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2-05 21:24:20

노로돔 시아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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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노로돔 왕조 제2대 국왕
노로돔 시아누크[1]
នរោត្តម សីហនុ
Norodom Sihanouk
파일:xst5tt7b691b1.jpg
출생 1922년 10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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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놈펜[2]
사망 2012년 10월 15일 (향년 8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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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재위기간 캄보디아 국왕
1941년 4월 24일 ~ 1955년 3월 2일
캄보디아 국가원수 (사실상 복위)
1960년 6월 20일 ~ 1970년 3월 18일
민주 캄푸치아 초대 국가상임위원회 주석
1975년 4월 17일 ~ 1976년 4월 2일
캄보디아 국왕 (복위)
1993년 10월 24일 ~ 2004년 10월 7일
서명 파일:노로돔 시아누크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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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노로돔 수라마리트
어머니 시소왓 코사막
배우자 Mam Manivan Phanivong (1949년 ~ 1952년)
Norodom Thavet Norleak (1946년 ~ 1949년)
Sisowath Monikessan (1944년 ~ 1946년)
Sisowath Pongsanmoni (1942년 ~ 1951년)
팻 칸홀 (1940년 ~ 1946년)
노로돔 모니니엇 (1952년 ~ 2012년)
학력 소뮈르 기병학교 }}}}}}}}}

1. 개요2. 생애3. 기타4. 가족관계5. 가족들
5.1. 부인5.2. 자녀
6. 소속 정당7. 둘러보기

1. 개요

"캄보디아는 과거 모든 침략에 저항했습니다. 저항은 캄보디아 인민의 전통이었습니다. 캄보디아인은 항상 싸워왔습니다."
"비극의 주인공은 나 시아누크가 아니라 캄보디아 인민이다."[3]
캄보디아의 전 국왕. 현지에서는 "아버지 왕"(សម្តេចឪ, [sɑmɗac ʔɨw])이라고도 불렸다.

20세기 이후 국왕임을 감안하더라도 사실상 전제 정치를 휘두른 인물이지만[4], 폐위 후 론 놀의 독재와 캄보디아 전역을 피로 물들이며 대학살을 펼친 폴 포트의 폭정으로 인해 그의 악행은 다소 묻힌 감이 있다. 그의 폐위 이후 캄보디아가 정권이 여러 번 갈리고 내전과 킬링필드로 혼란에 빠지자 많은 캄보디아인들이 그나마 평화롭고 안정적이었던 시아누크의 치세를 그리워하였고 냉전 종식 이후 1993년 10월 캄보디아 국왕 자리에 복귀했다.

2. 생애

파일:bio__norodom-sihanouk__mugshot--archive.jpg
젊은 시절의 시아누크

시아누크는 1922년 노로돔 가문에서 태어났다. 원래 그는 왕이 되기에는 까마득할 정도로 혈통이 멀었던 사람이었지만,[5] 태평양 전쟁으로 일본 제국프랑스령 캄보디아를 포함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전부 차지해 버리자 시아누크의 운명은 달라졌다. 실질적으로 캄보디아를 통치해 온 주체인 비시 프랑스[6] 하루 아침에 일본과 인도차이나에서 두집살림을 하게 되었고, 이에 1941년 시아누크를 꼭두각시 용도로 캄보디아의 왕으로 만들었다. 즉, 외할아버지가 사망하자 아버지를 대신해 18살의 나이에 왕이 된 것이다. 즉위 이후 시아누크는 여러 명의 부인과 결혼했고, 그들 사이에서 13명의 아들을 낳으며 놀고 먹는 생활로 일관했다. 그래서 그는 프랑스의 뜻대로 얼굴마담 역할을 충실히 해낼 듯 했지만 이 왕의 즉위가 훗날 캄보디아 역사를 피로 물들일 서곡이라는 것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이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일본 제국이 캄보디아를 점령했을 때에는 일제의 종용에 따라 재빨리 캄보디아의 독립을 선포했으나[7] 일본이 캄보디아에서 물러나자 프랑스 식민당국의 귀환을 환영했다. 1946년에 민족주의 성향 정당인 '캄보디아 민주당'이 67석 중 50석을 차지하자 그는 프랑스와 결탁해 선거결과를 무효화시켰고, 민족의회를 무력화시켰다.[8] 그러자 선응옥타인[9]의 민족주의 무장단체 '크메르인민자유위원회'(KNLC)와 좌익 혁명단체 '크메르인민혁명당'(KPRP)으로부터 반발을 사 위기에 봉착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1953년 1월에 계엄령을 발동시켜 의회를 해산하는 한편,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베트민에게 지고 있던 프랑스 제4공화국을 설득해 1953년 11월 베트남과 달리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캄보디아의 독립을 얻어내자 캄보디아 국민은 그런 그를 '캄보디아의 혼'이라 부르며 칭송했다.

