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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이 계획한 대게르만국의 영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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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10월 말의 유럽 동부 전선을 제외하면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 |
1. 개요
레벤스라움(Lebensraum)[1] 또는 번역하여 생존권(生存圈), 생활권(生活圈), 삶터란 게르만족의 전통적인 팽창주의와 대독일주의를 토대로 나치 독일이 구체화한 영토 확장에 관한 이념과 그에 따른 정치적, 군사적 정책을 가리킨다.독일의 지정학자 프리드리히 라첼과 카를 하우스호퍼가 주장했고, 나치 독일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도 일찍이 저서 《나의 투쟁》에서 영토 확장 목표를 밝혔다. 히틀러가 총통이 된 후에는 1940년대까지 나치즘을 이루는 핵심 요소였으며, 독일 부흥을 명분으로 전쟁과 홀로코스트 등 민족 학살을 추진하는 기반 사상 중 하나로 작용했다.
2.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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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벤스라움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하우스호퍼 |
용어 '레벤스라움'은 독일어로 '생존(생활)을 위한 공간'이라는 뜻으로, 레알폴리틱(Realpolitik)[2], 안슐루스 같은 다른 독일사 용어처럼 따로 번역하지 않고 '레벤스라움'이라고 쓰는 경우가 많다. 일본에서는 '생존권' 또는 '생존권사상'이라고 번역하며 영미 학계에서는 거의 번역하지 않지만 굳이 번역하는 경우엔 'living space'로 번역한다. 동식물의 서식지를 나타낼 때도 종종 사용하는 단어로, 용어 자체에 사상이 담겨있지는 않다.
레벤스라움은 당시 영국의 지리학자이자 대륙세력 계열 지정학 이론의 대가였던 핼퍼드 매킨더의 '중심지'(heartland) 이론과도 유사한 개념이다.[3] 중심지 이론은 유라시아 대륙의 심장부를 차지하여 광활한 인구를 이주시키며 농지를 차지하고 동서남북 전 방향으로 세력을 팽창하는 데 유리한 전초기지를 확보한다는 발상이었다.
3. 역사
레벤스라움의 개념 자체는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히틀러 이전에도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 충분치 않다고 느꼈다. 이미 중세부터 신성 로마 제국과 튜튼 기사단의 동부로의 영토 확장과 함께 동방식민운동(Ostsiedlung)이 일어났으며[4], 프리드리히 라첼은 1901년에 지리학적 서식지를 인간과 사회에 영향을 주는 한 요인으로 묘사하기 위해 인문지리학 용어로서의 레벤스라움을 만들었다. 라첼은 인간과 사회가 기본적으로 지리적 상황에 영향을 받고 한 지역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사회는 자연히 국가 영역을 다른 영역으로 확장시키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이 당시에는 독일의 인구가 크게 늘어나고 있던 시대라서 인구 과잉을 해소하기 위해 넘쳐나는 독일인들을 이주시키기 위한 해외 식민지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아메리카로의 인구유출도 독일 제국 입장에서는 심각한 골칫덩어리로, 이 당시에 미국과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아메리카 국가들로 이주하는 독일인들이 많아서 국력누수 우려가 컸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독일 제국의 영토를 넓혀서 독일 제국의 국력도 확보하고 인구 유출 문제도 해결하자는 꿩먹고 알먹고식의 주장이기도 했다.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독일의 군국주의 선전가들은 라첼의 레벤스라움 개념을 생활권을 위한 인종적 투쟁의 개념으로 발전시켰고 다음 전쟁은 분명 독일의 인종적 우월성을 보호하기 위한 생물학적 필요가 충족되는 레벤스라움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후 베르사유 조약 체제에서는 카를 하우스호퍼와 그의 지정학 연구소가 레벤스라움 이론의 확립과 독일 민족주의에의 이용에 기여했다.
3.1. 제1차 세계 대전 9월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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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독일 1917년 독일의 침략 목표를 비난하기 위해 연합국에서 선전용으로 만들었다. |
소련의 폐허 위에 동방의 독일 제국을 세운다는 히틀러의 장기 목표는 단순히 추상적인 소원에서 발한 비전이 아니었다. 1918년에 세워진 동방의 영토에서, 이 목표는 확실한 출발점을 가졌던 것이다. 동방의 독일 제국은 비록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이미 현실이었다.
