카 등지의 지배권을 유지하고, 소하체프를 두 사람에게 영지로 주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이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가신이 되도록 하되, 피아스트 왕가가 단절되면 가신으로서의 의무에서 해방될 뿐만 아니라 프워츠크, 비스카 등지를 물려받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한편, 보헤미아 국왕이었다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된 카를 4세는 프워츠크 공국을 자칸 공작 하인리히 5세에게 봉토로 넘기겠다고 선포했다. 하지만 카지미에시는 황제의 이 명령을 무시하고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켰다.

1355년 11월 26일 바르샤바 공작 카지미에시 1세가 자녀 없이 사망했다. 그는 주군으로서 자녀를 두지 못한 가신의 땅을 인수할 권리가 있었지만, 그 대신 카지미에시 1세의 형제인 시에모비트 3세에게 넘기기로 했다. 이에 감격한 시에모비트 3세는 카지미에시가 일전에 리투아니아인들과의 전쟁에 필요한 군자금 마련을 위해 자신에게 빌렸던 돈을 탕감해줬고, 충성을 재차 서약했다. 이후 1356년 5월 1일 프라하에서 폴란드-보헤미아 동맹이 체결되었고 카를 4세가 프워츠크 공국 등 마조프셰에 대한 일련의 권리를 포기하면서, 마조프셰는 폴란드의 영역으로 완전히 굳어졌다.

2.20.3. 내치

2.20.3.1. 왕권 강화 정책
카지미에시는 폴란드 각지에서 대귀족이 할거하고 왕의 명령이 통하지 않는 상황을 개선하고자 중앙 집권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귀족과 성직자의 경제력을 제한하고 교회를 왕권에 종속시키고자 했다. 크라쿠프 주교 얀 그로트는 왕이 주교구가 보관하던 자금을 전쟁 비용으로 쓰기를 반복하자 격렬하게 반발한 끝에 1334년 파문을 선고하고 크라쿠프 교구에 성무 금지령을 내렸다. 이에 카지미에시는 그가 국가 기밀을 폭로하고 반란을 조장했으며, 백성들을 학대했다고 비난했다. 1338년에는 왕이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바벨 대성당에 들어오자 얀 그로트가 예배를 중단해버리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선정을 베푸는 왕을 지지하는 여론이 갈수록 거세지자, 얀 그로트는 결국 1343년에 파문을 취소하고 카지미에시와 화해했다.

카지미에시는 각지에 스타로스타 제너럴을 둬서 자신을 대신해서 왕명을 집행하고 귀족들을 다스리도록 했다. 이에 무제한적인 자치권을 누리던 대귀족들은 자기들의 권익이 침해되는 것에 반감을 품었다. 1352년 9월, 마코 보르코비치를 비롯한 귀족들이 포즈난에서 연합을 설립하고 왕의 대표자들과 추종자들을 공격했다. 이에 대폴란드가 내전에 휘말릴 위기에 몰리자, 그는 1353년에 중재를 위해 포즈난에 찾아와서 자렘바, 레슈치크 가문을 회유해 연합에서 탈퇴하게 했다. 그러나 연합은 브란덴부르크군의 지원을 받아가며 저항을 이어갔고, 한 때는 차른쿠프를 포위하기도 했다. 카지미에시는 백성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그런 반란군을 침착하게 밀어붙였고, 결국 궁지에 몰린 연합 지도자 마코 브로코비치는 1358년 2월 16일 시에라츠에서 연합을 해산하고 카지미에시에게 항복했다. 카지미에시는 일단 마코를 용서하는 척했다가 나중에 긴급 체포해 감옥에 가둔 후 굶겨죽였다.

이리하여 대귀족들을 제압한 뒤, 카지미에시는 각지에 고관들을 임명했고, 크라쿠프에서 왕실 의회를 주기적으로 개최해 고위 인사와 토지 관리, 귀족 및 도시 대표가 참석하도록 했다. 또한 형사 사건을 처리하는 법원과 민사 분쟁을 전담하는 법원을 별도로 설립했으며, 지방 법원의 판결에 승복하지 못할 경우 크라쿠프에 설립된 고등 법원에 항소하도록 했다. 그 결과, 그동안 왕을 무시하던 귀족들은 더이상 자기들 멋대로 영주민들을 학대할 수 없게 되었고, 국왕은 통치력을 각지에 널리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카지미에시는 법률 분야에도 깊은 관심을 두었다. 그는 폴란드 내 지역 차이가 심하기 때문에 폴란드 전역에 통일된 법을 도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대폴란드와 소폴란드에 별도의 법을 두기로 했다. 소폴란드에서는 1362년에 비실리카에서 제정된 법이 적용되었고, 대폴란드에서는 1356년부터 1362년까지 피오토르에서 제정된 법이 적용되었다. 그래서 카지미에시 법령은 비실리카-피오토르 법령으로도 일컬어진다. 이 문서들은 라틴어로 작성되었으며, 폴란드 관습법에 기초를 두었다. 법령의 원본은 소실되었지만, 얀 드우고시 등 여러 연대기에서 일부 내용이 파편적으로나마 전해진다. 연대기 작가들에 따르면, 그동안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농민들을 지켜주기 위한 조치가 여럿 있었고 불법행위를 저지른 귀족과 성직자들을 단속하는 내용이 많았다고 한다. 또한 법령의 약 2/3가 형법에 관한 것이었고, 나머지는 민사에 관한 것이었다고 한다.
2.20.3.2. 군사 개혁
카지미에시는 군대 조직에도 개혁을 단행했다. 투석기, 공성추, 공성탑 등 전투 기계들이 대거 개발되었고, 사슬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로 구성된 기병대가 폴란드군의 주력이 되었다. 여기에 검병, 도끼병, 창병, 궁수병, 석궁병도 전투에 투입되었고, 모든 주민은 자기가 사는 도시에 공격이 가해지면 즉시 방어하며, 농민들도 민병대를 자체적으로 갖추고 적의 침략에 대항해야 했다. 그는 이에 더해 깃발 체계도 도입했다. 각 군대는 군기에서 이름을 따온 부대로 구성되었고, 군기에는 각 부대 지휘관이 속한 가문이나 영지의 문장이 새겨졌다.

