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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로돔 시아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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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32ea1><colcolor=#f8d913>
캄보디아 노로돔 왕조 제2대 국왕
노로돔 시아누크[1]
នរោត្តម សីហនុ
Norodom Sihanouk
파일:xst5tt7b691b1.jpg
출생 1922년 10월 31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프놈펜
사망 2012년 10월 15일 (향년 89세)
중국 베이징
재위기간 캄보디아 국왕
1941년 4월 24일 ~ 1955년 3월 2일
캄보디아 국가원수 (사실상 복위)
1960년 6월 20일 ~ 1970년 3월 18일
캄보디아 국왕 (2차 복위)
1993년 10월 24일 ~ 2004년 10월 7일
서명 파일:노로돔 시아누크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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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노로돔 수라마리트
어머니 시소와스 코사막
배우자 Mam Manivan Phanivong (1949년 ~ 1952년)
Norodom Thavet Norleak (1946년 ~ 1949년)
Sisowath Monikessan (1944년 ~ 1946년)
Sisowath Pongsanmoni (1942년 ~ 1951년)
팻 칸홀 (1940년 ~ 1946년)
노로돔 모니니엇 (1952년 ~ 2012년)
학력 소뮈르 기병학교 }}}}}}}}}

1. 개요2. 생애3. 기타4. 소속 정당5.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캄보디아는 과거 모든 침략에 저항했습니다. 저항은 캄보디아 인민의 전통이었습니다. 캄보디아인은 항상 싸워왔습니다."
"비극의 주인공은 시아누크가 아니라 캄보디아 인민이다."
캄보디아의 전 국왕. 현지에서는 "아버지 왕"(សម្តេចឪ, [sɑmɗac ʔɨw])이라고도 불렸다.

20세기 이후 국왕임을 감안하더라도 사실상 전제정치를 했던 인물이지만, 폐위 후 캄보디아 전역을 피로 물들이며 대학살을 펼친 폴 포트의 폭정으로 인해 그의 악행은 다소 묻힌 감이 있다. 그의 폐위 이후 캄보디아가 정권이 여러번 갈리고 내전과 킬링필드로 혼란에 빠지자 많은 캄보디아인들이 그래도 평화롭고 안정적이었던 시아누크 국왕의 치세를 그리워하였고 냉전 종식 이후에 그의 국왕 복위를 통한 왕정복고가 1993년에 이뤄졌다.

2. 생애

시아누크는 1922년 캄보디아 왕가의 한 집안인 노로돔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원래 그는 왕이 되기에는 까마득할 정도로 혈통이 멀었던 사람이었지만,[2] 태평양 전쟁으로 일본이 인도차이나를 전부 차지해버리자 캄보디아를 통치하던 프랑스는 1941년 시아누크를 꼭두각시로써 캄보디아의 왕으로 만들었다. 즉, 외할아버지인 캄보디아 국왕이 사망하자 아버지를 대신하여 18살의 나이에 왕이 된 것이다. 시아누크는 여러명의 부인을 가져 그들 사이에서 13명의 아들을 낳으며 놀고 먹는 생활을 해댔다. 그래서 그는 마치 프랑스의 뜻대로 캄보디아의 꼭두각시 왕으로 지내는 듯 했지만 이 왕이 훗날 캄보디아를 휘저어 놓을 왕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일본이 캄보디아를 점령했을 때에는 재빨리 캄보디아 독립을 선포했으나 일본이 캄보디아에서 물러나자 프랑스 식민당국의 귀환을 환영했다. 1946년에 민족주의 성향 정당인 '캄보디아 민주당'이 절대다수를 차지하자 그는 프랑스와 결탁해 선거결과를 무효화시켰고, 민족의회를 무력화시켰다. 그러다가 선 응옥 타인[3]의 민족주의 무장단체 '크메르인민자유위원회'(KNLC)와 좌익 혁명단체 '크메르인민혁명당'(KPRP)으로부터 도전을 받자 1953년 1월에 계엄령을 발동시켜 의회를 해산하는 한편,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지고 있던 프랑스를 설득해 1953년 11월 캄보디아의 독립을 얻어냈고, 캄보디아 국민은 그런 그를 '캄보디아의 혼'이라 부르며 칭송했다.