독일의 역사가 안드레아스 힐그루버(Andreas Hillgruber), 저서 <독일과 두 세계 대전(Germany and the Two World Wars)>에서
독일의 역사가 안드레아스 힐그루버(Andreas Hillgruber), 저서 <독일과 두 세계 대전(Germany and the Two World Wars)>에서
제1차 세계 대전이 막 시작된 1914년 9월 독일 제국 정부는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 당시 총리가 비밀리에 지지하던 "9월 계획"을 공식 전쟁 목표로 제출했고 그에 의해 전장의 승리를 거둔 뒤의 독일은 폴란드 서부 지역을 합병한 후 그곳에 독일계 개척자들을 보내고 리투아니아와 우크라이나를 식민지화하려고 했다.
1918년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유럽 러시아의 많은 영토가 독일에게 양도되었다. 독일인들은 당시 레벤스라움이 거의 이루어졌던 것으로 생각했지만 1918년 당시 최악에 빠진 서부 전선의 상황으로 인해 독일은 패전했다.
패전 후 독일인들은 제1차 세계 대전의 결과를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고 결국 히틀러의 제1차 세계 대전 유대인 음모론과 팽창주의 선동에 넘어가게 되었다.
3.2. 히틀러와 나치즘
우리의 농민 인구의 증가는 동방의 슬라브 노동 계급자 무더기가 들이닥치는 것에 대한 유일한 효과적 방어이다. 6백 년 전에도 그랬듯, 독일 농민의 운명은 슬라브 인종에 대항해 어머니 땅을 지키기 위한 투쟁을 통해 독일인들의 유산을 보존하고 늘려나가는 것이어야 한다.
하인리히 힘러
나치즘에서 레벤스라움이라는 곳은 히틀러의 말대로라면 피와 돈에 굶주린 사악한 유대인 패거리가 열등 인류(Untermensch/운터멘쉬)[5]인 슬라브족을 지배하는 동유럽을 말한다. 중부유럽의 장악이야 진작에 선결되어야 할 기본사양이다. 제3제국의 관점에서 중부유럽은 게르만 제1제국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하인리히 힘러
히틀러의 계획대로라면 유대-공산주의의 온상인 동유럽과 러시아를 쳐부수고 동유럽을 게르만 민족이 영원무궁히 발전할 수 있도록 곡창으로 개간한 뒤 슬라브족을 게르만 민족의 노예로 삼아 번창하는 천년제국을 세웠겠지만 히틀러는 소련과 양면전쟁까지 일으키고 패망했다. 서유럽 국가들은 나치의 사상으로는 좀 더 인종적으로 적합한 사람들이 사는 땅이었기 때문에 대놓고 그곳에 레벤스라움을 확보한다고 떠들지는 않았다. 장기적으로 보면 어쨌든 레벤스라움이 되었을 것이다.
나치 독일은 슬라브족을 게르만족에 동화시키기 위해 각종 국가판무관부 수립을 계획했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소련의 몇 지역을 제외하면 모두 수립되었다.
그리하여 바르바로사 작전 전에 회의로 소련 정복 목표로 아르한겔스크-아스트라한 선을 정하고 침공했다.