독립 후 1955년 3월 아버지 노로돔 수라마리트에게 양위하고 잠시 왕좌에서 물러난 그는 당시 캄보디아의 우익 세력들을 통합함과 동시에 일부 사회주의 세력을 포섭한 관제정당인 '상쿰'(Sangkum)[10]을 창설했으며, 그 해 실시한 초대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어[11] 일당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1당 통치 정부에서 섭정, 수상, 외교부장을 꿰차며 이른바 자애로운 전제군주로 군림했다. 이렇게 독재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한 시아누크는 언론과 지식인들에게는 재갈을 물렸고, 독재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눈엣가시였던 캄보디아 민주당을 1957년 강제 해산시켰고, 포퓰리즘 정치를 자행하며 자신이 캄보디아를 구원할 위대한 지도자라고 추켜세우면서 언론에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하게 했다. 시아누크의 2중대에 불과했던 상쿰은 그가 쫓겨나기 전까지 치른 4번의 선거에서 한 석도 야당에 허용하지 않았다. 1960년 왕이던 그의 아버지가 승하하자 그는 '캄보디아 국가원수'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다시 왕좌에 복귀한다.[12]

또한 냉전 상황에서 제3세계 비동맹운동을 펼치며, 캄보디아를 미국이나 소련의 편도 아니라고 선언하며 미국으로부터는 군사적•재정적 지원을 받았고, 공산주의 국가들과는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서커스 외교를 펼쳤다. 흔히 이 때의 시아누크식 정치를 ‘불교 사회주의’로 칭한다. 하지만 1960년대 중반부터 경제성장률이 하향곡선을 달리며 그의 철권통치에도 금이 가기 시작한다. 그래서 시아누크에 대한 반발의 목소리가 터져나왔지만 그는 반대세력을 소리소문없이 제거하는 것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정적 탄압과 언론에 재갈을 물려버린 덕택에 겉으론 평화가 지속되다 보니 이때를 그리워하는 캄보디아인들이 현재까지도 적지 않으며, 이러한 그리움은 시아누크가 훗날 다시 캄보디아의 왕이 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사실 경제가 하락세에 접어들었다고 해도 시아누크 시절의 캄보디아 국민소득 수준은 태국과 비슷했는데 캄보디아가 20년 넘는 기간 동안 폭정과 내전으로 초토화되는 동안 태국과 인도네시아는 성장하다보니 그에 대한 아쉬움이 많이 남은 것이다. 그리고 그 때에는 문화적 전성기를 구가해 캄보디아 영화, 음악이 타 동남아 국가들에서도 유행하고 홍콩에까지 퍼질 정도로 문화적으로 융성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아누크의 전제정치는 론 놀의 쿠데타와 크메르루주의 학살, 베트남에 의한 국토 유린을 불러온 도화선이 되었다. 결국 캄보디아 현대사의 비극은 시아누크에게 첫 책임이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13]