카지미에시는 폴란드군이 자국의 영역을 행진할 때 도시나 마을이 아닌 공터에 숙영지를 세우게 했고, 주변 주민들에게 보급품을 받아낼 때 반드시 대가를 지불하게 했다. 또한 농작물을 뺴앗고 농장을 파괴하거나 소와 돼지를 뺴앗을 경우, 엄중한 처벌을 부과했다. 그는 방어 시설 건설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의 시대에 53개의 성이 요새화되었고, 27개의 도시 요새가 강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요새 건설에 쓰이는 벽돌 등 재료를 생산하는 공장이 곳곳에 설립되었고, 지역 경제는 자연히 발전했다.
2.20.3.3. 경제 진흥
카지미에시는 경제 분야에서도 힘을 기울였다. 먼저 폴란드 전역을 뒤덮고 있던 숲을 농지로 바꾸는 사업을 대대적으로 단행했다. 또한 크라쿠프에 무역 특권을 부여했으며, 바라누프 산도미에르스키, 란코로나, 리비프, 필즈노, 프로조비체, 롭치체, 르제슈프, 슬롬니키, 타일리츠, 티친 등 여러 도시를 설립했다.[6] 이때 설립된 도시들에는 독일법이 적용되었고, 독일에서 살던 은행가, 상인, 장인들을 대거 초빙했다.

국고는 광범위한 왕실 토지에서 나오는 수입을 기반으로 했다. 새 도시 건설과 오래된 도시의 개선 사업은 수익성을 크게 늘렸다. 여기에 지방 귀족들이 자체적으로 지불하던 세금을 각지에 파견된 관료들이 매년 거둬들이는 연간세로 변경하면서, 국고 수입이 크게 증대했다. 또한 보흐니아와 비엘리치카의 광산과 양조장도 국고에 크게 기여했다. 카지미에시는 1368년 4월 21일에 소금 광산 법령을 공포해 소금 광산 관리를 재조직함으로써 소금을 통한 세수입을 체게적으로 관리했으며, 크라쿠프에 제염소를 설치해 소금의 질을 관리하게 했다. 크라쿠프 제염소는 14세기에 세수입의 1/3을 국고에 제공한 대표적인 왕실 기업이었다. 한편, 카지미에시는 그로스 크라코프스키(Gross Krakowski) 동전을 주조한 최초의 폴란드 통치자이기도 했다.

폴란드는 오랜 세월 외세의 침략과 내란에 시달리면서 인구가 희소했지만, 그가 37년간 선정을 베풀면서 인구가 크게 늘었다. 학자들은 그의 치세 말년에 1,800,000명에서 1,900,000명의 주민이 폴란드에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유럽 전역에 중세 흑사병이 창궐했던 것을 감안하면, 이는 실로 놀라운 성과였다.
2.20.3.4. 문화 진흥
1364년 5월 12일, 카지미에시 3세는 크라쿠프 대학의 설립을 선포했다. 그는 칙령에서 대학을 세우는 취지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는 인류의 모든 유익한 것과 모든 번영이 증가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의무를 다하고 있으며, 이것이 우리 주의 성직자와 신민들에게 유익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이 대학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이곳은 모든 과학에 대한 보편적인 연구가 발전할 수 있는 도시 크라쿠프에 자리잡았다. 이곳이 압도적인 지식의 진주가 되어 사람들에게 탁월한 조언의 성숙함, 미덕의 장식, 다양한 지식 방향으로 가득 찬 것을 제공하기를 바란다. 과학적으로 계몽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이 끌어낼 수 있는 유익한 과학의 원천이 있도록 하라.