3.3. 게네랄플란 오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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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목록 | <colcolor=#000,#ddd> 세부 사항 | ||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 ,1904 ~ 1908, | 발생 위치 | ||
후기 오스만 인종 청소 | 아시리아인 대학살 ,1914 ~ 1924, | 발생 위치 | |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1915 ~ 1917, | 발생 위치 | ||
관련 인물 이스마일 엔베르 | |||
그리스인 대학살 ,1914 ~ 1922, | 발생 위치 | ||
관동대학살 ,1923, | 발생 위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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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 대학살 ,1937, | 발생 위치 | ||
롬인 말살 정책 ,1935 ~ 1945, | 발생 위치 | ||
파슬리 학살 ,1937, | 발생 위치 | ||
관련 인물 라파엘 트루히요 | |||
제2차 세계 대전 | 슬라브인 말살 정책 ,1939 ~ 1945, | 발생 위치 | |
홀로코스트 ⚖️ ,1941 ~ 1945, | 발생 위치 | ||
재판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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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나치당 | 친위대 | 국방군 | 게슈타포 | 무장친위대 | 아인자츠그루펜 | 질서경찰 | |||
수용소 틀:나치의 주요 절멸수용소 | 다하우 강제 수용소 | |||
크로아티아 홀로코스트 세르비아인 학살 ,1941 ~ 1945, | 발생 위치 | ||
관련 인물 안테 파벨리치 | 딘코 사키치 | 미로슬라프 필리포비치 | 알로이지예 빅토르 스테피나츠 | |||
관련 단체 우스타샤 | 우스타샤 민병대 | |||
수용소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 | |||
보슈냐크인 및 크로아티아인 학살 ,1941 ~ 1945, | 발생 위치 추축국 점령하 유고슬라비아 | ||
관련 인물 드라자 미하일로비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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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 타타르족 추방 ,1944 ~ 1948, | 발생 위치 | ||
관련 인물 이오시프 스탈린 | |||
체첸인 및 인구시인 추방 ,1944 ~ 1948, | 발생 위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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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 마야인 제노사이드 ,1960 ~ 1996, | 발생 위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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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촐리족과 랑고족 학살 ,1972 ~ 1978, | 발생 위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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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티모르 제노사이드 ,1975 ~ 1999, | 발생 위치 | ||
킬링필드 ⚖️ ,1975 ~ 1979, | 발생 위치 | ||
재판 ECCC | |||
관련 인물 폴 포트 | 키우 삼판 | 깡 겍 이우 | 누온 체아 | 이엥 사리 | 이엥 티릿 | |||
관련 단체 크메르 루주 | |||
수용소 뚜올쓸라엥 | |||
구쿠라훈디 학살 ,1983 ~ 1987, | 발생 위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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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팔 학살 ,1986 ~ 1989, | 발생 위치 | ||
재판 안팔 학살/재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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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크 학살 ,1987 ~ 1989, | 발생 위치 | ||
관련 인물 시아드 바레 | |||
보스니아 제노사이드 ⚖️ ,1992 ~ 1995, | 발생 위치 | ||
재판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 | |||
관련 인물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 라도반 카라지치 | 라트코 믈라디치 | 젤리코 라즈나토비치 | 니콜라 요르기치 | 프라뇨 투지만 | 슬로보단 프랄략 |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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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 사건 스레브레니차 학살 | 프리예도르 인종 청소 | 포차 학살 | |||
르완다 제노사이드 ⚖️ ,1994, | 발생 위치 | ||
재판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 | |||
관련 인물 르완다 제노사이드 가해자 목록 |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에 기소된 인물들 목록 | |||
관련 단체 후투족 민병대 (인테라하므웨 | Impuzamugambi) | |||
제1차 콩고 전쟁 중 후투족 학살 ,1996 ~ 1997, | 발생 위치 | ||
밤부티 피그미족 학살 ,2002 ~ 2003, | 발생 위치 | ||
다르푸르 학살 ,2003, | 발생 위치 | ||
관련 인물 오마르 알바시르 | |||
야지디 학살 ,2014 ~ 2019, | 발생 위치 | ||
관련 단체 ISIL | |||
중국의 위구르인 탄압 ,2014 ~ , | 발생 위치 | ||
미얀마의 로힝야 탄압 ,2016 ~ , | 발생 위치 | ||
[!] 논란의 여지가 있음. | }}}}}}}}} |
전쟁 중의 독일 정책인 게네랄플란 오스트(Generalplan Ost)[6]는 '열등한' 슬라브인들을 사살, 추방, 노예화하고 레벤스라움을 이루기 위해 독일계 인구로 동유럽을 채우는 것이었다. 도시 인구는 기아를 통해 말살될 예정이었으며 슬라브계보다 발트계가 주가 된 발트 3국(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주민들에겐 나치즘을 강제로 주입하려고 했다. 즉, 전후 이를 실행할 시 대략 1억명 정도가 학살될 예정이었다고 추정된다. 나치가 패망하면서 유대인 대학살인 홀로코스트에서 끝났지만 나치의 점령은 현지의 사람들에게 나치의 가혹한 통치를 통해 현실화되었고 처음 나치가 들어왔을 때만 해도 호의를 가지고 해방자처럼 대하던 소수민족이나 소련에 불만을 가졌던 사람들조차 나치에 대한 복종보다는 반항을 선택하면서 빨치산을 대거 양산했다. 이런 쓰레기 같은 통치 정책에 대해서 현지의 나치 관료들조차 대재앙 같은 단어를 언급하면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는 경우도 있었다.