독립 뒤 아버지 노로돔 수라마리트에게 왕위를 주고 왕위에서 물러난 그는 당시 캄보디아의 우익세력을들 통합함과 동시에 일부 사회주의 세력을 포섭한 포괄정당인 '상쿰'(Sangkum), 해석하자면 '인민사회주의공동체'라는 정당을 창설했으며, 55년 치러진 초대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어[4] 일당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1당 통치 정부에서 섭정, 수상, 외교부장을 꿰차며 이른바 자애로운 전제군주로 군림했다. 이렇게 독재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한 시아누크는 언론과 지식인들에게는 재갈을 물렸고, 독재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후 포퓰리즘 정치를 자행하며 자신이 캄보디아를 구원할 위대한 지도자라고 추켜세우면서 언론에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하게 했다. 1960년 왕이던 그의 아버지가 승하하자 그는 '캄보디아 국가원수'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다시 왕좌에 복귀한다.[5]

또한 냉전 상황에서 제3세계 비동맹운동을 펼치며, 캄보디아를 미국이나 소련의 편도 아니라고 선언하며 미국으로부터는 군사적•재정적 지원을 받았고, 공산주의 국가들과는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서커스 외교를 펼쳤다. 하지만 1960년대 중엽부터 경제성장률이 하강곡선을 달리기 시작하며 침체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시아누크에 대한 반발이 점점 나오기 시작했지만 그는 반발 세력들을 탄압하여 반대 세력들은 소리소문없이 사라져버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적 탄압 때문인지 몰라도 겉으론 평화가 지속되다 보니 이때를 그리워하는 캄보디아인들이 현재까지도 매우 많으며, 이러한 그리움은 시아누크가 훗날 다시 캄보디아의 왕이 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사실 경제가 하락세에 접어들었다고 해도 시아누크 시절의 캄보디아 국민소득 수준은 태국과 비슷했는데 캄보디아가 20년 넘는 기간 동안 폭정과 내전으로 초토화되는 동안 태국과 인도네시아는 성장하다보니 그에 대한 아쉬움이 많이 남은것이다. 그리고 그 때에는 캄보디아 영화, 음악이 타 동남아 국가들에서도 유행하고 홍콩에까지 퍼질 정도로 문화적으로 융성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 마오쩌둥, 김일성 등과 친분을 맺었는데 이 인연으로 북한에서 망명생활을 했고, 2011년 김정일이 죽었을 당시에 캄보디아는 대규모 조문단을 보냈다. 그러던 중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으로부터 받던 지원을 거부하고, 중국의 편을 들었는데 이는 베트남을 견제하려는 목표였다. 그러나 시아누크는 국내에서는 암담한 경제상황에 분노한 공산주의자들의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해서 공산주의자들의 반발을 샀으며, 1969년에는 다시 미국과의 외교를 재개하자 공산주의자들은 시아누크에게 등을 돌려버렸다. 문제는 이런 박쥐와도 같은 시아누크의 행보를 미국도 믿지 못했고, 결국 미국에게도 버림받게 된다. 결국 60년대 이후 베트남 전쟁이 더욱 치열해지자 북베트남은 캄보디아 영내를 병참수송로('호치민 루트')로 활용했고, 이에 골치가 아팠던 미국은 론 놀 장군을 사주해 미국과 베트남 전쟁에 비협조적인 시아누크를 축출하는 쿠데타를 일으키게 만들어서 시아누크는 왕위에서 쫒겨나게 된다.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머물다가 축출당한 시아누크는 베이징으로 망명했고, 라디오를 통해 론 놀의 친미 정권과 투쟁하라는 방송을 내보내며 투쟁을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탄압했던 공산세력인 폴 포트크메르 루주의 명목상 지도자가 되어, 1975년 론 놀 친미정권 타도에 큰 힘이 된다. 크메르 루주 집권 뒤에 국가주석으로 복귀하게 되나 실권은 폴 포트에게 있었고, 결국 1년만에 사임하고 사실상 가택연금 상태에 처했다. 자신의 아내 무니니엇와 함께 왕궁에 연금된 시아누크는 처형당할 뻔했으나 저우언라이의 개입으로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그의 자녀 5명과 손자·손녀 14명은 구하지 못했고, 이들 19명은 지금까지 행방불명 상태다.[6] 다행히 현 국왕인 노로돔 시아모니 등은 고분고분하게 크메르 루주의 정책에 따르는 척 하면서 중국에게도 신변보장을 요청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또 그는 수백만 명을 대학살한 크메르 루주폭정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 절망한 나머지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는 나이 70살이 넘어간 이후 '내가 불교 신자만 아니었다면 조국의 절망적인 상황을 비관한 나머지 다시 자살을 시도했을 것'이라고 회상했다고.