한편 이 시기 마오쩌둥, 김일성 등과 친분을 맺었는데 이 인연으로 북한에서 망명 생활을 했고, 2011년 김정일이 죽었을 당시에 캄보디아는 대규모 조문단을 보냈다. 그러던 중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으로부터 받던 지원을 거부하고, 중국의 편을 들었는데 이는 베트남을 견제하려는 목표였다. 그러나 시아누크는 국내에서는 암담한 경제 상황에 분노한 공산주의자들의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해서 공산주의자들의 반발을 샀으며, 1969년에는 다시 미국과의 외교를 재개하자 공산주의자들은 시아누크에게 등을 돌려버렸다. 문제는 이런 박쥐와도 같은 시아누크의 행보를 미국도 믿지 못했고, 결국 미국에게도 버림받게 된다. 결국 60년대 이후 베트남 전쟁이 더욱 치열해지자 북베트남은 캄보디아 영내를 병참수송로 '호치민 루트'로 활용했고, 이에 골치가 아팠던 미국은 론 놀 장군을 사주해 미국과 베트남 전쟁에 비협조적인 시아누크를 축출하는 1970년 캄보디아 쿠데타를 일으키게 만들어서 시아누크는 왕위에서 쫒겨나고 캄보디아에는 공화정부가 들어서게 된다.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머물다가 축출당한 시아누크는 베이징으로 망명했고, 라디오를 통해 론 놀의 친미 정권과 투쟁하라는 방송을 내보내며 투쟁을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탄압했던 공산세력인 폴 포트크메르 루주의 명목상 지도자가 되어, 1975년 론 놀 친미정권 타도에 큰 힘이 된다. 크메르 루주 집권 뒤에 국가주석으로 복귀하게 되나 실권은 폴 포트에게 있었고, 결국 1년 만에 사임하고 사실상 가택연금 상태에 처했다. 자신의 아내 무니니엇와 함께 왕궁에 연금된 시아누크는 처형당할 뻔했으나 저우언라이의 개입으로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그의 자녀 5명과 손자, 손녀 14명은 구하지 못했고, 이들 19명은 지금까지 행방불명 상태이다.[14] 다행히 노로돔 라나리드는 시아누크와 함께 망명한 상태였고, 현 국왕인 노로돔 시아모니 등은 고분고분하게 크메르 루주의 정책에 따르는 척 하면서 중국에게도 신변 보장을 요청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도피 후 수백만 명을 대학살한 크메르 루주폭정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 절망한 나머지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는 나이 70살이 넘어간 이후 '내가 불교 신자만 아니었다면 조국의 절망적인 상황을 비관한 나머지 다시 자살을 시도했을 것'이라고 회상했다고.

1979년 12월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캄보디아-베트남 전쟁이 발발했고, 17일만에 프놈펜을 점령한 베트남은 캄보디아에 괴뢰정권인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을 세웠다. 크메르 루주는 산 속으로 도망쳤으며 왕가 역시 유폐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시아누크는 크메르 루주와의 관계를 끊지는 않았다. 캄보디아가 베트남의 식민지 형태처럼 될 것을 우려한 그는 베이징을 거점으로 하여, 국제 사회를 상대로 활발한 외교활동을 펴는 한편 아들 라나리드와 '민족통일전선'(FUNCINPEC)을 결성하여 친베트남 괴뢰정권에 맞섰다. 또한 원수와도 같은 크메르 루주와도 다시 손를 잡아 민주 캄푸치아 연립정부를 수립하고, 베트남의 세력 확장을 경계한 미국, 중국, 태국의 지원을 받아내며 여기에 추가로 북한, 루마니아의 도움도 받는데 성공한다.[15]

이러한 12년 동안의 외교 활동으로 캄보디아는 1989년에 베트남으로부터 독립된 뒤 캄보디아국이 새로 세워짐에 따라 크메르 루주와 전 수상 손 산이 이끈 반공성향 정당 '크메르 인민해방전선'(KPNLF)과 새 정부 구성을 논의했고, 유엔 중재로 1991년 파리에서 종전 협상을 맺게 되었다. 종전 협상 2년 후에는 총선을 실시해 새로운 정부를 구성했고, 그는 캄보디아 국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귀국했다.
파일:51426193_10.jpg
귀국 이후 환영식에서. 옆에 선글라스 낀 남자는 총리 훈 센이다.

첫 총선에서 시아누크의 아들인 노로돔 라나리드 왕자가 이끄는 푼신펙이 압승하자, 캄보디아의 또다른 독재자가 되는 훈 센은 내전이 일어날 수 있다며 시아누크를 협박했고, 이에 시아누크는 굴복하여 아들에게 공동수상제를 설득해 훈센에게 사실상 권력을 이양하고, 자신이 다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1997년 7월 제2수상인 훈 센과 캄보디아 인민당1997년 캄보디아 쿠데타를 일으켜 시아누크의 아들인 라나리드를 축출했다. 축출된 라나리드는 국외로 도피하게 되었으며, 훈 센은 반역죄 명목으로 라나리드에게 35년 형을 선고했고, 시아누크 일가는 완전히 실권을 잃어버렸다. 다만 1998년 시아누크가 사면령을 선포해서 라나리드는 돌아올 수 있었고, 그 해 열린 총선에서 다시 당선돼서 2006년까지 국회주석을 역임하긴 했다. 얼마 못 가 다시 쫓겨났을 뿐.