외교관 오토 브라우티검은 1942년 10월에 '우리의 잔인한 정책 때문에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은 볼셰비키들과 연합하여 우리에 대항하고 있다'고 보고하며 학살 정책을 비판했다.
3.3.1. 실현 사례
-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벨라루스 점령 - 나치 독일은 독소전쟁 중 벨라루스를 점령한 후 빨치산을 토벌하겠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민간인을 살상하였다.
- 나치 독일의 폴란드 통치 - 폴란드 침공 이후 폴란드를 점령한 나치 독일은 폴란드의 여러 문화를 탄압하고 교육을 폐지했으며 폴란드에 유대인 절멸 수용소들을 짓기도 했다. 특히 바르샤바 봉기 때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폴란드인들이 사망했다.
- 소련군 포로 학살
4. 평가
나치는 소위 아리아인이 살 땅을 마련하기 위해 동유럽을 다 꿀꺽해 그 땅에 살던 타 민족을 복종이 아닌 절멸시키려고 했지만 사실은 그 광대한 땅을 이용하기 위한 인력은 독일 국민 전부를 동원해도 턱없이 모자라다는 자가당착에 직면하였다. 당시 독일 인구가 100이라면 소련 인구는 200이었고 소련의 우랄 산맥 서쪽 땅만 해도 독일보다 훨씬 컸는데 2배, 3배 이상이었으니 전국민을 동원한들 될 리가 없다. 하다못해 살기 좋은 땅이라면 모를까 소련의 겨울 추위는 겁나게 무서운 수준이었다. 개발을 시도해도 될 턱이 없다. 그래서 레벤스라움이 실현되었다면 인구밀도가 26(명/km²) 정도가 되는데, 이는 브라질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다.결국 아리아인만을 빠르게 늘려서 퍼트린다는 망상에 빠지면서 아리아인만을 생산하는 기관인 레벤스보른을 만들어 아리아인이란 개념에 맞는 친위대원과 미혼의 여자들을 교배시키는 만행까지 저지르기도 했다. 나치 독일이 출산율을 회복시키기 위한 각종 정책을 써서 출산율을 1933년 1.67명에서 1939년에 2.59명으로 올리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합계출산율이 3~5명대였던 독일 제국 시절에 비해 현저히 낮았고 인구증가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아메리카 대륙과 구소련권의 독일인들까지 끌어모아야 겨우 될 판이었다.
경제학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도 레벤스라움은 헛소리에 가깝다. 산업사회에서 국가의 경제적 힘은 잘 교육받은 많은 인구와 고도의 인프라가 갖추어진 땅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광대한 동유럽 전체를 독일 수준으로 산업화시키는 것은 자원 및 자본의 한계로 불가능에 가까운 반면 당시 나치 독일은 활발한 인구증가세를 기록하던 독일 제국 시절에 비해 출산율이 현저히 감소했던 상태로, 출산율을 높였다고는 해도 1930년대 말의 시점에서 본다면 출산율이 2명대 중반 수준으로 당대 기준으로 3~4명대의 출산율을 기록하던 소련 및 폴란드에 비해 현저히 낮았고 이 때문에 독일인 인구만으로 레벤스라움을 유지하려다가 오히려 인구의 대규모 유출로 독일 본토의 쇠락을 가져올 위험이 높았다.[7]
레벤스라움은 나치 침략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철저히 비판을 받았고 지리학계에서도 흑역사로 취급되었다. 나아가 지정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침략자들의 이론으로 매도되어 없어질 위기에까지 놓였지만 바로 소련과 미국이 대립하는 냉전으로 진입하면서 지정학은 국제정치의 중요한 이슈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5. 기타
- 독일의 동맹국이었던 이탈리아는 스파치오 비탈레라는 영토 확장론을 내걸었고, 일본은 서구 제국주의를 쫓아내고 일본을 맹주로 하여 아시아 국가들끼리 공존하고 번영하자는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웠으나, 이들도 레벤스라움과 비슷했다.