1979년 12월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캄보디아-베트남 전쟁이 발발했고, 17일만에 프놈펜을 점령한 베트남은 캄보디아에 괴뢰정권인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을 세웠다. 크메르 루주는 산속으로 도망쳤으며 왕가 역시 유폐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시아누크는 크메르 루주와의 관계를 끊지는 않았다. 캄보디아가 베트남의 식민지 형태처럼 될 것을 우려한 그는 베이징을 거점으로 하여, 국제 사회를 상대로 활발한 외교활동을 펴는 한편 아들 라나리드와 '민족통일전선'(FUNCINPEC)을 결성하여 친베트남 괴뢰정권에 맞섰다. 이러한 12년 동안의 외교활동으로 캄보디아는 1989년에 베트남으로부터 독립된 뒤 캄보디아국이 새로 세워짐에 따라 크메르 루주와 전 수상 손 산이 이끈 반공성향 정당 '크메르 인민해방전선'(KPNLF)과 새 정부 구성을 논의했고, 유엔 중재로 1991년 종전 협상을 맺게 되었다. 종전 협상 2년 후에는 총선을 실시해 새로운 정부를 구성했고, 그는 캄보디아 국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귀국했다.

첫 총선에서 시아누크의 아들인 노로돔 라나리드 왕자가 이끄는 정당이 압승하자, 캄보디아의 또다른 독재자가 되는 훈 센은 내전이 일어날 수 있다며 시아누크를 협박했고, 이에 시아누크는 굴복하여 아들에게 공동수상제를 설득해 훈센에게 사실상 권력을 이양하고, 자신이 다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1997년 7월 제2수상인 훈 센이 쿠데타를 일으켜 시아누크의 아들인 라나리드를 축출했다. 축출된 라나리드는 국외로 도피하게 되었으며, 훈 센은 반역죄 명목으로 라나리드에게 35년형을 선고했고, 시아누크 일가는 완전히 실권을 잃어버렸다. 다만 1998년 시아누크가 사면령을 선포해서 라나리드는 돌아올 수 있었고, 그 해 열린 총선에서 다시 당선돼서 2006년까지 국회주석을 역임하긴 했다. 얼마 못가 다시 쫓겨났을 뿐.

실제로 시아누크의 측근들과 전문가들은 그가 자신의 왕궁에 죄수처럼 유폐돼 있다고 말했다. 왕은 정부가 파견한 감시인들에 둘러싸여 있고, 훈 센의 측근인 콩 솜 올 궁내부장이 이들을 총괄 지휘하며, 왕은 왕궁 담 밖으로 거의 나가지 못하고, 어쩌다 나갈 경우에도 감시인들이 반드시 동반하는 반면 언론의 접근은 차단되었다. 캄보디아 헌법은 왕에게 상당한 권한을 부여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 권한이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이후 캄보디아 정당들의 중재자로 활동하다가, 2004년부터 악화되기 시작한 건강 때문에 아들 노로돔 시아모니[7]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상왕이 되었고,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베이징평양과 같은 해외에서 보내다가 2012년 10월 15일 새벽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다. 중국 정부는 이례적으로 천안문 광장에 조기를 계양하는 등 그의 죽음을 애도했으며, 그가 사망하기 직전에 훈 센 총리를 비롯한 캄보디아 정치인들과 왕족들이 그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3. 기타