실제로 시아누크의 측근들과 전문가들은 그가 자신의 왕궁에 죄수처럼 유폐되어 있다고 말했다. 왕은 정부가 파견한 감시인들에 둘러싸여 있고, 훈 센의 측근인 콩 솜 올 궁내부장이 이들을 총괄 지휘하며, 왕은 왕궁 담 밖으로 거의 나가지 못하고, 어쩌다 나갈 경우에도 감시인들이 반드시 동반하는 반면 언론의 접근은 차단되었다. 캄보디아 헌법은 왕에게 상당한 권한을 부여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 권한이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이후 캄보디아 정당들의 중재자로 활동하다가, 2004년부터 악화되기 시작한 건강 때문에 아들 노로돔 시아모니[16]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상왕이 되었고, 말년을 자신의 우방이던 중국북한을 오가면서 보내다가 2012년 10월 15일 새벽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다. 중국 정부는 이례적으로 천안문 광장에 조기를 계양하는 등 그의 죽음을 애도했으며, 그가 사망하기 직전에 훈 센 총리를 비롯한 캄보디아 정치인들과 왕족들이 그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3. 기타

  • 그는 프랑스 와인음식 애호가로 그가 주선하는 연회는 당시 외교가의 대표적 사교장이었다. 그는 무려 6번씩이나 결혼을 했으며, 적어도 14명의 자식을 두었고[17] 색소폰 연주를 잘 했으며, 작곡가이자 영화 제작자 그리고 영화 감독이라는 화려한 경력을 가지기도 했다.[18]
  • 한때는 자신의 사치스러운 생활에 대해서 “캄보디아인들은 나를 포함해 모두 버릇없는 자식들이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 시아누크는 총선 때에도 후보자들에게 '나의 이름을 팔지 말라'고 직접 당부했다.
  • 시아누크는 김일성을 만나기 위해 자주 북한방북하였고, 그와 의형제까지 맺은 사이였다. 김일성은 그에게 섬 하나와 장수원이라는 평양 소재 별궁을 선물했으며 죽기 얼마 전까지도 휴가를 지내러 북한에 방문했다. 둘은 김일성이 죽을 때까지 친한 관계를 유지했음에도 한편으로 시아누크는 "김일성은 나를 도와주는 척한다. 그러나 사실 그는 중국과 폴 포트 정권 편이다. 그는 캄보디아의 공산화를 원한다. 그러나 나는 우리 국민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차갑고 잔혹한 사람" 등 김일성의 진의를 의심하는 발언을 남기기도 했다.#[19] 물론 시아누크의 속뜻과는 별개로 시아누크는 죽을 때까지 북한을 오가며 지냈고, 김일성도 시아누크가 민주 캄푸치아 연립정부에 참여하자 적극 도와주었으며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과도 관계를 유지했다.
  • 김정일하고도 에피소드가 있는데 북한에서 봉건 왕조를 농민의 힘으로 타도하는 사회주의 영화를 만들어서 캄보디아에 선물한 적이 있다. 시아누크가 이를 보고 노발대발해서 왕인 자신을 타도하라고 선동하는 이런 영화를 만든 게 아니냐고 해서 놀란 북한 측에서 싹싹 빌며 사과를 했다고 한다. 이는 김정일이 신상옥 감독을 납치해서 영화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할 때 녹취록에 나온 내용이다.김정일 녹취록 이런 일이 있었지만 김일성-김정일과 시아누크는 매우 친하게 지냈다.
  • 고영환에 따르면 김정일이 시아누크에게 기쁨조 공연을 보여준 적이 있는데 시아누크가 보기에도 상당히 낯 뜨거운 공연이었던 지라 공연이 끝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시아누크가 엄청나게 불쾌해 하며 통역을 맡았던 고영환[20]을 상대로 대체 자신에게 이런 걸 보여준 의도가 뭐냐고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고영환이 진땀을 빼며 시아누크를 말리는데도 시아누크가 화를 삭히지 못하자 고영환이 안 되겠다 싶어 당신은 지금 도청을 당하고 있다는 의미로 위를 가리키며 손가락질을 하자 시아누크가 바로 알아듣고 조용해졌다고 한다.

