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을 확인하세요.
[include(틀:다른 뜻1, other1=스위스의 축구 선수, rd1=하인리히 뮐러(축구선수), other2=이름이 비슷한
슈츠슈타펠의 인물, rd2=하인리히 힘러)]
국가보안본부 비밀경찰국장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초대 | 제2대 | 제3대 |
루돌프 딜스 |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 하인리히 뮐러 | |
슈츠슈타펠 지휘관 · 국가보안본부 본부장 |
국가 중앙 유대인 이주청장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000,#000 20%,#000 80%,#000); color:#fff"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초대 | 제2대 |
하인리히 뮐러 | 아돌프 아이히만 | |
슈츠슈타펠 지휘관 · 국가보안본부 본부장 · 게슈타포 국장 |
<colbgcolor=#000><colcolor=#fff> 게슈타포 3대 국장 하인리히 뮐러 Heinrich Müller | |
별명 | 게슈타포의 밀러 Gestapo Müller |
출생 | 1900년 4월 28일 |
독일 제국 뮌헨 | |
실종 | 1945년 5월 1일? (향년 45세)[1] |
나치 독일 베를린 퓌러붕커 | |
복무 | 슈츠슈타펠 (1934~1945) |
신장 | 160cm |
최종계급 | 슈츠슈타펠 중장 (집단지도자) 질서경찰 중장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종교 | 가톨릭 |
[clearfix]
1. 개요
하인리히 뮐러 (Heinrich Müller) |
Geheime Staatspolizei ist jeder Platz.
게슈타포는 어디에나 있다.
나치 독일의 친위대 집단지도자 및 질서경찰 중장. 게슈타포의 3대 국장으로, 아돌프 히틀러의 핵심 측근들 중에서도 악명이 자자했던 인물이다. 흔히 "게슈타포 뮐러"라고 불리며 게슈타포와 아인자츠그루펜 부대를 이용하여 무려 140만 명이 넘는 인간들을 학살하며 엄청난 악명을 떨친 나치의 핵심 인물로 무자비한 대학살을 저지른 전쟁범죄자다. 또한 반제 회의에 참석했던 참석자이며, 악명 높은 나치의 학살자 아돌프 아이히만의 상관이다.게슈타포는 어디에나 있다.
그리고 유일하게 제2차 세계 대전 후부터 지금까지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나치 인사이기도 하다. 1900년 출생이라서 현재까지 살아있다고 가정하면 [age(1900-04-28)]세인지라 이미 죽었겠지만,[2]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2. 생애
시골 경찰관의 아들로 뮌헨에서 태어난 뮐러는 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1914년부터 바이에른의 비행기 공장에서 일하다가 제 1차 세계대전시기 서부전선에서 육군 정찰기 조종사로 활동하며 1급 철십자 훈장과 바이에른 전공십자훈을 받았다. 독일 패전 후에는 바이에른 주 경찰본부에서 보조원으로 일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의 데모를 진압하는 역할을 맡았다. 한번은 뮌헨의 공산주의자들이 인질극 도중 인질을 쏴죽이는걸 목격한 그는 평생동안 공산주의자들을 증오했다고 한다. 이후 1929년에 뮐러는 바이에른 주 경찰관이 된다.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나치당원은 아니었지만 뮌헨경찰의 정치부를 운영하던 관계상, 하인리히 힘러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포함하여 나치당의 많은 인물들과 친분이 있었다. 뮐러는 평소 정치에는 무관심하며 맡은 일에만 충실했기에 역사학자들은 그가 전형적인 공무원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나치당이 정권을 잡자 친위대 보안부장이 된 하이드리히는 소련에 대해 잘 알며, 경찰에서 실력자인 뮐러와 그의 부하들을 포섭하여 1934년에 친위대에 가입시켰다. 친위대 파일에 기록된 뮐러의 성격에 관한 공식 조사한 결과 다음과 같이 보고서에 적었다 "그는 타고난 경관이다. 그는 자신을 방해할 가능성이 있는 그 어떤 것도 용인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어떻게 보여주어야 하는지 알고 있다."