  • 그는 프랑스 와인음식 애호가로 그가 주선하는 연회는 당시 외교가의 대표적 사교장이었다. 그는 무려 6번씩이나 결혼을 했으며, 적어도 14명의 자식을 두었고[8] 색소폰 연주를 잘 했으며, 작곡가이자 영화제작자 그리고 영화감독이라는 화려한 경력을 가지기도 했다
  • 한때는 자신의 사치스러운 생활에 대해서 “캄보디아인들은 나를 포함해 모두 버릇없는 자식들이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 시아누크는 총선 때에도 후보자들에게 '나의 이름을 팔지 말라'고 직접 당부했다.
  • 시아누크는 김일성을 만나기 위해 자주 북한방북하였고, 그와 의형제까지 맺은 사이였다. 김일성은 그에게 섬 하나를 선물했으며 죽기 얼마전까지도 휴가를 지내러 북한에 방문했다.
  • 김정일하고도 에피소드가 있는데 북한에서 봉건왕조를 농민의 힘으로 타도하는 사회주의 영화를 만들어서 캄보디아에 선물한 적이 있다. 시아누크가 이를 보고 노발대발해서 왕인 자신을 타도하라고 선동하는 이런 영화를 만든게 아니냐고 해서 놀란 북한측에서 싹싹 빌며 사과를 했다고 한다. 이는 김정일이 신상옥 감독을 납치해서 영화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할 때 녹취록에 나온 내용이다.김정일 녹취록 이런 일이 있었지만 김일성-김정일과 시아누크는 매우 친하게 지냈다.
  • 고영환에 따르면 김정일이 시아누크에게 기쁨조 공연을 보여준 적 있는데 시아누크가 보기에도 상당히 낮 뜨거운 공연이었던지라 공연이 끝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시아누크가 엄청나게 불쾌해 하며 통역을 맡았던 고영환을 상대로 대체 자신에게 이런 걸 보여준 의도가 뭐냐고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고영환이 진땀을 빼며 시아누크를 말리는데도 시아누크가 화를 삭히지 못하자 고영환이 안 되겠다 싶어 당신은 지금 도청을 당하고 있다는 의미로 위를 가리키며 손가락질을 하자 시아누크가 바로 알아듣고 조용해졌다고 한다.
  • 시아누크의 왕후 및 자녀들은 다음과 같다.[9]
구분 성명 모친 출생년도 사망·실종년도 사망·실종원인
공주 Buppha Devi Phat Kanhol (첫 왕후) 1943년 출생 2019년 사망 .
왕자 Yuvaneath Sisowath Pongsanmoni(둘째 왕후) 1943년 출생 2021년 사망 .
왕자 Ranariddh Phat Kanhol (첫 왕후) 1944년 출생 2021년 사망 교통사고 후유증(관련 기사)
왕자 Ravivong Sisowath Pongsanmoni(둘째 왕후) 1944년 출생 1973년 사망 말라리아
왕자 Chakrapong[10] Sisowath Pongsanmoni(둘째 왕후) 1945년 출생 . .
왕자 Naradipo Sisowath Monikessan(셋째 왕후) 1946년 출생 1976년 실종 크메르 루주 치하
공주 Sorya Roeuangsy Sisowath Pongsanmoni(둘째 왕후) 1947년 출생 1976년 실종 크메르 루주 치하
공주 Kantha Bopha Sisowath Pongsanmoni(둘째 왕후) 1948년 출생 1952년 사망 백혈병
공주 Khemanourak Sisowath Pongsanmoni(둘째 왕후) 1949년 출생 1976년 실종 크메르 루주 치하
공주 Botum Bopha Sisowath Pongsanmoni(둘째 왕후) 1951년 출생 1976년 실종 크메르 루주 치하
공주 Sujata Mam Manivan Phanivong(다섯째 왕후) 1953년 출생 1976년 실종 크메르 루주 치하
왕자 Sihamoni Monique Izzi(여섯째 왕후) 1953년 출생 . .
왕자 Narindrapong Monique Izzi(여섯째 왕후) 1954년 출생 2003년 사망 심장마비
공주 Arunrasmy Mam Manivan Phanivong(다섯째 왕후) 1955년 출생 . .
  • 한국에서는 시한욱이나 시하누크로 읽히기도 한다.
  • 캄보디아에서는 그를 기리는 시아누크빌이라는 도시가 있다. 별거없이 시아누크+ ~ville의 합성어다. 역시 이 도시이름도 간혹 한국인들이 시한욱빌이나 시하누크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도시에 시아누크빌 국제공항이 있다. 시아누크빌 도시 자체는 2010년만 해도 비교적 빈티지한 캄보디아 어촌의 정취를 느낄수 있던 해안도시였으나, 중국 자본의 개발로 인해 2020년대에는 크게 바뀌었다. 상세는 중국-캄보디아 관계일대일로 문서 참조.

4.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45 - 1955
상쿰 1955 - 1970

1981 - 1991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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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PA 기준 [nɔroːɗɑm səjhanuʔ\][2] 전임 왕인 외할아버지 시소와스 모니봉이 부계로 육촌 재종조부(할아버지의 사촌)였다.[3]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캄월혼혈인이다.[4] 55년 총선에서 상쿰은 91석 의석 전체를 차지했다. 훗날 시아누크는 이 선거에서 91개 선거구 중 39개 선거구에서 야당이 승리했었다고 언급했다.[5] 의례적인 군주 역할은 모친 시소와스 코사막에게 맡겼다.[6] 당연히 시아누크 전 국왕은 크메르 루주가 이들을 학살했다고 확신하고 있으며, 이원복의 학습만화 《가로세로 세계사》 2권에선 처형으로 기정사실화했다.[7] នរោត្តម សីហមុនី, Norodom Sihamoni, 1953년 5월 14일 ~[8] 이 숫자보다 더 많은 자식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9] 가장 오래 함께한 왕후는 마지막 여섯째 왕후 Monique Izzi로, 1990년대 이후에는 Monineath로 개명했다. 넷째 왕비 Thavet Norleak와의 사이에서는 자녀가 없었고, Sisowath Monikessan(셋째 왕후)은 출산 중 사망했으며, 그 외 왕비들과는 이혼했다.[10] 이 사람의 여섯째 딸인 노로돔 보파리 공주의 둘째 딸 노로돔 제나(제나 노로돔)(2012년 출생)가 캄보디아 현지 K-POP 소속사에 들어가 연습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