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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 명 정 부 | |||||||||||||||||||||||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정부 Prozatímní státní zřízení Dočasné štátne zriadenie | ||
망명 정부 | ||
국기 | 국장 | |
1939년 ~ 1945년 | ||
성립 이전 | 해체 이후 | |
체코슬로바키아 제2공화국 | 체코슬로바키아 제3공화국 | |
수도 | 프라하 | |
근거지 | 파리(1939~1940) 런던(1940~1945) | |
정치체제 | 의회 공화제 | |
국가원수 | 대통령 | |
언어 | 체코어, 슬로바키아어 | |
민족 | 체코인 슬로바키아인 | |
종교 | 가톨릭 | |
통화 | 체코슬로바키아 코루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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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존재한 체코슬로바키아의 망명 정부이다.2. 상세
나치 독일은 뮌헨 협정 이후 주데텐란트를 합병했다. 에드바르트 베네시 대통령은 독일의 압력으로 사임한다. 이후 폴란드는 테셴[1] 지방을, 헝가리 왕국은 슬로바키아 남부를 각각 뜯어갔다. 1939년에는 슬로바키아 민족주의를 선동해 슬로바키아를 분리독립시켜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을 수립했고, 남은 체코 지방에는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이던 에밀 하하의 승인을 얻어 나치 독일의 보호령인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을 수립했다.이에 망명 중이던 에드바르트 베네시 전 대통령은 파리에서 1939년 10월 체코 국민 자유 위원회 수립을 선언한다. 프랑스는 체코슬로바키아인 군대까지 조직할 수 있게 만들었고, 이들은 프랑스 침공 당시 프랑스군과 함께 독일 국방군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프랑스는 항복했고, 위원회는 런던으로 피신했다. 1941년 4월에는 위원회가 뮌헨 협정 이전의 체코슬로바키아를 계승한 정부라고 주장했다. 독소전쟁 이후 소련은 이 정부를 승인했으며, 폴란드 망명 정부와도 협력하기로 했다. 그리고 영국군과 함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암살 작전인 유인원 작전을 성공시키면서 영국과 자유 프랑스의 공식 승인을 받았다.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의 친소련 외교 정책을 어느정도 계승하여 반목하는 폴란드 망명 정부와 소련간 관계 조율에 힘썼으며 공산주의 사상의 체코슬로바키아 망명객까지 받아들였다. 다만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시절과는 다르게 망명정부 시절의 친소련 관계는 전후 중부유럽에 드리울 소련의 영향력에 대한 두려움이 반영된 결과였다. 베네시는 소련과의 친선 정책을 펼침으로서 전후 체코슬로바키아에 친소련 공산주의 쿠데타를 막고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게다가 체코슬로바키아는 폴란드와는 달리 소련과 어떠한 무력 분쟁도 겪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소련과 척칠 필요도 없었다. 이러한 친소 정책을 보여주는 사건들 중 하나는 1943년 미국 대표단에 소련은 전후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에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 주장한 것, 1945년 체코슬로바키아 내각에 공산당 인사들도 임명한 것이 있다.
1945년 체코슬로바키아가 해방되자 해체되고 체코슬로바키아 제3공화국을 수립한다.
2.1.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연합
폴란드 망명 정부의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는 망명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의 연합을 추진, 서방 연합국의 지지를 등에 업고 에드바르트 베네시에 협상을 요구했다.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정부와 베네시는 이러한 연합은 자연히 폴란드가 주도하게 될 것이고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의 세는 위축될 것을 우려하여 탐탁지 않아 했다. 또한 폴란드는 소련과 반목하는 관계로 체코슬로바키아를 끌어들이려 한 반면 체코슬로바키아는 소련과 친목하였으며 뮌헨 협정에서 폴란드가 강탈해간 테신 지역에 대해 국경분쟁을 겪고 있었기에 자연히 체코슬로바키아는 이러한 연합에 의욕이 별로 없었다.하지만 연합 요청의 거절은 서방 연합국의 반발 혹은 극단적으로는 서방 연합국이 베네시의 망명정부 지지를 철회하고 베네시 반대파들과 함께 더 '친서방적인'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정부를 구성할 것을 우려하여 협상에 참여는 하였다. 여기서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정부는 최대한 협상에 지연을 펼치면서 관세연합, 공동 화폐 등 최대한 적은 것을 내어주면서 질질 끌었고 체코슬로바키아에는 다행히도 시코르스키의 사망과 카틴 학살이 알려진 후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의 극단적으로 다른 대소 정책으로 무산되었다.
3. 둘러보기
[1] 체코어로 테신, 폴란드어로 치에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