친위대 여단지도자 뮐러 |
왼쪽부터 프란츠 요제프 후버, 아르투어 네베, 하인리히 힘러 ,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하인리히 뮐러. 회의를 하고 있다 |
힘러와 괴벨스의 담당분야였던 유대인 이주 계획에도 깊이 관여하여 1939년까지 유대인 이주계획 전국본부장으로 일한 뮐러는 유대인의 이주만하다가 유대인 절멸정책 즉, 홀로코스트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독소전쟁이 한창이던 뮐러는 아인자츠그루펜 부대를 조직하여 1941년 단 1년만에 소련 점령지역의 유대인을 무려 140만명이나 학살했고 그 결과 보고서를 작성하고 상부에 보냈으며.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을 결정한 1942년의 반제 회의에도 참석했다. 1942년 5월에 프라하에서 직속상관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암살당한 사건을 수사하여 암살자 색출에 공적을 세우기도 했지만. 힘이 커졌다고 생각한 힘러, 보어만에게 방해를 받기도 하면서, 정권에서 점차 권한이 축소되었다.
결국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힘러의 라이벌이던 마르틴 보어만과 손을 잡은 뮐러는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서 반역 음모자 색출과 체포를 담당했다. 이 때 빌헬름 카나리스를 포함해 5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체포되어 약 200명이 처형당했다. 전쟁말기였던 때에도 뮐러는
3. 전후
뮐러는 히틀러가 자살한 이후, 모습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 후 소식이 끊긴 뮐러는 베를린 공방전 중에 자살했다, 남미로 도망쳤다, 미국 정부에 의해 소련 첩보원으로 고용되었다는 등의 소문이 나돌았다. 일단 미국의 첩보원 등용 소문은 2001년에 미국은 정보자유법의 시행으로 구 CIA의 관련 자료들이 공개되었는데, 이때 뮐러는 전쟁범죄자로 이용가치가 없다고 판단했었기에 첩보원 등용의 가능성이 없다. 그러다가 이스라엘에 의해 붙잡힌 아돌프 아이히만이 재판에서 뮐러가 남미로 달아났다는 주장을 해서[4] 논란에 불을 지피기도 했는데, 이에 서독 정부가 조사에 나섰지만 명확한 증거나 사실은 찾을 수 없었다. 그 중 흥미로운 것은 국민 돌격대원이었던 발터 뤼더스가 뮐러의 사체를 유대인 공동묘지에 매장했다는 증언이었는데, 이 묘의 장소가 1961년에 동독 지역에 있었기에 서독 정부는 조사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폴란드의 첩보원이 서방으로 망명하면서 뮐러를 모스크바에서 봤다는 증언을 해서 CIA를 자극해 조사에 나서게 했지만 이는 뜬소문으로 결론 났다. 현지에서는 뮐러가 알바니아에서 스파이로 일한다는 소문도 나돌기도 했다.그런데 전쟁이 끝난 후에 소련에 잡혀갔다가 독일로 돌아왔던 많은 병사들에게서는 뮐러를 소련에서 봤다는 증언이 끊임없이 제기되었기 때문에 의혹은 더욱 커져갔다. 실제로 히틀러의 직속 비행사였던 한스 바우어 SS중장은 뮐러가 '나는 소련 쪽에 아는 사람이 많다, 나는 포로는 되지 않는다.'라고 늘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5] 그뿐만이 아니라 그가 그토록 소련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 그가 소련의 스파이가 아니냐는 의혹도 나오고 있다. 그가 행동할 때나 포로들을 심문할 때도 심문 방식이 마치 소련의 KGB[6]에서 사용하는 심문 방식과 많이 닮았으며, 그의 방에서는 은밀한 통신내역들이 있기도 했었는데 이것이 소련으로 중요정보를 보내기 위해서였다는 것과, 히틀러의 명령이라면 무조건 따랐던 이유가 나치의 최고위층에 들어가서 정보를 빼내기 위해서가 아녔냐는 의혹이 나오고 있다. 모스크바의 게슈타포 하인리히 뮐러
1990년 이전까지 CIA는 만약에 뮐러가 살아있다면 소련이나 체코에 있을 것으로 여겼지만 소련이 붕괴된 후 공개된 공문서 자료에는 뮐러에 관한 기록은 단 한 건도 없었다고 한다. 현재 CIA는 뮐러가 베를린에서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소련이 그가 이미 스파이로서의 임무를 마쳤기 때문에 그에 대한 모든 기록을 폐기하고 그가 평범하게 살 수 있도록 배려해준 것이라는 의혹도 있다. 그런데 2013년 11월 초, 뮐러의 사망신고서를 통해 그가 공군본부 인근에서 사망, 그 해(1945년) 8월에 시신이 발견되어 유대인 공동묘지에 매장됐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어쨌든 간에 뮐러의 시체나 그의 죽음에 관련된 이야기는 아직까지도 많은 의문이 남아있다. 마찬가지로 베를린 전투 이후 한동안 실종 상태였으나 유해검식 결과 전투 중 사망한 것으로 판명된 마르틴 보어만과는 대비되는 부분.