- 더 이른 시기에 나온 자매품으로는 프랑스의 '자연국경론'이 있다. 절대왕정 시절 루이 14세가 처음 주창한 이론으로 대서양, 지중해, 피레네 산맥, 알프스 산맥, 라인 강은 자연이 프랑스에 내려 준 국경이며 이 안쪽은 당연히 프랑스의 영토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다. 다만 이것은 이데올로기적인 이유보다는 방어가 용이한 국경선을 만들어야 한다는 현실적인 이유에서 나온 것이었다.[8] 이에 따라 프랑스는 왕국 시절부터 공화정, 제정에 이르기까지 수백년 간 정복전쟁을 치렀고 결국 달성하는 데 성공했으나 나폴레옹 전쟁의 패배 및 빈 체제의 도래로 도로아미타불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혁명 전쟁 및 나폴레옹 전쟁 과정에서 확장한 영토만 빼앗겼을 뿐 왕국 시절 확장한 영토는 그대로 프랑스의 일부로 인정받으면서 현재의 프랑스 국경이 자리잡게 되었다.
- 서울특별시 광진구에는 레벤스라움이라는 이름을 가진 다세대주택[9]이 있다. 사실 '레벤스라움'이라는 말은 나치 독일이 새로이 창조한 단어가 아니라 원래부터 독일어로 '생활 공간'이라는 뜻을 지닌 단어였으니[10] 틀린 용법은 아니지만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유럽, 특히 독일이나 북미 출신 사람들이 본다면 그야말로 건물주가 네오나치 아니냐며 놀라 자빠질 이름이다.[11] 비슷한 경우로는 아스톤 빌라 FC가 있다. 2022년에도 다시금 화제가 된 바 있는데 당시 댓글 반응은 나의 투기, '미대 떨어진 화가와 돌팔이 의사, 마약 중독자가 사는 집' 등 온갖 개드립이 쏟아졌다.
- 패러독스 인터렉티브 등 대전략게임 플레이어들은 어느 나라가 확장정책을 통해 레벤스라움과 유사한 판도를 가졌을 때 'XX스라움'(로마스라움, 프랑스라움,
조선스라움등)으로 패러디하기도 한다.
6. 매체
주로 나치 독일이 2차대전에서 승리한다/승리했다는 배경의 대체역사물에서 다뤄진다.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했다는 가정의 대체역사소설 당신들의 조국에서는 레벤스라움이 이뤄진 후의 모습이 나타난다. 다만 여기서의 레벤스라움은 북유럽(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무르만스크[12])을 독일 영토로 합병하지 않고 동유럽에 러시아의 유럽 영토까지만 합병한 모습이다. 선전대로 독일은 엄청난 영토를 얻었지만 정작 그 생활권이라는 것은 구 폴란드 및 소련의 잔당들의 지속되는 테러와 척박한 환경 때문에 아무도 가서 살고 싶어하지 않는 곳이 되었다. 레벤스라움으로 이주할 경우 정부 보조금에 더해 공짜 농장도 주고 레벤스라움이 굉장히 살기 좋다는 선전도 하고 있지만, 이주를 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으며 그나마 이주한 사람들도 엄청나게 고생하는 모양. 작중 등장인물도 가서 살지도 않을 생활권이 뭔 소용이냐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반면 높은 성의 사나이에선 레벤스라움 정책이 성공한다. 슬라브족에 대한 인종 말살이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았기 때문인데, 발두어 폰 시라흐가 소수 민족화하는 선에서 중지시킬 정도로 철저하게 실행된 것 같다. 게다가 드라마판에선 사실상 2개의 나치 정부가 존재하는데, 지리적으로 독일 본토와 가까운 유럽과 아프리카는 독일인으로 구성된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 멀리 떨어진 아메리카 대륙은 서유럽계 백인으로 구성된 아메리카 국가사회당이 관할하고 있다. 레벤스라움이 둘로 나뉜 셈이다.
