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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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왕국 Kongeriget Danmark 독일 점령하 덴마크 Dänemark unter deutscher Besatzung | |||||
국기 | 국장 | ||||
지도 | |||||
1940년 4월 9일 ~ 1945년 5월 8일 | |||||
수도 | 코펜하겐 | ||||
정치체제 | 입헌군주제 | ||||
역사 | • 독일의 점령: 1940년 4월 9일 • 독일의 패망으로 해방: 1945년 5월 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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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치 독일이 덴마크를 침공하고 세운 보호령이다. 현대 덴마크에서는 점령기(Besættelsen)라고 칭한다.2. 역사
덴마크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중립을 지키면서 독일의 점령을 면할 수 있었다.[1]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때 독일은 노르웨이를 점령하기 위해서 덴마크 북부의 올보르 공항 점령이 필요했다고 판단했고, 1940년 4월 9일 중립국이었던 덴마크를 침공했다. 덴마크와 독일은 1939년 불가침조약을 맺은 상태였지만 독일은 그냥 공격해 버렸다.덴마크는 본국의 군사력으론 독일 국방군을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기에[2] 침공이 개시된 지 4시간만에 독일의 요구 조건을 수용했고[3] 국왕 크리스티안 10세는 덴마크가 독일에 의해 점령된 이후, '국가에 의한 보호'를 선언했다.
덴마크는 공식적으로 독일과 전쟁에 돌입한 적이 없어서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의 덴마크 침공을 막아주기 위한 군 병력 진격'이라는 명분을 들어 덴마크를 침공했고 독일의 다른 점령지나 괴뢰국과는 다르게 꽤 자주적이었다. 독일에게 점령당한 이후 공식 명칭과 왕정을 유지한 국가는 덴마크와 모나코뿐이다.[4] 물론 어디까지나 외교적 명분에 지나지 않고 실제로는 침공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나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덴마크 국왕과 정부가 이것을 인정해 양국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다. 덴마크는 공식적으로 침공당하지도, 항복한 적도 없어서 괴뢰국이라고 보기는 애매했다. 그래도 덴마크 보호령은 여러 방면으로 독일과 협력했다.
추축국에 가입하진 않았으나, 추축국 가담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고, 방공 협정에도 가입하여 사실상 추축국이나 다름없었다. 독일의 적국인 소련, 중국[5]과 단교했으며, 무장친위대 안에 6,000명 정도의 덴마크인 부대인 덴마크 자유 군단도 구성했다. 대서양 방벽의 덴마크 부분에 대한 건설을 허용했고, 덴마크 국립 은행은 거의 이자를 받지 않고 독일에 대출을 해 주었다. 이것 외에도 독일에 여러 상품을 제공했다. 역대 세 총리였던 토르발드 스타우닝, 빌헬름 불, 에리크 스카베니우스는 나치 독일과의 협력 정책을 고수했다. 빌헬름 불은 전쟁 이후인 1945년 5월 3일에서 1945년 11월 9일까지 다시 총리로 재임했다.
1943년 독일 정부는 덴마크를 독일군의 감시하에 놓겠다는 최후 통첩을 보냈으며, 덴마크 의회는 이것을 거부했다. 그러자 독일은 덴마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덴마크 정부를 해산시켜 덴마크를 직접적으로 통치하기 시작했다. 1943년까지는 덴마크인들은 독일에 대한 저항을 거의 하지 않았으나,(크리스티안 10세가 매일 코펜하겐 시내를 말을 타고 돌아다닌다든지, 유대인을 보호하는 등의 소극적인 저항은 지속했다.) 계엄령 이후에는 저항하기 시작했다. 1945년 독일의 몇 남지 않은 점령지가 바로 덴마크였다.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하자, 나치 잔당들은 덴마크 근처 플렌스부르크에서 플렌스부르크 정부를 구성했다. 독일이 무조건 항복하자 덴마크는 해방되었다.
3. 매체에서
- 영화 <랜드 오브 마인>은 해방된 덴마크에서 독일군 소년병 포로들을 투입하여 덴마크 해안에 독일군이 부설한 지뢰 제거를 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 영화 4월 9일(영화)은 독일의 덴마크침공을 다루는 그날 하루를 묘사하고 있다.
[1] 중립을 표방하면서 발트해의 입구에 해당하는 카테가트 해협에 기뢰를 도배했는데 문제는 독일은 킬 운하의 존재 때문에 자국 함대가 굳이 덴마크 영해를 안 지나고 북해와 발트해를 오갈 수 있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덴마크의 기뢰 살포 때문에 같은 협상국인 러시아와의 연락이 차단되어 버렸다. 사실상 중립을 표방하며 독일에 납작 엎드린 것. 영국은 이때의 경험으로 유럽의 중립국도 말만 중립국일 뿐이라고 통감하고, 전후 주요 중립국에 대한 전시전략계획을 수립한 뒤 노르웨이 침공 때 실제로 실행에 옮긴다.[2]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행적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에게 원한을 사 두 나라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다.[3] 덴마크 정부가 빠르게 항복했기 때문에 소수의 덴마크군 부대들은 덴마크 정부의 항복 사실을 모르고 독일군과 싸우다 뒤늦게 항복하기도 했다[4] 발칸 반도의 점령지인 알바니아 왕국과 몬테네그로 왕국은 국명은 변경하지 않았지만 왕을 다시 세우지 않고 그냥 군정으로만 통치했다.[5] 일제의 괴뢰국이었던 왕징웨이 정권과는 수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