아무튼 만약 뮐러가 베를린 공방전 당시에 사망했다면, 연합군이나 소련군에게 체포되어봤자 죽은 목숨이라는 사실은 다를 바 없으니 베를린 공방전 도중 자살했을 것이다. 그런데 뮐러의 신원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고 그의 시신 역시 다른 베를린 시민의 시신과 함께 화장되거나 매장되었고 끝내 그의 죽음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 설명된다.
4. 매체에서
바티칸 기적 조사관 1권 '검은 학교'에서는 뮐러가 죽지 않고 미국으로 도망쳐 미하일 브라운이라는 이름으로 신분을 세탁한 다음 세인트 로사리오 학원을 열어 교장이 된 뒤 나치스 세뇌 교육을 학생들에게 은밀하게 실시한 것으로 나온다. 사인은 자연사. 학교 관계자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라 죽은 뒤에도 시체를 미라로 만들어 보존하고 있다.필립 커의 베를린 누아르 3부작 중 마지막 작품 '독일 장송곡'에서는 흑막으로 등장. 전황이 불리해지자 주요 간부들을 히틀러 암살 모의사건으로 처형당한 명단에 슬쩍 끼워넣는 식으로 그들의 죽음을 위장했으며[7], 작중 시점(1947년)에서는 생존한 나치 간부들로 구성된 지하 조직의 우두머리로 활동하고 있다. 현실의 친소 성향을 반영한건지 작중에서도 소련을 입이 마르게 칭찬하며 스탈린을 숭상하고 그들이 다음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그들을 떠맡아 미국에게 책잡히는 것이 싫었던 소련의 계략에 휘말려 주요 간부들을 잃었고, 미국에 망명을 시도할 것이 암시된다.
2021년 11월 출시된 콜 오브 듀티: 뱅가드 캠페인에 빌런으로 등장하는 헤르만 프레징거의 모티브가 됐다.
[1] 5월 1일, 저녁에 마지막으로 목격된 뒤 행방이 묘연해졌다. / "RG 263 Detailed Report, Heinrich Mueller", archives.gov[2] 만약 그가 독일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해 자연사했다면 1970년대 전후로 사망했을 것이다.[3] 헤르만 페겔라인이 처형당한 날은 1945년 4월 28일인데, 공교롭게도 그 날은 뮐러의 45번째 생일이었다.[4] 이스라엘과 서방 정보기관의 힘을 빼기 위해 일부러 거짓 증언을 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5] 실제 발언과 약간 다르다. 영문위키에 따르면 원문이 "We know the Russian methods exactly. I haven't the faintest intention of being taken prisoner by the Russians" 인데, 이를 해석하면 뮐러는 소련에 아는 사람이 많은 게 아니라 자신이 소련의 심문 방식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즉 끔살이 확정이라) 절대 포로가 되지 않겠다는 뜻이다.[6] 하지만 KGB는 전쟁이 끝나고 한참 뒤에 스탈린이 죽고 베리야가 숙청된 뒤에 생겼고 이때 소련 정보부는 NKVD였다.[7] 철저한 죽음을 위장하기 위해 대상 간부들의 이를 모두 뽑고 다른 적당한 시체에게 이를 이식하는 것으로 치아기록을 통한 검식도 회피했다.