4. 가족관계

5. 가족들

  • 시아누크의 왕비 및 자녀들은 다음과 같다.[21]

5.1. 부인

결혼 생활을 시작한 순서로 나열하며, 이 중 정비에 해당하는 사람은 왕족인 노로돔 타벳 놀리악과 노로돔 모니네아트이다.
  • 1. 팟 까놀(1920년-1970년) (1942년 결혼, 1946년 이혼) 현 국왕의 이복형인 노로돔 라나리드의 어머니이며 왕립무용수이다.
  • 2. 시소왓 퐁산모니(1929년-1974년) (1942 결혼, 1951년 이혼) 외가가 되는 시소왓 쪽의 왕족이다. 겨우 13살 때 그의 배우자가 되었다. HRH(His/Her Royal Highness)의 칭호를 받은 왕족이므로 근친혼일 것으로 추정된다. 14살의 나이에 낳은 노로돔 유바네아트 왕자를 시작으로 이혼하는 1951년까지 총 7명의 자녀를 낳았다.
  • 3. 시소왓 모니께산(1929년-1946년) (1944 결혼, 1946년 사망) 역시나 왕가 출신으로 HRH(His/Her Royal Highness)칭호를 받은 왕족이다. 결혼 전의 이름은 시소왓 나라낙샤 무니께사라, 17살의 나이로 시아누크 나라디포 왕자를 낳고, 사망했다.
  • 4. 맘 마니반 파니봉(1934년-1975년) (1949 결혼 - 1955 이혼) 라오스 출신으로 1949년 캄보디아에서 결혼했다. 두 명의 공주를 낳았고 1975년 크메르 루주 정권에 살해당했다.
  • 5. 노로돔 타벳 놀리악(1927년-2017년) (1946 결혼, 1968 이혼) 첫 번째 정실부인으로 외사촌이다. 그녀가 외사촌이면, 이모의 딸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 전에 결혼한 부인들은 왕족 출신이 아니라 왕족 출신인 그녀가 순서로는 다섯 번째이지만 제 1비에 해당하는 지위를 가졌다. 결혼 전 이름은 데비사 나라락슈미이다. 결혼은 1946년에 했으며, 정식 부인의 지위가 1955년에 내려졌다. 하지만 자녀가 없고 그녀에 이어 제 2비의 지위가 내려진 모니네아트가 왕의 총애를 받는 부인이라 그녀는 그다지 애정을 받은 것 같지는 않다.
  • 6. 노로돔 모니네아트(1936년- , 현 89세) (1955 결혼, 2012 사별) 현 국왕 노로돔 시아모니의 어머니이자 가장 오래 산 부인, 원래 이름은 모니크 이지로 프랑스 혼혈이다. 아버지가 프랑스인, 어머니가 캄보디아인이다. 시어머니이자 왕위 계승권이 있던 왕비 시소왓 코사막과 알력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3년 캄보디아 왕정복고로 그녀를 왕비로 삼았고 그녀의 아들이 왕까지 되어 파란만장한 후궁들 중 가장 행복(?)한 여인이다. 다만 아들은 후계가 없어 후손은 단절된다.

5.2. 자녀

구분 성명 모친 출생년도 사망·실종년도 사망·실종원인
공주 Buppha Devi Phat Kanhol (첫 왕후) 1943년 출생 2019년 사망 .
왕자 Yuvaneath Sisowath Pongsanmoni(둘째 왕후) 1943년 출생 2021년 사망 .
왕자 Ranariddh Phat Kanhol (첫 왕비) 1944년 출생 2021년 사망 교통사고 후유증(관련 기사)
왕자 Ravivong Sisowath Pongsanmoni(둘째 왕비) 1944년 출생 1973년 사망 말라리아
왕자 Chakrapong[22] Sisowath Pongsanmoni(둘째 왕비) 1945년 출생 . .
왕자 Naradipo Sisowath Monikessan(셋째 왕비) 1946년 출생 1976년 실종 크메르 루주 치하
공주 Sorya Roeuangsy Sisowath Pongsanmoni(둘째 왕비) 1947년 출생 1976년 실종 크메르 루주 치하
공주 Kantha Bopha Sisowath Pongsanmoni(둘째 왕비) 1948년 출생 1952년 사망 백혈병
공주 Khemanourak Sisowath Pongsanmoni(둘째 왕비) 1949년 출생 1976년 실종 크메르 루주 치하
공주 Botum Bopha Sisowath Pongsanmoni(둘째 왕비) 1951년 출생 1976년 실종 크메르 루주 치하
공주 Sujata Mam Manivan Phanivong(다섯째 왕비) 1953년 출생 1976년 실종 크메르 루주 치하
왕자 Sihamoni Monique Izzi(여섯째 왕비) 1953년 출생 . .
왕자 Narindrapong Monique Izzi(여섯째 왕비) 1954년 출생 2003년 사망 심장마비
공주 Arunrasmy Mam Manivan Phanivong(다섯째 왕비) 1955년 출생 . .
  • 한국에서는 시한욱이나 시하누크로 읽히기도 한다.
  • 캄보디아에서는 그를 기리는 시아누크빌이라는 도시가 있다. 별거없이 시아누크+ ~ville의 합성어다. 역시 이 도시이름도 간혹 한국인들이 시한욱빌이나 시하누크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도시에 시아누크빌 국제공항이 있다. 시아누크빌 도시 자체는 2010년만 해도 비교적 빈티지한 캄보디아 어촌의 정취를 느낄수 있던 해안 도시였으나, 중국 자본의 개발로 인해 2020년대에는 크게 바뀌었으며 결국 무분별한 중국 자본의 유입으로 중반 들어 캄보디아 범죄단지의 온상으로 전락했다. 상세는 중국-캄보디아 관계일대일로 문서 참조.