크라쿠프 대학은 볼로냐 대학과 파도바 대학을 모델로 삼았으며, 대학교에 재학하는 학생들은 관세 및 수수료 면제 등 많은 특권을 누렸다. 이 대학은 훗날 브와디스와프 2세에 의해 한층 더 발전했고, 브와디스와프 2세의 가문 이름인 야기에우워 왕조에서 따서 '야기엘론스키 대학교'로 개명되었다. 현재 이곳은 중부 유럽에서 프라하카를로바 대학교에 이어 2번째로 긴 역사를 자랑하는 대학으로서, 폴란드 최고의 명문 대학으로 손꼽힌다.

카지미에시의 통치 기간 동안 소폴란드에는 많은 고딕 양식의 건물과 예술 작품이 세워졌다. 그는 바츠와프의 성 베드로 대성당 확장에 대한 후원을 맡아 아버지 브와디스와프 1세를 위한 기념비를 건립했으며, 포즈난 대성당에 볼레스와프 3세 크쉬보우스티의 묘비를 세우게 했다. 또한 바벨 성도 고딕 양식에 맞춰 확장했고, 2개의 큰 교회, 즉 코퍼스 크리스티 교회와 성 알렉산드리아의 캐서린과 성 마가렛의 교회를 설립했다. 이외에도 니에포워미체, 비실리카, 산도미에츠, 카르구프, 시드우프 등지에 수도원을 잇따라 건립했다.

카지미에시는 성물함과 성배 등 기독교와 관련된 수많은 예술적 장인 작품에 자금을 지원했다. 여기에 왕의 위엄과 권력을 상징하는 정교한 문장이 담긴 예술 작품도 여럿 제작되었다. 그는 통치 기간 동안 "폴란드의 왕, 크라쿠프, 산도미에시, 시에라츠, 웽치차, 쿠야비 및 포메라니아 땅의 영주이자 상속인"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으며, 동방 원정에서 성과를 거둔 뒤에는 "루스의 군주이자 상속자", "폴란드와 루테니아의 왕"을 칭하기도 했다.
2.20.3.5. 유대인 우대 정책
카지미에시 3세는 독일어권 국가들에서 극심한 박해를 받고 있던 유대인들을 "왕의 백성"으로 보호하겠다고 선언하고 폴란드로 이주하도록 권장했다. 그는 유대인 어린이들에게 기독교인으로 세례를 주기 위해 납치하는 일반적인 관행을 금지했으며, 폴란드 가톨릭 종교 재판의 반유대주의 경향과 빈번한 폭동을 완화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유대인들은 독일법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왕실 법원의 직접적인 판결을 받음으로써 그들의 권리를 특별히 보장받았다. 그는 유대인 대금업자가 부과하는 이자율을 8과 1/3 %로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는데, 이는 유대인들이 너무 많은 이자를 받으면 현지인들의 분노를 살 것을 고려해 내린 것이었다. 그가 유대인들을 이렇듯 우대한 결과, 상공업에 능한 유대인들이 폴란드에 대거 유입되면서 폴란드 왕국의 빈약했던 상공업이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2.21. 피아스트 왕조의 단절

1370년, 카지미에시 3세는 룩셈부르크 가문의 손아귀에 들어갔던 실레시아를 탈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실레시아-폴란드 국경 지대에 군대를 집결시키라는 칙령을 내린 뒤, 그해 9월 프셰드보르츠 성에 머물면서 대규모 사슴 사냥을 벌였다. 그런데 사냥 둘째 날인 9월 9일, 그는 사슴을 쫓다가 낙마하는 바람에 왼쪽 정강이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그는 크라쿠프로 옮겨진 뒤 2개월간 상처에 세균이 감염되면서 고열에 시달리다가 1370년 11월 5일에 사망했다. 당시 카지미에시 3세가 낙마했다고 전해지는 장소에는 오늘날에도 표석이 세워져 있다.

카지미에시 3세는 생전에 4번이나 결혼했지만 후계자로 삼을 아들을 끝내 두지 못했고, 이로 인해 피아스트 왕조는 단절되었다. 이후 폴란드 왕위는 그가 생전에 여러 번 약속한 대로 헝가리 국왕이자 조카인 러요시 1세에게 계승되었고, 러요시 1세의 3녀 야드비가 여왕 때에 이르러 리투아니아의 대공과 모든 리투아니아인발트 신화를 쳐내고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조건으로 결혼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야기에우워 왕조의 인도하에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3. 역대 폴란드 대공 및 국왕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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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전설상의 피아스트 군주

3.2. 역사상의 피아스트 군주

3.3. 프르셰미슬 왕조의 지배기

3.4. 피아스트 왕조의 귀환


[1] 교회 관구 내의 교구를 이끄는 주교.[2] 주치의 장남, 바투의 형[3] 차가타이의 차남[4] 오고타이 칸의 아들[5]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금광을 캐던 광부까지 징병했다고 한다.[6] 일설에 따르면,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거의 100개의 신도시가 설립되었다고 하지만, 이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7] 1291년부터 폴란드 국왕을 자처했으며, 1300년에 정식으로 대관식을 거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