울펜슈타인: 영블러드에서는 1980년에도 유라시아 대륙은 여전히 나치의 휘하에 있는데 1971년에 우주 개척 시뮬레이팅을 할 영토를 만든답시고 옛 러시아 영토를 아예 거대한 방사능 지역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한다. 레벤스라움(생활권)이 아닌 토텐라움(사망권)이 되어버린 셈이었다.[13]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에선 오스트란트(발트-벨라루스) 국가판무관부를 제외한 다른 동부 국가판무관부들은 엉망진창인 상태이며 오스트란트마저 독일 내전이 벌어진 뒤 내전에 빠진다.
7. 관련 문서
[1] 독일어로 Leben은 살다, 생존하다의 의미이며 raum은 영어의 room과 동일하게 공간, 구역을 뜻한다.[2] 다만 이는 나치가 아니라 19세기 독일 작가 루트비히 폰 로하우(Ludwig von Rochau)가 고안한 말이고 오늘날에도 쓰이는 단어다. 한자문화권에서는 주로 '현실정치'로 번역된다.[3] 매킨더의 라이벌격 인물로는 미국 해군대학 학장으로 해양력 이론의 창시자로 불리는 알프레드 머핸이 대표적이다.[4] 전체적으로 보면 신성 로마 제국의 서남부는 프랑스로 귀속되거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로 자립하고 네덜란드와 스위스도 따로 놀게 되어서 신성 로마 제국의 판도가 동쪽으로 이동하는 모양새가 되었다.[5] 영어로 번역하면 Under-men.[6] '동방총계획' 정도로 번역될 수 있다.[7] 1990년대 이후 동유럽이 이런 꼴이 되었다. 동유럽의 출산율이 1990년대에 급감했는데 그나마 있는 인구가 서유럽으로 유출되면서 인구가 빠르게 감소하는 것이다.[8] 먼 옛날부터 산맥, 강, 바다 등이 국경이 되는 건 흔했다.[9] 네이버 지도의 건물 정보에는 단순하게 주택이라고만 나와 있지만 단독주택은 아니다. 카카오맵의 건물 정보에서는 빌라라고 기재되어 있으나 한국 법적으로 빌라는 4층 이하의 소형 공동주택을 가리키는 용어이기 때문에 정확히는 아파트로 분류된다. 링크 다만, 등기부등본 상에서 일부 층이 근린생활시설이나 오피스텔 같은 다른 용도로 등록되어있어서, 등본상에서 '다세대주택' 용도로 등록된 층이 4개 이하라면 또 '아파트'에는 포함되지 않는다.[10] 번역기를 돌렸다가 일어난 참사라고 하기엔 의아한 게 구글 번역으로는 출발어가 '서식지'이어야 도착어로 레벤스라움이 나온다.[11] 사실 불교계에서 사용하는 卍과 나치 독일이 사용했던 하켄크로이츠는 둘 다 인도 종교계에서 쓰던 똑같은 기호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卍에 대해 별다른 감정이 없지만 서구인들은 한국에 방문했다가 길거리에서 불쑥 등장한 卍을 보고 놀라는 경우가 종종 있다(...).[12] 핀란드가 차지했다.[13] 이런 짓을 대놓고 시행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다트 이슈드의 과학기술 중 방사능 제거 기술도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현실에서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과 달리 작중에서는 나치 독일이 미국의 뉴욕에 원자폭탄을 떨어트리면서 미국의 항복을 받아내었고 종전 이후에는 예의 방사능 제거 기술로 뉴욕을 복구할 계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