6.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45 - 1955
상쿰 1955 - 1970

1981 - 1991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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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PA 기준 [nɔroːɗɑm səjhanuʔ\][2]캄보디아 프놈펜[3] 복위 이후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남긴 말. 그의 회한처럼 캄보디아 국민들의 생은 시아누크가 겪은 아픔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끔찍한 역사의 연속이었다.[4] 사실 시아누크보다 더한 경우는 더 있다. 바로 중동의 왕정 국가들이다. 애초에 사우드 왕가, 레자 팔라비 등에 비하면 시아누크는 그저 애들 장난일 정도다.[5] 전임 왕인 외할아버지 시소왓 모니봉이 부계로 육촌 재종조부(할아버지의 사촌)였다.[6] 당시 펠릭스 에부에프랑스령 차드를 제외한 프랑스 식민제국 산하 대부분의 식민지가 프랑스 침공 이후 비시 프랑스를 지지하는 모양새를 보였다.[7] 물론 당시 일제의 동남아 괴뢰국이 대개 그렇듯 말이 독립이지 실상은 일제의 꼭두각시 정권이었다.[8] 캄보디아 민주당은 다시 치러진 1947년 선거와 1951년 선거에서도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며 승승장구한다.[9]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캄보디아와 베트남의 혼혈이다.[10] 해석하자면 '인민들의 사회주의 공동체‘라는 뜻.[11] 55년 총선에서 상쿰은 91석 의석 전체를 차지했다. 훗날 시아누크는 이 선거에서 91개 선거구 중 39개 선거구에서만 야당이 승리했었다고 언급했다. 부정선거였다는 소리.[12] 의례적인 군주 역할은 모친 시소왓 코사막에게 맡겼다.[13] 캄보디아 민주당을 해산하고 그가 구축한 일당 독재 체제는 뒤를 이은 론 놀과 크메르루주도 잘 써먹어서 1955년부터 1993년 총선 이전까지 캄보디아에 야당이란 존재하지 않았다.[14] 당연히 시아누크 전 국왕은 크메르 루주가 이들을 학살했다고 확신하고 있으며, 이원복은 학습만화에서 처형을 기정사실화했다.[15] 이 두 국가는 공산주의 국가였지만 소련과 사이가 소원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을 지원하는 소련과, 친소 성향 국가인 베트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16] នរោត្តម សីហមុនី, Norodom Sihamoni, 1953년 5월 14일 ~[17] 이 숫자보다 더 많은 자식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18] 직접 연기를 한 적도 있다. '보꼬르의 장미'에서는 일본군 대령 역을 맡아 주연으로 활약하기도 했다.[19] 실제로도 당시 북한이 베트남-캄보디아 전쟁에서 민주 캄푸치아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20] 해당 문서에 기재되어 있듯 프랑스어에 능통한 인물이다.[21] 가장 오래 함께한 왕비는 마지막 여섯째 왕비 Monique Izzi로, 1990년대 이후에는 Monineath로 개명했다. 넷째 왕비 Thavet Norleak와의 사이에서는 자녀가 없었고, Sisowath Monikessan(셋째 왕비)은 출산 중 사망했으며, 그 외 왕비들과는 이혼했다.[22] 이 사람의 여섯 번째 딸인 노로돔 보파리 공주의 둘째 딸 노로돔 제나(제나 노로돔)(2012년 출생)가 캄보디아 현지 K-POP 소속사에 들어가 연습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